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9)

3. 사각지대

준희는 새로 개관하는 미술관을 찾았다. 오랜만의 스케줄이었다. 몹시 귀찮아 일정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전시 기획자가 강욱진 회장과 특별히 긴밀한 집안의 자제였다. 대표로 얼굴을 비추는 것이 예의라는 지율의 잔소리에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어야만 했다.

그는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이기도 했고, 평소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미술관을 건성으로 한 바퀴를 돌아보고 전시 기획자인 지인을 만나 인사치레를 마친 준희는 지율을 끌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였다. 준희는 음료를 주문하고 돌아온 지율을 재촉했다.

“아는 대로 다 얘기해 봐.”

“선보기 전에 말씀드릴 땐 들은 척도 안 하시더니. 그분이 좋긴 좋으신가 봐요.”

“빨리.”

“어? 음료 나왔다. 가져오고 나서…….”

“딱 앉아 있어 봐. 내가 가져올게.”

준희는 혹시라도 시간이 지체될까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음료를 받아 와 테이블에 대충 내려놓은 다음 눈을 반짝였다. 지율은 혀를 찼다.

“도련님 너 이러는 거 처음 봐요. 낯설다, 진짜.”

“뭐가.”

“그동안 연애는 여러 번 했어도 이렇게 열정적이었을 때가 없었거든요. 역시 사람 짝은 다 따로 있…….”

“쓸데없는 얘기 말고.”

연거푸 재촉하자 지율이 이번에는 어깨를 으쓱했다.

“집안 자체는 평범한 중산층인 걸로 알려져 있어요.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모친이 공기업 다니고 부친이 초등학교 교사던가 그렇고요.”

“부모님도 알파셔?”

“아뇨, 가족 중에 알파는 차주완 대표가 유일해요. 차주완 대표가 유명세를 타다 보니 그 부모님도 몇 번 언론에 얼굴을 비쳤는데 평범한 베타였거든요.”

준희가 지율에게 요구한 것은 차주완 대표에 대한 정보였다. 시시콜콜한 소문까지 다 알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보통 형질은 90퍼센트 유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베타 집안에서 알파가 태어나는 일이란, 심지어 우성 알파가 태어나는 일이란 무척 희귀한 케이스였다. 모르긴 몰라도 어려서부터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어깨가 무거웠을 차주완 어린이를 상상하니 입가에 웃음이 절로 맺혔다.

“한국 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이고, 이미 대학생일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서 인터뷰한 기사도 남아 있어요. 그때 이미 기업 투자를 끌어내서 소규모 사업을 벌여 성공한 경험이 있고, 그걸 계기로 한울 전자 TF팀으로 스카웃돼서 강욱진 회장님과 인연을 맺으신 모양이에요.”

“될성부른 떡잎이었나 보네.”

“어릴 때 이 정도 성과를 내는 사람은 우성 알파 중에서도 드물긴 하죠. 천재예요. 최명 회장이 유성기획 대표 이사를 수소문했을 때에도 강욱진 회장님이 나서서 추천하셨을걸요.”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도 주완의 이력은 화려했다. 잘나지 않은 구석이 없네, 준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에게 반한 것과 별개로 얄미운 건 얄미운 거였다.

“이 모든 일이 차주완 대표가 이십 대일 때 일어났다는 게 놀랍긴 하네요. 유명할 만해요.”

“……그렇긴 하네.”

“도련님이랑은 여러모로 반대되는 구석이 많죠?”

“시비 걸지 마라.”

건수를 잡은 지율이 히죽거리며 음료에 꽂힌 빨대를 빨았다. 그를 노려보던 준희는 연락 없는 휴대 전화로 눈을 돌렸다. 그 잘난 주완에게서 연락이 오기로 한 금요일이었지만 여태 무소식이었다.

‘목 빠지겠네.’

온종일 오지 않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휴대 전화 진동이 울릴 때마다 기민하게 반응하며 부재중 통화 목록과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이 또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란 이렇게나 고단한 거였구나,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하아, 자연스럽게 한숨이 터졌다. 음료를 마시던 지율이 준희를 흘끗 보았다.

“차주완 대표는 내일 만나신다고 했죠?”

“응.”

“장소랑 시간 정해지면 말씀하세요.”

“……응.”

연락 좀 되지 않는다고 시무룩한 꼴이라니. 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해 스물아홉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옆에서 그를 보아 왔던 지율에게도 이는 생소한 모습이었다.

낯설다는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희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제 음료를 스트로로 의미 없이 휘저어 댔다.

***

약속 시간과 장소가 도착한 것은 금요일 저녁의 일이었다. 불만스러웠지만 불평할 수는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준희는 토요일 오전부터 드레스 룸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휴대 전화로 제 모습을 비춰 보며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지율이 운전하는 차가 서울 근교 한식당 앞에 정차했다. 야트막한 산과 푸른 강을 가까이 둔 정갈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현대식 한옥이 주변 풍경과 멋스럽게 어우러졌다. 차에서 내려 크게 호흡하자 자연의 향이 물씬 느껴졌다.

주완은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룸의 커다란 창에는 자연의 고즈넉한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자리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먼저 와 있었네요.”

넋을 잃고 풍경을 구경하던 준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룸의 입구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한 폭의 작품보다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그 풍경보다도 아름다운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어김없이 준희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설계된 양 속수무책이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주완이 준희의 맞은편으로 와 앉으며 물었다. 그가 등장하자 상록의 교목 내음이 장미꽃 향기를 누르고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뇨, 방금 왔어요.”

“다행이네요.”

준희는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움찔했다. 아프다고 호소했을 때 ‘다행입니다.’라고 속삭이던 남자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개량 한복을 입은 직원이 다가와 두 사람 앞으로 식전 차를 내려 주었다. 깊은 향이 배어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주완의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웠다. 준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찻잔의 겉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자주 오는 곳이에요?”

“자주는 아니고 종종 옵니다. 도시가 번잡해서 그런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을 찾게 될 때가 있습니다.”

“…….”

“사진 찍힐 일이 없어 아쉽긴 하네. 기왕 하는 야외 데이트인 만큼 여러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다음에는 고려해서 장소를 선정해 보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준희는 투정 섞인 불만을 꼭꼭 눌러 봉인해 버렸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주완의 표정이 평소보다 한결 누그러져 보여서인지 구태여 성질을 긁고 싶지 않았다. 준희는 옅게 한숨 쉬며 주완의 시선을 따라 창밖의 강을 응시했다.

오후 햇살이 물살에 부딪혀 반짝이고 있었다. 확실히 아름답기는 했지만 시선을 통째로 빼앗겨 버릴 정도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차가 반쯤 비워지자 요리가 서빙되기 시작했다. 창밖에 박혀 있던 주완의 눈길이 이번에는 그릇에 소담하게 담긴 반찬들로 옮겨 갔다.

“요즘 일은 어때요? 많이 바쁘세요?”

“평소와 비슷합니다. 나는 늘 바쁜 편이고.”

시선을 끌어 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지만 주완은 요리를 향해 눈을 내리깐 채 단정히 젓가락질할 뿐이었다. 와중에도 그의 속눈썹은 길고 예뻤다. 준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었다.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멎자 주완이 드디어 눈을 들어 준희를 마주 보았다. 인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오늘 들어 첫 눈 맞춤이었다. 준희는 숨을 들이켰다.

‘나무 냄새.’

특유의 페로몬 향 때문인지 그와 있을 때면 종종 아무도 없는 숲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 된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네?”

“빤히 보길래.”

“아, 그건 그냥…….”

준희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떼었다가 뒤늦게 망설였다. 그렇지만 이미 운을 뗀 후였다.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잘생겨서요.”

그가 던진 실없는 소리에 주완이 입꼬리를 당겨 픽 웃었다.

“비즈니스를 제안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네요.”

“…….”

“내 얼굴이 탐이 났던 게 아닙니까?”

부정하고 싶었지만 단박에 해명할 수가 없었다. 외양이 그를 눈여겨보게 된 핵심 계기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가 완전히 마음에 들어오기까지는 여러 순간들이 존재했다. 일일이 나열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니면, 몸인가?”

눈을 굴리는 사이 주완이 덧붙였다. 그는 약간의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준희는 억울한 마음에 코가 다 시큰해졌다.

“그런 거라면 강준희 씨는 나를 맞은편에 앉혀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야지.”

“…….”

“그렇게 서운한 티를 낼 게 아니라.”

눈치를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자연히 느껴진 모양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맹세컨대 분위기를 그르치려던 의도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

“강준희 씨는 이중적인 데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존재가 되자고 먼저 제안했으면서, 진짜 연인의 온기를 찾는 것처럼 굴지.”

“…….”

“강준희 씨 안에서 관계 정립을 정확히 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어중간한 태도는 우리 관계에 혼선을 줄 뿐일 테니.”

준희는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어떻게 하면 그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더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가 저에게 스며들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지난날의 고민들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 주완이 세운 견고한 벽을 가벼운 수작으로 깨뜨리기는 불가능했다.

어떤 말을 해야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걸까. 그동안 침략당해 본 역사만 있었을 뿐, 타인의 성을 공격해 본 경험이 없는 준희는 저에게 닥치는 모든 위기의 순간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미처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눅 든 준희를 향해 주완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그저 그런 연애 놀음을 하고 싶은 거라면 이제라도 다른 남자를 찾는 게 좋을 겁니다. 저번에 얘기했듯 계약서는 언제든 찢어 버릴 수 있는 종이에 불과하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지난번에는 다정한 배려로 들렸던 그 말이, 이번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뭘 기대했던 걸까. 다정한 태도? 뜨거운 진심? 그들의 관계는 주완의 말마따나 고작 계약으로 맺어진 얄팍한 것에 불과했다.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침울해진 준희가 시선을 내리깔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느끼실 줄 몰랐어요. 제가 더 주의할게요. 죄송해요.”

눈시울이 뜨거웠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뿐이지 그의 눈매는 아까부터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주완이 그의 젖은 눈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깊고 검은 눈동자로.

***

준희는 남자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오래도록 곱씹어 떠올렸다. 그의 눈빛은 견고하고 단단했으며 서늘했다. 그 눈에 조금 더 애정 어린 시선을 담게 할 수는 없을까. 아쉽고 서운한 감정이 물밀듯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준희는 한숨을 쉬었다.

중요한 일정이 아니고선 웬만하면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누군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흥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어제인가 지율은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으시다니 낯설기 그지없네요.’ 걱정했다.

집은 내내 고요했다. 정원 잔디에 내리쬐는 햇볕이 뜨거워지도록 침대에서 몸을 뭉개던 준희는 문득 몸을 일으켜 외출 준비에 나섰다. 간만의 외출 소식을 들은 지율이 쾌재를 부르며 달려왔으나 목적지를 확인하고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 좀 만나시지 않고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준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작업실이면 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작업실은 미술을 전공한 그가 취미 생활을 즐기는 곳이었다. 지나치게 정적인 공간이기 때문일까. 작업실을 방문했던 몇몇의 지난 연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놀라곤 했다.

정원을 가지고 있어 작은 주택으로 보이는 그의 아뜰리에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은 그야말로 미술 작업실이었다. 커다란 창이 정원을 향하고 있었고, 크고 작은 식물들이 놓여 있어 작은 실내 정원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2층은 그가 아끼는 몇몇 작품들을 전시해 두는 공간이었다. 전시품들 사이사이로 그의 습작품들이 몇몇 걸려 있기도 했다.

지율은 준희를 내려 준 뒤, 작업실에 올 때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일이 끝나면 연락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그곳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준희는 아뜰리에의 현관문을 잡아당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네.”

