소설리스트

외전 4 (7/7)

외전 4

짤랑짤랑. 가벼운 방울 소리가 들렸다. 짤랑, 타박. 짤랑, 타박. 그 가볍고 조용한 발걸음이 금세 요란한 방울 소리로 탈바꿈했다. 짤랑짤랑짤랑짤랑…!

“태자 전하, 전하…!”

오늘도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기설온, 3세. 태성국의 유일한 황태자였다.

설온은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다르게 체력이 좋았다. 또렷하고 조금은 순한 눈매와 고집스럽게 딱 다문 입술은 마치 복숭아와 같았다. 커다란 황금 복숭아가 태몽인 탓에 다들 여아인 가 했으나 태어난 설온은 남아였고, 또렷한 자신의 향을 가진 음인이었다.

“마마…!”

3세의 설온이 요즘 재미 들린 단어는 ‘마마’였다. 보드라운 갈색 머리카락은 제 부황인 기연훤을 닮았고, 올망졸망 강아지 같은 눈매와 입술은 아랑을 쏙 빼닮았다. 성격도 동글동글 순하니 아랑과도 닮아 있어 연훤의 마음을 홀랑 뺏을 정도였다.

“온아, 넘어져. 조심해야지.”

엄마, 아빠보다도 마마라는 말을 먼저 알게 된 설온은 자신을 보드랍게 감싸 올리는, 자신을 낳아 준 아랑의 목을 꼭 껴안았다. 짤랑짤랑, 설온이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게 달아둔 방울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듯 소리를 냈다.

폭 안긴 채로 어깨에 기대고 있으면 부드러운 부친의 향기에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토닥, 토닥. 자장자장 우리 아기, 조곤조곤한 자장가가 들려오면 설온은 작게 하품을 하며 옆으로 늘어뜨린 아랑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작은 손이 죔죔 하듯 몇 차례 주먹을 쥐었다 펴더니 곧 색색, 숨소리와 함께 곤한 잠에 빠졌다.

낮잠 시간만 되면 뽀르르 와서는 재워 달라고 애교를 피워대는 아이였다. 처음엔 돌보는 게 어려우면 어떡하지, 이런 몸으로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가 잘못된다면. 무수하게 이어지던 생각들이 있었다.

연훤이 그 작은 우울감에 빠진 아랑을 다독이며 보듬어 줬다. 어떤 아이든 사랑해 준다고. 이불 속에 콕 박혀 울며 나오지 않는 아랑을 어르고 달래며 달게도 속삭거렸었다.

연훤은 그런 아랑을 돌보려 한동안 집무실에 가지도 않았고, 급한 안건만 침궁 안에서 처리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랑을 아예 품에 끼고서 놓아 주지 않았을 정도였다.

불안한 마음을 잡아 준 건, 결국엔 연훤이었다.

“자장자장….”

토닥토닥, 토닥이는 소리와 짤랑짤랑 방울 소리, 그리고 나긋한 자장가가 한데 어우러졌다. 어깨에 기댄 뺨이 볼록하게 솟았다. 귀여워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데 막 잠이 들었을 때 건드리면 잠투정을 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설온을 안은 채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따끈하고 달착지근한 우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포근한 향을 맡고 있자니 아랑도 나른해져서 조심스럽게 한구석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앉으려 몸을 낮췄다. 히잉,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뒤척이는 움직임에 멈칫했다가 다시 머리카락을 죔죔 쥐며 입을 헤- 벌리고 자는 설온의 코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며 등을 기댔다.

아랑도 느리게 하품을 하며 설온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궁인이 조심스럽게 들어오다가 조용한 분위기에 작게 읍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꿈뻑꿈뻑,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침상으로 올라갈까, 하다가 또 움직였다가는 설온이 깰 것 같아 눈만 느릿하게 감았다.

색색- 두 부자가 귀여운 숨소리를 내며 곤한 낮잠에 빠졌다.

방 안을 살폈던 궁인의 걸음이 향한 곳은 본궁의 집무실이었다. 오 태감은 익숙한 얼굴의 궁인을 보고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황후마마와 태자 전하께서 오수에 드셨습니다.”

“알았다. 가 보거라.”

“예.”

궁인이 읍하며 종종걸음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오 태감은 가만히 밖을 지키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연훤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문서들을 살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무표정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작은 기척에 고개를 들곤 턱을 괴며 말했다.

“뭔가.”

“두 분 마마께서 오수에 드셨다 하옵니다.”

“온이가 또 아랑에게 갔나 보군.”

연훤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엄히 대해야지 하면서도 아랑을 쏙 빼닮은 얼굴이 울망하게 올려다보면 재차 마음이 약해지는 그였다. 이미 서류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까. 톡, 토독. 손끝이 탁자를 두드렸다. 오 태감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예, 폐하. 따르겠사옵니다.”

늘 일어나는 일상이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 태감은 성큼성큼 걸음부터 옮기는 연훤을 뒤따랐다. 한층 더 부드러워진 연훤의 분위기에 괜히 눈물이 났다. 그를 갓난아이때부터 쭉 돌보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연훤을 보좌했던 오 태감이었다. 날 섰던 분위기는 이제 간데없었다.

연훤이 우뚝 멈춰 서서 꽃을 땄다. 연노랑 꽃잎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손에 가볍게 쥐고서는 재차 걸음을 옮겼다. 닫혀 있던 침실의 문이 열렸다. 폭신한 의자에 기대어 잠든, 사랑하는 이들이 보였다.

작은 기척에 꼬물거리던 설온이 먼저 칭얼거리며 눈을 뜨려고 했다.

“쉬이-….”

연훤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설온이 졸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능숙하게 아랑의 손에서 설온을 빼내 안아 올리며 연훤은 통통하고 발그스름한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고소한 우유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 같았다. 설온은 배시시 웃으며 가물가물한 눈을 감고서는 연훤의 어깨에 톡, 하며 기대었다.

낮은 숨소리가 따뜻했다.

연훤은 한 손에 든 꽃을 아랑의 귓가에 꽂아 주며 손끝으로 입술을 건드렸다. 옆으로 슥 기우는 몸을 보다가 연훤이 아랑의 옆으로 앉아 제 어깨에 그의 고개를 기대게 했다.

“으으응….”

설온과 똑같이 칭얼거리곤 입을 헤, 하고 벌리는 게 두 모습이 똑 닮아 있었다. 연훤은 품에 안은 설온의 등을 토닥토닥, 느리게 쓰다듬었다.

익숙한 향이 나른하게 퍼져 있었다.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연훤도 편히 의자에 기댔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조곤조곤한 숨소리에 자신의 기분마저 나른해졌다.

어느 평화로운 날이었다.

향인 (香人)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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