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과 백 그리고 회색-482화 (482/591)

482화

이은혜의 어머니로부터 돈을 우리려는 수작은 아니다.

한국 무속인 협회장과 고문이란 직책의 권위를 찾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어설픈 수작 부려 돈을 벌기 보다는 적당히 명분만 얻으면 된다고 판단했다.

이미 반을 한국에게 빼앗긴 북한이라 힘을 쓰지 못하고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한다고 해서 사실 크게 이득 볼 뭐는 없었다. 정치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강경한 세력인 매파들에게 더욱 힘이 생긴다는 정도의 효과만 기대할 수 있었다.

용호원의 비룡각 앞에 커다란 상을 6개나 차려놓고 굿하고 있었다. 과일이나 떡 각종 고기와 음식 등을 수북이 쌓아 놓고 있었다.

덩! 덩! 덩더쿵!

요란한 북소리가 울리고 굿판이 시작되었다.

집주인인 윤수인은 의외로 이곳에서 굿판을 벌이지 않았다. 그녀는 강화도의 마니산에서 단식하며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오백화가 치장을 요란하고 굿판은 크지만 평범한 굿을 벌이고 있었다.

와글와글.

많은 무속인이나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었다. 오색 무복을 입은 오백화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한참 춤추며 굿을 하던 오백화는 구석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은혜를 발견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마! 얼굴이 둘로 보이네.’

오백화의 눈에 약간 나이가 차이 나지만 이은혜는 두 얼굴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얼굴이 둘로 보인다는 것은 귀신이 들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오백화는 귀신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자기가 범접하기 어려운 강한 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상제님 정도로 기가 너무 강하네.’

오백화는 매서운 눈으로 자기를 노려보는 이은혜의 눈빛에서 기가 질리고 있었다. 어떤 두려움으로 인해 춤추던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덩덩덩덩!

자주 만나지는 않으나 무속인을 좋아하는 장정옥으로 인해 가끔은 만났다. 부여 보리 고개 당집에서도 만난 처지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정신을 다루는 무속인들이야 기가 강한 사람이 대장이다. 오백화는 급하게 이은혜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저승사자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이은혜의 기가 강하다고 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검사인 이은혜는 범법자를 소탕하는 맹활약으로 인해 저승사자라는 닉네임이 생겼다.

검사가 된 이은혜는 부산, 광주, 해주에서 활동하는 마약과 폭력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이번에 서울지검으로 오자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녀의 손에 의해 검거되었다. 범죄자들에게 이은혜 검사는 저승사자가 틀림없었다.

오백화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모여든 사람들이 다들 이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검사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모여 있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일부 사람들은 모른 척 고개를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돌리며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저 여검사가 왜 또 여기는 나타난 거야? 누굴 잡아넣으려고?’

남의 정신을 현혹시켜 돈을 우려서 사는 무속인들은 그녀의 모습만 봐도 은근히 오금이 저리는 처지다.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기에게 쏠리자 이은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모여 들어 인사하자 급하게 오백화에게 말했다.

“회장님, 어서 하시던 굿이나 계속하세요. 나라를 아주 편안하게 한다니 좋은 굿이네요. 효과가 있을 것 같아 무척 기대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기가 강한 이은혜가 던진 간단한 말로 수그러들었던 오백화의 기가 다시 살아났다. 기이한 일이나 어찌되었건 신명이 나고 있었다.

덩덩! 덩더쿵! 찰랑 찰랑.

북소리와 더불어 오백화는 신이 나서 작은 방울을 흔들며 다시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던 이은혜는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한쪽 구석에서 두 손 모아 뭔가 중얼거리며 빌고 있는 장정옥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물었다.

“엄마, 도대체 뭘 비는 겁니까?”

“너에게 제발 좋은 남자 나타나서 시집 빨리 보내게 해달라고 빈다.”

“뭐요? 왜 또 이러세요.”

장정옥은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두 손을 비비며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었다.

“비나이나 비나이다. 옥황상제님께 비나이다. 우리 딸에게 좋은 남자 보내 주세요.”

장정옥은 너무 잘난 자신의 딸이 여전히 유부남인 김수훈에게 목을 매고 사니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장정옥은 이은혜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김수훈이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이미 아내와 공식 애인도 있다. 더구나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라 장정옥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딸이 이미 김수훈과 깊은 사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엄마, 나 결혼 안하고 산다니까 왜 또 이래요?”

“뭐? 결혼을 안 하다니? 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결혼을 안 하냐? 나는 그 꼴은 절대로 못 본다.”

이은혜는 어미가 하는 말에 짜증이 나서 화를 버럭 냈다.

“정 여사님, 또 그런 이상한 말을 하면 확 까발려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 버릴 거야.”

