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9)

5. 을의 사정

준희는 고백했고 주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채를 놓은 손이 턱을 붙잡았다. 시선이 부딪힌 상태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바쁜 사람의 시간을 많이 빼앗은 건 아닐까, 준희가 걱정할 정도였다. 마침내 준희를 놓아주며 주완이 말했다.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연락하겠습니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일어나요. 오늘 안에 연락할 테니까.”

혹여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까 우려했던 것이 눈빛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공연히 머쓱해진 준희는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몸이 기름칠 안 한 양철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듯했다.

아픈 티를 내지 않고 뒤로 슬그머니 물러나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손목에 감겨든 손길이 따뜻했다. 주완은 무심한 눈으로 준희를 훑어보더니 손목을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신경 못 써 줘도 몸 관리는 제대로 하세요. 본인 몸 아닙니까.”

“……그럴게요.”

목소리에서 뚝뚝 떨어지던 냉기는 사그라들어 있었다. 화가 풀린 걸까? 위축되어 상대방의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던 준희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 시간을 못 내서 미안합니다. 집에 못 데려다주는 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약속도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죄송해요.”

“네, 죄송할 일은 맞습니다.”

착하게 사과도 했건만 기를 펴게 해 주는 법이 없었다. 준희는 삐죽 나오려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러자 주완이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안경을 집어 들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찾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관계는 그대로 끝이 났겠지.”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는 말이었다. 준희는 바짝 고개를 들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완을 마주 보았다. 안경을 쓴 반듯한 이목구비가 눈에 가득 담겼다. 멀뚱히 서서 저를 바라보는 준희를 발견한 주완이 눈썹을 흘끗 올리며 물었다.

“뭐 해요?”

안 나가고. 뒷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준희는 얼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주춤주춤 대표실에서 빠져나왔다.

대표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는 준희의 뺨이 붉었다. 이마에 뜨겁게 열이 오른 듯도 했다. 그는 가볍게 숨을 가다듬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연락이 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내일 저녁에 시간 됩니까?」

「네. 무조건이요.」

「그래요. 그럼 저녁 여덟 시에 봅시다. 식당 예약하고 메시지 남기겠습니다.」

확실한 용건을 담은 메시지가 끝난 이후로도 주완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상처 남지 않게 잘 돌봐요. 나중에 확인할 테니까.」

「저 괜찮아요.」

「까불지 말고.」

「네. ㅎㅎ」

그의 태도는 확연히 전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솔직했던 것이 플러스 요인이었을까. 아니라면 정말로 구둣발이라도 핥으려던 태도가 포인트였을까. 준희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되짚어 보았지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약속 장소를 담은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그다음 날 오후의 일이었다. 준희는 이른 시간부터 저녁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데 진을 모두 뺐다. 결국 얇은 니트 티셔츠와 슬랙스가 당첨됐다. 늘 그렇듯 단정한 차림이었는데, 평소보다 약간 캐주얼한 느낌이었다.

그가 고른 저녁 식사를 깨작거리고 싶지 않아 점심은 평소보다 가볍게 해결했다. 샌드위치와 부드러운 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다. 준희는 하루 온종일의 시간을 그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데 썼다. 그렇게 하고도 아깝지가 않았다.

주완이 고른 식당은 조용한 일식당이었다. 룸이 구분되어 있어 프라이빗한 미팅을 하기에 적격인 데다가 신선한 회가 일품인 곳이었다. 준희도 첫 방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 배로, 아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많이 기다렸어요?”

먼저 도착한 쪽은 준희였다. 예약된 룸, 안내받은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따뜻한 차를 홀짝거릴 무렵 주완이 도착했다. 준희는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긴장감에 허리가 꼿꼿해졌다. 아직은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목소리가 나올지, 부정적인 목소리가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주완이 마주 앉자마자 미리 주문해 두었던 요리들이 테이블 위를 채웠다.

“오늘도 많이 바쁘셨죠?”

“회사에서는 늘 바쁜 편이죠. 양껏 드세요.”

“주완 씨도요. 맛있게 드세요.”

다소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간소한 반찬들부터 메인 디시인 회까지 전부 담백한 맛이었다. 과식하지 않는, 그보다는 식성이 까다롭고 입이 짧은 준희에게도 과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주완은 평소에도 그랬지만 식사 중에는 더더욱 말을 아끼는 성향이었다. 고요한 공기 중으로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이따금씩 울려 퍼졌다. 애피타이저로 소담한 과일과 따뜻한 차가 나왔을 때에야 주완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제 강준희 씨가 회사까지 찾아와 솔직하게 고백해 주었으니, 나도 솔직히 말할게요.”

마침 배가 가득 찬 준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을 들었다. 주완은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가 많이 났었고, 관계를 물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계약 조건부터가 성립이 안 되는 사이가 아닙니까. 강준희 씨가 이쪽 취향이라고 고백했던 것부터가 거짓말이었으니까.”

“……네.”

“그날 새벽 강준희 씨에게 걸려 온 전화를 끊자마자 결심했습니다. 끝내야겠다고. 짐작하겠지만 나는 이런 분야에서 칼 같은 편이에요. 지지부진하고 복잡한 관계는 딱 질색입니다.”

구태여 묘사해 주지 않아도 머릿속에 자연히 그려졌다. 아니다 싶으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어긋난 관계는 깔끔하게 잘라 내며, 미련 따위는 모르고 살았을 남자의 모습이.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는 엉킨 실타래 같은 지금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걸까. 긴장한 준희의 눈빛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자 주완이 낮게 웃었다. 그러고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기회를 주고 싶어지더라고. 펜트하우스에 찾아온 강준희 씨 얼굴을 보니까. 게다가 아주 기특하게도…… 문 앞에 꿇어앉아 있기까지 했고.”

그 순간의 장면을 떠올린 모양인지, 주완의 눈길이 잠시 허공으로 흩어졌다 되돌아왔다.

관계를 영영 끝내 버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구나. 판단이 들자마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찰나 차가워졌던 손끝 역시 따뜻하게 물들었다. 준희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쓸어내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안도를 되찾고 나니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 역시 떠올린 탓이다. 펜트하우스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이유엔 복잡할 게 없었다. 그저 눈길을 끌어 보고자 했을 뿐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어떻게든 그의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어야만 했기에.

“강준희 씨는 타고난 것 같습니다.”

“네?”

“고통을 느끼면서 흥분하고, 선 넘는 규칙도 의외로 잘 받아들이는 편인 것 같고. 나에게 굴복하면서 희열을 느낀 적, 정말 없습니까?”

“……노코멘트 하면 안 될까요?”

뒤늦게 머쓱해져서 눈치를 흘끔 보며 되물었더니 주완이 픽 웃으며 “퍽도.” 했다. 분위기를 완전히 녹아내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준희는 그제야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를 마주 보고 있던 주완이 반쯤 식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무심히 말했다.

“그래서인가.”

“…….”

“자꾸 봐주고 싶어지네.”

아……. 준희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간지러운 말을 건조하게 던져 놓은 장본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단정한 움직임이었다. 준희는 어디를 보아야 할지 몰라 그의 찻잔 쥔 손가락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목덜미가 뜨거웠다. 붉을 것이 분명했다.

탁, 주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날 펜트하우스에서 나온 길에 오래도록 그 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따라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고백하건대 1층에서도 같은 짓을 했지. 흡연 구역에서 로비를 바라보며, 그쪽을 기다렸습니다.”

“어째서…….”

“글쎄, 나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홀렸었나. 일반인을 상대로 그렇게 험한 짓을 해 놓고도 아직 마음 한 줌 남아 있기를 바란 건가.”

덤덤한 고백이었다. 고백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나니 심장이 곧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상쾌한 아침을 맞은 것처럼 온몸의 세포가 생생하게 깨어나는 듯했다.

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완을 마주 보았다. 그는 준희를 마주 보며 빙긋 웃어 주었지만, 웃음기는 이내 사라졌다.

“그날 호텔의 다른 방을 따로 잡아 머물렀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게 강준희 씨의 대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볼 것도 없이 계약서를 찢어 동봉한 이유는 그겁니다.”

룸을 따로 잡아 나왔던 것이 그의 공간에 더 있기 싫다는 의사로 읽혔던 모양이었다. 따라 나오기를 기대했으나 연락조차 오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준희는 초조한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변명했다.

“아, 그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저를 위해서 묵고 가라고 하셨지만, 진짜로 그렇게 하면 주완 씨 눈에 더 거슬릴까 봐요.”

“내가 묵고 가도 된다고 하면 그건 정말로 묵고 가도 좋다는 소립니다. 꼬아서 듣지 않아도 돼요. 내가 뭘 위해 그런 효율 떨어지는 예의를 갖추겠습니까?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말의 표면으로 복잡한 속내를 덮어 숨기는 남자가 아니었다. 주완은 구태여 꼬리를 잡고 늘어져 질책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의 감정이 그랬을 뿐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끝이었다.

그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고는 제안했다.

“자리 옮겨서 커피라도 한잔하죠. 아직 할 말도 남았고.”

“네, 좋아요.”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준희는 자리를 정리하는 주완을 따라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건물 외관이 현대적이고 인테리어가 멋스러운 카페는 주완의 소유라고 했다. 감각적인 그림들이 군데군데 전시되어 있어 준희의 눈길을 빼앗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비교적 유동 인구가 적은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붐비는 곳이었다.

둘만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준희는 이동하는 내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주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준희를 보며 말했다.

“여태까지 내가 한 말을 어디로 들은 겁니까. 나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는 사이에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를 서빙했다. 종업원이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준희는 멋쩍은 얼굴로 아이스 음료의 스트로를 쭉 빨아들였다.

그의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면박을 준 건 그렇기 때문이겠지. 남 눈치가 세상에서 처음인 준희는 어설프게 짐작해 나가며 눈을 굴렸다.

그러는 사이 주완이 본인 몫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다시 입술을 뗐다.

“바닥에서부터 다시 세우겠다고 했죠. 믿음이라는 거.”

“네.”

“그렇게 해 보세요.”

그리고 명확한 언어로 준희에게 제안했다.

“말로만 다짐하는 건 이제 안 먹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건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내게 믿음을 줄 수 있겠어요?”

다시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고 기뻤지만, 주완의 질문이 이어지자 준희의 머릿속이 금세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신뢰를 무너뜨리게 한 가장 큰 요인은 거짓말이었다. 믿어 달라는 진부한 말로는 무너진 신뢰를 재건축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건 귀로 들리기보다는 눈에 보여야 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계기로 마음에 와닿는 것이어야 했다. 준희는 흘끗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연락을…….”

말문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는지 주완이 미간을 약간 좁혔다. 준희는 침을 한 차례 넘기고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말했다.

“연락을 자주 드릴게요. 어디에 가는지, 뭘 하는지. 공백이 있지 않게, 솔직하게요.”

단순하고 원초적인 수단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연인과의 당연한 일상일지도 모르지만 준희에게 있어서는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 규칙이었다. 그는 지나친 관심에 평화를 느끼는 부류가 못 되었다. 지나간 수많은 구 남자 친구들과 백이면 백 연락 문제로 다투었을 정도였다. 물론 번번이 연락 두절로 상대의 속을 썩게 만들었던 쪽은 준희였다.

가만히 커피를 음미하던 주완이 문득 물었다.

“나랑 자주 연락하게 되면 강준희 씨만 좋은 거 아닙니까?”

“네?”

“그런 걸로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무래도 거짓말로 둘러대고 약속을 취소했던 제 실수가 크기도 했고요.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거짓 없는 모습을 보여 드려야 믿음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제 일거수일투족을 빤히 알게 되시면 혹시 모를 불안할 요소들이 없어지지 않을까 해서요.”

“듣고 보니 그렇겠네.”

침착하게 설명하자 주완은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얼핏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듯도 했다. 그러고는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묵묵히 커피를 즐기던 주완은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쪽 바닥에서는 일상생활까지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도 플레이의 한 영역으로 칩니다.”

“그런 플레이를 하신 적이 있으세요?”

“없습니다. 일상에서까지 감정을 소모하기는 싫었거든.”

그의 말에 스트로를 휘젓던 준희의 손이 멈췄다. 그 역시도 일상을 공유하는 것에 피로를 느끼는 편인 걸까? 그렇다면 자충수를 두게 된 꼴이었다. 준희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혹시 제가 귀찮을 것 같으시면…….”

“귀찮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세요.”

“……네.”

“장소 이동하면 이동한다, 무슨 일을 하면 한다, 시시각각 보고해 보세요. 재미있을 것 같네.”

의외로 꽤나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는지, 주완은 가볍게 미소를 띠었다. 그동안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보아 온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가 퍽 예뻐서, 준희는 한참이고 눈을 떼지 못했다.

***

그날 이후 준희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떠안게 되었다. 특별히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아 일상이 단조로운 탓에, 보고를 하자니 보고할 거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같았으면 일상의 공백을 파티와 모임으로 채웠을 테지만, 주완을 만난 뒤로는 그럴 일도 없어 더더욱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렇다고 한량인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데…….’

