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9)

7. Endless Dream (에필로그)

집이 오랜만에 북적거렸다. 강욱진 회장이 손녀들을 전부 호출했기 때문이다. 비록 해외 지사 파견을 나가 있는 둘째 유정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첫째 이영과 셋째 희미는 약속된 시간 전에 무사히 도착했다.

부산스러운 분위기 가운데 가장 긴장한 건 단연 준희였다. 강욱진 회장이 출가한 손녀들을 다시 집으로 불러 모은 이유는 모두 그에게 있었다. 교제한 지도 기간이 제법 되었으니 주완을 정식으로 한 번쯤 초대해야겠다는 것이 강욱진의 입장이었다.

준희는 그에 동의했다. 최근 유성기획 대표 이사 자리에서 사퇴한 주완에게 가장 먼저 러브 콜을 보낸 것 또한 강욱진이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명분이 확실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를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이토록 떨리는 일이 될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인마.”

그나마 나이 터울이 얼마 나지 않는 셋째 누이 희미가 거실을 오가며 초조하게 주완을 기다리는 준희를 타박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본가를 찾아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업무 전화에 안 그래도 정신이 없던 차였다.

“놔둬라. 쟤 속이 말이겠니.”

서재에서 할아버지와 사업 이야기를 나누다 거실로 나온 첫째 이영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따뜻한 여자였다. 일곱 살이나 터울이 지는 막내에게 유독 온화하고 너그러운 누나이기도 했다.

마침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다급히 확인해 보니 집 앞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였다. 준희는 누이들을 뒤로한 채 현관으로 뛰듯이 걸어 나갔다. 이영과 희미는 눈빛을 교차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준희는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까지 그를 마중 나갔다. 주완은 여태껏 본 중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작업실을 방문할 때 들고 왔던 것보다 화려하고 큰 꽃다발과 함께였다. 다른 손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는 와인 한 병도 들려 있었다.

“오셨어요?”

“강아지처럼 달려 나오기는. 가족분들은 다 계시지?”

“네, 혹시 긴장돼요?”

꽃다발을 받아 들며 물었더니 주완은 대답 없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는 위축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신경이 쓰이는지 옷매무새를 가볍게 점검했다.

주완은 앞장서서 들어가는 준희의 뒤를 따랐다. 제 뒤를 쫓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묘하게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인을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그에게도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강욱진 회장이 가장 먼저 주완을 반겼다. 깍듯하게 인사한 주완은 준비해 온 와인을 그에게 건넸다. 강욱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온화한 미소를 띠고는 주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영과 희미도 차례로 악수를 나눴다.

“신경 써서 차리라고 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그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고용된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준비한 덕택에 커다란 식탁 위는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로나 볼 법한 음식들이 대다수였다. 준희의 옆자리에 앉은 주완은 예의 바른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전부 맛있어 보이네요.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형.”

준희는 옆을 흘끔흘끔 확인하며 거들었다. 강욱진 회장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이영과 희미도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가족들에게도 준희는 새침하고 도도한 줄만 알았던 막냇손자이자 막냇동생이었다. 안달 난 모습이라니. 무척이나 생소한 광경이었다.

가벼운 안부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강욱진 회장을 비롯해 이영과 희미는 사업의 최전방에서 활약하고 있었기에 주된 스몰 토크 주제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말해 준희의 흥미를 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준희는 따분한 표정으로 생선 요리를 콕콕 찍어 먹었다.

“당분간은 어쩔 생각이에요? 거처는 정했어요?”

식사가 끝나 갈 무렵 희미가 냅킨으로 입가를 훔쳐 내며 물었다. 주완 역시 깔끔한 칵테일로 식사를 마무리하며 대답했다.

“회장님께서도 러브 콜을 주셨지만,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결정하기 전에…… 그동안 제가 바빠 데이트를 제대로 못 했으니 준희 씨와 여행을 다녀올까 합니다.”

“그래, 그동안 주완 군도 퍽 바쁘게 살았지. 숨 돌릴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쁠 것 없어.”

강욱진이 긍정했다. 과일을 오물거리던 준희는 갑작스러운 여행 고백에 먹던 것을 꿀꺽 삼키고 주완을 응시했다.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친 주완이 냅킨으로 준희의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다정히 닦아 주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준희.”

그러자 이영이 불시에 물었다. 맞은편의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는 눈초리가 새치름했다. 준희는 공연히 불안해 선수를 쳤다.

“누나는 낯간지럽게 그런 걸 묻고 그…….”

