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9)
  • 2. 희망 고문

    준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완은 곁에 없었다.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율뿐이었다.

    덜 뜬 눈으로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는 창문을 보니 이른 아침인 모양이었다. 오전 특유의 창백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전날 주완이 떠나고 곯아떨어진 뒤 제법 긴 잠을 잤다는 증거였다. 준희는 버석거리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약간 뒤척였다.

    작은 소리에 깨어난 지율이 졸린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그냥 뭐……. 언제부터 와 있었어?”

    “집에 안 갔는데요. 야근 수당 왕창 청구할 겁니다.”

    그는 길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잠이 달아난 준희는 슬며시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저기 소파 가서 눈 좀 붙이든가. 집에 가서 자고 다시 오지, 왜 안 갔어.”

    “병 주고 약 주십니까? 기자들이 어디 오늘 아침까지 순순히 기다려 줘야 말이죠. 밤새 수습했다고요.”

    “아, 그거.”

    “예, 그거요.”

    지율이 말하는 ‘그것’이란 어제 터졌던 열애설을 의미했다. 굳이 따지자면 제 잘못은 아니었으므로 위축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수습을 했다는 말은 그래도 무언가 지침이 떨어졌다는 뜻인데…….

    준희가 의아해하는 사이 지율은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태블릿 PC를 집어 들곤 이리저리 조작했다. 그는 포털 사이트에 ‘강준희’라고 검색한 다음 준희에게 건넸다.

    “뭐야, 이거.”

    “뭐가요?”

    “……인정했는데?”

    준희는 큰 눈을 끔뻑거리며 줄줄이 이어지는 기사 헤드라인들을 읽어 내렸다.

    「[단독] 유성기획 차주완 대표, 한울家 강준희와 열애 인정 “아직 조심스러운 단계”

    차주완♥강준희, 재계 거물급 유명 인사들의 핑크빛 만남 [종합]

    (취재 플러스+) “연애합니다” 유성기획 차주완, 한울 그룹 강준희와 열애설 인정

    이대로 결혼까지? 차주완‧강준희 ‘알파x오메가’ 연애 소식에 국민 관심 쏠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전부 열애설은 인정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었다. 설명이 필요했다. 준희는 고개를 들어 지율을 응시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것은 이쪽만이 아니었다.

    “인정한 게 왜요?”

    “언제 이게…… 이렇게 된 건데?”

    “어제 차주완 대표랑 얘기 끝낸 거 아니었어요? 전 하달받은 대로 했을 뿐인데요?”

    지율 역시 준희의 반응이 예상 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다시 태블릿 PC 화면 위로 눈을 돌린 준희는 무심히 스크롤을 내렸다. 두 사람의 연애에 대한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며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강준희 씨 의사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회장님과도 상의를 해야 하고.

    차주완 대표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도는 듯했다.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한 결과 열애설을 인정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걸까? 할아버지와 상의까지 마쳤으니 지율에게도 지시가 내려올 수 있었던 거겠지? 의문점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침 전화 오는 것 같네요? 그분한테서?”

    “어?”

    “나가서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통화 끝나면 전화 주세요.”

    “어엉.”

    지율의 말대로 휴대 전화가 진동하고 있었다. 지율은 얼이 빠진 준희를 대신해 태블릿 PC를 정리하고 휴대 전화를 그의 손에 쥐여 준 다음 병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병실에서 ‘차주완 대표’라는 저장명을 넋 놓고 바라보던 준희는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주완 씨.”

    [아, 강준희 씨. 혹시 내 전화에 깬 건 아닙니까?]

    “아니에요. 깨어 있었어요.”

    [몸은 여전히 괜찮은가요?]

    “네, 아마 오늘 퇴원할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일을 하는 도중이었는지 휴대 전화 너머가 아주 잠시 소란스러운 듯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준희는 잠자코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나는 강준희 씨가 먼저 연락할 줄 알았는데.]

    “네?”

    [기사 못 봤습니까?]

    “아……. 봤어요, 방금. 지금 막 일어났거든요.”

    경황이 없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했더라면 그의 말대로 먼저 연락했을 것이다. 전화를 기다린 걸까? 준희는 아주 조금 가슴이 부풀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마음의 결정을 하신 거예요?”

    [결정을 했으니 대응을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

    “…….”

    [관련해서 할 말이 많을 텐데, 전화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나 역시 회사 일로 바쁘기도 하고. 퇴원하고 나서 직접 봤으면 하는데요.]

    “오늘 퇴원하고 볼까요?”

    [그래도 컨디션이 괜찮겠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적어도 여섯 시…… 전에는 퇴원 수속해 달라고 할게요.”

    준희는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하며 빠르게 계산했다. 어차피 간단한 검진을 받은 뒤 퇴원하는 일정이었다. 여섯 시 전까지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주완의 퇴근 시간을 고려한 계산이었다.

    [그럼 여덟 시에 만나죠. 주소는 메시지로 보내겠습니다.]

    “네, 그럼 이따 봬요.”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준희는 한참이고 휴대 전화를 뺨에서 떼지 못했다. 기기의 뜨끈한 열기가 귓바퀴를 맴돌았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가, 모든 게 얼떨떨했다.

    그는 주완의 메시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휴대 전화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약속 장소는 SM 살롱이 있는 그 호텔의 펜트하우스였다. 준희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당장 지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도련님. 통화 끝나셨…….]

    “나 퇴원해야겠어!”

    마음이 급했다. 휴대 전화 너머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만 준희는 굴하지 않았다.

    병원 안에 도련님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강욱진 회장의 유난을 잠재우기 위한 보여 주기식 입원이기도 했다.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생긴 약간의 찰과상을 제외하고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준희는 무리 없이 퇴원했다.

    그는 퇴원하기 전 억제제를 처방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분간 차주완 대표와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대비는 해 두어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는데, 집으로 모셔다드릴까요?”

    “흐음……. 어쩔까.”

    차에 올라 고민하는 사이에 휴대 전화가 울렸다. 준희는 화면을 확인하고는 지율에게 말했다.

    “엔터 건물 앞으로 데려다줘.”

    “강희미 대표님 만나러 가시게요?”

    H 엔터테인먼트의 강희미 대표는 준희의 셋째 누나였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휴대 전화의 화면을 지율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자 지율은 알았다고 어깨를 으쓱한 뒤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꿔 넣었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휴대 전화 액정에 떠 있는 세 글자의 이름은 최시훈이었다. 전화가 끊기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전화를 받은 준희는 전후 사정 설명 없이 짧게 말했다.

    “지금 네 작업실로 갈게.”

    ***

    H 엔터테인먼트 건물은 으리으리하게 크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편이었다. 연습실과 작업실을 수용하는 건물이다 보니 스토커나 파파라치가 따라붙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경비도 제법 삼엄했다. 건물 입구에는 경비업체 직원이 상주했으며, 로비 인포데스크에도 안내 직원이 따로 고용되어 있었다.

    물론 준희는 복잡한 절차 없이 건물 내 엘리베이터로 직행할 수 있었다. 비단 그가 강희미 대표의 동생이자 사옥의 건물주인 강욱진 회장의 손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사옥이 설립되는 데 가장 많은 돈을 투자했던 사람으로, 대표 이사 강희미 다음가는 대주주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준희는 3층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크고 작은 작업실로 둘러싸여 있는 3층의 로비였다. 각 방의 문에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준희는 ‘최시훈’이라고 적힌 문 앞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예고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아우, 깜짝이야. 노크 몰라요, 노크?”

    “깜찍한 소리 한다.”

    최시훈의 작업실은 작은 녹음 부스를 끼고 있었다. 아늑한 크기이긴 했지만 커다란 창 너머로 한강이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공간이었다. 벽에 놓인 소파에 앉아 너저분한 노트에 무언가 끄적이던 시훈이 토끼 눈을 뜨고 준희를 맞았다.

    준희는 개의치 않고 소파 맞은편에 놓인 회전의자를 차지했다.

    “빈손으로 오기 있어요?”

    시훈이 노트를 치우며 묻자 준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야, 이 작업실 누구 덕에 쓰냐?”

    “이 형 또 계산적으로 나온다.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

    “엑스 보이프렌드요.”

    시훈의 당당한 주장에 준희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물론 구태여 따지자면 아주 틀린 소린 아니었다. 3년 전 스무 살인 최시훈은 당시 스물여섯이던 준희에게 열렬히 구애했고, 둘은 사귀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한 재벌가 망나니의 생일 파티 자리였다. 꽤나 호화롭게 여는 바람에 웨이터가 여럿 필요했는데, 당시 연습생이던 시훈은 스폰서라도 잡아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준희를 만났다.

    그에게 강준희는 기약 없는 연습생 생활을 끝내 줄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준희의 눈에 시훈은 천둥벌거숭이 그 자체였다.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진땀 빼는 꼴이 퍽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계산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훈은 스무 살답게, 진심을 다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안 잔 놈은 엑스로 안 쳐줘.”

    “와, 너무해.”

    진도를 빼기도 전에 준희가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젖비린내가 나서 안 되겠다’는 거였다. 그래도 준희는 연애 감정과 별개로 이 어린 중생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당시 호기롭게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든 셋째 누나, 강희미 대표 앞에 최시훈을 던져 놓았다. 애송이 하나 거둬들이는 대가로 강희미는 거액의 투자를 요구했고, 준희는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시훈이 H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맺게 된 지도 벌써 3년이었다. 그사이 최시훈은 솔로로 데뷔해 싱어송라이터로 제법 이름을 날렸다.

    “그래도 나한테는 형이 첫 남자 친구인데…….”

    시훈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투덜거렸다. 스물셋다웠다. 준희는 그를 막냇동생처럼 귀여워하는 편이었다. 전 남자 친구는 친구로도 다시 보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만 예외인 이유였다.

    “맞다. 형, 형. 뭐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기사 난리 났던데?”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본 그대로지.”

    “그동안 그렇게 연애를 했어도 공개 연애는 한 번도 안 했잖아요!”

    “그러게 말이야.”

    준희는 앉아 있는 회전의자를 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차주완 대표가 공개 연애를 수락했다. 무슨 뜻일까. 그야말로 비즈니스를 수락했다,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아닌 걸까. 어쩌면 당연한 것일 텐데도 공연히 입 안이 썼다. 준희는 상념을 떨쳐 버리며 시훈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잘 못 볼 거야.”

    “에?”

    “연애에 집중할 거거든.”

    “형 알고 지내는 3년 동안 남자 없을 때가 없었는데 그게 무슨 새삼스러운 말이에요?”

    시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3년 동안 보아 온 형이지만, 다른 사람이 된 양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자 준희가 시름 깊은 눈으로 시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봐도 그렇지?”

    “네.”

    “그런데 왜 모르겠냐, 나.”

    “뭘요?”

    “연애,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시훈은 경악했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준희의 이마 위로 손바닥을 덮었다. 그리고 제 이마의 온도와 비교해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은 없는데……?

    “형, 약했어요?”

    “너 나 꼬실 때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나?”

    “…….”

    “어떻게 해야 나한테 넘어올까?”

    시훈은 그의 이마에서 손을 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완전 진심이네, 이 형.”

    진단을 내린 그는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나름 진지한 얼굴로 고심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준희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미 사귀는 거 아니에요? 꼬시고 말고 할 게 있나?”

    “……아무튼 여차저차 그런 게 있어. 어린애는 몰라도 돼.”

    스물셋인 주제에 정곡을 찌른다. 준희는 시무룩해진 기색으로 휴대 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앉아 있던 회전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나 간다.”

    “벌써 가요? 나 이제 막 흥미진진해지려던 참인데?”

    “앨범 준비나 잘해, 인마. 나 앞으로 바쁠 예정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지율이한테 연락하고.”

    “치…….”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기 충전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기운을 잃은 상태로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차주완 대표를 볼 생각에 분명 설레기도 했지만 사실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하아, 옅은 한숨이 절로 샜다. 준희는 힘없이 손 인사를 하고는 시훈의 작업실을 떠났다.

    ***

    메시지에 적힌 장소는 19층에 SM 살롱이 자리 잡고 있는 호텔의 최상층 펜트하우스였다. 시간에 맞춰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준희는 약간 긴장했다.

    펜트하우스가 그의 집인 걸까? 객실 서비스가 갖춰진 펜트하우스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야 많았다. 물론 집은 따로 두고 종종 쉬러 오는 공간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준희 역시 다른 호텔에 펜트하우스를 한 채 가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자 문 앞으로 기다란 복도가 펼쳐졌다. 복도는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건조하고, 적당히 향기로웠다. 그 길의 끝에 놓인 커다란 철제문이 주완의 펜트하우스로 가는 입구였다.

