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과 백 그리고 회색-486화 (486/591)

486화

김수훈의 물음에 알두란 장관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답하지 않고 있었다. 알두란 장관은 찬성한 세 사람과 같이 모이면 이야기할 기세다.

“두 사람을 불러 오시오.”

“넷!”

이윽고 회의장에서 반대한 세 사람이 모이자 알두란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슬며시 일현무 실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입으로는 이유를 말하기 너무 곤란하니 대신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김수훈은 일현무에게 조용히 물었다.

“실장은 무슨 이유인지 아나?”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숨기지 말고 말해봐. 어떤 말이고 해도 되니 감추지 말고 해봐.”

김수훈이 이렇게 말하자 일현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후계자란 폐하 유고 시에 필요한 겁니다.”

“그야 그렇지. 그래서 나도 후계자를 지명해 놓으려는 것이고.”

“폐하, 후계자란 폐하께서 세우신 나라를 계속 이어가라는 사명을 지닙니다. 그러니 왕후님을 후계자의 1순위로 정하는 것이 잘못 됐다는 겁니다.”

일현무의 말에 김수훈이 즉각 반론을 폈다.

“실장,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본시 아리아 왕후의 가문이 왕위를 이어가던 나라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유고시에는 당연히 왕후가 통치해야 타당한 거지.”

이렇게 말하자 일현무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폐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께는 무뢰한 언사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리아 왕후님은 제가 보기에는 이미 망한 왕국의 공주일 뿐입니다. 망한 나라 공주가 다시 세워진 왕국의 왕위를 이을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던 혹은 설사 왕재를 타고 나지 못한 분이라도 지브릴 왕자님이 왕위를 이어야 타당합니다. 물론 아리아 왕후께서는 태후로써 잠시 섭정할 수는 있지만 왕위를 이어 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 이해가 안가나?”

“외람된 말이지만 사람이란 본시 옛사랑은 남녀 구분 없이 쉽게 잊어지는 법입니다.”

“옛 사랑은 쉽게 잊는다?”

일현무는 또박또박 대답하면서도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말이라는 생각으로 계속 자기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폐하, 제가 알기로는 사람이란 본시 성품이 그런 겁니다. 또 그래야 죽은 사람은 죽고 산사람은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요.”

“그건 그렇겠군.”

“폐하, 그래서 남녀를 불문하고 지난 사랑은 잊고 새로운 사랑에 정이 완전히 쏠리기 마련이고요. 그렇지 않으면 산사람도 불행이 계속된다고 봅니다. 만약 아리아 왕후님이 젊어서 왕위를 오르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 후의 일은 누구도 장담 못합니다. 그리고 지브릴 왕자님의 안위에도 문제가 생길 여지도 많고요.”

일현무의 말에 김수훈은 매우 놀라며 응수했다.

“뭐라? 자네 너무 심한 소리를 하는 것 아닌가?”

“폐하, 폐하께서 정정하신 지금은 아주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이렇게 된 마당이니 끝까지 말하겠습니다. 이건 제가 그냥 누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함하기 위해 하는 소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그런 경우는 수없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결국 나라라 흔들리고 엉망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소리를 듣자 김수훈은 너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부하들로는 충분히 걱정할 여지가 많은 사안이다.

왕후가 젊어서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자신이 일찍 죽었을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니 왕후가 왕위에 올라 재혼하지 마라는 법이 없다. 만약 재혼해서 왕자를 낳으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진다는 이야기다.

‘틀린 말은 아니군. 내가 죽으면 지금과 같을 수야 없겠지.’

일현무는 지브릴 왕자보다는 나중에 낳은 즉 아리아 왕후가 사랑하게 되어 결혼한 남자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위로 올리려고 할 위험성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남자도 재혼하면 후처에게서 낳은 자식을 더 사랑해 후계자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해 본처 소생과 후처 소생 간의 권력 다툼이 심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의 이태조의 후비인 강씨가 자신의 어린 자식으로 보위에 오르게 하려던 사건으로 인해 여러 차례의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현세의 재계에서도 그런 유사한 사건들이 간혹 벌어지기도 했다.

섭정한 태후가 자신의 아이를 왕위로 올리려고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고려의 천추태후로 널리 알려졌다. 물론 역사서의 내용이 사실 그대로 기록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런 비슷한 경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많았다.

이런 예민한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특히 아리아 왕후가 옆에 있는 상태에서 하기는 곤란했다. 또한 왕후가 알아들으면 앞으로 자기 신상에 해가 되니 말하기 정말 어렵다.

그러나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알두란 국방장관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국왕에게나 혹은 차기 국왕으로 오를 왕자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다. 나중에 그런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나라 전체가 내홍으로 휩싸일 염려가 많아 반대하는 것이다.

