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그랬던 이야기- 커플링 (24/27)

헤이, 나의 가이드 외전

지은이│라루체

공금 절갠 By.키엘

외전 1. 그랬던 이야기- 커플링

헤이수스 실바

눈 대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월, 한과 나는 협회의 요청으로 독일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은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문 앞에서 한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렴.}

포옹과 함께 짧은 인사를 건네자 곧바로 저녁을 먹자는 말이 돌아왔다. 식사 전 짐을 풀기 위해 방으로 갔다가 1층으로 내려가려 했는데, 센터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전화를 받는 사이 한이 먼저 1층으로 내려가고, 그리 길지 않은 통화를 하고 뒤늦게 거실로 나가자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거실에는 호세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은?}

{뻔하지.}

가는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서재가 있는 쪽이었다. 단번에 아버지와 그가 체스를 하러 갔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말랬어.}

그 말에 서재 쪽으로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저녁 먹어야 하잖아. 한은 비행기 안에서도 거의 못 먹어서 배고플 거야.}

{응. 근데 안타깝게도 다 되려면 30분은 더 있어야 하나 봐.}

이어 호세는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정성을 다한 스튜 요리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저녁 준비가 다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어머니가 조금 화가 나셨다는 말과 함께.

부엌 쪽에서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빼고 안쪽을 들여다보자 어머니와 보조하는 요리사 모두가 굉장히 분주해 보였다. 괜히 방해될까 싶어 다시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직 내려오지 않으신 것 같았다.

{어?}

호세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오. 반짝반짝하네.}

그리곤 내 왼손을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리며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커플링이야?}

{응.}

손등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호세는 어디서 맞췄냐는 둥 언제 맞춘 거냐는 둥 의미 없는 질문들을 던졌다.

{내 생일 때, 백화점에서 맞춘 거야.}

{생각보다 심플하다. 형이 골랐어?}

{아니.}

{어쩐지. 형 취향은 아니라서 왠지 그럴 것 같더라.}

처음에 내가 골랐던 반지는 원래 이런 심플한 디자인이 아니라 조금 더 화려한 반지였다. 한은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을 피워 결국 그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했다.

{근데 의외네. 생일 때 커플링 맞출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설마 서프라이즈로 받은 거야?}

{아니. 한이 먼저 준 거 아니야.}

{아. 그럼 형이 하자고 한 거야?}

{아니.}

{그럼 뭐야? 형 생일 때 맞춘 거라며. 한이 먼저 준다고 한 것도 아니고, 형이 달라고 한 것도 아니면 대체 뭔데.}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엉망이 된 내 서프라이즈 계획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떠올리면 지금도 기분이 우울해졌다.

***

넉 달 전-

유난히 하늘이 높고 푸르렀던, 그런 날이었다. 한층 무더웠던 날씨가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했다. 일 년 내내 여름인 브라질과는 달리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가을이었다. 해가 쨍하게 뜬 낮인데도 어디선가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 달에 한 번 정원사가 오는 날이라서 오전 시간을 밖에서 정신없이 보내고, 오후 세 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한은 창문을 활짝 열어 둔 채 거실 한편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왔어요?]

거실로 들어서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선 뒤 내게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감싸 안으려다 전신이 흙투성이임을 깨닫고 얼른 손을 거두었다.

[이제 다 끝난 거죠?]

[네. 좀 씻고 올게요. 쉬고 있어요.]

곧바로 욕실로 가 엉망이 된 옷을 벗고 미적지근한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수건으로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털며 거실로 나오니 이번에도 역시 소파에 앉아 있던 한이 몸을 일으켰다.

[물 줄까요? 목마를 것 같은데.]

[내가 마실 테니까 앉아 있어요.]

주방에서 더 가까웠던 내가 먼저 냉장고 쪽으로 가자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도 한은 굳이 내 옆으로 와 서성였다. 아무래도 혼자 집에서 쉬었던 게 미안한 것 같았다.

[힘들지 않아요?]

[전혀요.]

애초에 정원을 포함한 집안일 전부를 맡겠다고 말한 건 나였는데도 한은 늘 그 점을 미안해했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이나 가정부나 관리인을 쓰자고 했으나 매번 거절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우리 두 사람의 공간에 들어오는 게 싫어서 그랬지만, 지금은 오히려 취미 생활에 가깝다고 할 만큼 집안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특히 정원을 가꾸는 일은 더욱 그랬다.

[그래도 정원사를 더 자주 부르는 건 어때요? 아니면 인원을 늘리거나.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오시니까 당신이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요. 번번이 옆에서 보조해 줘야 하잖아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보조하는 것도 나름 재밌어요.]

그 말에 반듯했던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

[그러면 정원 일 말고 나머지 집안일을 좀 나누어서 해요.]

[그래요.]

[대답만 하지 말고, 진짜로요.]

[알겠다니까요. 이미 그러기로 했잖아요.]

[맞아요. 분명 지난번에도 그러기로 했죠. 근데 그렇게 약속해 놓고 항상 당신이 내가 할 일을 하는 거 알아요?]

