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과 백 그리고 회색-506화 (506/591)

506화

김수훈은 호텔로 찾아온 고려인 상인단체의 회장들과 만났다.

“반갑습니다.”

모인사람들은 10명으로 대부분 50살 정도 이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다들 머리가 약간씩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타국에서 힘들게 살며 고생을 너무해서 그런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 보였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했나요?”

김수훈의 물음에 임평석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저희 고려인들을 도와주세요.”

밑도 끝도 없이 도와달라고 말하자 김수훈은 입을 다물고 임평석의 주름이 많아 일그러진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를 어떻게 도와달라고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임평석은 자기들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인 우수리스크에서 사는 고려인들이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거나 혹은 농사를 지은 물건을 시장에 내다파는 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한 러시아마피아 조직이 자신들의 장사 터를 불법으로 점유하고 자릿세를 강제로 징수해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설명을 모두 들은 김수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임 회장님, 제가 어떻게 해주길 바랍니까? 제가 여기에 대해 잘 모르니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니 혹시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일단 도와주겠다고 대답하자 임평석은 구체적으로 돕는 방법을 말했다.

“저희들에게 상가를 따로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상가라면?”

“도시의 외곽에 집단으로 지붕만 있는 노점 상가를 지어서 저희들 고려인 단체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됩니다.”

이런 말에 김수훈은 의문이 들었다. 러시아 마피아가 다시 그 노점상가로 와서 자릿세를 받으려고 하면 해주나 마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마피아 조직은 어떻게 하고요?”

“그건 저희들이 따로 회비를 내서 자체적인 경비원을 채용하면 됩니다.”

“그래요? 어떤 경비원을 채용해요?”

“경찰이나 군인 출신을 채용할 생각입니다.”

결국 자릿세를 바치나 경비원을 채용하는 돈이나 그게 그거다. 그러나 경찰 출신 경비원을 채용하면 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없으니 조금은 전보다 좋아진다는 소리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점상가 건물이 다소 규모가 커야 된다고 했다.

러시아의 경제 사정이 너무 좋지 않다가 보니 이런 작은 규모의 지원금도 정부 기관에서는 해주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폐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나머지는 저희들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얼마나 도와주면 되나요?”

“미국 달러로 20만 달러만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고려인들 생각에는 재력 많다는 국왕인 김수훈이 러시아를 방문한 것을 기회로 자기들에게 무상으로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이야기다.

보아하니 딱한 사정은 틀림없었다. 본시 이득 없이 남을 그냥은 돕는 법이 없는 김수훈은 즉시 답하지 못하고 다시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복일이 슬며시 나서며 권했다.

“폐하, 러시아 정부에 말해 작은 터만 양해 받으면 됩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도와 줬으면 합니다.”

“알았어, 내가 러시아 관리를 만나면 한번 이야기해보지.”

김수훈은 고려인들을 만나서 공연히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20만달러를 주게 생기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허! 이거야 원, 보자마자 손부터 벌리다니.’

여러 사람 살리는 길이라니 도와주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백호에게 지시했다.

“사 차장, 이분들에게 20만 달러를 도와줄거니 현지에 가서 업자와 직접 건축계약을 하도록.”

“넷.”

러시아로 돈을 벌려고 왔다가 개시부터 공돈을 날리게 되었다.

고려인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김수훈은 신복일을 보며 조용히 나무랐다.

“복일아, 너는 앞으로 오늘 같은 경우 내가하는 일에 함부로 나서지 마라. 너 때문에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에게 20만달러 줬다.”

“폐하, 별로 많지도 않은 돈인데 동포인 고려인들을 도와주면 좋잖아요.”

“웃기고 있네. 그러는 너는 저런 동포들을 도와줄 생각은 안하고 여자 사는데 돈을 그렇게 쓰냐? 내 돈이 아까우면 남의 돈도 아까워야 되는 거지. 자기 돈이 아니라고 그냥 선심을 함부로 쓰며 말하면 안 된다.”

김수훈의 지적에 신복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사실 신복일은 여자들을 품에 안기위해 돈을 펑펑 쓰면서 지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라는 어려운 고려인들을 단 한 푼 도와준 기억이 없었다.

사람이란 여러 종류가 있다. 자기 돈도 아깝고 남의 돈도 아까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내 돈은 아깝지 않고 남의 돈만 아까운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내 돈도 아깝지 않고 남에 돈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김수훈은 자기의 재력으로 그런 정도 돈을 쓴다고 해 아까워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김수훈은 다시 신복일에게 말했다.

