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김수훈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멀리 사라지는 리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대의 리무진이 사라지고 나자 김수훈은 두 경호원에게 지시했다.
“나 어디 다녀 올 거니 그렇게 알아!”
“전하! 혼자 가시려고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그렇게 알고. 타이거 팀이 오면 먼저 출국해서 델타로 가있으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굳이 혼자 간다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았다. 혼자 간다고 강조하는 김수훈을 따라 갈 수 없었다.
경호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하고 나서 바로 리무진을 타고 용호원을 떠났다.
김수훈이 만나려는 사람은 이은혜다. 그녀는 여전히 모든 촉수를 자기에게로 향하고 있으니 오늘 일을 모를 수 없다. 돌출한 행동을 하는 여자라 오늘 일로 어떤 행동할지 몰라 만나볼 생각이다.
한참 승용차를 몰고 가다 서초동으로 들어서자 공중전화로 연락했다.
“나다, 너 지금 뭐하냐?”
“그냥 텔레비전으로 아시아 경기 보고 있죠.”
“혼자?”
“예, 오빠, 오늘 약혼식 했죠?”
자기 짐작대로 이은혜는 이미 자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이내 답했다.
“떠나기 전에 해야 될 것 같아 오늘 했다.”
이렇게 답하자 이은혜는 잠시 뭔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응수가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의외로 차분하게 말했다.
“오빠, 오빠도 혼자 있으면 지금 만나죠. 오빠에게 꼭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알았어, 대학교 정문 쪽으로 나와라. 내가 그리 갈거니.”
대학교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기 때문에 이렇게 약속하고 통화를 끝냈다.
다시 승용차에 올라 운전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나서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했다.
‘뭐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지?’
윤수인과 약혼해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해주기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어찌 생각하면 안 해도 그만인 사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아니 해주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10년을 알고 지낸 사이다 보니 그간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다. 이은혜는 그에게 애인도 아니고 여동생도 아닌 미묘한 사이였다.
고갯길을 넘어 서울대학교 정문 앞으로 가자 티셔츠와 치마를 입은 이은혜가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녀 앞에 리무진을 세우고 크게 외쳤다.
“야! 타!”
“오키!”
김수훈은 사실 이런 소리를 해보기를 막연하게 하고 있었기에 해보는 멘트다. 이은혜 역시 전생부터 괜찮은 미남이 고급 승용차 타고 와 이런 소리를 자기에게 해주기를 고대했었던 터라 같은 식으로 답하고 있었다.
“은혜야, 어디로 갈까?”
“가까운 한강 고수부지로 가죠.”
“알았어.”
한강의 고수부지에 승용차를 세우고 나자 이은혜는 차에서 내렸다.
“오빠, 가서 뭐 좀 사올게요.”
이은혜는 급하게 뛰어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매점으로 가서 음료수와 과자를 사서 뒷좌석으로 타고 있었다.
“편하게 이야기하게 오빠도 뒤로 오죠.”
김수훈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오르자 음료수와 과자를 넘겨주었다. 둘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오빠는 언제 출국해요?”
“아마 내일 모래 떠나게 될 거다.”
“빨리 떠나네요.”
먼저 이렇게 말문을 연 이은혜는 자기가 김수훈을 만나자고 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오빠, 박천태가 오백화 회장에게 푸닥거리 당해서 과거 기억을 잊어버리고 약간 머리가 이상해 진 것 잘 알죠?”
“안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살면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데.”
“그야 그렇겠죠. 박천태는 전생에서 배움도 없고 좋지 않은 과거만 가득하니 과거를 잊고 살아도 살아가는데 문제될 것이 별로 없지요.”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과거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좋지 않은 기억은 때로는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런 판단이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김수훈의 대체적으로 이은혜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나는 박천태 경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김수훈의 응수에 이은혜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박천태와 저는 다릅니다. 전생의 기억을 잊으면 공부도 새로 해야 하고 돈벌이도 어렵게 됩니다. 이제부터 돈벌이하기가 쉬운 세상으로 변하게 되는데요. 물론 오빠도 거의 같을 겁니다.”
약혼한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안하고 있다. 전생의 기억이 사라지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듣고 보니 사실 약혼이나 다른 문제보다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너는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데?”
“오백화나 윤수인이 저는 너무 겁나요. 두 사람이 작당해서 박천태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으니 저나 오빠도 그렇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졸지에 천재가 바보를 겨우 면하는 평범한 수준으로 변할까 그게 제일 겁나죠. 오빠나 저는 그것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든 아니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김수훈이 반문하자 이은혜는 많이 고민했는지 자기 생각을 열거했다.