[그건 당신이 바쁘니까 내가 좀 거들었던 거예요.]

시원한 물 한 컵을 단번에 비운 후 내 옆에 반듯하게 서 있는 몸을 꽉 껴안았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건 분명 나인데, 상대에게서 샤워 코오롱 같은 좋은 냄새가 났다. 목덜미에 코를 킁킁대자 간지러운지 품에 안긴 몸이 꼼지락거렸다.

[헤이. 이번엔 정말 진지해요, 나.]

[당신은 늘 진지해요.]

[그러니까, 읏- 잠깐! 아, 정말.]

한은 슬그머니 옷 속으로 집어넣은 내 손을 덥석 붙잡고선 나를 노려봤다. 그래 봤자 한 뼘은 더 낮은 곳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얼굴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일단 앉아요. 앉아서 계속 이야기해요.]

[이왕이면 침대가 좋은데.]

[…헤이.]

[알았어요.]

한의 무릎을 베고 눕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아직 덜 마른 머리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매일 꾸준히 운동하는데도 확실히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과는 달라서 6시간이 넘는 노동은 피로를 불렀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쉬는 날이 겹치니까 청소는 그날 같이해요.]

[좋아요.]

[좋다고 해 놓고 이번에도 나 없는 동안 하면 화낼 거예요.]

[알겠어요.]

[또 세탁은….]

한은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또 한 번 읊었다.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사실 전혀 신경 써서 듣고 있지 않았다.

한은 단순히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버튼을 누르는 건 잘하지만, 치밀성을 따지는 정신계의 특징 때문인지 지나치게 꼼꼼해서 다 된 것들을 개거나 정리하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내가 하면 20분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을 한의 손에 맡기면 한 시간이나 걸리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그나마 세탁은 나은 편이었다. 청소나 물건 정리를 시작하면 꼬박 반나절이 걸렸으니까. 예전에 함께 청소를 한 날도 일부러 그의 페이스를 맞추느라 이미 끝낸 곳을 몇 번이나 닦아야 했다.

이렇게까지 말할 때는 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냥 모른 척 알겠다고 들어주고 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그리고 나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아침이나 저녁을 준비할게요.]

[뭐라고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왜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놀랄 일이라기보다는… 절대 안 될 일이지.

한이 내게 딱 한 번 음식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함께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별일 아닌 것처럼 아침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하기에 흔쾌히 허락했었다. 한 번도 요리를 해 본 적 없다는 점이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그가 선택한 메뉴가 핫케이크와 달걀 프라이라는 걸 듣고 괜찮을 것 같았다.

맨 처음, 재료 하나하나를 저울로 개량할 때까지만 해도 어쩌면 완벽한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복잡한 음식과 달리 핫케이크는 레시피대로 잘 섞어서 굽기만 하면 딱히 어려울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날 이후, 나는 모든 과정을 알더라도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것이 요리라는 걸 깨닫고 두 번 다시 한에게 요리를 맡기지 않았다.

‘헤이. 원래 이렇게 버리는 게 많은 건가요?’

고작 밀가루를 체에 걸렀을 뿐인데 서툰 손놀림으로 인해 사방에 가루가 튀었다. 체를 들고 가장자리를 살짝만 치면 되는 간단한 일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체 친 밀가루와 다른 재료를 섞는 것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선반을 덮은 하얀 가루 위에 거품기에 묻은 반죽이 잔뜩 흘러내려 그 자리가 엉망이 됐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조금 번거롭겠지만, 그저 나중에 잘 닦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진짜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표면에 기포가 생기면 뒤집으라는데 기포가 안 생겨요. 어…? 타는 냄새 나는 것 같은데.’

문제는 불을 쓸 때부터였다.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른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반죽을 넣고 굽는 데 있어 조리 방법을 보고도 그대로 해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불을 써야 하는 달걀 프라이도 제대로 완성될 리 없었다. 결국, 그날 아침은 내가 만든 오믈렛을 먹고 30분이나 걸려 부엌 청소를 해야 했다.

그랬는데 지금 그걸 다시 하겠다고?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일단 한번 해 볼게요.]

내 마음을 눈치챈 한이 눈썹을 내리며 찡그리는 듯 웃었다. 걱정하는 줄 알면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잘해 볼 거예요. 진짜로.]

[…….]

[진짜라니까요. 나도 뭔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최근 들어 왜 자꾸 안 하던 걸 해 주겠다고 하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연인 사이에 꼭 뭔가 해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매번 해 주잖아요. 나는 늘 받기만 하고.]

[내가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랬어요, 계속. 가이딩만으로도 고마운데….]

[가이딩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매번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사실 가이딩이래 봤자 연인 사이의 스킨십이나 다름없는데 처음 시작이 그래서인지 한은 여전히 가이딩받는 것에 대해 별도의 감사를 표했다. 메이트가 아닌 상태에서 내가 호의로 가이딩을 제공하던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데.

