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1화 (4/29)

2부


“선재 씨.”

“네.”

다른 원실에서 장난감을 정리하던 선재가, 원장의 부름에 즉시 밖으로 나왔다.

맞은편에 있던 원실 문을 닫은 원장이 뒤쪽을 가리켰다.

“새로 들어온 교구품만 정리해주고 가주세요.”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선재가 맞은편에 있던 원실 문을 열었다. 창문이 열려 있나? 차가운 공기가 느껴져, 선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선생니임. 이거 해요오.”

낮은 책꽂이 근처에 있던 남자아이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와 방방 뛰었다.

“응, 잠시만. 선생님 이거 정리만 하고.”

선재를 유독 따르는 남자아이였다. 알파 아이이긴 했지만, 다른 알파 아이들처럼 성정이 거칠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가진 아이가 선재 주변을 빙빙 돌았다.

선재는 아이를 쳐다보며 박스를 들었다. 닦아놓은 정리함 앞에 상자를 놓은 뒤, 제일 위에 있던 학용품부터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생니임.”

“지우 뭐 하려고.”

포장된 교육용 키트는 6세 이상 아이들이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선재는 학용품들을 제대로 정리해두고, 키트는 일부만 꺼내 넣어두었다.

선재의 말을 이제 같이 놀자는 신호쯤으로 받아들인 아이가 그 자리에서 털썩,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았다.

“바닥 안 차가워?”

“괜차나요.”

다섯 살인데 말을 이렇게나 잘한다. 아이는 앉은 채로, 후드 주머니에서 도미노 조각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그걸 같이 세우며 놀자고 온 것 같았다. 선재는 박스를 쳐다보다 그래, 하고 아이 앞에 앉았다.

아이는 도미노 조각을 헐겁게 세웠다. 빨간 도미노 조각들만 골라서 바닥에 놓았고, 초록색 도미노 조각엔 손을 대지 않았다.

“선생님이 가운데.”

“선생님이 초록색 하면 돼?”

“네!”

초록색 도미노 조각을 든 선재가 빨간 도미노 조각 사이에 그걸 반듯하게 놓았다.

아이가 세운 도미노 조각이 열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배가 볼록하더니 이렇게 많은 조각을 가지고 오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옅게 미소 지은 선재가 길게 늘어선 조각 사이에, 제 몫의 초록색 조각을 신중하게 세워 넣었다. 어떻게 보면 도움을 청하는 건데, 괜히 잘못 건드려서 무너뜨리진 말아야겠다. 마지막 조각을 세울 땐 괜히 긴장이 되었다.

“우와! 했다! 지우가 했다!”

지우가 소리를 지르며 발돋움을 하고 난리를 쳤다.

작은 일에 기뻐하는 아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선재는 제가 도와주긴 했지만, 앞에서 좋아하는 아이를 보고 모른 척 칭찬도 해주었다.

“그러네. 지우 천재다.”

아이는 이어 선생님, 보세요, 하고 가장 끝에 있던 도미노 조각을 밀었다.

주르륵 쓰러진 도미노 조각들이 3초도 안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시, 다시, 하고 조각 하나를 세운 아이 앞에서, 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세 번은 이렇게 더 놀아줘야 할 듯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 선재는 원장실로 가 인사를 건넸다.

원장이 데스크에 앉아있다 선재를 보고 예, 하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선재는, 원장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태백에서 서울로 도망쳐왔던 그때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선재는 그때 돈도 거의 없었다.

가져온 돈 대부분을 차비로 썼고, 갈 데도 없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며칠이라도 묵을 수 있는 곳은 허름한 숙박업소였다. 빌라 방 서랍엔 100만 원이 넘는 돈이 있었으나 정확히 계산해서 돈을 들고나온 건 아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여관방에 들어와 돈을 세어보았을 땐 10만 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선재는 태백에서, 택시가 있는 곳까지 뛰어가는 도중에 핸드폰을 버렸다. 준희를 안은 채로 뛰어 이마엔 구슬땀이 가득 맺힌 채였다. 머리카락이 젖고, 얼굴에 멋대로 붙어도 그런 걸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기절하기 일보 직전에, 사람들이 한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선재는 지나가는 택시를 무작정 잡아, 서울로 가달란 말만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택시를 부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혹시나 범진과 연락이 닿을까, 그걸 기다릴 여유 같은 걸 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혼자 있으면 나쁜 생각이라도 해봤겠지만 아이가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선재는 서울에 있는 내내 태백 집을 벗어날 생각만 했고, 범진과 헤어지자마자 그걸 실행했다. 손발에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긴장을 해, 택시에선 내내 손을 주물러야 했다. 그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다.

아이와 태백을 벗어난 하루 이틀은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머리채가 잡혀 서울 바닥 어딘가에서 질질 끌려다닐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런 꿈을 꿨고, 깨어나면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돼 있었다.

선재는 꿉꿉한 냄새가 나는 여관방에서 준희를 꼭 끌어안았다.

도망치던 내내, 범진의 차가 저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을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나. 하지만 범진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된 지가 벌써 6개월이었다.

서울에선 어쩔 수 없이 준희를 맡기고 일을 해야 했지만, 종일 아이를 맡기려면 돈부터가 필요했다. 다행히 선재의 사정을 들은 어린이집 원장이 아이와 함께 출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처음엔 그 이유로 낮은 월급을 받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급여도 올라가게 되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권해주고, 월급도 넉넉하게 주는 원장이 선재는 너무도 고마웠다. 원장은 갈 곳이 마땅치 않던 선재에게 집도 한 채 내주었다. 선재는 갑자기 제 소유의 오피스텔 중 하나를 숙소 명목으로 지내게 해주겠단 원장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따뜻한 배려와 선의를 받아본 기억이, 적어도 최근에는 없었다. 성격 탓인지, 원장은 선재가 감사하다고 우는데도 무뚝뚝한 반응만 보였었다. 네,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선재의 등을 위로하듯 몇 번 두드린 게 전부였다.

그 성격을 아니까. 선재는 대충 대꾸하는 원장에게도 늘 열심히 인사했다. 준희를 돌볼 수 있으면서도 일을 할 수 있는, 그리고 편히 잠잘 데가 있는. 이런 조건이 세상천지에 어딨겠는가. 태백에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게 가끔 생각나긴 해도 지금 괜찮으니까.

선재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애써 지우며, 지금의 생활에만 착실히 임하려 노력했다.

“준희야.”

“네에.”

아이는 그동안 꽤 자랐다. 부르면 정확하게 대답을 할 줄 알게 되었고, 뜻을 전하기 위해 가만히 얼굴을 쳐다보기도 한다.

“오늘 재밌게 놀았어?”

“웅.”

“아빠한테 한 번도 안 오더라.”

“압마아….”

뒤늦게 오겠다고 팔을 뻗지만 팔이 짧아 선재가 마저 안아줘야 했다. 아이는 선재를 아빠라고도 부르고, 엄마라고도 불렀다. 창우가 엄마, 아빠, 하는 말을 가르쳤기 때문인지 말을 시작하면서부턴 줄곧 두 호칭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집에 있을 땐 선재를 주로 맘마, 하고 불렀다. 입을 막 뗐을 때의 버릇이 남은 탓이었다.

“아빠, 해봐….”

“빱아아.”

선재는 형질을 드러내는 일이 조심스러웠다.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던 터라, 또 범진 같은 끔찍한 인간과 만나게 될까 두려웠다. 어린이집에선 오메가 남자 선생님인 것이 득이 될 때가 있었지만 그 외엔 약점이 될 때가 많았다. 선재는 다른 선생님들이 꺼리는 잡일 같은 것도 열심히 했다. 체력이 많이 회복돼 식재료나 교구품이 대량으로 들어올 때도 앞장서서 일할 때가 많았다.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간 선재가 자동으로 잠기는 도어락의 신호음을 들었다.

원룸 형태지만 창이 커서 빛이 잘 들었고, 넓고 쾌적했다. 어디서든 준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절대 안 잊어야지. 어떻게든 은혜 갚아야지. 겉으로 티는 안 내도 마음을 모를 수 없다. 선재는 이렇게 좋은 집을 숙소로 내어준 원장에게 꼭 보답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 * *

4개월 전, 서울 H동의 한 어린이집 유리문과 철문이 연속해서 닫혔다. 확인하듯 문고리를 잡아당긴 하신애가 복도창 쪽으로 반대편 팔을 뻗었다. 자동으로 켜지는 불인데 이상하게 먹통이었다. 한 번 더 힘껏 팔을 뻗은 하신애의 손이 휙휙, 허공에서 맴돌았다.

“뭐야.”

이 사람 또 완전 소등을 하고 갔네. 하신애는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은 남자 선생님을 떠올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기가 많이 약합니다.’

처음엔 아이를 맡기러 왔었다. 근처에서 일을 해야 하니 아이를 저녁까지 봐달라던 남자.

아이 팔 이곳저곳을 보여주는 남자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얼굴이 동글동글하면서도 턱이 작고 날렵해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얼굴에 작은 생채기 몇 개는 있었지만 그게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망칠 정도는 되지 못했다. 하신애는 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새삼 신기하게 쳐다봤다.

남자는 이후로 며칠을 더 왔다. 일일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이것저것 한다는 남자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피곤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겠다고, 그 얼굴을 보며 생각한 하신애는 남편의 말을 떠올렸다. 오메가 선생님에게 월급을 반만 주는 편법이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오메가만 고용을 하자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선생 두 명이 한꺼번에 관두는 바람에 골치가 썩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어, 그러지 말고 우리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게 어때요?’