“진지하지 않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준희 씨도 그러리라고 믿고 있고요.”

준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완이 신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갈 데 없어진 시선이 빈 그릇 위를 더듬었다. 티를 내기는 싫었는데 얼굴이 뜨거운 것으로 보아 뺨이 상기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네. 여행은 어디로 갈 생각이에요?”

“그건 이제부터 차츰 상의해 보려고 합니다.”

그걸 끝으로 대화는 아까의 패턴으로 되돌아갔다. 전과 다를 바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투성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식탁 아래로 내려온 주완의 손이 준희의 허벅지 위를 어루만졌기 때문이다. 준희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칵테일로 입을 축였다.

***

식사를 마친 뒤에는 주완이 선물로 가지고 온 와인을 맛보았다. 후식까지 마쳤을 때에야 강욱진 회장은 주완을 제 손자에게 넘겨주었다. 적당히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가 되자 준희는 그제야 신이 나 주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가 주완을 인도한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분명 깔끔하게 청소해 두었는데도 방문을 여는 순간은 옷을 벗는 순간보다도 떨렸다. 안으로 들어온 주완이 한 걸음씩 떼어 놓으며 꼼꼼하게 방을 구경했다.

“아늑하고 따뜻한 방이네. 준희 너처럼.”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사실상 그는 주완이 자신의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 상태였다. 주완은 선반에 올려져 있는 작은 액자를 발견하고는 허리를 기울여 들여다보았다. 준희의 어릴 적 사진이 담겨 있는 액자였다.

“이건 언제 찍은 거야?”

그의 말투는 존댓말을 쓸 때보다 반말을 쓸 때 훨씬 더 상냥하게 느껴졌다. 준희는 슬쩍 다가서서 액자를 확인했다.

“초등학생 때일 거예요. 아마 열 살 즈음. 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날인 것 같아요.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대로 컸네. 변한 게 하나 없어.”

“그런가요?”

“성격도 이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

“……무슨 뜻이에요?”

준희가 한쪽 눈썹을 흘끗 들어 올리며 반문하자 주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코끝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맞은 코끝을 매만지던 준희가 무언가 생각난 듯 방에 연결되어 있는 드레스 룸으로 달려가 종이백을 가지고 나왔다.

“미루다 미루다 이렇게 드리게 될 줄 몰랐어요.”

“뭐지?”

“선물이요. 그, 19층에서 고르라고 하셨던…….”

“아.”

설명을 덧붙이자 주완도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벌써 몇 주를 묵혀 두었던 숙제였다. 호텔 19층의 SM 살롱에서 준희가 직접 고른 선물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아주 잊을 뻔했군.”

“여행은 어디로 갈까요?”

민망한지 슬쩍 주제를 바꾸며 준희가 제 침대에 걸터앉았다. 주완은 협탁 위에 잠시 쇼핑백을 올려놓은 뒤 준희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자신의 방에, 그것도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게 되다니.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속이 시끄러운 사이 주완의 손이 침대를 짚고 있는 준희의 손등 위로 겹쳐졌다. 준희는 고개를 돌려 주완의 옆선을 보았다.

“하와이에 작은 별장이 하나 있어. 괜찮다면 거기에서 충분히 쉬다 오는 건 어떨까 하는데.”

“좋아요. 저는 바다도 좋아하고……, 형이랑 가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아서.”

“박지율 씨한테 스케줄 받아 일정 조율해 볼게.”

“제 스케줄은 고려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스케줄이든 다 취소하고 갈 수 있어요. 당장이라도요.”

그렇게 말하는 준희의 두 눈이 빛이 날 듯 반짝였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준희의 시선을 마주친 주완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이거 유혹인가?”

그의 시선에 홀린 듯 묶여 있던 준희가 입술을 뗐다.

“넘어오실래요?”

주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기울여 준희의 말랑한 입술을 감쳐물었다. 살짝 머금었다 떨어지는 사이로 도톰한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수작질은.”

“……잡은 물고기도 다시 보자는 주의거든요.”

준희의 대답에 주완이 허, 웃음을 머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오늘부터?”

마지막 말은 다시금 주완에 의해 잡아먹히고 말았다. 감질나게 훑고 떨어진 입술은 쪽, 쪽, 가볍게 버드 키스를 남기곤 떨어졌다.

아쉬워……. 준희는 맹렬한 기세로 주완의 입술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주완은 싱긋 웃으며 그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릴 뿐이었다. 하기야 열렬히 키스해 보아야 끝장을 보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준희는 아쉬운 대로 주완의 손바닥을 끌어당겨 그 위로 입술을 묻었다.