따지고 보면 그때도 단지 가이드가 없는 한을 위해서 좋은 마음으로만 가이딩을 했다기보다는 그를 좋아하는 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어쨌든 이것저것 다른 것도 당신이 다 하잖아요.]

[그래도 요리는 참아 줘요.]

한은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그 고갯짓 한 번에 또 가슴이 설렜다. 몇 달이 지나도 그가 웃는 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봉긋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 맞다. 헤이. 대신 다음 주 수요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날은 아침도 내가 준비할게요. 요리는 직접 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사 와서라도 준비할 거예요.]

[다음 주 수요일이요? 왜요?]

[당신 생일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9월 19일.

[설마 잊고 있었어요?]

[네.]

[중요한 날이니까 잊지 말아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걸.

한 번도 내 생일을 잊지 않았던 내가 9월에 접어들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이유는 내 생일보다 더 중대한 행사가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9월 27일.

내 생일보다 약 일주일 늦게 돌아오는 그날은 한이 태어난 날이었다. 놀랍게도 우리 둘의 생일은 고작 8일 차이밖에 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기억하기도 매우 쉬웠다. 최근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의 생일에 관한 것밖에 없었다.

이제 거의 2주밖에 남지 않은 그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이미 몇 주 전부터 계속 고민해 왔지만, 막상 몰래 백화점을 갈 타이밍이 좀처럼 잡히질 않아 직접 사러 갈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내일 한이 오전부터 오후까지 본부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한이 없는 시간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알았어요. 할 말은, 다 끝났어요?]

[네.]

[그럼 이제 기운 없는 나 좀 위로해 줘요.]

[안 힘들다면서요.]

[그랬는데 갑자기 힘든 것 같아서.]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한은 그저 웃기만 했다. 보드라운 손길이 내 뺨을 두어 번 쓸어내리곤 머리통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갑자기 소파 위에 무릎을 세워 앉길래 뭘 하려나 했더니 자신보다 훨씬 체격이 큰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좀 기운 나요?]

[음…. 조금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더 힘써 줘 봐요.]

[…일부러 그러는 거죠? 가이딩이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내게 뭔가 해 주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럼 오늘은 당신이 내게 가이딩해 주면 되겠네.]

묘하게 뒤바뀐 자세로 있다가 그를 무릎 위로 들어 올렸다.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한은 슬금슬금 다시 옷을 걷어 올리는 손길에 다시 한번 웃었다. 부쩍 웃음이 헤퍼졌지만 내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웃어도 좋았다.

무척 행복한 하루였다.

***

평일 오전의 백화점은 특별한 행사가 없어서인지 예상보다 더 한가했다. 특히나 명품 위주로 전시된 본관의 경우, 카페테리아가 있는 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하는 직원과 손님 수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둘러보는 손님이 적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매장을 둘러볼 때마다 직원들이 곧바로 그 옆에 따라붙었는데, 내가 지나가는 곳은 그저 직원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외국인이라는 이유가 첫 번째인 듯했고, 그다음은 이곳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살기 전, 대외적으로 노출될 때는 늘 격식을 차린 옷만 입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익숙한 내 모습은 미디어에서 보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 이렇게 외출을 하게 될 때면 한국에 있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반대의 옷차림을 했다. 단지 그것만으로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오늘도 캐주얼한 옷차림에 캡 모자를 눌러쓰고 나왔다. 한이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오늘따라 따라붙는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다.

드르륵-

매장을 둘러보던 와중에 문자가 왔다. 한에게서 온 것이었다.

Han S: 끝났어요.

벌써요?

첫 번째 심문을 11시에 시작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12시쯤 끝날 줄 알았는데, 문자가 온 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Han S: 네. 생각보다 조금 일찍 끝나서 근처에 점심 먹으러 가려고요.

두 번째 심문은 몇 시예요?

Han S: 1시요.

알았어요. 맛있게 먹어요.

Han S: 아, 그리고

Han S: 마지막 심문이 내일로 바뀌었어요. 오늘은 일찍 끝날 것 같아요.

취소되었다고? 오늘 한은 세 건의 심문이 있었는데, 4시에 있는 마지막 일이 취소되었다는 건 1시에 있는 두 번째 심문을 끝내고 빠르면 2시 반쯤 집에 도착한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5시 넘어 도착할 거라고 예상하고 여유롭게 둘러볼 생각으로 이제야 1층을 반쯤 돌아봤는데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알겠다는 짧은 문자를 보낸 후 곧바로 걸음을 서둘렀다. 1층 잡화점을 끝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시계를 둘러보기 위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보석 매장으로 들어서자 직원 한 명이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그는 생각보다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선물할 것을 보려고 하는데, 일단 좀 둘러볼게요.]

[그러면 천천히 구경하시다가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시계가 전시된 쪽으로 자리를 옮겨 몇 개의 시계를 골라 놓고 이것저것 질문을 쏟아 냈다. 디자인과 성능이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총 세 가지였다. 하지만 세 가지 중 그 무엇도 내게 확신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꽤 까다로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가던 직원은 떨떠름한 내 표정을 보고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혹시 연인을 위한 선물입니까?]

