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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이야기의 마침표 (27/27)

외전 4. 이야기의 마침표

신한서

헤이와 함께하며 점점 커지는 행복만큼이나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절대 적응되지 않을 것 같던 말투가 완전히 익숙해질 만큼 우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어떤 때는 둘 다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고, 어떤 때는 한쪽이 여유롭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 어떻든 우리는 늘 같이 있었고, 모든 걸 공유하고 서로 이해하며 지냈다.

어느새 슬픈 과거를 떠올려도 괜찮을 정도로 헤이는 내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한서.]

활짝 열린 방문 사이로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새로 받은 센터 유니폼을 입고 거실로 나가자 나를 본 상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새 유니폼도 잘 어울린다. 왜 똑같은 유니폼인데 당신이 입으면 달라 보일까?]

여전히 내게 다정하기만 한 헤이는 곧바로 와서 입을 맞추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아침 인사였다.

오늘도 우리의 대화는 식탁에서 이루어졌다.

[검사 전에 준서 보기로 했지?]

내 물음에 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 교대라고 했더니 아침에 해 줄 수 있냐고 물어서 알겠다고 했어.]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나만 받으면 되는 검사지만 헤이는 항상 나와 동행했다. 유난히 크리처가 많이 나오는 계절이라서 요즘 헤이는 거의 매일 일찍부터 현장 지원을 하러 가는데 오늘은 내 검사 때문에 일부러 교대 타임을 뒤로 미루었다고 했다.

[최근에 잦네. 지금 현장 상황도 힘든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러다 큰일 나겠다.]

[거의 매일이야. 현장에 있을 때도 매번 상태가 안 좋아서 꽤 오랫동안 가이딩하거든.]

[그 애는 아직인가? 매칭률이 높아서 그쪽이 효과가 훨씬 좋을 텐데.]

[그러게. 이제 나이도 됐는데….]

[올해는 매칭 등록해야 할 텐데 무슨 생각으로 아직 안 하는 건지 궁금해.]

몇 년 전, 마침내 가이드를 찾은 준서는 가이드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이의 가이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겨우 발견한 가이드가 어려도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어린 가이드가 올해 드디어 스무 살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여전히 가이딩을 받고 있지 않아 한계치가 위험해질 때마다 헤이가 가이딩을 해 주었다.

[나는 일단 그 가이드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어떤 비밀이 있어서 그렇게 숨겨 두나 싶기도 하고.]

헤이의 말에 무척 동의했다.

윤 박사님으로부터 준서에게 어린 가이드가 생겼다는 말을 전해 들은 후, 준서와 그 아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애 키운다는 소문이 있던데.’

‘다 알면서 굳이.’

‘어때?’

‘뭐가.’

‘그 아이. 어떠냐고.’

‘뭘 어때. 그냥 조용해.’

‘흠, 준서 너도 그랬는데.’

‘혹시 나도 그렇게 작았었나.’

‘작았지. 물론 딱 그해까지였지만. 윤준서랑 육아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힘들지 않아?’

‘별로.’

준서는 어린 가이드의 부모가 아이를 키워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양육권을 넘겨받아 보호자를 자처했다.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 자세히 묻지 못했으나 아이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함께 살기 시작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보여 줄 거라 믿었는데, 오히려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불편해했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크게 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이목이 신경 쓰여 일부러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에는 외부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도 그 아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아이가 센터 교육 시설을 다니기 시작하며 지금은 센터 내에서는 아이를 알아보는 이가 제법 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늘 센터에 상주하지 않는 우리는 그 아이가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도 만난 적이 없었다. 생김새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소문으로 들었을 뿐 사진조차 본 적 없었다. 심지어는 준서의 아버지인 청장님 또한 그 아이를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셨었다.

‘모르겠다. 우리도 만난 적 없어.’

‘지금까지 한 번도요?’

‘그래. 혜림이 말로는 서로 잘 지내고 있다는데…. 언젠가 보여 주겠지.’

‘소개해 달라고 말씀해 보신 적은 있으세요?’

‘아니. 준서 걔 성격 알잖냐.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때가 오면 알아서 데려올 거야.’

대체 무슨 이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침 식사가 끝이 나 있었다. 오늘의 설거지 당번을 자처하고 그릇을 헹구고 있는데 익숙한 향수 냄새가 무척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따뜻한 팔이 허리를 감싸고, 등 뒤가 따뜻해졌다.

일부러 모른 척하자 이번엔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닿아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곧이어 짧은 입맞춤이 여기저기에 이어졌다.

[방해되는데.]

[일부러 방해하는 거니까.]

서너 개의 접시를 남겨 놓고 뒤를 돌았다. 헤이는 왜 그러는 거냐는 내 눈빛을 읽고 장난스레 웃었다. 어느새 30대가 되고 얼굴에 남아 있던 앳된 모습이 사라졌는데도 간혹 보이던 개구쟁이 표정은 그대로였다.

[나 좀 봐 줬으면 해서.]

방금까지 마주 앉아 밥을 먹어 놓고선.

헤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리광이 늘었다.

함께 살고 매일 얼굴을 보다 보면 조금씩 무뎌지는 감정에 따라 애정 표현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과 달리 그는 하루하루 더 자주 사랑을 표현했고 그만큼 내게도 더 큰 관심을 바랐다. 그런 그가 사랑스러웠다.

익숙해진 어리광에 먼저 입을 맞춰 주자 금세 좋은 감정이 전해져 왔다. 사랑한다고 말하자 마음 한가득 기쁨이 들이찼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헤이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오늘은 운전대를 잡는 대신 조수석에 앉았다. 헤이의 요청대로 라디오를 틀자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최근 헤이가 즐겨듣는 노래였다. 아니나 다를까 흥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헤이.]

[응?]

흥얼거림을 멈춘 헤이가 슬쩍 나를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을에 이 노래 부르는 가수가 콘서트 연다던데.]

[아, 정말?]

헤이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쯤 되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알아봤는데 티켓 오픈이 다다음 주 금요일이더라고. 예매할 거니까 콘서트 날짜에 맞춰서 시간 비워 둬.]

[그때 못 갔던 여행도 가야 하는데.]

[응. 가야지.]

올봄에 가기로 한 여행은 갑작스러운 가이딩 지원으로 인해 사흘 전에 취소했다. 자신 때문에 겨우 시간 맞춰 준비했던 여행을 가지 못하자 헤이는 한동안 꽤 우울해했었는데, 가이딩 지원이 끝나고 또 곧바로 바쁜 여름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을까지 기다려야 했다.

[콘서트가 9월이니까 그거 다녀오고 10월 되면 여행도 가자.]

시간이 지나면 상대와 닮아 간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음악, 콘서트, 여행. 이런 것에 전혀 관심 없던 내가 어느 순간 헤이에게 맞춰 그가 좋아하는 취향대로 바뀌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자주 가지는 못해도 간혹 헤이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거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고, 한 해에 두 번씩은 여행을 가려고 노력했다. 물론 매번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나중으로 미뤄진 여행 이야기를 하며 가고 있는데 센터에 거의 다 왔을 때쯤 콘솔박스 위에 올려놓은 헤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는 조금 후면 만날 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 준서 연락 왔는데.]

[벌써 도착해서 연락한 건가? 일단 대신 받아 줘.]

운전하는 헤이를 대신해 통화 버튼을 누른 후 전화를 받았다.

“어, 준서야.”

- 오고 있어?

헤이의 전화를 갑작스레 내가 받았는데도 상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응. 너는? 도착했어?”

- 아니. 아직 출발도 못 했어. 이제 곧 출발할 거야.

“천천히 와. 나 오늘 검사니까 7층 검사실에서 기다릴게.”

- 검사실 말고 4층 휴게실로 와.

“휴게실? 왜?”

- 사정이 좀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할게.

“알았어. 그러면 좀 이따 거기서 보자.”

[휴게실은 왜?]

이제는 얼추 한국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헤이는 전화를 끊자마자 물었다.

[모르겠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준다고 하네. 사정이 있다고 하는 거 보니까 휴게실에서 봐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아.]

[사정? 검사실에 못 가는 이유라도 있나. 어차피 준서도 오늘 검사 있댔는데.]

[가 보면 알겠지.]

어차피 검사가 없는 날에는 휴게실에서 가이딩을 하므로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상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서 차에서 내리려는데 짧은 진동과 함께 내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준서: 그리고 같이 갈 거야.

“…어?”

[왜?]

헤이는 메시지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린 나를 따라 내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준서한테 온 거야?]

[응.]

[왜? 많이 늦는대?]

[아니. 그게 아니라… 같이… 온다는데…?]

[응? 누가 같이 온다는… 어?]

준서가 보낸 메시지에는 정확히 누구랑 같이 오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헤이와 나는 동시에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드디어.

그토록 궁금했던 준서의 가이드를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

똑똑.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왔나 봐. 진짜 왔나 봐.]

[헤이. 진정해.]

[진정이 안 되는걸. 괜히 긴장돼.]

나만큼이나 기대에 부푼 헤이의 기분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네.”

짧게 대답하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준서는 오늘도 무뚝뚝한 표정을 한 채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왔어?”

“어.”

“피곤해 보이네.”

“형도 마찬가진데 뭐.”

준서 뒤로 처음 보는 얼굴이 서 있었다.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앞에 선 헤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와우…. 어리다더니, 피부 장난 아니다…. 와, 잘생겼네.]

[헤이. 인사부터 해야지.]

[아, 맞다. 안녕하세요. 전 헤이수스 실바예요. 헤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이의 외모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얼굴이 하얗고 피부가 깨끗하다. 일반인치고는 잘생긴 편이다.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쁘다, 등등. 그 외에도 좋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기대치가 최대로 올라가 있었다.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실망하기 나름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이는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고, 실제로는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 왜 아무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아이의 첫인상은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영어로 인사를 해야 할지, 한국어로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아이는 결국 후자를 택하고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 소개에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만나고 싶었는데, 반가워요. 신한서예요.”

헤이를 봤을 때 지었던 표정이 놀란 표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를 본 아이의 동공이 커질 대로 커졌다. 그는 그대로 멍하니 날 바라보기만 했다.

“준서가 꼭꼭 숨겨 둘 만했네. 학교는 도대체 어떻게 보내?”

[맞아, 준서 너 눈 엄청 높았구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장난스러운 우리 말에 준서는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와, 무서워서 누가 건드리겠냐. 그나저나 진짜 피부 좋다. 어려서 그런가.”

[거봐, 내 말 맞지?]

“응. 잘생겼네.”

“두 사람 다 그만해.”

“왜, 우리가 보면 닳을까 봐?”

결국 준서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 그냥 검사실에서 봐도 됐잖아.”

“치유계 한 명 이쪽으로 오기로 했어.”

“왜? 어디 다쳤어?”

자연스레 시선은 준서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만약 준서 본인이 다쳤다면 절대 치유계를 불렀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준서는 말없이 아이의 팔을 보고 있었다. 어쩌다 다쳤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아이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자신이 다친 이유로 치유계 에스퍼를 불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저, 갈게요.”

“앉아.”

“괜찮아요.”

“알겠으니까 앉아.”

말투하고는.

혹시나 제 가이드에게는 다정하지는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역시 준서는 참 한결같이 무뚝뚝했다. 하지만 아이의 팔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와 달라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았다. 조금 후 치유계 에스퍼가 와서 아이의 손목을 치료하는 동안에도 준서는 무표정한 얼굴 아래 걱정을 감추고 있었다.