하신애는 계단에 놓였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민선재. 오메가이고 올해 서른둘. 나이를 들었을 땐 깜짝 놀랐다. 절대 그렇게까진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신애는 민 선생이 고마워하는 것에 무안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뭐, 아이와 함께 직장 다니는 게 소원이었다니까 그럴 만도 한가?

공짜로 아이를 허락한 것도 아니긴 한데. 하신애는 월급의 반보다 더 낮게 급여를 책정해 주며, 준희의 원비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선생은 군말 없이 첫 월급을 받아들었고, 이번 달도 그렇게 줄 작정이었다.

“아유, 어두워.”

계단을 내려가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신애는 벽을 짚으며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뭐야. 아래층 계단에서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은 하신애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층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위층엔 무슨 업장이 들어설 예정인지 보기 드물게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근데 이 시간까지 일을 하나. 그림자가 아래서부터 점점 커지고 있는 게 보였다.

“….”

“아줌마.”

나 말하는 건가? 하신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림자는 웬 남자의 것이었다. 계단을 다 올라오지도 않고 말한 남자는 눈을 치켜뜨고 위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훤칠한 인상이지만 어딘지 소름도 끼쳤다. 뺨에 진 긴 흉터와 큰 덩치 때문에 하신애는 주눅부터 들었다.

“…예?”

“아줌마 어린이집 저거 운영하지?”

지직지직, 복도창 밖에선 간판 불 들어오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온 남자는 위에서 보던 것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하신애는 가까이 다가온 남자 때문에 고이지도 않은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니고…. 빚을 진 것도 아니다. 집채만 한 남자의 덩치에 압도당한 하신애가 책 잡힐 일이 없음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말은 씹, 해야지.”

계단을 완전히 오른 남자는 목을 앞으로 뺀 채로 입을 열었다.

“아니, 네… 맞아요….”

“민선재 알지.”

“…알죠, 네….”

얼굴값을 한다더니. 하신애는 너무 예쁜 오메가 선생님을 고용한 것에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어디서 평범하게는 못 살았을 것 같았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으면서 애를 데리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신애의 미간이 티 나게 떨리고 있었다.

“월급 그따위로 주면 디져.”

“…그게 무슨.”

“알면서 개지랄하지. 이 씨발꺼….”

하신애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씨발꺼… 하는 남자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쳐다봤다. 간판 빛이 강하게 들어올 때마다 귀 근처부터 뺨까지 진 흉터 아래에 어둠이 맺히고 있었다.

하신애는 물러날 데가 없음을 느꼈다. 다 알고 왔으면 어쩔 수 없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제때 주겠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남자가 귀찮은 표정으로 종이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주소가 적힌 메모지였고 하나는 명함이었다.

이거, 하고 손가락에 끼운 종이를 흔든 남자는 하신애에게 지령을 하나 줬다. 주소에 적힌 집이 원장 소유라고 속이고 민 선생을 거기서 살게 만들 것. 어떻게든 살게 하라 말한 남자는 짧은 문장 하나에도 저렴한 욕을 갖가지로 내뱉었다. 씨팔, 들었냐? 하고 얼굴을 들이민 남자를 향해, 하신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묵직한 돈 봉투까지 하신애에게 건넸다. 하신애의 몫은 아니었고, 민 선생의 몫이었다. 그 돈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아든 하신애가 손을 떨면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볼일을 다 본 남자는, 건물을 둘러보더니 좆나 후지다고 말한 뒤 하신애도 한 번 훑었다. 돈 없으면 씹, 사람을 안 써야지. 썅년아.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는지 그대로 돌아서 계단을 내려간 남자는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 *

아침. 시계를 쳐다보며 준희의 옷을 입히는 선재의 손길이 분주했다. 벌써 8시 40분. 9시까지 도착하려면 적어도 45분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아침밥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먹고 얼마 되지 않아 밥을 게워낸 준희 때문에 시간이 이렇게 늦고 말았다. 본래 35분쯤 나가 여유롭게 어린이집까지 가곤 하는데.

가자, 가자. 그렇게 말을 하며 준희의 손을 잡고 현관 밖으로 나온 선재가 복도에서 한기를 느꼈다. 한 층당 여러 갈래로 나뉜 복도고 창도 늘 닫혀 있어 이렇게 서늘한 적은 없었는데.

뒤를 돌아 복도 창문을 확인한 선재가, 준희를 안아 들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어….”

밖이 온통 회색이었다. 손을 뻗은 선재의 코트 소매에 눈송이가 묻었다 금세 사라졌다.

어떡하지. 우산을 가져와야 하나.

선재는 결국 준희를 품듯이 안고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내린 눈도 치워지지 않아 아이와 서두르듯 걷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깨끗한 길을 골라서 걸으니 속도가 꽤나 났다.

한 블록을 더 걸어 큰 횡단보도 앞에 선 선재가, 앞의 신호등에 시선을 두었다.

“선재 씨.”

갑자기 닿은 음성에, 선재가 놀라서 옆을 쳐다봤다.

키가 저만한 남자가 결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얼굴이 낯이 익었다.

며칠간 저를 따라다니던 남자였다. 좋은 냄새를 따라서 여기까지 왔다는 남자는, 쑥스러운 얼굴로 퇴근하던 선재를 난감하게 만들었었다. 남자는 저를 열성 알파라고 소개했고, 선재의 체향을 꿈에 그리던 향기라고까지 표현했다. 선재는 눈앞의 남자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죄송하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남자는 물러날 생각을 않았다. 한동안 안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선재는 짧은 탄식 같은 소리만 내뱉고 앞을 쳐다봤다. 그 틈에 초록색으로 바뀐 신호등 불에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제가 그렇게 싫습니까?”

따라오는 남자를 향해 눈길을 보내지 않던 선재가, 팔을 홱 잡아채는 남자의 손길엔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러세요.”

하도 달라붙는 바람에, 아예 무시를 하고 지나친 적도 있었다. 처음에만 가식적인 소리를 하던 남자는, 마지막 날엔 저급한 말까지 하며 선재의 표정을 찌푸리게 만들었었다. 냄새를 줄줄 흘리고 다니면서, 뭐가 잘났다고 저 같은 알파를 마다하냐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 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또 제게 할 말이 있는 듯 굴었다. 저급한 소리를 할까 봐, 선재는 다다른 인도에서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제대로 쳐다봤다.

“사람을 시켜서 이렇게 만들어 놓을 정도로… 제가 싫었습니까?”

멈춰 선 선재를 향해 먼저 입을 연 남자는, 바지를 걷어 다리를 들어 보였다.

흰 깁스였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몰랐다. 선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다시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얼굴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목에도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선재 씨 아니면 저한테 이렇게 할 사람 없지 않겠습니까?”

“예?”

“절 이렇게 만들 사람 선재 씨뿐이라고요.”

“아니… 제가 그쪽을 왜 이렇게 만듭니까?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남자는 심부름센터부터 시작해서 조폭, 깡패, 이런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름도 분명히 들었다고, 민선재 앞에 나타나면 뒤질 줄 알라고 분명히 들었다고, 남자는 길바닥에서 고함을 질렀다. 가만히 남자를 쳐다보던 선재가, 고함 소리에 몸을 움츠린 아이 때문에 인상을 썼다.

“저 그런 거 시킨 적 없습니다…. 아이도 있는데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누가 말을 거는 게 종종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라는 듯 따지는 알파는 처음이었다.

“…이게 진짜.”

사람들이 선재와 남자를 수상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남자도 그게 신경이 쓰이는지 더는 언성을 높일 생각을 못 하는 듯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남자는 병원비라도 물어내란 말을 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선재의 코트 소매를 자꾸 잡아챘다.

어쩔 수 없이 남자의 계좌번호를 받아든 선재가 알겠다고, 노력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이와 돌아섰다.

남자는 분이 안 풀린 듯, 먼저 냄새 흘린 게 누구냔 말을 선재의 귀엔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선재는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준희는 졸린 데다 컨디션도 나빠 품에서 꼼지락거리고만 있었다.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 아이가 겁을 먹게 하고…. 선재는 아침부터 이런 일을 겪자, 아이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품에 안은 아이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괜찮냐고 물었다.

녜에…. 하는 소리가 옷에 반쯤 파묻혀서 들리고 있었다.

잠깐 씁쓸하게 웃던 선재가 괜찮아, 말했다. 하나도 괜찮은 게 없지만 우선은 그렇게 말해야 했다.

제멋대로 끼어드는 잡생각을 떨쳐내는 사이, 목적지인 건물에 도착했다.

입구 안으로 들어가려 선재가 방향을 틀었다. 들어서는 계단 하나를 밟자, 품에서 주니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걷고 싶어?”

9시까지는 6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원래 도착하던 시간과 비슷하게는 도착했다. 버둥거리기 시작한 아이를 바닥에 내려준 뒤, 선재는 옷을 털었다. 조금씩 내리고 있던 눈은 건물과 가까워지면서 점차 그쳐갔다. 선재는 아이의 등도 손으로 털어주었다. 먼지 같던 눈이 바닥에 몇 송이 떨어졌다. 눈은 금세 물방울이 되었다.

“손.”

준희가 손을 주자, 선재가 그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이제 계단 오르기도 잘한다. 계단을 먼저 밟은 선재가, 뒤에서 뒤뚱거리며 계단 위로 발을 올리는 아이의 모습을 쳐다봤다.

“오빠! 안녕하세요!”

입구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건 혜윤이었다.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고, 어린이집의 유일한 베타 선생님이기도 했다.

“…아, 혜윤 씨. 안녕하세요.”

비스듬히 고개를 뒤로 했던 선재가 인사를 받아주었다. 성격이 좋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대쪽 같은 혜윤은, 부당한 해고처리에 어린이집을 신고하면서까지 제 몫을 챙겼다. 희한하게 제가 일한 뒤로는 오메가 선생님만 줄지어 들어왔다. 이유도 없이 해고 처리되는 베타 선생님 중, 유일하게 따지고 든 게 혜윤이었다.

