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7)

헤이수스 실바

눈을 떠 보니 놀랍게도 12시 반이었다. 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쭉 잠을 잘 뻔했다. 헐레벌떡 일어나 세수한 뒤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자 센터에서 준비한 차가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다. 센터에 도착한 시간은 1시가 되기 2분 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미스터 실바!]

조금 전 연락했던 연구원이 임시 포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아도 되는데. 에스퍼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연구원들이 전부 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일주일째 이곳에 있는데도 그들의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많이 피곤하실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원래는 적당히 쉬었다가 12시쯤 점심을 먹고 나올 예정이었는데 메시지를 보내다가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점심을 먹지 못했으니 당연히 배가 고팠다. 다행히 연이어 가이딩을 하려면 어느 정도 체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캡슐 내부 별도의 공간에는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나 베이커리가 잘 마련되어 있었다.

[아니요. 아직이긴 하지만 캡슐 안에 마련된 간식으로도 괜찮아요.]

방문 기록을 마친 연구원은 손목시계를 한번 보았다.

[일부러 여유를 두고 말씀드린 거라서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센터 카페테리아를 이용하셔도 괜찮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이 한참 교대 시간이라서 사람도 적을 겁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있죠?]

[두 시까지 캡슐에 도착하시면 됩니다.]

센터 카페테리아가 훌륭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 탓으로 늦어 놓고 특별 대우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바로 캡슐로 갈게요.]

괜찮다는 말에도 연구원은 별도로 준비한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결국 더는 거절할 수 없어 임시 휴식처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각국의 센터 건물이 다 제각각인 것처럼 에스퍼가 치료나 가이딩을 받는 정비 캡슐의 형태 또한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다. 한국은 가이드 비율이 높은 만큼 더 시설이 잘 갖춰져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완벽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했다.

인원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에는 프라이빗 가이딩 룸 외에도 별도의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모든 공간이 24시간 잘 관리되고 있었고, 정해진 시간마다 자동으로 소독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원이 이보다 더 늘어나면 정비 캡슐이 한 단계 더 확장된다는 사실이었다. 전체 확장된 캡슐은 가장 최근에 갔던 독일보다 1.5배는 더 컸다.

입구에서 소독을 마친 후 캡슐 안으로 들어가자 희미한 풀 냄새가 났다. 캡슐 안에는 자신의 에스퍼를 기다리는 가이드들이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매번 긴급 지원을 나갈 때마다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이것도 내가 매칭을 거부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제2 구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가이드였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크리쳐를 처리하기 위해 위험한 곳에 가야 하는 에스퍼. 그런 에스퍼의 가이드는 몇 날 며칠 동안 초조함과 불안함을 안고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실바.]

[안녕하세요.]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보았던 연구원이 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곧바로 나를 캡슐 맨 첫 번째 방으로 안내했다. 캡슐 한쪽에 있는 임시 가이딩 룸이었다. 센터의 배려로 이렇게 넓은 방 하나를 종일 이용했다. 어차피 1, 2단계만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 꼭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집중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듣자 거절할 수 없었다.

두 시가 되기 15분 전이었다. 5분쯤 앉아서 대기하고 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스르륵-

[…어?]

열린 문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별일 없어요?]

[케이.]

케이는 얼마 전 나와 호세의 가드를 맡아 주었던 에스퍼 중 한 사람으로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상대였다. 그래서 가드 일이 끝나고도 간혹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호세가 한국 이름이 어렵다고 투덜대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케이라고 소개했다.

테러가 일어나고 바로 그다음 날, 갑작스레 가드가 변경되었다는 소식에 나와 호세는 상당히 당황했다. 계속 함께했던 박 형사님과 한이 인사도 없이 사라지고 그날 아침 우리를 찾아온 건 센터 직원 두 명과 에스퍼 여섯 명이었다.

놀랍게도 여섯 명 중 단 한 명을 빼고 전부 메이트가 없는 에스퍼였다. 심지어 속성도 전부 달랐고 성별이나 나이도 전부 달랐다. 마치 그중 아무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처럼.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바꿔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눈에 빤히 보일 만큼 어린 에스퍼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명, 유일하게 연상이고 매칭한 에스퍼가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케이였다.

‘편하게 말해도 돼요. 그냥 형이라고 생각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알려 줄게요.’

이미 메이트가 있는 에스퍼라서 다른 에스퍼보다 조금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전달 사항을 그와 함께 주고받다 보니 조금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후, 갑작스레 현장 지원 일을 맡고 나서는 캡슐에 있으면 하루에 한 번씩 이렇게 인사를 하러 왔다.

[들어가도 되나? 가이딩 하는 사람 없어요?]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누구 오면 바로 나갈게요. 아, 저는 가이딩 받으러 온 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가이딩을 받으러 왔을 사람치고는 안색이 너무나 좋았다. 메이트에게 이미 가이딩을 받고 온 모양인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쉬러 온 거예요?]

[네.]

[현장은 어때요?]

[뭐… 똑같아요.]

[여전히 많이 바쁘죠?]

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오늘은 크게 다친 사람이 없어서 조금 수월한 편이에요.]

[케이도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우리는 뒤쪽에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물리계랑은 체력이 다르잖아요.]

