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Silva: 다음번엔 저녁 먹어요.
단지 화면에 보이는 글자일 뿐인데,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그려졌다. 툭,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이상한 사람.”
***
“…….”
“…….”
“…….”
“…이 정도로 된 것 같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확인 부탁드립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끝나고 최면을 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이라면 뭘 하는 거냐며 난동을 부릴 테러범은 내가 그의 몸에 손을 올리는데도 미동하지 않았다.
쿵. 쿵. 쿵.
평소라면 심장 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가 날아올 텐데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긴 해도 지금껏 상대해 온 테러범들은 거의 비슷한 행동을 보여 왔다. 주로 잘난 듯 설교를 하거나 남을 평가하고 비난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똑똑한 척해도 속으로 들리는 말은 대부분 상스러운 욕투성이였다.
그런데 그랬던 테러범들이 최근 들어 바뀌었다. 묻는 말에도 착실하게 대답하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1분, 2분, 시간이 흐를 때마다 나를 뚫어지라 쳐다만 볼 뿐.
폭탄의 위치를 확인한 후 경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의 고갯짓으로 그가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말해 주자 언제나처럼 경위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끝나고 그곳에서 나오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바이바이.”
뭐?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자 두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나를 보는 시선이 묘하게 거슬렸다. 실은 처음부터 그랬지만 그것도 일종의 도발 행위라고 생각해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지막 인사는 정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한참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경위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통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무심한 척 다시 뒤를 돌아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조사관은 오늘도 역시 취조실 밖의 사무 공간에서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를 한 번 쳐다보기에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는데 늘 조용히 있던 그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인사도 안 하던 사람이 살가운 말이라니.
머릿속이 복잡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키보드를 두드렸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다른 사람이 봐도 좋아 보이는구나. 조금 전에 만난 경위도 조금 놀란 얼굴로 똑같은 말을 했었다. 오늘은 어쩐지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꼴딱 밤을 새우고 고작 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는데도 오랜만에 한 번도 깨지 않고 편하게 잘 수 있었기 때문에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나 답답함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거울 속 내 모습은 확실히 어제와 달랐다.
이게 가이딩 효과구나. 한계치가 이것보다 더 내려가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조금은 더 선명하게 보이려나.
이래서 받고 싶지 않았는데. 한 번의 가이딩만으로 이렇게 다음이 욕심나면 어떻게 하려고.
오랜만에 마주한 편안함이 너무 행복했다. 흐릿한 기억 속, 그때 헤이가 붙잡았던 손을 멍하니 쳐다봤다. 잡는 순간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정말 찰나의 순간뿐이지만 온몸 가득 퍼져 나갔던 따뜻함이 여전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편안함도 그때뿐이었다.
그날 저녁 또 한 번 본부로 불려 가 능력을 쓰자 옅은 두통이 다시 시작됐다.
드르륵.
J. Silva: 자요? 난 이제 막 레지던스에 도착했어요.
헤이에게 연락이 온 건 열 시가 조금 지난 늦은 밤이었다.
자냐고 물을 거면서 메시지는 왜 보내는 거지.
아직 안 자요. 조금 전에 들어왔어요.
J. Silva: 어디 갔다 왔어요?
일 때문에 본부에 다녀왔어요.
J. Silva: 그건 언제 언제 가는 거예요?
일이 있을 때만요. 보통은 미리 연락이 와요.
J. Silva: 그렇구나. 내일은 언제 가요?
글쎄요. 내일 오라는 말은 없었는데, 가끔은 갑자기 와 달라고 할 때도 있어서요.
내가 그에게 이런 걸 말해 줄 이유가 전혀 없는 걸 알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J. Silva: 특별한 일 없으면 내일 오전에 시간 어때요?
왜 묻나 했더니.
몇 시에요?
J. Silva: 8시쯤이 괜찮을 것 같은데.
너무 이르지 않아? 보통 이렇게까지 일찍 약속을 잡기도 하나?
너무 이르지 않아요?
J. Silva: 그럼 8시 반은요?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J. Silva: 아니요. 괜찮으면 같이 아침 먹어요.
아침? 내가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만난 건 청장님이나 윤 박사님 정도고, 따로 만나게 되더라도 늘 저녁에 만났다. 이른 아침부터 아침을 먹자는 약속은 정말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것저것 물어보기 어려워 알겠다고 보내자 곧이어 상대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메시지에는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내 이름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J. Silva: 잘 자요, 한서.
***
이른 아침에 만난 헤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전날 밤을 새우고 반나절 넘게 가이딩을 했으니 짧은 수면으로 피곤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하곤 테이블 위 미리 준비해 놓은 메뉴를 내밀었다.
[음…. 어떻게 하지.]
하지만 잠시 후, 식탁에 앉아 아침 메뉴를 보던 그는 곧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이 장면은 바로 어제와 똑같았다. 헤이는 오늘도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오늘은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는데. 혹시 괜찮은 게 있으면 추천해 줘요.]
[글쎄요….]
레지던스에 머문 지는 10년이 넘었지만, 내가 카페테리아에서 시켜 먹는 음식은 늘 정해져 있었다. 가벼운 샌드위치나 간편히 먹을 수 있는 덮밥 종류. 그게 아니면 가끔 토마토 스파게티나 국수를 시켜 먹기도 했다. 모두 짧은 시간 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어제 세트 메뉴 먹었으니까 오늘도 세트 메뉴 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오늘은 양식 말고 다른 종류를 시도해 보려고요.]
[…혹시 한식도 괜찮으면 이건 어때요?]
늘 같은 음식밖에 먹지 않는 내가 누군가에게 음식을 추천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오래전 김우영이 자주 먹었던 음식이 기억났다. 마침 눈에 보이는 메뉴를 추천하자 헤이는 흔쾌히 그 메뉴를 골랐다.