방치되어 있던 이젤과 의자를 적당한 곳에 배치하고 캔버스를 올려놓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대학 졸업 후 간간이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 완성한 작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는 서랍장에서 유화 물감과 그림 도구들을 꺼내 이리저리 펼쳐 놓았다. 정석대로라면 젯소부터 개어 칠해야겠지만 오늘의 작업은 화풀이용에 가까웠으므로 정성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계열의 물감들을 골라내었다.

덜어 낸 물감을 이리저리 섞었다. 회색빛을 띠는 짙푸른 물감을 퍽퍽하게 머금은 붓이 캔버스 위로 떨어졌다. 유화 냄새가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나쁜 놈.”

망연히 캔버스 위를 덧칠하며 그가 짧게 짓씹듯 말했다. 주완은 그가 진짜 연인의 온기를 갈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경멸하는 듯했다. 그렇고 그런 연애 놀음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고 확고하게 선을 그었다.

엉망이 된 감정을 무어라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다만 거칠게 붓질했다. 푸르고 검은 면들이 캔버스 가장자리를 향해 조금씩 덧대어졌다. 하얗던 캔버스가 어느새 파도치는 밤바다처럼 넘실대는 듯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단 1분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박찼겠지. 혹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욕설이나 비난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렇게 ‘연애 놀음’ 해 왔으니까.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고, 온기가 필요하면 끌어안으면서 말이다. 모든 행동의 주체는 그였고, 그에게 연인은 필요할 때 취하고 귀찮으면 쳐 내는 가벼운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상대방 역시 그가 필요했기에,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 주는 것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의 관계는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얽혀 있을 뿐 주완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관계의 시작과 끝에 대한 결정권은 준희에게 있었다.

-저번에 얘기했듯 계약서는 언제든 찢어 버릴 수 있는 종이에 불과하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주완은 그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종용했다. 당신이 원할 때 멈춰 서라고, 기꺼이 주도권을 넘겼다. 바로 그런 점들이 준희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

준희는 캔버스를 빼곡히 채우던 붓을 멈추었다.

그래서, 싫은가? 그에게 매달려 애정을 갈구하고 절절매는 지금의 상황이 못 견딜 만큼 혐오스러운가? 그동안의 일들을 없던 셈 치고 예전의 그 방탕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다. 전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싶은 마음이 우세했다. 기약 없는 짝사랑이라도 마음을 온통 내바치고 싶었다. 조금의 애정을 흘려 주기만 한다면 남자의 발치에 엎드려 받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갈증이 났다. 그런 마음들은 준희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엉망이 되어 캔버스에 끈적끈적 들러붙은 물감 덩어리들이 꼭 제 마음 같았다. 그는 붓을 집어 던지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있지도 않은 시계 초침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긴 한숨이 잇새를 비집었다. 아직 수요일이라니. 한 주가 원래 이다지도 길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준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주완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

다시 돌아온 토요일, 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 주완은 그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주었다. 데이트할 때처럼 무관심한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그가 데이트보다 플레이를 월등히 선호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그때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었다. 데이트할 때는 껍데기뿐인 가짜 연인 행세를 하고, 플레이를 할 때는 플레이 파트너가 되어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모두 준희가 스스로 제안한 일이었기에 이제 와서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전어는 정해 왔습니까?”

“네.”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긴장된 몸을 따뜻한 커피로 녹이고 있던 준희는 주완의 질문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열기가 옮아 온 손바닥이 따끈따끈했다. 정해 오기는 했는데 막상 꺼내 놓으려니 민망해서 망설여졌다. 그러자 주완이 재차 물었다.

“뭘로 정했죠?”

“주완이 형…… 이요.”

기왕 정하는 것 겸사겸사 사심을 담아 보자는 의도에서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뱉어 놓고도 힐끗 눈치를 보자 주완이 픽 웃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고집이라도 부릴 생각이었는데, 다짐이 무색할 만큼 그는 순순히 넘어갔다.

“말로 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서 수신호도 정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도 제가 정해 와야 하나요?”

“수신호는 간단하게 가죠. 손가락으로 가위를 만들어 보이세요.”

준희는 손을 내밀고 가위를 만들어 보였다. 직접 고민하지 않았지만 간단해서 잊을 걱정은 없을 듯했다.

“커피는 다 마셨습니까?”

“네? 아……, 네.”

주완의 물음에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준희가 대답했다. 뜨거웠던 커피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조금쯤 식어 있었다. 잔을 반도 비우지 않은 채였지만, 그걸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배짱이 서질 않았다.

“서재로 가죠.”

주완의 제안에 준희가 몸을 일으켰다. 앞장선 쪽은 주완이었다. 주완은 서재의 문을 열었고, 준희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2주 전에 언뜻 살펴보았던 서재는 넓고 정갈했다. 나무로 된 가구들이 많아 주완의 교목 내음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방이었다. 벽면은 전부 책장으로 되어 있었고, 한편에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으며, 그 반대편에는 1인용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벗어요.”

그는 멀뚱히 선 준희를 남겨 놓은 채 책상으로 걸어가며 명령했다. 그러면서 스트립쇼를 앞둔 준희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책상 의자에 앉아 서류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준희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더디게 손을 놀려 탈의했다. 뭉그적거릴수록 더 민망해질 뿐이라는 점을 2주 전에 깨달은 그는 바지와 드로어즈를 동시에 내려 벗어 냈다. 알몸이 되어 옷가지를 개어 두자 주완이 다시 입술을 뗐다.

“이쪽으로.”

준희는 그가 앉아 있는 책상에 가깝게 섰다.

“내 앞으로 와서 허리 숙여요.”

주완은 서류를 잠시 옆으로 치워 놓으며 책상을 턱짓했다. 꼭 쥔 주먹 속 손끝이 차갑게 물들었다. 미적이며 걸음을 떼어 놓은 준희의 몸이 주완의 앞에서 굽어졌다. 골반을 책상에 붙이고 허리를 숙이자 차디찬 책상 위로 가슴이 닿았다.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정답인 듯했다. 제 앞에 하얗게 드러난 둔부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완이 서랍을 열었다.

“아…….”

이윽고 엉덩이 골 사이로 차디찬 젤이 흘렀다. 몸을 움찔거렸지만 주완은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골 사이를 파고든 손가락이 내벽을 누르고 안을 들쑤셨다. 입구를 꼭 조이고 있던 선홍빛 주름 위로 젤과 애액이 뒤섞여 고였다.

젤을 발랐다 뿐이지 그의 손길은 무자비했다. 아직 빡빡한 구멍에 막무가내로 손가락 개수를 늘려 문질러 댔고, 예열도 되지 않은 상태의 전립선을 긁으며 괴롭혔다.

“흐, 읏.”

다소 난폭한 손장난에 준희가 허우적거리며 책상 위로 손바닥을 짚었다.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골반을 책상에 걸치고 있는 탓에 여의치 않았다.

액이 고인 입구를 통해 손가락이 드나드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려 퍼졌다. 안쪽 깊은 곳을 찌를 때마다 준희의 허벅지가 반사적으로 달달 떨렸다. 귀와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기계처럼 길을 넓히던 손길은 한순간에 거두어졌다.

“으응.”

그의 손가락을 꼭 물고 있던 입구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아쉬운 양 빠끔거리는 것을, 주완은 진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준희는 엎드린 그대로 달뜬 숨을 연신 토해 냈다.

“강준희 씨.”

낮고 짙어진 주완의 목소리에 음욕이 묻어났다.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했다. 이 자세 그대로 박아 주려나. 합당한 기대감으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책상 아래 들어가서 엎드리세요.”

“……네?”

그러나 돌아온 명령은 의외의 것이었다. 단번에 알아듣지 못해 뒤를 돌아보자마자 그와 눈을 마주쳤다. 주완은 아래쪽을 턱짓하며 재차 채근했다.

“일어나서 책상 아래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주완이 입꼬리만 당겨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머리채 잡아 처박아 주는 편이 낫겠습니까?”

“아뇨, 아니에요. 할게요.”

그의 협박에 준희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희롱당한 구멍은 물론 앞쪽의 사정도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주완이 가리킨 곳은 책상 아래의 어두운 공간이었다. 책상이 넓어 그 안쪽 공간도 넓어 보이기는 했지만 몸을 편안하게 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주완은 침묵하며 그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준희는 짧게 심호흡한 뒤 무릎으로 기어서 책상 아래로 들어갔다. 눈앞으로 캄캄한 어둠이 쏟아졌다. 바닥에 손을 짚고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어 올리자 그를 지켜보던 주완이 무심히 말했다.

“엉덩이 더 치켜들어요. 무릎도 더 벌려 세우고.”

무릎을 넓게 벌린 상태에서 엉덩이를 더 높게 들기 위해서는 상체를 바닥에 가깝게 숙여야 했다. 수치감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상대에게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준희는 상체를 납작 엎드리다 못해 뺨을 바닥에 붙였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책상 바깥에 앉아 하얗게 드러난 엉덩이를 빤히 응시하던 주완이 다시 서랍을 뒤적였다. 그가 꺼내 든 것은 검정색의 딜도였다.

“강준희 씨는 이 장난감이면 충분할 겁니다.”

***

“흐으, 으, 아흐…….”

기계의 전동 음과 달뜬 신음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책상 안쪽에 준희를 가두고 구멍 안으로 딜도를 욱여넣어 준 장본인은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서류를 넘겨 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갇힌 준희는 죽을 맛이었다.

구멍을 가득 채운 딜도는 전동 음을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딱딱한 고무의 표면이 이리저리 안쪽을 헤집으며 내벽을 짓이겼다.

“흡, 흐윽…….”

딜도는 주완의 물건보다야 작았지만 완급 조절 없이 일정한 자극을 끊임없이 흘려 넣는다는 점이 그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내벽의 온도를 먹고 따끈하게 데워진 딜도를 머금은 입구가 움찔움찔 떨렸다. 그 가감 없는 자극에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목구멍을 비집었다. 딜도가 이리저리 돌아가다 무심코 전립선을 긁을 때면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바닥을 지탱하는 손과 팔꿈치, 무릎과 허벅지까지 파들파들 떨려 댔다.

팔락. 서류 넘어가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 무신경한 동작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읍, 눈물을 삼킬 무렵 주완의 발이 겉돌고 있는 딜도를 더욱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흐윽.”

몸이 앞으로 기울며 정수리가 책상 안쪽 면에 콩 부딪혔다. 몸을 물리고 싶어 발발 떨며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도망칠 수 있는 구석이 없었다.

잠시 딜도를 눌러 주던 발이 곧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안도할 새 없이 허벅지 사이로 발이 불쑥 들어왔다. 부드러운 천으로 된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발이 말랑한 고환을 툭툭 건드렸다.

“아응, 흐, 하으……, 주완 씨, 저 쌀 것 같…… 흐윽.”

“참아요.”

간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주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만가만 아래를 건드리던 슬리퍼가 고환을 위로 누르며 앞뒤로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당장이라도 분출하고 싶은 욕망에 척추뼈까지 저릿해졌다. 준희는 손가락을 세워 바닥을 박박 긁으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구멍에 꽂힌 딜도는 자비 없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안을 들쑤셨고, 단단히 선 기둥 아래 고환은 슬리퍼에 의해 느리게 짓이겨졌다. 앞뒤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정이 득시글댔다. 당장이라도 책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뒤를 쑤시며 수음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온몸이 정욕에 사로잡힌 듯했다. 흐윽, 흐윽……. 울음 같은 신음이 연달아 터졌다.

“저 못 견딜…… 아흑, 읍, 히익……!”

온몸을 달달 떨며 괴로워하던 준희가 일순 몸을 멈추었다. 기어이 선단을 비집고 애액이 흘러넘쳐 바닥 위로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완은 발을 멈춰 주지 않았다.