“세상일이란 쉽게 생긴 것은 반드시 쉽게 사라지게 된다. 너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세상 이치라고 보는 거야.”

사람이란 노력 없이 공돈으로 뭔가를 쉽게 이루게 되면 그만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다고 판단했다. 고려인들이 무조건 찾아와 도와달라는 말에 조금 달리 생각한 것이다.

도와주면서 조건을 건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치사한 일이다. 하지만 김수훈은 장학금을 주던 누굴 어떤 식으로 도와주던 완전히 공짜로 돕지는 않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왕국에서 어려운 독거노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해주면서도 공짜는 없었다. 반드시 빈 깡통 하나라도 들고 와서 제출해야 무료급식을 해주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잠시 고려인들을 만난 일로 대화를 나누던 김수훈은 사백호가 돌아오자 물었다.

“계약은 잘했고?”

“예, 별로 어려운 공사도 아니라 자체적으로 한다고 했지만 제가 업자와 계약하고 왔습니다. 2만달러를 선금으로 주고 나중에 공사 진척을 봐서 나머지는 주기로 했고요.”

“언제 공사는 끝나고?”

“터만 확정되면 10일이면 끝나게 됩니다.”

“그래? 그럼 내가 있는 동안에 준공이 되겠네.”

상가 건물이라고 해서 콘크리트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흔하게 5-60년대의 한국에서 흔하게 보였던 5일 시장에서 나무로 만든 기둥에 함석으로 지붕만 있는 그런 노점 상가를 짓는 것이다.

“상가 터는 어떻게 됐고?”

“폐하께서 지원해 준다니 관청에서 공지를 배려해 준다고 바로 약속하더군요.”

러시아 관리는 중앙정부로 부터 특별히 김수훈이 추진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지침을 받았던 것 같았다.

“다행이군. 나중에 공사가 모두 준공된 상태를 확인해 필요하다면 차장의 직권으로 20만불 정도를 더 지원해주도록하고.”

“넷!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중. 할라마 대사와 사관학교 교복을 입은 8명의 시녀들이 도착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시녀들은 다들 4명의 시녀들과 체구가 비슷하고 모두 한다하는 미모다.

김수훈은 젊은 미녀들을 옆에 두게 되자 속으로 생각했다.

‘잘못하면 구설수에 올리겠네.’

40명의 경호원들도 도착해 호텔에서 경호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단둘이 침실에서 만난 할라마 대사는 즉시 보고했다.

“러시아와 미국 대통령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언제요?”

“정상 회담이라 사전 준비가 필요해 15일 후에 여기서 모이겠답니다.”

“한국은 뭐라고 하던가요?”

할라마 대사는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폐하, 한국 대통령에게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한반도 통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니 지금 북경에서 장관급 특사가 북한 관료와 만나서 이야기 중이라며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게 생각하는 표정이라 폐하의 지시대로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중국이 개입하고 있나요?”

“예, 중국 관료도 회의에 참석한 3개국 실무자의 비밀 회담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나중에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겠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급하게 온 것은 중국과 북한 한국이 평양을 지나는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어섭니다.”

“뭐요? 그럼 한국이 그런 계획으로 북한과 중국을 만난다는 거요?”

“예, 아무래도 중국이 깊이 개입하게 생겼습니다.”

중국의 개임이야 예상한 일이지만 한국이 중국과 북한을 만나서 통일 문제를 논의한다니 변수가 생긴 것이다.

‘일이 이상하게 꼬일 수도 있겠어.’

김수훈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할라마 대사에게 물었다.

“함재기 문제는 확답을 받았어요?”

“예, 이미 대통령이 결재했다고 말하더군요.”

“다행이네요.”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추진하는 사업에 어쩌면 차질이 올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라마 대사는 다시 다른 문제를 거론했다.

“폐하, 소피아 공주님이 사고를 쳤습니다.”

“뭐요? 사고라뇨?”

“학교 근처 PC 방에서 놀리는 남학생을 패서 코가 뭉개졌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소송 사건이 벌어지게 생겨 보고 드리는 겁니다.”

“소송이라뇨? 어린 애가 치고 박고 한 것으로 소송 사건이 되나요?”

“떠나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이라 아직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일단 법무관을 보내 조사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소피아 공주는 다혈질인 성격이다. 그래서 말보다는 다소 주먹이 앞서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도 이미 다문화 가정이 많아졌지만 애들 사이에는 혼혈인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그래서 소피아는 한국에서 학교생활 중에 가끔 놀림을 받기도 한다.