    문 앞에 선 준희는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그의 집일지도 모르는데 너무 빈손인가? 뒤늦게 걱정이 들었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약속 시간이 코앞이었다. 선물 치레보다는 제시간에 맞춰 등장하는 것이 이로울 듯하다는 생각에 준희는 곧 초인종을 눌렀다.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준희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무거운 문이 열리자 복층 구조의 내부가 그를 맞이했다. 거실은 2층의 천장까지 트여 있어 층고가 무척 높았다. 게다가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의 야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다.

    “우와.”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선 준희는 반사적으로 감탄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주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듭니까?”

    “어, 네. 안녕하세요, 주완 씨.”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주완은 거실 한편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 바로 온 건지 슈트 차림이었고, 또…… 안경을 쓰고 있었다. 물론 안경을 씌웠다 하여 쉽게 가려질 미모가 아니었다. 안경은 도리어 액세서리인 양 남자의 지적인 매력을 한껏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준희는 입을 약간 벌린 채 소리 없이 감탄했다.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주완은 쓰고 있던 얇은 테의 안경까지 그 위에 올려 두었다. 기다리는 동안 남은 업무를 보던 모양이었다. 준희는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인테리어가 예뻐요. 야경도 그렇고요. 여기 사는 거예요?”

    “아뇨, 집은 따로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곳은 내 놀이터에 가까운 공간입니다.”

    “아…….”

    “앉으세요. 커피 괜찮습니까?”

    “네, 저는 아무거나…….”

    룸서비스로 올려 보낼 줄 알았는데, 주완은 부엌에서 로스팅 기구를 꺼내 직접 커피를 내렸다. 향긋한 커피 내음이 순식간에 거실 전체로 퍼져 나갔다.

    주완이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준희는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온기와 더불어 미약한 교목 내음이 묻어났다. 커피와 무척 잘 어울리는 향이라고, 준희는 가만히 생각했다.

    “그런데 강준희 씨는 말끝을 흐리는 게 버릇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자신에게 그런 버릇이 있었나 의아할 뿐이었다.

    “제가 그랬어요? 기억이 잘…….”

    “지금도 그랬습니다.”

    “아……, 싫어요? 고칠까요?”

    툭. 어느덧 다가온 주완은 그의 앞에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아서 망설이던 준희가 덧붙였다.

    “고칠게요.”

    “서류 좀 정리해 놓고 오겠습니다.”

    “네.”

    이번에는 맞는 답이었나? 커피 잔을 들며 눈치를 보았지만 주완은 눈길을 주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류와 안경을 정리했다.

    서재에 물건을 정리해 놓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식탁에서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백지와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 준희는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홀짝이며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깊고 검은 눈동자였다.

    “향이 좋아요.”

    “원두를 고심해서 고른 보람이 있네요.”

    “커피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죠.”

    “그런데 이 종이는 뭐…… 예요?”

    준희는 말끝을 흐리려다가 아까의 지적이 떠올라 문득 꼬리를 붙였다. 확실히 이 남자 앞에서는 절로 주눅이 든다. 단지 그가 마음에 들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묘하게 지배적인 분위기가 그를 위축시켰다.

    “비즈니스를 하기로 했으니 계약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저지른 일이면서도 심장이 1센티쯤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준희는 제 앞에 놓인 백지를 향해 느리게 눈을 내렸다.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제안했는지 조금씩 실감이 났다. 순수한 감정을 떠나 이해타산이 요목조목 들어가 있는 관계를 자처한 것이다.

    말을 잃은 준희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리고 싶습니까?”

    “아뇨. 아니에요, 그런 거.”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인 만큼 확실히 해 두자는 차원에서 계약서를 쓰는 겁니다. 파트너와 플레이하기 전에는 늘 거쳤던 절차이기도 하고.”

    “파트너…….”

    준희는 문득 ‘파트너’라는 말을 입 안에서 곱씹어 보았다. 그러자 주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플레이 파트너요. 강준희 씨도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내 성적 취향이 일반적이지 않은 만큼, 잠자리 사정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나온다니 거짓말쟁이로선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불평했다.

    “어디 말할 생각 없는데요.”

    “강준희 씨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우린 조금 더 특별한 사이 아닌가?”

    다른 파트너들보다 ‘특별한 사이’라니. 마음을 간지럽히는 단어였다. 물론 여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계약 연애 관계니까 정확한 규정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네, 그렇겠네요.”

    “마음에 안 드는 눈치네요.”

    “…….”

    “그렇지만 강준희 씨 본인을 위해서도 이 계약서가 필요할 겁니다.”

    “네, 해요. 할게요.”

    그 속뜻이 뭐였든, 주완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어쨌든 이쪽에서도 그가 넘어올 때까지 옆에 묶어 둘 명분이 필요했다. 준희는 적극적인 자세로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사업 전선에 뛰어든 다른 가족들과 달리 이러한 서류 절차에 익숙하지 않았다.

    “뭐라고 써야 해요? 계약서?”

    그가 쓸 수 있는 글자라곤 가장 상단에 적어 넣은 ‘계약서’뿐이었다.

    “이 계약의 근본 목적은 연애 관계를 유지하고, 비밀 유지를 약속하며, 성적 관계를 맺는 데 있어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정함으로써 상호의 이익과 발전을 도모함에 있습니다.”

    “……그렇게 쓸까요?”

    “만년필은 내려놓고 우선 의견부터 들어 보죠. 한 달에 몇 차례 만나는 게 좋겠습니까? 대외용으로 필요한 데이트와 플레이 횟수를 고려해서 생각해 보세요.”

    “어, 한 달에…… 잠시만요.”

    준희는 만년필을 다시 내려놓고는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계약은 예상보다 본격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더디게 돌아갔다. 중간중간 힐끔거리며 주완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매일 그의 눈앞에 알짱거리며 유혹하고 싶었지만 상대편에서 순순히 수용해 줄 리가 없었다. 적절한 횟수는 몇 번일까, 망설이던 그는 스스로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더듬어 보았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났으면 좋겠어요.”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 말입니까?”

    “네.”

    “그럼 그렇게 해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되 만남의 목적은 격주로 달리하는 걸로. 한 주는 데이트를 하고 한 주는 플레이를 하는 식으로 루틴을 정하도록 하죠. 동의합니까?”

    “으음, 좋아요.”

    “걸리는 사항이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 줘야 도움이 됩니다.”

    “없어요. 그렇게 해요.”

    ‘플레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그쪽 세계에서 잠자리를 일컫는 은어인 모양이었다. 준희는 적당히 소화시키고 넘어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소는 내가 정해도 되겠습니까? 데이트 장소든, 플레이 장소든.”

    “네, 주완 씨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시간은 되도록 주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다시피 평일엔 내가 조금 바빠서.”

    “그러면 토요일에 볼까요?”

    “시간과 장소는 매주 금요일 저녁에 정해서 연락하겠습니다.”

    그는 계약에 필요한 사항들을 익숙하게 짚어 내려갔다.

    “플레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당연히 강준희 씨의 건강과 안전입니다. 신체에 영구적인 자국을 남기지도 않을 거고, 함께 쓰는 모든 기구들은 모두 새것으로 청결하게 관리할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강준희 씨가 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뭐죠?”

    “세이프 워드.”

    다시 한번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나 처음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과오가 있으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준희는 눈을 굴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안전어 말입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으면, 다음에 만날 때까지 정해 오면 됩니다.”

    “그, 그렇게 할게요.”

    “또 어떤 종류의 플레이를 꺼려 하는지도 정리해 오는 게 좋겠습니다. 플레이 도중에 조율하게 된다면 분위기를 망치고 말 테니까요.”

    냉큼 대답하자 숙제가 늘었다. 무엇 하나 쉬이 넘어가는 법이 없는 남자였다. 준희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러나 그 혼자만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을 마음껏 휘두를 수 없는 건 주완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그는 상대의 상황이 어떻든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 사항을 앞세워 그에 부합하는 남자만을 취해 왔다.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보다는 진지하게 고려하고 대화해서 합의점을 찾아가야만 하는 상대였다. 분명 평소보다 성가시고 귀찮게 여겨져야 함이 마땅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준희가 그다지 꺼려지지 않았다.

    ‘시각에 약한 편이었던가.’

    주완은 준희를 응시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조금쯤 비굴하고, 조금쯤 속상하고, 또 조금쯤 희망적이어 보이기도 하는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살짝 내려간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는 꼴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이따금씩 그를 인내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곤란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그런 욕망이.

    “아, 플레이를 할 장소는 여깁니다.”

    “네?”

    “데이트 장소는 늘 바뀌겠지만, 플레이는 주로 이곳에서 할 겁니다. 일종의 놀이터 같은 공간이라고 아까 소개했었죠. 플레이에 필요한 기구들도 이곳에 모두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준희는 문득 고개를 들어 펜트하우스 내부를 느리게 훑어보았다. 아늑하고 근사해 보이는 이 공간 어딘가에 ‘그런 도구들’이 숨겨져 있다니, 약간 놀랍기도 했다. 그의 눈빛에 호기심이 일렁이는 것을 발견한 주완이 덧붙여 설명했다.

    “구경시켜 줄까요?”

    “아…….”

    “그 물건들은 모두 2층에 있습니다.”

    이쪽 분야는 준희에게 있어 미지의 세계였다.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영역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찰나였다.

    “보여 주세요.”

    어차피 피하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겁을 내 봐야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건강과 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고 선언까지 했으니, 그게 무엇이 되었든 참을 수 있는 범위 내의 문제일 것이다.

    주완은 순순히 승낙하는 준희를 의외라는 듯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거실 한편에 위치한 계단 앞으로 준희를 에스코트했다. 2층으로 향하는 나선의 계단이 꼭 이상한 나라의 토끼 굴처럼 느껴졌다.

    주완의 손이 준희의 허리께에 닿았다. 긴장한 마음이 풀어질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준희는 주완의 손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2층은 1층보다 층고가 낮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꽤나 충분한 공간이 있었고, 방은 하나뿐이었다. 방문은 검정색이었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빛을 띠고 있는 인테리어를 감안한다면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검정색의 문. 그 앞에서 숨을 삼키는 사이 주완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편하게 구경하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어둡던 방 안이 자동으로 밝혀졌다. 준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사각의 방은 삼면이 서랍장과 진열대로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벽면에는 유리로 된 진열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꽤나 흉흉해 보이는 체벌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체벌의 의미로 엉덩이를 맞는 것을 좋아하는가?’

    문득 SM 살롱 카탈로그에 담겨 있던 설문 문항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다란 지팡이와 가죽 형태의 납작한 채찍들, 그리고 나무 주걱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제 엉덩이를 터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준희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근처에 있는 서랍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제법 친숙해 보이는 섹스 토이들이 들어 있었다. 딜도와 바이브레이터 따위의 물건들이었다. 자리를 옮겨 열어 본 옆 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난감들이 들어 있었지만 적어도 벽에 걸린 것들처럼 흉포해 보이지는 않았다.

    진열장에 들어 있는 모든 물건들은 종류별로 크기별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모두 새것인 듯했다.

    “……직접 다 모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이 또한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라서.”

    몇 안 되는 취미 중 벌써 둘이나 알게 되다니 이걸 소득이라고 여겨 기뻐해야 할지……. 준희는 가늠이 되지 않아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진열장들이 벽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방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위로 사각의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그 공간이 마치 무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소 황량한 공간을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발견했는지 주완이 묻지 않은 말에 대답했다.

    “펜트하우스의 모든 장소를 플레이에 활용하는 편이지만, 엄격하게 체벌해야 할 때엔 이 방을 주로 씁니다.”

    “아…….”

    “모든 도구들이 손 닿는 곳에 있기도 하고, 조명이 어두워 던전 같은 분위기를 낼 수도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방인데, 파트너 입장에서는 썩 유쾌한 공간이 될 수 없겠죠.”

    벽에 걸린 체벌 도구들이 갑자기 한층 더 섬찟하게 느껴져서 발을 한 걸음 뒤로 물리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뒤꿈치가 카펫에 슬쩍 닿았다. 식은땀을 식히는 사이 주완이 물었다.

    “강준희 씨가 제일 좋아하는 도구는 뭡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이 공간에서 이름을 아는 물건이라곤 딜도와 바이브레이터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건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머리를 굴리던 준희는 대충 벽면에 무언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거…….”

    “아, 케인.”

    “…….”

    그는 뜻밖에 새로운 정보를 획득했다.

    “의외네요. 살성이 여려 보이는데. 자국이 잘 남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남는 걸 좋아하는 건가.”