잠시 멈추었던 몸이 다시 사시나무 떨듯 진동했다. 아래를 문지르는 발짓이 거세어졌다. 기어이 희뿌연 정액이 떨어져, 무릎을 딛고 있는 바닥 위로 툭툭 흘러내렸다. 준희의 상태를 알아챈 주완이 픽 웃으며 발을 거둬 갔다.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준희는 억울했다. 딜도를 박은 채 아래를 문질러 댄다면 그 누가 오더라도 견딜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 눈물을 흘리며 처분을 기다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

안에서 돌던 딜도가 순식간에 휙 빠져나갔다. 딜도를 머금고 있던 구멍이 맞물리지 못하고 공허하게 뻐끔거렸다. 허으윽, 그 허전한 감각에 준희가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서재를 더럽히다니 예의가 없는 사람이네.”

“…….”

“간절히 싸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편의를 봐주겠습니다. 일어나서 책상 위로 올라가세요.”

“……네?”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키고 되묻자 주완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팔을 잡아 책상 아래로부터 끌어냈다. 읽고 있던 서류는 책상 한편으로 치워져 있었다. 주완은 30센티 투명한 자를 꺼내 들고 책상 위를 탁탁 두드렸다.

“이리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혼이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혼이 난 적은 없었지만 추측하건대 이런 기분일 것이다. 배덕한 상황이 연상되자 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더운 호흡이 더욱 거칠어졌다. 남자의 엄격한 눈길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준희는 스스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뺨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책상에 무릎 한쪽을 올려놓았다. 그가 느리게 기어 올라가는 것을 주완은 고요히 지켜보았다. 젤과 액으로 젖은 엉덩이가 책상에 닿았다. 그러자 주완이 준희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가 들려 있는 손이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야 의도를 알아채는 데 성공했다. 준희는 숨을 삼키며 주완의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두어 번 접어 올려 주었다.

“등 대고 누워서 다리 벌리세요.”

팔뚝이 깔끔하게 드러나자 명령이 이어졌다. 준희는 꾸물꾸물 등을 대고 누워 그의 앞에서 다리를 벌렸다. 다시 단단해진 페니스에 주완의 시선이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이 따끔거리는 듯했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더 벌려야지.”

“아…….”

머뭇머뭇 벌어지는 다리를 지켜보던 주완이 쯧, 혀를 찼다. 이어 그의 손이 양 무릎을 잡아 양쪽으로 한껏 벌렸다. 허벅지 근육이 아프게 당길 만큼 다리가 양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이제 자위해 보세요. 내가 보는 앞에서.”

“흐윽, 주완 씨…….”

“양껏 싸도 좋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투명한 자가 배꼽 근처에서 꺼덕거리는 페니스를 톡톡 두드렸다. 혹시라도 그걸로 성기를 내리치기라도 할까 겁을 먹은 준희가 다급하게 살 기둥을 부여잡았다.

“흔들어요, 계속.”

우으, 다시금 울음이 터졌다. 얼굴이 온통 뜨거웠다. 준희는 기둥을 붙잡고 느리게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수치심 탓인지 성감 탓인지 활짝 벌어진 허벅지가 달달 떨렸다. 더디게 수음하는 것을 무심히 지켜보던 주완이 준희의 한쪽 무릎을 가만히 짚었다.

짜악-. 연약한 허벅지 위로 자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매질에 깜짝 놀라 손을 멈추자 반대편 허벅지에도 매가 떨어졌다.

“하윽, 아……! 주완 씨, 아프…….”

“서재를 더럽힌 벌도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자위는 계속하세요.”

“흐윽, 잘못했……, 잘못했어요.”

“좆 흔들라고 했습니다.”

“제발, 제발…….”

“왜. 허벅지 대신 거길 맞고 싶은 건가?”

흥분한 페니스를 매질당할 것을 상상하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준희는 흐윽, 흐윽, 연거푸 울음을 흘리며 손을 움직였다. 살 기둥을 움켜쥔 채 흔들다가 귀두를 엄지로 뭉근히 자극하며 수음하는 와중에도 허벅지에 자가 떨어질까 두려워 본능적으로 무릎을 움찔거렸다.

“허벅지 간격 유지하세요.”

주완이 단호하게 경고했다. 그는 무릎을 붙든 손을 떼어 주지 않은 채로 자를 허공에 쳐들었다. 짜악-. 하얗고 여린 살 위로 뭉툭한 매 자국이 그려졌다. 온몸의 감각이 저릿저릿해졌다. 준희는 더디게 손을 놀렸지만, 매 맞는 두려움 탓에 제대로 흥분할 수 없었다.

“사정할 때까지 맞을 겁니다. 제대로 하세요.”

“으흡, 흑, 아흐…….”

실로 잔인한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공포로 흥분을 틀어막아 놓고선, 절정에 이르지 않으면 멈춰 주지 않겠다니. 준희는 다급하게 손바닥으로 살 기둥을 쓸어 올리는 한편 반대쪽 손으로 고환을 주물렀다. 두 손을 열심히 놀려 제 것을 수음하는 꼴이 썩 볼만했다. 주완은 입꼬리를 당기며 붉어진 허벅지 위로 자를 거듭 내려쳤다.

짜악, 짜악-. 매 맞는 소리와 수음하는 소리가 허공에서 뒤엉켰다. 본능적으로 무릎이 좁아질 때마다 매는 더 아프게 떨어졌다. 준희는 책상 아래에서 한 차례 사정해 만질만질한 제 귀두를 연신 비벼 대며 자극했다.

“아, 흐, 아아……. 으응, 흐으응.”

주완의 방해 공작에도 계속해서 손을 놀려 흥분 궤도에 몸을 올렸다. 주완은 그를 격려하듯 강도를 낮춰 허벅지 위로 자를 가볍게 내려쳤다. 적당한 충격이 감각을 돋우었다. 안쪽 허벅지가 온통 선홍빛으로 물든 뒤였다.

“하……, 아흑…….”

마침내 선단을 비집고 선액이 터졌다. 준희는 꼿꼿하게 기립한 살 기둥을 바투 쥔 채 귀두를 문질렀다. 선액에 뒤이은 정액이 뱃가죽 위로 톡톡 터져 흘러내렸다.

“흐으으…….”

주완은 손을 멈추었다. 그는 스스로 성기를 비벼 대며 절정에 이르는 준희의 모습을 낱낱이 눈에 담았다. 사정에 이른 준희는 끅끅 흐느끼며 문득문득 허리를 뒤틀었다. 본능적인 발작이었다. 딜도가 쑤셔져 붉게 부어 있는 구멍이 옴짝달싹하는 것이 보였다.

툭, 손에 들려 있던 자가 바닥을 굴렀다. 주완은 준희의 골반을 끌어당겼다. 몸이 힘없이 아래로 딸려 간 준희의 몸이 돌려져 책상 위로 엎어졌다. 정액으로 더럽혀진 뱃가죽이 책상 위로 뭉개졌다.

‘축축해…….’

비단 책상 위에 맞부딪히는 뱃가죽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축축했다. 눈물에 젖은 얼굴과 땀에 젖은 등줄기와 선액과 정액으로 엉망이 된 뱃가죽과 엉덩이……. 주완의 시선에서 꼴이 대단할 터였다.

달칵, 버클 풀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연하게 들려왔다. 준희는 책상 위로 손바닥을 눌렀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주완은 바르작거리는 준희의 엉덩이를 아프게 움켜쥐고 벌렸다. 형형하게 발기한 성기가 입구를 비집고 꾸역꾸역 들이닥쳤다.

“하윽.”

딜도로 충분히 풀어 주었음에도 받아들이기 버거운 크기였다. 뜨겁고 단단한 살 기둥이 내벽을 아무렇게나 가르고 안쪽 깊은 곳을 향해 찔러 넣어졌다. 퍽, 퍽. 살 맞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것이 내부를 마구 휘저었다.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아으응……!”

남자의 단단한 귀두가 전립선을 긁었다. 새된 목소리가 잇새를 갈랐다. 주완은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허리를 눌러 몸을 고정시키며 허리 짓 했다.

“아흑, 흣, 응, 으읍, 아, 하아……, 으응!”

주완은 집요하게 성감대를 짓이기고 문질러 댔다. 신음을 알아챈 순간부터 허리 짓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이대로 온몸이 성감대가 되어 버릴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준희는 몰아치는 감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고개를 마구 흔들었지만, 주완은 언제나 그러했듯 그를 봐주지 않았다.

짜악, 마구 버둥거리는 준희의 엉덩이를 아프게 내려쳤다. 따끔한 감각에 구멍이 확 조여들었다.

“씨발.”

“흐으…….”

주완이 나직이 욕을 뱉으며 끈질기게 추삽질 했다. 준희의 몸은 힘이 빠져나가 주완이 흔드는 대로 들썩거렸지만, 구멍은 물고 있는 성기를 오물오물 잘만 빨아 당겼다.

‘타고났네.’

주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맹렬히 허리를 올렸다. 준희가 무어라 흐느끼며 책상을 쾅쾅 내려쳤지만 주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하…….”

“흐윽, 흐응…….”

한참을 추삽질 하던 끝에 준희 안에서 주완이 사정했다. 정액이 터져 나온 뒤에도 주완은 몸을 앞뒤로 느리게 움직이며 후희를 즐겼다. 여전히 거대한 것이 뒤로 물려졌다가 안으로 파고들 때마다 준희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책상 끝을 쥐고 있던 준희의 손에 힘이 풀렸다. 어느새 교목과 장미꽃 내음이 서재 안에 자욱했다. 몇 차례 내부를 헤집고 드나들던 성기가 끝까지 빠져나갔다. 뽁,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였다. 여운이 남은 구멍이 끝까지 닫히지 못하고 뻐끔거리자, 그 사이로 정액과 애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여전히 제대로 다무는 법을 모르는 구멍이네.”

“하아…….”

“나중에 단단히 교육시켜 줘야겠습니다. 내 것을 잘 품고 있을 수 있도록.”

후일을 기약하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준희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눈빛이 타오를 듯 맹렬했다.

“강준희 씨.”

몇 번이라도 더 박아 넣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더는 못 해요. 저 죽어요.”

“입 다물고 엉덩이 잡아 벌리세요.”

“저 진짜 더는 안…….”

“기절할 때까지 박아 주기 전에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눈앞이 눈물로 일렁였다. 말랐다 젖었다를 반복하는 까닭에 눈가가 쓰라렸다.

‘주완이 형…….’

아까 정한 안전어가 턱 끝까지 몰아쳐 일렁였지만 꾸역꾸역 삼켜 내며 손을 뒤로 가져갔다. 준희는 제 엉덩이를 벌려 그의 앞에 구멍이 드러나게 했다.

“후으.”

정말 다시 박으려던 것은 아니었는지, 주완이 그의 구멍을 바라보며 수음했다. 다시 꼿꼿이 선 페니스의 끝단이 구멍과 맞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빠르게 성기를 흔들어 살 부대끼는 소리가 서재를 가득 채웠다.

“하……. 강준희 씨.”

수음한 끝에 터진 정액이 벌어진 구멍 위로 치덕치덕 떨어져 흘렀다. 부푼 귀두가 주름 위에 턱턱 부딪히는 것이 느껴지자 전율이 일었다. 엉덩이를 잡아 벌린 준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주완은 뭉툭한 선단으로 질척해진 준희의 구멍 근처를 뭉근히 비벼 댔다.

‘미친…….’

하마터면 다시 박아 달라고 애원할 뻔했다. 그의 뜨거운 성기가 엉덩이 골 사이에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지경이었다.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준희는 펄쩍펄쩍 날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눈꺼풀을 내렸다.

