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애설
지겹다.
[야, 강준희.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야?]
눈이 아프도록 흰 벽과 대리석 바닥이 즐비했다. 텅 빈 미술관 안으로 구둣발 소리가 벽과 벽을 타고 먼 데까지 이르렀다가 되돌아오는 동안, 강준희는 유화 물감이 거칠게 덧칠 된 캔버스 앞에 멈춰 섰다.
스피커폰도 아니었는데,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가 휴대 전화 바깥으로 슬금슬금 새어 나왔다. 준희의 뒤를 따르던 비서 박지율은 익숙한 양 평정을 유지했다. 심지어 질책을 당하는 남자는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도 했다. 하암. 습관성 하품 다음으로는 건조한 사과가 따라붙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했잖아.”
[나 만나고 나서만 세 번째야.]
“승훈아.”
나른해 보이는 눈빛이 제 앞의 유화 작품을 제법 오래간 응시했다. 그의 가벼운 턱짓에 비서 박지율이 휴대 전화를 꺼내 작품명을 메모했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준희는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보폭은 일정했고 걷는 폼은 올발랐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 넣고 있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곧고 바른 자세였다. 각이 잡힌 깨끗한 슈트 차림은 어떻고. 물정 모르는 이가 보아도 귀한 집 자제라는 사실이 여실히 묻어나는 자태였다.
“세 번째인 거 잘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
[너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상대의 질책에 준희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 손가락을 접었다. 무언가 가늠해 보는 기색이었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있잖아, 사실 네가 모르는 자리까지 세면 네 번째야. 널 만나기 전까지 다 헤아리자면 열두 번이고.”
[야, 너……, 너어……!]
“응, 승훈아. 말해.”
[그게 남자 친구한테 할 소리냐고, 이 미친놈아!]
익숙한 레퍼토리에 픽 웃음이 샜다. 준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가볍게 한숨 쉬었다.
“못 할 건 뭔데. 그래서 네가 사귀자고 했을 때 내가 물었잖아. 할아버지 등쌀에 불편한 자리 있을 거라고. 못 참을 것 같으면 여기서 그만하자고. 내 기억이 틀려?”
[그게……, 그때는 무슨 말인들 못…….]
“쿨하다며, 너.”
[그 불편한 자리가 이렇게 자주 있을 줄 내가 알았냐?]
점차 흥분하는 목소리에 눈두덩이가 피로로 물들었다. 그는 가만히 선 자리에서 미열이 오르는 오른쪽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휴대 전화 너머의 남자 친구, 아,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에서’ 그의 연인인 것이 자명한 남자는 숨을 씨근대며 뒷말을 삼켰다. 준희는 상대가 무엇이 아쉬워 그 불같은 성정을 애써 누르려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뒤에서 방관하던 지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몸을 기울였다. 준희는 휴대 전화를 잠시 귓가에서 떼 내곤 지율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통화 정리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시간이…….”
짧게 조언한 지율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준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 전화를 귀에 붙였다. 오랜 통화로 기계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기업 한울 그룹의 강욱진 회장이 애지중지 여기는 막냇손자였다. 우성 알파 집안에서 줄줄이 누나 셋을 우성 알파로 두고 태어난 뜻밖의 우성 오메가. 우성이기는 하나 오메가라는 이유로 아픈 손가락 취급을 하던 강욱진 회장은 그의 아들 내외이자 준희의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뜨고 나선 더 유난스레 가장 어린 손자를 감싸고돌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머리털 나고 스물아홉이 되는 동안 그에게 접근해 왔던 온갖 우성 알파, 열성 알파, 혹은 베타들도 다 알았다. 현재 남자 친구인 유승훈도 알았다. 그런 이유로 준희의 연애를 이루는 것은 대체로 사랑과 세속적인 욕망 사이의 그 무언가였다.
준희는 강씨 핏줄답게 셈이 빨랐다. 순수의 농도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짓일랑 일찍이 그만두었다. 타고난 재력가로서의 방탕한 인생을 즐기기로 결정했던 것이 고작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승훈아.”
[뭐……. 그렇게 부르면, 내가 겁먹을 줄 알아? 지금 분위기 잡아야 할 건 나야. 네가 아니라.]
“알아. 아는데…….”
돈이 많은 만큼, 보통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은 만큼, 그는 속물근성에 관대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소유욕이 들끓기도 전에 손에 넣었고, 달콤한 사랑을 담보로 뛰어드는 불나방들에게도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 왔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넘치는 통장으로 텅 빈 일상을 화려하게 수놓는 데 익숙했다.
다행히 세상에는 아직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고, 만나 보지 않은 미지의 알파 남자들은 줄을 지었다. 준희는 언제고 그것들, 혹은 그들에게 자신의 돈과 마음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속된 말로 헤픈 남자였다. 그러나 헤프다는 말이 관대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나, 네가 질려.”
[…….]
“우리 승훈이는 똑똑하니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겠지?”
[야, 강준희. 이 씨발…….]
“헤어지자. 깔끔하게.”
어려울 것 없는 이별이었다. 준희의 마음은 쉽게 현혹된 만큼 쉽게 밑천을 드러냈다. 적어도 그가 누려 온 연애의 역사 속에서 쉽지 않았던 관계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끊는다. 내가 좀 바빠서.”
휴대 전화 건너편의 남자가 욕지거리를 뱉기 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뜨거워진 기계를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준희는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다. 갤러리를 다 돌아보지도 못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그를 기다리던 지율은 여상한 낯으로 출구까지의 길을 안내했다.
***
강준희의 삶은 권태로웠다. 골드를 맥스(Max)로 가득 채워 놓고 시작하는 게임은 처음에나 재미있는 법이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돈으로 해치우며 다다른 스물아홉에게 인생의 쓴맛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금방 지루해졌다.
어쩌면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쟁이이기 때문일지도. 다만 그의 욕심은 부나 명예에 있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원했더라도 일찍이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만. 그의 욕망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데 있었다. 사랑, 애정, 관심…… 뭐 그런 것들에 말이다.
달리는 세단 우측 뒷자리에 앉은 준희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차창 밖의 풍경을 멀거니 응시했다.
“마침 헤어진 김에 당분간은 좀 쉬시죠?”
“비서가 하기엔 도 넘는 충고라고 생각 안 해?”
“그럼 친구로서 할게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좀처럼 한 마디를 져 주는 법이 없는 비서 지율은 준희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1학년 때 2인 1조 발표의 파트너가 되었던 것을 계기로 친해졌다. 평범한 집안의 장남이자 베타인 그가 강욱진 회장 눈에 들어 학비와 용돈 걱정 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건 모두가 준희 덕이었다.
애초에 준희의 비서로 삼을 것을 점찍어 두었던 강욱진 회장의 큰 그림이었다. 다행히 지율은 꿈이 원대하지 않았다. 편하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었고, 이해관계가 잘 맞아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준희의 비서로 취업하며 평생직장을 보장받았다.
“이러다 또래의 전 세계 우성 알파 남자들 다 만나시겠어요, 진짜.”
“과장하지 마.”
“과장 아니죠. 우성 알파가 고작 1퍼센트밖에 안 되는 희귀한 집단이라는 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상식인데요.”
“그래서 열성 알파도 종종 만나곤 해. 얼굴만 반반하다면.”
“자랑이십니다.”
밑 빠진 애정의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준희는 분기별로 남자를 갈아 치웠다. 사춘기 무렵, 첫사랑과 평생을 함께하는 영화 같은 순정을 꿈꾸기도 했지만 아주 찰나였다. 그는 콧대 높은 재벌 3세이고, 그런 그의 까다로운 성미를 백 일 이상 받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생을 저 잘난 줄 알고 살았던 우성 알파에게는 더더욱.
그런 이유로 사랑은 불타기도 전에 누군가 물을 끼얹은 듯 급격하게 사그라들기 일쑤였다. 스물둘쯤 되었을 때 준희는 안정적인 연애를 단념했다. 그저 한여름 밤의 불꽃놀이처럼, 불타다 사그라드는 아름다운 한철을 즐기는 데 의의를 두었다. 그러나 그 역시 말마따나 한철. 고작 한철의 즐거움일 뿐이다. 마른 독을 채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지율아.”
“네.”
“콱 교통사고나 났으면 좋겠어.”
“운전대 잡은 제 뒤에서 못 하는 말이 없으세요. 내려 드리는 대로 저 퇴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비서로서요.”
준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빈말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등받이에 기대 몸을 미끄러뜨리며 입을 비죽거렸다.
“낙이 없어서 그래.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음 좋겠어서.”
“헤어지자마자 그렇게 징징거리실 거면 그냥 유승훈한테 전화해서 다시 만나자고 하세요. 상대는 미련이 많이 남은 눈치던데.”
“걘 안 돼.”
“왜요? 몸이 꽤 근사하다고 자랑하셨던 게 고작 일주일 전인데요.”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거야. 그 좋은 몸을 보고도 발기가 안 되는 건 걔한테든 나한테든 문제가 있다는 거잖아.”
끼익. 부드럽게 달리던 차가 빨간불 앞에 거칠게 정차했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의 여파에 심장이 낮게 울렁거렸다. 이거야, 이거. 준희는 허릴 곧추세우곤 눈을 반짝였다.
“우와, 방금 완전 스릴 있었어.”
“제발 그런 말씀은 병원에나 가서 하세요.”
“정차할 때 스릴 느꼈다는 말?”
“그것도 확실히 이상하지만…… 발기니 뭐니 하는 말들이요. 저는 도련님 비서지, 주치의가 아니거든요?”
“아, 그럴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을 다큐로 받았다. 지율은 제 환장할 도련님을 룸 미러로 흘겨보며 “으휴, 말을 말자.”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준희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져 있었다.
재미있자고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마지막 잠자리에서 그는 발기하지 못할 뻔했다. 초반부에 끓어오르던 관계는 횟수에 비례해 차갑게 식어 갔다.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높은 확률로 발기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발기 부전이면 어떡하지?”
“도련님, 제발!”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 병원에 들러야겠어.”
“하아……. 모셔다드릴 테니까 오늘 선 자리에서 그런 말은 제발 입에 올리지 말아 주세요. 이건 친구로서의 부탁이에요. 깽판 놓고 올 때마다 회장님이 절 얼마나 잡는지, 어? 님이 아시냐고.”
“보너스 입금할까?”
“나 참. 그런다고 제가 뭐…… 계좌 번호 아시죠?”