덕분에 줄줄이 취소해 오던 스케줄을 성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갤러리 개관에 참석하거나, 전시회 코멘트 요청에 응해 주거나, 누이인 강희미 대표와 관련된 연예계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하는 식상한 일들이었다. 또한 그렇게 하고도 시간이 빌 때면 작업실을 찾았다. 준희는 주완과의 약속대로 성실하게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지금 일어났어요. 출근은 잘 하셨어요?」

「점심 식사로는 샐러드 먹었어요. 오늘은 유성 갤러리에 방문할 거예요. 최명 아저씨 조카가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요. 주완 씨도 소식 들으셨겠지만요.」

「오늘은 운동을 다녀오려고 해요. 친구랑 테니스를 치기로 했어요. 아, 이 친구는 대학교 동기예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끼리 친해서 아는 사이였어요.」

「시사회장 도착했어요. 영화 지루할 것 같아요. 주완 씨가 옆에 있으면 견딜 만할 텐데. 보고 싶어요.」

「저 이제 작업실이에요. 그림 연습 하려고요. 집에 갈 때 또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면, 주완은 알았다고 짧게 답장하거나 아예 답장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준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일일이 결재받지 않는 쪽이 더 속 시원했다.

「작업실에 있을 때는 늘 식사를 소홀히 하던데. 오늘은 잘 챙겨 먹어요.」

그렇지만 걱정이 담긴 메시지가 돌아왔을 때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에 나비가 날아든 듯 간지럽기까지 했다. 그날 준희는 단조로운 색감에서 벗어나 솜사탕 같은 파스텔 톤 물감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그와 나누었던 계약서는 찢겨 사라졌지만 약속은 유지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고, 데이트와 플레이를 번갈아 즐겼다. 종종 관계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준희는 구태여 문제 삼지 않았다. 자주 연락하고 데이트를 즐기고 몸을 섞었으니 보통의 연인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패턴에 균열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게 된 것은 보통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강욱진 회장과 동반 스케줄이 있는 날이었다. 준희는 언제나처럼 아침에 일어나 안부를 전하는 동시에 그날의 일정을 전해 주었다.

「오늘도 많이 바쁘죠, 주완 씨?」

「저는 오늘 할아버지랑 갤러리 방문해요.」

얼마 전에 신설된, 파격적인 건축 디자인과 국내 최대 규모로 유명한 모 갤러리에서 고가의 경매가 열리는 날이었다. 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준희에게 갤러리 방문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강욱진 회장과 함께 나간다는 것은 해당 자리가 본래의 목적뿐만 아니라 인맥 관리의 기능까지 겸하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그래요. 잘 다녀와요.」

주완은 별다른 말 없이 그렇게 답장했고, 준희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갤러리 측에서 초대한 게스트는 많지 않았다. 넓은 전시관 내부에 편안한 가죽 소파들이 충분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전시 큐레이터가 등장해 조곤조곤한 어투로 진행을 시작했다.

국내외 현대 작가들의 그림 몇 작품이 소개되었다. 준희는 심드렁한 눈으로 줄지어 등장하는 작품들을 응시했다. 초대된 게스트들은 강욱진 회장처럼 나이가 꽤나 있으신 분들이 주류였고, 그래서인지 젊은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보다는 고풍스럽고 직관적인 작품들 위주로 선정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준희는 연거푸 물을 축내며 흘끗 고개를 돌려 홀에 앉은 사람들을 훔쳐보았다. 강욱진 회장 또래의 기업 총수나 국회 의원들, 눈에 익은 유명 인사들이 몇몇 보였다. 느리게 시선을 돌리던 준희는 문득 시선을 멈춰 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조명이 어둡고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걸리는 익숙한 실루엣이 있었다. 준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여 시야를 확보하고는 그쪽을 또렷이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날 기세로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곁에 앉아 있던 강욱진 회장이 의아한 눈으로 옆을 흘끔거렸다.

멀리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분명 차주완이었다. 그러나 행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준희는 가만히 등을 기대어 앉으며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준희는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강욱진 회장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어릴 적부터 보아 왔던 강욱진 회장의 지인들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의 지루한 대화에 억지로 끼어 어색한 미소를 띠면서도 준희는 혹시라도 주완이 행사장을 떠났을까 초조해하며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향기에 몸이 얼어붙은 건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의원님도 같이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느샌가 다가온 주완이 준희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며 다정한 음색으로 어른들에게 인사했다. 강욱진 회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기사 본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아직 이리 잘 만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회장님.”

“그야 애들 일이기는 해도, 그저 복받은 일이다 생각하고 있지요.”

덕담 아닌 덕담이 이어지는 동안 주완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허리를 살짝 당겼다. 몸이 자연스럽게 밀착됐다. 준희는 마른침을 넘기며 제 옆에 선 남자를 흘끗 훔쳐보았다. 여느 때보다도 딱 떨어지는 슈트를 입은 그의 얼굴에 남녀노소 좋아할 법한 조각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건 준희 역시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의원뿐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은 이쪽을 찍고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았고, 주완과 준희는 어디서든 이목을 끌어당기는 타입이었다.

한동안 강씨 집안의 사위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주완은 적당히 시간이 지나자 강욱진 회장에게 따로 인사하고 먼저 행사장을 떠났다.

“식사라도 대접해 드려야 예의지만 업무상 스케줄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회장님. 다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어, 그래. 바쁜 사람을 오래 잡아 둘 순 없지. 또 보세.”

그는 어른들 앞에서는 다양한 표정으로 적절한 예의를 갖추는 법을 아는 남자였다. 이어서 주완은 과하지 않게 준희의 허리를 토닥거리며 눈인사를 하곤 자리에서 사라졌다. 준희는 그가 빠져나간 출입구에 한참이고 시선을 빼앗겨 있어야만 했다.

“아주 홀딱 반했구만, 반했어.”

“……그런 거 아닌데요.”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빼긴 왜 빼, 이놈아?”

“타박하지 마세요. 그래도 잘…… 됐잖아요.”

강욱진 회장의 잔소리에 건성으로 얼버무리던 준희는 문득 말끝을 흐렸다.

정말로 잘된 걸까? 이 관계는 얼마나 안정적으로,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걸까? 순식간에 늘어난 의문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점령했다. 이러다가 관계가 갑작스레 산산조각 나기라도 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준희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억지로 생각을 털어 버렸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

「이번 토요일에는 제 작업실에 오실래요?」

이번에는 주완이 약속 장소를 예약해 알려 주기 전에 준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초대해 주는 겁니까?」

「초대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네.」

「저는 좋습니다.」

전부터 고대했던 일이었다. 아직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준희에게 작업실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이 오롯 그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와 일상이 스며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뜰리에에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들떠 올랐다.

약속된 토요일 아침부터 부리나케 작업실로 달려가 이곳저곳을 손보았다. 옷차림에도 고민이 많았지만 편안한 장소인 만큼 후드 티셔츠에 청바지를 선택했다. 화분들을 돌보고 물감을 정리하고 액자의 위치를 조절했다. 대청소를 하거나 그림의 위치를 바꾼 것이 아닌데도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주완은 예정된 시간보다 십여 분쯤 빠르게 찾아왔다. 평소 잘 울리지 않는 작업실 정원 밖 대문 벨소리에 준희는 고개를 바싹 들고 바지런히 움직였다. 정원 산책용 슬리퍼를 꿰어 신고 달려 나가 문을 열자 평소보다 한결 캐주얼한 차림의 주완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준희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멎었다가 아래로 살짝 내려갔다.

꽃이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에 숨이 턱 막혔다. 주완은 그의 앞으로 꽃다발을 살짝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정식 선물은 작업실을 둘러보고 필요한 걸로 하고 싶어서, 오늘은 꽃뿐입니다.”

“꽃만으로도 감사한데…….”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실례하겠습니다.”

준희는 그가 건넨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그의 향을 닮은 장미가 메인 테마가 되는 꽃다발이었다. 주완은 향기로운 내음과 함께 성큼 정원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준희는 열어 준 문을 닫고는 작업실로 앞장서며 그를 안내했다.

작업실 테이블 위에 꽃다발이 놓였다. 그를 위해 특별히 구비해 두었던 핸드 드립 커피를 내리는 동안 주완은 뒷짐을 진 채 말없이 1층의 작업실을 가만가만 돌아다녔다. 그는 평소 잘 입지 않는 니트 티셔츠에 편안한 무드의 슬랙스를 입었으며, 단정한 로퍼를 신고 있었다. 주머니에 가볍게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은 당장 인화되어 잡지에 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멋스러웠다.

“아…….”

준희는 드리퍼 위에 뜨거운 물을 내리는 동안 눈으로 주완을 쫓다가 결국 물을 넘치게 담아 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다른 곳을 보던 주완의 시선이 이쪽으로 옮겨졌다. 그가 알 만하다는 듯이 픽 웃었다.

“커피를 내릴 거면 커피를 내리고, 나를 볼 거라면 이리 가까이 와서 봐요.”

“금방 다시 내려 드릴게요.”

“커피도 사 올 걸 그랬네. 내가 센스가 없었습니다.”

“……그런 말 마시고요.”

준희가 고개를 슬쩍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넘친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 버리고는 심기일전해서 다시 커피 제조에 돌입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왔던 주완이 계단을 턱짓하며 물었다.

“내리는 동안 위층 구경하고 있어도 됩니까?”

“네, 물론이죠.”

허락이 내려지자마자 그는 계단 위쪽으로 사라졌다. 눈앞에는 없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묵직하게 두근거렸다. 오히려 눈앞에서 사라지니 커피를 내리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준희는 어렵사리 한 잔의 따뜻한 커피를 완성했다.

준희는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주완은 전시된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준희가 2층으로 올라오자 주완은 눈을 그림에 고정한 채로 물었다.

“여기에 준희 씨가 그린 그림도 섞여 있어요?”

“네. 몇 개는 제가 그린 거예요.”

“솜씨가 좋네. 그림 쪽으로 직업을 가질 생각도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그다지요.”

“그래요? 아까운 재능이네. 어떤 게 현업 작가의 그림이고 어떤 게 강준희 씨 그림인지, 이름표가 달려 있지 않으니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예기치 않은 칭찬에 뺨이 붉어졌다. 준희는 공연히 어깨만 으쓱하고는 주완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주완은 커피를 한 모금 맛보고는 계속해서 그림을 관찰하다가 문득 물었다.

“혹시 나도 그려 줄 수 있습니까?”

“저는 그리고 싶어요.”

주완의 질문에 준희가 곧장 대답했다. 그를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했었다. 당연하지. 그의 얼굴과 몸매는 준희가 보기에 완벽할 만큼 이상적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디가 제일 그리고 싶어요?”

그러자 주완이 물었다. 그제야 준희는 잠시 골몰했다. 마음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그리고 채색해 제 방에 걸어 두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구태여 한 부분만 그려야 한다면……, 준희는 망설이며 주완의 얼굴을 쓱 훑었다.

갈팡질팡하는 시선이 잘 깎인 이목구비를 지나 너른 어깨, 니트 티셔츠에 감춰져 있는 팔뚝과 손목까지 가파르게 떨어졌다. 주완은 저를 샅샅이 관찰하는 준희를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희는 결정했다.

“손을 그려 보고 싶어요.”

“얼굴이 아니라?”

“네.”

마디가 길고 약간 투박해 단단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의 손은 남자다우면서도 아름다웠다. 특히나 그의 손이 무언가 쥐고 있을 때에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곤 했는데, 그게 사람 심장을 퍽 설레게 만들었다.

그러자 주완이 제안했다.

“지금 간단하게라도 그려 보겠습니까?”

“그럴까요?”

준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려 볼 생각에 신이라도 난 것인지 두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총명하게 반짝거렸다.

“준비할게요. 마저 구경하고 천천히 내려오세요.”

그는 빠르게 내려가서 이젤을 세웠다. 시간을 지나치게 소요할 수 없었으므로 적당한 크기의 도화지를 배치하고 도구를 골랐다. 평소 목탄으로 크로키 하는 것을 선호하는 그였지만, 보다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었으므로 고민 끝에 연필 데생을 선택했다.

주완은 금세 준희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준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연신 생글거리며 연필을 골라 들었다.

“어떻게 하고 있으면 됩니까? 모델은 처음이라.”

“자연스럽게 계셔도 될 것 같아요. 잠시만요.”

준희는 창가를 향해 놓여져 있던 소파를 끌어 테이블 가까이에 붙였다. 주완은 그가 정해 준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이젤과 멀지 않은 거리였고, 쏟아지는 햇살도 적당한 자리였다.

“손목 좀 걷어 드려도 돼요?”

“마음껏 하세요.”

주완이 오른손을 내밀며 대꾸했다. 준희는 살금살금 그의 니트 티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그러자 주완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입꼬리를 발견한 준희는 그제야 제 행동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스팽킹을 좋아하는 강준희 씨를 위해 직접 매를 때려 주겠다는데, 손목까지 스스로 걷어야겠습니까?

매를 맞기 전마다 습관처럼 그의 소매를 직접 걷어 올려 주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목뒤가 따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준희는 점점 붉어지는 뺨을 티 내지 않으려 시선을 슬쩍 피하곤 이젤 뒤로 가서 앉았다.

주완은 테이블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의외네요. 가장 그리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요?”

“준희 씨한테 있어서 썩 다정하지 못했을 손이니까. 앞으로도 그럴 테고.”

준희는 도화지를 고정시킨 합판 뒤로 얼굴을 숨겼다. 그러고는 대꾸 없이 연필로 도화지 위에 구도를 잡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손을 확인하기 위해 이따금씩 합판 옆으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대부분은 숨어 있었다.

“부끄러움도 탈 줄 아는 성격이었습니까?”

“저를 어떻게 보신 거예요.”