케이는 치유계였다. 일반인과 다른 체력을 가진 물리계는 앞쪽 진영에서 직접 행동하므로 위험도가 높았고, 물리계를 서포트하는 치유계는 비록 뒤에 서 있어도 체력이 일반인과 같으므로 위험했다. 그래서 물리계나 치유계의 가이드는 늘 그들이 다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나마 현장에서 일하지 않는 정신계 쪽은 위험성이 전혀 없는 일을 하지만 대신 한 번에 소모되는 능력치가 너무 커서 자주 가이딩을 하지 않으면 폭주할 위험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걱정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케이.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궁금한 거? 이번엔 뭐예요? 갈 만한 곳? 식당? 쇼핑?]

[아니요. 그런 거 말고… 센터에 관련된 거예요.]

[센터와 관련된 거요? 흠. 일단 뭔지 들어 보고요.]

마침 정신계에 대해 생각하자 동시에 잊고 있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궁금했지만, 한국에 와서 계속 잊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온 S급 에스퍼는 총 다섯 명이고, 현재 활동하는 사람은 세 명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그렇죠.]

[그중 정신계 에스퍼가 한 명 있던데… 혹시 알아요?]

특별히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궁금해하는 S급 에스퍼가 정신계라는 사실은 이미 협회에 등록된 내용이었고 그것 말고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케이의 이마가 완전히 구겨졌다.

뭐지?

[왜 그래요? 내가 뭔가 실수했나요?]

[아. 아니에요. 잠깐 그냥… 좀 생각난 게 있어서.]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구겨진 그의 표정은 조금 후에야 되돌아왔다.

[뭐가 궁금한데요?]

[그를 알고 있어요?]

[당연하죠. 워낙 유명인이라서 모를 수가 없거든요.]

유명인? 하지만 협회 기록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는데. 케이에게 협회 기록에는 오직 그가 10년 전 발현했으며 아직 가이드가 없다는 사실만 적혀 있다고 말하자, 그는 갑자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늘 상냥한 표정만 짓던 그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렇게밖에 적을 수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자신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처음 나온 S급 에스퍼인데, 창피하다니요?]

[소름 끼칠 만큼 기분 나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것도 두 가지나.]

[두 가지?]

[사람 생각을 읽어요. 그 에스퍼.]

[아. 마인드리딩이요?]

[네. 그런데 거기다가 최면까지 걸 수 있거든요.]

마인드리딩과 최면 능력이라. 만약 두 가지 능력을 함께 쓸 수 있다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만지면 생각이 읽히는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가이딩을 하려면 무조건 닿아야 하니까요. 거기에 최면까지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가까이하기 좀 그렇잖아요.]

[흠…. 그래서 여태껏 가이드가 없는 건가요? 능력 때문에?]

케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 명 있었어요. 매칭하겠다는 가이드.]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사람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 버렸거든요.]

[아… 굉장히 힘들었겠군요.]

[힘들어… 요?]

[매칭할 가이드를 잃은 거니까 당연히 힘들지 않을까요?]

툭, 내뱉은 말에 케이가 갑자기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괴물은 가이드를 버렸어요.]

버렸다고?

꽉 주먹을 쥔 케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화난 표정으로 ‘정말 인간도 아니에요’라고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늘 상냥하게 미소 짓던 케이가 이렇게까지 흥분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뭔가 물어서는 안 되는 일을 물어본 것 같아 그만 이야기해도 좋다는 말을 하려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케이가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죽은 가이드가 제 친구였어요.]

너무 놀라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정말 소중했던 친구거든요. 매칭하지 않는다면 에스퍼와 가이드는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는데, 그 친구는 가이드인데도 그런 거 상관없이 모두와 잘 어울렸었어요. 정말 바보같이 착했는데….]

단지 궁금증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 S급 정신계 에스퍼는 워낙 흔치 않았고, 특히나 한국에서는 맨 처음 나온 S급 정신계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정보가 없어 괜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혹시나 한국의 다른 에스퍼라면 그의 능력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었던 것이었다. 설마 그 에스퍼가 케이가 직접 아는 사람일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미안해요. 알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군요.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몇 번이나 사과하고 상대가 괜찮다고 말해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했던 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인지. 이왕 말한 거 끝까지 이야기해 줄게요.]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케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매칭 당일 센터로 오던 두 사람의 교통사고. 그리고 하늘로 떠난 한 사람과 살아남은 다른 한 사람. 하늘이 노하여 벌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불운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가이드를 버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가이드가 죽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에스퍼 혼자 살아남은 것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케이는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허탈하게 웃었다.

[그 애 장례식 때… 발인 다 끝나고 난 후에야 왔어요. 그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라고요. 진짜 대단하죠? 늦게 온 주제에 담담하게 무표정으로 서 있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조금은 슬퍼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아니, 당연히 슬퍼해야 하는 거잖아요.]

물리계가 감정에 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신계가 그렇게까지 감정이 없었던가?

[편을 들려고 하는 건 아닌데… 혹시 참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아니면 너무 충격을 받는 바람에 잠깐 굳었거나.]

[그건 아닐 거예요.]

케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제 친구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한 번도요?]

[네. 너무하지 않아요?]

[혹시 기일이 아닌 다른 날 간 건 아닐까요?]

케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확인해 봤지만 단 한 번도.]

[그건 좀… 심하네요.]

[얼마 전에 마주쳤을 때 물어봤거든요. 내 친구가 왜 너를 메이트로 선택했는지 아느냐고. 그랬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더라고요. 우리는 몇 년이 지나도 이렇게 그를 기억하는데, 그 괴물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인 거예요. 지금은 전혀 관계없는 일, 그저 기억하기 싫은 기억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거죠.]