“알았어, 내가 충분하게 알았으니 더 이상 걱정 안하도록 조치하지. 앞으로 그런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도록 해.”

“넷!”

김수훈은 전에는 자신의 사후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후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런 문제가 거론되자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왕위도 승계도 문제지만 엄청난 재산 역시 과연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다.

‘휴우! 가진 것이 너무 많아도 걱정이네.’

그렇다고 아직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모두 환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유는 아직은 자신 젊기도 하고 또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김수훈은 세 사람과 헤어지고 나자 그레이 왕궁 뒤에 있는 사만다 묘소를 찾아갔다.

가을이라 그런지 묘소에는 쓸쓸함만 가득했다. 묘지 주변에는 마른 낙엽만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죽으면 이렇게 허망하군.’

마음이 뒤숭숭하면 항상 사만다 묘소를 찾고 있었다. 일현무는 죽으면 사랑도 같이 사라진다고 했으나 김수훈은 사만다 사후에 더욱 애절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더 잘해 줬어야 했는데.’

사만다가 살아 있을 때는 권력욕이 많다고 판단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사만다는 권력 욕심이 없던 여자였다. 목숨 걸고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킨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결국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모조리 바친 것이다.

옆에 있는 다른 두 여자의 묘도 돌아보았다. 자히르 샤 국왕의 묘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후계라········. 벌써 내 다음 후대를 생각해야하나?’

그저 평범한 위치라면 이런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가진 것이 많고 이룬 것이 많다가 보니 다음 후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서 정리하면서 살아야 되겠네.’

무조건 일만 벌린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훈은 밤이 어두워 질 때까지 묘소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아 왕후 이외에 세 여자가 주변에 있으니 마음은 더욱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이 어두워도 왕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자 일현무가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궁 안으로 들어가세요.”

“알았소.”

왕궁 안으로 들어온 김수훈은 왕후가 지내는 왕후 전으로 가지 않았다. 자꾸만 마음이 편치 않아 본궁의 침소에서 잠이 들었다. 신경을 너무 쓰다 보니 피곤해서 그런지 의외로 쉽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신복일이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다. 신복일은 지브릴 왕자가 지내는 동궁의 건물에서 지내고 있었다.

“폐하, 어제 늦게까지 묘역에 계셨다고요?”

“그래, 마음이 조금 심란해서 거기서 있었다. 무슨 일로 일찍 찾아 왔냐?”

“카스피 해의 바투 유전에서 연결되는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려는 회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래? 알아보니 어디로 파이프라인을 건설한다고 하더냐?”

“그야.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두 나라를 지나는 코스로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송유관 시설을 위한 공사구간도 제일 짧고 두 나라만 지나니 제일 간편하니까요.”

“추진하는 나라는 어디고?”

“미국과 프랑스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에 투자한다면 분명히 인근의 체첸지역도 눈독을 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김수훈은 신복일이 조사해온 파이프라인의 코스가 그려진 지도를 넘겨받았다.

“쉽게 구했네.”

“이미 TIB 정유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겁니다. 다들 이런 정도의 정보는 이미 알고 있고요.”

미국에서 개입되니 체첸반군을 도와줘도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로부터 직접 의심을 받거나 할 염려는 없어 보였다.

‘과감하게 지원해줘도 별로 문제가 없겠네.’

일단 체첸반군을 도와주는 문제는 운송만 해결되면 끝나게 되니 조금은 간편해지고 있었다.

김수훈은 신복일에게 다시 지시했다.

“너, 이제 러시아의 사할린 유전에서 북한을 관통해 한국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에 대해 알아 보거라.”

“아, 그 자료는 기획실에 이미 있습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네가 잘 검토해봐라. 비록 현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우선 지도로 확인해 보고 필요하면 조사팀을 구성해서 러시아를 한번 다녀오고.”

“알겠습니다.”

김수훈은 신복일에게 이런 지시를 내리고 비서실장은 불렀다.

본궁의 집무실에서 파리하스 비서실장은 만나자 차분하게 지시했다.

“왕실 이름으로 사만다 장학재단을 만드시오.”

“장학 재단요?”

“그렇소. 대상은 건축토목학을 전공하는 여대생 1학년으로 정하세요.”

“여자들만 선발 하나요?”

“그렇소, 장학생은 되도록 생활이 어려운 학생으로 5명을 선발하시오, 장학 혜택은 대학교와 대학원 포함해 6년간 전액 장학금으로 정하세요. 한국으로 유학을 갈 경우는 학비와 생활비 보조까지 해주도록 정해 보시오.”

“알겠습니다.”