윤준서에게도 저런 얼굴이 있구나.

“형. 검사 몇 시야?”

“아직 한참 남았어. 왜?”

“잠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해. 어차피 바로 옆이잖아.”

아이와 준서가 사는 곳은 예전에 내가 살던 센터 바로 옆 레지던스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스무 살이나 된 사람을 굳이 왜 데려다주냐고 하겠지만, 같은 에스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저 혼자 갈게요.”

“같이 가.”

“다시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그게 왜.”

“그냥 갈게요.”

“안 돼.”

“그래도-”

“안 된다고 했지.”

“…….”

“이럴 시간 없어. 나와.”

차가운 말을 던진 준서는 아이를 남겨 두고 먼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헤이가 ‘좀 다정하게 말하지’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음, 준서 고집 못 꺾는데…. 빨리 나가 봐요.”

당황한 표정을 한 아이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나갔다. 모두가 떠나고 헤이와 나는 소파에 앉아 준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헤이는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서.]

[응?]

[저 가이드가 그렇게 좋아?]

그새 풀이 죽은 헤이는 옆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시선이 계속 다른 쪽으로 가 있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 애를 본 게 아니라 준서 본 거야. 낯설어서.]

[뭐가 낯설어? 평소랑 똑같은데.]

[달라.]

[흠…. 뭐가 다르다는 거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도 과거에는 준서와 똑같았으니까. 헤이를 만나고 나서 내가 바뀐 것처럼 준서도 그랬다.

혼자 고민하던 헤이는 생각하길 포기했는지 모르겠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뭐, 확실히 오늘 준서 상태가 안 좋은 건 알겠더라. 어제 캡슐에서 가이딩했는데 오늘 더 심각해진 것 같아.]

[어제 했었다고?]

[응.]

그런데도 상태가 저런 거야?

조금 전 봤던 준서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체력이 좋은 물리계 에스퍼 얼굴에 피곤함이 드러난다는 것은 한계치가 정상 범위에서 꽤 많이 벗어났다는 것을 뜻했다. 몇 년 전, 내가 그랬듯이.

[몇 시쯤 했었는데? 현장 들어가기 전에 했어?]

[아니. 중간에 잠깐 쉬러 나왔을 때. 꽤 길게 했는데도 별로 효과가 없었나 봐.]

[3단계, 한 거지?]

[응. 항상 3단계로 하지.]

매칭률이 겨우 30%밖에 되지 않으니 3단계 가이딩을 아무리 오래 해도 한계치가 20 안팎으로밖에 떨어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3단계 이상의 가이딩을 할 수도 없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늘도 분명 현장 나갈 텐데 걱정이네. 지금 가이딩 받아 봤자 오후에 능력 쓰면 얼마 못 갈 텐데.]

[…그렇게 걱정돼?]

[당연하지. 내 친동생이나 다름없는데.]

[그러면….]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헤이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뭔데?]

[하아….]

하도 한숨을 쉬며 짜증을 내기에 혹시 몰래 3단계 이상 가이딩을 하겠다는 건 줄 알고 묻자 헤이의 얼굴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아무리 관대한 나라도 그것만큼은 허용할 수 없다며 수습해 봤지만 몇 분 동안이나 토라진 헤이를 달래야 했다.

[아니면 다른 방법이 뭔데?]

[3단계 가이딩 할 때…. 이거.]

[……?]

헤이는 손으로 자신의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옷 벗는 거라고.]

[옷을 왜?]

[맨몸으로 껴안으면 조금이라도 효과가 올라가니까.]

[아….]

[가끔 시간이 부족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거든.]

뭐?

순간 스스로 놀랄 만큼 얼굴이 구겨졌다. 뒤늦게 인상을 펴 보려 했지만,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헤이가 다른 에스퍼와 그냥 3단계 가이딩을 하는 것도 상상하기가 힘들어 최대한 모른 척하려 하는데 옷까지 벗고 껴안고 있다고 상상하자 갑자기 화가 났다.

[물론 한서랑 메이트 되고 나서는 한 번도 한 적 없어. 예전에, 그러니까 진짜 예전에 했다는 거야. 당연하잖아. 당신이 있는데 내가 그런 매너 없는 짓을 했을 리 없지.]

곤란해하는 얼굴이 나를 보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계속 이어지는 핑계를 듣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성인이 된 가이드를 과보호하는 윤준서를 이해하는 것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난 과거에 질투하는 것도, 예전의 나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나는 집요하고 유치한 에스퍼가 되어 있었다.

준서는 2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돌아왔으나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안에서만 밖이 보이는 작은 창에 비친 커다란 그림자가 몇 분 동안이나 그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결국, 내가 가서 먼저 문을 열었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잘 바래다줬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멀뚱히 서 있어? 빨리 들어와.”

한쪽에 앉아 있던 헤이가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섰다.

[준서, 가이딩하자.]

[나 방금 왔는데, 5분만 있다가 해. 바로 집중 못 해.]

“집중을 헤이가 하지, 네가 해? 너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고 그러냐. 너 오늘도 출동이야?”

“어.”

“요즘 상황은 알고 있는데, 그래도 좀 빼 달라고 해. 너 진짜 그러다 큰일 나겠다. 어제 최대 한계치 몇이었어?”

“…….”

“대답 안 해? 너 어제 한계치 몇이였냐고.”

“76.”

준서는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다.

“너 미쳤어? 85 넘으면 위험한 거 몰라? 그때부터는 네 마음대로 안 돼.”

“알아. 다음 주부터 지원팀 오기로 했어.”

어제 헤이의 가이딩을 받고도 한계치가 76이라는 것은 어제 가이딩을 받은 이후에도 능력을 여러 번 썼다는 것을 뜻했고, 지금 상태에서 능력을 몇 번 더 쓰면 위험 단계마저도 벗어나 폭주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내게는 최면이라는 최후의 수단이 있어 폭주를 막을 수 있었지만, 물리계 에스퍼인 준서는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S급 물리계가 폭주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게다가 예전에는 나도 늘 한계치를 70 가까이 채우고 지냈기에 지금 상태가 얼마나 괴로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두통과 통증이 시작되고 이명이 들릴 게 분명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헤이를 보자 역시 나만큼 심각한 얼굴로 준서를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준서가 오기 전에 의논한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다. 일단 다른 데로 좀 옮기자.”

“왜.”

“여기는 좀 그래. 사람 올 수도 있고.”

일반 휴게실에는 작은 창이 있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6층에 있는 가이딩 전용 룸으로 이동하는 동안 준서는 잠자코 우리를 따라왔다.

달칵.

적합도 검사실과 동일한 구조의 가이딩 전용 룸은 조금 전 있었던 휴게실보다 더 서늘했다. 헤이는 얇은 재킷을 벗고 그 안에 있는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옷 벗어.]

그 말에 예상대로 회색 눈동자 위 반듯했던 이마가 와작 구겨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가이딩 준비.]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해? 그냥 다시 입어.]

[왜?]

왜라고 물은 건 헤이였는데, 준서의 고개가 단번에 나를 향해 획 돌아왔다.

“하…. 형, 이거 형 생각이지.”

“그래, 왜. 맘에 안 드냐? 마음에 안 들어도 시키는 대로 해. 벗는 게 더 잘되는 거 알지?”

“저 덩치 소만 한 걸 왜 맨몸으로 껴안고 있어야 하는데.”

준서는 불만이 담긴 말을 뱉었지만 나는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준서만큼은 이 상태로 둘 수 없었다.

“젠장.”

[거봐, 내가 말했잖아. 준서 화낼 거라고.]

“어쩔 수 없어. 잔말 말고 빨리 벗어. 아니면 내가 능력 써서 벗게 할 거니까.”

“하…. 이렇게까지 해야 해?”

“땅 꺼지겠다, 인마. 평소에 하던 거에서 옷만 벗는 건데 뭘 그러냐.”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웃통을 벗고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은 정말로, 진심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어, 음… 한서. 미안한데 나가 주면 안 될까.]

[왜?]

[아, 그… 좀 집중하기 힘들어서.]

[헤이 넌 많이 해 봤다며.]

[그래도 한서 앞에선 하기 싫어.]

“그래 형. 나도 좀 그러니까 나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탓일까, 결국에는 옆 휴게실로 쫓겨나고 말았다.

검사가 끝난 후 헤이와 나는 윤 박사님과 함께 점심을 먹고, 헤이가 다시 센터로 일하러 갈 때까지는 센터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외부에 있는 쇼핑몰이라서 쇼핑보다는 산책을 하듯 잠깐 둘러보다가 사람이 없는 카페에 앉았다.

[윤 박사님이 걱정 많이 하시던데.]

[그러게.]

잠깐 만난 윤 박사님은 만나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우리를 보곤 어떻게든 웃어 보려고 하셨지만, 경직된 얼굴이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좀 전에 준서 한계치 61 나왔어.’

싫다는 사람 옷까지 벗겨 가이딩을 했건만 내려간 수치는 겨우 15. 헤이와 나도 더는 웃을 수 없었다.

‘내가… 내가 더 열심히 찾아봤어야 했어, 가이드. 내가 미리 찾아 주지 못해서 그래. 난 정말 고모로서 실격이야.’

윤 박사님은 거의 눈물을 보이기 직전이셨다. 일반인이지만 에스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래전 나를 담당하셨을 때도 똑같은 표정을 하고 계셨었다.

[아니, 그러니까 진즉에 매칭했으면 좋았잖아. 그 애 아까 보니 진짜 성인이던데. 스무 살 된 지 벌써 7개월이나 지났는데 왜 안 한 거냐고, 대체 왜.]

나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면 꼭 매칭을 하지 않았어도 가이딩만이라도 받으면 되잖아. 3단계까지는 괜찮으니까.]

[닿자마자 2차 발현할 만큼 매칭률이 높아서 그런 거 아닐까? 3단계 가이딩하다가 멈출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

[흠…. 그런 경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두 사람처럼 매칭도 안 했는데 매칭률이 다른 메이트만큼 높다는 경우도 들어 본 적 없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준서는 그 아이와 닿자마자 매칭을 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서 바로 2차 발현했다. 그것만으로 당시 큰 이슈였는데, 3년 전 측정한 두 사람의 매칭률은 무려 139.8%였다. 매칭을 한 후 메이트가 되어야만 100%를 넘을 수 있는데,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결과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준서가 그 아이에게 아직 가이딩을 받지 않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매칭률이 너무 높아서 다른 사람들처럼 3단계 가이딩을 진행했다가 멈추지 못할까 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불안했으면 그 애 스무 살 됐을 때 곧바로 매칭했으면 되잖아.]

헤이의 말대로 아이의 나이가 이미 스무 살이 되었으니 스킨십에 대한 제한이 없었고, 3단계에서 멈추지 못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모르겠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그 애 생일 될 때까지는 절대 매칭 진행 안 하겠다더라.’

언젠가 직접 물어보려고도 했으나 가장 가까운 가족도 모른다는데 그 이유를 말해 줄 것 같진 않아 그만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두 사람의 매칭 일까지 석 달이나 남았으므로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모네이드를 마시던 헤이가 핸드폰 액정을 뚫어지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센터에서 긴급 떴어.]

