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한남동, 그 저택 3 (완결)
8장. 차남 오윤민
초등학교 일학년 때 하얀 토끼를 죽인 적이 있다. 고의는 아니었다. 팔딱거리며 뛰어다니는 토끼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했다.
토끼는 담임선생이 윤수에게 데려다 키우라며 건넨 것이었다. 교내에서 운영하는 소규모 동물농장이 폐쇄되면서 갈 곳이 없어진 토끼가 몇몇 학급의 반장에게 한 마리씩 배정됐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종의 의무였다. 책임감 있는 학급 반장이라면 버려질 위기에 처한 학교의 토끼쯤은 당연히 데려가 키울 줄 알아야 한다는 안일한 교사들의 판단이 전제돼있었다.
윤수는 귀만 크고 멍청한 소동물을 집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작년에 유치원에서 나눠 준 금붕어 몇 마리를 가져갔다가 어머니에게 당장 인근의 내천에 풀어주고 오라며 혼난 적이 있었다. 당연히 토끼도 반기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한동안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토끼를 풀어준 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토끼는 가지 않았다. 이리저리 뜀박질만 하면서 윤수의 주변에서 맴을 돌았다. 토끼의 행동반경은 세로로만 길어질 뿐 가로로는 좀처럼 길어지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높이 뛰는 토끼를 위에서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 지가 문득 궁금했다. 호기심이었다. 손아귀에 토끼를 쥐고 파란 정글짐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토끼는 잠자코 숨만 할딱이고 있었다.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겹겹이 붙어있는 사면체가 거대한 거미줄처럼 보였다. 새파란 거미줄 한가운데 토끼를 떨어뜨렸다. 추락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낙하하는 도중 정글짐의 모서리 곳곳에 몸을 부딪치는 시간이 추가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토끼는 더 이상 하얀색이 아니었다.
마침 장을 보고 돌아오던 어머니가 그걸 발견했다. 어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들고 있던 짐을 차분하게 도보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정글짐이 있는 쪽으로 걸어와 피로 얼룩진 토끼를 응시했다. 후다닥 밑으로 내려온 윤수를 보는 눈동자는 살아있을 적 토끼의 것과 같은 새까만 색이었다.
“왜 그랬니.”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어요.”
“이렇게 될 줄 몰랐니?”
“몰랐어요.”
“정말 몰랐니?”
“네.”
윤수는 빠르게 대답했다. 정말로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눈꺼풀이 일순간 경련했다. 그러면서도 윤수로부터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자갈처럼 빛나는 어머니의 검은 망막 속에 윤수가 담겨 있었다. 분명히 같은 스스로인데도 어머니에 담겨 있는 자신은 어딘가 낯설었다. 빤히 치켜들었던 윤수의 시선이 살짝 길을 잃었다. 어머니가 또 물어왔다. 정말로?
왜 저렇게 어머니가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윤수는 답했다. 네. 어머니의 눈꺼풀이 질끈 밑으로 내려갔다. 동공 안에 담겨있던 윤수가 잠식됐다. 등을 돌린 어머니가 윤수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살렴. 그렇게 사는 게 편하면 좋을 대로 해.”
이후 어머니는 그와 관련한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윤수는 그날 다소 유별났던 어머니를 상기하기 싫어 몇 번이나 시간에 취해 잊으려 애썼다. 기억은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고, 지워질 만하면 다시 새겨졌다. 희석되지 않는 기억은 갈수록 뚜렷해졌다. 윤수가 그날의 대화에서 의도적으로 비워놨던 부분도 덩달아 오롯해졌다.
윤수는 유년기의 상당수를 어떤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언제라도 어머니가 그날의 일에 대해 같은 질문을 꺼낼지도 모른다는 것. 그때는 저도 모르게 그때와 다른 대답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 어머니는 실제로 그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수는 예고되지 않은 쪽지시험을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언제쯤 어머니가 그것을 물어올지를 막연하게 헤매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사학년 때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이 교내 동물농장을 부활시켰고, 교사들의 관리 부주의로 반년 만에 폐쇄됐다. 담임선생은 기괴한 소리를 내는 병아리 두 쌍을 반장인 윤수에게 건네주며 집에 가져가라고 했다. 윤수는 그런 건 부반장이 더 잘할 것 같다며 거절했다.
* * *
새하얀 방 안으로 차분하게 하나 둘 들어오는 형제들의 실루엣이 어두컴컴한 밤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어쩌면 이 집 자체가 현실에서 있어선 안 되는 공간인지도 몰랐다.
윤성아. 홍 선생님 모셔 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건넨 윤민의 말에 윤성이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남은 건 쓰러진 오 회장과 윤수, 윤민, 윤혁. 아직 윤석은 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모르는 건지, 외면하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발가벗은 채 시트 위에 앉아있던 윤수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오 회장의 뒤통수에 닿았다. 미동 없는 까만 머리카락을 응시하다가 그를 품고 있는 새하얀 대리석을 내려다봤다. 물결모양의 주름이 자글자글 새겨져 있었다. 어느 실루엣이 윤수가 한동안 잊고 있던 존재와 닮아있었다. 어릴 적에 정글짐에서 고의적으로 낙하시킨 하얀 토끼. 허벅지가 일순간 경련했다. 곁에 있던 윤민이 다가와 윤수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줬다.
“윤수야. 겁먹지 마.”
“형. 오 회장, 왜.”
“아무 생각하지 마. 잘 했어.”
살며시 윤수의 입가에 제 입술을 맞추는 윤민은 그와 처음 조우했던 그 따스한 순간을 연상케 한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아는데도, 이따금씩 윤수는 헷갈리고 만다. 스르르 떨어져 나간 윤민의 얼굴이 미소를 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쓰러진 상황에서 지을만한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키우던 금붕어가 죽은 여느 사람도 최소한 저보다는 상식적으로 감정을 내비칠 것이다.
방 안 쪽으로 가쁜 발걸음이 찾아들었다. 홍 선생이었다. 쓰러져 있는 오 회장을 보더니, 차마 난감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망설이는 듯한 홍 선생을 보면서 윤민이 짧게 고갯짓을 했다. 뭐 하세요. 선생님. 아버지가 괴로워하시지 않습니까.
상념에 잠겨 있던 홍 선생이 마지못해 오 회장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완전히 경직돼 있는 오 회장의 옆에서 왕진가방을 열고는, 팔뚝에 주사 하나를 놓았다. 오 회장의 팔이 파르르 떨리다가 멈췄다. 고개를 든 홍 선생과 윤수의 눈이 마주쳐졌다. 이 결과물의 원인이 윤수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홍 선생이 외면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버렸다. 윤수의 심장박동이 점진적으로 빨라져갔다.
입구 쪽에서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윤석이다. 방 안의 형제들과 홍 선생을 차례로 본 뒤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오 회장에게 다가갔다. 식어있는 오 회장의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체념한 얼굴이 빠르게 떨구어지고, 다소 건조해 보이는 손이 그 얼굴을 감쌌다. 나지막하게 입 밖으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씨발.
윤석의 반응을 본체만체하면서 윤민이 홍 선생에 시선을 뒀다. 차마 정면에서 눈을 마주치는 게 어려운지 홍 선생의 고개가 다소 숙여졌다. 태연한 건 윤민뿐이었다. 표정에 일말의 변화가 없었다. 감정을 드러낼 가치조차 없다는 것처럼.
“진통제는 아버지가 원해서 놓은 겁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이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홍 선생님. 선생님은 불안해하실 거 없어요. 알겠습니까.”
“네. 변호사님.”
“오윤민.”
벌떡 몸을 일으킨 윤석이 윤민을 서늘하게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얼굴이다. 윤민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것처럼 얼굴에 미소를 새겼다. 윤석의 짙은 눈썹이 뚜렷하게 일그러졌다.
“너, 진짜로 그거 한 거냐.”
“어. 윤수도 동의했어.”
“이 미친 새끼야. 네가 제정신이야?”
성난 목소리가 방 안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에 굳어버린 건 윤수 뿐이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윤석을 보고 있었다. 윤민도, 윤혁도, 윤성도. 대체 뭐가 문제냐는 얼굴. 그 심상한 얼굴들에 윤수는 더욱 지금 상황에 대한 현실감각이 아득해졌다. 사람이 죽었는데, 저 사람들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다. 일상의 편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예컨대 밤이 져서 해가 뜨고, 하늘이 흐려져 비가 오는 것처럼.
“아버지가 원하시는 거 실컷 하게 해드렸어. 그게 뭐가 죄가 돼. 형.”
“야. 오윤민.”
“대마초를 오래 하면 성기능이 저하돼. 물론 아버지 입장에서야 어머니와 이혼한 후 욕정 할 대상이 없었으니까 별로 상관없었겠지만. 그래도 윤수가 나타난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갑자기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윤수의 어깨가 일순간 굳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존재를 봤다. 지난한 여정을 마친 뒤 만족해하는 여행자처럼 나른한 얼굴을. 문득 고개를 돌린 윤민의 시선이 윤수를 향했다. 엷게 웃고 난 얼굴이 다시 윤석을 향했다. 지켜보던 홍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빠르게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남은 것은 이제 다섯 형제들과 죽은 오 회장뿐이었다. 길게 들숨을 삼킨 윤민이 말을 이어갔다.
“다들 알겠지만 아버지는 오랫동안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어. 심장병이 있는 환자들은 질산염제제가 첨가된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에게 비아그라는 쥐약이거든. 물론 아버지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먹으려 했지. 그 와중에 홍 선생은 회장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기적으로 하고. 물론 내가 주문 했어. 그게 더 아버지를 자극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애초에 아버지는 본인이 마음먹으면 불가능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질병까지 피해갈 수 있을 정도로. 그 만큼 윤수하고 섹스 하는 게 필요하기도 했고. 그런 와중에 홍 선생은 점점 더 질산염제제 비중을 높인 약을 투약하면서 아버지를 더 빨리 쓰러지게 하는 데 일조하고. 그 와중에 우리 이쁜 윤수가 섹스 횟수를 높인 것이 결정적으로 한몫 했고.”
말을 맺은 윤민의 입가에 픽 미소가 걸쳐졌다. 들려오는 얘기가 뜬구름처럼 가마득하다. 이불을 덮은 채 망연하게 윤민이 하는 얘기를 듣는 일이 라디오를 듣는 양 낯설다. 그 와중에 갈수록 확연해지는 건 윤민의 한없이 평온한 얼굴이다.
분연히 몸을 일으킨 윤석이 윤민을 향해 걸었다. 지체 없이 멱살부터 쥐어 잡았다. 윤민이 입고 있던 흰색 셔츠가 빠르게 윤석의 손에 말려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윤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오히려 윤석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것조차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다. 거기에는 자신이 그에게 승리했다는 성취감도 깃들어 있었다. 노려보던 윤석이 공격적인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 살던 조 비서 쫓아낸 거냐. 이런 상황 발생했을 때, 목격자 없애려고. 맞잖아, 씨발 새끼야.”
“형 좋을 대로 생각해.”
“그리고 지금 홍 선생. 저 인간 시켜서 진통제 놔갖고 이 상황 종결시킨 거고. 작년에 오윤성이 심장질환 있는 지 친구한테 했던 것처럼.”
벽에 기대고 있던 윤수의 몸에서 순식간에 맥이 빠졌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등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고개를 갸웃한 윤성이 천연덕스럽게 웃고 말았다.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혹은, 그랬다 한들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언젠가 윤성이 꺼냈던 단어가 윤수의 머릿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실험용.
입 밖으로 끊임없이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이 밀폐된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 더 이상 힘들다. 그 와중에 금방이라도 자신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릴 것만 같은 오 회장의 시신에 숨이 막힌다. 시신과 함께 머물고 있는 이 육면체 공간은 침식당하기 직전의 방공호처럼 절망적이었다. 괴로워하는 윤수를 알아 챈 윤혁이 다가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윤수의 옷가지를 하나하나 쥐어 건네고는 입을 열었다. 힘들어 하지 마. 이제 끝났어. 윤수의 떨리는 고개가 서서히 좌우로 가로저어졌다. 대체 뭐가 끝났다는 거야. 담담한 시선이 윤수를 스쳤다. 힘들겠지만 받아들여, 오윤수. 너를 위한 거니까.
품 안에 담긴 옷가지가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먼지처럼 가볍다. 옷가지에서부터 시작해 죽은 오 회장, 형제들, 이 방, 이 집. 전부 실존하는 것들인지 맹렬하게 의심하고 싶어진다. 나를 위한 거라고, 이게. 사람을 죽이는 게. 윤혁이 했던 말을 곱씹는 머릿속에 지긋한 두통이 찾아든다.
수 없이 오 회장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것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맞다. 그래서 섹스를 했다. 최대한 많이. 그래서 얻은 결과물이 지금 이것이다. 당연히 기뻐해야하는데,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저 형제들만큼은 태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좀처럼 되지 않는다. 오 회장의 시신을 눈에 담는 것이 차마 괴롭다. 이 상황을 통째로 기억에서 들어내고 싶다.
어머니가 이 상황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렇게나 잊고자 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또 다시 머릿속에 차오른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니? 정말 몰랐니? 어머니는 분명히 그렇게 물을 거다. 그랬다고 대답한다면, 어머니는 또 그때와 같은 조소를 건넬 것이고, 그 조소는 앞으로 윤수가 살아갈 수많은 나날에서 지울 수 없는 족쇄가 될 것이다. 아득한 유년 시절 겪었던 수많은 고통의 형태 그대로.
한동안 윤민의 멱살을 쥐고 있던 윤석이 낮은 숨을 쉬면서 손을 떼어냈다. 느릿하게 돌아간 고개가 윤수를 제외한 형제들을 하나하나 분개한 시선으로 눈에 담았다. 굳어있는 입술 사이에서 날 선 언어가 터져 나왔다.
“오윤민. 그리고 오윤혁, 오윤성. 너네 다 정상 아니야.”
“형은 정상인 것처럼 얘기하네. 윤수한테 정신 나가서 이혼해 놓고는.”
“말 함부로 하지 마. 이 새끼야.”
비소어린 윤민의 말을 무시하다시피 하며 윤석이 고개를 돌렸다. 단호한 시선이 윤수를 향했다. 하염없이 옷가지만 쥐고 있던 윤수의 어깨가 흠칫 들렸다. 윤석의 입술이 착잡하게 열렸다. 오윤수. 옷 입어, 빨리. 나가자. 이 새끼들 다 정상 아니니까.
말을 마친 윤석이 더 이상 형제들 쪽은 보기 싫다는 것처럼 등을 돌렸다. 떨리는 손을 들어 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거의 본능적이었다. 몸을 일으킨 윤수의 손목을 잡아 챈 윤석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순간적으로 윤석과 같이 나가는 게 맞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내 든 생각은 지금은 이게 맞다는 것. 지금 이 상황에서 저 형제들과 이 공간에 있는 건 감당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고통이라는 것. 주춤거리던 윤수의 발걸음이 윤석을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막 방을 나섰을 때, 윤민의 은은한 음성이 윤수의 귓바퀴에 머물렀다.
“형. 윤수는 두고 가야지.”
“얘를 어떻게 여기에 둬. 너 같은 새끼가 있는 공간에. 그리고 너 애초에 오윤수 싫어한다고 했잖아.”
쳐다도 보지 않고 대꾸한 윤석이 보다 힘을 준 손길로 윤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윤석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던 윤수의 등에 윤민의 나긋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후회할 거야. 형,
* * *
용산에 있는 윤석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번의 가정부도, 생글생글 웃어 대던 와이프도. 이혼했다고 했고, 한동안 한남동 집에만 머무는 걸 봤으니 둘 다 있을 이유가 없긴 했다. 완전히 기운이 빠진 몸으로 소파에만 앉아 있는 윤수를 보면서 윤석이 물 한 잔을 건넸다. 떨리는 손으로 받은 뒤 한동안 소리 없이 목만 축였다. 서늘한 공간에 침울한 정적이 맴돌았다.
“안 걸리겠죠.”
“뭐가.”
“저 포함해서 형제들이 오 회장 죽인 거.”
“걱정할 걸 걱정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윤민이 주도한 일이야. 흔적도 안 남을 거다.”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고 난 윤석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에 걸친 재킷을 벗어 던졌다. 정처 없는 시선이 구깃해지는 검은 색 재킷의 원단에 머물렀다. 공허한 얼굴로 침묵만 삼키는 윤수를 향해 문득 윤석이 질문을 건넸다. 너, 아직도 오윤민 신뢰 하냐. 짐짓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든 윤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대답하는 게 어렵다. 윤민은 지금까지 윤수에게 세 번에 걸쳐 자신을 믿냐고 물었고, 윤수는 앞선 두 번을 망설인 끝에 말미에 믿는다고 했다. 그때는 윤민의 서늘한 공기에 압도돼 어쩔 수 없이 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그 기억을 종종 반추하면서 깨달았다. 꽤나 진심이 담겨 있었다는 걸.
윤민이 건넨 제안은 정말 윤수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솔직히 반신반의 했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오 회장과 몸을 섞고 나니 정말로 그가 죽었다. 이상한 마법에 취한 것처럼, 원했던 일이 일어났다. 오윤민은 그런 사람이다.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계획적인 인간. 그가 지닌 태엽에 맞물려 돌아가는 한 가고자 했던 길을 비껴날 일은 없다. 애초에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다만 믿는 건 다른 문제다. 오윤민의 잘 다듬어진 태엽의 이면에는 속이 보이지 않는 검고 깊은 물이 존재한다. 안에 뭐가 담겨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신뢰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건 모험이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그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은 어렵게 다가온다. 그 매혹적인 검은 수면에는 윤수를 끌어당기는 인력이 존재한다. 심지어 그 수면에 빠졌다가 이미 한 번 원하는 결과를 얻었던 윤수 입장에서는, 그것을 단지 위험한 존재로 취급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오윤수. 미간을 구긴 윤석이 천천히 다가왔다. 양 어깨에 단단한 윤석의 손아귀가 걸렸다. 쥐는 힘이 다소 센 것도 같았지만, 윤수는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석의 위압적인 시선에 저도 모르게 무력해지고 말았다. 느릿하게 열린 윤석의 입술에서 단호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잘 들어. 이건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거니까. 윤수의 고개가 천천히 윤석을 향해 올라갔다.
“우리 어머니는 스스로 원해서 자살한 게 아냐. 오윤민이 그럴 수밖에 없게끔 한 거지.”
38.
이 집안사람들의 몸에는 저주받은 피가 흐른다. 일단 타고난 이상 반드시 우월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유전자의 이면에는 비뚤어진 인간성과 성욕이 존재했다. 이 같은 특성은 여성과 남성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었으며, 남성에게 특히 강하게 작용했다. 시작은 이타노 가문이었다.
1924년. 이타노 슌지의 아내였던 이타노 쿄코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가학성애자였던 이타노 슌지는 이 집의 지하에 비밀스러운 고문실을 지어놓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를 학대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행위 자체는 합의된 것이라 할 수 있었지만, 어느 날 흥분한 나머지 손가락을 도려내려 하는 이타노 슌지에 저항하다가 이타노 쿄코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둘 사이의 유일한 딸이었던 이타노 미도리는 조선인 오수헌과 결혼해 한동안 순탄하게 살았지만, 1945년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식에 반나절 동안 하염없이 제 머리카락을 뜯어가며 울어대다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해 소나무에 목을 매서 죽었다.
이타노 미도리와 오수헌 사이에서 나온 오인효는 이타노 미도리가 사망한 후 극도로 신경질적이 된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를 받았다. 이후 육군 중장의 딸인 장유경과 결혼을 했는데, 제 핏줄에 남아 있는 비정상적인 성욕을 역시 견디지 못했다. 1969년 둘째 오승조를 낳고 얼마 되지 않은 장유경을 억지로 범하려 하다가, 장유경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욕정을 분출할 곳이 없었던 오인효는 아들인 오승조를 학대하는 한편 딸인 오수연을 범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상습적으로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던 오수연은 어느 날 초경이 시작된 것을 아버지가 저를 범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충격을 받아 소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
이후 오인효는 오수연과 닮은 두 명의 여성 가정부를 아끼면서 집에서 지내게 했는데, 번갈아 가면서 상습적인 강간이 이어지자 두 명 모두 견디다 못해 탈출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발각이 되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오인효는 강제로 두 여성에게 제초제를 먹게 해 사망케 했다.
