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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그리고 회색-206화 (206/591)

206화

한국은 남쪽에서 불어온 뜨거운 바람에 의해 무더운 여름을 보냈다. 자연현상인 열기도 있었고 일본의 교과서 왜곡으로 인해 분노를 폭발시킨 열기는 더욱 강했다.

그런 뜨거운 열기도 가을이 되자 조금 수그러들고 있었다. 산에는 많은 등산객들이 몰려가고 들에는 농민들이 수확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대전 용문동에 자리 잡은 (주) 그린은 일본으로 수출하는 품목이 상당히 많아졌다. 식품회사의 축산물과 농산물 그리고 의류회사에서는 운동복이나 단체복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또한 산업회사에서는 새로 운동화와 구두를 수출하게 되었다. 그린산업의 경우 대구에 있는 신발공장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었다.

(주) 그린은 자회사가 식품, 산업, 의류로 늘었다. 여전히 논산축협의 상무로 근무하고 있는 박천태는 조금 일찍 퇴근했다. 급하게 대전 본사의 회장실로 올라와 유문호 대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회장님, 일본의 비룡그룹에서 이번에는 학생용 가방과 등산용 배낭 그리고 노트, 책상, 의자 등 사무용가구를 대량으로 주문했습니다.”

유문호의 보고에 박천태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가방이나 배낭은 산업회사에서 제조해 보내기로 하죠. 노트나 사무용가구는 본사에서 하청주어 상표를 넣어 납품 받아 수출하기로 하고요.”

“알겠습니다.”

공장을 인수해 직접 수출품을 생산하기보다 하청 주는 방법이 빠르다. 그렇게 해야 자금운용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필요한 조치를 내렸다. 이외에 여러 가지 회사의 업무에 대해 결정을 내려주고 있었다.

회사의 기본적인 업무 처리가 모두 끝나자 강희수 총무부장이 다소 색다른 내용을 보고했다.

“회장님, 저희 회사도 독립기념관 건립에 성금을 내야죠.”

“아직 보내지 않았나? 왜 즉시 처리하지 않았나?”

전에 보내기로 결정한 사항을 물어 약간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강희수가 즉시 그에 대해 설명했다.

“전에는 3개 회사만 있었으나 이제는 4개 회사로 늘어 회사당 500만원이라는 기준을 두고 새로 인수한 회사도 적용해야하는지 판단하기 곤란해서요.”

대구에 있는 그린산업을 인수한 때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박천태는 즉시 그에 대해 결정해 주었다.

“이제 회사가 4개니 늦게 인수한 그린산업도 포함해라. 회사 명의로 각기 500만원씩 부담하기로 해 2천만원을 보내고 내 개인 명의로 5백만원을 기부해라.”

여름에 터진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로 인해 한국에서는 독립기념관을 지어야 된다는 국민운동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박천태는 전에 독립기념관 건립기금 모금활동에 협조하기로 했었다.

박천태의 지시에 강희수는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개인이라면?”

“그냥 아무 직책 쓰지 말고 성금으로 기탁하라는 거야. 내가 소를 팔아서 돈은 보내 줄거니.”

“알겠습니다.”

가을이 되자 축산물 가격은 대폭 올랐다. 박천태는 드디어 그린파크에서 사육 중이던 비육소를 팔고 있었다. 그동안 줄 곳 투자만 하고 이제야 소 사육사업도 돈이 회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천태는 다소 걱정되는 표정으로 식품 회사의 강우균 사장에게 물었다.

“축산물 가격이 올라 수출에 이상은 없나요?”

“예, 아직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은산축산농장의 경우 납품단가를 올려 줘야합니다.”

“그건 식품회사에서 적절하게 단가 조정해서 올려주세요.”

이은혜와 당초 약속하기를 축산물 시세가 변동되면 납품단가를 매월 조정해 주기로 했다. 그 때문에 이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폭탄테러로 인해 잠시 위기감이 생겼었다. 의외로 그 사건은 쉽게 수습이 되었다.

폭탄테러로 잠시 혼란했던 비룡그룹은 기업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이익창출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룡그룹에서는 점점 더 많은 물품을 (주) 그린을 통해 수입해가고 있었다.

특히 동경에 본사를 둔 비룡그룹의 모기업이나 혹은 오사카에 본사를 둔 비룡유통무역의 성장속도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주) 그린도 빠르게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운용 자금도 많이 필요했다.

자금 담당인 강희수가 건의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은행 차입금을 두 배로 늘려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은행에서 차입하는 금액은 자본금의 100퍼센트만 허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두 배로 늘려 자금에 여유를 두며 회사를 운용할 생각이다.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이어서 박천태는 앞으로 소를 판 자금은 모두 자본금 증식에 사용하기로 했다. 모기업인 (주)그린 자본금을 10억원으로 늘리고 자회사인 3개 회사는 5억원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돈을 번 근거가 나타나게 되니 서서히 (주) 그린으로 보내 양성화시키고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다들 아래로 내려갈 무렵.