매칭을 결심할 정도였으면 분명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웠을 텐데.

케이의 말처럼 만약 그 정신계 에스퍼가 진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라면, 정말로 그는 인간이라기보다 괴물에 가까웠다. 보통 인간이라면 한때 평생을 약속할 만큼 소중한 상대를 그렇게 잔인하게 지울 수는 없었다.

[지금도 모르겠어요. 제 친구는 왜 그런 괴물을 메이트로 선택했는지. 모두가 거부하는 능력을 두 가지나 갖고 있는데 왜. 어째서 그런… 여전히 모르겠어요. 아마 평생 모르겠죠.]

케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생각도 해요. 혹시 그 에스퍼가 최면을 건 건 아니었을까.]

[그런데 최면은 시간제한이 있지 않아요?]

내가 알고 있는 최면 능력은 계속 유지되는 기억 조작과 달리 몇 시간 동안만 유지되고 그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풀린다. 그러므로 한 번 최면을 걸어 상대를 억지로 조종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유지되는 건 고작 몇 시간뿐, 그 이후에는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렇죠. 그냥…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도대체 뭐가 좋았을까, 하고. 제 친구 인기도 많았거든요. 굳이 그런 에스퍼를 선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에스퍼와 가이드 모두에게 사랑받는 가이드. 그런 가이드가 모두가 거부하는 에스퍼와 매칭 결심을 하다니. 본인이 아니고선 절대 풀 수 없는 숙제였다.

[…어렵네요.]

[그렇죠? 괜히 무거운 이야기 해서 미안해요.]

[아니요. 제가 시작한 거잖아요. 그 에스퍼에 대해 질문을 꺼낸 게 저니까.]

[아니에요. 나라도 궁금했을 거예요. 발현한 지 10년이 넘도록 가이드가 없는 S급 에스퍼라면, 누구나 궁금할걸요?]

[그것도 그렇지만, 활동 기록이 아무것도 없어서요.]

협회에 등록되는 내용에는 꼭 큰 업적이 아니더라도 에스퍼가 주로 하는 일이나 지금껏 했던 역할이 적혀 있었다. 물리계는 제2 구역에서 소속되는 팀이나 맡은 진영이 적혀 있었고 치유계는 지금껏 진행한 치료 상세 내역이 적혀 있었다. 정신계의 경우 제2 구역에서의 활동이 없는 만큼 다른 속성보다 내용이 적었지만, 그래도 주로 센터의 일을 서포트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 사실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에스퍼의 기록에는 그가 하는 일에 관한 내용이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센터에서 기록하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네?]

[이건 좀 우리랑 별개의 일이라서… 그냥 알고만 있어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안 돼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에스퍼가 하는 일이 경찰이랑 관련된 일이거든요.]

[경찰이요?]

[네. 아마 그래서 일부러 기록 안 했을 거예요. 센터랑 경찰이 사이가 좀… 좋지 않아서.]

[흠….]

역시 그렇구나. 그동안의 분위기로 봤을 때 대충 그렇다는 걸 예상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경찰과 센터는 협력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대립 관계이기도 해서 충분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걸 아는데 문득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지 ‘경찰’ 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새까만 유니폼을 입은 한이 생각났다. 바로 오늘 아침에 본 사람인데, 아주 오래전에 본 사람처럼 왠지 그리운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그 사람만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또….]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가 상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또? 뭔가 또 있나요?]

[…아니에요. 이건 진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사실 정말 궁금했지만, 더는 물을 수 없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 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누군가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

[미스터 실바! 가이딩 부탁드립니다!]

조금 전 안내했던 연구원이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대화를 여기서 끝내야 했다.

[아. 손님이 왔나 보네. 전 이만 갈게요. 나중에 또 봐요.]

[잠시만요. 하나만 더.]

서둘러 케이를 붙잡았다.

[뭔데요?]

[혹시… 이름 말해 줄 수 있어요? 그 에스퍼.]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정신계 에스퍼라서 현장에서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알고 싶었다.

[아…. 어차피 여기서는 유명인이니까 알려 줄게요. 신한서예요.]

신한서.

낯선 이름을 머릿속으로 기억했다.

[그럼 이제 갈게요.]

우리는 동시에 일어서서 문 앞으로 걸어갔다. 케이가 앞장서 먼저 열림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케이가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연구원 앞에 서서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 무슨 일 있어요?]

[아니에요. 그럼 이만.]

케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연구원과 가이딩을 받을 에스퍼가 함께 서 있었다. 연구원의 옆에 서 있는 상대를 확인하고 나 또한 잠깐 멈춰 섰다. 에스퍼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A급 물리계 에스퍼입니다. 지금 가이딩 가능하십니까?]

에스퍼의 한계치가 80을 넘어서고 폭주에 가까워짐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에스퍼의 눈 색깔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에스퍼의 한쪽 눈이 붉다는 것은, 그가 굉장히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계치는?]

[현재 81입니다.]

[아슬아슬했군요. 가이드는요?]

[아. 메이트는 지금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전에 3단계까지 동의를 받아 놨으니 가이딩 부탁드립니다.]

메이트가 있는 경우, 임시 가이딩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에스퍼의 가이드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폭주할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동의를 받기엔 너무 늦어 비상 상황이 일어나면 사전에 미리 동의를 받아 두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구원이 나가고 3단계 가이딩을 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작하겠습니다.]

