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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그리고 회색-154화 (154/591)

154화

문재화에게 1천만원을 주게 되자 박천태는 이제 대전에 보유한 자금은 하나도 없었다. 총 10억원 중. 3억원은 허윤희. 3억원은 민자경 3억원은 금산의 그린파크에 투자되었다. 나머지 1억원은 그린식품에 투자된 것이다.

‘이제 돈은 모두 소모했군.’

홀가분한 마음으로 불곰과 헤어져 논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송아지 사는 일에만 치중할 생각이다.

논산에 비육우 200마리는 판매하면 송아지로 교체해 금산의 축사에 넣을 생각이다. 남게 되는 자금은 사료대금으로 비축해 놔야 한다. 물론 아직 공사 대금을 모두 넘긴 상황은 아니다. 그래서 자금이 통장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달리 활용할 수 없으니 이미 투자가 끝났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논산에 돌아와 비육우를 판매하거나 송아지 사는 일에 전념하다 약혼일이 되자 대전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대전역 앞에 위치한 페리도트 레스토랑은 170평이나 되는 크기라 상당한 규모였다. 이곳 운영마담 즉 지배인인 정애리는 박천태가 나타나자 급하게 내실로 안내했다.

“회장님, 어서 옷 갈아입으세요.”

“벌써?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미리 오는 손님도 있으니 지금 갈아 입으셔야 합니다.”

“알았어. 민 사장님은 언제?”

“지금 미용실에 계십니다.”

박천태는 허윤희와 민화자가 같이 서울까지 올라가서 고른 기성복을 입었다. 평소에도 직장생활 때문에 양복을 입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급양복을 입으니 다소 어색했다.

‘쩝, 옷이 너무 거북하네.’

전생 보다는 고급스럽게 입고 살고 있지만 이런 호사는 사실 처음 누려 보는 것이다. 옆에서 옷의 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정애리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불쑥 던졌다.

“역전다방 할 때 옥상으로 제가 쳐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러냐? 그게 진짜면 지금 그냥 여기서 한번 할까?”

박천태의 이런 응수에 정애리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농담입니다. 저 이제 그런 필요 없는 욕심 없어요. 그냥 회장님이 너무 멋있어서 해보는 말이지.”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속으로야 정애리가 보기에 아쉬움이 남는 남자였다. 어쩌면 정애리는 마음 깊은 곳에 그런 마음이 남아 있으니 여전히 박천태 주변에서 머무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전으로 올라온 정애리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생겼다. 조금 버거운 상대이나 지금 페리도트 지배인이라는 자리가 그런 남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한번 결혼에 실패한 30대 중반으로 행정고시 출신인 대전시 건설과 공무원이다. 부잣집 딸과 결혼해 고부간 불화로 인해 이혼하고 슬하에 아이도 없으니 정애리는 아주 흡족한 남자를 만난 것이다.

“정 마담도 내년에 결혼한다고? 그러면 여기 관두나?”

“시댁이 아주 가난해요. 그래서 공무원 월급으로는 버거워요. 그래서 제가 벌어서 모셔야 해요. 그러니 여기서 계속 일할 겁니다.”

“그렇군. 시댁은 어딘데?”

“영동입니다.”

“그래? 가깝군.”

“남편은 대전에서 중고등학교 나오고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어요.”

잠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박천태는 홀로 나왔다. 그러자 백구만이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회장님. 축하합니다.”

백구만이 박천태의 얼굴을 직접 면대는 못했으나 이미 그의 정체는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척하라니 그저 인사만 정중히 하고 한쪽 구석에 심복으로 보이는 부하 둘과 같이 앉았다. 다들 30대 중반으로 또래였다.

박천태의 조사로 알고 있는 백구만의 부하 중에는 없었던 처음 보는 사내들이다.

‘새로 끌어들인 녀석들 같군.’

백구만까지만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그 이외에는 숨길 생각이라 박천태는 모른 척했다. 이어서 함열 출신인 도광철이 들어와 박천태에게 인사한다.

“작은 사장님. 축하합니다.”

작은 사장님이란 말이 조금 어색해 박천태는 이내 반문했다.

“뭐? 작은 사장? 내 키가 그렇게 작은가?”

“예?”

의외의 응수라 도광철은 머리를 극적이더니 다소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저는 그게 아니라 허윤희 사장님 약혼자라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도광철은 처음에는 웨이터 대장으로 왔다가 지배인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며 지배인으로 오른 사람이다. 그러니 박천태란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망하는 놈이 있어야 새로 흥하는 놈이 생기는 법이다.

호칭 때문에 이상한 대화가 오가자 옆에 서있던 정애리는 얼른 도광철을 끌고 구석으로 가서 말했다.

“도 지배인님, 앞으로 저분 만나면 회장님이라고 불러요. 다른 사람도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요.”

“이상하네, 회장이라니. 운 좋아 돈 많은 여자와 약혼한 남자 아닌가? 그런데 회장이라니. 도대체 무슨 회장이라는 거야 내가 알기로는 능력은 조금 있는 축협 계장이더구먼.”

