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U 기억상실〉 (18/29)

〈AU 기억상실〉


유독 긴 밤이었다.

선재는 암흑뿐인 꿈에서 준희를 안고 있었다.

아무리 달리고, 소리를 크게 질러도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도 앞은 캄캄했다.

“허…!”

월세방에서 눈을 뜬 선재는 아이부터 살펴보았다. 컴컴한 실내 여기저기를 짚어 아이를 찾았고,

“아, 악!”

바로 옆에 누운 건 준희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른 선재가 곧장 뒤로 물러났다. 널따란 침대 구석에 있던 준희가 잠에서 깨 선재를 쳐다보았다. 빠아…? 하는 소리에 선재가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이게 대체…. 빠르게 준희가 있는 곳까지 기어간 선재가 아이를 안고 황급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야, 니…. 뭐 하냐…?”

좀 전까지 제 옆에 누워있던 남자였다. 남자는 황당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명 하나를 켜고 상황을 파악하던 남자는, 이내 일어나 방의 불을 완전히 밝혔다. 인상을 찌푸리고 제 쪽으로 다가온 남자가 니 뭐 하는데? 하고 말을 걸었다.

“누, 누구신데, 왜, 주…. 준희랑…. 저….”

“뭐라고?”

어디서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두울 땐 알지 못했는데, 불을 밝히고 보니 준희보다 더 작은 아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장소도 준희와 잠들었던, 그 허름하고 좁은 월세방이 아니었다. 준희는 손을 뻗으며 아기, 아가, 하고 침대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마다 아이 몸을 다잡은 선재가 손을 벌벌 떨었다. 분명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꿈을 꿨었다. 한 번도 깨었던 기억이 없었다. 납치를 당했다면 눈치를 못 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몸을 잡힌 게 답답했던지, 준희가 고개를 들고 선재를 올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아빠 얼굴을 보고 아이도 울상을 지었다. 선재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이해했다. 너무 아기라, 사람들이 놀러 왔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발을 움찔, 움직이는 제 행동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벽을 짚곤 어데 갈라고? 했다.

“어? 어데를 갈라고.”

“시, 신고할 겁니다. 아이 건드리면,”

“뭐?”

문신이 빼곡한 상체와 얼굴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선재가 정신없이 말했다. 머리가 새하얘져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도 어려웠다. ‘신고’와 ‘아이’만 머릿속을 허망하게 떠돌았다. 작은 준희의 몸을 꼭 끌어안은 선재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남자에게 경고했다.

“더 다가오면 정말 신고합니다.”

“야, 장난도 머 이런 재미도 없는….”

남자가 웃으려다 표정을 굳혔다. 제 얼굴을 보곤 고개를 왼쪽으로 꺾었다.

“니 진짜 내 누긴지 모르냐.”

“…모릅니다.”

딱딱하게 대답한 선재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장난하는 거 아니고, 진심으로 내를 모른다고?”

“모른다고요. 정말 모릅니다. 다가오지 말,”

“점마도 누군지 모르겠고?”

범진이 가리킨 자리엔 아까 발견했던, 준희보다 작은 그 아이가 누워있었다. 고개를 돌린 선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상한 게 있다면 최근에 겪었던 일들도 아득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몇 번이나 확인하듯 묻는 남자에게, 선재는 반복해서 똑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 * *

병원에서는 원인 불명의 기억상실이라는 회의적인 진단을 내놓았다. 다양한 자극을 가하면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고는 했지만, 결국 약도, 뚜렷한 치료법도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가만히 들으며 그래서요, 그래서요, 하던 범진은 말을 완전히 이해하곤 행패를 부렸다. 그딴 말 들으려고 온 게 아니라고 고함을 쳤다.

선재는 옆에 앉아 설명을 듣다가, 범진이 발끈하면서부턴 어쩔 수 없이 그를 말렸다. 그만하세요. 예? 화가 잔뜩 나 테이블을 두드리고, 뒤에 있던 책장을 흔들어 책을 쏟았지만 제가 몸으로 막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행동을 멈췄다. 한숨을 한번 쉬곤, 내 그만할까? 묻기까지 했다. 선재는 황당한 얼굴로 예, 대답하곤 그에게서 손을 뗐다.

일주일 넘게 병원을 다녔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가는 곳마다 이상소견을 발견하지 못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범진은 최면치료실에도 선재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선재는 최면에 한 번도 빠져들지 못했다. 착, 소리를 들은 건 알겠는데, 정신이 말짱했다. 그런 식으로 한 시간, 길면 두 시간을 낭비하고 범진과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범진은 니 때문에 미치겠다고, 낯가리는 선재의 머리를 쥐고 입에 넣으려고 했다. 선재는 당황해서 이러지 말라고, 범진의 몸을 밀어냈지만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늘도 큰 소득은 없었다.

선재는 범진의 차에서 내려 집 앞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수지와 커다란 나무들이 보이고, 깨끗하게 포장된 차도가 바로 아래에 나 있었다.

신축주택 몇 채도 눈에 띄었는데, 생긴 건 다 제각각이었다.

뭐가 퍽,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선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담배를 물고 올라온 범진은 연기를 휘, 내뱉곤 그대로 꽁초를 뒤편으로 던졌다.

그러면서 거의 다 끊었는데 니 때문에 실패했다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가까이 다가온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니 아직도 내 못 믿겠지.”

“….”

가만히 있자, 화아, 씨, 하고 감정을 드러냈다. 사진도 보여주고 음성도 들려줬는데 뭘 더 원하느냐고 했다. 선재는 그 말엔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같이 병원을 다니고 최면도 하러 다니는 건 다 범진이 제시한 증거들 때문이었다. 납치라도 당했나 생각했지만 범진의 휴대폰 가득 제 사진이 저장돼 있었다. 몰래 찍은 것도 아니었다. 다 대놓고 찍고, 같이 찍은 사진도 수십 장에 달했다. 음성은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구녁에 박니 마니 하는 천박한 소리를 하는데 저도 그걸 따라서 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같은 건 기본이었다. 처음엔 조작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정교하게 조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리냐고, 정색하던 선재도 쏟아지는 증거엔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쓸며 앞을 보던 범진이 아, 하고 선재의 허리에 손을 댔다.

“니, 어, 여기 점 있거든?”

“무슨 짓입니까!”

범진은 다짜고짜 선재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허벅지랑 엉덩이에 쬐끄만 점이 하나씩 있다고, 그걸 확인해보자고 했다.

“그만, 제발 그만하라고요!”

바지 천이 딱 달라붙어 엉덩이가 민망한 모양으로 드러났다. 허리 부분을 냅다 들어 올린 범진이 선재를 제 몸 쪽으로 질질 끌며 붙였다.

“아니, 씨팔, 안 믿긴다매. 그래서 뭐라도 계속 보여 줄라 한다 아니냐.”

그 틈에 몸을 비튼 선재가 범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는 짓도 동네 날건달 같고, 말투도 이상하다. 얼굴엔 흉터가 큰 게 하나 있고, 몸은 문신 천지였다. 욕을 섞지 않고는 한 문장을 구사하지도 못했다. 지금도 증거랍시고 대뜸 손으로 바지를 벗기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제가 믿기지 않았다. 녹음된 통화 음성은 분명 제 목소리가 맞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방금까지 바지를 벗기려던 범진은 갑자기 개씨팔! 하고 고함을 쳤다.

“미쳤어요?”

그리곤 성질을 참지 못해 여기저기를 차고, 밟았다. 선재가 애꿎은 계단참을 퍽퍽 차는 범진을 말렸다. 가만히 두면 발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씨바, 내가 안 미치게 생깄냐. 내가 씹, 니를….”

뒤를 돌아본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가만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 눈을 들여다본 선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 제가, 그러면….”

씨…. 하고 욕처럼 숨을 내뱉던 범진이 선재의 말을 들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사진도 이렇게 다 있고….”

말로만 우기면 믿지 않을 테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반응할 때마다 범진이 증거를 내밀었다. 처음 보는 사람, 특히 경계심이 드는 사람에겐 무뚝뚝한 말투로 일관하는 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범진은 저와의 웬만한 통화 내역은 다 기록해 두는 편인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녹음된 음성을 들었지만, 파일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다 듣지도 못했다. 사진도 일일이 다 확인해볼 수 없을 정도로 장수가 많았다.

“아이도…. 낳았다고 하니까…. 제가.”

“그래, 채재혁이. 금마 그거 니 아들이라니까?”

“아니, 알았으니까요. 제가 노력을.”

“씨이팔! 뒤질 놈의 세상…. 겨우 씨발, 아오, 이 개좆…. 씨버럴.”

하는 욕마다 쌍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욕이면 다 쌍스럽긴 하지만 범진이 하는 욕은 욕의 범위도 벗어난 것 같았다. 코앞에서 욕을 듣고 있던 선재가 말은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하고 작게 읊조렸다.

“씹, 이래 됐는데도 욕하지 말라는 건 똑같네. 니미 씨팔! 개씨팔!”

예전에도 제가 욕하지 말란 말은 했나 보았다.

범진은 발로 바닥을 퍽, 퍽, 차며 난리를 쳤다. 다시 돌계단을 발끝으로 차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허공에 쌍욕을 내질렀다. 선재는 짐승처럼 날뛰는 범진을 쳐다보다 거리를 두었다. 처음엔 말렸지만 서서히 멀어졌다. 5m쯤 떨어진 울타리까지 멀어졌고, 범진은 씨발, 이거 어디 갔냐, 하고 두리번거리다 다시 제가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니, 씨, 도망은 왜 가냐.”

“계속 욕만 하시잖아요.”

“화아.”

목까지 시뻘게진 범진이 고개를 위로 쳐들고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나는 게 없으니 할 말도 없었다. 선재는 분에 찬 범진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범진이 고개를 똑바로 해 선재를 쳐다보았다.

“니 아까 뭐라 그랬지. 노력해 보겠다고 했냐.”

“…네.”

모든 흔적과 증거가 범진의 편을 들고 있었다.

준희도 그를 잘 따랐고, 제가 낳았다는 아이도 범진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꾸밀 이유가 누구에게도 없었다. 돈이라도 많았다면 범진을 더욱 수상하게 여겼을 테지만, 저는 그동안 벌어 놓은 돈도 한 푼 없는 것 같았다. 범진이 이럴 이유가 없었다.

“그럼 니, 내 하는 거에 토 달지 마라.”

범진은 손가락을 세워 선재의 얼굴을 가리켰다.

노력해 보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토 달지 말란 남자의 심정을 헤아리긴 힘들다. 말의 앞뒤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씨, 대답 안 하냐.”

손을 들려다 마는 범진의 행동에, 선재가 흠칫했다. 척 봐도 질이 나쁜 사람처럼은 보이는데 행동을 간신히 참는 티가 났다.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도 금방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눈을 들고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대답까지 덧붙이려 하는데,

범진은 안아 보자고 했다. 이러면 뭐가 생각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행동은 말보다 앞섰다.

갑자기 어깨를 안는 범진의 행동에 선재가 반응도 못 하고 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힘으로 머리를 고정해, 마찰되는 귀 부분이 아팠다.

남자에게선 나무 타는 냄새가 났다.

어디서 맡아 본 향 같기는 한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 * *

“준희 언제 이렇게 컸지?”

“으응?”

2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갔다. 그동안 기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범진과도 어색하게 지냈다. 똑바로 봐라, 하고 자기 전에 뚫어져라 쳐다봐야 하는 시간이 제일 곤욕이었다. 처음엔 아무 스킨십도 하지 않았지만, 엊그제는 그러다 이마에 입술을 붙여 왔었다.

어제는 이래야 기억이 난다고, 귀에 입을 맞추려 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일을 생각하던 선재가 아이 앞에서 이마를 짚었다.

“압빠….”

작은 준희의 손이 얼굴에 닿았다. 말은 안 해도, 아이도 제가 이상한 것쯤은 눈치챘을 터다.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린 선재가 아이를 안심시켰다. 어, 아니야.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후에 한참 뜸을 들이던 선재가 질문 하나를 건넸다.

“준희는…. 아빠 말고…. 그…. 다른 아빠, 좋아해?”

범진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몰랐다. 계속 그 아저씨, 다른 아빠, 키 큰 사람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아이가 아부지, 하고 따르긴 하던데, 제 입에 익진 않았다. 오늘도 그, 그, 하다 다른 아빠 정도로 언급했다. 준희는 뜻을 한 번에 파악했다.

“녜…. 주니 아부지….”

고개를 끄덕인 준희가 선재의 눈을 바라봤다.

“압빠 압푸지 마세요….”

슬픈 얼굴이 될 것 같은 아이의 낌새를 알아챈 선재가 서둘러 도리질을 쳤다. 팔을 뻗어 준희를 안아 주며 아닌데, 안 아픈데, 말했다.

“잉…. 압빠….”

말도 하고, 감정을 읽고 그 감정에 동화될 줄도 안다. 선재는 아이가 품에서 울려고 하자, 나름대로 웃긴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도리도리, 하고 준희가 이보다 더 어렸을 때 주로 했던 동작을 선보였다. 그 동작에 아이가 압빠, 하고 품속에서 일어서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작은 몸을 지탱해 준 선재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주니는 재여기 아닌데….”

“어?”

투정 어린 작은 말소리에 선재가 되물었다. 준희는 선재를 쳐다보다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도리도리를 흉내 냈다.

그제야 요즘은 도리도리, 같은 건 안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 소리를 낸 선재가 그래, 우리 준희 다 커서, 하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안기는 건 여전히 좋아하는지 거기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안겨서, 아빠, 주니가 호 해 주께요…. 했다.

선재는 아이를 안은 채 방 안에서 잠든 재혁의 존재도 생각했다.

병원 기록도 남아 있었고, 조리원이나 병실에서 찍은 사진도 있으니 기억에 없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만약 정말 제가 낳은 아기라면 책임이 따랐다. 어떻게든 기억을 찾아야 하는 게 맞다. 범진이 어떻고, 그와 사랑에 빠진 게 어떻다는 식의 감상은 사치였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아기가 저 방에 누워 있다. 그러니까….

