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9)
  • 외전

    박지율이 휴가를 떠났다.

    평소 그가 관리해 줘야 하는 일정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선에 차질이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최근 강희미 대표의 H 엔터테인먼트와 협업해, 앨범 아트에 들어갈 그림 작업을 하고 있어 미팅이 잦았다.

    강희미 대표가 참석한 기획 미팅을 마친 뒤의 준희는 평소보다 예민한 편이었다. 사회생활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데다가 작업 방향에 태클이 걸려 본 일도 없었던 것이다. 사소한 지적까지 전부 공격처럼 받아들여지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쉬이 먹히지는 않았다. 특히나 강희미 대표의 업무 스타일은 호전적이었고, 준희는 그런 의사소통 방식이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에서 차를 기다린 지 10분. 검정 세단이 멈춰 서자마자 미간이 좁아졌다. 내려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임시 비서를 발견한 뒤에는 눈썹이 흘끔 올라갔다.

    “안 타고 뭐 합니까, 도련님.”

    여상한 목소리가 그를 자극했다. 장난기가 도는 것을 보니 일부러 늦은 게 분명했다. 준희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조수석의 문고리를 당겼다.

    “무슨 비서가 에스코트도 안 해 주고.”

    달칵. 심지어 문은 잠겨 있었다. 준희는 이를 악물고 운전석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흥미로운 듯한 표정이 얄미웠다.

    “차주완 씨.”

    경고하려 딱딱하게 불러 보았지만 먹힐 리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제안했다.

    “평소처럼 뒷자리에 타시지 않고요.”

    “열어 주세요, 빨리.”

    “알겠습니다. 신경질은.”

    주완은 그제야 차의 잠금장치를 풀어 주었다. 준희는 거칠게 문고리를 당겨 조수석에 올랐다. 시위하듯 차 문을 거세게 닫자 주완이 준희를 흘끗 보았다.

    “벨트 매요.”

    “매 줘요.”

    “나는 강준희 씨 비서예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부하가 아니라.”

    “와…….”

    그는 차갑게 대답하며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준희는 부러 퉁명스럽게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보란 듯 발을 구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강준희 씨, 나한테 비서 자리 위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

    “업무, 일정, 행동거지 하나하나 관리받겠다고 했죠?”

    “그랬는데요. 왜요?”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었다. 눈길 한 번이라도, 손길 한 번이라도 유도하려는 뻔하디뻔한 수법. 그런 것에 쉽게 동요할 주완이 아니었다. 그는 픽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세단은 부드럽게 도로 위를 질주했다.

    ***

    주완을 자극해 실컷 혼나고 울어 버리는 것은 준희의 새로운 스트레스 해소 방식이었다. 지율의 휴가를 핑계로 일정을 그에 맞게 미뤄 두고 비서 역할을 자처한 주완에게 빌미를 주는 것은 평소보다도 수월했다.

    차가 주차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머리채가 잡혔다. 질질 끌려 올라간 곳은 그들의 신혼집이었다. 익숙한 향기에 긴장이 풀어질 뻔했지만 주완은 그렇게 되도록 방관하지 않았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은 현관에서부터 준희의 바지와 속옷을 찢어발기듯 벗겨 버렸다.

    “아, 읏, 비서가 무슨…….”

    “비서면 무조건 오냐오냐 해 줘야 한다는 법 있습니까?”

    오래간만에 듣는 존댓말이 짜릿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소파까지 준희를 끌어온 주완은 자리에 앉아 무릎 위에 그를 엎드리게 했다. 맨엉덩이 위로 손바닥이 매섭게 달라붙었다.

    “아!”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성격이 이 모양인지.”

    어린애처럼 엉덩이만 까고 매를 맞는 건 알몸일 때보다 수치스러웠다.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웬만해서는 회초리보다 강도 높은 주완의 손바닥이 일정한 속도로 준희의 엉덩이를 손찌검했다.

    “아프, 아파……, 흑.”

    “잘못했다고 하세요.”

    “시, 싫은……, 아! 읏, 흐…….”

    준희의 손이 소파의 가죽 위를 헛움켰다. 하얗던 엉덩이가 선홍빛으로 물들 때까지 주완은 끈질기게 손매를 때리며 준희를 괴롭혔다. 무시무시한 회초리로 얻어맞는 것보다야 핸드 스팽킹이 낫기야 하겠지만, 대 수가 쌓이고 나면 엉덩이를 홧홧하게 달아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짝-, 선홍빛 피부 위로 붉은 손자국이 새겨졌다 흡수되곤 했다. 강도를 높이자 통통하던 엉덩이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뻗었지만 곧바로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손목이 허리 위로 고정되어 더더욱 빠져나가기 어려운 형국이 되었다.

    “아, 읏, 잘못…… 잘못했어요……!”

    “늦었어요. 진작 빌었어야지.”

    주완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붉어진 엉덩이를 연거푸 내려쳤다. 손바닥을 후려칠 때마다 다리가 비틀리고 매 맞은 살갗이 움찔거렸다. 어느덧 엉덩이뿐만 아니라 꼭 물고 있는 입술과 귓불, 목덜미 군데군데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는 준희의 엉덩이를 실컷 혼내 주고 나서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매가 멈추고 허벅지에서 내려온 준희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문질러 대며 주완의 무릎 위에 뺨을 묻었다.

    “흐으…….”

    “또 까불 겁니까?”

    “……너무해요.”

    “너무하긴. 기어이 이런 꼴을 보려고 까분 게 아니었나?”

    주완은 속이 훤하다는 듯 말하며 준희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언뜻 붉어진 눈매가 촉촉했다. 하여간 가학심이 들게 하는 얼굴이라고, 주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턱을 부러 밀치듯 놓았다.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준희는 곧장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를 더 자극할까 말까 가늠하는 눈빛이 적나라했다. 일렁이는 시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주완의 손가락에 그런 준희의 머리카락이 얽혔다. 주완은 부드러운 머리채를 잡아 약하게 잡아당기며 물었다.

    “덜 혼나서 아쉽지, 우리 강아지.”

    그 말에 귀가 쫑긋 서는 듯했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무릎으로 뒤로 약간 물러섰지만 머리채가 잡혀 있어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다.

    2년 전 하와이에서 도그 플레이 했을 때 정원에서 배변 훈련을 당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은 탓이었다. 그 후로 준희는 그때의 플레이를 연상케 하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을 붉히곤 했다. 덕분에 주완은 그가 노출 플레이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완은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신호를 기민하게 알아챈 준희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불안한데. 걱정하는 사이 주완이 머리채를 놓고 제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리 앉아 보세요, 도련님.”