    “…….”

    “다행입니다. 스팽킹은 나도 좋아하는 플레이라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언가 오해하게 만든 모양인데, 그게 그다지 경쾌하게 반길 수 있는 장르 같지는 않아 보였다. 준희는 그냥 단순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를 때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자, 뭐 그런 결론이었다.

    “강준희 씨, 나는 유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체벌을 위해 매를 들 때는 가차 없는 편입니다.”

    “……네?”

    “침대 위에서는 특히, 고갯짓보다 입으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선택지마저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준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을 열어 대답했다.

    “주의할게요.”

    차주완 대표는 퍽 까다로운 남자였다. 준희에게 남겨진 세 번째 인상은 그랬다.

    ***

    “같이 나가죠. 집에 가는 길에 데려다주겠습니다.”

    “집으로 가세요?”

    “기본적으로 잠은 집에서 자는 주의라.”

    다락방 아닌 다락방을 마저 구경하고 1층으로 내려오자, 주완은 몇 안 되는 짐을 챙겨 들며 준희와 함께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펜트하우스는 그야말로 ‘플레이’라는 목적이 없을 때엔 이용하지 않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주완의 차는 클래식한 고급 세단이었다. 조수석의 문을 직접 열어 준 주완은 안전벨트까지 세심하게 매어 주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보기와 다르게 제법 자상한 매너였다.

    “계약서는 오늘 이야기한 걸 바탕으로 두 부 작성해서 다음에 만날 때 한 부를 주겠습니다.”

    “다음 약속은 언제가 될까요?”

    “이번 토요일에 보면 되겠네요. 약속대로.”

    그가 운전대를 부드러이 꺾으며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번 토요일의 약속은 데이트일까, 잠자리일까. 아주 잠깐 고민하는 사이 그가 덧붙였다.

    “이번 금요일에는 따로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네 시까지 펜트하우스로 오세요.”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그럴게요.”

    “강준희 씨, 아까 내가 뭘 생각해 오라고 했는지 기억해요?”

    “어…… 그게…….”

    “세이프 워드. 그리고 선호하지 않는 플레이. 두 가지입니다. 어려운 숙제는 아니니 편하게 생각해 오세요.”

    “네.”

    세이프 워드. 준희는 잊지 않으려고 입 안에서 생소한 단어를 소리 없이 곱씹었다.

    호텔이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가. 아니면 늦은 시간이기 때문인지, 주완의 차는 예상보다 빠르게 집 앞에 도착했다.

    차를 정차시킨 주완이 가만히 준희를 돌아보았다. 엔진 소리도 사라진 차 안으로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술을 떼려는데, 주완이 선수를 쳤다.

    “강준희 씨.”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심장이 고요하게 내려앉는 것이 신기했다. 전에 느껴 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준희는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려 주완을 마주 보았다. 당장이라도 ‘뭐 합니까?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라고 말할 것 같았는데, 이어진 말이 의외였다.

    “나와의 관계가 걱정되리란 거 잘 압니다.”

    “…….”

    “긴장도 될 거고, 두렵기도 하겠지.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스스로 선택했다곤 하지만 거기에 지나친 중압감이나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요. 그러라고 쓰는 계약서가 아닙니다. 계약서란 언제든 찢어 버릴 수 있는 종이일 뿐이에요.”

    그의 말투는 어느덧 부드러워져 있었다. 준희를 달래려는 것처럼. 또는 설득하려는 것처럼.

    주완은 그렇게 말하며 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성큼 다가와 준희의 벨트도 손수 풀어 주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쥐여져 있던 벨트가 탄성을 잃는다.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남자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차에 탔다가 내리는 일은 정말로 별게 아니죠.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는 게 운전자에게 미안한 일이 아니듯, 이 계약도 마찬가지예요. 강준희 씨는 어디든 내려야 할 곳에서, 언제든 내리고 싶을 때 내릴 수 있어요.”

    숨을 쉴 수 없었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마주친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깊은 산속,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선 교목 같은 남자가 덧붙였다.

    “지금이라도.”

    준희는 힘없이 쥐고 있던 안전벨트를 놓쳤다. 벨트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어서 그 박동 소리가 주완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는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회유는 그를 더 집착하게 만들 뿐이었다. 언뜻 엿보이는 남자의 세심한 배려를, 깊은 다정을, 조금 더 열어 보고 꺼내 보고 싶었다.

    “……안 내릴래요.”

    그러나 지난번처럼 성급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준희는 문득 터져 나올 뻔한 고백을 꾹꾹 눌러 삼킨 채 느리게 입술을 뗐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주완 씨가 너무 궁금해요. 더 알고 싶어요.”

    “…….”

    “물리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의 진중한 모습이 번번이 준희의 발목을 잡는다. 의도한 수작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이었다. 준희는 그의 대답이 떨어지고 나서야 도망치듯 차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조심히 가세요. 토요일에 봐요!”

    밤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선 붉어진 얼굴도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사이 조수석의 차창이 내려가고, 주완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묵례한 뒤 안전벨트를 매고 차를 출발시켰다.

    정말 티가 안 났을까. 차의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마냥 지켜보던 준희는 손등을 뺨에 대며 되뇌었다. 뺨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울고 싶었다.

    ***

    마냥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모두 외출하고 혼자 덩그러니 남은 집에서, 준희는 학구열을 불태웠다.

    지피지기백전불태라 했다. 그는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 노트북 화면을 한참이고 노려보다가 이내 검색어를 쳐 내려갔다.

    「세이프 워드」

    우선 숙제부터였다.

    “플레이 도중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달했을 때 관계를 중지하게 만드는 신호…….”

    가학적인 성향과 피학적인 성향이 만나 불평등한 관계에서 성행위를 즐기는 만큼, ‘싫다’라는 말이 본연의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진짜 거부’를 나타내는 표현 방식을 합의해야만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단어와 손동작을 각각 정해 두는 것이 일반적인 듯했다.

    아직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준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고민하다가 입력창을 비웠다.

    ‘아, 케인.’

    그날 그곳에서 아무렇게나 가리켰던 체벌 도구를, 주완은 그렇게 불렀었다. 단순히 ‘케인’이라고 검색했을 땐 별다른 결과가 뜨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스팽킹은 나도 좋아하는 플레이라서.

    그는 주완의 목소리를 되짚어 가며 검색어에 살을 붙였다.

    「케인, 스팽킹」

    그제야 의미 있는 검색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지를 확인하니 그 방에서 그가 가리켰던 물건이 확실했다. 지팡이처럼 생긴 그것은 지팡이의 용도로는 쓰일 수 없을 만큼 가늘고 탄성이 있어 보였다. 다시 말해 회초리에 가까운 도구였다.

    스팽킹의 의미까지 확인한 준희는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져 뺨을 긁었다. 스팽킹이란 손이나 도구 따위로 엉덩이를 때리는 행위였다.

    준희는 문득 SM 살롱 안내 책자에 담겨 있던 설문의 첫 문항을 떠올렸다.

    ‘성적으로 괴롭힘당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가?’

    그러니까 스팽킹을 포함해, 성적으로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이 ‘플레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였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포지션을 나누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행위를 즐기는 것. 차주완 대표가 말한 ‘온건치 못한 성적 취향’이란 그런 것을 뜻했다.

    확실히 흥미로웠다. 최근 발기 부전을 걱정할 만큼 일반적인 연애와 잠자리에 지루해졌던 참이었다. 어쩌면 주완과의 관계가 그에게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첩첩이 쌓여 가던 걱정이 한결 덜어졌다.

    그리고 이를 잘 해낸다면……. 어쩌면 차주완 대표도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묘한 오기까지 치밀어 올라 왔다.

    “뭘 어떻게 하는 줄 알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신감을 잃었다. 처음이 아니라고 박박 우기긴 했지만 그에게는 플레이 경험이 없었다. 사실 상대가 주는 시련을 얼마큼 소화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서 노트북의 마우스 패드를 건성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는 자연스럽게 시청각 자료 쪽으로 접근했다. 짤막짤막하게 편집되어 있는 영상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종류는 다양했다. 불편하고 야한 자세로 몸이 묶인 남자가 재갈을 문 채 등장하기도 했고, 가죽으로 된 채찍으로 맨엉덩이를 얻어맞는 남자도 있었으며, 상황극 속에서 섹슈얼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짧은 영상들을 넘겨 보던 그는 문득 정장을 다 갖춰 입은 남자가 벌거벗은 남자를 희롱하는 장면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꼭 선생님 같기도 했고, 엄격한 상사 같기도 했다.

    ‘차주완 씨도 이런 느낌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귀로 피가 몰린 듯 뜨거워졌다. 공연히 부끄러워지는 이유가 사람 탓인지 상황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있어 보았자 스무 살 전후로나 있었겠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 까마득한 과거에 말이다.

    준희는 그만 노트북을 툭 닫아 버리곤 이불 위에 얼굴을 묻었다. 학습이 무슨 소용일까. 차주완 대표 앞에 서면 모두 백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는 고개를 약간만 틀어 침대 옆 협탁에 방치되어 있는 휴대 전화를 응시했다. 평소 연애할 때의 그는 언제든 불시에 상대에게 연락해 귀찮게 구는 타입이었다. 그의 성화를 제대로 받아 주지 않으면 화를 냈고 떼도 썼다. 그는 여태까지 자신이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은 것임을 인정했다. 지나간 인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들었다. 지금껏 그래 온 것처럼 할 수 없게 된 지금, 손발이 꽁꽁 묶인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파도치는 물결 속으로 스스로를 떠넘겨 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 칠흑 같은 바다의 주인이 차주완이기만 하다면야, 목줄을 넘겨줘도 좋지 않을까. 아, 위험했다. 준희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

    토요일 오후 네 시는 빠르게 다가왔다.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펜트하우스 문 앞에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첫사랑에 심취한 사춘기 청소년이 된 것만 같았다. 초인종을 누르기 직전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에, 준희는 헛웃음을 띠었다.

    천하의 강준희가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는 더 주저하지 않고 벨을 눌렀다.

    “시간에 맞게 왔네요.”

    “주완 씨.”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정한 차림이었다. 재킷을 차려입지 않았을 뿐이지 셔츠와 슬랙스를 입어 격식을 갖추었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약간 건조했지만 온도는 지난번보다 훈훈한 정도였다.

    슬리퍼를 꿰어 신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얄팍한 서류를 넘겨 보고 있는 주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앉아요.”

    그는 소파 앞을 턱짓하며 말했다. 남자가 가리킨 곳에는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대리석 위로 넓고 까칠한 카펫이 깔려 있었을 뿐이다. 의자를 가져와서 앉아야 하나? 눈치를 보았지만 주완의 시선은 오직 서류를 향하고 있었다.

    우물쭈물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더니 주완이 눈을 들어 준희를 마주 보았다. 그의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강준희 씨, 꿇어앉아야지.”

    “아…….”

    그제야 준희는 ‘놀이’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몸을 뒤뚱뒤뚱 움직여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완은 보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준희가 읽기 편한 방향으로 놓여진 종이 상단부에는 ‘계약서’라고 프린트되어 있었다.

    -계약서는 오늘 이야기한 걸 바탕으로 두 부 작성해서 다음에 만날 때 한 부를 주겠습니다.

    그때 이야기했던 그 한 부인 듯했다. 서서히 눈을 내려 읽어 보니, 그날 밤 대화했던 내용이 고스란히 문서화되어 담겨 있었다. 비즈니스에 오가는 서류 같은 모양새였다.

    “쭉 읽어 보고 수정할 부분이 없다면 잠시 보관해 뒀다가 집에 갈 때 가져가도록 하세요.”

    “네.”

    준희는 손을 뻗어 계약서를 한 장 넘겨 보았다. 나열된 조항들은 그날의 대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계약서를 건성으로 훑어보고 덮자마자 주완은 그걸 다른 곳에다 치워 두었다. 더 이상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깜빡깜빡 여닫히는 눈꺼풀이 긴장으로 뜨겁게 물들었다. 주완은 긴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쪽에선 어쩔 수 없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이쪽에선 그쪽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숙제는 잘해 왔습니까?”

    “아……!”

    준희의 눈동자가 낭패로 물들었다. 바보 같았다. 분명 오늘을 위해 이것저것 야무지게 검색도 해 보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준희는 무릎을 꿇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게…… 정말로 준비해 오려고 했었는데 생각이 잘 나질 않아서…….”

    “하면 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변명은 딱 질색입니다. 생각 안 해 왔습니까?”

    “……죄송해요.”

    다 큰 성인이, 같은 성인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어야 하다니. 굴욕감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생각해 내세요.”

