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킹크랩과 가재 요리까지 주문한 바람에, 저녁값으론 어이없는 금액이 나왔다. 웬만해선 속으로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선재도 찍혀 있는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너무… 하고 입을 열기까지 했다. 1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특히 가재 요리는 범진이 억지로 먹어라, 먹어라, 하도 말을 해 입을 댄 것이지만 이후로도 맛이 있어 꽤나 먹었다. 준희도 달달한 가재살이 맛있는지 몇 번이나 다시 달라고 입을 벌렸다.
복합적인 심정으로 준희의 손을 잡고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했지만 30만 원 정도를 보탤까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범진이 무슨 일을 하고, 뭐 때문에 돈이 늘 많은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사를 자주 하면 머지않아 땡전도 한 푼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저와 상관이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예 분리해놓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몇 주간 범진의 돈으로만 생활을 했고, 그가 구한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런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끌려가고, 범진이 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선재는 오늘 먹은 밥값 같은 것도 언젠가는 갚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신세 지고 있는 오피스텔도 마찬가지.
1층 부동산 유리에 붙은 시세로 감안하면, 월세를 기준으로 족히 100만 원은 나가는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오가며 들여다본 구조와 방, 층수를 따져서 생각하면 그 정도의 값을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선재는 그것만은 꼭 갚으리란 생각을 다잡았다. 아예 신경을 끄라고 하면 불같은 화가 돌아올 게 뻔하니 돈이라도 갚자는 심정이었다.
“야.”
돈 계산을 하고 있었더니 범진이 앞으로 간 줄도 몰랐다.
“안 오고 뭐 하냐.”
“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상을 쓴 범진을 향해, 선재가 걸음을 내디뎠다.
곧 타게 된 엘리베이터에서도 돈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한 푼도 없이 시골 바닥을 돌아다녔던 때가 있어서일까. 너무 큰 돈을 한 끼 값으로 써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가재 요리는 제가 더 많이 먹은 것 같았다.
“너는 근데….”
입이 열리자마자 범진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덩치가 크고 표정을 험상궂게 지어서 그렇지, 평소엔 원래 나이와 근접하게는 보인다. 긴 흉터와 상처가 아니면 순하게도 보일 얼굴이다. 특히 눈매에서 그런 인상이 짙게 들었다. 선재는 다음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범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또 말을 하다 마네.”
유연하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1층에 도착했고, 저녁이 와 있는 게 보였다. 아까까진 분명 빛이 있었는데, 어느덧 푸릇한 기운만 남아 있었다.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고, 먼저 내린 범진의 뒤를 따랐다. 꼬기, 꼬기… 하고 먹었던 걸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맛있었어?”
“네에.”
“…아저씨한테 고맙다고는 얘기하자.”
“녜, 주니가.”
“응, 준희가….”
원래라면 밥을 먹자마자 인사는 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테이블로 들어온 빌지를 언뜻 본 이후로는 마음이 복잡해져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범진은 이미 주차장에서 차를 끌어, 건물 앞까지 도착한 상태였다. 자동차 불빛을 흘끔거린 선재가 잡고 있던 준희의 손을 힘주어 끌기 시작했다.
“준희 가자….”
“네에…. 아부지 고맛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입구까지의 거리는 3m 정도. 잘 걷고 있던 준희가 갑자기 선재의 손에서 손을 뺐다. 쏙 빠진 손에 선재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작은 등이 어디까지 굽은 게 보였다. 배에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허리 숙인 준희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차가 곧 범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최선을 다해 고개를 숙인 탓에, 발끝까지 조금 들리고 있었다.
“주니가…. 해따아….”
범진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재가 차 쪽에 시선을 보내다 준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가 하라고 하면 해. 저 아저씨가 안 보고 있네.”
“아젓씨? 주니 아부지?”
“…준희… 아부지 말고, 아저씨 고맙습니다, 해봐.”
“아젓씨 고맛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녜에.”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니 이제는 아저씨라고 할까. 선재는 준희를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했다. 범진은 다른 쪽을 보고 있다가도 차에 아무도 타지 않으니 금세 클랙슨을 울렸다. 거리는 꽤 조용했다. 빠앙, 하고 울린 소리에 준희가 빠방이, 빠방이, 하고 다리에 속도를 붙였다. 차를 알아보고 익숙하게 뒷좌석 앞에 섰다. 문을 연 선재가 준희를 차에 태우고 제 몸도 뒤이어 실었다.
“아부지 고맛습니다….”
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사하는 아이가 귀엽기도 했지만, 역시 아부지라고 말을 해 심란하기도 했다. 선재는 열감이 이는 얼굴을 푹 숙이며 준희의 어깨를 감쌌다.
“…야, 준희야.”
“녜에.”
“아부지 놔두고 둘이서 사니까 좋더냐?”
“…으은…? 네에….”
말을 이해하지 못한 준희가 곤란한 표정으로 네에, 하고 대답했다. 이럴 땐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다. 범진의 말은 억양도 특이하고 말투 자체도 상스러워 준희가 제대로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표준어도 못 알아들을 때가 많은데…. 선재는 와중에 아부지는 기억을 한 준희에게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하필이면 그걸 외웠나 싶었다.
차는 거침없이 도로를 탔다. 비슷한 풍경이 차창 밖으로 끊임없이 펼쳐졌다. 선재는 범진이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집에는 보내주겠지 싶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차를 탈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낯선 차를 탔을 땐 꽤 긴장이 됐었는데, 범진의 차는 오랜만이긴 해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익숙하고 편했다. 저런 남자와 함께 있긴 하지만 워낙 자주 타본 차니 그만큼 익숙함도 드는 듯했다.
최근에 얻어탔던 차는 윤형의 차였다. 이후로도 인사는 하고 지냈지만, 차를 타는 일은 다신 없었다.
어린이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제안에도 한사코 거절을 했었다.
“니도 좋냐?”
“….”
“좋냐고, 선재야.”
“…뭐가….”
“임마 애비는 한 번 바꾼 걸로 족해라.”
엄지를 세워 뒤를 가리키는데, 그 자리에 정확히 준희가 앉아있었다.
“….”
“애 엄마가 좋은 꼴 보이야지.”
말을 꼭 저렇게 했다. 선재는, 이제 적응을 한 억양엔 따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범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너무 잘 알았다. 한 번 바꾼 애비를 저로 여기는 듯해 기가 차긴 했지만 말이다. 선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꾸는 하지 않았다. 어디서 윤형을 보기라도 했을까? 가시 돋친 말은 분명히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범진의 놓아주기 방식이 겨우 이런 거라, 선재는 누구에게 실망감을 토로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과도기 같은 게 아닐 수도 있을까. 저와 준희를 태우고 어딘가로 향하는 범진은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제발 아니기를.
속으로 천천히 기도하듯 읊조리는 사이, 차가 멈췄다. 도착한 곳은 대공원 주차장이었다. 범진과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장소였다. 처음엔 대공원이 아니라 근처 다른 곳에 볼일이 있나 싶었다. 선재는 차에서 내리는 범진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차에 있어도 될까 싶어 준희의 보드라운 팔에만 손을 올렸다. 투명한 솜털이 손끝에서 하늘거렸다.
“뭐 하냐.”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린 범진의 목소리엔 그 감상이 모두 깨졌다. 상체를 숙인 채 차 안을 쳐다보는 범진의 이마엔 굵은 주름이 한 줄 가 있었다. 차창을 끼고 있지만, 더 늦으면 가만히 안 두겠다는 눈빛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선재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시간도 늦었는데 공원에서 뭘 하겠다는 건가. 여름이라 저녁치고는 주변이 밝을 뿐이었다. 30분도 안 되어 주변은 캄캄해질 것이었다.
“준희, 좀 걸을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8시 정도 되었으니 한두 시간 안에 졸린다고 할 텐데. 몸이 약한 아이라 자기 전엔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만들어야 한다. 조금 걷는 거야 나쁘지 않겠지만 범진이 이후로도 계속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그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푸우?”
준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위쪽을 가리켰다. 위로 던지면 핑글핑글 빛을 내며 내려오는 장난감을 가리킨 거였다. 아이의 눈동자에 작은 불빛들이 촘촘히 박혔다.
“신기해?”
“녜에….”
“준희 이거 계속 볼래?”
“으으응… 아부지….”
“…그래, 아저씨한테 가자.”
계속 아저씨라고 부르면 준희도 아저씨라고 부르겠지. 범진의 ‘아부지’도 따라 하는데 계속하다 보면 제 ‘아저씨’도 언젠간 따라 할 것이다. 선재가 아저씨, 하고 힘주어 말했다. 범진은 듣지 못하도록 상체를 약간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
사람이 많은 곳엔 오고 싶지 않았다. 범진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범진은 저를 조금이라도 쳐다본다 싶으면 길거리에서도 뭘 보냐 씨발아, 하고 욕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제발 그런 일이 안 생겼으면 했다. 이런 제 마음을 범진이 조금이라도 알는지. 범진은 나무 아래서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몇 번 연기를 뱉더니 툭, 꽁초를 아무 곳에나 버렸다.
“저기.”
“왜.”
“다른 데 가면 안 돼?”
“딴 데 어디.”
“…아니, 집이라든지….”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던 범진의 이마가 또 울퉁불퉁해졌다. 한껏 든 눈엔 흰자가 가득했다. 얼마 안 지나 입꼬리만 씩 올리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너무 선했다. 선재는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다.
“안 해줘서 달았냐.”
“…뭐?”
“그래서, 씹. 이거 존나게 흔들었고.”
“뭐 하는…!”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 한쪽을 큰 손으로 꽉 잡았다. 차 앞이라 다행이지, 뒤에 누가 있었으면 흉한 모습을 그대로 보일 뻔했다. 빠르게 엉덩이를 옆으로 뺀 선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 그래도 붉었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뭘 흔든다는 건지 말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거리를 좁힌 범진에게선 진한 담배 향이 났다. 어? 선생님, 대답해보세요. 하자 입에 남았던 담배 연기까지 허공으로 퍼지게 되었다. 인상을 찌푸린 선재가 잡고 있던 준희의 손을 뒤로 밀었다. 준희는 이러나저러나 주변이 신기한지 고개만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아! 이내 작은 손으로 손뼉까지 쳤다.
야광 물질이 발린 헬륨 풍선 하나가 어떤 아이 손에 들려 있었다. 둥둥 떠 있는 풍선을 향한 박수였다. 작은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가리키는 걸 보니 저도 갖고 싶다는 눈치였다.
한 번 잡혔을 뿐인데… 엉덩이는 계속 얼얼했다. 그 감각을 느끼면서도, 선재는 저 풍선이 어디서 파는지를 둘러보았다. 저긴가? 아, 깜짝이야.
코앞까지 다가온 범진이 선재를 놀란 얼굴로 바꾸어 놓았다. 여차하면 진짜 코라도 닿을 듯한 거리였다. 뒷걸음질을 치려고 발을 든 선재의 움직임은 빠르게 멈췄다. 범진이 곧장 허리를 감아왔기 때문이었다. 밖에선 이런 적이 없었는데.
허리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선재가 불편한 감정을 얼굴로 드러냈다. 범진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쳐다보다 뭐, 하고 씩 웃었다.
질질.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관계처럼. 허리에 범진의 손을 두르고 걷는 이 순간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범진은 허리에 손을 올린 걸 까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야, 씹, 저게 뭐냐, 하고 먼 곳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거나 갑자기 멈춰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그런 사람과 길을 걸어야 한다면 차라리 어둡고 좁은 골목처럼 생긴 길이 낫겠지. 선재는 길도 잘 모르면서 사람들이 최대한 없는 곳으로만 범진을 이끌었다. 이끈다고 하기도 웃기지만, 어쨌든 발을 먼저 내밀면 범진은 여유롭게 따라서 왔다.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볼 때도 선재의 허리를 감은 왼팔은 굳건했다. 곤란한 얼굴을 한 선재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공원 곳곳에 놀이터가 많았다. 숲에서 나는 소리를 재밌어하면서도, 결국 놀이터에 시선을 빼앗긴 준희가 그쪽으로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요란스럽게 놀진 않지만 그래도 아이라 기구 같은 걸 좋아하긴 한다. 그네 두 개를 다른 아이들이 차지하고 있어, 준희의 목적지는 미끄럼틀 아래였다.
기구가 뭐가 됐건, 아래로 들어가 숨기를 좋아한다. 거기서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선재가 준희를 핑계 삼아 허리에 둘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왜.”