상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닿자마자 단 몇 초 만에 굳었던 상대의 몸이 풀어졌다. 상대의 눈 색이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이드는 측정된 가이딩 능력치로 레벨이 나뉘며 자신의 레벨보다 한 단계 위의 에스퍼까지 가이딩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B급 가이드인 경우 A급 에스퍼의 가이딩은 가능하지만, S급 에스퍼의 가이딩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매칭률에 따라 가이딩이 되는 정도가 달랐으므로 B급 가이드라도 어떤 A급 에스퍼에게는 가장 기본인 30%까지만 가이딩 할 수 있고, 또 어떤 A급 에스퍼에게는 70% 이상의 가이딩을 할 수도 있었다.

결국, 가이드의 레벨이 높을수록, 그리고 상대와의 매칭률이 높을수록 가이딩 가능한 에스퍼의 수가 많아졌다.

그래서 S급 가이드 중에서도 모든 에스퍼와 매칭률 70%가 넘는 All-ESP 가이드는 더할 것 없이 귀한 존재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스퍼에게 가이딩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쾅-!

[미스터 실바!]

예상대로 오후 다섯 시 이후에는 정신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크리쳐는 어두울 때 더 많아졌고, 늘어나는 크리쳐의 수만큼 에스퍼가 많이 투입되자 그만큼 가이딩이 필요한 인원이 늘어났다.

사실 가이드 비율이 현저히 높은 한국은 센터장의 말대로 성인 에스퍼 대부분에게 이미 매칭된 가이드가 있어서 임시 가이딩을 받으러 오는 인원은 해외에서 잠깐 지원을 왔거나,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에 한할 거라 예상했기에 임시 가이딩이 많이는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이미 가이드가 있다 해도 일주일 넘게 이어지는 긴급 상황에서는 에스퍼와 가이드의 타이밍이 비껴 나가 가이드가 잠시 부재중일 때 에스퍼의 상태가 악화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임시 가이딩이 필요했다.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문을 열자 연구원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와 함께 서둘러 캡슐 밖으로 이동했다.

한계치 85가 넘어선 에스퍼는 점차 의식이 멀어져 자신의 공격성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위험성이 매우 높아 간혹 캡슐로 데려오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가이딩을 할 때도 있었다. 현장에 직접 갈 수 있는 것은 All-ESP 가이드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이쪽입니다!]

제2 구역은 엉망이었다. 쌓인 쓰레기 더미와 시체가 굴러다니는 난잡한 그라운드. 사방에 뿌려진 진흙과 오물들. 그런 환경 속에서 끈적거리는 괴수의 타액과 혈액을 뒤집어쓰며 사냥하는 에스퍼는 언제 봐도 놀라웠다. 자신보다 몇 배는 더 큰 크리쳐를 상대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강했다.

뒤쪽 나무 기둥에 눈이 새빨개진 에스퍼가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언제 봐도 폭주 직전의 에스퍼는 섬뜩했다. 이마를 찌푸린 채 서 있을 뿐인데 몸 전체에서 살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저항이 심한 에스퍼에게는 곧바로 3단계 가이딩을 할 수 없어 1단계 가이딩을 하기 위해 황급히 그의 장갑을 벗겨 내고 단단한 손을 붙잡았다.

[이제 괜찮아요.]

언제나처럼 똑같은 말을 뱉었다. 가이딩을 하며 주문처럼 외우는 말이었다. 있는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모아 가이딩을 했다. 5분쯤 지나자 거친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고 쿵쿵대며 뛰던 박동이 점차 괜찮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상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매번 이런 순간마다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반드시 메이트가 있을 필요는 없다고.

특별한 능력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 명의 에스퍼만 도맡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네 엄마를 보는 순간 이 사람이 바로 내 짝이라는 걸 알았다. 너도 그런 인연을 만나게 될 거야. 메이트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니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거라.’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없어요, 아버지.

지금껏 가이딩을 한 에스퍼만 수백 명,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에스퍼 중 단 한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어머니를 보는 순간 운명이라는 걸 알았다던 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내게 주어진 운명은 이 능력으로 많은 에스퍼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이드가 도착했습니다! 캡슐로 이동하겠습니다. 미스터 실바, 정말로 감사합니다.]

남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나는 특별한 능력을 주신 신에게 감사했다.

다시 생각해도 역시 내게 메이트는 필요 없는 존재였다.

***

어둠이 지나고 날이 밝자 캡슐을 찾아오는 에스퍼도 차츰 줄어들었다. 피곤함을 억지로 누르며 눈 감기는 걸 겨우 참고 있자 오전 7시가 다 되어서 휴식 허가가 떨어졌다.

[교대할 가이드가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좀 쉬고 오셔도 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휴식이 허락된 건 겨우 5시간이었다. 레지던스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시간을 낭비할 것 같아 그냥 센터에 머무는 쪽을 택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시간을 조금 늘려 보겠습니다. 레지던스에 가셔서 쉬고 오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어릴 적부터 쭉 체력 단련을 해 왔고, 성인이 되어서는 수면 시간도 조절해 왔다. 평소에도 습관을 들여 온 덕분에 짧은 수면으로도 크게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었다.

가이딩 룸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기 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뭐 하고 있어요?

Han S: 영화 봐요.

한은 영화를 좋아하나 봐요.

Han S: 딱히.

그 아래로 깜빡 잊고 보내지 못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레지던스에 있는 메뉴 중에 괜찮은 음식 좀 추천해 줘요.