주완이 놀리듯 묻자 준희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사각사각, 연필심이 도화지를 스치는 소리가 둘 사이의 공백을 채웠다. 주완은 준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합판을 응시하기도 했고 커피를 홀짝거리기도 했으며 때때로 정원으로 고개를 돌려 자라나는 식물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모델 중에서는 꿀알바라고 생각해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가만히 있는 것이 어려워 진땀을 빼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그렇지만 태어나 해 본 적 없는 일일 텐데도 주완은 여유로웠다.

“지루하지는 않으세요?”

“이제 삼십 분은 되었나. 괜찮습니다.”

“가만히 있는 걸 힘들어하는 모델도 있어서요.”

“오히려 좋습니다. 시간이 멈춰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순간이 잘 없거든.”

주완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는 여유로울 뿐만 아니라 모델 역할을 해 주는 일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 평소에 워낙 일분일초가 아쉬울 만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준희는 소리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결 마음을 놓고 연필을 놀렸다.

“요즘 준희 씨를 만날 때면 정말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림을 반쯤 완성해 나가던 준희의 연필이 그의 말과 함께 멈춰 섰다. 합판 밖으로 눈을 빼꼼히 내민 준희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주완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미소만 띠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다정한 눈길, 표정, 말투. 그것 외에도 심장을 간지럽게 하는 일들은 더 있었다. 토요일에는 전보다 많은 시간을 준희에게 할애해 주었고, 플레이도 전에 비해 수위가 낮고 온건해진 편이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준희는 언제나 소리를 내어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만의 하나 혹시라도 일상의 평화를 해칠까 저어되었기 때문이다.

“주완 씨.”

“네.”

“우리는 뭐…….”

그리고 하마터면 분위기에 휩쓸려 물을 뻔했다. 우리는 뭐냐고. 관계의 정의를 내려 달라고. 결말이 예측되지 않는 확률 게임에 마음을 몽땅 털어 내놓을 뻔했다. 마침 전화가 와서 주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기어이 묻고야 말았을 것이다.

주완은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 전화를 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준희에게 눈으로 양해를 구했다.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완은 전화를 받으며 정원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

누구의 전화일까. 남겨진 준희는 쥐고 있던 연필의 표면을 살살 쓸었다. 정원으로 나간 주완의 얼굴은 꽤 심각하고 진지해 보였다. 업무에 관련된 통화일까. 별것 아닌 통화였으면 굳이 자리를 비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해진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화한 것일지도. 준희는 걱정 어린 눈으로 창밖 주완의 걸음걸이를 쫓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완은 그에게서 아주 등을 돌려 버렸다.

등을 돌리니 흐리게 보였던 입 모양마저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준희는 떨떠름한 얼굴로 발을 느리게 굴렀다. 연필을 쥐고 있던 손바닥에 얼핏 식은땀이 배어났다.

주완은 십여 분쯤 지나서야 전화를 끊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가만히 그를 기다리던 준희는 고개를 바싹 들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누구한테 온 전화예요?”

주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까와 같은 자리에 앉아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아, 바쁜 일 생기셨어요?”

“아니에요. 얼마나 걸릴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조금만 더 그리면 얼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촉하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그려요.”

준희가 기민하게 반응하자 주완이 너그럽게 대답했다. 주완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손을 올려놓고는 반대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얼굴에는 옅게 수심이 묻어나는 듯했다. 준희는 아까의 통화 내용이 못내 궁금해졌지만 더 캐물을 수 없어 아랫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

“조금 걷죠.”

바래다주는 길, 주완은 집에서 조금 멀리에 차를 세우고는 제안했다. 준희는 군말 없이 냉큼 조수석에서 내렸다. 차로 닿으면 5분일 거리이니 걸어가게 되면 30분은 걸릴 것이다. 그만큼 그와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격이니 나쁠 것이 없었다.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푸른 도화지에 일어난 온화한 파문이 눈에 담겼다. 날이 좋았고, 걸음걸이는 느긋했다. 말없이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녹아내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준희는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음을 옮기며 가만히 호흡했다. 그는 그 순간의 공기마저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적이 드물어 편하네요.”

“네, 날씨도 좋고요.”

“종종 걸을 만한 장소를 알아보겠습니다. 줄곧 실내에서 만나느라 답답했을 수도 있겠어요.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물론 실내도 좋지만…… 주완 씨랑 이렇게 걷는 것도 좋네요. 하늘도 예쁘고.”

그렇게 이야기했을 무렵 주완이 그의 손을 당겨 가 잡았다. 실컷 도화지에 옮겨 놓았던 단단한 손이 그보다 약간 작은 준희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준희는 약간 긴장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굴렸다.

분명 걸어서 30분은 걸리는 거리였는데, 벌써부터 집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준희는 최대한 미적미적 걸음을 늦추었고, 주완은 기꺼이 보폭을 맞춰 주었다.

“누님들은 전부 출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할아버지랑 둘이 사는데 할아버지가 저보다 더 바쁘세요.”

마침내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주완이 물었다. 준희는 어깨 너머로 집을 흘끗 돌아본 다음 푸념하듯 대답했다. 마주 서는 바람에 맞잡고 있던 손이 자연히 떨어지게 되었다.

인사를 나눌 타이밍이었다. 준희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 볼게요.”

준희는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맞은편의 남자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함께 걸어온 길을 홀로 돌아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짜리 헤어짐임에도 불구하고 다음 약속이 마냥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동거하면 어떨까. 혹은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제대로 된 관계 정립조차 끝내지 못한 주제에 퍽 야무진 꿈이었다. 준희는 자라나는 희망을 꾹꾹 눌러 참으며 눈을 내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주완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의 여린 마음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주완의 니트를 구겨 쥐었다.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준희의 허리를 당겼다. 사이가 좁혀지며 고개가 약간 더 기울어졌다.

주완의 혀는 선을 넘나들며 준희의 숨을 부드럽게 훔쳐 갔다. 준희는 넘나드는 그의 혀를 핥고 느리게 문지르며 숨을 집어삼켰다. 그의 다정한 키스에 심장은 세차게 뛰었고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한 허무한 감정에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정말 잘 우는 사람이네.”

“…….”

“미안하게도 나는 당신의 우는 얼굴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다지 달래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떨어진 사이로 젖은 눈을 발견한 주완이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다시 아까처럼 마주 선 그가 준희의 상기된 뺨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쓸어 주며 입을 열었다.

“강준희 씨.”

“……네.”

“준희 씨가 이야기해 보세요.”

“뭐에 대해서…….”

“우리 관계가 뭐인 것 같은지.”

“아…….”

준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작업실에서 그에게 전화가 오는 바람에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전화를 받느라 제 질문을 놓치고 말았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하게 캐치했던 모양이었다. 준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모르겠습니까?”

“혹시 주완 씨와 제가…….”

“응, 나와 준희 씨가?”

“……교제하는 사이인가요, 지금?”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준희가 가까스로 묻자 주완의 얼굴에 조각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닌 것 같습니까?”

아……. 온몸의 감각이 현실의 것 같지가 않았다. 뒤통수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렇지만 얼을 타다가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준희는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뇨, 맞는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연애하는 사이인 것 같아요. 확실해요.”

이어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어깨 위로 이마를 묻었다. 제 품으로 쏙 숨은 준희를 내려다보던 주완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준희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그런 일반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영 무지해서, 배워야 할 게 많을 겁니다.”

“……저라고 누구를 가르칠 정도는 아니에요.”

준희는 주완에게 안긴 채 지레 찔려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완은 그의 엉덩이를 달래듯 톡톡 두드려 주었다.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세요. 집 앞에서 애정 행각이 너무 길었습니다.”

“아쉬운데…….”

“금방 또 볼 텐데 그걸 못 참겠습니까?”

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온 준희가 어깨를 떨어트렸다. 불평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더는 투덜거리지 않았다. 준희는 살금살금 눈치를 보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번에는 진짜 갈게요.”

“그래요.”

“……주차한 데까지 바래다줄까요?”

“시간 끌지 말고.”

어지간히도 야속한 사람이었다. 연인이 되었다고 호락호락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다지도 한결같을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결국 고집을 꺾은 준희는 한 발자국씩 대문 앞으로 뒷걸음질 쳤다.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주완 씨.”

대문 안쪽에 서서 좁아져 가는 문틈으로까지 주완을 지켜보던 준희는 못내 아쉬워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어느덧 어두워진 공기 중으로 짙은 한숨이 배어 나왔다. 준희는 아직 강욱진 회장이 돌아오지 않은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방으로 돌아와 씻고 나서까지 심장의 떨림은 오래도록 멎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덜 말린 채 침대에 몸을 눕히자 비로소 몽롱하고 노곤해졌지만 그뿐이었다. 태어나 처음 카페인을 들이켠 사람처럼 심장은 끊임없이 쿵쾅거렸다.

연애가 처음인 것도 아닌데…….

준희는 손가락을 들어 말랑한 입술을 가만히 건드려 보았다. 그와 나누는 모든 행동은 새롭고 생경하기만 했다. 오래 공들여 얻은 관계여서인지 심심풀이로 게임처럼 유지해 오던 그동안의 연애와는 결이 달랐다.

반쯤 취한 기분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누워 있을 때 옆자리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준희는 손을 더듬어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혹시 주완에게 온 전화일까 봐 반사적으로 통화 수락부터 눌렀는데, 발신자는 그가 아니었다.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 문휘영이었다.

휘영과는 양가에 친분이 있어 어려서부터 아는 사이였고, 대학교 동기로 만나 함께 학교를 다니며 친해졌다. 그렇다는 건 집안 내 포지션이 준희와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데다가 사는 동네도 얼추 가까워 준희는 그와 종종 만나 테니스를 치곤 했다.

“어, 왜.”

[야, 이러기냐?]

“다짜고짜?”

[초대해 줘.]

본래도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종잡을 수 없는 화법이었다. 준희는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아, 발뺌하지 말고.]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끊어.”

[차주완 대표 말이야. 이번에 파티 연다며. 소문은 무성한데 나한테는 왜 아직 소식이 없냐? 우리 사이 고작, 어? 그것밖에 안 되는 사이야?]

“…….”

들떠 있던 기분이 심연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주완이 파티를 주최한다는 소식은 지나가는 말로라도 들은 바가 없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자리이기 때문일까? 그렇다기에는 알짜배기 사교 모임만 골라서 참석하는 휘영이 탐을 낼 만큼 화려한 파티인 것 같은데…….

[야, 강준희. 듣고 있어?]

사업하는 사람이니 인맥 관리 차원에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준희는 문득 작업실에서 모델 노릇을 하다가 전화를 받고 슬며시 자리를 피했던 주완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파티에 관련된 전화였을까? 이쪽에 알리는 게 껄끄러워서 통화 내용을 숨겼던 걸까? 그렇다면 내 입지는 뭐가 되는 거지? 그런 자리에까지 초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밖에 안 되는 걸까?

준희는 젖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리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답 없는 준희가 답답했는지 휘영이 씩씩거리며 거듭 당부했다.

[하여간 초대 기다릴 테니까 나 절대 빼지 마. 기다린다?]

“……알았으니까 끊어.”

[그리고 우리 테니스장은…….]

용건을 마친 휘영이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준희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일단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대충 알아들은 척으로 무마했지만 끓는 속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준희는 들고 있던 휴대 전화를 옆으로 툭 던져 놓았다.

찬물을 끼얹은 듯 심장이 고요해졌다. 감정의 굴곡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짜증 나.”

준희는 꼼지락거리며 움직여 이불을 뒤집어써 버렸다. 그러는 사이 이불 위를 유영하던 휴대 전화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다음 토요일이 돌아오도록 준희는 최소한의 연락만을 유지했다.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알렸지만 전처럼 살갑게 안부나 미사여구를 붙이지는 않았다. 「오늘은 집에 있으려고요.」, 「잠시 작업실에 나왔어요.」, 「갤러리예요.」. 용건만 간단히 한 메시지에는 주완 또한 길게 답장하지 않았다. 전에도 그랬듯이.

그렇지만 펜트하우스에서 마주친 주완의 얼굴은 예상보다 퉁명스러웠다. 준희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뻔뻔한 척 눈을 굴렸다.

“슬슬 제대로 혼나고 싶어서 일부러 시위했던 겁니까?”

“네? 뭐가요?”

“그래, 그 정도 수작을 부리기에는 강준희 씨가 아직 지나치게 초심자지.”

식탁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그는 맞은편에 앉은 준희를 흘끗 바라본 뒤 다시 시선을 거둬 갔다.

근래 들어 플레이하기로 합의한 토요일의 양상도 전과는 사뭇 달랐다. 펜트하우스에 입성하자마자 옷부터 벗게 만들었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평범하게 데이트하듯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시켜 먹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관계를 맺곤 했다.

플레이의 수위 또한 전에 비하면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뺨에 손을 올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매를 들어 보았자 열 대 전후로 끝나는 수준이었으며, 그가 거리껴 할 만한 난이도 높은 플레이를 요구하는 일도 없었다. 관계는 준희가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정도에서 그쳤다.

주완은 준희를 옆에 둔 채 밀린 업무를 마무리할 모양이었다. 일이 바쁜 사람이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없이 너그러웠을 텐데, 준희는 지난주 휘영에게 들은 소식으로 여전히 속이 시끄러운 상태였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면, 원래 연애를 그런 식으로 하는 타입인가?”

“제가 왜요?”

“알면서 모르는 척 좀 그만둘 수 없어요? 지난 일주일 동안 분명히 나한테 연락하는 일에 소홀했잖습니까. 하필 ‘그날’을 기점으로.”