[당신은 다 골랐어요?]
[네.]
[뭐 먹을 건데요?]
[이거랑 오렌지 주스요.]
어제 먹었던 샌드위치를 가리키자 헤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도 먹었잖아요.]
[이걸로 괜찮아요. 아침이니까.]
[흠….]
헤이는 잠깐의 고민 끝에 내가 고른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 외에 한 가지 음식을 더 시켰다. 어제도 시키지 않은 감자 수프를 주문해서 먹게 하더니 나의 만류에도 조갯살이 들어간 수프 하나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런데.]
주문을 끝낸 헤이를 불렀다.
[왜요?]
[어제는 분명 다음번엔 저녁 먹자고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웬 아침이에요?]
[아. 그랬는데 이번 주에는 힘들 것 같아서요. 다음 주에는 오후에 쉬고 싶어서 이번 주에는 쭉 오후 지원 나가기로 했거든요. 오후 한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라서 저녁은 못 먹을 것 같더라고요.]
그럼 다음 주에 먹으면 되지 않아? 그렇다고 아침을 먹자고 하는 건 정말 이상했다. 혹시 브라질은 그런 문화가 있나 해서 조심스레 물어보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침 먹는 약속은 처음이에요.]
그런데 왜?
[어차피 아침은 먹어야 하는데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아, 그리고 어제 봤던 영화 뒷부분이 궁금했거든요.]
그건 혼자 있을 때 보면 되잖아.
결국, 우리는 음식이 올 때까지 어제 다 보지 못했던 영화를 봤다. 20분 후 음식이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오고 헤이는 리모컨으로 티브이를 끄며 이렇게 말했다.
[나머지는 다음에 봐요.]
여전히 영화의 잔여 시간은 1시간 27분이나 남아 있었다.
***
[…혹시 상태가 안 좋아요?]
금요일 오전에 만난 헤이는 나를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요.]
[어제도 결국 일 갔다고 했죠?]
[오후에 잠깐이요.]
[흠.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분명 그 전보다 한계치가 많이 내려갔었는데, 다시 금방 차오른 느낌이었다.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 동안 본부에서 능력을 사용한 것 외에는 따로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도 두통이나 통증이 예전처럼 시작됐다.
며칠 동안 괜찮았다고 몇 년 동안 익숙했던 아픔이 다시 괴로워졌다.
[진짜 괜찮아요?]
그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아, 그러면 그냥 쉬어도 됐는데.]
[됐어요. 이미 왔으니까 뭐 먹을지 골라 봐요.]
헤이는 내가 건넨 메뉴를 들고 보면서도 중간중간 나를 힐끔힐끔 돌아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 헤이는 새로운 메뉴를 시켰고 나는 같은 것을 시켰다.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는 영화를, 식사가 끝난 후에는 방으로 돌아갔다. 점점 그와 있는 시간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 본부 일이 끝나고 레지던스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주말 전에 연락을 주겠다던 최 박사님이셨다.
- 가이딩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괜찮으십니까? 미스터 실바에게 물어보니 오후 시간은 언제든지 좋다고 하더군요.
아. 혹시.
‘다음 주에는 오후에 쉬고 싶어서 이번 주에는 쭉 오후 지원 나가기로 했거든요.’
그게 나 때문인 건 아니겠지?
설마 나 하나 때문에 그랬을 리 없는데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 그럼 하루 전에 센터에 들러 한계치 측정을 했으면 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월요일에도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오전, 오후 편하신 시간에 와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 화요일, 자세한 시간과 장소는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얼마 후, 곧바로 최 박사님으로부터 화요일 오후 2시까지 센터 3층으로 와 달라는 요청 메시지가 도착했다.
***
화요일은 오전에 잠깐 본부에 들렀다가 곧바로 센터로 향했다.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곳은 3층에 있는 박사님의 검사실이 아닌 그 옆의 적합도 검사실이었다. 오래전, 딱 한 번 왔었던 곳이었다.
그 앞에 도착해 [적합도 검사실]이라는 푯말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찍 오셨군요.”
최 박사님이셨다.
“안녕하십니까.”
서둘러 마스크를 벗어 인사를 건네자 언제나처럼 서글서글하게 웃으셨다.
“네. 미스터 실바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기다릴까요?”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에 갑자기 긴장이 밀려왔다.
“저….”
“왜 그러십니까?”
“가이딩 전용 룸이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꼭 여기서 해야 합니까?”
“아. 실은 그러려고 했는데 일단 매칭률 확인부터 해야 한다는 걸 잠시 잊었습니다. 매칭률 측정은 이곳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박사님께서는 다음부터는 다른 곳에서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럼 들어갑시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서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 한 명이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기억 속에는 분명 7~8명쯤 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안에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른 분들은 없습니까?”
“비상 상황이라서 전부 현장에 지원을 나가 있습니다. 어차피 매칭을 위한 게 아니라 단지 기록용이니 도움을 줄 연구원 한 분만 남아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몰렸던 긴장이 금세 풀어졌다. 열 명쯤 되는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을 줄 알았는데 두 명뿐이라면 그래도 나았다.
“장갑을 벗어 주시겠습니까?”
“아….”
“이쪽으로 주십시오.”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박사님께 건넨 후 허전해진 손을 문질렀다. 멀리 서 있는 센터 연구원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안색으로 봤을 때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예전과 비슷합니다.”
“두통이나 답답함이 있죠?”
“네.”
“어제 측정한 한계치는 63입니다. 실제로 한계치 60까지가 정상이고 그 이후부터는 주의 단계로 올라가니까 보통 60 근처에 다다르면 그때부터 통증이 생깁니다. 신한서 에스퍼는 50대 초반에서 후반으로 넘어서는 순간 통증이 이전과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빠르긴 해도 정상 범주에 속합니다.”
