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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헤이의 한국어 공부 (26/27)

외전 3. 헤이의 한국어 공부

신한서

매우 평범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별다른 것 없는 그저 보통의 날.

그런 단조롭고 평온한 하루를 바꾼 것은 오후 5시에 집으로 돌아온 헤이의 한마디였다.

[한서. 내가 불편해요?]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이야?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말에 잠깐 굳었다가 우선 말 그대로 해석해 답을 해 주었다.

[당연히… 불편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 사이는요?]

[네?]

[우리가 가깝지 않아요?]

[당연히 가깝죠.]

[그런데 왜죠?!]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더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그것도 잔뜩 원망이 담긴 말투였다.

[그런데 왜….]

충격받은 헤이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황당해하는 이 와중에도 그 모습이 마치 우울한 강아지를 떠올리게 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요?]

토라진 채 소파에 앉아 버린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학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나가기 전까지 괜찮았으니 그가 갑자기 이렇게 이상한 말을 던지는 이유는 나갔을 때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 게 분명했고, 그렇다면 한 곳밖에 없었다.

최근 헤이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중이었다.

학원은 센터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일반인을 만날 일이 없어서 얼굴이 알려진 헤이도 아무런 문제없이 다닐 수 있었다. 메이트를 따라 한국에서 머물거나 특별 요청으로 장기간 한국에 머물게 된 에스퍼나 가이드가 신청할 수 있고, 가이드와 에스퍼반을 따로 운영했다.

처음에는 헤이처럼 에스퍼를 따라 한국에 머무는 가이드가 몇이나 되려나 싶어 참가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런 내 예상과는 달리 헤이를 제외한 인원이 무려 열네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것도 5개월 동안 가이딩 지원을 하러 온 한 명을 빼고는 모두 메이트를 따라 한국에 머물고 있는 가이드라고. 헤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가이드들을 만나서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것 같다며 기뻐했었다.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는 매주 목요일마다 헤이의 기분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왜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온 건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오늘 학원에서….]

헤이는 조곤조곤 오늘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났던 건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오늘 배운 주제는 ‘높임말’ 이었고, 그걸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다 보니 거기서 한둘씩 나온 말로 오해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메이트와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는 거죠?]

[내가 강사님에게도 물어봤어요. 분명 나보다 나이 많은 상대에게 쓰는 언어라고 했다고요! 한은 나보다 나이 많은데도 존댓말을 쓰잖아요.]

[그거야… 아니, 일단 들어 봐요. 우리 대화의 99.9%는 영어예요. 그런데 거기에 어떻게 존댓말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껏 내가 물을 때마다 해 준 한국어도 전부 존댓말이었잖아요.]

[아…. 그건….]

사실 헤이가 이토록 한국어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헤이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후 집에서도 꼬박꼬박 연습했고, 최근에는 꼭 학원에서 배운 한국어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궁금해질 때마다 내게 묻곤 했다.

보통은 어떤 상황에서 ‘지금 말한 걸 한국어로 말해 줘요’라고 부탁했었는데, 그때마다 말해 준 한국어가 전부 존댓말이었던 건 사실이었다.

[-요. 로 끝나는 건 존댓말이라고 했어요. 한이 말해 준 건 다 똑같이 끝났다고요. ‘보고 싶어요’, ‘기다려 줘요’, ‘금방 갈게요’, 또 ‘사랑해요’ ‘지금 당장….’]

[알았어요. 그래요, 맞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존댓말을 쓰는 게 헤이가 불편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럼 왜요?]

지금껏 우리가 사용해 온 언어는 영어지만, 매번 머릿속으로는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받아들였으므로 처음에 주고받은 대화는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존댓말로 주고받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쭉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존댓말을 한 것뿐이었다.

[그건…. 처음 만났을 때는 당신 나이를 모르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처음 만난 상대에게는 보통 존댓말을 써요. 그래서-]

[하지만 지금 우리는 처음 만난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중간에 말을 놓자고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거야 영어로만 대화했었으니까요. 영어는 존댓말이라는 게 없잖아요. 동의할 필요조차 없었죠.]

[헤이, 그러니까….]

아. 답답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생각하는 걸 고대로 이해시킬 방법이 없어서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진정하고, 지금부터 그럼 존댓말을 하지 않으면 되죠?]

결국 나는 차라리 이해시키는 걸 포기하는 게 더 옳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뭔데요?]

[나도 당신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을래요. 그래도 돼요? 나이가 달라도 매우 가까운 관계에서 동의를 얻으면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 배웠어요.]

뭐, 상관없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영어로만 대화하는 우리에게 지금 대화는 완전히 불필요했다. 헤이가 한국어를 배운다고 해도 한국어로 대화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고, 영어로는 아무리 말해도 존댓말과 반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받아들이기 나름이었다.

그런데도 헤이는 계속해서 몇 번이나 강조했다. 우리는 무척 가까운 연인 관계니까 서로 편하게 대화하자고.