그런 혜윤을 쳐다보던 선재가 아이와 옆쪽으로 자리를 비켰다.

혜윤이 아이의 걸음을 맞출 필요는 없었다.

선재는 뒤쪽을 쳐다보며 혜윤에게 눈짓했다.

“아, 저희도 천천히 가려고요.”

혜윤은 저희, 라며 고개를 옆쪽으로 기울였다. 뒤에 있던 남자가 선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재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친구예요. 저한테 뭐 받을 거 있어서 잠시.”

“네.”

“근데 아까 그 남자 누구였어요?”

“아.”

“그때 봤던 늙다리 알파죠.”

혜윤은 선재가 거리에서 그런 일로 진을 빼고 있는 걸 몇 번이나 봐 왔었다.

선재가 말을 흐리자, 혜윤이 대신해서 정신머리 없는 것들, 하고 혀를 차 주었다.

선재는 아이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돌아 반응을 해주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제 손을 꼭 쥔 채로 계단을 열심히 오르고 있었다. 작은 몸이 들썩들썩 움직이는 걸 보던 혜윤이 뒤에서 아유, 준희 귀여워. 하고 말을 보탰다.

드디어 신발장이 보이고 있었다. 야, 기다려. 하고 입을 연 혜윤이 잠시만요, 하고 선재와 준희를 지나쳐 갔다. 계단 끝에 서 있던 선재가 뒤에서 더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혜윤을 따라가지 않고 선재를 천천히 따르고 있었다.

“전 빨리 안 가도 돼서요.”

“…네.”

여섯 개 정도 남은 계단을 마저 올라가며, 선재는 아이의 다리에만 시선을 보냈다.

도착한 신발장에서 아이의 신발을 벗겨 주며, 선재는 남자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앞에서 걷던 아이에게 뭐라고 하지 않아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선재는 입구 문을 통해 시계를 쳐다봤다. 준희가 열심히 올라준 덕에 아슬아슬하게 출근 시간은 지켰다. 작은 운동화를 벗겨낸 선재가 준희의 발바닥에 손을 대 보았다. 이렇게 하면 따끈따끈한 발바닥이 느껴지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다. 살짝 웃은 선재가 어린이집으로 먼저 들어가려는 준희를 쳐다봤다.

“준희 먼저…. 선생님 신발 신고 갈게.”

“네에.”

어린이집에 오면, 아빠나 엄마가 아니라 선생님이 되어야 했다. 선재는 아이의 등을 쓸어 주며 유리문을 밀었다. 아이는 작은 틈 안으로 몸을 넣어, 휘청휘청하면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는 잘 알았다. 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선재가 제 실내화도 신발장에서 꺼냈다.

“아이랑 되게 닮으셨네요.”

그때까지도 선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말을 건넸다.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선재가, 신발을 신발장에 넣고 슬리퍼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저, 그럼 안녕히 가세요.”

들어가기 전에 남자를 향해 고개 숙이자, 남자도 선재를 따라서 상체를 숙였다.

평소에 나지 않던 미묘한 향기가 감도는 걸 보면, 남자도 알파일까? 선재는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린이집 유리문을 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선재는 오피스텔 앞에서 택시를 탔다. 건널목에서 또 괴짜 같은 그 사람을 만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짧은 거리라, 양해를 구한 뒤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차창을 유심히 보며 건널목을 지나치는데, 인파 때문인지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순 없었다.

그렇게 도착하게 된 어린이집에서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치거나 우는 일이 없어 오전 시간이 조용히 지나갔다.

“저, 오빠.”

선생님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혜윤은 선재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준희 계속 혼자 키우실 거예요?”

별걸 다 물어보는 혜윤이었지만 선재에게만 그러는 건 아니었다. 오물거리며 크로켓을 먹던 선재가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선재는 입 안에 있던 걸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별로… 생각을 안 해봐서요.”

“그럼 지금 생각 좀 해보세요.”

“…어….”

“사실 어제 저랑 같이 왔던 친구요.”

“네.”

“지금까지도 계속 오빠 타령만 하고 있거든요. 밥 한 번만 먹게 해주면 안 되냐는데.”

“….”

“혹시 만나게 되더라도 제가 이렇게까지 말한 건 비밀이에요.”

“…네.”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명랑한 사람. 선재는 혜윤을 보면 저까지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선재도 먼 미래를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를 만날 여유나 욕구가 들지 않았다. 죽은 남자도 그렇지만, 범진 때문에도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언제 만나실래요. 내일? 오늘 저녁에?”

“아뇨. 저는 그, 생각이 없어서.”

“아니, 오빠. 밥은 먹을 수 있잖아요. 저랑 친구면 성격 좋은 것도 보장이고. 아니에요?”

따지듯 쏘아붙이는 혜윤의 기세에, 선재가 두 손을 들었다.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했다.

“아, 오빠 제발요. 한 번만.”

선재가 거의 넘어간 것 같자, 혜윤은 손까지 모으고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까지 쳐다보던 선재도 더는 목석같이 굳어 있지 않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신 조건이 있다는 듯 입을 열며,

“그럼 같이 먹어요. 혜윤 씨도.”

“전 바빠서… 죄송해요.”

능청스럽게 말하는 혜윤은 그새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사람에게 바로 연락을 하는 걸까 봐, 선재의 눈이 의심스럽게 혜윤 쪽을 향했다. 뭐라고 말을 걸려던 찰나 휴대폰을 놓은 혜윤이 선재를 쳐다봤다.

“내일 저녁 5시에 요 앞으로 오겠다네요.”

“아니….”

“5시 괜찮죠?”

“준희는 제가 종일반 마지막 타임까지 봐 드릴게요.”

옆에 있던 다른 선생님까지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선재만 빼고 다들 신난 분위기가 되었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더 하나. 선재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한숨을 쉬었다. 책꽂이 앞에 앉아있는 준희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있는 것도 대충은 알 텐데. 전날 신발장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던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유심히 보지 않아 얼굴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림자는 길었던 것 같은데. 다시 오물오물, 크로켓을 입에 넣은 선재가 창가로 밀려드는 포근한 겨울 햇살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 * *

다음날이 되어 만나게 된 남자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저와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180cm는 넘는 것 같았다. 겉모습을 크게 따지지 않는 편이긴 했지만, 선재는 그래도 창우와 남자를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닮았다고 해서, 혹은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말이다. 선재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남자와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다짜고짜 사귀자거나 만나자거나 하는 얘기를 하지 않아 마음은 편했다.

선재는 그래도, 남자에게 아이가 있다는 말과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단 말은 했다. 에둘러 거부 의사를 밝힌 거지만, 남자는 그마저도 괜찮다고 했다. 당장 어떻게 하자고 말하지 않을 테니 시간이 날 때 밥만 먹어달라는 귀여운 부탁을 했다. 확실히 다섯 살이나 어린 게 거기서 티가 났다. 선재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식사가 끝나고도, 선재는 남자와 한참이나 주변을 걸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 앞까지만 같이 걷겠다는 남자의 말을, 선재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남자가 준희를 안아주면, 준희도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뒤로 젖히며 웃었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남자는 준희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엘리베이터로 가면서, 선재는 이런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굳이 저 남자가 아니더라도, 준희에게 행복한 일상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면 어떨까. 선재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런 미래가 있다면.

짧게 지나간 생각이었지만 선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 *

은근한 페로몬에라도 계속 노출된 탓일까. 선재는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준희를 씻겨주는 것도 겨우 하고, 제 샤워는 졸면서 했다.

널따란 원룸 구조에서 눈에 띄는 건 두 개의 침대였다.

처음엔 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잤지만, 푹신한 걸 좋아하는 아이의 취향을 반영해 둘째 달 월급을 받자마자 구매를 한 것이었다.

선재는 아이를 창가 쪽 침대에 눕혀 주고, 저도 휴대폰으로 뉴스를 좀 보다 금세 잠들었다.

꿈은 꾸지 않았다.

흐윽, 하는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도, 선재는 잠결이었다.

몇 시나 되었는지 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이가 울고 있나 싶어 옆에 있던 침대를 바라보며 실눈을 떴고,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선재는 잠이 쏟아져,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면 다시 몇 초도 안 지나 잠들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또 흐윽,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 소리를 정확하게 들었을 땐 소름이 돋았다.

선재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너무 놀라 고함도 못 지른 선재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기억이 맞다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침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범진이었다.

처음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꿈이 아닌 것 같았다.

흐릿했던 범진의 얼굴이, 꿈이라도 저렇게 선명하게 보일 순 없을 것 같았다.

선재는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범진을 올려다봤다.

그의 짙은 그림자가 선재의 얼굴에도 한껏 드리워졌다.

“흐윽, 흐윽.”

정확히 들렸던 울음소리는 주방 식탁 주변에서 나고 있었다. 선재는 겁에 질려 그게 무슨 소린지, 누군지,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오직 눈앞에 범진이 있는 것만 보였다. 얼굴을 덜덜 떨려왔지만, 선재는 그래도 입을 열었다.

“버, 범진아, 저기. 내가.”

“니 뭐.”

“미안. 내가 잘못했어. 내가….”

“형님.”

앞으로 다가온 범진의 모습은 그때와 똑같았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으응….”

“안 미안하면 사과하지 말고.”

“…아니… 아냐… 미안….”

“미안하면 처맞아야지.”

갑자기 선재의 뒷머리채를 잡은 범진이, 선재의 얼굴을 가까이서 쳐다봤다.