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현관문이 열렸다. 품에서 조용히 호오, 호오, 하던 아이가 몸을 끌며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선재가 아이를 들어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아이는 만세를 하고 현관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저러다 넘어지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범진이었다. 준희가 신발도 안 벗은 범진에게 안겼고, 범진은 아이를 안은 채로 신발을 벗었다. 아부지, 하고 두 팔로 범진의 어깨를 벅차게 끌어안은 준희의 몸이 유독 작고 어리게 보였다. 범진의 뒤로는 집에서 일을 해 주고 있다는, 앳된 얼굴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가 거실 쪽을 바라보며 선재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선재도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범진은 벗은 신발 위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준희의 양 볼에 뽀뽀를 해 줬다. 아이도 범진에게 뽀뽀를 해 주고…. 선재가 그 모습을 멍하게 쳐다봤다. 처음엔 적응이 안 돼서 준희를 제가 안으려고 했지만, 준희가 싫어했다. 으으응, 하며 한동안은 범진의 품에 있으려고 했다.

“준희야. 형아도 안아 주세요.”

그 주변을 서성이던 남자가 준희를 받아 안았다. 남자의 이름은 영채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어, 제가 기억을 잃어버린 걸 알기도 했다. 영채는 틈만 나면 사장님, 이거는요? 이건? 하고 혹시 기억하는 게 없는지 묻곤 했다. 준희는 형아도 좋은지 영채의 어깨에도 보드라운 뺨을 이리저리 비비며 장난을 쳤다. 아, 귀여워. 영채의 호들갑에 선재도 미소 지었다.

“야.”

털썩, 소파에 앉은 범진 때문에 몸이 흔들렸다. 거실 구석으로 가나 싶었던 범진이 바로 옆에 몸을 붙이며 앉았다.

선재가 말없이 범진을 쳐다봤다.

“나가자.”

“어디를….”

“밥도 먹고, 내 사무소에도 갔다가.”

“…….”

“뭐. 걍 노는 걸로 보이냐. 다 기억 찾는 거다. 이게.”

틈만 나면 집으로 와 직업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일은 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한다고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 하고 집을 나갔다가 한 시간, 길면 세 시간 내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지금도 한 시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알겠다고, 준비를 하겠다고 말한 선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범진이 넓게 벌린 팔로 소파 등받이를 잡았다. 뒷모습을 보이며 옷을 갈아입으러 간 선재를 위아래로 쉼 없이 훑었다. 그러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기를 반복했다.

범진은 곧 나온 선재를 대놓고 훑었다. 눈빛을 느낀 선재가 옆쪽으로 몸을 피했다. 범진은 뒤로 꺾었던 고개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선재를 향해 다가섰다.

“반지도 끼야지.”

“…….”

범진이 주머니에서 꺼낸 건 굵은 금반지였다. 새로 맞췄다는 은색 링도 있는데, 밖에 나갈 땐 꼭 이걸 끼게 했다. 촌스럽게 보석까지 박힌 게 어디서 이런 걸 샀을까 싶었다. 선재는 손을 슬쩍 빼려고 했지만, 범진이 손목을 단단히 잡고 반지를 끼워 줬다.

“딱, 어? 눈에 잘 띄게.”

손을 들고 이리저리 흔든 범진이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

“이게 우리의 역사가 담긴 가락찌다.”

“아….”

‘우리’의 역사라고 하기엔 반지가 너무 제 취향이 아니었다. 아니, 딱히 누구의 취향도 아닌 것 같은…. 범진이 뭐라도 기억이 안 나냐는 식으로 쳐다보지만 해 줄 말이 없었다. 디자인은 참 강렬하다. 잠깐 방심한 틈을 타 손을 슥 빼낸 선재가 뒤쪽에서 영채와 놀고 있던 준희를 향해 걸어갔다. 범진은 선재의 뒤를 따랐다.

“준희, 형아랑 좀만 놀고 있어.”

“네에.”

“아빠가…. 맛있는 거 사 올게.”

아이가 마침 영채의 손을 끌어 어디로 향하고 있었다. 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영채의 손가락을 잡고 반쯤 열린 장난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잰걸음으로 준희를 따라가던 선재가 나무 큐브로 가득한 작은 풀장에 들어가는 아이를 한동안 쳐다봤다. 괜찮겠지. 기억만 찾으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선재는 영채에게 옆방을 가리키는 손짓도 해 보였다. 제 새끼라고 하니 금방 정이 든 것일까. 잠에 빠진 아기 걱정도 되긴 되었다.

큐브로 물장구치듯 노는 준희를 뒤로하고 몸을 돌린 선재가 바로 뒤에 서 있던 범진에게 얼굴을 부딪쳤다. 가까이 있으면서 한마디도 안 한 범진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제 왔냐, 했다.

바로 뒤에 있었으면서 무슨 소린가 몰랐다.

선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 이제 가죠, 말했다.

남자와 자주 가던 곳들을 찾아가면 뭐가 바뀔지도 모른다. 마땅한 병명은 없지만 다양한 자극이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은 계속 들은 참이었다. 이런 식으로 범진과 어딜 들르는 건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엔 범진과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추운데 웬 아이스크림이냐고 하니, 이런 짓을 여름 새벽에 자주 했다고 했다. 상담받은 병원이 대부분 서울에 있어, 이런 곳을 갔다고, 여기서 뭘 먹었다고 보여준 적도 많았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걸 보여주는 범진이 고맙긴 했다.

작은 기억이라도 떠오르면 좋겠다. 선재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현관문을 나서는 범진의 뒷모습을 천천히 따라갔다. 며칠 전부터 범진은 좀 신이 나 보였다. 옛날에 가봤던 곳이나, 했던 걸 제게 말해 주는 게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 * *

“저기 보이냐.”

범진이 가리킨 곳은 고요한 물가였다. 한 사람이 낚싯대를 두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곳을 내려다본 선재가 범진이 씨, 하는 소리를 들었다.

“니랑 저서 하루 죙일 앉아 낚시했는데.”

한 번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다시 그곳을 내려다봤다. 늙은 남자가 검은색 패딩을 입고 낚시하는 것 말고는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에 선재가 잘…. 하고 입을 열었다.

“모르,”

“뒤에 주차장도 있지.”

“…네.”

“거서 카쎅도 뒤질나게 떴다.”

미간에 힘을 준 선재가 창밖을 쳐다보다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니가 카쎅광이었그든.”

“…거짓말하지 마시죠.”

살면서 그런 거 좋아해 본 적 한 번도 없다. 선재가 표정을 굳히고 범진을 쳐다봤다. 반응이 재밌기라도 한지 범진이 운전대를 대충만 잡고 얼굴을 자꾸 이쪽으로 돌렸다. 내리막길인데 겁도 없이 운전했다.

“와, 억울해 디진다.”

“…앞에 보시고요.”

“나는 낚시만 하고 갈라고 했는데, 니가 저기, 어디냐. 컨테이나 보이지.”

뒤쪽에 있던 작은 가건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지나친 장소라 확인할 수도 없고, 선재는 그걸 보겠다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범진은 기억을 찾아 주려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거짓말을 할 때가 있었다. 히죽히죽 웃는 얼굴에서 그게 티가 났다.

“거기 옆에다 차 대고 졸라 칬다 아니냐.”

“…….”

“쓰읍, 그거는 강렬한 기억일 건데.”

“기억 안 나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 적 없으면은, 뭐. 내 혼자 좆 휘두름서 좆불놀이라도 했나 보지.”

마무리 짓는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꾸하지 않은 선재가 창밖만 바라봤다. 준희나 재혁이란 아기를 생각하면 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범진과 있으면 기억을 잃은 것 같지도 않고, 잃었다고 해도 그 기억, 찾고 싶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설득이 되는 게 있어야지. 모든 정황이 그와 사랑했음을 가리키고 있더라도 지금, 사랑의 ‘사’ 자도 떠오르지 않는 걸 어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재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차가 멈춘 곳은 오리고기 식당 앞이었다.

시동이 꺼지자마자 선재가 차에서 내렸다. 오는 내내 범진이 틈만 나면 손을 잡아 오거나 허벅지를 만지려고 해 빨리 내리고 싶었다. 차가운 겨울날이지만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은은한 숲 냄새도 어디선가 풍겨 오고 있었다. 범진은 보닛을 크게 돌아 선재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선재가 제가 갈게요, 하고 범진이 먼저 들어가길 기다렸다.

텅텅 빈 식당인데 범진은 굳이 방으로 들어갔다.

선재는 신발을 벗으며 범진을 따라갔지만, 왠지 들어가고 싶지 않단 생각만 했다.

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과 만약 어쩌다 콩깍지가 씌었더라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공존했다.

일행이시죠? 물은 종업원에게 얼결에 네, 대답한 선재가 범진이 향한 방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식당. 덩그러니 위치한 곳인데 유명한 식당인가 보다. 떡 하니 붙은 액자엔 식당 연혁이 상세하게 기재돼 있었다. 애매한 시간대라 사람이 없던 거지, 지나치면서 예약석도 몇 석 보았다. 먼저 앉은 범진을 쳐다보고, 맞은편으로 건너간 선재가 야,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아야지. 어데 가냐.”

잠시 주춤한 선재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이렇게 먹읍시다.”

“하아, 니 말 자꾸 깡패 색끼처럼 할래?”

“네?”

“네는 뭘 네냐. 여 와서 앉으라고.”

“…….”

선재가 멀거니 서 있는 사이, 종업원이 찬을 들고 들어왔다. 선재는 좀 있다가요, 하고 끝내 범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찬이 테이블에 놓이는 순간까지 범진은 이따 내 옆에 앉기로 했다, 니, 하고 포기할 줄을 몰랐다. 종업원의 눈치를 본 선재가 예….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붉은 양념에 재워져 나온 오리불고기는 질이 좋아 보였다. 검은 철판 위에서 끓어 입맛도 자극했다. 원래 오리불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그랬다.

“니가 이거 환장하고 먹었다.”

“…….”

“애 배고도 얼마나 잘 먹었는지 아냐.”

“…….”

“첨엔 한 개도 못 먹다가. 이거를 이렇게.”

나무 주걱으로 고기와 양념을 끌어 다 제 쪽으로 몰아주었다. 철판을 쳐다보던 선재가 그쪽도 먹으라고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처음부터 쭉 그쪽, 그쪽, 했는데 하도 범진이라고 부르라고 하니 말하기가 어색했다.

“범진… 씨도 드시죠….”

“어쭈?”

“…….”

“그 쌍판에 말을 그래 하니까 내가 씁,”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또 웃었다.

신경을 끄고 식사를 시작한 선재가 불고기 맛에 속으로만 감탄했다. 제가 자주 먹은 이유가 있었겠다 싶었다. 적당히 매콤달콤하면서도 감칠맛이 대단했다. 고기 자체도 부드러웠다. 묘하게 맛있는 향기가 나는데 그건 무슨 재료 때문인가 몰랐다.

“맛있냐.”

처음부터 범진은 식사엔 별 관심이 없었다. 기억을 찾으러 간다고 했으니, 거기에 열중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선재는 그제야 범진의 변태 같은 말도 이해하려 노력했다. 막상 또 들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좋게 생각하기가 가능했다. 빤히 제 얼굴을 쳐다보며 고기나 몰아주는 범진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니 근데.”

볶음밥까지 먹고 있던 선재가 고개를 들고 범진을 쳐다봤다.

“옆에는 언제 올 건데.”

선재는 입안에 있던 밥을 마저 삼키고, 물을 몇 모금 마셨다.

“…또 이상한 짓 하실 거잖아요. 기억 찾으러 나온,”

“야, 상식적으로 생각이란 걸 해 바라. 니 내랑 애색끼 낳고 할 거 다 했는데 뭔 짓인들 안 했을까 봐? 니 기억 찾으러 나왔다 아니냐. 그럼 협조라는 걸 해 줘야지. 니가 맨날 내 옆에 앉아가 밥 먹어 가지고, 내가 그거 해 보자고 이러는 거 아니냐.”

선재는 범진이 흥분하듯 말을 잇는 동안에도 ‘상식적’이란 단어에 꽂혀 뒷 말은 거의 듣지 못했다.

범진이 제발 상식적으로 나왔음 싶었다.

어? 안 오냐? 하고 시비 걸듯 말한 범진 때문에 선재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입고 왔던 점퍼는 옆에 그대로 두고, 몸만 옮겨 범진 쪽으로 갔다. 범진은 방금까지 언성을 높일 것 같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로 저를 반겼다. 좋다고 웃는데 기분 나쁜 웃음이다. 속내를 감춘 선재가 범진 바로 옆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어깨동무를 한 범진 때문에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선재가 고개를 빼며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와, 이거 진짜 급나 팅기네.”

“…….”

“니 이래 해 주면 존나 좋아했다니까. 내 좋으라고 이러는 줄 아냐.”

말없이 앞만 쳐다보던 선재가 뻣뻣하게 세우고 있던 목에서 힘을 풀었다.

“저도 아니까…. 옆자리로 왔지 않습니까…. 그냥, 너무 이러는 건 아직….”

“뭘 아는데. 사실은 내 좋으라고 하는 게 있기는 하다.”

“…….”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할 말을 잃은 선재가 그 말엔 대꾸하지 않았다. 범진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가 몸이 자꾸 범진 쪽으로 붙게 되었다. 머리가 그의 상체에 닿을 것 같자, 선재가 범진의 팔을 급하게 잡았다.

“팔은 좀….”

“니 근데 말을 원래 그래 했냐.”

“…뭐가요.”

“어쩔 땐 괜찮은데 어쩔 땐 머머 함까, 됐슴까, 왜 그래 말하는데.”

“무슨 말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봐라, 또 그라네, 말하며 웃은 범진이 고개를 안쪽으로 넣고 선재와 눈을 맞추려 했다.

“어? 또 했다고. 그렇게. 깡패 색끼처럼.”

“…….”

“깡패 색끼처럼 그라면, 어? 내가 겁을 먹지 않겠어요.”

진짜 깡패 같은 사람이 이마를 이마로 비비며 말했다. 상체가 단단히 붙잡혀 밀리진 않았지만, 확 다가오는 바람에 머리가 뒤로 빠졌다. 범진은 힘이 너무 셌다. 일자로 묶여 버린 팔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온몸이 꼿꼿하게 붙들린 자세가 된 채, 선재는 최대한 몸을 웅크려도 보았다.

“그, 그만 좀.”

“니 오랜만에 냄새 맡으니까 기분 좋다.”

“…….”

“처음엔 내만 모른다 그래서 꼴 디지게 받았는데.”

“…….”

“기억 씨팔, 뭐. 찾음 되지. 안 그냐.”

“…….”