    “……네?”

    별안간 다시 상냥한 비서 모드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표정으로 눈을 굴리자 주완이 미소를 거두었다.

    “하나.”

    “…….”

    “둘.”

    “아, 앉을게요!”

    불길한 카운트에 저절로 오금이 저린 준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로 앉아요.”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준희는 그가 명령한 대로 등을 돌리고 아직 화끈화끈한 엉덩이를 무릎 위에 슬쩍 걸쳤다. 그러자 주완이 허리를 당겨 그를 더 깊숙이 앉게 만들었다.

    “아…….”

    뜨거운 엉덩이가 허벅지 위에 얹혀졌다. 주완의 너른 품 안에 등을 안긴 모양이었다. 그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자 척추가 뻣뻣하게 긴장되고 엉덩이가 들썩여졌다.

    “옷 흘러내리지 않게 걷어 올려요.”

    아래로 흘러내려 허벅지를 가리고 있는 셔츠를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준희는 옷깃을 쥐고 배꼽 높이까지 옷을 들어 올렸다.

    “더.”

    준희가 우물쭈물 셔츠를 약간 더 걷어 올리자 주완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그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주완의 힘이 들어간 준희의 손이 위로 가뿐하게 올라갔다. 덕분에 셔츠는 가슴 위까지 말려 올라갔다.

    “잘 잡고 있어야 할 겁니다.”

    가려져 있던 가슴이 공기 중에 노출되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주완을 등지고 있음에도 어쩐지 낱낱이 핥아지는 것만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주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 허벅지를 벌려 그 사이에 있는 준희의 무릎을 양옆으로 벌어지게 만들었다. 엄한 분위기에 어느덧 발기한 성기가 허공에 흔들려 민망한 기분을 들게 했다.

    “아…….”

    “우리 도련님이 욕구가 쌓인 것 같으니, 친절하게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졌다. 미열이 난 듯 온몸이 뜨거웠다. 셔츠를 바투 쥐고 있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완은 한 손을 준희의 허리에 감은 채 남은 손으로 허공에 꼿꼿하게 서 있는 성기를 감싸 쥐었다. 살갗에 열기가 닿자 더욱더 피가 몰렸다. 본능적으로 무릎을 좁히고 싶었으나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주완의 허벅지 탓에 불가능했다.

    “흐……, 제발.”

    “제때 분출하지 못해 성미를 곤두세웠던 거 아닙니까? 발정 난 고양이처럼.”

    “하, 아아…….”

    “그러고 보니 히트사이클이 곧이었던가.”

    그는 여상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준희의 성기를 주물렀다. 확실히 히트사이클이 가깝기 때문인지 성기의 선단이 쉽게 축축해졌다. 주완은 귀두의 끝을 주무르고 훑어 선액을 손바닥에 묻힌 채 기둥을 연신 쓸어 올렸다.

    “미팅할 때 또 발정이라도 나면 큰일이니 좆물이 말라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싸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당분간 중요한 일정일랑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짓궂게 말하는 게 얄미웠지만, 주완의 명령으로 꽁꽁 묶여 있는 준희로서는 따질 말이 없었다.

    “거실 바닥이 흥건해질 때까지.”

    공연히 죄를 보탰다가는 정말로 바닥이 정액으로 축축해지기 전까지는 품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흣, 흐, 으응…….”

    부드럽고도 강하게 살 기둥을 흔들어 대는 손길에 허리가 마구 뒤틀렸다. 가로막힌 두 무릎은 볼품없이 덜덜 떨려 대고 있었다. 힘을 주고 버티고 싶었지만 본능에 지배된 이상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주완은 그의 무릎을 더 넓게 벌리게 만들며 수음의 속도를 높였다. 그의 손길이 거칠고 빨라질수록 새된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준희는 당장이라도 셔츠에서 손을 놓고 주완의 팔뚝에 매달려 몸을 옹송그리고 싶었다. 고개가 절로 위를 향하며 준희의 뒤통수가 주완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아으, 으, 흐으으, 응…….”

    준희는 그와 관계를 맺어 오며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자신이 스팽킹보다도 오르가슴 컨트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엄하고 고통스러운 스팽킹은 그 역시도 두렵고 무시무시했지만, 밑바닥의 욕망까지 통제당할 때에는 차라리 울고불고 매달리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주완, 씨……, 흐으…….”

    게다가 주완의 손길은 자비가 없는 편이었다. 달아오르는 정도에 따라 속도와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 자위와는 차원이 다른 열락이 아래를 지배했다. 차라리 묶여 있으면 좋으련만. 당장이라도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명령이 그를 더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셔츠를 쥐고 있는 손과 벌어진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려 댔다. 등줄기에 땀이 배어날 정도로 몸은 긴장되어 있었다.

    “아흑, 흑, 아…….”

    울음과 신음의 경계선에서 호흡이 뒤엉켰다. 성기를 주무르던 손길이 귀두를 집요하게 문질러 대는 통에 허여멀건 정액이 입구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툭, 툭. 애액이 뒤엉켜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 도련님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좆물도 제대로 못 싸시니.”

    “으, 아…….”

    “걱정이 돼서 어디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우리말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뜨거워 뜻을 바로바로 해석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집에 숨겨 놓고 먹이고 씻기고 쑤셔 줘야 하나.”

    그렇지만 더디게도 상상력을 자극한다. 셔츠 하나만 허락된 채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내고 집에 갇혀 그에게 길들여지는 상상에 목덜미가 오싹했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손에 쥐인 셔츠는 속절없이 구겨진 지 오래였다.

    주완은 한 차례 사정을 마친 준희의 것을 툭툭 건드렸다.

    “흐, 읏.”

    그러고는 질척한 손바닥으로 벌어진 허벅지 안쪽을 가볍게 손찌검했다. 신음하는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 그 소리에 주완은 픽 웃으며 다시 준희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

    그 후로도 주완은 준희의 성기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흥분하게 만들어 사정하게 하고, 사정하고 나서 힘 빠진 성기를 다시 문질러 달아오르게 했다. 세 차례나 더 절정을 맞은 뒤에야 주완은 준희를 안아 들어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녹진해진 준희를 눕혀 다리를 벌리게 하고 아래를 꿰뚫었다.

