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과 백 그리고 회색-19화 (19/591)

19화

술집에서 나온 박천태는 빠른 걸음으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어? 삼촌.”

자취방에는 청양에 있어야 할 김수훈이 찾아와 있었다. 삼촌이라는 호칭이 이상했는지 김수훈은 급히 반문했다.

“삼촌이라니?”

“제가 나이어린 형님에게 지금처럼 형이라고 부르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앞으로 삼촌이라고 부르려고요.”

“그러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겠다.”

잠시 생각하던 김수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랑 너와 성이 같으니 네가 내 외가 쪽 먼 조카 정도로 남에게 말하면 되겠네.”

“그러네요.”

오랜 만에 만나 사이라 두 사람은 그간의 지낸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양에서는 다들 잘 있죠?”

“응! 잘 지내지만 아무래도 엄마가 기어이 부여로 이사를 온다고 하더라. 은산에 막내 외삼촌도 사시고 그러니 다른 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나봐.”

“삼촌은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나야 간다면 우리가 살던 경상도 쪽이나 아니면 대전정도라도 가서 사는 것이 좋다고 보는데.”

“원하면 그리 가시죠?”

“엄마에게 말해 봤지만. 연고도 없고 돈이 너무 없다고 그냥 부여로 이사를 온다고 했어.”

사실 가난하다 조금 여유가 생겨 상점하나 마련할 정도의 돈만 있었다. 그러니 대도시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보통 결심이 아니고는 힘들었다.

김수훈도 부여로 오는 것을 찬성하는 기색이자 박천태는 다시 물었다.

“삼촌도 부여로 결정했군요. 그럼 전에 말씀하신 대로 부여로 와서 포목점을 하신다고 하나요?”

“응! 그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나 보더라.”

김수훈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자본금이 없는 상태로 돈 벌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많은 돈을 모으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저 전생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고 스스로 가진 능력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나는 그냥 평범한 남보다 조금 나은 생활만 하면 족하니 엄마 생각에 따르려고 했다. 지금은 한복도 많이 입고 시골도 결혼식을 많이 하니 그런대로 돈 벌며 살 것 같다.”

김수훈의 말에 박천태는 술집에서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제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인데 부여로 오시면 포목점에서 상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코너를 만들면 어떨까 하네요.”

“상포?”

“예, 우리가 살 때야 자금이 많이 드는 장례예식장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지금은 보통 집에서나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니 상포만 잘 취급하면 돈 벌이가 어쩌면 좋을 겁니다.”

그러자 김수훈도 나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았어, 내가 엄마에게 말해서 해보도록 하지.”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자 그제야 박천태는 김수훈이 찾아온 이유가 궁급해 물었다.

“왜 왔어요?”

“너도 만나보고 어차피 이사도 온다니 나도 미리 알아 볼 것이 있어 왔다. 별 일은 아니니 너는 신경 쓸 것 없었다.”

김수훈은 부여에 나타났다는 천재소녀가 아무래도 자기들과 같이 미래에서 넘어온 여자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 애에 대해 몰래 알아볼 생각이다.

‘이번에 그 여자 뒤를 캐서 신상내역만 정확하게 확인하고 가끔 살피면 되겠어. 굳이 나나 천태의 정체를 그 애 앞에 노출시킬 필요가 없어.’

두 사람이야 전생이나 이생이나 모두 사이가 좋다. 하지만 그 여자애의 경우는 자기들 정체가 드러나면 어찌 행동할지 전혀 모르니 살펴볼 생각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박천태에게 숨기기로 했다.

그러나 오랜 만에 만나 과거인 즉 미래의 자기들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 박천태는 전에 만났던 꼬마 이야기를 했다.

“삼촌, 나 여기서 조금 이상한 애를 봤어요.”

“누구? 뭐가 이상한데.”

“아주 어린 꼬마가 조금 행동이 어른스럽기도 하고 느낌이 이상합니다. 그 애 이름이 절 감옥으로 보낸 이은혜 검사와 같아 섬뜩하더라고요.”

김수훈은 자신이 알던 사건의 담당 검사가 달라 반문했다.

“너 잡아넣었던 검사가 이은혜냐? 그 사건은 남자검사가 담당했잖아.”

“그건 제가 뒤에 보복한다니 그냥 담당검사를 바꾼 겁니다. 아무튼 이은혜 검사가 광주에 숨어있던 절 잡아넣었다고 봐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한데 뭐 하러 원한을 품냐?”

“사실 그 사건은 강간은 아닙니다.”

“뭐?”

“일본 여자애를 서로 합의 하에 제가 그냥 건드린 정도지 강제로 먹은 것은 아닙니다. 이은혜 검사가 일본 놈들 사주를 받아 절 그쪽으로 몰은 겁니다.”

아직도 뭔가 억울한 내용이 있어서 이런다고 이해는 하지만 김수훈은 과거를 모두 지우기로 했으니 박천태를 타이른다.

“네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게 지금 와서 뭐 대수라고 지금도 계속 마음 쓰냐? 그래야 너만 피곤한데.”

