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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그리고 회색-13화 (13/591)

13화

박천태는 밖에서 주민들이 하는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건 나중에 의문사로 밝혀질지도 모르는 사건 같군.’

탁! 탁!

이때 몽둥이 철제 구조물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박천태가 근무하는 방범초소로 야방으로 같이 근무하는 동료가 다가왔다. 그는 몽둥이를 들고 증기로 찐 인삼 건조대인 일건장의 철제 시설물을 후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탁! 다다다다.

그 역시 무료한 시간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는 모양이다.

방범초소로 올라온 동료는 밖이 소란하자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노인이 주모하고 술 마시고 싸우나 봐요.”

동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 술만 먹으면 여기서 항상 싸우는 노인네.”

“잘 아시나보네요.”

“알지, 저 노인은 내 후배 아버님이야. 본래 저렇게 이상한 분은 아니었는데. 외아들이 자살해 죽고 많이 변했어. 약간 정신이상 증상이 있어.”

“그렇군요.”

계속 바통 터지 형태로 다음 방범초소로 가야했다. 그 때문에 박천태는 순찰시계를 받아 들고 서둘러 방범초소를 떠났다. 박천태는 노인이 울고 있는 장면을 보고 순간 이렇게 생각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삶도 있군.’

박천태가 떠나고 나서도 밖에서는 계속해서 노인은 땅에 펴져 앉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이고, 이놈아! 나도 데리고 가라. 아이고.”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지친다는 표정으로 하나 둘 사라졌다.

‘죽은 놈만 억울하지.’

목이 메어 한참 서럽게 ‘꾸억! 꾸억!’ 하며 울던 노인은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울다 지쳐서 그런지 땅에 그대로 누워 버린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노인에게 욕하며 박 터지게 싸우던 주모가 노인을 슬며시 안고 주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썩을 노인네. 이제 완전히 폐인이네.’

젊어서 한 때는 서로 정을 주고받던 사이다. 주모는 이제는 그런 오래전 과거야 깔끔하게 정리한 처지지만 길에서 얼어 죽게 생긴 옛날애인을 방치할 수 없어 방으로 들이고 있었다.

공장의 담장을 따라 있는 12개의 방범초소를 모두 돌고 정문의 경비실로 돌아오자 퇴근 시간인 아침6시가 됐다.

수위실 소속인 야방 근무자는 오후 6시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6시에 퇴근했다. 물론 2-30분 일찍 출근하고 2-30분 늦게 퇴근했다.

박천태는 야방들에게 근무복으로 지급된 허름한 남색 점퍼를 벗었다. 사복인 평범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정문을 나왔다.

정문에 서있는 마음씨 좋은 수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 하세요.”

“수고 했다. 오늘도 운동장 가냐?”

“예.”

박천태의 손에는 작은 가방이 들려있었다. 가방 안에는 빈 도시락이 있고 운동복과 축구화가 들어 있었다. 홍삼공장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의 유일한 놀이가 이제 축구뿐이다. 새로운 인생에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박천태는 부아가 나서 힘차게 차버릴 축구공이라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아까 아들 죽음으로 폐인이 된 노인을 목격하니 더욱 부아가 치민다.

‘에이, 더러운 세상.’

펑! 펑!

중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공을 차고 있었다.

“야! 간다!”

펑!

덩치가 큰 사람이 온 힘을 다해 힘차게 공을 차자 축구공은 하늘 높이 올라 받아줄 상대방의 키를 훌쩍 넘어 테니스장 쪽으로 굴러갔다.

“어이! 공 좀 차줘!”

“와서 가져가쇼.”

“좀 차달라니까?”

“나는 공 못 차니 주어 가시오.”

테니스장에서는 젊은 남녀가 모여 테니스를 치기 위해 준비 운동 중이다.

축구와 달리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은 조금은 부유층에 속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조기축구를 하는 사람들을 조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테니스 조기회에는 여자 회원들이 있으니 더욱 그런 경향이 심하다.

