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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그리고 회색-7화 (7/591)

7화

와글와글. 재잘재잘.

즐거운 수학여행을 떠나자 들뜬 기분인 아이들은 신이 나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관광버스의 제일 뒷자리에 앉은 김수훈은 머리가 너무 지끈거리고 아프다.

‘에이, 오지 말걸.’

전생에 이곳은 두 번이나 찾아와 구경했기 때문에 흥미가 전혀 없었다.

‘볼 것도 하나도 없는 곳인데.’

나중에 거액을 투자해서 관광 개발했어도 볼거리가 별로 없던 곳이다. 지금은 더 엉망일 것이라 구경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더구나 애들과 어울릴 나이도 아니라 더욱 그렇다. 김수훈은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고 골만 지끈거렸다.

‘영어단어나 외워야겠네.’

항상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영어단어장을 꺼내들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단어장을 넘기며 영어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외운다. 한창 집중해서 영어단어 외우는 김수훈에게 신복일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공주 먼저 들려 점심은 백제탑에서 먹는 다네요.”

“알았어!”

“오늘 같은 날도 공부해요?”

김수훈은 영어도 아주 잘하고 대부분 과목에서 늘 만점이다. 수학여행 도중에도 단어를 외우자 무척 신기해 보였다.

‘오늘 같은 날도 공부하네.’

이렇게 시끄러워도 공부를 하니 너무 신기해 위아래로 자꾸 살폈다. 김수훈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신복일의 머리를 영어단어장으로 툭 치며 버럭 소리 지른다.

“저리가라! 가서 놀아!”

신복일이 어마뜨거라 얼른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애들이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김수훈은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워 그것도 잘 안되면 앞으로 살 길을 곰곰이 생각했다.

‘천태 자식은 나중에 축협 들어가 인공수정사라도 하며 살지만 나는 앞으로 뭐하며 살지?’

과거에서 깨어나 그런대로 적응해 살고 있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조금 막막하다. 그렇다고 꼭 해보고 싶은 것도 현재로는 없었다. 그러니 미래의 자기 모습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지금부터 법 공부나 죽어라해 한 우물 파서 사법시험이나 한번 봐볼까?’

변호사만 되면 밥 먹고 살 걱정은 절대 안하는 세상이다. 제일 좋은 직업 같았다. 잘난 사람들은 변호사자격증 정도야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것 취득하면 대통령도 하고 국회의원도 되고 그러던데.’

머리는 좋다고 평을 받던 처지다. 어쩌면 합격될 것도 같다. 더구나 몸 주인의 본시 머리도 지능검사에서 130이 조금 넘는 좋은 머리니 가능하게 생겼다. 슬며시 애들 시켜 담임선생님에게 알아낸 정보다.

그러나 사법시험은 워낙 어렵고 힘든 공부라 그걸 감내할 자신감이 없었다.

‘죽게 공부해 떨어지면 꽝인데.’

그것 보다는 쉽고 보람 있으며 재미있는 그런 직업을 찾고 싶다. 물론 안정성도 보장되어야 한다.

‘제일 좋은 것은 땅장사 인데 자본금이 없으니 그것은 현재로는 힘들고·······.’

차창 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를 집중해서 생각했다. 그쪽으로 집중하다 보니 소란해서 머리 아프던 것이 어느새 사라졌다.

‘뭔가 빨리 정해야해.’

김수훈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직업군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나름 미래를 구상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상상하고 있었다. 중간에 걸림돌이 생기면 다시 다른 직업을 선택해 골똘하게 생각했다. 너무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니 그 또한 혼란만 가중됐다.

‘썩을! 미래를 너무 알아도 병이네.’

공주의 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자 다들 관광버스에서 내린다.

와글와글. 시끌시끌.

답답한 관광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은 신이 나서 계속 뭔가 지껄이며 요란하게 떠들고 있었다.