“그 년 때문에 이런 곳에서 이상하게 살게 되니 잊기 어렵죠.”

박천태는 다소 단순한 성격이라 그런지 여전히 이은혜에 대한 앙금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조직생활을 하며 자기에게 위해를 가하면 반드시 보독하는 것이 습성으로 몸에 익어 이러는 것이다.

김수훈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다독였다.

“너도 참 이상하다. 여기로 와서 다른 사람이 됐으면 잊어야지.”

“아무튼 저는 꼭 이은혜가 절 또 잡으러 온 기분이라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건 그러고 그 애는 이상하기는 한 애입니다. 천재소녀라고 소문도 파다하고요. 꼬마가 법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법률용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김수훈 역시 천재소녀가 특별히 법률용어를 잘 사용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때문에 아무래도 검사출신인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었던 여자라고 확신했다.

박천태와 그런 악연이 있다면 마주 치지 않은 것이 좋다고 판단됐다.

‘그 여검사에게 원한이 많은 녀석이니 알아야 좋을 것 없어.’

혼자만 알아내서 안전할 경우 만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만나게 해줄 생각이다.

김수훈은 꼬마들에게 들은 그 애의 기행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잘났다고 하던 여검사가 여기서 어린 여자애로 살자니 쉽게 적응이 안 되어 벌어진 사고 같아.’

아버지라는 사람을 이상하게 본다든가 혹은 학교에서 선배에게 대들다 주어 터진 일들이 많았다. 3학년 시험을 봤다는 것이 모두 적응을 잘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도 지금 힘들게 적응하는 중이군.’

지방대학 출신인 자신도 이제 학교에서 매번 1등하는 처지로 변했다. 이은혜의 경우 검사출신이라 스펙이 너무 높으니 쉽게 자신의 능력을 감추기 어려웠으리라 잠작이 갔다. 그것으로 추측해 보니 이은혜의 경우는 자기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남의 앞에 나서서 두드러지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확실했다.

‘나와는 전혀 다르게 살겠어.’

자기도 여기서는 뛰어난 자신을 주체 못해 앞서 가려고 했다. 그 여자는 더욱 그게 강할 것이라고 이해가 됐다.

“천태야, 아무튼 너는 지금도 과거 생각 많이 하는 모양인데. 이제 모두 잊어라.”

“예. 이제 다 잊고 삽니다.”

“어차피 다른 세상으로 왔으면 여기에 적응하고 살고 공연히 필요 이상 나댈 것 없었다.”

“알았어요. 그래서 형님 말대로 공부도 하고 착실하게 지냅니다.”

여전히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박천태를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하는 생각으로 다시 신신당부했다.

“그래, 그냥 편하게 복 받아 이런 좋은 환경에서 산다고 생각하자. 전생 보다야 그래도 우리 두 사람 나은 생을 꾸려 나갈 능력은 주어 졌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예. 명심하죠.”

“그리고 네 짐 따로 내가 박스에 넣어 두었으니 굳이 짐 때문에 청양에 올 것 없었다. 그리고 공연히 송별회다 뭐다 와서 술 먹다 실수가 벌어질 수 있으니 그냥 입대하고.”

“예.”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하고 같이 잠을 자고 다음날 김수훈은 박천태가 출근과 동시에 구교리로 향했다.

이은혜와 옆집이라는 조지정을 만나면 더 빠르게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많아 혼자서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 여자애 집의 문패를 살피고 문 옆의 편지통에 들어 있는 고지서 등을 살짝 빼보았다. 그런 방법으로 그 애의 부모에 대해 정확하게 알았다.

“그 애 아빠는 건설업자군. 시골 기준으로 보면 돈도 많아 보이고.”

김수훈은 이은혜의 주변을 오전 내내 살피고 나서 부소산으로 올랐다.

부소산 중턱에 있는 전망대로 올랐다.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부여 시가지를 보며 나름 자신이 오래전에 올라 내려다보던 부여와 비교했다.

엄마가 이사를 온다는 5일 시장 쪽을 유심히 살폈다.

“5일 시장 쪽이 아직은 거의 허허벌판이군. 잘하면 그쪽에 지금 땅 조금 사 놓으면 나중에 편하게 먹고 살 돈은 벌게 생겼어.”

전에 와본 곳이라 가능한 판단이다. 그러나 사회가 원 역사 그대로 돌아가야 가능한 투자니 성공할 확률이야 자신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엄마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땅에 투자할 여력이 없는 처지다. 아무리 미래의 발전 모습을 안다고 해도 그저 그림에 떡에 불과했다.

“전이나 지금이나 돈 놓고 돈 먹기군.”

김수훈은 막내 외삼촌의 나이가 30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박천태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름 구상했다.

“아무래도 외삼촌을 끌어 들여야 돈을 빨리 벌겠어.”

전에는 자신의 어려서 행적을 아는 외가 식구에 대해 조금은 거부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자신으로는 대리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박천태가 군대를 다녀와야 뭔가 같이 해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는 외삼촌이 적당하다고 판단됐다.