“그건…….”

“이제 잡힌 물고기라 이건가?”

더 참을 수 없었는지 주완이 보고 있던 서류를 덮어 버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하필이면 관계를 정립한 것과 휘영에게서 소식을 들은 날이 교묘하게 겹쳐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듯했다. 준희는 그제야 아차 싶어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파티를 주최하는 일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던 것에 심술이 났다고 고백하려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를 마주 보고 있던 주완이 미간을 약간 좁혔다.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준희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파티…… 여신다면서요. 친구한테 들었어요.”

“어떤 친구. 이번에도 전 남자 친구한테 들었던 건 아니고?”

“그건 절대, 맹세코 진짜 아니에요. 왜 전에 같이 테니스 치러 갔던 그 친구요. 대학 동기.”

그러자 주완은 팔짱을 끼고 앉아 등받이 뒤로 삐딱하게 몸을 기대며 준희를 응시했다.

“그런 이야길 들었다는 게 문제가 됩니까?”

“……저만 모르고 있었나 해서요. 그래도 명색이 연인인데.”

준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주완의 한쪽 눈썹이 일순 들썩거렸다. 이해가 되었는지 짜증스럽던 기색이 사라졌다. 그는 팔짱을 풀고 낮게 한숨 쉬었다.

“본인한테만 비밀로 한 것 같아서 화가 났던 겁니까?”

“왜 비밀로 하셨어요?”

“비밀이었을 리가.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은 일정이라 말하지 않았던 거고, 마침 어제 확정된 참이라 오늘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준희 씨한테 제일 먼저.”

“…….”

“알잖아요.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소문부터 도는 경우 많다는 거.”

그는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또각또각 두드렸다. 딱 떨어지는 그의 설명에 일주일 내내 켜켜이 쌓여 온 응어리가 눈처럼 녹아내리는 듯했다. 준희의 표정이 풀어지자 주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어 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뭐 때문에 불만이었는지는 이해했어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불만이 생기면 그때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세요. 일주일 내내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신경 쓰이셨어요?”

“강준희 씨 같으면 안 쓰이겠습니까?”

주완이 되물었다. 대답과 다름없는 질문이었다. 공연히 가슴께가 간질거려서, 준희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막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웃음기를 발견한 주완이 헛웃음 지으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아주 오르락내리락하지. 도대체 롤러코스터도 아니고.”

“죄송해요.”

“그런 의미에서 다다음 금요일 저녁은 비워 두세요.”

“저 초대하시는 거예요?”

“당연한 걸 그런 식으로 묻지 말아요.”

“네.”

잔소리를 들었지만 이번에는 서운하지 않았다. 준희는 히죽 웃어 버리곤 시선을 피했다. 주완은 조금 전에 보고 있던 서류를 다시 펼쳐 들었다.

“잠시 보겠습니다. 명단을 내일까지 넘겨야 해서.”

그는 양해를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완은 서류를 확인하며 필요한 곳에 만년필로 사인을 남겼다. 그런 주완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준희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제 지인들도 불러도 돼요?”

“지인들?”

주완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반사적으로 되묻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비스듬히 들어 올린 눈빛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전화를 해서 초대해 달라고 으름장 놓았던 문휘영이 떠올라서 물어봤던 것인데 타이밍을 잘못 잡은 걸까? 준희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어색하게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강준희 씨 전 남자 친구들 줄줄이 불러다 소개할 참입니까?”

“절대 그럴 생각은 없었…….”

“자꾸 까불지.”

“…….”

“가서 벽 보고 서 있어요.”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문휘영 때문이었다. 준희는 속으로 제 친구를 씹고 또 씹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직 앉아서 뭐 해요?”

“갈게요. 가요.”

준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주완이 턱짓했던 벽으로 다가갔다. 식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멀건 벽을 마주 보고 서니, 마치 학생이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심지어 그는 학창 시절에도 다른 녀석들이 체벌받는 걸 본 적이나 있지, 직접 받은 경험은 없었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서 있어요.”

“네…….”

하필 흰 벽지에는 무늬조차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금세 지루해졌다. 똑바로 선 자세조차 몇 분 지나지 않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제라도 손을 뒤로 보내 뒷짐이라도 지고 싶었지만,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던 터라 이제 와서 자세를 다시 잡을 수도 없었다.

이상하게 온몸 구석구석 전부 신경이 쓰였다. 흰 벽에는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머리가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시계라도 확인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깨가 뻐근하고 손끝이 저려 왔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강준희 씨.”

귀신같이 눈치챈 주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준희는 간절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주완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티셔츠 벗고, 하던 거 계속 하세요.”

“…….”

“움직일 때마다 하나씩 벗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네.”

스트립쇼를 펼치게 될 판이었다. 준희는 그가 명령한 대로 니트 티셔츠를 벗어 옆에 개어 놓고는 벽을 마주 보고 섰다. 넓지만 선이 얇은 어깨와 판판한 가슴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아까 원했던 대로 뒷짐을 진 자세였다.

한쪽 손목을 잡아 고정시키니 아까보다는 자세를 유지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그렇지만 맨살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하니 언제든지 고개를 들어 저를 지켜볼 수 있는 위치의 주완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목뒤와 날개 뼈를 지나 허리선까지 훑어 내릴 것이라 생각하면 공연히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했다.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숨을 들이마시는 일조차 별일로 느껴졌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온몸의 근육이 기름칠을 잊은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듯했다.

“아…….”

“바지 벗어요.”

결국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을 디뎌 놓자마자 주완에게 발각당했다. 주완은 여상한 목소리로 지적했고, 준희는 바지를 벗기 전에 조심스럽게 어깨를 주물러 스트레칭 했다.

바지까지 벗고 나니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옷가지라고는 속옷과 양말이 전부였다. 그는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다시 벽을 보고 섰다. 흰 벽을 오랫동안 노려보았더니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완 씨, 저 어지럽…….”

“요즘 내가 많이 봐주긴 했나 보네. 엄살이 심해졌습니다.”

“…….”

주완은 엄격한 말투로 슬며시 새어 나오려던 투정이 쏙 들어가게끔 만들었다. 준희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티 나지 않게 작게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들썩이는 어깨를 기민하게 눈치챈 주완이 똑똑 식탁을 두드렸다.

“강준희 씨,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요?”

“아닙니다.”

“마저 벗고 이리 와요.”

뒤늦게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주완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은 채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흘끔 고개를 돌려 보니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준희는 황급히 속옷과 양말까지 마저 벗어 개어 두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주완은 의자를 뒤로 빼내어 편하게 앉은 다음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준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주완이 다시 한번 허벅지를 턱짓했다.

“엎드려요.”

준희는 그의 허벅지에 골반을 지탱해 엎드렸다. 엉덩이가 봉긋 솟은 채 머리와 다리가 땅을 향하게 되는 자세였다. 뽀얀 엉덩이 위로 주완의 손길이 내려앉았다. 그가 엉덩이를 투박하게 주물러 대는 동안 준희는 바닥을 짚은 손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눈앞에 보이는 주완의 발목을 동아줄처럼 붙잡았다.

짜악-. 별다른 예고도 없이 손바닥이 엉덩이에 감겼다. 그의 길고 단단한 손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체벌 도구였다.

“읏.”

무릎이 절로 꺾여 허공에 달랑거렸다. 주완은 엉덩이를 번갈아 내려쳤다. 뽀얗던 엉덩이 위로 손자국이 연거푸 내려 찍혔다. 그의 손바닥은 따갑고도 둔탁했다. 살과 살이 아프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준희는 불이 나는 듯한 감각에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흐, 읏, 아……, 주완 씨, 저 아프…….”

“그럼. 아프라고 때려 주는 건데.”

“흐…….”

“지금까지 몇 대 맞았습니까?”

호되게 매 맞은 엉덩이는 손찌검이 멈췄음에도 여전히 화끈거렸다. 아래로 향하고 있어 피가 쏠린 얼굴 또한 붉고 뜨거웠다. 준희는 주완의 발목을 쥔 채로 고민했다. 몇 대 맞았지? 세라고 하지 않은 탓에 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탓이다.

“……맞을 만큼?”

“허.”

제법 뻔뻔하게 웅얼거리자 주완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준희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지시했다.

“일어나세요.”

“…….”

엄살이 통한 걸까? 준희는 얼떨떨하게 그의 허벅지에서 일어나 눈을 굴렸다. 주완은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의 다리를 발로 툭 건드렸다.

“적당히 넘어가 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습니다. 엎드리세요, 여기.”

“그, 주완 씨…….”

약한 소리를 하며 머뭇거렸지만 이내 뒷덜미를 붙들렸다. 거친 손길로 식탁 앞까지 몰아세우는 바람에 준희는 더 저항하지 못하고 식탁 모서리에 골반을 댄 채 몸을 기역 자로 꺾어 엎드렸다. 차디찬 대리석의 식탁 위에 손바닥을 짚어 지탱하는 사이 주완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주완이 2층으로 올라가 버리고 혼자 남겨진 준희는 식탁에 엎드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판판한 대리석 표면에 배를 깔고 엎드리니 2층의 체벌 가구에 묶여 무자비하게 스팽킹을 당했던 지난날이 저절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찔한 기억이다. 준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진작에 제대로 대답할걸. 괜히 일을 키운 격이었다. 준희는 마음속으로 수십 번 후회하며 울상을 지었다. 주완이 무시무시한 매를 들고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상 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주완의 화가 풀릴 때까지 충분히 엉덩이를 터뜨릴 수 있도록 꼼짝없이 버텨 내는 길이 전부였다.

“강준희 씨.”

그가 가지고 내려온 것은 라이딩 크롭이었다. 채찍의 일종이었고, 마편 같은 생김새였다. 손잡이와 편을 잇는 대가 가늘었고, 가죽으로 된 편은 직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손잡이를 휘두를 때마다 낭창낭창 탄성 있게 흔들리는 것이었다.

식탁에 엎드려 발발 떨고 있는 준희의 뒤에 선 그는 크롭을 가볍게 휘두르며 여상하게 물었다.

“몇 대나 맞아야 진짜 반성이 되겠습니까?”

대 수를 정하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준희의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는 발바닥을 들썩거리며 현재 자세에서 가능한 만큼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러자 준희의 수상한 몸짓을 발견한 주완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샅샅이 눈으로 훑었다. 주완이 크롭으로 준희의 허리께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일어나 보세요.”

“그게, 그…….”

“일어나서, 나 보고 똑바로 서요.”

건조한 명령에 준희는 벌써부터 울고 싶어졌다. 반응이 오기 시작했던 것은 그가 2층으로 사라진 뒤부터였다. 흠씬 혼이 났던 기억에 반사적으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고, 살살 열이 오르는가 싶더니 아래로 홧홧한 기운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수습하기 위해 식탁 위를 짚고 선 손바닥에 힘을 주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의 명령을 침묵으로 무시할 수 없어서, 준희는 머뭇거리며 상체를 일으키곤 쭈뼛쭈뼛 돌아섰다.

“허.”

그의 아랫도리 사정을 확인한 주완이 헛웃음을 치며 삐딱하게 섰다.

준희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를 기다리면서 혼자 세운 걸로 모자라 그 은밀한 사정을 낱낱이 내보이는 꼴이라니. 수치심에 심장이 저릴수록 아래가 꼿꼿이 기립했다. 손을 내어 중심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더 크게 혼이 날 터였다. 준희는 양옆으로 내린 주먹에 힘을 주었다.

“맞을 생각 하면서 세운 겁니까?”

“…….”

“어떻게 여태 마조히스트라는 자각 없이 살았지? 내가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그는 기분을 읽을 수 없는 말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준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주완이 크롭을 허공에다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허락도 없이 건방지게.”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여유 있네요. 말대꾸를 다 하고.”

“…….”

“손 뒤로 하세요.”

간신히 입술을 뗐지만 화만 부르고 말았다. 준희는 속으로 ‘망했다.’를 되뇌며 손을 뒤로 보내 뒷짐을 지고 섰다. 그러자 크롭의 가죽 편이 꼿꼿이 선 살 기둥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주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뜻 읽어 낸 준희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자, 잠깐만요.”

“고개 숙여서 제대로 보세요. 소유주 말을 안 듣는 좆이 어떻게 고생하는지.”

“잘못했……, 아흣……!”

짝, 낭창낭창 휘던 크롭이 기립한 성기 위를 따갑게 내려쳤다. 가죽으로 된 면이 살갗을 휘감으며 후려치고 지나가자 단 한 대 만으로도 위력이 대단했다. 준희는 인사하듯 허리를 꺾고 다리를 동동 굴렀다. 예상치 못했던 고통에 엉덩이와 허벅지에까지 고루고루 힘이 들어갔다.

“허리 세워요. 다섯 대만 맞읍시다.”

“안 될, 아흑……, 주완 씨, 너무 아파요. 너무…….”

“여섯 대.”

“주완 씨…….”

“매가 너무 적지. 일곱 대.”

엄격하게 대 수를 올려 가는 목소리에 맞을 때까지만 해도 잔잔하던 마음이 거세게 요동쳤다. 꾸물거리던 준희는 간신히 허리를 세우고 아까의 자세로 복귀했다. 설움을 머금은 눈매는 어느덧 붉게 얼룩져 있었다.

“자세 유지하고, 카운팅 하세요.”