버스기사는 버스 안을 살피다 제일 뒷자리의 남학생 혼자 내리지 않자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너는 안 내리냐?”

김수훈은 집중해서 딴 생각하다 다른 애들이 모두 내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김수훈은 구경하고 싶지 않아 슬며시 옆으로 누우며 답했다.

“저는 멀미가 나서 그냥 여기서 잠이나 자려고요.”

김수훈이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답하자 운전기사는 밖에서 기다리던 담임선생님에게 크게 외쳤다.

“한 명은 멀미나서 여기서 잔다고 하네요.”

“알았어요. 멀리 가지 못하게 하세요.”

다른 애들은 구경을 다니고 있지만 김수훈은 관광버스 안에서 미래만 생각하고 앉아 있었다. 한참을 지나 다시 아이들이 버스에 오르자 다시 귀가 아프도록 떠들고 있었다.

“야아! 정말 신기한 것 많네.”

“옛날 사람들도 솜씨 엄청 좋았네. 금으로 별거 다 만들고.”

김수훈은 아이들이 계속 떠들자 이제 아예 귓구멍에 휴지를 박아 버리고 눈을 감는다.

공주를 관광하고 바로 이동해 부여의 백제탑에 도착했다. 김수훈은 그제야 관광버스에서 천천히 내렸다. 그가 전생에 보았던 경치와는 전혀 다르다. 백제탑 바로 옆에는 중학교가 있고 커다란 공장이 있었다.

‘어? 무슨 공장이지? 이상하게 구수한 냄새가 나네.’

김수훈의 호기심은 너무 쉽게 담임선생인 배창연이 풀어줬다.

“다들 주목! 여기 있는 석탑은 백제탑 또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고 부르는 국보 제9호인 백제시대의 건축 양식도 잘 알 수 있는 탑이다. 저쪽 공장은 인삼을 증기로 찌고 햇빛에 잘 말려 홍삼 만드는 홍삼제조공장이다. 홍삼은 신비한 약이라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나중에 사회시험에 자주 나오니 다들 외우도록.”

“네~에!”

“지금부터 점심시간이니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점심식사해라.”

담임선생님의 일장 훈시가 끝났다.

와! 와!

아이들은 크게 함성을 지르고 백제탑 주변 잔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푸짐하게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

당연히 김수훈은 지천파인 10명과 같이 모였다. 다들 부모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펼쳤다. 한 결 같이 비슷한 모양의 단무지에 계란이 들어 있는 김밥이다. 물론 살림 형편이 좋은 애는 김밥 안에 소고기를 넣은 녀석도 있었다.

“야! 따로 먹지 말고 같이 놓고 펼쳐 먹어.”

“넷!”

지천파는 강령은 거창했지만 이미 많은 애들이 떠났다. 하루 이틀 사이에 김수천의 과도한 과외교습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탈퇴했다. 공부가 진짜 남 일인 애들은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이제 지천파는 김수훈을 제외한 남자 5명과 여자 5명으로 총 11명이다. 다들 공부 좀 하는 반장 부반장 혹은 공부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애들로 새로 구성됐다.

영어를 배운다니 공부 잘하는 여자애들 세 명이 쉽게 멤버로 합류했다. 공짜로 영어 배운다니 두말 안하고 제일 상위권 성적인 여학생들이 들어왔다. 남보다 잘 되는 애들은 어려서부터 뭐가 달라도 달랐다.

여자로 창립 멤버인 두 아이는 모두 사는 형편이 좋아서 그런지 싸온 도시락에 소고기가 들어 있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임선영이 자기가 싸온 도시락을 김수훈에게 드밀며 말했다.

“삼촌, 드셔요. 선생님 드린다고 엄마에게 세 개 싸달라고 했어요.”

“고맙다.”

김수훈이 도시락 하나를 받아 들자 임선영은 도시락 하나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저애 집은 벌써 치맛바람 일으키나?’