“준희 봐야 돼.”
“봐라. 누가 못 보게 하냐.”
“…이러고 애를 어떻게 보는데.”
“잘 노는데 혼자 오바 싼다.”
“넘어져.”
“니 그렇게 참견하면 애 미친다.”
“뭐….”
“지 인생을 얼마나 살고 싶겠냐. 저 봐라. 니 닮아서 금방 엄한 놈이랑 어울리네.”
“…말 그렇게 하지 말지 그래.”
“할 건데, 어쩔래.”
갑자기 할 건데, 하고 입이 쪽 닿고, 어쩔래, 하고 또 쪽, 입이 닿았다. 힘도 어지간히 실려 머리가 뒤쪽으로 밀릴 정도였다. 선재는 무작정 닿는 입술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조명등 덕분에 주변은 밝은 편이었다. 누가 보기라도 했을까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또 엄청나게 빨개졌겠지. 그런 얼굴을 보이기는 싫다. 고개를 숙인 선재가 질세라 들어오는 범진의 손을 보고 얼굴에 힘을 잔뜩 줬다.
“고개 안 드냐?”
“하지 마, 좀.”
턱을 붙잡은 손이 가볍게 움직인다. 위협하듯 말하긴 하지만, 범진이 손에 힘을 세게 가하는 것 같진 않았다. 선재는 무슨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치하고 있는 이런 상황을 참기가 힘들었다. 범진이 허허 웃는 것 같아 기분도 나빴다. 마음 같아선 도망이라도 치고 싶지만. 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결국,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범진의 손이 여전히 턱에 닿은 게 느껴졌다.
“놔…. 손.”
“놓을 테니까 여기 앉아 봐라.”
가리킨 곳에 기다란 벤치 하나가 있었다. 선재의 시선이 준희 쪽으로 옮겨갔다. 아이는 처음 만난 남자애와 미끄럼틀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무서워, 이거 커, 하는 내용이었다. 거리가 멀지 않아 뭐라 말하는지는 조금만 집중해도 들렸다.
“왜….”
“맥주 사 오게.”
“…나 술….”
안 먹는데. 30초 거리에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편의점으로 향한 범진이 건물의 흰 조명 아래서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편의점엔 파는 게 별로 없었다. 선재가 그 모습을 쳐다보다 준희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형인 듯 보이는 남자애는 준희를 잘 챙겨 주었다. 내가 뭐 구경시켜 줄게, 하고 준희를 데리고 가서 꽃밭을 보여주기도 하고, 작은 미끄럼틀을 타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어… 타면 안 돼.”
준희는 혼자 미끄럼틀을 타본 적이 없었다. 엉덩이라도 바닥에 부딪힐까 염려가 되었다. 금방 일어난 선재가 준희와 아이가 있는 쪽으로 가서 고개를 저었다.
“동생 다칠 수 있으니까 바닥에서만 놀면 안 될까?”
“다쳐요?”
“응, 동생 몸이 많이 약해.”
“그럼 뭘 하지….”
아기가 뭘 좋아해요? 하고 금방 묻는 꼬마도 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착한 마음이 느껴져 선재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준희 뭐 하고 싶어. 형아랑 계속 놀래?”
“네에… 주니 불 보러.”
오는 길에 놓여 있던 돌다리 조명을 말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앞에 서 있던 꼬마에게 시선을 보냈다. 저거 보여주면 되겠다. 근처에 있던 조명도 예뻐 그걸 가리켰더니 꼬마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고 준희를 데려갔다.
“안 앉을 거냐.”
범진이 뒤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채였다. 뭘 사러 갔다가 마땅한 걸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원래 술 안 파냐, 하고 묻는 말엔 거기서 행패나 안 부렸을지가 걱정되었다. 선재는 보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미안해했다.
“…아기 좀 보고.”
“미저리도 아니고 씹.”
“뭐?”
또 순식간이었다. 선재는 제 목을 압박하듯 두르는 범진의 팔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힘을 쓰고 있단 것도 모르는지 범진은 즐겁기만 한 얼굴이었다. 선재가 그 얼굴을 아래서 올려다보며 고개를 양옆으로 계속 저었다.
“아, 그만해.”
“키스나 함 갈기까.”
점점 떨어지는 팔에서 범진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미쳤다고 여기서 할까 싶었다.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봤다. 진심인가? 집요한 눈을 보자 그냥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 지나다니는 곳에서 뭘 하자고? 갑자기 섬뜩해진 기분에, 선재의 입이 급히 열렸다.
“여기서 뭘 해.”
“뭐가. 하면 그만이지.”
“아니, 아니. 그럼 저기…. 저기 가서.”
선재로선 최소의 조건을 말한 것이었다. 공원 조명 아래서 키스를 하는 것보단 구석에 있는 벤치에서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건 같았다. 안 할 인간도 아니니 그나마. 그나마 눈에 안 띌 장소를 급히 물색해야 했다. 준희 쪽을 한 번 쳐다본 선재가 범진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선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저기서 하고 싶냐?”
“….”
“하고 싶냐고.”
범진은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빨리 끝내고 준희나 봐야지, 이게 무슨….
아이는 다행히 형과 잘 놀고 있는 것 같았다. 뒤로 반쯤 꺾여있던 선재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 저기서 할래.”
선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범진도 만족한 얼굴을 했다. 얄궂은 걸 요구한 건 본인이면서 마지막엔 꼭 그걸 기꺼이 임해준단 식으로 굴었다. 코로 긴 숨을 흘려보낸 선재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구석진 벤치로 옮기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울며 겨자 먹기지만 어쩔 수가 있나? 워낙 제멋대로니 다른 방도도 없다.
결국, 벤치에 앉자마자 입을 맞췄다. 뒤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나무 때문에 상체나 얼굴 쪽은 가려지는 것 같았다. 선재는 유독 츄웁, 하는 소리가 나는 범진의 입놀림 때문에 목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혀가 안쪽으로 들어와 입 안 살을 다 후비고, 입천장과 치아 하나하나를 다 건드렸다. 마지막엔 입술까지 무는 시늉을 해 약간의 통증까지 있었다. 최소한 2분은 그러고 있었던 듯하다. 입이 떨어지자마자 선재는 손등으로 입가를 벅벅 비볐다.
“좋았냐?”
“….”
“이게 대답 또 안 하지.”
그런 말과 함께 입술이 또 부딪쳐왔다. 선재는 뒤로 피하려다 뒷머리까지 범진의 손에 꽉 잡히고 말았다. 범진의 혀엔 작은 심장이 하나 달린 것 같았다. 뭐가 툭툭, 하고 움직이는 듯해 입 안에 들어오면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밀고 들어오는 키스였기에, 선재는 범진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제가 미끄러지고 말 자세였다. 이 정도면 어두워도 어느 정도 보이겠는데…. 츄웁, 하고 끈적하게 입술을 잡아당기니 곤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침에 선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너무 강제로 하고, 말도 안 되는 걸 우기고, 멋대로만 하는데.
기분이 분명 나쁜데.
범진을 향한 부끄러움도 동시에 들고 있었다. 부끄러움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너무 초조해선가. 사람들이 볼지도 모르니 말이다. 선재는 두 혀가 얽히는 동안 거기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저분한 소리는 오직 범진과 제 귀에만 들리고 있었다. 다시금 길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축축이 젖은 듯한 소리가 그 사이로 샜다. 선재는 낯이 뜨거워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부터 숙였다. 어둡고,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곳이긴 했지만 아무도 안 봤다는 보장은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과 입가를 닦아낸 선재가 몸을 일으켰다.
준희가 놀고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아….”
“으응. 준희 재밌어?”
“네에에….”
아이는 다양하게 바뀌는 바닥 조명에 조막만 한 손을 대보고 있었다. 준희와 계속 놀아주었던 남자아이도 그 곁에서 손을 뻗어보고 있었다. 빛에 따라 피부색이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게 선재가 보아도 신기하긴 했다. 조명인데 레이저 불빛처럼 선명한 데가 있었다.
“준희 다리 안 아파요?”
“녜에에….”
“이제 집에 가야지….”
“녜에에….”
줄곧 쭈그리고 앉아있었을 텐데. 아이는 조명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겨 위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선재는 네에, 하는 대답만 하는 준희의 머리에 손을 가만히 대보았다. 보드랍고, 또 보드라운 머리. 범진만 없으면 그저 조용한 풍경인데… 순간을 지저분하게 만든 범진에겐 싫다는 감정밖에 들지 않았다. 왜 키스를 하자고 해서는.
“어?”
“…네?”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킨 건 어떤 중년의 여성이었다. 어디서 봤다 했는데 몇 초가 지나서야 분간을 할 수 있었다.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었다. 큰 컬로 말아 올린 머리 스타일이 인상적인 분이었다. 먼저 아는 체를 한 원장 선생님에게, 선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재 씨였어요?”
“네? 아, 네.”
“…아니… 나는 누가 이런 데서 그렇게 낯 뜨거운 짓을 하나 했네….”
“…네?”
“차암… 내가 부끄러워서… 그래도 선생님이….”
반은 혐오스럽고, 반은 실망했다는 얼굴이었다. 선재가 그 얼굴을 쳐다보며 영문을 파악하려고 했다.
…설마 범진과 그러고 있던 걸 원장님이 본 건가.
“애기도 있으신 분이… 차암….”
원장은 차암, 하고 말을 끌며 자신이 느꼈던 당혹감을 표현하려는 듯했다. 선재는 최대한 모르는 체를 하면서도 혹시 그 장면을 봤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오늘 근무한 바로는 시종 부드럽게만 말씀하시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거대한 벽을 사이에 두게 된 것 같았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들으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아, 선생님…. 오해가, 오해가 있으셨던 것….”
“…아우…. 내가 차암… 혈기가 왕성하신 것은 좋은데…. 선생님이면 최소한의 미풍양속은 지키셔야죠… 나는 이,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 그러니까… 그게, 저.”
“…내일부터 우리 어린이집은 안 나왔으면 해요.”
“네?”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아나요…. 그렇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선생님은 고용할 수가 없어요.”
“아, 저… 선생님.”
“그래도 다행이네요. 첫날에 이런…. 오늘은 수고 많았어요.”
말을 끝까지 해야 하는데. 선재는 휙 지나가 버리는 원장에게서 향수 향만 어렴풋이 맡을 뿐이었다. 준희는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불빛을 쳐다보고 있고…. 머리는 새하얘지고 있었다. 원장님에게 핑계를 대려고 해도 댈 핑계가 없다.
오해였다고 말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어쨌거나 키스를 한 건 맞으니까. 억지로 당했다거나 사고였다는 거짓말을 치기엔 누가 봐도 합의된 키스로 보였을 터였다. 실제로 모종의 합의가 있기도 했고.
선재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았다. 준희를 가운데 두고 좁은 반경 내에서 같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길가 저편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원장 선생님이 보였다.
범진은 벤치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 있었던 어두웠던 벤치는 아니고, 근처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였다. 뭐를 했냐, 어떻게 했냐, 그런 내용이라 선재가 알아들을 수 있는 통화내용은 아니었다. 봐봤자 소용이 없으니 선재의 시선이 금방 거두어졌다.
범진처럼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울렁거렸다. 저를 이렇게 만든 범진이 나쁘고 싫었다. 이런 장소에서 추하게 입이나 맞추는 괴짜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선재는 준희를 일으켰다.
“우리 아기… 집에 가자.”
“우응?”
선재가 두 손으로 작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준희는 갑자기 서게 되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준희 집에 가서 자야지. 선재는 준희의 귓가에 잠, 자야지, 하고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아이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돋았다.
“네에…. 주니 코오….”
“응. 손.”
선재는 준희의 손을 잡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범진이 공원에서 뭘 하든 상관할 생각이 없었다. 선재는 범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전화를 끊고 일어서려는 걸, 선재가 손짓하며 만류했다.
“됐….”
“뭐.”
“됐으니까… 따라오지 마.”
“뭐?”
“…너랑 그러고 있는 거 원장 선생님이 보셨어. 나 일해야 하는데, 네가 저기서….”
“헛소리한다.”
몸을 일으킨 범진이 그대로 선재의 입에 제 입을 맞췄다. 팔로 목이 감긴 채 입이 맞닿으니 말은커녕 잠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우읍, 읍, 하는 소리가 입 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밝은 데서 입을 맞추지 않으려고 구석에 숨어 들어가 키스를 했었는데. 결국은 놀이터 입구의 제일 밝은 구역에서도 입을 맞추고 있었다. 선재가 웁, 하고 밀어내던 손짓을 거두었다. 손에 닿은 아이의 손엔 진동을 주지 않아야 했다.