1989년. 대학교에서 만나 결혼한 오승조의 아내 이세영이 이 집에 발을 들였다. 역시나 강간과 고문이 이어졌고, 오윤석과 오윤민을 낳은 이세영은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게 된다. 타지에서 강현우를 만나 오윤수를 얻은 이세영은 한 동안 그곳에서 잘 사는 듯싶었지만,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강현우를 죽이겠다는 오승조의 협박과 회유를 이기지 못해 다시 한남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윤혁과 오윤성을 낳았다.
오승조의 변태적인 성행위는 이세영이 다시 집에 돌아온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승조는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오윤수를 특히 예뻐했는데, 단순히 이세영과 닮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오윤수를 일부러 고문실에 불러놓은 채 이세영을 고문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여줬다. 어린 오윤수는 그것이 뭔지 몰랐지만, 저런 식으로 사람을 때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알았다.
그 충격적인 기억은 오윤수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안겼다. 다른 사람이 맞거나 맞은 흔적을 보는 걸 괴로워하는 형태로. 기억에는 없었지만 무의식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고문장면, 그리고 그것을 봤을 때 느꼈던 공포감이 맞물리며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심리적 장애를 유발했다. 트라우마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무의식에 남은 공포가 떼어낼 수 없는 신체기관처럼 굳건했다.
오윤수가 고문실에서 제 어머니가 맞는 것을 보고 온 직후에는 오윤민이 식탁에 불러서 초콜릿이나 젤리처럼 달콤한 간식을 줬다. 이미 기분 나쁜 걸 보고 온 오윤수는 그것을 아무리 먹어도 좀처럼 입이 달아지지 않아서, 언젠가부터는 거부하게 됐다. 오윤수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됐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 것을 먹지 않는 오윤수에게 오윤민은 대신 뽀뽀를 해줬다. 오윤수는 그건 잘 받아들였다. 오윤민은 형제들 중에서 오윤수를 가장 아끼고 있었다. 그 때까지는 말이다.
오윤성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고문실에서 오승조의 이상 성행위를 버티다 못한 이세영은 비명을 지르면서 스스로 칼을 들어 제 자궁과 성기를 훼손했다. 오승조는 그 날의 성행위를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비디오카메라를 켜 두고 있었는데, 그들이 침대가 아닌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그런 일이 터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상에는 소리만 남게 됐다. 오승조는 그 영상을 USB에 담아 아끼는 그림 뒤에 뒀다. 생각날 때 그것을 보며 수음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의 사건이 있은 후 이세영은 오윤수를 데리고 다시 강현우에게 돌아갔다. 한 번만 더 자신에게 접근하면 자살하겠다며 확고한 경고까지 남긴 채였다. 이세영이 없어지자 오승조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데가 없어졌다. 한동안 넘칠 정도로 뜨거웠던 욕정의 온도는 어느 순간부터 식어가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오승조는 흥밋거리라도 찾기 위해 형제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종종 오윤석에게 자신 대신 나머지 형제들을 학대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오윤석은 차라리 자신에게 그 역할을 위임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오승조가 학대하는 것은 강도가 지나쳐 형제들이 기절하기 일쑤였는데, 오윤석이 할 때는 하는 척만 하고 말면 그만이어서였다. 오윤석은 기회만 되면 아버지에게 본인이 대신 하겠다며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린 형제들은 그런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오윤혁은 이해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학대가 시작되면서부터 오윤민은 어머니를 증오하게 됐다. 애초에 어머니가 자신들을 버리고 집을 나감으로써 이 고통이 시작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증오의 대상은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오윤민은 어머니와 함께 사라진 오윤수도 싫어하게 됐다. 애초에 오윤민이 오윤수에 특별한 애정이 없었다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끼던 존재의 부재로 인한 고통은 아끼던 존재에 대한 증오로 치환됐다. 애정이 큰 만큼 증오도 큰 법이었다.
아버지 오승조와 어머니 이세영을 죽이고, 아들인 오윤수까지 괴롭히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오윤민의 고민이 시작됐다. 우선 어머니를 다시 집 안으로 들여야 했다. 그러려면 함께 살고 있는 강현우가 제거돼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오윤민은 그런 얘기를 오승조에게 했다. 오승조는 오윤민이 제안한 대로 실제 교통사고를 꾸며 강현우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세영은 돌아오지 않았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그때부터 오승조는 오윤민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장남인 오윤석을 믿는 대상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 아끼는 건 영리하고 오승조의 심리를 잘 꿰뚫는 오윤민이었다. 사람을 다루고 설득하는 데 타고난 오윤민의 기질은 이미 그 때부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오윤민이 그 다음에 생각한 것은 오윤수만이라도 다시 집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 무렵 오승조는 수년에 걸친 대마초 흡입으로 성기능이 크게 저하돼 있었다. 이미 이세영이 떠난 후 욕정 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현재로서 유일하게 욕정 할 수 있는 오윤수를 끌어들여 오승조에게 섹스 할 의지를 품게 한 후, 심장질환 약에 극약인 비아그라를 먹게 해 사망케 한다. 초등학생이었던 오윤민은 이 같은 계획을 세웠다. 세 번에 걸쳐서 오윤수에 대한 납치 계획이 실시됐고, 마지막 시도 때 비로소 납치에 성공했다.
오윤수는 중학교 1학생이었고, 오윤민은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8년 만에 다시 만난 오윤민을 오윤수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 집 역시 처음 보는 것처럼 반응했다. 아주 어릴 때였던 데다가 집에 있는 내내 좋지 않은 기억들만 접했을 테니 스스로도 잊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오윤민은 그에 대해 서운한 감정과 동시에 또 한 번 오윤수에 대한 증오를 느꼈다. 다만 이 날 접한 오윤수는 너무나도 작아서 오승조가 성욕을 느끼려면 몇 년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오윤민은 오윤수에게 많이 먹고 빨리 크라는 얘기를 한 뒤 돌려보냈다.
계획이 재개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오윤수는 24살이 됐고, 그 나이는 오윤민을 낳은 뒤 이세영이 집을 나가던 때와 같았다. 오승조 입장에서는 가장 이세영에 대한 욕정이 극에 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오윤민은 어느 날 오윤수에 집에 찾아가 이세영에게 몇 마디 말을 하는 것만으로 그녀가 자살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형제들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살 직전에 작성한 유언장에 따라 오윤수가 이 집에 왔다. 일 년간 머무르면 20억원의 유산을 상속한다. 사실 그건 오윤민의 돈이었다.
윤수의 손에 들려 있던 빈 물 컵이 바닥에 낙하했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 파편이 거실 이곳저곳을 굴렀다. 파편의 날선 모퉁이가 조명을 받아 희게 빛났다. 한숨을 쉰 윤석이 부엌에 가서 물티슈를 들고 돌아왔다. 거기 가만히 있어. 다쳐.
바닥에 흩어져 있는 유리파편이 윤석의 손에 걸려 하나하나 지워져갔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실 바닥을 보면서 윤수는 그저 한 가지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오윤민 때문에 죽었다. 심지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것도 오윤민이었다.
소파 위에 올라가 있던 윤수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살을 파고들 것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억눌렀다. 마침내 파고 들어간 중지 손가락 끝에 핏물이 맺혔다. 손바닥을 적시는 희미한 물기를 느끼긴 했지만, 윤수는 아프지 않았다.
“오윤민이 뭐라고 한 거예요. 어머니한테.”
“그건 나도 몰라.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 본인밖에 모르겠지. 너도 이제 알잖아. 그 새끼는 제 얘기 남한테 함부로 안 하는 거.”
“제 어머니지만 본인 어머니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격앙된 채로 말을 쏟던 윤수가 차마 버티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다. 오윤민은 사람을 두 명이나 죽였다. 심지어 제 친부모를. 실제로는 세 명이다. 더 이상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윤수의 아버지까지 포함하면. 그래놓고 아무렇지 않게 윤수를 보며 웃었다. 안온한 온도로 윤수를 품에 안았다. 때로는 입을 맞추고, 자신을 믿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이것도 집안 내력이에요?”
“뭐가.”
“자기 부모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거. 그것도 이 집안 혈통 때문이냐고요.”
서늘하게 묻는 윤수의 말에 윤석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물티슈에 감긴 유리 파편을 쓰레기통에 하나하나 집어넣으면서, 윤석의 굳은 얼굴이 한참동안 뭔가를 헤아렸다. 쓰레기통 안에 물티슈가 들어갈 때마다 날 선 유리의 마찰음이 엷게 거실을 울렸다.
“그럴지도 몰라.”
“뭐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외고조 할아버지인 이타노는 광복 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증조할아버지인 오수헌하고 할아버지인 오인효는 지금하고 사망과정이나 원인이 굉장히 유사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제대로 말해봐요.”
건조한 윤수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윤석을 응시했다. 그 얼굴을 잠시 눈으로 삼키던 윤석이 마지못해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옆 자리에 앉은 윤석의 시선이 먼 곳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긴 정적이 흘렀다. 윤수는 독촉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럴 기운도 없었다. 방금 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 때문에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공기 중 어딘가에 한없이 부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만이 인지할 수 있는 최소한이었다.
“오수헌은 오인효를 학대했고, 오인효는 우리 아버지와 돌아가신 고모를 학대했어. 그것도 핏줄의 영향이냐고 하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집안 대대로 비슷한 일이 반복돼 왔어. 그렇게 학대당한 트라우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발현하고, 그것이 아버지의 사망을 결정 지어 왔어.”
“결국 오수헌, 오인효도 전부 아들한테 살해당했다는 거잖아요.”
윤수의 입 밖으로 차가운 언어가 터져 나왔다. 윤석의 고개가 느릿하게 윤수 쪽을 향해 돌아갔다. 전에 없이 한기가 도는 얼굴이 어딘가 낯선 듯, 잠시 난감한 얼굴을 지어보인 윤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수헌은 오인효가 제 비서관을 시켜 등반 중 등을 밀게 해서 추락사 했고, 오인효는 아버지가 돈을 주고 섭외한 사람들이 꾸민 교통사고로 사망 했어.
충격적인 것도 정도껏이었다. 도무지 같은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집안의 이야기를 들고 있으니 이제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희미하게 웃음을 터뜨린 윤수의 입술이 서서히 굳어져갔다. 이런 미친 집안이 세상 어디에 있어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어가며 고개를 숙인 윤수의 머리통에 윤석의 시선이 닿았다. 그러게. 나직하게 말을 뱉은 윤석이 침묵했다.
유리파편이 사라진 바닥에는 여전히 그 날카로운 존재들이 날을 세운 채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망막을 부숴버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몸을 세우던 투명한 것들을 곱씹으며 윤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문득 정수리에 윤석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윤수의 머리를 쓸어내린 윤석이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오윤수. 일단 그 집엔 돌아가면 안 돼. 윤수의 눈꺼풀이 스르르 들렸다. 오윤민 죽이려면 다시 들어갈 수도 있죠. 왜요.
분기에 차 되는 대로 뱉은 말이었지만, 일단 드러내고 나니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무엇보다, 오윤민은 그런 대가를 받아도 충분한 인간이었다. 정수리에 머물러있던 윤석의 손이 끌어내려졌다. 윤수를 향하는 무표정 너머에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감정이 맺혀있었다. 저 사람에게 저런 식의 동정은 받고 싶지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윤석 역시 저 집안사람이다. 윤수는 그 집안의 핏줄에 스며있는 비인간적인 본성으로 인해 부모를 통째로 잃은 피해자고. 이건 어디까지나 윤수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문제였다. 고개를 돌린 채 완전히 윤석 쪽은 보지도 않는 윤수의 등 너머로 착잡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가지 마, 오윤수. 오윤민은 네가 돌아왔으면 하겠지만.”
“오윤민은 저 싫어한다면서요. 제가 거기 돌아가서 오윤민한테 좋을 게 뭐가 있어요.”
딱딱하게 내뱉는 윤수의 말에 윤석은 또 다시 침묵을 지켰다. 호젓한 거실에 소리 없이 공기가 쌓였다. 마른 침을 삼킨 윤석의 입 밖으로 익숙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피는 못 속이니까.
하. 윤수의 입 밖으로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젠가 오윤혁도 했던 얘기. 그 놈의 핏줄. 이제는 저주스럽기까지 한 그 문장을 잘근잘근 곱씹으며 과거 윤석이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어떤 특정한 조건이 있어야 성적으로 반응해.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의문은 왜 오윤민은 예외가 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이제 와서 한 생각은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직도 확연한 한정식 집에서의 기억. 벗고 있던 윤수가 입 안에 윤민의 손가락을 문 채로 그와 눈이 마주치던 그 때, 분명히 오윤민은 당황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윤민을 본이래 유일하게 말이다. 이후의 오윤민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종종 윤수가 알던 모습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오 회장에게 벨트로 맞고 있던 당시 오윤민이 취했던 태도는 윤수의 기존 인식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윤수가 알기로 오윤민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절대로 거스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건넨 일종의 반항은 오 회장으로 하여금 그를 폭행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절대 안 그럴 것 같았던 오 회장이 변수를 두기 이전에 오윤민이 변수가 있었다. 이후부터 윤민은 갑자기 오 회장과의 섹스에 대한 언급을 철저히 피하기 시작하더니, 다른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윤수가 오 회장과 있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것처럼.
개새끼. 악에 바친 혼잣말이 혀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버지 어머니를 그 따위 꼴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이제 와서 감히 나한테 그딴 마음을 품는다고. 사실이라면 절대 용인할 수 없다. 윤수의 어금니가 힘 있게 씹혔다.
“오윤수. 섣부른 행동하지 마. 그냥 내 곁에 있어. 너는 어떻게든 내가.”
잘근잘근 분기를 다지는 윤수를 어떻게든 수습하려던 윤석의 말이 문득 멎었다. 뒤늦게 뭔가를 알아챘다는 것처럼. 공허한 얼굴로 거실을 보던 윤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방을 한 번 들어가더니, 이내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들어가 본다. 갑자기 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저 쳐다만 보고 있는 윤수의 시야에 당혹감이 가득한 윤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긴 숨을 쉬고 난 윤석의 손등이 간헐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없어.”
“뭐가요.”
재차 물어보는 윤수를 향해 윤석이 한껏 긴장한 얼굴을 뒀다. 오히려 윤수가 더 긴장될 지경이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당황한 건 처음 보는 일이었으니까. 두 눈을 질끈 감은 윤석의 입 밖으로 희미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애가 없어.
39.
아무래도 범인은 한 명이다.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단기간에 도출할 수 있는 사람. 그것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런 사람은 윤석 입장에서도 오로지 한 명뿐이었으니까.
소파 위에 손을 얹은 윤수의 흐릿한 눈이 윤석을 향했다. 빠르게 스마트폰을 든 윤석의 손가락이 액정 위의 번호를 눌렀다. 단축번호 2번. 오윤민. 신호음이 가는 뚜렷한 소리가 윤수의 귓가에까지 닿았다. 이내 들려오는 심상한 목소리.
-어. 형.
윤수의 눈꺼풀이 짧게 경련했다. 길게 숨을 내뱉은 윤석이 사뭇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애 어디에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딴 짓 할 게 너밖에 더 있어. 대답해. 애 어딨어.”
분노에 사로잡힌 윤석의 말에 윤민은 여유 있게 웃음으로 갈음했다. 침묵이 흐르고, 이내 평소와 같은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윤수 집으로 돌려 보내고 얘기하자.
“오윤수는 거기에 못 둔다고 했잖아.”
-그럼 애를 포기하든지.
별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얘기하는 단조로운 목소리에 윤수의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아, 역시나. 또 새삼스럽게 느낀다. 애가 몇 살이라고 했지. 세 살이라고 했나. 그렇게 어린 애가 사라진 걸 두고 초조해 하는 아버지를 두면서도, 오윤민은 저렇게 태연하게 얘기하는 게 가능하다. 애초에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대화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얼굴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윤석의 손목을 윤수가 빠르게 붙들었다. 제법 힘이 실린 목소리가 핸드폰을 향했다. 애 데려다 놔. 내가 갈 거니까. 진심이었다. 오윤수. 당혹감에 찬 윤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시한 채 보다 확고하게 한 번 더 강조했다. 돌려보내긴 뭘 돌려보내. 가도 내가 가.
그대로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니, 손바닥에 한기가 어리는 것만 같다. 하. 밭은 숨을 내뱉은 윤석의 몸이 거세게 일으켜 세워졌다. 보지 않아도 표정은 알만 했다. 어떻게든 그 집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빼내 온 게 누군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원래대로 되돌리냐는 투일 터다.
“어차피 저도 거기 가야 해요.”
“미쳤어? 오윤수. 오윤민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지 어떻게 알아.”
“오윤민한테 직접 물어봐야 해요.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제법 단호하게 눈을 치켜 올리는 윤수를 보고는, 윤석이 복잡한 얼굴로 다시 소파 위에 앉았다. 그저 이 상황이 괴롭다는 것처럼. 건조한 손을 들어 얼굴은 감싸는 모습에 여러 형태의 절망이 겹쳐 보인다. 어쩐지 윤수는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힘든 건 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윤수는 이미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후지만, 저 사람은 언제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고통에 한없이 사로잡혀야 한다. 형. 제가 알아서 할게요. 형은 신경 쓰지 마요.
윤수의 손이 자신의 입술을 향해 스르르 올라갔다. 그런 채로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바닥이 온통 피투성이다. 아까 손바닥에 닿았던 손톱의 흔적, 손톱이 떨어져 나가다가 휩쓸려 벗겨진 피부의 흔적.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지금의 윤수처럼.
너, 진짜 가면 안 될 것 같아. 피 묻은 손을 말없이 쳐다보던 윤석이 벌떡 몸을 일으켜 또다시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몇 초인가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리고, 윤석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네, 김 상무님. 저 오윤석 전무입니다. 얘기 들으셨겠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저런 사유로 급하게 미국이나 러시아 쪽에 저와 일행 두 명 정도가 머물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상무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네. 제 애 하나하고, 대학생 남자애 하나입니다.”
한동안 말을 이어가던 윤석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는다. 핸드폰을 쥔 손아귀가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킨다. 또 당황한 얼굴. 소파에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던 윤수의 눈가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대표이사하고 임원진 교체 이사회 소집이요, 지금 상황에서. 그야,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아직 장례식도 안 치렀잖습니까.”
다소 절박하게 말을 이어가던 윤석의 말이 또 끊겼다. 묵직한 호흡을 가누며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아귀가 힘없이 밑으로 끌어내려진다. 망연하게 천장을 향하던 윤석의 두 눈이 살짝 감겼다가 서서히 올라갔다. 도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간 윤석의 입가에서 보다 분노를 담은 말이 튀어나왔다. 오윤민이 다 설득해 놨다고요.
듣고 있던 윤수의 입가에 절로 또 헛웃음이 맺혔다. 역시나 치밀하기로는 이를 데 없는 인간이다. 이미 오 회장이 사망하기 전부터 다 설계해 놨던 거다. 오 회장이 가진 지분이 얼마나 되는 모르지만, PEF로 구성된 최대주주가 따로 있다는 건 안다. 그런 상황에서 오 회장이 사망할 시 차후 경영구도를 좌우하는 건 당연히 최대주주다. 오윤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최대주주인 PEF부터 이사회까지 다 섭외를 해 놨던 거다. 오 회장 사망 시 신속하게 대표이사직을 교체하고, 제 신경에 늘 거슬리던 오윤석을 전무이사에서 내쳐버릴 수 있게끔. 일반인에게야 어려울 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다루는 게 전문인 오윤민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다.
어느덧 통화를 마친 윤석이 무거운 숨을 가누며 손아귀에 쥔 핸드폰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쥐었다. 절망어린 손길이 벽에 핸드폰을 내려쳤다. 나지막하게 윤석의 입가에 욕설이 맺혔다. 씨발 새끼. 주체할 수 없는 분기를 어쩌지 못하는 윤석을 보고 있으니, 윤수는 어딘가 측은한 감정이 든다. 저 사람은 이제 아버지를 잃은 것뿐 아니라 본인의 직위까지 잃게 생겼다. 심지어 아들조차 어찌 될지 모른다.
형. 제가 해줄 수 있는 거 있으면, 얘기하세요. 솔직히 제대로 해줄 만한 게 없다는 건 윤수가 더 잘 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그 정도 말은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비록 이 집에 오고 난 뒤 형제 중 가장 먼저 윤수를 범한 사람이지만, 그 기억은 지금도 상기하고 싶지 않지만. 오윤석은 러시아에 갔다가 귀국한 이후 꾸준히 잘해 준 인물이었다. 심지어 윤수 앞에서 스스로를 버리기도 했다. 그게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 해도, 오윤석이 지닌 사회적 지위 아래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건 윤수도 충분히 알고 있다.