아직도 임선영의 부모님이 뭘 하고 사는 분들인지 잘 몰랐다. 옷을 잘 입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사는 형편은 좋아 보였다. 이 시절은 담임의 가정 방문도 있었다. 외부로 들어나지는 않지만 잘 사는 애들의 부모님들은 선생님들을 상대로 은밀하게 촌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다들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 중. 지천파의 넘버 투인 조지정이 김수훈 옆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뒷머리를 극적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삼촌, 나 여기로 전학 와야 해요.”

“전학?”

“예, 아버지가 여기 부여경찰서로 발령 났어요. 돌아가면 여기로 전학 와야 해요.”

졸지에 사귄지 며칠 되지도 않고, 아니 졸병으로 삼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지게 됐다. 점심식사는 조지정의 이별 파티라는 이벤트로 변하고 말았다.

“지천, 영원히!”

“건배!”

사이다를 이별주로 해서 다들 크게 구호를 외치며 건배했다. 김수훈은 여전히 심란해 보이는 조지정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당부했다.

“조지정! 전학 가서 기죽지 말고 잘해. 나중에 내가 중학교는 여기로 올지 모르니 자리 잘 잡아라. 삼촌 쪽 팔리게 하지 말고.”

“예, 삼촌.”

아이들이 점심 식사하는 잔디밭 주변에는 아이들 용돈을 노린 장난감 장사들 수십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김수훈은 이별이라니 그래도 선물을 주고 싶었다.

액세서리를 파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구경했다. 작은 구리합금인 반지를 보며 물었다.

“아저씨 이거 얼마에요?”

“그것 싸다 100원.”

10명이면 1000원이라 많은 돈이 들지만 그래도 지천파의 삼촌으로 이 정도는 써야 체면이 서게 생겼다. 축협을 다니는 박천태가 월급 탄다고 넘겨준 용돈도 있었다.

김수훈은 남자들 줄 것으로 조금 굵은 반지를 샀다. 여자들은 조금 다른 실반지를 샀다. 같은 모양의 반지가 없었다. 자기가 낄 반지는 덤으로 얻었다.

김수훈은 10개의 구리반지를 애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며 호언장담했다.

“야! 이게 내 이별 선물이고 앞으로 지천파 표시다. 우선 굵은 손가락에 끼고 나중에는 손이 굵어지면 새끼손가락에 끼면 될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넷!”

“나중에도 이 반지 끼고 있는 애는 내가 금반지로 바꿔준다.”

“예!”

생각이 있는 놈은 충성할 것이다. 금반지가 욕심이 나서 구리반지를 버리지 않을 것을 계산해 하는 당부 말이다.

“그리고 다들 알겠지만 지천은 굽이굽이 흘러 부여 백마강에서 다시 만나니 지천파인 조지정도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알았나?”

“넷! 삼촌!”

하루가 다르게 아이들은 이제 삼촌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자기들과 동급생이 분명하나 뭐든 어른과 같이 행동하니 이제 마음속으로 승복하고 있었다. 애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위력을 크게 발휘하는 것은 김수천의 허접한 영어실력이다.

조지정은 자기의 이별 파티를 이런 식으로 조금 거창하게 하자 감격해서 울먹인다.

“삼촌, 꼭 중학교 부여로 오는 거죠?”

“알았어, 너 터 잘 잡으면 내가 다른 애들과 같이 부여로 올 거다.”

“애들도 같이요?”

“그래, 같이 왔다. 그러니 자리 잘 잡아.”

김수훈은 누구에게 당하지 않고 살 무술이야 익힌 상태다. 또한 앞으로 더욱 무술 실력은 늘게 될 것이니 걱정은 안했다. 하지만 여러 명을 혼자서야 감당하기 힘들다. 그것을 면하려면 조금 과격한 싸움을 벌일 수도 있었다.

‘내가 굳이 어린 꼬마들과 대가리 터지게 싸울 이유야 없지.’