[국가보안기술연구소]

13:52 / 2A S22 18 29: E59 32

미측정 크리처 (A) 아이스플레어 (SS) 출현 전원 소집

위험단계: 7

비상단계: 6

가이드: Jesus Silva

에스퍼: 신한서

메이트 동의 여부: S

[메이트 동의 여부에 대기 떴는데?]

[급해서 문자부터 보냈나 보네. 곧 전화 오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이블 위 내 핸드폰이 바쁘게 진동했다. 당연히 헤이의 가이딩 수락 여부를 묻는 전화였고, 우리는 여유로운 티타임을 그대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

“역시 못 잤구나.”

윤 박사님의 말대로라면 오전에 수치가 올라가는 걸 방지해 주는 주사를 맞고 돌아갔을 텐데, 그런데도 오후에 만난 준서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부르지 그랬어. 잠드는 최면이라도 걸어 줬을 텐데.”

“형은 이런 걸 어떻게 참았어?”

글쎄 어떻게 참았을까.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인데 오늘 하루 여러 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헤이는 안에 들어가 있어.”

“고마워 형.”

“내가 고생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고맙다 그러냐. 됐어.”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지내 왔어도 준서가 이렇게 직접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건 정말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일부러 웃으며 등을 토닥이자 준서는 제2구역 한쪽에 마련해 놓은 컨테이너 검사실로 들어갔다.

긴급 상황인 만큼 오래 가이딩을 할 시간이 없어 헤이는 금방 나왔는데, 준서 상태에 관해 묻자 눈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실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쪽에서 연구원이 뛰어와 헤이에게 가이딩 지원을 요청했다. 급한 상황이라서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눴다.

[곧바로 집에 갈 거지?]

[일단 준서 나오는 거 보고 나서.]

[알았어. 끝나고 연락할게.]

[응. 수고해.]

[아, 운전 조심하고.]

지금 내 운전이 문제인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는 나는 헤이가 캡슐로 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몇 분 후, 컨테이너 문이 열리며 준서가 걸어 나왔다.

“어떻게 됐어? 좀 전에 박사님 센터랑 통화하던데.”

“일단 가면서 이야기해.”

준서는 곧바로 다른 컨테이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보다 훨씬 큰 보폭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바람에 거의 뛰듯이 그의 뒤를 따랐다.

“치유계 어딨어! 당장 키트 들고 와!”

주위는 엉망이었다. 곳곳에 다친 에스퍼가 의료진에 실려 나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크리처의 괴성이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내 앞에 가고 있는 한 사람뿐이었다.

준서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백 미터쯤 떨어진 장비 스토리지였다.

“지금 바로 현장 들어갈 거야.”

“너 괜찮겠어?”

준서는 괜찮다는 대답 대신 핸드폰을 꺼내 내게 건넸다.

“오기 전에 문자 보내 놨으니까 곧 전화 올 거야. 전화 오면 오늘 끝나고 곧바로 집으로 가라 그래. 절대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전해 줘.”

누구에게 문자를 보낸 건지, 누구에게 전화가 올 건지, 저 메시지를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가장 중요한 걸 말해 주지 않았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녁은 알아서 시켜 먹으라고 하고, 혹시 아침까지 못 들어갈 것 같으면 나 다른 곳으로 지원 갔다고 좀 전해 줘.”

“싫어. 네가 왜 아침까지 못 들어가냐? 지금 바짝 잡으면 서너 시간 안에 끝나겠구만.”

“알잖아.”

“뭘 알아? 무슨 말인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새로운 크리처로도 모자라 3~4년에 한 번씩 출현하는 SS급 크리처가 나오는 바람에 상황이 매우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원 소집이면 퇴직한 에스퍼까지 지원을 하러 오기 때문에 이르면 오늘 밤 안으로 끝낼 수 있었다.

때문에 아침까지 못 들어가게 될 상황은, 준서가 폭주할 상황에 놓이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또-”

“부탁할 게 아직도 남았어? 그 꼬맹이는 너 없으면 죽는대?”

“이번엔 나. 혹시라도 나 폭주하면 어떻게든 꼭 최면 걸어 줘.”

뭐라고?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서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형, 가까이 오면 다칠 테니까 그냥 내버려 둬.’ 이럴 줄 알았더니 죽기는 싫으냐?”

“애가 아직 어려서.”

지금껏 농담이라곤 모르던 준서가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농담을 꺼냈다. 하지만 농담처럼 꺼낸 그 말에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차마 웃어 줄 수 없었다.

“고마워 형.”

오늘만 두 번째 고맙다는 말.

평생 살면서 최면을 걸어 주는 걸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이 능력이 이렇게까지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고맙다고 한 사람은 준서인데 갑자기 헤이가 무척 보고 싶었다.

***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능력이 두 가지나 있는데도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곳에서 난, 그야말로 쓸모없는 에스퍼였다.

그런데도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물론 준서가 한 부탁 때문이기도 했지만, 긴급 상황을 실제로 마주하고 나니 저 안에서 고생하고 있을 헤이 때문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캡슐 안에는 많은 가이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고작 몇 번 왔었다고 이런 상황이 익숙해져서 모두의 시선을 무시하고 중앙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1평도 되지 않은 자그마한 이 공간은 사적인 통화를 하거나 중요한 일로 따로 대기해야 할 상황일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방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비좁은 곳에는 평범한 의자 하나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핸드폰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앉아서 기다리자 준서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이재성」

처음 보지만 낯설지 않은 이름 세 글자를 보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

“아, 나 신한서예요. 기억나요?”

상대는 당황해서인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준서 막 현장 갔는데, 가기 전에 전화기 건네받았어요. 오늘 끝나면 바로 집에 가라고 전해 달래요.”

- …네. 감사합니다.

무척 차분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 모습을 떠올렸을 때, 오히려 준서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아이는 매우 침착했다. 갑자기 현장에 나가게 된 걸 알면 무슨 일이 있냐고 한 번 물어볼 법도 한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다른 크리처를 모두 소탕하고 위험 크리처 하나만 남았을 때였다. 거의 마무리 단계라서 에스퍼와 가이드 대부분이 돌아가고 캡슐에 남아 있는 인원은 열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한서…?]

[고생했어.]

몇 안 되는 인원 중 한 명이었던 헤이는 지친 얼굴로 가이딩 룸에서 나왔다. 내가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그는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반가웠는지 나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데 모든 시선이 우릴 향해 쏠렸다.

[설마 계속 있었던 거야? 못 봤는데.]

[저쪽 대기실에 있었어. 방해될까 봐.]

[왜 안 갔어? 준서 때문에?]

아니, 당신 때문에.

분명 말해 주면 기뻐했을 테지만 괜히 쑥스러워 말을 삼켰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이런 살가운 말은 내뱉기가 힘들었다.

[가이딩은 다 끝났어?]

[응.]

헤이는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 어깨에 제 뺨을 비비적거렸다. 하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 봤지만 되레 여기저기 입맞춤이 날아왔다.

[깜짝 놀랐네. 그렇지만 너무 좋다.]

혹시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 오히려 놀란 쪽은 나였다.

[준서 아직 안 왔어?]

[응. 그쪽 팀이 마지막 처리 중인가 봐. 좀 늦네.]

[그래도 거의 끝났으니까 곧 오겠지.]

우리는 한쪽에 앉아서 준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연구원은 거의 다 끝났으니 그냥 가도 좋다고 말했지만,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차마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불안했던 내 예감대로 결국 모두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윤준서 에스퍼가 폭주 직전이라고 합니다! 텔레포터를 통해서 일단 캡슐로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연구원 한 명과 우리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대피했다.

“준서야!”

“윤준서 에스퍼! 괜찮습니까.”

텔레포터의 손을 잡고 이동한 준서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불안한 호흡이나 높은 체온으로 봤을 때 완전히 폭주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만큼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조용히.”

낮게 깔린 차가운 목소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인상을 쓴 모습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험악해 모두가 한동안 정적을 지켰다.

탁.

오랜 기다림 끝에 기대어 있던 몸이 일어섰다. 연구원이 용기 내어 말을 걸었지만 비키라는 싸늘한 대답만 들려왔다. 준서는 가이딩 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중앙에 있는 패널에 손을 올렸다. 곧이어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마저도 힘에 겨운지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 대신 번호를 눌렀다.

“……!”

상대가 곧바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빨간 눈동자 속에 살벌한 눈빛이 곧 나를 죽일 것처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워서 주저앉았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평소와 똑같은 말투로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쉬어. 힘들면 부르고. 최면은 그때 걸어 줄게.”

준서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모두가 동시에 한숨을 쏟아 냈다. 센터는 일단 폭주할 것 같지는 않으니 조금 더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내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난 언제쯤 들어가는 게 좋을까?]

내내 경직된 얼굴로 지켜보던 헤이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가이딩하기 전에 내가 최면을 거는 게 먼저일 것 같아. 연구원님 말로는 지금 상태에서 어정쩡한 가이딩은 오히려 더 독이라니까 우선 잠들게 하고 나서 가이딩해야지.]

[그러면 그때 같이 들어가.]

[나 혼자 들어가도 괜찮아. 내가 가서 최면 걸고 나면 들어와.]

[싫어. 같이 가.]

[그냥-]

[무슨 말을 해도 절대 혼자는 안 돼.]

[…이보다 더 심할 때도 있었어.]

[그건 나와 약속하기 전이야.]

다시는 센터를 돕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난 후로도 서너 번 폭주한 힐링계 에스퍼를 도운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물리계 에스퍼를 상대한 적은 없었다. 내가 헤이를 걱정하듯 헤이도 나를 걱정했기 때문에, 정말 곤란한 상황이 온다 해도 혼자서 물리계 에스퍼를 상대하는 것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헤이가 어떤 마음으로 내 옆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은 내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싫을 텐데 나와 가장 가까운 준서이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것도.

[알았어. 그렇게 해, 그럼. 나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게.]

[전화? 누구한테?]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다른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최면을 걸고 가이딩을 마칠 때까지 몇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므로 절대 오전 안으로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전화를 걸어야 했다.

다시 프라이빗 공간으로 들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채 두 번이 가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아, 저 조금 전에 통화했던 신한서예요. 집에 잘 들어갔어요?”

- …네.

반가움이 느껴졌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실망으로 뒤덮였다. 아까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줄만 알았던 그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일까, 쉽게 다음 말을 뱉을 수 없었다.

- 아직 안 끝났나요?

“아. 갑자기 중국 쪽에서 지원 요청이 와서… 그, 준서가 좀 도와주러 갔거든요.”

- …얼마 동안이요?

“어, 음…. 얼마 안 걸린다고 금방 올 거라고 했어요.”

차라리 다른 사람을 시킬걸.

원래부터 거짓말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니지만, 헤이를 속일 때는 뻔뻔하게 잘만 나오던 거짓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나를 잘 모른다고 해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어설프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 …네.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끝으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런 말을 건네고도 감사하다는 말을 듣자 못된 짓을 한 것 같아 죄책감이 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준서 가이드랑 통화했는데 거짓말했더니 마음이 불편해서.]

[거짓말? 무슨 거짓말?]

헤이에게 내가 방금 얼마나 형편없는 거짓말을 했는지 알려 주었다. 그러자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헤이가 어깨를 웅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준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조만간 오겠는데, 그 애.]

[어딜 와?]