설전은 오래가지 않아 뼈 있는 농담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준희는 그 자리에서 휴대 전화로 꽤나 거액의 보너스를 지율의 계좌로 입금시켰다.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하던 지율도 어느덧 그의 씀씀이에 익숙해져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지율은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엉뚱한 도련님과 넉살 좋은 비서를 태운 세단이 수도권 외곽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입구로 접어들었다. 차를 멈춰 세운 지율은 준희를 돌아보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늘 만나실 분은 유성기획 차주완 대표 이사예요.”
“유성기획이면…… 최씨 아저씨네 회산가?”
“네, 맞아요. 최명 회장이 광고업은 트렌드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며 당시 이십 대였던 차주완 대표를 CEO로 발탁했던 게 3년 전인가. 그럴 거예요, 아마. 꽤 떠들썩했었는데요, 그때. 기억 안 나세요?”
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게는 우성 알파 누나만 셋이었다. 전부 명석하고 야심 찬 덕에 준희는 경영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들에서 한 발자국 물러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애초에 머리 아픈 것들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자 지율이 이어서 설명했다.
“총수 집안의 후계자가 어린 나이에 이사급으로 채용되는 경우야 흔하지만, 아무리 우성 알파에 엘리트라고 하더라도 끌어 주는 사람 없이 CEO로 고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것도 젊은 나이에.”
“으응, 그래?”
“간략히 설명하자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 이겁니다. 브리핑 끝. 그런데 도련님은 뉴스도 안 보세요? 젊은 기업인 중에 차주완 대표 유명세 따라올 사람 없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야.”
“그럼 얼굴도 모르시겠네요? 꽤 잘생겼는데.”
“그래 봤자 고리타분한 사람이겠지. 듣기만 해도 감이 온다. 이제 내려도 되지?”
그동안 전전했던 열두 번의 선 자리에는 그놈의 기업인이니 판검사니 하는 남자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전부 강욱진 회장이 깐깐하게 선별한 인사들로, 집안 배경이 탄탄하거나 학벌이 빼어나거나 수완이 남다른 남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준희를 단 1분이라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클럽에서 부딪힌 열성 알파, 아니, 심지어 베타나 오메가보다도 긴장감이 떨어진다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준희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문고리를 당겨 차 문을 열었다. 레스토랑 직원이 마중을 나와 그를 안내했다. 그 뒷모습을 걱정스런 눈길로 말끄러미 응시하던 지율은 차를 몰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레스토랑 직원의 뒤를 따르던 준희는 손목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보다 5분쯤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잘만 따라오던 구둣발 소리가 멎자, 직원이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준희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여기 혹시 화장실이 어디죠?”
***
직원이 안내한 화장실은 넓고 쾌적했다. 내벽과 바닥을 이루는 대리석은 물기 없이 반들반들했다. 차가운 색감의 조명 아래에 선 준희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 본인의 모습을 점검했다. 당장이라도 공식 석상 내지 중요한 자리에 등장할 수 있을 만큼 단정한 차림새였다.
“흐음…….”
그는 그게 못마땅했다. 짧게 신음한 다음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세면대 한편에 던져 놓았다. 셔츠를 바지 바깥으로 빼내곤 위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놓은 뒤에야 신경질적이던 표정에 미소가 감돌았다.
답답한 것을 싫어하는 까닭에 셔츠는 정사이즈보다 약간 크게 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특유의 어려 보이는 생김새 때문인지 거울에 비친 꼴이 꼭 불량한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준희는 단정히 내려앉아 있는 머리카락까지 손으로 헤집어 흐트러뜨렸다.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 순해 보이는 인상과 상반되는 꼬락서니였다.
그동안 선 자리에 나왔던 남자들, 능력치도 생김새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우연히 마주쳤다면 한두 번쯤은 흔쾌히 침대에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격식 있는 자리에 마주 앉아 아버지가 누구니, 취미가 뭐니, 천편일률적인 대화로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사실이 준희에게는 고문에 가까웠다.
그러니 소소한 재미는 스스로 챙길 수밖에. 준희는 세면대에 다가서서 차가운 물로 손을 씻었다. 격식이라곤 갖추지 못한 한심한 꼴의 맞선 상대를 발견한다면, 열세 번째 남자의 얼굴은 어떤 모양으로 일그러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저쪽도 대단한 인연을 기대하고 나오는 것은 아닐 터였다. 결혼 따로 사랑 따로라는 인식이 만연한 바닥이었다. 결혼은 적당히 비슷한 집안, 혹은 조건에 맞춰서 전략적으로 해치우고 절절한 연애는 애먼 사람이랑 하겠지. 나 역시도 그렇게 되려나, 준희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딴청을 부리는 사이 15분이나 지나가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안내해 주세요.”
느긋한 걸음으로 화장실에서 나가니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부리나케 앞장섰다. 입고 들어갔으나 벗고 나온 재킷의 존재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인적 없는 복도를 굽이굽이 지나는 직원의 뒤를 따르며, 준희는 마지막까지 상념에 집중했다.
언젠가는 그에게도 넓고 깊은 애정의 호수를 마르지 않게 만들어 줄 사람이 생길까. 분명 어려운 일이다. 쉽게 싫증을 내고 금세 변덕을 부리는 성격도 성격이고, 그런 변화무쌍한 성정을 포용해 줄 만한 그릇은 흔치 않다. 과연 이 나라에, 아니, 이 세계에 존재는 할까. 소용돌이치듯 빙글빙글, 자조적인 생각이 심연 깊은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준희는 무심히 숨을 들이켰다. 안으로 들이던 발걸음이 일순 멎었다. 깊은 산속 우두커니 서 있는 오래된 상록의 교목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모든 알파와 오메가들은 각자의 페로몬 내음을 체향으로도 가지고 있다. 선을 보러 나온 남자는 필시 우성 알파일 테니, 체향이 느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심장이 한 차례 반응한 것은 그가 같은 식물계 향기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준희는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얼굴도 모르시겠네요? 꽤 잘생겼는데.
지율의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는 듯했다. 준희는 남모르게 이를 아득 갈았다. 말은 제대로 했었어야지. 맞은편의 남자는 ‘꽤 잘생겼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차마 어딘가에 빗대어 평가하기 민망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다소 무심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부터 오뚝한 콧날과 잘 빚어진 턱선에 이르기까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절로 끌어당겼다. 셔츠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준희와 달리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지만, 구태여 벗지 않아도 단단하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몸이기까지 했다.
외모를 훑느라 정신 팔려 있던 준희의 시선이 마침내 상대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는 건조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미하면서도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준희는 그제야 자신이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나타났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고작 10분이었지만, 상대에겐 ‘고작’이 아닌 모양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준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소리마저 근사한 남자였다. 클럽에서 만났다면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다가가 눈을 접어 웃으며 추파를 날렸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가 우성 알파인지, 열성 알파인지, 어쩌면 베타인지도 괘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할 만큼 상대의 외양은 여태껏 만나 왔던 어떠한 남자들보다도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름답다. 갖고 싶다. 첫인상에 대한 소감이었다. 왜 하필 이곳에서 만났을까. 아닌가. 차라리 잘된 일인가. 판도 깔렸겠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머리를 굴리던 준희는 방금 화장실 거울로 거듭 확인했던 본인의 꼬락서니를 떠올렸다.
‘망했네.’
“차주완입니다.”
“아, 저는 강준…….”
“네, 강준희 씨. 음식은 제가 미리 주문했습니다. 늦으시기에.”
단정치 못한 옷매무새야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그렇다 쳐도, 고작 10분 지각에 이리도 눈치를 주다니 너무한 처사였다. 수습할 방법을 궁리하느라 준희의 시선이 바쁘게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다.
“되게 유명 인사라면서요.”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아뇨.”
“그렇다면 대단히 유명한 건 아니었나 보군요.”
칭찬으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했으나, 평소 안 하던 짓이었으니 수월할 리가 없었다. 들끓던 흥미가 뜻밖의 장애물 앞에 가로막혔다. 아쉬운 마음으로 입맛을 다시던 준희는 옆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일이 바쁘진 않아요? 최명 아저…… 아니, 최명 회장님 회사에 대표 이사로 계신다고 들었어요.”
“바빠도 견딜 만합니다. 적성에 맞아서. 드시죠.”
“아, 네.”
준희는 워낙 입맛이 까다롭고 양이 적은 편이었다. 포크를 들고 망설이던 그는 방울토마토 하나를 찍어 잇새에 넣고 깨물었다. 상큼한 즙이 혀를 물들였다. 그러나 미각보다 즐거운 쪽은 시각이었다.
차주완 대표는 모든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지저분하지 않았고, 과하지 않았고, 가볍지 않았다. 다시 말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레스토랑 종업원을 대하는 품행 또한 정중했다.
-아무리 우성 알파에 엘리트라고 하더라도 끌어 주는 사람 없이 CEO로 고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흘려들었던 지율의 목소리가 불현듯 되살아났다. 재벌가 자제로 태어나 거저먹은 게 아니라 본인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자수성가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눈빛은 당당해 보였지만 으스대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맞으십니까?”
“네, 뭐. 그럭저럭.”
“솔직하게 대답하셔도 됩니다. 아까부터 음식이 거의 비워지질 않고 있어서요.”
“음식은 정말 괜찮아요. 제가 입이 짧아서요.”
메인 요리에 이르기까지 준희를 유심히 지켜보던 주완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거기에서 잠시 끊겼다.
“주완 씨는요? 입에 맞으세요?”
“마음에 들 것도 안 들 것도 없습니다. 내가 고른 식당이니.”
주완이 썰어 준 스테이크 한 점을 씹어 삼킨 뒤에 물었더니 다소 불친절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게다가 이쪽에는 영 흥미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예의 없게 굴지는 않았지만 형식적인 질문으로 분위기를 주도하지도 않았고, 이쪽을 탐색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말없이 적적한 자리가 퍽 낯설었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힐끔힐끔 눈을 들어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한편으로는 심통이 치밀기도 했다. 첫눈에 마음을 동하게 하는 남자이기는 했지만, 저리 뻣뻣하게 굴 정도인가.
‘비싸게 굴긴.’
준희는 그동안 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알랑거렸던 열두 명의 맞선 상대를 떠올리며 속으로 불평했다.
메인 요리 식사를 마친 남자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덩달아 포크를 내려놓은 준희는 애꿎은 물만 연거푸 들이켰다. 물 잔을 내려놓을 무렵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이 느리게 얽혀 들었다. 준희는 보란 듯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성질머리와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고 맑아 보인다고 여럿에게 찬사 받던 미소였다. 별것 아닌 수작이자 유치한 필살기이기도 했다.