[네. 맞아요.]

남에게 직접적으로 연인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라서일까,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조금 들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면 이쪽은 어떠십니까?]

직원이 가리킨 곳은 반지가 놓인 진열대였다. 사실 생각해 놓은 다른 후보 중 하나였기에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정중앙에 놓인 반지 한 쌍이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꺼내서 볼 수 있나요?]

[당연하죠.]

내가 선택한 반지는 로즈 골드와 화이트 골드 투톤으로 된 굵은 밴드에 총 6개의 보석이 둘러싸인 것이었다. 주위에 있는 다른 것들보다 훨씬 화려한 디자인으로 눈에 띄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열된 것 중 가장 비싼 상품이라는 설명이 따라왔다.

[모든 커플링은 한쪽 디자인이 다르게 나와 있지만, 원하신다면 같은 디자인으로 한 쌍을 주문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눈치 빠른 직원은 조금 전 내가 남자 시계를 둘러본 것을 잊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사는 쪽으로 거의 90% 마음이 기울었다.

[생일이 2주 정도 남았는데, 그 전까지 가능할까요?]

[디자인별로 제작 일정이 달라서 한 번 더 확인해 본 뒤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누군가와 짧은 통화를 끝낸 직원은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다행히 이 디자인은 주문이 많지 않아서 10일이면 제작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오늘 주문하시면 늦어도 다음 주 주중에는 찾으러 오실 수 있는데,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알겠다고 대답하려다 잠깐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어 대답을 망설였다. 당장 오늘 주문을 하려니, 정작 제일 중요한 한의 반지 사이즈를 모르고 있었다.

사정을 들은 직원은 몇 가지를 물었다.

[직접 물어보실 수는 없는 거죠?]

[네. 몰래 준비하는 거라서….]

[흠. 착용하시던 반지가 있으면 가져오시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만, 당연히… 없으시겠죠?]

고개를 저었다. 반지는커녕 시계 외에는 액세서리를 전혀 착용하지 않는 그가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링게이지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상대가 모르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링게이지요?]

직원은 곤란한 얼굴로 진열대 뒤편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언뜻 보기엔 동전이나 열쇠 꾸러미처럼 보이는 그것은 커다란 고리 안에 몇 십 개의 둥그런 테두리가 크기별로 들어가 있는 신기한 형태였다. 금속으로 되어 있는 둥그런 테두리는 반지를 대신해 손가락 치수를 재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저 커다란 걸 들고 가서 과연 한이 모르는 사이에 치수를 잴 수 있을까? 당연히 걱정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럼 다시 올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이걸 어떻게 하지?

한의 생일까지는 정확히 17일 남아 있었다. 제작 기간이 10일 걸린다는 건 즉,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 내에는 반지 치수를 알아내 주문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둥근 쇠붙이가 주렁주렁 달린 링게이지를 손에 들고 한참 고민하다가 차고가 올라가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잘 쓰지 않는 서랍에 도로 넣었다.

뒤늦게 그중 예상되는 치수 몇 개 정도만 빼내야겠다는 방법이 떠올랐지만 그걸 생각해 냈을 때는 이미 한이 거실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헤이.]

[왔어요? 늦었네요.]

[네. 일이 좀 길어졌어요.]

한은 아침에 입고 나갔던 까만색 카디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뉴스 기사 보고 있었어요.]

[재미난 게 있었으면 말해 줘요.]

나를 만나기 전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전혀 관심 없던 한은 나와 함께 살면서 조금씩 변해 갔다. 여전히 직접 티브이를 보거나 뉴스 기사를 읽지는 않지만, 내가 티브이를 틀어 놓거나 뉴스를 볼 때면 옆에 앉아서 함께 보거나 가끔은 지금처럼 내게 묻곤 했다.

[딱히 없었어요. 오늘 덥다는 이야기뿐이던데요.]

거실에는 9월에 접어든 후 한 번도 틀지 않았던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온 실루엣이 내 옆으로 와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아, 덥다. 다시 여름이 왔나 봐요.]

가까이서 본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혹시 피곤해요?]

[…네. 이럴 때 보면 당신이 에스퍼 같네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것 같아서요. 오늘 힘들었어요?]

[조금요. 마지막에 한 심문이 좀 힘들었어요. 오랜만에 테러범이 아니었거든요.]

[테러범이 아닌 경우도 있어요?]

[네. 간혹 유괴범을 심문할 때도 있어요.]

[아…. 그러면 폭탄 위치 대신 유괴 장소 같은 걸 알아내는 건가?]

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냈어요?]

[네.]

[좋은 일을 한 거네요.]

[아니. 오늘은 아니었어요.]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표정으로 작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피곤한 얼굴에 한층 더 큰 그림자가 졌다.

[알아냈을 때는 이미 인질이 사망했더라고요.]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보통 장소만 알아내면 끝인데 범인이 인질을 죽였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그 부분까지 알아내느라 오래 걸렸어요. 범행 방법이라든가, 시간이라든가….]

[그런 것까지 당신이 해야 하는 거예요?]