“….”
진득하니 붙었다 떨어진 입술에선 범진의 체취가 그대로 남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이가 한참 아래에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주변 사람들이 흘끗거리며 지나가고는 있었지만, 아이는 저와 범진이 무얼 하는지는 신경도 안 쓰고 주변을 가리키고 있기만 했다. 선재가 입가를 닦으며 범진을 노려보았다.
“이런 건 진짜 하지 마.”
올려다본 범진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혼자만 기분이 좋았다. 저런 얼굴이 되면 말이 통하지 않는 걸 선재가 제일 잘 알았다. 준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선재는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미끈한 어깨선이 한동안 오르락내리락했다.
“생각 좀 해보고.”
한 번 고개를 꺾은 범진이 선재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또 이러고 길을 나설 생각인가.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어쨌든 집에는 가야 하니 선택권이 없었다. 허리를 대놓고 조몰락대고 만지는 범진의 손길을, 선재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선재는 빛이 없는 구역을 빠르게 찾아보았다. 걸어야 한다면 그런 길이어야 했다.
“우응….”
몇 분 전까진 쌩쌩했는데, 졸음을 느끼는 듯한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선재가 범진의 팔에서 몸을 빼냈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어서 범진의 손이 다시 닿진 않았다. 준희는 눈을 끔벅끔벅 뜨고 있었다. 그 얼굴에 눈을 맞춘 선재가 두 팔로 준희를 들어 올렸다.
아이를 안았으니 다시 제 몸을 감싸오진 않을 것이다.
“…압쥐이… 주니….”
“아, 안 돼, 안 돼, 준희야.”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제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범진 쪽으로 두 팔을 뻗었다. 몸도 쑥 기울었다. 오늘 어린이집 놀이터에서 안겨봐서인지 손을 뻗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 품이 뭐가 편하다고. 얼결에 애를 받아든 범진의 얼굴이 묘했다. 졸지에 품이 빈 선재만 난감한 얼굴을 하게 되었다.
“…안 다치게… 안아.”
이미 안겨버렸으니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준희가 베개를 베듯 범진의 가슴팍에 뺨을 으응, 하고 맞대고 있었다. 어두운 길로 걸어가려 했는데 어느새 빛 속이었다. 준희의 편안한 얼굴이 너무도 잘 보였다. 선재는 준희를 쳐다보는 범진의 얼굴에도 시선을 던졌다. 기우였을까.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위험한 행동은 할 것 같지 않았다.
* * *
선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준희부터 씻겼다. 계속 졸았고, 차에선 깊은 잠에 빠져버렸으니 씻기는 것도 금방 해야 했다. 손과 발, 얼굴만 씻기려고 하는데도 준희의 고개가 자꾸 처지는 것이 보였다. 너무 많이 돌아다니긴 했다. 어린이집에서도 놀고, 저녁도 밖에서 먹은 데다 대공원까지 갔으니 아이 체력엔 많은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품에 안은 준희의 얼굴이 한밤중처럼 고요했다. 선재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얼굴은 물수건으로 닦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발에 수건을 맞대니 잠결에도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미안, 미안… 자자.”
“으은… 녜에….”
끄덕이는 고개가 선재의 가슴팍에 부드럽게 비벼졌다. 나풀거리는 머리칼도 물에 약간 젖어 있었다. 한 번 물을 댔다가 잠을 완전히 깨울 것 같아 관둔 흔적이었다. 새 수건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 선재가 아, 하고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물에 적셔야 하는 걸 깜빡했다.
“자아… 옳지….”
금방 물에 젖은 수건을 들고 와 아이의 얼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불을 끈 상태에서 옆에 있던 수면 등의 조도만 약간 올렸다. 뽀얀 얼굴이 엷은 빛 아래서도 충분히 드러났다. 선재는 그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수건을 제 팔에 한 번 대보았다. 적당한 온도라 잠든 아이를 깨울 것 같진 않았다.
네에, 꾸웅, 마아, 하고 잠꼬대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작은 얼굴로 수건을 가져간 선재의 손길이 섬세했다. 자그맣고 물렁한 귀엔 투명한 기운이 돈다. 그 귀까지 다 닦아준 선재가, 최대한 조심해서 일어났다. 방문을 닫을 때도 문고리를 천천히 끌어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만들었다. 후우. 문이 닫히고서야 입 안에 있던 숨이 흘러나왔다. 눈은 벽에 걸린 시계에 갔다. 원래라면 더 나중에 잠드는 아이지만,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
차악, 하는 소리에 선재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실벽에서 약간 떨어져 앉은 범진이 맥주캔을 따고 있었다. 대공원에서 출발했을 땐 범진이 집 앞까지만 가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차가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면서는 대충 이렇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재가 먼저 6층으로 올라갔고, 범진은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아이를 씻길 때만 해도 범진은 집에 없었다.
선재는 손에 들렸던 수건을 화장실 세면대에 던졌다. 세탁기를 돌릴 수 없는 시간이니, 저기에 두었다가 내일 처리할 생각이었다.
“자.”
“…나 술 안 먹어.”
공원에서도 했던 말이었다. 선재는 범진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담배든 술이든 해본 적은 있지만, 기억이 좋지 않았다. 기분 좋은 날에도 술을 입에 대기가 어려웠다. 1년에 한 번이나 먹을까. 준희를 낳고 난 후론 입에 대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눈을 치뜬 범진이, 손에 들린 맥주캔을 흔들었다.
“팔 아프다.”
“….”
말을 했는데도 범진은 캔을 거두긴커녕 가져가란 식으로 흔들어대기만 했다. 캔에선 한 번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맥주 일부가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다. 입구가 하얀 거품으로 부글거리는 게 보였다.
범진이 포기하지 않을 걸 안다. 선재는 못 마신단 말을 또 꺼내지는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뭘 하든 소용없는 몸부림일 것이다. 걸음을 옮긴 선재가 범진과 거리를 두고 바닥에 앉았다. 무릎을 꿇은 채 범진의 손에서 흔들리던 맥주캔을 건네 들었다.
거품이 금세 사그라져, 노란 물로만 캔 윗면이 찰박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술을 마시나 싶어 선재의 눈이 바닥으로 향했다. 바닥엔 조금 쏟아진 맥주뿐이었다. 아몬드 같은 거라도 사 오지. 밥을 먹긴 했지만, 맨입에 술을 입에 대기가 꺼려졌다. 범진은 이미 꿀떡이며 맥주를 삼키고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엉뚱한 말만 들을 뿐이다. 캔을 입술로 가져간 선재가 입 안으로 내용물을 조금 흘려보냈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거지만 여전히 맛이 없었다.
선재는 꿇고 있던 다리에 힘을 풀었다. 범진이 불편해서 꿇어앉은 건데 모양새가 이상했다.
“….”
“가까이 좀 와라.”
“왜… 나도 자러,”
“니가 애냐…. 지금 자게.”
“…어린이집.”
선재는 아차 했다. 공원에서 일자리를 잃었던 게, 말을 하고 나서 생각이 났다. 어린이집, 까지 들은 범진이 코웃음을 쳤다.
“짤려 놓고 어딜 가겠다고.”
실은 아까부터 기막힌 우연에 의심이 들던 참이었다. 범진과 대공원을 간 것도 갑작스러웠고, 원장님과 마주친 건 여태도 진짜 있었던 일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필 거기서 마주칠 게 뭐란 말인가?
“네가 따로… 어떻게, 했어?”
“따로 뭐.”
“우리 원장 선생님 만나서.”
“하아, 내가 시간이 남아도냐?”
선재는 짜증 섞인 소리를 뱉은 범진을 쳐다보다 고개를 위쪽으로 들었다. 원래라면 이즈음에, 범진은 밖에서 전화를 해오거나 한다. 집에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범진이긴 하지만 언제 일을 하는지는 빤하게 알았다.
“…낮에는 그럼.”
“일하다가 시간 남아서 니 보러 간 건데. 왜.”
남는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가, 일하다가 시간 남아서 자길 보러 왔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선재는 무슨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몰랐다. 더군다나 낮에는 일하지 않던 범진이었는데, 오늘은 낮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떠오른 건축 현장. 막연히 땅과 건물에 관련된 수상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낮에, 사람들이 현장에서 할 법한 일이 떠올랐다. 막노동도 하는 것일까.
“너 뭐 하는데…? 막노동 같은 거 해?”
어쨌든 범진이 번 돈으로 생활을 하고 살아간다. 밤에 나가 의뭉스러운 일을 하고 돌아올 때는 묻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지만, 낮에 일을 하는 범진에게는 제가 아는 선에서 질문을 던져볼 만도 했다. 선재는 본의 아니게 순진한 말을 뱉어놓고 그걸 쓸어 담을 생각도 못 했다. 나름대로 진지했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들은 범진만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니는 진짜… 나이 어디로 처먹었냐.”
“….”
“어? 보자. 얼굴로는 안 처먹은 것 같은데.”
갑자기 거리를 좁힌 범진 때문에 선재의 몸이 뒤쪽으로 빠졌다. 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뺀 터라, 다리만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남았다. 범진이 그 다리 앞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얼굴 볼라고 왔드만.”
“….”
“다른 거 보여주게?”
“아니….”
선재가 몸을 똑바로 했다. 뒤로 뺐던 몸을 앞으로 당겼을 뿐인데 범진의 얼굴과 틈 없이 맞닿게 되었다. 갑자기 맥주를 들이켜선지 범진에게선 맥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담배향과 체향도 서서히 느껴졌다.
한참 얼굴만 쳐다보던 범진은 갑자기 손을 올리고 선재의 뒷목을 낚아챘다. 얼굴을 앞으로 당겨 입을 맞췄다.
혀가 선재의 입 안을 요란하게 들쑤셨다. 갑자기 들이친 혀에 눈을 반사적으로 감은 선재가 손으로 범진의 어깨를 밀어냈다.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선재는 굵은 물고기를 통으로 한 마리 삼킨 것 같아 버겁다는 생각만 했다. 다짜고짜 혀뿌리까지 집어넣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 딱 그러고 있었다. 목젖과 연한 살에 닿는 혀가 뒤로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웁, 우우.”
손으로 몇 번이나 어깨를 치고서야 얼굴을 뒤로 뺄 수 있었다. 하아, 하고 숨을 내쉰 선재가 팔목으로 입 근처를 닦았다. 온갖 냄새까지 입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라 입 근처가 벌게지도록 손으로 문질러댔다.
“…왜 이렇게, 아프게,”
숨을 고르며 말을 하니 호흡이 뚝뚝 끊겼다. 헐떡이는 선재의 얼굴이 붉었다. 오늘 내내 얼굴이 붉었고 나중엔 열꽃 비슷한 것까지 피었지만 대공원을 산책하며 그 기운은 조금 사그라졌었다. 지금은 온전히 키스로만 얼굴이 붉은 것이었다. 선재도 그걸 아니 고개를 내린 채 불평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범진이 그런 선재를 쳐다보고 있다 선재의 바지 안으로 손을 쑥 넣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범진의 행동을 주시하지 못했다. 차마 피할 수도 없었던 탓에 손이 이미 엉덩이골에 가 있었다. 그리곤 쭉 내려왔다. 하지 마. 고개를 들고 범진을 쳐다봐도 돌아오는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허리를 꼬며 손길을 피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내 손을 거둔 범진이 그 손에 험한 시선을 보냈다. 대충 봐도 반짝거리고 있어, 선재의 눈이 힘없이 떨어졌다.
“니도 젖었네.”
일부러 손톱부터 손끝까지 세심히 살피는 듯했다. 놀리듯 말하지만, 웃음기는 싹 거두어진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흘깃거린 선재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범진과 섹스를 많이 했다 해도, 저런 말은 참을 수 없는 데가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야… 우리 언제 했냐.”
“…몰라.”
“옷 좀 벗기게 와봐라.”
“….”
자꾸 몸을 피하는 걸 범진도 알아차린 모양이다. 선재는 하릴없이 맥주캔에 손을 댔는데, 그걸 옆으로 옮기고 나니 더는 할 게 없었다. 범진의 손이 윗옷에 닿아 눈만 꾹 감았다. 천이 얼굴을 쓸고 지나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드러난 가슴에 어깨가 안으로 모였다. 범진의 눈도 그쪽을 향해, 선재는 자세까지 슬쩍 틀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유두의 색이 평소보다 훨씬 붉었다.