범진과 코가 닿을 정도가 되자, 선재는 패닉이 와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슬퍼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충격에 몸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 툭, 떨어지는 눈물을 쳐다본 범진이 겁납니까, 물으며 선재의 머리를 뒤로 꺾었다. 선재가 흑, 하고 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꿈이라기엔 여전히 생생한 장면들.

선재는 자다가 이런 일이 생겼으니, 꿈이라는 유일한 희망을 놓지 못했다.

처음부터 말이 안 되니까.

이럴 수는 없으니까.

잡고 있던 머리채를 홱, 놓은 범진은 침대에 한쪽 무릎만 댄 채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악무세요.”

“으. 으으윽….”

입 안에서 울음을 굴리던 선재가 범진의 말엔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손이 접혔다 펼쳐지는 게 시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범진의 턱이 두어 번 아래로 까딱였다. 이리와. 가까이 붙어. 살기 위해 의미를 읽어낸 선재가 범진이 가르쳐준 대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맞으라면 기꺼이 맞겠지만, 옆에서 잠든 아이도 걱정이 되고, 뒤쪽에서 언뜻 모습을 보인 남자 때문에도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뭐라도 물고 있을래요.”

“…우윽… 윽….”

주먹을 쥔 채로, 범진이 거리를 바짝 붙였다. 눈물을 똑똑 흘리던 선재가 눈을 세게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과 새로 나오는 눈물이 갈래도 없이 쏟아져나와 얼굴을 적셨다. 위에서 초 단위로 젖어가던 얼굴을 내려다보던 범진이 선재의 감긴 눈을 손으로 벌렸다.

“씹, 누가 눈 감으라드냐.”

“…우…으흑….”

“씨팔 쌍판 보니까 더 빡치네.”

범진이 선재의 뒷머리를 다시 쥐었다.

고개를 강제로 뒤로 꺾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형님.”

“…으….”

“대답하세요, 씨발년아.”

“우, 윽… 응….”

겁에 질려 온몸을 다 떠는 선재를 쳐다보던 범진이 코웃음을 쳤다.

“간이 이렇게 작은데 어떻게 토낄 생각을 했습니까.”

“우으, 우흑….”

“내가 그렇게 싫었어요.”

뒷머리를 또 확, 잡아당긴 범진이, 다른 한 손으론 선재의 뺨을 장난치듯 툭, 툭, 쳤다.

“우윽. 흑.”

“이… 씹, 뭔 상관이냐.”

선재는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범진이 하는 말이, 그리고 이런 상황이 여전히 현실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꿈일까.

꿈이라도, 범진을 태연하게 대할 수는 없겠지.

범진은 떨리고 있는 선재의 눈을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까만 눈동자와 젖은 속눈썹, 눈 끝이 붉어진 걸 한참이나 살폈다.

“야.”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범진이 입을 열었다.

“흐윽, 흡.”

“저 새끼랑 뭐 할라 그랬는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때도 평온하던 얼굴이 불에 덴 듯 확 찌그러졌다. 그러면서 선재의 머리채를 앞으로 끄는데, 범진이 옆으로 조금 물러나자 선재의 시선에도 누군가가 들어왔다. 울음소리를 내고 있던 사람을 막연히 떠올리고는 있었고, 제발 그가 아니었으면 했는데, 식탁 구석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저와 같이 밥을 먹었던 그 남자였다.

“저런 거랑 씹질하게?”

없는 정신에도 남자의 상태가 끔찍해, 선재는 그만, 하는 소리를 입 밖에 냈다. 남자의 발가벗겨진 몸 곳곳에서 핏물이 흘러 그 몸을 동여맨 밧줄을 적시고 있었다. 튀어나온 눈두덩에도 피가 고인 게 보였고, 귀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선재는 그만, 그만해, 하고 누구에게 닿는지도 모를 그 소리만 계속 입에 담았다.

“그만하면.”

범진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니가 대신 처맞을래.”

“그마아….”

처맞을 거냐고, 하며 범진은 선재의 뒷머리를 또 세게 잡아당겼다. 제대로 뒤로 꺾인 고개에, 선재가 목을 움직이며 흐느꼈다. 잇새로 흐르는 조용한 울음이 범진의 귀를 간지럽히듯 닿았다.

“씨팔, 대신 처맞을 용기도 없는 게.”

“…으우….”

“엉?”

머리는 느릿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범진이 성이 난 듯 가차 없이 흔들면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기도 했다. 선재는 계속된 흔들림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았고, 눈도 빠질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고통은 참을 수 있었지만, 앞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은 참기 힘들었다. 와중에도 범진은 씨팔, 하며 선재의 머리를 가볍게 쥐고 양옆으로 흔들었다.

“우윽… 윽…. 때….”

“뭐?”

“때, 때려, 때….”

“때리라고요.”

선재의 머리를 앞으로 끌어당긴 범진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니 내한테 맞아봤냐.”

“…으…윽….”

이 씹, 하고 뭔가를 떠올린 범진이 다른 한 손을 들어 선재의 뺨을 세게 쥐었다.

“그것도 씹, 맞은 거라고.”

범진도, 뭔가를 예측하고 있는 모양이긴 했다. 뺨이 잡히자 침과 눈물로 젖어있던 입술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런 선재의 입술을 쳐다보며, 범진이 쯧, 하는 소리를 냈다.

곧 맞을 거라 생각한 선재는 눈이라도 세게 감았다. 안면이 당기고 머리도 아팠지만, 두 눈은 어떻게든 감아야 할 듯싶었다. 날아들 주먹을 안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선재는, 어쨌든 제가 한 대는 맞아야 이 상황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죄 없는 남자가 이 집까지 끌려와 저 꼴이 된 것에 죄책감이 들었고, 범진이 제 삶을 망치려는 것에도 이 순간만큼은 순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눈가가 찌그러지도록 세게 눈 감은 선재를, 범진은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혀로 입술을 쓸며, 뜻 모를 미소도 얼굴에 걸었다.

씨벌, 하고 숨 쉬듯 욕한 범진은 선재의 입술을 제 입을 갖다 댔다.

크게 입 벌리며 다가가, 선재의 코에도 범진의 침이 조금 묻었다. 범진은 선재의 윗입술을 세게 빨아당긴 다음 억센 혀를 입 안으로 넣었다. 선재가 그 혀를 느끼고 어깨를 위로 들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상태라, 기둥이 굵은 혀를 받기가 벅찼다. 무게중심을 잡지 못한 선재의 상체가 뒤로 기울어졌다. 범진이 힘까지 가득 싣고 돌진해와, 버틸 여력이 없었다. 안 그래도 힘이 없던 몸에 범진의 몸까지 겹치려니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머리가 더는 흔들리지도 않는 상태인데 앞이 핑핑 돌았다.

범진은 선재의 목구멍에 혀끝을 밀어 넣다 갑자기 입을 뗐다.

“야.”

“하아, 흐….”

“선재야, 형님.”

“후으….”

“니가 가만히 있는데 좆 세운 새끼들 달려드는 건 내가 봐줄 수가 있어요.”

“…흐으.”

“근데 니 발로 찾아가면 내가 씹, 뭘 봐주까.”

주먹질을 받아도 이보단 낫지 않았을까. 선재는 입 안으로 들어왔던 범진의 체향과 페로몬에 정신을 잃을 것처럼 몸이 흐물대는 걸 느꼈다. 중심축을 제대로 세울 수도 없이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범진을 힘없이 쳐다보던 두 눈이, 기어코 뒤쪽으로 넘어가려 했다. 까만 눈동자가 흰자를 덮은 눈꺼풀 쪽으로 움직였다.

“그, 그 사람… 그만 괴롭…괴롭혀….”

뒤쪽에서 들린 소리에 범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반 패 죽인 상태로 집에 데리고 와, 처음엔 우는 소리만 들렸었다. 점점 정신이 드는지, 이젠 무어라 말까지 하고 있었다. 열성 알파에다 하는 짓이 느끼해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또 좆같은 소리를 하는 게 들렸다.

“…괴…괴롭히지… 마….”

“…허.”

뒤쪽을 휙 돌아본 범진이, 선재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뒤로 넘어가며 등을 침대 헤드에 부딪힌 선재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엄지로 콧속을 가볍게 긁은 범진이 남자에게 다가가 상체를 숙이고 눈을 맞췄다.

“뭐라고, 개새꺄?”

“…으으, 으윽.”

그 길로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집 밖으로 나간 범진은, 복도 창가에서 남자의 상체를 허리까지 매달았다. 팬티 차림으로 창틀에 매달린 남자가 다리를 버둥댔다. 이미 장기가 망가져, 배에 충격을 가하니 입에선 걸쭉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화단의 마른 나뭇가지로 떨어지던 피가, 남자의 콧속으로도 들어가 거품으로 부글부글 역류했다. 범진은 그러는 모습을 보고도 분을 참지 못했다. 남자의 팔을 위로 들어 손을 고깃덩이라도 된 듯 벽에 댔다. 그리곤 주먹으로 퍽퍽 쳐, 손뼈가 잘게 부서지도록 만들었다.

그즈음, 선재의 귀에서도 온갖 소리가 들렸다. 집에 여러 명이 다녀가는 듯했다. 검은 양복이 보이고, 셔츠를 입은 마른 남자도 언뜻 본 것 같았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낯선 사람들이, 왜 제 집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지를 몰랐다. 선재는 멀어지는 정신을 다잡아 옆을 봤다. 작게 올라온 이불 속에서, 아이가 그래도 편한 잠을 자고 있는 걸 보았다. 많은 불행 중, 그거 하나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한 선재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더는 눈을 떠서 주변을 쳐다보는 것도 무리였다.

나쁜 꿈속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면 좋겠다.