썼던 메시지를 지우고 아침 인사를 적었다.

한. 좋은 아침.

10분만 더 있다가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잠깐이면 되는데. 딱 8분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꿈을 꿨다.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진 탓인지 꿈속에서까지 가이딩을 했다. 급하게 찾아온 에스퍼의 손을 잡고 집중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헤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그 얼굴이 한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새까만 머리카락. 또렷한 눈매와 오목조목 자리 잡은 이목구비.

‘한?’

쿵. 쿵.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붙잡은 손에 괜히 땀이 차올랐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손을 붙잡은 것만 수백 번은 되는데, 가슴속에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마른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안아 주고 싶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친.

저 몸을 안으면 심장이 터질지도 몰라.

쿵. 쿵.

조금 더 빨라진 심장이 세게 가슴을 두드렸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떴지만 곧바로 현실로 돌아올 수 없었다. 현실 세계에 돌아와서도 꿈의 잔상 때문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꿈속에서 잡았던 그 손의 감촉과 온기를 기억하기 위해 멍하니 두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정신인가?

한은 에스퍼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가이딩을 하는 꿈을 꾸었다.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가이딩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진 행동이었다.

돌았구나.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한참 후, 완벽히 현실임을 자각하자 무거운 죄책감이 찾아왔다. 비록 꿈이었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다른 마음이 들었던 상대가 한이라는 사실에 옅은 자괴감도 들었다.

정말 미쳤구나.

***

그날 이후 서너 번인가 같은 꿈을 꾸었다. 매번 나오는 이도 같았고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런 꿈을 꾸는 동안에 한을 만나면 꿈 때문인지 새까만 머리카락을 자꾸만 쓰다듬고 싶었고, 장갑 아래 숨겨져 있는 손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을 만난 건 겨우 두 번뿐이었다.

미국에서 S급 가이드가 추가 방문하기로 했으나, 그가 미국 내에 발생한 다른 비상 상황 지원을 가는 바람에 방문 일정이 갑작스럽게 연기되었다. 따라서 당분간은 계속 바쁠 예정이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틈틈이 레지던스에 들러 잠깐이지만 옥상에서 한을 만날 수 있었는데 문제는 20일 이후였다.

20일부터 추가 에스퍼 지원이 오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났다. 지원을 온 에스퍼 대부분이 메이트가 없는 에스퍼였고, 그중 S급이 두 명 있어 능력치 소모가 많은 그들을 위해 상시 대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꼼짝없이 센터에 갇혀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핸드폰 액정엔 1월 25일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벌써 1월의 넷째 주 일요일이었다.

똑똑-

[미스터 실바. 지금 잠깐 괜찮으십니까?]

연구원의 목소리가 다급하지 않은 걸 봐서 가이딩 때문은 아닌 듯했다. 천천히 문을 열자 예상대로 연구원은 혼자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연구원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실은… 조금 전 협회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영국에서 S급 가이드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네?]

사전에 전혀 듣지 못한 말이었다.

[영국에서 가이드가 오기로 했었나요? 처음 듣는 말인데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게… 지난번처럼 혹시라도 오기로 한 가이드에게 일이 생길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못 오게 되면 실망하실 수도 있어서 확정이 나면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래도 조금 갑작스럽네요. 아 물론, 기쁘긴 하지만….]

[죄송합니다. 저희도 오늘 갑자기 출발 소식을 들었습니다. 협회와 센터가 소통이 잘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유가 어찌 됐든 S급 가이드가 왔다는 것은 그나마 잠깐의 휴식이 허락된다는 의미였다. 일주일간 센터에만 갇혀 있던 내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언제 도착하는지 아시나요?]

[오늘 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그때부터 교대가 가능합니다. 계속 쉬지 못하셨으니 레지던스에 가셔서 좀 쉬고 오십시오.]

연구원이 떠나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교대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로가 누적되어 상당히 피곤한데도 쉬어야겠다는 생각보다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먼저 떠올랐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였다.

한. 뭐 해요? 잘 잤어요?

이제 밥 먹을 수 있어요. 내일 괜찮아요?

메시지의 답은 곧바로 도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라고 생각해 기다렸지만 3시간, 4시간이 지나 저녁이 될 때까지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캄캄한 밤이 되어도 오지 않았던 답장은 그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Han S: 먹어요, 밥.

신한서

‘김우영 군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끔찍했던 그날로 돌아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그 말투와 표정에서는 그 어떤 미안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외운 듯한 형식적인 말. 여전히 그것이 다였다.

수천 번 머릿속을 괴롭혔던 말들이 이어졌다.

‘신한서 군에게 맞는 다른 가이드를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우영 가이드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사망 보고가 될 예정입니다.’

‘불운이 따른 걸로 했으면 합니다.’

하나가 사라졌으니 이제 다른 하나를 찾아보자고.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사람은 죽은 걸로 하자고. 그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두 번이나 가족을 잃었는데, 그 자리를 대체 누가 채워 줄 수 있는데? 누가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거야? 당신이라면 이 모든 게 불운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

현실에서도 울지 못했던 나는 꿈에서조차 울 수 없었다.

“헉-.”

계속해서 반복되는 악몽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하아, 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를 돌리기 위해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채 잠에서 깬 곳은 침실이었다.

지금 몇 시지.