한계치가 59였을 때와 비교했을 때, 한계치가 52로 떨어진 것만으로 확실히 통증이 사라졌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정신계는 다른 속성보다 더 한계치가 빨리 오르죠?”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정신계는 한 번에 소모되는 능력치가 높으므로 능력을 한두 번 쓴 것만으로도 한계치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신한서 에스퍼는 능력이 두 가지나 되므로 어쩌면 다른 에스퍼보다 더 높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본부 일을 도운 것만으로 이렇게 한계치가 빨리 오르진 않았었다. 지난주와 이번 주 합쳐서 능력을 고작 세 번밖에 쓰지 않았는데 한계치가 10 이상 오른 셈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예전과 비슷한 두통이 시작된 건 능력을 두 번밖에 쓰지 않았을 때였다.
최 박사님께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자 심각한 표정을 하셨다.
“한 번 폭주한 에스퍼의 데이터가 바뀌는 일도 있습니다. 한 번 한계치를 벗어나고 나면 소모하는 능력치에 비해 한계치가 전보다 금방 찰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더욱더 가이딩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계속 이렇게 한계치가 빨리 올라갈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늦출 방법은 없나요?”
“능력을 쓰지 않으면 되겠지요.”
그건 안 돼.
센터가 김우영의 단서를 찾아낼 때까지는 계속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해 줘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능력을 썼다간 몇 달 안에 또 폭주할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에요?]
[아, 오셨습니까. 미스터 실바.]
헤이는 얇은 티셔츠에 남색 재킷을 걸친 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새벽 한 시부터 여태껏 현장 지원을 하고 왔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처음 보는 연구원에게 별도로 인사를 한 헤이는 말도 없이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데요? 당신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궁금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별것 아니라며 넘기려 했지만 헤이는 집요하게 물었다. 결국 전보다 한계치가 빨리 올라갈 수도 있다고 설명하자 헤이는 의외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폭주하고 나면 그럴 수 있다고 들었어요.]
[알고 있었어요?]
[네.]
에스퍼인 나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예요?]
[능력을 안 쓸 수는 없는데, 이 상태로라면 금방 또 폭주할 수 있으니까요.]
[흠… 가이딩을 받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대화는 더 복잡해지기 전에 연구원에 의해 중단되었다. 연구원은 검사실 내에 따로 있는 한쪽 방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에 따라 움직이자 헤이가 내 뒤를 따랐다. 작은 방 앞에 서자 다시 잊고 있었던 긴장감이 몰려왔다.
정확히 7년 만이었다.
***
얼핏 보면 수술실 같은 작은 방은 오래전 그날과 똑같았다.
푸른색이 감도는 서늘한 벽과 새하얀 바닥. 각 코너에 놓인 카메라와 스피커들. 민무늬 소파와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아 더는 설명할 게 없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살짝 한기가 느껴졌다.
[검사는 영어로 진행됩니다. 시작하면 안내에 따라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럼 문을 닫겠습니다. ]
쿵, 하고 문이 닫히자 헤이가 먼저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뭐 해요? 이리 와요.]
[아직 안내가 안 나왔어요.]
[어차피 앉으라고 할 거예요. 이리 와서 앉아요.]
헤이는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데 벽 쪽에 붙은 스피커에서 연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이 함께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헤이가 정확히 예상했던 말이었다.
[거봐요.]
소파를 향해 걸어가는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는 것뿐인데 누군가와 붙어 앉는 있는 게 너무 어색했다. 결국, 한 뼘 떨어진 곳에 앉았다.
“일단 편하게 대화를 나누시면 됩니다.”
매칭 테스트는 딱 한 번 해 봤지만, 순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로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눈 후 1, 2, 3단계 가이딩을 차례대로 진행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잘 알기 때문에 더 어색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헤이와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이상했다.
[점심은 먹었어요?]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헤이는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아직이요. 본부에서 바로 오느라.]
[그럼 끝나고 같이 먹을래요? 저도 아직이거든요.]
[아침 다음엔 점심이에요?]
[그럼 곧 저녁도 먹을 수 있겠네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 건지, 무얼 먹을 건지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은가 싶은 정도로 별것 아닌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화하는 과정은 매칭 테스트 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어색함을 풀기 위해 만든 거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정말 모르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어색할 게 분명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 해요?]
그렇게 묻자 헤이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서로 인사를 하거나 간단히 자기소개해요. 이름을 물어보기도 하고, 능력이 뭔지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많이 해 봤어요?]
[어릴 적에 수없이 많이요. All-ESP 가이드라면 매칭 확률이 99.9% 이상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거든요.]
이런 걸 백 번도 넘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자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그가 왜 이런 상황에 익숙한 건지 이해가 갔다.
[99.9%면, 혹시 매칭률 70%가 안 되는 에스퍼도 있어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에스퍼와 테스트를 해 볼 수는 없으니까 100%가 될 수는 없죠. 정말 특수한 경우지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테스트는 총 3단계에 걸쳐 진행되며, 안내에 따라 1단계부터 차례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드디어 누굴 위한 시간인지 모를 대화 시간이 지나고 이어 1단계 테스트에 대해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냥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을 복잡하고 어려운 말로 한참 동안 설명했다.
“측정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니 편안하게 앉아 있으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해 주십시오.”
헤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며칠 전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손이 먼저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단단한 손바닥이 닿자마자 심장이 덜컹거렸다.