    “그, 어…….”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머리를 재촉해 보았지만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아무 단어나 뱉어도 되는 걸까? 딸기, 포도, 사과, 오렌지처럼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을? 초조하게 들썩거리던 준희의 눈길이 주완의 것과 부딪혔다.

    남자는 고요하고도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고 회로가 다시금 멈춰 버리고 말았다. 주완이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고 있던 상체를 세웠다.

    “악……!”

    그는 순식간에 준희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몸이 자연히 앞으로 쏟아지며 고개가 바싹 들렸다. 준희는 깜짝 놀라 허공을 더듬었다.

    “손 뒤로.”

    그는 날카로운 명령에 허우적거리던 손으로 뒷짐을 지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완을 올려다보았다.

    “생각, 안 납니까?”

    “주, 주완 씨…….”

    자세는 불편했고 두피는 아려 왔다. 꼼짝없이 속박된 감각은 그날의 엘리베이터를 떠올리게 해서, 그를 더더욱 긴장시켰다. 이내 머리채를 쥐고 있지 않은 쪽의 손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눈을 질끈 감을 새도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준희는 뺨을 얻어맞았다. 짜악-. 마찰 음과 달뜬 신음이 서재를 가득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헉, 흐윽…….”

    “손 뒤로 하라고 했습니다.”

    어느새 준희는 저도 모르게 뒷짐을 풀고 주완의 손목에 매달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주, 주완 씨. 저는…….”

    “경고하는데,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합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준희는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겨우 등 뒤로 가져가 손목을 꽉 붙잡았다. 몸의 무게가 실려 두피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짜악-. 다시 한번 커다란 손바닥이 뺨에 감겼다. 단단히 붙들려 있는 통에 충격은 오롯이 준희의 몫이었다. 눈물로 젖은 뺨이 뜨겁게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주완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고통을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눈물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숨을 고르게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허공에 들린 손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준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뜨세요.”

    그러나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헉헉거리며 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당장이라도 손찌검을 할 듯 치켜 올라가 있던 남자의 손이 준희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숨 쉬어요.”

    “흐윽, 후……, 네에.”

    “앞으로 내가 열 대를 더 때리겠다고 하면, 강준희 씨는 참을 수 있겠습니까?”

    “주완 씨, 제발…….”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흣, 흐읍……. 안 돼요. 안 될 것 같아요. 흐윽, 주완 씨……, 잘못했어요.”

    준희는 뒷짐을 풀고 몸을 던져 주완의 무릎에 매달렸다.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 끝에 동그랗게 맺혔다가 바닥으로 똑똑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준희의 머리채를 놓아준 주완이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닦아 올렸다. 뺨을 때린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표정은 몹시 건조했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열 대를 더 때릴 겁니다.”

    “흑, 흐윽……. 살려 주세요.”

    “소용없습니다. 빌고 애원해도 봐주지 않으려고 강준희 씨 앞에 내가 있는 겁니다.”

    뺨은 벌써부터 찢어질 듯 화끈거렸다. 한두 대면 모를까 열 대를 더 맞는 건 정말로 무리였다.

    “정말로 플레이를 멈추는 방법이 뭔지, 강준희 씨도 알 텐데.”

    “…….”

    “그러니까 안전어를 정해 왔어야지.”

    직관적인 훈육이었다. 그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로 입을 틀어막았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꼭 물고는 물기 어린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주완이 손을 뻗어 준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걸 놓쳤었는지 이제 알겠습니까?”

    “……잘못했어요.”

    “2주 후에도 안전어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나는 강준희 씨를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일 겁니다. 울고, 빌고, 기절해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까?”

    “네, 주완 씨. 네…….”

    준희는 재차 대답하며 상대의 무릎에 매달린 채로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못마땅한 듯 작게 한숨 쉰 주완이 덧붙였다.

    “간단한 것조차 정해 오지 않았으니 두 번째 숙제는 검사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것만은 해 왔노라 자신 있게 대답하며 점수를 땄다면 좋았을 테지만…… 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 그중에서 꺼려지는 플레이를 골라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럼 숙제 검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벗어요.”

    “네?”

    자꾸만 휙휙 뒤바뀌는 요구에 준희는 반사적으로 되물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몸을 뒤로 물린 주완이 발을 들어 준희의 어깻죽지를 지그시 밟아 밀었다. 상대의 무릎에 매달려 있던 준희의 몸이 자연히 뒤로 밀려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다, 벗어요. 강준희 씨.”

    움직임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듯했다. 준희는 얼결에 얇은 니트 티셔츠의 밑단을 말아 쥐었다. 등이라도 돌리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주완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준희는 양팔을 교차해 티셔츠를 벗어 냈다. 니트 티셔츠는 뺨에 남아 있던 물기와 함께 벗겨져 나갔다. 평소 같으면 옷을 벗는 즉시 그대로 세탁 바구니에 넣어 버렸을 테지만, 준희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옷을 적당히 개켜 옆으로 밀어 두었다.

    앉은 채 바지까지 벗자니 꼴이 사나울 것 같았다. 준희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 버클을 풀었다. 달칵, 조이던 허리가 풀어지자 공연히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주완은 독촉하지 않았다. 말없이 끈질기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바지부터 끌어 내려 덧붙였다. 개어 둔 준희는 곧 후회했다. 그냥 한 번에 벗어 버릴걸……. 최후의 보루까지 스스로 끌어 내리는 꼴을 슬로 화면으로 중계하게 된 꼴이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선 자리에서 꼼지락거리던 준희는 겨우겨우 속옷에 손을 걸어 허벅지로 끌어 내렸다. 은밀한 부위까지 고스란히 남자의 앞에 노출되었다. 음모가 없어 유난히 희고 붉은 성기에 눈길이 멎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양말까지 벗어 옷가지 위에 얹어 놓은 뒤 허리를 펴고 섰다.

    “몸은 청결하게 잘 관리해 왔습니까?”

    “네? 아……, 네에.”

    “관장은?”

    “……했어요.”

    “그런가요? 검사해 보면 알겠지.”

    주완이 몸을 일으켰다. 준희를 세워 둔 채 잠시 자리를 비운 그가 가지고 나타난 것은 네모난 플라스틱 박스였다. 라텍스 장갑과 젖은 거즈가 담겨 있었다. 용도가 가늠이 되지 않아 의아해하는 사이 주완은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고 손수건 모양으로 잘 접혀 있는 거즈를 집어 들었다.

    남자가 준희의 뒤로 가서 섰다. 시야에서 사라지자 목덜미가 긴장으로 뻐근해졌다.

    “똑바로 서세요.”

    “네.”

    똑바로 서는 게 어떤 거였더라.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진다. 쭈뼛거리는 사이에 젖은 거즈가 어깨 위에 닿았다.

    “읏, 아……, 죄송해요.”

    반사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졌다. 거즈는 물을 아주 약간 머금고 있었으며, 예상보다 차가웠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조심스럽게 폈다. 죄송하다는 말이 자동 완성어처럼 새어 나왔다. 전 연인들이 본다면 기함할 일이 분명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령을 더하지도 않았다. 어깨에 닿은 거즈가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간지러워서 온몸의 근육이 움찔움찔하는 듯했다. 목뒤 척추 선을 지난 거즈가 귓불에 닿았다.

    “아…….”

    거즈는 느리고 부드럽게 귓불을 훑고 지나갔다. 차갑던 면에는 어느덧 약간의 체온이 물들어 있었다. 거즈를 거두어 확인한 남자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울렸다.

    “깨끗하네요.”

    그렇다고 검사가 끝난 건 아니었다.

    “흡.”

    등에 닿은 거즈는 척추뼈를 타고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축축한 면이 살갗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간지러워 입꼬리를 달싹거렸다. 터져 나오려 하는 신음과 웃음을 억누르느라 손과 발, 그리고 엉덩이에까지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주완이 경고하듯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수치심이 들었다. 준희는 이를 악물었다.

    “소파 위로 올라가죠, 강준희 씨. 무릎 꿇고.”

    “……네.”

    “엉덩이는 뒤로 내밀어요.”

    “…….”

    “뭘 검사하려는 건지 알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남자가 앉아 있던 소파에 무릎을 대고 올라가며 준희는 머리를 굴렸다. 등받이를 잡는 손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옅게 떨리고 있었다.

    짜악-. 아까 맞은 엉덩이 위로 다시 한번 손바닥이 내려왔다.

    “대답해야지.”

    “관장…… 검사요?”

    “알았으면 벌려요. 내가 잘 볼 수 있게.”

    뭘 어떻게 벌리라는 뜻일까. 머릿속이 백지가 된 듯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는 주춤주춤 무릎을 벌리고 서며 허리를 낮추고 엉덩이를 뒤로 뺐다.

    “더.”

    얼추 정답인 듯했지만 성에 차지는 않는 눈치였다. 준희는 무릎을 더 넓게 벌리고 엉덩이를 허공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 정도로 구멍이 잘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

    “손으로 쥐고 벌려 봐요. 내 눈에 다 보이도록.”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벌거벗은 준희에 반해 남자는 옷을 모두 갖춰 입은 상태였다. 그 간극에서 오는 모멸감이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온몸이 뜨거웠고 얼굴은 터질 듯 붉을 것이 분명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강준희 씨.”

    그렇지만 딱딱하게 저를 부르는 그의 한 마디에, 준희는 등받이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희고 말랑해 보이는 엉덩이 한쪽은 주완의 손찌검에 이미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몸이 앞으로 밀려 준희의 뺨이 소파의 가죽 등받이에 닿았다. 제 엉덩이를 부여잡은 손이 발발 떨려 댔다. 골짜기가 벌어지자 맞은 곳보다 더 붉은빛을 띠고 있는 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조여들어 있는 주름이 긴장감으로 조금씩 벌름거리고 있었다.

    주완은 당장에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성기를 박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지만, 숨을 고르며 인내했다. 이 과정을 느긋하게 즐기고, 제 은밀한 부위를 가감 없이 벌리고 있는 남자에게 충분히 수치 주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었다.

    “손 떼지 말아요.”

    주완이 경고했다. 그가 쥐고 있던 거즈가 구멍 아래 회음부에 닿았다.

    “아, 아흐…….”

    “제대로 하세요.”

    등받이 쪽으로 몸이 절로 기울었다.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지 않았다면 다리 사이를 좁혔을 것이다. 본능적인 도망이었다. 그러나 주완의 손이 그의 골반을 끌어당겨 원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이번에는 골반을 잡힌 채로 회음부가 만져졌다. 젖은 거즈가 타고 오르는 동안 전율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솜털 하나하나 죄다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준희는 더운 숨을 내뱉으며 속수무책으로 신음했다.

    “흐으, 읏…….”

    그간 연애를 하며 몸을 섞을 때 사람 손을 타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온몸의 구석구석을 낱낱이 발각당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손길은 부드럽고 뜨거웠으며, 살갗에 닿아 있는 젖은 거즈는 축축하고 간지러웠다.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만질만질한 살을 타고 오른 거즈가 마침내 구멍 근처를 맴돌았다. 주름진 입구가 빠끔거리는 것이 준희에게까지 느껴졌다. 말라 가던 눈매에 다시금 물기가 어렸다.

    ‘안 돼…….’

    구멍을 잘 오므려 단속하고 싶었지만 제 손가락으로 직접 벌리고 있어서인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천박하게 여닫히고 있는 구멍을, 주완이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등줄기에 땀이 맺혀 흘렀다.

    “붉네요. 안쪽까지 전부.”

    “으, 으흑, 으응…….”

    “붉고 번들거립니다. 당장 쑤셔 달라고, 제발 쑤셔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젖은 거즈가 마침내 주름진 피부를 건드렸다. 거즈에 싸인 손가락이 두드러지게 붉은 입구에 지문이라도 남길 듯 꾹꾹 눌러 댔다.

    “아, 흣.”

    감질나게 구멍 바깥을 맴돌던 거즈가 안쪽을 벌리고 들어왔다. 뜨거운 내벽을 문질러 대며, 부드럽게 침입한다. 엉덩이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 주체할 수 없이 벌벌 떨렸다. 그가 그대로 손가락을 깊게 찔러 성감대를 만져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주완은 그가 원하는 대로 굴어 주지 않았다. 다만 거즈로 내벽을 닦아 내듯 꾹꾹 눌러 가며 입구를 확장시킬 뿐이었다. 감질나는 감각에 준희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깔끔하게 한 모양입니다.”

    원하는 것을 안겨 주지 않은 채 거즈가 구멍에서 빠져나갔다. 손가락 한 마디가 겨우 들어왔다 나갔을 뿐인데도, 그가 빠져나간 공간이 허전했다. 뜨거운 숨이 색색 토해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등받이에 뺨을 비비적거리고 있던 준희에게 주완이 명령했다.