벽시계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원래 있었던 불면증 탓도 있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져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두통과 답답함이 이어지는 건 평소와 같았지만 30분에 한 번씩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와 잠깐 숨을 멈추고 고통을 이겨 내야 했다. 졸음이 밀려와 잠깐 잠이 들어도 이내 엄청난 통증 때문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해가 뜰 무렵에야 까무룩 잠이 든 것 같은데 마치 한숨도 자지 못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매일 눈을 떠 만나는 하루는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데, 오늘만큼은 눈을 뜨기 전부터 다른 하루였다.

1월 25일.

그날이었다.

김우영의 기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김우영이 죽은 날이었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내게 김우영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절대로 오늘을 슬퍼하며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라고 수백 번 생각해도 자꾸만 머릿속에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나 아프고 괴로운 날이었다. 그냥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그런 생각만 끊임없이 반복됐다. 김우영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까지는 어떻게든 이겨 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이날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오늘의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몸이 아파서 다행이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아픈 게 차라리 나았다.

드르륵-

종일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던 와중에 메시지가 왔다.

J. Silva: 한. 뭐 해요? 잘 잤어요?

다정한 문자였다.

그래서 일부러 답장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이런 따뜻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속을 모르는 상대는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 왔다.

J. Silva: 이제 밥 먹을 수 있어요. 내일 괜찮아요?

J. Silva: 영국에서 지원이 와서 여유가 생겼거든요.

J. Silva: 함께 저녁 먹지 않을래요?

J. Silva: 괜찮으면 보고 연락해 줘요.

액정에 뜨는 메시지를 보고 일부러 답장을 보내지 않자 저녁에는 전화가 왔다.

드르륵- 드르륵-

헤이

여덟 번 울린 전화가 끊기고 1분 후 다시 걸려 왔다. 정확히 두 번. 그의 전화를 두 번이나 무시했다.

이제 포기했겠지.

그런 생각을 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다시 짧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J. Silva: 일이 바쁜가 봐요. 내일이라도 연락 줘요.

J. Silva: 아, 그리고 밥 잘 챙겨 먹어요.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먹고 싶지 않았고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공복의 허기짐도 잊게 했다.

귀찮음에 못 이긴 척 짧은 메시지라도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혼자 있고 싶었다.

***

끔찍했던 하루가 지나고 그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헤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 한!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상대의 말이 쏟아졌다.

- 괜찮은 거예요? 계속 연락이 안 돼서 사실 걱정했어요. 일이 바쁜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까 봐요. 위험한 일이잖아요.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어제 좀 바빴어요.]

- 늦게라도 괜찮으니까 메시지 주지 그랬어요.

[피곤해서 집에 오자마자 잤어요.]

- 불면증이라면서 얼마나 무리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바빠도 그건 너무해요. 사람을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지. 생각 없이 뱉은 거짓말은 간혹 할 말을 잃게 했다.

- 오늘은 컨디션 어때요?

[푹 쉬었더니 괜찮아요.]

거짓말. 실은 어제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틀 전, 오후 두 시쯤 센터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거의 한 달 만의 호출이었다. 에스퍼가 폭주한 장소는 아무도 없는 외곽의 자택이었고, 불행하게도 폭주한 에스퍼는 물리계 에스퍼였다.

늘 그랬듯 물리계 에스퍼를 상대하는 일은 힘들었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채 폭주한 에스퍼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는 것은 언제나 두려웠다. 그렇지만 두렵고 무서워도 센터와 약속한 일을 해야 했다. 끝나고 나서 곧바로 치유계의 치료는 받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보이는 곳이 다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올라간 한계치 때문에 정말로 상태가 위태로워졌다. 그동안은 나 자신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가이딩을 받는 것은 피하려 했지만, 지금 이 상태라면 이번에야말로 가이딩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먹자고 했죠?]

- 맞아요.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몇 시쯤이요?]

- 음… 대충 정리하고 준비하면… 6시쯤이요.

오전 10시에 청장님을 만나러 잠깐 본부에 가야 하는 것 빼고는 아직 따로 들어온 요청은 없었지만 오후에는 센터에 들러 임시방편으로 주사를 맞으려고 했다. 하지만 주사를 맞게 되면 몇 시간 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그날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오늘은 취조 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주사는 그냥 내일 맞아야겠다.

어차피 오늘은 본부 쪽 일도 없을뿐더러 이틀 주기로 에스퍼가 폭주하는 일은 없었으니 센터의 호출이 들어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흔쾌히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때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 아. 다행이다. 그럼 지난번에 말했던 식당, 예약해 둘게요.

[괜찮겠어요? 예약은 내가 해도 돼요. 식당만 알려 줘요.]

-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할게요.

대체 얼마나 괜찮은 곳이길래.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서프라이즈를 해 줄 거라며 잔뜩 기대에 찬 헤이를 위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디서 만날 거예요?]

- 레지던스에서 만나서 같이 가면 좋은데, 좀 늦어지면 센터에서 바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게 되면 식당 근처에서 봐요. 장소는 메시지로 보낼게요.

[알겠어요. 그러면 나중에 연락해요.]

- 이번엔 정말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거네요. 정말 밥 한번 먹기 너무 힘들어요.

[그러게요.]

- 좀 이따 봐요. 출발하기 전에 전화할게요.

그리고 네 시쯤, 헤이에게서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다행히 예약 시간을 미룰 수 있어 우리의 저녁 시간은 6시에서 7시로, 만날 장소는 식당 근처로 변경되었다.