약간의 정이 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윤수는 어느 순간부터 이 형제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연대를 느끼고 있었다. 오윤석은 그 연대감의 일부다. 어쩌면 정말로, 피는 못 속이는 건지도 모른다. 일단은 어머니가 같으니까. 누군가는 미쳤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윤수는 이 기묘한 연대감을 무시하는 게 어렵다.
윤수야. 한동안 말이 없던 윤석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윤수를 보는 얼굴은 예의 무표정이다. 그 안에 체념이 비친다. 더 이상 분노할 대상도, 분노할 거리도 찾지 못해 정처 없이 헤매는 듯한 낮은 온도의 얼굴. 바라보던 윤수의 입술이 짧게 떨렸다.
“이런 말 갑자기 하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네.”
“만에 하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우리 애 봐 줄 사람이 없으면. 너한테 부탁 좀 할게.”
“그게 말이에요. 형한테 무슨 일이 왜 생기는데요.”
“만에 하나라고 했잖아.”
단호하게 내뱉는 윤석의 말에 윤수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가 이내 잦아든다. 도대체가 방금 윤석이 꺼낸 말의 의도를 알기가 어렵다. 무슨 일. 그런 걸 떠올리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윤석도 가만히 당할 인물이 아니기도 한데. 게다가 아이. 부탁한다니, 한 마디로 키워 달라는 거 아닌가. 윤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애를.
“제가 그 애를 왜 키워요.”
“넌 키울 수밖에 없어. 이유는 스스로 알게 될 거야.”
사뭇 차분하게 말을 마친 윤석이 고개를 돌린 채 긴 숨을 내쉬었다. 대체 저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뭐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 와중에도, 윤수는 저 사람의 심정을 어딘가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역시나 그 연대감의 연장선상이다. 이 형제들과 윤수의 감정선은 엷게 이어진 전선처럼 어딘가 연결돼 있다. 처음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이것이 어머니의 핏줄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외면하는 것조차 어머니에 대한 배반이 될지도 모르니까.
문득 현관에서 들려오는 벨 소리가 거실을 적셨다. 윤수도, 윤석도 동시에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를 켜서 바깥을 확인한 윤석이 빠르게 현관으로 갔다. 문을 젖히자마자 아빠 소리와 함께 작은 머리통을 지닌 아이가 거실로 뛰어 들었다. 뒤편에서 등장한 건 윤혁과 부산에 갔을 때 마주쳤던 체격 좋은 남자다. 쓱 거실을 둘러보다가 윤수를 확인하고는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가시죠.
잠시 굳어 있던 윤수의 몸이 일으켜졌다. 아이를 등 뒤에 둔 윤석의 손이 급하게 윤수의 팔을 잡았다. 차마 이 상황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눈빛이다. 윤수는 그걸 바라보는 게 힘들다. 아예 외면한 채 최대한 차갑게 말을 건넸다.
“놔요. 저 가야하니까.”
“오윤수. 그냥 있자.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까. 나 너 진짜 거기 못 보내.”
“형. 어차피 형은 그냥 저랑 섹스하는 게 좋았던 거잖아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거의 충동적인 말이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됐다. 그걸 알면서도, 윤수는 일부러 말했다. 그렇게 얘기해야 오윤석이 자신을 놓아줄 것 같았다. 윤석의 품에 안긴 아이가 빠끔히 고개를 내민 채 윤수를 뚫어져라 봤다.
오윤석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오 회장 회사에서의 직위는 잃었을지라도 저 정도 커리어라면 훗날 어디에서든 자리를 잡고 승승장구할 수 있을 거다. 그 동력의 밑바탕이 되는 건 아이다.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세 살배기 아이. 윤수에게는 그런 게 없다. 그런 게 없기 때문에 지금의 분노가 앞서는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오윤민을 대면해서, 어머니에 대해 궁금한 것을 해소하고 할 수만 있다면 오윤민을 죽이고 싶다는 분노. 오윤석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거다. 어찌됐든 그는 오윤민과 완전하게 모계 부계 혈연이 일치하는 핏줄이었다. 반쪽짜리인 윤수와 달랐다.
오윤수. 나 못 믿어? 문득 윤석의 나직한 음성이 윤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무게감 있는 언어가 윤수는 괜히 두려웠다. 마치 자신에게 기대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물론 달콤한 제안이다. 윤수도 안다. 아무리 오윤민이 똑똑하기로서니 오 년 가까이 글로벌 기업 요직에 머무르며 경력과 인맥을 쌓아온 윤석을 완벽하게 찍어 누르기는 쉽지 않을 거다. 윤수 입장에서는 가늠도 되지 않은 세계다.
하지만 윤수는 그저 단순한 것을 봤다. 둘 중에 누가 더 잃을 게 클지를. 오윤석에게는 책임져야 할 존재가 있다. 오윤석의 아들. 오윤민에게는 없는 것. 그게 오윤민과 오윤석의 차이다. 그 확고한 차이가 존재하는 한, 오윤석은 오윤민을 이길 수 없다. 이길 수 없는 경쟁의 사이에 놓인 윤수는 그래서 지금의 결론을 내렸다. 싸움에 불리한 쪽으로 하여금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게 나았다. 오윤석에게도, 윤수에게도.
“전 형 못 믿어요. 미안해요.”
딱딱하게 한 마디 건넨 윤수의 몸이 돌려졌다. 윤석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현관 밖으로 나왔다. 사내 한 명이 뒤따라 나왔다. 그걸 확인한 뒤, 스스로 먼저 현관을 닫아버렸다. 쿵하며 문이 닫히는 마찰음이 무겁게 로비를 울렸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뒤편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남성이 윤수를 곁눈질로 훑는 게 느껴졌다. 윤수의 눈꺼풀이 그를 향해 들렸다. 윤민 형 어딨어요. 남성이 여전히 기계에 가까운 음성으로 답했다. 밑에 계십니다. 차에. 잘 조교된 인공지능을 연상케 하는 답변이었다.
35층에서 지하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추락하는 내내 윤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오윤민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죽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게 답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죽이면 그걸로 끝이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 잘난 가면을 끌어내려서 더 이상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할까. 또 아니면.
한없이 생각을 이어가던 윤수의 입가에 짧은 조소가 맺혔다. 씨발.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욕설에 옆에 서 있던 남성이 표정을 굳히며 윤수 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이 집안 피도 안 섞여 있으면서, 이 집 남자들처럼 사고하고 있구나. 내가.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리고, 지하 주차장이 나타났다. 유일하게 라이트를 켠 고급 외제차 한 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앞장서서 걸어간 남성이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안에는 팔짱을 낀 채 사뭇 부드러운 눈으로 윤수를 응시하는 윤민이 있었다. 문을 닫은 남성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마주보는 윤수와 윤민 사이에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왜 그런 얼굴로 봐? 윤수야. 태연하게 건네 오는 말에 윤수의 턱 끝이 공률했다. 어머니 어떻게 한 거야. 형이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한 거라면서. 다짜고짜 내뱉은 독기어린 말에 윤민이 픽 웃었다. 윤민의 손길이 윤수의 얼굴을 향해 스르르 올라갔다. 매만지는 체온은 여전히 따스하다. 이런 공기 속에서조차.
“우리 윤수는 참 궁금한 것도 많아.”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런 얼굴 하면서 물어보면 누가 대답하고 싶겠어. 게다가 따지고 보면 자살은 우리 어머니가 선택한 거고, 너희 아버지에 대해서는 내가 의견만 제시했을 뿐 실제로 한 건 우리 아버지인데. 그걸 내 탓이라고 하면 곤란하지.”
“형.”
“그리고 윤수야. 어차피 둘 다 그렇게 되는 쪽에 네 인생에도 이득이었어.”
내 인생에 이득이라고. 아버지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남는 게. 한껏 떨고 난 윤수의 턱이 멈췄다. 빠르게 올라간 손이 거세게 윤민의 손아귀를 떼어냈다. 이내 잔뜩 힘을 실어 윤민의 뺨을 후려쳤다. 살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차 안을 메웠다. 운전석에 있던 남성조차 흠칫 놀라 이쪽을 봤다. 잠시 옆을 향하던 윤민의 얼굴에 길게 미소가 맺혔다. 이 상황이 흥미로워서 죽겠다는 모양새다. 다시 윤수를 향하는 시선이 한층 안온해져 있다.
“어디 더 해봐, 윤수야. 우리 집 지하에 있는 고문실이 그렇게 궁금하면. 계속해 봐.”
40.
한남동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수는 목덜미에 스르르 올가미라도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또 다시 여기로 왔다. 이 빌어먹을 집에. 눈꺼풀을 한껏 치켜 뜬 채 말 없이 이 층짜리 거대 저택을 노려봤다. 그 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윤민이 살짝 몸을 일으켜 손수 윤수의 옆에 있는 차 문을 열어줬다. 느릿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윤민의 다정한 음성이 찾아들었다. 뭐해, 윤수야. 집으로 가야지.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혁도, 윤성도. 일하는 여직원들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온 집안을 감돌았다. 입구에 선 채 내부만 바라보는 윤수를 향해 윤민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윤혁이하고 윤성이는 장례식장에 가 있어. 어쨌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장례를 치러야지. 하. 윤수의 입 밖으로 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오 회장은 아들들의 손에 죽었다. 이 집안 남자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 비극적인 상황을 도출한 장본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장례식장에서 상주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집안 남자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집안이고, 말도 안 되는 핏줄이다.
윤수야. 정지해있던 윤수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윤민의 시선은 거실에 걸려 있는 네 명분의 선조들 사진을 향하고 있었다. 이타노 슌지, 오수헌, 오인효, 그리고 오승조. 고개를 돌린 윤민이 윤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가능한 주문이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반발심에 얼음장 같은 언어들이 절로 터져 나왔다. 진짜 양심도 없구나, 형. 하기야 사람 새끼가 아니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듣고 있던 윤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아, 저 얼굴. 윤수는 한눈에 알아봤다. 저번에 한정식 집에서 봤던 것과 같다. 이 정도로 신경을 자극하면 천하의 오윤민도 주체가 안 되는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왠지 더 잔인한 말이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윤수야. 형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
“어떻게 안 해. 형은 살인자야. 내가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죽어. 그러면 최소한 증오하는 건 생각해볼게. 빨리 대답이나 해. 어머니 어떻게 했는지.”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머릿속에서 떠오른 잔악한 말들을 빠짐없이 뱉었다. 윤민의 입 밖으로 낮은 숨이 터져 나왔다. 이내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온도가 다소 낮았다. 마주친 동공의 초점이 흐려진 것처럼 보였다. 윤수의 뒤꿈치가 잠시 주춤했다. 어떻게든 맞서야겠다고 생각한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위축되게 하는 낯빛이다.
윤수야. 나직하게 이름을 부른 윤민이 손을 들어 윤수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게감이 실려 있다. 순식간에 온 신경이 냉동되는 듯한 기분에 윤수의 목덜미가 순간 호흡을 멈췄다. 윤민의 손가락이 하얀 살결을 소리 없이 쓸어내렸다.
“나는 너한테 충분히 이해할 기회를 줬다고 생각해.”
“이해는 무슨 이해. 웃기는 소리하지 마.”
“내가 분명히 얘기했지. 둘 다 죽는 쪽이 너한테도 나았다고. 너는 왜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할까. 윤수야. 응?”
사뭇 따스하게 질문을 건넨 윤민이 가까이 다가왔다. 윤수의 어깨를 끌어안는 팔이 제법 단단하다. 살며시 내려온 윤민의 얼굴이 윤수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피부에 닿는 축축한 감각에 윤수의 어깨가 소스라쳤다. 전에 없이 맹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윤수의 팔을 윤민이 빠르게 쥐었다. 강제로 맞춰진 시선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알고 싶어? 어머니한테 뭐라고 했는지. 대신 너는 스스로에 대해 알기 싫은 진실을 알아야 해. 그래도 좋아? 차분하게 건네 오는 질문에 윤수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오윤수에 대해 알기 싫은 진실. 그걸 알아야 한다고. 이미 익숙한 일이지만 윤민은 또 윤수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허무맹랑한 얘기나 한다며 무시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윤민에게는 그게 안 된다. 애초에 오윤민이라는 사람이 능숙하게 사람을 다룰 줄 아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윤민이 그런 류의 말을 할 때마다 윤수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됐다. 정말로 자신이 모르는 스스로에 대한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맞는 건지를 두고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이 부딪혔다. 순식간에 불어난 상념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망설이는 윤수를 한 동안 지켜보던 윤민이 보다 얼굴을 가까이 했다. 멈춰있던 윤수의 입술에 윤민의 입술이 닿는다. 기척 없이 안으로 혀가 스며든다. 공기처럼 들어온 혀가 입 안의 점막을 사르르 녹인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인 양 자연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걸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뒤늦게 흠칫한 윤수가 채 뿌리치기도 전에 빠르게 혀가 빠져 나갔다. 평소의 예사로운 얼굴로 돌아온 윤민 때문에 방금 있었던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쳐다만 보는 윤수를 향해 윤민이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지. 다른 사람이랑 하면 이 느낌 안 났거든.”
“지금 뭐하는 거야. 형.”
“결정해, 오윤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오윤수라고 했다. 저런 식으로 윤수를 부른 건 처음이다. 완벽하게 처음 만난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이성적인 언어다. 낯선 언어가 이곳저곳에서 솟아오른 수풀처럼 윤수를 에워싼다. 판단력이 자꾸만 흐려진다. 그대로 사고가 멎는 것이 아닐지 우려하기를 몇 번, 윤수는 간신히 단 하나의 판단을 했다. 애초에 이 집에 온 건 그걸 알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았어, 그렇게 할게. 이제 내가 뭐하면 돼. 물기 없이 건넨 말에 윤민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등을 돌린 채 건네는 명령이 얼음보다도 차갑다. 먼저 발걸음을 내딛는 윤민을 따라 윤수도 조금씩 앞을 향해 걸었다. 걸음은 부엌 쪽을 향하고, 다음에는 뒤편에 있는 작은 통로를 향했다. 처음 걷는 길이다. 친구들이 올 때마다 윤성이 가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던 곳. 마찬가지로 윤수에게도 허용되지 않던 장소다.
통로의 끝에 문이 하나 있다. 윤민의 발걸음이 멎는다. 열쇠를 꺼내 손잡이의 구멍 안에 넣은 손아귀가 서서히 옆으로 돌아갔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 벌어졌다.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당긴 윤민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윤수도 뒤를 따랐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밑으로 향하는 계단이다. 안정적인 소리를 내면서 내려가는 윤민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 초면의 공간에 몸을 밀어 넣는 게 맞는 것인지에 대해. 반쯤 내려간 윤민이 문득 고개를 돌려 윤수를 봤다.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 와? 윤수야. 대답하지 않았다. 새까만 지하의 공간에서는 축축하고 텁텁한 냄새가 났다. 내려가는 순간 같은 냄새로 온몸이 물들 것만 같았다. 말이 없는 윤수를 향해 엷게 웃은 윤민이 말을 건넸다. 알고 싶다면서. 왜, 이제 와서 무서워? 윤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솔직히 무섭다. 보이지 않는 저 밑은 윤민의 검은 수면을 닮아 있다. 바닥에 닿는 순간 삼켜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수는 선택했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 잠겨 있는 진실을 알게 되는 쪽을. 윤민의 검은 수면 밑에 자리 잡은 것들을 확인하는 쪽을. 평범한 계단처럼 보이는 작은 내리막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걸려있다. 언제나 형제들이 윤수와 마주할 때 의도적으로 쳐 놓은 울타리. 저 경계선을 건너는 건, 울타리를 넘는다는 거다. 그리고 그것이 윤수의 선택이었다.
한동안 멈춰 있던 윤수가 결국 밑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윤민도 남은 계단을 마저 걸었다. 전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두 사람분의 발걸음 소리가 어둠처럼 쌓였다. 지하에 다다른 윤민이 손을 들어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불현듯 안이 환해지고, 윤수의 시야에 들어온 건 처음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저 멀리 침대가 있고, 그 옆에 놓인 커다란 선반에는 각종 고문기구가 가득하다. 침대 반대편에는 대형 수조. 안에서 검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기시감의 근원을 알았다. 오 회장의 방에서 발견한 USB에 담겨 있던 영상. 여기에서 찍은 게 분명하다.
윤수야. 네가 결정한 거야. 여전히 윤수 쪽에 등을 둔 윤민이 또 한 번 강조했다. 윤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는 얘기다. 윤수가 선택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은 것이야 당연하다. 다른 형제들이야 상관없을지 몰라도, 윤수로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형제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앉아. 저 쪽에. 짧게 턱짓으로 침대 쪽을 가리킨 윤민이 선반으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선반 아래에 붙어있는 서랍장을. 잠시 윤민의 뒤통수만 보던 윤수가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절반쯤 향하던 걸음의 속도가 문득 느려졌다. 이내 완전히 정지하고 만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의지와 관계없이 스르르 다리의 힘이 풀어지고, 양 무릎이 차츰 바닥을 향해 내려간다. 완전하게 숙여진 고개 너머로 윤수를 새까맣게 응시하는 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막 서랍장에 손을 가져갔던 윤민이 고개를 돌려 윤수 쪽을 봤다. 왜 그래, 윤수야.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원인모를 상황이다. 마른 침만 하염없이 삼켜 대는 윤수의 얼굴을 확인한 윤민이 뒤늦게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못 가겠구나. 서랍장을 반쯤 연 윤민이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왔다. 완전히 힘이 빠진 윤수의 몸을 안은 채 침대로 향했다. 하얀 침대로 향하는 내내 윤수는 최대한 뱀이 있는 쪽은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뱀이 문제였다. 윤수가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다.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싫어할 만하지. 아버지가 어머니 폭행하는 내내 너는 어머니 대신 저 뱀이 있는 수조 쪽만 봤을 테니까. 당연히 기억이 겹쳐서 뱀도 싫어하겠지.”
막 침대 위에 윤수를 내려놓은 윤민이 대수롭지 않게 답을 내놨다. 윤수의 동공이 빠르게 커졌다. 어떻게 저런 것까지 꿰뚫고 있지. 당혹감 어린 얼굴이 윤민을 향해 올라갔다. 윤민의 한없이 건조한 눈이 윤수의 얼굴을 훑었다. 애초에 그런 게 뭐가 알기 어렵다는 투다. 아직도 모르겠어? 윤수야. 형이 늘 얘기했잖아.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건 없다고.
윤수의 목덜미가 반사적으로 떨렸다. 기분이 나빴다. 저런 인간이 자신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구는 게.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양 눈가에 절로 힘이 실렸다. 팔짱을 낀 채 적막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윤민을 향해 또 한 번 독설을 터뜨렸다.
“그 말 다시는 하지 마. 형 같은 새끼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너 이렇게까지 할 거야?”
“난 보통의 사람이야. 형이나 오 회장, 형네 형제들하고 달라. 그런 사람이 형한테 이런 감정 품는 거 당연한 거 아냐?”
윤민이 살짝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짧게 아랫입술을 지분거리고 난 뒤 다시 윤수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와 호흡을 가눈 윤민이 옆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저 죽일 듯이 쏘아보는 윤수의 어깨에 윤민의 손이 올라왔다.
“윤수야. 형이 너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 알지. 어릴 때부터.”
“뭘 소중하게 여겨. 날 그렇게 싫어해서 이 집에 일부러 불러들인 다음에 오 회장한테 강간당하게 한 거, 형이잖아.”
“물론 처음엔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더라고.”
나직하게 말하고 난 윤민의 손길이 윤수의 귓불로 올라갔다. 살짝 살집이 있는 아래쪽을 잘근잘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어딘가 애정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아 윤수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 와중에 기묘한 간지러움이 귓불을 타고 온몸에 퍼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정지해있던 눈꺼풀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찾아들었다. 사실은 내가 널 보고 싶었던 것 같아. 윤수야. 윤수의 눈꺼풀이 번쩍 들렸다.
난 안 보고 싶었어, 씨발 새끼야. 빠르게 올라간 손아귀가 윤수의 얼굴을 매만지던 윤민의 손목을 쥐었다. 있는 힘껏 끌어내리는 윤수의 손동작에 윤민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진짜 웃음은 아니었다. 미소로 치환한 분노에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했지. 윤수야.”
“이래야지. 안 이러면 어머니한테 미안해서 내가 어떻게 숨을 쉬어.”