‘테니스가 품위 있는 운동이지.’

아무튼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지금 시절은 이렇게 운동도 등급이 분명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다.

박천태가 운동장으로 들어와 빠르게 옷을 벗고 스타킹과 축구화를 신고 나서 가볍게 준비운동을 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크게 외쳤다.

“천태 왔으니 게임 시작하지.”

“그럽시다.”

양편을 갈라 심판도 없는 축구시합이 벌어졌다.

펑! 우르르.

축구공을 따라 사람들이 이리 저리 몰려다녔다. 마치 개떼들이 뼈다귀 하나를 서로 차지하려고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모습과 비슷하다.

박천태의 포지션은 항상 풀백이다. 그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대충 편 가르는 경기라 사람들 얼굴이 헷갈려 자기편이나 상대편을 아직도 잘 구분 못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쉽게 구분이 가능한 풀백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골키퍼를 보기도 했다.

골키퍼를 보며 들고 차는 펑 차기하면 하프라인 너머까지 훌쩍 공을 넘기기 때문이다.

“최 순경! 여기!”

“야! 도 순경 거기 막아!”

조기축구회에는 경찰들이 여러 명 나오고 있었다. 군청이나 홍삼공장에 다니는 직원들도 여러 명 조기축구회를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주로 편은 직장인과 일반주민으로 나뉘어 경기하고 있었다.

전후반 20분씩 뛰는 경기가 끝나고 나자 일부 사람들은 빠르게 운동장을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을 먹고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다.

일부는 페널티 킥을 교대로 차는 커피내기를 했다. 대부분 읍내에서 자영업 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었다.

박천태는 이때부터 운동장 구석에서 본격적으로 태권도나 격투기 수련에 들어갔다.

“탓! 핫!”

도복을 입지 않고 축구 유니폼을 입은 상태로 연습했다. 그렇다고 오래 하는 것은 아니고 매일 20분 정도만 하고 운동장을 떠나고 있었다.

그가 격투기 수련을 끝낼 무렵. 골대에서 커피 내기는 끝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결국 오늘 커피를 사게 됐다.

“천태야! 너도 같이 가자.”

“아닙니다. 집에 가서 밥해먹어야 합니다.”

“먹고 가라니까 그러네.”

박천태는 청양에서 벌어진 황소 도난 사건 이후로 다방이라면 이가 갈린다. 더구나 다방 레지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조기회의 어른들이 커피를 마시러 같이 가자고 해도 단 한 번도 따라가지 않았다.

홍산 제조공장의 야방으로 취업한 박천태는 그런대로 적응해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중학교 운동장에서 나와 대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중. 아주 어린 꼬마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학교를 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 오늘이 애들 입학식인 모양이군.”

대부분 입학생들은 부모의 손이나 아니면 상급생인 언니 오빠의 손을 잡고 가고 있었다.

재잘재잘.

박천태의 눈에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보였다. 다른 애들과 달리 가방도 메지 않고 혼자서 학교를 가는 것이 조금 이상해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상하네. 1학년으로 들어가는 입학생 같은데 혼자 가네.’

어린꼬마는 고개를 위로 들고 매우 거만한 표정이다.

대단한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꼬마의 걸음걸이가 마치 성인이 걸어가는 당당한 걸음이라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꼬마로 안보이니 이상하네. 영 분위기가 어려진 형님과 비슷해.’

박천태는 매우 신기한 것을 구경이라도 한 표정이다. 어린꼬마 옆으로 지나며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을 슬쩍 바라본다.

‘헉! 이은혜!’

순간 오금이 저려 왔다.

공교롭게 자기를 4년간 감방으로 보낸 여검사와 이름이 같아 매우 놀란다. 상대조직의 행동대장을 칼로 찌르고 일본에서 유학 온 대학생이라는 그 녀석 애인인 일본여자를 겁탈하고 도피생활을 2년간 했다.