“음료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그 야심찬 한 수가 무색하게도, 고작 디저트 따위를 묻는 직원의 목소리에 시선을 홀랑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주완은 직원과 눈을 맞추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전 아메리카노로.”
“……카푸치노로 주세요.”
주문을 마친 뒤에도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관심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준희는 슬슬 짜증이 났다. 주완은 그를 어쩌다 마주 앉은 혼밥 상대쯤으로 인식하는 것이 분명했다. 준희는 손가락에 닿는 테이블보를 꾹꾹 눌러 구겨 버렸다.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침묵의 바람이 흘러들었다.
준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긴장감을 늦추었다.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았다. 쉽게 놓아주기 아쉬운 외모와 품행의 소유자이기는 했지만…… 분위기도 썩 근사한 데다 심장을 울렁이게 만드는 향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꼭꼭 잠겨 있는 셔츠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풀어내 주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 싫다는 남자를 붙잡고 늘어질 정도는 아니지 않냐고, 준희는 백번 합리화했다.
그래서 자존심이라도 세우고자 했다. 좋은 자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고, 여운을 남기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수준에서 선수 치려고 입술을 떼려던 참이었다.
“강욱진 회장님께 직접적으로 배운 것은 없으나, 기꺼이 은사님으로 모실 만큼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주완은 제 몫으로 나온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선수를 빼앗긴 준희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동그래진 눈으로 주완을 빤히 응시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강준희 씨에게 사과하기 위해섭니다.”
“네?”
“맞선이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결혼을 염두에 둔 당사자들이 만나 가치관을 확인하고, 서로를 탐색하고,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하는 자리죠.”
‘가벼운 자리가 아니’라는 말에 준희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부러 옷을 엉망으로 고쳐 입고 심지어 약속에 늦기까지 했던 유치한 심술을 질책받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준희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크흠, 가볍게 헛기침했다.
“그런데 저는 결혼할 마음 없이 자리에 나왔으니 강준희 씨에게 실례를 끼친 격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다시 고개를 들어 주완의 눈을 빤히 마주 보았다. 이번에는 순수한 의문이 흘러나왔다.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여기에서 ‘저’라고 함은, 그의 집안까지 모두 포괄하는 말이었다. 선 자리에 나온 사람들은 강준희의 첫인상에는 관심이 없었을지언정 그가 가진 배경에는 관심이 퍽 많았다. 현대 사회에서 재벌가의 결혼이란 로맨틱한 백년가약보다 영리한 비즈니스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애초부터 비즈니스엔 뜻이 없었다니, 준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직까진 결혼 생각이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고 한들 나는 강준희 씨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 상대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비즈니스를 한단 말인가. 대화가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준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한 차례 털어 냈다.
“그건 어떻게 아는데요?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됐잖아요.”
“그야…….”
“핑계인 거죠? 내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대놓고 거절하기 민망하니 정중하게 돌려서 말하는 거잖아요.”
어쩌면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저를 거절하고는 싶으나 불이익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공을 들여 설명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차주완 대표가 단단히 잘못 본 거였다. 그는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하고 나온 차림새부터 불량한 재벌 3세라고 자랑하는 꼴이었나? 준희는 아차 싶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런 꼴로 나온 마당에 제가 할 말이 없기는 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덧붙이자면, 나는 보통 이런 자리는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강준희 씨가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짐작컨대.”
“…….”
“강준희 씨도 피차 같은 처지였던 것 아닙니까?”
그는 말문을 막는 데 소질이 있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비아냥거리다니 반칙이었다. 그렇지만 준희는 왜인지 쉽게 항의할 수 없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지율이 본다면 놀라 자빠질 것이 분명했다.
“내가 강준희 씨를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이 자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분명히 실망했을 겁니다. 이런 자리가 마뜩지 않은 거라면 강욱진 회장님께 본인의 소신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누가 이런 자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준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맞은편의 남자가 묘하게 달리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드물게 진중한 태도를 가진 그가 꼭 단단한 고목처럼 느껴졌다. 그의 체향이 그러하듯이.
“제가 차인 걸로 하겠습니다.”
“…….”
“구색도 이쯤 맞췄으면 충분할 겁니다.”
주완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의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가 반도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쩌지. 이대로 보내고 말아?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려는 상대의 태도가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저기요, 주완 씨.”
“할 말이 남았나요?”
이윽고 포지션을 정한 준희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바르게 앉으며 동그란 눈을 천연덕스럽게 깜빡거렸다. 자리를 정리하려던 주완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준희는 그 균열 없는 얼굴에 일말의 당혹감이라도 서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죠. 저는 그쪽이 마음에 드는데요.”
“…….”
“사실 보자마자 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뭐 조금…… 캐주얼하게 나온 걸 후회하기도 했고요. 식사를 마친 지금까지도, 저는 주완 씨한테 흥미가 있어요.”
준희는 누군가를 유혹하는 데 있어 돌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눈치를 줘도 넘어오지 않는 상대에게는 기꺼이 직구를 날렸다. 물론 그의 전적에 패배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안 넘어올 것 같은 나무에는 도끼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주완은 이채 어린 준희의 눈동자를 한참이고 마주 보았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준희는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주완은 결단이 선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형편없나요?”
준희는 부러 그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주완은 쉽게 현혹되지 않았다.
“아뇨. 솔직히 말하자면 강준희 씨는 내 취향에 가깝습니다. 얼굴도, 몸도, 향기도.”
“…….”
도리어 역습했다. 눈가에 머무르던 남자의 시선이 입술로 떨어지고, 어깨를 훑어 몸을 한 바퀴 휘감는 동안 준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강준희 씨는 날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입꼬리를 당겨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유려하게 책임을 전가했다. 반칙이었다. 이건 신사답지 못한 태도였다. 준희는 식어 빠진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며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물론 불가능했다.
“그건 제가 판단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이번에는 주완 쪽에서 등받이에 몸을 느슨히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자세를 조금쯤 바꾸는 것만으로도 정중하던 인상이 흐트러지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일반적인 연애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결혼과는 거리가 멀죠.”
“그게 무슨…….”
“온건치 못한 성적 취향의 소유자라고 설명한다면, 이해가 빠를까요? 물론 도덕적 수위를 넘을 만큼 질이 나쁘거나 과격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판단하기에 따라 누군가는 나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한 건.”
“…….”
“나를 감당하기에 강준희 씨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옷차림이 증명하듯.”
오히려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스펙트럼이 넓을 거라고 생각할 순 없는 걸까? 좀처럼 가늠이 되질 않아 준희가 미간을 약간 모았다.
“어떤 취향인지 알려 줄 순 없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설명은 이미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사생활 침해라고 여겨지네요.”
그러나 주완은 단호했다. 그는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준희의 어깨가 힘을 잃고 늘어졌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선을 긋는데 초면에 지나치게 매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드디어 떠오른 단념의 빛을 발견한 주완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죠.”
확인 사살이었다.
***
“다시 말해 차였다는 거죠?”
“다시 말하지 마.”
“후식으로 나온 음료를 다 마시기도 전에?”
“즐거워 보인다?”
속이 끓었다. 안전상의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자꾸만 히죽거리는 지율의 멱살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준희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지만 지율은 그런 것에 연연하는 상냥한 비서가 아니었다. 지율은 부드럽게 운전대를 꺾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깽판 놓지 말아 달라던 부탁을 깡그리 무시한 채 재킷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시정잡배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나타난 제 도련님을 발견했을 땐 하늘이 노랗게 물드는 줄 알았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꼴좋다고 느껴질 수밖에. 세상은 아직 살 만하구나. 지율은 콧노래를 불렀다.
고급 주택가의 한적하고 깔끔한 거리가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익숙한 그림의 동네였다. 준희는 창문을 약간 열고 붉게 물들어 가는 푸른빛의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인생에 그런 경험도 한 번쯤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동안 도련님한테 차인 백한 명의 남자들이 억울하고 원통해서 구천을 떠도는 일은 없을 거 아니에요.”
“백한 명이라니 그건 어디서 나온 수치야?”
“일일이 세어 본 건 아니지만 얼추 비슷할 텐데 대충 넘어가세요.”
이놈이고 저놈이고……. 오늘따라 여러 명의 손아귀에서 쥐락펴락당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준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앞좌석을 발로 쾅 걷어찼다. “으이구, 저 성질머리.” 중얼중얼 불평하는 지율의 목소리가 들리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집 앞에 이르렀을 무렵 지율이 룸 미러로 준희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렇지만 드문 일이기는 하네. 그쪽에선 도련님이 왜 싫대요?”
악의 없는 질문이 심장을 관통한다. 헛웃음이 터졌다. 준희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사람이 날 왜 싫어해?”
“그렇지만 차이셨잖아요?”
눈치 없는 질문과 함께 차가 문 앞에 정차했다. 사납게 노려보는 까닭에 지율의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지율은 열없이 뒷덜미를 긁적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강준희 씨는 내 취향에 가깝습니다. 얼굴도, 몸도, 향기도.
거리낌 없이 희망 고문 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했다. 준희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느슨하게 풀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자유분방해 보여서 자기랑은 맞지 않을 것 같댔어. 그뿐이야.”
“역시 성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한 시간 만에 그걸 간파하다니.”
“넌 누구 편이냐, 진짜?”
“이기는 사람 우리 편이요.”
“허……, 의리 없는 놈.”
지율은 말랑한 비난에 면역이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안전벨트를 풀고 준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 꽤나 마음에 들었나 봐요?”
“뭐? 누가?”
“도련님이 차주완 대표한테요?”
“무슨 헛소리야. 나 간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화가 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원래 나가기 싫어했던 자리고, 그쪽에선 본인이 차인 걸로 하겠다면서 도련님 면도 세워 줬다면서요.”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추리에 준희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나 저를 지그시 응시하는 지율의 눈길을 끝내 극복해 내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한번 자 보고 싶었던 것뿐이거든?”
“맞다, 발기 부전. 병원 안 가도 돼요? 오늘은 이미 늦었고, 내일 예약 잡아 둘까요?”
“아니, 됐어.”
쾅, 차 문이 거칠게 닫혔다. 지율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킬킬거린 뒤에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
***
지잉, 지이이잉.
휴대 전화 진동 소리가 넓은 방의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러나 침대에 드러누운 준희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씩 침대 바깥으로 내놓은 다리를 허공에 휘저어 댈 뿐이었다.
툭, 발끝에서 달랑거리던 실내용 슬리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릿했던 동공이 그제야 또렷해졌다. 그는 여전히 질리도록 울고 있는 휴대 전화를 들어 올렸다. 전화의 발신인은 유승훈이었다. 사실, 확인하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야, 강준희.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짜증 섞인 목소리가 쏟아졌다. 준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답 안 해? 씨발.]