짧게 경고한 그가 크롭을 휘둘렀다. 짜악, 마편이 다시금 꼿꼿이 선 성기를 매섭게 후려치고 지나갔다. “아흡!” 준희는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지만 허리를 숙이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자 주완이 픽 웃으며 말했다.

“숫자 세야지.”

“아, 흣, 하나…….”

“안 센 매는 무효입니다.”

그의 말에 벌써부터 남은 매가 두려워 턱이 덜덜 떨렸다. 준희는 꼼지락거리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 아래에 보이는 성기에는 매 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준희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짝-! 크롭이 경쾌하게 성기 위에 감싸였다. 이번에는 귀두 근처였다. 헉, 가쁜 숨이 절로 쏟아졌다. 준희는 발바닥을 다른 쪽 발등 위로 비비며 짜내듯이 숫자를 셌다.

“으읍, 흑……, 하나…….”

고작 세 대에 페니스가 불이 난 듯 뜨거운데 일곱 대를 마저 감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세이프 워드가 입 안에서 자꾸만 어른거렸지만 준희는 울음과 함께 꿀꺽 삼켜 내며 눈물 고인 눈으로 제 성기를 바라보았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살 기둥 위로 크롭이 떨어졌다. 찰싹, 가죽이 여린 살을 후려칠 때마다 성기가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아, 으……, 둘, 흐으……. 아흑, 셋……!”

크롭은 귀두 아래부터 뱃가죽에 가까운 기둥까지 빠짐없이 후려치며 기둥을 붉은빛으로 물들여 나갔다. 매가 떨어질 때마다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으며, 허벅지는 벌벌 떨렸다. 다섯 대째 맞았을 때 준희는 기어이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아흑, 하……, 너무 아프……, 아으으, 주완 씨…….”

“두 대 남았습니다.”

주완은 입꼬리를 올리며 귀두 위로 크롭을 살짝 가져다 댔다. 때릴 곳을 가늠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꾹꾹 눌러 참던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고 있었던 탓에 눈물이 살 기둥 위로 톡 떨어져 타고 흘렀다.

“안 돼요, 흐읍……. 너무 아플 것 같아요. 참을 수 없을 거예요.”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주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가죽 편으로 귀두 위를 살살 쓸었다. 예민해진 살갗을 문질러 대니 선단에 애액이 슬며시 맺혔다.

“고개 들고 나 봐요.”

“흐, 흐읍, 흑…….”

한번 터진 눈물은 수습할 수 없이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고개를 들고 마주 본 주완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맺혀 있었다. 봐주지 않을 것이다. 깨닫고 나자 준희는 차라리 이 고통이 빨리 지나가 버리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간절한 얼굴을 한참이고 마주 보던 주완이 눈을 내렸다. 그의 시선이 우느라 들썩이는 대로 가늘게 흔들리는 성기에 꽂혔다. 주완은 만질만질해진 귀두 위로 정확히 크롭을 휘둘렀다.

짜악, 크롭은 귀두 표면에 빠르게 감겼다가 살갗을 훑으며 아래로 떨어졌다.

“아흑!”

준희는 단말마에 신음과 함께 그대로 주저앉았다. 숫자도 세지 못한 채였다. 준희는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옹송그리고 두 손으로 페니스를 감쌌다. 차마 어루만지거나 비빌 수도 없는 고통이 아래를 지배했다. 그는 화끈거리는 아래를 감싸 쥔 채 울음을 꾸역꾸역 토해 냈다.

“무효.”

그를 더 서럽게 만든 것은 뒤통수 위로 쏟아진 차디찬 음성이었다. 준희는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자 크롭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주완이 그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투명하고 커다란 눈망울은 서럽게 일그러져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붉어진 코끝과 입술을 샅샅이 훑어보던 주완은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준희가 그의 무릎에 간신히 매달려 고개를 마구 저어 댔다.

“주완 씨! 저 더는……, 더는 정말 못 맞겠어요. 흐윽……, 살려 주세요.”

“매 좀 더 맞는다고 죽지는 않을 겁니다.”

“흑, 흐으……. 아니에요. 죽고 말 거예요.”

허, 주완이 짧게 웃었다. 그는 입가에 걸린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제안했다.

“다른 곳으로 대신 맞게 해 줄까?”

“네! 제발요. 부탁드려요.”

“그럼 아까처럼 식탁에 엎드려서 엉덩이 벌리세요. 앞으로 못 맞겠으면 뒤로 맞아야지.”

준희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려 심호흡했다. 주완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움직이는 것이 현명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딛고 서서는 식탁을 잡고 섰다. 어느새 힘이 죽은 성기는 아직까지도 터질 듯 후끈거렸다.

그는 겨우 배를 붙이고 식탁에 엎드려 손을 뒤로 가져갔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이 양 엉덩이를 쥐고 벌리자 선홍빛 구멍이 드러났다. 주름지게 꽉 다물려 있는 입구 위를 크롭의 가죽 끝이 위아래로 살살 쓸어 댔다.

“아…….”

“아직 느끼면 안 됩니다. 이번에는 숫자 제대로 세도록 하세요.”

“……네, 주완 씨.”

눈물을 삼키고 꾸역꾸역 대답하자마자 크롭이 떨어졌다. 짜악, 꽉 다물린 구멍 위를 빗기듯 스치고 지나갔다. 준희는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놓고 맞은 곳을 비비고 싶어졌지만 가까스로 인내했다.

“흣, 하나.”

다시 하나부터 시작이었다. 세고 나니 아득해졌다. 준희는 차디찬 식탁 위에 뺨을 비벼 식히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자 다음 매가 떨어졌다. 짜악-! 이번에는 가죽이 질기게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

“하윽, 두울……!”

성기에 이어 구멍에까지 불이 난 듯했다. 차라리 엉덩이를 맞을 때가 나았다. 준희는 공연히 말대꾸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구멍을 맞는 것이 성기를 얻어맞는 것보다야 나았지만 같은 부위를 거듭 맞을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크롭이 구멍 위를 세 대, 네 대 갈기고 지나갈 때마다 손을 놓고 싶은 욕망으로 온몸이 벌벌 떨렸다. 짝! 선홍빛 구멍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어느덧 힘이 풀린 구멍은 주완이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달싹이며 빠끔거렸다.

“아, 흑……, 여섯, 하아…….”

한 대만 더……. 그렇게 되뇌면서도 슬슬 한계에 도달한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금 타고 흘러 식탁 위를 적셨다. 준희는 바닥을 딛고 선 발끝을 동동거리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주완은 제 앞에 회음부까지 노출시킨 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구멍을 벌름거리며 발을 구르는 준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태는 손으로 얻어맞은 엉덩이까지 고루고루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기어이 무너뜨리고만 싶은 정복욕이 들끓었다. 주완은 크롭의 손잡이를 다잡고는 강도를 높여 휘둘렀다.

짜악-! 전보다 큰 마찰 음을 남기며 크롭이 떨어졌다. 주완이 예견한 대로, 준희는 엉덩이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반사적으로 제 구멍을 가렸다.

“아흐윽, 으……, 흐윽, 흐으으…….”

작은 가죽 마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통증에 준희는 본능적으로 맞은 부위를 마구 쓸었다. 눈치가 보인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숫자를 세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목뒤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던 준희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주완의 무릎에 매달렸다.

“자, 잘못했어요. 봐주세요. 제발……. 제발요, 주완 씨.”

그는 바지춤을 잡고 매달려 주완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매를 타고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세이프 워드를 입에 담지는 않았다. 주완은 그런 준희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애원하는 저를 말없이 응시하는 주완을 마주 보던 준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을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한 잔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이윽고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키고는 입술을 벌렸다. 그러고는 바지춤 위로 불룩해진 주완의 것을 머금었다.

“아……, 으응…….”

앞섶이 침으로 젖어 들었지만 주완은 그가 하는 양을 그대로 두었다. 준희는 입을 한껏 열어 그의 것을 천과 함께 감쳐물고, 혀를 내어 표면을 핥았다. 그러면서도 눈을 들어 주완을 마주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붉어진 코끝이 앞섶에 스쳐 더욱이 발갛게 물들었다.

툭, 손에 들려 있던 크롭이 떨어져 내렸다. 주완은 그대로 준희의 허리를 감싸 안아 들었다. 가볍게 들려 옮겨지는 와중에도 준희는 주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연신 입술을 놀렸다.

“하여간 엉큼합니다.”

“……봐주세요.”

그가 내려놓아진 곳은 침실이었지만 침대 위는 아니었다. 주완은 침대에 걸터앉았고, 준희는 그를 마주한 채 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주완은 눈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눈빛으로 보내는 신호를 인지한 준희는 느릿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달칵, 버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희는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준희는 손을 내어 침 묻은 앞섶과 속옷을 끌어 내려 주고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속옷 위로 드러난 페니스의 위용이 제법 흉흉했다. 준희는 살 기둥을 소중하게 감싸 쥐고는 입술을 벌려 단단히 모양이 잡힌 귀두를 감쳐물었다. 그는 입 안에서 혀를 내어 뜨겁고 매끄러운 표면을 살살 핥았다. 사탕 빨듯 혀로 굴리며 눈을 들어 주완을 올려다보니, 눈살을 약간 찡그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야릇했다.

주완은 손을 내어 준희의 귓불을 어루만졌다. 다정한 손길에 등줄기가 간지러워 몸이 떨릴 정도였다. 준희는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남자의 귀두를 빨았다. 턱을 쓰며 이리저리 핥고 혀를 놀리는 통에 입술과 맞닿은 표면 사이로 침이 새어 흘렀다.

“오늘따라 사고뭉치 강아지처럼 굴더니. 후으……, 애교로 무마하면 그만인가?”

“읍, 으우…….”

‘무마했다’고 하기에는 혼날 만큼 혼난 것 같은데……. 준희는 반사적으로 대꾸하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눌러 참으며 그의 살 기둥을 한껏 더 집어삼켰다. 목을 크게 열고 고개를 비틀어 가며 끝까지 삼키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읏.”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낑낑거리며 애쓰는 준희를 내려다보는 주완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힘들면 도와주겠습니다.”

“아…….”

그렇게 말한 주완이 준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턱이 위로 들려 입에 양껏 머금고 있던 성기를 느리게 뱉어 냈다. 제 것을 바깥으로 빼낸 주완은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며 다시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준희는 눈치껏 혀를 바깥으로 빼고는 그의 것이 드나들 길을 만들었다.

“목구멍 크게 열어요.”

“컥, 흐, 아읍…….”

준희는 주완의 양 허벅지를 바투 쥐고는 고개를 젖히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가 말한 대로 목구멍 안쪽까지 최대한 넓히려 목젖을 껄떡거렸지만 커다란 성기가 안쪽을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껄떡이는 숨소리를 참을 수는 없었다.

주완은 제 것을 준희의 입에 물린 채 느리게 허리 짓 했다. 적당히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이다. 준희는 본능적으로 뜨거워진 눈으로 그의 눈을 응시하며 꾸역꾸역 혀를 내어 제 안으로 밀려드는 기둥을 애무했다.

“후…….”

그 붉어진 눈매를 바라보며 허리를 움직이던 주완이 이내 제 것을 빼냈다. 그러고는 준희의 허리를 당겨 단번에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눕혀진 준희의 입가는 침과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주완은 팔을 교차해 티셔츠를 벗어 버렸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티셔츠 위로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차례로 떨어졌다.

부드러운 침구 위에 몸이 눕혀지자 긴장이 풀려 온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탈의를 마친 주완의 그림자가 제 위로 드리우자, 준희는 그의 탄탄한 가슴을 거쳐 두 눈을 응시했다.

“적당히 봐주면 분명 또 기어오를 텐데.”

“…….”

“자꾸 봐주게 돼서 곤란하네.”

준희는 손등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살짝 닦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입술 위로 주완의 온기가 내려앉았다. 쪽, 쪽. 가볍게 버드 키스를 남기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

준희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는 다리를 들어 조르듯 그의 허리를 감쌌다.

“보채기는.”

그는 제 허리에 감긴 준희의 발목을 잡아 높게 들어 올렸다. 히트사이클 기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흥분한 그의 구멍은 젤을 이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축축이 젖어 있었다. 주완은 주름진 입구 주변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손가락을 넣어 내벽을 누르며 안쪽 깊숙이 삽입했다.

“으으응.”

얻어맞아 발그레한 엉덩이에 쭈뼛쭈뼛 힘이 들어갔다. 주완은 뜨거운 숨을 삼키며 꼼꼼하게 아래를 풀어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혹독하게 다뤄진 구멍이 저릿했지만, 그래서인지 평소보다도 더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좋아 준희는 신음을 감췄다.

주완은 손가락을 늘려 가며 공들여 애무했다. 체벌과 전희로 뜨거워진 몸은 쉽게 젖고 말랑해졌다. 손가락이 전립선 부근을 훑을 때마다 성기까지 지르르 울림이 일었다. 준희는 손을 더듬어 침구를 간신히 틀어쥐고선 가쁜 숨을 내뱉었다.

“하, 으…….”

어느 정도 길이 들자 손가락이 전과 달리 푹푹 찔러 넣어지며 안쪽을 자극했다. 주완의 진지하던 눈빛에는 어느덧 장난기가 얼핏 감돌았다. 으응? 헉헉거리던 준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

“아……, 으응.”

그의 손가락이 교묘하게 성감대를 비껴가며 내벽을 자극했다. 감질나는 추삽질에 준희는 끙끙거리며 허리를 뒤척였지만, 발목을 붙잡혀 있어 자세를 바꾸기 쉽지 않았다.