[가끔 일부러 입을 열지 않는 진짜 나쁜 사람들도 있거든요. 이번이 딱 그랬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분이 왠지 싸한 게 느낌이 별로였어요. 결국, 유괴범이라기보다는 연쇄 살인범이었던 거죠.]

[설마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거예요?]

[처음인 줄 알았는데 결국 아니라는 게 밝혀져서…. 지금 다른 건에 대해서는 추가로 경찰이 조사 중이에요. 아마 이번 주에 다시 한번 부를 것 같아요.]

바로 옆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정말 미친놈이 많네요.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당신이 정말 대단해요. 나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한 대 쳤을 거예요.]

[나름 익숙해져서 그래요. 처음에는 나도 간혹 힘들었어요.]

[혹시 앞으로도 힘들어지면 꼭 말해 줘요. 내가 다른 건 해 줄 수 없지만 대신 화내 주고 짜증 내 줄게요. 정말 고생했어요.]

이럴 때 내가 옆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뿐이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한의 기분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평소보다 능력도 많이 썼으니 가이딩해야 되겠네요. 방으로 들어갈래요?]

나와 함께 살게 되면서 한은 또 한 가지 바뀐 점이 있는데, 그토록 잠이 없던 사람이 잠이 늘었다는 점이었다. 체력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은 물리계를 제외한 정신계 에스퍼의 수면 시간은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한계치가 정상적이지 않았던 한은 몇 년 동안이나 하루 서너 시간도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나와 메이트가 된 이후로 한계치가 안정적으로 돌아온 한은 수면 패턴이 정상으로 돌아와 일반인처럼 잠을 잘 수 있었고 가이딩을 받은 후에는 깊은 잠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렇다는 걸 깨닫자 이런 순간 참 나쁘게도 갑자기 지금 이 상황이 반가워졌다. 어떻게 몰래 반지 사이즈를 잴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던 나에게는 오늘 한에게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잠깐 손만 잡아 줘요.]

[그걸로 안 될 것 같은데.]

[지금은 이걸로 됐어요. 그냥 좀 쉬고 싶어요.]

한은 내 어깨에 툭 머리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위해 소파 위에 다리를 올리고 어깨를 감싸자 품에 안긴 몸이 금세 힘을 빼고 기대었다. 잠들었나?

[헤이.]

혹시 잠든 건가 해서 숨죽인 채 머릿속으로 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당연히 잠들 줄만 알았던 그가 나를 불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대답도 하지 못했는데 불쑥 질문이 날아왔다.

[혹시 생일날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갑자기? 아니 그것보다 본인 생일도 곧 온다는 걸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건가.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다음 주니까 많이 남은 거 아니에요. 더 미리 알아봤어야 하는데 오히려 조금 늦었는걸요.]

[난 뭐든 좋아요.]

[그러면 선물은요? 갖고 싶은 거 없어요?]

감겨 있던 두 눈이 어느새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뭐든 좋다며 대충 얼버무리자 계속해서 시선이 따라왔다.

[내가 선물 고르는 데 영 소질이 없어서요.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떠오르질 않아요. 그냥 아무거나 골랐다가 실망을 주는 것보다는 당신이 원하는 걸로 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 줘요.]

[정말 아무거나 괜찮아요.]

[물론 본인이 다 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 내게 받고 싶은 것 없어요?]

지금 내게는 내 생일 선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이 온통 반지 생각뿐인데 내 생일 선물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헤이?]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주스 마실래요?]

품에 안겨 있는 몸을 슬쩍 밀어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주방을 서성이다가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닿기만 하면 원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한의 능력이 업그레이드되며 이제는 생각을 조절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대신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닿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생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혹시 반지에 대해 생각을 하는 동안 그가 속마음을 읽게 되면 미리 준비하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전부 들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을 해야 해.

하지만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반지에 대한 생각이 더 자주 떠올랐다. 그렇다고 갑자기 함부로 속마음을 읽지 말아 달라고 말을 꺼내면 아예 대놓고 숨기는 게 있다고 보고하는 것과 같아 그런 부탁도 할 수 없었다.

하…. 괜히 이상하게 행동하면 더 들킬 가능성이 큰데 어쩌지….

그 후로도 한이 생일에 관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마다 일부러 말을 돌리거나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며 위기를 벗어났지만, 완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상 계속해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가 가진 능력에 대해 단 한 번도 거부감을 가진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그 능력이 싫어졌다.

그날 밤-

[오늘은 스테이크예요. 당신 건 미디엄 웰던으로 구웠어요.]

[맛있어 보여요. 잘 먹을게요.]

[내가 해 줄 테니까 줘 봐요.]

한은 곧바로 괜찮다고 말했으나 그의 앞에 놓인 접시를 가져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한은 미소를 띠었다.

[사실 스테이크 굽는 실력은 할아버지가 최고예요.]

[할아버지가요?]

[네. 지난번에 브라질 같이 갔을 때, 그때 먹어 봤잖아요.]

[아. 당연히 주방에서 준비한 건 줄 알았는데.]