일본인인 여대생 강간사건이라고 해서 언론에서 크게 보도가 나갔다. 하지만 사실 자기가 겁탈한 여대생은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손잡은 조직의 감시 역할로 보낸 조직원이다.

자기가 이상해서 바라보자 꼬마도 걸음을 멈추고 박천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뭔가 알아내려고 생각하는 모습이다. 박천태는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또 한 번 새삼 놀란다.

‘진짜 이름이 똑 같네. 하필이면 그 독종과 이름이 같으냐? 이상하네.’

박천태가 저지른 살인미수사건은 야쿠자의 지원을 받은 조직과 순수한 국내파간의 세력 다툼이었다.

결국 이은혜 검사는 광주의 판자촌에 숨어 있는 자기를 찾았다. 살인미수에 강간범으로 감방으로 처넣은 독종이다. 여검사가 직접 자기를 잡지는 않았다. 광주경찰에게 잡혔지만 부산지검에서 근무하는 이은혜 검사의 지휘에 의해서다.

“그 검사 년 보고 전해, 내가 감방에서 나오면 홀랑 벗겨 잡아먹고 보도방에 처박아 버린다고,”

자기가 너무 날뛰며 여검사에게 철저하게 보복한다고 지랄하자 검거 이후 박천태의 살인미수와 강간죄는 남자검사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이건 무슨 조화야. 독종인 그년과 이름이 같은 여자애를 보다니. 영 찜찜하네.’

조직에서 손도 쓰고 의형제인 김수훈이 변호사사서 힘을 썼다. 그 바람에 10년은 살 감방 생활을 4년으로 줄여 만기 출소했다. 서로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자기를 추적했다는 여검사의 이름은 또릿하게 기억했다.

영 기분이 찜찜해 박천태는 서둘러 꼬마 옆에서 멀어졌다.

그 여검사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열도 나지만 진짜 집요한 여자라 은근히 겁도 났다.

놀라 자기를 바라보는 청년을 보던 이은혜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지? 보긴 많이 본 얼굴 같은데.’

기억이 날것도 같고 착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많이 본 사람은 확실해 보였다.

‘나중에 유명한 사람이 되는 사람인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봤나?’

얼굴에 칼자국도 없고 나이가 7살이 어려졌으니 이은혜는 자기가 2년간 추적해 잡게 했던 박천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착각하는 모양이군.’

이은혜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걷고 있었다.

혼자서 걷고 있는 이은혜 옆으로 자전거를 탄 6학년 학생인 조지정이 다가와 말했다.

“너, 왜 혼자 가냐?”

“·········.”

“어! 오빠가 말하는데 왜 대답 안 해?”

“야! 할 일 없으면 가서 주둥이나 닦아. 남자 자식이 주둥이가 너무 싸면 병신 같아 보이니.”

“이게.”

조지정은 이제 6학년이다. 삼촌의 명령도 있어 이제 학교에서 대장 노릇을 할 참이다. 이제 겨우 1학년에게 면박을 당하자 얼굴이 퍼레졌다.

어린 여자애를 팰 수는 없었다. 더구나 경찰서장 부인과 아주 친한 꼬마 애라 배경도 무시 못 했다.

“싸가지 하고는.”

1학년 꼬마에게 쪽팔림을 당해 화가 났지만 한마디 던지고 애써 참으며 빠르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 학교로 향했다.

그런 조지정의 뒷모습을 보던 이은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런 병신 같은 새끼.”

엄마가 아빠 화물차로 학교에 데려다 준다고 했다. 혼자서 간다고 고집을 부려 혼자서 걸어오기는 했지만 구두래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5살 꼬마 걸음으로는 멀기만 하다.

‘에이, 짜증나, 집에 가면 엄마 꼬여서 자가용 한 대 사라고 해야겠네.’