    이미 지쳐 버린 준희의 몸은 힘없이 이리저리 휘둘렸다. 진이 모두 빠질 때까지 괴롭혀진 뒤에야 준희는 비로소 그에게서 헤어 나와 잠들 수 있었다. 기절 같은 숙면이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그로부터 열 시간은 족히 지난 후였다. 너무 깊이 잠들어 깨어난 뒤에도 한참이나 수마를 떨칠 수 없을 정도였다.

    “준희야.”

    “으으응.”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대답은.”

    귀엽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야 준희는 겨우 실눈을 뜬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머리카락이 약간 젖은 채 샤워 가운을 입고 있는 주완의 모습이 흐린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준희를 품에 안아 따뜻하게 우린 차를 조금 마시게 했다.

    “살이 더 빠진 것 같은데.”

    “아니, 으음…….”

    “차 마시고 나와. 아침 먹어야지.”

    차 몇 모금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준희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주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굳이 선택하자면 준희에게는 밥보다는 잠이었다. 이대로 주완에게 안겨 한숨 더 잘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듯했다.

    “강준희.”

    그렇지만 딱딱한 호명에 울상을 지으며 주완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주완은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는 준희의 코끝을 살짝 잡고 비틀었다.

    “천천히 나와.”

    그는 준희의 머리카락을 한 차례 쓰다듬어 준 뒤 침실에서 나갔다. 문을 통과하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준희는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키곤 차를 마저 마셨다.

    섹스하다 바로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청결했다. 아마도 언제나처럼 주완이 구석구석 씻겨 준 덕분이겠지. 준희는 그의 그런 살뜰한 흔적을 좋아했다.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띠어졌다.

    옆에 놓인 샤워 가운을 주워 입고 거실로 나섰을 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식탁에 차려져 있는 아침을 보니 어쩐지 꽤나 굶주린 듯했다.

    하기야 간밤에 그렇게 뒹굴고 바로 잠들었으니…… 체력이 웬만큼 소모된 것이 아닐 터였다.

    “앉아.”

    준희의 입맛에 맞는 브런치가 차려져 있었다. 연어를 곁들인 샐러드와 오트밀 죽과 신선한 과일이 주 메뉴였다. 식성이 까다롭고 헤비한 음식을 거리끼는 준희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구성이었다.

    “형이 직접 한 거예요?”

    “그럼 누가 했으려고.”

    평소에야 워낙 바쁜 사람이니 음식은 사람을 고용해 해결하는 편이었지만, 주완은 간단한 메뉴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었다. 홀로 자취하던 대학교 시절에는 요리가 취미인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뒤로 준희는 어쩐지 주완이 더 멋있어 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허기지지도 않아? 늦게까지 잘도 자던데.”

    “더 잘 수도 있었는데…….”

    “굶는 버릇 들이지 마. 간단하게라도 배를 채우고 다시 자든가 해야지.”

    “으응.”

    준희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오트밀 죽을 한 스푼 입에 떠 넣었다. 말끝을 흐리기는 했어도 그는 주완의 잔소리가 싫지 않았다. 턱을 괸 채 준희를 응시하던 주완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에 세 끼 잘 챙겨 먹을 것. 당분간 매 끼니마다 사진 찍어 보내.”

    “……까먹으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어떡해요. 혼나야겠죠.”

    그래 봐야 고작 세 살 차이인 데다가 나이가 적지도 않은데 어린애 취급이 잦았다. 오트밀 죽을 마저 해치운 준희는 연어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찍어 입으로 나르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허투루 하는 말 아니야. 출장 잡혀서 이틀간 집 비우게 됐으니까 그동안…….”

    “네?”

    그렇지만 지금 듣게 된 말에 비한다면 잔소리는 듣기 싫은 축에도 끼지 못했다. 준희는 고개를 바싹 들며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일정 다 미뤄 뒀다고 했잖아요. 일주일은 나랑 같이 시간 보내기로 했으면서…….”

    “그러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혀엉.”

    “그렇게 졸라도 할 수 없어.”

    긴 한숨이 이어졌다. 준희는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샐러드를 건성으로 씹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주완은 손을 뻗어 그런 준희의 뺨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발정 날 안사람을 두고 집을 비우는 심정도 편치 않아.”

    “…….”

    “곧 히트사이클이잖아.”

    2년 전 하와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두 사람은 결혼 준비에 돌입했고, 작년에 비로소 식을 올렸다. 새롭게 얻은 신혼집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맨션이었다.

    주완은 옆에 놓인 약통을 준희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아무런 라벨도 붙어 있지 않았지만 정체야 뻔했다.

    “억제제 잘 챙겨 먹고.”

    “제가 형을 따라가면 어때요? 얌전히 있을게요, 진짜.”

    주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준희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희야.”

    “네.”

    “이틀이야. 기다릴 수 있잖아.”

    “형은 혼자 있을 내가 걱정도 안 돼요?”

    “왜 안 되겠어.”

    준희의 불평에 주완이 빙긋 웃었다.

    “우리 강아지가 주인 바쁜 틈 타서 여기저기 엉덩이 흔들고 다니지는 않을까. 달콤한 페로몬으로 근본도 모를 개새끼들 꼬여 들게 만들지는 않을까.”

    “…….”

    “그래서 규칙을 몇 가지 정해 줄까 해.”

    샐러드를 비우던 포크의 움직임이 멎었다. 준희는 멍한 얼굴로 주완을 마주 보았다. 적나라한 단어 선정은 플레이 분위기를 저절로 조성했다. 주완은 준희의 턱 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밥은 하루 세 끼 챙겨 먹기. 자기 전에 억제제 먹기. 그리고 마지막은…….”

    마주친 눈빛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준희는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굴렸다.

    ***

    그의 마지막 조건은 정조대였다. 성기를 감싸는 형태로 생긴 스테인리스 재질의 구속구로, 고환을 감싸는 링 아래로 늘어진 갈고리의 끝에는 쇠구슬이 달려 있었다. 앞뒤의 성 기능을 동시에 막아 주는 용도였다.

    정조대는 준희를 발기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소변을 볼 땐 열 수 있도록 입구가 열리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주완은 출장을 떠나기 직전 준희를 직접 관장시킨 다음 정조대를 채우고 갈고리에 연결된 쇠구슬을 구멍에 밀어 넣었다.

    “집에서는 셔츠만 입고 있을 것. 자기 전에는 잠깐 정조대를 풀고 관장해야 하지만 하기 전에 전화해서 허락받도록 해.”

