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과 백 그리고 회색-5화 (5/591)

5화

늦은 가을이라 쌀쌀한 찬바람이 부는 초저녁.

마루에 걸터앉은 이은혜는 옆에서 털실로 모자 만든다고 뜨개질하는 장정옥에게 은근하게 말을 건넸다.

“엄마! 아빠랑 왜 살아?”

“그냥 살지.”

“아빠가 다른 여자와 바람도 피는데 그냥 확 이혼해 버리지.”

어린 딸의 말에 장정옥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너 아빠 싫어?”

“응! 싫어!”

“왜?”

“내 알몸도 함부로 보고 그러잖아.”

“아빠는 봐도 되는 거야.”

아빠가 자기 알몸을 본 것에 대해 딸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니 어떻게 해서라도 달래볼 요량이다.

“날 껴안고 그러니 진짜 싫어.”

“아빠잖아!”

“난 그러면 죽고 싶어.”

아빠라는 남자의 과도한 스킨십으로 인해 드디어 이은혜는 정신이상 증상을 보였다. 괴성을 지르다 못해 때로는 면도칼을 들고 이덕배가 접근하면 다가오지 못하게 휘두르는 지경으로 이르렀다.

이은혜는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칭얼거렸다.

“엄마, 엄마는 아빠랑 이혼하면 더 멋있는 남자만나 아주 멋지게 잘 살 거야.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엄마 부자 만들어 줄게.”

어린 딸의 이런 당돌한 말에 너무나 황당한 장정옥이다. 방금 한 말은 5살 여자아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다.

‘이 애가 귀신이 들렸나?’

순간 팔뚝이 써늘해 지더니 소름이 돋는다.

얼마 전. 딸이 벌거벗고 목욕하는 장면을 아빠에게 보이고 나서 이제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혹시 은혜가 너무 조숙해서 그런 가?’

아빠가 가까이 접근해 손만 만져도 금방이라도 죽겠다는 듯이 괴성을 지른다. 장정옥은 요즈음 심각하게 딸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저 애 머리가 진짜 이상해졌나?’

참으로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조숙한 딸이 너무 무섭다.

여름에 물놀이하다 익사할 수 있었던 사고 전에는 아빠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잘 따랐다. 애교도 무척 많았던 딸이 돌변했다.

고민하던 장정옥은 칠갑산의 장곡사를 찾아가 해운스님을 만났다. 딸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조언을 구했다.

장곡사 주지인 해운스님은 그저 지그시 눈감고 목탁을 두드리며‘업보로다. 업보로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부모들의 지은 죄가 너무 커 생긴 업보라고 했다. 말이야 빙빙 돌려 청산유수로 했지만 절에 시주 많이 하면 업보는 풀릴 수 있다는 조언이다.

장정옥은 남편을 설득시켜 조금 후하게 시주했다. 그러나 이은혜의 증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엄마에게 이혼하고 따로 살자고 틈만 나면 칭얼거렸다.

“엄마! 우리 따로 살자.”

“뭘 먹고 살고?”

“위자료 받으면 되잖아.”

하는 말마다 부모에게 이혼 아니면 위자료 타령이니 약간 머리가 요상하게 변한 딸이다.

결국 안아 준다고 다가오는 아빠를 부엌칼을 들고 찌르려고 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그 사건 때문에 이제 남편은 다른 집에서 지냈다. 그러자 이은혜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조금 만족해하며 잠잠해졌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접촉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제는 별거 중이고 간통죄에 해당되니 이혼하라고 재촉이다.

“엄마! 아빠 간통죄로 감방에 집어 처넣으면 위자료 아주 많이 받아. 위자료 많이 받는 방법 내가 알려줄게. 그리니 이혼해.”

너무 황당한 어린 딸년의 말에 장정옥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나이를 조금만 더 먹었다면 ‘싸가지 없는 년.’이라고 따귀라도 치게 생겼다. 나이가 어느 정도 된다면 집에서 내보내기라도 하련만 이제 겨우 5살인 아이의 행동이라 떨떠름해도 그저 웃어넘겼다.

