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9)
  • 6. 매듭

    최고 경영자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가지의 의사 결정을 도맡는다. 회사를 이루는 모든 부서에 그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란 없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할 때까지, 심지어는 퇴근하고 나서까지 결재 서류가 줄을 잇는 까닭이 그것이다. 그런 이유로 주완에게는 24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최고의 효율을 지향했다. 대표실에 들어와 책상에 앉는 순간부터 그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판단하고 움직였다. 과거에 종종 체력적으로 힘이 부쳐 한계에 도달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꾸준한 운동으로 극복해 냈다.

    주완에게 있어 일할 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경험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는 옆에 놓은 휴대 전화가 신경 쓰였고, 집에서는 선물이 담긴 쇼핑백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면 그만일 텐데 막상 손이 떨어지지 않아 그마저도 포기했다.

    연락이 끊긴 지도 일주일 차였다. 의외의 순간에도 자존심을 곧잘 꺾어 왔던 준희였지만, 이번에는 유독 길게 고집을 부렸다. 주완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는 준희를 위해 준비했던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주완 님, 결재 서류 온라인 확인 부탁드립니다.」

    비서 도일이 전에 없이 사내 메신저로 독촉 메시지를 보냈다. 주완은 손에 쥐었던 상자를 툭 내려놓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밀려 있는 결재 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미간을 약간 좁힌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꾸만 흔들리고 감정에 휘말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 준희의 기분을 맞춰 주기는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손쉽게 혀 위로 올려 사탕발림하는 꽃밭 같은 역할극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끝내면 될 일 아닌가? 평소 같으면 이토록 고민하기도 전에 푸르게 벼려진 이성의 날이 관계의 끈을 매몰차게 끊어 냈겠지만, 이번만큼은 전과 달랐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차별점이 주완을 괴롭게 만들었다.

    「주완 님.」

    언급한 결재가 급한 건이었는지, 도일이 연거푸 사내 메신저를 통해 주완을 불렀다. 주완은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정신을 차리고 곧 확인하고 결재하겠노라 대답을 하려던 참이었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부모님이신데.」

    「어떻게 할까요?」

    다소 당황한 듯한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것을 느끼며 주완이 짧게 한숨 쉬었다.

    「들여보내세요.」

    오래 시간을 끌어 봐야 역효과임을, 오랜 단련을 통해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빠르게 회유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차악의 해결 방식이었다.

    대표실의 문이 열리자 한눈에 보기에도 고지식해 보이는 중년 부부가 들어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지만, 특별한 것을 퍽 평범해 보이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주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그들을 안내했다.

    초등학교 교사와 공기업 직원. 평범하게 살아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직업이었지만, 그렇다는 점이 두 사람의 평생을 갉아먹기도 했다. 평범한 수준을 벗어날 수 없겠다는 실망감에서 비롯된 열등감과 열패감이 두 사람을 똘똘 뭉치게 했을 무렵 주완이 태어났다. 지극히 평범한 베타 집안에 우성 알파로 태어난 주완에게 신분 상승에 대한 비틀린 열망이 쏟아진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요즘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되는 거니, 응?”

    어머니는 앉자마자 불만을 쏟아 냈다.

    “집에는 한 번을 안 오고 말이다.”

    “우리가 네 연애 사실을 기사로 봐야겠냐? 동료 교사들에게 내 체면이 뭐가 되니.”

    아버지는 아들의 직장까지 찾아와 얼굴을 보자마자 안부가 아닌 잔소리부터 늘어놓은 주제에 체면을 운운했다. 주완은 언제나처럼 화를 삼키며 건조한 표정을 유지했다.

    “네 나이도 있고, 적당히 연애할 때는 아니잖니. 결혼 얘긴 없는 거야?”

    어머니는 걱정하는 척 슬쩍 운을 띄웠다. 주완은 놀랍지 않았다. 분명한 목적 없이 회사를 찾을 인물들이 못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원래부터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주 어렸을 적에 일찍이 깨달았다.

    그들의 잔소리는 표면적으로 걱정을 담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본연의 욕망에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아들을 빌미로 상층의 공기를 누려 보겠다는 야욕이었다. 아들과 같은 대열에 서서 주변의 평범한 동료들을 내려다보고 짓밟고 이죽거리고 싶은 것이다.

    “장성한 아들을 데려가 놓고 양심도 없지. 네가 어른들끼리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해라.”

    주완은 부모의 태도에 이골이 난 지 오래였다. 상대가 평범한 집안의 자제였다면 쌍수를 들고 반대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빤히 그려지는 장면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준희는 또 다른 신분 산승을 위한 동아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주완은 준희를 먹잇감으로 던져 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진지하게 만나는 사이 아닙니다.”

    “너는 그 나이 먹고, 교제가 장난이니? 응?”

    “답답한 녀석.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어머니는 목뒤를 잡았고 아버지는 혀를 찼다. 주완은 무표정의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제를 모르고.”

    아버지가 기어이 선을 넘었지만 주완은 화를 억눌렀다. 도발에 넘어가 보았자 소란만 일으키게 될 뿐이다. 오래간 부딪히고 깨어지고 원망하며 주완은 깨달았다.

    “일이 바쁘니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면 뭐 하니. 사람이 먼저 되어야지.”

    어머니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했다. 주완은 쓴웃음을 띠며 먼저 자리를 털었다. 어느 정도 속이 풀리도록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어 주었으니, 몇 차례 욕지거리나 하다가 분에 못 이겨 대표실을 떠나게 될 것이다.

    예상 시나리오는 적중했다. 싫은 소리를 번갈아 가며 토해 내던 두 사람은 주완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얻어 내지 못하자 금세 전의를 상실했다.

    “하여간 똑바로 해라. 알았니?”

    그들은 영양가 없이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털었다. 한울 그룹 회장 손자인 강준희를 놓칠까, 유일한 신분 상승의 동아줄인 아들이 손아귀에서 멀어질까 조바심은 나지만, 그나마의 돈줄이기도 한 그가 수틀리면 대단히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그 속내가 보이지 않으니 가시 돋힌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했다. 때마다 불어닥치는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번뇌했다.

    “생활비는 내일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고얀 녀석.”

    한때는 전부이자 우상이었던 부모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주완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저를 자식으로서 보듬은 적 없는 부모였다. 그런 자들에게 일생을 휘둘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의 돌변한 태도에 부모는 당황해했고 불안해했으며 역정을 내기도 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표실의 문이 여닫히고 중년 부부의 모습이 사라졌다. 주완은 길게 숨을 골라 내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가득 찬 불쾌감을 걷어 내기 위함이었다. 두통이 몰려오는 듯했다.

    잠시 감정을 가라앉힌 주완은 책상 앞에 앉았다. 시선이 모니터에 이르기 전에 그 옆에 놓인 선물 상자에 가서 꽂혔다. 상자 속에는 준희가 선물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가죽끈의 색상만 다를 뿐인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선물한다면 좋아하겠지, 그 밝아지는 표정을 확인하고자 준비한 것이었다. 예정대로였으면 파티가 있었던 그날 밤에 건넸겠지만…….

    -나는 하고 싶어요, 결혼.

    생각할 것이 많은 그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는 환상에 가까웠다.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꿈꿔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상대를 벗겨 먹을 것이 뻔한 속물 부모 아래 자란다면 누구나 그렇게 될 것이다.

    주완은 쓴웃음 지으며 선물 상자를 책상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굳게 닫힌 서랍을 오래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감정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지나간 32년은 그를 지독하게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너나 가.”

    “제가 가면 도련님은 어쩌시려고요.”

    어두운 조명 아래 와인 바, 동그란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은 지율이 걱정스런 기색으로 말했다. 준희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 전화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되도록 주완에게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같은 걸로 한 병 더 시켜 줘.”

    준희가 빈 와인 병을 흔들며 말했다. 지율은 종업원을 불러 준희가 들고 있는 와인을 추가 주문했다. 준희는 와인 병을 손에 든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먼저 연락해 보려고 했다. 그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 여태 그랬던 것처럼 꼬리를 내리고 그의 품에 달려가 안기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억울한 마음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주완과 분명히 연애 중이었다. 계약으로 묶여 있던 초창기와는 달리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였다. 그런 사이라고 함은, 아무리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을 공유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상호 협조적으로 맞춰 가는 관계가 아닌가.

    “……어떻게 연락 한 통이 없냐. 한 통이.”

    “그냥 먼저 연락하시는 게 어때요?”

    “내가 왜.”

    “아쉬운 쪽이 연락해야지 어쩌겠어요.”

    “왜 늘 나만! 나만 이렇게 아쉬워야 하나고!”

    “인생이 다 그런 거죠. 완벽하게 수평적인 관계가 어디 있겠어요. 그동안 상대 쪽에서 아쉬워 죽는 연애는 잘만 해 오셨잖아요.”

    준희는 도끼눈을 뜨고 지율을 노려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주변 남자들 모두 맞는 말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것만 같았다. 지율이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새 와인이 서빙됐다. 준희는 다시 채워진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냥 내 편 들어.”

    “무조건 네 편 들기가 제 업무면 그렇게 하고요.”

    “너도 짜증 나. 가 버려, 그냥.”

    “도련님 무사히 집에 모시기가 제 업무라서요.”

    지율은 한 마디를 지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준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려 잔에 담긴 와인을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빠르고 과하게 달리고 있었다. 지율은 멜론과 하몽이 담긴 접시를 슬쩍 밀어 주었다. 준희는 모르는 척하며 와인 병으로 손을 뻗었다. 앞을 더듬으며 나아가던 손이 허공을 움켰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연거푸 허공을 허우적거린 끝에야 병이 손에 잡혔다.