선재는 꿈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도 모르고,

뭔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들은 건 아침이었다.

지독한 악몽에라도 시달렸던 듯, 눈을 번쩍 뜬 선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밤이었는데 날이 밝았다. 빛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꿈이구나.

선재는 옆을 쳐다보며 안심을 했다. 아이가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잠에서 깨려 하는 것도 보였다. 그럼 그렇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형님, 일어났습니까.”

화장실 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범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선재가, 얼굴을 급격하게 굳혔다. 오줌을 눈 듯 성기를 만지작대며 다가오는 게 기억 속의 범진과 비슷했다. 선재는 고개를 반쯤 들고 범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더는 꿈도 뭣도 아닌 것 같았다.

“잘 놀았어요.”

잘 놀았냐고 물은 범진은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얼굴로 가만히 저를 보다, TV 아래로 가 몸을 숙이고 앉았다. 거기서 두둑, 하고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 건 순간이었다. 뒤를 돌아 요거, 하고 손을 드는 범진에게 선재도 시선을 고정했다. 범진의 손에 들린 작은 렌즈에 눈길을 보냈다.

“내 형님 보면서 딸 좆나게 쳤다.”

“….”

“…뭐, 인생이 술술 풀리는데 그게 형님 인생 같았습니까.”

작은 카메라를 뒤로 날린 범진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한 번만 더.”

“….”

“도망가면 그땐 다 죽는 줄 아세요.”

“….”

“저것도 가만 안 놔둡니다.”

턱으로 옆에 있는 침대를 가리킨 범진에게, 선재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아무래도, 범진은 모든 걸 다 알았지만, 장난하듯이 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만 같다. 선재는 저거, 하며 손가락질을 한 범진에겐 무턱대고 알았어, 알겠어, 하는 말만 사정하듯 했다. 제가 죽는 거야 몇 번이든 괜찮지만, 아이에겐 그런 비슷한 말이 닿는 것도 원치 않았다. 선재는 편하게 있던 자세를 고쳐 무릎까지 꿇었다. 잘못했냐는 범진의 말엔 잘못했다는 말만 뻐꾸기처럼 했다.

시간이 지나, 밥 좀 얻어먹자는 범진의 말에 선재는 주방 개수대로 가 손부터 씻었다. 범진은 집 안을 돌아다니며 설치된 카메라들을 손봤다. 공유기에는 새것을 넣을 예정이라고, 그런 말을 선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선재는 그런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못 했다. 그저 물을 크게 틀어놓고, 거칠어지는 숨을 어떻게든 고르려고 노력했다.

냉장고 앞판으로 범진이 뭘 하는지가 시시각각 보였다. 어느새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범진은 베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저걸 왜 맡나. 태연하게 냉동실 문을 열어 새우를 꺼내려고 했지만, 범진의 잔뜩 부푼 아랫도리도 눈에 들어왔다. 뒷머리가 지잉 울리듯이 아팠다. 새벽에 뒷머리를 얼마나 세게 잡혔는지 모르겠다. 맞지 않긴 했지만 그게 다행은 아닌 것 같고…. 선재는 고개를 저으며 냉장고에서 새우를 꺼냈다.

밥 한번 먹었을 뿐인 그 남자는 지금 어떻게 된 걸까. 선재는 그가 괜찮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제발 괜찮기를 빌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 하필이면 저같이 이상한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그런 일은 벌어진 거니까. 제발 괜찮았으면 했다. 혜윤에게는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아니, 우선 원장님부터. 오늘 무단결근을 한 것부터 뭐라 말할지. 새우 꼬리를 작은 칼로 자르던 선재의 손이 한 번씩 미끄러졌다.

“아.”

결국은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깊이 파이진 않았지만, 대각선 진 균열에서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병신 같은 게.”

선재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새 옆으로 다가온 범진이 제 손가락을 내다보며 때릴 기세로 말했다.

“눈을 달고 있으면 뭐 하냐.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

선재는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시비를 거는 범진에게 마음만 축 가라앉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그게 죄라고 하니, 그러려니 했다.

“필요도 없는데 눈알 이거 그냥 확 뽑아버릴까.”

범진이 눈 뽑는 시늉을 했다. 커다란 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뭘 보냐, 씨발.”

눈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올리는 범진의 동작에 선재의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개열받게.”

슬쩍 다시 눈을 떠 바라본 범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금방금방 열을 받고, 금방금방 웃는다. 핏물이 나무 도마 위에서 안개 같은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무심히 손가락을 쳐다본 선재가 수도를 틀고 핏물을 씻어냈다.

“하, 씨팔.”

침이 다 튈 듯 악센트를 넣어 욕한 범진이 계속 곁에 서 있었다. 그 욕을 듣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선재가 수도부터 잠갔다. 다행히 새우가 있는 쪽엔 핏물이 스미지 않았다. 도마를 기울여 물을 묻힌 선재가 칼을 다시 잡았다.

한쪽에 모아둔 새우를 다시 도마 중앙으로 가져오는데, 범진이 위쪽에 있는 찬장을 퍽 하고 쳤다.

“…왜….”

소리에 몸을 움츠린 선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반응했다.

“근데 도망은 왜 갔는데요.”

“….”

그걸 몇 개월이나 지나서. 난리를 쳤던 어제 새벽도 아니고 지금, 범진은 묻고 있었다. 선재는 태백에서 느꼈던 막막했던 감정을 범진에게는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입으로 좀 들읍시다.”

“….”

“내가 형님이면 겁나서라도 못 그럴 것 같은데.”

“….”

“그깟 뺨 한 대 쳤다고.”

“….”

애써 잊고 있었는데 범진이 상기시켰다. 누가 뺨만 맞아서 도망쳤을까. 선재는 그날 느꼈던 막막했던 미래를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서울로 왔지만, 태백에 있는 것보단 나았다. 아니, 장소가 문제인가. 겨우 도망쳐왔는데, 이곳이 다시 지옥이 됐다. 선재의 눈이 가볍게 감겼다 뜨였다.

“다른 년이었음 봐라. 반 쳐 죽여놨지.”

“….”

“도망 씨발, 진짜로 가지 마세요.”

“….”

“대답 안 합니까.”

“…알았어.”

“이쪽 보고 해야지.”

“알았….”

소리가 들린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자, 냅다 입술이 맞부딪혀왔다. 머리가 밀려 범진의 왼팔에 뒷머리가 닿았다. 코와 코가 간신히 빗겨나 있는 각도였다. 선재는 강제로 입이 벌어져, 구렁이처럼 들어오는 범진의 혀를 버겁게 받았다.

범진이 말을 막으며 키스해오는 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태백에 있을 땐 자주 그랬지만, 지금은 시간이 꽤나 지나버렸으니까. 오늘 새벽에 한 키스는 정신이 너무 없어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선재는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티 나지 않게 뒤로 뺐다. 숨이 막혀 푸으, 하고 입술 새로 바람이 빠졌다. 젖은 손을 올린 선재가 범진의 단단한 배를 밀어내었다.

귀에서 어디, 하고 겁주는 소리가 들렸다. 범진은 밀어낸 만큼 몸을 가까이 붙이고 키스해왔다. 치아와 입 안 살이 모조리 범진의 혀에 감기고 있었다. 지긋이 밟힌 발엔 눈가가 주저앉았다. 그냥 밟는 것도 아니고 꽉 붙잡듯이 밟아 통증이 심했다.

가장 싫은 건 배에 꾹 닿는 성기였다. 처음부터 닿고는 있었지만 계속해서 부푸는 탓에 배가 짓눌린단 느낌이 있었다. 제발 그만 좀 해. 그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닌 건 알지만, 마음 같아선 몇 번이나 귀에다 대고 그런 말을 외치고 싶었다. 범진이 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지를 몰랐다. 그렇게, 그렇게까지 제 삶이 망가지는 게 재밌는가.

단단히 잡힌 팔을 움직이려 하자, 범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를 냈다.

“씨발… 가만히 있어라….”

“….”

“개좆같은 거 다 참고 있으니까.”

키스를 멈추고 눈을 내리깐 범진의 얼굴이 사납게 바뀌어 있었다. 미간을 조인 채 숨을 몰아쉬던 선재의 눈이 범진의 뺨 흉터에 닿았다. 낮이어도 주방에 있는 불을 안 켜니 그 흉터가 더 검고 깊이 팬 것처럼 보였다. 험상궂은 표정 때문에, 선재는 더는 범진을 쳐다보지 못했다.

“…뭐…!”

갑작스러운 손길이었다. 선재는 갑자기 벗겨진 바지에 잽싸게 뒤로 돌았다. 몸을 붙인 범진이 어쩌랴, 하고 저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엎드려라.”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내려간 바지를 올리려던 선재가 다시 엎드리라고, 하는 음성엔 멈칫했다. 뭐에 화가 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힘줄까지 솟은 범진의 얼굴엔, 선재는 제게만 죄가 있다고까지 착각하게 되었다.

“….”

“백준희 깬다.”

그 말에 가라앉아 있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눈썹을 조인 선재가 앞만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팬티는 형님이 내리세요.”

범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선재의 등을 눌렀다. 천천히 상체를 숙이던 선재가 싱크에 거의 엎드려서는 뒤로 돌아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

“알았어요.”

선재가 일을 서둘러 끝내려는 생각으로 팬티를 아래로 내렸다. 단호한 마음과 달리, 광경은 원색적이었다. 범진은 복숭아 속만큼 희고 통통한 엉덩이가 드러나는 것에 눈빛을 바꿨다. 팬티를 내리던 선재의 손이 엉켜 엉덩이는 반쪽만 드러난 채였다. 범진이 그 동그란 살덩이를 쳐다보다 제 손을 가져가 팬티를 제대로 휙 내렸다.