준희는 침구를 쥐었던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간신히 더듬었다.

“흐응, 읏, 주완 씨…….”

“응.”

“넣어, 흣, 넣어 주세요.”

“뭘 말입니까?”

그는 추삽질 하던 손을 멈추고 빙긋 웃었다. 원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준희는 그런 류의 부탁을 부끄러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도 통용되는 외설에 가까워질수록 준희에게는 익숙하고 손쉬워졌다.

준희는 말을 꺼내기 전에 한 차례 머리를 굴렸다. 익숙하게 패를 까 보이며 발칙하게 굴어 봐야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판단이 이르자 그는 부러 애달픈 표정을 유지한 채 주완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주완 씨 거…….”

난잡한 말이 익숙하지 않아 당황한 듯한 기색을 띤 채였다. 그러자 주완은 웃음기를 거두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검고 깊은 눈동자에는 음욕이 가득했다. 발목을 쥔 손에서 힘이 풀리자 준희는 다시금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고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 안에, 넣어 주세요.”

구멍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주완은 귀두를 입구에 맞춰 밀어 넣음과 동시에 준희의 입술을 단숨에 삼켰다. 간신히 들고 있던 뒤통수가 침구에 닿았다. 입술 사이로 혀가 엉켰다. 주완은 그의 양손을 깍지 껴 맞잡으며 허리를 쳐올렸다.

입술도, 손도, 성기도.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서로에게 꼭 맞물려 흔들렸다. 고개가 좌우로 움직이며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준희는 턱을 움직여 가며 주완의 온기를 남김없이 받아 마셨다. 그와 동시에 아래는 반복적으로 결합했다. 허벅지가 엉덩이에 맞닿는 소리가 매 맞는 소리처럼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응, 으응…….”

“하…….”

입술과 입술 사이로 체액이 가늘게 선이 되어 이어졌다. 멀어진 얼굴은 성감에 젖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전립선을 짓이기듯 안으로 파고들어 박아 대는 자극에 준희는 눈을 질끈 감고 참았던 신음을 토해 냈다.

주완이 허리를 아래로 쾅쾅 박을 때마다 비음 섞인 신음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주완 역시 낮게 신음하며 허리 짓 하는 동시에 바짝 서서 허공에 흔들리고 있는 준희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감싸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흑, 흐, 으응……, 아! 아으응…….”

자극은 평소보다 쉽고 빠르게 찾아왔다. 성기도 구멍도 방금 전에 크롭으로 채찍질 당해 최고치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완의 성기와 손길이 오갈 때마다 쓰라렸지만, 그래서인지 그와 동시에 몰려오는 쾌락은 더없이 짜릿했다.

“주완 씨, 으으응, 아……!”

“아……, 씨발.”

자극당한 귀두의 끝에서 애액이 흘렀다. 절정으로 치닫는 자극에 준희는 허리를 반사적으로 움찔움찔 비틀며 히익, 하고 자지러졌다. 깍지가 풀린 손으로는 다시 한번 침구를 틀어쥐었다. 이윽고 정액이 뱃가죽 위로 튀었고, 주완은 낮게 욕을 짓씹으며 허리 짓의 속도를 높였다.

“아, 흐……. 아……!”

주완의 성기가 잔뜩 자극받은 전립선을 제대로 긁고 짓이기며 드나들었다. 준희가 사정하고도 한동안 안을 쑤셔 대던 주완은 준희를 끌어안다시피 한 상태로 사정했다. 땀과 애액으로 범벅이 된 두 몸이 한데 뒤엉켜 엉망이 된 숨을 들썩였다.

준희는 사정의 여운을 느끼며 몸을 늘어뜨렸다. 자극이 남은 허벅지가 의지와 상관없이 파르르 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태어나 이토록 만족스러운 관계를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탈력감에 젖은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의식은 까무룩 멀어져 갔다. 주완이 준희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자도 됩니다.” 허락해 주는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칠흑 같은 새벽이었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가 불편함을 느껴 힘겹게 눈을 떠 보니, 저를 품에 안은 채 잠들어 있는 주완의 얼굴이 보였다. 그로부터 상황을 자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해 준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잡시다.”

옅은 잠에서 깨어난 주완이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놀란 저를 달래는 주완의 손길이 다정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아닌 밤중에 청승을 떨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준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눈을 감았다.

그의 품 안이었기 때문인지 준희는 다시 까무룩 잠들 수 있었다. 제대로 깨어났을 때에는 커튼 안쪽으로 가녀린 아침 햇살이 새어 들고 있었다.

“잘 잤습니까?”

먼저 깨어난 주완은 구태여 일어나지 않은 채 그 자세 그대로 준희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준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슬쩍 비볐다. 눈곱이라도 꼈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짧은 점검을 마친 그가 다시 슬쩍 고개를 들고 주완을 마주 보았다.

“……원래 잠은 집에서 자는 주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예외도 있는 법이지. 특히 연인에게는.”

“…….”

연인……. 고작 두 글자인 그 단어가 뭐라고 아침부터 가슴이 뛰었다. 주완은 그를 안아 주던 팔을 떼어 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살짝 눌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까지 멋있어 보이는 것을 보니 이번 생에 콩깍지를 벗어 내기란 글러먹은 듯했다.

“집이 아니라 요리를 해 줄 순 없겠고, 브런치라도 주문해 둘 테니 조금 더 자고 있어요. 먼저 씻겠습니다.”

“네.”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침구가 여전히 포근하게 느껴져, 준희가 제안을 냉큼 수락했다. 주완은 그가 귀엽다는 듯 픽 웃으며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려 주었다. 준희가 얼빠진 표정을 짓게 된 것은 당연했다.

“뭐 하신 거예요?”

“남자 친구한테 이 정도도 하면 안 됩니까? 일반적인 연애는 내가 잘 몰라서.”

“아뇨? 더 해 주세요. 얼른요.”

“싫어요. 버릇 나빠질 것 같아서.”

잽싸게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머리를 내밀었지만 주완은 장난스레 엄한 표정을 지으며 준희의 콧잔등 위로 손가락을 튕겼다. 기대와 달리 콧대를 얻어맞고 만 준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도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 친구잖아요.”

“동시에 내 강아지이고, 장난감이지.”

“…….”

“아닙니까?”

“……맞아요.”

반박할 수 없었다. 준희는 그가 부여한 모든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그게 탈이었다. 준희는 침실에서 벗어나는 그의 뒷모습을 씁쓸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본인이 샤워 가운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뭐지?’

그러고 보니 관계 후 바로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가뿐하고 개운했다. 가운을 슬쩍 들춰 안을 보니 깨끗하고 보송하게 닦여 있는 것이 보였다. 준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완이 사라진 문가를 바라보았다.

제가 잠든 사이 그가 살뜰한 손길로 정리해 주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준희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이불을 뒤집어썼다.

***

주완이 씻고 나오기 전에 받아 놓은 물로 반신욕을 충분히 즐기고 거실로 나와 보니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호텔식 브런치가 알차게 차려진 식탁 위로 주완이 직접 내린 두 잔의 따뜻한 커피가 올려졌다.

마치 신혼부부의 아침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었다. 준희는 떨리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관리하며 따뜻하게 데워진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지인은 몇 명 정도 초대할 생각입니까?”

“네?”

“초대할 사람 없어요?”

주완은 도톰한 베이컨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며 물었다. 준희가 반문하자 다시 한번 물으며 눈을 마주쳤다. 준희는 의아했다.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전 남자 친구 줄줄이 소개할 거냐고 어제 분명히…….”

그러자 주완이 픽 웃으며 칼질을 멈추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 꼬투리였던 게 당연하잖아요.”

“……네?”

“강준희 씨 실컷 혼내 보려고 꼬투리 잡은 겁니다. 울며 매달리는 꼴 보려고.”

“아…….”

“그런 멍청한 소리 그만 내고 열심히 들어요. 어제 기운 많이 뺐을 테니까.”

정말이지 새롭게 가르치는 건 영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억울했는지 당황했는지 상기된 준희의 뺨을 발견하고 나니 주완의 기분이 산뜻해졌다. 이대로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것도 좋겠지. 그는 속으로 되뇌며 잘 자른 베이컨을 준희의 앞에 놓아 주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던 주완이 문득 눈썹을 들썩였다. 베이컨과 계란 요리를 콕콕 찍어 먹던 준희도 고개를 들었다.

“아, 그나저나 선물은 언제 줄 겁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준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선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럼 기왕 고를 거 살롱에서 골라 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강준희 씨가 원하는 플레이 도구를 선물로 받고 싶은데.

‘그 사달’이 나기 전에 그에게 주어졌던 일종의 숙제. 주완은 그걸 생각해 낸 거였다. 준희는 제 방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쇼핑백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다음에 드릴게요.”

“그렇게 하세요. 파티 끝나고 줘도 좋고.”

“그럴까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파티 끝나고 내 집으로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콜록, 갑작스러운 습격에 기침이 일었다. 입에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면 뱉어 내는 실수를 범해 주완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준희는 오물오물 입 안의 잔여물들을 삼켜 내고는 물었다.

“주완 씨 집에요?”

“싫은가요?”

“그럴 리가요! 너무……, 너무 좋아서요. 꼭 가고 싶어요. 초대해 주세요.”

“펜트하우스도 좋아하는 장소이긴 하지만 매번 여기에서 볼 수는 없고. 앞으로는 그보다 자주 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준희는 얼빠진 얼굴로 저도 모르게 인사했다. 주완은 헛웃음을 지으며 식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가볍게 턱을 괴었다.

“이런 일에 감사 인사 할 필요는 없어요. 당연한 거니까.”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변명처럼 덧붙이며 커피를 들었다. 그의 교목 내음만큼이나 짙은 향이 코끝을 스쳤다. 준희는 저를 바라보는 주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평소와 달리 편안한 옷을 입고 있어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사시사철 푸른 상록처럼 단단해 보이는 남자. 아마 이 남자의 풀어진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세상에 허락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에 준희는 기분이 들떴다.

그때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주완의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화면을 흘끗 응시한 주완은 화면을 아래 방향으로 가도록 뒤집어 놓았다.

“편하게 받으셔도 돼요.”

준희가 슬쩍 말했지만 주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여는 대신 옆에 놓아두었던 경제지를 작게 펼쳐 들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남들보다 더 귀한 모습을 발견하고도 더 깊은 비밀까지도 소유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준희 또한 그랬다. 그의 더 내밀한 면들까지 목격하고, 손을 뻗어 어루만지고 싶은 욕구에 공연히 조급해졌다.

“먹고 일어납시다. 데려다줄게요.”

집에 가고 싶지 않은데……. 주완은 다정한 듯 무심한 제안으로 준희의 욕심을 손쉽게 깨뜨렸다. 준희는 순순히 눈을 내리고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

그날 집에 바래다주는 길에 주완은 파티에 초대해야 하는 지인들의 명단을 추려 보내 달라고 부탁했고, 준희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휘영과 테니스장에서 만나 정식으로 초대할 수 있었다.

테니스보다도 파티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휘영은 라켓을 휘두르는 것보다 입을 놀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준희도 하는 둥 마는 둥 운동을 마치고 나란히 앉아 이온 음료를 마시는 쪽을 택했다.

“나랑 같은 고등학교 나온 걔 알지. 이강 회장님네 막내. 걔 진짜 성격 꼬였기로 유명하거든?”

“알지.”

나란히 앉은 휘영은 이온 음료를 입에 털어 넣으며 준희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강 회장댁 막내 이기석의 악명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을뿐더러 사교장에서 오며 가며 만나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이로, 가벼운 안부를 물을 수 있을 정도의 관계였다. 그다지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생판 남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연 그의 악명 때문이었다. 대단한 사고를 치고 다니지는 않지만 줄줄이 딸린 형제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비틀린 심사와 주변인들을 업신여기는 태도와 말버릇. 직접 겪지 않았지만 익히 들은 면면들이 상당했다.

“걔도 거기에 온다잖아. 나한테 연락해서 어찌나 뻐기던지. 그러니 내가 너를 재촉하지 않고 배겨?”

결론은 미안하다는 말을 이기석에게까지 빙 둘러 하고 있는 거였다. 준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사과를 건성으로 받아넘겼다.

“하여간 그 새끼는 친구도 없나. 별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까지 연락해서는. 아무리 봐도 이상한 애라니까? 혹시 걔가 너한테 접근하면 상대해 주지 마.”

“걔가 나한테 접근할 일이 뭐 있겠어.”

“혹시 모르잖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라니까?”

휘영은 거듭 당부하더니 목소리를 슬쩍 죽여 물었다.

“차주완 대표랑은 어때? 너 꽤 오래 만난다?”

“뭐가.”

“너 원래 되게 변덕스럽잖아. 누구 만나도 금방 질리고, 헤어지고. 기억 안 나? 2년 전인가. 웬 남자가 테니스장까지 쫓아와서는…….”

“야, 그런 소리 혹시라도 주완 씨 앞에서 꺼내기만 해.”

“알았어, 알았어. 나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인마.”

휘영의 질문이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누구든 준희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자라면 호기심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분방한 연애 생활을 즐겨 온 까닭이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더니 휘영이 슬쩍 밀착해 오며 흥미롭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번에는 결혼 전제로 사귀는 거야? 결혼하려고? 천하의 강준희가?”

“내가 뭐 어쨌는데.”

그의 은근한 질문에 준희는 시치미를 떼며 눈을 굴렸다.