선택하는 단어들이 하나같이 저급하다. 짠한 구석도 있지만, 인상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 남자랑 살고 있었던 걸까? 눈이라도 좀 피할라치면, 얼굴을 들이밀며 파고드는데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꽉 잡힌 어깨도 부서질 듯 아팠다.

“어깨…. 너무 아픈데요….”

“아픔 안 되지.”

한 번 더 아픈 건 안 되지, 하고 툭 털어 내듯 말한 범진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완전히 놔주는 건 아니었다.

“밥은. 더 먹을래?”

“아뇨. 다 먹었습니다.”

“씁. 또 근달 색끼처럼 말한다.”

뭐가 건달 같고 깡패 같다는 건지 선재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깡패, 깡패, 하는데 누가 제일 깡패 같은지 모르나? 선재는 속으로만 반항하듯 생각하곤 범진의 눈을 쳐다봤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의 눈이 보였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배 얼마나 티나왔는지 보자.”

눈이 닿자마자 혼자 이상하게 웃더니, 갑자기 배 검사를 한다고 왼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흠칫한 선재가 범진의 팔을 더듬듯 잡았다.

“무슨 짓입니까….”

“아니, 우리가 원래 이러고 놀았그든.”

“…….”

“니 밥 다 먹으면 배 검사해 주고 그랬다.”

“…….”

퍽 자연스럽게 말해 선재가 말려들었다. 의심하는 눈초리에 범진이 내 살면서 구라 치본 적 한 번도 없다고 거짓말했다. 그 틈에 손은 서서히 들어왔다. 손에서 힘을 푼 선재가 배 위로 슬쩍 닿아 오는 따뜻한 느낌에 침을 삼켰다. 실내가 따뜻하긴 해도 손이 이렇게 따뜻할 리는 없다. 바로 직전에 바지춤에다 손을 세게 비벼 열을 내던데, 이걸 하려 그랬나 싶었다.

“쫌 많이 먹었네. 니 많이 먹음 체하는 거 알지.”

커다란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배를 만졌다.

“…….”

무슨 짓을 하고 살았던 걸까? 배 검사라니. 하고 있는데도 돌아오는 기억이 없어 억울했다. 여기까지만 하세요, 하고 범진의 팔을 끌어낸 선재가 얼굴에 오르는 열을 감추지 못했다. 범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선재의 어깨를 다시 끌어서 제 몸쪽으로 붙였다. 이거, 하고 턱짓한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가리켰다.

“니 입도 내가 딲아 줘야 한다.”

“그건 제가 하겠, 잠깐,”

“내가 해 줘야 기억이 돌아오든 말든 하지.”

범진은 치우란 식으로 선재의 팔을 걷어 내고 물수건 하나를 뜯었다. 그래도 아 뱄을 때보단 들 묻히네, 하고 선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지낸다고? 믿기지가 않았지만 기억나는 게 없으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범진은 태연한 얼굴로 선재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손가락에 물수건을 끼우듯 두르고 구석구석 야무지게도 닦았다.

“내가 방법을 안 지가 얼마 안 됐는데….”

닦아 주는 동안엔 혼잣말을 했다.

“니한테 어떻게 하면 되는지….”

“…….”

무슨 말인지. 선재는 범진의 맥락 없는 말을 들으며 입을 닦였다. 범진은 처음엔 혀를 내밀지 않다가, 아랫입술을 억지로 열어 선재의 혀를 쳐다보면서부터는 보란 듯 혀를 내밀었다. 선재가 혀로 느끼하게 입술을 쓰는 범진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식당에서 나오자, 다음 코스는 사무소라고 범진이 떵떵거렸다.

가는 동안, 길 아래로 나 있는 물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다. 여름엔 여기 물이 꽉 찬다는 소리를 들으며 선재는 바깥 구경을 했다. 삭막한 듯 근사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겨울이어서 나무도 다 옷을 벗었고, 옅은 햇빛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지만 자연 특유의 웅장함이 있었다.

도착한 사무소는 적당한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데스크도 생각보다 많았다. 범진이 소장이라고 해서 조악하고 불법적인 곳만 생각했었다. 왠지 미안해진 선재가 사무소 안으로 들어갈 땐 범진이 하자는 대로 했다.

손을 잡아야 한다고, 안 잡으면 직원들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린다는 범진의 말에 기꺼이 손을 내주었다. 식당에서도 그랬지만 손에 열을 내고 내미는 버릇이 있었다. 덕분에 잡은 손은 따뜻했지만.

일부러 팔을 휘휘 저으며 걷는 범진 때문에 의도치 않게 직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범진이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에 오야, 하고 잠시 멈췄다.

손을 잡은 채로 계약을 했니 마니 했다.

뒤쪽에서 손이 잡힌 채로 서 있던 선재가 무안한 듯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어? 사모님? 안녕하세요!”

멀리서부터 고개를 숙이며 다가오는 직원의 목소리가 컸다. 낯간지러운 호칭에 선재가 어색하게 반응했다. 아마 범진이 그렇게 부르라고 시키지 않았을까. 이건 기억이 없어도 민망하고 부끄럽고 싫었다. 선재가 예…. 하고 겨우 대답했다.

“닌 목소리가 왜 이래 크냐. 느그 싸모 놀란다.”

범진이 몸을 돌려 그 직원에게 아는 체를 했다. 어? 박영원이, 까지 덧붙였는데 직원이 사장님, 저 조영원이라고 몇 달째 말하는데 서운해요, 말했다. 평소 조영원을 이영원, 박영원, 김영원 등으로 부르고 있나 보았다. 제가 처음엔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이제는 외워 주세요, 하고 영원은 투정을 부렸다.

남들한텐 황당할 정도로 관심이 없나 보다.

“여기, 니 자리.”

소장실 문을 열자마자 안마 의자 하나가 나왔다. 집에 있는 것과 모델이 같았다.

“니가 허리 아프다고 울어싸 가지고.”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거짓말인지 뭔지, 어디 나사 빠진 사람처럼 얘기해 자존심이 상했다. 발끈했지만 차분하게 말을 꺼낸 선재가 범진이 안쪽 데스크로 척척 걸어 나가는 걸 쳐다봤다.

“뭐. 임신해서 허리 아팠다고. 야한 생각 했냐.”

“하….”

야한 생각을 안 했는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히 한 방 먹은 것 같아 선재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범진은 종이 서류 하나를 들고 오더니 했네, 하며 선재와 이마 박치기를 콩 했다.

코뿔소처럼 들이박을 것 같은데 아프게 하진 않는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기만 한 선재가 소장실 밖으로 나간 범진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범진은 1분도 안 되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디서 들고 왔는지 커피 용기 하나도 손에 들려 있었다. 니 먹는 거 있길래 쌔거 쌔벼왔다, 말한 범진이 내민 건 오렌지에이드였다. 근처에서 배달 주문이 가능한 카페가 딱 하나라고 언급한 범진은 거기서 니는 이것만 먹는다, 했다.

에이드를 받아든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뭘 보는데. 심장 떨굴라고 쳐다보냐.”

“…….”

그래도 계속 쳐다보고 있자 범진이 미간을 확 좁히고 얼굴을 붙여 왔다.

“니 딴 새끼 이래 쳐다보면 진짜 죽는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안 났을 뿐이다. 별거 아닌 말인데도, 범진에게 하려면 생각이 좀 필요했다. 혼자 어떻게 해석해 들을지를 몰라서였다. 아직 기억을 찾은 것도 아니니까….

죽이겠단 말은 다소 뒤늦게 들렸다.

시선을 피한 선재가 아예 뒤로 돌았다.

“야.”

그냥 어디 앉아야겠다 생각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범진의 팔이 허리를 감아 와 놀랐다. 선재가 몸을 살짝 비틀었다.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해 주냐.”

“왜요.”

“죽인다 한 건 취소.”

“…….”

한쪽 어깨에 범진의 턱이 닿았다.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어깨를 들며 목을 짧게 만든 선재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니가 그런 말은 하지 말랬그든.”

“…….”

“내가 또, 니 말은 잘 듣는다 아니냐.”

범진이 못 보는 각도에선 선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불만이 가득할 때나 경멸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 앞볼에 옅은 보조개가 패곤 했다. 지금도 딱 그런 얼굴이 됐다. 귓가에 대고 말해 간지러운데다 숨도 더웠다. 범진이 어? 하고 확인하듯 물으면서는 뺨에 입술도 닿을 것 같았다. 몸이 팔에 감긴 채여서 피하기도 어려웠다.

범진은 뭐가 재밌는지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선재와 눈을 맞추려 했다. 얼굴을 내미는 것도 내미는 거지만, 한쪽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뾰족한 듯 묵직한 느낌이 제일 별로였다. 범진은 거의 매번 발기하고 있었다. 찝찝한 감각에, 선재가 하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범진이 여태 화만 냈다면 상황이 좀 더 심각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범진은 처음에만 화를 냈을 뿐, 기억을 잃어도 별로 나쁠 게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기억을 찾아보자고 집 안을 돌아다닐 때도 그랬다.

진짜 기억 안 나냐, 이건 뭐다, 저건 그거다, 할 땐 괜찮았는데.

갈수록 혼자서 웃고 있었다.

왜 장난을 치지? 의아해하며 쳐다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빡대가리 돼 뿠냐, 하면서 좋아하기만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배려를 해 주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진을 제게 보여 줘야 할 텐데, 휴대폰 각도가 갈수록 범진 쪽으로 기울었다. 종국엔 혼자 사진이나 영상을 보며 니가 이랬네, 저랬네, 하면서 감상이나 하고 있었다.

통화 음성도 마찬가지다.

특히 그때 바지춤이 제일 불룩하게 솟곤 했다.

“알았으니까…. 좀 앉으면 안 될까요….”

허리를 조금 꺾어 앞걸음을 치자 엉덩이에 닿는 느낌이 훨씬 덜했다. 범진이 어깨에 턱을 걸고 따라오긴 했지만 무턱대고 하체를 붙이진 않았다. 여기서 이러고 놀았던 걸까? 이러고 놀았다면 제가 좀 불쌍했다.

바로 앞 소파까지 겨우 안착한 선재가 테이블 위에 에이드를 놓았다.

정신이 없어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히터 열 때문에 얼음은 훨씬 작아져 있었다.

그제야 에이드를 들고 몇 모금 삼켰다. 생과일로 만든 건가? 맛이 좋긴 하다. 톡톡 쏘는 탄산과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맛있지. 니 그거 맛없다고 하면 니 아니다.”

이 사람은 할 일이 없나…. 일하는 사무소까지 와서 저만 따라붙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가 네, 맛있습니다, 말했다.

범진은 케, 하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와이리 근달색기 같냐고 또 낄낄댔다. 소파 등받이를 몇 번 치더니 여기서도 뭘 했는지 기억 안 나냐고 물었다. 소파를 쳐다본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아무것도?”

“네.”

에이드가 맛있는 것 외엔 특별한 감상이 들지 않는다. 범진은 옆으로 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았다. 안 그래도 튀어나왔던 부위가 노골적으로 치솟았다. 불룩해진 천 근처에 일자 모양의 주름이 무수히 졌다.

말없이 고개 돌린 선재가 빨대에 입을 갖다 댔다.

“하, 씹. 진짜 다 잊어뻐렸냐.”

웃고나 있었으면서 갑자기 심각한 투로 말을 뱉었다.

“모른다는 거 데리고 뭐를 하겠냐.”

“…….”

손을 머리 뒤로 둔 범진이 벽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콧대가 되게 높네. 첫인상 같은 건 기억나지 않지만, 옆에서 얼굴을 자주 봐 그런지 코나 눈썹뼈, 귀 모양 따위는 인상에 남았다. 뺨까지 그어진 흉터도 눈에 익었다. 언뜻 사나운 얼굴처럼 보이는데 눈매가 매섭지 않아 그 정도로 험상궂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마침 범진이 눈썹을 치켜들고 이쪽을 바라봤다.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선재가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목에 힘을 척, 뺀 범진이 삐딱한 각도로 선재를 쳐다봤다.

허어 씨, 하고 거친 소리를 뱉은 범진은 따먹지도 못하는데 어디서 귀여운 척을 하고 지랄이냐고 생트집을 잡았다.

“억울해 뒤지겠네.”

그리곤 몸을 일으켰다 다시 털썩 앉았다. 의도적으로 간격을 좁혔다.

식당에서처럼 붙어 앉은 범진은 또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며 시비를 걸어왔다.

“니 기억 찾으면 내가 니 가만 놔둘 줄 아냐.”

코를 맞부딪히며 말했다.

“니 배 뽈록하게 튀어나올 때까지 할 거다.”

주먹을 손바닥으로 치며 탁탁, 소리를 냈다.

“하.”

이런 미친 변태를 사랑했다니. 정말 미쳤었구나. 선재는 아무리 퍼즐을 맞춰 보려 해도 조각들이 어지러이 나뒹구는 느낌만 받았다. 실실 웃는 변태남을 피해 등을 말자 변태남의 손이 허리를 감아 왔다. 힘도 들어가 있어 몸이 통발에 걸린 고기처럼 퍼덕댔다. 선재가 미간을 구긴 채로 범진을 쳐다봤다.

“누가 지금 따먹는댔냐….”

코끝을 스치며 할 얘긴 아니었다. 뜨거운 숨이 얼굴 전체에 퍼졌다. 범진은 어? 누가 지금, 하고 코로 선재의 얼굴을 밀어내며 턱까지 내려왔다. 작은 턱에 범진의 입술이 끈적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얼굴엔 그새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야.”

그러다가 야, 하고 가라앉은 투로 말을 걸었다.

선재가 불만에 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턱이 반짝, 범진의 침으로 번들댔다.

“니도 진짜 웃기네.”

그 말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선재가 뭔 소리냐, 하는 얼굴로 범진을 쳐다봤다.

“내 모른다면서. 모르는 새끼가 얼굴 빨고 있는데 힝, 힝, 하고만 마냐?”

힝, 힝, 같은 소리 낸 적도 없지만, 갑자기 화내는 범진이 어이없어 말문이 막혔다.

“이거 안 되겠네.”

큰일이라도 생긴 듯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는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가 욱해서 말을 꺼냈다.

“제가 언제 그랬, 그랬습니까.”

“그랬는데?”

“안 그랬어요. 그러는 그쪽이나, 이렇게 하는 거 되게.”

“…….”

“되게….”