그 부끄러움과 상관없이 범진의 손이 가슴에 닿았다.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아니, 젖꼭지에 닿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선재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하지 마, 아프니까.”
“그럼 살살해주까.”
범진은 일부러 물었다. 입꼬리 한쪽을 올린 채 선재의 턱을 위로 들었다.
“…으응….”
“니가 말을 해야지, 그럼.”
“…사… 살살.”
“뭐.”
“…만지라고.”
알겠다… 하고 대답한 범진의 음성이 낮았다. 선재는 이러나저러나 좋지 않았다. 세게 만지면 아프고, 부드럽게 만지면 기분이 이상했다. 나중엔 세게 만져도 기분이 정상적이지 않을 걸 아니 괜한 말을 한 건가 싶기도 했다. 원래 자극을 많이 받은 유두라, 범진의 투박한 손길에도 돌기가 금방 툭 솟았다. 선재는 애써 모른 척을 했다. 빳빳하게 선 젖꼭지를 능숙하게 건드는 범진의 손길이 지독했다. 고개를 돌린 채 입술을 짓씹고 있던 선재의 얼굴에 떨림이 일었다.
“그, 그만… 그만…. 내가 해줄게.”
그렇게 말하자, 범진은 바지부터 내렸다. 곧 드러난 성기가 퉁겨지듯 허공으로 솟았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어도 형체를 대충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언제부터 발기를 한 건지 검붉게 몰린 피가 비속했다. 선재는 위아래로 꺼덕이는 성기에 자꾸 눈을 피했다.
입으로 해봤자 시간만 낭비될 것이다.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아도 이쯤 되면 늘 어떻게든 해치워 버리자는 결정이 섰다. 망설이면서도, 선재가 손으로 제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성기가 엷은 붉은 빛으로, 그 모양을 조금 드러내고 있었다. 선재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벅지 근처로 갔다.
범진은 그런 선재를 대놓고 쳐다보고 훑었다. 깨끗하고 예쁜 얼굴 아래에 저와 비슷한 걸 달고 있는 게 범진의 묘한 흥분을 일으켰다. 생김이나 흉측한 정도야 차원이 다르지만 어쨌든 매끈매끈한 몸에서 불거진 유일한 것이다. 배에 있던 흉터에도 시선을 보내던 범진이, 바지를 옆으로 치우느라 푹 숙여있던 선재의 고개를 가차 없이 위로 들었다.
“….”
“엎드릴래?”
“뭐가….”
“니 엎드리고 싶냐고.”
“….”
선재의 눈썹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체위를 정하라고는 말한 적이 없는 범진이라, 그 말이 불쾌하게 와닿았다. 뭐든 하기 싫어서 뭘 하든 똑같다. 미간이 꿈틀거리는 것까지 가만 내려다보던 범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엎드리든가.”
“….”
꼭 말을 이렇게 해서 제가 엎드리고 싶었던 것처럼 만든다.
선재는 감정에 일렁이는 눈을 하고 범진을 노려보듯 올려다보면서도, 천천히 몸을 뒤쪽으로 돌렸다. 바꿔 말하면 범진이 하고 싶은 자세라는 뜻도 된다. 어차피 들어줘야 할 걸 아니까, 선재는 약한 항변도 하지 않았다.
맨바닥에 앉아있는 걸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애액이 계속 나와 바닥을 적시는 느낌도 좋지 않았다. 바닥에 두 손을 댄 선재가 엉덩이를 위로 조금 들었다. 슬쩍 들린 엉덩이에 선선한 바람이 닿아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긴장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옆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범진이 성기를 위아래로 크게 움직여대며 선재의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곧 미끈거리는 입구 근처를 비벼오는데, 무슨 돌덩이 같이 느껴졌다. 선재는 딱딱한 살덩이가 뒤를 문지르자 구멍 새로 더 많은 애액을 흘렸다. 성기가 우악스레 비벼지면서 구멍이 슬쩍 열릴 때마다 안에 갇혀있던 체액이 멋대로 샜다. 선재가 양 입을 꽉 다물었다. 삽입을 하는 것보다 이러고 있는 게 조금 더 싫었다. 느리게 숨을 쉬는데도 가슴팍엔 진동이 일었다. 후으으… 하고 숨만 쉬었는데도 떨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으….”
엉덩잇살이 벌어지기가 무섭게, 범진은 성기를 구멍 안으로 삽입했다. 퍽, 하고 앞으로 밀린 선재가 표정을 찌푸렸다. 뺨이 금방 불룩하게 솟았다.
“아, 아윽….”
갑자기 삽입돼 아팠다. 애액이 충분히 나오곤 있지만, 선재의 구멍과 길은 오메가치고는 쉽게 문이 열리는 편이 아니었다. 사방이 접힌 내벽이 애액에 조금씩 열리고 있었지만, 원체 틈이 좁았다. 하나둘 펼쳐지는 주름도 한계가 있었다. 범진이 손으로 선재의 한쪽 엉덩이를 옆으로 당겨, 구멍에 반쯤 씹힌 자지를 슬그머니 쳐다봤다.
엉덩이가 벌어지는 느낌에 거부감을 가진 선재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보지 마. 하지… 마, 그만… 그냥, 해….”
“그냥 하라고?”
말엔 의도가 가득했다. 뜻을 파악하려던 선재가 갑자기 확 들어오는 성기에 한쪽 발바닥을 위로 들었다.
“아으, 그러… 아프… 아파….”
“그냥 하라면서.”
어? 하고 허리를 민 범진이 선재의 가슴 쪽으로 손을 보냈다. 입으로는 싫다고 하는데 젖꼭지를 어느 정도 만져주면 구멍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걸 범진은 안다는 눈치다. 눈썹 한쪽을 세운 범진이 선재의 등 선을 느긋하게 훑었다. 손으로 톡 솟은 젖꼭지를 살살 돌려주자, 선재는 눈에 띄게 엉덩이를 떨었다. 성기를 감싼 내벽도 불에 달군 것처럼 천천히 녹아들기 시작했다. 쩌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붙어대는 점막에, 범진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으…으….”
“후으.”
속도는 조금씩 붙었다. 범진이 허리를 뒤로 뺐다 부딪혀올 때마다 바닥 위에 놓인 선재의 잘은 손등뼈가 윤곽을 드러냈다. 지탱을 하려니 손에도 힘이 많이 들어가고 있었다. 선재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는 중이었다. 방문을 닫긴 했지만, 소리를 최대한 죽여야 준희에게 이런 소리가 안 닿을 듯했다.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를 위로 든 채 느긋하게 박아댔다. 허리를 밀면 주름이 자지와 함께 내벽 안으로 들어가고, 허리를 뒤로 빼면 자지를 물고 놔주지 않는 구멍이 인상적이었다. 퍽, 퍽, 하고 치던 범진이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무르으… 읖…하으, 흑… 무릎….”
자세 때문에 무릎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이 심했다. 범진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듯 성기를 박으니 쏠리는 하중이 엄청났다. 손목도 직각 이상으로 꺾여있어 무릎에도 그만한 힘이 전달됐다. 결국, 팍, 쏟아지듯 앞으로 고꾸라진 상체에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뺨이 바닥에 쓸리는 와중에도 추삽질 때문에 몸이 밀려났다.
“아…아…흐….”
“제대로… 엎드려라….”
“으…윽…읍….”
“…후으.”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팔꿈치가 범진의 손아귀에 잡혔다. 범진은 은근한 삽입을 이으며 선재의 팔을 위쪽으로 당기듯 끌었다. 결국, 억지로 상체가 들린 선재가 다른 한 손으로 겨우 바닥을 다시 짚었다. 여전히 밀고 들어오는 범진의 성기에 머리칼이 얼굴 앞으로 쏟아졌다. 퍽, 하고 앞으로 밀릴 때마다 찰랑거리는 옆머리칼이 눈가를 연속해서 찔렀다.
선재는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 닿았던 무릎에서도 둔탁한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벽과 몸속의 모든 막이 범진의 성기를 향해 달라붙고 밀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깊숙이 삽입을 했다가, 깊이를 조절해 중간까지 박힐 즘엔 제일 예민한 부위를 찔렀다. 유난히 얇고 약한 점막에서 찌걱이는 소리를 냈다. 범진의 투둑거리는 성기가 몸속을 지우듯 두드렸다. 그러다가도 퍽, 안쪽까지 삽입이 되면 아랫배 전체에서 통증이 일었다. 선재는 힘껏 눈을 감았다. 구멍과 내벽이 퉁퉁 부어가면서까지 범진의 성기를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응답하듯 깊은 지점까지 닿은 성기엔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선재의 손이 자연스레 배에 닿았다.
범진이 팔꿈치를 잡고 있긴 하지만 중심은 금방 무너졌다. 뒤로 꺾이듯 들린 팔꿈치만으론 제대로 버틸 수 없었다.
그때 범진의 손이 선재의 엉덩이를 밀어내듯 스쳤다. 반동으로 쭉 빠진 성기가 선재의 애액으로 전체가 번들댔다. 방금까지 성기를 잡고 있던 구멍이 채 닫히지도 못하고 아주 천천히 오므라들고 있었다. 꽉 조이듯 성기를 잡고 있던 탓에, 안쪽에 고였던 애액과 프리컴이 난잡하게 뒤섞인 채 구멍 밖으로 후두두 쏟아졌다. 안쪽 허벅지를 타고 질질 흐르는 느낌에, 선재의 엉덩이도 아래로 푹 내려갔다.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쳐다본 범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섹스는 충동에서 충동이었다. 섹스를 이루고 있는 게 충동뿐인 듯, 범진은 엉성하게 앉아있는 선재의 얼굴로 다가가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곤 혀를 꺼내 얼굴 여기저기에 댔다. 잔뜩 발개지고 축축해진 선재의 얼굴 곳곳에 굵은 혀가 닿았다. 범진은 눈을 빨고, 뺨을 깨물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침투성이가 된 얼굴. 선재는 제대로 눈을 뜨기도 힘들어했다. 귀까지 잘근거리며 씹힌 탓에 입에선 결국 흐느끼는 소리가 샜다.
“제대로 누워봐라.”
그렇게 말하며, 범진은 선재의 어깨를 바닥 쪽으로 천천히 밀었다. 서서히 눕혀지며 바닥에 시선을 보낸 선재가 훌쩍이면서도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똑바로 누웠다. 아랫배 아래에 위치한 성기가 반듯한 모양으로 솟아 있었다. 발그스름한 성기. 자세를 잡고 있던 선재의 의지와 무관하게, 범진의 손이 발기한 선재의 성기에 닿았다. 꾹 누르듯 잡아, 선재의 안쪽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좆 이거 언제봐도 뒤지네….”
“….”
두 손을 아래로 가져간 선재가 범진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다. 결국, 꿈쩍도 하지 않아 그대로 둬야 했지만, 성기를 만지는 것만으로는 더는 발기하지 않았다. 범진은 손으로 선재의 가슴을 쓰다듬듯이 만졌다. 꼬집듯 잡아당기자 선재가 머리를 뒤로 꺾었다. 범진의 팔뚝을 양손으로 잡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달궈져 있던 배가 한층 더 붉은 빛을 띠었다.
바닥은 이미 엉망이었다. 범진이 한 번 박은 구멍은 계속 작게나마 열려 있는 채였다. 투명하게 진득거리는 따스한 액이, 이미 식은 체액 위로 실처럼 이어져 떨어지고 있었다. 범진이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선재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범진은 이제 부근만 건드려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에 손을 가져갔다. 제가 쑤셨다는 게 명백한 구멍. 범진은 힘을 잃은 다리를 넓게 벌렸다. 뒤치기를 시킨 탓에 두 무릎이 새빨갛게 올라 있었다. 손으로 자지를 몇 번 비빈 뒤 샘처럼 젖은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이미 풀어지듯 오물거리고 있어 삽입하기는 쉬웠다. 순식간에 닿는 따듯한 내벽의 느낌에 범진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후우.
“으응…으….”
“…야.”
눈을 감고 있던 선재의 귓가에 탁, 하는 소리가 났다. 범진의 양손이 선재의 어깨 바로 위에 자리를 잡았다. 와중에도 성기는 느물거리며 삽입되는 중이었다. 가벼운 움직임이지만, 선재의 속눈썹은 티 나게 흔들렸다. 소리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겠으나 몸의 움직임까지는 제어할 수 없었다.