    “아…….”

    그렇지만 손쉽게 미끄러져서 테이블 아래로 툭 떨어진 병이 바닥을 굴렀다. 흘러나온 와인이 붉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지율은 급하게 일어나 종업원을 불렀다.

    “도련님, 괜찮아요?”

    “말이 돼?”

    “예?”

    “나……, 나 심지어 억제제도 먹었다고!”

    억울한 마음에 언성이 절로 높아졌다. 지율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이 없는지 살폈다.

    그러나 준희에게는 지금 남들의 시선이라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태껏 히트사이클이 돌아올 때마다 준희는 주완과 관계를 맺었고, 그 전에는 그를 지나간 수많은 전 남자 친구들과 발작적인 성욕을 해갈해 왔다. 그러니 억제제를 복용할 틈이 없었다. 히트사이클이 오면 오는 대로 본능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끓는 욕망을 현대 의학으로 억눌러야 하다니……. 그의 인생에 있어 무척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씨발.”

    “일단 자중해 보세요. 네?”

    지율은 황급히 준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더 불만을 발설할 것처럼 입을 오물거렸지만, 이번에는 취기가 그의 입을 막았다.

    쾅. 준희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았다.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염없이 되짚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뜨겁고 달큼한 숨을 내뱉고 나자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준희는 백기를 들었다.

    「도대체 언제 연락할 거예요?」

    집에서 홀로 맥주 세 캔을 비운 뒤의 일이었다. 알코올이 알딸딸하게 정신을 지배한 상태에서, 준희는 오타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저 차단했어요? 아니라면 점이라도 찍어서 보내 보세요.」

    부아가 치밀어 한 통의 메시지를 더 보내자 그제야 답변이 도착했다.

    「오래 참는다 했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빈 캔을 콱 우그러뜨리며 준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를 다시 만나기 전에 알코올 중독자가 될 지경이었다. 들고 있던 캔을 바닥에 내팽개친 준희는 몇 차례 손가락을 헛디디는 과정을 거쳐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 음은 지독히도 오래 이어졌다. 준희는 눈썹을 흘끗 올렸다. 밤 열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회사에 있을 리 없었고, 그다지 바쁠 시간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주완은 기어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준희는 휴대 전화를 두 손으로 다시 잡고는 전투적으로 엄지손가락을 놀렸다.

    「전화 받아 주세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읽음 확인은 빠르게 떴다. 전화를 받을 수 있으면서 부러 받지 않은 것이다. 정수리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는 짜증을 내거나 욕을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직 생각 끝났다고는 안 했는데.」

    답변을 받은 준희는 그대로 휴대 전화를 툭 떨어트렸다. 콰직. 바닥에 곤두박질친 휴대 전화에서 무엇 하나 깨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숨을 삼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지고 들어가려고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그는 혹시라도 저를 잃게 될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들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준희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액정 모서리에 실금이 그어져 있었지만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 그는 빠르게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생각하시는 동안 저라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줄 아세요?」

    「뭘 어쩌려고.」

    주완의 답은 여전히 덤덤했다. 준희는 머리를 굴렸다. 이성과 다르게 감성은 이미 그를 도발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방탕하게 놀 거예요.」

    「얌전히 있어요.」

    「싫어요.」

    순순히 사과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준희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부드러운 침구 위로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연거푸 뱉어 냈다.

    그러다가 바싹 고개를 들었다. 바투 쥔 두 손안에는 이불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얌전히 기다리는 것으로 그의 용서를 구할 수 없다면 눈길을 끌 수 있는 다른 방법이야 많았다. 기실 준희는 후자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장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끊기기가 무섭게 비트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울려 퍼졌다.

    [뭐야? 이 시간에 통화하는 건 너무 간만인데?]

    “너 어디야?”

    [어디겠냐?]

    취기 오른 목소리로 대답하는 사람은 문휘영이었다. 준희 못지않게 노는 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며, 넘쳐 나는 감성을 알코올에 흘려보내는 것이 익숙한 친구였다.

    “나 지금 갈게. 주소 찍어.”

    [뭐? 알았어.]

    황당하다는 듯한 대답에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전화는 끊겼다. 소음이 사라지니 방 안이 고요하고 공허해졌다. 준희는 까맣게 죽은 휴대 전화 화면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주완에게서도 더 이상 메시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준희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주완과 만날 때 잘 입지 않던 캐주얼한 옷들을 이리저리 고르다가 거울에 비친 저와 눈이 마주쳤다. 자기 직전이라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맥주 세 캔에 발그레해진 두 뺨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두운 색의 후드 티셔츠를 꺼내 입은 다음 모자를 깊게 뒤집어썼다.

    ***

    “설마 차주완 대표랑 헤어졌어?”

    휘영은 근처 분위기가 좋은 펍에서 제 무리들을 불러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준희도 이따금씩 어울려 놀아 낯이 익은 녀석들도 몇 보였다. 준희는 휘영의 옆에 느슨히 앉아 한숨 쉬었다.

    “안 헤어졌어.”

    “웬일로 마음잡고 발 끊었다 했더니.”

    “나도 맥주 한 잔 줘.”

    “결혼까지 할 거라며?”

    “할 거야!”

    바싹 약이 올라 대답하니 휘영이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무리 중 하나가 종업원 대신 생맥주를 내어 주며 눈을 찡긋거렸다. 준희는 날쌔게 잔을 가로채 몇 모금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켰다. 주변에서 “오오.” 놀라는 소리를 냈다.

    그는 어디에 가나 주목을 끄는 타입이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나둘씩 인사했다. 준희는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더더욱 깊게 눌러쓰곤 입을 비죽거렸다.

    “그 사람이랑 만나고부터 술자리 싹 끊었길래 되게 간섭하는 타입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쿨한 편?”

    “…….”

    “하긴. 그렇지 않고서 너를 만나기가 쉽지는 않지.”

    “씨발. 내가 뭐.”

    “모르긴 몰라도 얌전한 고양이는 아니시잖아요. 너도 인정하잖아?”

    부아가 치밀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너희는 안 어울려.’,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속단하곤 했다. 위축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겹기는 했다. 니들이 뭘 아는데. 언성을 높여 퍼부어 주고 싶기도 했다.

    당장은 수틀릴 수도 있겠지. 서로 다른 점들도 분명히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준희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후드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연락 한 통 없이 조용한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두고 봐. 끝을 보고 말 테니까.”

    준희는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주변 소음에 제대로 듣지 못한 휘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준희는 고개를 대충 젓고는 맥주를 마저 비웠다.

    지금의 삐걱거리는 현재는 후일 돌이켜 보았을 때 과정이라고 명명될 것이다. 기어이 끝나 버릴 관계라면 지독하게 발목을 잡고 늘어져 평생 못 잊게 만들어 주기라도 할 테다. 준희에게는 보기보다 집요하고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찰칵. 그때 누군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휘영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누가 사진 찍어. 얘가 연예인이야? 안 지워?”

    “……미안. 아니, 오랜만이잖아. 신기해서 그랬지. SNS에 올리면 안 되냐?”

    “장난해?”

    휘영이 날카롭게 반응하자 준희가 그의 소매를 당겨 막은 다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가 흠칫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올려. 나 태그 걸어서.”

    “그래도 돼?”

    “어, 마음껏 올려. 괜찮으니까.”

    준희는 비죽 웃었다. 그래, 기왕이면 멀리 소문내 주었으면 했다. 그가 밤마다 다른 남자들과 엉켜 술을 마시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에 헛소문까지 붙어 주완의 귀에까지 들어가 주었으면 했다. 그러면 신경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화를 내고 싶어서라도 연락하겠지. 술김인지 홧김인지. 판단력이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준희의 허락에 눈치를 보고 쭈뼛거리던 사람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거나 준희의 계정을 태그 걸어 피드를 올렸다. 그의 SNS라고 해 보았자 잘 쓰지 않을뿐더러 가끔 무명작가들의 작품이나 업로드하곤 했지만, 소문을 퍼뜨리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너 혹시 일부러 그래?”

    휘영이 눈치를 채고 슬쩍 물었다. 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휘영이 석연찮은 눈빛을 보내는 동안 준희의 앞에는 맥주가 가득 채워진 새 잔이 놓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당분간은 이 의도적 자유를 마음껏 누려 볼 요량이었다.

    그는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식도를 통해 들어가는 차디찬 식감이 그의 온 감각을 살아나게 만드는 듯했다.

    ***

    그렇지만 이틀이 되고, 닷새가 되고, 일주일이 되도록 주완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휴대 전화를 확인한 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는 연락은 오질 않고 영양가 없는 연락만 한가득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가까스로 오전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벽에 귀가해 늦게 일어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강욱진 회장도 한 소리를 하려고 벼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정신이 깨어나니 속이 쓰렸다. 준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주일간의 비행은 틀림없이 주완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니 하여간 지독한 남자였다. 꿀물이라도 타 마시려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지잉, 지이잉-. 휴대 전화 진동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떨리는 마음으로 화면을 확인해 보았지만 상대는 주완이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던 끝에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휴대 전화 너머의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받네?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누구야?”

    [나야, 이기석.]

    소개를 듣자마자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고 삐딱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파티에서 그 사달을 일으키고 무슨 억하심정이 남아 있어서 전화까지 걸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준희는 휴대 전화를 가까이 하고 경계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왜 전화했는데?”

    [그야 그때 일 사과도 할 겸 사실 확인도 할 겸. 겸사겸사?]

    “무슨 확인?”

    [너 진짜 헤어졌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짜증스럽게 중얼거리자, 휴대 전화 너머에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나사가 반쯤 풀린 놈이 분명했다. 상대하는 시간도 아까워 전화를 끊으려던 차였다.