털이 쭈뼛 설 만큼 기분 좋은 감각이 퍼졌다. 순식간에 온몸 가득 편안함이 번지면서 거짓말 같은 평온함이 찾아왔다. 불과 몇 초 전까지 복잡하기만 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긴장이나 불안함 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찰나의 기억으로 잠깐 느껴졌던 따뜻함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따뜻하다는 한마디로는 전부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중간중간 되찾지 못한 기억이 미치도록 아쉬울 만큼 좋은 감각이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 이런 기분이라니.
무언가 들릴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손이 상대의 온기로 데워질 때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살짝 눈을 내리깐 채 집중하던 헤이가 비스듬히 나를 쳐다봤다. 표정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를 보는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왜요?’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때, 연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습니다. 곧바로 2단계를 진행하겠습니다.”
멀어지는 손끝이 서운해서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봤을 땐 나보다 조금 크고, 조금 투박해 보이는 손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놓기가 힘들었다.
“조금 가까이 앉아 주시겠습니까?”
2단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상반신만 닿는 자세를 유지하기 힘들어서 나보다 체격이 큰 헤이가 어깨동무를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한쪽 다리에 단단한 허벅지가 닿고 기다란 팔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근. 두근.
가슴의 두근거림이 아까보다 더 빨라지고,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곧 가이딩이 시작되자 조금 전까지의 편안함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간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닿는 곳의 온기가 따뜻함을 넘어 알 수 없는 열감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느껴 보는 야릇한 기분이었다. 미치도록 좋지만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지러운 기분.
도대체 뭐지?
손을 잡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지막입니다.”
3단계 가이딩을 앞두고 안내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단지 포옹일 뿐인데, 닿기도 전에 덜컥 겁이 났다. 조금 전과 같은 생소한 감각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다른 에스퍼라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더 했을 텐데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뻗어 오는 손길에 따라 나도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쿵.
그 순간, 마치 심장이 떨어지는 것처럼 멈춰 서더니 살짝 숨이 버거웠다. 온몸 가득 퍼지는 찌릿한 느낌에 한순간에 전율이 일었다. 상대의 살결을 통해 전해져 온 온기로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기억이 깜빡깜빡, 위험 신호를 보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려 할 때마다 내 허리를 감싼 손이 내 몸을 다부지게 붙들었다. 온몸에 저릿함이 번져 가고 피가 한쪽으로 몰린 것처럼 배 아래가 단단해졌다. 처음 느껴 보는 갈증이 전신을 뒤덮는 기분이었다.
“흡….”
조절하지 못한 호흡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내가 뱉어낸 숨이 뜨거웠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 소리가 반복해서 머리를 두드렸다.
대체 이건 언제 끝나는 거지?
들끓는 흥분이 이성을 쥐고 흔들었다.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주저앉으려 하자 이번에도 무너질 뻔한 내 몸을 단단한 팔이 붙잡았다.
“테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드디어 끝났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양가감정이었다. 얼른 손을 내리고 이 품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머리에서 자꾸만 다른 신호를 보냈다.
[괜찮아요?]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멀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헤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괜찮아요.]
서둘러 몸을 떼어 냈다. 곧바로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만 쿵쾅대는 심장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
헤이와 나의 매칭률은 정상이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약간 높은 매칭률이 나왔다. All-ESP 가이드와 에스퍼는 평균적으로 75에서 82 사이의 매칭률이 나온다는데 우리의 매칭률은 85였다. 그러므로 가이딩 속도가 남들보다 느린 이유가 매칭률이 낮기 때문은 아니었다.
매칭률이 정상임에도 가이딩 속도가 느린 이유는 단지 내 문제였다. 내가 다른 에스퍼보다 가이딩 효과를 적게 받을 뿐이었다. 전날 측정했던 한계치가 63이었는데 매칭 테스트를 받은 이후 측정한 한계치는 59였다. 테스트를 받는 동안 내려간 수치는 겨우 4밖에 되지 않았다.
최 박사님께서 낸 결론은 이러했다.
다른 에스퍼보다 한 번에 사용되는 능력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한계치가 빨리 올라 폭주 위험이 크다.
다른 에스퍼보다 가이딩 효과를 적게 받는다.
그로 인해 한계치를 내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방법은 없습니까?”
최 박사님께서 매칭률에 대해 말해 줄 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졌으나, 그 이후 내가 일부러 한국어로 질문을 했다.
“가이딩을 받아야 합니다.”
최 박사님은 아주 깔끔한 방법을 제안하셨다. 다만, 그 방법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가이딩을 피해 왔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가이딩을 받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받기 싫다고 우기는 건 억지일 뿐 나를 생각하는 박사님을 힘들게 하는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가이딩을 실제로 받게 되자 이제는 전혀 다른 이유로 받고 싶지 않아졌다. 그전까지는 억지로 가이딩을 받으면 듣게 될 상대의 비난이나 부정적인 속마음이 듣고 싶지 않아 피해 왔는데, 지금은 매번 느껴야 할 좋은 감각이 무서워졌다.
신체 접촉을 통해 어떠한 자극을 받으면 흥분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포옹만으로 그런 자극을 받았다는 게 너무 창피스러웠다.
“보통… 이런 건가요?”
“뭐가 말입니까?”
“가이딩이요.”
가이딩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너무 좋아서 마치 하면 안 되는 약을 한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내 몸을 나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기분. 항상 남에게 최면을 걸기만 했었는데,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최면에 걸려 버린 느낌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최 박사님은 이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랫동안 가이딩을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지난번 폭주 시에도 1단계 가이딩을 받고 정신을 잃었지요. 그동안 한계치를 눌러 왔던 몸이 갑작스레 높은 가이딩을 받는 바람에 그럴 겁니다. 미스터 실바가 신한서 에스퍼와 매칭률이 너무 높은 가이드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헤이는 우리가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동안 연구실을 둘러보며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박사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이야기 중인데요?]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박사님께 물었다.