[다른 요리는 어머니와 일하시는 분들이 준비하시지만, 스테이크는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거예요. 뒤뜰에 있는 커다란 그릴에서 엄청 정성 들여서 하시는데, 힘드니까 그냥 대충하자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직접 하세요. 화력에 따라 고기 맛이 다르다고.]

[몰랐어요. 진짜 맛있었는데….]

[근데 나중에 해 보니까 화력만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화력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결국 굽는 사람의 실력이 더 중요한 거였어요. 아버지나 다른 사람이 똑같은 그릴에 구워도 할아버지가 하시는 게 제일 맛있어요.]

다 썬 스테이크 접시를 다시 건네자 또 한 번 고맙다는 말이 돌아왔다.

[우리도 그릴 하나 살까요?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잘해요. 어릴 적부터 봐 와서.]

[하지만 그릴이라면 이미 있지 않아요?]

[음, 그건 너무 작아요.]

한이 말하는 건 캠프장에서나 볼 법한 작고 둥그런 1~2인용 그릴이었다. 물론 우리 두 사람만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청장님과 윤 박사님 식구를 초대해 그의 생일을 함께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난 후 마당에 있는 바비큐장을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어서 이참에 사람들을 불러 그곳에서 파티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올리지 말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모든 걸 자꾸만 그의 생일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됐다.

새로운 그릴을 사자는 내 제안에 한은 선뜻 알겠다고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만큼 맛있는 스테이크를 만들어 주겠다는 내 설득에 결국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당신이 먹고 싶은 거죠?]

[그렇기도 해요.]

[역시.]

그때까지만 해도 저녁 식사는 아무 탈 없이 이어졌다. 잘 구워진 스테이크와 매시 포테이토, 그리고 다른 사이드 디시를 비우는 동안 언제나처럼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디저트로 준비한 과일을 먹던 한이 갑자기 잊고 있던 생일에 대해 다시 말을 꺼냈다.

[아. 그러면 당신 생일날, 브라질 바비큐 먹으러 갈래요? 예전에 당신이 묵었던 호텔 있죠? 그 부근에 그런 레스토랑이 있다고 들었어요.]

[좋아요.]

[그리고 아까 말했던 생일 선물은 내일 함께 보러 가요. 본부 일은 12시쯤이면 다 끝나니까 오후에 같이 보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일이 예상보다 좀 늦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냥 여유로울 때 나중에 가요.]

[예상보다 늦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오늘 있었잖아요.]

[내일은 그냥 테러 건이라서 오늘처럼 길어질 일 없어요. 그리고 길어진다고 해 봤자 백화점은 늦게까지 하니까 오후 늦게라도 가면 되잖아요.]

사실 딱히 안 될 이유는 없었지만, 오늘 어떻게라도 반지 사이즈를 알아내 내일 오전에 백화점에 들르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혹시라도 오후에 같은 장소에 가게 돼서 실수라도 할까 봐 괜히 신경 쓰여 쉽게 알았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흠.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

[네? 아니요. 무슨 이유요?]

[안 될 이유가 없는데 알겠다는 말을 안 해서요. 원래 쇼핑 좋아하잖아요.]

[아…. 그런 거 없어요. 좋아요, 난.]

[그러면, 가는 거죠?]

[그래요. 내일 가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피하려고 일부러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들킬 바에야 그 보석매장에 가는 걸 하루 이틀 미루는 게 나았다.

밥 먹고 한이 샤워하는 동안 서랍에 있는 링게이지를 꺼내 고리에 걸려 있는 수많은 원형 금속 중 약지에 맞을 만한 것 몇 개를 빼냈다. 그리고 그가 잘 열지 않는 협탁 맨 아래 서랍 안에 미리 넣어 두고선 타이밍을 기다렸다.

타이밍을 잘 맞추더라도 중간에 깨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내가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 보이던 한은 4단계 가이딩만으로 기운을 빼더니 곧바로 기절하듯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은 내가 그의 손가락에 원형 틀을 세 번이나 바꾸어 끼울 동안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으응….”

마지막 링게이지를 끼울 때 딱 한 번 뒤척였으나 아주 잠깐이었다. 심장이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할 만큼 가슴이 뛰었지만 떨리는 손으로 네 번 시도한 끝에 결국 한의 반지 사이즈를 알아낼 수 있었다.

***

[잘 잤어요?]

내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어느새 나갈 준비까지 마친 한은 꽤 편안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나 어젯밤에 언제 잠들었어요?]

[음…. 가이딩 거의 끝날 때쯤?]

[미안해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오히려 그렇게 잠들어 줘서 고맙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한은 자신이 고작 4단계 가이딩 중간에 잠이 든 걸 미안하게 생각했다. 아마 그 이상을 바랐던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으니까 얼른 와서 앉아요.]

한은 세팅이 끝난 식탁을 훑어본 뒤 그제야 서둘러 의자에 앉았다.

[오늘 특별한 일 없으면 어제 말했던 대로 점심 전에는 끝날 거예요.]