[여기. 우리는 집에 갈 준비하자.]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한 번도 이곳에 와 본 적 없는 사람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애초에 여기까지 와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끊었어. 오긴 어딜 와. 혼자서 어떻게 여길 와?]

[준서가 여기 있으니까 혼자서 어떻게든 올 거야. 확실해.]

[뭣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는데?]

[그냥 알 수 있어. 같은 가이드니까. 준서 걱정 많이 하더라.]

같은 가이드가 아니라서 그런지 나는 헤이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전에 그 애를 봤을 때는 잠깐 얼굴을 봤을 뿐 따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준서가 다친 아이를 걱정했지 그 아이가 준서를 걱정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평소와 다른 준서를 알아챈 것처럼, 같은 가이드라서 에스퍼를 향한 애정을 알 수 있는… 그런 건가?

끝까지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로 헤이를 바라보자 또 한 번 웃었다.

[내가 그랬거든. 당신 얼굴 볼 때마다 그랬어. 그러니까 가이딩하러 꼭 올 거야.]

그렇게 앉아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윤준서 에스퍼 가이드 도착했습니다!”

그 아이가 정말로, 나타났다.

연구원과 똑같은 하얀 가운을 입고 나타난 아이는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말씀드렸듯이 완전히 폭주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요. 말씀 다 하셨으면 이제 들어가도 되죠?”

무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들려오는 아이의 속마음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새하얀 손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

해가 뜨기 시작한 시각, 조용한 동네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지붕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헤이와 나는 거실에 발을 내딛자마자 곧바로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

[…….]

손도 꼼짝하기 싫을 만큼 피곤이 밀려왔다. 헤이도 마찬가지인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니, 이미 다음날이 되어 버렸으니 정확히 말하면 정신없는 24시간이었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던 하루를 생각하면, 똑같은 24시간이 정말 길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헤이.]

[응?]

[고마워.]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헤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잊고 있었는데.]

[…뭘?]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큰 선물인지.

오늘 겪었던 일 중 유독 여러 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모두 과거에 내가 겪었던 것이었다.

헤이를 만나기 전,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을 밀어내기만 하는 못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없을 만큼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보내는 증오조차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때는 혼자인 법을 모르면 바보가 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외로웠다. 그리고 아프고 힘들었다.

‘형은 이런 걸 어떻게 참았어?’

참을 수 없었다. 참지 못해서 순간마다 내게 최면을 걸었을 뿐이었다. 괴로워도 괜찮다고. 넌 괜찮아질 자격도 없다고.

그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내게 다가와 준 사람이 헤이였다.

‘내가 그랬거든. 당신 얼굴 볼 때마다 그랬어.’

사람이지만 괴물로 불리는 에스퍼. 그 괴물들 사이에서도 외톨이인 나. 그런 내게 어떻게 보답 없는 애정과 관심을 줄 수 있었을까.

[한서?]

파란 눈동자가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그의 머리카락이 유독 눈부셔 보였다.

[내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나는 운이 좋았다. 그토록 아팠던 과거가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깊었던 상처를 지울 수 있었던 건 내가 누구보다 운이 좋기 때문이었다.

감사했다. 한없이 빛나는 사람이 내게 와 주어서, 내 옆에 있어 줘서.

***

그 사건이 있고 3개월 후, 정말 오랜만에 준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웬일이야?”

- 이번 주에 볼 수 있어?

“이번 주 언제?”

- 토요일.

“당연히 볼 수 있지. 그날 너도 올 거잖아.”

이번 주는 청장님의 생신이었다. 생신 때마다 매년 여사님께서 직접 음식을 하시고 헤이와 나를 초대해 주셨고, 가족인 준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함께했다. 이번에는 드디어 그 가이드도 함께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토요일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뻔히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뜬금없이 전화해서 그날 보자고 하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 저녁 말고 낮에 잠깐 봤으면 해서. 할 얘기 있으니까 형 집으로 갈게.

“나한테 할 얘기? 그것도 우리 집에서?”

- 어.

“어차피 그날 청장님 생신이잖아. 거기서 얘기하면 안 돼?”

- 어.

“아니면 센터는?”

- 안 돼. 내가 갈 테니까 형 집에서 해.

거기서 여기까지 오려면 꽤 멀 텐데. 게다가 여기까지 왔다가 또 청장님 댁으로 가려면 거의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거리라서 다른 곳을 제안했지만 중요한 이야기라며 계속해서 우리 집에서 만나겠다고 고집부렸다.

“뭐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길래 그러냐. 뭐에 관한 일인데?”

- 그것도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그것도 말 못 해 줘?”

- 어.

“그래, 알았어. 그러면 토요일에 편할 때 와. 청장님 댁 가려면 여기서 6시에는 출발해야 하니까 늦어도 그전에는 오고.”

- 1시 반까지 갈게.

“그렇게 일찍? 그러면 차라리 만나서 점심을 먹자.”

여태껏 이토록 심각하게 따로 보자고 말한 적이 없어서 전화를 끊고도 고민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꼭 집에서 보자는 걸까.

[준서야?]

내가 넋을 놓고 있자 모든 걸 지켜보던 헤이가 물었다.

[토요일 오후에 보자고 하네. 그날 청장님 댁 가니까 거기서 보자고 했는데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이쪽으로 온대.]

[집으로?]

[응. 오라고 해도 단 한 번을 안 오더니. 일찍 온다고 해서 그냥 같이 점심 먹자고 했어. 오면 집 근처 가까운 곳에서 점심 먹고 집에 있다가 청장님 댁으로 가면 될 것 같아.]

평상시라면 무슨 일이냐며 궁금해했을 헤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야 하지…. 지난번에 갔던 한정식집에 갈까, 아니면 이탈리안, 읏-]

[그건 제발 나중에 생각하면 안 될까.]

허리선을 따라 올라온 손이 자연스레 가슴께를 문질렀다. 정확히 목까지 걷어 올린 옷 아래 톡 튀어나온 곳에 뜨거운 혀가 닿았다.

[아…. 잠깐만, 하으….]

[통화 끝났잖아. 이럴 때 전화를 받는 게 말이 돼?]

그러니까, 왜 갑자기 이러는데.

대체 어디서 또 느낌이 온 건지 아직 저녁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가만히 영화를 보던 도중 갑자기 야릇한 상황이 됐다. 딱히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로맨틱한 영화도 아니었고 이번에 어디선가 상을 받았다는 그저 평범한 인디 필름을 봤을 뿐인데 아무런 이유 없이 영화 중반이 넘어가자 허리춤에 머물던 손이 멋대로 몸을 만지고, 어느 순간 소파에서 묘한 자세가 되어 있었다.

[하아….]

집중 좀 해 달라며 불만을 토하던 헤이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이 닿았다. 내 몸 곳곳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그가 내 관심을 바라며 쓰는 방법이었다.

[한….]

이럴 때만 꼭 한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랬다.

티브이 화면에는 여전히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통화를 한다고 볼륨을 줄여 놨지만,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작게 소리도 나오고 있었다. 대학생 두 명이 책상을 내리치며 싸우고 있는 장면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이 분위기가 이어지기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쪽 아니고 이쪽. 날 봐야지.]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헤이는 이럴 때만큼은 결코 주위 환경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형태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게 엉덩이에 닿았다.

[조금 전에 피곤하다고….]

[그러니까 위로해 줘.]

[피곤한데 왜 위로가 필요해. 위로가 아니라, 그냥 쉬는 게, 흣-]

커다란 손바닥이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조금만 할게.]

내가 아직도 그 말에 속을까 봐.

헤이가 하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도 멈출 방법은 없었다. 다짜고짜 밀어붙이는 힘에 몸이 획 돌아갔다. 허겁지겁 소파 손잡이를 잡자 동시에 트레이닝 바지가 쑥 내려갔다. 하다못해 방으로 들어가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통한 적이 없었다.

언제 가져온 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지 몇 초 만에 엉덩이 사이로 미끄덩한 윤활제가 쏟아졌다. 좁은 구멍 사이로 손가락이 밀려 들어왔다. 생경한 감각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검지인지 중지인지 모를 손가락이 내벽을 긁듯이 쑤시자 앓는 듯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아으으….”

상대가 열중하는 동안에도 발목에 걸려서 다 벗겨지지 않은 바지가 괜히 거슬렸다. 영화 보다가 다짜고짜 사람을 뒤집어엎어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화가 날 만도 한데 언젠가부터 익숙해져 담담히 받아들이는 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새 다음을 기대하는 것도.

뒤를 돌아 있는데도 다급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허벅지 안쪽을 오가던 손이 빠져나가고 단단한 손바닥이 허리를 붙잡았다. 습관처럼 힘을 빼자 여전히 버겁기만 한 페니스가 녹진하게 풀린 구멍 안으로 빠듯하게 들어왔다.

“으읏….”

언제나 그렇듯이 미리 잘 풀어 놓는다고 해도 삽입은 고통스러웠다. 애초에 손가락도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구멍 안으로 몽둥이와 같이 굵은 게 들어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내벽에 닿을 만큼 밀고 들어온 기둥은 안을 가득 채우고도 끝이 아니었다. 뿌리까지 처박은 페니스가 뱃가죽을 뚫을 듯이 안쪽 깊은 곳으로 더 파고들었다.

하지만 고통은 잠깐이었다. 그 뒤에 밀려오는 쾌감은 대부분 고통을 참아 내게 했다. 한계치에 따라 다르지만 간혹 삽입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도 있었다.

[하….]

경련하듯 몸을 떨자 등 여기저기에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 목덜미에 닿는 젖은 숨에서 짙은 만족감이 느껴졌다.

헤이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시작 전에는 짐승같이 달려들 것 같더니 막상 삽입 후에는 여유가 생긴 모양인지 탐색하듯이 느릿하게 안을 휘저었다.

“으응….”

얕게 안을 문지르는 것만으로 뜨거운 마찰열이 올랐다. 순간순간 피어나는 찌릿한 감각에 자꾸만 몸에 힘이 풀렸다. 뭉툭한 끝이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안쪽 부분을 마치 유린하듯 툭툭 건드리고 빠져나갔다.

삽입의 통증으로 터졌던 눈물이 다른 의미로 솟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기분이 조금씩 몽롱해졌다. 이럴 때는 조금 억울했다. 딱히 가이딩이 필요 없는데도 일단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일반인의 몇 배나 되는 느낌을 순간마다 감당해야 했다.

소파에 바짝 엎드린 채로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던 헤이는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소파 아래로 미끄러질 것 같은 내 팔을 붙든 채 뒤쪽으로 획 잡아당겼다.

[뭐 하는- 아윽!]

단단한 팔이 허리를 마저 쑥 들어 올리자 등이 활처럼 휘었다. 헤이는 버둥대는 내 상체를 붙들고 성급히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아, 아, 읏…!”

방금까지 평정을 유지하던 헤이는 갑자기 속도를 높여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거의 수직으로 꽂힌 페니스가 빠르게 안을 쳐올렸다. 소파 위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꽉 붙잡힌 팔목이 자유롭지 못해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손 좀, 아, 하으…. 제발….]

[하아…, 너무 좋아.]

풀어 달라고 했더니 이번엔 아예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쑥 빠져나간 기둥이 한 번에 안을 뚫고 들어왔다. 더할 나위 없는 깊은 삽입이 시작되고, 짐승처럼 박아 댔다. 누구 것인지 모를 숨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드르륵-

“어…?”