    “돌아앉아서 다리 벌리세요.”

    툭, 들고 있던 거즈가 플라스틱 통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통에 들어 있던 새 거즈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물에 적셔져 있던 것이었다.

    준희는 엉덩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지만 쉽게 뒤돌아설 수 없었다. 등받이에 붙어 있던 뜨거운 뺨이 가죽에서 떨어졌다. 그는 가늘게 떨며 고개를 숙여 제 아래를 확인했다. 발기했다. 뒤를 감질나게 쑤셔 댄 탓이었다.

    “이미 혼날 일투성인데, 지금이라도 말을 재깍재깍 듣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그…….”

    “돌아앉으라고 했습니다.”

    안절부절못하며 망설였지만 더 이상 미적댔다가는 큰 화를 부를 것만 같았다. 준희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 몸을 돌렸다.

    “다리 제대로 벌리세요.”

    준희는 눈을 내리깔고 허벅지를 벌렸다. 하체가 엠(M)자 모양을 만들었다. 주완의 눈길이 그의 몸을 샅샅이 훑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마뜩지 않았는지, 무릎을 잡아 최대한으로 벌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무릎 잡아서 고정시켜요.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손이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흣, 네…….”

    “모순적인 몸입니다. 좆은 발딱 세운 주제에 감추고는 싶은가 봅니다.”

    부끄러움에 온몸이 울긋불긋했다. 준희는 스스로 무릎을 잡아 다리가 오므라들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이윽고 주완의 손에 들린 거즈가 순식간에 낭심으로 다가왔다.

    “아읏……, 자, 잠깐……!”

    준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렸다. 주완은 말로 주의를 주지 않았다. 그는 안쪽의 여린 허벅지 살을 찰싹 때려 경고했다. 발작성 신음이 튀었다. 엉덩이보다 배로 아픈 부위였다. 준희는 달달 떨리는 허벅지를 고정하기 위해 무릎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젖은 거즈가 뻣뻣해진 살 기둥 위로 문질러졌다. 표면은 물기로 치덕거렸고 손의 온기가 묻어 어느새 뜨거웠다. 유난히 희고 붉은 성기가 거즈가 위아래로 쓸고 갈 때마다 허공으로 꺼떡거렸다.

    “아, 흐……, 흐응…….”

    몇 차례 왕복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눈앞에 섬광이 번쩍번쩍하는 듯했고 발가락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에 안 차는지, 무릎을 잡고 있는 준희의 손 위로 주완의 손이 포개어졌다.

    “아흑…….”

    한쪽 무릎이 허공에 쳐들어졌다. 자연히 엉덩이는 남자 쪽으로 미끄러지듯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잘 접혀 있던 거즈가 위아래 왕복하는 주완의 손길에 속절없이 구겨졌다. 얄팍한 거즈에 주름이 잡혔다. 단순한 수음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질척한 거즈가 이번에는 귀두 위로 완전히 감싸여졌다. 준희는 본능적으로 무릎을 쥐고 있던 손으로 소파 위를 긁었다. 쾌감이 절정에 도달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 터져 나올 듯한 요의가 치밀었다.

    “흣, 으으응……, 하으……. 아, 안 돼, 흣. 쌀 것 같…… 아흐으, 읏!”

    “참아요. 질질 흘려 댔다간 혼날 각오 해야 할 겁니다.”

    “흐윽, 모, 못 참아요……. 주완 씨, 주완, 끄흡, 하아…….”

    귀두를 감싸고 간질거리듯 문질러 대는 주완의 손장난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히익, 목덜미까지 소름이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준희는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마구 저어 댔다. 온몸을 지배하는 저릿저릿한 감각 탓에 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소파를 긁던 준희의 손이 본능적으로 주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곧 두 손목이 한 손에 잡혀 머리 위로 들어 올려졌다. 허리가 마구 들썩였지만 주완은 이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단단하게 일어서 있는 성기에만 쏠려 있었다.

    “아, 흑, 흐읏, 으응, 흐……!”

    짧은 신음이 앞다투어 입 밖으로 튀었다. 기어이 귀두를 감싼 거즈 위로 묽은 애액이 질척하게 번져 갔다. 한번 액이 터지고 나니 걷잡을 수 없었다. 준희는 울음을 토해 내는 동시에 사정했다. 선액과 정액이 뒤엉킨 채 눅진하게 녹아내렸다. 거즈가 질퍽질퍽해졌다.

    “싸지 말라고 했을 텐데.”

    “흐읍, 흡……. 불가능…… 해요, 흐윽.”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내가 정합니다. 강준희 씨가 아니라.”

    그의 성기를 희롱하던 손바닥이 거즈를 치워 냈다. 온기가 사라지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준희는 젖은 눈으로 주완을 올려다보며 겨우 숨을 골랐다. 주완은 준희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강준희 씨.”

    “…….”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 그게…….”

    “혼나야겠죠.”

    주완은 단호했다. 준희의 눈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2층에 가서 케인 가져오세요.”

    “흐읍. 주완 씨, 잘못했…….”

    “첫날이라 그런가. 자꾸 두 번 말하게 합니다.”

    주완은 후희를 수습할 틈도 주지 않고 준희를 몰아붙였다. 준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오르가슴의 열기가 식지 않은 성기가 화끈거렸다.

    “아직 여유가 있나 보네. 열 대.”

    “……네?”

    “열다섯 대.”

    “가, 가져올게요!”

    준희는 뒤늦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몸을 움직였다. 지난번에 함께 올랐던 계단을, 이번에는 혼자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에도 주완의 시선이 느껴져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벌거벗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행위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어서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2층으로 올라 검정색 방문을 열었다. 플레이 도구들을 보관하는 방이자, 엄격하게 체벌할 때면 플레이 장소로 활용한다는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옷을 멀쩡하게 입고 슬리퍼까지 신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알몸인 데다 맨발이었다. 공연히 발가락이 곱아드는 듯했다. 살금살금 방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벽면으로 다가가자 여러 개의 케인이 눈에 들어왔다.

    ‘뭘로 고르지.’

    케인은 굵기와 길이별로 여러 개 나란히 걸려 있었다.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엉덩이 근육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굵고 길수록 아플까? 그렇다고 너무 얇은 걸 가져갔다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더 많이 때리면 어쩌지? 갈등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그는 결국 걸려 있는 것들 중 가장 평균치에 가까운 케인을 집어 들었다.

    그는 케인의 어디를 쥐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양손으로 바투 쥐었다. 시간을 지체한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해 내려갔을 때, 남자는 통유리에 비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텍스 장갑은 벗은 채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았는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주완이 명령했다. 여전히 벗은 것 없이 모두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그의 앞에 알몸으로 서는 것이 부끄러웠다. 한 걸음 거리에 멈춰 선 준희가 고개를 슬쩍 숙였다.

    주완은 준희에게서 케인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동작 없이 팔을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눈앞에 손목이 가까웠다. 준희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스팽킹을 좋아하는 강준희 씨를 위해 직접 매를 때려 주겠다는데, 손목까지 스스로 걷어야겠습니까?”

    “그……, 아니요.”

    본능적으로 항변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초짜 취급을 당할까 불만을 꿀꺽 삼켰다. 잠시 머뭇거리던 준희는 손을 들어 주완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와이셔츠 단추를 톡톡 풀어 주었다. 그런 뒤에 두 겹 말아 올리자 근육이 적당히 잡힌 팔뚝이 드러났다.

    “창 짚고 서세요.”

    2층에 다녀오는 사이 식었던 목덜미가 다시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멋지다고 생각했던 창 너머의 야경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어쩐지 관음당하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툭툭. 주완이 케인으로 준희가 짚고 서야 할 부분을 가리켰다. 더 지체할 여지가 없었다. 준희는 그가 두드린 자리에 손바닥을 짚고 섰다.

    “다리 더 벌리고 뒤꿈치 들어요.”

    “네.”

    어려운 지시도 아니었는데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주춤거리며 다리를 조금 더 벌린 뒤 까치발을 들고 서니 몸의 중심이 앞으로 기울었다. 주완은 그의 허리를 눌러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몸을 기역 자로 접은 채 엉덩이를 쳐든 꼴이었다.

    이윽고 주완이 한 걸음 물러서서 때릴 위치를 가늠했다. 가느다란 막대기가 엉덩이 위를 몇 번 스치자 살갗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준희는 목구멍에서 껄떡거리는 긴장감을 애써 누르기 위해 숨을 골랐다.

    “맞을 때마다 카운팅 하세요.”

    온몸의 신경이 엉덩이에 쏠려 있는 것만 같았다. 벌써부터 눈매가 촉촉했다. 눈앞에 펼쳐진 야경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전해지기가 무섭게 엉덩이 위로 날카로운 감각이 스쳤다. 차악-. 후려쳐진 살갗 위로 붉고 선명한 줄이 남았다. 단 한 대 맞았을 뿐인데도 맞은 부위가 얼얼했다. 입술을 떼었지만 목소리가 터져 나오질 않아 숫자를 셀 수 없었다.

    주완은 그를 봐주지 않았다. 매섭게 케인을 휘둘러 뽀얀 엉덩이 위에 새로운 상처를 남겼다. 차악-. 준희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몸을 떨었다. 발돋움으로 지탱하고 선 다리가 벌써부터 달달 떨려 왔다.

    “두, 두울…….”

    “틀렸습니다. 세지 않으면 무효라는 기본적인 상식부터 가르쳐야 됩니까? 다시 처음부터 제대로 카운팅 하세요.”

    “으, 흐으…….”

    “대답.”

    “네, 주완 씨. 네.”

    태어나 처음 맞아 보는 매였다. 그것도 맨살 위에. 첫 경험치고는 하드 코어였다. 눈앞이 희고 붉게 물드는 듯했다. 준희는 차오르는 눈물을 꿀꺽 삼켜 내며 숨을 죽였다.

    고요를 가르고 날아온 케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살에 감겨들었다. 준희는 단말마 신음을 간신히 삼키고 숫자를 세었다.

    “하나……, 흣.”

    숫자를 세자마자 틈을 주지 않고 케인이 다시 바람을 갈랐다. 흰 피부 위로 붉은 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으흣, 두울…….”

    그는 창을 짚고 있는 손을 당장이라도 떼고 얼얼한 엉덩이를 어루만져 주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손바닥을 짚은 창 위로 뿌옇게 김이 서렸다. 야경 위로 제 일그러진 얼굴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준희는 숨을 삼켰다.

    케인은 일정한 간격으로 휘둘러졌다. 그건 허공을 커다랗게 가르며 가차 없이 붉은 줄을 긋고 떠났다. 짝- 짜악. 셋, 네엣. 매 맞는 소리와 숫자 세는 소리가 허공에서 엉켜 댔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했다.

    “흡, 일곱……, 흐윽…….”

    “무효.”

    발돋움한 탓에 허벅지는 잘게 떨렸고, 무릎은 간헐적으로 힘이 풀려 굽혀졌다. 숫자를 세었음에도 무릎을 굽혀 자세를 흐트러뜨리자 주완이 저승사자 같은 목소리로 선고했다.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엉덩이가 홧홧해서 문질러 풀어 주고만 싶었다. 준희는 가까스로 인내하며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뒤꿈치를 들었다. 그러자 울긋불긋해진 살 위로 케인이 떨어졌다.

    “아흑……. 일곱.”

    소름 돋은 선홍빛 살갗 위로 매 자국이 덧입혀졌다. 울퉁불퉁한 표면을 케인이 한 차례 느리게 훑어갔다. 준희는 몸을 벌벌 떨었다.

    이 플레이를 잘 따라간다면, 잘 견뎌 낸다면 주완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해 주지 않을까. 초반의 기대감은 생각도 나질 않았다. 안일하게 생각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는 그저 매 맞는 시간이 얼른 끝나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짜악-. 그러나 그의 소망을 배반하듯, 주완은 매의 강도를 더 높였다.

    “흣, 여덟…….”

    준희는 아픔을 조금이라도 달래 보려 발을 동동 구르며 엉덩이를 흔들어 보았다. 체면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좆 흔드는 꼴이 볼만하네요, 강준희 씨.”

    “흐윽.”

    조소 섞인 그의 목소리에 온몸이 화끈거렸다. 엉덩이가 아픈 것과 별개로 오래 발돋움하고 있었더니 허벅지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뺨을 타고 흘러 턱에 고여 있던 눈물이 대리석 바닥 위로 톡톡 떨어져 내렸다.

    “많이 아픕니까?”