그러자 정애리는 더 이상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튼 나중에 나보고 원망이나 말아요. 나는 분명 알려 줬으니까.”

정애리는 민화자와 박천태 사이가 내연 관계라는 것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민화자가 분명히 자기의 모든 재산은 물론 이 건물도 박천태 소유니 앞으로 평생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정애리는 박천태가 민화자의 행보를 조종하는 부레인은 확실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뭔가 다른 기미가 보여 아는 것은 아니다. 논산에서부터 박천태 주변에 있다가 보니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논산에도 살 때도 조금은 느꼈지만 드디어 허윤희와 약혼하게 되자 보다 확실해진 것이다.

강우균 사장도 들어와 박천태를 보며 전과는 달리 정중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 축하합니다.”

“사장님도 오셨군요.”

“오너이신 회장님의 약혼식에 간부 직원들은 와야죠. 원하시는 대로 전무와 상무 그리고 이사들만 왔습니다. 아. 덤으로 제 아들 데리고 왔습니다. 소개하고 싶어서요.”

“그래요?”

강우균은 활동적이지만 아들은 아주 착실하게만 생긴 순둥이 같아 보였다. 딱히 관심을 둘 청년은 아니지만 서로 인사는 나누고 이어서 밀려드는 손님 받기에 정신이 없었다. 논산축협에서도 조합장과 전무와 직원이 오고 애견협회에서도 찾아 왔다.

하객으로 서부건설의 이덕배가 이은혜와 같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덕배는 자기 회사에 공사를 준 고객이라고 찾아왔다. 하지만 이은혜는 이미 박천태가 자기와 같이 미래에서 넘어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은혜는 박천태 옆으로 다가와 남들이 듣지 않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조카, 약혼 축하해.”

“감사합니다.”

“잘하라고. 나는 나중에 검사할 거니까. 공연히 내 손에 잡히는 불상사 안 생기게 하라고. 서로 피곤하게 엮여서 살지 말자고.”

“그러죠.”

이은혜가 박천태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풍산개 강아지 때문이다. 김수훈이 자기를 조금 외면하자 표면적으로 모른척하고 지내고는 있지만 그의 행적을 모조리 조사했다. 그래서 계속 일본에 가서도 다른 사람 다 모르쇠 하지만 유달리 박천태를 챙기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결국 풍산개 까지도 박천태가 관리 하는 것을 알아내서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 확신이 서자 사고 당시 진보면의 길 옆 편의점 앞에서 김수훈과 같이 서 있던 칼자국 있던 사내가 박천태라는 것을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런 이은혜의 말을 듣고 박천태는 김수훈의 걱정처럼 살심을 품지는 않았다. 박천태 역시 이은혜의 뒤를 조사해 그녀가 의형에게 코가 끼어서 산다는 것을 조금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의형과만 관계가 나빠지지 않으면 이은혜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전히 어린 소녀라 안심하고 있었다. 박천태는 그래도 전생에 지독하게 추적당해 감옥으로 들어간 일은 잊지 않아 한마디 던지고 있었다.

“써먹지도 못하는 몸으로 고생 참 많으십니다. 검사님.”

“못 써먹다니. 나 이제 다 자랐다고.”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더 폭삭 늙도록 곰팡이 냄새 풀풀 풍기며 사셔야 될 겁니다.”

“뭐야?”

열 받은 이은혜가 발길질하자 박천태는 살짝 뒤로 물러나 피하며 다시 약을 올렸다.

“팬티 보입니다. 검사님.”

둘만이 주고받는 은근한 신경전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어린소녀가 공연히 발길질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던 이덕배는 황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은혜야, 너 또 왜 이러냐? 대전에 올라 와서는 얌전하더니.”

결국 이은혜는 이덕배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로 가며 한마디 던지고 있었다.

“너, 나중에 형수님 살려 달라고 사정하지 마.”

“저는 잘나가는 형님보고 사니 걱정 절대 안합니다. 꼬맹이 형수님.”

아무튼 괴이한 대화라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바라본다. 하지만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한국무속인협회 충남지부장과 여러 명의 여자들이 투피스 정장 입고 축하 화분을 들고 윤수인과 같이 나타났다.

박천태는 윤수인에게 다가가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떻게 알고?”

“일본서 연락이 왔더군. 그이가 가보라고 해서 왔네. 축하하네. 조카. 그이에게 대충은 들어서 아니 다음에는 호칭 다르게 부르자고.”

“예.”

뭘 얼마나 김수훈이 말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미래에서 넘어온 이야기 빼고는 대충 다해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윤수인은 같이 온 충남지부장에게 말했다.

“앞으로 이분 잘 모셔라. 잘 모시면 너도 복 많이 받을 거니.”

“예, 별당아씨.”

충남지부장은 먹음직스럽게 생긴 사내라는 생각하며 박천태를 보다 화들짝 놀랐다.

“어마나!”

그녀의 눈에 방금 긴 칼자국이 있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자기를 매섭게 노려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덜덜덜.