조금 전 헤이가 압수해 소파 테이블로 치워 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짧게 오고 끝날 줄 알았던 진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 잠깐, 만, 아, 전화가-]

[안 돼.]

[센터, 으….]

[센터는 진동이 아니잖아.]

[본부일 수도 있어, 흐읏….]

[이 시간에?]

[그럴 수도, 아, 잠시만 확인 좀, 읏…!]

딱딱한 페니스가 내벽을 긁고 무자비하게 안을 헤집었다. 헤이는 당황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그대로 골반을 퍽퍽 쳐올렸다. 내가 엉덩이를 빼려고 할 때마다 강한 힘이 더 움직이지 못하게 나를 눌렀다.

[싸면 받게 해 줄게.]

[읏, 아! 아, 그만, 좀- 아!]

집요하게 오던 진동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그런데도 급박한 움직임은 그대로였다. 허겁지겁 나를 내려놓은 헤이는 봉긋 솟은 엉덩이에 다시 단단한 귀두를 꽂아 넣었다. 젖은 구멍이 잘박대는 소리를 내며 기둥을 빨아들였다. 불룩해진 배를 만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밀려오는 사정감으로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흥분감에 내벽이 조여들자 헐떡대는 숨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이 들렸다. 헤이는 내 골반을 누른 채 더 거칠게 허리를 흔들었다.

“흐, 아아, 아흣!”

내벽이 더 깊게 들어오는 기둥을 삼키자 민감한 자극을 견뎌 내지 못하고 경련하듯 몸을 떨며 사정했다. 도저히 가시지 않은 쾌감으로 가라앉지 않은 호흡을 고르는데 한 번 끊어진 전화가 다시 또 울렸다.

드르륵-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조차 미치지 못해 허공에서 헛손질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하아, 전화, 전화 다시 와….]

[그래서?]

[받게 해 준다고….]

헤이는 여전히 열에 들떠 가쁜 숨을 뱉고 있었다. 살짝 화가 난 듯한 눈빛은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목덜미를 씹어 댔다.

“아!”

하지 말라고 묻기도 전에 다시 몸이 흔들렸다. 뜨거운 숨이 섞인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아직이라고.

***

토요일, 오후 1시가 조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서.]

헤이가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물었다.

[이 근처에 꽃집 있어?]

[꽃집? 꽃집은 왜? 누군데?]

[재성. 지금 오고 있나 봐. 당신이 통화해 볼래?]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헤이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재성 씨? 꽃집은 왜요? 이 근처에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정확한 건 찾아봐야 알아요.”

- 아….

짧은 탄식 뒤로 ‘왜’라고 묻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핸드폰의 주인이 아닌 상대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꽃 사려고? 이 근처에서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 가다가 사서 갈게. 대신 그러면 좀 늦어.

“음, 우리는 괜찮은데…, 혹시 지금 어디까지 왔어?”

- 출발한 지 30분쯤 됐어. 곧 있으면 그쪽으로 빠지는 인터체인지야.

“내가 문자로 주소 보내 줄 테니까 그냥 그쪽으로 와. 그나마 이쪽에서는 거기가 나름 번화가니까 꽃집은 하나 정도 있을 거야. 지난번에 갔을 때 봤던 것 같거든. 우리도 지금 준비해서 거기로 갈게.”

- 왔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그냥 우리가 알아서 찾아볼게.

“어차피 뭐 살 거 있어서 우리도 가야 돼. 그쪽에 마트도 있으니까. 여기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시간도 꽤 남아서 거기 갔다 올 여유는 될 것 같은데?”

준서가 말한 곳에서 5분쯤 떨어진 곳에 마침 큰 쇼핑몰이 있었다. 집에서 가까워 자주 가는 곳으로 분명 꽃집도 있었던 기억이 났다.

두 사람이 이곳으로 바로 와도 점심을 먹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획이었기에 차라리 그곳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 그쪽에서 만나 볼일을 보고 장소를 옮겨서 점심을 먹어도 될 것 같았다. 그 후에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해도 될 만큼 시간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

상대가 알겠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자마자 도톰한 재킷을 걸치고 차를 탔다. 밖은 어느새 10월의 중순을 지나 늦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은 꽃집에서 필요한 걸 사고 먼저 카페에 들어가 있겠다고 연락이 왔다. 헤이와 나는 기다리는 이가 혼자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일부러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어…?”

[왜?]

[방금 준서 본 것 같아서.]

[응? 어디?]

입구 쪽에 차를 대고 카페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 큰 인영이 눈에 띄었다. 많은 사람 사이에서 머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인지 얼굴을 확실히 구별할 수는 없었다.

[저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어.]

[흠. 우리처럼 카페로 가는 중인가 보지, 뭐. 근데 차라리 다른 데서 만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차보다는 밥 먹고 싶은데….]

[날씨가 좀 쌀쌀해서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기 좀 그랬어. 잠깐만 있다가 바로 이동하자.]

오늘 아침, 악몽을 꿨다며 잔뜩 인상을 구긴 헤이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늦게 아침을 먹었음에도 배가 고프다며 칭얼댔다.

[점심은 어디서 먹을 거야?]

[지난번에 갔었던 집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려고 했어.]

[그러면 또 차 타고 이동해야 해? 거기 음식 나오는 데 오래 걸리는데.]

[아니면 간단히 이 근처에서 먹어도 돼. 여기 식당가에도 꽤 괜찮은데 많으니까. 일단 볼일 다 보고 애들한테 물어보자. 아마 괜찮다고 할 거야.]

[응.]

단지 식사 시간이 조금 당겨진 것만으로 기뻐하는 기분이 느껴졌다. 어린아이 같아서 픽 웃음을 터졌다.

[그렇게 좋아?]

[응. 당신도 나 먹는 거 봤잖아. 아침을 거의 안 먹었더니 진짜 배고파.]

[그러게 누가 그렇게 조금 먹으래.]

[아, 진짜 아까는 밥이 안 넘어갈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았어. 꿈이… 하아…. 정말 끔찍했어.]

[무슨 꿈이었는데?]

[그냥… 찝찝한 꿈. 나만 알고 있을래. 괜히 당신도 기분 안 좋을 수 있잖아.]

어차피 그런 거 안 믿는데.

다시 풀이 죽은 헤이의 등을 토닥이자 그가 금세 미소를 지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바뀌는 상대의 기분이 이제는 익숙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약속한 두 사람은 이미 음료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짧은 인사 후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물었다.

“20분 전쯤 왔다고?”

“어.”

“흠, 그래? 이상하네.”

큰 키나 체격이 당연히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아서 좀 전에 봤던 사람이 당연히 준서인 줄로만 알았다.

“혹시 오다가 다른 에스퍼 못 봤어?”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전에 오는데 멀리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길래 당연히 너인 줄 알았거든. 키나 체격이 딱 봐도 물리계였어. 아니면 이런 데 2m나 되는 사람이 막 돌아다니겠냐? 근데 넌 20분 전에 와 있었다며. 그럼 누구였지?”

그저 다른 에스퍼를 보지 못했냐는 질문을 했을 뿐인데 준서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나만큼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준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의외였다.

“살벌한 표정 좀 치워라. 센터에서 맨날 보면서 밖에서는 다른 에스퍼 만나기 싫어서 그래?”

“그런 거 아니야. 혹시 대충 어땠는지 기억나?”

“너무 멀어서 자세히 못 봤어. 나는 정신계라서 누구처럼 시력 개방 안 되거든요. 그냥 무지하게 크고 체격 좋은 것만 알겠더라. 넌 남한테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웬일로 관심을 두냐.”

“아니야. 됐어.”

됐다고 말했지만, 그 후로도 준서는 조금 이상했다. 마트에 잠깐 들렀을 때도,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가로 이동할 때도, 평소보다 더 주위를 의식하고 신경 쓰는 듯했다.

“여기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주말에도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점심시간이 이미 한참 지났는데 이상하게 식당가가 붐볐다. 어차피 자리가 있는 곳을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찾는다고 해도 괜히 눈에 띄는 게 신경 쓰여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극장가를 지나가는데 이번에도 저 멀리 유독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 보았던 그 사람이 어딘가에서 혼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아까 내가 말했던 사람 있다. 저 사람 봐 봐.”

준서는 내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색 눈동자 안 선명한 동공이 일순간 확장됐다.

“…진형우?”

진형우라면 몇 안 되는 S급 에스퍼 중 하나였다. 그는 준서와 똑같은 물리계 에스퍼로 함께 일할 일이 없으므로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워낙 유명해서 다른 에스퍼에게 관심 없는 나도 알고 있었다. 진형우와 그의 가이드는 특별한 일 없이도 가이드가 일주일에 두세 번씩 현장에 따라올 정도로 유난히 사이가 좋다는 걸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왜 진형우 혼자서 왔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쾅-!!!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꺄아악!”

귀를 찢을 듯한 비명과 굉음이 동시에 들렸다. 마치 재난 영화 속 어떤 장면처럼 거짓말 같은 장면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먼지바람. 비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들. 평평한 땅이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지고 견고하게 서 있던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아래도 위도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뒤바뀌었다.

비명이 들리자마자 놀랍게도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피해야겠다는 생각보다도 원인을 제공한 인물의 상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행히 미처 피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날아오는 파편들을 준서가 막아 주어 다치지 않았다.

“준서야!”

혼란의 중심에서 제 가이드를 껴안고 있던 준서는 엉망이 된 등에 피가 비치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폭주한 것 같은데, 원인은 일단 나중에 따지자. 지금은 상황 정리하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 준서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지금 저거 말릴 사람 너밖에 없어.”

폭주한 에스퍼가 만약 진형우가 확실하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자연계 능력자라니. 지금 바로 센터 직원이 출발한다 해도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몇 명의 사상자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른 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폭주한 에스퍼를 막는 방법은 준서가 그를 상대하는 동안 내가 최면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면 내가 바로 최면 걸 테니까….”

[안 돼. 내가 갈 거야.]

내 말을 끊은 헤이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말투였다.

[당신은 재성 데리고 다른 데 가 있어. 준서와 내가 갈 거야.]

[지금 저거 안 보여? 헤이 네가 ALL-ESP긴 해도 저 상태면 곧바로 가이딩하기 어려울 거야. 그냥 내가 가서 최면 거는 쪽이 빨라. 안전하고.]

헤이의 기분에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 내가 가겠다고 우길 때마다 걱정과 화가 동시에 울컥하고 솟아났다.

[그래도 안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그것만큼은 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 안 하기로 이미 약속했던 거야.]

이럴 시간이 없는데.

걱정하는 헤이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폭주한 에스퍼를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경험한 나로서는 나 대신 가겠다는 헤이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럴 시간 없어. 그냥 한서 형 말대로 해.]

[싫어. 위험해.]

[위험한 일은 내가 할게. 형 다칠 일 없게 할 테니까 얘 좀 부탁해.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 있어.]

다행히 최면을 걸어 억지로 헤이를 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투덕대며 시간 끄는 걸 바라보던 준서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절대 내가 다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준서가 그렇게 말하자 헤이는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끝나면 바로 연락해.]

내 어깨를 꽉 껴안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

오랜만이어서일까.

조금 전까지 괜찮은 줄만 알았던 심장이 겉잡을 수없이 빠르게 뛰었다. 혼자가 아닌데도 밀려오는 긴장을 떨쳐 내기가 힘들었다.