***

“강준희 씨.”

“으음…….”

“강준희 씨, 여기서 잠들면 안 됩니다.”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준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품이 올려진 따뜻한 물에 몸이 가두어진 상태였다. 기억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플레이가 끝나고 저번처럼 주완에게 들려 욕실에 오기까지의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다만 거품 목욕을 하다가 몸이 노곤해져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준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완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흡사 멱살을 틀어쥔 모양새였다.

“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플레이 직후의 그는 너그러웠다. 물 묻은 손에 잡힌 셔츠가 젖어 버렸지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허리를 편 주완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 옷을 아예 벗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탈의에 준희의 두 눈이 언제 졸았냐는 듯 동그랗게 뜨였다.

주완은 옷을 완전히 벗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 벗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약간 벌린 준희의 턱을 주완의 손가락이 톡 건드렸다.

“침 떨어지겠네. 앞으로 조금 가 봐요.”

꾸물꾸물 움직이자 준희의 뒤로 주완이 들어왔다. 욕조는 두 사람이 함께 반신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크기였다. 주완은 준희가 제 가슴팍에 뒤통수를 대고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 주었다.

혼자 앉아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안정감이 느껴졌다.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에 귀에도 들릴까 걱정되지 않았다면 다시금 깜빡 곯아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도 힘들었습니까? 어김없이 많이 울던데.”

“그게…… 그랬네요, 제가.”

“고생했어요.”

주완의 젖은 손이 준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끌어당겨 그 손바닥 위에 제 뺨을 비볐다.

“막내라 그런가. 어리광이 많네요, 강준희 씨는.”

“…….”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믿지 않을 터였다. 준희는 입을 꾹 다무는 쪽을 택했다. 대신 뺨을 비비던 손바닥을 다시 머리 위로 얹었다. 다정한 손길이 이어졌으니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플레이 끝나고는 원래 이렇게 다정하세요?”

그 전의 누군가를 의식한 질문은 아니었다. 구태여 따지자면 준희는 질투가 없는 편이었다. 그의 전 연인들은 그가 더 질투하지 않아서, 더 애달아 하지 않아서, 더 관심 주지 않아서 안달이었다. 성가신 집착과 질투로 불평하는 일은 없었다.

주완은 잠시 침묵했다. 준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이어지던 고요를 깨고 그가 대답했다.

“나는 상대방 몸의 상처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상처까지 즐기는 사람입니다. 내 한 마디 한 마디가 칼이 되어 상대방 마음을 베리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

“몸의 상처는 약을 바르면 나아지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고작 이 정도 케어로 단숨에 회복되진 않겠죠. 그렇지만 늘, 고작 그거라도 하는 편이기는 합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일 테니.”

병 주고 약 주고의 전형이 아닌가. 준희는 그의 악취미에 입이 딱 벌어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길을 떨쳐 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절망적이었다.

“그나저나 다정하다고 느꼈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라고 하는 짓이지만 받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지 내 입장에선 미지수라서.”

“어떻게 못 느끼겠어요? 플레이할 때 주완 씨는 엄청 딱딱하고 무서운데요.”

“지금은 안 무섭습니까?”

“지금은…….”

수수께끼 같은 그의 질문에 준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뗐다.

“적어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아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등 뒤로 잔잔한 웃음이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

몸을 씻고 밖으로 나갔을 때 식탁에는 주완이 주문한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다. 2주 전과 비슷한 메뉴였지만 그때 준희가 주로 먹었던 요리들 위주로 간소하게 준비된 듯했다. 눈물을 잔뜩 흘린 뒤여선지 평소에 식욕이 없던 준희도 꽤나 허기가 돌아서 맛있게 식사할 수 있었다.

도리어 음식을 거의 먹지 않은 쪽은 주완이었다. 느리게 포크를 놀리며 준희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이따금씩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는 식사를 마친 준희를 앉혀 놓고 붉게 열이 오른 허벅지에 약을 발라 살뜰히 챙겨 주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보살핀 뒤에 집에 데려다주어 플레이를 마무리하는 것이 정해진 루틴인 듯했다.

이상한 다정이었다. 분명히 악취미였다. 잔뜩 풀 죽었던 마음을 다시금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일종의 희망 고문이었다. 준희는 공연히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서도 그는 주완이 당부한 과제를 잊지 않았다. 지난 플레이에 대해 복기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딱히 못 견딜 만큼 싫었던 플레이가 없었기에, 간결하게 메시지로 보고하는 데서 끝날 수 있었다.

기묘하게 들떠 있던 마음을 단숨에 가라앉힌 것은, 금요일 오후에 날아든 그의 메시지였다.

「급히 출장을 가게 돼서 내일 일정은 취소해야겠습니다. 데이트는 다음 주로 미룹시다. 미안합니다.」

종일 그 메시지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분한 마음에 쾅쾅 발을 굴렀다. 준희는 그의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약속이었다. 그 하루를 제외한 나머지 엿새는 공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난 데이트에서 심기를 어지럽힌 적 있으니 이번 데이트에서는 심기일전하여 그의 마음에 쏙 들어 보고자 단단히 다짐한 상태이기도 했다.

“짜증 나…….”

그 모든 다짐과 준비들이 메시지 한 통에 수포로 돌아갔다.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준희는 당장 손에 잡히는 베개를 벽에 힘껏 집어 던졌다. 그럼에도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다시 의미 없는 엿새가 시작되었다. 아니, 이번에는 약속이 취소된 토요일 하루도 포함이니 이레인 셈이었다. 그는 주말 내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침대를 굴러다녔다. 오랜만에 스케줄을 미루고 휴식을 취하던 강욱진 회장을 걱정시키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월요일 오후, 강욱진 회장으로부터 임무를 받아 집으로 출근한 지율이 준희의 소매를 잡아끈 것은 그래서였다.

“저기요, 도련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있는 준희를 빼꼼히 들여다본 지율이 그를 불렀다.

“내버려 둬.”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회장님이 그러지 못하시겠답니다.”

“그냥 신경 꺼.”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도련님 신경 쓰는 게 제 일인데요. 저도 월급 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지율은 한 마디를 지지 않는 성실한 비서였다. 휙 고개를 들어 지율을 노려보던 준희가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어린애 같은 모양새였다. 지율은 콧방귀를 뀌곤 그 이불을 단번에 걷어 냈다.

“협조하시죠. 오늘의 제 일은 도련님 외출시키기거든요.”

“하…….”

“쇼핑이라도 나가시든가요. 회장님 걱정하시잖아요.”

쇼핑……? 제법 솔깃한 선택지였다. 잠시 망설이던 준희가 몸을 일으켰다. 생각을 떨쳐 내는 데 그만한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침대에서 뭉개 봤자 뭐 해결되는 게 있나요? 아마추어처럼 굴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이쪽 사정을 모르는 주제에 지율은 그럴싸한 돌직구로 뼈를 때렸다. 준희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율의 승리였다. 몸을 씻기 위해 느릿느릿 욕실로 향하는 준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백화점의 VVIP 라운지가 분주해졌다. 준희가 도착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라운지는 그의 취향을 고려한 제품들로 일사불란하게 채워졌다. 입맛에 맞는 디저트와 음료도 함께였다. 준희가 들어서자 라운지 직원들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라운지에 마련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담당 직원이 곁으로 다가와 밝은 미소를 띠고 그에게 물었다.

“새로 출시된 컬렉션부터 쭉 보여 드릴까요?”

“오늘은 캐주얼한 스타일보다는 깔끔한 스타일로 보여 줘요. 세미 정장 쪽으로.”

“직접 입으실 제품을 보시나요?”

직원의 물음에 준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평소 입던 것과 달리 새로운 스타일을 요구한 것은 무의식의 발현에 가까웠다. 무심코 주완의 물건을 쇼핑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던 탓이다. 뒤에 선 지율이 준희의 골몰하는 뒤통수를 흘끗 응시했다.

“아뇨, 선물할 거예요.”

어쩐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왜 저래? 지율은 의아했다. 연인의 선물을 사 주는 것은 언제나 준희의 기쁨이자 취미였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인데도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어떤 분께 선물하실 건가요? 백화점에 등록되어 있는 고객님이시면 사이즈를 맞춰 보여 드리겠습니다.”

“차주완 대표 기록이 있을까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자 그를 지켜보던 지율이 갸웃거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새삼스러워하세요. 늘 하던 짓이면서.”

“내가 언제 새삼스러워했다고 그래. 말 지어내지 마라.”

“네, 네. 그럽죠.”

티격태격하는 사이 체격 큰 모델이 피팅 준비를 마쳤다. 준희는 소파 앞 티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던 카푸치노를 한 모금 머금었다. 백화점 측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옷은 세미 정장 타입의 깔끔한 룩이었다. 그걸 입고 있는 주완의 전신을 떠올리는 일이란 어렵지 않았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호선을 그리고 올라갔다.

“주세요.”

“네, 수선해서 준비하겠습니다. 쭉 보여 드릴게요.”

준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다. 특히 어울리는 물건을 발견하면 스스럼없이 구입해 무심히 건네곤 했다. 지율도 그에게 여러 차례 선물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지인이게도 그럴진대 하물며 연인들에게는 어땠겠는가. 심지어는 그의 선물 공세에 지쳐 스폰서처럼 굴지 말라고 화를 낸 사람도 있었다.

그에게 선물이란 성의이자 놀이였다. 그게 재력을 과시하는 행위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가능하니까 베풀었을 뿐이다. 쇼핑 자체를 좋아했을뿐더러, 선물을 받는 순간 환해지는 표정을 보면 희열이 일곤 했다.

주완은 어떨까. 그가 건넨 선물에 미소를 지어 줄까? 앞서 말했듯 종종 과한 선물에 질려 질책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주완의 반응이 어떨지 선명히 추측할 수는 없었다.

“다음 컬렉션은 파리에서 출시된 후 국내에는 최초로 저희 백화점에 들어온 것으로…….”

“주세요.”

주완이 입는다고 생각하니 줄줄이 이어지는 컬렉션들이 전부 근사해 보였다. 이것도 어울릴 것 같고, 저것도 어울릴 것 같았다. 유명 경영인이 아니었다면 모델계에서 필시 탐을 냈을 얼굴이고 몸이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연신 “주세요.”, “그것까지 할게요.”라고 중얼거리며 옷을 사들이는 준희에게 지율이 속삭였다.

“이럴 바엔 백화점을 차려 주시죠, 그냥.”

“하……, 그럴까?”

“……하던 거 계속하세요. 예.”

장난을 90퍼센트쯤 담아 던진 제안이었지만 준희는 진지했다. 마음 같아서는 백화점을 통째로 옮겨 그의 드레스 룸을 가득 채워 주고만 싶었다. 아이돌에게 명품을 사다 바치는 팬들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결제할 금액이 쌓여 갈수록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커피 잔을 내려놓은 준희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눈을 반짝였다.

“시계도 좀 볼게요.”

얼추 옷을 다 훑었다고 생각될 무렵 준희가 손을 가볍게 들어 주문했다. 그의 한 마디에 다양한 디자인의 시계가 선보여졌다. 그중 가장 기본적이고 단정한 가죽 시계에 시선이 멎었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모양의 손목시계였다.

“이 브랜드에서 이번 시즌 한정판으로 출시한 제품입니다. 눈금판의 장식은 다이아몬드인 데다가 세공이 정교하게 들어가 있어서 출시되기 전부터 입소문이 자자했어요.”

“그걸로 할게요.”

준희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선택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열된 시계들을 전부 사들이고 싶었지만, 첫 선물이니만큼 참을성을 발휘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를 감안하고도 준희의 소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본래 통이 큰 편이기도 했지만 주완을 떠올리면 더욱이 주체되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와 커프스단추를 몇 가지 사들였으며, 슈트에 착용할 수 있도록 가죽 벨트도 여러 개 골랐다.