“내 망아지.”

주완은 그렇게 읊조리며 반대편 손으로 준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쓸쓸한 한국 날씨와 달리 내리자마자 청명하고 온화한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준희를 옆자리에 태운 주완의 스포츠카가 해안 도로를 가로질렀다. 뻥 뚫려 있는 도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준희는 차 밖으로 팔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은 덥지만 산뜻했다.

그 역시도 하와이에 별장을 두고 있어 어릴 적에는 종종 방문했지만 전부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완과 단둘이 온 만큼 감회가 새로웠다. 준희는 하늘 위로 기지개를 켜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날아갈 것 같아요!”

“위험하게 방방거리지 말고 제대로 앉아 있어.”

타박하는 주완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맺혀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스포츠카는 꽤나 오래도록 해안 도로를 달린 끝에 주완의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주완은 액티비티와 휴양 중 어느 쪽에 더 관심이 있는지 재차 물어 확인했지만 준희는 순순히 사실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실상 이리저리 쏘다니고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을 좋아했지만 주완이 그런 것을 즐길 리 없었기 때문이다. 준희는 오랫동안 휴가 없이 일해 왔을 그에게 맞춰 주고 싶었다.

결국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와이 별장을 충분히 즐기다가 돌아오기로 합의했다. 주완의 개인 별장은 으리으리하지는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영화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데다가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프라이빗한 정원에는 아담한 풀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로부터 조금 더 걸어 나가면 바로 해변이었다.

“너무 좋아요. 진짜 행복해.”

오래 비워 두었던 별장의 주인이 찾아온다는 소식에 사용인이 마련해 놓은 웰컴 드링크를 한 손에 들고 안채부터 정원까지 꼼꼼히 돌아다니며 구경한 준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가 격정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아 주완은 픽 웃었다.

“하와이가 처음도 아닐 텐데 뭐가 그렇게 들떠.”

“그래도……. 형이랑은 처음이니까요.”

준희는 그의 눈앞에서 살랑거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주완은 그 맑은 미소에 오래도록 눈길을 빼앗겨야만 했다. 최근 들어 그런 일이 잦았다.

늦은 점심으로는 사용인이 그럴싸한 랍스터 요리를 만들어 주고 사라졌다. 기내식을 충분히 먹었음에도 시장감이 느껴져 준희는 평소보다도 적극적으로 음식을 섭취했다. 맞은편에서 보조를 맞추며 배를 채우던 주완이 그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훔쳐 주었다.

“잘 먹는 모습 보니 좋네.”

“평소에는 보기 싫으세요? 제가 입이 짧아서요?”

“양에 관계없이 먹는 모습이야 늘 예쁘지. 탈 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먹어. 무리하지 말고.”

“네.”

“말도 잘 듣지.”

고분고분한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주완이 씩 웃었다. 평소보다 캐주얼한 차림에, 앞머리도 자연스럽게 내린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훨씬 어리고 청순하게 느껴졌다. 준희는 랍스터에 집중하면서도 이따금씩 그의 미모를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정해야 할 게 있는데.”

“뭐요?”

“세이프 워드. 형이라고 부르는 쪽은 이미 의미 없어졌으니.”

“어……, 뭐가 좋을까요?”

“글쎄.”

마침 적당히 포만감이 들어 탄산음료로 식사를 마무리하고는 고민에 빠졌다. 그와의 첫 안전어로 ‘주완이 형’을 준비했던 지난날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주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준희에게 물었다.

“그땐 왜 세이프 워드를 ‘주완이 형’으로 정해 왔던 거야?”

“그야……, 어떻게든 꼬셔 보려고요.”

서로를 딱딱하게 부르던 때였으니 말랑한 단어로 약간의 호감이라도 사 보고자 했던 게 그 취지였다. 그의 솔직한 대답을 들은 주완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엉큼하기는.”

“그래서 결과가 좋았잖아요. 형이랑 하와이도 다 오고.”

“잘했어요.”

주완은 어린애 다루듯 준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의 손길이 싫지만은 않아서 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번에는 반대로 ‘주완 씨’라고 부를까요? 세이프 워드로요.”

“나쁘지 않네.”

“그런데 언제쯤 연습해 볼 수 있어요, 그거?”

“까불지.”