“욕하지 마.”
[너 같으면 욕 안 하게 생겼…… 하, 그래. 일단 그건 됐고. 취소해.]
“뭐를.”
[헤어지자던 거 취소하라고!]
그래, 휴대 전화에 불나게 부재중 전화를 쌓은 이유야 뻔하지. 신선하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보통 이별을 고하고 나면 상대는 준희의 얼굴이 아쉬워서, 몸이 아쉬워서, 재력이 아쉬워서 적어도 한 번씩은 그를 붙잡고 보았다.
준희는 피곤이 내려앉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번복할 생각 없어.”
[하, 준희야. 강준희. 집 앞으로 갈게. 얼굴 보고 말해.]
“그만 집착해.”
[야, 너는! 아오, 씨발. 그래, 너 잘났다. 잘났는데…… 남자 친구가 선 좀 안 봤으면 좋겠다는 게, 그게 그렇게 너한텐 집착이냐?]
“아니, 내 마음. 식어 버린 내 마음에 그만 집착하라고.”
그러자 휴대 전화 너머의 승훈이 허, 황당한 듯 숨을 뱉었다.
[너 진짜로 지금 내 태도만 집착이라고 생각해? 웃기지 마. 자주 연락하는 것도, 그만큼 연락해 달라는 것도 버거워했잖아. 아니야?]
“그게…….”
[씨발, 그것도 안 하려면 연애 왜 하냐?]
“그, 승훈아.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한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했다. 어른스러운 연애를 위해서는 반드시 고쳐야 할 태도였다. 준희는 누운 채 턱을 긁적이며 10초쯤 반성했다.
“야, 그보다 나 물어볼 게 있어.”
[뭐, 뭔데.]
준희는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궁금한 게 있었다.
“온건치 못한 성적 취향…… 이라고 하면, 뭘 말하는 걸까?”
[…….]
“응?”
[도대체 이건 갑자기 무슨 전개…….]
지율의 말을 빌려 백한 명이나 되는 남자를 만나는 동안 특이한 페티시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제복 판타지야 흔한 수준이었고, 발목에 성감대가 있다거나 유난히 손가락에 집착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비난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키스를 절대 하지 못하는 강박증이 있다든지.’
그렇지만 그걸 성적 취향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준희의 추리는 번번이 상식선에서 가로막혔다.
[그거야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성향자들이 있을 테니…… 잠깐, 너 이거 누구 얘긴데?]
“…….”
[씨발, 강준희. 너, 너……, 바람피워? 어? 야, 너 나와. 나오라고, 개새끼야!]
“보통 끝난 관계에 바람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
[강준희!]
울분에 찬 고함 소리에 준희는 서둘러 통화를 종료시켰다. 그는 휴대 전화의 전원까지 꺼 버린 뒤에 다시 침대 위로 등을 뉘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직까진 결혼 생각이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고 한들 나는 강준희 씨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영 본 적 없는 유형이란 말이지. 그저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한 이야기일까? 준희는 점차 나른해지는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으며 생각했다.
대개의 경우, 특히나 선 자리에서는, 준희에게서 취할 것을 먼저 생각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하다. 비즈니스를 하러 나왔으니 손해 보기는 싫은 것이다. 그는 사랑에 대한 다디단 꿈을 가지고 있는 어린애가 아니었으므로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차주완은…… 달랐다. 준희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기억 속에서 이어지는 장면은 저의 옷차림에서 보여지는 가벼운 태도를 질책하는 듯한 서늘한 눈빛이었다. 쉽게 고집을 피우거나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해 보이던 남자의 기백을 떠올리며 준희는 숨을 길게 뱉어 냈다.
“아…….”
넓고 각진 어깨와 두툼해 보이던 팔뚝, 구태여 벗겨 보지 않아도 탄탄할 것이 분명한 보디라인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간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아래가 착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엄격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그는 침대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손목을 채우던 시계를 푸르고, 재킷을 단번에 벗어 던지며 흥분한 늑대처럼 달려들려나. 준희는 상상 속 남자를 제멋대로 움직여 대며 느슨한 바지춤 아래로 손을 넣었다. 온건하지 못하다는 성적 취향은 어쩌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으응…….”
남자의 단단한 악력에 손목을 잡힌 채 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상상을 했다. 상대를 향해 활짝 열린 아래로 살을 겹치며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몰아붙여지는 것이다. 성감대가 비벼질 때마다 ‘좋아요, 주완 씨. 거기 더…… 더 세게…….’ 애원하고 나면, 이성의 끈이 풀려 버린 남자가 아주 격렬하게 허리 짓을…….
“흣, 으응.”
질끈 감은 눈앞으로 한 편의 19금 드라마가 펼쳐졌다. 장면이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준희는 꼿꼿이 발기한 제 성기를 손에 쥔 채 마구 문지르고 흔들었다. 허벅지가 절로 벌어지고 심장이 터질 듯 세차게 뛰었다. 달뜬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것은 투명한 선액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미끈거리는 엄지로 귀두를 문질러 대자 엉덩이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절정에 이를수록 온몸의 촉감이 잔뜩 예민해졌다. 하아, 하아……. 그는 가쁜 숨과 함께 사정했다.
그는 희뿌연 체액으로 뒤덮인 손바닥을 꺼내 보며 숨을 골랐다. 엉덩이 골 사이가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뒤를 쑤셔 자위하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왠지 청승맞은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준희는 옆에 놓인 갑 티슈에서 휴지 몇 장을 뽑아 오른손을 정리했다. 여전히 뜨거운 호흡이 들락거렸다. 처음 만난 사이에 딸감으로 소비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약간의 죄책감이 일었지만 금세 지워 버렸다. 이쯤은 사소한 복수라고 해 두지, 뭐. 그는 그렇게 씹어 삼키며 더럽혀진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다음 날 밤이 되자마자 클럽을 찾았다. 자주 가던 클럽에는 어쩐지 유승훈이 버티고 있을 것 같아서, 지인 추천을 받아 오픈한 지 오래되지 않은 업장을 택했다. 새로 세워진 5성급 고층 호텔 지하에 위치하는 클럽이었다. 최근 내로라하는 DJ들이 앞다투어 초빙되어 호평을 얻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프라이빗하게 나누어진 공간이 많아서 편히 놀기엔 딱이라고, 지인은 칭찬했다.
업장에서 가장 좋은 룸을 잡고 나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알음알음 인맥을 타고 준희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일일이 몸을 부딪히고 다니며 상대가 알파인지 베타인지, 게이인지 헤테로인지 확인하는 것보다야 그편이 단순하고 수월했다.
그가 룸에 들어섰을 때, 그곳은 이미 파티 분위기였다. 허락 받지 않고 딴 샴페인과 위스키들이 테이블 위로 줄을 지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준희를 발견한 낯선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그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유리벽 밖으로 눈 아프게 현란한 조명이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자마자 듬직한 남자가 옆자리를 채웠다. 머스크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향수 냄새는 아닌 것 같고, 대충 알파나 오메가겠지. 준희는 고개를 돌려 외양을 위아래로 느리게 훑으며 그가 건넨 샴페인 잔을 받아 들었다.
“언제 오시나 했어요. 오늘 주인공이시잖아요.”
“주인공? 오늘 내 생일 아닌데?”
“헤어지셨다고 들었는데? 이거 이별 파티 아니에요?”
“아……, 이별이 뭐라고 파티씩이나 해요.”
그보다는 간만에 성욕이 당겼으니 흐름을 놓치지 말고 새로운 남자나 만나야지 싶던 참이었다. 그의 인생에 차주완 같은 건 있으나 없으나 하등 상관없는 일이라고, 증명해 보이고도 싶었다. 유치한 일탈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희는 건조하게 대답하며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지나치게 달지 않고 적당히 상큼한 맛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옆자리의 남자는 슬쩍 더 붙어 앉으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런 쿨한 태도.”
지금에야 뭔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을까. 노골적인 호감에 준희는 자조적으로 픽 웃었다. 다시금 눈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언뜻 유명한 배우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는 짙은 쌍꺼풀의 소유자였다. 어깨도 넓고 다리도 길어 보였다.
그윽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남자가 별안간 윙크했다. 제법 귀여운 짓까지 하네. 그래, 이 정도 외모에 이 정도 아양이면 속는 셈치고 넘어가 줄 수도 있었다. 차주완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준희는 손에 들린 샴페인을 단숨에 비웠다. 그걸 청신호라고 생각했는지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준희는 그의 손에 빈 샴페인 잔을 들려 주며 예의상 싱긋 웃었다.
“이것 좀 치워 줄래요? 테이블에 자리가 없어 보여서.”
그는 양주 병으로 가득 찬 테이블을 턱짓하며 말했다. 명백한 거절 의사에 남자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속으로는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해?’ 열불이 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어제 선 자리에서 준희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가 불쾌해하며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지인이 준희에게 접근하며 물었다.
“쟤 별로야? 이 바닥에서 인기 많은데? 잘생기지 않았어?”
“눈이 별로야.”
“눈?”
“쌍꺼풀. 아주 느끼하게 생겼어.”
“……네가 원래 쌍꺼풀 있는 남자를 싫어했던가?”
기실 잘생기기만 한다면야 쌍꺼풀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준희는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져 있던 주완의 날카로운 눈매를 떠올리며 입을 씰룩거렸다.
룸 안 남자들을 죄다 진득하게 훑어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얼굴이 없었다. 지인은 아예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쟤는 어때. 쟤는?” 하며 사냥을 거들었지만 헛수고였다. 한참이고 준희 옆에 붙어 종알거리던 지인은 기어이 “오늘 물 좋은데 왜 그러냐?”며 그를 타박했다.
“나 망한 것 같다.”
“뭐?”
“왜 이렇게 다 성에 안 차냐.”
“마음에 드는 애가 없어?”
“이게 비단 오늘만의 일일까? 앞으로 안 이럴 거라는 보장이 있냐고…….”
“취했냐?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좀 해.”
그러나 더 설명하고 말고 할 기운도 들지 않았다. 준희는 연거푸 마른세수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려고?”
지인이 묻자 그는 귀찮다는 듯 손 인사만 하고는 룸을 벗어났다.
클럽을 아주 벗어나기 전 입구와 가까운 화장실을 찾았던 건 어쩌면 운명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세면대 앞에 이르러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남자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차주완 대표 인터뷰 영상 봤어?”