“혹시 매칭률이 더 낮은 가이드랑 하면 괜찮을까요?”
“아마도 지금보다는 나을 겁니다. 만약 그런 이유로 가이딩 받는 게 불편하시다면 일단 다른 가이드와 다시 테스트를 받아 보시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만약 매칭률이 낮은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게 되면 대신 효과가 매우 느릴 겁니다. 지금도 다른 에스퍼보다 가이딩이 느린 편이니까요. 가이딩 시간이 길어지겠죠.”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살을 맞대는 것도 달갑지 않은데 심지어 가이딩 시간이 길어진다니. 다른 가이드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가이딩을 받을 때마다 헤이를 상대로 매번 이렇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가이딩 받을 때는 기억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맨정신으로 그에게 가이딩을 받게 되면 조금 전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건 정말 민망할 것 같았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이기적이었다.
[나 지금 무시당한 거예요? 나도 말해 줘요. 분명 내 이름 들었거든요.]
헤이는 내가 대답하지 않자 박사님에게 말을 걸었다. 최 박사님은 헤이에게 아주 간단히 설명했다. 내가 가이딩을 잘 받지 않아서 헤이의 가이딩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그래서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건 어떤지 이야기 중이었-]
[안 돼요.]
뭐?
순간 내 입에서 나온 줄만 알았던 말은 헤이가 한 말이었다.
[…뭐라고요?]
[매칭률 낮은 가이드에게 받으면 더 오랫동안 받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왜 당신이 신경 쓰냐고.
[그렇지만 지금 신한서 에스퍼에게 당신의 가이딩은 조금 힘들 수 있습니다.]
[한서, 당신은 어때요? 당신 생각은요?]
헤이는 이번에는 나를 보며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잔뜩 토라진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는 거 싫다고 했잖아요. 억지로 가이딩 시키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 받을 거예요?]
[지금도 억지로 가이딩을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어차피 당신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잖아요.]
[나는 달라요. 나는 내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
뚱한 얼굴이 한껏 더 우울해졌다.
내 가이딩에 관한 일인데 헤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게 그를 대한다고 해도 결국 나는 그가 부담스러워하는 에스퍼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지?
[아니면 당신이 잘 때 해도 괜찮아요. 그러면 좀 낫지 않을까요?]
[뭐라고요?]
[지난번에 당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는 괜찮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러면 나눠서 하는 건요? 한꺼번에 안 하고 잠깐씩 하는 건 어때요?]
아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어쨌든 다른 사람은 안 돼요.]
[왜 당신이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된다면 안 돼요.]
[왜요?]
[안 되니까.]
[그러니까 대체 그 이유가 뭔데요?]
[당신은 모르지만… 있어요, 그런 거.]
[내가 모르는 이유가 뭔데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얼굴을 어떻게 다른 사람이-]
[아. 잠시만요, 두 분.]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때쯤 대화를 듣던 최 박사님이 우리를 말렸다.
[음. 조금 전 말씀드렸듯이 지금까지 계속 한계치를 억눌러 오던 몸이 갑자기 높은 가이딩을 받아 원래보다 몇 배에 달하는 자극을 받는 건데, 특히나 이런 자극은 한계치가 높을 때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만약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 받는 것이 싫으시다면 미스터 실바의 가이딩을 한계치가 낮을 때 조금씩 나눠서 받는 것은 가능합니다.]
[네?]
[예를 들어 한계치가 60일 때 가이딩을 받으면 자극이 심하겠지만, 한계치가 50일 때 가이딩을 받으면 조금 덜할 것입니다. 한계치가 60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받지 않고, 한계치가 적당히 차올랐을 때쯤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적당히 차올랐을 때라면….]
[신한서 에스퍼의 경우 50대 중반을 넘으면 옅은 두통이 시작되고, 50대 후반이 되면 몸에 통증이 심해지죠. 그러면 늦어도 옅은 두통이 시작되었을 때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전에 피로감을 느꼈을 때 받는 것이 가장 좋을 거고요.]
최 박사님의 설명은 정확하게 이해했다.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일수록 가이딩을 받을 때 몸이 받는 자극이 심하고 한계치가 높을수록 더 심해지므로, 만약 매칭률이 높은 헤이에게 계속 가이딩을 받을 거면 한계치가 낮을 때 받아야 그 자극이 조금은 줄어들 거라는 말이었다.
이해는 했지만 이게 과연 가장 좋은 방법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지금처럼 쉽게 한계치가 올라간다면 능력 한두 번만 쓰면 50대 중반이 될 텐데. 결국 2~3일에 한 번꼴로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데 만약 헤이가 귀국한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최 박사님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조용히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꾸준히 가이딩을 받는다면 몸이 서서히 적응해 이러한 자극도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미스터 실바가 돌아간 후에는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데 그때까지 몸이 가이딩에 적응한다면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브라질로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도움을 받는 것이 어떻습니까?”
슬쩍 옆을 쳐다보자 헤이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현장 지원만으로 바쁠 텐데 피곤하지도 않은 건지. 그는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내 입에서 나올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예상대로 한계치는 금방 올라갔다. 본부 일 때문에 잠깐 능력을 쓰는데도 심문을 두 번 정도만 하고 나면 옅은 두통이 시작됐다.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데.
헤이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 볼까 고민해 봤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가이딩을 요청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이런 고민이 생긴 이유는 센터를 통해서가 아닌, 내가 직접 헤이에게 가이딩을 요청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꼭 센터에서 가이딩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분께서 알아서 가이딩을 하시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결과만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두 분도 편하시겠죠?’