    [그러게 누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래. 헛소문 돌게.]

    “그 헛소문 퍼뜨린 거 너 아니고?”

    [티 났나?]

    “처맞고 싶지 않으면 작작해. 네 헛짓거리 상대 되어 줄 생각 없으니까.”

    [아닐 텐데.]

    기석은 여유롭게 반박했다. 거기에서 전화를 끊었어야 했는데. 준희는 눈썹을 들어 올린 상태로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던 시점이.

    [헤어진 거 아니면, 너 하는 꼬라지가 딱 그거잖아. 나 봐 주세요.]

    “…….”

    [차주완 시선 끌려고. 안 그래?]

    떠보는 듯한 목소리에 비실비실 새는 웃음소리가 섞였다. 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싸구려 떡밥 던진다고 대어가 물려?]

    침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기석이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그리고 제안했다.

    [나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잖아. 내가 제대로 도발해 준다니까?]

    “네까짓 거 도움 없어도 상관없어.”

    아주 잠시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도발에도 선이 있었다. 기석의 의도대로 휘둘렸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고 말 터였다. 준희는 짓씹듯 대답했다. 그러자 휴대 전화 너머에서 “허.” 하고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제 유혹이 먹히지 않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 혹시 내가 말 안 했나. 지금 내 옆에 문휘영 있는데.]

    “뭐? 걔가 왜…….”

    [조금 많이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이기석 정도 되는 새끼가 사교장에서의 수모를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어쩐지 잠잠하다 싶던 차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 어울리면서 휘영에게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해 애써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와, 준희야. 너는 나 못 당해.]

    전화했을 때부터 어떻게든 불러내기 위한 계책을 최소 다섯 가지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덧 낮게 깔린 목소리가 더없이 음습하게 느껴졌다. 준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씨발, 너 어딘데.”

    그러자 조용하던 휴대 전화 너머에서 다시금 낄낄거리는 불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기석이 그를 불러낸 곳은 모 호텔의 파티 룸이었다. 5성급의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호텔이었지만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방문한 적 없는 호텔이었다.

    파티 룸으로 향하는 복도는 조용했다. 그러나 기석이 메시지로 보낸 호실에 가까워질수록 왁자지껄한 소음이 그곳으로부터 조금씩 흘러나왔다. 마침내 문 앞에 섰을 때 준희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배어나는 듯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준희는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이기석이라도 정신이 박혀 있다면 한울 그룹 막냇손자인 강준희에게 섣불리 해코지를 하지는 못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준희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목표한 대로 휘영만 챙겨서 서둘러 이곳을 뜰 생각이었다. 지율은 그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뒤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가 나오지 않는다 싶으면 지율이 올라와 수습해 줄 것이다. 준희는 막연한 불안을 가라앉히고 문을 두드렸다.

    “어,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캐한 연기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클럽처럼 낮고 시끄러운 비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낄낄거리던 몇몇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파티 룸은 복층으로 되어 있고, 발코니에 풀장까지 마련되어 있는 구조였다. 메인 룸은 복층 높이까지 뚫린 채 천장에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기석은 그 아래 위치한 긴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눕히고 있었다. 눈이 반쯤 풀린 상태였다.

    “문휘영 어디 있어?”

    준희는 그의 앞까지 걸어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러자 기석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킬킬거렸다.

    “아, 문휘영? 걔 여기에 없는데?”

    “……뭐?”

    “하여간 인생이 만만하지, 준희야. 너는 여기까지 오면서 네 친구한테 전화 한 통 안 걸어 봤어?”

    “…….”

    낭패였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기석을 마주 보며 준희는 생각했다. 넘어간 것이 우스울 정도로 얄팍한 수였다. 그는 그저 되는대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얼이 빠져 있는 사이 기석이 덧붙였다.

    “네가 멍청한 덕에 나는 수고를 덜었지만 말이야.”

    그는 목을 양옆으로 뚝뚝 꺾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이채가 서려 있었다. 준희는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보이지 않으려 숨을 골랐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지. 이까짓 싸구려 파티에…….”

    턱을 치켜들고 고고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툭. 누군가가 뒤에 와서 의도적으로 어깨를 건드렸다. 준희는 기민하게 반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를 건드린 사람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승훈?”

    그는 주완을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전 남자 친구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주완에게 단단히 깨졌던 이후 연락조차 오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유흥을 즐긴다는 것 외에는 기석과 연결 고리가 없었을 텐데……. 준희는 당황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당황한 사이 기석은 테이블 위 얼음 바스켓에 들어 있는 와인 병을 꺼내 바스켓 안에 와인을 전부 쏟았다. 얼음이 가득 찬 바스켓 안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바스켓의 윗부분을 들어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준희의 위로 얼음과 와인을 동시에 쏟아 버렸다.

    “아악……!”

    파티 룸을 채우고 있던 음악은 어느덧 멈춰 있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던 남자들의 시선이 기석과 준희가 있는 중앙으로 향했다.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차디찬 감각이 정수리를 때리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가 딛고 선 바닥에 붉은 물웅덩이가 고였다. 준희는 고개를 바싹 쳐들고 기석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미친 새끼가!”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 서 있던 승훈에게 양팔이 잡혀 기석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준희는 붙들린 채 몸부림쳤지만 승훈의 완력을 당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피식피식 웃으며 준희에게 다가온 기석이 그의 턱을 붙잡았다.

    “너 진짜 미쳤어?”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울 그룹 도련님을 건드리겠어.”

    “허.”

    “그런데 말이야. 너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너 같으면 다물겠냐? 이거 안 놔?”

    준희는 끝없이 반항하며 몸을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승훈은 그를 강하게 압박했다. 기석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담배를 들어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였다가 뱉어 낸 연기가 와인으로 젖은 준희의 얼굴 위로 번졌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연기의 냄새는 담배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준희는 코끝을 찌르는 역하고 습한 냄새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대마초였다.

    “나도 이 방법까지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나 차주완이나 적당히 거슬려야 말이지. 씨발. 그날 그 새끼가 나한테 어떤 치욕을 줬는지, 네가 알아?”

    준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기석은 누군가를 향해 턱짓했다. 주방 쪽에 모여 있던 무리 중 하나가 이쪽으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손에는 투명한 액체가 든 얇은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그래서 갚아 줘야겠더라고. 내 방식으로 말이야.”

    안 봐도 훤했다. 파티 룸에서 합법적이고 건전한 파티만 즐겼을 리가 없었다. 대마초도 대마초였거니와 각종 마약을 공수해 암암리에 즐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마약을 주사할 생각인 거였다. 공범을 만들어 오늘 일을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기석은 주머니에서 폴딩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부욱-. 처참한 소리와 함께 입고 있던 티셔츠가 찢겨 나갔다. 한편으로는 겁이 났지만 준희는 여전히 형형한 눈동자로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히어로가 도착하기 전에 히로인을 적당히 짓밟아 놓는 게 악당의 도리겠지?”

    소매를 나이프로 당겨 찢으며 기석이 기분 나쁘게 비죽 웃었다. 나이프를 던지자마자 이번에는 주사기가 손에 들렸다. 뒤에서 붙들고 있던 승훈이 이번에는 팔뚝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하게 결박했다.

    주사 바늘이 피부 가까이에 다가왔을 때였다. 준희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승훈의 팔뚝이라도 깨물어 보려고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 입구 쪽으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기석이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준희 역시 소란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지금부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권리가…….”

    덩치가 꽤 있는 형사들 여럿이 들이닥쳐 파티 룸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기석 또한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들고 있던 주사기를 바닥으로 떨어트려 멀리 차 버렸다. 준희는 승훈의 팔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팔꿈치로 그의 배를 가격했다.

    “아악! 이 새끼가!”

    입구를 향해 냅다 뛰었지만 기석이 반사적으로 머리채를 휘어잡는 바람에 몇 걸음 도망치지 못한 채 소파 위로 고개를 박아야만 했다. 무언가 깨지고 아웅다웅하는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던 손길이 휙 거둬졌다.

    온몸이 전부 뻐근했다. 뺨은 어느덧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준희는 겨우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강준희 씨, 괜찮습니까?”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너무도 보고 싶었던 얼굴이 그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완은 딱 떨어지는 정장 차림으로 기석의 팔을 꺾어 제압하며 준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주완은 인상을 약간 찡그린 채 가까이 다가온 형사에게 기석을 넘겼다. 그는 준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 몸을 일으켜 주었다. 준희는 그의 얼굴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시울이 온통 뜨거웠다. 눌러 참았던 설움이 넘쳐흐르는 탓에 끅끅 넘치는 울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 준희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새것처럼 빳빳하던 옷깃이 속절없이 구겨졌다.

    “왜……, 흡. 왜 이제야 왔어요?”

    대답하지 않고 준희의 몸을 살펴보던 주완이 재킷을 벗어 그의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나이프로 난도질당한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뒤였다. 주완은 짧게 한숨 쉰 다음 어디론가로 몸을 옮겼다. 준희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그의 행적을 쫓았다.

    주완이 향한 곳은 기석이 있는 곳이었다. 수갑이 채워진 채 벽에 주저앉아 있는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주완은 구둣발로 망설임 없이 그의 턱께를 걷어찼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기석의 몸이 바닥으로 스르르 기울었다. 형사들은 현행범을 체포하느라 그쪽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듯했다.

    준희는 소파 위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돌아온 주완이 그의 허리와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흡, 흐윽……, 여기는 어떻게 알고…….”

    “씨발, 입 다물어.”

    “…….”

    “화가 나서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니까, 제발.”

    평소 서늘하던 그의 깊은 눈매는 확연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준희는 눈치껏 입을 꾹 다물었고, 주완은 그대로 현장을 벗어났다.