“별 생각 다했죠. 청부해서 사라지게 할까도 생각하고 승용차로 확 밀어 버릴까도 생각했어요. 다급하니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하지만 저야 태생이 그런 일과는 남이라 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오빠를 포기하면 어떤가 생각했죠. 윤수인이나 오백화가 저를 해하려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 때문 같아요.”
오래 고민하며 생각해서 그런지. 아니면 본시 머리가 좋은 검사출신이라 그런지 정확하게 핵심을 집어내고 있었다.
이은혜는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지?’
한참 침묵하던 이은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수인이 오빠와 급하게 약혼한 이유는 아마 명분 때문일 겁니다. 제 생각에 윤수인은 욕심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욕심이 너무 많은 여자라고 봅니다. 저는 조금 다르고요.”
“뭐가 다른데?”
“저야 그냥 같은 처지로 살아가니 서로 돕고 살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다른 남자와 사귀지 않으니 전에 말한 그런 정도는 오빠가 저에게 해 주면 더 좋고요.”
결국 뺑뺑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에는 결혼을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던 것이 변해버렸다. 보아하니 박천태를 만나보고 겁을 잔뜩 먹은 것 같았다.
모르고 당하면 그런가하고 살겠지만 그런 위험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두 사람에게 모두 겁나는 일이다.
‘생각해 보니 그 문제가 제일 크군.’
자신들의 정체를 남들이 알아도 위기지만 그런 전생이 사라지게 하는 것도 상당히 위험하다.
윤수인은 자기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모른다. 서로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투는 입장인 이은혜야 제일 두려운 일이지만 김수훈도 무조건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한없이 커지는 법이다.
‘간단치 않네.’
김수훈은 이은혜의 말을 듣고 보니 윤수인에 대해 약간 의심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생각을 바꾸었다. 그런 식으로 의심하다 보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로운 삶을 살았던 김수훈은 그것은 정말 싫은 일이라 일단 윤수인은 믿어 보자는 마음이 강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김수훈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은혜야, 네가 그것이 너무 걱정되면 윤수인에게 접근하지 않으면 되잖아.”
“오빠, 그야 그렇겠지만 너무 불안해서 죽겠더라고요.”
이은혜는 덜덜 떠는 정도는 아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며 상당히 겁에 질려 있었다. 김수훈은 그런 이은혜를 살며시 안고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은혜야, 오빠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지 확실하게 말해봐라.”
김수훈이 살며시 안아주며 이렇게 다독이자 이은혜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간단하죠. 윤수인에게 저를 해하게 하면 결별한다고 선언하면 저를 함부로 해할 생각은 못할 겁니다.”
“그게 오히려 화를 불러 올 수 있는 말 같은데.”
이은혜와 사귀는 것이 싫어서 과거기억을 사라지게 시도하려는 윤수인이다. 잘못하면 그런 말로 더 큰 분란을 일으킬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직접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나올 수 있지요. 오빠가 잘 돌려서 말하면 머리 좋은 여자니 충분히 알아들을 겁니다.”
결국 윤수인이 자기를 해하려는 것을 알아서 막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더 이상 그 문제로 대화를 해봐야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훈은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너, 내가 그렇게만 해주면 되냐?”
“예, 오빠가 약속은 잘 지키니 저를 안전하게만 해준다면 저야 불만이 없죠.”
이런 문제는 모두 나중에 일이다. 김수훈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자.”
“예? 벌써 가지고요?”
“그럼, 더 할 이야기가 있냐?”
김수훈이 이렇게 말하자 이은혜는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불만을 토했다.
“이제 보니 저 보다 오빠가 더 답답한 사람이네요.”
이은혜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여자를 접했지만 자기가 적극적으로 접근해서 접했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여자가 적극적으로 덤비니 그저 마지못해 접하는 식이었다.
아주 어려서는 지금과 조금 다르게 행동했었다. 하지만 태생이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주변에 자기가 좋다고 덤비는 여자들이 많다보니 굳이 자신이 데시 할 필요까지 없으니 더욱 그렇게 변해 버렸다.
김수훈은 이은혜가 겁을 먹었지만 돌출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해서 즉시 답했다.
“답답해도 할 수 없지 태생이 그런 거니.”
여러 가지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약혼식은 했지만 여전히 상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훈은 이내 뒷좌석에서 나와 운전석으로 갈아타고 승용차를 몰았다. 승용차를 몰고 가며 이은혜와 자기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은혜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전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자기와 이은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일이 전보다 많아졌다. 복잡한 생각을 하며 이은혜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도착해 승용차에서 내렸다.