가이딩을 받을 때마다 센터로 가야 할 줄 알았는데, 최 박사님은 일주일에 한 번만 센터를 방문하면 된다고 말하며 우리 두 사람이 의논해서 편한 곳에서 가이딩을 받으라고 하셨다. 결국 한계치가 올라갔을 때마다 내가 헤이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도, 부탁하는 것도, 내겐 처음이었다.
그냥 내일까지 기다려 보자.
다행히 내일은 계획되어 있는 본부 일이 없어 하루 정도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헤이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J. Silva: 몸은 어때요? 가이딩 필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한 번 더 메시지가 왔다.
J. Silva: 레지던스에 2시쯤 도착할 것 같아요. 이따 잠깐 볼까요?
J. Silva: 가이딩 해야 하니까 방에서 봐요.
그럼 2시 30분쯤 갈게요.
***
예정대로 약속한 시각, 그의 방에 가서 가이딩을 받았다. 바로 얼마 전, 가이딩을 받았던 기억 때문인지 이상하게 그를 보자 심장이 뛰었다.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바로 3단계를 하는 것보다는 1단계부터 해 볼까요?]
최 박사님의 말대로 한계치가 조금 낮을 때 받는 가이딩은 그 전보다 자극이 조금 덜했지만, 정말 미세한 차이일 뿐이었다.
손을 잡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포옹으로 넘어가자 순식간에 낯선 감각이 찾아왔다.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단단한 품에 안기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려 했지만 휘청대는 몸을 잘 가눌 수가 없었다.
헤이는 가이딩을 할 때만큼은 굉장히 집중해서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맞닿아 있는데도 속마음이 들리지 않아 신기했었는데, 그 이유는 정말 그가 가이딩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결국 민망한 건 나뿐이었다.
[다 됐어요. 다음에 또 가이딩 필요하거든 꼭 연락해요.]
그날은 운 좋게 헤이가 먼저 연락해 주었지만, 똑같은 문제는 그다음에도 계속됐다. 헤이가 가이딩에 대해 먼저 묻는 건 이틀에 한 번이었는데, 어느 날은 하루에 두세 건의 심문이 있는 날도 있었다. 통증이 심해져도 바로 전날 가이딩을 받았기에 또 요청하는 게 미안해서 연락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처음 한두 번은 미안해서 연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본 헤이가 내 몸 상태를 눈치채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랑 가이딩하는 게 그렇게 싫어요?]
[네? 아니요. 그건 아닌데….]
[나랑 닿는 게 불쾌한 건 아니죠?]
[그럴 리 없잖아요. 오해하지 말아요.]
[혹시 뭔가 내가 실수한 게 있거든 말해 줘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들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연락 안 했어요? 가이딩 하기 싫어서 연락 안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설마 내가 불편해서 그런 건 아니죠? 연락하기 미안했다거나, 힘들었다거나. 나는 우리가 그것보다는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헤이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냥, 습관이 되질 않아서 연락하는 걸 잊었어요.]
그런 변명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이후로 헤이는 매일 아침 내 일정을, 매일 밤 내 몸 상태를 물었다.
***
2주 후-
[한서!]
기다란 팔이 공중에서 정신없이 흔들거렸다. 커다란 몸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여기예요!]
너무 눈에 띈다니까.
캡 모자에 목도리를 둘렀어도 남들과 다른 체격 때문에 멀리서도 자연스레 눈이 갔다. 밖에서 웬만하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일렀건만.
[헤이. 멀리서도 보이니까 그렇게 알려 주지 않아도 돼요.]
[알려 주려고 한 게 아니라 반가워서.]
거의 매일 보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반가울까.
헤이와 나는 그동안 거의 매일 만났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헤이의 방이었고, 두 번 정도 옥상에서 본 적도 있었다. 헤이의 방에서 만날 때는 함께 아침을 먹었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가이딩을 받았다.
그렇게 가이딩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나고, 여전히 제2 구역의 상황이 좋아지지 않아 바쁜데도 언제나 흔쾌히 가이딩을 해 주는 헤이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식사 요청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싶은데, 혹시 언제가 괜찮아요?’
망설이다 겨우 미뤄 왔던 말을 꺼내자 헤이는 한동안 굳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계속 실패했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와.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아요.]
[번화가니까요.]
[택시 기사님이 아니었으면 전 절대 못 찾았을 거예요.]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지난번과 같은 지하철역 부근이지만 역과 조금 떨어진 곳의 작은 골목이었다. 약속 시각은 지난번보다 이른 5시였는데, 지난번 그 시간대는 퇴근 시간과 맞물려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내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헤이가 유명인이라는 점이었다. 모두 헤이가 브라질로 돌아간 줄 알고 있지만, 사람이 북적북적한 지하철역에 서 있으면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때는 헤이가 먼저 정해 놓은 장소였고, 아무 생각 없이 허락하는 바람에 나 역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그때 만나지 않은 게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중에야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그날 헤이가 늘 티브이에서 입고 나왔던 코트를 걸치고 아무런 준비 없이 왔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모자도 썼고 목도리도 했어요. 옷도 완전 캐주얼하게 입었는데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겠죠?]
파란색 티셔츠에 흰 패딩을 입은 그는 코트를 입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잘 어울렸다. 평소 티브이에서 보이는 것과 완전 다른 차림을 하면 설사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냥 닮은 외국인인 줄 알고 지나칠 것 같아 며칠 전 일부러 주문했는데, 잘 어울리는 차림을 보자 목적이 무엇이었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을 통해 나오거나 밖에 외출할 때 늘 단정한 복장을 하기에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다 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인지 헤이는 쇼핑하는 내내 즐거워 보였다. 이제야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옷은 괜찮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들킬지도 몰라요.]
[뭐가요?]
[그렇게 손 흔드는 거요.]