“…왜, 무… 뭐….”
찢어지듯 갈린 목소리가 선재의 입에서 겨우 새 나왔다. 범진이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뭉근한 삽입을 지속했다. 조금씩 밀리는 선재의 얼굴이 가감 없이 시야에 잡혔다. 예쁜 얼굴이 열에 떠, 온갖 체액을 묻히고 있었다. 범진이 제 입 안을 혀로 부풀리더니, 상체를 숙이고 선재의 입술을 찾았다. 달큰한 향기. 순순히 입을 벌린 선재의 입 안에 제 혀를 밀어 넣은 범진이 허리를 세게 썼다. 갑자기 콱 박히는 느낌에 선재의 입 안이 엷게 떨렸다. 그 움직임을 느낀 범진이 제 혀로 선재의 혀를 거칠게 옭았다. 그러면서 또 퍽, 허리를 치며 내벽을 사정없이 비볐다. 귀두 끝에 아슬하게 닿았다 스치는 안쪽의 돌기엔 엄청난 흥분감이 치솟았다. 오메가의 임신 기관이었다. 여기에 정액을 싸고 싶은 충동이 그동안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섹스할 때마다 그렇게 느꼈고, 웬만하면 쌌다. 범진은 입을 떼고 선재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이 금세 옆으로 돌았다.
“쳐다, 보라고…. 씨.”
범진이 선재의 턱을 정면으로 돌렸다. 아랫입술을 깨문 선재가 소리를 어떻게든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기집 입구까지 박히는 범진의 성기엔 당연히 눈가가 찌푸려졌다. 깊이도 들어온 성기를 느끼면 아랫배 전체가 울리곤 했다. 내벽을 거침없이 비비며 박혀 드는 범진의 성기에, 선재가 추삽질에 맞춰 얼굴을 위로 들었다.
“목에 팔 감아봐라….”
사정할 때가 거의 다 되었을까. 선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범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적당한 선에서 끝나겠다 싶어 손엔 힘까지 들어갔다.
“제대로 힘주고.”
선재는 풀어지는 성감 속에서도 정신을 차렸다. 소리를 안 내려고 이를 악문 상태였다. 힘을 주라는 말에 힘을 더 주고 목을 안긴 했지만,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 아…!”
갑자기 몸이 훅 들려, 선재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양쪽으로 벌어진 다리가 범진의 팔에 단단히 걸린 꼴이 되었다. 그대로 일어난 범진의 얼굴이 위쪽에 있었다. 선재는 대롱대롱 매달린 자세로 구멍을 꿰뚫려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틈에 퍽, 하고 들어온 성기엔 고개가 뒤로 꺾였다. 허리가 떨리고 목엔 핏대가 섰다.
“으흑… 내, 내려줘, 내려….”
“후으.”
“아, 아흑.”
장기가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범진의 성기는 더욱 치밀한 각도로 쑤셔졌다. 발등에 힘을 준 선재가 등을 떨며 범진의 목을 꼭 잡았다. 죽을 것 같았다. 놓칠 것 같았다. 풀어질 대로 풀어진 구멍만 범진의 침범을 쉽게 허락했다. 꽤 이완된 입구였지만 범진의 성기가 워낙 커 그 자세로도 빠지지 않았다. 연속으로 갖다 처박히기만 해 선재는 결국 성기 끝에 물을 맺었다. 맑은 정액이 힘없이 성기 밖으로 풀려 나왔다. 바짝 선 붉은 성기에선 그 밖에도 투명한 물이 질질 흘렀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배에 한 번 튀었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선재는 범진의 목을 끌어안고 도리질을 했다.
“…아, 아흑, 주, 주그, 죽을 것… 흑, 그만…. 나 화장시…흐윽.”
범진의 팔과 허릿심으로 엉덩이가 위에서 사정없이 들렸다 내리꽂히고 있었다. 쑥쑥 들어오는 범진의 성기가 쉬지도 않고 내벽을 찔렀다.
“아, 아! 나… 안, 화장실! 화!”
갑자기 들이치는 요의에 가까스로 범진과 눈을 맞췄다. 선재는 고개를 저으며 화장실, 화장실, 하고 울었다. 떨어질까 봐 범진의 목을 단단히 잡았지만, 엉덩이와 다리가 단단히 붙잡힌 채였다. 또 꽈악 자리를 잡는 성기의 움직임이 거셌다. 방광까지 자극하는 움직임을 버틸 순 없었다. 선재는 결국 범진의 목을 잡은 채 발가락을 완전히 오므라뜨리고 달달 떨었다. 성기에선 자극을 못 이긴 소변이 찔끔거리며 새 나왔다. 실처럼 남은 기분과 감각. 낭패감. 선재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범진의 움직임은 그래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으어…흑…! 엉…흐윽….”
선재를 가만 내려다보던 범진의 얼굴에 힘줄이 섰다. 울면서도, 잡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실린더 빗금이 차오르듯, 다리가 파닥거리며 경련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체액을 흘리는 육체. 언젠가 이 얼굴을 천사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여전히 그 생각은 유효했다. 안 그래도 발기해있던 제 좆이 터져나갈 듯 팽창했다.
어마무시한 속도가 붙었다. 배 속과 내벽의 점막이 이미 한 겹은 벗겨져 버린 듯했다. 반쯤 뒤집힌 눈을 한 선재가 겨우 침을 삼켰다. 팔에도 힘이 없어 한 손은 자꾸 미끄러졌다. 퍽, 퍽, 박히던 범진의 성기가 선재의 몸속에서 힘있게 정액을 배출했다.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사정된 정액에, 선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은자위가 눈꺼풀 뒤로 거의 넘어갈 즈음,
“흐으…흐윽….”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쑤욱 빠지는 성기는 거무튀튀하게 발기한 것이 여전히 기세가 좋았다. 벌어진 구멍에서 후두득, 뿌연 정액과 애액이 앞다투어 떨어졌다. 다리가 강제로 벌어진 채여서 균열은 더딘 속도로 메워졌다.
“흐윽… 흐으윽….”
어디든 기대고 싶었다. 온갖 것을 내보인 몸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누구든 끌어안고 싶었다. 선재는 제 자세가 얼마나 추할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범진의 목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여전히 방 안의 아이가 걱정이 돼 소리는 최대한 속으로 삼킨 채로. 나중엔 무엇 때문에 우는지도 몰랐다. 슬퍼서인지, 수치스러워서인지, 힘들어서인지. 복잡한 머릿속에 물이 가득 차버린 것 같았다. 흐윽… 흑… 울음이 그칠 때까지 범진의 살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밉고 싫은 사람 품에 안겨, 마음에 이는 불을 꺼트렸다.
그 사람이 지른 불을, 그 사람의 품에서 어떻게든 꺼트리려 하였다.
* * *
우음…먀아….
어디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꿈인 줄 알았는데 준희의 목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이른 시각도 아니었다. 9시가 좀 넘었으니 아이는 한 시간 정도 일찍 깼을지도 몰랐다. 주변을 둘러본 선재가 발가벗은 범진의 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얇은 이불 하나를 범진의 몸에 덮어 주었다.
“….”
천 위로 솟은 중심부는 어떻게 할 수 없나 보았다.
삐익삐익, 하는 아이의 소리에 선재가 급하게 문고리를 돌렸다. 푹신한 침대 위에 앉아있던 준희와 단숨에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가리키고 있던 건 협탁 위에서 흔들리고 있던 휴대폰이었다. 밤에 휴대폰을 저곳에 둔 뒤 따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원장님일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최근 들어 이상한 곳에서 전화가 많이 오곤 했다. 대출, 카드, 장난 전화… 작은 기대감을 품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진짜 그걸로 끝이었을까. 졸지에 아이도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당장엔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이라도 알아봐야 한다.
“아암.”
“…준희 잘 잤어?”
“녜에….”
“나쁜 꿈 안 꿨고?”
“네에… 주니… 칭구들이랑….”
“오늘은 안 가도 되는데 어쩌지.”
“…주니 칭구들….”
“응, 준희 오늘은 친구들 못 보겠다.”
“응, 네에.”
응, 하는 대답을 따라 하고 제 대답을 덧붙인다. 이런 식으로 말이나 억양을 따라 할 때가 있다. 선재가 제일 많이 하는 배고파? 괜찮아? 하는 물음을 따라 할 땐 발음도 자연스러운 편이었다.
“얼굴 안 아파요?”
“녜에, 주니… 어얼굴… 압파.”
아프다는 건지, 안 아프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기엔 얼굴 피부가 조금 벗겨진 데가 있었다. 손을 뻗어 준희의 뺨을 만져본 선재가 침대에 놓여 있던 로션통을 거꾸로 기울였다. 그리곤 손에 짜낸 로션을 아이의 뺨에 넓게 펼쳐 발라주었다. 손끝에 닿은 살결이 보드랍게 일렁였다.
“준희 추워?”
방과 거실엔 시스템 에어컨이 설치돼 있었다. 뺨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느낌에 선재는 입을 열었다. 실내온도를 설정해두면 자동으로 켜졌다가 꺼지길 반복하지만, 혹시 몰랐다.
“우으응….”
도리도리. 준희는 고갯짓을 한 뒤 곧장 눈을 감았다. 로션을 바른다고 알아서 눈을 꾹 감는 모습이 귀여웠다. 선재는 미소 띤 얼굴이 된 채 준희의 얼굴을 조심해서 만졌다. 무향 로션 사이로, 아이 피부에서 나는 특유의 살내음이 은은히 올라오고 있었다.
“아기 아침 뭐 먹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준희가 금세 반응을 했다. 네, 하고 대답했다가 준희 아침… 하고 같이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 선재의 웃음을 유발했다. 푸으… 하고 웃음이 터졌던 선재는 결국 준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이불 속으로 같이 들어가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많이 잤을 텐데도, 아이는 누운 자세가 되니 금방 눈을 느리게 떴다.
달칵, 선재의 눈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최소한의 자각은 있는지 드로어즈는 걸친 범진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들어갔냐.”
“…방금….”
“입만 열면 구라네.”
“거짓말 아닌데.”
선재가 몸을 일으켰다. 거울로 깨끗한 얼굴이 비치는 게 보였다. 어제 계속 빨갰는데. 오늘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페로몬 때문인가. 강원도에서 병원을 찾았을 때도 초기 증상은 이것과 비슷했다. 햇빛 알레르기가 도졌다고 생각했지만, 범진과 시간을 보내며 증상이 사라졌다. 햇빛이 아니라 범진의 알파 페로몬 때문인 것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강원도에선 범진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몸에 이상이 생겼고, 지금은 범진과 떨어져 있었던 탓에 몸이 이상해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말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왠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준희 좀만 기다려.”
“녜에… 아부, 아부지 주니….”
“안 돼…. 밥 먹어야지.”
범진에게 향해진 말인데, 선재는 제가 들은 체를 했다.
“왜. 밥 먹기 전엔 낸테 앵기면 안 되냐.”
껄렁하게 다가온 범진은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준희가 또 안아달라고 할 것 같았다. 선재는 옆에 있던 수건을 범진의 어깨에 휙 둘렀다. 까만 문신이 대충은 가려졌다.
“옷 좀 입지….”
탄탄하고 큼지막한 근육이 온몸에 가득했다. 문신이라도 수건으로 가려야 위화감이 덜 할 것 같았다. 바지를 입힐 수는 없으니까 반사적으로 수건을 두른 것이었다. 범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선재를 쳐다봤다. 일어서서 눈을 피하는 모습이 선재다웠다. 씨… 하고 입을 연 범진이 선재의 이마에 제 이마를 꾹 갖다 댔다. 선재는 머리가 밀리자 하지 마… 하고 중얼거렸다.
* * *
오피스텔 건물과 연결된 소규모 복합몰엔 아침에도 오픈을 하는 식당이 많았다.
짜장,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준희가 오픈도 안 한 중국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쇼케이스 안엔 요리 모형들이 가득했다. 비스듬히 누운 접시 하나를 가리키고 짜장, 짜장, 하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마땅히 살 게 없다고 생각해 마트만 갔었는데, 이렇게 식당이 많을 줄은 몰랐다. 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뗐다.
“응, 자장면. 준희 어린이집에서 먹었지.”
“네에.”
“먹고 싶어?”
“네에. 주니 짜장.”
“그럼 나중에, 낮에 먹자. 지금은 문을 안 열었으니까.”