“너, 그런 이상한 소리 어디서 배웠냐?”

“엄마, 신문도 보고 라디오에서도 많이 나오잖아.”

이은혜는 시대 적응을 위해 신문은 아주 자세하게 읽는다. 유독 범죄수사 보도를 좋아했다. 그럴듯한 핑계라 장정옥은 아무래도 그런 언론매체의 악영향을 받아 이런 말을 딸이 자주한다고 판단했다.

사실 이은혜는 또렷하게 기억하는 전생이 검사니 그런 간통사건 처리 방식이야 오래 전에 도통했다.

30대의 젊고 뜨거운 열정을 지닌 장정옥은 본의 아니게 외동딸의 괴이한 행동으로 인해 참으로 외롭다. 품기만 하면 자기를 녹초 시키는 힘 좋은 남편과 별거하며 독수공방 중이다.

‘저년이 이제 내 원수여 원수.’

남편과 뜨거운 밤은 이제 가물에 콩 나듯. 불륜 커플들이 몰래 바람피우듯 여관으로 가서 해야 할 지경이니 미칠 노릇이다. 너무 뜸하게 그러다 보니 그런 날은 전신이 녹아나는 뜨거운 밤이다. 장정옥은 날 잘 잡아 컨디션 아주 좋은 날로 정해 남편 만나러 갔다.

이제 점점 날도 추워지고 밤은 한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후! 애물단지인 딸년 때문에 나만 생과부 됐네.”

장정옥은 남편 없이 외롭게 긴긴 가을밤을 보내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장곡사의 해운스님 말대로 자신의 업보임에는 틀림없었다. 아무튼 기이한 행동과 더불어 어린 딸은 머리가 엄청 좋아졌다.

장정옥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중간 이상의 성적으로 졸업해 무식은 면했다. 나름 교양서적도 많이 읽어 촌구석에서는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자기보다 5살 어린 딸이 더 똑똑했다.

딸이 이혼을 종용하며 조그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한 법률 용어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신문을 너무 봐서 그런지 세계정세에 대해 가끔 말하는 것을 보면 ‘천재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왜 천재냐면 신문에 나오는 어려운 한자도 딸은 어디서 배웠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한자가 하나도 없었다.

‘무당 찾아가 푸닥거리해야 하나?’

요즈음 들어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다. 딸은 아무래도 공부 귀신이 들린 것 같았다. 용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 해보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중이다. 열렬한 불교신도라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잘못하다 부처님이 노할까 두렵다. 그녀는 사실 부처님께 엄청난 죄를 지은 여자다.

아빠의 스킨십으로 고민하던 이은혜는 자신이 아무리 종용하고 졸라도 이혼할 의사가 전혀 없는 장정옥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에이, 다 틀렸네.’

별 수 없이 타협점을 찾아보는 것이 상책이다.

골똘하게 한참 생각하던 이은혜는 드디어 묘안을 떠올리고 말했다.

“엄마! 아빠하고 이혼하기 어려우면 나만 따로 다른 집에서 살면 안 돼? 아빠 돈 많으니 식모 하나 딸려 나는 딴 집에서 살게 해줘.”

이런 말에 장정옥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속으로 철부지 어린 딸을 욕하고 말았다.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 싸가지 없이 벌써 부모 버리고 따로 산다고 하네.’

몸이야 장정옥 부부의 딸이지만 정신은 전혀 다른 30세의 성인여자니 두 사람의 대화는 소통이 원활할리 없었다.

이은혜는 아빠라는 늙은이가 자기의 귀한 알몸을 보고 더구나 민민한 그곳까지 봤을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도저히 아빠라는 존재가 사람으로 안 보였다.

‘별 이상한 늙은 놈이 사는 집을 아지트로 삼다니 내가 멍청하지.’

목욕할 때 왜 들어와 늙은 놈이 어린소녀인 자신의 귀하고 귀하신 몸을 함부로 쳐다보냐는 것이다.