범진은 넋도 놓고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쪽 눈썹이 움직이고, 눈이 크게 뜨이는 걸 본 선재가 입을 닫았다.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기만 해도 범진은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기가 무서웠다.

“됐습니다.”

“하, 이거 또.”

“…….”

“내가 니랑 사기면서 답답해 뒤질라 했던 게 몇 번인지 아냐.”

“…….”

왠지 알겠다. 말이 안 통하니까 말을 안 했을 거다. 아니면 지금처럼 부담스러워서 입을 닫았거나. 그런 인간이랑 사귀긴 왜 사귀었지? 선재가 속으로만 정신없이 생각하고 뚱하게 범진을 쳐다봤다.

“어째 그때랑 똑같냐. 개욱끼네.”

손으로 턱을 닦아 낸 선재가 몸을 일으키는 범진을 향해 눈을 들었다. 드디어 볼일이 생긴 모양이다. 진심으로 웃긴지 졸라 웃기네, 좆나 웃기네, 말한 범진은 소리로도 웃었다. 완전히 일어난 범진이 몸을 돌리고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

아, 이건 아니잖아.

선재가 바지 앞섶이 툭 튀어나온 채로 걷는 범진을 아찔하게 바라봤다. 아까보다 더 발기했는지 앞쪽 모양도 선명하게 비치는 느낌이었다. 설마 저러고 나가는 건 아니겠지. 다급해진 선재가 주변을 살폈다.

지잉,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한 범진은 메시지 하나를 써서 보내는 것 같았다.

곧 아까처럼 종이 서류를 테이블 모서리 쪽으로 가져왔다.

“니 잠깐 30분만 혼자 있어라.”

선재가 난감한 얼굴로 멀어진 범진을 응시했다. 떡 벌어진 어깨부터 허리까지는 괜찮은데, 그 아래가 문제였다. 생판 남이면 계속 모른 척을 하겠지만, 어쨌든 남은 아니었다.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았다는데 어쩌랴. 끝까지 고민하던 선재가 저기, 하고 입을 열었다.

눈만 들어 선재를 쳐다본 범진이 왜, 하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꼭…. 그, 가야 합니까?”

“예, 형님. 가야 합니더.”

“아니, 장난하지 말고요.”

“왜. 뭐 낸테 할 말 있냐.”

선재가 기억을 잃은 뒤부턴 낮에도 밥 먹듯 집을 드나들었던 범진이다. 어딘가 조급한 얼굴을 한 선재를 쳐다본 범진이 들고 있던 휴대폰도 놓고 말을 더했다.

“어디 아프냐.”

다가오는 범진을 보고 그게 아니라, 대답한 선재가 다음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가리키기도 뭣하고, 거기가 섰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근데 왜.”

가까이 다가온 범진이 어느새 제 눈앞에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바지춤이 훤히 보였다. 민망함에 고개를 냅다 든 선재가 범진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 이렇게 나가면…. 사람들이 흉볼 것 같아서요.”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했지만, 범진이 얼마나 알아들을지는 미지수였다. 예상처럼, 범진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니를 흉본다고? 하며 포인트를 잘못 짚었다.

“아니요. 그쪽, 아. 그니까 바지가.”

“내 바지 뭐.”

퉁명하게 대답한 범진이 다리를 벌리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범진의 시선에도 불뚝 솟은 부위는 보였다. 근데 뭐 어쩌라고. 집에선 선재가 눈앞에 있어서 발기하고, 일하러 나왔을 땐 선재가 보고 싶어서 상상을 하다가 발기하는 자지였다. 오늘은 스킨십도 많이 했으니 가만 죽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당사자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시선을 옮겨 선재와 눈을 맞춘 범진이 짧게 웃었다.

“내가 씨발 자지를 세우든가 말든가 남들이 뭔 상관이냐.”

“…….”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어진다. 선재는 더욱 부풀 것 같은 자지 때문에 말을 아꼈다. 무슨 말만 하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단어를 고를 때도 신중해야 했다.

“음.”

잠시 생각하듯 음, 소리를 낸 범진이 선재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근데, 니 말도 일리는 있네.”

갑자기 말에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까지 어쩌라고 식으로 나오던 범진이 금세 말을 바꿨다. 선재가 바로 옆에 앉은 범진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잖냐. 내가 이래 개자지면은 밖에 사람들도 점마 저거 뭘 보고 저래 됐냐, 하고 상상할 끈데. 그면 니 입장도 난처한 게 맞지. 니 얼굴 아는 사람도 내 주변에 좀 있으니까.”

뭔 소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바꾼 건 맞아 보였다. 선재는 범진의 말을 대충만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좀 이따가 나가는 게.”

“씁. 내 자지 이거 웬만하면 안 죽그든.”

집에서만 자지, 자지, 하는 줄 알았는데 밖에서도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았다. 혼자 얼굴이 벌게진 선재만 범진의 흥분을 돋우지 않으려고 차분하게 말했다. 조금 기다리면 괜찮아지지 않을….

“하, 이거 전에는 니가 기똥차게 빨아 줬는데.”

“…….”

선재가 뒤이어 이어진 하, 씨, 쓰읍, 같은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었다. 범진은 얼굴빛 하나 안 바뀌고 그런 말을 한 뒤 혼자 추임새를 넣었다.

뭐, 한집에서 살았으니까 그랬겠지. 모든 게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저는 아직 어떤 기억도 돌이키지 못했다. 예전이 어땠든 지금은 생판 남이지 않나. 2주 넘게 봐 오긴 했지만, 적응을 못 해서 아직도 데면데면했다. 물론 저 혼자서인 것 같지만.

선재는 그건 좀, 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입만 열었다. 그때부턴 범진이 말을 할 때마다 아~ 하고 말을 끊었기 때문에 한 문장도 쉽게 구사할 수가 없었다.

범진은 하루아침에 마누라를 잃었다느니, 자지가 좆침만 질질 흘린다느니, 못 들어 줄 소리만 골라서 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선재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어깨가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왔고, 눈으론 시계도 한 번 쳐다봤다.

“꼭 입으로….”

망설이듯 입으로 해야 하냐고 물으려는데, 범진이 또 말을 끊고 아니? 했다.

“손으로 만져 줘도 된다.”

니가 원래 잡아땡기기도 잘했다, 말하는 범진을 쳐다보고 있자니 더 무슨 말을 보탤까 싶었다. 자포자기한 선재가 그걸로 합의를 보려 했다. 일이 급한 듯하니 도움은 좀 주기로 했다. 기억을 찾으면 저 꼴로 밖을 내보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 사람과 아이도 낳은 사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해 줄 거냐.”

몸을 일으키고 그런 걸 물어보는데, 튀어나온 앞섶만 보였다. 선재가 고개를 들고 그러겠다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차에서 하자면서요.”

“지나가던 개잡놈들이 우리 귀한 마누라 볼까 봐 겁난다 아니냐.”

범진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무실에서 대충 만져 주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범진은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 말하며 차로 갔고, 차에선 앞 차창이 훤하다고 갑자기 시동을 걸었다. 챙길 걸 다 챙긴 걸 보면 애초부터 차에서 할 생각은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게 오게 된 곳이 저, 성처럼 생긴 건물 앞. 차에서 내린 선재가 범진에게 끌려갔다. 일본 정통 러브호텔 국내 상륙, 까지 읽어 낸 선재가 현수막에서 눈을 거뒀다. 옛날에 유행했던 러브호텔과는 차원이 다른 어쩌고…. 하는 소개 글은 앞쪽에 있는 광고판에 쓰여 있었다.

주차장 공사가 덜 돼, 범진은 모래가 날리는 공터에다 주차를 했다. 호텔 주변이 다 하얀 흙바닥이었다. 선재가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흙먼지만 사방으로 날렸다. 수상스키를 타듯 질질 끌려가게 되자 선재가 급히 입을 열었다.

“손으로, 제가 손으로만 하겠다고.”

“어, 손으로만 해 주면 된다.”

흐린 볕이 떨어지는 겨울 한낮. 근처엔 날아다니는 벌레 한 마리도 없었다. 차가 몇 대 주차돼 있긴 했지만, 어쩐지 그게 더 수치스러웠다. 선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야 범진과 멀어질 수 있었다. 손으로만 해 주면 되는 걸 뭘 이런 곳까지 찾아와서 유난을 떠나 몰랐다. 후우, 입구 쪽 간이 소파에 앉은 선재가 최대한 범진의 일행이 아닌 척했다.

기구? 씨팔, 그거는 좆질 못하는 새끼들이나 쓰는 기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선재가 범진이 큰 소리로 쩌렁쩌렁 얘기하는 걸 다 들었다. 직원이 단순히 언급한 이벤트에 그런 반응을 보였다. 거기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로 찍찍 말하고 난리였다.

이내 그 방 줘 봐라, 말한 범진은 카드를 받아 들고 선재가 앉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

얼굴을 만지고 있던 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코앞까지 닿자, 선재가 울며 겨자 먹기로 범진의 손을 잡았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굳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지만, 말이 안 통했다.

부피감이 있는 벨벳 천으로 꾸며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선재는 자꾸 뽀뽀하려는 범진을 몇 번씩이나 밀어냈다. 범진은 지치지 않았다. 마지막인 것처럼 능글맞게 사정했다.

“한 번만.”

한 번이란 횟수에 선재가 몇 초간 생각했다. 뒤늦게 입을 열고 대답했다.

“…그럼 한 번만 하는 겁니다. 또 하려고 하면 저 집에 갈 겁니다.”

“알았다.”

대답은 누구보다 잘했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는데도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선재는 가만히 서서 어색한 얼굴로 범진의 뽀뽀를 받았다. 입술이 20초 정도 붙어 있다가 슬쩍 떨어질 때 선재는 고개를 돌렸다. 범진은 아직 안 끝났는데? 능청스럽게 말하며 선재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한 번만 한다고 해 놓고 그 한 번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다.

결국 5분이 넘게 지나고서야 멈춰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손을 잡은 범진을 따라 억지로 걷기 시작하는데, 분위기가 참 미묘했다.

여분의 카펫이 복도 한쪽에 세워져 있었고, 엘리베이터 근처엔 하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범진은 익숙하게 걸어 어느 객실 앞으로 갔다. 구조를 다 꿰고 있는 눈치였다. 언뜻 듣기로 투자금 어쩌고저쩌고하던데, 이 건물에도 지분이 좀 있는 모양이었다. 객실 문 바로 옆엔 창이 하나 있었다. 하얀 창틀 너머로 흐린 겨울 하늘이 보였다.

“…….”

제일 큰 객실을 잡았는지 면적이 엄청났다. 창으로 뻥 뚫린 욕실은 사생활 보호가 전혀 안 될 듯했고, 침대는 커다란 게 두 개나 되었다.

안쪽 플레이 룸엔 오락기와 표준 사이즈의 당구대, 정체를 알 수 없는 새 상자들이 가득했다. 범진은 제일 위에 있는 상자를 툭 쳐서 떨어트렸다. 그러자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쏟아졌다.

채찍과 토끼 머리띠, 손바닥만 한 천 등이 흩어졌다. 다 새것 같았다. 가만 쳐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린 선재가 범진이 안 보이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니 당구 쫌 칠 줄 아냐.”

따라오며 물은 범진이 앞쪽에 있던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앉았다.

물은 건 당구면서 바지를 벗고 있었다. 만져 주러 온 건 맞지만 너무 처음부터 벗으니 민망했다.

눈을 돌린 선재가 범진이 드로어즈까지 벗는 걸 보고 한숨을 쉬었다. 같이 사는 사이였다고 하니 이해는 되는데. 그래도 너무 의식을 안 한다. 그동안 모른다고, 낯설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지 셀 수도 없다. 범진은 상대방이 어떨지는 생각을 별로 못 하는 인간인 듯했다. 그러면서 니가 내 사람 만들어 놨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전엔 어떤 인간이었단 걸까? 상상도 해볼 수 없었다.

퍽 소리가 나도록 침대 위로 몸을 던진 범진은 한가운데 누워 선재를 쳐다봤다.

“안 오냐.”

벽에 붙은 채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가 눈을 피하며 앞으로 다가갔다.

범진은 남은 반팔도 마저 벗으려 옷을 위로 들어 올렸다. 성기를 내놓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지, 배까지 붙어 버린 성기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바닥에 시선을 둔 선재가 실루엣을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야, 누가 보면 니 애쓰끼모인 줄 알겠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는데, 범진이 그런 소리를 했다.

저급한 일본어 혹은 은어인가 했으나 에스키모를 발음한 것 같았다. 선재가 제 뚱뚱한 점퍼를 한 번 쳐다봤다. 정신이 없어서 이것도 못 벗었다. 점퍼를 벗은 선재가 바닥에 그걸 내려놓았다. 입고 나온 옷은 평범한 하얀 스웨트셔츠에 겨울용 면바지였다.

범진은 상체를 홱 세우곤 모서리에 앉은 선재와 거리를 붙였다. 갑자기 보인 문신에 선재가 눈을 들고 범진을 쳐다봤다.

“니 안에 반팔 입었잖아. 위에 이것도 벗지?”

“왜요? 손으로 하는데 무, 무슨 상관입니까?”

당황한 듯 말을 더듬은 선재의 반응에 범진이 씩 웃었다. 어, 맞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만 쓰라 했지?”

“네.”

“그래도 한 번만 벗어 주면 안 되냐? 빤쓰 까라고 한 것도 아닌데?”

거칠게 막 뱉으면서도 살살 달랬다. 선재가 범진과 눈을 맞추다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것만 벗을 겁니다, 말하곤 상의를 위로 들어 올렸다. 반동에 배가 빼꼼 드러나자 범진이 눈을 내려 배를 쳐다봤다.

옷에서 팔 하나만 빼면 되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범진의 눈을 봤다. 드러난 배에 시선이 닿은 걸 느낀 선재가 손으로 배를 가렸다. 스웨트셔츠를 바닥에 놓곤 옷매무새를 제대로 고쳤다. 그런 선재의 뜻을 읽었는지 범진이 허, 하고 소리 내 웃었다.

“씨팔, 이거 비싸서 어떡하냐.”

갑자기 목을 끌어안은 범진 때문에 몸이 앞으로 쑤욱 밀렸다.

“어? 이 귀해 뒤지겠는 거.”

한 번만, 마지막으로 뽀뽀한다고 했으면서 힘으로 끌어안고 뺨에 으, 하고 입을 맞췄다.