그러자 윤수인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지부장을 보며 태연하게 다독이고 있었다.

“오라! 너도 이제야 얼굴에 칼자국 있는 사내를 본 모양이군. 작심하고 100일 단식기도 계룡산에서 했다더니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었군. 너도 이제 조금 사람 보는 눈이 전보다 좋아졌어.”

이런 말에 박천태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있었다.

‘헉! 날 알아보는 여자가 여러 명이네.’

윤수인 역시 의형에게 매달려 사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박천태는 앞으로도 의형에게서 완전히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나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박천태에게 윤수인은 고마운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인삼김치 제조하면 서울 남산의 비룡각으로 보내라. 많이는 모르지만 공장 가동될 정도는 내가 책임지고 팔아 줄거니. 염려 말고.”

“감사합니다.”

“강아지는 당집으로 계속 보내라. 벌써 보내야 하는데 조금 늦구나.”

“내려가면 바로 보내겠습니다.”

“부여로 가져오지 말고 그냥 논산지회장에게 보내면 된다.”

“예.”

일본에 있는 김수훈이 지시를 내려 박천태가 하는 김치공장 운영을 벌써부터 돕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어서 약혼식은 진행되고 서로 예물 주고받고 조금은 간단하게 끝나고 있었다. 하객들이 식사하는 가운데 다소 늦게 민자경이 나타났다가 박천태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그녀는 봉투만 접수대에 올려놓고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쩝! 꼭 저렇게 와 봐야 직성이 풀리나?’

박천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서구지역발전협의회 회장이라 백구만이 권해서 그저 돈 봉투나 주려고 왔다가 조우된 것이다.

하객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돌다 백구만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 갔다. 이제 군기가 바짝 들은 백구만은 벌떡 일어나 다시 고개 숙여 축하했다.

“회장님, 축하합니다.”

“나 죽은 사람 아니다. 두 번 절하지 마라.”

“아, 예.”

“아까 그 사람들은?”

“예, 제 부하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놈들이 앞장을 설 겁니다.”

“이제 조금 뭘 배웠군.”

결국 백구만도 자기가 당하기 싫으니 앞장을 세울 부하를 휘하에 거느린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추가로 말했다.

“회장님, 저는 도계장 하나 사용 중입니다. 저놈들 도계장에 가서 털 홀라당 벗긴 놈들입니다.”

배우면 써먹는다고 불과 며칠 사이에 배운 그대로 불법으로 닭을 잡아 팔던 도계장을 인수했다. 거기서 자기가 당한 두 배 정도로 몽둥이질과 면도질을 병행하며 입단식하고 휘하에 거두었던 것이다.

“주류도매회사는?”

“허가 내려니 복잡해서 기존 것 사버렸습니다.”

“뭐 샀어?”

“예, 웃돈 주고 조금 힘 좀 쓰니 순순히 넘겼습니다. 마침 제 사채도 연채 물며 쓰는 놈이라 조금 수월했습니다.”

내밀한 흑막이 있겠지만 그거야 박천태가 자세하게 알 이유는 없었다.

“지분은?”

“불곰이 20, 제가 20, 전 사장이 10, 민자경 회장님이 30 그리고 나머지 20은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부주류합동 주식회사로 명칭만 바꾸었습니다.”

“수고했군.”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약혼식에 참석했던 하객들이 하나 둘 떠났다.

하객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민화자는 그제야 내실에서 박천태에게 말했다.

“약혼 여행은?”

“안가. 무슨 약혼 여행이야. 지금 김치공장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 가까운 계룡산이라도 가죠.”

“안간 다니까 그러네.”

약혼 여행을‘가냐 안가냐?’로 서로 옥신각신 하다 결국 보문산 놀이공원이라도 가자고 해서 그곳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리고 박천태는 논산으로 돌아가 이제 반야농장으로 완전히 이사했다.

약혼식을 대외적으로 한 이유가 바로 반야농장에서 세 사람이 같이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박천태는 여전히 안방에서 민화자와 자며 약혼자인 허윤희는 독수공방이다. 이상한 세 사람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었다.

박천태가 인삼 김치 사업하기 위해 민자경을 만나러 대전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녀로부터 인삼김치에 대한 자료를 넘겨받았다. 이후로 금산에만 가끔 다니고 근무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에 있는 김수훈은 박천태가 시작한 인삼김치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나름 고심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의 나하시 변두리에 있는 별장에서 지내는 김수훈은 요즈음 야구연습으로 바빴다. 같이 지내는 남자배우들이 심심하다며 글러브를 끼고 공 던지기했다. 가끔 던지기를 같이하다 보니 전생에 야구선수를 꿈꾸던 시절이 떠올라 투구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획! 퍽!

“스트라이크!”

김수훈이 던지는 공을 앉아서 받아 주던 남자배우가 매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작가님, 야구 언제 배웠어요. 이거 작가님 공이 엄청나네요.”

“그래요?”

“저 고교시절에 야구선수를 해봐서 압니다. 이건 대단한 투구입니다.”

졸지에 일본에서 더 머물러야 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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