준희가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고 식탁 아래 발을 움직여 그의 다리를 톡 건드렸다. 그러나 주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

실습의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식사를 마무리한 뒤 함께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주완은 그를 무릎 꿇렸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더니 노곤한 기분이 찾아들어, 샤워 가운 바람으로 꿇어앉자마자 준희는 그를 도발한 것을 약간 후회했다.

주완의 손에는 준희가 19층에서 손수 골라 선물했던 목줄과 플러그가 들려 있었다. 사은품으로 동봉되었던 플러그의 모습을 준희도 이제서야 처음 보았다. 손잡이 부분에 복슬복슬한 꼬리가 달려 있는 애널 플러그였다.

“벗어.”

가운을 벗고 빠르게 알몸이 된 준희가 그의 앞에 다시금 무릎을 꿇었다. 주완은 준희의 뒤로 돌아갔다. 애널 플러그를 삽입하기 위함인 듯했다. 준희는 눈치껏 몸을 엎드리고 엉덩이를 위로 들었다. 그러자 주완이 그의 엉덩이를 따끔하게 때렸다.

“밝히기는.”

“…….”

차가운 젤이 엉덩이 골 사이에 떨어졌다. 손가락이 몇 차례 드나들며 길을 넓히더니 이번에는 차디찬 플러그가 구멍 안으로 쏙 파고들었다. 부들부들한 감촉의 꼬리가 회음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져 몸이 소스라쳐졌다.

그다음으로는 부드러운 가죽 재질의 목줄이 목에 감겼다. 찰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둘레에 맞게 잠금장치가 채워졌다. 주완은 목줄에 걸린 체인에 리드줄까지 걸었다.

“준희야.”

“네?”

“개가 되었으니 개처럼 대답해야지.”

“……멍.”

그런 것까지 고려하고 고른 선물은 아니었는데……. 그의 명령대로 개처럼 짖고 나니 수치심으로 귓불이 뜨거워졌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완은 손을 뻗어 준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밥도 먹고 씻기도 했으니까 소화도 시킬 겸 산책할까?”

“네? 악……!”

산책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묻자마자 목줄이 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준희는 손을 뻗어 주완의 가운에 매달렸다. 그러자 주완은 그런 준희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나갈 테니까 흥분하지 말고. 옷 입고 나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멍…….”

언어를 잃은 강아지에게 주인의 의사를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주완은 쥐고 있던 리드줄을 준희의 잇새에 물려 주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알몸으로 엎드린 채 리드줄을 스스로 물고 주완을 기다렸다. 펜트하우스나 주완의 집에서보다도, 생전 처음 오는 곳에서 발가벗고 있으려니 누군가 지켜볼 것만 같아 온몸의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셔츠와 반바지로 가볍게 차려입은 주완이 거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 쓰지 않던 검은 모자까지 쓰고 있어, 언뜻 대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대학 생활은 어땠을까. 분명 만인이 사랑하는 선배이자 동기이자 후배였겠지. 준희는 문득 그의 대학 시절을 엿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리드줄.”

그의 앞에 도착한 주완이 손을 내밀었다. 준희는 그의 손바닥 위로 리드줄을 얌전히 뱉어 놓았다. 잘했다는 듯, 그의 손길이 다시금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짓밟힌 인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게 될 만큼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주완은 리드줄을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리드줄이 팽팽해지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 해, 준희야. 기어야지.”

그는 무심한 눈으로 명령했다. 알몸으로 그가 서 있는 곳까지 기어가는 일만 하더라도 충분히 수치스러웠는데, 그가 말한 ‘산책’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주완은 깨끗한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 준희는 본능적으로 망설였다. 아무리 사람 없는 개인 별장이라고 할지라도 실내와 실외가 주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준희는 알몸이었고, 목줄에 매여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주완은 그에게 머뭇거릴 여유를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말 들어야지.”

“낑…….”

주완은 리드줄을 당겼다. 준희의 몸이 어쩔 수 없이 안채를 빠져나와 정원의 푹신하게 깔린 잔디 위로 향했다. 손바닥과 무릎이 잔디밭 위를 헤치고 주완의 뒤를 따랐다. 주완은 준희의 속도에 맞춰 여유로운 보폭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분명히 아무도 없을 텐데. 기묘한 긴장감이 온몸을 저릿하게 물들였다. 움직일 때마다 뒤에 달려 있는 꼬리가 흔들리는 바람에 안을 채우고 있는 플러그가 내벽을 자극했다.

“산책시키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데. 한국에 돌아가면 같이 운동이라도 할까?”

“멍.”

“역시 너도 좋지?”