일종에 방패막이로 주변에서 얼쩡거릴 애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다시 이동해 부소산 자락에 있는 박물관도 구경했다. 부소산을 한 바퀴 돌고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구두래 나루에 도착했다.

관광버스가 시내 권에 주차되어 있어 아이들은 걸어서 이동하고 있었다.

부소산 자락에 있는 커다란 호텔인지 여관인지가 보이는 옆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와글와글.

여전히 아이들은 서로 재잘 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

갈림길 모퉁이에서 웬 꼬마 여자애가 쪼그리고 앉아 깡통을 하나 놓고 구걸하고 있었다.

“오빠! 10원만!”

옷차림이 고급이라 부잣집 애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 여자애가 길가에 가마니 깔고 앉아 깡통 놓고 구걸하니 길을 가던 애들이 다들 서성이며 구경했다.

더구나 옆에는 야외용 전축을 놓고 크게 음악을 틀고 있으니 너무 신기해 보였다. 야외용 전축에서는 전영록의 애심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떠나갈 당신이여~ 이제는’

어린 꼬마가 이런 뭔가 애절하게 갈구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깡통 놓고 구걸하니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한 녀석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집 어디냐?”

“나 집 나왔어! 오빠! 도와줘! 며칠 굶었어.”

얼굴도 예쁘고 옷도 고급인 애가 이렇게 말하니 어떤 녀석은 동전을 깡통에 던져주고 있었다.

짤랑!

“오빠! 나중에 장가 잘 가고 출세하세요.”

다섯 살 정도인 어린 여자애가 동전을 던진 국민학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장가 잘 가고 출세하라고 덕담하니 더욱 이상하다.

순간 김수훈은 대단한 흥미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깡통 안에 넣어주고 꼬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꼬마가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이상한 애네. 하는 짓이 꼬마애로 안보이네.’

자기 자신이 이상한 몸이라 이상한 여자애를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여자애도 많은 동전을 주는 김수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눈도 껌벅거리며 재차 확인하듯이 살폈다.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알 수가 없네.’

길에서 구걸하는 여자애는 이은혜다. 엄마가 자기에게 용돈 많이 안준다고 일종의 시위를 겸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로 나와 구걸하고 있었다.

“은혜야! 은혜야!”

갑자기 목이 터져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많은 꼬마들이 몰려서 뭔가를 구경하자 장정옥은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후다닥 달려와 바라보고 기겁했다.

“은혜야! 너 왜 또 이러니?”

“·······.”

“말이라도 해봐라. 너 또 여기 나와서 왜 구걸하고 이러냐?”

“·········.”

답답한 장정옥은 사정하는 투로 말했다.

“은혜야! 네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아야 엄마가 뭘 해주지.”

몇 번을 이렇게 반복하며 사정하는 조로 말하자 그제야 이은혜는 무덤덤하나 다소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에게 과외비는 줘야 당연하죠.”

“뭐? 과외비를 내가 안준다고 이러냐?”

장정옥은 기도 안차서 입을 떡 벌린다. 이제 이상해진 딸은 ‘돈 귀신이 붙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은혜는 태연하게 자기가 왜 이러는지 설명했다.

“용돈 달라니 엄마가 저보고 나가서 벌어먹으라니 별 수 없죠. 제가 너무 어리니 먹고 살기에는 구걸이 최고더라고요.”

“내가 너 때문에 미쳤다.”

장정옥은 점점 이상해지는 어린 딸 때문에 자신이 먼저 정신병원으로 가든가 울화통이 터져 화병이 날 지경이다.

두 모녀 지간이 이런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담임선생님이 애들에게 크게 외쳤다.

“빨리 차에 타라! 가면서 무량사도 들려야 하니. 바쁘다.”

“네~에!”

아이들이 다들 크게 대답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김수훈도 조금 특이한 여자애라 약간 호기심을 보였으나 흘려버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이상한 인연으로 같이 과거로 떨어진 두 사람이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은혜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장정옥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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