“당연하지. 다 입었는데도 섹시하더라, 야. 같은 인간 맞냐?”
“미친 소리 작작 해라. 당연히 같은 인간 아니지. 어디 베타가 우성 알파에 비빌 수나 있겠냐.”
준희는 반사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숨을 죽였다. 귀를 기울이기 위함이었다.
“오늘 클럽에서 볼 수 있으려나.”
“여기 자주 온대?”
“자주는 아니고 가끔, 종종? 파트너 찾으러 오는 모양이던데.”
파트너……. 섹스 파트너를 말하는 건가. 준희는 공연히 신경질적으로 핸드 티슈를 몇 장이고 뽑아내 물기를 닦았다.
***
“준희야.”
고개가 한 차례 방아를 찧었다.
“강준희.”
흐려지던 시야는 까맣게 물들었다가 도로 밝아지길 반복했다.
“아가?”
흔들리던 머리통이 크게 휘청였을 때에야 준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의 할아버지, 한울 기업 총수인 강욱진 회장이 못마땅한 낯을 하고 혀를 쯔쯔 찼다. 준희는 그제야 제가 앉아 졸던 곳이 밥상머리 앞임을 겨우 상기했다.
강욱진 회장의 걱정 어린 한숨이 이어졌다. 준희는 떨어트릴 뻔했던 포크를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털었다. 결국 지난밤에는 일찍 들어오고도 새벽빛이 비추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래, 차주완 때문이었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여도 잠이 오질 않아서 태블릿 PC를 꺼내 든 그는 홀린 듯이 차주완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았다. 영상 속 주완은 핏 좋은 정장을 입고, 일인용 소파에 느슨히 기대어 앉아 인터뷰어를 응시하고 있었다. 클럽 화장실에서 떠들던 남자들의 말을 빌려 그는 ‘다 입었는데도 섹시’했다.
“이놈은 이래서 싫고, 저놈은 저래서 싫고. 할아비가 언제까지 네 변죽에 맞춰 줘야 해?”
강욱진 회장이 지난밤의 영상을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있는 준희를 꾸짖었다.
각자 맡은 계열사 경영으로 바쁜 누나들은 전부 출가하고 넓은 집에 남은 가족이라곤 강욱진 회장과 준희 둘뿐이었다. 아직까지 경영에서 물러나지 않고 왕성히 활동하는 할아버지 덕에 준희는 그 집에 홀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막냇손자가 눈에 밟힌 나머지 강욱진 회장은 일이 급하지 않은 날엔 꼭 그를 불러 앉혀 놓고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오래된 습관 덕에 아침에 일찍 눈뜨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어제처럼 쉽게 잠들지 못했던 다음 날의 경우엔 예외였다. 신선한 블루베리를 콕 찍어 입에 넣으며 준희는 애써 졸음을 쫓았다.
“어지간한 놈으론 성이 차지 않는 것 같아서 기껏 괜찮은 녀석을 설득하고 설득해서 앉혀 놨더니, 그걸 홀랑 거절해?”
“거절한다고 거절당해 준 그 남자도 문제죠.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는 뜻이잖아요.”
“이 녀석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야?”
책임을 애써 그쪽으로 돌리려고 시도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한 번을 호락호락하게 넘어간 적 없었던 열두 번의 선 자리 역사 때문일 거다. 그걸 알면서도 준희는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꽤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해 어쩌면 진지한 연애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준희는 요거트를 당겨 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차주완 대표,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언젠가 크게 쓸 인사로 점찍어 뒀었는데 말이야. 이 기회에 관계를 맺어 두면 좋았을 터인데…….”
강욱진 회장은 크게 아쉬워하며 뜨거운 커피를 입 안에 들이부었다.
“뭐,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요?”
“너처럼 겉멋만 든 요즘 애들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진중하지. 사려도 깊고. 무엇보다 영리하고 유능한 녀석이야. 왜, 이제 와서 아쉬워? 할아비가 자리 한 번 더 마련해 줘?”
“됐어요. 연락을 해도 내가 해야지, 할아버지가 거기 왜 끼어요?”
“네놈이 제대로 안 하니까 말이지, 네놈이!”
쾅. 노익장의 두툼한 손이 테이블을 때렸지만 준희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래 봐야 제 할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가족의 애정만으로는 허한 마음이 풍만하게 채워지질 않는 걸까, 준희는 이따금씩 그게 궁금했다. 어쩌면 채워진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지금과 같았을지도. 넓고 쓸쓸한 저택에서 외로이 자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준희는 체념했다.
“이번엔 또 누굴 데려다 앉히나……, 쯧.”
“저 또 선봐요?”
“하여간 옆에 멀쩡한 놈 들어앉힐 때까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이놈아.”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리듯 그릇 위에 내려놓았다. 고리타분한 자리를 떠올리니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딱딱한 자리는 적성에 안 맞는단 말이에요. 두드러기 날 것 같다고요.”
“언제까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거냐, 녀석아. 어느 인생이 그렇다든?”
“차라리 차주완 대표를 한 번 더 만나 볼게요.”
골치 아파 보이던 강욱진 회장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정말이냐?” 하고 재차 묻기까지 했다. 준희는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이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그는 차주완 대표를 찾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지난밤 클럽에서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방탕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려면, 아니, 설령 찍는다고 하더라도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서는 병원이 아니라 주완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노하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대는 편이 여러모로 합리적일 것이다. 어쩐지 기분이 산뜻해졌다.
“잘해, 이놈아. 잘.”
그래서인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잔소리도 지나치게 느껴지지 않았다. 준희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 강욱진 회장이 출근하고 난 조용한 집에서는 어쩐지 낮잠이 솔솔 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결국 지난밤과 같은 시간, 준희는 다시금 같은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정확하게 같다고 하기에는 어제와 미묘하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그는 전날의 룸으로 향하지 않고 클럽 입구가 잘 보이는 바에 자리를 잡았다. 차주완이 방문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열렬한 팬이야, 뭐야.’
스스로의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질척거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면 우연을 가장하는 편이 나았다. 그는 메뉴에서 적당히 눈에 띄는 이름의 칵테일을 골라 주문하고는 하릴없이 턱을 괴었다.
무작정 기다리면 그가 나타나긴 할까? 의아했지만 지금 당장은 이 방법 말고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바텐더가 완성된 칵테일을 준희의 앞으로 밀어 주며 물었다. 도서관에 온 것과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리라. 준희는 칵테일로 마른입을 축였다.
“차주완 대표 자주 와요?”
“아, 그쪽도 차주완 대표 기다리는구나.”
그쪽‘도’라니. 예기치 못한 대답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바텐더는 흥미로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의 눈에는 곰살맞은 미소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준희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바텐더가 어쩐지 굉장히 얄밉게 느껴졌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종종 있는 편이죠.”
“인기 많아요?”
“그거야 기다리는 사람이 알아야지. 나한테 물어봐요?”
바텐더는 빈 유리잔을 당겨 행주로 물기를 닦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조언하듯 덧붙였다.
“여기서 죽쳐 봐야 못 만나요.”
기다리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힘 빠지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하여간 어지간히 비싼 남자인 모양이었다. 준희는 반 정도 되는 양의 칵테일을 단번에 입 속에 털어 넣었다.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지난날 들었던 뒷소문도 그렇고, 클럽에 자주 드나드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운명처럼 마주칠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올 장소가 이곳밖에는 없었는걸.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에 바텐더는 다른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칵테일 한 잔을 비우고 다음 칵테일을 주문해 반쯤 마시는 동안 클럽의 분위기는 순조롭게 무르익어 갔다. 그에 반비례하게 다소 즉흥적이었던 준희의 패기는 서서히 식었다. 모두가 몸을 흔들고 하룻밤 상대를 찾아 눈을 번득이는 공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확실히 지루한 일이었다.
결국 자정이 되기도 전에 그는 자리를 털었다. 지율에게 연락해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하니 “그러게 너무 무식한 작전이었다니까요.”라는 잔소리가 돌아왔다. 준희는 씁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기 위해 호텔의 1층 로비로 향했다.
자존심 센 주인을 만나 몸이 고생이었다. 등받이도 없는 바에 앉아 벌을 서느라 노곤해진 몸을 호텔 로비의 포근한 소파에 반쯤 뉘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때였다. 준희는 호텔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낯익은 남자를 발견했다. 제법 거리가 되는 탓에 선명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이목구비와 탄탄하면서도 아름다운 보디라인만큼은 확실히 보였다. 그는 그 남자가 차주완 대표임을 확신했다.
준희는 앉은 채로 슬쩍 몸을 낮췄다. 저쪽에서 이쪽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사이 손에 쥐고 있던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준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도련님, 호텔 입구에 차 대기시켰어요. 나오세요.]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확인할 거 생겼어.”
[지금까진 뭐 하시고요?]
“방금 생겼어. 끊는다.”
남자를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준희는 통화를 종료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엘리베이터 가까이로 다가갔다. 계기판에 적힌 숫자는 쉼 없이 올라가던 끝에 19층에서 멈췄다. 그는 반사적으로 상행 버튼을 눌렀다.
***
따뜻한 계열의 조명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살롱의 나무 바닥 위로 구둣발 소리가 짓이겨졌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던 대기실을 나서면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되는 공간은 은밀한 숍(Shop)이었다. 나무로 정교하게 짜여진 바닥재에서는 삐걱삐걱 뒤틀린 소리가 나곤 했는데, 아마도 오너의 취향인 듯했다. 마치 오래된 교실 바닥을 밟는 듯한 그 느낌을 주완은 싫어하지 않았다.
유리로 된 전시장이 숍의 벽면을 두르고 있었으며, 커다란 진열대는 널찍이 간격을 둔 채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성인 용품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진열되어 있는 도구들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느리게 걸으며 벽면을 구경하던 주완은 특정 섹션에 이르러 멈춰 섰다.
뒤따르던 직원이 주완의 눈길이 이른 진열장으로 다가가 가늘고 기다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직원이 주완의 손에 들려 준 것은 케인(Cane)이라는 스팽킹 도구였다. SM 성향자인 그가 플레이할 때 선호하는 도구들 중 하나였다. 하얗고 여린 살 위로 붉고 선명한 자국을 남길 수 있다는 미관적인 이점도 이점이거니와 무엇보다 상대에게 확실한 고통을 심어 줄 수 있는 도구였다.
그는 한쪽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허공에다 케인을 휘둘러 보았다. 두께가 적당하고 탄성이 좋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꽤나 위협적으로 들렸다. 군더더기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들고 있던 케인을 직원에게 돌려주는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룸으로 올려 드릴까요?”