“워낙 바람 같은 성정이었잖냐. 그래서 나는 네가 평생 혼자 자유롭게 살 줄 알았어.”

과거에는, 그러니까 주완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준희의 생각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눈길이 닿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그러다 흥미가 식으면 자연히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될 줄만 알았다.

그렇게 같은 궤도를 반복하다 관성에 젖어 정신이 녹진해졌을 무렵 주완을 만났다. 그는 탄력을 잃었던 그간의 감각들을 전부 깨어나게 만드는 남자였다.

처음에는 그저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준희는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잡아 두고 싶다는 열망으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욕심은 점점 더 커져 갔다. 그가 손에 잡히지 않을수록, 이따금씩 혼자만의 비밀을 만들수록, 알 수 없는 면면이 늘어날수록 더.

“나는 하고 싶어, 결혼.”

툭, 손에 쥐고 있던 공을 세게 던졌다. 손을 벗어난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는 바닥에서 여러 번 튕겨 어디론가로 도르르 굴러가 버렸다.

“너만 그렇게 마음먹었다면야, 뭐. 차주완 대표 입장에서는 솔직히 너만 한 혼처 없지.”

“그렇게 생각해?”

준희는 온기 잃은 눈으로 휘영을 흘끗 보며 물었다. 휘영은 입 아프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태초에, 그러니까 역사책에나 등장할 법한 과거에는 성별의 구분 없이 알파와 오메가가 결합해 아이를 낳았다. 현재에 와서는 남자 오메가의 임신 기능이 상실된 것이 과학적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동성혼은 명맥을 유지해 왔다.

특히나 상류층 집안 사이에서는 임신 기능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으로 맺어져 육아 비용을 자선 단체에 기부하거나 아이를 입양해 가정을 꾸리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일종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게다가 준희는 혈통 좋은 우성 오메가였고, 집안은 대한민국에서는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만큼 경제적으로 탄탄했다. 휘영이 말한 대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자수성가한 차주완 대표에게는 더없이 좋은 혼처라는 것이 세간의 시선일 터였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정말로 그걸 원할까?

준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휘영은 듣지 못했다. 그는 라켓을 챙겨 자리를 털었다.

***

주완은 다시 바빠졌다. 그는 파티 전 데이트를 취소하는 대신 준희의 옷에 꼭 맞는 슈트를 선물로 보내왔다. 커다란 바구니에 풍성하게 장식된 꽃다발도 함께였다.

하필 강욱진 회장이 집에 있을 때 선물이 도착해 은근한 눈초리를 받게 되었지만 표정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선물로 보내온 슈트는 화이트 톤의 슬림한 모양이었다. 재킷은 단정했지만 셔츠가 풍성하고 소매에 디테일이 들어가 있어 얼핏 화려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군중 속에서도 도드라질 법한 디자인이었다. 슈트를 입어 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율이 “여느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 같네요.” 첨언했을 정도였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이리저리 확인하고 부드러운 옷감을 여러 번 더듬어 보던 준희는 옷을 벗어 드레스 룸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주완에게 메시지로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꽃이랑 옷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주완 씨.」

「그동안 받은 것들에 비하면 약소하지. 금요일에 시간 맞춰 데리러 가겠습니다.」

「같이 가요?」

「그럼 따로 올 생각이었어요?」

별것 아닌 한 마디에 공연히 가슴이 벅찼다. 같이 가는 게 당연한 사이…….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당연하지 않은 현실에 마음이 미어지곤 했었는데. 헤실헤실 흐르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침대 위를 뒹굴었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주완과 함께하는 첫 공식 석상이 아니던가. 그는 파티가 있는 금요일 오전부터 헤어와 메이크업 디자이너를 집으로 초대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단장했다. 파티가 끝나고 그의 집에 방문할 것을 대비해 속옷도 가장 아끼던 것으로 골라 입을 정도였다.

주완은 금요일 오후, 약속한 시간에 맞춰 그를 집 앞까지 마중 왔다. 그가 왔다는 소식에 준희는 헐레벌떡 뛰어나가려다가 도로 방으로 돌아갔다. 숙제처럼 내 주었던, 살롱에서 고른 ‘그 선물’을 깜빡한 탓이었다. 다시금 유난스레 현관으로 급히 걸어가는 준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욱진 회장이 쯔쯔 혀를 찼다.

“얌전하게 다니거라, 인석아.”

“저 오늘 외박해요!”

“그렇게 떳떳하게 소리칠 일이지, 그게. 아이고.”

잔소리를 다 듣기도 전에 현관문을 닫고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손에는 오랫동안 방구석에 묵혀 두었던 쇼핑백을 든 채였다.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킨 뒤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던 주완은 준희를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문을 열고 나오던 준희는 상기된 표정으로 잠시 멈춰 섰다. 각 잡힌 정장 위에 얇은 롱코트를 걸친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주완은 준희의 차림을 한 차례 위아래로 훑더니 담배를 꺼뜨렸다.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서자 주완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준희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다음부턴 외투도 같이 선물하겠습니다.”

“……네.”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그는 부드럽게 잔소리하며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준희는 그를 스쳐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깨에 걸친 코트에서 배어나는 그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코를 파묻을 뻔했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주완이 차에 올라 안전벨트까지 직접 끌어 매어 주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준희는 간헐적으로 숨을 참았다.

“예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직접 보니 더 예쁘네.”

차를 출발시키며 주완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도리어 턱을 치켜들고 기분 좋은 티를 감추지 않았을 텐데, 왜인지 얼굴이 뜨거워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답지 않게 창피해하는 일이 늘었다.

파티 장소는 한옥과 양옥의 느낌이 적당히 섞여 있는 5성급 호텔의 가든 홀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재즈풍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완과 함께 도착했을 때 정원은 이미 도착한 게스트들로 제법 붐볐다.

입구로부터 주완과 준희가 걸어 들어오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차례 쏠렸다. 대부분은 다시금 눈을 돌리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지만, 가까이 있던 몇몇은 인사를 하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주완은 홀 직원이 건넨 샴페인을 두 잔 들어 그중 한 잔을 준희에게 건넸다. 준희는 여전히 주완의 코트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꼭 영역 표시 같은 모양새였던지라,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멀리에서 준희를 발견한 휘영이 골이 난 낯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친구랑 이야기하고 있을게요.”

“그렇게 하세요.”

주완의 손님들과 적당히 눈인사를 마친 준희는 그렇게 속삭인 뒤 적당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슬쩍 빠져나온 준희를 가로챈 건 휘영이었다. 준희를 곁으로 끌어당긴 그는 들고 있던 샴페인을 한껏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홀의 바깥쪽으로 이동한 터라 주완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준희는 그쪽을 이따금씩 흘끗거리다가 휘영이 건넨 디저트로 눈을 옮겼다.

“이기석 기어이 와서는 아까부터 어찌나 뻐기는지 재수 없어 죽겠어.”

“예민하게 굴 정도야?”

“몰라. 하여간 요즘 내 눈엣가시야.”

준희에게 디저트 한 접시를 건넨 그는 거기에 담겨 있던 체리를 하나 집어 씹어 먹으며 어디론가로 눈을 흘겼다. 게스트가 꽤 많아 북적거리는 탓에 특정 인물을 찾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휘영은 준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 그런데 안색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래? 괜찮은데.”

“뺨이 좀 붉은 것 같아서. 아무튼 여기 있어 봐. 나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올게.”

약간 긴장하기는 했어도 컨디션이 안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양 뺨에 열기가 얼핏 오르는 것 같기는 했다. 준희는 휘영이 사라지고 나서 손등으로 뺨을 슬쩍 눌러 보았다.

히트사이클이 가까워서일지도 모른다. 그는 주기가 다른 오메가보다 긴 편일뿐더러 주기에 영향을 강하게 받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당연히도 평소와 구분될 정도는 되었다. 그마저도 주기적으로 주완과 몸을 섞고 있어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준희는 열감이 오르는 목뒤를 슬쩍 쓰다듬었다. 주완에게 말해서 먼저 그의 집에 가 있는다고 해도 실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강준희, 오랜만이다.”

대기실이라도 찾아 쉬고 있을까 부유하던 시야 앞을 기다란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준희는 상대를 약간 올려다보았다. 휘영이 이를 갈며 신경 쓰던 이기석이었다. 준희보다는 약간 크고, 예민함을 드러내듯 모델처럼 뾰족한 녀석이었다. 하필이면 줄줄이 나쁜 이야기만 들었던 터라 눈썹을 치켜뜨니 기석은 속이 훤하다는 듯이 비죽 웃었다. 기분 나쁜 미소였다.

“어떻게 좀 해라. 네 장미꽃 냄새가 자욱해.”

“네 담배 냄새는 어떻고.”

“담배 냄새만?”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이온 음료 마시듯 단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짝다리를 짚고 비스듬히 선 꼴이 퍽 양아치 같아 보였다. 알 만하지. 담배뿐이랴. 그에 대한 소문 중에는 좋을 것이 하나 없어서, 놈이 담배나 술이 아닌 마약에 취해 있다고 해도 준희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준희는 눈을 돌려 문가를 흘끔 응시했다. 휘영이 들어오면 함께 자리를 옮길 요량이었다. 휘영은 기석을 아니꼬워하고 기석은 자리를 잡고 와인을 동 낼 예정인 듯하니 같은 공간에 두어 보았자 소란만 일으킬 것이 뻔했다.

“언제 헤어질 거야?”

기석의 도발은 급작스러웠다. 준희는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이자 기석이 픽 웃었다.

“뭐라고 했어?”

“뭘 못 들은 척이야. 네 연애 편력, 이 자리에 모르는 사람도 있어? 차주완도 알 텐데.”

껄렁한 언사가 부차적으로 신경을 자극했다. 준희는 가소롭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고 싸늘한 시선으로 기석을 응시했다. 그러나 기석은 기죽지 않고 이죽거렸다.

“여기 있는 적령기 오메가들, 너희 헤어지는 것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것 몰라?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려. 대기표 뽑아 놓은 녀석들 불쌍하잖냐.”

“무슨 개소리야.”

“그래, 너도 너지만. 망나니로 소문난 너랑 달리 올곧게 자수성가해 준 우성 알파가 넙죽 굴러들어 오기만을 바라는 집안이 한둘이겠냐고.”

“…….”

“어차피 너야 결혼 생각도 없잖아. 많고 많은 연애 상대 중 하나였을 텐데 굳이 열애설까지 나서 번거롭지 않아?”

모욕을 당해서인지 히트사이클이 다가오기 때문인지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온몸의 감각이 저릿할 만큼 예민해졌다. 준희는 거칠어지려고 하는 숨을 겨우 고르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지나친 오지랖이었다. 듣던 대로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어떻게든 이쪽을 흥분시켜 보려는 수작이 뻔했다. 이러한 상황 자체를 게임으로 여기고 있을 녀석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틀어쥔 주먹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너희 집안 정도 되면…… 솔직히 차주완으로는 성에 안 찰 거 아니야.”

“씨발, 안 닥쳐?”

쾅. 근처에 있던 테이블 위로 주먹을 휘둘렀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주변 몇몇의 눈길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씨근거리는 숨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잘 손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페이스에 말려들어 가면 지는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판 위에 주완이 끌어내어진 순간부터 준희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기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한 걸음 다가섰다.

“왜 그래, 도련님.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

“솔직히 너 차주완 하나로 부족하잖아.”

준희는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하필이면 가득 찬 와인 병이 잡힌 것은 이기석에게 불운이었다. 병의 주둥이 쪽을 틀어쥐었던 준희는 그걸 들어 올리기 전에 한 차례 이성의 끈을 더듬었다.

그는 병을 거꾸로 들어 이마를 깨는 대신 와인을 들이붓는 쪽을 택했다. 양아치처럼 노랗게 물들인 놈의 정수리 위로 붉은 와인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씨발! 뭐 하는 짓이야! 이 개 같은 새끼가.”

뒤늦게 손을 들어 병을 쳐 낸 기석이 씩씩거리며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허공으로 떨어진 와인 병이 바닥을 구르며 남은 와인을 줄줄 토해 냈다. 준희는 미동 없는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홀에 모인 게스트들 중 반 이상이 이쪽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고들 있었다.

와인으로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대충 쓸어 물기를 치운 기석이 팔을 뻗었다. 준희의 멱살을 틀어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옷깃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붙들려 비틀어졌다.

“아악! 이건 또 뭐야?”

그의 손목을 가로챈 건 차주완이었다. 잡은 손목을 허공에 던지는 눈빛이 서늘했다. 그는 기석의 어깨를 밀어 한 걸음 물러나게 한 다음 준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에 준희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도대체 무슨 소란이냐고 당장이라도 추궁할 것만 같아,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러나 주완은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없어요?”

“……네.”

“흥분했어요? 페로몬 향이 짙은데. 나가 있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자리 정리하고 곧 따라 나갈 테니까.”

기석은 발작을 하듯 주완에게 덤벼들었지만 주완은 그를 손쉽게 제압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자리에 오래 머물러 보아야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 뿐인 듯했다.

준희는 꽤나 당황했다. 그는 지키고자 했던 것이 없어 꽤나 당당하게 살아왔다. 사교장에서의 작은 소란이야 강욱진 회장이 무마시켜 줄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는 그동안의 자신이 제법 안하무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완의 명성에 흠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그가 힘겹게 쌓아 올린 것들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뭔데. 무슨 일이야?”