    “네……. 아파요, 흐읍.”

    “어쩌지. 남은 일곱 대는 더 아프게 맞아야 하는데.”

    히익. 그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뺨에 난 눈물길 위로 뜨거운 기운이 다시금 죽죽 쏟아져 내렸다. 소리를 끅끅 삼키며 우는 준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주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울어 봤자 더 세게 때려 달라는 꼴밖에 안 될 텐데.”

    “…….”

    “내 성향을 잊은 건 아닐 테고. 역시 이 정도 강도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그런 게 아니…….”

    “입 다물고 고개 돌려요.”

    억울하고 서운했다. 창을 짚고 있느라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휭, 케인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허공에 휘둘러 세기를 가늠한 주완이 울긋불긋한 엉덩이 위를 다시금 조준했다. 휘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 케인이 맨엉덩이 위로 떨어졌다. 짜악-. 더 세게 때리겠다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포물선을 그린 케인의 끝부분이 생채기를 내기로 작정한 것처럼 붉은 피부 위를 갈겼다.

    “아흑, 아홉……!”

    피가 터진 것처럼 맞은 부위가 화끈거렸지만 진짜 피를 볼 정도는 아니었다. 피부 안쪽으로 피가 터진 자국이 선명하기는 했다. 멍이 들 것 같았다. 잠시 케인을 내린 주완이 그 선명한 자국 위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근육을 풀어 주었다.

    “흐윽, 흑……. 너무 아파요. 으읏.”

    “다행입니다.”

    미친 거 아니야? 준희는 왈칵 새어 나갈 뻔했던 진심을 억누르며 울음을 토해 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주완이 케인으로 그의 종아리를 톡톡 건드려 자세를 바로잡도록 했다.

    몸의 흔들림이 멎자 다시 케인이 휘둘러졌다. 짜악-. 무서운 소리를 내며 케인이 엉덩이를 터뜨릴 기세로 부딪혔다.

    “열……! 흑, 으흡.”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아픈데……. 가차 없이 매를 때리는 주완이 얄미워 죽을 것만 같은데……. 엉덩이에 물든 홧홧한 기운이 허리를 타고 올라 온몸을 물들이는 듯했다. 온몸의 성감대가 감전된 듯 찌릿찌릿하고 간지러웠다.

    ‘……히트사이클이 언제였더라?’

    심상치 않은 몸의 반응에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려 했지만, 케인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가차 없게 살 위로 흔적을 덧댔다. 짜악, 짜악.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매질에 엉덩이가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한 대라도 허투루 놓칠까 봐 준희는 허겁지겁 대 수를 셌다. 열하나, 열둘……. 흔들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덩달아 그의 몸에선 장미 화원에서 날 법한 향기가 은은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차악-. 불이 날 것 같은 엉덩이 위로 다시금 케인이 감겼다. 무릎이 꺾이는 것을 방지하려고 온 다리에 힘을 빳빳하게 주었다.

    “하으, 여, 열다서엇……, 주완 씨, 저……. 저 좀 어떻게…….”

    센 대 수는 열다섯이지만 스무 대는 족히 맞았을 엉덩이가 케인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엉덩이를 덮은 땀 때문에 붉은 자국이 핏빛을 띠었다. 희고 만질만질하던 그의 엉덩이는 울긋불긋하고 울퉁불퉁했다. 케인을 바닥에 던져 놓은 주완이 매 자국 위로 손바닥을 덮었다.

    “아, 아아…….”

    “엄살이 심하네요.”

    “흐으윽.”

    당신이 안 맞아 봐서 그렇다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따갑고 쓰린 엉덩이도 엉덩이거니와 앞쪽의 사정도 좋지는 못해서였다. 주완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꽃향기가 점차 자욱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꿈치 내려요.”

    “감, 흐윽, 감사합니다.”

    발발 떨리던 다리를 겨우 온 발바닥에 지탱하고 서자 감사 인사가 절로 나왔다. 손바닥도 창에서 떼어 내려 하자 엉덩이를 주무르던 주완이 주의를 주었다.

    “손 떼라곤 안 했는데.”

    “……죄송해요. 안 뗄게요. 혼내지 마세요. 저 너무 아파요.”

    주완은 그의 뒤로 다가서며 페로몬을 풀었다. 교목 내음이 번지자 요동치던 심장이 차츰 안정되었다. 준희는 숨을 헐떡거리며 유리창을 긁었다. 뒤로 다가선 주완이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주완, 씨……. 으응, 아…….”

    상체가 창을 향해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창에 뺨이라도 비빌 기세로 바르작거렸지만 주완은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움켜쥔 엉덩이를 아프게 주물러 대며 버클을 풀어낼 뿐이었다. 거친 손길에 매 맞은 상처가 뜨겁게 아렸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앞뒤로 달아오른 성감을 해결하는 일이 시급했다. 준희는 다리를 약간 더 벌려 서며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찰싹, 아프게 살을 때렸다.

    “아흑.”

    “밝히기는.”

    이내 허벅지 사이로 불쑥 들어온 주완의 손이 회음을 지나 음낭을 부드럽게 주물러 댔다. 안 그래도 기둥을 세우고 있던 음경이 위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벌써 다 젖었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단단해진 귀두 끝은 선액이 맺혀 만질만질했다. 주완이 음낭과 기둥을 한 번에 쥐고 짓뭉개듯 주물렀다. 자극받아 있던 성기가 괴롭힘을 당하자 허벅지가 절로 오므라들었지만, 그마저도 주완의 다리가 단단하게 막아섰다.

    “맞으면서 세우는 변태인 줄 알았으면 선 자리에서 그렇게 거절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흐으, 으, 으으응…….”

    “진작 알았다면 옷을 엉망으로 입고 나타난 당신을 테이블 위에 엎어 놓고 엉덩이를 터뜨려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네요.”

    “허윽, 흑…….”

    페니스를 마구잡이로 주무르던 주완이 손을 휙 치워 내곤 준희의 엉덩이를 우악스레 잡아 벌렸다. 준희는 창에 비친 주완을 간신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바지춤을 끌어 내려 성기만 꺼내 든 채였다.

    질척이는 손가락이 내벽을 밀고 안쪽 깊은 곳까지 단번에 삽입됐다. 허리가 긴장됐지만 골반이 잡혀 있어 몸을 빼지는 못했다. 준희는 버티는 걸 포기하고 창에 이마를 댄 채 마구 문질렀다.

    “으응, 응, 흐으.”

    히트사이클이 아니었다면 뻑뻑했을 텐데, 마침 히트사이클이기 때문인지 구멍으로 애액이 넘쳐 수월하게 손가락을 피스톤질 할 수 있었다. 질척질척 물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공중으로 번져 나갔다.

    손가락을 순식간에 세 개로 늘려 급히 구멍을 넓힌 주완이 제 성기의 선단을 입구에 맞추었다. 꺼덕이는 살덩이가 엉덩이 사이로 짓뭉개지는 것이 느껴졌을 때 준희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커……!’

    골 사이에 문질러지는 귀두의 크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충 풀고 집어넣기에는 버거운 사이즈였다. 크다고 자부하는 남자들을 꽤나 만나 보았는데도 그에 비하면 모두 허풍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몸이 절로 뻣뻣해졌다.

    “아……, 흣, 흡. 너무 크…….”

    “힘 풀어요.”

    그는 우는소리를 내는 준희의 골반을 단단히 틀어쥔 채 제 것을 느리게 삽입했다. 단단한 귀두가 안으로 밀려드는 느낌이 생생했다. 더 이상 신음도 내지를 수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처음인 양, 뻐근하게 힘이 들어갔다.

    “하으, 흣.”

    “후……. 안 되겠네. 그냥 쑤시겠습니다.”

    “안 드…… 흐아……!”

    입구에서 꾸역꾸역 길을 넓히던 페니스가 단번에 깊은 곳까지 욱여넣어졌다. 고개가 천장을 향해 쳐들리고 허리가 휘어졌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짚고 있던 창을 팡팡 두드렸다. 그러나 깊숙이 처박혔던 성기는 뒤로 한 차례 물렸다가 다시 안으로 쾅 밀고 들어왔다.

    “악, 흐윽, 흥. 으응, 으……. 흑.”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앞다투어 터져 나왔다. 내벽을 들쑤시던 남자의 귀두가 전립선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성감으로 허리가 뒤틀렸다. 움직이지 말라는 듯이 주완이 준희의 뒷덜미를 잡아 눌렀다. 눈물 젖은 뺨이 창에 비벼졌다.

    “끊어 먹을 작정입니까? 힘 빼요.”

    “으응, 흑, 으으흑.”

    주완은 매질만큼이나 사정없이 허리를 흔들어 대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준희는 붉고 검게 점멸하는 감각에 더는 말다운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의 귀두가 전립선을 찔러 줄 때마다 뜨겁고 자극적인 감각이 배 안에서 폭죽처럼 일어나길 반복했다.

    내벽은 성기를 오물오물 빨아 들이며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만져 주지 않은 준희의 아랫도리도 발딱 일어나 배꼽 근처에서 꺼덕거렸다. 준희는 오르가슴으로 아픔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대며 그의 귀두에 제 성감대를 맞추었다.

    “하아…… 아, 흐응……!”

    “후…….”

    남자의 온기가 안을 다 잠식하고, 살이 맞부딪혀 철썩이는 소리로 공기가 짓이겨졌다. 장미꽃과 나무의 향기가 어지러이 뒤섞여 갔다.

    주완의 것이 배 안에서 축축하고 뜨거워졌다. 사정한 것이다. 그러나 품고 있는 성기의 위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준희는 그의 것을 머금은 채 색색거렸다. 한 차례 정액을 싸질러 놓은 주완이 그의 뒷덜미에서 손을 떼어 척추 선을 타고 손가락을 훑어 내렸다.

    “읏.”

    준희는 성감의 여운으로 몸을 떨었다. 손바닥이 향한 곳은 배 아래였다. 아직 사정하지 못한 페니스 위로 주완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감겼다. 욕정으로 헐떡이던 준희의 머릿속에 다시금 하얗게 불꽃이 일었다.

    덩달아 주완의 허리가 움직여졌다. 그는 제 것을 바깥으로 빼내는가 싶더니 안으로 푹푹 찔러 넣었다. 안을 채운 점액이 접합부를 타고 허벅지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윽, 흐으응…….”

    그는 느리게 허리 짓을 하는 동시에 준희의 살 기둥을 쥐고 흔들어 주었다. 힘이 빠져나가 주저앉으려고 할 때마다 주완은 귀신같이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려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주완 씨……. 저 쌀 것 같…… 아흑.”

    온몸이 성감에 지배된 듯 저릿했다. 신음을 질러 대느라 과로한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등 위로 주완의 옷감이 스쳤다. 몸을 겹치고 허리를 치대는 그 역시도 나직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이 뒤엉켰다.

    주완은 준희의 귀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마구 문지르다가 절정에 이르기 직전 입구를 콱 틀어막았다. 온몸이 팔딱팔딱 뛰었지만 이미 주완의 품 안이었다. 주완은 그의 요도구를 막은 채 허리를 거칠게 쳐올렸다.

    “흐으윽, 싸게 해 주, 아흣!”

    “하……. 안 돼. 참아요.”

    제발, 제바알. 울먹이는 목소리가 질질 늘어졌다. 발을 동동 굴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엉덩이를 맞는 것도, 이런 식으로 오르가슴을 통제당하는 것도 모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준희는 어쩔 줄 몰라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윽고 주완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준희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엉덩이 제대로 쳐들어요.”

    “흑, 흐윽…….”

    “이따위로밖에 못할 것 같아서 초심자와 계약하지 않는 겁니다.”

    그가 무미하게 질책하며 제 것을 안쪽 깊은 곳까지 퍽퍽 박았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매 맞는 소리처럼 들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로 입이 짭조름했다.

    “다음에는, 후……. 어디 묶어 놓고 박든가 해야지.”

    “흐읏, 아, 아!”

    “인내력이라곤 없어서 자세 유지도 제대로 못 하고. 상전이 따로 없습니다.”

    “으, 흐윽, 잘못했……, 아아, 흣.”

    주완의 흉포한 성기가 준희의 구멍을 마구 들쑤시듯 넘나들었다. 뒤로 뺄 때마다 붉은 내벽이 같이 딸려 나올 정도였다. 이미 싸질러 놓은 정액과 새로 넘친 쿠퍼액이 뒤섞여 허벅지로 길게 흘러내렸다.

    “칠칠치 못하게 질질 흘리기나 합니다.”