하지 말라고 버둥댄 선재가 손으로 범진의 자지를 만졌다. 화들짝 놀라 손을 확 빼는데 범진이 하체를 더욱 내밀었다.

“어, 딱 그래 만지면 되겠네.”

뺨에서 느리게 입을 뗀 범진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잠깐 생각이 필요했으나 선재가 마음을 다잡았다. 난데없이 닿아 놀랐던 거지, 만지라면 만질 수 있다. 범진의 속삭임에 대충 위치를 예상하고 손을 더듬거린 선재가 다시 범진의 자지, 그것도 끝쪽에 손바닥을 스쳤다. 뒤에서 몸을 잡고 있던 범진도 팔에서 힘을 풀었다.

“좀 보고.”

옆쪽으로 고개를 튼 선재가 범진과 눈을 마주쳤다. 만지겠다고 했지만, 손은 그 상태로 굳은 채였다. 범진이 선재의 팔을 끌어 좆기둥을 잡게 했다. 조명에 범진의 얼굴이 그늘졌다. 선재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뭘 잡긴 잡았는데 자지 같지 않았다. 너무 굵고 울퉁불퉁했다.

“왤케 못하냐.”

“하고 있, 잖아요….”

얼굴을 붙잡은 범진 때문에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눈을 맞춘 채 중얼거린 선재가 자지를 느릿느릿 쓸었다.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이 썩 좋지 않게 와닿았다. 미숙한 손짓에 범진이 이런 것도 다 가르쳐 줘야 하냐고, 얼굴을 붙이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와씨, 좆물 한 내일 나오겠다.”

선재가 눈가를 찡그렸다. 손바닥에 닿는 느낌도 별론데, 범진이 얼굴을 고정하니 턱이 아파져 온 탓이다.

“왜.”

“얼굴 이렇게 잡으면 아파, 아픕니다.”

범진은 크게 흥분하는 기색이 없었다. 태연하게 그래? 하고 선재의 입술 끝에 입만 맞췄다. 얼굴을 잡고 있던 손에선 힘을 풀어 줬다.

“마지막으로 뽀뽀, 한 번만 하겠다고…. 해 놓고.”

“어…. 구라 좀 쳤다. 왜. 치믄 안 되냐.”

이번엔 뺨에 입술이 닿았다. 대놓고 두 번 뽀뽀한 범진이 위에서 선재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입맛을 다셨다. 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와중에도 선재의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위로 들린 자지 모양에 따라 팔이 움직이는 폭도 컸다. 답답했는지 범진은 손으로 선재의 손을 감싸고 잠깐 퍽퍽, 흔들어 대기도 했다. 그렇게 하라 가르쳐 준 거였다. 어색하게나마 따라 하려는데, 힘이 제대로 안 실려 범진이 불평했다.

“야…. 니 이래 하면 진짜 내일까지 좆 쥐고 있어야 될 건데.”

그건 안 된다. 입술에 힘을 준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하고 있잖아요.”

빛이 나기 시작한 손을 선재가 제법 빠르게 놀렸다. 범진이 말한 좆침 때문에 손가락 사이 사이가 은근한 물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잘 모르는, 분명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성기를 만져 주려니 얼굴에 자꾸 열이 돌았다. 두 뺨이 붉어진 선재를 쳐다보던 범진이 눈썹을 이쪽저쪽으로 움직였다.

“안 되겠는데.”

“…….”

아무리 빠르게 해도 범진에게선 별 반응이 오지 않는다. 참는 건가? 참아서 저러나? 괜한 오기에 최대한 열심히 쥐고 흔들어도 범진은 입 끝을 혀로 스윽 쓸고 말 뿐이었다. 손바닥 피부가 조금씩 아려 왔다. 표피에 괴상한 게 돋았는지 툭툭 불거진 감각이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힘이 빠진 듯 잠시 움직임을 멈춘 선재가 아까보다 불규칙해진 숨을 뱉었다.

“별로 팍 오는 게 없네.”

“그럼, 그냥, 가죠…”

배까지 달라붙을 정도로 발기해 놓고 팍 오는 게 없단다. 스스로 조절하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섹스를 많이 했으면 그런 걸 다 할 줄 아나 싶지만, 문란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섹스는 분명 저와 했을 것이다. 생각을 거기까지 해 나간 선재가 혼자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는 언행을 생각하면 밖에서 놀았거니, 하고 결론을 내 버려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범진은 의외로 가족뿐인 듯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선재가 잠시 손을 떼고 딴생각을 했다.

“야.”

“…….”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선재가 고개를 돌리고 범진을 쳐다봤다.

말할 게 있으면 그냥 하면 될걸, 꼭 시선을 맞추고 말을 시작했다.

“니 이것만 좀 까 주라.”

범진이 건든 건 선재의 상의였다. 손으로 어느 부분을 툭, 툭, 쓸어 올리듯이 치는데 정확히 유두가 건드려졌다. 옆으로 슬쩍 몸을 피한 선재가 불쾌한 얼굴로 범진을 쳐다보았다.

“…알겠는데, 저랑 무슨 관계였는지…. 알겠는데요.”

“알겠는데?”

“제가 그, 기억나는 게 없으니까.”

“그면 기억을 만들면 되지.”

안 그냐, 하고 붙어 온 범진은 아무 고민, 걱정도 없어 보였다. 상체를 사수한 선재가 범진이 몸을 안을수록 힘을 줬다.

그놈의 딱 한 번, 같은 소리는 지치지도 않고 했다.

“한 번만 벗음 된다니까.”

“좀, 잠시만요.”

“야, 니도 생각이란 걸 해 봐라.”

말을 하면서도 범진은 선재의 티셔츠를 돌돌 말아 올렸다. 원래 이런 버릇이 있는지 뒤에서 몸을 안은 채로 뺨에 입술을 붙여 왔다. 오늘만 이 비슷한 스킨십을 몇 번이나 했는지. 다리를 앞으로 뻗은 선재가 눈만 옆으로 해 범진을 쳐다봤다.

“어? 생각을 해 보라고.”

“잠깐 떨어져서 그럼,”

“나도 어? 2주를 참았다. 이게 계산을 하면 얼마냐. 좆물이 2주 치 쌓인 거니까.”

진짜 무슨 소리야…. 속으로 생각한 선재가 찝찝함이 가득한 얼굴로 범진을 얼굴을 훑었다.

“어쨌든 터져 가지고 병원 실려 가면 그거 니 책임이다.”

“제가 왜, 왜 책임져야 합니까?”

“그면, 마누라 책임이지 누구 책임인데. 지나가던 개색끼 책임이냐.”

너무 어이가 없으면 머리가 새하얘진다. 판단력이 흐려졌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왠지 이랬을 것 같다. 되지도 않는 말로 사람을 우롱하고, 희롱하다가 결국 이 사태까지 온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준희가 남자를 너무 좋아했다. 예민했던 아이라 아무나 좋아하진 않을 텐데.

하아, 답답한 듯 숨을 내쉰 선재가 어느새 한쪽 유두가 드러난 제 가슴에 서둘러 옷을 내리려 했다.

“이게 무슨.”

“야.”

선재의 시선을 뺏은 순간, 범진은 옷을 마저 말아 올렸다. 선홍빛 돌기 두 개가 모습을 보였다. 말려 올라간 티셔츠는 범진 때문에 쉽게 내릴 수 없었다. 곤란한 얼굴을 한 선재가 자꾸 몸을 뒤로 뺐다. 뒤에 범진이 있긴 했지만, 일단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구부렸다.

“진짜 싫으냐.”

“…….”

“죽어도?”

범진은 태도를 바꾸고 진지하게 물었다. 가만, 시선을 돌려 범진을 쳐다본 선재도 마음이 약해졌다. 그동안 잘해 줬던 것도 있긴 하니까. 아니, 항상 잘해 줬다. 얼마나 걱정이 되면 출근을 했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찾아오곤 할까. 병원도 늘 크고 좋은 곳만 갔다. 아무 생각 없이 보이기는 하는데, 사람이면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정도는….”

작게 입 벌려 중얼거린 선재가 말을 흐렸다.

“존나 싫다, 히야, 씨팔 내 이 개, 십색기랑은 죽어도 못 하겠다, 싶으면 말해라.”

말이 ‘어’ 다르고 ‘아’ 다른데 표현을 꼭 그런 식으로 했다.

“만세.”

말아 올린 티셔츠를 위로 잡아당긴 범진이 유치한 소리를 했다.

선재가 버티다가 두 팔을 위로 들었다.

“말해라, 어? 디히지게 싫으면은.”

겨드랑이로 손이 쑥 들어왔다. 이것도 못 빨고, 말한 범진이 선재의 한쪽 팔을 올리고 입을 겨드랑이로 가져갔다. 경악한 선재가 범진의 머리를 팔로 퍽, 치며 조였다. 범진은 팔로 한 대 맞고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언제 움푹 들어간 겨드랑이까지 입을 넣었는지, 쭉 빨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혀로 안쪽을 빨리자, 선재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민감한 피부에 자극이 닿아 어쩔 줄을 모르고 얼었다.

“하아, 이 씨발.”

범진은 혀로 속살을 닿는 대로 다 핥아 댔다. 날름거리는 장난을 치다가 넓적하게 혀를 눕혀 진득하게 쓸어올리는 짓도 했다. 간지러움에 움찔, 허리를 떤 선재가 어깨를 뒤로 뺐다.

범진은 혀만 쭉 뻗고 그걸 따라왔다.

머리를 다시 넣고 겨드랑이를 낼름낼름 빠는데, 선재가 뺨을 붉혔다.

만족한 듯 얼굴을 뗀 범진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러면서 선재의 어깨를 뒤로 은근하게 밀었다.

“우리가 거의 그, 10년은 했그든? 긴장하지 말고 누워 봐라.”

“그때 기억은…. 있는데요….”

“어쨌든.”

범진이 말로 선재의 혼잣말을 막았다. 그때부터 인연이었다고 성화였다. 혼자 흥분해서 뭐라 말을 하다가 알겠냐? 했다. 선재는 갑자기 욱하는 범진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드랑이가 맛있다고 헛소리를 하다가 니 예전 생각을 하면 속이 뒤틀린다고 정색했다.

범진의 손에 밀리던 어깨가 시트에 닿았다. 부자연스럽게 누운 선재가 긴장한 탓에 나무토막처럼 몸을 일자로 경직했다. 범진이 엉덩이를 툭툭 때리며 하, 또 이런 맛이 있다며 오버를 했다. 엉덩이를 몇 대 맞고 나자 긴장이 좀 풀렸다. 언제 맞아본 건가…? 선재가 뒤늦게 그만하시라고, 손을 뒤로 뻗었다.

“야…. 좀 될 대로 되라 식으로 하긴 했는데….”

옆으로 와 그런 말을 하는데, 범진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기억 찾으면 그만 아니냐.”

팔을 뻗어 선재의 바지 지퍼를 내린 범진이 손을 넣어 사타구니를 쥐었다.

겨드랑이 애무를 당하고 난 뒤론 계속 멍했다. 다리를 옆으로 뻗었지만, 범진이 바지 벗기는 걸 돕는 꼴이었다. 궁댕이, 하고 범진이 엉덩이를 들어 보라고 때리면, 부끄럽지만 자세를 조금씩 고쳤다. 그 탓에 바지가 허벅지까지 벗겨졌다. 범진은 팬티가 드러나자마자 손을 뒤로 넣어 얇은 천이 감싼 엉덩이를 대놓고 조몰락댔다. 눈을 마주치고 그런 짓을 해, 선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당황한 낯빛을 했다.

“잠시만요…. 아…. 범진 씨, 좀….”

“이거 안 해 주면 니가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아냐.”

“아니요….”

“아니기는. 내가 니를 제일 잘 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범진은 위치를 옮겼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아예 두 손을 팬티 안으로 휙 넣었다. 볼기를 손으로 마구 주물렀다.

물론 선재가 그런 걸 안 했다고 잔소리를 한 적은 없었다. 범진은 선재만 보면 되는대로 지껄이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제 눈앞엔 어디까지나 제가 아는 선재였다. 장난기가 나왔다. 나중에 선재가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정도는 웃고 넘길 문제였다. 해 봤자 딱밤 한 대 맞고 말 거다.

선재만 이 순간을 곤란하게 여겼다. 몸을 이리저리 비튼 선재가 저기요, 저기요, 하고 범진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범진은 팬티 안에서 별짓을 다 했다. 엉덩잇살을 벌렸다가 척, 놓고, 또 벌렸다가 척, 놓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구멍이 벌어져 물이 스멀스멀 샜다.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조금씩 끈적하게 젖고 있었다. 간만에 잡아 본 엉덩이에 심취한 범진이 정도를 모르고 손을 놀렸다.

한 손을 빼낸 범진은 손끝에 묻은 애액을 쳐다보고 쓰윽 웃었다. 손을 그대로 내밀어, 끈적거리는 점성을 선재에게 굳이 보여 줬다. 수치심에 인상을 구긴 선재가 다리를 오므렸다.

“씁, 다 벗어야겠는데.”

다 벗길 요량으로 데리고 왔으면서 아쉬운 척은 제일 잘했다.

지금 안 벗으면 다 젖어서 노빤쓰로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범진은 노빤쓰로 집에 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연설했다.

엉덩이에 손을 넣고 팬티 밴드를 슬슬 내리면서, 설득하는 척을 했다.

“아, 그냥…. 제가 할게요.”

상체에 힘을 준 선재가 범진을 쳐다보며 말을 툭 뱉었다.

다양한 자극은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솔직하게 말하면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을 겪을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장소도 못 가리고 발기하는 범진을 볼 때마다 언젠가는, 한 번은, 하고 관계하는 걸 떠올려 본 적도 있었다. 범진이 좋아서가 아니라, 제 입장만 고수하다간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면 제게도 못 할 짓이었다. 준희에겐 말할 것도 없고, 막내라는 그 애에게도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구부정하게 앉은 선재가 뒤로 손을 가져갔다. 팬티를 내리는데, 반쯤 발기한 제 성기도 속옷에서 삐져나오려는 것 같았다. 자주 봤겠지. 부부면 자주 봤을 게 아닌가? 부끄럽고 싫을 때마다 제겐 남지도 않은 기억에 의지하려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범진은 제가 벗는단 말에 니가 벗을라고? 하며 좋아하기만 했다. 옆으로 와 어깨를 끌어안고 혀로 귀를 핥았다.