결국 이은혜는 화물차가 싫다고 걸어서 온 것이 약간 후회가 됐다.

이은혜는 다리가 아파오자 짜증이 나서 신경질을 냈다.

“어휴! 그냥 학교 다니지 말고 검정고시로 다 해결해 버릴까?”

아직은 그것이 유리한지 아니면 학교 적당히 다니며 숨고르기 하는 편이 유리한지 잘 판단이 안 섰다. 더구나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니 일단 다니기는 해야 될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복잡하게 하며 이은혜는 걸어가고 있었다. 홍삼 공장의 까마득하게 높은 담장 옆으로 난 길을 지나 학교로 가고 있었다. 그러자 높은 담장 위에서 여자들이 크게 소리쳤다.

“꼬마야. 삼 줄까?”

그러자 짜증이 난 이은혜가 크게 소리 지른다.

“찌질한 공순이들이나 많이 처 드셔!”

너무 황당한 말에 여공들이 다들 기도 안차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린다.

“뭐 저런 꼬마가 다 있냐?”

“싸가지가 하나도 없네. 언니 보고 공순이라니.”

그러자 한 여자가 슬며시 나서며 자심감이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꼬마 말이 틀린 것이 아니지. 우리가 공장 다니니 공순이는 틀림없지.”

이 여자는 얼마 전 대학출신 회사원과 선을 봤다. 그러나 홍삼공장에서 상용직으로 일한다고 하자 남자가 기겁하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이무렵 부여의 홍삼공장에 다니는 여자들은 모두 바람둥이고 남자직원들의 밥이라는 낭설이 많이 퍼져 있었다.

진짜 사랑을 해서인지 아니면 이해관계로 그랬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여공들과 남자직원들 간에 벌어지는 애정문제는 매년 몇 건씩 연달아 큰 소문과 함께 터지고 있었다.

수위나 직원들과 바람나서 놀아난 여공들이 팬티나 브래지어에 홍삼을 넣어 빼돌리다 들켰다는 그런 소문들은 항상 들리고 있었다.

이은혜는 담장이 너무 높아 꼭 교도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휴! 저런 곳을 어떻게 다녀. 나 같으면 당장 공장 그만 두겠네.”

바로 옆에는 남자 중학교라 그런지 철조망 담에는 박박 머리로 검정 교복 입은 중학생들이 새로 입학하는 이은혜에게 놀리듯이 말했다.

“너도 이제 20년 고생길로 접어드는구나.”

남자의 경우 군대까지 계산하면 대학까지 나와 사회로 나가려면 20년을 꼬박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자 이은혜는 그런 까까머리 중학생들에게 역시 똑 부러지게 응수했다.

“머리 박박 깎고 조폭도 못되는 오빠들이나 잘하셔. 꼭 공부 못하는 것들이 세월 타령만 하더라.”

남학생들 역시 뜨악하여 뭐라고 응수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뭐! 저런 이상한 꼬마가 다 있냐?”

그러자 한 남학생이 나서며 고개를 저으며 응수했다.

“야! 저 애 건드리지 마! 말해봐야 소용도 없지만 보통 똑똑한 애가 아니라 말 잘 못 걸면 크게 망신만 당했다.”

“왜?”

“말 하는 싸가지도 너무 없지만 그냥 영어도 좔좔좔 씨부렁거리지. 고등학교 수학문제도 풀어버린다고 하더라. 아무튼 거의 괴물 수준이야.”

“그러냐? 저 꼬마가 그럼 구두래에서 부소산 정기 받아 태어났다고 소문난 천재소녀라는 거냐?”

“응!”

그런 소리를 뒤로 하고 이은혜는 천천히 걸어 이제 새로운 거점인 학교에 도착했다.

와글와글. 재잘재잘.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운동장 주변에는 많은 학부형들이 처음 학교에 들어온 자녀를 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은혜는 많은 학생들이 있는 운동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커다란 학교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후! 여기가 제 2 아지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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