“부탁합니다.”
심드렁한 반응과는 달리 테스팅은 구매로 이어졌다. 케인을 자리로 돌려 둔 직원은 제품명을 눈으로 암기했다. 호텔 펜트하우스 고객이기도 한 주완의 물건은 구매하는 족족 그리로 올려 보내졌다.
케인을 지나 패들(Paddle)과 크롭(Crop)이 진열된 긴 장식장을 훑어보았지만 감흥이 없었다. 파트너가 부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퍽퍽하고 지루한 삶에 작은 흥밋거리라도 채워 보고자 짬을 내어 살롱에 방문했지만 무료함은 가시지 않았다.
‘너무 오래 굶었나.’
주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열대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첫 번째 진열장에는 다양한 모양의 딜도와 바이브레이터가, 그 맞은편에는 애널 플러그들이 각양각색의 모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진열대와 진열대의 사이로 플레이용으로 개조된 가구들이 예술 작품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전 파트너와 관계를 정리하고도 다음 상대를 찾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 이유는 회사가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생적으로 외로움에 무딘 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우성 알파인 이상 러트사이클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처럼 잦지는 않지만 연례행사처럼 돌아오는 알파의 러트사이클 또한 무시할 것은 못 되었다. 러트사이클이 다가올수록 해소되지 않은 성욕은 그를 갈증 나게 만들 것이다. 억제제는 발작적인 발정을 다스리게 해 줄 뿐, 그 시기의 감정과 욕망까지 통제하진 못했다. 게다가…….
-그런데 어쩌죠. 저는 그쪽이 마음에 드는데요.
그날의 기억이 묘하게 주완의 욕망을 자극했다. 왜일까. 선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단정치 못한 꼴에, 자신감이 일렁이던 눈빛까지. 무엇 하나 달가운 구석이 없던 남자였다. 강준희는 재계의 거물인 강욱진 회장의 막냇손자이자 곱게 자랐을 것이 분명한 우성 오메가였다.
그렇지만 옅은 빛깔의 투명한 눈동자와 붉은 입술,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자국이 남을 듯한 부드러운 살성의 흰 피부, 낭창해 보이지만 동시에 강단 있어 보이는 몸, 그리고 무엇보다 식당의 룸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을 물들이던 짙은 장미꽃 향기는 쉽게 잊지 못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얼굴도, 몸도, 향기도 제 취향에 가깝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그래 봐야 그림의 떡이었다. 그 자유분방한 남자는 도무지 누군가에게 길들여져 본 적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 말해 가학적이고 통제적인 주완의 성향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남자였다. 여러모로 아쉽기는 했지만, 그는 날뛰는 망아지를 데려다 길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귀찮고 수고로웠다.
“계산서는 룸에 달아 놓겠습니다, 회원님.”
“예, 그렇게 하세요.”
케인 외에도 몇 가지 장난감을 룸으로 올려 보낸 뒤에야 주완은 살롱의 출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강준희의 잔상을 털어 버리려고 노력하면서.
***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1층으로 돌아와 입을 벌리고 준희를 집어삼켰다. 커다란 철제 박스는 그를 순식간에 19층으로 옮겨 주었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렸을 때, 준희는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붉은 빛깔의 카펫이 발자국 소리를 흡수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주 프라이빗한 대기실이었고, 그를 맞이한 것은 중세풍 턱시도를 입은 안내 직원이었다. 작은 가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직원은 정중하게 인사하며 그를 맞이했다.
대기실의 사방에는 벨벳 천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튼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인 듯했다. 대기실치고 꽤 넓은 공간은 또다시 커튼으로 이따금씩 나뉘어 있었다. 칸이 나뉜 공간마다 작은 티 테이블과 1인용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준희는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주변을 슬그머니 흘끔거렸다.
“회원 확인 부탁드립니다. 코드나 회원 카드를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회원…… 이라면 따로 가입이 필요한 건가요?”
“예, 저희 살롱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프라이빗 살롱이기 때문에 회원이 아니면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머리를 굴렸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까지는 포기하더라도 차주완이 방문한 이 장소의 비밀을 알아내는 수확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공간이 주는 은밀한 분위기로 보아 이곳은 그가 말한 ‘온건치 못한 성적 취향’과 맞닿아 있는 장소임이 분명했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리석으로 된 티 테이블의 표면을 톡톡 두드리던 그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제가 맞게 찾아온 것 같네요.”
회원 심사에 어떠한 조건들이 들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준희는 태어나 그런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경험이 없었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턱을 끌어 올리며 덧붙였다.
“비서를 통해 처리하고 싶은데, 가입에 필요한 자료를 넘겨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정색 명함을 꺼내 준희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많은 정보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가명일 것이 분명한 직원의 이름과 연락처 정도가 심플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비서 통해 연락 주시면 신속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네.”
“나가시는 길을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추방이었다.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직원은 앞서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 하행 버튼을 손수 눌러 주었다. 당장에라도 대기실을 둘러싼 커튼을 헤치고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공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소란을 피워 봐야 득 될 것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계기판의 숫자가 19와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한 직원은 묵례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준희는 아무도 없는 대기실의 모습을 흘끗 훑었다. 이윽고 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강준희?”
으응? 준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엘리베이터 안쪽에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몸을 떼어 내고 있었다. 남자는 한눈에 이쪽을 알아보고도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가 얼을 타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로 닫혔다. 아니,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다시 열렸다. 강준희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문 너머의 남자를 응시했다. 아는 남자였다. 고작 며칠 전에 그에게 차였던 남자, 유승훈이었다.
경계하며 뒤로 슬쩍 물러서려 했지만 팔을 잡혔다. 승훈은 우악스럽게 준희를 끌어당겨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쳤다. 딱딱한 벽에 등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런 데서 다 본다?”
이런 데가 어떤 데인데? 준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온건치 못한 성적 취향 어쩌고 하더니 결국 여기서 만날 거였어?”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내려. 난 가려던 참…….”
“진작 말하지 그랬어.”
“뭘?”
“이런 취미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재미있게 놀아 줄 수 있었잖아, 내가.”
승훈은 그를 벽에 몰아붙인 채 팔로 퇴로를 차단하고 조소했다. 이윽고 남자의 두툼한 손이 준희의 뺨을 툭툭 기분 나쁘게 건드렸다. 준희는 이를 악물고 그의 손을 탁 쳐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멱살이 틀어잡혔다.
“이래도 우리 헤어져?”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형용할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물러나고 싶진 않았다. 준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상대를 비웃었다.
“뭘 자꾸 물어? 헤어져. 헤어지자니까? 열 번쯤 들어야 꺼질래?”
그러자 남자의 손이 준희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아악, 야!”
두피가 송두리째 뜯겨 나갈 것처럼 아파 발악하며 팔뚝을 붙잡았지만 유승훈은 그보다 체격이 훨씬 큰 남자였다. 준희는 그가 어린 시절 유도를 했었다고 자랑스레 떠벌리곤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억지로 마주 보게 된 눈동자에는 전에 없던 광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거 안 놔, 미친 새끼야?”
“그 새끼는 어떻게 해 주는데, 준희야. 나보다 그렇게 잘났어? 어?”
“그래, 그렇게까지 잘났어. 이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듣겠냐?”
바람이 났다고 확신하는 승훈의 위로 기름을 들이부었다. 두피가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었지만 적당히 어르고 달래며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승훈이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에 저절로 힘이 풀려 갈 때였다.
짜악. 날카로운 마찰 음과 함께 준희의 고개가 돌아갔다. 뺨은 물론이고 귓바퀴까지 얼얼해지는 매서운 손찌검이었다. 준희는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맞아 본 경험이 없었다.
“하…….”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
“왜 이렇게 기어올라? 여기 우리 둘뿐이잖아, 준희야.”
그는 준희의 턱을 붙들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잠시 멎어 있던 숨이 가파르게 입술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거칠게 호흡하고 있는 준희를 마주 보던 승훈은 터진 입술 위로 엄지손가락을 쓸었다. 투박한 손놀림에 준희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처음 느끼는 공포에 쉽게 저항할 수 없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봐.”
승훈은 조소했다.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이번에는 목울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큭.”
본능적으로 손톱을 세워 손등을 긁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도리어 목을 움킨 남자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갈 뿐이었다. 시야가 눈물로 흐릿하게 물들었다.
“오냐오냐하는 것보다 이런 취급이 더 어울리는 개새끼인 줄 몰랐지.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하게 됐네.”
“흐읍, 이거, 놓…….”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잘해 줄게. 어?”
머리가 핑 돌았다. 구토감이 일었으며 귓속에는 이명이 울렸다. 숨을 쉬기 위해 남자의 팔을 틀어쥐고 발돋움을 해 보았지만 나아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가 고통스러워할수록 승훈은 잔인하게 이죽일 뿐이었다.
맞아서 부어오른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턱에 고였다. 헉, 허윽. 꼴딱꼴딱 넘어갈 듯 겨우 호흡하며 준희는 승훈의 손아귀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다.
‘누가 좀 구해 줘. 살려 줘…….’
간절한 바람이 목구멍에 걸려 껄떡거렸다. 승훈의 번들거리는 흰자위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흥분 상태인 게 분명했다. 이대로 숨이 넘어가면 어떡하지. 현실적인 공포가 머리를 하얗게 물들였을 때였다.
띵. 작은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읍, 읍, 쿨럭…….”
어쩌면 천국의 문이 열리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 것이 맞는지 목을 쥐고 있는 승훈의 손에서 힘이 약간 풀려 나갔다. 준희는 겨우 되돌아온 숨에 발작하듯 호흡하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
승훈은 엘리베이터 문 너머 누군가에게 이죽이며 양해를 구했다. 준희는 그제야 승훈의 팔을 걷어 내며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간신히 또렷해진 시야에 입구를 막아서고 있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문 밖에 서 있는 남자는 차주완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꼴로는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피차 여기 회원이면 알 거 아닙니까. 협조 좀 해 주죠.”
자리에 얼어붙은 채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주완에게 승훈이 날카롭게 말했다. 주완은 그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불안정하게 호흡하며 시선을 피하고 있는 준희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자동으로 닫히기 시작했다.
“…….”
꼴이 얼마나 엉망일까. 머릿속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악마 같은 승훈의 얼굴이 다시 준희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투박한 손이 다시 준희의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이 허공에 들어 올려졌을 때였다.
턱, 좁아지던 문틈이 가로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준희는 잔뜩 움츠러든 와중 용기를 내어 엘리베이터 입구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닫히던 문을 잡아 강제로 다시 열리게 만든 장본인은 어김없이 주완이었다. 그는 준희를 곧게 응시하며 물었다.