    ***

    준희를 데리고 주완이 향한 곳은 펜트하우스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준희는 못내 파티 룸의 상황이 신경 쓰였다.

    이기석 무리가 범법을 저지르고도 여태껏 법망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겠는가. 섣불리 들쑤시고 싶지 않은 벌집이었기 때문이다. 준희만큼은 아니었어도 기석을 비롯해 그 무리는 전부 줄줄이 재벌가나 정치권에 연결되어 있었다. 건드렸다가는 뒤끝이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검찰 측에서는 총대를 메고 나서 준 주완 덕분에 한바탕 소탕을 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그 화살은 모두 주완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준희는 조수석에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걱정으로 몸을 뒤척였다.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주완은 그를 위해 따뜻한 물을 받아 반신욕을 하게 두고 놀란 속을 달랠 수 있도록 룸서비스로 수프를 준비했다. 그를 위해 움직이는 내내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준희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화를 안 내려고 해도 안 낼 수가 없네.”

    반신욕을 마치고 가운을 입고 나와 수프를 반쯤 비운 준희를 맞은편에 앉혀 놓은 주완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성마른 어투로 말했다. 욕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은 눈치였다. 공연히 주눅이 들어 준희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강준희,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지?”

    “…….”

    “거기가 어디인 줄 알고 네 발로 걸어 들어가?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게 맞습니까? 아, 이기석 옆에 붙어 있으면 내가 관심을 좀 가져 줄 줄 알았나? 그래서, 원하는 대로 나를 다시 보게 돼서 기쁜가?”

    “그러려고 간 건 아니에요. 그 전까지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이기석이 있는 곳에 가게 된 건 그 새끼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든. 어떤 미끼를 던졌든. 멍청한 짓을 하기 전에 나를 생각했다면 지금보다는 조심히 행동했겠지.”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허. 주완이 헛웃음을 쳤다. 그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눈으로 준희를 바라보다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이기석 본거지야 그날부터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니가 거기에 제 발로 찾아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중얼거리는 말투에서 허탈함이 묻어났다. 준희는 눈을 내려 시선을 피하면서도 한 자락 남은 저항심으로 물었다.

    “왜 여태 연락 안 하셨어요?”

    기어이 그곳에 이르도록 왜 한 번이라도 먼저 연락해 주지 않았는지. 정말로 보고 싶었던 건 저 혼자였던 건지. 준희는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질문을 던졌다.

    미동 없는 시선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완이 입술을 뗐다.

    “너 하는 꼴 보려고.”

    “…….”

    “신뢰를 무너뜨리는 거짓말도 싫지만 그보다도 근본적으로 혐오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 내 손에 움켜쥔 것들이 통제되지 않는 것.”

    목소리는 한겨울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냉랭했다. 준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딱딱하고 건조한 눈빛이 여느 때보다도 깊어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혼잣말하듯이 말을 이었다.

    “내 성향이 얼마나 깊은 바닥으로부터 기인한 건지 언제쯤 알아줄까, 네가.”

    그의 눈은 공허해 보이기도, 한편으로는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준희는 숨을 삼켰다.

    “너는 여전히 내가 우습지.”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

    “안 봐 주니까……. 연락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주…….”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변명처럼 늘어놓던 말들이 짧은 반박에 가로막혔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마치 고문 같았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슬러 봐야 무덤을 파는 짓인 듯했다. 주완은 책망하듯 말을 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거였지 ‘헤어지자’는 뜻이 아니었지 않나? 아니면, 나만 그렇게 받아들이고 머리 터지게 고민한 건가.”

    “…….”

    “내가 얼마나 치열했을지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지.”

    “치열…… 하셨다고요?”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단어였다. 이 연애에 치열한 것은 오직 저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그의 반응을 관찰하던 주완이 헛웃음을 지었다.

    “여태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반쯤은요.”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연애하는 비효율적인 짓을 굳이 왜 하겠습니까?”

    심장이 별안간 바닥까지 내려앉는 듯했다. 스스로의 감정에 빠져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주완도 어쩌면 그를, 많이 사랑하고 인내하고 있으리라는 것.

    “강준희 씨. 나는 통제되지 않는 것, 대충 둘러대는 것, 감정적인 것, 제멋대로인 것들은 딱 질색인 사람입니다.”

    “…….”

    “내가 말한 것들의 결집체가 뭐인 것 같아요? 감이 안 오나?”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주완이 싫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던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지만,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강행해 온 행동들은 정확히 그를 목표하던 바의 반대 지점으로 이르게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준에, 철없이 이어 온 연애사에 맞추어 판단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어쩌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순조롭게 해결될 문제였다. 준희는 그간의 실책으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본인이라는 생각이 안 듭니까?”

    “그게…….”

    “그런데도 진작에 너를 끊어 내지 못한 내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데. 강준희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아?”

    그는 허탈한 듯 픽 웃었지만 그다지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준희는 그의 웃음 뒤에 묻어나는 싸늘함을 인지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틀어진 노선을 바로잡을 기회는 오직 지금뿐일지도 몰랐다. 준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완은 그의 행동을 무미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핵심은 그를 향하는 주완의 마음이었다. 주완이 그에게 부족했듯, 주완에게도 그가 부족했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켜켜이 쌓여 온 헛된 고집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준희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이게 강준희 씨 답인가?”

    그가 서늘하게 물었다. 준희는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바닥 위에 제 뺨을 묻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나여도 괜찮을지. 당신이 견딜 수 있을지.”

    “견딜 수 있어요. 이미 결론을 내린 지 오래됐어요.”

    준희가 가져가는 대로 두었던 손에 힘이 들어왔다. 그는 준희의 턱을 잡아 고개를 약간 더 들게 만들었다. 검고 깊은 오만한 시선이, 아래를 곧게 내려다보았다.

    “너는 내 앞에 무릎 꿇지 말았어야 했어.”

    “…….”

    “나는 너를 사랑해서 울게 만들고 싶은 사람이야, 준희야.”

    그는 손을 거두어 갔다. 뺨을 물들이던 온기가 사라지자 마음까지 공허해져 버린 듯했다. 의자를 뒤로 빼고 느슨하게 앉은 주완이 발을 들어 무릎 꿇고 있는 준희의 어깨를 밀었다. 몸이 뒤로 밀려 나동그라지면서도 준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뭘 원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니 행동은 쉬웠다. 준희는 몸을 일으켜 납작하게 엎드리곤 그의 앞까지 기어갔다. 손아귀에 쥐고 마음껏 흔들 수 있도록, 완벽한 굴종을 바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준희는 그의 아래로 기어들어 가 마음껏 사랑받고 싶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자 다시 한번 어깨가 뒤로 밀렸다. 뒤로 나동그라지기가 무섭게 준희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기어갔다. 세 번, 네 번, 같은 행동이 이어졌다. 반복되는 움직임에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대리석 바닥 위에 짓이겨진 무릎은 붉게 물들었다.

    “준희야.”

    “네. 네, 주완 씨.”

    “어쩌려고 이래.”

    한숨을 담은 그의 목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준희는 그의 무릎에 매달려 뺨을 비비다가 붉어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랑해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

    마침내 몸을 일으킨 주완은 준희를 침실로 끌고 들어갔다. 가운의 끈은 그의 손길에 의해 속절없이 풀려 나갔고 가운도 마찬가지였다. 알몸이 되어 침대 위에 올라간 준희의 손에 젤이 쥐여졌다.

    “풀어.”

    무슨 뜻인지는 금세 알아들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준희는 쭈뼛거리며 뒤로 돌아 무릎을 세우고 상체를 이불 가까이 붙였다. 높게 들어진 엉덩이가 주완을 향하도록 하고는 그가 들려 준 젤을 손바닥에 담아 엉덩이 사이를 더듬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

    손가락이 더디게 구멍 안을 드나들며 길을 넓혔다. 스스로 아래를 넓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감상하고 있을 주완을 생각하자 수치심이 몰려왔지만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가 끙끙거리는 동안 그걸 무심히 지켜보던 주완은 잠시 자리를 떠났다.

    2층에 다녀오기 위함일 것이다. 그가 오기 전까지 구멍을 최대한 풀어 두어야 고생하지 않을 것이다. 준희는 손가락을 늘려 가며 안을 들쑤셨다. 뒤로는 자위를 한 경험이 잘 없는 데다가 마음이 조급해 손길이 더디고 투박해졌다.

    “제대로 안 하지.”

    “하고 있……, 아, 으…….”

    이불 위에 뺨을 댄 채 손목을 흔들어 대는 준희의 앞으로 부드러운 천이 드리워졌다. 눈을 깜빡이기가 무섭게 가늘고 기다란 천이 시야를 가렸다. 머리를 한 바퀴 두른 천은 뒤통수에서 비로소 단단히 묶였다. 안대가 씌워진 격이었다.

    어리둥절한 마음에 손을 멈추고 고개를 움직이자 이번에는 머리채가 잡혔다.

    “아……!”

    구멍을 넓히던 행위는 자연히 중단되었다. 주완의 거센 손아귀에 잡힌 준희의 몸이 침대 위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아래는 다 풀었나 보네.”

    “아니, 그……. 읏.”

    다음은 손목이었다. 로프에 의해 단단히 묶인 손목이 머리 위로 들어 올려졌다. 로프의 끝은 침대 헤드에 연결되어, 준희가 손목을 들어 올린 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되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였지만 손이 위로 들려 있어 어깨가 슬슬 뻐근했다.

    “다리 벌려.”

    “……네.”