“수선 일정에 맞춰 한 번에 전달해 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물건은 차주완 대표님 자택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

직원의 설명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준희는 무언가 생각난 듯 문득 말을 멈추었다.

“혹시 오늘 바로 준비 가능한 제품들이 있나요?”

“액세서리류는 바로 준비 가능합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죠.”

지율은 골몰하듯 살랑살랑 흔들리는 준희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꿍꿍이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준희는 고개를 살짝 돌려 지율과 눈을 마주쳤다. ‘뭐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물으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액세서리만 따로 준비해 주세요. 바로 가져갈게요.”

반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

액세서리가 포장된 쇼핑백을 들고 찾은 곳은 주완이 대표 이사로 위임되어 있는 유성기획 본사 건물이었다. 약속 없이 찾아가는 건 실례가 아니냐며 지율이 걱정했지만, 이미 결단을 내린 준희의 실행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유성 그룹 총수인 최명 회장과는 어려서부터 조카 손자처럼 예쁨받은 사이였다. 게다가 공개 열애 중이기까지 하니 잠시 방문하는 것쯤이야 나무랄 사람도 없겠지. 준희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준희는 지율의 손을 빌려 선물을 잔뜩 들고 당당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침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는지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든 직원들이 엘리베이터에 동승했다. 목에 걸린 ID 카드에는 직책 없이 이름 석 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지난 금요일에 김경식 님 사고 치셨다면서요?”

“말도 마요. 그것 때문에 바로 비행기 떴잖아요. 클라이언트 본사가 싱가포르라 차주완 님이 직접 가서 수습하셨대요.”

“우와. 왕창 깨졌겠네.”

“그렇지도 않다던데요? 차주완 님 은근히 너그러우시던데.”

“능력에서 나오는 여유라 이건가? 부럽다. 저도 딱 한 번만 옆에서 같이 일해 보고 싶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배울 것 같은데.”

“에이, 대신 업무량 장난 아닐걸요? 전 적당히 일하면서 적당히 살랍니다. 야망이 다 뭐죠? 먹는 건가요?”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대화였다. 엘리베이터 가장 뒤편에 서 있던 준희는 지율과 슬쩍 눈을 마주쳤다. 그들이 뒤에 타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신나게 떠들던 직원들은 자신들이 누른 층에 도착하자 우르르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을 때 남은 사람은 준희와 지율뿐이었다. 휘우, 흥미롭다는 듯이 지율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차주완 대표 부임하자마자 직책부터 다 없애 버렸다더니. 사실인가 보네요.”

은근히 위계질서에 엄격한 타입일 것 같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본인마저도 직책이 아닌 ‘차주완 님’이라고 불리길 자처했다는 점이 특히 의외였다. 침대에서는 누구보다 형식과 역할에 집착하는 사람이면서…….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남자였다.

그래도 대표 이사인 그가 평사원들과 다르게 누릴 수 있는 편의가 있다면 한 층을 전용 사무실로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의 스케줄을 관리해 주는 비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준희라고 할지라도 대뜸 회사에 찾아오지는 못했을 터였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서 멈추었다.

그들이 내린 공간은 작은 라운지였다. 손님의 대기실 겸 비서의 사무 공간으로 쓰이는 장소였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눈빛이었다. 스케줄에 없는 손님이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한도일 씨. 저는 여기 강준희 님 개인 비서 박지율입니다. 전에 통화한 적 있었는데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반갑습니다.”

지율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근처에 내려놓고 활짝 미소 지으며 주완의 비서 한도일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하고는 지율의 뒤편에 서 있는 준희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나 얼떨떨한 표정은 가시지 않은 채였다.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차주완 님이 외부 미팅에 나가 계셔서요.”

아……. 운이 나빴다. 선물을 핑계로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준희는 아쉬운 눈으로 ‘대표실’이라고 반듯이 적혀 있는 문패를 흘끗 응시했다. 하기야 애초에 성공 확률이 낮은 얄팍한 술수였다.

“뭐 드릴 게 있어서 잠깐 들른 거긴 한데……. 언제 돌아오세요?”

“확실하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도일이 난처한 얼굴로 유감을 표현했다. 눈을 굴리며 상황 파악을 마친 지율이 도일에게 물었다.

“일단 물건을 대표실 안에 좀 옮겨 놔도 될까요?”

“예, 그렇게 하시죠.”

공개 연애를 할 정도로 진지한 사이인 듯하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도일이 흔쾌히 대답하며 대표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대표실의 인테리어는 블랙 톤이었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색감으로 꾸며진 펜트하우스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가구와 사무 용품들은 질서 정연하고 반듯하게 놓여져 있었다. 적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어 공기가 쾌적하게 느껴졌다. 방 한편에 놓인 책장에는 광고업에 관련된 서적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준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대표실 안쪽을 훑어보는 동안 도일이 짧게 인사하곤 대표실을 벗어났다. 지율은 소파 옆으로 쇼핑백을 가지런히 세워 놓으며 감탄했다.

“먼지 한 톨도 없게 생겼네요.”

“그러게.”

“잠깐 기다렸다 가실 거예요? 마실 거라도 사다 드릴까요?”

“어, 도일 씨 몫까지 준비해 줘.”

지율마저 대표실에서 사라졌다. 대표실 중앙에는 유리로 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검정색의 가죽 소파들이 그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홀로 남은 준희는 그 소파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경을 쓴 주완이 창가에 앉아 미간을 살짝 좁히고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그림을 상상하니 절로 입꼬리가 당겨져 올라갔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공기 중에는 미미하게 교목 내음이 묻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낮잠을 잘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한껏 늘어뜨릴 때였다.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작은 소음에 준희가 눈을 반짝 떴다. 지율이 음료를 사 오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주완이 돌아왔나? 준희는 소파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자꾸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이해진 씨.”

대표실의 문을 약간 열어젖히니 바깥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간절한 얼굴을 하고서 도일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대표님이 메시지를 확인하질 않으셔서…….”

주완을 대표님이라고 칭하는 것으로 보아 회사 직원은 아닌 듯했다. 이해진이라고 불린 남자를 마주하고 있는 도일은 뒤통수마저 당혹스러워 보였다.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막무가내로 찾아오셔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게만 해 주세요.”

“지난번에도 사정을 한번 봐 드렸다가 제가 무척 곤란했어서요. 게다가 지금은…… 손님이 와 계시기도 하고요.”

도일의 말을 듣던 해진의 눈이 문득 대표실 쪽을 향했다. 문틈으로 상황을 관망하다 문득 시선이 얽힌 준희는 약간 당황했다. 손잡이를 쥔 채로 잠시 고민하던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문을 활짝 열었다. 반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일 씨?”

“아, 그게…….”

준희의 등장에 몸을 비틀어 선 도일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치정인가. 그러나 현재 진행형이라고 보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대화의 양상으로 보건대 전 남자 친구 내지 전 파트너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준희는 덤덤하게 추측하며 해진을 빤히 응시했다. 이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호감형에 가까운 미남자였다. 언뜻 서글서글해 보였지만 눈빛에 예민한 기색이 묻어나는 듯도 했다.

‘이런 남자가 취향인가?’

문득 경계심이 들었지만 이내 상념을 지워 버리곤 싱긋 웃었다. 그렇게 웃을 때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같아 보인다는 사실을, 그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됐든 그쪽이랑은 상관없을 거예요.”

해진이 먼저 그를 향해 날을 세웠다. 목소리는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초조할 것이 분명했다. 준희는 여유롭게 대꾸했다.

“상관없다니 섭섭하게 말씀하시네. 제가 주완 씨 정식 손님인걸요?”

엄연히 말하자면 이쪽도 ‘정식 손님’이라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준희는 당당했다.

“아, 제가 누구인지는 아시죠?”

해진이 입술을 떼기 직전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화들짝 놀라 등을 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지율이었다. 캐리어에 커피를 들고 나타난 지율은 해진을 발견하고 놀란 눈을 했다.

“제가 커피 개수를 잘못 계산해 왔나요?”

주완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해서인지, 해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준희는 해진을 향해 상냥하게 제안했다.

“어렵게 오신 것 같은데 잠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실래요? 마침 내 비서가 커피를 사 온 모양이라.”

“됐습…….”

“사양하지 말고요. 주완 씨 손님이면 내 손님이나 마찬가지인데.”

“…….”

“그렇죠, 도일 씨?”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다. 도일이 당황한 사이 준희는 다시금 대표실의 문을 당겨 열었다. 굳은 표정으로 준희를 노려보던 해진이 자조적으로 픽 웃었다.

“그러죠, 그럼.”

도일은 일이 꼬여 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차마 중재할 수 없었다. 지율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희는 해맑은 미소를 유지하며 해진을 대표실로 안내했다. 이판사판이었다.

***

“제가 누구인지는 알고 대표실에 들이신 겁니까?”

대표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해진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알 게 뭐야. 준희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중앙 소파 자리의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일단.”

해진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망설이다가 그가 가리킨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흘끔흘끔 대표실 곳곳을 훔쳐보면서도 못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리 테이블 위에는 준희 몫의 카푸치노와 본래 지율의 몫이었던 아메리카노가 놓여져 있었다. 준희는 제 몫의 카푸치노를 한 모금 넘기곤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아메리카노를 흘끗 확인한 해진이 입술을 뗐다.

“대표님 몫으로는 더 진한 커피를 준비하셨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쓰디쓴 블랙커피를 좋아하시잖아요. 아시죠?”

얄팍한 공격이었다. 코웃음이 나왔다. 준희는 최대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뇨, 몰랐어요. 아시겠지만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됐기도 하고, 주완 씨가 워낙 배려심이 깊어서 저한테 전부 맞춰 주는 편이거든요.”

해진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준희는 다시금 여유로운 미소를 만면에 걸었다.

“그러고 보니 손님 이름을 아직 안 여쭸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해진이라고 합니다.”

“해진 씨.”

그를 부른 준희는 숨을 들이켰다. 고소한 커피 향 사이로 시트러스 향기가 뒤섞였다. 이 남자도 우성 오메가일까? 아니면 열성 오메가일까? 혹은 알파일지도. 고작 옅은 향기만으로 그의 정체를 완벽하게 추측할 수는 없었다.

“해진 씨가 누군지 알고 들이는 거냐고 하셨죠.”

“…….”

“대충 보면 견적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전 남자 친구이거나 전 파트너겠지. 그런데 그게 뭐요? 그게 내가 당신을 겁내거나 꺼려 할 이유가 되나?”

비록 사업 전선에 뛰어든 적은 없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쟁쟁한 재벌가 자제들 사이에서 섞여 자랐다. 시기와 질투가 뒤엉킨 가식적인 관계망 속에서 진짜를 구분해 내는 일이란 쉽지 않았고, 그 자체로 인생 공부였다. 게다가 그는 사업 수완 좋은 강씨 집안의 일원이었다. 타고난 기백과 여유는 쉽게 얕볼 것이 못 되었다.

먼저 평정을 잃은 쪽은 해진이었다. 팽팽하게 마주 보고 선 그의 눈빛에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서렸다.

“애쓰지 마.”

해진이 짓이기듯 경고했다. 주먹을 바투 쥐고 이쪽을 노려보는 모습은 차라리 안쓰러웠다.

“어차피 그쪽과의 관계도 손익 따져 선택한 비즈니스에 불과하잖아?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질 텐데, 뭐가 그렇게 꼿꼿해?”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그래도 굳이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다면…….”

준희는 앉은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이내 짓궂은 웃음이 입가에 감돌았다.