‘나이도 적당해.’

외삼촌인 박명호는 은산중학을 나오고 부여고등학교도 나와 동창생들이 많았다. 또 은산에서 이장도 하던 사람이니 사업 파트너로는 적당했다.

‘재산도 조금 되니 합자 상대로 적당해.’

시골에서 논 10마지기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 정리하면 충분히 가게는 마련할 정도는 됐다.

김수훈은 청양으로 가는 길목인 은산의 외갓집을 들리기로 하고 급하게 산에서 내려와 시외 버스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가 부소산에서 내려와 시내권인 기념품 가게 근처를 지날 갈 무렵 어린 이은혜가 보였다.

“어! 저 애가?”

하는 짓을 살피기 위해 슬며시 뒤를 따라 갔다.

터덜터덜.

이은혜는 다른 여자애들과 비슷한 행동으로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과자가게에 들려 작은 수첩을 들고 뭔가를 적는 모습이 보였다.

‘오라, 저애도 뭔가 해볼 생각이군.’

이은혜는 심지어 슬며시 복덕방도 들어가 뭔가 기웃 거리기도 했다. 한 시간 정도 시내를 돌아다니더니 만족한 표정을 짓고 다시 집 쪽으로 향했다.

‘이제 집에 가나?’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에 뒤를 조심스럽게 멀리서 따라 가보니 이은혜는 경찰서 옆의 부여체육관으로 가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체육관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이은혜는 도복으로 갈아입고 태권도를 배우고 있었다.

“오라! 상급생에게 주어 터졌다더니 복수할 생각인 모양이군.”

아무튼 아주 어린 꼬마가 진지하게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김수훈은 빙그레 웃고 뒤로 돌아섰다.

더 이상 이은혜에 대해 알아볼 것이 없고 아직은 어떤 위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수훈은 서둘러 시외버스 정류장 옆에서 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부여체육관에서 태권도를 연습하던 이은혜는 잠시 쉬는 시간에 옆의 놀이터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의 그네에 혼자 앉아 한숨을 쉬었다.

“후! 내가 너무 성급했어.”

입학과 동시에 시작한 태권도라 몇 개월 배워 너무 쉽게 승급했다.

자신감에 차서 자기를 패대기 쳐버린 선배에게 대들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3학년이 너무 강하다 싶어 그제야 상대방에 대해 알아보았다.

“후! 뭔 학교를 4년씩이나 늦게 들어 왔냐? 부모들이 뭐 해 처먹느라고 애를 학교도 안 보내고. 어째 6학년들하고 반말 주고받더라니.”

어김없이 만 6살이면 학교에 입학하던 시절에 살던 이은혜로는 도통 이해가 불가능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선배는 3학년이지만 여학생들 중에는 소위 학교 짱이다. 그러니 내리 3년을 원수인 그 선배에게 고개 숙이고 살게 생겼다.

“인생 더럽게 꼬이네. 앞으로 줄 곳 죽어지내야 하다니.”

상대를 골라도 너무 잘 못 골랐다. 머리로야 그런 선배 정도 100명이 있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건 도통 머리가 아닌 몸으로 때워야하는 사건들이 발생하니 죽을 맛이었다.

감히 어린 1학년이 학교 짱인 선배에게 대들었다고 해서 등교와 동시에 과자 가져다 줘야 하루가 편하게 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것도 싫다는 것 사정하면서 두 손으로 뇌물 줘야 되니 어린 나이에 화병이 생길 정도다.

더구나 먹성도 좋아 잘도 받아먹고 배에 거지가 10마리는 들어 있었다. 배에서 조금 신호만 보이면 자기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냈다.

“야! 싸가지! 가서 주전자로 물 떠와.”

여린 몸으로 주전자를 들고 물을 떠다주면 한 모금 마시고 다 버렸다. 무거운 주전자 들고 물을 또 떠오라니 진짜 이건 똥강아지 훈련도 아니고 너무하는 처사다.

이은혜의 가방에는 공책이나 책등의 학용품은 단 하나도 없었다. 도시락 두 개와 과자 봉지만 가득하다. 그래서 용돈을 조금이라도 아낄 겸 과자 시세를 오늘도 알아보고 다녔다.

먹보인 선배는 식성 또한 까다롭다. 맛이 조금만 없으면 다른 여자애들에게 줘버리니 미칠 노릇이다.

‘주는 대로 처먹지도 않으니 뇌물 바치며 살기도 힘들군.’

검사하며 남의 뇌물은 받아 봤지만 자기가 바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 나오는 것이 그저 한숨뿐이다.

‘이 난관을 어찌 해결하지?’

아빠라는 작자는 부여에서 뼈를 묻는다고 고집이니 다른 학교로 떠날 수도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다. 안전한 제 2 아지트로 삼을 생각이던 그곳이 온통 지뢰밭이니 죽을 맛이다.

뇌물이란 처음에는 적게 처먹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 간덩이가 부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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