따르릉!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려 박천태가 받았다. 수화기에서는 이은혜의 목소리가 약간 고음으로 들렸다.

“야! 나 좀 만나자.”

“어디서요.”

“나! 지금 사무실 앞의 용문빵집이야.”

“빵 집요?”

“그럼, 내가 이 나이에 다방에서 기다리냐?”

“알았어요. 끝났으니 바로 가죠.”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이은혜는 여전히 어린나이로 인해 고생이 많았다. 나이가 점점 들어감에 따라 조금은 신중해지고 활동하기는 조금 편해졌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통화하는 것으로 보아 이은혜는 뭔가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저러나 모르겠네.’

아직은 이은혜가 어떤 투정을 부려도 여유롭게 받아줄 생각이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특단의 조치를 취해 볼 생각이다. 여러 가지 생각 중에 한 가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너 계속 까불면 내가 비약을 퍼 먹이고 완전히 죽여주마.’

박천태는 전생의 기억을 하나도 잊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이은혜에 대해 두려움과 더불어 복수심이 남아 있었다. 이은혜가 전생을 기억 못한다면 굳이 그런 짓이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은혜가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여전히 자기를 검사 시절 밥으로 알던 범죄인 취급하니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잠시 이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회사 앞의 빵집으로 갔다.

사무실과 불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통유리로 된 빵집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다 눈빛을 반짝였다.

“어라! 연애질하고 있네.”

빵집의 창가에 이은혜가 사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이은혜의 앞자리에는 고등학교 학생이 앉아 뭐가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은혜는 남학생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생글 거리며 웃고 있었다.

“옳아, 저것 이제 몸이 좀 커졌다고 바람이 났나보다.”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고 해도 아직은 너무 어리다. 하지만 그보다는 김수훈이 저 여자애를 어찌 생각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니 그 염려가 더욱 크다.

그러나 이은혜와 다른 사내와 놀아난다면 그런 부담감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박천태는 이은혜가 딴 남자와 사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때는 너, 내 밥이야.’

회심에 미소를 지으며 박천태는 이은혜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남의 연애를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빵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한참을 웃으며 남학생과 대화를 나누던 이은혜 도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서 서성이는 박천태를 발견한 이은혜는 손을 높이 들었다. 좌우로 흔들며 빨리 들어오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박천태는 그제야 빵집 안으로 들어와 마주 앉으며 말했다.

“애인은 왜 보냈어요?”

“애인?”

“예, 사귀는 남자 아닌가요?”

이은혜가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무슨 헛소리야. 조금 전 그 자식이 나에게 다가와 몇 학년이냐고 물어 1학년이라니 여고 1학년인 줄 알고 사귀자고 해서 노는 꼴이 너무 재미있어 듣고 있었는데.”

여고 1학년으로 남학생이 말했다니 박천태는 다소 황당해 반문했다.

“그래요? 그 자식 눈이 시원치 않나 보네요.”

이렇게 응수를 하고 박천태는 슬며시 이은혜의 몸매를 살폈다. 늘 어리다고 보다 저번에 조금 자랐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과 또 달라져 완전히 숙녀가 거의 다된 모습이다.

‘헉! 이제 진짜로 거의 다 자랐네.’

순간 박천태는 참으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은근히 다 커가니 자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탐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복수를 빙자한 육욕이 불쑥 생긴 것이다.

‘고것! 다 자라니 이제 진짜 쓸 만하네.’

이런 음흉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박천태의 눈빛이 조금 요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은혜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더니 너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그 눈 곱게 떠라. 한 방에 죽는 수 있으니.”

“예? 그게 무슨?”

“내가 다 알아 봤다. 내가 조사한 증거로 보아 너는 분명히 약 장사로 떼돈 벌었다는 것이 확실해.”

“약이라뇨?”

지은 죄가 있으니 박천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자 이은혜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약간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 내 앞에서는 함부로 까불지 말고 조심해라.”

“그런 몸으로 절 어떻게 할 수 있다고요.”

“너 내가 지금 어리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내가 어려 아직은 검사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국회의원이니 네가 저지른 범죄 자료를 모조리 넘겨 줘. 너 정도야 한 방에 죽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

기도 안차게 이렇게 위압적으로 말하자 박천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무슨 소립니까? 저 그런 짓 절대 안했어요.”

“너야 늘 그렇듯이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변명이야 하겠지. 내가 거의 확실한 증거를 잡고 있으니. 그런 줄만 알라고.”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잘못이 드러나 이은혜의 조사에 꼬리가 잡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헛소리를 함부로 하는 여자는 아니니 은근히 겁이 났다.