    정조대를 채운 열쇠는 현관 신발장 위에 놓였다. 속옷 대신 정조대를 착용한 아래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불편했다. 준희는 셔츠 하나만 입은 차림으로 울상이 되어 주완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쇠구슬을 삼키고 있는 엉덩이가 벌써부터 이물감에 움찔거렸다.

    “형, 이거 너무 이상해요…….”

    “멋대로 빼면 뺀 시간만큼 딜도를 물고 있어야 할 거야.”

    “흐…….”

    “식사 메뉴는 사진으로, 억제제 먹을 땐 전화로 보고해.”

    “알겠어요.”

    이는 일종의 통제 플레이였다. 그걸 알면서도 주완 없이 규칙을 지켜야 하는 이틀을 앞둔 준희의 마음은 걱정과 서러움으로 일렁거렸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완은 집을 나서기 전에 그의 허리를 당겨 가볍게 입 맞춰 주었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그렇게 주완이 집을 떠났다. 셔츠 한 장에 차디찬 정조대를 착용한 준희를 남겨 두고서.

    “하…….”

    한숨이 절로 일었다. 침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옮기는 족족 쇠구슬이 안을 자극해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자위도 할 수 없게 된 마당에 많이 움직일수록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침실로 돌아간 준희는 침대 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이틀 내내 잠만 잘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세 끼를 제대로 먹어야 했으니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얄미워.’

    최대한 신경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대로 이틀이나 버텨야 하다니. 침대에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느껴지는 이물감에 준희는 아찔해졌다.

    처음에는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요즘 인기라는 모바일 게임을 잔뜩 받아 차례로 튜토리얼을 수행해 보기도 하고, 눈을 뗄 수 없다는 드라마를 켜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집중할 만하면 아래의 차가운 감각이 그의 관심을 현실로 건져 올리곤 했다.

    “아, 진짜 차주완…….”

    허공에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들어 줄 사람도 없었다.

    이건 음모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출장 일정 하나 조정 못 하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휴대 전화를 침대 위에 내동댕이친 준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점심은 또 뭘 먹는담. 그러고 보니 꼴이 이러해서 고용인을 부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사실 정조대의 잠금장치는 언제든 풀 수 있도록 그 열쇠가 현관에 놓여져 있었고, 몰래 풀었다가 주완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착용하면 그만일 수도 있었다. 적당히 잔꾀를 부리는 정도라면 들킨다고 해도 인생이 뒤바뀔 파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부부란 연인일 때의 그것처럼 쉽게 뒤집을 수 있는 종류의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그렇지만 준희 또한 플레이의 긴장감을 잃고 싶지 않았다.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기묘한 상하 관계에 푹 젖어 있고 싶었다. 오랜만에 주완이 기특해할 만한 생각을 곱씹으며 준희는 베개에서 얼굴을 뗐다. 정체되어 있던 숨이 길게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몸을 살짝 움직임과 동시에 말을 멈추었다.

    “으으.”

    차라리 딜도가 나을지도 모르겠어. 준희는 감질나게 내벽을 긁어 대는 감각에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며 울상을 지었다.

    ***

    점심과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 반찬과 전기밥솥에 들어 있는 쌀밥을 꺼내 적당히 해결했다. 정조대가 뒤까지 지배하고 있는 이상 제대로 앉아 밥을 먹기란 불가능한 일이라서, 엉거주춤 일어난 상태로 식사를 하느라 수고가 두 배였다. 메시지로 식사 메뉴를 찍어 전송했지만 주완은 읽기만 할 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준희는 밤이 되어서야 휴대 전화 너머로 주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조대를 벗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전화를 걸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응, 준희야.]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얄미울 만큼 다정했다.

    “쉬고 있었어요?”

    [호텔에 오기는 했지만 일이 조금 남아서 아직 씻지도 못했네.]

    “이제 잠깐 풀어도 될까요?”

    [뭘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 주완이 짓궂게 되물었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게 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준희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아 삼킨 뒤 어물어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정조대요.”

    [그러세요. 관장 준비하고.]

    “통화하면서 해요?”

    [그런데 억제제 먹는다는 말은 왜 없지?]

    “아.”

    [아?]

    억제제를 챙기는 게 익숙하지 않아 아주 까먹고 있었다. 큰일 날 뻔했다. 준희는 반사적으로 대답해 놓고 후회했다. 자연스럽게 행동할걸. 그는 이런 일에 천연덕스럽지가 못했다. 하기야 평생을 눈치 보지 않고 자라 온 도련님이 그런 능청맞은 대처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을 리 없었다.

    [우선 억제제 먼저 먹고, 정조대 풀어.]

    “네.”

    준희는 휴대 전화를 스피커 모드로 전환시킨 다음 식탁에 있는 약통을 집어 들었다. 그는 주완이 집을 비운 동안 복용할 수 있게끔 준비된 두 알 중에 한 알을 덜어 입에 물었다.

    “먹으께요.”

    약을 잇새에 문 채 중얼거리느라 발음이 샜다.

    [얼른 먹어. 그러다 놓치지 말고.]

    뒤늦게 물을 따라 약과 함께 꿀꺽 삼켰다. 물 마시는 소리를 가만 듣고 있던 주완은 작게 “옳지.” 했다.

    “이제 풀어도 돼요?”

    [풀고 와. 벌받아야지.]

    “형…….”

    [편하게 재우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게 됐네. 억제제 복용하는 거 다시 잊지 않도록 새겨 줘야 하니까.]

    “…….”

    [정조대 풀고 말해.]

    규칙이 많지도 않았는데 그걸 왜 잊어서는. 준희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현관으로 걸어가 열쇠를 집어 들었다. 종일 저를 불편하게 했던 정조대에서 해방되기 직전인데도 흥이 나지 않았다.

    달칵, 열쇠가 맞아떨어지며 시원한 소리와 함께 고환을 감싸고 있던 고리가 풀렸다. 준희는 침을 꼴깍 넘기며 뒤를 파고들고 있던 쇠구슬에 달린 갈고리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흐, 읏.”

    아무리 작은 구슬이라지만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오는 감각이 선연해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짧게 앓는 소리를 주완이 수화기 너머로 듣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목덜미가 더욱이 뜨거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푸, 풀었어요.”

    [생리 식염수 준비해.]

    “네.”