“외국으로 간다고?”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이상한 말은 하지 마세요.”

딸이 이렇게 강경하게 말하자 장정옥은 매우 놀라며 기가 죽어 조심스럽게 답했다.

“알았어. 지난 일을 너는 또 왜 들먹이며 그러냐?”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알았다.”

장정옥은 딸이 과거를 다 까발려 버린다는 소리에 기겁하고 말았다. 분명히 저도 다치는 비밀이지만 까발리면 장정옥의 인생은 끝장나는 폭탄이다.

‘그건 막아야 한다고.’

시한폭탄을 품고 사는 장정옥은 딸의 호통소리에 놀라 슬며시 굿판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자 같이 왔던 여자들도 모조리 떠났다. 대부분 이덕배 의원이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정치세력의 후원자나 혹은 정치인 부인들이다.

이은혜는 잠시 용호원에 남아서 오백화가 하는 굿을 구경하고 있었다. 작두를 탄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해 보이는 굿이었다.

이윽고 굿이 모두 끝나고 차려놓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이은혜는 슬며시 오백화에게 물었다.

“윤수인은 언제 오죠?”

“별당아씨는 아마 며칠 지나야 올 겁니다.”

“그래요? 돌아오면 저에게 전화하라고 전해 주세요. 종로의 소프트 회사에서 지낼 겁니다.”

“알았어요. 연락하죠.”

이은혜는 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윤수인에 대해 무척 호의적이다.

어차피 두 여자 모두 김수훈과 결혼해서 살림을 차리고 살지는 못하는 같은 처지다. 그런 이유로 이은혜는 약간은 그녀를 동정심도 있고 동지라는 느낌이 있었다.

이은혜는 용호원을 떠나 급하게 종로에 있는 ST 소프트로 향하고 있었다.

지상 15층 지하 3층인 ST 소프트의 사옥은 수많은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또한 사옥에는 마이크로소프트 한국지사도 같이 있었다.

사주인 이은혜 이사장이 사무실로 찾아오자 직원들은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평소에 잘 찾아오지 않는 이은혜가 찾아온 이유는 원도우 95의 개발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한글 95 오피스도 같이 개발이 끝났기 때문이다.

김일태 회장은 회장실로 찾아온 이은혜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사장님, 내년 1월 1일에 원도우 95와 같이 동시에 출시할 생각입니다.”

“알았어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오류가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하세요.”

“알겠습니다.”

원역사보다 몇 년은 빠르게 개발된 한글 프로그램이다. 물론 원도우도 몇 년 정도 빠르게 개발이 되었으나 컴퓨터 성능이 부족해서 출시를 늦추고 있었다.

“회장님, 펜티엄 컴퓨터 보급률이 공공기관의 경우 어느 정도는 되나요?”

“아직은 20퍼센트만 펜티엄 컴퓨터로 교체가 된 상태입니다. 아마 내년에는 답답해서도 빠르게 신형 컴퓨터로 교체를 하게 될 겁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이은혜는 김일태 회장에게 물었다.

“내 방 그대로 있지요?”

“예. 일부 공간은 연구원들이 사용했었습니다.”

“그럼, 당장 사용이 가능하겠네요. 나는 앞으로 며칠간 거기서 머물거니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한글과 윈도우 프로그램 가지고 오고요. 개발된 게임들도 모조리 가져오라고 하고요.”

“넷!”

이은혜는 15층 구석에 오피스텔처럼 꾸며진 공간으로 들어가 연구원들과 같이 새로 개발된 각종 프로그램을 점검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보며 혹시라도 오류가 나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오류가 발견되지 않자 이은혜는 자기가 들고 온 많은 디스켓에 저장된 자료를 옮기고 있었다.

밤이 깊도록 자료를 정리하고 나서 다음날이 되자 이은혜는 TV와 라디오를 켜고 집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평양방송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이 발표되고 있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사망한지 꼬박 하루가 지나서 외부로 알리고 있었다.

뉴스를 보고 있던 이은혜는 중얼거렸다.

“결국 같은 시간에 죽었군.”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투의 말에 연구원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장님은 이미 알았나 보네. 하긴 검사라 우리보다 일찍 아나보지.’

이상하게 생각은 하지만 다들 이은혜가 검사라 미리 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김일성 사망에 대해 고위급이나 정부 대변인이 나서서 논평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일본의 NHK 방송사에서는 아주 요란하게 김일성 일대기를 보도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또한 중국의 방송사에서는 앞으로의 북한을 약간 걱정하는 정도로 논평하며 보도하고 있었다.

이은혜는 뉴스를 시청하다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조문단을 북한으로 보낸다고 발표하네.’