    그의 명령대로 무릎을 넓게 벌렸다. 이쪽을 향하고 있을 주완에게 회음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주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의 허리 아래로 베개를 밀어 넣었다.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엉덩이가 위쪽으로 가감 없이 드러나 보이는 자세였다.

    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를 주완의 손바닥이 거칠게 때리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무릎을 좁히자 더 거센 손찌검이 이어졌다.

    “읏, 흐으.”

    가까스로 무릎의 간격을 더 넓게 벌려 놓자, 그제야 손찌검이 멎었다. 준희는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

    이어 차가운 무언가가 엉덩이 사이로 툭 건드려졌다. 딱딱한 모양의 전동 딜도였다. 주완은 자극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구멍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 안으로 딜도를 쑤셔 넣었다. 그의 것보다는 작은 크기였지만 그래도 꽤나 부피감이 있는 물건인지라, 허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읏, 흐……, 너무 딱딱해요. 차가워…….”

    “징징거리기는.”

    주완은 그렇게 타박하며 딜도를 안쪽 깊은 곳까지 단번에 박아 넣었다.

    “히윽.”

    갑작스럽게 안을 가득 채우는 이물감이 온몸을 저릿하게 물들였다. 제대로 풀어 놓지 않은 탓에 통각이 아래를 지배했다. 엉덩이에 자연히 힘이 들어가 골이 패일 정도였다. 그러나 자꾸만 빠져나오려는 것을 주완은 계속해서 푹푹 안으로 찔러 넣었다.

    “아흑, 흣, 으응…….”

    딜도는 전립선을 건드리지 못한 채 애먼 곳만 자극했다. 준희로서는 더욱이 죽을 맛이었다. 허공에 들어 올려진 다리가 애처롭게 달달 떨렸다. 주완은 딜도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오지 않을 때까지 끈질기게 안으로 쑤셔 넣었다.

    “잘 물고 있어.”

    마지막으로 짧게 말한 주완이 딜도의 스위치를 올렸다. 딱딱한 것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안을 들쑤셨다. 준희는 묶여 있는 손에 힘을 주고 로프에 매달리듯 몸을 의지했다.

    “아, 아아……! 흐, 싫……, 흐으, 하…….”

    투박하게 안을 휘젓는 감각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준희의 위에서 몸을 치운 주완은 한 발자국 떨어져 그 모습을 감상했다.

    위이잉-. 준희의 신음 소리와 더불어 딜도가 진동하는 소리만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안대로 가려진 눈가는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딱딱한 기구가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전립선을 스칠 때마다 몸의 곳곳이 따끔하게 자극되는 듯했다. 허공에 들려진 발바닥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아, 흐윽……, 흐, 주완 씨.”

    준희는 애처롭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대한 눈물을 삼키고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애태우는 동안 딜도는 빙글빙글 돌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의 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잘 물고 있으라고 했는데……. 주완의 명령이 생각나 아래에 힘을 꼭 주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더 밀려 나오는 것만 같아 서러워졌다. 그의 말에 온전히 복종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흐, 으응, 으…….”

    결국 반쯤 빠져나와 허공으로 헛돌던 딜도가 침대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비워진 구멍이 빠끔거리며 개폐하는 것이 느껴져 몸이 떨렸다. 딜도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빙빙 돌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잘못, 흐, 잘못했어요. 주완 씨……. 주완 씨, 어디 계세요. 읍, 흐윽.”

    허공에 잘못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묶인 손목을 비틀어 대는 바람에 피부가 따가웠다. 그를 두고 어디로 가 버리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곁에 없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걸로는 만족이 안 되지, 네가.”

    그를 두고 떠난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를 무렵 가까운 곳에서 주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도하는 마음에 몸의 긴장이 일순 풀리며 베개 위로 받쳐졌던 허리가 살짝 흔들렸다. 주완은 딜도의 스위치를 끄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준희는 울먹이며 애원했다.

    “네, 안 되겠어요. 흡……. 주완 씨 거 주세요.”

    “…….”

    그러나 주완은 반응하지 않았다. 준희는 무릎을 벌려 보이지 않는 주완을 향해 제 아래를 내보이며 말했다.

    “주완 씨……. 주완 씨 자지……, 넣어 주세요.”

    “사람 미치게 합니다.”

    짧은 한탄과 함께 안대가 휙 벗겨졌다. 어둠으로 막혀 있던 시야에 빛이 찾아들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간신히 눈앞이 선명해졌을 때, 주완은 옷을 벗은 채 준희의 위로 몸을 겹치고 있었다. 준희는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감았다.

    주완은 손목을 풀어 주지 않은 상태로 제 것을 그의 아래에 맞췄다. 딜도로 충분히 풀려 있는 내벽을 뚫고 마치 몽둥이처럼 커다란 살 기둥이 단번에 끝까지 삽입되었다.

    “흐읏.”

    적응되지 않는 크기였다. 주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허리를 움직여 제 것을 빼냈다가 다시 한번 깊은 곳까지 빠르게 박아 넣었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흐으, 읏……. 흐, 으으응…….”

    허리 짓은 차츰 격렬해졌다. 성기가 전립선을 비비고 지나갈 때마다 준희의 물건 또한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갔다. 그러자 주완이 준희의 성기를 틀어쥔 다음 엄지손가락으로 요도구를 콱 틀어막았다.

    “아! 으, 주완 씨, 놔주세……, 히윽.”

    준희의 것을 통제한 상태로 주완은 허리 짓에 속도를 붙였다. 퍽퍽 살 맞대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온몸이 전율이 가득 차올랐다. 준희는 쏟아지는 오르가슴에 어찌할 바 모르고 새된 신음 소리를 토해 냈다. 뒤가 자극되는 만큼 앞쪽 사정도 급했지만 주완이 틀어막고 있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흐, 아으, 흣. 아, 아아, 아흐으……!”

    “후…….”

    주완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허리를 흔들었다. 안쪽으로 퍽퍽 쳐올릴 때마다 준희의 다리가 주완의 허리를 조금씩 더 조여들었다. 성감을 자극할 때마다 허벅다리가 움찔거렸다.

    커다란 왕복을 반복하던 주완은 차츰 가동 거리를 좁혀 가며 빠르고 잘게 안쪽 성감대를 비벼 대며 자극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열락에 온몸이 예민해지고,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발끝까지 저릿한 감각에 잡아먹혔다.

    “아으, 흐…….”

    내벽을 가차 없이 자극하던 주완은 준희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로프를 풀었다. 동시에 안쪽 깊게 치고 올라오며 사정했다. 준희는 몸을 벌벌 떨며 주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사정한 뒤에도 주완은 일정한 속도로 허리를 크게 돌렸다. 맞닿은 접합부로부터 정액이 찌걱거리며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 차례 사정했음에도 주완의 불씨는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가볍게 허리를 돌리던 주완은 다시금 미간을 좁히며 깊은 곳으로 성기를 찔러 넣었다.

    “하윽.”

    “네가 직접 막아.”

    주완은 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옮겨 주었다. 틀어막혀 있던 요도구 위의 손가락을 치우고 준희의 손으로 직접 성기를 쥐도록 했다. 준희는 한 손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 두 손을 동원해 성기를 쥔 채 요도구를 막았다.

    “으으, 흐으으…….”

    “내일 두 발로 걷고 싶으면 제대로 막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주완은 준희의 양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위로 들어 올렸다. 삽입되어 있던 성기가 약간 빠져나오며 찔꺽찔꺽 새던 정액이 엉덩이를 타고 흘렀다. 주완은 접합부를 똑바로 응시하며 허리를 쳐올렸다.

    “아, 흣!”

    제 성기를 바투 쥔 채 다리는 활짝 벌려져서 오르가슴에 벌벌 떠는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럽고 애처로울 터였다. 그렇지만 본인의 처지에 대해서 상기하기에는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성감이 너무도 컸다.

    주완은 허리를 돌리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강직한 성기가 아래로 내리박히듯 쾅쾅 들어차며 전립선을 마구 짓이겨 댔다. 준희는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고 싶었지만 허리 아래를 베개가 받치고 있는 데다가 주완이 무릎 뒤를 잡고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으, 아으……, 흐으, 흣, 으, 읏, 아……!”

    뒤로 반응하고 자극받을 때마다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성기가 터질 듯 뜨거워졌다. 피가 몰려 맥박조차 퍽퍽 거칠게 뛰노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성기를 비벼 사정하고 싶었지만, 주완의 경고가 생각나 눈물만 뚝뚝 떨어트릴 뿐이었다.

    끝없는 추삽질에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준희는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오르가슴에 고개를 뒤로 꺾으며 “힉, 히윽.” 하는 신음만 연거푸 흘렸다. 평소 낸 적 없는 비음이 뒤엉켜 흘러나온 탓에 목은 반쯤 쉬어 있었다.

    “아, 으응……. 주완 씨, 저 못 참겠……, 흣, 아으으……!”

    성기를 쥔 손을 잘게 떨며 애원했지만 주완은 봐주지 않았다. 도리어 더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내벽을 긁으며 왕복하는 주완의 뜨거운 성기가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어이 요도구를 쥐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흣, 안, 으응, 안 돼……. 아읍.”

    “정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거라고는 없지.”

    “죄송해요……, 으응, 흐…….”

    애액이 힘겹게 귀두 끝을 비집고 흘렀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정액은 걷잡을 수 없었다. 끝끝내 참고 있다가 터져 나온 희뿌연 체액이 뱃가죽 위로 흘렀다.

    “손 치워.”

    “으, 흐으. 아악……!”

    명령대로 두 손을 치우자마자 아직 사정이 끝나지 않은 살 기둥 위로 매서운 손찌검이 떨어졌다. 가볍게 찰싹 때리는 정도였지만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래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준희는 침구를 꽉 틀어쥐며 신음했다.