“아…!”

“이거 다른 새끼한테 대줬다간 다 죽입니다, 진짜로.”

범진은 곧바로 선재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양쪽 볼기를 세게 쥐었다 놓고, 또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기어코 뒤쪽으로 손을 댄 선재가 작게 애원했다.

“아, 알겠으니까, 그냥… 좀….”

준희가 일어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까 아이는 잠에서 거의 깬 것처럼 보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일까 두려웠다. 선재는 앞에 있는 수저통만 바라보며 뒤로 가져갔던 손을 앞으로 다시 그러모았다. 긴 키스에 부어오른 입술은 아직도 반짝임이 있었다. 그 입술을 꾹 문 선재가 퉤, 하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침에 젖은 범진의 손날이 선재의 엉덩이 사이를 갈랐다. 키스를 길게 한 탓에 어쩔 수 없는 몸의 반응이 있긴 했지만, 성기를 삽입할 정도로 젖진 못했다. 손가락을 세우고 약간의 애액과 침을 비빈 범진이 구멍에 삽입할 듯 그 근처를 위아래로 비벼댔다.

“형님.”

“…왜…왜….”

“형님이 잡고 벌려보세요. 나는 내 좆 좀 꺼내게.”

나쁜 새끼. 지독한 새끼. 개 같은 자식. 차라리 빨리 삽입하고 끝내기를 바라고 있는데, 범진은 그것조차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로 뒤를 돈 선재가 범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

“지금 야렸냐.”

“….”

금방 시선을 내린 선재가 숨을 몇 번 몰아쉬다 다시 앞을 봤다. 짝, 하고 가볍게 엉덩이를 때리는 범진의 손길에 얼굴이 남김없이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 쥐고 있던 두 손을 펼쳐 뒤쪽으로 가져간 선재가 이를 악물고 엉덩이를 잡아당기듯 벌려, 그 사이로 뻐끔거리는 구멍을 범진에게 내보였다.

“…다른 새끼한테.”

이랬다가는 또 죽여버릴 거라고, 범진이 말했다. 혼자 말하고 혼자 화를 냈다. 그동안 더 미쳐버린 걸까. 선재는 손끝이 하얘지도록 엉덩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괜히 손을 뗐다간 이 고생도 수포로 돌아갈 걸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범진의 지독한 성격상, 손을 놓으면 더 오래 이러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희게 질린 손끝을 쳐다보던 범진이, 발딱 선 자지를 선재의 구멍 앞까지 들이밀었다.

선재의 얼굴을 쳐다보고, 침대에 밴 냄새까지 맡자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하던 자지였다.

좆기둥을 잡고 구멍 안으로 밀어 넣자, 귀두부터 쑥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소 말라 있던 엉덩이 사이에 침을 발라놔 진입하기는 수월했다. 사방에서 좆을 쥐는 내벽의 느낌에, 범진이 씨팔, 하고 선재의 엉덩이를 꼬집듯 잡았다.

축축하고 꾸물거리는 장기가, 저 얼굴과는 딴판인 그 구멍 안이, 범진은 좋으면서도 괘씸했다. 선재의 어깨를 세게 누른 채로 허리를 쓰기 시작했다. 성기가 퍽, 퍽, 박힐 때마다 선재의 등이 동그랗게 올랐다 꺼지길 반복했다. 처음부터 들려 올라가던 잠옷을, 범진이 완전히 위로 젖혀 올렸다.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등이, 제 자지가 삽입될 때마다 움찔거리고 있었다. 범진이 동그란 머리통을 쳐다보며 자지를 처박았다.

“으윽, 흑.”

포악한 움직임에, 입을 악착같이 닫고 있던 선재에게서도 소리가 새 나왔다.

“애 깨울라고?”

안쪽까지 단단히 박아넣은 채로 어깨를 누른 범진이 낮게 읊조렸다. 감정을 참는 듯한 얼굴이 범진에게도 언뜻 보이고 있었다. 그 타이밍에 자지를 슬쩍 뺐다 강하게 처박은 범진이, 다시 선재의 얼굴을 누르고 살폈다.

“흐윽….”

소리를 참지 못한 선재가 흐느꼈다.

“조… 흐, 윽, 좀만, 좀만 살살….”

읊조리듯 입을 연 선재가 잠깐 움직임을 멈춘 범진을 향해 고개를 조금 돌렸다.

“내가 왜. 씨발. 니는 내 말 들었냐.”

그 말을 듣자마자, 범진이 화가 난 듯 허리를 난폭하게 썼다.

“아, 아흐, 흑, 읍.”

앞으로 몸이 밀리며 격하게 박히는 탓에, 선재의 성기가 수납장에 찌그러진 채로 비벼지고 있었다. 너무 아프기만 해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아무리 힘을 써도 범진은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선재가 결국 조용히 울음을 터뜨리며 고갯짓을 했다.

“아프다고… 아파… 너무, 우흑… 흑….”

서서히 범진의 움직임이 잦아드는데도 선재는 엎드린 채로 계속 흐느끼기만 했다.

“하, 이 씨발년이 진짜… 어디가 아픈데.”

성기도 성기지만 딱딱한 면에 계속 부닥쳤던 장골뼈가 새빨갛게 올라있었다. 계속 이대로 박히다간 피멍이라도 들 게 분명했다. 대충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본 범진이 선재의 허리 아래로 두 손을 넣고 싱크대에 제 손등이 닿도록 했다.

“썅년이, 벌 받는 줄도 모르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아주 씨발, 후우.”

“흐으, 흐….”

“그만 좀 쳐울어라.”

잔뜩 성이 난 투로 선재의 튀어나온 뼈 부분을 감싼 범진의 손이 퍽, 힘이 가해질 때마다 싱크대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손등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지 거친 몸짓이 이어졌다. 범진은 몇십 초가 가서야 천천히 박기 시작했고, 여차하면 가만히 있어 주기도 했다. 위쪽 내벽을 긁어주면 선재에게서도 느리게나마 반응이 왔다. 으으…으흑… 울음 사이로 끼어든 앓는 소리가 범진의 귀에도 그대로 닿았다.

“좋으라고 박아주냐…?”

범진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선재의 예민한 점막을 더욱 힘있게 찔렀다. 박을 때마다 손에 부딪히는 선재의 뼈에도 묘한 흥분이 이는 듯했다. 한참을 박다 선재의 배를 가볍게 치며 뒤로 당긴 범진은, 구멍에 자지를 박은 채로 몇 걸음 물러났다. 선재도 자지가 박힌 채로 엉성하게 뒷걸음을 쳤다.

“얼굴.”

범진이 지독스럽게 자극한 탓에, 선재의 성기도 반은 발기한 상태였다. 수납장에 눌린 성기가 평소보다 더 붉은 빛을 띠며 위로 올라있었다. 얼굴, 하고 말한 범진을 향해 고개를 돌린 선재가 그대로 맞닿는 입술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범진이 하체를 빼고 다시 박을 때마다, 선재의 성기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얼굴이 좀만 떨어져도 젖꼭지를 세게 꼬집는 범진 때문에, 선재는 필사적으로 얼굴을 뒤로 한 채 입을 내주었다. 범진의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구멍 입구를 감싼 점막이 흉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재는 눈 끝에 물을 한가득 맺은 채 범진을 벌게진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입과 구멍을 내주고 있는 선재를 노려보듯 쳐다보던 범진의 미간에 사정없이 금이 갔다. 아무 소리도 없이 입 맞추며 자지만 박던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세게 주물렀다. 한참 뒤에 좆 끝에서 터져나간 정액은 양이 어마어마했다. 범진이 좆물을 안쪽 내벽까지 칠하려 허리를 더욱 깊이 썼다. 그 움직임에 고통을 느낀 선재가, 발끝을 바르르 떨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래도 범진과 하릴없이 몸이 붙었다.

범진의 성기가 빠져나가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은 선재는, 한동안 일어서지도 못했다. 뭐라고 욕을 하며 팔을 흔드는 범진은 역시 상대방 입장 따윈 전혀 생각해주지 않는 듯했다. 선재가 그 무력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몽둥이찜질이라도 당한 듯 온몸이 쓰라렸다. 엉덩이 사이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엔 눈이 질끈 감겼다.

반강제로 일으켜진 선재가, 그 상태로 자르던 새우를 마저 잘라 밥에 넣고 볶았다. 처음엔 다른 걸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준희가 먹는 볶음밥용 밥을 꺼내 어떻게든 볶아 냈다. 소금은 치지 않아 싱거울 게 분명한데도 간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범진은 다리를 쩍 벌리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냥, 저 남자는 제게서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고, 충족만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목하니 패인 널따란 접시에 볶음밥을 옮겨 담는 선재가 아랫입술을 몰래 깨물었다. 엉덩이에서 안쪽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얼굴을 확 붉힌 선재가 흔들리는 미간을 겨우 다잡았다. 그릇 위에 고슬고슬하게 익은 새우 볶음밥이 한가득 담겼다.

밥 먹고 섹스하고 잠자고. 그것만 하면 다라는 듯이 구는 무서운 남자.

“형님도 앉아야지. 어디 가는데.”

“….”

선재가 대리석 식탁 모서리에 몸을 붙인 채 가만히, 범진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뭘 쳐다봅니까?”

“….”

“왜 씨팔, 더 쑤시줄까.”

히죽 웃으며 숟가락 가득 밥을 뜨는 범진을 향해선 억지웃음도 지을 수 없었다. 그저 뒤돌아 딴청을 피운 선재가, 싱크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깊은 잠에 빠져든 준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괴롭고 굴욕적인 건 잠시고, 그다음은 어느 정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둥근 밥그릇 하나를 꺼낸 선재가 제 몫의 새우 볶음밥을 천천히 담았다.