“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음식점을 가리키는 아이의 행동에 눈길이 간다. 딱히 먹고 싶어서가 아님은 선재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반응을 해줘야 정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번엔 우동집 앞에서였다. 선재가 웃는 얼굴로 준희의 손짓에 맞장구를 쳤다.
“이거는 준희 먹은 적 없는데.”
“으응… 주니가 업써?”
“응, 준희 먹은 적 없는 거야. 다음에 아빠가 사줄게.”
“녜에… 빠아도 주니가.”
이번 아빠, 하는 소리는 제게 닿아서 다행이다. 아니다. 범진은 주로 아부지라고 불리나. 잠깐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원래는 호칭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닌데 범진 때문에 아빠, 아빠, 하면 누구에게 향해진지를 먼저 살피게 되었다. 그 호칭만은 범진에게 제발 안 했으면 했다. 이미 아부지가 입에 익어 상황이 별로인 것 똑같지만…. 저는 원래 아이가 선재야, 하고 부르는 것만 아니면 다 괜찮지 싶은 사람이었는데. 괜히 아빠 소리에 집착하게 되었다. 뒤이어 선재야, 부르는 준희를 상상해본 선재가 혼자 픽 웃었다.
“야.”
범진이 가리킨 곳은 한정식집이었다. 유리에 크게 붙은 홍보물엔 정갈한 상차림 사진이 프린팅되어 있었다. 턱으로 입구 쪽을 가리킨 범진에게, 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희의 작은 손을 끌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테이블엔 많은 찬이 놓였다. 뜨거운 음식이 들어올 때마다, 선재는 준희의 두 팔을 뒤쪽으로 안듯이 끌었다. 준희는 그때마다 신기한 걸 봤다는 얼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구운 고등어 접시는 카운터에 있던 주인이 서빙을 했다.
“아유, 애기 이쁘네.”
저를 향해진 눈빛에, 준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에.”
“어이구? 너 이쁜 거 알아?”
“…네에.”
준희는 자꾸만 네, 하고 대답했다. 선재는 뜻도 모르고 낯선 어른의 말엔 무조건 네, 라고 대답하는 준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감사합니다… 해야지.”
“강사함니다….”
감사하단 말을 할 땐, 무조건 배에 두 손을 갖다 대야 하는 줄 안다. 선재는 배꼽 언저리에 작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준희의 모습을 웃으며 쳐다봤다. 테이블엔 따뜻한 김이 가득했다.
“아유, 이뻐라.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선재도 고개를 숙였다. 맞은편에 앉은 범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주머니도 눈치란 게 있어 범진에겐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얼굴에 자리 잡은 커다란 흉터를 한 번 쳐다보고 말았을 뿐이다. 선재가 그런 범진의 얼굴을 한 번 훑고 준희에게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준희, 아빠가 생선 발라서 줄게.”
“네에에.”
“야, 준희야.”
우응, 하고 고개를 든 아이의 눈이 범진에게 닿았다. 선재는 범진의 말을 무시하고 앞쪽에 있던 생선살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라고?”
갑자기 제가 누군지를 묻는 범진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주니 아부지…!”
“그래.”
“….”
선재는 말없이 생선살만 발랐다. 아이의 밥에 찻물을 붓고 천천히 저었다. 적당한 온도가 된 밥을 준희의 앞쪽에 내밀었다. 발랐던 생선살을 작은 접시에 따로 담고, 물김치 몇 점도 떠 담았다.
“준희 밥 먹자.”
“애비가 새끼랑 소통하는 데 방해하냐.”
“….”
선재의 미간이 흔들렸다. 새끼, 애비, 같은 말은 범진에겐 별말이 아니겠지만. 준희에겐 자극적인 말이 분명했다. 이전엔 말을 따라 하지 않았으니 괜찮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앞에 있던 찻물을 제 밥에도 조금 부은 선재가, 망설이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자식한테 그렇게 말 안 해.”
몇 초간의 정적. 그래서 너는 진짜 아버지가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맥락에서 말을 한 건데 해석하기에 따라 뜻이 다를 것 같았다. 숟가락으로 밥을 휘휘 젓던 선재가 움직임을 멈추고 범진을 바라봤다. 범진은 마음이 훤히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음흉하기도 해서, 선재는 고개를 곧장 숙였다. 밥이나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인정하냐, 이제?”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
선재는 상황을 이렇게 만든 범진이 참 막무가내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멋대로지만, 결국 또 셋이 앉아 밥을 먹게 되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선재는 말을 끝까지 맺지 않았다. 어차피 속을 뒤집는 말만 제게 돌아올 게 뻔했다.
“….”
곧 식사를 시작한 범진이지만, 눈은 선재에게 줄곧 가 있었다.
뭘 먹다가도 빤히 바라보고, 먹지 않으면 대놓고 쳐다보는 눈길이 선재도 부담스러웠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거리가 가까우니 모를 수 없었다. 고개를 앞으로 내밀면서까지 쳐다보자, 선재는 결국 얼굴을 들어 범진의 눈과 눈을 맞췄다.
“밥 안 먹어?”
“먹고 있다.”
“….”
먹고 있다고 하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선재는 눈만 한 번 감았다 뜬 뒤, 제 식사에나 열중하기로 했다. 시선은 어떻게든 참으면 되겠지. 으응,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준희가 앞에 놓인 연두부에 어색하게 숟가락을 대고 있었다. 잘 맞게 잘라줬는데 워낙 부드러운 두부라 숟가락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준희 이거… 이렇게….”
아이는 숟가락으로 떠준 두부를 금세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거리며 잘도 먹었다.
지잉, 흔들리는 테이블에 선재의 시선이 옆으로 갔다. 테이블 구석에 놓아둔 휴대폰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또 어디서… 엄한 곳에 신상정보가 넘어갔는지, 국외에서도 문자가 마구 날아오곤 했다. 돈 빌려주겠다는 전화도 몇 통이나 받았는지 모른다. 선재는 화면을 확인한 뒤,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밝았던 화면이 곧 검게 변했다.
“누구냐.”
“몰라.”
“줘봐라.”
“….”
선재는 옆쪽에 놓였던 휴대폰을 범진에게 건넸다. 보호할 사생활 같은 것도 없으니 잠가놓지도 않았다. 그건 범진과 떨어지고도 똑같았다. 그냥 손으로 한 번 툭 치면 메인화면으로 전환이 되는 핸드폰. 범진도 익숙하게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었다.
“…어쭈? 이게?”
“…왜?”
“최범진?”
“….”
무슨 말을 하는지 대번에 알았다. 선재는 왜? 하고 물었다 금세 납득한 표정을 했다. ‘주인님’으로 저장해두었던 번호를 ‘최범진’으로 바꾸어 놓았던 게 기억이 났다. 범진에게 일을 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였던 것 같다. 어렴풋이 스치는 기억에, 선재의 표정이 굳었다. 어쨌든 범진이 해놓은 것을 제 임의대로 바꿨다. 놓아주겠다는 것 같아서.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라고 해서 그랬던 거긴 한데.
뭐라고 변명을 할까 하다가, 우스운 일 같아 하지 않았다.
“내가 최범진이냐?”
“….”
“간땡이 많이 커졌네, 이게.”
“…네가.”
“뭐.”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해서.”
선재는 입에 맴도는 아무 말이나 했다. 상관이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저도 제대로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한데, 그게 논리적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실은 굳이 저장 명을 바꿀 필요는 없었으니까. 저 또한 ‘최범진’으로 바꿔 놓으며 굳이 왜 이러고 있는지를 몰랐지 않았나.
무엇보다, 그때 무슨 기분을 느꼈는지를 설명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이러이러해서 그렇게 했다, 하는 간단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시비 걸듯 말해, 주변을 지나다니던 종업원들의 눈초리가 이쪽으로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선재는 한숨을 쉬며 범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위에 큰 조명이 하나 있어선지 저 고동색 눈이 쓸데없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이거 바꿨다간 봐라.”
범진이 휴대폰에다 뭘 썼다. 빠른 속도로 조작을 끝내, 뭐라고 쓰는지 가늠해보지도 못했다. 이거, 하는 범진에게서 제 휴대폰을 받아들자 흰 화면에 대놓고 쓰인 단어 하나가 보였다.
그걸 확인한 선재의 눈이 범진 쪽으로 향했다. 이런 건 하고 싶지 않은데….
“야, 아니다. 남편이 낫겠다.”
“….”
휴대폰엔 서방님이라는 글자가 입력되어 있었다. 주인님을 떼려다 남편과 서방님이 붙어 난감했다. 다시 휴대폰을 줘보라는 손짓에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서방이 더 좋냐?”
“….”
좋을 리가.
선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의자 위로 던지듯 뒀다. 등받이가 있는 쿠션형 좌석이라 어디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주니… 두부….”
“응…. 잠깐만.”
그 와중에, 범진과 간밤에 무엇을 했는지도 차례로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얼굴이 붉어질 게 뻔하다. 그래도 준희의 두부를 갈라 주고 있어 생각이 좀 분산되는 듯했다. 숟가락으로 두부를 조금 떠낸 선재가 아이 입에 작은 두부 조각을 넣어 주었다.
범진이 드나든 구멍엔 여전히 이물감이 들었다. 몇 번을 더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두 눈도 퉁퉁 부었을 것이고, 아랫배는 깨어났을 때부터 줄곧 아팠다. 무릎 양쪽엔 보기 싫게 멍까지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제 몸엔 입은 적 없던 잠옷이 입혀져 있었고, 범진은 알몸 상태였다.
남한텐 잠옷을 입혀 주면서, 저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게 이제야 어이가 없어졌다.
선재는 밥을 반 공기 정도만 비운 상태였다. 몸이 불편하니 밥에도 더는 손이 가지 않았다.
* * *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을 먹고 헤어진 범진과는 그날 저녁에 또 만났다.
범진이 대뜸 집으로 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선재는 그때서야 과도기니 뭐니 하는 생각을 접었다.
범진은 놔줄 생각도 없었다는 말을 자랑하듯 했다.
그리곤 제가 없는 동안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말을 했다. 일선이라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해석하면 그랬다. 내가, 덜 위험하게 할 거니까. 그런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범진은 혼자 화까지 냈다. 말 듣고 있냐고. 그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줘야 했다. 선재는 결국 내 말이 허풍 같냐는 범진의 말에 믿는다는 대답까지 했다. 그리곤 약속을 하고 서로의 소지를 걸었다.
약속하자고 내민 소지를, 선재는 욕인 줄 알고 처음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약속한다니까, 하는 말을 듣고서야 아, 하고 제 손가락을 범진의 손가락에 걸었다.
범진은 가끔씩 그렇게 안 어울리는 행동을 했다.
선재가 그때 생각을 하며 제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야망과 욕망으로 그득하던 범진의 눈이 자동으로 그려졌다. 구역 어쩌고, 하며 판을 크게 벌일 생각만 하던 범진이었는데. 선재는 저와 준희가 위험해진다는 이유로 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범진의 의도를 대충은 파악했다. 그런 게 고맙기는 했다. 놓아주는 게 가장 좋은 방안이긴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주는 게 좋았다.
범진은 낮에 나가 저녁에 들어올 때도 있고, 아예 이틀 정도 집을 비울 때도 있었다. 바쁠 땐 그렇게 했다. 건축 현장에서 사람 부리는 일을 한다고 했다. 니가 말하면 아냐고 해서, 선재도 말을 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이것저것 말해주는 심보가 이상했다. 선재는 터무니없이 어린 범진이 여전히 싫고, 이해가지 않았다. 저를 무시하면서도 품에 끌고 머리카락을 만지는 범진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마지막엔 확인하듯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한다.
예쁘단 말과 죽이겠단 말을 동시에 하는 사람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상식도 없는 남자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건?
선재는 아, 하고 화장실 수납장 맨 구석에 숨겨놓은 약을 한 알 꺼냈다. 왠지 싫어할 것 같다고 느껴 예전부터 쭉 숨겨서 먹고 있던 것이었다. 피임약 한 알을 입 안에 넣은 선재가 식탁에 따라 놓은 물로 그걸 삼켰다. 제가 열성이긴 하지만 임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도 열성인 경우 3, 4일에 한 번씩 약을 먹는 것으로 확률을 제로에 가깝게 만들 수 있었다.
비타민과 빵, 작은 냄비가 놓인 식탁. 범진이 까먹은 초콜릿 껍질도 널브러져 있었다. 그걸 구겨 휴지통에 버린 선재가 TV를 켰다.