    관장은 본래 정해진 수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진땀이 배어났다. 준희는 휴대 전화를 들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욕실의 거울 찬장을 열어 보면 생리 식염수 팩과 뜯지 않은 주사기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옆에 놓인 양동이를 먼저 꺼낸 다음 생리 식염수 팩을 열어 쏟아부었다.

    “준비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다치지 않게 바세린부터 발라.]

    “네.”

    관장은 주완에게서 당하는 편이 훨씬 더 수치스러운 데다가 나쁜 기억이 있어 유난히 떨게 되는 플레이였다. 혼자 하는 쪽이 편했지만, 전화로 일일이 지적을 받으며 하게 되니 색다르게 긴장이 되었다.

    그는 주완이 지시한 대로 관장에 앞서 엉덩이를 벌리고 구멍 안팎으로 바세린 크림을 꼼꼼히 발랐다. 이 역시 늘 거치는 절차였지만 수화기 너머 주완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했어요, 형.”

    [주사기 꺼내.]

    준희는 200cc 용량의 주사기를 꺼내 뜯었다. 주완은 더 큰 용량의 주사기를 사용해 한 번에 주입하곤 했지만, 스스로 할 때 커다란 주사기를 사용하기는 불편해서 그보다는 작은 쪽이 나았다.

    [가득 채워서 세 번.]

    “아…….”

    용량도 마찬가지였다. 주완이 눈앞에서 명령하고 감시해 준다면야 1000cc까지도 괴로워하면서 버텼지만, 생리 식염수를 스스로 주입하고 견디는 건 배로 힘이 드는 일이어서 600cc도 버겁게 느껴졌다.

    [네 번.]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주완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준희는 깜짝 놀라 얼른 빌었다.

    “잘못했어요. 대답 잘할게요. 세 번만 넣게 해 주세요. 네?”

    [질질 흘리지 않고 남김없이 잘 넣을 수 있겠어?]

    “네, 그럴게요. 제발…….”

    [그래요, 세 번.]

    겨우 한숨을 돌렸다. 준희는 주사기에 식염수를 채운 다음 입구에 튜브를 연결했다. 고무로 된 관은 끝이 둥글게 부풀어 있어 삽입된 후에 빠져나갈 염려를 덜어 주는 모양새였다.

    튜브 끝의 동그란 부분을 구멍 안쪽에 끼워 넣었다. 바닥을 더듬어 주사기를 붙잡으니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주완이 지시했다.

    [혼자 한다고 어설프게 할 생각 말고 자세 제대로 해.]

    “네.”

    어정쩡하게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서 있던 걸 들킨 듯했다. 준희는 주완에게 관장을 당할 때처럼 가슴을 바닥에 붙이고 엎드려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튜브가 없었더라면 혼자서는 관장을 하기 힘든 자세였다.

    욕실의 대리석 바닥은 깨끗하고 따뜻했다. 준희는 손을 더듬어 주사기를 붙잡고는 피스톤을 밀었다. 주사기를 채우고 있던 식염수가 줄어들며 엉덩이 안쪽에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한 감각이 가득 채워졌다.

    “아, 으흑.”

    [멈추지 말고 계속해. 시간은 다 넣고 난 뒤부터 잴 거니까.]

    협박 같은 목소리에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주사기의 용량을 겨우 채워 넣은 준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튜브에서 주사기 입구를 빼내고 몸을 약간 일으켜 바스켓에 든 식염수를 다시 채웠다.

    가득 찬 주사기의 입구를 다시 튜브에 끼운 준희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피스톤을 밀어 넣었다. 손을 움직이는 대로 액체가 튜브를 타고 구멍 안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져 아찔했다. 튜브의 끝이 원형으로 부풀어 있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아직인가? 정신 안 차리지, 지금.]

    “하, 하고 있어요. 읏, 움직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주입을 지체할수록 먼저 들어간 액체를 담고 있을 시간만 길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빨라지지가 않았다.

    겨우 마지막 횟수까지 채운 준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옹송그렸다. 튜브를 뺄 정신도 없었거니와 뺀다면 더더욱 참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애달프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자 주완이 무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10분.]

    “네, 으, 아으…….”

    차라리 플러그라도 끼워 준다면 좋으련만, 그저 바닥을 긁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준희는 대리석 위로 이마를 비볐다. 그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형……. 아, 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직 5분이나 남았어. 엄살 부리지 말고.]

    위로 쳐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다리가 절로 모여지고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변의를 해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준희는 늘 참아야만 하는 이 순간이 괴로웠다.

    “아, 하아…….”

    [3분. 조금만 더 참아.]

    시간이 줄어들수록 주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준희는 그의 목소리를 동아줄처럼 속으로 붙잡은 채 신음을 삼켰다. 괴로운 순간이 끝나면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잘했다고 칭찬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의욕이 생기곤 했다.

    [뒤처리하고 나서 다시 전화 걸어.]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이 끝났다. 준희는 대답할 여유도 없이 전화를 종료했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빠르게 움직이고 싶었지만, 혹여라도 안에 담고 있는 액체가 줄줄 샐까 봐 변기를 향해 느리게 기어가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

    결국 건방지게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고 자기 직전 한 차례 혼나야 했다. 정조대도 도로 착용하라는 명령에 눈물이 찔끔 났지만 꾸역꾸역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불이 꺼진 혼자뿐인 침실은 예상보다 더 적막하고 쓸쓸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정조대의 쇠구슬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어 숙면을 방해했다. 옆에서 조금 시끄럽게 굴거나 불빛이 있어도 잠에 잘 드는 편이었는데…… 주완이 없는 데다가 정조대까지 차고 있으니 평소처럼 까무룩 잠이 오질 않았다.

    여러 번 뒤척이던 끝에 준희는 한숨을 쉬었다. 살짝 열린 커튼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외로워.’

    최근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래서인가, 덥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군데군데 화끈거리고 저릿했다. 준희는 다시 한번 창문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낮게 신음했다.

    “으음.”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다. 이상한 것은 기분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저려 오는 손끝을 말아 쥐길 반복하며 준희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이번에는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마를 짚어 보았다. 몸살이라도 난 걸까. 그렇다기에는 몸이 무겁기보다는 지나치게 들떠 있는 편이었다. 이 느낌은 꼭…….

    ‘히트사이클 같은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히트사이클 주기가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분명 저녁에 억제제를 먹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억제제는 몸에 맞게 제조된 것으로 복용했기 때문에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했다.

    “아…….”