그동안 김수훈은 북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거나 또는 특별하게 접촉을 시도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조문사절단을 보내겠다는 발표하자 이상해 보였다.

‘혹시, 오빠가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통일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미 북한에서 남침할 여력은 없었다. 또한 북한은 원 역사보다 더욱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아 중국으로는 큰 골칫거리에 해당되고 있었다.

북한의 군인 출신들이 집단으로 무기를 들고 중국으로 넘어와 강도짓이나 또는 오지의 산에서 거점을 잡고 산적 질을 하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장사라도 치루라고 식량을 조금 보내주고 말겠네.”

한국 정부는 원 역사와 전혀 달리 북한과 비밀 접촉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굳이 급하게 통일하자는 어떤 정치 세력도 없고 그저 북한이 고사되기를 기다리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끔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은 참상이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 그때는 슬며시 대한 적십자사를 통해 식량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이은혜는 멀리 떨어진 김수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매우 궁급했다.

‘연락을 해볼까?’

하지만 김수훈이 한국의 일에 대해 특별하게 어떤 조치를 하게 된다면 자기에게 분명 연락해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공연히 전화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은혜는 TV에서 시선을 거두고 연구원에게 지시했다.

“이제 게임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개발해야 살아남아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온라인 게임용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게임 개발이 하우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준비할 생각이다.

이제 펜티엄 컴퓨터가 보급되고 있다. 윈도우 프로그램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인터넷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은혜는 그때를 대비해 온라인 게임 개발을 준비할 생각으로 연구원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후, 앞으로 10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군.’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나라를 생각해도 앞으로의 10년이 중요한 고비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은혜는 마음에 조금 급해지고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 사망으로 인해 한반도는 어찌 되었건 또 다시 세계인들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며칠 회사에서 지내던 이은혜에게 여직원이 다가와 보고 했다.

“윤수인라는 분이 연락했네요. 김포에서 만나잡니다.”

“김포 어디요?”

“마송리로 오시면 그곳에 국화를 키우는 농장이 있으니 그리 오랍니다. 농장 이름은 마송국화라고 하네요.”

“그래? 알았어요.”

하필 국화를 재배하는 농장에서 만나자고 하자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만나기를 원해서 만나는 것이라 장소를 굳이 따질 이유는 없었다.

이은혜는 사무실에서 나와 리무진을 타고 서둘러 김포로 향했다.

서울 남부 강변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이은혜는 서인운하 공사장을 지나게 되었다. 원 역사에는 서인운하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공사를 하지만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운하라고 해서 서인운하로 명명되어 공사 중이다.

“공사 속도가 아주 빠르군.”

현 대통령은 이제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는 서해안 시대가 열린다고 선언하며 몇 가지 큰 국토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서인운하, 인천공항건설, 새만금간척사업, 제주도서귀포 관광단지개발과 항구건설, 부산지역의 신항만 건설들을 중요한 국토개발 정책으로 내세웠다.

북쪽 일부를 수복한 한국은 한강하류를 준설해서 뱃길을 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류에 토사가 너무 많이 밀려오는 바람에 그 뱃길은 경제성이 적다고 판정되었다.

또한 그곳은 좁은 해로로 인해 생각보다 뱃길이 험했다. 그래서 오래전 조선시대부터 구상되어 시도하다 중단한 서인운하를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원역사보다 규모가 커서 5천톤급 이상인 대형 선박들이 충분하게 운항할 정도의 뱃길을 만들고 있었다.

김포의 마송리에 도착한 이은혜가 나이 많은 주민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아저씨, 여기 국화 재배하는 농장이 어디죠?”

“아가씨, 여긴 국화 재배하는 농장이 여러 개요. 그렇게 막연하게 물으면 곤란하죠.”

“아하, 그렇군요. 마송국화라고 젊은 사람인데요.”

“그 사람 농장은 저쪽으로 보이는 길로 쭉 따라가면 보일 거요.”

이은혜는 주민이 지목한 좁을 길을 따라 천천히 리무진을 몰고 가고 있었다. 김포 마송리에는 대형 비닐하우스 단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아크릴로 만든 마송국화농장일안 간판이 보였다. 그곳으로 리무진을 몰고 가 커다란 마당에 주차하고 윤수인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안보이네.”

이때 커다란 조립식 창고 안에서 윤수인이 나오며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언니, 여기에요.”

“왜? 여기서 만나자고?”

“오빠가 저에게 전화했어요. 초상난 북한으로 국화나 몇 트럭 보내주라고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조문사절단을 보낸다더니 조의금으로 국화를 보내주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자기에게 연락안한 이유야 현직 검사 신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대행하면 말썽이 생길까 윤수인에게 부탁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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