“누가 누굴 버려? 주완 씨가 나를?”

감히.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지만 해진은 그의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준희의 눈에 오만의 빛이 넘칠 듯 일렁거렸다.

준희에겐 그런 연기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의 모습이 평소의 강준희에 가까웠다. 상대의 사기가 뚝뚝 꺾여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준희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해진 씨,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서요. 그렇다면 그런 도발은 내 입장에서 조금…… 우습지 않을까?”

“뭐, 이 새끼야?”

준희는 상대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느리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을 뿐이다. 권태로운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 그는 가소로웠다. 이토록 쉽게 발끈할 거면서 고상한 척은 쉬웠지. 준희는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섰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해진 씨한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테니까.”

“이런 미친놈이…….”

해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때리면 몇 대쯤은 맞아 줄까. 어쩌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요긴하게 쓰일지도. 준희는 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해진의 두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도 폭력을 행사할 배짱은 없는 듯했다. 하기야 지나가던 개도 한울 그룹의 막냇손자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지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겠지만, 천만에. 너도 고작 며칠, 길어 봐야 몇 주짜리에 불과…….”

잔뜩 흥분한 해진이 속사포처럼 저주했다. 그러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표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그의 말끝을 잘라먹었다.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문가로 향했다. 그동안 여유작작한 자세를 유지하던 준희도 불안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입구에서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남자는 이 대표실의 주인, 차주완이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 주완의 눈빛은 뒷골이 절로 송연해질 만큼 서늘했다.

준희는 본능적으로 해진과 저 사이 잘못의 퍼센티지를 계산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연락도 없이 멋대로 찾아온 전 애인(혹은 파트너)과 역시나 기별도 없이 찾아와 허락하지도 않은 손님을 제멋대로 대표실로 끌어들인 현 (계약)연인 중 어느 쪽이 더 골치가 아플까.

“…….”

응,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

공기가 얼어붙은 채 몇 초가 지났을까. 가늠할 수 없었다. 주완은 대표실의 문을 닫기 전 대표실 바깥에 있는 도일과 지율을 향해 부탁했다.

“한도일 씨, 오늘 퇴근하세요. 그리고 박지율 씨는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시겠습니까?”

도일과 지율은 영문도 모른 채 라운지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주완이 대표실의 문을 닫았다.

안으로 들어선 주완의 얼굴은 더없이 고요했다. 그러나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증폭되었다.

“……대표님.”

해진이 먼저 얼음장 같은 정적을 깨고 주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나 문가에 서 있던 주완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대표실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주완은 망설임 없이 해진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대단한 마찰 음과 함께 해진의 몸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헉, 준희는 숨을 들이켜다 못해 손바닥으로 제 입을 막았다. 처음 플레이 하던 날 꽤나 세게 뺨을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손찌검에 비한다면 아이들 장난 수준에 불과했다.

해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주완에게 매달렸다.

“대표님, 저 대표님 없이 못 살아요. 제발…….”

“내가 뭐라고 했었지?”

“제가 다……, 제가 전부 잘못했어요. 저 세컨드여도 괜찮아요. 저 자리, 욕심 안 낼게요. 그러니까 제발…….”

그는 주완의 바짓단을 붙들고 늘어진 채 준희가 있는 방향을 손가락질하며 애원했다.

‘내가 무슨 좋은 꼴을 보자고 여길 왔을까.’

준희는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주완은 차가운 눈으로 해진을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나가.”

“흐윽, 대표님…….”

“두 번 말할까?”

“…….”

“멋대로 구는 건 질색이라고도,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잘못했어요.”

주완은 그에게서 눈길마저 떼 냈다. 그러자 바짓단을 붙들고 있던 해진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옷감이 와락 구겨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준희는 제가 다 긴장해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끝이라는 말을 얼마나 더 해야만 네가 나가떨어지려나.”

“…….”

“그동안 했던 말이 부족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그렇게 말하며 주완은 몸을 약간 틀었다. 그 바람에 해진의 손이 허공을 헛돌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매몰찬 대우에 준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해진을 부축할 뻔했다.

고개를 숙이고 절망하던 해진이 전의를 상실한 채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어느덧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젖은 뺨을 소매로 훔쳐 낸 그는 주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표님.”

해진은 끝끝내 미련이 일렁이는 눈으로 주완을 응시했지만 주완은 그와 눈을 마주쳐 주지 않았다. 기어이 그가 스스로 대표실에서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말없이 강요했다. 준희는 해진의 축 늘어진 어깨에 한동안 시선을 붙들렸다. 그사이 주완은 제 책상으로 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준희는 얼떨떨했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것만 같았다. 그는 책상에 앉은 주완의 시선이 소파 옆 쇼핑백에 향하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어, 그게…….”

설명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쭈뼛거리며 선 채로 준희가 말을 가다듬었다.

“백화점에 갔는데 주완 씨 생각이 나서요.”

“화대입니까?”

미적미적 이어지던 말을 날카롭게 자르며 주완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뒤틀린 심사가 그대로 묻어나는 섬찟한 미소였다. 준희는 당황해서 어물어물 변명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정말로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니면 시위인가.”

“…….”

“약속을 취소한 대가인 모양입니다. 부잣집 도련님 아니랄까 봐 통이 크네요. 간과한 내 죄가 큽니다.”

화대나 시위로 여기라고 벌인 일이 아니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그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핑계를 만들어 얼굴이라도 보려던 수작이었을 뿐이다. 유려한 곡해와 비아냥에 준희는 할 말을 잃고 입술만 소리 없이 달싹거렸다.

차마 주완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준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렇게 느끼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그저…….”

“강준희 씨.”

“…….”

“오늘 충분히 선 넘은 것 같은데.”

주완의 미간이 얄팍하게 구겨졌다. 그는 컴퓨터를 부팅시키며 거듭 말했다.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덧붙이자면 이제 그만 돌아가 달라는 뜻입니다.”

화난 상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준희는 머리를 굴렸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당장은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쪽이 상책일지도. 준희는 주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살금살금 대표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리고.”

그렇게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주완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았다.

“오늘 열 시. 펜트하우스.”

준희는 고개를 돌려 주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안경을 쓰고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업무를 확인하고 있었다. 주완은 준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말했다.

“화대를 받았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망했다.

준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 속으로 여러 번 되뇌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열 시가 되기 두 시간 전. 그러니까 여덟 시에 준희는 일찍이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그가 들어선 펜트하우스 거실에는 대표실에 들고 갔던 쇼핑백들이 옮겨져 있었다. 준희는 쇼핑백을 앞에 두고 소파 위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다. 그를 불쾌하게 하려 벌인 짓은 당연히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눈 밖에 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잘못 생각했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인데……. 일을 그르치고 나자 주눅이 들었다. 고작 몇 시간 전의 일들이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래,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갔으니 영역 침범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지. 서프라이즈보다는 돌발 상황에 가까웠을 거야. 조금만 더 인내했다면 불쑥 찾아가는 대신 돌아오는 토요일을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잘못 판단했어. 줄줄이 이어지는 자괴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보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아…….”

자꾸만 잇새를 비집는 한숨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초조해지다가도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떡하겠냐는 자조가 뒤따랐다.

계약을 파기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수틀렸다고 즉흥적으로 굴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준희는 내키는 대로 굴었던 자신의 지난날을 잠시 반성했다. 그러고는 주완의 서늘하던 두 눈동자를 떠올렸다. 종종 누그러지거나 다정한 빛을 띠던 순간들도 이따금씩 끼어들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 줄지도 모르지. 어렴풋한 희망들도 함께였다.

계속되는 상념에 2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옹송그린 자세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준희는 그대로 깜빡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서늘한 음성이 그를 불러 깨울 때까지.

“강준희 씨.”

주완의 목소리에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릎에 처박혀 있던 고개를 바싹 들자 몸에 힘이 풀려 옆으로 기우뚱 기울어졌다. 우스운 꼴로 허우적거린 후에야 준희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앉아 주완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의 정장 차림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준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준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여 남은 졸음을 쫓아냈다.

“가지가지 합니다.”

“아, 으음……, 그게…….”

조는 사이 잠긴 목소리가 볼품없이 흘러나왔다.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자 주완이 작게 한숨 쉬었다.

“씻고 나와요.”

그는 욕실 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준희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느니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씻고 나오는 동안 주완 역시 침실에 따로 분리되어 있는 작은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그는 어두운 색 샤워 가운을 입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준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잡한 듯 구겨져 있는 미간과 끽연하는 느린 손동작, 그리고 깎아 놓은 듯 반듯한 옆 선이 눈에 들어왔다.

‘잘생겼다.’

와중에도 그런 감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준희는 입고 나온 샤워 가운의 끈을 공연히 고쳐 매고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인기척을 느낀 주완이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뜨렸다.

“침실로 가죠.”

건조한 음성이 귀를 스쳤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담배 연기를 남겨 둔 채 주완이 먼저 침실로 향했다. 그는 자리를 옮기자마자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여태껏 그는 플레이 하는 동안 옷을 제대로 벗었던 적이 없었다.

주완의 뒤를 쫓던 준희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근육이 적당히 자리 잡힌 어깨 너머로 준희를 흘끗 돌아본 주완이 재촉했다.

“뭐 합니까. 가운 벗고 올라가세요. 시간 끌지 말고.”

이것도 다 플레이의 일종인 걸까. 준희는 꾹 다물린 남자의 입술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성질이 터져 나올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결국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주완은 그에게 특정 자세를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게 걸터앉으니 차가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가운을 입고 섹스할 요량입니까?”

“아, 아뇨. 방금 벗으려고 했…….”

“아니면 그런 취향까지 화대에 포함되는 거였나?”

“…….”

“그런 거였다면 서툴러서 미안합니다. 화대는 처음이라.”

가운의 끈을 당겨 풀던 준희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주완과 눈을 마주쳤다. 짜증이 깃든 눈빛과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내가 직접 벗겨 주길 바라는 건가?”

“…….”

“왜 말이 없습니까, 강준희 씨. 지불을 했으면 정당하게 요구하세요.”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는 동안 침대 위로 주완의 무게가 실렸다. 가운의 끈을 다 풀지 못하고 멈춰 있는 손등 위로 주완의 손이 내려앉았다. 그의 손길에 끈이 완전히 풀리고 가운이 벗겨졌다.

“구멍도 내가 풀어 줘야 됩니까?”

그는 어깨를 밀어 준희를 눕게 만들었다. 무릎이 잡혀 양옆으로 벌어졌다. 준희는 등 아래 놓인 이불을 양손에 구겨 쥐었다.

매를 들거나 고압적으로 명령할 때보다도, 준희는 지금이 더 두려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작정 사과해야 하는 걸까. 오해라고 매달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의 심술이 풀릴 때까지 견뎌 내야 하는 걸까.

주완은 베개를 끌어다 준희의 엉덩이 아래에 받쳤다. 다리를 벌리고 누운 자세에서 엉덩이가 허공에 들리며 은밀한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흐읍, 더운 숨을 들이켜는 사이 주완이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협탁에서 꺼내 온 젤이 회음부 위로 쏟아졌다. 살갗을 적시며 흘러내린 젤이 주름진 입구에 구석구석 발렸다. 주완은 무릎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은 채 그의 아래를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터질듯 뜨거워지고 이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완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흐, 읏.”

주완의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내부를 들쑤셨다. 긴장한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다소 버겁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완은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젤로 질척해진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개수를 늘려 가며 길을 넓혔다.

쾌감 없는 자극에 몸을 떠는 동안 자신의 물건을 키운 주완이 구멍 가까이로 선단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이 휙 빠져나가며 뭉툭한 살덩이가 닿자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힘 빼요.”