    짝, 짜악. 손바닥으로 다섯 대쯤 매를 맞은 성기가 힘을 잃고 늘어졌다. 정신을 못 차리고 눈물을 쏟는 사이 주완은 허리를 쾅쾅 쳐올려 두 번째 절정을 맞았다.

    “눈 떠야지, 준희야.”

    “흑, 흐윽…….”

    “나 봐.”

    주완은 두 번이나 그를 받아 내고서 기절하다시피 눈을 감고 있는 준희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렸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주완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림자를 드리운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 이렇게 울면 어떡해.”

    “흐으, 으읍.”

    “더 괴롭히고 싶게.”

    긴장되어 있던 허리가 끊어질 듯 뻐근했다. 준희는 침구를 쥐고 있던 손을 뻗어 그의 뺨 위로 손바닥을 겹쳤다. 주완은 픽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었다.

    “봐주기엔 너무 늦었지.”

    “아……!”

    그는 성기가 삽입되어 있는 상태에서 준희의 허리를 당겨 몸을 일으키게 했다. 이번에는 주완이 침대 헤드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있고, 준희가 그 위에 올라탄 자세였다.

    “직접 움직여.”

    “흐으…….”

    준희는 깨질 것 같은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엉덩이를 들었다. 어느덧 다시 단단하게 선 주완의 성기를 끝까지 빼냈다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아…….”

    주완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부풀어 올랐다. 준희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은 채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여 성기를 품었다가 빼냈다가를 반복했다.

    힘겹게 왕복하는 사이 목덜미가 잡혔다.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가 떨어져 준희는 허리를 세웠다. 주완의 눈빛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준희의 목을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목울대를 가만히 문질렀다.

    “읏, 흡…….”

    “강준희.”

    “네, 흣.”

    “예쁘게 굴지.”

    혼잣말하듯 낮게 읊조린 그가 손에 힘을 주어 서서히 기도를 막았다.

    “헉, 큿.”

    숨이 틀어막혀 얼굴이 붉어졌다. 옅은 장미꽃 향기가 물씬 배어나 코끝을 찔렀다. 주완은 허리에 힘을 주고 제 것을 쳐올렸다. 굳어 있는 준희의 안으로 성기가 거칠게 들어찼다. 누워서 받아 낼 때와는 확연히 다른 이물감이었다. 게다가 목을 쥔 손이 점차 조여들고 있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윽, 허…….”

    기침이 터지려고 할 무렵 주완은 손에 힘을 풀었다. 막혀 있던 숨이 거칠게 토해지고 가슴이 들썩거렸다. 주완은 다시 허리를 쳐올리며 목을 조여 왔다.

    “큽.”

    숨이 막혀 온몸이 긴장됐다. 두 손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목을 움켜쥔 채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주완의 성기를 머금고 있는 구멍까지 꽈악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턱을 쳐들며 끅끅거렸다. 눈앞이 하얗게 밝아졌다가 이내 까맣게 점멸했다.

    주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왈칵 쏟아져 나온 젖은 장미꽃 향이 어지러울 만큼 짙었다. 그는 꽃이 피어난 듯 새빨개진 준희의 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헉, 허윽, 끕……, 하으……. 주완 씨.”

    “아…….”

    “제발……, 읏, 흡…….”

    나직이 욕을 짓씹은 주완은 느리게 추삽질 하며 준희의 숨을 능수능란하게 컨트롤했다. 몇 차례 반복했을 때 준희는 손톱을 세워 그의 손등을 긁어 댔다. 흘러내린 눈물로 뺨이 축축했다. 감각이 공포에 맞닿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흘러나온 페로몬 향이 어느덧 자욱했다.

    “혀엉……, 읍.”

    “…….”

    “흣, 흐윽…….”

    점차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준희는 본능적으로 그를 부르며 몸을 떨었다. 형이라는 호칭까지 세이프 워드로 보아야 할지는 아리송했다. 주완은 그의 목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감아 몸을 뒤집었다.

    침대 위로 눕혀진 몸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다리를 양옆으로 밀어 올리자 접합부가 위로 드러났다. 성기를 한껏 머금은 아래 입구는 붉고 축축했다. 주완은 이성의 끈이 툭 끊겨 나가는 것을 느끼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흐, 으, 아응…….”

    장미꽃 향기의 페로몬 사이로 상록 교목 내음이 빠르게 얽혀 들었다. 주완이 페로몬을 풀자 자유로웠던 숨이 다시금 가빠져 왔다. 페로몬이 섞이자 혈류가 빠르게 돌았다.

    “하…….”

    주완은 낮게 신음하며 준희의 몸 위로 몸을 가깝게 밀착시켰다. 페로몬과 열기가 동시에 느껴지자 준희는 손을 뻗어 주완의 어깨를 움켰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주완의 눈은 포식자의 그것처럼 서늘하고 맹렬했다.

    “잠깐, 만요…… 으으응.”

    “잠깐 같은 건, 없어, 준희야.”

    그의 말씨는 꽤나 다정했지만 아래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사정하지 않은 굵고 긴 성기가 애액으로 질척한 구멍 안을 들쑤시고 또 들쑤셨다. 몰아치는 성욕을 감당하기 어려운 쪽은 주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길게 심호흡하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 안에 내 좆물을 가득 싸질러 볼까.”

    “으, 흐, 아으으…….”

    “가득 차다 못해 줄줄 흐르는 꼴을, 그 새끼들한테 보여 주면, 하……, 볼만할 텐데, 안 그런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말의 마디가 끊겼다. 낮게 긁히는 목소리는 소유욕과 열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준희는 그의 말을 해석할 틈도 없이 열에 달떠 비음을 터뜨리며 자지러졌다. 안을 채운 성기가 점차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주완의 어깨 위로 손톱을 세웠다.

    “아흑, 흐, 너무 크……, 안 돼……, 으응!”

    그러한 몸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준희는 잘 알고 있었다. 노팅을 하려는 것이다. 수월하게, 또 확실하게 정액을 배출할 수 있도록. 남성 오메가의 임신이 퇴화한 지금, 구태여 노팅을 하려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그의 안을 난잡하게 더럽히고 싶은 것이다.

    페로몬 향이 짙어지며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차츰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벽을 짓누르며 커져 가는 그것의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쾌락과 고통으로 뒤엉킨 감각이 온몸을 저릿하게 지배했다.

    “하윽.”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침구를 적셨다. 온몸을 비틀어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주완이 무릎 뒤를 강하게 잡고 벌리고 있어 불가능했다. 준희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주완의 등과 어깨를 긁어 댔다.

    이를 악물었는지 주완의 턱께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굳은 표정의 그는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성기를 깊숙한 곳을 향해 느리게 밀어 넣었다.

    “안, 안 돼……, 아, 아프, 찢어질, 찢어질 것 같……, 흑, 흐읍……. 으으응!”

    엄살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흉포할 만큼 큰 성기가 안에서 움직이기까지 하니 쾌락을 넘어 아래가 마비된 것처럼 얼얼할 지경이었다. 준희는 그의 어깨를 꽉 붙든 채 고개를 마구 저어 댔다. 생전 좆이 닿아 본 적 없는 부분까지 문질러지는 느낌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아랫배를 더듬었다.

    “흑, 너무 아파요……. 여기, 여기까지 들어온 것 같……, 아흣……!”

    엄살이 아니었다. 더듬어 본 뱃가죽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듯한 느낌에 준희는 겁을 집어먹고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공포와 두려움과 그간 느껴 본 적 없었던 쾌감이 한데 뒤엉켜 이성을 마비시켰다.

    차마 움직일 생각도 못한 채, 육식 동물에게 붙들린 초식 동물처럼 바싹 굳어 울고 있는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는 주완의 턱께가 꿈틀거렸다.

    “씨발.”

    주완은 낮게 욕설을 짓씹으며 마침내 사정했다. 커다란 성기가 내벽과 맞물려 입구를 굳게 닫고 있어, 쏟아져 나온 정액이 동굴 깊은 곳에 고여 들었다.

    주완이 사정한 다음에야 준희는 비로소 긴장을 약간 풀었다. 눈물이 가득 고여 흐린 시야 너머로 주완이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수마가 몰려왔다. 의식의 끈을 붙들고 있기 위해 눈에 힘도 주어 보았으나 고여 있던 눈물이 피부를 타고 흐를 뿐이었다. 그는 까무러치듯 잠들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완은 여전히 준희의 안에 들어와 있는 채였다.

    평소 같았으면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준희를 살뜰히 씻겨 품에 안은 채 잠들었을 테지만 주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끈따끈한 내벽에 성기를 파묻어 밀착한 채 잠드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아침이 되어 깨어난 준희의 몸은 뻑적지근하게 굳어 있었다.

    잠을 덜어 낸 준희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등은 주완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고, 엉덩이는 그의 골반에 닿아 있었다. 안을 채운 성기는 노팅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오전이어서인지 꼿꼿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더 자지 않고.”

    “히익.”

    뒤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준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지난밤의 여파인지 주완의 얼굴을 살피는 일조차도 두렵게 느껴졌다. 그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렸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마주 본 주완의 눈빛은 지난밤과 달리 다정했지만 묘하게 간담이 서늘해졌다. 준희는 마른침을 꼴깍 삼킨 뒤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게, 아……, 목소리.”

    조그맣게 소리를 내려 했던 그는 여러 겹으로 갈라져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목을 감쌌다. 그러고는 한 번 더 놀랐다. 목에 손이 닿자마자 묵직한 고통에 신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근육들이 뭉쳐 있는 것쯤은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준희는 서둘러 목을 가다듬고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래……, 빼 주시면…….”