    침을 꼴깍 삼켰다. 아래가 홧홧해지는 감각이 지속되다 못해 점점 강도가 더해졌다. 부드러운 이불에 스치는 피부가 온기를 갈구하는 듯했다. 준희는 손을 내어 제 팔뚝과 허리 부근을 꾹꾹 주물렀다.

    “으, 아으…….”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싶었지만 내벽을 짓누르고 있는 쇠구슬 때문에 자세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기가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은 차주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몸이 그리웠다. 뜨거운 손길로 저를 어루만지고 애무해 주기를 바랐다. 갑작스러운 갈증에 준희는 더운 숨을 뱉어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래가 뜨거웠다. 본능적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차가운 정조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벽을 짚었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히트사이클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증상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협탁의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새벽 1시. 늦은 시간이었다. 준희는 망설이지 않고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이어지는 동안 다리가 풀려 무릎을 꿇어야 했다. 준희는 부드러운 침구에 뺨을 묻고 비벼 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 음의 끝에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안 되는데……, 아…….”

    애타는 음성으로 중얼거린 준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정조대 위를 연거푸 더듬었다. 본능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안을 파고든 쇠구슬은 달궈진 양 뜨겁게 느껴져서 죽을 맛이었다.

    준희는 한 번 더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역시나 주완은 받아 주지 않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잠들어 버린 걸까. 평소 작은 소리에도 기민하게 반응하고 깨어나는 그였기에, 준희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

    더운 숨을 뱉어 낸 그는 결국 휴대 전화를 내버려 둔 채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수록 목이 타는 듯하고 몸이 뜨거워져 거실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대고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릎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뒤를 찌르고 있는 쇠구슬이 이리저리 내벽을 찔러 댔다. 성기는 정조대 안에서 서서히 부피를 키워 갔다.

    ‘안 돼. 제발.’

    현관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준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열쇠가 놓인 신발장을 더듬는 손이 다급했다.

    그때였다. 도어 록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준희는 반쯤 풀린 눈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뭐 하는 짓이지, 이게.”

    주완이었다. 탁 터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준희는 그대로 그에게로 기어가 바지를 붙잡았다.

    “형……, 이상, 읏, 이상해요. 억제제를 분명히 먹었, 하……. 먹었는데, 몸이…….”

    “강준희.”

    “하아, 하.”

    “숨 천천히 쉬고, 침착하게 말해.”

    주완은 준희의 턱을 쥐고 고개를 들게 한 다음 엄격하게 지시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그쳐지지 않았다. 준희는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했다.

    “허윽, 흐, 하아…….”

    “그래서 허락도 없이 멋대로 정조대를 풀려고 했던 건가.”

    “흐, 그게……. 형이 전화를 안 받으셔서…….”

    “준희야.”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완은 입꼬리를 올리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지.”

    말씨는 다정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겁을 집어먹은 준희가 히윽, 하고 딸꾹질을 했다. 이윽고 주완은 준희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채 거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옷 한 자락 벗지 않고, 심지어 구두도 벗지 않은 채였다. 개처럼 끌려 거실로 돌아오게 된 준희는 서둘러 그의 무릎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악, 잘못, 잘못했어요. 형, 제발.”

    “벗어.”

    주완은 머리채를 놓아주고 딱딱하게 명령했다. 온정 한 점 남겨져 있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서 준희는 이 모든 상황이 플레이를 위해 쌓여 온 스테이지였음을 깨달았다. 그걸 깨닫고 나니 흥분이 몰려오며 성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정조대에 짓눌렸다.

    준희는 입고 있던 흰 셔츠를 벗어 개어 두었다. 얌전히 갠다고 개었는데, 손이 떨려 각이 잡히지 않고 구김이 갔다. 그런 것쯤은 상관없는지 그사이 현관에 다녀온 주완의 손에 열쇠가 걸려 있었다.

    “준희야.”

    “네. 네, 형.”

    “풀어 줄까?”

    “네, 제발…….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이리 가까이 와서 무릎 꿇어.”

    주완은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으며 명령했다. 준희가 무릎으로 기어 다가가자 그는 상체를 숙여 정조대를 풀어 주었다. 해방된 성기가 꼿꼿하게 허공에 몸을 세웠다. 갈고리 끝에 달린 쇠구슬이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느낌이 선연해 준희는 저도 모르게 주완의 무릎을 짚었다.

    “하윽. 아, 죄송해요.”

    “그대로 짚고 있어, 양손 다. 다리는 벌리고.”

    툭, 정조대가 옆에 떨어졌다. 금속성의 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준희는 무릎 꿇은 두 다리를 양옆으로 벌려 세우고 양손은 주완의 무릎을 각각 잡았다. 주완은 준희의 턱 끝을 잡아 얼굴을 마주 보도록 살짝 들어 올렸다.

    “시선 그대로.”

    “네.”

    그러고 보니 이쪽이 알몸인 데 반해 주완은 각 잡힌 정장 차림이었다. 예의에 맞게 갖추어 입은 완벽한 착장에 군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였다.

    “아……!”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를 비웃듯, 주완이 구둣발로 준희의 고환을 가볍게 짓눌렀다. 발기한 성기까지 꾹꾹 올려 지르밟는 통에 주완의 무릎을 쥔 준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흑, 흐, 아으!”

    딱딱한 구둣발이 말랑한 고환과 성기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준희는 주완의 무릎을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가늘게 들썩거렸다. 벌어져 있는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흑, 너무 아프……, 아, 하, 으응……!”

    아프기도 했지만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열감이 느껴져 허리가 자꾸만 비틀렸다. 당장이라도 그의 앞에 몸을 옹송그리고 엎드려 그만해 달라고, 그만 뒤를 범해 달라고 빌고 싶었다. 성기 끝에 배어 나온 체액이 어느덧 주완의 구두를 반질거리게 물들여 놓았다.

    “아픈 건지 좋은 건지.”

    “아, 흐윽.”

    “눈 뜨고 잘 봐, 준희야. 아프다고 하면서 좆물을 질질 흘리고 있잖아.”

    “으, 으으, 싫…….”

    “정말 싫어? 응?”

    몸에서 뿜어낸 열기로 꽃향기가 자욱해졌다. 준희가 바투 쥐고 있는 부분의 옷감은 정신없이 구겨져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 맺혀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주완 씨……, 윽, 흐윽.”

    마침내 준희는 헐떡이는 목구멍을 열어 안전어를 불렀다. 주완은 그를 괴롭히던 행위를 중단하고 몸을 기울여 준희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뚝.”