주위를 에워싼 살기가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괴물이 되어 버린 에스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준서에게 달려들었다. 폭주한 에스퍼의 힘은 평상시의 몇 배나 되므로 준서도 그를 상대하는 데 애를 먹는 듯했다.

쿵!

주먹을 주고받던 와중에 약이 오른 괴물은 준서를 벽 쪽으로 던져 버렸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데 마치 그 고통이 그대로 옮겨져 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내가 이런 일을 했던 걸까.

다시 떠오른 기억은 아프고 끔찍했다. 통증을 참고 일어서면 다시 또 날아왔고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고통에 무뎌지다 보면 마지막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벽 주변이 무너져 내리고 뿌연 먼지가 눈앞을 가렸다. 흐릿한 시야 속 새빨간 눈을 가진 괴물이 준서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만약 내가 저 상황에 있었더라면. 그런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될 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마치 이런 게 익숙하다는 듯 걸어가 괴물의 등에 손을 올리고 최면을 걸었다.

진정하라고. 이제 그만하라고. 말을 건네자 커다란 체구가 털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멍하니 서 있다가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아까보다 더 엉망이 된 준서가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냐며 웃자 상대도 따라 웃었다.

“오늘 청장님 생일파티는 병실에서 하게 생겼다. 이게 갑자기 무슨 꼴이냐.”

준서는 바닥에 쓰러진 진형우를 힐끔 쳐다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들어 버린 진형우에게서는 방금까지 괴물 같았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음, 일단 벌어진 상황이야 그렇다 치고 진형우는 갑자기 왜 폭주했을까.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도 아닌데.”

“없어.”

“어?”

“아마 없을 거야, 지금은.”

“지금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가이드 사망 소식 들은 거 없는데? 있었으면 알려 줬겠지.”

“일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

더 자세한 걸 물어보고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센터 인원이 도착하는 바람에 준서와 나는 따로 떨어지게 됐다. 준서가 의료진과 함께 먼저 떠나고 나는 현장에 남아서 센터 직원에게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던 직원은 컨테이너로 된 차량으로 나를 안내했다.

“잠시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모든 보고가 다 끝났는데도 대체 무얼 더 이야기하자는 건지. 컨테이너 안에 있던 몇몇 다른 직원이 일부러 자리를 피하듯 나가 버리고 둘만 남자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제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는 겁니까.”

“음… 그게….”

그는 무척 곤란한 듯 말을 망설였다. 혹시라도 예전처럼 다시 폭주한 에스퍼의 진정을 맡아 줄 수는 없냐는 제안이라도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닐까 의심할 만큼 말을 꺼내기 어려워했다. 그러나 망설임 끝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완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혹시 가이드분이 근처에 계십니까?”

헤이의 행방을 묻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졌다.

“네. 사건이 터지고 잠시 대피해 있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이곳으로 불러 주실 수 있나요? 가이딩이 필요해서….”

지금 이곳에 가이딩이 필요한 사람은 세 명밖에 없었다. 나, 준서, 그리고 진형우.

만약 내가 가이딩이 필요했다면 직접 헤이를 만나면 그만이었고, 준서에게는 더 좋은 가이드가 있으므로 헤이의 가이딩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메이트가 있는 진형우 역시 헤이의 가이딩은 필요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지?

‘없어. 아마 없을 거야, 지금은.’

조금 전 준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진형우 에스퍼 가이드가 없어진 겁니까?”

“아닙니다. 저, 그게 아니라….”

“그런데 왜 헤이의 가이딩이 필요하죠? 진형우 에스퍼에겐 메이트가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젠장.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센터 직원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과 속마음이 전혀 달랐다.

“지금 당장 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두 시간 안에도 올 수 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건가요? 본인 에스퍼가 폭주했는데 왜 당장 올 수 없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애초에 폭주한 이유도 가이드가 옆에 없어서인 것 같은데 아닙니까?”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저희 측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테니 그런 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더는 직원의 속마음을 읽지 않아도 그가 생각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한마디로 더는 묻지 말라는 의미였다.

“헤이가 안 오면요?”

“예?”

“제가 만약 헤이의 가이딩을 허락하지 않으면 저 에스퍼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그것도 말해 줄 수 없군요.”

이해 안 되는 것투성이였으나 이곳에 있어도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헤이에게 연락해 와 달라고 부탁한 후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쪽 구석에 주차된 구급차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인영이 한쪽에 누워 있었다.

“준서 너 뭐 알고 있지.”

“뭐가.”

“혹시 네가 오늘 하려 했던 이야기, 지금 이 상황이랑 관계되는 일이야?”

“일단 가까이 와.”

“맞는지 아닌지만 말해.”

누워 있던 몸이 천천히 일어났다. 준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툭 대답했다.

“맞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에스퍼 한 명이 폭주하는 일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미리 알고 있던 준서가 일부러 내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분명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아까 네가 그랬잖아. 아마 지금은 없을 거라고. 진형우 가이드 사라진 거, 너는 알고 있었지.”

“한 명 아냐.”

“어?”

“없어진 가이드, 한 명이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해.”

사라진 가이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겐 결코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곧바로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세 글자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준서는 제 가이드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감춰 왔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내가 걔 보호자가 된 이유, 알아?”

“윤 박사님한테 대충은 들었어. 그 애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키울 수가 없다고.”

“어디가 아픈지는 못 들었지?”

“그건 몰라.”

“여기. 여기가 아팠거든.”

준서는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가리켰다.

“뇌?”

“아니. 정신.”

준서는 우연히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 아이를 구하려다가 2차 발현을 했다고 운을 띄웠다.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이를 물건 취급했다고.

“그럼 학대 아동이었어?”

“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냥 학대만으로 끝날 사람이 아니었어.”

그 이후, 도저히 아버지라고 할 수 없는 그 남자는 돈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약쟁이 딜러에게 데려갔다. 제 아들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이용해 약을 사는 데 이용할 목적이었다.

“병원에 만나러 갔는데 사라졌더라고.”

“찾았어?”

“찾았지.”

준서가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 이미 그 남자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약쟁이 딜러가 모시고 있는 사람이 최연소 가이드인 아이를 무척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더군. 미등록 에스퍼였어.”

미등록 에스퍼라는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얼마 전부터 가이드가 사라지고 있어. 아니, 전부터 계속 사라졌지만 여태껏 센터에서 숨긴 거야. 그러다 최근엔 굉장히 잦아졌고. 가이드가 왜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해?”

“…진형우의 가이드를 포함해서 다른 가이드를 데려간 것도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어. 그리고 지금까지 데려간 가이드 중에서는 형이 아는 사람도 있어.”

내가 아는 가이드. 사라진 여러 명의 가이드 중에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준서의 설명이 모두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준서는 그때 그 사건을 비밀로 해 주는 대신 아이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고, 센터를 통해 그 미등록 에스퍼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미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의미했다.

모든 말을 마친 준서는 일부러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물어볼 게 있어.”

“…말해.”

“김우영은, 우영이는…, 그럼 우영이는 어떻게 됐어?”

준서는 이미 센터가 김우영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숨길 이유가 없었다. 여태껏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게 무의미하게 세 글자를 말하는데 몇 번이나 목이 멨다. 오랫동안 꺼내지 못했던 그 이름은 여전히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나를 보는 상대의 눈빛은 그저 안타까움뿐이었다.

내 질문에 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꽤 오랫동안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 정적을 깨트린 건 나의 짧은 한마디였다.

“…없구나.”

***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준서의 가이드가 도착해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구급차에서 나와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쯤이면 헤이도 컨테이너에 도착해 있을 게 분명했다. 얼른 그곳으로 돌아가 그를 만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잔여물이 나뒹구는 시멘트 바닥은 아주 차가웠다.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지금까지 원망했었다. 김우영을 잃고 난 후 나는 모든 걸 원망했었다. 그를 쉽게 허락한 센터도, 스스로 가 버린 김우영도. 하지만 그중 제일 원망스러운 건 나였다. 결국, 김우영을 보낸 내가 가장 싫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껏 부정해 왔다.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원망했고, 원망으로 그런 의심을 지우려 했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럴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없구나.’

그런데도 내가 한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쿵, 심장이 떨어져 마음 어딘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분명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지 않았다.

현실은 한 박자 뒤늦게 찾아왔다.

김우영이… 이 세상에 없다.

‘내가 네 가이드 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

‘난 포기 안 해.’

‘뭐 하긴. 여태 너 기다렸지.’

‘한서야. 나 이러다 가이딩도 못 해 보고 죽겠다.’

‘불쌍하니까 밥 좀 사 주라.’

‘너 혹시 진짜 내 동생 아니냐?’

‘내 생각엔, 널 보고 귀엽다고 생각 못 하는 사람들은 다 등신이야.’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없을 거라니까.’

‘지각은 할지 몰라도 절대 외박은 안 해.’

꼭 돌아온다고 해 놓고.

너무 오래돼서 이미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한서!]

그때였다. 익숙한 인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분명 저 멀리 있었는데 금세 가까워졌다. 하지만 가까이 올수록 이상하게 그의 모습은 점점 흐릿해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뿌연 시야 속 걸음을 멈춘 상대가 보였다.

눈앞을 가린 것은 김우영이 사라진 후 한 번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헤이수스 실바

탁.

현관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 어두웠던 집 안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지나치게 환한 조명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괜히 켰나.

벽 쪽에 톡 튀어나온 스위치를 괜스레 한 번 더 매만졌다. 다시 끄면 이상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발짝 늦게 집 안으로 들어온 상대가 먼저 거실 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뒤쪽 어디선가 차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유독 요란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어느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밖도 컴컴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담담한 말투가 평소와 너무나 똑같았다. 하지만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조금 전을 떠올리게 했다.

한에게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그 장소로 돌아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준서와 한에게는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겠다고 약속했지만, 차마 멀리 갈 수 없어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한은 보이지 않았고, 약속한 장소에는 센터 직원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전화를 걸어 봤지만, 전화도 받지 않았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괜찮다는 전화를 받았지만 내 눈으로 그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불안했다. 그래서 근처를 샅샅이 뒤졌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한은 나를 보자마자 울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남들이 들을 만큼 크진 않았지만, 소리 내 울기도 했고 아주 조용히 눈물만 흘리기도 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또 너무 갑자기 울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그저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저녁도 저녁인데 일단 좀 씻어야겠다. 우리 둘 다 꼴이 말이 아니네.]

마치 전쟁터라도 다녀온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흙, 모래,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로 뒤범벅되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더러운 옷을 벗고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지며 잊고 있던 피로가 밀려왔다.

‘잠시… 멈추질 않아서….’

머릿속에서 떨리던 어깨와 젖은 눈동자가 지워지질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해 보려 해도 자꾸만 떠올랐다.

무슨 일이냐고, 혹시 누군가 슬프게 한 거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왜 가만히 있었을까.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게 후회스러워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한은 왜 슬퍼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었던 걸까.

후회 다음엔 궁금함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던 한은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했다. 서로를 거의 다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금도 어리광을 부리거나 불만을 이야기하는 쪽은 항상 나였고, 한은 그러지 않았다. 전보다 많이 웃고 말수가 늘긴 했어도 농담처럼 던지는 말 외에는 불만을 이야기한 적도 없었고, 당연히 눈물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건 어쩌면 내가 있다는 걸 알고도 멈추지 못할 정도로 큰일이 있었다는 뜻인데, 에스퍼가 폭주하고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날 만한 일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이제 물어봐도 될까.