[알겠어요. 백화점에서 만날 거예요?]

[아니요. 곧바로 집으로 올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가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릴 테니 한 차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난번에 갔던 곳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거기 말고 다른 데로 갈 거예요.]

우리가 자주 방문하는 백화점은 이곳에서 40분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은 그곳이 아닌 다른 백화점을 간다는 것을 뜻했고, 어쩌면 그중 하나가 어제 내가 갔던 백화점일 수도 있었다.

일부러 지금껏 함께 가 보지 않은 백화점을 찾아서 간 건데.

조금 불안했지만, 혹시 우연히 같은 곳을 가게 되더라도 같은 매장에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게다가 어차피 내 생일 선물을 고르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곳으로 유인하면 그만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한을 배웅한 후 어제 숨겨 두었던 링게이지 부속품들을 다시 고리에 끼워 넣었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알아냈어.

아직 한의 생일이 돌아온 것도 아닌데, 그에게 들키지 않고 사이즈를 알아낸 것만으로 큰일을 해낸 것 같아 괜히 기쁜 마음이 들었다. 벌써부터 반지를 받고 기뻐할 그의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한은 나가기 전 약속했던 대로 정확히 12시 30분에 도착했다.

[딱 맞춰서 왔네요.]

[미뤄질 일 없다고 했잖아요.]

오전 일이 잘 풀렸는지 기분도 좋아 보였다.

[가면 우선 점심부터 먹어야겠어요.]

[좋아요.]

어제저녁까지도 무얼 갖고 싶은지 생각해 두라며 어려운 숙제를 던져 주었던 한은 막상 백화점에 가는 동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선물보다는 점심으로 무얼 먹고 싶은지 묻더니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 지났는데도 차가 좀 막히네요. 거의 다 왔는데.]

바쁜 도심 속 높은 건물들 사이에 유독 더 화려하고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복잡한 도로를 헤치고 도착한 곳은 설마 했던 그 백화점이었다. 바로 어제 이 시간 내가 있었던 그곳.

어제와 단 하나 다른 점은, 어제는 오전에 도착해 주차장이 많이 비어 있었던 반면 오늘은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입구 가까이에 있는 주차 공간이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카페테리아가 신관 쪽에 있어서 이쪽에 대려고 했는데 가까운 자리가 없네요. 본관 쪽 주차장은 차가 좀 적을 것 같은데 그쪽으로 갈까요?]

[난 상관없어요.]

나는 마치 이곳이 처음이라는 듯 대답했다.

우리는 본관 쪽에 차를 대고 1층에서 신관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지나가는 동안 어제와 마찬가지로 직원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중 나를 알아본 몇몇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8층에 도착해서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돌아온 한은 내겐 아직 낯설기만 한 진동 벨 두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곳에 자주 왔었어요?]

한은 아주 자연스럽게 백화점 안을 돌아다녔다. 신관과 본관이 나누어진 데다 워낙 넓은 구조로 되어 있어 한두 번 와서는 헷갈릴 만도 한데 표지판이나 안내 지도 없이 신관으로 통하는 길이나 엘리베이터 위치를 곧바로 찾았고,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전에 카페테리아가 8층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요. 자주까지는 아니지만 레지던스 살 때는 가끔 볼일이 있을 때 이곳에 왔었어요.]

[그런데 왜 나랑은 한 번도 안 왔어요?]

[당신이 눈에 띌까 봐 조금 덜 복잡한 곳으로 갔었으니까요. 그런데 같이 온 적은 없지만, 당신과 함께 이곳에 있었던 적은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의아한 표정으로 한을 바라보자 그가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은 이곳에 온 적 없어요?]

[있어요.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번 왔었어요.]

내가 맨 처음 이 백화점에 온 것은 가족과 함께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가는 곳마다 기자단이 쫓아다녀서 많은 인원이 몰리는 바람에 다른 층은 하나도 구경하지 못했으나 1층만 둘러보고도 굉장히 많은 물건을 샀던 기억이 났다. 특히나 할머니 선물을 고르시던 할아버지가 보는 것마다 다 사시겠다고 우기셔서 모두 말리느라 고생했었다.

[그때 난 2층에 있었어요. 시끌시끌하길래 봤더니 당신 가족이 방문했더라고요. 중앙이 뚫린 구조로 되어 있어서 2층에 있는 카페에서 1층을 내려다볼 수 있거든요.]

[아…. 누구랑 있었어요?]

[혼자요. 당연하잖아요. 그 당시에는 혼자가 익숙했을 때니까. 이상하더라고요. 같은 공간에 있는데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혼자였고, 당신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너무 눈에 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은 정말 많은데, 그중 하나가 한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했다. 당연히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때 함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때 당신을 알았었다면 그냥 혼자 두지 않았을 텐데.

[밥 먹고 바로 본관으로 넘어가요.]

[왜요?]

[왜긴요. 당신 선물 사러 가야죠.]

[선물이라면 여기서 사도 되잖아요. 신관이 매장이 더 많던데.]

[그건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드르륵- 드르륵-

한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에 테이블 위 진동 벨이 요란스레 움직였다.