“이 정도로 그만하는 거는.”

“….”

굳이 식탁에서 제일 돌출이 된 모서리 면에 앉은 범진이, 목소리를 확 낮추고 입을 열었다.

“그날 나도 딱히 잘한 건 없어섭니다.”

“….”

선재가 벽면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범진이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그만한다는 걸까. 선심 쓰듯 말한 ‘이 정도’가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 맞나. 선재는 범진의 눈을 쳐다보다 식탁 쪽으로 시선을 떨궜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숟가락을 드는 선재의 손에 푸른 핏줄이 몇 가닥 서 있었다.

“형님은요.”

“뭐….”

“나한테 미안하지 않았어요.”

“….”

진심으로 사과를 원하는 듯한 표정을 쳐다보던 선재의 말문이 턱 막혔다.

섹스 도중에 벌이라고 했던 것도 그렇고, 범진은 어디까지나 저를 용서하는 입장인 듯했다. 선재는 왜 제가 잘못한 입장이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으로 감정을 소모하긴 더 싫었다. 도망을 간 건 맞으니까. 어쨌든 범진의 구렁에서 벗어나려고는 했으니까. 쿠션감이 좋은 의자 위에 앉아있어도 골반과 허리가 계속 욱신거렸다. 고개를 끄덕인 선재가 범진의 눈을 다시 쳐다보았다.

“미안….”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봐주는 거는.”

“…응.”

마지못해 선재가 대답했다.

“불에다 기름 쏟은 건 니다.”

이후론 욕설이 공기처럼 와 닿았다. 선재는 젓가락으로 밥만 깨작거렸다. 섹스의 여파가 남은 뺨의 홍조가 내내 가라앉지 않았다. 선재는 보이지도 않는 제 뺨이 얼마나 빨개졌는지를 잘 알 것 같았다. 범진의 얼굴도 그만큼 붉었기 때문이었다. 격하게 섹스한 탓인지 저런 남자의 얼굴에도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근데.”

“….”

밥을 먹는가 싶던 범진이 숟가락으로 식탁을 탁, 치며 얼굴을 구겼다.

“그 새끼랑 밥은 왜 먹었는데.”

“…아는 선생님이 부탁해서.”

젖은 목소리지만 짧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는 죄가 없다. 그런 식의 말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을 완전히 닫은 선재가 헛기침을 했다.

“아는 선생님 누구. 오혜윤이?”

“….”

선재는 혜윤의 이름을 듣고, 범진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점점 두려웠다. 떨리는 눈을 다잡은 선재가 범진을 쳐다봤다.

“왜. 내가 알면 안 됩니까?”

아니. 고개를 저은 선재가 그냥, 선생님들이… 하며 말꼬리를 늘였다. 혜윤을 딱 짚었다간 혜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범진은 제 인생을 망치는 것에 큰 흥미가 있는 사람이고, 주변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으니까. 선재가 자조적인 결론을 내며 볶음밥 사이에 있는 새우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표정이 뭣 같네.”

괜한 시비를 거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선재는 차라리 눈을 마주치지 않기로 했다. 저를 보라고 화내는 게 아니면, 식사하는 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혜윤이랑 많이 친합니까.”

범진은 궁금한 게 그리도 많은지 혼자 화내다가 뭘 묻고, 또 화내다가 생뚱맞게 질문을 던지길 반복했다.

“…같이 일하니까.”

“형님 그냥 여자도 좋아해요?”

“그런 거 아냐.”

“형님 거시기는 박으라고 있는 것도 아닐 건데.”

“…그런 거 아니라고.”

선재는 범진의 이런 말들엔 계속해서 토를 달았다. 주변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일이 이렇게 돼 안 그래도 혜윤에게 미안한 마음만 있는데…. 계속 엉뚱하고 의뭉스러운 소리만 해대니 말대꾸라도 제때 해, 어린이집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싶었다. 거시기, 어쩌고 한 말엔 선재의 표정도 티나게 찌푸려졌다.

“얼굴 재밌네, 씹팔.”

“….”

“그 어린이집인가 좆집인가 근처도 가지 마세요.”

아무 연관도 없는 두 단어를 매치시킨 범진 때문에, 선재의 표정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

“왜. 불만 있냐.”

“….”

“불만 있음 도망가. 씨벌아.”

씨이벌아. 하며 말하는 범진은 턱을 위로 들어 올리며 주변 분위기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선재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겠지만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준희를 떠올리면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아이는 절대로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저처럼,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온 저처럼 되지 않길 원했다.

“형님은 왜 요리를 아무리 시켜도 늘지를 않냐.”

이후로 식사는 조용히 끝난 듯하다. 새우볶음밥을 반 넘게 먹던 범진이 그런 소리를 했던 걸 빼면.

“다음부턴 밖에서 먹자, 그냥.”

“…오늘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내일 더 맛있게 할게.”

“…그래도 오랜만이라고 밥은 해주고 싶나 보네.”

“어…? 응.”

선재의 입매가 어색하게 들려 올라갔다. 밖에서 먹었다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아이를 안고 이 동네 근처에서 범진과 밥을 먹기는 정말 싫었다. 동네 장삿집에서 멋대로 침을 뱉고 담배를 사 오라고 위협을 하는 꼴을 봐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그런 맥락에서 밥을 해주겠다고 한 걸, 범진은 저 좋을 대로만 들었다. 원래 편할 대로 생각하니까. 선재는 범진의 기꺼워하는 표정에, 같이 입을 말아 억지로 올려주었다.

* * *

범진이 제 생활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제가 범진의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범진과 함께 아침을 맞았다. 범진이 옷을 다 벗고 자는 통에 깊은 잠은 늘 잘 수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피곤한 날엔 코까지 골며 자, 커다란 존재감까지 동시에 느껴야 했다. 매일매일 신경이 예민해져 갔다.

일을 하며 어쩔 수 없이 다시 개통했던 휴대폰이 문제인가 싶었다.

이걸로 추적을 했나? 싶어 화장실에 볼일을 보듯 들어가 한참을 그 화면만 쳐다본 적이 많았다.

사는 집은 어떻게 알았고, 카메라는 어떻게 달았을까? 선재는 범진보다 일찍 깨어나거나 늦게 잠들 땐 늘 그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넓은 침대 한복판에 누운 범진은 오늘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아무 자극도 받지 않은 육체의 피가 중심부에 건강하게 모여들어 있었다. 선재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있다가, 준희가 깨어나면 준희의 침대 위로 올라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깨어나지 않는다.

선재는 식탁 위에 쌓인 돈뭉치를 바라보다 창 쪽에 있는 준희의 침대, 그리고 범진을 느린 눈빛으로 훑었다.

주방에서 급하게 섹스한 날, 범진은 침대부터 바꿔야겠다고 혼자 난리를 쳤다. 형님이 고르고 싶냐고 물었다가 금방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이렇게 된 판국에 인테리어가 무슨 소용인가. 범진은 어차피 곧 이사할 거긴 한데 그래도 이런 데선 둘이 못 잔다고 중얼거리며 엄청나게 큰 침대를 하나 집 안에 들였다. 하루나 지났을까 싶었다. 가구 배달기사 여럿이 집에 찾아와 그 큰 침대를 긴 시간에 걸쳐 설치해주고 갔다. 준희가 드릴 소리에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선재만 고생을 했다. 범진은 아이가 울든 말든 옆에서 눈썹이나 세우고 서 있고, 그게 아니면 기사들에게 가 별 이유도 없이 험한 말을 했다. 기사들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작업이 끝난 다음에 설치 기사들에게 고개 숙인 건 선재였다. 그마저도 범진이 창가에서 큰소리로 통화 중이라 가능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냐고 성질을 부릴 게 분명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선재는 범진이 가져다준 돈을 쓰며 생활하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당연하게 섹스를 하는 것과 밤과 새벽에도 같이 있어야 할 때가 많아졌다는 것 정도다. 범진은 여전히 위험한 삶을 살았고, 거칠고, 나쁜 사람이었다. 피를 묻히고 그대로 집에 올 때도 있어 등골이 송연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땐 늘 준희가 걱정되지만… 그래도 준희를 나쁘게 대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런 쪽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야… 거 서서 뭐 하냐….”

“일찍 깨서….”

“누가 씨… 그런 거 궁금하댔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저런 식으로 옆에 없으면 화부터 내고 보는 범진이라, 선재는 침대가 자리한 쪽으로 발걸음부터 옮겼다. 범진이 팔을 열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보였다.

“뭐….”

“뭐?”

“아니… 왜 불렀냐고.”

“이게 아침부터 처맞으려고.”

선재가 그 말엔 입을 다물었다. 집에 쳐들어왔던 날 머리가 잡혔던 것만 빼면 별다른 폭력에 노출된 적이 없긴 했다. 그래도 뺨을 맞은 적이 있고, 범진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익히 아니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다. 선재는 위쪽으로 올라오라는 범진의 손짓을 보고 침대 위에 무릎부터 올렸다.

신경을 안 쓰고 싶었지만, 발가벗은 데다 저렇게 발기한 성기가 눈에 안 띌 리 없었다.

범진은 선재를 향해 턱으로 발기한 성기를 가리켰다.

빨라는 뜻이었다.

어제도 빨았고, 엊그제도 빨았는데 못 할 건 없었다. 범진을 쳐다보다 금방 고개를 돌린 선재가 검붉게 솟아 있는 성기에 얼굴을 천천히 내밀었다.

입을 벌려 성기 끝을 물려고 하던 찰나,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쥐었다.

“왜….”

“형님도 벗어야지.”

“….”