일을 하지 않게 되어 낮엔 많이 무료했다. 준희가 깨어 있을 땐 아이와 산책이라도 갈 텐데. 요즘은 그걸 제가 더 바라게 된 것 같았다. 준희야, 산책 갈까? 물으면 아이는 고개를 저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제 눈을 살피며 압빠 산책 좋아? 하고 묻곤 했다. 선재는 준희가 남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했으면 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살피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먼저 해주지 않길 바랐다. 어떤 면에 있어선 제발 이기적이길 바랐다.
하지만 준희는 선재의 표정을 읽으면 말을 바꾸곤 했다.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으면서도 선재의 손을 현관 쪽으로 끌곤 했다.
그 마음이 예뻐서.
선재는 그것 때문에라도 위험한 일을 줄여준 범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어리고 약한 준희를 다시는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서 제 속을 뒤집어 놓긴 하지만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런 데선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범진도 무언갈 포기한 것이고, 그건 준희와 저 때문이다.
그것만은 잘 알고 있다.
* * *
“아, 좀만, 잠깐만. 아, 아흐.”
범진은 시도 때도 없이 집에 들렀다.
일터가 근처라 그런지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집에 불쑥 찾아오는 일이 잦았다.
주로 점심 시간대였다.
밥을 먹고 올 때도 있고, 같이 먹자고 밥을 아예 사 올 때도 있었다.
선재는 태백에서 이런 경험을 한 것 같아 기시감을 느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본 적은 없었다.
낮에 집에 들른 범진과는 거의 매번 섹스했다.
“아으, 으, 흐!”
“니 여 좋아하지.”
범진의 성기가 구멍을 드나들고 있었다. 밥맛이 돌아야 밥을 처먹지, 하고 들어왔던 범진은 자장면과 탕수육 세트를 시켰다. 시키는 동안에도 손으로 성기를 만지고 있어 보기가 좀 그랬었다.
바지 밖으로 홱 내민 성기는 거대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처음엔 빨기만 했는데 사정을 시키긴 역부족이었다.
결국, 선재도 범진의 애무를 당해내지 못하고 짧은 시간에 엉덩이 새가 질척해지고 말았다. 제가 제일 예민한 부위를 범진은 모두 알았다. 손가락 하나를 구멍에 넣고 어느 부근을 만지면, 허리가 떨리고 머리에도 하얀 금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영부영 같이 살게 된 후로, 범진은 거실에 킹사이즈 침대부터 들였다.
워낙 넓은 공간이라 커다란 침대가 들어와도 공간이 차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그 침대 위에서 지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범진을 끌어안고 있던 선재가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어서 행위가 끝나면 제가 어떻게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퍽, 퍽, 하고 가랑이 사이를 때리듯 박혀 드는 성기가 내벽 전체를 갈라대고 있었다.
“아, 아흑!”
범진은 선재의 얼굴을 보며 섹스하길 좋아했다. 물론 뒤에서 치는 것도 좋아하지만 얼굴을 아예 보지 않고 끝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몰래 해야 할 때나 뒤치기로 끝낼 때가 있었을 뿐이다. 물기 가득한 소리를 내며 구멍 안으로 쑤셔박히는 제 자지를, 범진은 마음에 들어 했다. 알파로 태어난 게 요즘처럼 만족스러울 때가 없었다. 선재를, 이 오메가를 박기 위해 태어난 몸인 게 섹스할 땐 더 극명히 감각되곤 한다.
“씨이팔.”
퍽, 하고 세게 박으며, 범진은 선재의 턱을 손으로 쥐었다.
다리가 풀린 듯 벌어진 선재는 얼굴도 잔뜩 풀어져 있었다. 구멍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잠깐 멈추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숨만 조용히 쉬는 선재의 얼굴을 보는 것도 썩 입맛에 맞았다.
깊숙이 꽂아 넣은 채로 선재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하자, 선재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니 뭐 하냐….”
“…아….”
“좆나게 하고 밥 먹어야지.”
“….”
기분 좋은 듯 씨발, 하고 읊조린 범진이 상체를 숙여 선재를 끌어안았다. 엉덩이가 위로 들릴 정도로 강한 삽입을 반복하자 선재의 가슴팍이 큰 폭으로 튀어 올랐다. 그 움직임을 제 거대한 몸으로 막은 범진이 허리를 거칠게 썼다. 찰박이는 소리가 얼마나 났을까. 범진은 선재의 내벽 깊은 곳에다 정액을 싸고, 한참이나 선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배불러서 어디 짱깨나 먹겠냐.”
범진이 그런 말을 하며 선재의 머리를 쓸었다.
“빼… 이제.”
“니 배불러서 짱깨나 먹겠냐고.”
실 웃으며 그런 말을 하던 범진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 안에 쌌다는 걸 꼭 저렇게 얘기하고 싶어 했다. 선재는 끝까지 다른 말을 하며, 범진의 성기가 구멍을 빠져나가자마자 다리를 모았다. 벌어진 구멍에서 뭐가 질질 새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표정을 굳혔다.
“이…. 씨발, 좆끄치 이쁜 거.”
옆으로 풀썩 다가온 범진이 그런 선재의 얼굴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아, 머리 아파.”
“아픔 하지 마까.”
범진이 선재의 눈을 위로 쭉 찢었다 아래로 내리며 얄밉게 시비를 걸었다.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그러자 선재가 범진의 손을 치우며 고개를 돌렸다.
“어이, 씨발.”
“….”
“고개는 돌리지 말라니까.”
“….”
“니는 교육이 안 되냐. 고개 돌리지 말라고 계속 얘기를 해도 그래 고개를 홱홱 돌려쌌냐.”
범진의 손에 턱이 잡힌 채, 선재는 다시 범진의 얼굴을 쳐다봐야 했다. 얼굴을 빼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에 매번 이렇게 반응하진 않지만, 대부분은 이랬다. 범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선재가 알았어, 대답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씻고 나오자 식탁엔 거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미 문밖에 도착해 있던 요리들이었다.
선재는 그때까지도 빨개진 얼굴을 하고 자장면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선지 특별한 음식이라도 먹는 것 같았다. 탕수육에 손을 대지 않자, 범진은 선재가 자장면만 먹는 내내 탕수육을 선재의 자장면 위에 올려줬다. 이거 먹어라, 했다. 소스도 가득 찍은 탕수육을 자장 위에 자꾸 올리니 맛이 변하는 게 당연했다. 그만해, 내가 먹을게. 결국, 그렇게 말한 선재를 범진이 웃기다는 듯 쳐다봤다. 입에 자장이 묻은 선재를 보겠다고 그 작은 턱을 1분에 한 번씩은 계속해서 위로 들었다.
* * *
“간다.”
“그래.”
많게는 하루에도 네 번 범진의 배웅을 해준다.
섹스를 하고, 밥을 먹은 뒤에도 한 번 더 범진의 성기를 빨아주어야 했다. 그것까지 하고 나자 남은 힘이 별로 없었다. 밥을 먹어 충전이 됐다 싶었는데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하고 나면 범진만 에너지가 넘쳤다. 오늘은 내가 니 때문에 산다, 하는 말까지 들었던가. 모르겠다. 선재는 아직 아이가 자는 걸 확인하고, 침대로 가 낮잠부터 청했다.
깨어난 시각은 3시였다.
밥도 안 먹고 낮잠을 잤던 아이라 점심시간이 터무니없이 늦어졌다.
20분만 자려고 했는데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나고 말았다.
머리를 짚으며 일어난 선재가 방문부터 급히 열어젖혔다.
“준희, 뭐 해?”
“주니… 있썼써요.”
다행히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듯한 눈이었다. 어제, 저녁을 먹고 늦게 들어온 탓에 아이도 피곤함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 다가가 준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선재가 배고프지, 하고 입을 열었다.
“네에…. 주니 바압.”
“응. 일어나자.”
얼굴까지 쓸어준 선재가 아이를 두 손으로 번쩍 일으켜주었다.
바닥에 놓아주자 아이는 비몽사몽이면서도 문 쪽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주니….”
“응, 준희.”
뒤따라서 방문을 빠져나오던 선재가 앞서가는 준희의 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주니 아부지….”
“….”
선재는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이는 거실에만 나오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범진을 찾곤 했다. 지금도 거실 침대가 비어 의문을 표하는 것이었다. 범진이 딱히 잘해주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꼭 아부지, 하며 범진을 챙기곤 했다. 선재가 준희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아이를 품에서 조금 떨어트렸다. 까만 눈. 햇살을 입으니 꼭 보석처럼 보인다.
“준희는 그 아저씨 좋아?”
“…아젓씨 시러….”
“….”
“아부지… 주니 아부지 조아요….”
선재가 묘한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두 눈을 실눈 모양으로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 아부지이, 하는 아이를 알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뭐 때문일까. 안아주면 편해서? 품이 넓긴 하니 잠이 쏟아지면 저와 범진 중, 꼭 범진을 선택해 그 품으로 기어서 들어가곤 했다. 새끼 강아지 같은 몸짓으로 꼼지락거리는 게 귀엽긴 해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아직도 범진이 준희를 품에 안고 있는 걸 보면 근처에서 신경이 곤두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안심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아빠도 운동할게. 준희 편하게 안을 수 있게.”
“…으으응….”
제대로 알아듣고 고개를 젓는 걸까. 선재가 반대편 어깨로 고개를 젖혔다.
“준희 말 알아들었어?”
“네에…. 주니 바압….”
“…그래.”
힘 풀리듯 웃은 선재가 품에 있던 아이를 식탁 의자 위에 앉혀 주었다.
소분된 소고기죽을 꺼내 냄비로 적당히 데우기 시작하고, 아기가 먹을 만한 반찬도 냉장고에서 몇 개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그렇게 다 데운 죽을 세 숟갈쯤 먹였을까.
갑자기 들린 벨소리에 선재의 고개가 돌아갔다.
비디오폰 화면이 커다래, 식탁에서도 누가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범진이 벨을 누를 리 없으니 택배 기사인가 했다. 자연스럽게 향한 눈이 통로 벽을 짚었다. 배송 기사들이 웬만하면 택배를 앞에 두고, 그대로 가버리는 걸 알아서였다. 하지만 사람 얼굴이 계속해서 화면에 잡히고 있었다. 등기가 온다는 소리도 없었는데…. 안고 있던 아이를 식탁 의자에 앉혀두고, 선재는 인터폰 쪽으로 가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문 앞엔 윤형이 서 있었다.
“….”
범진과 같이 살게 되면서는 보았던 일이 거의 없었다. 며칠 전에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걸 빼면. 선재는 그때도 범진에게 괜한 오해를 살까 윤형을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려보내고 뒤늦게 6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CCTV라도 뜯어 확인을 할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 앞이라니. 선재가 아무것도 없을 주변을 괜시리 살폈다. 거실 구석에 눈길을 보내고 바닥도 훑었다. 최근 들어 카메라가 있는지 계속 찾아보고는 있지만, 촬영이 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범진은 카메라 설치하는 것도 늘 대놓고 했다. 저걸로 내가 니 보고 있다, 하며 속이 뒤집히는 소리만 골라 했었다. 요즘 범진은 뭘 지켜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으면 그냥 제가 왔다.
비디오폰 통화 버튼을 누른 선재가 입을 닫고 가만히만 있었다.
“선재 씨?”
“…뭐 하시는 거예요?”
윤형은 당황한 눈치였다. 따로 호수를 말한 적은 없지만 방향으로 대충 예상은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찾아올 줄은 몰라서. 용건이 있어도 문제고, 없으면 큰 문제다. 선재는 윤형의 당황한 기색을 보고도 말을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아, 저… 선재 씨 괜찮나 해서요.”
“뭐가요…?”
“그 사람이요. 원해서 같이 사는 거 아니죠?”
“….”
선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사람들은 남의 일을 이렇게 잘 아는 것일까. 범진도 그렇고, 윤형도 제 사정을 파악하고 있어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도망을 가도 간 게 아니고, 집에서 생활을 해도 유리 벽 안에서 생활하는 느낌이다. 범진이 워낙 요란한 사람이니 모를 수가 없던 것일까? 선재의 입은 1분 가까이 지나서야 열렸다.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거짓말. 선재 씨 지금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요.”
“….”
윤형의 얼굴을 확인하고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건, 그에게서 오고 있던 메시지 때문이었다. 자세히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범진은 윤형을 아는 듯 굴었다. 니는 씨발, 어디 풀어 놓기만 하면 이 지랄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물음이긴 한데 대답을 구하는 물음은 아니었다. 범진은 그때 분명 스치듯 그 새끼, 하고 윤형을 칭했었다. 그런 윤형에게 괜찮냐, 잘 있냐, 하는 메시지를 받고 있었으니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단 문 좀 열어보세요. 저랑 얘기해요.”