[왜요? 자연스럽게만 행동하면 안 들킨다면서요.]
그러니까 그런 게 이 나라에서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고.
[어쨌든 추우니까 얼른 이동해요. 주소 알려 줘요. 내가 찾을 테니까.]
[어떻게 가는지 알아봤어요. 따라와요.]
택시가 아니었으면 절대 못 찾았을 거라면서. 먼저 앞장서는 헤이가 영 못 미더웠지만 일단 그를 따라나섰다.
“와, 방금 지나간 사람 봤어?”
“키 진짜 크다.”
“누구 닮지 않았어?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음, 나도 보긴 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거리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다행히 내 예상대로 헤이를 그냥 잘생긴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불안함을 놓지 못했다.
헤이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헤이.]
[왜요?]
[너무 두리번거리지 말아요. 사람들이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못 알아보잖아요, 다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묻자 헤이는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금방 답을 내놓았다.
[달려드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지금은 없지만 생길지도 몰라요.]
[그러면 당신이 아니라고 최면 걸어 주면 되잖아요.]
[내가 왜요?]
기다란 두 다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왜 갑자기 길 한복판에 서는 거냐고 물으려는데 토라진 얼굴이 나를 획 돌아봤다.
[요즘 당신은 인색해졌어요.]
[당신은 뻔뻔해졌고요.]
[너무해요.]
헤이는 일부러 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러고 있으면 절대 들킬 리는 없겠네. 설마 그 대단한 All-ESP 가이드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 사이는 전보다 확실히 가까워졌다. 자주 만나는 만큼 대화를 많이 나누기도 했고 서로에 대해 알고 나서는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헤이는 나의 능력을 알고도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내가 아무리 거리를 두려 해도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헤이를 말릴 수 없었다.
[아, 맞다!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괜찮아요.]
[매번 괜찮다고만 하잖아요. 오늘은 능력 몇 번이나 썼어요?]
[한 번이요.]
[흠….]
[원래 2건 예약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내일로 미뤄졌어요. 아직 두통도 없고 말짱해요.]
[그래도….]
[어제 가이딩 했잖아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어제는 내가 너무 늦어서 짧게 했잖아요. 오늘 끝나고 나서 1단계라도 받는 게 어때요?]
누가 보면 매칭된 에스퍼와 가이드라고 오해할 만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우리는 메이트가 아니었다.
헤이와 나의 관계는,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관계였다. 남이라고 하기에는 가까웠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일로 엮인 관계도 아니었다. 헤이가 내게 가이딩을 해 주고 있지만 그건 일에 대한 책임이 아닌 호의로 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이상한 관계였다.
[여기예요.]
7분쯤 걸어 도착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었다. 당연히 큰길 쪽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식당은 작은 골목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다. 헤맬 줄 알았는데 다행히 한 번에 찾았다.
건물 1층은 작은 소품 가게와 카페가 운영 중이었다. 헤이가 추천을 받아 가고자 한 식당은 2층이라고 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식당 간판이나 사인이 전혀 보이지 않아 식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품 가게 옆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자 입구에 귀여운 글씨가 적힌 입간판이 놓여 있었다.
제철 요리 전문점 마음
예쁜 이름이네.
[들어가요.]
딸랑-
안으로 들어가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안쪽 오픈 키친에서 두 명의 요리사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식당 이름처럼 내부 인테리어 역시 따뜻한 느낌이었다. 베이지색을 기본으로 노란색 조명이 달려 있었고, 식탁이나 의자, 선반까지 모두 원목으로 되어 있었다. 조금씩 높이가 다른 펜던트 조명이나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주인의 센스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단정한 셔츠를 입은 직원이 우리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헤이에게 예약자를 물어보려 하자 묻기도 전에 먼저 대답이 돌아왔다.
[아. 예약은 당신 이름으로 했어요. 내 이름은 알아볼 수도 있어서.]
“신한서예요.”
직원은 예약을 확인하고 우리를 안쪽 2인석 자리로 안내했다. 우리를 안내한 직원은 금방 돌아가고 짧은 앞치마를 맨 다른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희 식당을 이용하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럼 짧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식당은 제철 음식으로 요리를 해 코스 형식으로 내어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메뉴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오늘 메뉴는….”
계속되는 설명을 들으며 중간중간 헤이에게 메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미리 이야기를 듣고 온 헤이는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든 눈치였다.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와인이나 맥주 메뉴를 따로 드릴까요?”
“아니요. 주스나 탄산 종류로 부탁드립니다.”
음료 주문까지 마친 후 직원이 돌아가고 헤이에게 물었다.
[예약은 누가 해 준 거예요?]
처음부터 이 식당을 고른 건 헤이였다. 그때 가드를 맡아 준 에스퍼에게 추천을 받고 꼭 나와 함께 가 보고 싶다고. 자신 있게 본인이 예약한다기에 영어를 하는 직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냥 아는 사람에게 부탁했어요.]
[아는 사람?]
[네.]
아는 사람이 누구지?
예약을 해 줄 정도면 그래도 헤이와 어느 정도 대화를 주고받은 상대일 테니 어쨌든 센터와 관계된 사람일 게 분명했다. 그중 그 누구도 나를 달가워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예약은 분명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센터 내 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내 이름을 듣고도 나임을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만약 헤이가 함께 밥을 먹을 상대가 나인 걸 알았다면 그 사람이 한 번쯤은 말렸을 텐데.
그런 생각을 들자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헤이.]
[왜요?]
[혹시 나에 대해 들은 적 없어요?]
[당신에 대해서요?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그냥 어떤 거라도요.]
[당신을 알기 전을 의미하는 거예요?]
[알기 전이든 알고 난 후든 나에 대해 들은 게 있나 해서요.]