    저를 흘끔거리는 준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주완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싫은데.”

    그러더니 준희의 골반을 당기며 허리를 장난스럽게 쳐올렸다. 그러는 바람에 성기가 성감대를 쿡 찌르며 온 감각들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으응……, 안 돼요. 저 진짜 힘든데…….”

    “내숭은. 좆 빠는 감도가 이렇게나 좋은데.”

    “아…….”

    곤란하다는 듯 신음하자 주완은 준희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성기를 빼내 주었다. 몇 시간 내내 성기를 품고 있었을 구멍이 쉽게 닫히지 않고 벌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침구 위에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주완은 그의 엉덩이를 양옆으로 잡아 벌려 열고는 그 모습을 낱낱이 눈에 담았다. 침대 가장자리로 엉금엉금 기어가 피하고만 싶었지만, 지난밤 마주 보았던 포식자의 눈빛을 떠올리면 여전히 긴장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목이 뻐근한 것은 어떻고.

    닫히지 않은 구멍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완이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으으…….”

    “좆물은 싹싹 잘 핥아 먹었어요?”

    “네……, 네.”

    장난기 어린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나마 침구에 얼굴을 묻고 있어 다행이었다. 뜨거워진 얼굴로 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손가락을 빼낸 주완이 그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일어나요. 씻어야지.”

    ***

    주완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은 뒤 준희를 안아 욕실로 옮겼다. 따뜻한 물에 담기니 긴장되었던 근육이 그제야 조금씩 풀어졌다. 함께 욕조 안으로 들어온 주완은 준희를 품 안에 가둔 채 그의 몸을 살뜰히 씻겼다. 언제나처럼 살뜰히 저를 돌보는 모습에 그동안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 왔던 불만과 긴장감이 눅진하게 녹아내렸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그 차주완이었다. 그에게서 갈구해 마지않았던 다정이었다. 주완에게 몸을 맡긴 준희의 마음이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그는 밤새 채우고 있어 안쪽에 말라붙은 정액까지 손가락을 넣어 구석구석 긁어내고서야 준희를 놓아주었다.

    반신욕을 마치고 나와 룸서비스로 조식을 주문한 주완은 식탁 앞에 앉은 그에게 직접 내린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몸은 좀 어때요?”

    “조금 뻐근하지만…… 괜찮아요.”

    사실 밤새 혹사당한 몸도 몸이었지만 눈이 마주칠 때마다 겁을 집어먹게 되는 게 문제였다. 흘끔대다 시선을 마주칠 때면 지난밤 저를 바라보던 성마른 눈빛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위축되었다.

    “준희 씨.”

    “네?”

    별다른 반응 없이 앉아 있던 주완이 그를 불렀다. 준희는 빠르게 대답하며 고개를 바싹 들었다.

    “보편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가 당신을 괴롭히는 건 그 자체로 관심이고 애정입니다.”

    “…….”

    “나는 사랑하는 만큼 때로는 악랄해질 테고, 기어이 그 눈에서 눈물을 보아야만 성이 풀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연결 고리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나와 연애하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차분한 설명이었다. 준희는 이따금씩 커피를 홀짝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는…….”

    “그건……. 그건 제가 성급했어요. 머리 아프게 이해시키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가 입술을 떼려는 찰나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배를 채울 수 있는 간단한 음식들로 식탁 위가 채워졌다. 음식을 서빙해 온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들어요.”

    주완은 준희 앞으로 음식을 밀어 주며 말했다. 손에 쥔 포크가 이리저리 산만하게 음식 위를 돌아다녔다. 준희가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완은 시간이 조금 흐르고서야 말을 이었다.

    “준희 씨도 알겠지만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 내게 거는 기대가 크셨습니다.”

    “네.”

    “포장할 것도 없지. 내 부모는 훌륭하지 못하고, 따지자면 속물입니다.”

    신랄한 어조에 준희는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리는 사이 주완은 덤덤하게 말했다.

    “가족들에게 나는 언제나 신분 상승의 수단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부모님은 내 혼처를 또 다른 기회 정도로 치부하고 있고. 나는 그런 집안의 일원으로 누군가를 들인다는 사실이 언제나 끔찍했습니다.”

    “…….”

    “그래서 더더욱 내 미래에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두지 않았던 거고. 지금도 그 마음에는 그다지 변함이 없어요.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사정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재촉하고 투정 부리지 않았을 텐데…….”

    그의 어린 시절이 자동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엄격하고 각박한 집안 분위기와 그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야 했을 지난날들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주완이 픽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과정인 것 같기는 합니다.”

    “…….”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준희 씨가 나를 백 퍼센트 마음에 들어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준희 씨에게 그렇듯이.”

    “그래도 사랑해요.”

    지금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이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주완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준희를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서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제자리에 앉아 준희의 앞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전부터 주려다가 기회를 놓쳤던 선물인데, 열어 봐요.”

    “……뭐예요?”

    “보면 알 겁니다.”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상자를 받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여니 익숙한 디자인의 손목시계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준희는 단번에 그 시계를 알아보았다.

    “이거 그때 제가 선물했던…….”

    “같은 디자인으로 했습니다. 연인이 된 기분을 내고 싶어서.”

    입술이 절로 열렸다. 준희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겉 상자만 만지작거렸다. 그런 준희에게 주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준희 씨야말로 원하는 만큼 까불어 봐요.”

    “…….”

    “내가 감당해 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준희가 비로소 눈을 들었다. 건드리기라도 하면 눈물이 톡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런 건 비겁해요. 이미 나를 이만큼이나 길들여 놓고.”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서로 솔직해지는 거. 그거면 될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대답하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손목시계를 조심스럽게 꺼내 팔목에 착용해 보았다. 사이즈도 그에게 꼭 맞게 수선되어 있었다. 선물을 받는 것 또한 주는 것 못지않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준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리저리 돌려 가며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는 주완을 흘끔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럴 거라면 세이프 워드도 바꾸는 게 좋겠는데.”

    “네?”

    “내가 말을 놓는데 너는 나를 계속 주완 씨라고 부르려고?”

    “아…….”

    예상치 못했던 제안에 준희가 넋을 놓았다. 그는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아니면 뭐라고 부르고 싶어요?”

    “아뇨, 저는 좋아서요. 주완이 형…….”

    고작 호칭 따위가 뭐라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간지러운 미소가 입가를 물들이기도 했다. 어쩌면 시계보다도 더 대단한 것을 선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준희야.”

    다정한 부름이 귓가를 간질였다. 이대로 죽어 버려도 여한이 없지 않을까, 위험한 생각마저 들었다.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들리기라도 할까 겁이 날 정도였다.

    ***

    예상한 결과였지만 주완은 다시 바빠졌다. 유성기획 대표로서의 일도 일이었지만, 파티 룸에서의 사건도 워낙 규모가 컸던지라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다.

    준희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로 집에 머물며 스케치북에 데생으로 그의 얼굴을 그려 넣곤 했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이목구비와 눈, 코, 입들이 몇 차례 도화지에 담기며 점점 현실의 모습과 가까워졌다.

    “뒤늦게 바람이라도 든 게야? 더 공부하고 싶으냐?”

    모처럼 제가 쉬는 주말에까지 스케치북을 끼고 있는 손자를 향해 강욱진 회장이 물었다. 거실에 내려와 연필을 놀리던 준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취미 생활이죠.”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그려 선물하고 싶다는 욕심이 꽤나 커졌다. 너무 큰 그림은 부담스러울 테니 어디엔가 탁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정도여도 좋을 듯했다. 오랜만에 수채화를 해 볼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구상을 하며 선을 덧대어 갈 때였다.

    “주완이 녀석은 요즘 어떻든?”

    “바쁜 것 같아요.”

    “단순히 바쁘기만 한 게 아닐 텐데.”

    할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주완에 대한 말을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준희는 스케치북으로 향하던 눈을 들었다. 강욱진 회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강네 막내 녀석 신고한 게 주완이잖니. 그 집뿐만 아니라 줄줄이 엮여 있는 집안들이 많아. 명이도 주변 여론을 무시할 만한 명분이 없을 테고.”

    “……그 정도로요?”

    “슬슬 우리 회사로 거두어야 하나 싶기도 한데. 네 생각은 어떠냐.”

    애초에 유성기획 총수인 최명에게 주완을 추천한 건 강욱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유성에 그를 맡겨 두기만 할 건 아니었다. 일찍이 제 사람으로 점찍어 두고 무르익기만을 기다려 오던 강욱진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제 손자인 준희와 엮어 주는 것이 양날의 검이라고 느껴졌던 이유였다. 좋은 결론을 도출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최악의 경우 손실이 컸기 때문이다.

    준희는 스케치북을 접어 옆에 내려놓으며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요. 회사에 이익이 될 사람이라 할아버지가 가까이하고 믿었던 거 아니에요? 그럼 자리가 있을 때 좋은 곳에 쓰셔야죠.”

    “녀석도. 이제 와 철든 척은.”

    “아니, 척이 아니라……. 그렇잖아요. 그리고 지금 저희 되게 좋으니까 주완이 형한테 최대한 높은 자리 주세요.”

    “어이구, 이놈아. 네 할아비를 그렇게 걱정해 봐라.”

    강욱진 회장은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혀를 찼다. 준희는 그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휴대 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입력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도 저에게 푸념 한 번 하지 않은 그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형, 많이 바빠요?」

    어떤 말로 운을 띄울지 한참을 고민한 결과물치고는 평범했다. 답변은 의외로 금방 되돌아왔다.