전생에서도 30살까지 남자 경험이 전혀 없던 그런 귀한 몸이다. 이제 다시 어린소녀가 되어 깨어났으니 그것도 더블로 점수를 계산한다면 완전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될 정도의 귀하신 몸인 잘나가던 미녀 검사니 더욱 그렇다.

‘변태 같은 자식.’

때로는 아빠이니 그런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본능적으로 용납이 안 됐다. 그 늙은이를 보면 전신이 부들거리니 어쩔 수 없었다.

기분 좋아야 할 새로운 삶이 고통의 연속이다. 돈도 적당히 있고 다른 것은 스스로 이루면 되니 먹고 살 적정은 안 됐다. 그러나 아비의 지나친 사랑 때문에 참으로 고약한 가정에서 깨어났다는 더러운 기분이다.

고통의 연속이라 다니던 부여유치원이야 진즉에 때려 치웠다.

코 흘리게 하고 같이 논다는 자신이 참으로 가증스러워 보였다. 엄마는 안 간다고 울고불고 버티는 자기를 억지로 손잡고 유치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런 엄마에게 턱하니 영문 편지 간단하게 한 줄 써주고 그것으로 유치원을 조기 졸업해 버렸다.

“엄마, 나 유치원 다니는 돈 용돈으로 줘.”

“뭐?”

“나에게 쓸 돈 아꼈으니 나 줘도 되잖아.”

말하는 싹수로 보아 나중에 효도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장정옥은 퉁명스럽게 내뱄었다.

“나 본래 너 유치원 그만 두게 할 생각이다. 그 돈으로 나 피부 좋아지는 과일 사먹으려고.”

하지만 이은혜는 엄마보다 머리가 두 배는 좋다. 결국 협상에 성공해 유치원 교습비를 용돈으로 챙겼다. 커다란 돼지저금통을 가득 채워 달라고 울며 사정해 목적을 달성했다. 언제고 변태 늙은이가 사는 더러운 집에서 탈출하려면 항상 비상금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편집적인 증상까지 보이던 이은혜는 어느 순간 그게 사라졌다. 이제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날 구하려 했던 그 남자도 나와 같이 여기로 떨어졌을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에 눈빛이 마주쳤지만 미남으로 평가되는 잘 생긴 얼굴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다.

‘생긴 것은 80점짜리 던데.’

편의점 앞에 서있던 척 봐도 범죄인이고 조직폭력범으로 보이던 얼굴에 깊은 칼자국이 있던 사내도 떠오른다.

‘그 자식은 20점도 너무 과해.’

아무튼 이상하게 두 남자를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같이 왔을까?’

머리가 너무 좋아서인지 모르나 이은혜는 자신 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같이 왔다고 추측되는 두 남자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은 따로 할 일도 없으니 한번 찾아보자고.’

어차피 미궁속의 범인도 찾아내는 유능한 검사란 자부심이 팽배하게 있었다. 오래 시간을 들이면 반드시 찾을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 내년에 학교 가서 1등하면 뭐해 줄 거야?”

“1등?”

“응! 그리고 올백이면.”

“올백이 또 뭐냐?”

“전 과목 100점이 올백이지 뭐야. 영어 좀 배우고 살아.”

장정옥은 딸의 말에 아무리 영어사전을 뒤져도 올백이라는 단어는 없어 결국 딸에게 중1 영어부터 다시 배우는 중이다.

“엄마! 나이 먹어도 대학가도 되니 이참에 대학 가라.”

“그러냐? 내가 공부하면 대학 가겠냐?”

“내가 도와줄게.”

“알았어!”

누가 엄마인지 딸인지 도통 구분이 안가는 모녀지간으로 점점 변하고 있었다.

이은혜가 나름의 방법으로 엄마를 설득해서 적응하는 동안 김수훈도 엄마를 설득하고 있었다.

청양시장의 은산한복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김수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나 엄마에게 할 이야기 있어요.”

“왜? 또 부여로 이사 가지 말자고 하려고?”

“예, 국민학교는 여기서 졸업하고 중학교부터 부여에서 다니는 것이 좋아요.”