“아, 귀에 이건…. 좀…. 그런데요….”

“이게 다 니 기억 돌릴라고 하는 거다. 좀 떠오르는 거 없냐.”

“…네.”

대답을 들은 범진이 두 손을 선재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명치께에 닿았나 했는데 손을 세우고 젖꼭지를 곧장 만졌다. 손끝으로 돌기를 제대로 잡았다. 적나라한 감각에 등을 만 선재가 팔을 안쪽으로 모았다. 범진은 바로 톡 튀어나온 유두를 몇 번 쥐었다 놓더니, 잘 봐라, 말했다.

“뭐…. 뭘요.”

“거의 다 마르긴 했는데.”

몇 번은 해 본 사람처럼, 없는 살을 꼭꼭 누르더니 젖꼭지를 능숙하게 잡아 올렸다. 피부가 땅기는 느낌에 선재가 놀란 소리를 냈다. 범진이 손으로 짜낸 곳에선 흰 젖물이 맺혔다. 처음엔 좀 나왔는데 이제 거의 말랐다고, 별 듣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쏟아 낸 범진이 손가락으로 젖물을 쓸어 제 입으로 쑥 가져갔다.

“하아, 씨발, 오랜만에 먹네. 좆나 맛있다.”

“아니…. 왜…. 그걸 왜…. 왜 먹습니까, 왜.”

경악한 선재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2주 넘게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몸의 사정을, 범진은 속속들이 다 꿰뚫고 있었다. 그 어떤 증거를 봤을 때도 이렇게 당황한 적은 없었다. 이마까지 벌게진 선재가 범진을 밀어내려 머리를 숙였다. 어깨도 앞뒤로 비틀며 몸부림을 쳤다.

“증거 또 제시한 건데 왜.”

“…….”

증거, 증거 대 보세요! 크게 외친 건 어느 날의 자신이었다. 부부라고, 니가 나랑 결혼을 했다고 우기는 남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처음 보여 준 건 같이 찍은 사진과 제 사진으로 가득한 사진첩이었고, 옆에 누워 우앙, 우앙, 소리를 내는 남자 아기였다. 다가오지 말라고 팔을 퍽 때렸을 땐 준희가 아부지를 때리지 말라고 울먹거렸다.

완성이 다 된 영화에 혼자 뚝 떨어지면 그런 기분일까? 선재는 사진과 통화 기록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돼,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남자가 거의 시켰지만, 그래도 싫지 않다는 듯 말하는 제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며칠 전부터 몸도 기억을 해야 한다고 뽀뽀를 하던 남자지만, 이렇게 다 벗고 그와 마주해 본 적은 없었다. 틈만 나면 툭툭 유두를 만지려 들어도 이런 증거까지 보여 준 적은 없던 것이다.

“니가 또, 증거 대 보라고 쌩감을 지를까 봐. 내가 먼저 선빵 칬다 아니냐.”

발기한 자지를 내놓고 다가온지라, 엉덩이나 허리춤에 그 느낌이 가끔씩 쿡쿡 찍혔다.

범진은 제 얼굴을 돌려 입도 맞췄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귀를 핥고, 촉촉한 눈에도 입을 댔다. 그때마다 길고 굵다란 것이 그대로 눌려 선재의 피부를 자극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선재가 고개를 돌려 범진을 쳐다봤다.

“그럼 일단 한 번만…. 할 거니까요…. 오늘은.”

범진이 한 번만을 달고 살아 제 입에도 붙어 버렸다. 뭐가 됐든 한 번만 하겠다는 말에 범진이 별난 소리를 냈다. 야, 이야, 하고 쓸데없이 감탄했다.

“이제 믿어 주냐.”

범진은 바로 옆에서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이어 선재의 뺨에 입을 크게 벌리고 키스 같은 뽀뽀를 한 범진이 자리를 이동했다. 다리 쫌만 벌리 봐, 말하는 범진 때문에 선재는 표정을 연신 찌푸리면서도 허벅지를 열었다. 범진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희고 부드러운 허벅지를 한동안 주물럭거렸다. 살이 탱글탱글 손안에 잡힐 때마다 기분 좋은 티를 냈다. 눈은 성기와 회음부, 가려진 엉덩이골 사이를 빠르게 넘나들었다.

“영 모르는 놈이랑 하는 것 같냐?”

입을 닫고 있던 선재가 간신히 네, 대답했다. 그래? 하고 반응한 범진은 손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소한의 위로나 그럴싸한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와 엉덩이를 막무가내로 쥐었다. 하체가 반쯤은 범진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종아리와 뒤쪽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범진의 허벅지는 지나치게 딱딱하고 뜨거웠다. 온몸이 용광로 같았다.

범진은 오랜만에 만지는 선재의 몸을 완전히 풀어 버리는 게 목적이었다. 잘 만져 주면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금세 풀리곤 한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사람이 바뀌진 않는다. 범진은 그래서 여유로울 수 있었다. 섹스에 국한한 결론이 아니었다. 기억을 찾으나 안 찾으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대충은 안다. 선재가 가르쳐 줬기 때문에, 다르지만 같은 선재에게도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았다.

“아…. 너무 부끄러워서…. 그것도, 제, 제가…. 하면 안 될까요….”

하, 웃은 범진이 구멍을 지분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니가 한다고?

“…네, 모르겠어요, 아….”

선재가 손으로 제 두 눈을 꾹 눌렀다. 쳐다보던 범진이 한 손으로 제 성기를 퍽퍽 만졌다. 선재를 구슬리겠다고 자지가 터지니 어쩌니 했지만, 진짜 터져도 이상하지 않게 부풀어 있었다. 구멍을 만지면서 더 발기했던 게, 선재가 하는 행동에도 천박하게 반응했다.

선재는 기억이 없으니 저와 한 적도 없는 게 되지만, 구멍을 보면 섹스 경험이 많은 게 티가 났다. 경험 많은 오메가의 뒤는 동그랗게 열리는 게 아니라, 위쪽으로 벌어지듯 열린다. 횟수도 그렇지만 좀 큰 자지를 받았나. 선재의 구멍은 쉽게 벌어지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구멍이지만 이제는 귀두를 대기만 해도 뻐끔뻐끔 점막을 열려고 든다. 자극적인 생각을 이어 나간 범진이 손가락 하나를 구멍 안으로 그대로 넣었다. 제일 좋아하고, 잘 느끼는 곳을 한 번에 찔렀다.

범진이 표정을 감추는 선재를 두 눈으로 집요하게 훑었다.

더는 제가 하면 안 됩니까,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엉덩이에 약한 경련이 일었고, 입술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넣어 갈고리처럼 뒤틀어 쑤시면, 발기는 물론 정액과 소변이 앞다투어 흘러내리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절반 정도 발기했던 선재의 성기가 고개를 슬슬 들고 있었다.

힘을 줘 꾸욱, 꾸욱, 내벽의 돌기 면을 누르자 사타구니도 파르르 떨렸다.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표정은 어느 정도 보였다. 입술에 얼마나 힘을 준 건지, 턱이 호두 모양으로 잡히고 있었다. 범진이 다른 손으로 선재의 엉덩이를 가볍게 쳤다.

“내 안 보냐.”

손가락 하나를 더 넣은 범진이 역시나 같은 스팟을 거침없이 찔렀다. 손을 내리려던 선재가 그 순간 다시 얼굴을 가렸다. 등과 목을 떨었고, 허벅지가 툭툭 튀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몇십 초 정도였다. 범진이 아는 몸이어서 흥분 상태로 만들어 놓는 게 손쉬웠다. 임신했을 때도 이런 식으로 틈만 나면 손가락 장난을 하곤 했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린 범진이 손가락 두 개로 내벽을 살살 긁었다. 찌걱. 아까부터 나오기 시작하던 애액 때문에 소리는 적나라했다. 범진은 누르다가 긁고, 긁다가 톡톡 치기를 반복했다. 선재가 더는 참지 못하고 꾹 다문 잇새로 소리를 흘렸다.

“흐, 아흐…. 윽….”

범진은 선재가 좋아하는 곳만 골라서 만졌다. 특히 입구 바로 안쪽의 내벽에 살짝 튀어나온 돌기가 있다. 그곳을 건드린 범진 때문에 선재가 다리를 덜덜 떨었다. 아랫배가 살짝 들리는 걸 본 범진이 그 돌기를 몇 번 더 반복해서 건드렸다. 결국 선재가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소변보다는 점성을 가진 맑은 정액이 성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도 가시지 않는 감각에, 선재가 아예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입술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아랫배와 옅은 체모를 큰 손으로 닦아 준 범진이 위로 올라가 몸을 붙였다. 선재의 팔을 내리고 억지로 눈을 맞췄다.

“하겠다면서 눈 가리기 있냐.”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은 범진이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는 선재를 코앞에서 내려다봤다.

“…….”

선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맥없이 정액을 싸 버린 게 현실감이 없었다. 범진이 뺨에 손을 대고 눈을 자꾸 보게 했다. 그러다 코를 톡 치고, 눈가를 벅벅 닦아 줬다. 그러면서 어떤데, 싫으냐, 물었다. 지금 묻는 건 반칙이었다. 선재가 가만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만 보란 식으로 범진이 얼굴을 꽉 붙잡아, 양 뺨이 삶은 달걀처럼 부풀었다 꺼졌다.

“고개를 저은 거냐. 만 거냐.”

“…손으로 얼굴…. 부웉…. 잡고 있잖아요….”

범진의 눈을 피하지 못한 선재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젖어서 벌게진 눈 아래를 내려다본 범진이 마무리하듯 눈가에 손을 댔다. 여린 살 촉감이 손가락에 닿았다.

툭, 손가락으로 볼을 튕기고 간 범진은 다리 사이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선재가 긴장감에 눈을 퍼뜩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범진이 아까부터 침만 흘리던 좆을 축축하게 젖은 구멍에 가져다 댔다. 구멍에서 애액이 새면 범진이 좆을 들고 회음부까지 비볐다. 한참 비비다 뻐끔거리는 구멍에 자지를 조준한 범진이 선재를 한 번 쳐다봤다.

우연히 눈을 마주친 선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를 슬쩍 올린 범진이 내벽을 벌리며 천천히 들어갔다. 자지 모양으로 벌어진 내벽이 짓이겨지며 범진의 자지를 맞았다. 지익, 지익, 젖은 내벽을 벌리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퍼졌다. 붉어진 것 말고는 표정이 거의 없던 선재의 얼굴이 점차 변했다. 입이 벌어지고, 눈가가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아, 끄, 끝까지 못, 못…. 흑, 넣, 넣습니다.”

손을 쓰는 것도 벅찼던 자지니 두려운 게 당연했다. 선재는 단순히 범진의 크기만 떠올리고 넣을 수 없다고 도리질을 쳤다. 범진이 기둥 중간쯤 삽입하고 몸을 위로 뻗었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며 허리를 천천히 썼다. 또 얼굴이 붙잡힌 선재가 아예 울 것 같은 얼굴로 범진을 쳐다봤다.

“니 떡 다 치면 쪼꼬우유 먹었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냐.”

갑자기 엉뚱한 소리였다. 대답하지 않은 선재가 범진의 얼굴만 계속 쳐다봤다.

초코우유고 뭐고…. 왜 자꾸 사람 얼굴을 붙잡고…. 범진은 뺨을 쓰다듬듯 만지며 아니다, 빠나나도 먹는다, 했다. 선재는 갑자기 생뚱맞은 얘기를 꺼낸 범진의 얼굴만 가만히 응시했다. 막연한 두려움에 벌게졌던 눈 아래가 통통하게 부어오르려 했다. 어? 기억 안 나냐, 물어본 범진을 향해 선재는 고개만 저었다. 별로…. 안 좋아하는데….

대답하려는 찰나, 범진이 이걸 어떡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고새 다 들어갔네.”

입꼬리 양쪽이 위로 들려 올라갔다. 딴소리를 하며 은근히 삽입하던 범진의 작전이 통했다. 어느새 안쪽 점막을 건드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 큰 자지로 유연하게 삽입할 수 있는지를 다 안다는 눈치였다. 수치심에 입을 꾹 다문 선재가 눈으로 옆을 훑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틈만 나면 박아서 딱, 내 모양으로 만들어 났는데.”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상체를 세운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안 들어갈 리가 있겠냐.”

그래도 몇 주 만에 하는 관계라고,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가 제대로 벌어질 수 있게 도왔다. 제일 깊은 곳까지 삽입해 익숙한 점막을 좆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허리를 완전히 빼진 않았고, 일단은 길이 완전히 벌어질 수 있도록 기다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하루 두세 번씩 하던 때보단 조심했다.

사타구니 한쪽을 누르듯 잡고 삽입한 범진은 속도를 터무니없이 늦췄다. 길을 내는 것도 있었지만, 소리도 들으라는 것이다. 좆이 애액에 저며질 때 이런 소리가 난다고, 좁은 내벽을 벌릴 땐 이렇다고. 선재가 그 의도를 읽곤 범진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참고 있는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진 모른다. 아랫입술을 이로 깨문 선재가 갑자기 퍽, 박혀 드는 자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 근처에 떨림이 인다. 여기가 예민하기 때문에. 범진이 내벽을 긁으며 허리를 밀었다. 흑, 소리를 낸 선재가 고개를 위쪽으로 들었다. 얕게 움직이던 범진이 세 번, 네 번을 연속해서 강하게 찍었다. 깊숙하게 오므리고 있던 돌기에까지 자지가 닿았다. 범진이 점막이 헤질 듯 강한 힘으로 좆을 부딪쳤다. 찔릴 때마다 찌걱, 나온 애액이 범진이 자지를 뺄 때마다 딸려 나가 시트의 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하윽, 으, 아흐…!”

“다리 쫌만 더 벌리봐라.”

“아아, 흐, 흐윽! 흡,”

목, 팔, 다리까지 붉어진 선재가 자극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떨궜다. 분명 낯선데,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 있었다. 안쪽을 살살 건드리다 퍽, 박혀 드는 자지엔 몸이 꼬였다. 내벽을 벌리다 못해 찢어발길 듯한 움직임인데도 차곡차곡 쌓이는 따뜻한 쾌감이 있었다.