헤이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도심에 있는 지하철역 근처였다. 월요일이라도 퇴근 시간이 넘어서인지 꽤 많은 사람이 이곳저곳에서 몰려나왔다. 이토록 사람이 많은 곳은 오랜만이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 일찍 왔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복잡한 개찰구와 떨어진 한쪽 건물 벽에 서서 헤이를 기다렸다. 약속 시각까지는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응. 어디야? 나 도착했어.”

“저녁 먹고 지난번에 말했던 그 카페 가 볼래?”

“아, 박 사장님. 네. 아이고, 그럼요. 잘 지내시죠?”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친구를 기다리는 대학생,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는 연인, 막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나도 어쩌면 저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들도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소소한 일상 속 피어나는 작은 걱정들마저 부러워졌다.

약속 시간이 10분쯤 남았을 때였다.

쾅-!!!

뒤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높은 건물 하나에서 새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폭발?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커다란 호출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삐- 삐- 삐-

언제 들어도 요란한 이 호출음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서둘러 쳐다본 액정에는 너무나 익숙한 장소가 적혀 있었다.

「OO 지하철역 남쪽 900m XX 백화점 인근」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지금껏 이토록 짧은 간격으로 에스퍼가 폭주한 적이 없었기에 이틀 간격으로 에스퍼가 폭주할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도 센터가 보낸 에스퍼의 폭주를 알리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순간, 곧 이곳에 도착할 헤이가 떠올랐다. 자칫하면 에스퍼인 그가 이 일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 한. 방금 소리 들었어요?

[헤이.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 네?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 정말로 가 봐야 해요.]

- 방금 폭발한 것 때문인가요?

[네. 일단 이쪽으론 오지 말아요. 알았죠? 택시를 돌려서 레지던스로 돌아가요.]

- 알았어요. 조심해요, 한.

***

쾅-!!!

“꺄악-!”

괴물은 저 멀리 서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도심 한복판에.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존재는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의 눈앞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격을 맞은 도시는 잿더미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한차례 충격을 받은 중심부는 뿌연 먼지로 사방이 뒤덮였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메케한 연기가 호흡기 속으로 들어와 연속으로 기침이 나왔다.

“여기!”

내게 호출을 날린 센터 관계자는 난리가 난 한복판에 서 있었다. 오늘도 역시 그의 이마는 성난 주름으로 푹 패어 있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 사이에는 그 흔한 인사 한마디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한 번 더 듣고 뒤를 돌았는데, 보조하는 연구원 하나가 다가와 예고도 없이 얼굴에 묵직한 가면을 씌웠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익숙한 소독약 냄새로 뒤덮이고 얼굴 가장자리에 차가운 고무가 닿았다. 순식간에 씌워진 방독면은 언제나 그렇듯 무겁고 불편했다.

“그냥 마스크 착용하겠습니다.”

다른 때라면 알겠다고 방독 마스크를 건네줄 그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아니면 연기 때문에 눈이 아플 겁니다. 폭주 직전에 능력을 써 버려서 주위에 있는 게 다 타 버렸거든요.”

뭐?

“불 능력자입니까?”

“네. 이번 에스퍼는 부분 불 능력자입니다.”

부분 불 능력자라면 자연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S급일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S급입니까?”

“다행히 A급입니다. 능력 범위가 좁아서 자연계인데도 특별히 제외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요.”

다행이라니. 실소가 터졌다.

부분 화력이라서 능력을 쓰는 거리가 제한되어 있다 해도 결국 근거리까지 가야 하는 내게는 A급이나 S급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긴장이 밀려와 손끝이 떨렸다. 센터 관계자는 그런 날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차피 폭주하고 나서는 능력 사용 못 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별일 없을 겁니다.”

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물리계라면 레벨과 상관없이 체력이나 힘은 같았다. 바로 며칠 전 느꼈던 그 통증이, 목에 닿았던 엄청난 악력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가시죠.”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방탄조끼를 건넸다.

원망스럽게도, 이제 내가 움직여야 할 때였다.

곳곳에 나뒹구는 잔여물과 시멘트 구조물들을 밟고 괴물에게 다가갔다. 한 발짝 한 발짝 무거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이상하게 몸이 삐거덕거렸다. 이미 다 나아서 조금의 통증도 남아 있지 않은데, 두려움을 기억하는 머리가 자꾸만 신호를 보내는지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겨우 이틀이었다.

능력을 쓴 지 이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겨우 이틀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능력을 썼다간 나 또한 폭주 직전까지 갈 거라는 걸 알지만 그보다는 당장 다가올 아픔이 두려웠다.

가고 싶지 않아.

내 안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맘을 읽었는지 도착하기도 전에 붉은 눈동자의 괴물이 나를 발견하고 먼저 달려들었다.

쾅-!!!

“윽!”

나는 멱살이 잡힌 채로 물건처럼 던져져 벽에 처박혔다. 도움이 되지 않는 방탄조끼를 통해 충격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동시에 밀려오는 통증은 예상대로 아프고 끔찍했다. 아픈 몸을 일으켜 다가가면 퍽, 주먹이 날아왔다. 다시 일어서서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면 고통도 점점 무뎌졌다. 몇 차례 더 주먹을 받아 내자 성이 난 상대가 한 번 더 나를 집어던졌다. 최면을 걸 수 있는 몇 초만 있으면 되는데, 상대는 쉽게 자신의 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쿵-!