[내가 다녀올게요.]

한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진동 벨 또한 음식이 준비됐음을 알렸고, 점심이 늦었던 우리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 앞에서 조금 전 나누었던 대화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점심을 먹은 뒤, 본관으로 가자마자 한은 망설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어디 가요?]

[아, 저쪽에 있네. 얼른 들어가요.]

놀랍게도 그가 가리킨 곳은 내가 반지를 보았던 액세서리 매장이었다.

뭐지? 말리기도 전에 내 옆에 있던 인영이 성큼성큼 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헤이. 얼른 와요.]

당황해서 멍하니 문 앞에 서 있는 것도 잠시, 한의 부름에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 보았던 직원이 나를 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서둘러 표정 관리를 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가 알은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많은 고민을 하는 듯했다.

나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대로 굳어 있는데, 더 황당한 건 이어지는 그의 다음 행동이었다. 한은 진열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게 마음에 드는지 한번 봐요.]

순간, 직원과 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소리 없는 물음이 날아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한서.]

[네?]

[잠깐만…. 잠깐만 와 봐요.]

팔짱 낀 손을 붙잡고 매장 밖으로 나오자 그는 순순히 끌려 나왔다.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떤 게 마음에 드냐니,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반지 사고 싶어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여기로 왔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한숨이 나왔다.

[하아…. 다 알고 있었어요?]

[네.]

[언제부터 알았는데요?]

[그러니까… 꽤 오래전이요. 전부터 반지가 갖고 싶다는 건 알았어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이 브랜드 반지를 많이 고민하길래….]

뭐라고? 당장 큰소리가 나올 것 같은 걸 겨우 참아 냈다. 아니, 너무 놀라서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속마음 읽었어요?]

[…네.]

[그러면 알면서 왜 여태껏 아는 척 안 했어요?]

[사실은 서프라이즈를 해 주고 싶었어요. 난 늘 받기만 하니까, 이번에야말로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일부러 말 안 했는데… 혹시 내가 뭔가 실수한 건가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마음 졸이며 겨우 비밀에 부쳤다고 생각했는데. 뿌듯했던 것도 잠시, 저 매장에 함께 들어간 순간부터 나의 서프라이즈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허무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를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는데, 그 말을 듣고 한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나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는 사람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

한마디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어? 한은 아직 안 내려온 게냐?}

예전 생각을 떠올린 사이 어느새 할아버지께서 다이닝 룸에 와 계셨다. 밖에서 바비큐를 하고 오셔서 그런지 옅은 그을음 냄새가 났다. 호세는 조금 전 내게 설명했듯 한이 아버지와 함께 서재에 가 있음을 이야기하며 내 손가락을 가리켰다.

{할아버지. 커플링이래요.}

{오. 그렇구나. 생각보다 너무 심플한걸.}

나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걸 좋아하는 할아버지께서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많은 보석이 박혀 있는 화려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딱 보니 네가 고른 건 아니구나.}

{한이 골랐대요.}

{어쩐지. 그래도 한은 기뻐했겠구나.}

그래요. 기뻐하기야 했죠. 그게 진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예쁘네요.’

반지를 건네받은 그는 기쁘게 웃으며 감사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었다. 서프라이즈도 실패했는데 이상한 방식으로 커플링을 맞추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둘 다 서프라이즈에 실패했다. 나 또한 생일 선물로 반지를 주려고 했다고 솔직히 고백하자 한은 고민 끝에 서로 교환하기를 원했고, 결국 우리는 각자 서로의 반지를 사 줌으로써 커플링을 맞추었다. 커플링이지만 따로 결제해서 교환하는 형식이라니. 정말 최악이었다.

‘미안해요. 앞으로는 절대 허락 없이 속마음을 읽지 않을게요.’

‘아니에요. 어차피 이제 서프라이즈 따위 안 할 거예요. 그냥 당신 원하는 대로 해요.’

‘…화 많이 났구나. 진짜 약속할게요. 믿어 줘요, 네?’

한은 나중이 돼서야 내가 서프라이즈를 실패해 우울해한다는 걸 알아채고 나를 위로했는데, 어떤 약속을 해도 지나간 실패에 대한 아쉬움을 쉽게 감출 수 없었다.

‘반지는 내가 반칙 써서 알아낸 거니까 반지 말고 다른 선물을 더 줄게요. 원하는 거 없어요?’

‘없어요.’

‘그러면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해요.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하지만 부쩍 미안해하며 소원까지 들어주겠다고 말하는데 계속 토라져 있을 수는 없었다. 내 눈치를 보며 나를 바라보는 게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나를 계속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너무 실망 마라. 결혼반지는 네가 좋아하는 걸로 하면 되잖니. 그때는 몰래 준비해서 깜짝 놀라게 해 주렴.}

아니요. 평생 서프라이즈는 틀렸어요, 할아버지.

앞으로도 내가 한을 놀라게 해 줄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번에 반지를 맞추게 되는 날에는 꼭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것만으로 벌써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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