“매년 5명씩 정해 교육 받도록 해서 나중에는 총 30명이 되도록 하시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기리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이날 이후 김수훈은 장학재단 설립과 한국에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사업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었다.

어느덧 늦은 가을이 되고 있었다.

두 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는 김수훈에게 하산이 찾아와 보고했다.

“폐하, 무기를 모두 창고에 적재해 두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수량은 얼마나 되나?”

“컨테이너로 무기는 20대 분량입니다. 그리고 실탄이나 포탄도 그 정도가 됩니다.”

“시바 섬으로 보내는 건축 자재인 철재로 기록하고 카라치 항구로 보내도록 해.”

여기에 있는 무기야 수단의 카말에게 보내면 된다. 수단에서 조지아를 거쳐 체첸으로 무기를 보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물었다.

“하산, 조지아로 가서 말을 준비는 시켰나?”

“폐하, 폐하께서 지시한 그대로 이미 체첸반군에게는 카말이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는 것은 끝냈습니다.”

“벌써 끝나다니?”

한 달도 안 된 시기에 이미 무기들의 인계가 끝났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 화물수송선을 보낼 때 아예 처음에 식량과 같이 보내 버렸어요.”

“문제는 없었고?”

“예!”

자칫 다른 나라의 검역에서 걸린 수 있는 무기 반출이다. 일단은 체첸반군에게 식량과 무기를 보냈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하산은 다시 보고했다.

“폐하, 제가 직접 가서 인계를 직접 했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네가 직접 가다니?”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이집트인으로 위장하고 또 얼굴에 마스크도 쓰고 넘겨서 체첸반군들도 전혀 저를 모릅니다. 저와 접촉한 그 녀석만 짐작할 뿐이죠.”

“알았어. 어려운 일은 너무 쉽게 처리했군.”

하산은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폐하, 사실은 그쪽 지역에도 델타타이거 부대원이 있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냐?”

“예, 저도 믿는 것이 있으니 체첸 반군을 돕자고 한 거죠.”

김수훈은 하산의 말에 여전히 걱정되어 물었다.

“하산, 혹시 델타 타이거 부대원이 거기로 가서 교관하는 것은 아니냐?”

“당연히 무기만 보낼 수는 없죠. 새로운 무기인데 교관이 있어야 군사교육을 시키게 생겨 50명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신분이 드러나면 어쩌려고?”

“폐하, 모두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출신들이니 안전 문제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한 달간 교육시키고 즉시 자신들의 나라로 철수하게 되니까요.”

“그냥 눌러 있다가 체포되면?”

“그래도 여기 출신이 아니니 우리나라가 지원한 것은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미군들도 특수 부대원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 우리보다는 미국이 더 의심을 받을 겁니다.”

“뭐라? 미국에서 특수부대를 보내려고 한다고?”

“예, 미국이 이번은 양보를 못하겠는지 군대를 이미 아제르바이잔으로 많이 보낸 상태입니다.”

김수훈은 미국이 개입하고 있다는 소리에 즉시 지시했다.

“교관 요원으로 간 사람들 모두 철수시켜라. 미국이 그들의 정체를 알면 오히려 러시아 쪽으로 역공작을 펼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네요. 같이 활동하다가 보면 아무래도 교관들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네요. 바로 연락해서 철수해서 숨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의리상 조금 돕다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게 생겨 신속하게 발을 빼기로 한 것이다.

델타 궁전으로 모아진 많은 무기들이 대형 컨테이너 트럭에 실려 떠나고 있었다. 모두 델타에서 카라치 항구까지 연결된 고속도로를 따라 가게 된다.

부르릉. 부르릉.

거의 동시에 떠나기 때문에 델타 궁전 주변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산은 모두 40대를 한 번에 떠나보내며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서 알면 상당히 심하게 이의를 달고 불평할 건데. 차라리 사실 대로 이야기 하지.”

파키스탄 정부로 통보하면 비밀 유지가 어렵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무기만 보내고 같이 가지 못하니 무척 걱정되지만 하산은 직접 따라갈 수는 없었다.

따라갈 수 없는 이유는 김수훈이 더 이상은 무기 반출 작전에 개입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산은 안전 부절 못하는 상태로 전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이 지나자 카라치 항구까지 따라간 델타타이거 요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사히 선적해 시바 섬으로 떠났습니다.”

“그래? 어떻게 검역은 통과하고?”

“델타에서 보내는 다른 건축 자재와 같이 선적해 그것만 파키스탄에서 검색하고 끝냈습니다.”

파키스탄 정부에서는 가끔 아프가니스탄에서 관할하는 부두를 찾아와 검색하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수출품 보다는 수입품에 대해 검사하고 있었다.

이웃한 나라로 혹시 자국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무기류가 들어오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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