그는 준희의 선물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애완견에게나 붙일 법한 말로 준희를 자극하며 정원을 맴돌았다. 기어 다니는 것이 힘들기는 했지만 잔디가 푹신하고 가동 범위가 넓지 않아 견딜 만했다.

적당히 거닐었을 무렵 주완은 정원의 가장자리로 준희를 이동시킨 다음 말했다.

“배변 훈련도 산책의 중요한 코스인데.”

“…….”

“우리 준희는 왜 소변을 안 볼까.”

적나라한 단어 선정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쩔 줄 모르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준희 앞에 주완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준희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겨 주며 재촉했다.

“참을 필요 없어. 착하지.”

“멍…….”

“싸지 않으면 안 들어갈 건데.”

“……으응.”

“한쪽 다리 들어.”

주완은 그에게 한쪽 다리를 들고, 정말 개가 되어 소변을 볼 것을 종용했다. 이쪽을 맹렬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버티려고 해 봐야 배로 혼나게 될 것이 뻔했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키고 오른쪽 다리를 옆으로 서서히 들어 올렸다. 개처럼 들어 올려진 허벅다리가 허공에서 잘게 떨렸다.

“으, 으으……, 못 하겠…….”

“준희야.”

“흐윽.”

“실망시킬 거야?”

수치심이 온몸을 뜨겁게 물들였다. 준희는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다시피 한 채로 벌벌 떨었다. 다리는 들어 올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대로 소변을 봐도 몸에 묻지는 않겠지만…… 견딜 수 없는 배덕감으로 눈시울이 뜨겁게 물들었다.

“아윽.”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이번에는 거칠게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준희는 붉게 물든 눈으로 주완을 마주 보았다. 그는 서늘해진 눈으로 준희를 응시했다.

“말 안 듣지.”

“…….”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였으면서 건방은 잘도 떨던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이 상태로 소변을 보는 것은 무리였다. 준희는 입 안에서 새로 정한 안전어를 굴려 보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이렇게나 쉽게 상황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준희는 다른 단어를 선택했다.

“……주인님.”

냉랭하던 눈에 일순 이채가 돌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주완은 가만히 숨을 가다듬고는 준희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주인님이 도와줄까?”

“네. 네, 주인님. 이렇게……, 이 자세로는 못 싸겠어요.”

주완은 몸을 일으키며 리드줄을 당겼다.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려면 준희 역시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몸이 바르게 세워진 뒤에야 주완은 리드줄을 그의 입에 물려 주었다.

“아…….”

이윽고 주완은 그의 왼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다리를 들어 올리게 했다. 오른발은 바닥에 지탱한 채 왼 허벅지가 위로 들린 자세였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 준희는 제 뒤에 선 주완의 품에 등을 기대야만 했다.

주완은 준희의 무릎을 붙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으로 준희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위아래로 쓸며 느긋하게 자극하자 성기는 금세 꼿꼿이 몸을 세웠다. 자세가 불편해 엉덩이에 움찔움찔 힘이 들어갔다.

“아으.”

“참지 말고 마음껏 싸.”

몇 번 손바닥을 비비지 않고도 애액은 금방 터져 흘렀다. 미끌미끌한 선액으로 성기가 뒤덮이자 자극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주완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은 그의 것을 빠르게 쥐어흔들며 희롱했다.

“윽, 히윽……, 으, 흐으, 응, 아으……!”

준희는 리드줄을 입에 문 채로 끙끙거리며 신음을 토해 냈다. 자세가 무너질 것 같아 주완의 양 팔뚝을 손으로 움켜 의지한 채였다. 왼 무릎은 여전히 허공에 들린 상태였다. 엎드려 있다가 일어났을 뿐이지 개가 소변을 보는 자세에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모양새였다.

수치심과 서러움이 복합적으로 섞여 뺨을 적셨다. 와중에도 성기는 불가항력으로 자극받아 당장이라도 사정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주완은 기둥의 끝을 바투 쥔 채 엄지손가락으로 귀두를 빠르게 비벼 자극했다.

“읍, 으흡, 아으흑……!”