“으, 잠, 잠깐……, 주완 씨……, 아흑.”

아직 그의 크고 단단한 성기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풀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울상이 되었지만 주완의 것은 우악스럽게 안을 비집고 삽입되었다. 갑작스런 이물감에 이불을 쥐었던 손을 접합부 쪽으로 가져갔지만 단숨에 손목이 붙들렸다.

안이 충분히 넓어지지 않아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주완의 물건이 기어이 끝까지 밀어 넣어졌다. 붙들린 양 손목이 머리 옆으로 고정된 채였다. 준희는 짧게 신음하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주완의 미간이 덩달아 좁아졌다. 안이 좁아서인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는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이물감이 반복됐다. 배려 없는 허리 짓에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강준희 씨는, 후……. 돈이 아깝지 않은가 봅니다. 눈을 떠서, 날 봐야지.”

“그, 그런 거 아니……, 흑, 히윽.”

“똑바로 봐요.”

그의 명령조 지시에 눈을 몇 차례 깜빡여 내니 눈물로 흐리멍덩해진 시야가 또렷해졌다. 주완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추삽질을 이어 갔다. 그 잘생긴 눈을 마주 보자 심장이 바닥 끝까지 내려앉는 듯했다. 준희는 숨을 삼켰다.

“돈 많고, 배경 좋은 걸 제외하면……. 강준희 씨가 잘하는 게, 뭡니까?”

“으, 하으, 읍……. 아, 아으, 흐, 너무 크…… 아……!”

“하는 짓마다, 거슬립니다. 아주.”

주완은 허리 짓 할 때마다 문장을 끊어 가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전립선 부근을 애매하게 긁어 대며 준희를 괴롭혔다. 아무렇게나 사정없이 찔러 넣어지는 감각에 준희는 성감을 맞추려 힘겹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마저도 엉덩이가 베개로 받쳐진 채 허공으로 들려 있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할퀴는 직언은 괜찮았다. 불친절한 허리 짓도 참을 만했다. 준희를 힘들게 하는 건 마주 보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수틀린 기색이 여실히 드러나는 형형한 분위기가 심장을 오그라들게 했다.

‘마주 보는 섹스는 처음인데…….’

번번이 뒤에서 안는 자세로 성기를 품었기 때문에 눈을 마주 본 채 몸을 섞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중한 첫 경험이 제 실수로 인해 무서운 기억으로 각인될 것만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준희는 붙들린 손목을 반항하듯 약간 비틀었다. 그러자 주완은 그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치켜들곤 더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몰아치는 감각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 흑, 흡……. 하, 아아, 아……!”

단단히 모양이 잡힌 귀두가 어느 순간부턴가 성감대를 누르고 집요하게 찔러 댔다. 감춰 두었던 페로몬을 풀었는지, 상록 교목 내음이 판단 기능을 눅진히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하앙, 아, 으으응…….”

새된 신음이 속절없이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그의 매서운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준희는 손목의 결박을 풀고 팔을 뻗어 주완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의 품에 매달려 사랑을 속삭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에게 입을 맞추고 다정한 손길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애가 타고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온기가 간절했다.

‘차라리 혼내 주지.’

이런 시선과, 기계적인 허리 짓에 몸을 내주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 성싶었다. 자꾸 왈칵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힘겹게 삼켜 내며 생각했다.

완급 조절 없이 쏟아지는 쾌감에 발가락이 자연히 곱아들었다. 잘게 허리를 쳐올리던 끝에 주완은 그의 안에서 사정했다. 그렇지만 사정한 후에도 준희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정액이 질퍽하게 들어찬 안쪽을 향해 끊임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접합부를 통해 희뿌연 정액이 밀려 나올 때까지 허리 짓은 계속됐다. 살 맞는 소리에 물기가 더해졌다. 끝을 모르는 절정의 감각에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한참이고 안을 치덕이던 주완은 뒤늦게 빠져나갔다. 느리게 몸을 물리는 감각이 선연해서 몸이 절로 떨렸다.

“오늘 선물 값에 뒤처리까지 포함된 게 아니라면, 난 씻고 가 보겠습니다.”

“아, 으으……. 주완, 씨. 가지 마, 흐윽, 가지 마세요.”

침대 위에 준희를 버려두고 몸을 물린 주완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운을 집어 몸에 걸쳤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준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리가 뻐근하고 아래로 액이 줄줄 흐르는 느낌이 났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준희는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가 주완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그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가운에 마구 비비며 울음을 뭉개다가 고개를 들어 주완을 올려다보았다.

“안 돼요. 안 돼요, 주완 씨. 흐윽……. 저 두고 가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반성하고 있어요. 정말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싫어요.”

말 사이사이에 흐느낌이 섞였다. 준희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주완이 미간을 구겼다.

희고 고운 얼굴은 붉어진 눈매와 코끝, 불어 터진 입술 탓에 울긋불긋했다. 연한 갈색의 투명한 눈동자 위로 맑은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가 났다는 사실마저 일순 까무룩 잊혀질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게다가 그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고 매달리는 행동 또한 심장을 뻐근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주완의 속을 알 길 없는 준희는 더럭 겁이 났다. 무언가 또 수틀린 것일까. 애프터 케어는커녕 이대로 저를 버려둔 채 떠나겠다 선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절망적이었는데……. 허벅지를 붙들고 늘어진 팔에 힘이 들어갔다.

“주완 씨……, 저 혼내 주세요.”

“…….”

“잘못했으니까……, 흐읍. 스팽킹 해 주세요. 저 잘 맞을 수, 있어요.”

그는 저도 모르게 간절하게 매를 청했다. 이대로 관계가 틀어지는 건 싫었다. 벌을 받고 응어리를 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저를 살뜰히 보살피던 손길을 떠올리며 준희는 애원했다.

“으…….”

방울방울 떨어지던 눈물이 걷히자 투명한 눈동자에 주완의 모습이 비쳤다. 말없이 준희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도 진득하고 집요했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고 온몸의 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지는 고요는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지만, 이제 와서 눈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완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은 준희의 뺨을 뜨겁게 어루만져 눈물을 훔쳐 갔다. 손길이 닿은 뺨이 뜨겁게 욱신거리는 듯했다. 준희는 최대한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간신히 조금 뱉었을 무렵, 주완이 그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고개가 한계까지 꺾였다.

“읍.”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울음이 통째로 달아나 버릴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스스럼없이 벌어진 잇새로 파고든 뜨거운 혀가 입 안을 유연하게 헤집었다. 섹스와 비교할 수 없게 부드러운, 그와의 첫 키스였다.

주저앉아 위를 보고 매달린 자세이기도 했고, 턱을 단단히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오가는 타액이 목구멍 너머로 그대로 넘어갔다. 준희는 가만히 눈꺼풀을 내리며 허벅지를 붙들고 있던 손을 뻗어 주완의 어깨 너머로 넘겼다.

“아아.”

턱을 놓은 손이 허리를 감아 그를 일으켰다. 입술과 입술은 여전히 맞닿은 채였다. 준희는 고개를 기울이며 각을 맞춰 남자의 혀에 제 온기를 맞대어 문지르고 턱을 움직였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기 새 같은 모양새였다. 오물오물 움직이며 주완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준희의 붉은 입술이 애틋하고 가여웠다.

주완은 준희의 간절한 움직임에 적당히 장단을 맞추다가도 주도적으로 혀를 움직여 연한 살과 입천장을 뭉근히 훑어 내곤 했다. 혀와 혀가 섞일 때마다 허리께에 저릿저릿 전류가 감도는 듯했다. 준희는 이대로 그를 침대로 인도해 넘어뜨리고 싶었지만, 자리에 선 남자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후…….”

주완의 페로몬 향이 다시금 느슨하게 새어 나왔다. 오랜 키스 끝에 입술을 떼어 낸 주완의 눈빛은 사뭇 누그러져 있었다. 어딘지 멍해 보이는 듯도 했다. 착각인가. 준희는 그의 기분을 읽어 내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주완은 짧게 한숨 쉬었다.

“또 선을 넘었네요.”

속을 알 수 없는 말투였다. 그래도 아까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준희는 혹시 몰라 버릇처럼 사과했다.

“잘못했…….”

“간절히 원하는 것 같으니 바라는 대로 해 주겠습니다.”

“…….”

“오늘 산 것들 중에 벨트도 있던데. 가져와요.”

하, 그제야 참았던 숨이 이어졌다.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에야 준희는 제 허리가 그의 팔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준희는 아래와 위를 연달아 흘끔거리며 말했다.

“이것 좀…….”

“빨리 맞고 싶어 안달이 났나 봅니다.”

주완이 짓궂게 그를 놀렸다. 딱딱했던 분위기가 녹녹하게 풀어졌다. 안심이 되고도 억울한 마음에 준희가 울상을 지었다. 주완은 그제야 준희를 놓아주었다.

준희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거실로 쏟아져 나왔다. 어느 타이밍에서 기분이 풀어진 걸까. 그 순간을 정확하게 잡아채긴 어려웠다. 준희는 상념을 거두고 거실에 가지런히 서 있는 쇼핑백을 부지런히 헤집었다. 주완은 그가 늦으면 늦는 대로 꼬투리를 잡아 더 아프게 때릴 남자였으므로.

“그새를 못 참고 질질 흘리면서 다녀왔습니까?”

벨트를 꺼내 가지고 들어가니 주완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준희의 뒤를 턱짓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싸 놓은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다 못해 바닥에 고여 있었다. 준희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완 씨 정액이잖아요.”

반사적으로 항변하니 주완이 픽 웃었다. 그러나 금세 웃음기를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으름장을 놓았다.

“여유 있네요. 아니면 엉덩이가 터질 때까지 맞고 싶어 매를 버는 건가.”

“잘못했어요.”

준희는 그의 앞에 빠르게 무릎을 꿇고 가지고 온 벨트를 내밀었다. 가운을 반듯하게 입고 있어 정사의 흔적이 사라진 그와 달리 준희는 몸의 이곳저곳이 전부 축축했다. 주완은 벨트를 받아 들고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소매를 걷어 주는 일이 이제는 익숙했다. 굴욕감에 눈이 따끔거렸다.

가운은 셔츠와 달리 천이 도톰하고 뭉툭해서 잘 걷어지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는 준희를 가만 내려다보던 주완은 손목을 휙 거둬 간 뒤 벨트로 침대 위를 툭툭 두드렸다.

“침대 잡고 엎드려요.”

그가 가리킨 곳을 손바닥으로 짚으니 허리가 자연히 굽어졌다. 주완은 손으로 허리를 눌러 뺨을 침대에 붙이고 엉덩이를 치켜들게 만들었다. 준희는 손에 잡히는 이불을 구겨 쥐었다.

“몇 대 맞아야 반성이 되겠습니까?”

준희는 이불을 꾹 쥔 채 머리를 굴렸다. 몇 대를 불러야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가늠하는 동안, 주완은 손바닥으로 준희의 엉덩이를 가볍게 내려치며 예열시켰다. 정액과 애액이 흘러 질척한 살갗 위로 손바닥이 달라붙자 제법 따끔따끔했다.

“열 대……요.”

지난번엔 열다섯 대를 맞았지만, 정사를 한 차례 치렀으니 자체적으로 감안해서 대 수를 줄여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엉덩이가 눅진해서 벨트로 맞는다면 상당히 아플 터였다. 다행히 주완은 그가 정한 대 수가 나쁘지 않은 듯했다.

“숫자 세세요.”

“네.”

주완은 벨트를 반으로 접어 바투 쥐고 준희의 희고 말랑한 엉덩이 위로 때릴 자리를 가늠했다. 빳빳한 재질의 가죽이 엉덩이에 슬쩍 달라붙었다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짜악. 허공을 가르고 떨어진 벨트가 넓은 자국을 남겼다.