보통 때보다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30분이나 지나 있을 줄 몰랐다. 시간을 보고 서둘러 거실로 나가자 한이 냉장고 문을 연 채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먹을 게 과일밖에 없네.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평소에는 쉽게 듣지 못하는 그의 혼잣말이 들렸다.

[뭐 좀 만들까?]

한은 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평소라면 인기척이 없어도 이미 내가 거실로 나왔을 때부터 느낌만으로 알아챘을 텐데 정말 집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베이컨 있으니까 파스타 정도는 만들 수 있어.]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좋은 샴푸 향이 났다. 나를 본 하얀 얼굴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피곤할 텐데 지금 요리하기는 좀 그렇잖아. 내가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 올 때 사서 왔어야 했는데 미리 생각을 못 했어. 미안.]

당신이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생각을 못 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우리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차창을 보며 생각에 잠긴 한에게 말을 걸기도 힘들었고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기에 그 상황에서 저녁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저쪽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식품은 있는데 그걸로 먹자.]

[그걸로 되겠어? 점심도 못 먹었잖아.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고.]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차에 일이 터지는 바람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해 분명 배가 고팠었는데. 밥때가 한참 지난 지금도 배고픔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만 괜찮으면 나는 괜찮아. 지금 나갔다 오면 더 늦을 것 같아서.]

[하긴, 그런가? 그러면 그렇게 하자. 근데 내일은 장 봐야겠다.]

이럴 때 참 눈치 없이 어딘가 굴러다니고 있을 내 소고기가 떠올랐다. 청장님 댁에도 가져가려고 평소보다 많이 샀는데. 오늘 아침 식료품이 다 떨어져서 오후에 장을 보러 갔었는데 결국 다시 내일 또 마트를 가야 했다.

몇 가지 즉석식품을 레인지에 돌려 식탁으로 가져갔다. 음식 향을 맡자 그제야 잊고 있던 허기가 찾아왔다.

[오랜만이다. 이런 거.]

한이 말한 대로 우리의 식탁이 이토록 초라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기에 올라와 있는 이 음식들도 이미 사 놓은지는 반년쯤 되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아 유통기한이 겨우 한 달 남짓 남은 것들이었다.

[그때는 햄버그스테이크랑 치킨이었는데.]

[라이스도 있었어.]

[맞아.]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그 전날 도로가 꽁꽁 얼어 위험한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종일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리던 날. 외식을 하고 마트에 들르기로 했던 우리의 계획은 날씨 때문에 무산되어 버렸다. 워낙 외곽 지역이라 배달이 되는 곳도 없었고 나갈 수도 없었던 터라 그때도 이렇게 즉석식품을 돌려 먹었다.

의외로 괜찮았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너무 놀라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금 전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사람이 웃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왜 웃어?]

[우스워서.]

[…뭐가?]

[고작 몇 분 만에 완성되는 영양가 없는 음식인데 밖에서 먹었던 요리사가 해 주는 음식보다 지금 이게 훨씬 맛있다는 게.]

한은 미트볼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점심도 못 먹었으니까 당연하지.]

[그것보다, 울고 나면 이렇게 배가 고픈지 몰랐어.]

[…원래 그래.]

겨우 찾은 대답은 너무 성의 없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상대가 퉁명스러운 대답으로 오해할까 걱정이 됐다. 다행히 한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먹고 난 뒤 정리는 금방이었다. 설거지할 거라고는 포크 두 개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내일로 미루고 소파에 앉았다. 원래 이때쯤이면 같이 볼 영화라도 찾았겠지만, 오늘은 우리 두 사람 다 그저 앉아만 있었다.

[헤이.]

무릎 위에 보드라운 손길이 닿았다. 조심스레 그 손을 붙잡고 상대를 바라보자 까만 두 눈동자가 조금 불안한 듯 흔들렸다.

[우영이가 죽었대.]

뭐?

지나치게 담담한 말투였다. 그래서 순간 잘못들은 줄만 알았다.

[방금 뭐라고….]

[이제, 이 세상에 없대.]

[…….]

머릿속이 한순간에 백지가 됐다.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계획했던 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이 울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위로해 주려고 했는데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니 굳은 채로 한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들은 말을 믿기 힘들 정도로 너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화가 났다. 무능력하고 한심한 나 자신에게.

가이드도 에스퍼의 기분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게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나는 그를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는 바보였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당신은 얼마나 슬펐을까. 울면서 그 슬픔을 감당해 내는 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리고 내게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그것들은 속에서만 돌아다녔다.

[그런 얼굴 안 해도 돼.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예상이라는 건 미리 생각해 둔 것뿐, 그게 전부 현실이 되진 않았다. 애초에 ‘어쩌면’ 이라는 말이 짐작에 불과했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적어도 몇 %의 반대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므로 그것이 단 1%라도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었다. 그 1%의 희망이 사라졌는데 절대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 슬프게 울었던 거잖아.

[울었던 건 꼭 슬퍼서만은 아니야.]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듯한 대답이었다.

[그전까지는 인정하는 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울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던 것뿐이야. 나만큼은 울어서는 안 된다고. 그냥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

[고마워. 오랫동안 같이 노력해 줘서.]

[난 아무것도….]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 기억해 준 것만으로 충분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인데 기다려 준 것도. 난 정말 괜찮아.]

내 손은 붙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 말에 이번에는 내가 울고 싶어졌다.

신한서

탁탁탁.

뛰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걸음이 빨라졌다.

‘찾았어, 그 에스퍼.’

전화를 끊자마자 정신없이 달렸다.

주소가 찍힌 곳에 도착하자마자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얼른 들어와.”

간판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들어간 곳은 작은 카페였다. 너무나 평범한 카페. 내부에는 은은한 차 냄새와 달콤한 디저트 냄새가 났다. 일단 앉으라는 준서의 말에도 내 신경은 온통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다.

이런 곳에 그 에스퍼가 있다고? 이렇게 평범한 곳에?

헤이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지만 내겐 잠시라도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어디 있어?”

“저쪽.”

“만나야겠어.”

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전에 먼저 할 말 있어.”

“지금 꼭 해야 할 말이야?”

“중요한 이야기야.”

“중요? 나한테는 저 사람 만나는 게 제일 중요해. 어디 있어? 당장 데리고 센터로 갈 거야.”

“아이가 사라졌어.”

“뭐?”

결국,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준서의 가이드가 사라진 것이다.

[네 가이드가 사라졌다고?]

“그래. 그래서 지금 센터에는 못 데려가.”

“왜 못 데려가? 지금 당장 데려가서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지.”

“소용없어.”

“뭐가 소용없어?”

“최면을 걸어도, 마음을 읽어도 소용없어.”

“왜 소용없는데.”

“모를 테니까.”

분명 저쪽 어딘가에 그 에스퍼가 있다고 했다. 준서의 가이드를 데려간 게 그녀라면 지금 당장 그의 행방을 물어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하는데 준서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우리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못 찾았던 이유 알아냈어.”

“뭔데.”

“주인님이 아니야.”

“뭐?”

“우리가 봤던 그 얼굴, 주인님 아니라고.”

뭐라고?

머릿속에서 도저히 잊히지 않은 얼굴. 김우영을 떠올리면 항상 함께 떠오르던 얼굴. 환하게 웃고 있었던 스크린 속 그 얼굴을 나는 단 한 번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니라고? …어떻게?

“나도 만나고 나서 알았어. 저 뒤쪽에 있는 사람이 만약 그 에스퍼라면 아마 날 보자마자 알았을 거야. 그런데 저 사람, 내가 누군지 전혀 몰라.”

“모른 척하는 걸 수도 있잖아.”

“아니, 정말로 알아보지 못해. 형도 만나 보면 알 거야.”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까지 김우영을 데려간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김우영은 대체 누굴 위해 간 건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누군가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헤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도 확인할 게 있어. 아직도 왜 이제희가 주인님이라고 알려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어. 단서가 너무 적어서 일단 뭐든 찾아내야 할 것 같은데, 형이 좀 도와줬으면 해.”

나 역시 궁금했고, 반드시 알고 싶었다. 준서가 굳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그랬을 거라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안쪽에 있는 작은 공간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그녀는 눈을 감고 있어도 언젠가 보았던 화면 속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 조금 달라졌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얼굴을 이렇게 보게 될 줄 몰랐어.”

이미 준서에게 이 사람이 그 에스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의 재회는 생각보다 허무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놀라울 정도로.

헤이는 내 옆에 서서 나처럼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자신이 나설 수 없는 자리라는 걸 알지만 그저 옆에만 있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필요한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가 단지 옆에서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었다.

최면을 걸기 위해서는 상대가 깨어나야 하므로 우리는 그녀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기다렸던 상대가 눈을 떴다.

“당신들…. 누구시죠?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녀는 정말로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최면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었던 사실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이름 이지현. 에스퍼, 가이드, 센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인.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 직업은 파티시에. 20년 전 프랑스로 입양된 후 얼마 전에 한국으로 돌아옴.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에 김우영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딱 하나, 그녀는 프랑스로 입양되기 전 작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캠퍼스를 걷는 장면이었다.

“젠장.”

그녀의 이야기가 다 끝난 후, 신경질적으로 욕을 뱉은 준서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뭐야?”

“그 에스퍼,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자세한 설명은 일단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아. 당장 가 봐야 해서. 그 애 찾으면 그때 말해 줄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은 적막했다.

한참 생각에 빠졌다가 옆을 돌아보자 헤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헤이는 눈에 띄게 말이 줄었다. 아마도 김우영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날부터 그랬던 것 같다.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도 내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날 헤이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 후로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오히려 헤이가 이상해졌다. 함께 있을 때 괜히 내 눈치를 살피며 말 거는 걸 망설인다거나 지나치게 내 기분을 의식하곤 어색하게 대답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뀐 건 스킨십이었다.

배웅이나 마중할 때 하는 포옹이나 짧은 키스는 매일 하지만 딱 거기까지. 소파에서 자연스레 어깨를 기대거나 손을 잡긴 해도 언제 어디서든 수시로 끌어안던 행동은 사라졌다. 예전에는 분위기가 아닐 때도 그렇게 달려들더니, 최근에는 오히려 가이딩을 해야 한다고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할 정도였다.

오늘따라 유독 더 말이 없는 헤이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결국, 반드시 지키기로 했던 약속을 깼다.

‘괜찮은 걸까. 많이 실망했을 텐데.’

맨 먼저 들려온 말이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하여간 걱정도 많아.

물론 준서의 전화를 받고 카페에 갈 때까지만 해도 김우영의 행방과 관련된 에스퍼를 찾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난 후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끼는 동생의 가이드가 사라진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우영에 관한 일은 절대 가슴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일이라서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계속 숙제로 남아 있었다. 여전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고 당연히 궁금한 일이지만, 이제 와서 당장 그 에스퍼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몹시 슬퍼하거나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린다 한들 이미 지나간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 위험한 상황을 눈앞에 둔 준서는 괜찮을 수 없었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하루하루가 지옥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단지 어떻게 하면 준서를 도울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던 것뿐이었는데 내가 말이 없는 걸 다른 쪽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헤이.]

[어, 어?]