“안타깝네. 형은 윤수한테 항상 잘 해주려고 하는데, 윤수가 그걸 거부하고 있으니.”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온 윤민의 존재감이 윤수의 몸까지 식혀버리는 것만 같다. 금방이라도 위축될 것 같은 위기감을 이겨내기 위해 독설을 뱉었다. 역겨운 새끼. 한 침대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빠르게 몸을 일으키려는 윤수의 팔에 윤민의 억센 손아귀가 걸렸다. 내가 알려줄 게 많은데. 일단 이것부터 알려주는 게 맞겠네.
잡혀 있던 윤수의 몸이 다시 침대 쪽으로 끌어내졌다. 완전히 시트 위에 올라간 윤수의 어깨를 억누른 채 윤민이 위쪽에 제 몸을 갖다 댔다. 당연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시트에서 벗어나려 하는 윤수의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윤민이 단단하게 쥐어왔다. 다소 힘이 빠져버린 손아귀가 윤민의 손이 이끄는 대로 침대 위쪽을 향했다. 잠시 멍해진 윤수의 귓가에 날카롭게 자신의 손목을 감싸는 금속음이 들렸다. 고개를 드니 언젠가 영상에서 봤던 그것이다. 족쇄처럼 생긴 금속.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윤수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굳어버린 윤수의 또 다른 손목도 순식간에 끌어올려졌다. 손목을 채우는 두 번째 금속음은 아까보다 컸다.
너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면 내가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쳐 줘야지. 윤수를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말을 마친 윤민이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단추를 모두 풀어 낸 셔츠를 젖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몸. 그리고.
아. 윤수의 입 밖으로 짤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마 눈으로 담아내기 버거울 정도로 끔찍한 흔적이 현현했다. 열 개, 아니 스무 개쯤 될까. 작고 큰 흉터들이 온몸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쪽 팔에는 울퉁불퉁한 화상자국이 길게 남아있다. 전부 오 회장의 짓이다. 특히 화상자국은 윤혁의 팔을 부러뜨리려는 오 회장을 만류하다 입은 것이 분명했다.
숨이 막혀왔다. 급속도로 가빠지기 시작한 호흡을 간신히 가누던 윤수가 끝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상황은 윤수에게 위험했다. 저렇게까지 난도질당한 몸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그동안 접했던 모든 고통어린 흔적이 무색할 정도로 오윤민의 몸에 남은 자국이 빠르게 윤수의 머릿속을 엄습했다. 뛰는 심장을 주체하는 게 버거웠다.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윤수의 다리를 윤민이 스르르 쓸어 올렸다. 여전히 침착한 표정이다. 너무도 평소와 같아서, 지금 당황한 윤수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얼굴이다.
“어머니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어. 자신이 도망치는 바람에 제 아들 네 명이 이런 꼴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서. 그런 죄책감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건 너무나도 쉬워, 사실.”
“형.”
“어머니에게 얘기 했어. 현재로써 우리 아버지가 욕정 할 수 있는 사람은 윤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떻게든 윤수를 얻어서 어머니처럼 취하고 싶어 한다고 하는 것을. 어머니 역시 그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항상 갖고 있었어. 어떻게 하면 윤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간단한 제안을 했어. 어머니, 어머니가 죽으시면 돼요.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그게 다야.”
흘러나오는 말은 신문기사라도 읊는 것처럼 예사롭기 그지없다. 윤수의 양 팔에서 힘이 서서히 풀어져갔다. 파르르 경련하기 시작한 눈가에 차츰 물기가 들어찼다. 어떻게 자기 어머니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결과적으로 오윤민은 원하는 결과를 모두 얻었다. 어머니를 자살케 하고, 아버지를 사망케 하고, 오윤수를 고통에 몰아넣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차마 생각지도 못할 그런 일들을 저질러 놓고 나서도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원하는 걸 얻었으니 그걸로 됐다는 거다. 도무지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 오윤민을 탄생케 한 건 이 집안의 저주받은 핏줄이다. 그 비인간적인 유전자가 윤수와 윤수의 가족을 타락시켰다. 단지 그 핏줄에 얽혔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죄 값을 치렀다. 윤수의 눈꼬리에서 길게 물기가 떨어져 내렸다. 시트를 적시는 액체의 소음이 빗소리처럼 윤수의 귓가에 새겨졌다.
“어머니가 자살을 하고, 네가 집에 온 것까지는 좋았어. 다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갔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아버지한테 강간당하다가 못 이겨서 자살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근데 같이 지내다 보니 그건 또 안 되겠더라고.”
“넌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새끼야. 오윤민.”
“윤수야. 나는 너를 다시 만나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어. 죽는 게 정말로 싫은 있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 그게 너야, 윤수야. 게다가 난 너를 다른 형제들처럼 억지로 범하고 싶지도 않았어. 어차피 시간이 흐르다 보면, 넌 당연히 나를 원하게 될 거니까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거야.”
“웃기지 마. 그럴 일은 없어.”
“근데 결국 이렇게 되잖아. 나는 기다리려고 했는데, 네가 그걸 망치잖아. 너는 내가 계산한 값을 항상 무의미하게 만들어. 어렸을 적부터 그랬어, 넌.”
씁쓸하게 웃은 윤민이 손을 들어 윤수의 허리를 쥐었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감각에 순식간에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것만 같다.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이 상황이 죽을 만큼 싫었다. 이거 풀어, 당장. 어금니를 깨물어가며 쏟아낸 윤수의 경고에 윤민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윤수야. 네가 판단한 거야. 스스로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한 건 너였잖아.
대체 그것과 이 행동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멸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윤수의 턱밑으로 윤민의 손아귀가 들어왔다. 이내 맞닿은 윤민의 입술 틈으로 거칠게 혀가 들어왔다. 아까와 비교하면 훨씬 더 현실감 있는 키스였다. 입 안에서 질척이는 뜨거운 감각에 온몸이 송연해졌다. 어떻게든 떼어 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하는 윤수의 턱을 윤민이 더욱 거세게 감싸 쥐었다. 어림없는 일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오윤민과 이런 걸 하고 싶지 않았다. 두 눈을 부릅뜬 윤수가 힘 있게 윤민의 혀를 깨물었다. 하. 낮게 헛웃음을 터뜨린 윤민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입 안에 들어찬 자신의 피를 머금는 입가에 한껏 여유가 담겨 있었다.
“이래야 오윤수지. 훌륭하네.”
“무슨 개소리야.”
“뭐, 네 입장에서 원치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형제들이랑 할 때 너무 맥없이 무너져서 좀 걱정한 것도 사실이야. 저래서는 재미가 없는데 싶어서.”
윤수의 눈가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맥없이 무너졌다고. 섹스한 사실 뿐 아니라 어떻게 했는지까지 다 알고 있는 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누군가 먼저 얘기했을 거 같지는 않은데. 다소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꺼풀만 치켜뜨는 윤수를 보며 윤민이 나긋하게 말했다. 우리 집에 CCTV가 딱 두 개 있어. 아버지를 죽이는 데 활용할 용도로 설치한 거긴 한데, 아버지 방에 하나 있고. 나머지 하나가 네 방.
입술이 짧게 벌어졌다. CCTV. 그거였다. 윤석이 언젠가 얘기했던 이 집엔 비밀이 없다는 것도, 결국엔 그걸 의미한 거였다. 오윤민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윤수가 이 형제들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섹스 했고, 오 회장의 방에서 어떤 섹스들을 했고, 자신의 방에서는 뭘 하고 있었는지까지. 윤수가 밤마다 잠을 뒤척일 때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종종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화면으로 보고 있었던 거다. 윤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친 새끼 같으니. 더 이상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얼굴로 아랫입술만 깨물어 대는 윤수의 머리카락에 윤민의 손이 닿았다. 아끼는 보석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려간 손가락이 어깨를 타고, 허리까지 내려간 뒤 골반이 있는 쪽에 머물렀다.
“윤수야. 얘기했잖아.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건 없어.”
41.
윤민의 손아귀에 걸린 윤수의 바지가 스르르 끌어내려졌다. 피부에 닿는 마찰음에 어딘가 소름이 돋았다. 빠르게 무릎을 세워대는 윤수를 보면서 윤민이 여유 있게 허벅지를 손으로 억눌렀다. 악. 뼈까지 파고드는 듯한 느낌에 짧은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사이에 완전히 바지가 벗겨져 내려가고, 손은 다시 속옷 위를 향했다. 본능적으로 성난 목소리가 뱉어졌다.
“하지 마, 이 개새끼야.”
“네가 결정한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이딴 걸 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
“윤수야.”
엷게 한숨을 내 쉰 윤민이 좀 더 상체를 들어 얼굴을 가까이 했다. 윤수가 피곤하게 군다는 식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윤수의 목덜미로 올라온 윤민의 손아귀가 부드러운 피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손에 어딘가 날이 서 있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우악스럽게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흐으, 읍.”
“너에 대해 알고 싶으면.”
“아, 숨. 아읍.”
“이런 것까지 알아야지. 응?”
완전히 목덜미를 옥죄는 것처럼 덮쳐오던 손아귀가 스르르 풀어졌다. 붉어진 윤수의 얼굴이 빠르게 호흡을 뱉으며 뒤쪽으로 젖혀졌다. 속옷까지 내려가 허전해진 다리를 뒤늦게 확인했다. 진짜 하려고. 경직된 윤수의 목덜미에 윤민의 얼굴이 내려갔다. 부드럽게 입술로 훑어대면서, 입고 있던 윤수의 상의를 위쪽으로 끌어 올렸다.
처음에는 입술이었던 것이 혀로 바뀌어갔다. 눅눅하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던 윤민의 혀가 소리 없이 어깻죽지 쪽으로 내려갔다. 아. 물감처럼 퍼져나가는 간지러움에 짧은 소음이 터져 나왔다. 기분이 묘했다. 아니, 언젠가부터 이미 윤수는 묘한 상태였다.
처음에 오 회장과 할 때는 그저 고통과 공포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윤석과 할 때도 그 감각은 유효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남산타워 앞에서 윤석이 자신의 몸을 애무했을 때는 온몸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윤혁과 할 때는 윤수의 민감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지분거린 탓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남자와 하면서 사정했다. 윤성과 할 때는 약에 취해있었던 영향인지 역시 사정했다. 그리고 다시 오 회장이 돌아와 그와 섹스하게 됐을 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성기도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남자들과 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몸도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하게는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욕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익숙해진 몸이 본능에 따라 반응하는 걸로 치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결론에는 어딘가 결핍된 부분이 있었다. 원치 않는 섹스에 반응하는 사람은 매저키스트가 아니고서야 없다. 그러므로 윤수가 욕정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조건을 그들이 갖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윤수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조건이 어떤 형태가 됐든지, 자신이 그들의 행위에 일부라도 감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윤민이 지금 하는 행위는 그 동안 누적됐던 감각을 한꺼번에 일깨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 몸을 바싹바싹 타게 만든다. 그 기분이 싫었다. 어떻게든 거부하려 했지만, 양 다리를 거세게 짓누른 채라 한계가 있었다. 피부에 닿는 윤민의 혀에는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고 있어 스칠 때마다 세포 곳곳이 빠르게 반응하는 것만 같았다. 결박당한 손이 수시로 떨리고, 입 밖으로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싫다더니, 잘 느끼네.”
“당장 때려치워. 형이랑 안 할 거니까.”
“이런 네 몸,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윤수야.”
핵심을 찔러오는 듯한 윤민의 질문에 순식간에 윤수의 머릿속이 검어졌다. 분명히 한 적이 있는 생각이지만, 일부러 소리를 내서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다. 굳어있던 입술에서 문득 날 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두가 있는 곳에 머무른 윤민의 입술이 힘있게 그것을 빨아대고 있었다. 유두 뿐 아니라 근처에 존재하는 모든 피부가 소스라치는 듯 했다. 간지럽다는 말만으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각이 윤수의 몸을 지독히도 잘 아는 것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하, 아읏. 좀. 안 한다고 했잖.”
“소용없어. 안 멈출 거니까.”
“싫다고, 하지 마. 읏, 개새끼야.”
붉어진 눈시울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내가 이 새끼랑 이딴 짓을 하고 있다. 어머니를 죽게 한 사람에게 몸을 내주면서 야릇한 소리를 터뜨려대고 있다. 게다가 이 사람은 피가 섞인 형제다. 유일하게 형제들 중 자신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인간이다. 결국에는 이렇게 됐다. 이제 형제들 중 지옥에 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남은 건 형제들이 공유한 창부로 전락하는 일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다. 당장 멈춰야 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걸 할 수 있지. 흐릿해지는 머릿속에서 실체 없는 상념들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죽으면 될까.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언젠가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오 회장에게 강간당한 뒤로 한 적이 없다. 엄밀히 따지면 이번이 두 번째다.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의 욕망이 더 간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도가 없으니까. 하지만 방법이 제한적이다. 양 손은 결박됐고 양 다리도 사실상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윤수의 어금니 사이로 혀가 빠르게 들어왔다. 아예 절단할 것처럼 힘을 준 윤수의 턱이 부드럽고 축축한 신체를 깨물었다. 입 안 가득히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좀 더 해야 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죽기 어렵다는 걸 안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오윤민과 하느니 죽는 게 낫다는 것. 그걸 표출하는 것만으로 이 행위에는 의미가 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없는 윤수을 인지한 윤민의 고개가 들렸다. 하염없이 자신의 혀를 깨물어 대는 윤수와 윤민의 시선이 뚜렷하게 마주쳐졌다. 쯧. 혀를 차는 묵직한 소리가 흐려진 윤수의 청각을 적셨다.
벌떡 몸을 일으킨 윤민이 옆에 붙어 있는 선반에 가서는 뭔가를 집었다. 이내 서랍장을 열어 흰색으로 점철된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침대로 돌아온 뒤 태연하게 시트 위에 몸을 올리고는 윤수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풀어진 혀가 목구멍을 틀어막는 통에 완전히 힘이 빠진 윤수의 입술이 마지못해 벌어졌다. 흰 붕대가 입 안에 사정없이 구겨 넣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이내 가죽으로 된 벨트 같은 것이 윤수의 입가에 걸쳐졌다. 입술을 중심으로 에워싼 벨트가 머리 뒤편에서 차갑게 채워졌다.
“흐으, 읍.”
“이런 거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참.”
“으, 흣.”
“별로 심하진 않더라고. 다행히도.”
다정하게 웃어 보인 윤민이 제법 힘이 실린 손으로 윤수의 다리를 벌려대기 시작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최대한 다리에 힘을 줘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혀의 출혈 때문에 몸의 기운이 다소 빠진 상태인 데다가 워낙 다리를 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단단했다. 낮은 숨을 쉰 윤수의 고개가 맥없이 옆으로 젖혔다.
완전히 윤수의 다리를 벌린 채 잠시 내려다보면 윤민이 바지의 버클을 풀어 내렸다. 속옷까지 끌어내린 자리에 현현하게 발기한 성기가 보였다. 이 상황에서도 저 정도로 커지는 구나, 저 개새끼는. 저주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윤수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을 억지로 움켜 쥔 윤민이 은은하게 말했다. 잘 봐, 윤수야. 형이 너한테 어떻게 하는지.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입 안에 들어찬 붕대를 양 이빨이 무겁게 씹어대기 시작했다. 물기에 젖은 윤수의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춘 윤민이 서서히 하반신을 윤수의 아래쪽에 밀착시켰다. 벌어진 구멍 틈으로 핏줄까지 선명한 성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붕대를 물고 있는 윤수의 양 이빨에 더욱 힘이 실렸다.
귀두부터 들어오는 성기의 존재감이 낯설었다. 마치 처음 안에 남자의 것을 넣는 것처럼.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점막 곳곳이 소스라치게 반응했다. 점점 더 묵직해지는 뱃속에 지긋한 고통과 간지러움이 들어찼다. 성기가 들어오자마자 이런 걸 느낀 건 처음이었다. 윤수의 양 허벅지가 가늘게 떨렸다. 알아 챈 윤민이 귀엽다는 얼굴로 떨리는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느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도, 빠르게 안쪽까지 밀려들어오는 성기 때문에 다리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아릿하고 묘한 감각이 벌레 떼처럼 하반신을 휘덮고 있었다. 눈꼬리를 타고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윤민과 섹스하면서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게 싫었다. 자신까지 발정난 개처럼 만들어버리는 그의 성욕이 저주스럽기만 했다.
흡. 한껏 윤민을 노려본 채 입 안에서 끊임없이 소리를 뱉어냈다. 윤민이 마지못해 살짝 입 안을 벌려줬다. 여전히 붕대와 재갈 때문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윤수는 그 와중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악독한 말을 뱉기로 했다.
“동생 구멍에 쳐 박으니 좋아? 발정 난 새끼야. 넌 사람도 아니야. 너 포함해서 너희 형제들 다 사람 아니야. 백날 천날 쑤셔 봐. 내가 어디 좋아하나. 내 몸에 어느 한 곳도 너한테 내주지 않을 거니까. 너 같은 개새끼한테는 절대로 줄 일 없. 흡.”
분연히 말을 터뜨리던 윤수의 입이 강제로 다물렸다. 윤민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맺혔다. 꽤나 한참동안. 하여간 귀여워, 오윤수. 그 말을 끝으로 윤민이 미소를 거둬 냈다. 완연한 무표정으로 돌아온 윤민이 살짝 몸을 들어 침대 밑쪽을 봤다. 밑에 달려 있는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제법 묵직했다. 안에서 뭔가를 찾아낸 윤민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손아귀에 쥔 물건이 차분하게 윤수의 하반신 쪽을 향했다. 찰칵. 들리는 쇳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방금 윤수가 확인한 게 맞다면, 저건 잭나이프다.
“윤수는 자꾸 내가 계산한 값을 넘어선다니까. 매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며 묻고 싶어도 방도가 없다. 온 입이 붕대와 재갈에 단단하게 봉쇄된 채다. 여전히 윤수의 안에 성기를 넣은 채로, 윤민이 윤수의 하반신을 어루만졌다. 잔뜩 위축된 하얀 허벅지를 유독 손가락이 지그시 매만졌다. 빠르게 살결이 미동했다. 완전히 허벅지를 꾹 누른 윤민이 잭나이프를 가져갔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윤수의 어깨가 절로 공률했다.
“나한테 하나도 안 내준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흐으, 읍.”
“네 여기, 볼 때마다 예뻐서 항상 생각나더라고. 이런 방식으로나마 흔적을 남겨놓으면 더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겠지. 나도, 너도.”
말을 마친 윤민이 윤수의 안쪽 허벅지에 날 선 잭나이프를 갖다 댔다. 흐읍. 차마 고통을 변환할 수 없는 윤수의 음성이 애처롭게 붕대를 적셨다. 맨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온몸의 세포를 갈기갈기 찢었다. 칼날은 느리게 내려갔다. 닿은 부위가 아예 소멸해버릴 것처럼 홧홧했다. 내려간 칼날이 무릎 부근에까지 닿았다. 그어진 부위가 손가락 세 개는 족히 될 것 같았다. 도려내 진 표피를 따라 뜨거운 혈액이 흘러내렸다.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윤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내벽을 채운 윤민의 성기가 좀 더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군데군데 있는 점막을 위협할 정도로 빳빳하게 팽창한 음경 때문에 뱃속이 쑤셨다. 이 상황에서 저 인간은 흥분하고 있는 거다. 허리가 절망적으로 떨렸다. 자신의 피부에서 떨어져 내린 핏방울이 하염없이 하반신을 적시고 있었다. 끊임없이 붕대를 씹어가며 몸부림치는 윤수의 눈가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물기가 흘러내렸다. 흡족하게 내려다보던 윤민이 윤수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괜찮아. 겉에만 살짝 그은 거니까.
허벅지가 좀 더 들렸다. 핏물이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벌어져있는 엉덩이 사이에까지 스며들었다. 그것을 윤활유 삼아 윤민의 성기가 좀 더 매끄럽게 내벽을 들쑤셨다. 아윽. 틀어 막힌 윤수의 입 밖으로 제한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출혈이 지속되는 혀. 표피가 훼손된 허벅지에서 찾아드는 고통. 거기에 사정없이 안을 후벼 대는 윤민의 음경까지. 이게 실제 상황인 걸 믿고 싶지 않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피로 얼룩진 자신의 하반신이 보였다. 그걸 보면서도 태연하게 윤수의 뱃속을 성기로 뒤적이는 윤민의 모습도. 엉덩이에 흘러내린 핏물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머금어댄 음경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부풀어 오른 듯 느껴졌다. 자신이 윤수에게 새긴 흔적을 음미하는 일이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머리가 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뛰는 심장과 맥박에 몸을 맡긴 채 느슨해진 윤수의 뱃속에 윤민의 성기가 아까보다 깊숙이 들어왔다. 아까처럼 혈관을 세운 부푼 성기가 내벽의 허물어있는 주름을 지긋이 문질러댔다. 하반신에 이따금씩 불씨가 떨어진 것처럼 따끔했다. 또 다시 기묘한 감각이 스멀스멀 아랫도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수시로 흠칫흠칫 올라가는 윤수의 다리를 윤민이 길게 어루만졌다.