리드줄을 꼭 깨문 채로 준희가 파드득 떨었다. 기어이 귀두를 비집고 나온 허여멀건 액체가 잔디밭 위로 툭툭 튀어 흘렀다. 사정을 하고도 준희는 평소보다도 오랜 시간 동안 잔여 감정에 휩싸여 몸을 벌벌 떨었다. 주완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

그대로 안채로 돌아온 준희는 침대에 눕혀졌다. 그는 엎드린 자세로 한 차례 주완을 받아 내고 나서야 목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목줄을 풀어 주고 붉어진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주완은 그대로 준희를 눕혀 다시 한번 몸을 붙였다. 주완이 두 차례 더 사정한 뒤 준희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까마득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침구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몸은 금방이라도 씻고 난 듯 상쾌했다. 준희는 여러 번 몸을 뒤척여 가며 다시 잠을 청했지만, 달아난 잠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차 적응이 채 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는 자는 것을 포기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저를 안고 잠든 주완의 얼굴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어?”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인데, 그림처럼 잠들어 있던 주완이 눈꺼풀을 올렸다. 졸음이 묻은 나른한 눈이 준희에게로 향했다. 가만히 숨을 고르며 준희를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내려 이마 위로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입술이 이마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잠이 안 와?”

잠긴 목소리가 부드럽게 안부를 물었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끈질기게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덜 깨어난 모습마저 아름다운 남자였다. 마음께가 간지러웠다.

“아니면, 밤 산책이라도 할까?”

“졸린 거 아니에요?”

“글쎄. 나도 슬슬 잠이 깨려는 참인데.”

상기된 뺨을 손등이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주완은 느리게 상체를 일으키곤 고개를 양옆으로 꺾어 스트레칭 했다. 간단하게 몸을 푸는 모습마저 군더더기가 없어 보였다. 준희는 그를 따라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맨발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사장의 폭신한 모래가 발에 감겼다. 여름 날씨라고 해도 새벽이라 쌀쌀할 수 있다며, 주완이 둘러 준 담요를 포근히 감싼 채 준희는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크고 작은 발자국이 모래 위에 나란히 새겨졌다. 그들은 새카만 해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편 산책로의 가로등이 그들을 비추는 빛의 전부였다. 어두운 탓에 모래와 바다의 경계선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했다. 그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로 바다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꼭 우주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가.”

“봐요. 별도 쏟아질 것 같잖아요.”

준희가 감상에 젖어 중얼거리며 밤하늘을 가리켰다.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는 노래 구절을 작게 흥얼거리기도 했다.

“이 우주는 얼마나 클까요.”

“천문학자가 꿈인 적도 있었어?”

“무드라고는. 저는 지금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날 확률이라는 아주 시적인 공식을 언급하려던 참이었는데요.”

주완는 낮게 웃었다. 준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지만, 그가 무드를 깨려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장난을 치려던 것이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우주에서 누구보다도 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더없이 충만해진다.

까만 해변에 파도가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가 오래도록 소리의 공백을 채웠다. 반복되는 파도 소리는 몰려오다 몰려오다 끝내 마음까지 와 닿을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준희는 주완의 품을 파고들었다.

“준희야.”

“네.”

“나는 우주의 공식도, 거창한 운명론도 믿지 않아.”

기어이 2절까지 해서 바다에 푹 젖어 있는 감상을 깨뜨려 버리려는 것일까. 준희가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고 주완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언제부터였는지, 준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라면 영원 정도는.”

“…….”

“괜찮지 않을까.”

진중한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함께 귓가에서 부서졌다. 이상하게도 코끝이 시큰해졌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으려 힘을 주는 사이, 주완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손을 잡으려는 건가, 준희는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두었다.

그의 앞으로 건네진 손끝에 딱딱한 감촉이 맞닿았다. 준희는 고개를 기울였다. 동그란 물건이 왼손 약지를 감쌌다. 반지라는 것은, 그가 손을 놓아주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는 주완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누가 프러포즈를 이렇게 무드 없게 해요?”

“네가 사랑하는 남자.”

부끄러운 마음에 장난스레 타박하자 주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준희는 말없이 그의 왼손을 끌어당겨 네 번째 손가락을 확인했다. 아마도 같은 디자인일 것이 분명한 반지가 그의 손에도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도.”

말도 안 되게 투박한 고백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준희는 이제 그의 투박한 말이 ‘사랑한다’는 뜻임을 알았다. 평소에는 더없이 다정하고 세심하지만 내제된 성향만큼은 고압적이라는 것도. 마음에 없는 사탕발림에는 소질이 없는 남자라는 것도. 그렇기에 모든 말에, 표현에, 진심이 듬뿍 묻어난다는 것까지도.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다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우스꽝스러운 리액션이었지만 주완은 기꺼이 그의 여운을 지켜 주었다. 언약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준희는 주완의 손을 맞잡아 깍지를 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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