    “으흑, 흡. 으응…….”

    그와의 플레이는 좋으면서도 괴로웠다. 지속하고 싶으면서도 중단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몸의 감각이 한껏 기민해져 있는 지금은, 한계가 가파르게 찾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이프 워드를 부르고 나서도 준희는 자세를 바꾸지 못한 채 주완을 올려다보며 아이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주완은 그의 허리를 당겨 마주 보는 자세로 그를 무릎 위에 앉히고는 가만히 등을 다독여 달래 주었다.

    “흑, 더럽, 으, 더러울 텐데…….”

    와중에도 준희는 터져 나온 선액이 주완의 깨끗한 정장을 더럽힐까 걱정이 되어 웅얼거렸다. 그러자 가볍게 웃은 주완이 그를 살짝 떼어 놓았다.

    “읏.”

    옷깃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열락이 피어나는 듯했다. 준희는 몸을 움츠렸다. 그의 붉어진 뺨을 바라보던 주완은 그를 안아 든 채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주완의 옷이 한 겹씩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나신이 된 근육질의 몸이 침대에 누운 준희의 위로 드리워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기 어려웠지만, 분명한 것은 준희의 몸이 주완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준희는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주완을 졸랐다. 정확하게 뭐라고 하는지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주완은 비스듬히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러운 애무가 이어졌다. 입술을 지나 턱 끝을 스친 주완의 입술이 준희의 쇄골 위를 음미하듯 느리게 빨아 들였다.

    “아…….”

    그렇지만 공들인 전희가 무색할 만큼 이미 충분히 달아올라 있는 준희는 주완의 허리에 다리를 감으며 그를 재촉했다. 주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의 양다리를 잡아 벌려 허공에 엉덩이를 띄웠다.

    젖어 있는 선홍빛 구멍이 그를 향해 달싹거리며 안달을 내고 있었다.

    “형……, 넣어 주세요.”

    열띤 목소리까지도 푹 젖어 있었다. 허공에 띄운 엉덩이를 주무르던 주완은 주름진 입구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종일 쇠구슬을 품고 있어서인지 히트사이클이기 때문인지 내벽은 당장 넣어도 될 정도로 말랑하게 풀려 있었다.

    그래도 혹여 다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해 주완은 손가락을 넣어 공을 들여 안쪽 근육을 풀어 주었다. 손끝에 전립선이 닿을 때마다 준희의 희고 붉은 몸이 움찔거렸다.

    “흣, 으응…….”

    “예쁘지.”

    어르고 달래는 다정한 음색이 준희의 귓불을 붉게 물들였다. 준희는 부드러운 이불을 손에 꼭 잡아 쥐고는 숨을 색색 내쉬었다.

    구멍을 충분히 풀어 주었다고 판단이 된 주완은 준희의 가는 발목을 손에 가볍게 쥐었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발기한 성기를 맞추고 자리를 잡자, 준희는 흥분된 신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으.”

    “몸이 달았네, 아주.”

    주완은 짓궂은 목소리로 질책하며 제 물건을 준희의 아래에 밀어 넣었다. 뜨겁게 성기를 감아 오는 감각에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몸이 달아오른 쪽은 준희뿐만이 아니었다.

    “흐, 빨리……. 얼른요.”

    준희가 주완을 재촉했다. 느리게 박차를 가해 가려고 했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주완은 어디에선가 이성의 끈이 톡 끊기는 것을 느끼며 그의 안쪽 깊은 곳을 향해 세차게 허리 짓 했다.

    “하…….”

    “으, 흐, 아, 아! 으응……, 아으, 좋아, 좋아요……!”

    커다란 성기가 깊이 닿을 때마다 준희는 속절없이 신음했다. 배 안쪽으로부터 뜨거운 열락이 왈칵왈칵 치미는 듯했다. 그는 이불깃을 꽉 쥐고 있던 손을 주완의 어깨에 얹었다.

    안을 파고들 때마다 뜨거운 피가 돌아 발끝까지 저릿해졌다.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고, 본능적으로 다리를 좁히고 싶었지만 발목을 잡힌 탓에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몸이 멀어지려 할 때마다 주완이 골반을 당겨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응, 흐응, 으……, 아!”

    “후……. 강준희.”

    몸과 몸이 쉼 없이 맞부딪혔다. 허리 짓을 하며 풀어낸 페로몬 향은 준희를 더더욱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주완은 허공에서 꺼덕이고 있는 준희의 성기를 잡아 빠르게 흔들었다. 아까부터 달구어져 있었던 데다가 강한 자극이 가해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준희가 먼저 사정했다.

    준희는 어느덧 주완의 목을 끌어안은 채 엉엉 울며 온몸으로 오르가슴을 받아 내고 있었다. 주완은 준희의 귓불을 혀로 훑으며 난폭하게 허리 짓 했다. 쾅쾅 빠르게 치달을 때마다 준희의 허리가 이리저리 비틀렸다.

    “아, 읍, 흣, 아응, 응!”

    “……미치겠네.”

    주완은 나직이 지껄이며 느리게 뒤로 허리를 물렸다가 처박듯 추삽질 했다. 주완이 사정할 때 준희는 또 한 번 절정을 맞았다.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강렬한 쾌락이었다.

    ***

    다음 날 아침은 분주했다. 주완은 준희를 깨워 따뜻한 물에 반신욕부터 하게 했다. 따뜻한 물과 몽글몽글한 거품에 물속에서 잠들 뻔할 때마다 가볍게 딱밤을 먹이는 통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반신욕을 하고 나온 준희가 토스트와 시리얼로 가볍게 배를 채울 동안 주완은 밤사이 더럽혀진 침구를 직접 갈았다. 귀찮지도 않은지 쉬지 않고 움직여 대는 주완을 눈으로 쫓으며 준희는 토스트를 씹은 입을 오물거렸다.

    “아.”

    그러다가 식탁 위에 놓여져 있는 약통에 눈이 멎은 준희는 불현듯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식사를 마친 준희가 마실 수 있도록 커피를 내리던 주완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거 이상해요!”

    준희는 약통을 불량하게 흔들며 씩씩댔다.

    “저 어제 억제제 먹었거든요. 통화하면서 분명히? 그런데 왜 안 들었지? 이랬던 적이 없는데……. 제 몸이 뭔가 이상해진 걸까요?”

    “이상할 리가.”