읏. 길게 빠져나왔던 윤민의 귀두가 불현듯 직장 끄트머리에 박혔다. 윤수의 허리가 순간적으로 경련했다. 온몸의 맥이 빠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따금씩 윤민의 성기 때문에 고개를 드는 감응에 좌절감이 들었다. 픽 웃은 윤민이 또 다시 윤수의 귓불을 입에 머금었다. 알면서도 저항할 기운이 없어 그대로 뒀다. 형의 입 안에서 굴러가는 살집으로부터 들려오는 녹녹한 소리가 귓구멍을 울렸다. 목덜미가 찌릿했다. 통로를 차단당한 입가에 더운 숨이 맺혔다.
“윤수야, 넌 모를 거야. 네가 얼마나 형한테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읍, 하읏.”
“그리고 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야. 반드시.”
말을 마친 윤민이 보다 힘을 실어 하반신을 움직여댔다. 내벽을 짓이기기라도 할 것처럼 공격적으로 들이닥치는 귀두에 윤수의 고개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꿈틀거리며 점막을 핥아대는 윤민의 음경이 싫으면서도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다. 막혀진 입 밖으로 신음을 삼켜대던 윤수의 얼굴을 윤민이 지긋이 쓸어내렸다.
윤수의 입에 물려있던 재갈과 붕대가 빠져나갔다. 허전해진 윤수의 입가에 윤민의 입술이 닿았다. 들어온 혀가 끈적하게 젖은 입안을 쓸어내렸다. 입 안에 들어찬 핏물까지 윤민의 혀를 타고 비워져 갔다.
아래에서는 수시로 내벽을 비벼대는 윤민의 성기가 완전히 하반신을 억압할 것 마냥 위협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점막 곳곳이 핏물과 윤민의 쿠퍼액에 젖어 미끈거렸다. 이따금씩 자신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곳을 후벼댈 때마다 뱃속이 쿵쿵거렸다. 아, 형. 스스로도 모르는 뱃속을 윤민에게 점령당한 기분이 수치스러웠다. 간헐적으로 맺힌 눈물이 순식간에 시트를 향해 낙하했다.
“형, 그만. 하지 마. 으응, 그만.”
“가만히 있어.”
“넣지 마. 제발, 하읏. 넣지 마. 혀엉.”
갈수록 빨라지는 자신의 맥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에 젖어 위축된 자신의 성기가 발기하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하반신을 적시는 자리자리한 감각이 금방이라도 성기를 들어 올릴 것처럼 뚜렷했다. 떨리는 윤수의 양 허벅지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린 윤민이 깊숙한 점막을 귀두로 꾹 눌러댔다. 조붓한 틈을 커다란 음경이 쑤셔대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앗. 금방이라도 뱃속이 터질 것 같은 위기감에 절박한 비명이 뱉어졌다. 눈물에 가려 흐릿한 눈가에 윤민이 입을 맞췄다. 지그시 물기가 흡수됐다. 아까 입 안의 핏물을 삼킨 것처럼. 윤수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하나하나 윤민에게 스미고 있었다.
수시로 내벽의 깊숙한 부분을 밟아대는 윤민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자신의 몸인데도 이미 윤민에게 완전히 점거당한 것 같은 좌절감이 들었다. 벌레 떼처럼 하반신을 장악한 기묘한 감각은 거의 한계까지 치닫고 있었다. 불현듯 바깥으로 나갈 것처럼 빠졌던 성기가 매서운 마찰음을 터뜨리며 내벽을 쑤셨다. 아앗. 적막한 지하공간에서 윤수의 엉덩이와 윤민의 하체가 맞부딪히는 적나라한 소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됐다. 생생한 소리가 귓가에 맺힐 때마다 자신이 형과 살을 섞고 있다는 걸 몇 번이나 실감하게 됐다. 하. 체념 어린 숨소리가 입가에 맺혔다.
뱃속이 갑자기 더워졌다. 정액을 분출한 모양이었다. 길게 숨을 뱉은 윤민이 성기를 빼낸 뒤 윤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초점이 흐려진 윤수의 눈가에 윤민의 입술이 닿았다. 담담한 윤민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물들였다. 역시 네가 여자로 태어나야 했어. 그랬다면 네가 지금쯤 내 애를 가졌을 텐데. 간신히 식었던 윤수의 눈가가 불현듯 뜨거워졌다.
이 형제들은 이제 끝났다. 오윤석, 오윤민, 오윤수, 오윤혁, 오윤성. 어느 하나도 깨끗한 존재가 없다.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도 없다. 네 명의 형제들은 같은 형제이자 남자인 윤수를 취했고, 윤수는 그들에게 자신을 내줬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 한남동 집에서 일어났다. 지옥에나 어울릴 법한 그런 일이. 메마른 윤수의 입 밖으로 희미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형하고 나는 지옥에 갈 거야.”
“다행이네. 혼자 갈 줄 알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윤민이 웃었다. 멈춰있던 윤수의 눈가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낳은 다섯 명의 형제들이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몰랐다면 불쌍한 일이고, 알았다면 불행한 일이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전히 그 고문실이었다. 고개를 내린 끝에는 붕대로 감고 있는 허벅지가 보였다. 잠시 숨만 가누다가 천천히 다리를 들어 바닥을 밟았다. 지금이 며칠이고, 또 몇 시인지 알고 싶은데 수단이 없다. 여기엔 시계도 달력도 없다. 윤수의 핸드폰도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다. 멍해진 눈으로 방 안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으니 처음 접한 공간에 동떨어진 미아가 된 기분이다. 문득 시선을 돌린 곳에는 수조에 갇혀 있는 뱀이 있다. 분명히 갇혀있는데도, 언제라도 스멀스멀 다가와 윤수의 몸을 촘촘히 에워쌀 것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순식간에 공포에 사로잡혀 바르르 떨리는 몸을 최대한 뱀이 있는 쪽으로부터 멀리 떼어냈다. 벗고 있는 등이 문득 선반에 닿았다. 고문기구들로 가득한 선반. 시선을 끌어내려 그것들을 보고 있다가, 밑에 있는 서랍장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윤민은 지하실에 들어오자마자 저 서랍장부터 열었었다. 거기에 뭔가가 있다는 거다. 망설이던 손아귀가 서랍장의 손잡이로 향했다. 스르르 끌어낸 뒤 안에 있던 것을 차근차근 살폈다. 붕대나 응급 약 등이 들어가 있는 구급약통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옆으로 치워낸 뒤 다른 것이 있는지를 살폈다. 액자가 하나 있다. 흑백 사진이 들어간.
손아귀에 쥔 채 얼굴 가까이 끌어올렸다. 다섯 살이 채 돼 보이지 않는 두 명의 아이. 남자와 여자. 뒤편에는 이 집의 것이 분명한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윤수는 그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았다. 윤수의 어머니 이세영과 오승조다. 이상한 일이다. 왜 이들이 어릴 때 이 집에 있었던 걸까. 분명히 윤수의 어머니는 대학교에서 오 회장을 만났다고 했는데.
불현듯 뒤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게 계단을 딛는 소리가 지하를 울리고, 이내 윤수의 시야에 닿은 건 윤민이다. 액자를 보고 있는 윤수를 알아챘는지 사뭇 자조적으로 웃은 윤민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결국 봤구나. 내가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아버지하고 어머니 어릴 때 사진이지.”
“왜 오 회장하고 우리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이 집에 있는 거야.”
윤수의 질문이 순진하다는 양 윤민이 짧게 웃어보였다. 이내 사뭇 침착해진 윤민이 윤수가 들고 있던 액자를 천천히 밑으로 끌어내렸다. 냉랭한 공기가 흐르는 둘 사이의 공백을 나른하게 삼켜 대면서 윤민의 입술이 열렸다.
“이상하지 않아? 윤수야. 우리 아버지가 21살 때, 그리고 어머니가 20살 때. 처음 만난 대학생들이 바로 눈이 맞아서 임신하고 결혼을 했어. 이건 비정상적인 거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연결돼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야. 윤수야. 오승조하고 이세영은 남매였어.”
말도 안 된다. 순식간에 동공이 무뎌졌다. 눈앞에 있는 윤민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맥을 잃은 윤수의 얼굴이 바닥을 향했다. 자신이 뭘 들었는지가 뚜렷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온 몸의 세포가 터질 것처럼 진동한다. 현실이 아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쓰러질 것처럼 스르르 내려가는 윤수의 어깨를 쥔 채, 윤민이 확고하게 말했다.
“우월한 유전자를 보존하려면, 근친 교배밖에 답이 없었거든. 윤수야.”
42.
우월한 유전자는 보존해야 한다. 여느 불결한 핏줄과 섞일 여지를 최대한 차단하고, 가능한 한 동일한 유전자를 오랫동안 후손에게 전파해야 한다. 1800년대 초 일본의 이타노 가문은 이 같은 계획을 세웠다.
이타노 가문은 여느 일본인과 달랐다. 우월한 신체조건과 수려한 외모, 명석한 두뇌와 쉽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성품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남성들은 쉽게 곳곳의 요직을 꿰차며 사회를 아우르는 인물로 자리 잡았고, 여성들은 누구에게나 주목받는 매력적이며 현명한 존재로 성장했다. 단 하나,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정신병적인 기질만 제외한다면 그들은 완벽에 가까웠다.
우월한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외부 혈통과는 섹스하지 않았다. 최소한 사촌, 아니면 남매. 같은 혈통을 지닌 이들끼리만 교배했고 그 결과로 나온 아이들은 또 다시 같은 혈통을 지닌 자손들과 성교를 해서 후손을 낳았다. 처음에는 오래된 가족계획의 일환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아니라는 걸 그들도 알게 됐다.
역사적으로 근친상간이 금기시된 것에는 사회적 인식의 문제도 있지만 유전병의 계승을 막기 위한 부분이 컸다. 이타노 가문에는 몇 가지 정신병이 있었으며, 같은 혈통과의 반복적인 교배가 이어지면서 이를 유발하는 유전자는 갈수록 뚜렷해졌다. 그 정신병의 일부가 바로 근친에 대한 욕정이었다.
이타노 가문의 부계혈통 유전자는 모계혈통 유전자에게만 발정하고, 모계혈통 유전자는 부계혈통 유전자를 거스르지 못했다. 이 비정상적 기질은 대가 이어질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처음에 단순한 유전자 보존의 목적으로 근친상간이 일어났다면, 언젠가부터는 필요에 의해 근친상간을 행하게 됐다. 서로가 아니면 욕정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던 것이다.
1917년. 일본의 장교였던 이타노 슌지가 남매인 이타노 쿄코, 이타노 쇼코와 함게 조선으로 왔다. 그는 지금의 용산구 한남동에 커다란 땅 하나를 차지하고 집을 지었다. 집 한 가운데는 일본에서 가져온 소나무를 심었다. 조선에 자신들의 명성을 뿌리 내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나무였다.
이타노 슌지는 일본군치고는 제법 조선인에 호의적인 편이었다. 다른 이들이 조선인을 단순한 노예로 부렸던 것과 달리 그는 조선인들을 진정한 인간으로서 대할 줄을 알았다. 그의 눈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달았다. 굳이 이타노 가문이 일본에서만 뿌리를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어차피 같은 인간이라면, 국적이나 장소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이타노 가문의 우월한 유전자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걸.
그 무렵 조선인 오정훈을 알았다. 경성에서 제법 큰 규모의 상점을 운영하는 일반인이었다. 이타노 슌지와 오정훈은 술 몇 잔을 나눠 마시며 친밀하게 지냈다. 어느 날 이타노 슌지는 술김에 오정훈에게 이 가문의 비밀을 얘기했고, 오정훈은 큰 흥미를 보였다. 괜찮다면 자신이 그 기회를 누리고 싶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렇게 계획이 시작됐다. 이타노 슌지는 자신의 바로 밑 동생이었던 이타노 쿄코와 결혼했고, 또 다른 남매인 이타노 쇼코는 오정훈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후 이타노 남매 사이에서 나온 것이 이타노 미도리. 오정훈과 이타노 쇼코 사이에서 나온 것이 아들 오수헌과 딸 오수경이다.
이타노 미도리와 오수헌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쉽게 끌렸다. 이 가문의 피는 그리 많지 않은 양을 품어도 충분히 이타노 가문의 특수성을 그대로 반영했다. 백 년여에 걸쳐 근친 교배를 통해 집약된 유전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타노 미도리와 오수헌은 결혼한 뒤 한남동에 있는 이타노 가문의 집으로 이사했고, 이후 오인효를 낳았다. 그러던 중 1945년 조선에 광복이 찾아오면서 이타노 슌지는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갔고, 이타노 미도리는 저를 혼자 두고 간 아버지를 원망하다 자살했다.
한편 오수헌의 남매였던 오수경은 당시 촉망받는 군인이었던 장기조와 결혼했다. 그렇게 결혼해서 낳은 것이 딸 장유경. 오수헌의 아들 오인효는 장유경과 처음 만난 날부터 잠자리를 할 정도로 서로를 뜨겁게 욕정했다. 근친에만 반응하는 이타노 가문의 핏줄은 그 누구도 속일 수가 없었다.
오인효과 장유경은 딸 오수연과 오승조를 차례로 낳았다. 계획대로라면 이들을 그대로 결혼시키면 그만이었지만, 오수연은 낳을 때부터 몸이 너무도 허약해 언제 죽게 될 지 아무도 모를 상황이었다. 불안했던 오인효는 당시 자주 다니던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 이은아와 잠자리를 가지고 딸을 하나 낳았다. 바로 이세영이다.
이은아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했다. 이세영을 제 아버지 호적에 들이고, 어떻게든 오인효과 오승조 부자(夫子)로부터 떨어져 나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던 중 오수연이 오인효의 성폭행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 결국 오인효가 예상했던 것처럼 오승조와 이세영이 아니면 이 대를 이을 사람이 없는 상황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이은아는 고집스럽게도 이세영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겼다.
1989년.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오승조는 같은 대학 1학년생으로 입학한 이세영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들은 다섯 살이 되기 이전에 한남동 집에서 같이 살았던 적이 있지만, 워낙 어릴 때였으므로 서로를 기억하지 못했다. 첫눈에 반한 오승조는 제법 저돌적으로 이세영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세영 역시 그게 싫지 않았다. 알게 된 지 한 달 만에 잠자리를 가졌고, 거기서 아이를 얻었다. 아이가 생기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결혼하기로 합의했고, 만난 지 두 달 만에 이세영은 한남동에 있는 집으로 다시 발을 들였다.
이세영의 어머니 이은아는 이 사실을 알자마자 크게 절규하며 제 딸을 뜯어 말렸다. 이세영은 듣지 않았다. 딸에게 실망을 넘어 경멸감까지 느끼게 된 이은아는 완전히 이세영과 연락을 끊고 절연했다. 결과적으로 이세영에게는 이복 남매인 오승조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이세영은 오윤석과 오윤민을 낳았다. 가정이 꾸려졌지만, 이세영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한남동 집에 있는 내내 이어지는 오승조의 성고문은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세영은 갈수록 야위고 쇠약해졌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 이세영은 오승조에게 통보도 하지 않고 집을 나갔다. 다른 지방에 무작정 자리를 잡은 후 거기서 강현우를 만났다.
강현우는 겉보기에는 썩 잘생기고 성실한 청년이었지만 실상은 폭력적인 도박 중독자였다. 이세영은 그걸 알면서도 최소한 오승조보다는 강현우가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거한 지 몇 달 만에 아이를 낳았고, 그것이 오윤수다. 둘은 혼인신고가 돼 있지 않았다. 여전히 이세영이 오승조의 아내로 등록돼 있어서였다. 이세영은 강현우가 제 아버지 호적에 윤수를 올려 주길 바랐지만, 강현우가 거부했다. 기껏 낳은 아이가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하며 이세영이 초조해하던 와중에 오승조가 나타났다. 그는 이세영이 딱히 사정을 말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대뜸 윤수를 제 호적에 올렸다. 이타노 가문의 후손인 제 조카가 이름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은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오윤수는 그렇게 오승조 가문에 올라갔다. 윤수가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을 무렵, 이세영은 강현우에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세영이 오승조의 집에서 나오며 챙겨 온 재산의 대부분을 도박으로 탕진한 강현우는 이세영에게 빚까지 떠넘기려 했다. 이세영은 더 이상 이 상황을 참을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느 날 밤 이세영은 오윤수를 데리고 도망치 듯 다시 한남동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는 이세영에게 오승조는 억지로 섹스를 하면서 두 명의 아이를 추가로 낳았다. 오윤혁과 오윤성이 그렇게 나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들에게는 아직 딸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들과 교배해서 후손을 이을 딸이.
오랜 기간 딸을 낳기 위해 시도하던 오승조는 어느 날 임신을 하기 위한 섹스는 그만 두기로 했다. 물론 대를 이를 유전자는 필요했지만, 되지 않는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그는 그 무렵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이타노 가문의 모계혈통 유전자가 오로지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걸. 이타노의 부계혈통 유전자가 욕정 할 수 있는 대상이 이미 존재했다는 걸 안 것이다.
오윤수였다. 지나칠 정도로 이타노 가문의 여자들과 닮은 외형을 지닌. 남자임에도 이례적으로 이타노 여성들의 유전자 상당수를 보존한 유일한 존재.
오승조는 아이를 낳지 않는 대신 섹스를 위한 섹스를 이어갔다. 그 자기중심적이면서도 가부장적인 면모를 이기다 못해 이세영은 끝내 고문실에서 스스로 제 자궁을 훼손하고 집을 떠났다. 오윤수를 안고 다시 돌아온 집에서 강현우는 완전히 폐인이 돼 있었다. 이세영은 그 곳에서도 고통 어린 삶을 살았다.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강현우는 툭하면 이세영을 폭행했고, 이세영은 그 와중에 오윤수만은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오윤민은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핏줄도 아니고, 전혀 자신과 상관도 없는 사람이 제 어머니와 형제를 괴롭히는 것이 지독히도 거슬렸다. 아버지인 오승조에게 얘기해서 결국 강현우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모자(母子)는 한남동 집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강현우가 병원에 입원한 후 이세영은 극도로 신경질적이 됐다. 틈만 나면 집 안의 물건을 부수었고,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흐느끼다가 새벽이 돼서야 깜빡 눈을 감는 일이 많았다. 오윤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세영의 이 같은 히스테릭한 성미를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참았다. 제 어머니이기 때문이었다. 참고, 견디고, 이겨 내던 세월이 15년을 넘어섰다. 이세영은 여전히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다. 그건 이타노 가문의 여자들이라면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질병이기도 했다.
오윤수가 24살이 되던 해의 어느 여름.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집 천장에 목을 맨 채 허우적대는 자신의 어머니를 봤다.
“윤수야. 이제 기억 나?”
윤수의 볼에 손을 올리며 물어오는 목소리가 다정하기 그지없다. 입술을 굳힌 채 서 있던 윤수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려온다. 윤수의 어머니 이세영. 윤수가 어릴 때부터 수없이 신경질과 짜증과 폭언을 일삼던 안타까운 존재. 윤수에게 수많은 트라우마를 안긴 존재. 윤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저 죽었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싶었다. 아버지 강현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죽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이제는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정말 몰랐니? 잊었던 어머니의 질문이 또 다시 머릿속을 채워왔다. 네, 몰랐어요. 윤수는 또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상적인 삶이 불가능할 지도 몰랐으니까. 하염없이 과거에 늪에 사로잡혀 아예 잠식될지도 몰랐으니까. 살기 위해 그랬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너도 사실 필요했던 거야. 너희 아버지, 너희 어머니가 그렇게 되는 걸. 아니야. 윤수야?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새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엷게 웃은 윤민이 윤수의 몸을 끌어안았다. 차분하게 어깨를 쓸어내린 뒤 손을 들어 윤수의 턱을 쥐었다. 자신을 향해 들춘 채로 시선을 맞췄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 봐.”
“아니야.”
“아니야? 표정은 다른 것 같은데.”
윤민의 입가에 실리는 미소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정말 즐거워서 비치는 미소. 한동안 웃음을 머금던 윤민이 눈가가 서서히 굳어갔다. 무표정한 얼굴이 윤수의 입가에 입을 맞췄다. 떨어져 나간 윤민의 동공이 갓 일식에 들어간 달처럼 뚜렷했다.