“…아뇨….”
무슨 말을 할까. 선재는 윤형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범진 앞에서 할 말을 잃는 것과는 맥락이 다른 문제였다. 이 사람은 지금 뭐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일까? 뭘 알고, 뭘 모르는 걸까? 선재는 윤형의 수려한 얼굴에도 화면에 시선을 멍하니 두었다.
“일단 문 열어보시고, 그러고 저한테 얘기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도와줄 수 있어요. 저는 선재 씨 사정이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런 사정이라면 가만히 손 놓고 볼 수는 없어요.”
“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아뇨, 선재 씨 괜찮지 않아요. 제가 본 것도 있는데요. 선재 씨 그런 취급 당하는 거….”
복도에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선재는 부끄럽기도 해서 화면에 있는 버튼을 손에 닿는 대로 눌렀다. 그러자 화면이 꺼졌다. 그런 취급? 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선재는 검게 변한 화면에 비치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나마 훑었다. 통신을 끊은 걸 알았는지, 문밖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선재는 우선 죽을 떠먹고 있는 준희에게 눈을 돌렸다. 저렇게 계속 문을 두드리면 곤란해질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돌려보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준희는 한 번 쿵, 하고 난 소리에 예민해지진 않았던 듯했다.
“준희, 방에서 죽 먹고 있을까?”
“…바앙…?”
“죽, 거북이랑 같이 먹고 있자….”
“거부기…?”
“응. 먹고 있으면 아빠가 갈게.”
“…녜에.”
밥그릇에 숟가락을 꽂은 선재가 준희부터 품에 안았다. 또 쾅, 하고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정말 해야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선재의 눈이 준희의 얼굴로 향했다. 여전히 소리엔 큰 반응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저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아무리 남이 처한 상황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해도, 저렇게 막무가내로 굴 줄은 몰랐다. 새 오피스텔이긴 하지만 입주민도 꽤 되지 않나.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게 없었다.
준희를 방에 데려다준 선재가, 거실로 나와 비디오폰 화면을 다시 켰다.
“문 두드리지 마세요.”
화면에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한 윤형이 재차 비치고 있었다. 선재는 혹시 말을 얼버무린 건가 싶어 연결되자마자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문 이거 정상적인 문은 맞아요?”
또 쾅, 하는 소리. 윤형이 문마저 못 믿겠다는 듯 발로 쾅, 하고 친 것이었다. 감금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힘이 많이도 실려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아이의 기분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제 어깨가 움찔할 정도의 소음이어서, 선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저는 선재 씨 걱정돼서.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하시는 게 더….”
“겁나는 거죠? 저도 며칠이나 생각했고요, 방법도 다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100%가 아니라 그 이상을 확신하고 집 앞에 찾아온 것 같았다. 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만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인가. 선재는 통화를 끊고, 화면에 비치는 윤형의 얼굴에만 시선을 던졌다. 문으로 가로막히긴 했지만 뭐라고 말하는 소리는 흐리게나마 들려오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서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진전도 없고, 윤형은 물러날 생각을 않았다. 준희를 미리 방에 둔 게 다행이다. 선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탁자 위에 있는 휴대폰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전화해서 오라고 말을 할까? …아니다. 짧은 생각에 잠겼던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윤형이 아니라도, 범진과 저를 이상하게 볼 사람은 세상에 많았다. 윤형이 저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도 순전한 억지라고 볼 수는 없다. 틈만 나면 때리려는 시늉을 하고, 강압적으로 구는 데다 밖이라도 상관없이 몸을 더듬는다. 일의 원흉이 범진일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범진을 부르겠다는 생각이 과연 옳은지가 몇 번이나 상기되었다. 선재는 결국 휴대폰에 두고 있던 시선을 완전히 거뒀다. 그리곤 비디오폰 통화 버튼에 손가락 끝을 갖다 대었다.
“저, 윤형 씨가 무슨 생각 하시는지 대충은 알겠는데요….”
“네, 일단 저희 집에….”
“윤형 씨?”
말이 채 끝나지도 않은 타이밍에, 윤형의 얼굴은 사라졌다. 곧 드러난 건 렌즈에 바짝 붙은 누군가의 몸. 손으로 일부러 가린 듯이 어둑한 화면이 한 번 비치고, 그다음 팔과 어깨가 드러났다.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선재는 갑자기 등장한 범진의 모습에 기함을 했다. 윤형의 얼굴이 밀리듯 사라진 걸 떠올리면 또 무턱대고 사람을 때린 것 같았다. 선재는 수신이고 뭐고, 모든 걸 관둔 채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급하게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뭐…!”
“이 씨팔놈이 한 번 살려줬더니….”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가 제 귀에도 그대로 꽂혔다. 어떤 작은 소리라도 울리는 복도의 구조상, 일을 더 크게 만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윤형이 이미 배를 한 대 맞은 듯 소화전 쪽으로 쭉 밀려나 있는 게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범진의 뒷모습을 향해 달려간 선재가, 이내 두 팔에 감기는 단단한 몸을 힘껏 뒤로 끌었다.
“그만해… 하지 마.”
“…놔라.”
“…아무 일도 없었어. 그만해….”
“씨발, 안 놓냐?”
어쩌면 제게도 손이 날아올지 몰랐다. 선재는 윤형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범진이 이런 곳에서 끔찍한 일을 벌일까가 더 두려웠다. 일이 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윤형은 누가 봐도 사회에서 이룬 게 많은 알파였다. 오늘 보인 모습이 충동적인 것과 별개로, 그는 그대로 완벽하고 성공한 사람이었다. 범진이 어둠 속에서 돈을 끌어모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양지로 드러났을 때 불리한 건 무조건 범진이다. 난데없이 문을 두드린 건 윤형이지만, 먼저 폭력을 행사한 것도 범진이었다. 범진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일이 커져선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선재는 범진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걸 계속해서 막았다. 할 수 있는 만큼 붙잡고,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팔에 힘을 주었다.
“니 씨발 저 새끼랑 뭐 있냐?”
“…그런, 그런 거 아니니까.”
범진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든 선재가 범진의 눈을 올려다보며 도리질을 쳤다. 그런 거 아니야.
“집에, 집에서 얘기해. 집에서.”
“이게… 씨.”
이렇게 무턱대고 범진의 몸을 잡아본 건 처음이었다. 그만하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그의 몸을 안은 것은. 선재는 씨, 하는 소리까지 듣고 무작정 눈을 감았다. 범진의 의지를 막았다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거리에서 뺨을 맞은 게 아직도 정확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이후로 때린 적이 없다고 해도, 분위기가 심각하게 흘러가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늘 들곤 했다. 맞는다면 왠지 지금일 것 같았다.
선재는 이를 악물었다. 날아올지도 모르는 손을 상상하고, 그 고통을 떠올렸다.
“…뭐 하냐….”
힘을 주고 끌어안고 있던 범진에게선 그런 낮은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선재가 감았던 눈을 조금씩 벌렸다. 범진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제 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상황에 갈증이라도 났는가 보았다. 범진의 표정을 살핀 선재가 그제야 뒷걸음을 쳤다. 두 팔이 여전히 범진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범진은 어이없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선재를 따라 복도에서 뒤로 천천히 걸었다.
“….”
결국, 집 앞까지 당도했다. 선재는 틈을 내지 않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손잡이를 완전히 당긴 뒤에야 범진의 얼굴에 시선을 보냈다. 범진은 눈썹을 뾰족하게 만든 채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어가, 들어가자….”
“하, 이 씹….”
“….”
“…하.”
범진의 입에서 비슷한 한숨이 반복적으로 새나갔다. 집에 누가 드나드는지, 선재가 밖을 나가 얼마 만에 돌아오는지 정도는 휴대폰으로도 쉽게 알 수 있게 해놓았다. 비디오폰은 오피스텔에서 제공하는 연결 프로그램이 따로 있었다. 의도는 달랐지만 어쨌든 누가 벨을 눌렀는지 정도는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일터에 거의 도착하긴 했지만 그대로 차를 돌려도 몇 분 안에 닿는 거리였다. 범진은 휴대폰 화면에 가득 찬 윤형의 얼굴에, 망설임 없이 핸들을 돌렸다. 쳐들어가듯 도로 위를 내달렸다.
“니 지금 뭐 했냐.”
“….”
“내가 일 볼 때 끼어들지 말라고,”
말했냐, 안 했냐, 하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이었다. 선재가 고개를 들고 범진의 말에 조용히 반박했다.
“저 사람, 그냥… 오해한 거니까.”
“오해? 이게 씨발 궁둥이 처 흔들 때부터….”
“그게 아니라, 네가, 네가 나쁘게 하니까 저 사람이 오해를 해서.”
“뭐?”
“때리려고 하고, 욕하고 그랬으니까.”
“…이 씨발….”
“또 이렇게 하잖아.”
“이게 진짜, 뒤지고 싶어서….”
방금까지 잔뜩 화가 나 있던 범진이었다. 선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맞을 뻔한 것도 잘 아는데, 왜 말을 멈출 수 없나 몰랐다. 복잡하고 앞뒤가 없었던 생각들이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토해지는 듯했다. 윤형의 등장에 조마조마했던 마음, 준희부터 챙기느라 제 기분이 어떤지는 살필 수 없었던 순간, 원인을 제공한 범진에게 드는 화, 슬픔. 선재는 범진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자 마음이 요동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먹먹해진 목이 따갑게 지끈댔다.
“오해하게 만든 건 너잖아. 네가….”
범진을 향해있는 두 눈이 금세 벌겋게 올랐다.
“아오….”
그 눈을 바라보던 범진이 손을 몇 번이나 올리려다 말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걸리적거리나. 팰 수도 없고,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삶에서 이런 인간을 만나 곤혹스러운 건 범진도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느끼는 기분은 밥맛 그 자체였다. 욕밖에 나오지 않았고, 제어하는 방법도 몰랐다. 한주먹감도 안 되는 게 울면서도 뭐라고 자꾸 말을 한다. 범진은 화가 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열불이 터졌다. 열불이 터지는데도 성질대로 행동하지 못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하는 선재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이 좆만 한 게 뭐라고 집까지 끌려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씨발, 그냥 닥쳐라. 좀….”
으응, 끙,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선재가 뺨부터 급히 닦았다.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결국 몇 방울이 눈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준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문 뒤로 거북이 장난감을 든 준희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이는 현관 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발을 천천히 뗐다.
“아압… 압부지….”
이 상황에서 범진에게 두 팔을 뻗는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원망은 자신과 상황 자체에 겨냥된 것이었다. 어떻게든 같이 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선재는 혹시 아이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범진 앞에 가로섰다. 아무리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준희만 반가운 얼굴을 하고 범진을 향해 두 팔을 뻗고 있었다.
“안 돼, 이리 와.”
아이를 낚아채듯 안은 선재가 발에 걸리는 거북이 장난감을 구석으로 몰았다.
“아부지… 주니이….”
“내놔라.”
안겨 있던 아이가 품에서 쑥 빠져나갔다. 내놓으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이 들어와, 반응할 새가 없었다.
“….”
범진은 아이의 몸을 휘휘 날리듯 잡고, 제 품으로 끌었다. 널따란 품에 안긴 준희가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처럼 꼼지락거리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니 아부지… 업썼써요….”
우응? 하고 고개를 든 아이의 눈이 범진에게 닿았다. 아까, 밥을 먹으러 나왔을 때 범진이 없었단 말을 저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재가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뺨이 축축하게 젖었었는데, 지금은 다른 이유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준희가 철없이 행동하다 범진의 화를 돋우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애를 데리고 간 것도 어디까지나 객기 때문일 테니. 수틀리면 바로 이 새끼 어쩌고, 하면서 가차 없이 욕할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좋냐…?”
“녜에….”
범진의 얼굴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했다. 그 얼굴을 하고 제 딴에는 다정하게 화답한 것이다. 누가 들어도 비아냥대는 투지만 선재만은 그 말에 밴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려했던 일은 생기지 않을까.
싸움 아닌 싸움을 벌인 뒤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평소라면 조심해서 안으라거나 그런 투로 말하지 말라는 말을 해볼 수도 있을 텐데. 선재는 준희의 눈이 다른 데로 향한 사이 코를 훌쩍였다. 시큰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