    “형도 어제 분명 봤잖아요. 억제제 먹고도 히트사이클 돌아왔던 거. 밥 먹고 같이 병원 가요. 아무래도 원장님한테 따져야겠…….”

    “평범한 비타민인걸.”

    응?

    잘못 들었나 싶어 준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소요됐다. 그사이 주완은 다 내려진 따뜻한 커피를 준희의 앞에 내려놓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비타민…… 이라고요?”

    “간밤에 내가 우연히 집에 왔을 리가 없잖아.”

    “와…….”

    짜여진 판이라는 생각은 간밤에도 했었지만, 짐작했던 것보다도 더 정밀하게 계획되었던 모양이었다. 준희는 입술을 달싹이며 감탄했다.

    “주도면밀한 사람. 성격 나빠.”

    “칭찬이지?”

    그는 제 몫으로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결혼하고도 플레이를 해 오긴 했지만 연애할 때에 미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 종종 성에 차지 않아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제가요?”

    “일부러 자극하고 심통 부렸던 거, 그래서 그랬던 거 아닌가?”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보란 듯 그를 자극했던 건 사실이었다. 준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리다가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커피가 식도를 넘어간다.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어물어물 긍정하자 주완이 픽 웃었다.

    “출장 있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반쯤은. 일이 있기는 했어. 지방이 아니라 회사에 나갈 일이었지만, 남은 시간은 같이 보내려고 일을 몰아서 처리하느라 늦은 건 사실이야.”

    “아.”

    덧붙인 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준희가 새침한 얼굴을 했다. 마음을 숨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주완은 그런 준희를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럼 이제 주말까지 프리한 거죠?”

    “응, 준희한테 써야지.”

    평소보다도 다정한 말씨가 마음을 녹인다. 준희는 돌아가려는 그의 손을 붙잡아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강아지 같기는.”

    주완이 기분 좋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처럼 얻은 휴가인데, 하고 싶은 거 있어?”

    “아무것도요.”

    준희는 이번에는 그의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어 장난친 다음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집에서 뒹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같이 친구들을 만나자거나, 술을 마시러 나가고 싶다거나, 시끄러운 여행지를 제안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집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쪽은 준희보다는 주완이 선호하는 휴가에 가까웠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읽었는지 준희가 덧붙였다.

    “정말이에요.”

    “파티를 열거나 친구들을 만나도 괜찮아. 술을 마셔도 좋고.”

    “형, 나를 뭘로 보는 거예요?”

    “눈치 볼 것 없다는 얘기야.”

    “그럼 집에서 영화 보는 건 어때요? 방을 영화관처럼 꾸며 놓고도 바빠서 한 번도 이용한 적 없잖아요. 나초랑 팝콘도 만들어서 먹으면 진짜 영화관에 간 것 같을 텐데.”

    영화관이라면 보여 주기식 연애를 할 당시에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대외용이었다. 주완은 기본적으로 사람 많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준희는 조르듯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네?” 했다.

    처음 만날 땐 천방지축에, 제멋대로인 줄만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컸지. 내심 기특하기도 했다.

    “그러자.”

    주완은 붙들린 손에 힘을 주고 준희의 턱을 잡았다. 상체를 기울여 가볍게 입을 맞추자 이번에는 준희 쪽에서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어깨를 잡아 왔다. 이내 입술 사이로 말랑한 혀가 파고들었다. 고소한 커피 향이 감도는 키스였다.

    ***

    영화는 준희가 오래간 고심한 끝에 결말이 아름다운 로맨스로 골랐다. 그가 스트리밍 사이트를 앞에 두고 이리저리 줄거리를 읽고 후기를 찾아 가며 고민하는 동안 주완은 영화를 보며 먹을 간단한 스낵을 준비했다.

    영상 시청을 위한 다목적실에는 커다란 스크린을 벽면에 둔 채 편안한 소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암막 커튼도 드리워져 있어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부럽지 않은 모양새였다.

    “형이랑 영화관 갔을 때 기억나요.”

    “강준희가 영화 제목도 기억 못 하던 그때?”

    “솔직히 형도 영화 보려고 간 거 아니었으면서. 대외용이었잖아요, 그거.”

    “부정할 수 없네.”

    “얼마나 얄미웠는데.”

    준희가 영화를 재생시킨 뒤 주완에게 밀착하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주완은 그의 입술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았다가 놓아주고는 문득 물었다.

    “그런데 왜 포기하지 않았지?”

    “뜻대로 되면 그게 마음인가. 바란다고 거둘 수 있는 게 마음이었으면 진작 그만뒀을걸요.”

    필터링 없이 대답한 준희는 뒤늦게 주완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 형을 선택한 걸 후회한다는 게 아니라…….”

    “오해 안 했어. 그럴 만했지.”

    주완은 준희의 허리를 감싸 곁으로 당겨 오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기특하다고 생각해. 고맙다고도.”

    갑작스러운 칭찬에 준희는 멋쩍은 듯 눈을 굴리다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완은 테이블에 놓인 팝콘을 가져와 영화에 집중한 그의 입 속에 하나씩 넣어 주었다. 큰 저항 없이 팝콘을 받아먹는 준희의 얼굴은 퍽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제멋대로에 고집이 세고 어디로 튈지 모르던, 이상형과 정반대의 계약 연인이었다. 맞선을 보던 자리에서만 해도 그런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그러니 인생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옆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느꼈는지 준희가 스크린에서 눈을 떼었다. 고개를 돌리면 어렵지 않게 시선이 마주친다.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림과 동시에 주완의 입술이 그 위를 가만히 덮었다. 허리가 당겨진다. 준희는 느리게 눈을 감고 입술이 밀착할 수 있도록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아마도 당분간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로맨틱한 대사들을 배경으로 입술을 부딪히며 준희는 생각했다. 더불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지던 주완의 시선을 떠올리면 지금의 모든 순간이 꿈결 같아진다.

    “방해했네. 미안.”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영혼 없는 사과가 떨어져 내렸다.

    “타이틀 뜰 때부터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

    준희는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금 입술을 부딪혔다. 그의 말은 반은 진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영화는 지루하지 않았다. 타이틀부터 도입부까지, 흥미로운 전개로 눈을 뗄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차주완이 아니었다면 필시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나란히 앉은 이상, 영화의 재미는 현실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고, 그래야만 했다. 상호간의 사랑을 확인한 뒤로 매순간이 판타지로 점철된 로맨스 영화 같았기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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