“윤수야. 너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너는 우리 가문의 일부야. 심지어 너는 남자로서 이례적으로 모계혈통 유전자를 갖고 있고.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며 아버지가 다 너한테 발정하는 거야. 우리들은 너 아니면 성욕을 가질 대상이 없거든.”
“개소리야. 이거 다.”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우리한테 반응해. 아직도 모르겠어?”
입 밖으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잊기 위해 노력했던 긴 세월이 뒤늦게 펼쳐진 페이지처럼 윤수의 머릿속을 엄습했다. 오윤민. 아주 어릴 때 지내던 한남동 집에서 가장 자신에게 잘 해줬던 형제. 윤수는 사실 어렴풋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하의 고문실에서 오 회장에게 맞는 어머니를 보고난 뒤 거실에 올라오면 언제나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윤민은 풀이 죽은 윤수를 식탁에 앉혀 놓고 초콜릿이나 사탕과 같은 단 군것질거리를 입에 넣어줬다. 자신을 위로하는 다정한 존재를 보면서 윤수는 종종 생각했다. 형은 엄청나게 잘 생겼다고.
14살, 윤민을 재회했을 때 윤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잊었던 세월만큼 훌쩍 자란 그를 보면서 과거와 같은 감상을 떠올렸다. 정말 잘 생겼다고. 24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어머니의 유언장 대변인이라며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기억이 구깃구깃 접혀 들어간 와중에도 윤수는 윤민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되풀이했다. 저 사람이 매력적이라는 걸.
오윤석, 오윤혁, 오윤성. 그리고 오 회장. 마찬가지다. 강제로 자신을 취하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천천히 그들에게 젖어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처음부터 그들의 욕정에 익숙했던 몸인 양 외면하는 게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형제들에게는 형용할 수 있는 애틋한 감정까지 품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오윤석을 위해 모진 말로 그를 밀어냈고, 선뜻 경계선을 허무는 오윤혁의 태도에 은연중에 기뻐했으며, 폭행당하기 직전인 오윤성을 위해 오 회장에게 맞섰다.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는 핏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난 이 집안사람 아니라고.”
동공 끝까지 물기에 젖은 윤수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사뭇 안타깝다는 윤민의 시선이 가까워졌다. 느릿하게 윤수의 머리를 어루만진 윤민이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흘러나오는 말은 피아노 건반을 탄 멜로디처럼 매끄럽기 짝이 없었다.
“윤수야. 부정해도 소용없어. 넌 우리 집안사람이야. 우리 집안 남자들한테 욕정하고, 반응하는 게 당연해. 그리고 쓸모없다고 판단했을 때 너희 아버지나 어머니를 외면하는 것도 당연한 거고. 원래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금방이라도 악을 쓸 것처럼 뱉는 말에 윤민이 살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이러는 윤수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윤수의 입술을 어루만진 윤민이 살짝 몸을 끌어내리고는 시선을 맞췄다. 윤수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던 입술이 나직하게 열렸다. 너, 그 때 집에 갔을 때. 어머니 살아 계셨었잖아. 근데 왜 그냥 죽게 놔뒀어?
질문을 맺은 윤민의 입가에 잔잔한 호가 걸렸다. 윤수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뇌리에서 지우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기억. 눈물이 맺힌 채 발버둥 치던 어머니. 살려 달라던 어머니. 윤수는 그걸 외면했었다. 지금의 어머니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으니까. 일 년 내내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웃자란 움파처럼 메말라가는 어머니를 보는 게 힘들었다. 그럴 거면 아예 세상과 등을 지는 게 나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에게나 윤수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양 눈꺼풀이 반쯤 감긴 채 거칠게 호흡하는 윤수의 목덜미를 윤민의 손길이 온기 있게 쓸어 내렸다. 귓가에 따스한 음성이 닿았다.
“윤수야. 피는 못 속이는 거야. 응?”
42.5 그 날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고 생각한다.
어우, 시끄러워. 진짜. 학보사 문을 열고 들어선 윤수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안에서 다른 후배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던 성훈이 고개를 들었다.
“야. 이거 우리 쯔위 신곡이야. 그냥 들어.”
“시끄러우니까 끄라고.”
“아. 새끼 겁나 까다롭네.”
혀를 한 번 찬 성훈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학보사 벽에 걸린 TV 채널을 돌렸다. 채널이 바뀐 화면에 걸린 것은 24시간 보도채널이다. 러시아 광물회사, 한국-미국-러시아 연결하는 3자 광물사업 추진 나서. 헤드라인 위에 펼쳐진 화면을 응시했다. 정장 차림의 잘생긴 중년 남성이 인자하게 웃으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장면이 비친다. 명패에 새겨진 이름. 회장 오승조. 귓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떼어낸 윤수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러시아 회사인데 왜 회장이 한국인이야.”
“몰라. 법인만 거기에 있나 보지.”
“돈 세탁까지 하면서 엄청 벌었겠네. 자식들은 좋겠다.”
심드렁하게 한 마디 뱉은 윤수가 자리에 앉았다. 또 다른 귓가를 만져보는데, 없다. 나머지 한 짝의 블루투스 이어폰이. 젠장. 불만스럽게 읊조리는 윤수의 눈치만 살피던 후배들이 이내 왁자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 새끼들은 떠들려고 여기 왔다 갔다 하나. 한숨을 쉬며 두 눈을 감은 윤수의 귓가에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윤수 선배. 방긋방긋 웃으면서 들어온 건 키가 작고 예쁘장한 생김새의 여자 후배였다. 채나연. 다음 대권 주자인 국회의원 채종욱의 딸. 학교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인물이었다. 예쁘고, 집안 좋고, 성격 좋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연과는 교내 언론반 스터디모임에서 만났다. 윤수는 신문기자를, 나연은 아나운서를 지망하고 있었다. 알게 된 지 며칠 만에 덜컥 나연이 고백을 해왔다.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예의 있게 거절했다. 매력적인 애지만 윤수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대로 깔끔하게 돌아설 줄 알았는데, 틀린 판단이었다. 이후에도 종종 티가 날 정도로 윤수의 주변을 맴돌면서 친근하게 굴었다. 나연이 윤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일부 학교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것이었다. 오윤수가 그렇게 대단해? 몇몇 남자선배들이 언짢아하며 그런 말을 했다. 사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윤수 자신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매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선배. 이거 드세요.”
“뭔데.”
“마카롱이요. 아까 가로수길 들렸다가 사왔어요.”
“야. 난 안 주냐.”
옆에서 비뚤게 앉아있던 성훈이 한 마디 하자 바로 나연이 생글거리면서 재빠르게 다가갔다. 당연히 선배 것도 준비했죠. 학보사 사람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먹을거리를 늘어놓는 나연을 보면서 성훈을 비롯한 사람들이 시끄럽게 환호했다. 저런 걸 보면 제법 고단수다. 넘어가지 않는 남자가 드물 거다. 심상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뒤적여 꺼냈다.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 하나가 액정에 떠 있었다.
-윤수야. 학교니? 잠깐 집에 올 수 있을까.
아침에 학보사 일 때문에 늦게 갈 거라고 한 것 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살짝 눈살을 일그러뜨린 윤수가 답장하는 것조차 무시한 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앞에서는 까르르 웃으면서 성훈의 어깨를 가볍게 쳐대는 나연이 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했다. 윤수가 한결같이 거부반응을 보이는 걸 알면서도 꾸준하게 학보사에 찾아오지 않나, 그 와중에 학보사의 다른 사람에게까지 능숙할 정도로 친밀하게 대하지 않나.
나연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윤수는 도통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때의 여자친구나 박채영도 간신히 사귄 편이었다. 스스로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외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 있었다.
어. 저 분 알아요. 성훈으로부터 막 팔을 떼어 낸 나연이 TV를 가리키면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 성훈과 후배들의 시선이 동시에 TV를 향했다. 보도채널에서는 아까의 뉴스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오 회장님이요. 우리 아버지랑 친하시거든요.”
“너희 아버지 정도면 없는 인맥을 찾는 게 더 힘들지 않냐.”
“저 분도 대단하세요. 그리고, 그 집 오빠들이 진짜 너무너무 잘생겼거든요. 저 어릴 때 일부러 오빠들 보러 저 집 놀러가고 그랬는데. 한남동에 엄청나게 큰 집이 있는데, 그게 회장님 집이에요.”
말을 마친 나연이 티 없이 웃어보였다. 쳐다보던 성훈의 얼굴에 그저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실렸다. 살짝 윤수 쪽을 응시한 성훈이 툭 말을 던졌다.
“그럼 그 너무너무 잘생긴 오빠들이나 꼬시지, 왜 윤수한테 와서 그래.”
“그 오빠들 눈이 얼마나 높은데요. 저한테는 관심도 없으세요.”
“대한민국에서 너한테 관심 없는 남자도 있냐.”
“저기도 하나 있는데요, 뭐.”
옆에 있던 남자 후배가 조심스럽게 윤수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후배들과 성훈, 나연의 시선이 동시에 윤수 쪽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고개를 든 윤수가 그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나연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야, 채나연. 너 그만 가 봐라. 지금부터 학보사 바빠.
잠시 서운한 표정을 지어보인 나연이 활짝 입을 열었다. 내일 또 와도 되죠? 제법 애교 있게 던지는 질문이 천진하기 그지없다. 하. 짧게 숨을 내쉰 윤수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응수했다. 네 맘대로 해. 그 반응이 뭐가 재미있었는지 나연이 한동안 깔깔대며 웃었다.
내일 또 봐요, 선배님. 해맑게 인사한 뒤 학보사 밖으로 나서는 나연을 보며 성훈이 길게 혀를 찼다. 왜, 뭐가 문제인데. 살짝 얼굴을 찡그린 윤수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했다. 한탄 섞인 성훈의 말이 윤수의 귓가에 닿았다.
“저렇게 완벽한 애가 왜 너를 좋아할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다 고통스럽다.”
“죽고 싶냐.”
“박채영은 뭐라고 안 하냐? 쟤 저러고 있는 거 알면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
“다행히도 박채영이 저 존재를 모른다.”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윤수의 귓가에 다시금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액정을 보니 또 어머니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윤수야. 할 말 있어.
별일이었다. 집에 있을 때의 어머니가 종종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경질적인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밖에 나와 있는 윤수에게 이렇게까지 귀찮게 군 적은 드물었다. 고민하던 윤수의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성훈이 물어왔다. 야, 뭐야. 채나연 만나러 가냐?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 보인 윤수가 학보사 문을 빠르게 젖혔다. 집에 좀 가 봐야 할 것 같아.
버스를 타고 집에 다다르자마자 입구에서 보인 건 고급 외제 세단이었다. 이런 걸 타는 아파트 주민은 윤수가 알기로 없었다. 짧게 눈으로 훑고 지나치려다가 그 차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덩치 큰 남자와 절로 눈이 마주쳐졌다. 워낙 사납게 생겨서 윤수를 보자마자 시비라도 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당황한 얼굴로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일별하고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뒤 12층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대뜸 정장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윤수와 어깨를 부딪쳤다. 아. 짤막하게 내지른 소음에 남자가 곁눈질로 윤수를 봤다. 듣기 좋은 저음의 사과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니에요, 됐어요.”
남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윤수 입장에서 이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대로 무시한 채 바깥으로 나와 집 현관 앞에 섰다. 비밀번호를 누르고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닫힐 뻔 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하. 윤수가 들어갔던 현관을 응시한 윤민의 입술이 짧게 열렸다. 많이 컸네, 그 새.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민이 천천히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수시로 직원을 시켜서 사진을 확인하고 있긴 했지만 성장이 더딘 편인지 24살이 된 최근 들어서도 계속 크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키는 이제 안 크는 것 같은데, 얼굴이 변하나. 현관문을 지켜보던 윤민의 발걸음이 로비 끄트머리를 향했다.
반만 열려 있는 창문을 끝까지 열어젖힌 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자 희뿌연 연기가 눈앞에서 흐드러졌다. 밑으로 보이는 주차장에서 세단에 기대고 있던 로펌 직원이 윤민을 알아보고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담배 끄트머리에 닿아 있는 윤민의 손가락이 점점이 재를 떨궜다. 아직 어머니는 죽지 않았을 거다. 목을 맨 지 1분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이니까. 지금 윤수가 들어간다면, 스스로 어머니의 목에 매여 있는 줄을 풀어서 해결할 가능성이 크다. 윤민의 미간이 지그시 구겨졌다. 이러면 계획이 뒤틀리는데.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뱉은 윤민이 보다 힘있게 담뱃대를 어루만졌다. 툭 소리와 함께 하얀 재가 떨어져 내려갈 때마다 윤민의 눈가가 점점 더 찌푸려졌다. 입 밖으로 나직하게 세 글자가 흘러나왔다. 오윤수.
현관 너머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점점이 눈발이 흩어져가는 설원처럼 평온하기만 하다. 왜 소리가 없지. 보다 생각이 많아진 시선으로 창밖의 허공을 훑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뚜렷한 태양 하나가 걸려 있다. 한없이 고요한 하늘이었다. 집게손가락으로 담배 끝을 매만지는 윤민의 얼굴에 짙은 상념이 드리워졌다. 왜 오윤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시계를 확인했다. 3분이 지났다. 3분. 목숨이 끊어지기에 충분한 시간. 여전히 현관 너머는 조용하다. 아무 일 없는 일상의 공간처럼. 밑에 있던 직원이 손을 휘휘 저어가며 윤민에게 빨리 내려오라는 듯한 신호를 건넸다. 여유 있게 웃어 보인 윤민이 다시 입가에 담배를 가져갔다.
하얗게 타들어가던 담배 끝과 입술 사이의 간격이 부쩍 줄었다. 현관 너머에서는 끝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길게 숨을 삼킨 윤민의 입가에 엷은 호가 맺혔다. 꽁초만 남은 담배를 창틀에 천천히 비벼대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고개를 돌려 현관이 있는 쪽을 봤다. 침묵에 감싸인 두터운 문이 펼쳐지지 않는 책자처럼 적막하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오롯하게 혼자서 묻고 싶다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 윤민의 손가락이 밑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차분한 윤민의 발걸음이 안을 향했다. 스르르 닫히는 문 사이로 현관을 보면서 윤민이 허탈하게 웃었다.
윤수야. 너는 항상 내가 계산한 것을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엔 나와 같은 것을 택하고 마는구나.
43.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회색을 띤 고문실의 천장이었다. 저도 모르게 기절했던 모양이다. 느릿하게 숨을 가누면서 고개를 숙여 하반신을 봤다. 허벅지에 둘러진 하얀 붕대가 또 새 것으로 바뀌어 있다. 저번보다 왠지 좀 더 상처가 아문 것 같은 기분이다. 붕대를 풀어 확인해보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염없이 벽이 있는 쪽을 읽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된 이 공간에는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이 며칠인 지는 물론이고, 낮인지 밤인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문득 위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게 내려오는 실루엣이 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습을 드러낸 건 윤혁이다. 깨있는 윤수를 확인한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지금이 며칠이야.”
“네가 이 집에 다시 온 뒤로 시간이 좀 흘렀어.”
“그래서 며칠이냐고.”
보다 힘을 줘서 물어오는 윤수의 말에 윤혁이 난감하다는 듯 짧은 숨을 터뜨렸다. 대답하는 대신 가까이 다가온 윤혁이 물었다. 안 추워? 대답하지 않았다. 춥고 안 춥고를 분간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머릿속이 텅 비어있었다. 벌거벗은 윤수의 몸을 한동안 내려다본 윤혁이 테이블에 올려져있는 옷을 챙겨왔다. 완전히 기운 빠진 몸으로는 옷조차 입기가 어려워, 윤수는 제 무릎 위에 놓인 옷가지를 한참 동안 쳐다만 봤다.
입는 거 힘들어? 내가 도와줄게. 속옷과 바지부터 챙겨 윤수의 다리가 있는 쪽으로 가져가는 윤혁을 보며 윤수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오윤혁. 잠시 멈춰있던 윤혁의 고개가 스르르 들려졌다.
“며칠이냐고 물었잖아.”
“일주일 정도.”
“일주일이라고.”
하. 입 밖으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주일. 혀와 허벅지의 상처 때문에 기절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이 저주받은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혼절하고. 그렇게 침대 위에 누워서 숨만 쉰 것이 일주일이라고. 허망하게 앉아있는 윤수의 다리 사이로 속옷을 끌어올리면서 윤혁이 입을 열었다. 홍 선생님이 주기적으로 치료도 하고 영양제도 놔 줘서, 몸 상태가 아주 나쁘지는 않을 거야. 물론 평소보다 기력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거짓말이다. 평소보다 기력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력이 없는 수준이었다. 물에 젖은 나무둥지처럼 무력하게 윤혁에 기댄 채 그의 손을 따라 끌어올라오는 옷가지를 봤다. 자신의 옷이고, 입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인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나같이 모두 남의 것인 것 양 느껴졌다.
옷을 다 챙겨 입은 후에도 윤수는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침대 위에 앉아만 있었다. 윤민으로부터 들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 거대한 그물처럼 온몸을 단단하게 휘감고 있었다. 이타노 가문, 모계혈통 유전자, 어머니와 아버지. 맥없이 지탱하던 머리의 내면에서 윤민이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윤수야. 이건 네가 선택한 거야.
선택. 맞다. 윤수가 선택했다. 스스로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아는 것을 택한 건 윤수였다. 그 때는 몰랐다. 이 정도로 잔인한 것일 줄은. 그렇게나 증오하던 오승조 가문의 남자들과 자신이 같은 핏줄을 지녔다는 것이 진실이었을 줄은. 그런 것이었다면 알지 말 것을 그랬다. 무의미한 후회라는 걸 알면서도, 윤수는 몇 번이나 그 생각을 반복해서 했다.
여기 답답하지. 나갈까.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윤수를 향해 윤혁이 차분하게 물어왔다. 답답한 것도 사실이고, 나가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을 나간다 해도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오윤수가 그 저주받은 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 생각에 얽매여 있는 한 윤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의지를 절로 잃게 된다.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생각하는 것조차. 한동안 윤수를 응시하던 윤혁의 손길이 그 우울한 머리통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아귀가 다소 쓰리게 느껴졌다.
불현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계단 위의 문이 열렸다. 윤혁과 윤수의 고개가 동시에 그 쪽을 향했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온 홍 선생의 얼굴에 경악감이 실려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이고. 이걸, 이거를 어떻게 해.”
“왜 그러시냐고요.”
벌떡 몸을 일으킨 윤혁을 보면서 홍 선생이 한동안 얼굴 근육만 떨어댔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입술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전무님, 자살 했어.
홍 선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혁이 계단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위층을 향해 빠르게 올라가는 발소리가 윤수의 귓가에 비현실적인 여운을 남겼다. 윤혁을 따라 홍 선생도 위로 올라가 버리고, 지하실에는 윤수 홀로 남았다. 망연히 시트를 향하고 있던 윤수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실존했던 언어인지가 자꾸만 의심스럽다.
오윤석이 자살을 했다. 자신의 곁에 있으라는 그를 냉정하게 뿌리치고 용산의 아파트를 떠나온 지가 일주일. 그 일주일 사이에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빠르게 일그러지는 물결처럼 윤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오윤석은 답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죽은 게 맞다면, 답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가 살아있다 해도 윤수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할 것이다. 차마 그 답을 열어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비틀거리는 윤수의 몸이 계단이 있는 쪽을 향했다. 작은 계단을 하나씩 밟아가며 올라가다 보니 가장 위쪽에 있는 문이 나타났다. 무겁게 밀쳐 내고는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오랜만에 접하는 햇살이 두 눈을 아릿하게 적셔왔다. 잠시 감았다가 뜬 시야에 커다란 소나무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울창한 나뭇가지에 걸린 단단한 밧줄. 그 밧줄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남성의 몸. 오윤석.
다리의 힘이 차츰 풀려갔다. 그대로 주저앉은 윤수의 귓가에 윤혁과 홍 선생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발견한 거예요. 나도 방금 봤어, 이미 상황 끝났어. 절망적으로 말을 쏟아내던 홍 선생이 부리나케 다시 집 안을 향했다. 사다리를 가져온 홍 선생이 나무에 대고 위로 올라갔다. 윤석의 목덜미에 걸려있는 줄이 가쁘게 칼로 베어져갔다. 쿵. 줄이 끊어지자마자 몸이 떨어지는 소리가 두텁게 정원을 적셨다. 윤수의 고개가 느릿하게 나무쪽을 향해 들려졌다. 분명히 이제는 줄만 남았는데, 여전히 그곳에는 윤석의 몸이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뭐예요? 태연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윤성이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개운한 얼굴이다. 잠시 나무 밑을 눈으로 살피더니,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윤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윤수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려주면서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하, 진짜 저 형도 참. 우리 윤수 형 겁나게 왜 저런 짓을 했데. 윤수는 반응하지 않았다.