뒤늦게 들어온 휘영이 인파를 비집고 들어와 준희의 팔을 덥석 쥐었다. 휘영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준희의 팔을 당겨 다시금 인파를 뚫고 소란의 근원지로부터 멀어졌다.

바깥으로 아주 나오고서야 준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했다. 분노를 마저 표출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답답함과 원치 않는 소란에 휘말리고 말았다는 억울함이 한데 섞여 감정을 헝클어뜨렸다.

“안 봐도 뻔하지. 이기석 그 새끼가 문제였지?”

휘영이 눈치를 보며 준희를 다독였다. 준희는 이를 악문 채 주먹을 그러쥐었다. 겨우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있을 때 뒤쪽이 웅성거린다 싶더니 선명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주완임을 알 수 있었다.

“준희 씨와 같이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문휘영이에요. 준희랑은 대학교 동기이고…….”

“아, 종종 듣고도 이제 뵙네요. 파티가 일찍 끝나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럼 준희 씨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네? 네, 그렇게 하세요.”

휘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주완은 준희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고는 에스코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건물 입구로 주완의 차가 나타났다. 준희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흥분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준희는 소리 없이 긴 숨을 뱉어 내며 차창 바깥의 먼 하늘을 응시했다.

***

그의 집은 의외로 포근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인테리어 전반적으로 짙은 색감으로 통일감을 주었지만 나무 가구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했다. 물론 깔끔하고 단정한 것은 사무실이나 펜트하우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초지종부터 엄격하게 따져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완은 그렇게 칼 같은 남자는 아니었다. 생활 공간의 인테리어처럼 의외인 구석이 있었다. 그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캐모마일 티를 건네며 준희를 진정시켰다.

주완은 몸의 기운을 기민하게 살피며 물었다.

“반신욕이라도 하겠습니까? 몸은 괜찮아요?”

“……아직은요.”

그가 건넨 티를 한 모금 마시며 손목을 약하게 주물렀다. 히트사이클 때문인지 몸에 열감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아직은 견딜 만한 정도였다. 그렇지만 주기마다 신경 역시 기민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준희는 흘끗 눈을 올려 주완의 표정을 훑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기분은 좀 어때요?”

“많이 나아졌어요.”

“그럼 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주완은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만 기석에게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 그에게 그대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진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들으면 기분 나쁠 말들이었다. 준희는 눈을 피하다가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 나는 그 일의 인과를 알고 싶은 겁니다. 그래야 내가 준희 씨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다시금 시선을 마주쳤다. 준희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해하고 싶어서……. 그 말이 다디달게 들려 하마터면 구구절절 기석의 말을 전하는 실수를 범할 뻔했다. 준희는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고는 시선을 비껴 냈다.

“말 안 할 겁니까?”

“……네.”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입에 담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자 주완이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대며 느린 한숨을 뱉었다. 작게 파문이 일어난 눈빛에서는 답답한 기색이 얼핏 묻어났다.

“답답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네, 강준희 씨.”

“저도 숨기고 싶은 게 있을 수 있잖아요.”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주완은 헛웃음 지었다. 심사가 꼬인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그는 가만히 준희를 바라보다가 곧 몸을 일으켰다.

“평상시에 강준희 씨가 그런 말을 했으면 나는 충분히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소동을 피우고 나서 침묵을 일관하는 건, 글쎄.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

“차 마저 마시고 있어요. 먼저 씻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준희는 그를 붙잡고 싶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결국 고민하는 사이 주완은 침실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제야 준희는 고개를 들어 거실을 훑어보았다. 너른 거실은 퍽 아늑한 분위기였다. 커다란 창밖으로는 펜트하우스의 도시적인 야경과 달리 멋들어진 상록수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준희는 의자 위로 무릎을 올려 끌어안고는 그 위로 이마를 묻었다.

침실 안쪽으로부터는 작은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거실에 홀로 남은 그는 문득 못 견디게 외로워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그것도 그가 생활하는 공간에 함께 있는데도 외로워질 수 있다니. 인간의 감정은 지나치게 모순적이었다.

준희는 몸을 더욱 옹송그리며 작게 한숨 쉬었다.

***

침실 역시 거실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어두운 색감의 인테리어가 눈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침실 협탁에는 작고 새하얀 쇼핑백이 올려져 있어 위화감을 주었지만, 그것에 대해 차마 언급하지는 못했다.

주완은 그에 이어 몸을 씻고 나온 준희에게 제 옆자리를 내어 주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컨디션을 살뜰히 챙기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분명히 주기상 플레이를 해야 하는 주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한 표정을 짓거나 꾸짖어 분위기를 잡지도 않았을뿐더러 섹슈얼한 스킨십이랄 것도 없었다.

말없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준희는 더 어색했다. 그는 이불에 싸여 누운 상태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분위기였다.

“……오늘은 저 안 혼내세요?”

“오늘 내 기분과 준희 씨 몸 상태로는 무리예요.”

“저는 괜찮은데…….”

준희가 눈을 굴리며 겁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주완이 픽 웃으며 그의 입술께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왜. 그날처럼 무슨 말을 들었는지 실토할 때까지 스팽킹 해 줄까요?”

“…….”

“시작하고 나면 울고불고 빌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겁도 없지.”

막상 그날을 떠올리니 아찔해진 건 사실이라서 준희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주완은 침대 헤드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준희를 옆으로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희 씨.”

“네.”

“그 사람 질 안 좋은 거야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

“나는 준희 씨가 뭘 걱정하는지, 그걸 더 모르겠어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준희가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소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연인 사이에는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생각해 볼게요.”

기다리던 대답이 아닐 것을 알았다. 주완은 그가 차라리 허심탄회하게 털어놔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준희 입장에서도 이런 일은 흔치 않았다. 겪어 본 적 없었던 일이었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이토록 복잡하게 생각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데다가…….

그의 기분이 나쁠 만한 일들이라면, 그저 혼자 간직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그가 당장 조금 답답해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피어오르곤 했다. 그러니 입이 쉽게 떨어질 리 만무했다.

“억제제 있습니까?”

주완이 준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인상을 약간 찡그린 채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서운함이 몰려들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준희는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비상용으로 하나쯤…….”

“하나 먹고, 먼저 자요.”

“안 주무시게요?”

“담배 한 대 태우고 오겠습니다.”

나직이 한숨을 뱉어 낸 주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준희도 덩달아 상체를 일으켰지만 그를 따라나서지는 못했다. 혹시 몰라 챙겨 두었던 억제제를 한참이나 손바닥에 굴린 다음에야 준희는 그것을 복용했다.

침실을 나선 주완은 담배 한 대를 태울 시간이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준희는 그를 한동안 기다리던 끝에 까무룩 잠들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준희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손을 뻗어 옆을 더듬어 보았다. 자리가 따뜻한 것을 보니 밤새 비워져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적어도 몇 분 전까지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듯 온기가 남아 있었다.

덜 뜨인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준희는 협탁에 올려 두었던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어느덧 오전이었다.

닫혀 있는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바깥으로부터 주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준희는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로 느리게 걸어 나갔다.

거실에는 그가 없었다. 소리는 다른 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그가 거실에 있었다면 아무리 문을 닫았다고 한들 침실까지 그 소리가 넘어 들어왔을 것이다.

소리는 침실과 반대편 복도 쪽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준희는 그쪽을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제법 심각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주완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렇게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방문 앞에 가서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주완이 걸어 나오다가 준희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일어났어요?”

“아, 네. 어디 계신가 해서…….”

“곤히 자는 것 같길래 깨우지 않으려고 서재에서 받았습니다. 앉아 있어요.”

그는 자연스럽게 준희의 어깨를 잡아 거실로 인도했다. 의도와 관계없이 소파에 앉혀진 준희는 멍한 눈으로 주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는 물을 끓이고 찻잔을 꺼내 어제와 같이 캐모마일 티를 한 잔 우려 준희에게 내어 주었다.

대각선 맞은편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으며 주완이 말했다.

“상의할 게 있습니다.”

“뭐예요?”

“언론사에서 열애설에 대해 후속 취재가 한창인 모양입니다.”

방금의 통화는 회사에서 온 전화였던 모양이었다. 준희는 그가 건넨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머금고 눈을 마주 보았다. 주완은 사무적인 톤으로 설명했다.

“무대응으로 일축하느니 공식 입장을 한번 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어떤 공식 입장이요?”

“언론에서 궁금해하는 건 뻔합니다. 열애 보도가 나갔으니 결혼 소식을 알고 싶은 거겠지. 이미 찌라시로는 약혼식을 계획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허다하니까.”

그의 눈은 업무를 다루던 때처럼 무심했다. 조금은 귀찮은 듯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사소한 변화와 움직임들이 준희의 마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잘 만나고 있지만 약혼설은 사실 무근이다. 그러니 낭설은 자제해 달라는 게 골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이 남자는 저와의 미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라는 불안감으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망나니로 소문난 너랑 달리 올곧게 자수성가해 준 우성 알파가 넙죽 굴러들어 오기만을 바라는 집안이 한둘이겠냐고.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저 그런 헛소리인 줄 알았던 기석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혹시나 그가 나를 부족하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너무도 다른 성향의 파트너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섣부른 추측이 줄을 지었다.

“강준희 씨?”

주완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속상했다. 서운했고, 그의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준희는 눈을 내리깐 채 침묵을 유지하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주완 씨는 어떤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먼저 명확하게 할 게 있는데, 내가 해명하고자 하는 건 결혼이 아니라 결혼설입니다.”

“어쨌든요.”

“어쨌든이 아니라, 강준희 씨.”

주완의 눈빛은 여전히 건조했다. 그런 질문이라고는 예상한 적 없다는 듯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리기도 했다. 옅은 한숨을 삼킨 주완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나와 정말로 연애하기 전에도 거짓으로 공표한 적 있잖아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세요.”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그래, 바뀐 건 상황뿐이지. 핵심은 같고.”

“제가 궁금한 건…….”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준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지점의 일이었다. 가령 정말로 언젠가는 나와 결혼할 생각인가요, 그런 진부한 질문 같은 것들 말이다.

준희는 채 묻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주완도 답답한 듯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내가 정말로 강준희 씨랑 결혼 생각이 없을까 봐, 그게 불안한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그건 차차 시간을 가지고 우리가 같이 고민할 문제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기 전에는 결혼 생각이 있더라도 없다고 공표하는 게, 우리에 대한 관심을 잦아들게 하는 방법이고.”

맞는 말은 지루하기만 했다. 마치 뻔한 잔소리 같은 거였다. 준희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방황하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조바심이 났다. 애끓는 마음을 그가 몰라줄까, 모르고 지나쳐 버릴까. 반항심이 들기도 했다. 그의 말에 쉽게 수긍해 주고 싶지 않았다. 번잡스러운 마음속에서 뾰족한 진심이 입 밖으로 톡 튀어나왔다.

“나는 하고 싶어요, 결혼.”

그러자 주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제멋대로입니까? 내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거예요?”

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지나치게 화를 내고 돌아설까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한 번은 그가 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직 내려놓지 못한 자존심이 가시를 세웠다.

대답하지 않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주완이 한숨을 짧게 뱉은 후 말했다.

“정말로 솔직히 말해 볼까.”

“어떤…….”

그를 올려다보는 준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차라리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가 꺼낼 진심이 자신의 것보다 작고 초라할까 겁이 났다. 그렇지만 자초한 일이었으며, 확인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나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안 생길지 모릅니다. 나는 가정을 갖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들이 이상하게도 준희에게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로 해석되었다. 그와는 결이 다른 말임을 알면서도,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오역했다.

다소 격양되어 있던 주완은 말을 멈추고 감정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누그러진 기세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원칙을 깨고 내가 강준희 씨와 연애라는 걸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마음을 풀어 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고, 거짓으로 감정을 속이려 들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겁게 물들었다. 차라리 달콤한 거짓말을 속삭여 주었으면 했다. 빈말이어도 좋으니 결혼하자, 웃으며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했다. 그래 보았자 허상일 테지만, 그래도. 그렇대도. 준희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족한가 봐요.”

주완은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핏 상처 입은 듯한 시선이 준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감돌았다. 준희는 당장이라도 뱉은 말을 회수하고 싶다가도, 이대로 모든 것을 산산이 조각내 버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이중적인 마음은 끊임없이 저 스스로를 괴롭혔다.

‘어쩌면 지친 걸까.’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고 여태껏, 어쩌면 오래 버틴 것이 아닐까.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울음이 터지지는 않았다. 그저 가슴이 텅 비어 버린 듯 공허해졌을 뿐이었다.

그런 준희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완이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나한테는 필요한 것 같은데.”

공허했던 가슴 아래로 비수 같은 벼락이 내리꽂혔다. 처음으로 초대받은 그의 집에서, 그의 공간에서, 그의 향이 자욱이 묻은 장소에서…… 여느 때보다도 건조한 목소리로 주완이 말했다.

“씻고 나와요. 데려다줄 테니까.”

준희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주완은 이미 돌아선 뒤였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준희는 홀로 거실에 남겨졌다. 캐모마일 티는 반쯤 비워진 채 온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가슴 위로 바위가 얹힌 듯 무겁고 답답했다.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준희는 주완이 말한 대로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고 외출복을 입었다. 뒤이어 씻고 나온 주완은 준희를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준희도 이번에는 고집을 꺾고 싶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 찬 채 집 앞으로 도착한 차 안에서, 주완이 짧게 인사했다.

“연락하겠습니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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