와르르 무너지는 건물을 따라 굴러 내려온 돌덩이가 어깨를 쿡 내리찍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가온 상대는 예상대로 목을 눌렀다.

“크윽-”

세게 부딪힌 충격으로 잠깐 숨을 쉴 수 없었다. 깜빡깜빡, 자꾸만 생각이 끊어졌다. 쿨럭, 하고 기침을 토하자 입 안에서 비릿한 향이 느껴졌다. 떨리는 손을 들어 내 목을 조르는 이의 손을 붙들자 흠칫, 놀란 상대의 악력이 한차례 더 강해졌다. 그 바람에 붙든 손이 힘없이 다시 떨어졌다.

‘이제 그만해.’

손이 닿지 않으면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다. 수십 번 외쳐도 내 말은 상대에게 절대 닿지 않았다.

“그… 만….”

이대로 끝나는 걸까.

점점 의식이 흐릿해졌다. 왜 하필이면 이런 능력을 주었냐는 원망이 머릿속을 괴롭혔고, 숨겨 두었던 두려움이 맘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왔다.

정신이 멀어져 갈 때쯤,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누군가 지원을 온 모양이었다.

“……!”

획, 붉은 눈동자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목을 조르는 악력이 조금 약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손을 올렸다. 언제나 그랬듯 최면을 거는 건 순간이었다.

‘진정해.’

그가 제발 그대로 쓰러져 주기를 바랐다.

털썩.

그 바람대로 긴 싸움 끝에 커다란 인영이 쓰러졌다. 상대가 쓰러지자마자 나 또한 풀썩 주저앉았다.

아. 오늘은 좀 힘들다.

모든 걸 다 놓아 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아프다.

언제나 그랬듯 능력을 쓰고 난 직후에는 가슴이 조금 답답하고 머리가 아팠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무리했으니 증상이 심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언가 이상했다.

뭐지?

“헉-”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숨을 고르며 기다렸지만 깨질 듯한 두통과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점점 더 심하게 가슴을 조여 왔다. 분명 목을 조르는 커다란 손이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숨쉬기 힘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읏-”

갑자기 심장이 날뛰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결국 조금 전 상대에게 썼던 능력을 나 자신에게 써야 했다.

‘진정해.’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일은 수십 번이나 해 온 일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능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서너 번 머릿속으로 외친 말이 전혀 닿지 않았다. 이틀 전만 해도 조금 오래 걸렸지만, 분명히 괜찮았었는데.

최면이 걸리지 않았다.

왜 안 되는 거지?

폭주가 시작된 몸은 마치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훅 하고 오른 열 때문에 귀까지 먹먹해졌다. 그러고 보니 눈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꽉 막힌 방독면이 갑갑해 벗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잘되질 않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꽉 막혀 나오지 못한 호흡을 겨우 토해 내자 헉헉대는 숨소리가 메아리쳐 돌아왔다.

“하아…. 하….”

***

어느새 한계가 오고 끝이 왔다는 걸 직감했다. 지금껏 느꼈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이 엄습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로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전신이 짓눌리는 듯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을 더는 견뎌 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끝내도 되지 않을까.

전부 다 내려놓고 이제는 편해지고 싶었다.

‘당신하고 있으면 내가 이상해져요.’

우습게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지금 떠오른 얼굴은 김우영이 아니었다. 잊지 못해 그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워했는데. 수시로 떠오르던 그 얼굴보다도 겨우 몇 번 본 다른 얼굴이 생각났다. 김우영과 단 한 군데도 닮지 않은 그 얼굴이.

지금쯤 잘 돌아갔으려나.

김우영. 나 이상해. 자꾸 네가 아니라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이래도 되는 건가?

언젠가 헤이가 불쑥 꺼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신만 보면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생각을 하게 돼. 이런 생각을 해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생각.’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말이, 지금에서야 이해가 갔다.

내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사실 나도 그렇다고 답하고 싶었다. 내게 남겨진 벌이라고 생각했던 익숙한 외로움 앞에서 어느 순간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만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이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 사람과 있으면 자꾸만 욕심이 났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물어볼 걸 그랬어.

발갛게 변했을 눈에서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드디어 이 괴로움을 끝낼 수 있는데, 끝을 내고 싶지 않았다. 쓸쓸한 마지막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마지막 따위 오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은, 누구보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내게도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도했다.

델 듯한 열기 다음에 찾아온 건 살을 찌르는 추위였다. 온몸이 덜덜 떨릴 만큼 강한 한기가 밀려왔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몸을 웅크렸다. 알알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나 모래 알갱이가 살갗에 닿았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멍이 들고 뼈가 부러졌을 텐데, 몸이 아닌 다른 곳이 아팠다. 어깨에 닿는 차가운 바닥과 온몸을 휘감는 칼바람에 마음이 시리고 아팠다.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후드득 떨어졌다.

모든 걸 포기한 그때,

흐릿한 시야 너머로 커다란 인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갑자기 텅 비었던 손과 굳어 있던 어깨에 보드레한 손길이 닿았다.

순식간에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편안함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미치도록 좋은 감촉이 닿자마자 거짓말 같은 평온함이 찾아왔다. 복잡했던 머릿속도 불안했던 마음도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살을 파고들던 냉기가 갑자기 사라지고 쉼 없이 불던 한랭한 겨울바람이 더는 살을 때리지 않았다.

[이제 다 괜찮아요.]

귀에 닿는 나지막한 목소리.

분명,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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