“강준희 씨. 지금 플레이 중입니까?”
“…….”
“이 상황, 합의된 게 맞냐고 묻는 겁니다.”
‘플레이’니 ‘합의’니, 준희는 그런 것들은 몰랐다. 그저 진중하게 물어 오는 주완의 목소리에 울음이 터졌을 뿐이다. 그는 승훈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주완 씨…….”
“이 개새끼가, 진짜.”
제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시도에 승훈이 반사적으로 준희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포박해 두지는 못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주완이 승훈의 손목을 잡아 세웠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뭐야?”
운동깨나 했다는 승훈을 어렵지 않게 제압한 주완이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어 넘겼다.
“아악!”
단말마적 비명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힘이 풀린 준희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완은 승훈의 머리채를 잡아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 벽에 이마를 짓이기게 만들었다. 쾅, 하는 커다란 소리에 준희가 어깨를 움츠렸다.
다시 한번 쾅, 하고 승훈의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주완의 행동에는 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승훈의 이마를 박살 낸 그는 머리채를 놓아주지 않은 채 눈을 돌려 준희의 상태를 확인했다.
“경찰에 신고하겠습니까?”
승훈의 찢어진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맥을 잃은 몸뚱어리가 주완의 손 아래에서 흐느적거렸다. 준희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완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일을 키우면 언론까지 시끄러워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회사 이미지에 타격이 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자 주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다음 승훈의 머리통을 다시 한번 벽에 내동댕이쳤다. 준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엘리베이터를 울리는 타격 음이 앞의 두 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들렸다.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승훈을 끌어내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보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1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했다.
“괜찮습니까?”
준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주완의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망설이던 준희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주완은 강한 힘으로 준희를 일으켜 세웠다. 발을 디디고도 한 차례 휘청이자, 주완의 손이 준희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어 부축했다.
몸이 가까워지자 상록의 교목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와락 안기고 싶을 만큼 달고 부드러운 향기였다.
“사람을 가려 만나도록 하세요. 회장님께서 걱정하시겠습니다.”
딱딱하고도 걱정스러운 한 마디에 이상하게 심장이 저렸다. 준희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날 주완의 부축을 받아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나오는 준희를 발견한 지율은 경악했다. 넋이 반쯤 나간 준희를 대신해 자초지종을 설명한 건 주완이었다. 주완 시점에서의 설명이었지만 지율은 금세 사태를 파악하고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지율의 차에 준희를 태워 보낸 그는 호텔 입구에 홀로 남아 담배를 태웠다.
내뿜은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날리는 장면을 뒤로한 채 차는 출발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사이드 미러로 지켜보던 것이 그날 준희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는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를 반긴 것은 백색 천장이었다. 블라인드가 드리워진 커다란 창문의 모양과 서걱거리는 이불의 촉감으로 준희는 그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율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강욱진 회장이 유난을 피운 것일 테다. 준희는 손등을 찌르고 있는 링거 바늘을 들여다보며 체념했다. 그에게 할아버지의 호들갑은 익숙했다.
그가 머무르는 VIP 병실은 병원이 아니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로 아늑했다. 침실과 거실이 구분되어 있는 형태였는데, 거실에 TV와 소파 등의 가구들이 놓여 있어 손님 대접이 용이했다. 그러나 잠시 기절 좀 했던 일로 병문안을 올 손님은 없었다. 심부름을 시킨 탓에 그나마 대화 상대가 되어 주던 지율마저 외출 중이었다. 넓은 병실은 지독하게 쓸쓸하고, 또 지루했다.
낮잠도 한계였다. 공연히 하품을 해 보았지만 눈동자는 말똥말똥했다. 준희는 한숨을 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보고 싶다.’
문제였다. 틈이 날 때마다 차주완 대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난생처음 해 보는 경험이 준희는 못내 낯설었다. 그는 손등을 찌르고 있는 링거 바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비타민 수액을 연결해 주고 있는 링거 줄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주치의를 포함해 도합 네 명의 의료진이 걸어 들어왔다. 그렇다고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정돈할 생각은 없었다. 준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의료진을 맞이했다.
“특별한 외상은 없습니다. 그래도 회장님께서 당부하신 만큼, 오신 김에 간단한 검진을 받아 보시는 게…….”
“교수님.”
준희는 그답지 않게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저 제 병명 알 것 같아요. 확실해요.”
“예?”
“상사병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처방해 주세요.”
주치의 왼편 레지던트가 고개를 떨궜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주치의는 헛기침을 해 레지던트에게 짧게 주의를 주곤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강준희 군, 상사병에는 약이 따로 없습니다.”
“억제제 말이에요.”
“……으응?”
예상치 못한 전개에 이번엔 가장 뒷줄에 서 있던 인턴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주치의는 인내했다. 성질 같아서는 ‘그런 헛소리하실 거면 당장 퇴원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싶었지만, 참을 인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하는 법이고 그의 앞에 누워 있는 환자는 병원 대표 이사장이 끔찍이 생각하는 막냇손자였다.
그는 그간 주치의에게서 억제제를 처방받은 적이 드물었다. 성욕을 억제하기보다는 알파를 침대에 끌어들여 해갈해 버리는 쪽을 주로 택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수절하려고요.”
흐읍, 숨을 참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준희는 더없이 진심이었다. 머릿속에서 차주완을 떨쳐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그는 99퍼센트 확신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차주완을 사로잡아야 한다. 기어이 손에 넣고 그의 사랑을 독차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준희 군.”
“네, 교수님.”
“몸에 맞는 억제제를 처방하려면 어차피 간단한 검진은 필요해요. 그러니 오늘은 안정을 취하고 내일 검진을 받은 뒤에 퇴원을 고려해 보죠. 억제제는 퇴원할 때 같이 처방해 줄게요.”
주치의는 평정을 유지하며 준희를 달랬다. 그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준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똑똑. 다시 한번 병실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료진에게는 구원의 소리였다. 그들은 가볍게 묵례한 뒤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벗어났다. 앞다투어 자리를 떠나는 의료진과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온 지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또 교수님 괴롭히셨어요?”
“말이 이상하다? 뭐만 하면 다 내 탓이야?”
“탓할 만한 일을 자꾸 벌이시니까요.”
지율은 가지고 들어온 서류 봉투를 건네며 투덜거렸다.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시키시고.”
불만은. 준희는 지율을 흘겨보며 서류 봉투의 입구를 열었다. 그가 시킨 심부름은 문제의 19층 살롱에 가입하는 일이었다. 살롱의 정체를 모르는 건 준희도 매한가지였으니 지율의 불만을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저는 정말 이런 사생활까지 알기는 싫었거든요.”
“너 전화 오는 거 같은데?”
“하……. 그러게. 받고 올게요.”
마침 요란하게 진동하는 휴대 전화를 핑계로 지율을 내보낸 뒤에야 준희는 마음 편히 서류 봉투에 든 내용물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건 도저히 용도를 파악할 수 없는 검정색의 책자였다. 겉면에는 제목이라든가 살롱의 이름이라든가 하는 기본적인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았다.
준희는 도톰한 표지를 넘겨 보았다. 한 장을 더 넘기고 나니 간략한 약도가 나왔다. 살롱 내부 구조도인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숍(Shop)’이라고 표기된 공간이 가장 넓어 보였다. 숍은 또다시 각각의 제품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체벌 도구, 구속구, 왁싱 용품, 토이, 가구, 의류, 맞춤 제작 용품……. 준희는 약도 위에 쓰여진 작은 글씨를 눈으로 훑었다. 이어 약도가 그려진 한 장의 페이지를 넘기자 ‘Secret Salon for BDSM’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강준희 씨는 날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주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휴대 전화로 ‘BDSM’을 검색했다. BDSM은 구속(Bondage)과 훈육(Discipline), 지배(Dominance)와 굴복(Submission), 가학(Sadism)과 피학(Masochism)을 일컫는 말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었다. 관련된 이미지 항목에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불편한 자세로 구속되어 있는 사진들이 주를 이뤘다.
준희는 더 이상 검색하는 것을 그만두고 책자를 한 장 더 넘겼다. 다음 페이지의 첫 줄에는 ‘보다 정확한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고객님이 원하실 경우에 한하여 설문과 상담을 진행하여 그에 걸맞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성적으로 괴롭힘당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가?”
무언가에 홀린 듯 소리 내어 읽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분별한 정보들은 하나의 관념으로 쉬이 뭉쳐지질 않았다. 이어지는 여러 개의 문항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준희의 시선이 ‘체벌의 의미로 엉덩이를 맞는 것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잠시 멈췄다.
‘체벌’의 의미로 ‘엉덩이를 맞는다’? 어려서도 그런 훈육을 당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서서히 눈꺼풀을 감아 내리고는 훈육의 주체가 차주완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냉정한 표정으로 저의 잘못을 탓하고, 손목을 끌어당겨 엉덩이 위로 매섭게 손찌검하는 차주완을 말이다. 해선 안 될 불순한 생각이라도 품은 양 기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심장께가 조여드는 듯했다.
가만히 숨을 뱉어 내며 눈을 뜨고 남은 문항을 계속 읽어 보려 할 때였다. 지잉, 지이잉. 옆으로 밀어 두었던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호흡을 가다듬은 준희는 책자를 접고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강준희 씨.]
만약 그때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그는 실로 오랫동안 후회했을 것이다. 휴대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히 차주완 대표의 목소리였다. 준희는 너무 놀라 대답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안 들립니까, 강준희 씨?]
“드, 들려요.”
[차주완입니다.]
“네, 아, 어제 일은…….”
그러고 보니 어제는 직접 인사할 겨를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기회가 생긴 김에 말문을 열었지만 이내 가로막혔다.
[기사 봤습니까?]
“네? 무슨 기사요?”
[포털 사이트도 안 봤겠네요.]
무슨 말이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그때 병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며 다급한 기색의 지율이 뛰어 들어왔다. 준희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지율이 입만 벙긋거리며 무어라 신호를 주었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사이 잠깐의 침묵을 깨고 주완이 말했다.
[열애설 말입니다.]
“…….”
[지금 어딥니까? 제가 거기로 가겠습니다.]