괜찮아, 형. 안 좋은 기억은 빨리 잊어야지. 살짝 윤수의 볼에 입을 맞춘 윤성이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무쪽을 보는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다. 한동안 그 얼굴을 쳐다보던 윤수가 사뭇 차갑게 질문을 던졌다.
“너, 알고 있었지.”
“응? 뭐를.”
“봤지. 윤석이 형 자살하는 거. 나하고 윤혁이는 지하실에 있었고, 홍 선생이 머무는 손님방에서는 정원이 안 보여. 네가 있는 방에서는 정원이 보이잖아. 그럼 분명히 봤을 거 아냐. 정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딱딱하게 내뱉은 말에 윤성의 고개가 스르르 윤수 쪽으로 돌아갔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윤수를 향해 빙긋 웃은 동생이 몸을 숙였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난 윤성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응. 봤어. 근데 윤석이 형이 결정한 거잖아. 내가 어떻게 말려.”
“네 친형이야. 친형이 자살했다고.”
“그래서. 친형이면, 무조건 말려야 해?”
“너, 이것도 재미있자고 그런 거야?”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건네는 말에 윤성이 픽 웃었다. 매끄러운 윤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윤성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싫으니까, 윤석이 형이. 윤수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낸 윤성이 긴 한숨을 쉬었다. 살짝 일그러진 눈가에 날연함이 걸려 있다. 언젠가의 불쾌한 기억을 곱씹는 듯한 얼굴. 윤석이 형이 형 데리고 이 집에서 완전히 나가려고 했잖아. 그래서 싫어. 문득 거세게 불어 닥친 바람에 커다란 나뭇가지들이 빠르게 일렁였다. 나뭇가지끼리 부딪히는 거친 소리에 그만 귀가 멀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지가 뭔데, 윤수 형을 나한테서 떨어뜨리려고 해. 다시 몸을 일으키는 윤성의 실루엣이 태연하기 그지없다. 윤수의 아랫입술이 점점 더 빠르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지 그 이유로, 제 형이 죽는 걸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했다는 거다. 그저 윤석이 윤수를 데리고 이 한남동 집에서 떠나려 했다는 것 때문에. 절망 섞인 한숨이 윤수의 목구멍을 적셨다. 이애는 완전한 이타노 가문 사람이었다.
문득 입구에서 긴 소음을 울려대며 구급차와 경찰차가 차례로 들어섰다. 나무 앞에 멈춰 서자마자 차 안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 나와 윤석의 시신이 있는 쪽을 향했다. 구급대원들은 윤석을 들 것에 올려 구급차 안으로 데려가고, 경찰들은 홍 선생과 윤혁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대기 시작했다. 문득 경찰 한 명이 윤수와 윤성 쪽을 보면서 큰 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그 쪽도 가족분들이세요?”
“네. 동생이요.”
“이 쪽으로 좀 와보세요.”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윤성을 향해 경찰이 손짓을 했다. 지체하지 않고 다가간 윤성에게 경찰이 팔짱을 낀 채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상냥한 얼굴로 대답하는 윤성의 입가에 드러나지 않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불청객들은 그리 긴 시간 머물지 않고 현장을 벗어났다. 경찰차는 윤혁과 윤성, 홍 선생을 태워갔다. 넓고 고즈넉한 정원에 윤수만 홀로 남았다. 또 다시 거칠게 이는 바람을 타고 커다란 나뭇가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쉼 없이 뱉어졌다. 듣고 있으니, 꼭 비명소리 같았다.
꽤나 시간이 흘렀다. 정원 입구에서 익숙한 차 한 대가 스르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널찍한 주차공간에 다다라 멈춘 차 안에서 윤민이 나왔다. 적막한 시선으로 나무가 있는 쪽을 보고는, 주저앉아 있는 윤수를 향해 차분하게 걸어왔다.
“왜 여기에 있어. 날도 추운데.”
“윤석이 형 자살했어.”
“응. 알아.”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한마디 한 윤민이 윤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잡아야 하는 걸까. 바닥에 딛고 있던 손이 조금씩 웅크려들었다. 이 가문의 모계혈통을 지닌 사람이라면, 저 손을 잡는 게 맞을 거다. 부계 혈통에 끌릴 수밖에 없는 유전자. 윤수는 그걸 타고 났다. 그러나 윤수는 좀처럼 그러고 싶지가 않다. 자신이 이렇게 태어났다는 걸 믿고 싶지 않다.
“윤수야. 안 일어날 거야?”
“혹시, 윤석이 형도.”
“윤석이 형이 왜.”
“형이 그렇게 만든 거야?”
힘없는 질문을 듣고 난 윤민의 입가에서 짧은 헛웃음이 터졌다. 소리 없이 웃고 난 윤민이 보다 윤수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눈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머물러 있다. 진짜 큰일났네, 너. 이젠 뭐만 일어나면 다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윤수의 떨리는 시선이 윤민의 태연한 얼굴에 맺혔다. 그야, 형이. 뭔가 말하려는 윤수의 어깨를 윤민이 차분하게 다독였다.
윤수야. 형 나쁜 사람 아니야. 다정하게 한마디 한 윤민이 지그시 윤수를 바라봤다. 검게 빛나는 동공에 진심이 담겨 있다. 차마 그걸 마주하기가 어려워, 윤수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완전히 윤민으로부터 돌아선 윤수의 귓가에 윤민의 손가락이 찾아들었다. 부드럽게 그것을 매만지고 난 윤민이 사뭇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어쩌면 윤석이 형은 네가 죽였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윤석이 형 외면했잖아. 기껏 너 데리고 이 집에서 도망치려고 한 사람을, 네가 버렸잖아.”
“그거는 형이 윤석이 형 애 데리고 협박했으니까.”
“아니. 내가 협박하지 않아도 너는 다시 이 집에 왔을 거야.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죽였는지 알고 싶어서? 그것도 답은 아니야. 넌 그냥 왔을 거야. 이곳에.”
아니야. 희미하게 말을 뱉은 윤수의 눈동자가 빠르게 떨려갔다. 하. 윤민의 입가에서 의미심장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몸을 돌린 그의 시선이 집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온 정원이 정적에 휩싸인 듯 조용했다. 바람이 멎은 탓에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다물려 있던 윤수의 입술이 다소 분기를 담아 열렸다.
“아니야. 그럴 일은 없어.”
“왜 윤수 너는 내가 진실을 말해도 항상 부정을 할까. 넌 사실 이 집을 좋아해. 왜냐고? 네가 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안에 있으니까.”
“제발. 그딴 말 좀 하지.”
성난 소리를 내지르는 윤수의 팔을 불쑥 윤민의 손아귀가 잡아챘다. 강제로 윤수를 일으켜 세운 윤민이 분연히 나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밧줄이 눈에 띄었다. 순식간에 경직된 윤수가 어떻게든 몸을 세우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줬다. 기운이 없는 탓에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가차 없이 잡아당기는 윤민의 손아귀에 맥없이 몸이 이끌려갔다. 완전히 나무가 있는 쪽까지 끌고 온 윤수의 몸을 윤민이 빠르게 기둥이 있는 쪽에 밀어붙였다. 거칠한 표면이 칼날처럼 윤수의 등을 압박해왔다.
“너는 윤석이 형보다 나를 더 원해. 내가 형보다 부계혈통 유전자가 더 강하니까. 네가 윤석이 형을 거부해서 형이 자살을 택한 거고. 너 때문에 이혼까지 한 사람을, 네가 버린 거야. 이게 진실이야. 왜 이걸 인정하지 않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어떻게 믿어. 그리고 난 형 좋아한 적 없어.”
“그래? 그럼 스스로 확인해 봐.”
불현듯 윤수의 허리 쪽으로 윤민의 손아귀가 다가왔다. 다소 거칠게 버클을 풀어 내린 윤민의 시선이 서늘하게 윤수를 훑었다. 나한테 욕정하는지 어떤지, 네 몸이니까 네가 판단해.
44.
나뭇가지를 타고 또 다시 거센 바람이 인다.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솔 향이 의식을 마비시킬 것처럼 무섭게 엄습해온다. 형. 바지를 끌어내리는 윤민의 손아귀를 윤수가 절박하게 부여잡았다. 지금 여기서 하면 안 된다. 손톱이라도 파고 들 것처럼 힘이 들어간 손가락을 보며 윤민이 딱딱하게 말했다.
“왜 이래, 형한테 발정하는지 확인 좀 해보겠다는데.”
“못 해. 여기서 못 해. 방금 윤석이 형이 여기서 죽었는데. 어떻게.”
“왜. 윤석이 형한테 죄책감 느껴서?”
비소를 머금은 윤민이 반쯤 벗겨 내린 바지에서 손을 떼어낸 채 윤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부드럽게 그것을 쓸어내리기를 잠시, 이내 우악스럽게 기둥을 향해 윤수의 어깨가 밀쳐졌다. 입 밖으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바지와 속옷이 발목까지 끌어내려졌다. 힘이 실린 손아귀가 윤수의 어깨를 무너뜨릴 것처럼 기둥에 갖다 붙였다. 거칠한 나무 표면에 살을 엘 것만 같았다.
말 해, 어느 쪽이야. 나한테 발정할까봐서야. 윤석이형한테 죄책감을 느껴서야. 윤수의 입 밖으로 망연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윤수 입장에서는 결국 자신이 윤민을 원해서 윤석을 버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지독히도 남을 잘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굴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기운이 없는 와중에 머릿속까지 빠르게 무거워지는 통에 윤수는 온몸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완전히 녹아버리기 직전의 자신을 가누기 위해, 윤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쥐어짜는 것처럼 말을 뱉었다.
“할 테면 해 봐. 어차피 난 형하고 하는 자는 거 하나도 안 좋으니까.”
완전히 윤민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한 말이었다. 얼굴을 본 채로는 차마 할 수 없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사실 윤수는 자신의 몸을 자신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윤민과 섹스 했을 때 온 하반신을 휘감았던 오싹한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것처럼 자릿한 자극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높았다.
매번 거짓말만 골라하는구나, 넌. 지나칠 정도로 평소와 다르지 않은 톤으로 읊어오는 얘기와 함께 뒤편에서 윤민이 버클을 풀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 귓바퀴가 따끔해지는 것만 같았다. 윤민의 손아귀가 걸쳐진 어깨가 바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윤민의 차가운 손아귀가 윤수의 허리 쪽을 향했다. 단단하게 감싸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윤수의 엉덩이 사이를 벌려대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젖은 것처럼 축축하게 느껴졌다. 기둥을 짚고 있던 윤수의 팔에 절로 힘이 실렸다. 완전히 굳어 있는 윤수를 알아챘는지, 혀를 찬 윤민이 윤수의 귓불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사뭇 묵직한 명령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힘 빼고, 다리 더 벌려.”
“형. 잠깐, 잠깐만.”
“아까는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왜 갑자기 이래.”
피식 웃은 윤민이 윤수의 귓불을 살짝 입에 머금었다. 사탕을 빨아대는 것처럼 통통한 살집을 더운 혀가 음미했다. 윤수의 목덜미가 짧게 떨리는 것과 동시에 굳어 있던 어깻죽지가 스르르 풀어졌다. 허리를 끌어안은 윤민의 팔뚝에 좀 더 힘이 실렸다.
엉덩이 사이가 보다 사납게 벌어지고, 흠칫한 윤수의 허벅지가 안쪽으로 움츠러들었다. 더 이상 좁히지 못하게끔 딱딱한 윤민의 손가락이 붕대에 감겨있는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순식간에 허벅지가 파들거렸다. 형, 아파. 절박한 애원은 단호하게 무시당했다. 벌어진 엉덩이 틈으로 성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둥을 딛고 있던 윤수의 손아귀가 바르르 떨면서 정처 없이 거칠한 표면을 맴돌았다. 느릿하게 들어가는데도, 거세게 채워지는 밀물처럼 점막을 점령하는 느낌이 생생했다. 어떻게든 소리를 참으려고 질끈 깨문 아랫입술이 터질 것만 같았다.
거 봐, 어차피 좋아하잖아. 귓가에 닿는 윤민의 조롱에 뛰고 있던 심장이 움켜쥐어지는 것만 같았다. 비었던 공간에 들어찬 발기한 음경이 뱃속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내벽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런 와중에도 하반신의 세포가 하나씩 간질거리며 일어나는 느낌이 절망적이었다. 저번과 같았다. 어쩌면 저번보다도 반응 속도가 더 빨랐다.
하아. 완전히 기둥에 팔뚝을 기댄 채로 숙여진 고개에서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형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몸이 이렇게 되고 있다. 그런 동생을 확인시킨답시고 형이라는 사람은 강제로 발기한 성기를 박아대고 있다. 짐승보다도 못한 짓거리였다.
그런데도 가장 싫은 것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후회였다. 정말로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자신의 성기를 일으킬 것처럼 하반신을 엄습해오는 희열감에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었다. 고집, 괜히 부렸는지도 모른다고.
불현듯 안쪽 끄트머리까지 윤민의 성기가 쑤셔넣어졌다. 뱃속이 뚫릴 것 같은 기분에 절로 허리가 무너져 내렸다. 아, 형. 뜨거운 숨을 터뜨리고 난 고개가 위를 향해 들렸다. 얼굴 숙여대지 말고, 소리 제대로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윤민이 단호하게 지시했다. 단단한 팔뚝이 윤수의 허리를 옭매는 것처럼 거칠게 조여 왔다.
내벽 깊숙한 지점까지 들어갔던 성기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다시금 뱃속을 장악하고, 또 다시 반복. 배려 없는 삽입이 이어질 때마다 고통과 간지러움이 동시에 점막을 녹여대는 것만 같았다. 경련하던 윤수의 허벅지 사이가 문득 아릿해졌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의 성기를 보고 있으니 더욱 허벅지가 빠르게 떨려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위험했다.
흐윽, 형. 기둥에 이마를 기댄 채 물기어린 목소리를 터뜨리는 윤수를 보면서, 윤민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왜, 윤수야. 이유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오윤민은 듣고 싶은 거다. 윤수가 지금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는 걸.
가늘게 벌어졌던 입술이 다시 다물렸다. 도무지 소리 내서 인정할 수가 없다. 형이 넣어주는 성기가 좋아 자신의 것까지 설 것 같다는 말을 일부러 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 없는 윤수의 뒤편에서 윤민이 엷게 한숨을 쉬는 게 들렸다. 우리 윤수가 고집이 세네, 참.
퍽. 예고 없이 안쪽의 이물감이 거칠어졌다. 앗. 저도 모르게 날 선 소리를 뱉는 윤수를 무시한 채, 윤민이 사정없이 귀두를 깊숙한 점막에 비벼댔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뱃속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쿵쿵거렸다. 흘러내릴 것 같은 윤수의 몸을 윤민이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아, 형. 혀엉. 잠, 흐흑.”
“말해. 좋다고.”
“아니야, 아닌데. 그런 거 아니, 흐읍.”
조금 성난 것처럼 뒤에서 하반신을 튕겨내고 난 윤민이 윤수의 아랫도리에 손을 가져갔다. 조금 부풀어있는 윤수의 성기를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여기는 아니잖아. 응?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꾸만 눈시울을 가려대는 물기를 어떻게라도 해볼 생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에 아직도 걸려 있는 밧줄이 한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온몸의 세포가 경직됐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큰 형이 저기에 있었다. 윤수의 거절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스스로 저곳에서 목을 맸다. 그를 그렇게 만든 두 사람은 그 밑에서 보란 듯이 섹스를 하고 있다. 발정 난 개들처럼.
가늘게 흩날리는 밧줄을 따라 동공이 느릿하게 굴러갔다. 안 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어떻게든 멈춰야했다. 여기서 더 윤민과 몸을 섞고 있어봤자 이미 부정하기 어려운, 자신이 그에게 감응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맥없이 열린 윤수의 입에서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아, 형. 말이 끝나자마자 뚝 소리를 내며 풀밭에 눈물이 떨어졌다. 문득 행위가 멎었다. 서서히 윤수의 얼굴에 자신의 고개를 기대며 윤민이 말했다. 제대로 얘기 해. 윤수야. 윤수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말했잖아, 말했는데. 뒤편에서 나직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금 한 말은 답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끝날 줄 알았던 행위가 오히려 더 거세게 재개됐다. 윤수의 몸을 무너뜨릴 것처럼 내벽을 쑤셔대는 음경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다는 것처럼 공격적이다. 동시에 윤수의 성기를 압박하는 고통이 점점 더 견고해졌다. 하, 제발. 절망적으로 소리를 내지른 윤수의 입가에 뜨거운 눈물이 스며들었다.
“확실하게 얘기해.”
“흐윽. 형. 좋아, 진짜 너무. 하아. 좋아서 죽을 것, 같. 으읏.”
“왜 좋은지도.”
윤수의 입 밖으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대답을 망설이는 걸 알아챈 윤민이 폭력에 가까운 삽입에 들어갔다. 들어간 성기가 조붓한 내벽 곳곳을 사정없이 후벼댔다. 헤어지다 못해 걸레처럼 문드러지게 할 기세였다. 삽입이 이어질 때마다 하반신이 부딪히는 매서운 소리가 귓바퀴를 에워쌌다. 아앗. 커다랗게 비명을 내지른 윤수의 입술이 절박하게 벌어졌다.
“하아. 형, 형 자지가 좋아서, 흑.”
“계속 해.”
“형 자지, 나한테 들어오는 거 좋, 흐읏.”
“윤석이 형이 죽은 자리에서 나한테 박히는 데도 좋다 이거지.”
잔인하기 그지없는 말에 윤수의 볼을 타고 길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머리 위에서 소나무가 파스스 일렁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적셨다. 동시에 잘려나간 밧줄이 소리 없이 나부꼈다. 또 한 번 윤민의 것이 뱃속을 쑤시고 들어왔다. 흡. 절망적인 소음이 입 안에서 삼켜졌다.
“좋, 아앗. 좋아. 윤석이 형이 죽은 자리에서 해도.”
“두 번 다시 네가 어떤 애인지 부정할 생각하지 마.”
“흐윽. 형, 이제. 그만. 혀엉.”
“대답.”
입가에 윤민의 단단한 손아귀가 걸렸다. 살짝 들춰진 고개를 타고 눈물이 윤민의 손가락에까지 맺히는 게 보였다. 하. 희미하게 숨을 터뜨린 윤수의 고개가 기운 없이 끄덕여졌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부정할 수 없는 이 집의 사람이고, 그걸 인정하지 않는 한 이 폭력은 멈추지 않을 테니까.
안 할게, 이제. 힘없이 흘러나온 윤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윤민의 것이 빠져나갔다. 윤수의 몸이 바닥을 향해 무력하게 추락했다. 다소 건조한 손아귀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 올린 윤민이 한동안 말없이 소나무를 응시했다. 이내 본래의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완전히 무너져 있는 윤수의 몸으로 향했다. 허리를 살짝 숙여 윤수를 끌어안고는 집을 향해 걸었다. 가는 내내 윤수는 최대한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윤민 쪽을 보지 않으려 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이 유독 길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세상에서는, 짙은 소나무 향만이 유일한 존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 * *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보니, 소나무에 한 남자가 목을 맨 채 걸려 있었다. 윤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고, 그가 왜 그것을 택했는지도 알았지만 그 쪽으로 다가가는 대신 창문을 닫아 외면하는 걸 택했다.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자신의 안일했던 선택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그게 힘들었다. 윤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형. 따스하게 찾아드는 목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맞은편에서 윤성이 다정한 눈으로 윤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문이 있는 쪽부터 봤다. 소나무. 이제는 밧줄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을 확인한 순간 윤수는 저도 모르게 숨어 버리듯 몸을 낮추고 말았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저 나무에 걸려있던 윤석은 그 흔적이 사라질수록 모순적이게도 윤수의 시야에서 선명해지고 있었다.
“형. 왜 그래.”
“아냐.”
“얼굴이 안 좋아. 물이라도 마실래? 부엌 다녀올게.”