“왜 싸웠는지도 모르고요?”

“아직 모릅니다. 다만 PC방에서 중학교 3학년을 다니는 남학생 둘을 떡이 되도록 팼다는 것만 압니다.”

“뭐요? 그게 정말입니까?”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다니는 만 10살인 소피아가 중 3인 남학생을 둘이나 팼다니 기도 안차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걱정되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다시 한국으로 갈 수는 없었다. 후견인으로 별로 챙겨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훈은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께서 바로 돌아가 잘 수습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용을 알아보고 바로 연락하세요.”

“넷!”

할라마 대사가 떠나고 나자 김수훈은 한국으로 전화했다. 혹시 하는 생각에 이은혜에게 부탁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멀리 출장 중이라는 소식만 들었다.

‘멀리 출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바쁘게 오전을 보내고 나서 새로 합류된 시녀인 사관생도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김수훈은 불루아이에게 지시했다.

“다들 둘씩 조수로 쓰게 되나?”

“넷!”

“그럼 이제부터는 조수들은 모두 원 투로 암호명을 정하지. 불루원, 불루투 이런 식으로·····. 내가 사람얼굴과 이름을 잘 못 외우니 B1 B2 식으로 명찰을 붙이고.”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블루와 블랙은 이니셜이 한자만 쓰면 서로 겹칩니다.”

“이니셜을 BL, BK, YL, HY로 두 자씩 사용하면 되겠네.”

“넷!”

“사복은 가슴에 수를 그렇게 넣어 보고.”

“잘 알겠습니다.”

다소 특별한 정신세계에서 사는 잡년에 해당하는 여자들이 12명으로 불어나 이제 항상 같이 다니게 되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다니게 되자 김수훈은 내심 고민하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전용비행기 한 대 사서 써야 되는지 모르겠네.’

김수훈은 여전히 국왕 전용비행기는 너무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꾸만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니 전용비행기 구입을 고민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잠시 창가에 서서 항구에 정박한 많은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로는 아주 중요한 부동항이라 그런지 이곳에는 군함들이 많았다. 그리고 무역선이나 혹은 어선들도 많이 몰려와 있었다.

어선들 중에는 태극기를 휘날리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북쪽 사할린이나 북해도 해역이나 혹은 동해에서 어로 작업하던 어선들로 보였다.

군함인 항공모함을 방문하는 행사라 김수훈은 해군제독복장인 하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도 모두 군복인 예복으로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준비를 끝내고 나자 역시 하얀 해군 예복 차림인 사백호가 와서 보고했다.

“폐하, 시장이 관함식에 참석하자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도 나가지.”

12명의 시녀들과 경호원들은 모두 군복인 하얀 제복을 입고 모여 있었다. 해군 함정인 항공모함을 방문하는 행사라 정장인 예복을 입게 한 것이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드바르채크 사장이 반겼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지금 막 준비를 끝냈습니다.”

드바르채크 시장이 다른 업무를 재치고 김수훈을 전담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한국어를 잘하기 때문 같았다.

리무진에 오르고 나자 김수훈은 이동하며 드바르채크 시장에게 고려인들에게 청탁 받은 문제에 대해 말했다.

“제가 노점 상가를 지을 자금을 주기로 했으니 상가 지을 장소와 건축 허가 등에 협조해 주세요.”

“예, 이미 보고를 받았습니다. 고려인 단체에서 요구하는 장소를 시청에서 넘겨주기로 했으니 폐하는 너무 염려 안 해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일단 시장이 약속했고 이미 조치했다고 하니 김수훈은 고려인들과 만난 일에 대해서는 잊고 다른 쪽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시장님, 그냥 관함식만 하나요?”

“아닙니다. 함재기의 이착륙 시범도 있고 항공모함이 보유한 방어무기들의 화력시범도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려면 안전한 해상으로 나가야 하지 않나요?”

“예, 폐하께서 승선하시면 바로 항구를 떠나 남쪽으로 가서 무인도를 상대로 한 대대적인 육해공 전체의 화력 시범을 보일 겁니다. 육군 방공부대에서는 미사일도 발사될 겁니다.”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김수훈은 러시아 정부가 수호이 전투기의 판매를 위한 화력시범을 핑계로 북한 국경 지역에서 대대적인 무력시위를 벌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옐친 대통령이 단단히 마음먹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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