말간 눈동자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운전에 집중하는 척 물었다.

[왜?]

[준서가 정말 그 에스퍼가 누군지 알아냈을까?]

[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이어 순식간에 많은 말들이 들렸다.

‘당연하다고 말해야겠지? 근데 그랬다가 괜히 나중에 또 다른 사람이면 어쩌지…. 그렇다고 이번에도 아닐 거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아마도, 알아내지 않았을까?]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지 영 자신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오늘 보니까 준서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내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서 속상하네.]

[그래도 당신이 최면 걸어서 이지현이라는 사람한테서 이것저것 알아냈잖아. 그것만으로 이미 도움이 된 거라고 생각해. 나중에 말해 준다고 했지만… 누군지도 알아낸 것 같고…. 이제 행방만 알아내면… 어… 그러니까….]

[그 에스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음….]

헤이는 또다시 망설였다.

‘잡을 수 있다고 해야겠지? 아씨, 근데 만약에 그래 놓고 못 찾으면 어떻게 해. 누군지 알아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그리고 잡았다고 놓칠 수도 있고… 그래도 못 잡을 거라고 말할 순 없잖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동시에 오갔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질문을 던졌는데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는 건 이번에도 역시 자신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내 질문 하나에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헤이는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에스퍼는 꼭 벌을 받을 거야.]

착한 사람.

너무나 다정한 사람.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에는 그 에스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힘들었었다. 그 에스퍼에 대해 알고 싶었고, 찾고 싶었고, 찾은 다음에는 내가 직접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서 이미 수백 번은 죽었을 만큼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상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만약 그 에스퍼가 누군지 밝혀진다면 제대로 된 벌을 받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는 이가 있다는 것은 나를 항상 조심하게 했다. 그리고 잃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다는 것은 오래된 미련을 버리게 했다. 지금의 내겐 김우영에 대한 진실과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어느 순간, 그렇게 변해 있었다.

일일이 흥분하며 당장 준서와 함께 그를 찾아보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도, 순간 화가 나더라도 참을 수 있는 것도, 내 옆에 헤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겁하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괜찮은 거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괜찮을 수 있는 이유는 전부 헤이 덕분이었다.

***

준서에게서 연락이 온 건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아이를 무사히 찾았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혹시 집으로 와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고 전화를 끊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헤이가 물었다.

[뭐래?]

[내일 집으로 와 달라고 하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어.]

[준서 이제 괜찮대? 가이드는?]

[잘 지내고 있대. 둘 다 괜찮은가 봐.]

[다행이다. 근데 한서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왜, 이상해?]

[음…. 뭔가 다른 생각 하는 것 같아서.]

이럴 때는 꼭 에스퍼 같다니까.

남들이 보면 절대 모를 내 작은 변화까지도 어쩜 이렇게 잘 아는지. 간혹 내가 모르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그냥. 결국 내가 못 한 걸 준서는 해내는구나, 싶어서. 뭔가 이상한 기분이네.]

[아….]

[기분 나쁜 건 아니야. 오히려 잘된 거니까 좋은 쪽이야.]

[응.]

여전히 헤이는 내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대체 언제까지 그러려나 하고 두고 보았으나 2주가 지나자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약속한 시각에 도착하자 어느 때보다 반가운 얼굴이 우리를 맞이했다. 준서 옆에서 우릴 반기는 재성 씨도 건강해 보였고, 준서 또한 일주일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색을 띠고 있었다. 30분쯤 지나 우리 말고 다른 두 사람이 찾아왔다. 준서는 그들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뭐라고?]

“…….”

“와, 미쳤다.”

“말도 안 돼….”

준서가 해 준 말은 놀라우면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 에스퍼의 정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지만, 그 일에 센터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우리가 여태껏 잘못 알고 있었던 에스퍼의 정체는 ‘이정환’ 이라는 연구원으로 준서와 재성 씨의 담당자였다. 여 박사님의 뒤를 이어 매칭 담당자로 임명되었으나 헤이와 나는 이미 그 전에 다른 담당자로 바뀌어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연구원이었다. 기억 조작 능력으로 이지현, 아니, 이제희의 동생 행세를 했고, 그녀를 이용해 가이드를 빼돌렸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잡히지 않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건 센터 고위 관계자 중 조력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겐 그 에스퍼의 정체보다 센터를 관리하는 몇몇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협력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났다.

“우영이를 보낼 때도, 알고 있었을까?”

내 질문을 들은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때는 몰랐을 거야. 김우영이 죽고, 그 후에 주인님의 정체를 알게 된 것 같아. 그리고 직접 찾아서 본인들을 도와주는 대신 신분을 숨겨 주겠다고 거래를 했겠지.”

“…쓰레기들.”

몇 년 동안 나를 이용하더니 그래 놓고 그 이후에 더 더러운 짓을 하고 다녔구나.

그때 그 테러 사건으로 인해 조직 개편이 되었었지만, 그 당시 바뀐 고위 관계자는 정말 소수였다. 이렇게까지 큰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고위 관계자 중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 고위 관계자가 누군지는 찾아낸 거야?”

“어.”

“누군데.”

“AU그룹 회장. 미디어에 공개된 적은 없는데 그 그룹 실소유주이자 센터의 실세라고 하더라.”

AU그룹은 에스퍼가 현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장비와 무기를 만드는 회사였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특수 자재를 사용해서 무기를 제작하는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로 특수 군수 산업 시장의 유일한 공급자였다. 완전 독점 기업이 된 순간부터 단기간에 성장해 정부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회사였다.

센터가 정부의 하위 기관이 아니라도 센터가 운영되려면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정부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기업이 상대라면 이 일을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그 회장이란 사람이 고위 관계자 중에서도 제일 높은 급이라며. 게다가 센터도 절대 어떻게 못 할 텐데 우리가 그 사람들이 저지른 걸 밝혀낸다 해도 쉽게 인정하려 할까? 그렇게 많은 에스퍼와 가이드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사람들인데.”

“저도 제일 걱정되는 부분이 그거예요. 게다가 아시다시피 센터라면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할 텐데, 윗사람이 그랬다는 걸 알게 되어도 그대로 덮으려고 할 것 같아요.”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도움을 받자.”

“협회가 과연 도와줄까?”

“글쎄.”

“그쪽도 그렇게 협조적이진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잘못해서 센터에 알려지는 날에는 모든 게 끝나.”

“일단 그전에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 확인한 후에 조심스레 진행해야 할 것 같아.”

“그래.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쪽이 그나마 희망이 있네. 비슷한 사례가 있으면 조사해 본 후에 진행하자. 그동안 증거를 모아야 하니까 회장 주변 인물 자백부터 받아 두고.”

[나도 도울게.]

그 이후, 모든 일이 잘 진행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협회 쪽에 협조를 구하거나 준서가 알아낸 정보로 주변 인물을 심문하는 일밖에 없었지만, 결국 준서 쪽에서 모든 증거를 모았고 그 에스퍼의 행방도 알아냈다.

조금 위험한 방법이긴 했지만, 준서의 가이드인 재성 씨가 에스퍼를 유인하는 방법을 썼다. 준서가 한 박자 뒤늦게 출발했고, 헤이는 센터에 있다가 재성 씨가 움직이는 동안 GPS를 통해 위치 파악을 하는 데 도움을 줬다.

나는 현장으로 가지 않고 대기하고 있다가 협회 쪽에 연락하는 쪽을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준서에게 온 좌표를 협회 측으로 건네자 얼마 후 준서에게 연락이 왔다. 협회의 도움을 받아 잘 인도했다는 소식이었다.

- 정말 안 와 봐도 되겠어?

“내가 거길 왜 가.”

누구보다 진실을 알고 싶었고, 누구보다 만나고 싶었었다.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지.

예전의 나였다면 이미 진즉에 준서가 지금 서 있는 그곳으로 가 그 에스퍼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에스퍼가 벌을 받는 데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걸로 만족스러웠다.

“나머지는 협회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너도 그만 쉬어.”

- 센터는?

“센터는 다 정리된 후에 가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다 찍혀서 지금은 어차피 못 가.”

농담을 건네자 수화기 너머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일 다시 연락할 테니까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집에나 가.”

- 고마워, 형.

고마운 사람은 오히려 난데.

“수고했어, 준서야.”

전화를 끊자 헤이가 부쩍 보고 싶었다.

***

드르륵-

차고 문이 올라가는 소리에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1, 2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헤이가 들어왔다.

[수고했어.]

가까이 다가가 너른 품에 안겼다. 밖이 꽤 추운지 어디선가 찬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 위로 올라온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당신도.]

차창에 비친 우리 둘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거실 중앙에 서서 가만히 껴안고 있는 모습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하지만 서너 걸음만 옮기면 편안한 소파가 있는데도 왠지 그대로 있고 싶었다.

[잘 해결됐어.]

[응.]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이번에는 등을 어루만졌다. 딱히 가이딩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단단한 손바닥이 닿자마자 심장이 덜컹거렸다.

두근. 두근.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 가슴은 여전히 한 사람을 향해서만 뛰었다.

[그 에스퍼는 어떻게 되는 거야?]

[협회 쪽으로 인도했으니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아마 프랑스로 가게 될 것 같아. 거기서 벌을 받겠지.]

[센터는?]

[그것도. 협회가 진실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공개한다고 했어. 센터에서 벌어진 일이나 AU그룹에 관한 거 전부.]

[잘 됐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그냥 담담하네.]

그렇게 말하자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닿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잖아.]

아닌데.

헤이는 마치 끝을 맺지 못한 이야기가 이제야 다 끝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그 이야기의 마침표는 이미 오래전에 찍혀 있었다.

‘당신이 정말 다 잊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면 아마 평생 그 과거를 짊어지고 가야 할 거예요. 난 그게 더 싫어요.’

언젠가 헤이는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진실을 알지 못한 몇 년 동안에도 난 과거를 떠올리지 않았다. 헤이와 함께하는 그 시간 동안에는 과거가 아니라 오롯이 그 순간을 살았다.

그가 내게 처음 왔을 때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간혹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현실인지 의심할 정도로 그 행복은 더 커지기만 했다. 한 사람을 만났을 뿐인데 완전 새로운 삶을 살았다.

과거는 이미 예전에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 있었고, 헤이를 만난 순간부터 나는 새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의미로 다행이라고 생각해.]

[응?]

[이제 당신이 내 눈치 안 봐도 되잖아.]

[…어?]

등을 만지던 손이 아까부터 어정쩡하게 허리 근처를 빙빙 맴돌았다. 차마 옷 속으로 집어넣지도 못하고, 아래로 내려오지도 못하고, 허리와 엉덩이 경계선에서 어느 쪽으로 갈지 갈등하고 있었다.

[분위기 안 따질 땐 언제고.]

상대의 팔을 획 잡아당긴 후 가슴팍을 툭 밀었다. 털썩 소파에 반쯤 누워 버린 헤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쁜 눈동자에 놀라움이 비쳤다.

다짜고짜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입을 맞췄다. 주춤하던 것도 잠시, 헤이는 곧 익숙하게 뺨을 감싸 안고 팔을 둘렀다. 사랑한다고 말하자 내 것이 아닌 기쁨이 밀려왔다. 마음 한가득, 행복이 가득 찼다.

나는 이 이야기의 마침표가 영원히 찍히지 않기를 기도했다. 영원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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