    「조금 그렇네. 당분간은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아니면 제가 커피라도 사서 회사에 갈까요? 얼굴이라도 보면……. 너무 바쁠 것 같으면 말고요.」

    「그래 주면 고맙고.」

    거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주완은 예상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준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그는 작은 캔버스를 지참해 유성기획 건물에 도착했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일하는 곁에 앉아 옆모습이라도 담아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비서 도일의 몫까지 총 세 잔의 커피도 잊지 않았다.

    「저 지금 도착해서 올라가는 길이에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메시지를 보냈다. 답변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도 전에 돌아왔다.

    「어쩌지. 내가 급하게 미팅이 생겨 나와 있는데. 30분이면 될 거야. 금방 들어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천천히 오셔도 돼요.」

    시간을 맞춰 방문하기는 했지만 동분서주하는 그를 단번에 만나기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잠시 기다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준희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마음을 비웠다.

    준희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최상층에 당도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준희는 도일에게 눈웃음으로 인사했다. 도일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준희는 의아해졌다. 이전에는 연락도 없이 다짜고짜 대표실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다 되어 있을 테니 그가 난처할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도일 씨. 무슨 일 있어요?”

    “아, 그게…….”

    “혹시 제가 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못 들으셨어요?”

    “아닙니다. 들었습니다. 차주완 님이 갑작스럽게 미팅에 나가시면서 강준희 님이 와서 기다리실 거라고도 말씀해 주셨거든요.”

    “네, 그런데요?”

    준희가 재차 묻자 도일이 대표실을 흘끔 응시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주완 님 부모님이 와 계셔서요.”

    “아?”

    “약속도 없이 갑작스럽게 오셔서…….”

    그의 설명에 차츰 상황 파악이 되었다. 주완이 자리를 비우고 준희가 도착하기 직전에 주완의 부모님이 연락도 없이 대표실을 찾은 모양이었다. 준희는 굳게 닫혀 있는 대표실의 문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냥 돌아갈까. 돌아가는 쪽이 주완을 배려하는 길일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언젠가는 부딪혀야만 하는 일이었다. 직면하지 않으면 풀릴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도일에게 괜찮다는 듯 여유롭게 미소를 띠어 주고는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짧게 심호흡하고는 똑똑, 노크했다. 스멀스멀 새어 나오던 대화 소리가 뚝 끊겼다. 준희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비틀며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누구…….”

    소파에 걸터앉아 있던 중년 부부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준희는 문을 닫고 서서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일정한 보폭, 올바른 자세로 또박또박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군더더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인사가 늦었죠. 강준희라고 합니다.”

    “아, 주완이랑 교제하는 그……!”

    부부는 눈빛을 교환했다. 준희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기류를 기민하게 읽었다. 일전에 들었던 주완의 설명을 차치하고서라도 이쪽 부류는 준희에게 더없이 익숙했다. 자라는 동안 주변에 늘 그의 유별난 지위와 조건을 향해 눈을 번뜩이는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희는 부부의 맞은편에 앉았다. 부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완벽한 조건의 먹잇감이기 때문인지 알게 모르게 화색이 돌았다.

    “오실 거라는 이야기를 따로 들은 적이 없어서 놀랐어요. 평소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편이신가 봐요.”

    가시를 숨긴 채 사실을 직선적으로 말하되 상냥한 미소를 유지했다. 적당한 거리와 예의를 갖추고 건네는 직언이었다. 그는 이런 식의 화법에 익숙했다.

    “우리가 준희 군을 꼭 만나고 싶어 했는데, 우리 애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인지 통 소개를 안 시켜 주더라고요.”

    “네,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주완 씨가 워낙 배려심이 많아서요. 반듯하게 자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도통 무례하질 않으세요. 늘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가지고 들어온 세 잔의 커피 중 두 잔을 부부의 앞으로 내어 주었다. 부부는 어쩐지 말문이 막혀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계시는 줄 몰라 음료를 많이 준비하지 못했네요. 다음에 오실 땐 꼭 미리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대접할 수 있어요. 그 정도는 하게 해 주실 거죠?”

    “……우리 애랑 꽤나 진지한 사이인가 보지요?”

    준희가 내민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주완의 아버지가 은근슬쩍 물었다. 준희는 제 몫의 커피를 앞으로 당겨 오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어른분들께 심려 끼치지 않도록 잘 만나고 있습니다. 고작 저희들 일로 벌써부터 바쁘신 분들께 호들갑을 떨 수는 없으니까요.”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에는 그로부터 뻗어 나갈 수 있는 가지들을 아우르는 답변으로 교묘하게 그물망을 빠져나가야 했다. 이해관계가 명백한 사교 자리에서 흔하게 이용되는 화법이었다. 부부는 더 이상 캐묻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이제 돌려보내 볼까. 준희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연락하지 않고 오신 것을 보니 잠깐 얼굴만 보고 돌아가실 예정이었나 봐요. 주완 씨 이후 일정이 꽤나 바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머님 아버님을 챙겨 드리지 못해서 아쉬워하겠어요.”

    “그거야, 뭐……. 뭘 바라고 온 것도 아니니…….”

    부부는 식어 가는 커피를 마시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

    도일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고 최대한 빠르게 미팅을 마무리한 뒤 회사로 돌아왔을 때, 대표실에는 준희 홀로 남겨져 있었다. 주완의 부모와 제가 먹은 커피를 정리하고 음료까지 새로 준비해 둔 상태였다.

    “……가셨어?”

    제대로 경고해 둘 각오까지 하고 도착한 주완은 황당한 눈치였다. 소파에 앉아 나른히 시간을 보내던 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잠시 들르셨던 거니까요. 어쩔 수 없겠다며 가셨어요.”

    “무례하게 굴진 않으셨고?”

    “뭐 하러 저에게 무례하게 구시겠어요. 걱정하는 그런 일 없었어요.”

    게다가…… 그쯤이야 감당 가능한 범위였다. 주완이 겉옷을 정리하는 동안 준희는 준비해 놓은 커피를 책상 모니터 옆자리에 올려 두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일해요. 바쁜 거 아니에요?”

    “그래도 회사까지 찾아온 손님인데 잠시 숨은 돌려야지.”

    “숨 돌리다가 새벽까지 야근하는 건 더 싫은데……. 저는 여기에 앉아서 형 얼굴만 보고 있어도 재미있는데요.”

    “그래서 그 재미있는 얼굴 그림으로 담으려고 도구까지 야무지게 챙겨 오셨나?”

    옆에 치워 두었던 준희의 미술 도구를 발견한 주완이 픽 웃으며 물었다. 미술 도구가 담겨진 쇼핑백을 들어 안을 구경하자 준희는 저에게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건네진 쇼핑백에서 작은 캔버스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네. 일하는 멋있는 모습 담아 가려고.”

    “그럼 좋을 대로 해. 오늘은 일을 빨리 끝내야겠네. 어차피 이럴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책상이 잘 보이는 방향에 자리를 잡던 준희가 고개를 들었다.

    “네? 그게 무슨 뜻?”

    “정리하려고. 대표 이사 자리.”

    “……최명 회장님이 그러래요?”

    “아니, 내 의지야. 눈치가 보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 일’이 영향을 끼친 듯했다. 안 끼칠 수가 없지. 그때의 일로 잡혀 들어간 정재계 2세들이 몇이던가. 몇 날 며칠 언론에서도 끊이지 않고 떠들어 댔으니 하나같이 신고자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준희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원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 준희야.”

    “죄송해요.”

    “화나는 소리 말고.”

    주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능숙한 순서로 데스크톱과 모니터를 켠 그는 옆에 놓여 있던 안경을 집어 들었다. 테가 얇은 안경을 쓸 때면 지적인 매력이 한껏 돋보이곤 했다.

    “커피도 잘 마실게.”

    주완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인사했다. 준희는 얼굴을 붉히며 캔버스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내 주완은 일을 시작했고, 준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얇은 선들이 겹쳐지며 일하고 있는 주완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겼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연필이 캔버스를 긁는 소리가 교차했다. 퍽 평화로운 오후였다.

    ***

    정신을 차렸을 때 창밖에는 까마득한 어둠이 내려 있었다. 소파에 웅크리고 기댄 채 잠들었던 준희가 느리게 잠에서 깨어나며 몸을 일으키자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재킷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

    뻐근한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 소파에 앉아 나른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주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준희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입가를 더듬었다. 침이라도 흘리고 잤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입가는 깨끗했다.

    “깨우지 그랬어요.”

    “곤히 자길래.”

    “일은요?”

    “끝났을 시간이고.”

    그제야 주변을 더듬어 휴대 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준희가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켜는 동안 주완은 그의 앞에 놓인 캔버스를 집어 들었다. 잠들기 전까지 부단히 손을 놀린 덕분에 밑그림은 충분히 완성되어 있었다.

    “전공자이니 당연하겠지만 정말 솜씨가 좋아. 더 공부해 볼 생각은 없나?”

    “제가 야망이 없어서요.”

    “그렇다면 이 실력과 정성에 나라도 보상해 줘야겠는데.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아니면 먹고 싶은 거라든지.”

    캔버스에서 눈을 뗀 그는 준희를 바라보며 다정히 웃었다. 잠이 덜 깨어서인지 그 모습이 꼭 꿈결처럼 느껴져서, 준희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냥…….”

    “응, 그냥?”

    “……사랑한다고, 해 주실래요?”

    그는 잠겨 있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대답을 듣기 전인데도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아무래도 이 연애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길인 것이 분명했다. 뜨거운 눈꺼풀을 재차 내렸다 들어 올리며 준희는 숨을 죽였다.

    주완은 들고 있던 캔버스를 내려놓았다. 드물게 고민하는 듯한 눈은 준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오랜 고요를 깨고, 주완이 입술을 뗐다.

    “여행 갈까, 우리.”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원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준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주완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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