뒷문을 열어주자 이은혜가 차에서 나오며 와다닥 껴안으며 급하게 입을 마주쳤다.
“흡!”
가볍게 입술을 마주친 이은혜는 조금 전 보다는 표정이 밝아지며 말했다.
“오빠, 건강하게 지내요. 위험한 일 절대하지 말고요.”
“알았어.”
이은혜가 아파트로 올라가 불을 켜는 것을 아래서 확인하고 나자 승용차를 몰아 떠났다.
운전하는 내내 가벼운 터치를 한 입술은 묘하게 간질거리는 느낌이 오고 있었다. 김수훈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풋!”
아주 짧은 순간의 입맞춤이지만 이은혜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을 받아 생소했다. 이런 정도의 입맞춤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던 여자는 처음이었다.
‘평생 키스도 한번 못해본 것이 틀림없어.’
말로야 별 소리 다하고 있지만 이은혜는 자신이 평하던 그대로 오리지널 숫처녀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신선한 느낌은 다른 여자들과 벌인 진하고 요란했던 정사와는 다른 새로운 감정으로 슬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김수훈이 용호원으로 돌아오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두 경호원이 보고했다.
“전하, 48명 전원이 밤 비행기로 떠났습니다.”
“알았어.”
선발대가 떠났다는 소리에 김수훈은 가볍게 응수하고 백호각의 사랑채로 가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던 김수훈은 화들짝 놀랐다. 나삼을 입은 20살 정도 되는 백인 여자 둘이 비단금침을 펴놓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생각지 못한 여자들의 출연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윤수인이 관장하는 곳이라 그녀의 허락 없이는 여자가 들어 올 수 없었다.
순간 아까 해어질 때 미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선물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상한 애야.’
전 같으면 순순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다른 여자와 새로운 느낌을 받았던 터라 이런 윤수인의 행동이 약간 짜증났다.
‘내가 여자에 환장한 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이불위에 앉아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하는 여잔가?”
김수훈의 물음에 한 여자가 나서며 익숙한 한국어로 답했다.
“저희는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직원입니다.”
“아니? 대사관 직원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무슨 일이야 물어 보나 마나 잠자리에 들어 몸을 주러 온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뜻으로 물어 보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약간 당황하던 두 여자는 다시 처음 입을 연 여자가 다시 말했다.
“저희는 왕궁 소속인 시녀들입니다. 전하 때문에 한국대사관으로 파견됐고요.”
“그래서?”
“전하는 기억하시지 못하겠지만 전하께서 저희들을 안아주신 적이 있습니다.”
“뭐야? 언제?”
김수훈이 반문하자 여자는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떠나기 전에 소위 처녀성 확인을 받은 여자들이다. 특별히 왕궁의 왕세자 궁에서 근무하는 시녀로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두 여자는 김수훈이 카불의 왕궁으로 오지 않자 한국의 대사관으로 배치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제 김수훈이 돌아 왔으니 항상 옆에서 잠자리 시중이나 음식을 챙겨야 된다는 설명이다. 자세하게 설명하는 여자의 말에 일이 어찌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김수훈은 그렇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여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이 짜증나서 즉시 지시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누가 뭐라고 했던 앞으로 내 방을 함부로 들어오지 마라.”
“네.”
“어서 나가 봐.”
“예? 나가라뇨. 저희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어요.”
“나가라면 나가!”
김수훈이 화가 나서 크게 소리치자 두 여자는 겁에 질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잠자리하라고 지시 받았으니 나갈 수도 없고 안 나가면 혼나게 생겨 망설이고 있었다.
“이런 쌍!”
획! 퍽!
공연히 부하가 치민 김수훈은 베개를 들어 집어 던졌다. 기겁한 두 여자가 얼른 베개를 원위치 해놓고 급히 방에서 나갔다.
김수훈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아랍으로 가면 이와 비슷한 일이 수시로 벌어지게 생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은혜와 가벼운 입맞춤으로 새로운 느낌이 생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여자와 접하기는 진짜 싫었다.
‘이제부터는 달리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자신이 의지로 접할 경우 이외에는 여자를 품에 안는 것을 금지할 생각이다. 어떤 기준이 없이 함부로 여자를 취하다 보면 진짜 진구덩이로 깊이 빠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어서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해주는 배려라도 거절해야 자신의 의지로 살아간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것부터 고치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게 된다고.’
여자 때문에 권좌에서 비참하게 물러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모든 일은 내 의지로 가부를 결정해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