“왜?”

“본래 학교 다니던 중간에 다른 학교로 전학가면 애들이 왕따 시켜요.”

“왕따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박명숙은 도통 모르는 소리하는 아들의 말에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김수훈은 순간 아차 했지만 자세하게 설명했다.

“모든 애들이 놀아 주지도 않고 그러는 것을 말하는 거죠. 모조리 따돌리는 거요.”

“아! 그런 뜻이냐?”

“그러니 졸업하고 중학교부터 부여에서 다니는 것이 좋아요.”

그러나 박명숙은 이미 결심했기 때문에 떠난 것을 고집했다. 결국 설득이 어려워지자 김수훈은 학교에서 대형 사고를 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며칠 후에 수학여행을 간다고 해서 학생들은 대부분 조금은 들뜬 분위기다.

‘에이, 가려면 멀리가지, 겨우 공주와 부여로 간다네.’

수학여행으로 가까운 곳으로 간다니 매우 실망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나 그쪽으로 별로 가고 싶지가 않다. 다소 꿀꿀해진 기분도 풀 겸 운동이나 할 생각이다.

김수훈은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빠르게 먹고 운동장으로 갔다.

학교 운동장 구석에 있는 철봉대에서 김수훈은 철봉을 하고 있었다.

“헛! 헛!”

제일 높은 철봉에서 양손으로 매달려 앞뒤로 몸을 흔드는 아주 단순한 동작이다. 그러나 발끝에 힘을 주어 힘차게 휘두르니 언제라도 한 바퀴 돌 정도로 크게 휘둘리고 있었다.

휘익! 휘익!

힘차게 앞뒤로 휘둘리기 하는 김수훈에게 갈래 머리인 여자애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수훈아, 그게 재미있냐?”

수훈은 순간 ‘너 바보냐?’ 소리가 튀어 나올 뻔했다. 단순한 동작이 재미가 있을 수는 없었다. 그저 팔을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트레이닝일 뿐이다.

여자 애는 호기심이 가득해 김수훈이 철봉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을 그만 두고 여자애와 대화해야 하는 묘한 분위기다. 그러나 어린 여자애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김수훈은 아무 말 없이 이제 턱걸이만 하고 있었다.

“홋! 홋! 홋!”

김수훈은 운동에만 집중하고 여자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다는 김수훈의 태도에 여자애는 혀를 날름 내밀더니 휙 돌아서서 멀어졌다. 자기에게 관심을 안보이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벌써 저러면 커서 뭐가 되려고.’

문뜩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해본다. 연애 잘하면 시집 잘 가서 호강하고 살기도하니 그것이 정말 중요한데 김수훈은 그걸 잘 몰랐다.

한참 철봉에 매달려 운동하는 김수훈에게 옆 반에서 반장하는 녀석이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야! 멀대! 너 턱걸이 잘한다고 폼 잡냐?”

조금 전 김수훈에게 말을 걸던 여자 애와 자주 어울리는 녀석이다. 아마 여자 친구가 다른 놈에게 관심을 보이니 질투가 난 모양이다. 녀석이 김수훈을 멀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또래보다 김수훈의 키가 크기 때문이다. 녀석의 말대로 김수훈은 이제 턱걸이를 아주 잘했다.

이사 간다는 엄마를 설득 못한 김수훈은 녀석의 아비가 경찰서 과장이라는 것을 알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지정! 너 말 조심해라.”

“뭐!”

“너 앞으로 까불면 죽는다.”

조지정은 6학년까지 해결하는 학교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녀석이라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었다.

“조지정, 앞으로 나보고 형이라고 불러라.”

조지정은 눈을 부라리며 크게 외쳤다.

“뭐? 이자식이 겁도 없이.”

“까불면 죽는다고 내가 방금 경고했다.”

“뭐? 이자식이 너 죽을 래?”

김수훈의 거친 말로 시작된 말싸움은 결국 방과 후에 뒷산으로 가서 정식으로 결투하기로 결정했다. 지는 놈이 평생 졸병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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