범진은 선재가 좋아했던 곳만 골라 퍽퍽 찔러 댔다. 허리를 제대로 잡아 내벽의 모양이 구부러지게 만들고, 각을 세운 자지가 거칠게 점막을 비볐다. 소리치듯 울먹이는 선재의 두 팔을 제대로 잡고 몸을 완전히 붙였다. 버릇처럼 엉덩이를 약간 들어주면, 선재도 몸에 익은 게 있어 허리를 슬쩍 들었다. 당황한 시선이 스치자, 범진이 혀로 제 입안을 쓸며 허, 씨발, 생각나냐, 했다.

“아, 안…. 그런…. 흑, 으, 아흐!”

“여기, 씨팔.”

섹스 때문에 얇아진 내벽 점막을 범진이 거칠게 비벼 댔다. 팔을 잡아당기며 자극을 준 탓에 선재의 몸이 제대로 넘어갔다. 그게 함정이었는지, 아랫배에 자극을 받은 선재가 신음을 높이며 발가락을 한껏 구부렸다. 순간 발기돼 있던 선재의 성기에서 투명한 소변이 쏟아져 나왔다. 한 번 찔끔, 싸는가 싶었는데 범진이 연속으로 박으면서는 주체가 안 돼 줄줄 흘렀다.

“아, 흐으…. 이거 아니…. 제가…. 흐읏.”

와중에 당황해 손으로 제 성기를 가리려 들었다. 범진이 그 손을 떼며 느긋하게 허리를 썼다.

“니 원래 잘 싼다.”

“…없…. 흐으, 아닌…. 이앙…. 안 거…. 먹였죠…. 흐으….”

울음 탓에 이상한 거 먹였냐는 말이 정상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목에 물기가 차 웅얼대는 소리와 섞여 나왔다.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살짝 들고 좆을 박은 채로 얼굴을 만졌다. 삽입을 이으며 선재에게 장난을 쳤다.

“내가 왜.”

“머겨짜나요…. 으으…. 흐으.”

“하루 쟁일 니 좋아하는 것만 먹였는데.”

“에이드에…. 이앙한 거…. 타서…. 흐윽.”

범진이 손으로 선재의 뺨을 조였다 놓길 반복했다. 많이 했던 장난질을 선재만 낯설어했다. 뭔, 그런 짓까지 했을까 봐, 하고 범진은 선재의 얼굴을 계속 주물렀다. 왜 자꾸 얼굴 가지고…. 하다가 내벽을 벌리는 느낌엔 선재가 으으, 하며 다시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느긋하게 박아 주던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 한쪽을 벌리듯 잡아챘다.

선재가 꼬집히는 느낌에 다리를 홱 오므렸다. 그사이 상체를 뒤로 뺀 범진은 선재의 두 다리가 한 방향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옆으로 눕힌 채로 박으면 또 다른 곳에 자지가 닿는다. 그걸 모르는 선재만 한 번만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중얼중얼 겨우 말하고 있었다.

“화…. 화자…. 실….”

옆을 보고 누운 선재의 어깨를 잡은 범진이 거침없이 자지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등과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경련이 이는 게 한눈에 보였다. 손을 뻗은 범진이 젖꼭지도 살살 말아 올리듯 쥐었다.

“응…. 흐, 만지지 마….”

“인제 반말하냐.”

“말라고…. 흐….”

선재가 베개가 있던 침대 헤드까지 밀려 올라갔다. 퍽, 퍽,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의 축이 위로 빠졌다. 붉어진 유두 끝에서 또 뭐가 차오르려고 할 때, 선재가 파드득 몸을 떨며 흐느꼈다. 발가락을 있는 힘껏 오므렸지만, 자극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다. 요도 끝에 물이 고여 또다시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배뇨였다. 사정을 포함하면 세 번째. 처음보다 훨씬 투명한 액이 자지가 박혀 들 때마다 질금거리며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아, 흐, 자꾸, 이아…. 이안하게….”

“어, 니 원래 안 쌌지.”

장단을 맞춰 준 범진이 상체를 수그리며 선재의 뺨을 슥 닦아 주었다. 열기에 젖었던 얼굴은 범진이 하도 쓸고 닦아 손자국이 남은 상태였다. 나름대로는 위한다고 하는데 손짓에 우악스러운 데가 있어 연한 상처가 남았다. 그걸 본 범진이 얼굴에 금 가겠냐, 혼잣말했다. 범진은 옆쪽으로 모여 있던 선재의 다리 한 짝을 제 가슴팍 쪽으로 붙인 채 허리를 밀었다. 살이 척척, 계속해서 부딪혔다.

이쪽도, 저쪽도 보기 힘들어진 선재가 한 손으로 제 코와 입을 막았다.

선재의 한쪽 다리를 들고 있던 범진이 혀를 내밀어 종아리를 끈적하게 핥았다. 넓적한 혀로 맛을 보듯 날름거렸다.

범진은 곧 자세를 고쳐 선재의 다리를 제 허리 뒤로 넘겼다.

반쯤 뜬 등에 선재가 손을 파닥거렸다. 엉덩이가 위로 들리자마자 범진은 제 한쪽 다리를 기역자로 세웠다. 각도가 달라지면서 선재의 내벽이 또 울기 시작했다. 범진이 잘 안다는 듯 각도를 재고 자지를 힘껏 쑤셨다. 내벽이 자극으로 부풀면서 꾸역꾸역 물을 짜냈다.

“아, 아흐, 나, 내가, 흐엉…!”

결국 참지 못한 선재가 울음 섞인 신음을 내질렀다. 그렇게 울어도 검붉은 좆은 쉼 없이 엉덩이를 뚫어대고 있었다. 내벽과 살을 비비며 드나들었다.

“씨발, 좋지.”

범진이 선재의 다리를 척, 놓고 제 상체를 다시 위로 올려붙였다. 선재와 얼굴을 마주 본 채로 그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물었다.

“우윽, 윽….”

“야, 씨, 니가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다.”

“으…윽! 흐!”

“내만, 씨팔, 니를 알면 되지, 씹.”

몸을 완전히 붙이며 자지를 박는 범진의 몸짓을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까지도 터뜨린 울음을 간신히 안으로 넣던 선재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쾅쾅, 사정없이 찍히는 속도 때문에 내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범진이 한곳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탓에 아랫배엔 쥐도 날 듯했다. 결국 또 물을 싸 버린 선재가 범진의 목을 끌어안으며 눈을 있는 힘껏 감았다. 몸의 본능만 남아 그를 끌어안았다.

범진은 선재의 뺨을 눌러 입을 벌렸다. 밑을 후벼 파는 와중에 키스에 집착했다. 입속에 있던 선재의 혀를 꺼낸 범진이 제 혀로 거침없이 옭았다. 위아래 다 살을 넣고 한껏 흥분했다.

선재가 목을 안고 있던 손을 풀고 범진의 어깨를 안았다. 혀도 한 번에 뿌리까지 쑤셔 박은 범진은 선재의 입안을 한순간에 점령했다. 추욱, 입을 쭉 빨아당길 때마다 선재의 침이 반은 얼굴 밖으로 흘렀고 반은 범진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아래에선 내벽이 찌걱대며 젖은 소리를 냈다. 그게 아니면 골반이 엉덩이를 치는 소리. 입을 입으로 붙잡은 채로, 범진은 선재의 벌게진 엉덩이에 제 하체를 붙이길 반복했다.

“아, 아흡!”

입안에서 신음을 낸 선재가 두 다리를 허공으로 뻗은 채 경련하듯 떨었다. 몇 번 더 박은 범진은 선재의 내벽을 쭉 비비고 들어가면서 정액을 분출했다. 깊은 곳으로 퍼져나갔고, 일부는 내벽에 덕지덕지 맺혔다. 자위를 하긴 했지만, 성관계로는 오랜만의 사정이었다. 범진이 사정 뒤에도 잘게 박으며 자지를 빼지 않았다.

선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범진이 뒤늦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손은 젖은 머리칼에 닿아 있었다.

“기억 돌아온 거 없냐….”

축 가라앉은 목소리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선재가 코를 훌쩍 먹었다. 입을 꾹 다물고 위쪽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발갛게 올라온 얼굴에 손을 댄 범진은 살살 만졌는데, 하고 얼굴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뒤집어 손등을 대곤, 이래 하면 안 아프지, 물었다. 굳이 그런 걸 지금 물어서…. 최대한 조심해서 만지는 듯한 손길에, 선재의 눈에 맺혀 있던 물기가 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이상할 정도로 서럽고 벅찬 기분이 들었다.

* * *

“업어 주까.”

“아니….”

욕실에서 정액을 빼 주니 마니, 추한 실랑이를 벌인 탓에 말을 완전히 놓게 되었다. 엘리베이터까지 어기적거리며 걸어간 선재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범진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1층에 도착했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낙비인 듯 빗줄기가 거셌다.

범진은 직원이 있는 쪽으로 가서 우산 하나를 받아 들고 왔다. 여러 개가 꽂혀 있었는데 하나만 들고 왔다.

“뭐 먹고 가까. 니 배 다 꺼졌을 거 아니냐.”

열과 수분으로 붉어진 얼굴에 입을 대며 말했다. 선재는 직원이 볼까 봐 얼굴을 뺐지만, 범진이 어깨를 안는 탓에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입구에서 우산을 펼친 범진은 한 걸음 떼기가 무섭게 고개를 푹 숙여 오고, 또 두어 걸음 걷다가 고개를 푹 숙여 오며 입을 맞추려고 했다.

“함만.”

그러면서 딱 한 번만, 하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섹스까지 했으면 차까지는 조용히 가야 할 게 아닌가. 범진은 정도를 몰랐다.

아예 멈춰 선 것도 범진 때문이었다. 범진은 끌어안은 어깨에 힘을 세게 주었다. 오므라드는 어깨를 느낀 선재가 범진의 눈을 우산 안에서 쳐다봤다.

“거짓말, 큽,”

거짓말만 계속 친다고, 뭐라고 하려 했는데 실패했다. 범진이 냅다 키스를 시도해왔다.

반동 때문에 선재의 얼굴이 뒤로 넘어갔다.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범진이 어깨를 안고 있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볍게 입술을 빤 범진은 디지네, 디져, 하며 좋아했다. 그러곤 선재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차까지 향했다.

조수석에 선재를 태운 범진은 그제야 우산을 저 혼자 썼다. 빙 둘러 운전석까지 걸어오는데 얼굴이 쓸데없이 밝았다. 선재는 범진의 왼쪽 어깨도 한동안 쳐다봤다. 어깨부터 손까지 다 젖어 빗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는 한 방울도 맞지 않았는데, 범진은 몸의 반이 다 젖어 있었다.

운전석에 올라탄 범진은 아, 맞다, 했다.

“니 쪼코우유 먹을래. 점마한테 달라 하면 준다.”

“…….”

딱히 먹고 싶은 건 아니지만 배는 조금 고팠다. 범진의 말대로 배가 좀 꺼진 참이었다. 숨을 가다듬은 선재가 어디…. 하고 겨우 나오는 목소리를 끌어 말했다.

범진은 대충만 듣고 곧장 차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우산도 없이 냅다 빗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멀진 않지만, 장대비라 온몸이 다 젖을 듯했다. 바보인가? 선재는 훌쩍거리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곧 나온 범진은 재킷 안에 우유를 넣은 채로 뛰어왔다.

뭐가 즐거운지 워, 씨발, 하는 소리가 차 안으로도 들려왔다.

거의 도착해선 야, 하고 앞 차창으로 상체를 숙이며 선재를 쳐다봤다.

“진짜…. 이상한 사람….”

최대한 안 들리게 중얼거린 선재가 범진이 차 타는 걸 곁눈질하듯 쳐다보았다. 범진은 하나도 젖지 않은 초코우유를 품 안에서 꺼냈다. 니 꺼. 하고 더 깊은 안주머니에 있던 빨대까지 까서 우유에 꽂아 줬다.

선재는 우유를 받아 들고 숨을 골랐다. 빨대나 우유갑 어느 것도 전혀 물기가 배어 있지 않았다.

범진은 옆에서 오랜만에 비 맞으니까 좋다고, 그 소리만 몇 번을 했다.

선재는 대꾸 없이 우유만 마셨다.

차가 곧 출발했지만 중간중간 멈춰 서는 범진 때문에 집으로 가는 길이 멀었다.

야, 저거 봐.

몇 번이나 그런 소리를 들었다.

별것도 아닌 걸 보여 주려 했다.

저거 니랑 본 거. 니가 좋아했던 거. 니가 저거 이쁘다고 했잖냐.

다른 차들이 뜸하면 아예 멈춰 서서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도 했다.

거칠게 숨 쉬는 시늉을 하며 니가 젤 이쁘다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기억이 있을 때의 저는 어떻게 반응해줬을까. 그런 소리는 성적으로 희롱당할 때나 들어봤던 건데, 범진이 하는 말엔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결혼한 사인데 악의가 느껴지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만.

이렇게 이상한 사람을 사랑한 제가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범진이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달려들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하려 한다.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몰래 쳐다보았다.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도 범진은 제 모든 동선을 살피고 있었다.

쓰윽 웃으며 내 봤냐, 했다.

선재가 고개를 저으며 빨대에 입을 갖다 댔다. 입안으로 쪽 빨려 들어오는 우유가 참 달았다.

* * *

기억을 완전히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하고도 이틀이 더 갔고, 그날 선재는 12시간을 내리 잠만 잤다. 일어났을 땐 모든 일들이 다 기억이 났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로 가만 앉아 있는 시간이 10분. 선재는 홈카메라로 다가가 예전에 그랬듯 인사를 했다. 24시간 그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지, 범진에게선 30초도 안 돼 전화가 걸려왔다. 급하게 걸려온 것치고는 어, 야, 하는 말밖엔 하지 않았다. 말을 먼저 꺼낸 건 선재였다. 간단명료하게 기억나, 하고 말했다. 전화는 그 순간 뚝 끊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진이 요란 법석한 소리를 내며 집을 찾았다. 선재야! 내 마누라! 어이없이 큰소리를 지르며 등장하는데, 괜히 일찍 말했다 싶었다. 그 좁은 도로를 난폭하게 운전해왔을 범진 때문에 선재는 저녁에 말할걸, 하고 후회하면서도 범진의 키스를 피하지 않았다. 눈물도 찔끔 났던 것 같은데.

“사람 갖고 노니까 좋았지…?”

“내가 언제.”

“밥 먹을 때 원래 옆에 앉는다 그러고…. 입도 꼭 닦아 줘야 한다 하고…. 다 기억나거든.”