[좋아요. 난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난 뒤 곧바로 머릿속에서 방금 했던 말을 정정했다.

‘좋아요’ 가 아니라 ‘좋아’ 가 되는 건가?

입에서 뱉는 말은 똑같은데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고 단순할 줄 알았던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치 아픈 숙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껏 없던 두통이 찾아온 듯했다.

***

[한서.]

본부 일이 오래 걸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각 집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차고 문을 닫고 거실로 발을 내딛는데 미리 나와 있던 헤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잘 다녀왔어요?]

[네. 당신은 언제 왔어요?]

[한 30분 전에요.]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정리되지 않는 존댓말과 반말이 섞여 뒤죽박죽이었다. 며칠 전부터는 언젠가 익숙해지겠지, 하고 그냥 원래대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피곤하죠?]

단단한 팔이 나를 껴안았다. 널따란 품에 안기자 콩닥대는 심장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딱히 가이딩을 하는 것도 아닌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오늘은 어땠어요?]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지겨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때였다.

[괜찮았어요. 오랜만에 청장님이랑 점심도 먹었고. 당신은요?]

[나도 괜찮았어요. 오늘은 정말 재밌는 걸 배웠어요.]

오늘은 목요일, 헤이가 한국어 수업을 듣고 온 날이었다.

[뭐 배웠는데요?]

[호칭이요.]

[아,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겠어요.]

[맞아요. 근데 한국은 특이하게 누굴 부르는데도 호칭을 붙여서 부르더라고요. 정말 신기했어요. 포르투갈어나 영어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말을 잇는 헤이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설마.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밀려온 건 헤이가 ‘우리’라고 말한 순간부터였다.

[호칭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예상대로 호칭을 만들자는 그의 제안에 나는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갑자기요?]

[강사님이 말해 줬어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부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고.]

[그렇지만 연인 사이에 꼭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우리는 말도 편하게 하기로 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실례라고 했어요. 남자가 나이 많은 사람을 부를 때는 분명히-]

[잠깐만-!]

서둘러 손으로 헤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헤이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걸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호칭은 절대 싫어요.]

[왜요?]

[보통 일반적으로 호칭을 붙여서 부르기는 하지만 연인을 부를 때는 꼭 남들과 똑같은 호칭으로 부를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연인 사이에는 뭐라고 부르면 돼요?]

[그냥… 이름만 불러도 돼요.]

[정말요?]

[네.]

[하지만 분명 강사님이-]

[정말이에요. 내 말을 믿어요.]

이미 말을 편하게 하자고 했던 것만으로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만약 이상한 호칭까지 정하게 된다면 정말로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계속 주고받는 말은 분명 영어일 텐데 왜 자꾸 바꾸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헤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말을 믿는 듯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잘 넘어가는 듯했는데.

일주일 후-

차고 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섰는데 이쯤 되면 들려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학원이 제시간에 마쳤다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이가 거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침실을 지나 서재 방문을 열자 웬일로 헤이는 노트북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요?]

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만 보았다.

[왜 그래요?]

원망스러운 눈빛과 동시에 잔뜩 토라진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왜 내게 거짓말했어요?]

[무슨 말이에요?]

[호칭이요. 연인 사이에는 이름만 불러도 된다면서요.]

[맞아요.]

[거짓말이잖아요.]

[진짜예요. 누가 거짓말이래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 부른다고요!]

헤이는 오늘 학원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설명했다. 지난주에 배웠던 걸 복습하다가 우연히 호칭에 관해 다시 이야기했는데 그러다가 연인을 부르는 호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는데요?]

그렇게 묻자 헤이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적힌 글을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만약 남남 커플일 경우, 막 사귄 커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여 여전히 존댓말을 쓰는 커플은 이름 뒤에 ‘~씨’ 를 붙여 부르고, 원래 잘 알던 관계의 경우 기존에 불렀던 호칭 그대로를 유지한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조금 더 관계가 발전하고 나면 호칭은 자연스레 바뀐다. 상대의 특징에 따라 서로 다른 별명을 지어 주고 사랑스럽게 불러 주거나 혹은 똑같은 호칭을 부르기도 하는데, 그중 가장 흔한 호칭은 ‘자기야’ 혹은 ‘여보….’]

[대체 그런 건 어디서 찾아본 거예요?]

서둘러 헤이의 말을 끊고서 그가 보고 있는 화면을 보기 위해 옆으로 다가갔다. 화면에는 유명한 검색 엔진 사이트가 떠 있었다. 연인 사이에 부르는 호칭 종류가 잔뜩 나열된 걸 보고 허락 없이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어떻게든 말려야 해.

그런 생각으로 나는 계속해서 남들처럼 호칭을 바꾸겠다는 헤이를 말렸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헤이는 죽었다 깨나도 싫다는 내 의견을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서는 ‘그러면 베이비나 허니는 어때요?’ 라는 끔찍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어 수업 따위 없어져 버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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