    주완의 질책이 억울했지만 준희는 그저 어깨만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성난 듯 부풀었던 남자의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왔다. 그는 준희의 것을 놓아주지 않은 채 남은 손으로 제 것을 흔들어 사정했다. 이번에는 케인 자국이 빼곡히 남은 엉덩이 위로 정액을 분출했다. 안팎으로 정액 범벅이 된 꼴이었다.

    ‘뜨거워…….’

    하반신 전체가 홧홧한 느낌이었다. 더럽혀진 기분 자체는 퍽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손아귀 안에서 사정을 금지당한 아랫도리 사정이 다급할 뿐이었다.

    “흐읍, 주완 씨, 저도……. 저도 가게 해 주세요…….”

    “창 제대로 잡아요.”

    그의 명령에 흐트러졌던 몸을 다시금 재정비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을 잡자, 페니스를 꽉 쥐고 있던 주완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정할 것 같았는데, 빠르고 반복적으로 살 기둥을 훑어 내리는 손길에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 되었다.

    “학, 하윽, 아아앙……!”

    우는지 신음하는지 모를 정도의 비명이 튀었다. 너무 오래 참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기를 잡아 빼는 손길이 가혹할 만큼 거세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액과 정액이 앞다투어 허공으로 쏟아져 나가 창과 대리석을 더럽혔다.

    두 다리로 딛고 서 있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성기가 놓아지기도 전에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았지만 주완의 손길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엉덩이가 내려앉은 곳은 주완의 허벅지 위였다. 한쪽 허벅지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준희의 페니스가 계속해서 주완에게 수음당했다.

    “하악, 그, 그만…… 아흑……!”

    주완은 준희의 뒷덜미를 크게 베어 물었다. 짜릿한 감각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주완은 도저히 나올 것이 없어질 때까지 그의 성기를 문지르고, 음낭을 주물러 댔다. 주완은 탈진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다음부턴 플러그로 여길 막아 버려야겠습니다.”

    “…….”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준희를 살짝 일으킨 주완이 엉덩이 골 사이를 진득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흘러넘친 정액으로 주완의 바지가 더럽혀져 있었다.

    “잘못…… 흐, 죄송해요…….”

    “태초엔 남성 오메가도 임신할 수 있었던 걸 알고 있습니까?”

    “하아…… 으…….”

    준희는 성감의 여운을 떨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완은 손을 들어 준희의 엉덩이를 양옆으로 잡아 벌렸다. 그러자 간신히 조이고 있던 구멍이 오물오물 빠끔거리며 남겨진 정액을 조금씩 뱉어 냈다. 주완은 빠져나오는 애액들을 다시 안쪽으로 푹푹 쑤셔 넣으며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간절하게 벌름거려 봤자 현재의 몸으론 내 씨앗을 품을 수 없습니다.”

    “으으응…….”

    “아쉽게 됐습니다. 강준희 씨는 어떻게든 나를 잡아 두고 싶을 텐데, 방법을 하나 잃은 셈이네요.”

    “안 되는…… 으응…….”

    그가 뭐라고 하든 일일이 서운해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노곤했다. 주완이 엉덩이를 잡고 있는 손을 떼자마자 준희의 몸이 허벅지 위로 내려앉혀졌다.

    그러자 주완은 준희의 어깨 아래와 무릎 아래에 팔을 넣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준희는 반사적으로 주완의 목을 끌어안았다.

    ***

    준희를 들고 주완이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욕실은 넓고 온화했다. 욕실의 창문은 가로로 길어서, 꼭 야경이라는 그림을 담고 있는 액자 같았다. 창문 아래 위치한 욕조는 크고 깊었다. 주완은 준희를 욕조에 앉히고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받았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찰박찰박 차올랐다.

    준희는 몸을 웅크리고 앉은 채 주완을 흘끔거렸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수온을 확인하는 남자의 얼굴은 평온할뿐더러 얼핏 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준희는 심장께가 꼭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엉덩이를 이렇게나 얻어터지고도 그가 잘생겨 보이다니 중증이었다.

    “너무 뜨거우면 상처가 덧날지도 몰라서 미지근한 물로 받겠습니다. 차가우면 말해요.”

    “……적당해요.”

    “원래 플레이할 때 많이 우는 편입니까? 내일 얼굴이 많이 붓겠어요.”

    플레이는 몰라도 섹스할 때 잘 우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건조한 축에 가까웠다. 아래는 물이 많아도 위쪽은 아니라며 아쉬워하는 남자도 종종 있었다.

    울음의 여운으로 이따금씩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힘들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건가, 준희는 차오르는 물을 움키며 가만히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저 지금 못생겼어요?”

    갑작스레 걱정이 되었다. 진심이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얼굴이 못 봐 줄 정도로 부은 건 아닐까?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물에서 손을 빼고 허리를 일으킨 주완이 어이없는 듯 준희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걸 나한테 묻습니까? 여기 널린 게 거울인데.”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예뻐요.”

    무심하게 대답한 그는 입욕제를 풀어 거품을 냈다.

    “울었을 때 더.”

    준희는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거품을 응시하며 숨을 삼켰다. 잘못 들었나.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두근거리던 것도 잠시, 입욕제를 마저 물에 쏟아부은 주완이 말했다.

    “일어나서 욕조 잡고 엎드려 보세요.”

    “네?”

    예상치 못한 요구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엎드리라니, 또 엉덩이를 때려 주려는 걸까. 플레이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 잠깐 사이에 머릿속이 복잡하고 초조해졌다. 안절부절못하는 준희를 발견한 주완이 픽 웃었다.

    “안이 정액으로 지저분할 텐데 긁어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 혼자 처리해도 되는…….”

    “내가 안 됩니다. 두 번 사양하지 말고 엎드려요.”

    결국 꾸물꾸물 몸을 뒤집어 욕조를 잡고 그에게 엉덩이를 내주었다. 허리를 눌러 엉덩이를 높이 들게 한 주완이 엉덩이를 양옆으로 벌리고 손가락으로 구멍께를 지분거렸다.

    “아, 아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냥 저는, 으응, 제가 뭘 또 잘못한 줄 알고.”

    “그런 거면 왜 울상이죠? 혼날 구실이 생겼으면 좋아야 하는 것 아닌가? 혼나는 거 좋아하잖아요.”

    “……오늘은 그만 혼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는 손가락을 깊게 넣어 크림처럼 질퍽한 애액들을 밖으로 긁어냈다. 내벽을 누르는 손길에 구멍이 절로 움찔거렸다. 잇새로 웃음이 새는 소리가 귀를 때리자, 준희의 귓불이 수치로 물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아래를 벌름거리고 싶냐고 질책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는 세심하고 꼼꼼하게 강준희의 안에 남은 그의 흔적을 치워 냈다. 말인즉슨 오래도록 그의 엉덩이를 잔뜩 벌린 채로 손가락을 쑤셔 대었다는 뜻이다. 정액을 긁어 주겠다는 명목 아래 깊숙한 곳에 있는 성감대까지 꾹꾹 눌러 대는 탓에 준희는 욕조를 잡은 채 신음을 삼켜야만 했다.

    몸을 기어이 기진맥진하게 만든 뒤에야 주완은 준희를 놓아주었다. 준희는 물과 거품으로 넘칠 듯 차오른 욕조에 노곤한 몸을 기대고 앉으며 겨우 긴장을 풀었다.

    “많이 피곤해요?”

    “조금 졸려요.”

    “오늘 플레이가 평소보다 힘들었습니까?”

    ‘평소’라고 할 만한 경험이 없었으니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준희가 눈을 피하는 사이 주완은 샤워 볼에 거품을 묻혀 준희의 여린 살을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몸을 피해도 질책하지 않았다.

    언제 울렸냐는 듯 주완은 살뜰하고 꼼꼼하게 준희를 씻겨 주었다. 방금까지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깜빡 잊어버릴 정도였다. 주완은 아이를 다루듯 머리까지 세심하게 감겨 주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에 온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주완은 깨끗한 물로 거품기를 마저 씻겨 낸 다음 샤워 가운까지 꼼꼼히 입혀 주었다.

    “나가 있어요. 금방 씻고 나갈 테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정액과 땀으로 더럽혀진 몸이었는데, 어느덧 보송보송했다. 눈물 자국도 깨끗하게 씻겨 나가 있었다. 준희는 산뜻해진 기분으로 욕실을 벗어났다.

    ***

    주완이 씻는 동안, 준희는 펜트하우스의 내부를 구경했다. 한 차례 구경한 적이 있지만 오늘은 느낌이 또 달랐다. 거실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창가에 남아 있는 축축한 흔적을 발견하곤 애써 눈을 돌렸다. 확실히 2층 검은 문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밝고 따뜻한 색감의 인테리어였다. 그는 붉은빛이 수놓인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야…….”

    엉덩이가 눌리자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는 케인 자국이 빼곡할 엉덩이가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거실 한편에 떨어져 있는 케인이 눈에 들어왔다. 물건에 죄가 있을 리가 없는데도 공연히 치가 떨렸다. 그 기다란 것이 휘둘러지던 소리가 여태 귓가에 선명한 듯했다.

    그는 몸서리치며 거실을 등졌다. 1층의 방들은 전부 넓고 깔끔했다. 하나는 침실이었고, 하나는 서재였고, 마지막 하나는 드레스 룸이었다. 준희는 침실에 발을 들였다. 커다랗고 아늑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그는 침실에 놓인 전신 거울을 발견하고는 홀린 듯 그 앞으로 가서 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주완의 말마따나 벌써 퉁퉁 불어 있었다. 특히 눈가가 눈에 띄게 붉었다. 이윽고 준희는 본능적으로 엉덩이께를 문질러 보았다.

    상처가 남았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샤워 가운 밑자락을 손에 쥐었다. 그는 거울을 등진 채 가운을 말아 올리고 고개를 돌려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와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는 엉덩이를 확인했다.

    “그렇게 해서 보이겠습니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힘이 풀렸다. 샤워 가운이 도로 내려가 허벅지를 가렸다. 같은 디자인의 샤워 가운을 입은 주완이 문가에 기대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돌려세웠다.

    “침대 위로 올라가 보세요. 상처가 얼마나 났는지 봐야지.”

    “……괜찮은데요, 저는.”

    “강준희 씨는 나를 애프터 케어도 제대로 하지 않는 파렴치한으로 만들 셈입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침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들고 들어온 것을 침대 위로 툭 던져 놓고는 침대 근처 서랍장을 뒤적였다. 주완이 무언가 찾는 동안, 눈을 굴리며 망설이던 준희는 침대 위로 꾸물꾸물 기어 올라갔다.

    주완이 침대 위에 던져 놓은 것은 얼음주머니였다. 준희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 차가운 것을 쿡쿡 찔러 보았다.

    “이리 와요.”

    주완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가 서랍에서 꺼낸 것은 연고였다. 준희는 무릎으로 걸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엎드려 보세요. 편하게.”

    “네.”

    그의 말대로 베개에 뺨을 묻은 채 편하게 엎드렸다. 주완은 그의 샤워 가운을 말아 올렸다. 마치 주사 맞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모양새였다. 뺨이 뜨거워졌다. 주완은 열감이 많이 사라진 엉덩이 위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았다.

    “으, 차가워요.”

    “조금 참아요. 찜질을 해 줘야 상처가 금방 아물어요.”

    준희는 고개를 최대한 돌려 주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얼음주머니를 쥐고 군데군데 찜질이 안 되는 곳 없도록 마사지해 주었다.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강준희 씨. 경험이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닌데…….”

    “그래요? 그런 것치고 잘 참았다고 칭찬해 주려 했더니.”

    “없어요. 어, 그러니까…… 플레이 경험 별로 많지 않아요. 사실 그래서 싫어하는 플레이 고르는 것도 어려웠어요. ……물론 숙제 못 해 온 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지만요.”

    칭찬에 영혼이 팔려 주절주절 늘어놓는 모습을 흘끗 본 주완이 옅게 미소 지었다. 저런 얼굴도 할 줄 아네. 쉽게 넋이 팔렸다. 그가 얼음주머니 반대편 손으로 준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채를 잡고 뺨을 갈겼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다.

    “잘 참았어요.”

    그 손길에 매달려 뺨을 비비고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의 온기로 제 애정의 샘을 넘치도록 채우고 싶었다. 갈망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지만 손길은 금세 거두어졌다.

    “아까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오늘 플레이 힘들었습니까?”

    주완은 얼음 팩을 치우고 수건으로 물기를 훔쳐 내더니 이번에는 연고를 짜서 직접 발라 주었다. 덥고 축축한 기운이 상처 위를 스칠 때마다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손길 자체는 기본적으로 부드러웠다.