‘아무래도 너무 빨리 약 판 돈을 노출시킨 것이 문제된 것 같아.’

마약으로 번 돈을 조급하게 너무 일찍 노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야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서로 좋게 지내는 것이 내 신상에 유리해.’

박천태는 뒤가 너무 구리다 보니 이은혜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기로 했다. 일단 서로 타협점을 찾기 위해 말머리를 다른 쪽으로 슬며시 돌렸다.

“무슨 일로 갑자기 절 보자고 했죠?”

“내가 조금 급한 일이 생겼어.”

“예? 무슨 급한 일요?”

“내가 급한 일이 오빠 일 말고 뭐가 있어?”

“삼촌에게 무슨 일 있나요?”

박천태의 반복된 비슷한 응수에 이은혜는 짜증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신문도 안보냐? 미국의 그 요상하게 생긴 여자가 오빠와 사귄다고 방송사와 신문기자들 모아 놓고 광고하는 판에 내가 급하지 않겠냐?”

“아, 그거요. 그것은 삼촌 말에는 미국 여배우가 헛소리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그거야 오빠가 변명하는 거지.”

이은혜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오빠가 미군부대에 있다니 거기 주소나 달라고. 오빠에게 편지 보내게.”

“편지요?”

“응! 군대서는 여학생이 보낸 위문편지가 제일 인기라며. 그러니 나도 위문편지를 매일 보내야지.”

미국의 여배우인 제니퍼가 기자회견하며 자기는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드레건 김이라고 발표했다. 그런 사건이 미국에서 벌어지자 큰 이슈는 아니지만 한국의 신문이나 연예잡지에 기사로 실렸다. 그로 인해 이은혜는 마음이 상당히 조급해졌다. 제니퍼는 미모나 몸매로 보나 이미 성숙해 보였다. 아무리 낮게 점수를 주려고 해도 레벨이 상당히 높은 여자는 틀림없었다.

‘영화배우로 인기도 많고 집도 부자라니 만만치 않은 상대야.’

이은혜는 언론 보도를 보자 직감적으로 생각지도 못한 강한 복병이 나타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키나와로 위문편지를 보낸다고 하자 박천태는 즉시 답했다.

“필요하다면 삼촌 주소야 얼마든지 제가 알려 주죠.”

박천태는 양복 주머니 안에서 수첩을 꺼내 오키나와의 미군부대 주소를 알려 주었다.

“여기로 보내면 됩니다.”

넘겨준 주소를 보고 난 이은혜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도대체 왜 일본에서 안 온다는 지 정확한 이유를 아나?”

“저야 잘 모르죠. 어차피 이제 얼마 있으면 졸업이니 거기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아서 올 모양이죠.”

“학교도 안 다니는데 졸업장을 주나?”

“그야 수입일수야 채웠고. 사립학교라 학교에서 야구선수로 공도 많았으니 졸업장이야 주겠지요.”

“그건 그렇겠네. 아무튼 기회를 봐서 직접 찾아가 봐야겠어.”

눈치 빠른 이은혜가 일본으로 가서 혹시라도 두 여자와 관계 대해 알게 되면 너무 복잡해진다고 판단했다. 박천태는 급하게 말리고 있었다.

“면회를 가도 삼촌을 만날 수 없을 겁니다. 저도 한번 찾아가 만나보려고 해서 전화했더니 미군부대서 중요한 임무를 부여 받아 외출도 안 되고 면회도 일체 안 된다고 합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예, 틀림없어요. 주로 특수한 임무를 부여 받으면 외박 외출이나 면회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니 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겁니다.”

이은혜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니 조금은 모른다고 판단해 적당히 둘러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헤어지게 되었다.

박천태는 이은혜와 해어지고 나서 바로 승용차를 타고 금산으로 향했다. 그가 가는 곳은 금산의 서대산 근처에 있는 당집이다.

서대산 정상의 서북쪽에 자리한 당집은 서울에서 지내던 윤수인이 내려와 있었다.

박천태가 당집으로 가는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는 잡놈이 길을 막으며 물었다.

“어디를 가는 거요?”

“윤수인씨를 만나러 갑니다.”

“아. 박천태 회장님인가요?”

“그렇소.”

박천태가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넘겨주자 다시 얼굴을 확인한 경비원이 거수경례를 하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 가셔도 됩니다,”

당집으로 들어가는 곳은 주변이 모두 인삼을 재배하는 삼포로 조성되어 있었다. 당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자갈길이지만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목조로 지어진 당집이 보이고 그 옆에는 두 채의 약간 허름해 보이는 한옥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윤수인과 여러 명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윤수인은 박천태가 여기까지 찾아오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네가 무슨 일로 여기를 오지?”

“삼촌이 전해 달라는 말 때문에 찾아 왔습니다.”

“무슨 말을 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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