***
「[실시간 검색어]
1 차주완 강준희 열애
2 차주완
3 한울 그룹
⋮
6 강준희
7 차주완 강준희 약혼
⋮
9 강욱진」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의 1위부터 10위까지, 그들과 관련되지 않은 검색어가 없었다. ‘핑크빛 기류’, ‘열애 인정하나?’ 등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단 기사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모든 기사에는 호텔 로비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이 버젓이 박혀 있었다. 주완이 준희를 부축하고 있었으므로 그 자세가 꽤나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
전화를 끊은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주완이 병실에 도착했다. 보고 있던 책자는 침대 옆 협탁에 숨겨 놓은 뒤였다. 준희는 손님을 응접할 수 있도록 마련된 소파에 주완과 마주 앉았다.
병실에 들어온 주완은 머리를 포마드로 올려 훤칠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눈썹 뼈에서 콧대로 내려오는 축은 마치 유명 조각가가 빚어 놓은 듯 절경이었다. 지율은 ‘두 분이 먼저 대화하시는 게 맞는 순서일 것 같다’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몸은 좀 어떤가요?”
어쩌면 단순한 안부일지도 모를 그의 걱정 어린 인사에 준희는 더디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사실 입원까지 할 일도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걱정하셔서요.”
“그런 거라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말을 충분히 맞춘 다음 언론에 대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급하게 시간을 냈습니다. 섣부르게 대응했다가는 말이 어긋날 수 있어서. 그렇게 되면 혼란만 가중될 테니까요.”
“아, 으음. 어어…….”
“물론 열애설이야 사실 무근이라고 발표할 테지만, 문제는 우리를 어떤 사이로 소개할 것이냐에 있겠죠.”
아, 그쪽은 기정사실인 건가. 그래, 아닌 건 아닌 거였고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그사이 주완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는 지인이라고 소개하는 겁니다. 그렇게 할 경우 당장은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겠지만, 선을 봤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 후속 보도라도 된다면 수습하기 어려울 겁니다.”
“다른 하나는 뭐죠?”
“알아 가는 단계라고 발표하는 겁니다.”
그는 마치 비즈니스 미팅을 주도하는 사람처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맞선을 본 사이라고 시인하고, 알아 가는 단계이기는 하나 아직 사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대응하면 당장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야 하겠지만 금방 잊혀질 겁니다.”
“둘 다 거짓말이네요.”
“그렇습니다.”
주완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준희는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뭘 기대했던 걸까. 연인이 아닌 사이에 열애설이 터졌다. 쌍방이 재계의 유명 인사인 만큼, 서로의 비즈니스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처리하는 것이 올바른 조치였다.
“혹시 다른 대안을 생각해 두고 있었습니까?”
“아뇨, 저는 열애설이 났다는 것도 방금 접했는데요.”
“내 제안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라.”
석연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이 일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준희는 눈을 굴려 상대의 시선을 피했다. 지인이라고 변명하든 알아 가는 단계라고 시인하든, 일단 대응하고 나면 언론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적인 자리는 당연히 만들기 어려울 테고, 주완을 사로잡을 기회를 만들기란 더 어려울 것이다.
“아니면 사실대로 보도하고 싶습니까?”
망설이는 기색을 읽은 주완이 넌지시 물었다. 준희는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들고 주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쉬움이라곤 묻어나지 않는 건조한 눈을 보니 공연히 설움이 복받쳤다. 준희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사실대로 뭐요. 선을 본 건 사실이지만 차주완이 강준희를 거절했고, 이미 다 지난 일이다. 그렇게요?”
퉁명스러운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 준희를 빤히 바라보던 주완이 이내 입술을 뗐다.
“내가 강준희 씨를 거절했습니까?”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슬쩍 좁히며 말했다.
“맞잖아요. 왜 발뺌해요?”
“글쎄, 왜일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
“우리 그때 정리했지 않나. 내가 차인 걸로 하겠다고.”
아……. 확실히 그랬었다.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그를 대신해서 주완이 말을 이었다.
“선을 본 건 사실이나 이미 강준희가 차주완을 거절한 상태라고 대응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야 앞으로 더 이상 맞선을 볼 일이 없을 테고, 강준희 씨 정도 되는 사람에게 차였다고 한들 이미지에 타격 입을 일도 없겠지.”
“그래도 그건…….”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나는 되도록이면 강준희 씨 의견에 따르고 싶은데.”
“……정말요? 왜요?”
다소 갑작스러운 배려였다. 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주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입원할 일까진 아니었다고 해도, 병원에서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마음이 편치 않네요.”
“…….”
“병문안을 빈손으로 왔으니 위로 선물인 셈이라고 해 두죠.”
인사치레를 하자마자 비즈니스 모드에 들어갔던 주제에, 어느덧 예의 바른 모습으로 돌아와 선의를 베풀다니 반칙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오간 듯한 기분이었다. 이미 그에게 단단히 빠져 있었던 준희로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좋아해요.”
그래, 좋아한다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필터 없이 튀어나온 순수한 감정이 대화의 맥락을 끊었다. 예기치 못한 고백에 주완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물론 당황한 것은 차주완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준희 역시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제 고백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차주완 대표를 사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아마추어처럼 대뜸 고백할 계획은 추호도 없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불리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준희는 반쯤 본능적으로 수습했다.
“……혼나는 거.”
“…….”
“맞는 것도, 괴롭힘당하는 것도요.”
“강준희 씨,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합니까?”
“우리 그냥 만나면 안 돼요?”
그는 마주 앉은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넘어 주완의 허벅지를 덥석 붙잡았다. 몸은 거의 테이블 위로 엉거주춤하게 얹혀졌다. 마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린 모양새였다. 주완은 미동 없이 준희를 내려다보며 침음했다.
“그러면 주완 씨나 나나 이미지에 타격받을 일도 없잖아요. 열애설 인정하면 나도 지루한 선 자리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아도 되고……. 주완 씨가 필요할 때 할아버지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거고요.”
“쇼윈도 연애를 하자는 겁니까, 지금?”
“그보다는 가까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이해관계가 맞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열애설을 인정하고 쇼윈도 커플로서 이득 취할 건 취하고 몸도 섞자는 거냐고 묻는 겁니다.”
사무적으로 들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정리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남자 앞에서는 당당하게 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준희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마주 보며 물었다.
“……안 돼요?”
“그 말은 나랑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소린데.”
주완은 그렇게 대답하며 짧게 한숨 쉬었다. 그러고는 제 허벅지를 쥐고 있는 준희의 손을 치워 내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강준희 씨는 내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없습니다.”
“왜요?”
“나는 경험이 없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사업적으로든 성(性)적으로든.”
이로써 두 번째 거절이었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자리로 돌아가 바로 앉았다. 분한 마음보다는 이대로 협상이 결렬될까 초조한 마음이 더 컸다.
“처음 아니에요.”
“그런 거짓말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그게, 그…… 어제 주완 씨가 날 발견한 게 그 호텔 19층 엘리베이터였잖아요. 그걸론 증명이 안 될까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기나 하고…….”
“BDSM 살롱이잖아요, 거기.”
그 사달이 나기 전에 명함을 얻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천운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는지 주완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준희는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가 없어 불안했다.
지잉, 지이잉.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주완의 휴대 전화가 정적을 깼다. 발신인을 확인한 주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쉬는 편이 좋겠습니다. 환자의 시간을 이렇게 많이 빼앗는 게 아닌데, 실례했습니다.”
“주완 씨…….”
“강준희 씨 의사는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회장님과도 상의를 해야 하고.”
그는 휴대 전화를 내밀어 발신인이 ‘강욱진 회장님’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준희는 그제야 체념하고 어깨를 떨어뜨렸다.
***
병실에서 나온 주완은 강욱진 회장과 짧은 통화 끝에 저녁 약속을 잡았다. 언제까지고 열애설 대응에만 시간을 쏟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길로 회사로 돌아간 그는 밀린 업무에 파묻혔다. 그러나 이따금씩 강준희를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이쪽과는 거리가 먼 남자라고 판단했다. 이쪽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대개 탁한 갈증이 묻어 있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줄 수 있을까, 기대와 근심이 뒤섞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저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강준희는 아니었다. 마주친 시선에 묻어나는 욕망은 의외로 순수하고 투명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재벌 3세들에게서 느껴지는 욕심이나 교만함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슨 사연인지 차림새가 경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맹이는 썩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판단했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접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두 번째로 마주쳤을 때 역시 그가 이쪽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는 금세 접었다. 성향자였다면 그의 성격상 선 자리에서 ‘온건치 못한 성적 취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장 떠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좋아해요. ……혼나는 거. 맞는 것도, 괴롭힘당하는 것도요.
그렇게 말했던 걸까. 결재 서류를 넘겨 보던 주완은 저를 도발하던 준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작게 한숨 쉬었다.
초심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아니면 이쪽의 성향을 눈치채 호기심이 동한 것일지도. 이 바닥에는 단순히 새로운 자극이 궁금해서 기웃대는 바닐라들도 많았다. 그러나 계기가 무엇이 되었든 성가시긴 매한가지였다.
똑똑.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대표실의 문이 두드려졌다. 모습을 나타낸 것은 대표실 직속 비서였다.
“말씀하신 식당에 예약해 두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이만 퇴근해도 좋아요.”
그는 마지막 결재 서류 확인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를 떠나 예약된 식당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그는 고민했다. 무척 성가신 데다가 상성이 맞지 않을 것이 뻔한 상대를 두고 이토록 갈등하게 되다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가벼이 잡은 운전대 위로 손가락이 톡톡 두드려졌다.
-우리 그냥 만나면 안 돼요?
그는 제 허벅지를 붙잡고 애원하다시피 매달려 왔던 강준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울려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천진한 눈망울에 두려움이 일렁이게 만들어 보고도 싶었다. 사디스트이자 도미넌트인 그에게는 위험한 신호였다.
주완의 차는 오래 지나지 않아 한식당 입구에 정차했다. 키를 맡기고 예약된 룸으로 이동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거의 유일하게 존경하는 어른을 만나는 자리임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
“오랜만이네, 주완 군.”
“회장님.”
강욱진 회장이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완은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둘이 잘되기를 누구보다 내가 가장 바랐지만, 이번 일은 너무 갑작스럽군.”
“제 불찰입니다.”
“준희한테 다녀갔다면서. 얘기는 나눠 보았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무언가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주완은 흡사 범처럼 생긴 노익장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직 교제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아직이라 함은?”
“그렇지만 좋은 감정으로 알아 가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강욱진 회장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이제 결단을 내릴 차례였다.
“허락해 주신다면 열애설, 인정하겠습니다.”
반쯤 충동적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후회하는 법이 없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대답을 뱉은 뒤로도 여운이 길었다. 번복하지는 않았다. 깊은 곳에서 들끓기 시작한 욕망까지도 모두 오롯 그의 감정이었다. 주완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강욱진 회장을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