    녹아내릴 것 같아……. 준희는 속으로 되뇌며 베고 있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주완이 연고 바른 엉덩이를 찰싹 때려 주의를 주었다.

    “오늘 혼난 게 부족한가 봅니다. 대답해야죠, 강준희 씨.”

    “아, 으. 네? 그러니까 오늘 플레이가…….”

    힘들기야 했다. 그렇지만 오답을 말하기는 싫었다. 준희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주완이 재촉했다.

    “조금…… 은요?”

    “확실하게 말해 줘야 다음 플레이를 짤 때 고려할 수 있어요. 아무래도 강준희 씨는 경험이 많이 없는 것 같으니 당분간 플레이 후기를 남기는 게 좋겠습니다. 싫어하는 플레이는 그 과정에서 차차 하나씩 알아 가는 걸로 하죠.”

    “후기를 어떻게요?”

    “오늘 플레이 한 소감을 정리해서 보내요. 복기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형식을 따로 정해 주진 않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플레이가 좋았는지, 어떤 플레이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꼼꼼하게 써야 합니다. 그렇게 작성해서 일요일까지 메일로든 메시지로든 전송하세요.”

    “…….”

    방에 오도카니 앉아 오늘의 플레이를 복기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귀가 뜨거웠다. 성생활에 있어서는 부끄러움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플레이 할 때 느꼈던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내보일 생각을 하니 수치심으로 눈앞이 일렁거렸다.

    “강준희 씨?”

    “네. 해요. 할게요. 일요일까지…….”

    “솔직하게 쓰세요. 거짓으로 대충 무마할 생각 말고.”

    “네에.”

    어쩐지 혹 떼려다 혹 붙인 기분이었다. 준희는 주완 몰래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고는 가져가서 아침저녁으로 발라요. 다음 주에 데이트할 때 얼마나 아물었는지 확인할 겁니다.”

    “네.”

    “안전어는 2주 후까지만 정해요.”

    “네, 그럴게요.”

    “말 잘 듣고 대답 잘해서 예쁘네.”

    연고 묻은 손을 티슈로 닦아 낸 그가 다시 한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린 준희가 눈을 반짝거리며 주완을 돌아보았다.

    “저 그거 더 해 주면 안 돼요?”

    “뭘 말입니까?”

    “……쓰다듬어 주는 거요.”

    “그게 좋아요? 강아지도 아니고.”

    “네, 좋아요.”

    가볍게 타박했지만 힐난조는 아니었다. 주완은 준희의 머리카락을 연거푸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물기를 먹어 차갑게 식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가만가만 얽혀 들었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원래 어리광이 많은 성격이었나. 준희는 스스로 성찰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막내치고 덤덤하고 건조한 성격이었다. 연인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그런데 실컷 혼난 다음이라 그런가, 왜인지 주완 앞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잠시 있어요. 룸서비스 시켜 줄게요. 특별히 못 먹는 음식 있습니까?”

    “아뇨, 저는 너무 매운 것만 아니면 돼요.”

    한참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이 떠나가자 허전해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온기 탓인지 매 맞은 엉덩이가 더는 욱신거리지 않는 듯했다. 준희는 부드러운 침구에 몸을 파묻었다.

    ***

    주완은 준희의 입맛에 맞을 만한 룸서비스 음식을 여러 개 시켜 주었다. 입이 짧은 그로서는 한 그릇도 깨끗이 비우기 어려웠는데, 주완은 남겨도 되니 골고루 맛보라고 안심시켰다. 준희는 그의 말대로 여러 개의 음식을 조금씩 맛보고는 금방 나가떨어졌다. 후식 겸 커피도 지난번처럼 주완이 직접 내려 주었다.

    그는 과한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는 확실히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런 태도까지 애프터 케어에 포함되는 영역이라는 것을 준희는 자세히 몰랐지만 어렴풋이 추측할 순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준희에게는 보상처럼 여겨졌다. 잔뜩 괴롭혀졌던 사실이 잊혀질 정도로 다디단 보상이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준희를 돌본 주완은 밤이 꽤나 깊어졌을 무렵에야 그를 집 앞까지 차로 배웅해 주었다. 함께 새벽을 보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워 조수석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근처에서 서성이는 그에게 주완은 숙제를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고는 떠나갔다. 멀리 사라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가 그날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력을 모두 소진할 만큼 휘둘렸기 때문인지 준희는 여느 때보다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숙제를 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앉은 것은 다음 날인 일요일 오후였다.

    -플레이 한 소감을 정리해서 보내요. 복기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형식을 따로 정해 주진 않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플레이가 좋았는지, 어떤 플레이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꼼꼼하게 써야 합니다.

    그는 태블릿 PC를 꺼내 든 채 주완의 말을 떠올렸다. 관계에 대한 계약서 한 부는 그의 방 한편 금고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지난밤, 그는 분명히 흥분했다. 견디기 어려운 부분도 존재했지만, 고작 전 연인인 유승훈과의 관계에서는 발기 부전을 걱정했던 그였다. 어제의 플레이는 생소하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런 하잘것없는 부분을 떠올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확실히 강렬했지.”

    특히 구멍에 성기를 박아 넣은 채 뻣뻣이 선 성기의 선단을 가로막고 허리 짓을 하던 절정의 순간에는…… 실신해 버리는 줄만 알았다. 준희는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죽을 것 같긴 했어도 짜릿했다. 스스로도 몰랐던 극한의 쾌감을 다른 남자의 손을 통해 느끼게 된 격이었다.

    그가 울고불고 빌어도 주완은 봐주지 않았다. 목뒤가 저릿할 만큼 끝의 끝까지 그를 몰아붙일 수 있던 이유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상대의 마지노선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절정에 치닫도록 괴롭히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건 좋았다고 쳐도…….”

    준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뺨을 맞는 건 확실히 무서웠다. 다시 맞으라고 한다면 눈물부터 앞설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관장 검사는 눈물이 날 만큼 수치스럽기는 했어도 못 견딜 정도로 괴롭지는 않았다. 기묘한 배덕감에 흥분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케인으로 스팽킹을 당하던 기억을 떠올리자 공연히 엉덩이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잊지 말고 약을 바르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준희는 서랍에서 꾸물꾸물 연고를 꺼내 들었다. 그는 문이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잠옷 바지와 드로어즈를 슬쩍 내려 엉덩이를 드러내고 연고를 발랐다.

    준희는 엉덩이를 까고 엎드려 누운 채로 복기를 계속했다. 엉덩이를 맞는 것은 뺨보다는 덜 무서웠지만 그래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행위였다. 그렇지만 처음 그의 펜트하우스를 구경하던 날 얼결에 가장 좋아하는 도구로 케인을 지목해 버리는 바람에 싫다고 말하기가 애매해져 버렸다. 게다가…….

    -다행입니다. 스팽킹은 나도 좋아하는 플레이라서.

    주완이 좋아하는 플레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다음이라서 그런지 싫은 소리를 하기가 더 꺼려졌다. 좋아하는 플레이인 만큼 잘 참아 낸다면 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봐 주지 않을까, 준희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흐음…….”

    기억을 되짚으며 호불호를 따져 태블릿 PC 메모장에 정리하고 나니 내용이 가관이었다.

    「(1) 뺨 맞는 건 별로.

    (2) 관장 검사는 민망하긴 했지만 진저리 치게 싫을 정도는 아님.

    (3) 스팽킹은 좋았던 걸로 치자.

    (4) 섹스할 때 매우 좋았음.」

    섹스할 때 정확히 뭐가 어떻게 좋았는지도 말해야 하는 걸까. 사정하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 줘서 좋았다고 상세하게 이야기하기는 너무 부끄러운데……. 고개를 기웃기웃 기울여 가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 두었던 휴대 전화가 긴 진동 소리를 내었다. 지율이겠거니 싶어 무심히 시선을 옮겼던 준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완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는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서둘러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주완 씨?”

    [통화 가능해요? 뭐 하던 중이었습니까?]

    “어, 그게……. 약 바르고 있었어요.”

    [기특하네.]

    “숙제도 하고 있었고요.”

    준희는 그의 칭찬에 매달려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안 그래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정리 끝난 거면 전화한 김에 지금 말로 하죠.]

    “네?”

    [글로 쓰는 것보다 그쪽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예상에 없던 전개였다. 준희는 눈을 굴리는 한편 꺼 두었던 태블릿 PC의 화면을 다시 띄웠다. 아까 정리해 둔 메모가 화면에 떠올랐다.

    “그, 어……, 할까요?”

    [듣고 있어요.]

    정리가 덜 되었다며 문자로 정리해서 보내겠다고 할걸. 뒤늦게 후회가 되었지만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준희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게, 뺨 맞는 건 많이 무서웠어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는 자제해 보죠.]

    조율이 가능한 거였구나. 준희는 새삼스럽게 속으로 되뇌며 눈을 깜빡거렸다.

    “관장 검사는 조금 민망했고요. 물론 그래도 견딜 만은 했지만…….”

    [네, 그리고?]

    “어, 음, 그리고 스팽킹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준희는 연고를 바른 까닭에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주섬주섬 속옷과 바지춤을 끌어 올리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자 휴대 전화 너머의 남자가 픽 웃었다.

    [그건 안 들어도 알겠네요. 강준희 씨 스팽킹 좋아하잖습니까?]

    “……그렇기는 한데요.”

    [대 수는 적당했습니까? 혹시라도 하드 스팽키라 부족하진 않았을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부족하지 않았어요. 절대로.”

    놀리는 듯한 주완의 말에 준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였다.

    [과했습니까?]

    그러는 사이 주완이 다시 물었다. 준희는 망설였다. 첫 단추부터가 거짓말이었던 터라 수위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는 혼쭐이 났던 엉덩이를 바지 위로 더듬으며 침을 꼴깍 넘겼다.

    “아뇨, 적당했어요.”

    달콤한 보상이 수반된다면 이 정도야 참을 만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더 말해 보세요.]

    “그리고 섹스할 때는…….”

    태블릿 PC 메모에 정리해 놓은 순서대로 이야기해 내려가다가 준희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던 대목이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공연히 목덜미가 홧홧해지는 듯했다.

    [망설이는 걸 보니 성에 안 찼나 봅니다.]

    “아뇨! 아니에요. 좋았어요. 그때가 제일 좋았는데…….”

    [뭐가 좋았습니까? 박아 줘서 좋았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좋았고…….”

    [말 늘이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하세요, 강준희 씨. 슬슬 답답해지려고 하네.]

    “……못 싸게 하셨잖아요. 되게 죽을 것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좋았던 것 같아요.”

    [표현이 전부 불분명하네요. 오르가슴 컨트롤이 좋았다는 거죠?]

    “그……, 네.”

    [참고하겠습니다.]

    오르가슴 컨트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강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된 것 같아 수긍했다. 여러모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준희는 긴장돼 있던 어깨에서 힘을 풀어 보려 애쓰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주완은 말이 없었다. 아마도 준희의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준희가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왜 전화하신 거예요? 숙제 검사 하려고요?”

    [연인이 연인에게 전화하는 게 이상합니까? 대외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이잖아요, 우리.]

    “…….”

    의외의 대답이었다.

    [물론 강준희 씨가 싫다고 한다면 따로 연락하는 일 없이 계약에 명시된 날에만 만날 수도 있습니다.]

    “아뇨, 좋아요. 좋았어요. 저도 연락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평범한 연인처럼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 남들 보기에 더 자연스러울 테니.]

    그럼 그렇지. 약간 들떴던 마음 위로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준희는 휴대 전화를 귀에 붙인 채로 뒤로 발랑 드러누웠다.

    “정말 좋아요. 주완 씨랑 이렇게 통화하니까, 꼭 진짜 연인 같아요.”

    [비즈니스를 제안했던 사람치곤 감상적인 말이네요.]

    그도 그렇거니와 그는 진짜 연애를 할 때에도 연락에 목을 매거나 집착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휴대 전화를 잊은 것처럼 살다가 본인이 필요할 때에만 연락하곤 해서 상대방의 속을 뒤집어 놓는 쪽이었다.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이나 있었던가. 그런데도 그 ‘평범한 연애’에 희망을 걸게 되는 꼴이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었다. 가만히 상념에 잠겨 있는 준희의 귓가에 주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다음 약속 장소는 금요일에 알려 주겠습니다.]

    “네? 아……, 네. 안녕히 주무세요.”

    [강준희 씨도요.]

    딱딱한 건지 다정한 건지 모를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뜨거워진 휴대 전화를 한참이고 뺨에 붙이고 있던 준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툭, 들고 있던 휴대 전화가 침구 위로 떨어졌다.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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