“뭐. 전에도 몇 번 그랬다 아니냐.”

“매번 그런 것처럼 말했잖아.”

“그기 뭔 상관이냐…. 기억 돌아온 기념으로 입이나 함 박아 보자.”

“언제까지 기념할 건데….”

마땅한 이유가 없는지, 매번 그 핑계였다.

범진이 눈을 찡그리면서 웃었다.

“일단 하고.”

여기서 키스를 하려 했다. 상체를 뒤로 뺀 선재가 범진을 조용히 불렀다.

“범진아.”

“왜.”

“위에 봐봐. 여기 어딘지 소리 내서 읽어 봐.”

고개를 든 범진이 병원 소개가 쓰인 전광판을 눈으로 훑었다.

“병원 다녀도 다 똑같이 쎅쓰하고 키쓰하고 한다.”

앞을 지나던 사람이 범진을 슥 쳐다보고 갔다. 선재가 범진의 입을 막으며 표정을 굳혔다.

“누가 그거 말해? 조용히 안 해?”

범진은 선재의 손으로 입이 막힌 게 좋은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일부러 웅얼거리며 발음이 안 되는 척을 했다.

곧 선재가 손을 떼려 하자, 그 팔목을 잡아 손바닥을 위쪽으로 뒤집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 빠는 건 되지, 물었다. 맘에 안 드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선재를 무시하곤, 범진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보란 듯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마지막엔 쭉쭉 빨았다.

“아, 뭐 해.”

“쌍판 좀 만져 줘라.”

“…….”

“니 그동안 한 번도 내 쌍판 안 만져줘서 내가 맨날 울었다 아니냐.”

“뻥치네…. 잘도 울었겠다…. 나 가지고 놀기나 했으면서….”

말은 그렇게 한 선재지만 팔을 뻗어 범진의 뺨에 손을 댔다. 특유의 뜨겁고 단단한 느낌. 몸도 그렇지만 얼굴도 그런 느낌을 준다. 이렇게 하면 기억이 돌아온다고, 이렇게 한 번만 해 보라고, 해 보자고,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던 범진 생각이 났다. 선재는 손으로 범진의 뺨을 꾹 누른 채 그의 눈을 쳐다봤다. 하는 것마다 억지에다 막무가내인 사람인데….

좋아서 웃음이 났다.

범진은 제 얼굴을 위로 들었다 아래로 내렸다 하며 자체적으로 쓰다듬어지는 척을 했다.

선재의 손은 가만히 있는데 저 혼자 얼굴을 비볐다.

“참나….”

다양한 검사를 받고 결과를 들을 때까지 범진은 선재의 곁을 지켰다.

들러붙어 피곤한 건 있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단 좋았다.

옛날엔 몸이 아파도 늘 혼자 병원의 구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 했었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아플 때 느끼는 설움까지 감춰야 하는 건 조금 쓸쓸했는데.

범진과 결혼한 뒤론 한 번도 병원을 혼자 와 본 적이 없었다.

선재는 괜히 MRI나 CT, 초음파 등의 단순 촬영 검사에도 좀 아픈 것 같다고 엄살을 부렸다. 그럴 때 범진은 한술 더 떠 내 새끼 빨리 나아라, 하고 배나 등을 만져 주었다. 크게 티 나지 않는 검사용 가운을 입어, 선재도 범진의 손이 들어오면 그냥 가만히 있었다.

선재는 마지막까지 원인 미상의 기억상실을 진단받았다. 일부 열성 오메가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보고가 있긴 했지만, 사례가 극히 적었다. 그래도 그 일부가 이후로는 비슷한 증상도 없었다는 말에 선재가 맘을 놓았다. 혹시 또 기억을 잃을까 불안한 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진은 니 기억 잃으면 내가 맨날 찾아 줄 수 있다, 하고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믿음은 가지 않았다. 또 딴짓만 실컷 할 것 같았다.

“또 놀려먹을 거면서.”

“내가 언제 놀리먹었냐.”

“기억 찾아 줄 생각은 안 하고…. 옆에서 웃고만 있고.”

“니만 보면 웃음이 나오는데 으쩌라고.”

힘주어 말해 억양이 유독 튀었다.

말없이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가 하, 웃음을 터뜨렸다. 니도 웃네, 하는 범진에겐 반박하지 못했다. 어쨌든 웃은 건 웃은 거니까.

병원을 나온 두 사람은 근처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마땅한 건물도 없는 길가를 30분 넘게 걷다가, 골목이 보여 그쪽으로 빠졌다.

늦겨울이라 쌀쌀하긴 해도 날이 많이 풀려 있었다.

범진은 선재의 손을 다양하게 잡아주면서 걸었다. 차가워지겠다, 싶으면 선재의 손등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손이 커서 거의 다 덮여 있었는데도 손의 위치를 자꾸 바꿨다. 선재는 뜨끈뜨끈한 손에 힘을 꽉 주고 범진을 쳐다봤다.

“냉면 먹자.”

“감기 들라고 환장했냐.”

“냉면 먹는 거랑 감기랑 무슨 상관이야.”

“뭐, 저거 말하냐.”

앞을 쳐다본 범진이 냉면과 손만두가 쓰인 입간판을 발견했다. 건물을 보니 유리문 안쪽이 어둑어둑했다. 비수기라 장사는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 닫아서 어차피 못 먹는다.”

“그럼 다른 냉면….”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서 선재는 다른 냉면집을 찾았다.

“야, 내가 니 손 이래 잡아주니까 추운지도 모르지. 먼 냉면이냐.”

겨울치고는 그렇게 춥지 않은 날인데 혼자서만 난리였다.

심드렁하게 들어 준 선재가 그럼 뭐 먹어, 하고 범진을 쳐다봤다.

쳐다봤다가 앞을 보고, 앞을 보다가 눈을 맞추는 식이었다.

범진은 차라리 우동을 먹으라고 했다.

“어디서.”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다.”

속으로 먹고 싶은 냉면도 아닌데 택시를 타야 하나? 싶었지만 선재는 범진의 손을 잡고 가만히 멈춰 있었다.

길가로 손을 뻗은 범진이 택시 한 대를 잡았다.

3분쯤 갔을까. 택시는 어느 포장마차 바로 옆에 멈춰 섰다.

먼저 내린 선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범진이 기사에게 요 앞에 시장, 하고 말해 무슨 시장인지 눈치는 채지 못했었다. 내리고 보니 시장 이름이 익숙했다.

“어?”

“니 내가 여서 티김 사 줬잖아. 기억나냐.”

내심 들뜬 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범진을 쳐다봤다. 몇 달간 범진과 떨어져 지냈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범진이 백팩에서 꺼냈던 튀김도 잊을 수 없었다. 키스를 하느라 정작 튀김 자체는 별로 못 먹었지만 말이다.

시장엔 따로 높은 천장도 설치돼 있었다.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위를 올려다본 선재가 엄청 높다고 중얼거렸다.

“뭐가.”

“천장. 저거 봐.”

“별걸 다 보라 하냐.”

하씨, 하면서도 범진은 고개를 들고 쳐다보는 시늉을 했다. 별로 신기해하진 않았지만, 선재가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범진이 선재를 데리고 간 곳은 한 유명 우동집이었다. 범진이 메뉴도 보지 않고 자이언트 우동을 두 개나 주문했다. 선재는 이름이 그런가 보다, 했지만 막상 나온 우동은 이름처럼 거대한 그릇에 담겨 나왔다.

“이거 시킨 거 맞아?”

“야, 많이 크네.”

이야, 야, 하고 혼자 추임새를 넣은 범진이 우동 하나를 옆으로 밀었다. 하나를 나눠 먹어도 되겠다고 말한 범진의 말에 선재도 수긍했다.

“그냥 우동도 있네….”

메뉴판을 한 번 쳐다본 선재가 혼잣말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식당 안은 북적북적해서 누구도 누구에게 관심이 없었다. 옷을 벗고 난동을 부려도 그냥 넘어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 젓가락을 맛본 선재가 맛있다, 하고 범진에게 말했다.

“내가 니 맛때가리 없는 거 멕이는 거 봤냐.”

생각하는 척 눈을 딴 데로 둔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살짝 미소까지 띠자 범진이 제 아랫입술을 은근히 물었다. 눈으론 웃었다.

“조때가리 트진다.”

맛때가리에 이어 조때가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래도 작게 속삭이듯 말해 들어줄 만은 했다. 어디, 하고 테이블 아래를 쳐다본 선재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앞섶을 확인했다. 범진은 선재가 고개를 옆으로 숙이기가 무섭게 다리를 더 쩍 벌려 튀어나온 부분을 강조했다.

말없이 고개만 저은 선재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넣는데 범진이 같은 면발을 집었다.

느슨한 우동 면발이 국물 위로 올라오자 둘의 눈이 맞았다. 어차피 사람도 안 보는데 괜찮겠지. 또 언제 같은 면발을 집겠나 싶어 선재가 면발을 끊지 않고 입으로 천천히 잡아당겼다. 범진은 당연히 끊지 않았다. 결국 10cm도 안 남게 되자, 선재가 먼저 이로 면을 끊었다.

“야이, 뭐 하냐.”

“그럼 거기서 뭘 더 하게.”

“확, 씁…. 다시 와 봐.”

아예 면발도 없이 얼굴을 내밀어 보라고 했다. 고집을 못 이긴 선재가 면기 쪽으로 얼굴을 붙이고, 범진은 아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은지 범진은 아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선재의 옆으로 가 앉았다. 모퉁이 쪽이라 뒤돌아 앉은 손님만 한 명 보이는 구역이었다.

범진은 앉자마자 선재의 얼굴을 잡고 잽싸게 뽀뽀했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우동 면발을 건져 먹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쳐다본 선재가 바람 새듯 한 번 웃곤, 젓가락을 다시 잡았다.

“…….”

범진의 장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면발 한 가닥을 나눠 먹은 게 인상 깊었던지 자꾸 같은 면발을 집으려 들었다. 하여간 빼빼로 게임도 좋아하고, 그 비슷한 것도 참 좋아했다.

“배고프다고….”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린 선재가 범진의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 범진이 고개를 옆으로 툭, 꺾으며 배 얼마나, 하고 물었다.

그리곤 병원에서 했던 것처럼 슬쩍 손을 넣어 배를 만져왔다.

“…….”

뜨거운 면기에 손을 댔다가 넣어 배보다 손이 훨씬 따뜻했다.

“먹어라.”

입은 상의를 앞쪽으로 부풀린 선재가 젓가락을 들었다.

“나갈 때 셔츠…. 꺼내서…. 입어.”

깨작깨작 우동을 먹기 시작한 선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왜.”

몰라서 묻냐는 얼굴로 선재가 범진을 빤히 쳐다봤다.

“엄청…. 서잖아.”

또렷하게 대답한 선재가 상체를 약간 틀면서 앉았다. 커다란 손이 배 전체를 만졌다가 위쪽으로 올라오려는 게 느껴졌다.

“뭐가 서는데.”

“그거, 그, 서니까. 셔츠로 가려서 입으라고.”

앞접시에 담았던 국물은 이제 미지근해져 있었다.

돌려 말한 선재가 간질거림에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정말 어쩌라는 건지를 범진은 묻고 있었다. 매번 그랬다. 여유 있게 웃는 범진을 쳐다본 선재가 가리라면 좀 가려, 했다. 안 그래도 반은 발기하고 있던 성기가 제 배까지 만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가리면 쫌 세아도 되냐….”

범진이 장난기 가득한 투로 속삭였다. 니 보고 좆 세워도 되냐고, 하고 확인하듯 또 물었다.

“좀…. 몰라.”

“니 앞에서는 이게 개좆대가리가 된다 아니냐.”

턱을 살짝 내린 범진이 아래쪽에 시선을 두는 듯했다.

이따금 범진을 쳐다보던 선재가 그 말엔 대꾸하지 않았다.

읊조리듯 건네진 말이 참 범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싫지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제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밖에서만큼은 범진을 자제시키려고 하는데,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선재는 식사를 다 끝낸 뒤엔 범진의 셔츠를 손수 밖으로 꺼내주었다. 길가를 배회하는 주정뱅이 같은 느낌은 나지만 거기가 하도 커져 어쩔 수 없었다. 다 했다고 범진을 올려다봤을 땐, 범진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만 있었다. 왜 웃어? 물어도 입이 귀에 걸려있을 뿐 별말을 안 했다.

다음에 들른 곳은 튀김 가게였다.

선재는 고구마튀김을 제일 잘 먹었다. 그때 고구마도 있었나? 물었는데, 범진도 그것까지 기억하진 못했다. 범진은 뜨거운 튀김을 입안에 냅다 넣고 혼자 씨발, 씨발, 욕을 했다. 그래도 왜 이렇게 뜨겁냐고 주인에게 따지진 않았다. 말도 안 되지만 예전 같았으면 분명 시비를 걸었을 거다. 선재는 가만히 서서 범진을 쳐다보았다.

“야, 니, 내가 예고하고 내 쳐다보라고 했지.”

뜬금없이 쳐다볼 때가 자주 있긴 해도, 그런 걸 예고하고 쳐다보는 건 더 이상했다.

“무슨 예고를 하고 봐.”

집게로 남은 고구마튀김을 집어 먹은 선재가 우물우물 먹으면서도 범진을 쳐다봤다.

보라고, 오라고, 그렇게 말할 때는 언제고 막상 아무 때나 쳐다보고 있으면 혼자 얼굴이 벌게진다. 하, 이게, 하고 좋은 기분을 못 숨긴 범진이 계속 입꼬리를 올렸다. 손으로 선재의 뺨을 툭 치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렇게 좋을까?

속으로 생각한 선재가 범진과 거리를 가까이 붙였다.

손을 먼저 내밀어, 놀고 있던 범진의 손을 잡았다.

불시에 잡아보니 손이 미지근했다.

선재는 손을 잡지 않은 척, 튀김을 마저 먹었다.

범진도 왼손으로 튀김을 찍어 먹었다.

잡은 손은 곧 따뜻해졌다.

그렇게 좋다.

그렇게 좋을까? 하고 속으로 했던 질문에, 선재가 먼저 답을 내놓았다.

아직도 너무 좋았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시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 맛본 튀김도 맛은 잘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은 감각을 지우기도 하니까.

범진아,

자꾸 부르고 싶은데, 범진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부르지 않아도 곁에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