“흐읍, 아…….”

생각보다 강도가 높아 허리가 절로 튀었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키고 주완을 돌아보았다. 마주친 눈빛에 주완이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들어 올렸다.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금세 풀이 죽었다. 준희는 우는 소리를 삼키며 다시 침대를 짚었다.

“죄송해요. 자세 바로 할게요.”

“카운팅도 제대로 하도록 하세요.”

“네.”

대답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준희가 자세를 바로잡는 사이 주완의 손이 엉덩이를 거칠게 주무르고 떨어졌다. 울긋불긋하게 손자국이 남아 있는 엉덩이 위로 거센 매질이 이어졌다.

짜악. 빠르게 떨어진 벨트가 엉덩이 전체를 홧홧하게 물들였다.

“악, 흐……. 하나.”

꽉 다문 잇새가 벌써부터 벌벌 떨렸다. 이대로라면 열 대는커녕 다섯 대를 맞기도 전에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지고 말 것이다. 섣부른 걱정에 눈시울이 뜨겁게 물들었다. 그사이 벨트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갈랐다. 짜악-, 매 맞는 소리가 뒤따랐다.

“둘! 아, 으으, 아파요.”

앓는 소리를 냈지만 주완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엉덩이를 만져 열감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발그레해진 엉덩이를 벨트로 툭툭 건드렸다.

짜악,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벨트가 여린 살갗 위로 연거푸 감겼다. 숫자 세는 소리가 점차 울음에 뭉개졌다. 벨트의 위력이 센 데다가 그의 엉덩이가 땀과 애액으로 젖어 있는 상태였기에, 붉은 자국이 빠르게 그려졌다. 다섯 대째 맞았을 때 준희는 기어이 발을 동동 굴렀다.

“다섯……! 으흑, 흡. 용서해 주세요, 흐윽……. 너무 아파요.”

“무효. 자세 흐트러뜨리지 마세요.”

그의 냉정한 말에 준희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끅끅 울음을 토해 냈다. 엉덩이가 달구어지도록 매를 맞은 탓에 눅진해진 구멍 사이로 남은 정액이 비집고 흐르는 것이 느껴져 더욱 비참해졌다. 주완은 거친 손길로 엉덩이를 벌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다가 픽 웃었다.

“여전히 칠칠치 못하긴.”

“아흐…….”

그는 정액을 내보낸다고 질책하며 손가락으로 흘러나온 정액을 다시금 푹푹 쑤셔 넣었다. 갑작스런 삽입에 온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유희 삼아 구멍을 거칠게 쑤셔 대던 그는 손가락을 뺀 뒤 텀을 거의 두지 않고 벨트를 휘둘렀다.

“악!”

머릿속에 하얗게 번개가 내리치는 듯했다. 히끅. 숫자를 세지 못했다는 설움에 딸꾹질마저 일었다. 준희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젖은 눈으로 주완을 응시했다. 주완은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강준희 씨가 스팽킹을 끝낼 생각이 없나 보네.”

“흡, 잘못했…….”

“괜찮습니다. 알다시피, 때리는 건 나도 즐기는 편이라.”

일곱 대를 헤아리기까지 준희는 자세를 흐트러뜨렸다는 이유로, 혹은 카운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여러 번이나 무효 처분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엉덩이는 벨트 자국으로 가득해졌다. 붉게 뒤덮인 피부는 불이 난 듯 쓰라렸다.

“엉덩이 그만 흔들어 대죠. 정신 사납습니다.”

“흐으, 그치만…… 너무 아파서…….”

정신없이 내뱉는 사이 벨트가 떨어졌다. 눈앞이 눈물로 흐려졌다. 자꾸 짓씹는 탓에 입술도 죄 붉게 터진 지 오래였다. 준희는 간신히 입술을 벌렸다.

“하으, 아……, 여덟. 하아…….”

숫자는 세었으나 땅을 딛고 있는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발이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보호하려는 듯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준희는 서둘러 원래 자세로 돌아갔지만 주완이 그대로 넘어갈 리 만무했다.

“다시.”

그렇게 말하는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엉덩이를 잔뜩 혼내 줬으니 만족스러운 표정이려나. 다음부터는 적당히 울어야지 다짐하면서도, 도저히 불가능할 미래가 보여 암담해졌다.

휘익. 벨트가 위로 들어 올려지는 소리에 준희는 더 이상 자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 위로 무릎이 꿇려졌다. 엉덩이를 조준하던 벨트가 중간에서 간신히 궤적을 바꿔 준희의 머리 위로 휘둘러졌다.

“제정신입니까?”

주완이 잔뜩 화를 내며 벨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준희는 손등으로 눈을 닦아 내며 주완의 가운 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주완이 차갑게 쳐 내는 바람에 준희의 손바닥이 바닥을 짚었다.

“흐윽, 너무 아파서……, 제발. 제가 잘할…….”

“강준희 씨, 그럴 때 해야 하는 말 잊었습니까? 도대체가 공연히 피 보지 않을 마음이 있긴 한 겁니까?”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이쪽으로 내리꽂히는 시선이 형형했다. 그는 전에 없이 얼굴을 구겨 가며 화를 냈다. 두려움이 왈칵 차올라 준희는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잘,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비는 겁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놔요.”

간신히 그의 마음을 풀고 첫 키스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전복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참아야 했던 것이다. 또는 세이프 워드를 불러야만 했었다. 뒤늦은 후회가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문득 대표실에서 해진을 단호하게 내치던 주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틀리게 군다면 해진이 내쳐졌듯이 순식간에 버림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못 견디게 초조해졌다. 이대로 끝나 버리게 된다면, 그에게서 얌전히 떨어져 나가 줄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키스하기 전까지는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 다음이라 더더욱 그랬다.

하얗게 질려 있는 사이 냉정한 태도로 그에게서 발목을 빼낸 주완이 몸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못한 채 그가 저를 버리고 떠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쩌면 패닉 상태에 가까웠다. 준희는 다급하게 무릎으로 기어 아직 침실을 벗어나지 못한 주완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주완이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강준희 씨 오늘따라 왜 이렇게…….”

“좋아해요!”

“뭐?”

샤워 가운에 얼굴이 묻혀 잘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이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고백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준희는 얼굴을 들어 주완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마주하자 말문이 막혀 왔다. 이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맞는 선택일까?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묻고 울어 버릴까? 자아가 두 개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했다. 과부하가 걸린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주완의 미간이 다시 한번 구겨졌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준희는 속수무책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발음을 뭉개며 고백했다. 이번에는 불가항력이었다.

“좋아, 해요. 주완 씨를 좋아해요.”

그제야 주완이 몸을 돌려 준희를 마주 보았다. 저를 끌어안고 올려다보며 눈물짓는 준희를 내려다보던 주완은 길게 숨을 뱉었다.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

주완은 그대로 준희를 안아 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우는 준희를 내려놓은 곳은 어김없이 욕조 위였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준희를 씻기고 나서 룸서비스로 음식을 주문했다. 속이 놀라지 않도록 가벼운 요리 위주였다.

그렇지만 준희는 포크를 들고 싶지 않았다. 샐러드의 싱싱한 채소들이 창백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아주 작은 양상추를 찍어 아삭거리며 끊임없이 눈치를 보았다.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게 다물린 입에서 어떤 말이 쏟아져 나올지 가늠할 수 없어 목이 메었다.

“음료도 같이 마셔요.”

“……고맙습니다.”

주완은 요리와 함께 주문한 따뜻한 코코아를 그에게로 밀어 주었다. 코끝이 붉게 물든 채 샤워 가운에 감싸여 있는 준희는 코코아를 홀짝 마셨다. 무언가 씹어서 넘기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은 듯했다.

속이 차츰 진정되자 식사에도 진전이 생겼다. 준희는 샐러드를 적당히 비우고 닭 요리와 수프도 조금씩 맛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주완은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이따금씩 거실 창을 통해 야경을 내다보았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식사를 마무리할 무렵 주완이 입술을 뗐다. 진지하고도 무거운 기색이었다. 준희는 차마 ‘처음부터’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비즈니스를 제안할 때부터 거짓으로 환심을 샀었던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반응이 좋지 못할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창밖을 향해 있던 주완의 시선이 준희에게로 옮겨졌다. 준희는 눈을 피하며 어느새 미지근해진 코코아를 한 모금 넘겼다.

“이쪽 관계라는 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감정을 곡해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어쩌면 강준희 씨도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걸지도 모르죠.”

“전 제 감정에 확신이 있어요.”

준희는 분명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시선이 맞부딪혔다. 냉정한 눈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완의 눈에 묻어 있는 감정은 그보다는 걱정에 가까워 보였다. 준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당장 그렇게 생각될지라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감정을 인정하고 나면, 강준희 씨가 힘들어질 겁니다.”

“그 말은…….”

말의 속뜻을 어렴풋이 눈치챈 준희가 물었다.

“그 말은 제가 주완 씨를 좋아하는 마음이 진짜라고 해도, 우리 관계에 변함이 없을 거라는 뜻인가요?”

“그건 그다음에 상의해도 늦지 않을 문제예요.”

그렇다는 말은 변화할 여지가 있다는 뜻일까. 준희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엉덩이를 맞는 동안 씹어 댄 입술에서는 언뜻 비린 맛이 났다. 주완이 눈살을 살짝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부드러이 훑고 지나갔다.

“입술이 다 터졌습니다.”

“…….”

“상처 남지 않게 약 발라서 관리하세요.”

“네.”

준희가 고분고분 대답하자 주완은 인상을 펴고 입꼬리를 올렸다. 입술에 온기를 남긴 손가락이 멀어졌다.

“그래도 오늘의 행동이 이해가 되네.”

“네? 어떤 점에서요?”

“선물 공세가 나 보라는 시위인 줄 알았거든. 아니면 이쪽에서 계약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니 그쪽에서도 좆대로 해 보겠다는 선전 포고거나.”

주완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 앞에 놓인 쇼핑백들에 흘끗 눈길을 주었다. 벨트를 꺼내느라 헤집었던 탓에 이리저리 쓰러지고 포장이 풀려 너저분해진 상태였다.

“전자든 후자든 무척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네요.”

보고 싶어 그랬다는 의도를 알았다는 뜻일까.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겨우 누그러진 분위기를 어그러뜨릴까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쇼핑백 더미에서 눈을 뗀 주완이 다시금 준희와 시선을 맞추었다.

“혼날 때 억울했겠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요?”

“변명이라고 생각하실까 봐요.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대답해야 화가 풀릴지 모르겠어서 그랬어요. 무섭기도 했고요.”

그러자 주완이 잔잔히 웃었다.

“무서웠어요?”

“네. 평소보다 훨씬 더요.”

“미안합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미안하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저는 혼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네요.”

온화해진 분위기에 준희는 조금쯤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에 주완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덧붙였다.

“그러면 앞으로는 더 무섭게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그건…….”

“아까의 강준희 씨는 평소보다 훨씬 더 예뻤거든.”

안 된다고 칭얼거리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다시 눈물을 글썽일 뻔했다. 마주친 눈빛이 무척이나 따뜻했기 때문이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그게 아니라면 귀여워하는 소동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준희는 왈칵 불평하고 싶어졌다. 긍정적인 대답을 줄 게 아니라면, 차라리 냉정했으면 좋겠다. 이런 식의 희망 고문은 그를 조금의 가능성에 매달려 헐떡이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주완이 이따금씩 바라보던 야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까맣게 물든 도시를 배경으로 붉고 푸른빛들이 눈부시게 수놓여 있었다. 준희는 제게로 와 닿는 주완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숨을 골랐다. 심장께가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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