[음… 아니요.]
헤이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모르는구나.
[그러면 나와 아는 사이라는 거, 혹시 주위에 아는 사람 있어요?]
[같이 만난 사람 외에는 없을 거예요. 왜요?]
같이 만난 사람이라면 헤이의 동생과 박 형사님, 그리고 내 검사를 맡고 있는 박사님밖에 없었다.
[센터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죠? 최 박사님이나 서 박사님 말고요.]
[네. 그런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예약해 줬다고 해서요. 그것도 내 이름으로 했다길래 혹시 다른 센터 사람이 당신과 내가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나, 했어요.]
[그거라면 내가 오해하게 만들었나 봐요. 이곳을 추천해 준 지인이 핸드폰 예약 어플을 알려 줬고, 거기에 영어로 예약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내가 직접 했어요.]
[아…. 그렇구나.]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때마침 직원이 음료를 들고 왔다. 탄산수가 섞인 귤청 에이드 두 잔이 우리 앞에 놓였다. 오렌지 주스가 없어 대신 시킨 음료였다. 처음 마셔 본 음료는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당신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들자 헤이가 조금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가요?]
[나와 아는 사이라는 거. 말한 사람 있어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말할 사람도 없고.]
[만약 알려 줄 사람이 있으면요? 있다면 말했을 거예요?]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당신은 만약이라는 말을 좋아하네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인데.
[사실 나와 아는 사이라는 게 알려지는 게 싫은 거죠?]
[…꼭 대답해야 해요?]
[대답해 줘요. 만약 알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알려야 하는 상황이 뭔데요? 그럴 일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거예요.]
[…정말 솔직히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래요. 나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헤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았어요.]
우연이지만 헤이와 알게 된 건 내게 좋은 일이었다. 계속 가이딩을 받지 못한 내게 흔쾌히 가이딩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헤이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가이드였다. 많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그와 가까워지길 원했다. 그런 사람과 내가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때부터 쏟아질 시선과 질타가 얼마나 클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유지해 오던 일상에 금이 가길 바라지 않았다.
[나한테도, 헤이한테도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해요.]
[흠. 나한테는 왜요?]
[센터 내에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텐데, 괜한 소문은 당신에게도 좋지 않을 거니까.]
[그 이유는 능력 때문인가요?]
[…당신이 모르는 일이 많았어요. 이유야 어쨌든 서로 귀찮아지는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잖아요.]
[난 귀찮지 않은데.]
[…….]
[알려져도 상관없거든요.]
그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제 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도 말할 필요 없는 과거 때문에 마음속에 계속 죄책감이 머물렀다. 헤이가 보이는 호감이 부담스러운 이유도 바로 그 이유였다. 두 가지 능력을 가진 정신계 에스퍼. 헤이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라는 거, 아까 했던 질문과 관계있어요? 당신에 대해 들은 게 없냐고 물었잖아요.]
[…없다고 했으니까 이제 상관없어요.]
헤이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도 타이밍 좋게 직원이 음식을 가지고 왔다. 직원이 밀고 온 작은 카트 위에는 알록달록 예쁜 색감의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구운 토마토와 제철 채소, 문어 샐러드, 그리고 말린 생선 부르스게타입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음식 앞에서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먹어 본 적 있는 식전 빵만 베어 물고 있자 음식을 먼저 먹어 본 헤이가 말없이 내 앞의 접시를 가리켰다. 하는 수 없이 문어 샐러드에 있는 감자 하나를 포크로 집어 들었다.
[먹어 봐요. 맛있어요.]
헤이의 말대로 음식은 맛있었다. 생소한 음식인데도 향이나 맛이 낯설지 않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고, 나중에 메인으로 나온 해물 파스타도 매우 맛있었다. 어느새 식사는 끝을 향해 갔고,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다행히 식사하는 동안에는 음식 이야기 외에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디저트는 어때요?]
[이것도 맛있어요. 잘 모르지만 이 정도면 추천할 만한 것 같아요.]
[그렇죠?]
내 대답을 들은 헤이는 기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나와서 잘 먹지 않죠?]
[네.]
[매일 똑같은 것만 먹으면 지겹잖아요. 레지던스 카페테리아 음식도 훌륭하지만 가끔 이렇게 새로운 걸 먹는 것도 좋아요. 아, 물론… 당신은 카페테리아 음식도 좀 새로운 걸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간혹 윤 박사님이나 준서와 밖에서 먹을 때가 있지만 준서도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해서 언제나 가는 곳은 센터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사람과 닿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이렇게 사람 많은 번화가에 온 것은 김우영이 있었을 때뿐이었다.
[아까 그랬잖아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조금 전 끝났어야 할 대화가 다시 시작되자 여태껏 먹었던 음식이 전혀 소화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먹던 걸 멈추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
[만약 내가 당신에 대한 안 좋은 말을 듣게 되면… 그렇다 해도 난 당신을 믿을 거예요.]
그러니까 왜. 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당신은 정말 만약이라는 말을 좋아하네요.]
가이드인 당신이 내 거짓 과거에 대해 알게 되더라도 나를 믿어 줄 수 있을까. 과연 지금처럼 나를 좋게 봐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다 보면 최악의 상황과 함께 절대 일어나지 않을 희망도 함께 떠올랐다.
만약 당신이 나를 믿어 준다면?
혹시라도 그래 준다면. 어쩌면 당신이라면 그래 주지 않을까.
만약이라는 말을 늘 헛된 기대를 불렀다. 혹시, 어쩌면- 이런 말은 달콤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아픔만 안겨 주었다. 기대하고 바라다 보면 끝은 언제나 실망과 미움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렇다는 걸 잘 아는데도, 자꾸만 하면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