“내가 벗기줘?”

아니, 하고 웅얼거린 선재가 잠옷 바지를 느리게 벗었다. 펠라만 받으면 될 것을, 범진은 이렇게 허벅지나 엉덩이를 함께 지분거리길 원했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자 하얀 팬티가 드러났다. 웬만해선 면팬티, 그것도 흰색이 좋아 취향대로 사다 보니 속옷 대부분이 그렇게 생긴 것들뿐이었다. 선재는 속옷이 드러날 때마다 다른 걸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범진 때문에 시간을 내는 일이 어려웠다. 그렇다고 인터넷 주문을 하기에도 민망했다. 혹시라도 범진이 먼저 확인하면 그 앞에서 팬티를 쭉쭉 늘리고 장난칠 게 뻔했다. 그건 더 싫었다.

“왜…?”

그렇게 팬티를 내놓은 채로 범진의 것을 다시 물려고 하는데, 범진이 또 엉덩이를 세게 잡아챘다.

“올라와서 좀 빨아봐라.”

“…올라왔잖아.”

“씹, 이렇게.”

갑자기 들리는 엉덩이에, 선재가 손을 범진의 허벅지에 갖다 댔다. 범진은 선재의 엉덩이를 얼굴 바로 앞까지 올리고서야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민망한 자세로 올라오게 된 선재가, 최대한 엉덩이를 앞쪽으로 당기며 범진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팬티 안으로 쑥 들어오는 범진의 손이 뜨거웠다. 선재는 커다란 손에 마구잡이로 엉덩이가 잡히자 눈살을 찌푸렸다. 입에 있는 성기를 뱉으면, 범진이 당장 안 무냐고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벌써 몇 대나 맞았는지 몰랐다. 차라리 사정을 빨리 시켜야지. 선재는 그런 생각으로 발기해 있는 성기를 입 안으로 빠르게 밀어 넣었다. 목 끝을 살짝 찌르는 느낌 정도는 괜찮았다.

그렇게 움직이려 했는데,

범진이 팬티를 확 끌어 내리는 게 느껴졌다. 성기를 입 밖으로 내뱉은 선재가 손을 엉덩이로 가져갔다.

“씨이팔, 뭐 하냐….”

“…해줄 테니까 옷 입게 해줘.”

“야… 니 씨발, 이거 누구 건지 모르냐….”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벌렸다.

개구리처럼 엉덩이를 내밀고 범진의 몸 위에 올라가 있는 것도 부끄러웠는데, 팬티까지 벗겨지니 수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가 난 듯한 범진은 물러나 줄 생각을 안 하는 듯했다. 돌아보고 있던 선재가, 다시 꼿꼿하게 솟아오른 범진의 성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침에 진을 빼봤자 저만 손해다. 굳게 마음을 다잡은 선재가 성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함만 더 빼면 바로 씹질로 간다.”

눈을 세게 감은 선재가 입에 머금은 성기를 목 끝까지 천천히 넣었다.

아침부터 섹스하긴 죽어도 싫다.

얼마간의 경험으로, 아침에 일을 치르면 저녁이 될 때까지도 피곤함을 느끼게 된단 걸 알아버렸다. 그렇다고 저녁이나 밤에 섹스를 거르는 인간도 아니었다. 선재는 준희의 점심밥도 못 챙겨 주고 잠을 잔 후로는 온갖 핑계를 대며 아침 섹스만은 피하고 있었다. 적응되면 모르겠지만, 또 적응하기도 싫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렇게 상대해줄 힘이 제겐 없었다.

선재의 동그란 머리통이 자지 근처에서 왔다 갔다 했다.

범진이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엉덩이에 곧장 시선을 고정했다.

한 번만 더 빼면 떡을 친다고 해놨으니, 자진해서 입으로 자지를 뱉진 않을 터다.

씩 웃은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힘껏 잡아 벌렸다. 아까는 대충 벌렸는데, 이번엔 제대로 힘을 줘 벌렸다. 자지 기둥 중간에서 멈칫, 하고 머무르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범진이 눈앞의 엉덩이를 가볍게 치며 제대로 안 빠냔 말을 덧붙였다.

그때까지도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있던 범진은,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구멍과 주름에도 눈길을 보냈다. 경험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양이나 색으로 판단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몇 년을 해대면 제 자지에 맞춰서 모양은 바뀌지 않을까. 저 얼굴과는 딴판으로 축축하고 흐물거리는 내벽도 말이다. 범진은 그 생각으로 점점 커지는 자지를 느꼈다. 물고 있던 선재도 발기의 정도에 따라 소리를 달리했다. 배에 붙을 듯 뒤집히며 발기하기 시작하면, 선재는 중간까지 무는 것도 제대로 못 했다.

범진은 목과 어깨를 세워, 선재가 엉덩이를 들고 성기를 빨도록 만들었다. 살짝 버둥대던 선재는 입 안에서 차마 성기를 못 뺀 채 우읍, 하는 소리만 냈다. 또 씩, 웃은 범진이 선재의 엉덩이를 다시 찢어질 듯 벌렸다. 이번엔 구멍은 물론이고 안쪽 내벽도 슬쩍 보이려 했다.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넣어 엉덩이를 벌린 범진이, 기어코 촉촉한 입구 쪽 내벽을 들여다봤다. 꾸물거리던 점막에서 애액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뭐 했는데 질질 싸고….”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범진은 이런 것도 괜찮다 느끼며 바로 앞에 있던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갖다 댔다. 혀를 내밀어 방금까지 벌려놓았던 구멍 주변 주름을 살살 쓸기 시작했다. 선재가 엉덩이를 앞으로 빼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그만해, 하고 성기를 문 채로 울먹였다.

혀로 이런 곳을 애무 당한 적이 없는지, 선재는 많이 놀란 눈치였다.

혀를 빳빳하게 세운 범진이 구멍에 끝부분을 삽입해가며 선재를 놀렸다.

몸의 반응 때문에 애액이 흘러내리면, 범진이 그걸 핥아 먹었다.

그때마다 자지 끝에 닿는 선재의 목구멍이 기분 좋게 움직였다. 뭐라고 우는 소리가 안에서 맴도는데, 목구멍도 함께 열려 일부러 그렇게 빨아대는 것 같았다. 좆이 선재의 연한 입천장을 치며 발기했다.

입 안이 아프고 목 끝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선재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 얼굴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엉덩이가 벌어지는 느낌도 참기가 힘들었다. 간질이듯 살살 닿는 혀에, 얼굴이 시뻘게진 선재가 최대한 깊숙한 자리까지 성기를 삼켰다.

“함부로 이거 빼고 그러면 뒤진다.”

범진은 엉덩이를 짝, 때리며 선재에게 말을 걸었다.

엉덩이를 멋대로 빼지 말란 소리였는데 선재는 성기를 입에서 빼지 말란 소리로 알아듣고 무슨 말을 더했다. 목구멍이 움찔거리는 감각에, 범진이 후으, 하고 만족한 듯한 숨소리를 냈다. 조금 못 빤다 싶으면 다시 선재의 엉덩이를 벌리고 혀를 쑤셔 넣었다. 곱게 접힌 주름을 혀로 쓸고, 금방이라도 자지를 박아도 될 듯한 구멍 안쪽에 단단한 혀 기둥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 또 목이 움찔, 하고 떨리며 자지 끝을 감쌌다. 다음에도 이렇게 말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범진은 마무리하듯 선재의 구멍을 빨아 재꼈다. 포동포동하게 부은 입구 쪽 내벽을 보자니 선재의 깨끗한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구멍이 새끼손톱만큼 열릴 때마다 어김없이 애액을 내보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범진은 이제 사정하기 직전이었다. 한 손을 선재의 구멍 쪽으로 가져간 범진이 손가락 하나를 주름 사이로 느긋하게 밀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재의 목구멍이 사정없이 조여지는 게 느껴졌다. 범진은 검지를 끝까지 삽입했다가 빠르게 빼냈다.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쳐다본 뒤, 다시 그 구멍에 손가락을 삽입했다. 처음엔 느리게 했지만 갈수록 속도를 붙였다. 그러자 자지 끝에 닿은 선재의 목구멍도 급격하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우으, 우욱, 하는 소리를 내는 선재의 입 안에서 범진의 자지가 좆물 뿜을 준비를 했다. 범진도 그걸 느껴, 선재의 엉덩이에 꽂혔던 손가락을 더욱 빠르게 왔다갔다 했다. 열고 닫히던 선재의 목구멍 끝에 팍, 하고 끈적한 액이 퍼졌다. 범진은 정액도 짧게 싸는 법이 없었다. 몇 번이나 튀는 느낌이 나고서야, 선재는 입을 뗄 수 있었다. 우욱, 하고 고개를 뒤로 뺀 선재는 동시에 엉덩이에 꽂혀있던 범진의 손가락도 빼냈다.

선재는 범진에게 등을 보인 채로 입 근처에 묻은 정액을 닦았다.

입 안 깊숙한 자리에 사정된 정액이 반은 넘어가고 반은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있기도 잠시, 범진이 선재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내가 씨팔, 딴 데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

“…우으….”

우는 것도 제 앞에서 하라는 범진의 말을, 선재는 어디까지 따라줘야 할지 몰랐다.

하라면 해야겠지만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하는 일이었다.

바지와 팬티가 무릎까지 내려간 채로 울고 있는 모습을, 범진은 꼭 봐야겠단 식으로 굴었다.

당장엔 어떤 반항도 무의미해서.

선재는 범진이 안아주는 대로 몸을 맡겼다. 턱을 드는 범진의 손길에 하릴없이 얼굴을 위로 들었고, 바지나 팬티는 입을 수도 없었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으로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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