상냥하게 말을 건넨 윤성이 시트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등을 돌리는 윤성의 옷자락을 윤수의 손이 다급하게 쥐었다. 의아한 표정의 윤성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형. 다소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 얼굴을 쳐다보던 윤수의 손아귀가 사르르 풀렸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방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혼자 있는 게 두려웠다. 혼자 있으면, 창문 너머의 소나무와 단 둘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그게 무서웠다. 가지 마. 그냥 여기에 있어. 맥없이 건넨 말에 윤성이 흐드러지게 웃었다. 갑자기 왜 그래? 형. 어린애처럼.
어딘가 흡족한 얼굴의 윤성이 다시 시트 위에 몸을 앉혔다. 무기력하게 고개를 늘어뜨리는 윤수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아끼는 사물을 매만지는 것처럼 나른하게 살결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윤성이 입을 열었다. 혼자 있는 게 싫구나, 형.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수의 입가에 윤성이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걱정 마. 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이내 또 다시 입맞춤. 엷은 피부를 적시는 따스함에 조금씩 숨이 차분해져갔다.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그래, 이거면 됐다. 이 정도로 평안해질 수 있다면, 일단은 그걸로 됐다.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45.
윤석이 죽은 후 한남동 저택에서의 열흘이 흘렀다.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고, 흉터만 남았다. 저택 안의 일상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두 명의 여자 조리사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요리를 하고, 청소와 빨래 등을 맡는 네 명의 여직원들은 수시로 거실을 오가며 집안일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는 정원 관리사는 각종 조경용 나무와 소나무를 손질하고는 퇴근 시간에 맞춰 돌아갔다.
오윤민은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8시에서 자정 사이에 퇴근했다. 오윤혁은 오전 6시쯤 집을 나서 오후 6시에서 자정 사이에 돌아왔다. 오윤성은 오전 7시 무렵에 등교해 오후 8시 무렵에 돌아왔다.
윤수는 내내 집 안에 있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었다. 일단 정원이 있는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나가면 소나무와 마주쳐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었다. 소나무는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차단하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그저 기분 나쁜 존재에 불과했던 나무는 삼 개월 사이 윤수의 안에서 부쩍 커져 사나운 가시덩굴이 됐다. 가시덩굴의 끝에는 윤석이 있었다. 이제 윤수에게 있어 저 나무가 있는 한 외부로 발을 내딛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됐다.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넌. 하도 학교에 나오지 않는 윤수가 걱정이 됐는지, 성훈이 직접 한남동 집으로 찾아 왔다. 이 집에 지인을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멍하니 침대 시트 위에 앉아 있기만 하는 윤수를 보면서 한숨을 쉰 성훈이 가방에 넣고 온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사실 그냥 온 건 아니고. 나도 줄 게 있어서 왔어.”
“이게 뭔데.”
“몰라. 학보사에 네 앞으로 이런 게 왔더라고. 나도 안 열어 봤어.”
성훈이 건네 오는 갈색 서류봉투의 표면을 살폈다. 왼쪽 끄트머리에 발신자명 석자가 새겨져 있다. 윤수의 얼굴이 하얗게 돌변했다. 오윤석. 눈에 띌 정도로 바들바들 떨어 대는 윤수를 성훈이 의아한 눈으로 봤다. 왜 그래, 오윤수. 차마 대답하지 못 하고 숨만 가다듬었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호흡이 안정되고, 비로소 봉투의 매듭을 풀 수 있었다.
안에는 몇 가지 서류와 사진, 그리고 통장이 있었다. 사진부터 봤다. 윤석의 아이다. 오주원. 돌 사진부터 최근 사진까지 열 장 가까이 된다.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에는 어두운 윤석의 침실에서 섹스 하던 중이었고, 두 번째 마주쳤을 때에는 납치에서 풀려난 아이가 부리나케 윤석의 품에부터 달려드느라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도 꽤나 낯익은 얼굴인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떠가면서 한동안 그 모습을 살폈다. 답을 떠올리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이 가문 남자들의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이 어린 아이조차.
다른 서류에는 아이의 출생신고서 복사본이나 건강검진내역과 같은 이런저런 기록이 적혀 있었다. 통장은 여러 개였다. 10억 원짜리도 있고, 20억 원이나 30억 원짜리도 존재했다. 몇 개는 아이의 명의로 돼 있고, 몇 개는 윤수의 이름으로 돼 있었다. 어느 통장의 첫 장에 붙어있는 작은 메모가 눈에 띄었다. 열 한 글자의 전화번호가 선명하다. 옆에 적힌 이름. 최희윤. 아는 이름이다. 언젠가 윤석의 회사에 갔을 때 만났던, 윤석의 비서라던 여자.
핸드폰을 들어 숫자를 새긴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통화음이 흐른 후, 맑은 여자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들었다.
-네. 최희윤입니다.
“안녕하세요. 오 전무님으로부터 연락처 받고 연락 드렸는데요.”
-어머, 오윤수 씨죠? 오랜만이에요.
그 한 마디를 꺼낸 것만으로 최희윤이 바로 반색을 했다. 윤수가 머뭇거리는 사이 기다렸다는 양 줄줄이 최희윤의 말이 이어졌다. 연락이 너무 안 와서 저는 그냥 없던 일로 하시는 줄 알았어요. 게다가 오 변호사님이 지난주에 연락 주셔서 본인이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또.
늘어지는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최희윤의 말에 윤수는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각만 했다. 계속해서 제 할 말만 내뱉는 최희윤의 말을 가로 막고 사뭇 차분하게 질문을 건넸다.
“윤석이 형이 뭐라면서 제 얘기를 했는데요.”
-오 전무님 말로는 나중에 본인한테 일이 생겨서 아이를 맡을 사람이 없으면 윤수 씨가 대리 양육하신다고 하던데요.
“그런 얘기를 했어요?”
-네. 이미 합의한 거 아니었나요?
오히려 최희윤이 더 의아하다는 것처럼 물어왔다. 잠시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낸 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니 언젠가 윤석이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신 애를 부탁한다는 말. 어차피 윤석의 아내는 아이를 챙기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서, 윤수는 어차피 애를 맡을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가문 유일한 모계혈통 유전자의 보유자가 윤수니, 본능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길게 숨을 쉰 윤수가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복잡한 생각은 일단 뒤로 하고, 아까 들었던 신경 쓰이는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오 변호사 얘기는 또 뭐예요.”
-오 변호사님 말로는 미국에 주원이 외삼촌이 있다고 하던데. 그쪽에서 주원이를 맡겠다고 했나 봐요. 일정 확정되면 저한테 먼저 연락 준다고 했어요. 다음 주 쯤에.
거짓말이다. 그런 친척이 있었다면 윤석이 그 때 윤수에게 얘기했을 거다. 게다가 와이프인 강유진도 거절한 아이의 양육을 강유진의 혈육이 자처했을 리가 없다. 말로만 친척이고, 실상은 생판 남에게 해외입양을 보내려는 것이 분명하다. 오윤민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미치겠네.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터뜨리며 마른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어찌 보면 윤민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 지독한 부계혈통 핏줄을 가진, 어떤 인물로 성장할지 모르는 애가 제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게 오윤민이라는 걸 나중에 알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 가문의 남자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가장 먼저 윤민을 제거하려는 계획부터 세울지도 모른다. 윤민 입장에서야 모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싶을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예 인연을 끊어버린 채 타국의 제삼자에게 처음부터 그 집 애였던 것처럼 보내는 게 최선이긴 했다.
엄밀히 말해 다른 형제들이었다 해도 상황은 같았을 거다. 반대로 살아남은 게 오윤석 쪽이고 오윤민의 아이가 존재하는 상황이었다면 윤석 역시 비슷하게 했을 거다. 정도와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집의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같은 유전자 집단 내에서도 자신의 유전자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라면 같은 유전자라도 망설임 없이 제거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수컷 짐승의 세계처럼 말이다.
맥없이 앉아있는 윤수의 귓가에 문득 최희윤이 어린애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윤수 삼촌 전화야. 윤수 삼촌 알아? 상냥하게 건네는 최희윤의 말에 어린애가 뭔가를 대답하는 게 언뜻 비쳤다. 듣고 있으니, 윤수는 제 귓가가 얼어버리는 것만 같다.
-윤민은 싫어. 윤수는 알아.
전화 한 번 해볼래? 최희윤이 아이의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부스스 하는 소음이 들리고, 아이가 제법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질문을 건네 왔다. 형. 언제 와?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아귀가 바르르 떨렸다. 오주원이 윤수를 본 건 단 두 번뿐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마주친 게 아니다. 만남 아닌 만남을 고작 두 번만 가진 상태에서도, 이 애는 본능적으로 알아본 거다. 자신을 품을 수 있는 유전자를 윤수가 가지고 있다는 걸. 특이한 것을 넘어 기형적인 수준이다.
전화를 끊은 후 한동안 까만 액정의 핸드폰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맞은편에서 긴 시간 그 모습을 응시하던 성훈이 사뭇 이성적으로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거야.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윤석의 죽음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여기에 아이 문제까지 고민하려니 모든 사고가 정지하는 기분이었다.
“일단 네가 삼촌이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형제들은 다 그 애를 어떻게든 외부에 떠넘기려 하는 거 같고, 큰 형 와이프라는 사람도 아이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혈육 중에서 그 애를 맡을 만한 사람은 사실상 너밖에 없는 거 아냐?”
제법 일목요연하게 건네 오는 말에 윤수의 고개가 느슨하게 벽에 기대졌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키운다니. 단 두 번 봤던 애를. 어떤 애인지도 모르면서. 만약 키우려면 당연히 이 집에서는 못 키울 거다. 오윤민을 비롯한 형제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애를 어떻게 대놓고 키울까.
만에 하나 키운다면 나가서 키워야 한다. 그런데 막상 그 생각을 하니 탄식부터 나온다. 따져보면 나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이제는 그 유언장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허황된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언젠가 확인한 자신의 통장에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입금된 20억 원이 있었다. 당연히 오윤민이라는 걸 알았다. 필요 없다면서 윤민의 로펌 법인계좌로 다시 입금시켜버렸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는 이제 와서 윤민이나 다른 형제가 딱히 건드릴 것 같지 않다. 애초에 아버지를 증오한 건 오 회장이고, 형제들은 그다지 그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언뜻 윤석에게 들은 바로는 아버지 쪽에 선 납입된 병원비가 있어서 향후 몇 년은 어떻게든 유지된다고 했다. 그러니 그 문제도 지금 당장은 걸릴 것이 없다. 윤수는 그냥 이 곳에서 나가면 된다. 단지 그거면 되는데, 결정하는 게 어렵다.
솔직히 형제들이 잠자코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다. 당장 윤성만 해도 윤석이 윤수를 데리고 떠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자살하는 현장을 보고도 침묵했다. 윤민은 윤수가 이 집의 사람이므로 이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굴고 있다. 윤혁은 애매하다. 언젠가 윤수를 데리고 나가려고까지 했던 사람이긴 하지만, 그건 본인과 함께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윤수 혼자 나간다고 하면 또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윤수에게 반드시 집에 있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은 건 무엇보다 윤수가 나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막상 윤수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들이 보일 미지의 반응은 예측할 수 없어 더 두렵다. 그렇다고 해서 망연하게 이곳에서 머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당장 다음 주가 되면 윤민은 최희윤의 집으로 가서 애를 찾은 뒤 미국에 보낼 거다. 그 상황을 그저 지켜만 보는 건 윤석에 대한 배신이다. 이미 한 번 배신해서 죽음에 이르게 해놓고는, 죽은 뒤에까지 아이를 두고 또 다시 배신하는 격이다.
키우는 건 모르겠는데, 입양은 일단 안 될 것 같아. 단호하게 흘러나온 윤수의 말에 성훈의 고개가 스르르 들려졌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덤덤하게 건네 오는 질문에 윤수가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어 대다가 고개를 들었다.
“부탁 좀 할게. 내가 연락처 준 최희윤이라는 사람이랑 접촉해서 일단 애를 잠깐 네 집에 데려와 줘. 계속 그 집에 있으면 언제 윤민 형이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일단 애를 빼내. 그리고 내가 내일이나 모레쯤 너희 집으로 갈게. 가서 며칠만 신세 좀 질게.”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냐. 그냥 너희 형제들한테 쿨하게 얘기하고 당당하게 집에서 나가면.”
“그게 안 된다니까. 김성훈.”
날연하게 뱉은 말에 성훈의 미간이 짧게 구겨졌다. 이내 풀어진 얼굴은 무표정이지만 제법 무게감이 있었다.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어차피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일단 묻어 두겠다는 듯한 심정이 비쳤다. 정적 속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씁쓸한 윤수의 얼굴이 돌아가고, 성훈이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때 되면 얘기해주라. 어?”
“응. 사랑해.”
“아, 좀 하지 말라고.”
시큰둥하게 응수한 성훈이 이만 가보겠다며 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굳이 바래다주지 않겠다는 얘기를 한 뒤 고개를 돌리는 윤수의 귓가에 문득 바깥쪽에서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윤민의 얼굴이 보였다. 윤수의 몸이 화들짝 일으켜졌다.
또다. 예전 같았으면 밖에 나가 있을 시간에 또 집을 들렀다. 윤석이 죽고 난 후 윤민은 로펌에서 근무할 시간대조차 종종 집에 머물렀다. 칼같이 자신의 시간 관리를 하는 사람이, 그런 소모적인 시간낭비를 굳이 했다. 그러면서 윤수의 방을 들락거렸다. 마치 윤수가 방에 제대로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윤수 친구분이신가 봐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성훈을 향해 윤민이 가볍게 악수를 청했다. 어색하게 악수를 하고 난 성훈이 새삼 감탄한 얼굴로 윤민의 얼굴을 살피는 게 보였다. 윤수는 매력적이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남성에 쉽게 경계를 허무는 성훈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훈은 주변에 소위 ‘잘 나가는 형’이 많았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인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경계심이 많아 주변에 사람을 별로 두지 않는 윤수와는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이었다. 성훈을 쳐다보는 윤민의 시선에 일순간 서늘함이 비쳤다. 이내 평소의 안온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거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은 씨. 혹시 거기 있어요?”
“네. 변호사님.”
“우리 윤수 친구분인데, 정문 쪽까지 같이 바래다줘요. 택시 잡아주고, 비용 나한테 청구하고.”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저기,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당혹감에 손을 내젓는 성훈의 어깨에 윤민의 단단한 손아귀가 걸렸다. 한껏 부드럽게 미소 짓는 윤민을 보다가 성훈도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윤수 친구면 나한테도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성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명함 지갑에서 하얀색 명함 한 장을 꺼낸 윤민이 성훈의 손바닥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여기 내 명함인데, 이따 시간될 때 문자 하나만 줘요. 종종 연락하고 지내자고. 성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우, 저야 영광이죠. 달갑게 명함을 챙겨 넣은 성훈이 연신 고개를 꾸벅하고는 복도를 걸어 나갔다. 마지막까지 성훈을 향해 여유 있게 웃어 보이고 난 윤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윤수의 방 안으로 들어온 윤민이 다소 날카롭게 문을 닫았다.
“여기에 어디 남자를 들여.”
“내 친구야. 형이 무슨 상관이야.”
차갑게 한마디 한 윤수가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태도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윤민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어가며 윤민이 천천히 침대로 다가왔다. 돌아가 있는 윤수의 고개를 손아귀에 쥐어 강제로 들게 하고는, 명령조로 말했다. 고개 들고, 형한테 키스해 봐. 윤수는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질끈 다물었다.
안 할 거야? 아까보다 묵직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초점 없는 동공이 무언의 경고처럼 윤수를 훑었다. 윤민은 종종 이런 주문을 했고, 그 주문에 윤수가 망설일 때마다 차분하며 침착한 방식으로 윤수를 압박해왔다. 그 압박은 언젠가 윤수의 손목을 옥죄던 족쇄처럼 견고해 소리를 지르거나 폭행하는 일보다도 더 윤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던 윤수가 마지못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윤민의 얼굴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하고, 입술을 머금었다. 턱에 닿았던 윤민의 손아귀가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여린 살결을 단단하게 움켜쥔 윤민이 깊숙이 혀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목구멍을 틀어막을 것처럼 훑어 대는 혀에 윤수의 호흡이 가빠졌다. 좁아진 목구멍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워 눈가에 물기가 차오를 지경이었다.
하. 괴롭게 숨을 들이마신 윤수의 얼굴이 다급하게 떨어져나갔다.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려는 윤수의 턱을 윤민이 언짢은 듯 휘어잡았다.
“제대로 해야지.”
“잠깐만. 나 힘들어서. 형. 잠시만.”
“윤수야.”
사뭇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던 윤민이 윤수의 턱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한 치도 비껴가지 못하게끔 완고하게 고정한 채 다시 입술을 부딪혀왔다. 바들바들 떨리던 윤수의 어깨를 충분히 봤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입 안의 점막에 축축한 혀의 돌기가 닿았다. 아까처럼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쓸어대는 혀 때문에 순식간에 입 안이 더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숨을 쉬려면 쉴 수도 있는데, 그저 윤민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긴장감에 절로 호흡이 멎어간다. 꽤 긴 시간 윤수의 안을 취하고 난 윤민이 스르르 입술을 떼어냈다. 희미하게 떨어지는 윤수의 눈물을 살짝 손가락으로 훔치고는, 다소 딱딱하게 말을 뱉었다. 말 좀 들어. 착하게.
저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은 이 한남동 집과 같은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이 집이 이타노 가문의 부계혈통을 위해 세워졌던 것처럼, 윤수 역시 그를 비롯한 남자들에게 범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윤수의 의지와 관계없이, 애초에 그렇게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물기가 메마른 시야가 부쩍 흐릿해졌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윤민을 맥없이 올려다보던 윤수가 젖어있는 입술을 스스로 머금으면서 눈을 감았다.
나가야 한다. 계속 이 집에 머무르면서 형제들에게 몸만 내주다보면 자신의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윤수가 갖고 있었던 꿈이나 목적들이 한낮 휴지쪼가리처럼 버려질 것이다. 자신은 고작 그런 존재가 되려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니었다. 자신을 속박하는 잔인한 운명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일단 이 집에서 사라져야 했다.
46.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최대한 소나무 쪽은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달이 맺혀 있는 하늘을 봤다. 새까맣게 젖어든 하늘이 윤수의 몸까지 검게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완전하게 그 색깔에 잠식당하기 직전에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를 봤다. 챙길 수 있는 최소한만 챙겼다. 지갑, 신분증, 여권, 좋아하는 책, 간단한 옷가지. 가방의 지퍼를 단단하게 채운 후 다시 창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한껏 용기내서 소나무가 있는 곳을 봤지만, 5초 이상 응시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자꾸만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다. 저 나무에 걸린 윤석이. 외면하고 싶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잔인했던 자신의 거절이.
일단 저 나무를 거치지 않고서는 이 집에서 나갈 방도가 없다. 잠시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윤수의 시선이 방문 쪽을 향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저 나무로부터 시야를 가려줄 사람이 있기는 한데, 그가 나서줄지가 미지수다.
차분하게 방문을 열고 일단 복도로 나왔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맨 채 다가간 곳은 윤혁의 방이었다. 방문을 두드렸다가는 다른 사람이 알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문부터 열었다.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걸터앉아 통화를 하고 있던 윤혁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윤수를 의아한 듯 살펴보다가 우선 통화부터 끝내려는 지 갑자기 대화의 속도를 높였다. 아, 네. 아무튼 미국은 지금 상황에서 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요. 아닙니다, 죄송하실 거 없고요. 제가 죄송하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윤혁이 길게 숨을 내쉬며 윤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나 집에서 나갈 건데.”
“지금?”
“어.”
“윤민 형이나 윤성이도 알아?”
“몰라.”
하.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린 윤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윤수를 보는 얼굴이 다소 차갑게 여겨졌다. 근데, 나한테는 왜 왔어. 망설이던 윤수가 자신 없이 입을 열었다. 정문까지만 같이 가 줘. 윤혁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하긴, 윤혁이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그냥 해 줘. 나한테는 중요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윤수의 얼굴을 한 동안 보다가, 윤혁이 차마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심정이 복잡할 것이다. 윤수가 나가는 걸 묵인하는 것은 형제들에 대한 배신이다. 스스로도 원치 않는 일일 것이고. 그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응시하던 윤수가 천천히 윤혁의 앞으로 다가갔다. 숙여져 있는 윤혁의 고개 밑으로 손을 넣어 들게 하고는, 느릿하게 그 입가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안으로 스며드는 눅눅한 혀에 조금 당황한 듯한 윤혁의 팔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서로의 혀가 맞부딪히는 시간이 정적 속에서 얼마간 흐르고, 윤수가 얼굴을 떼어냈다.
“해 줘. 응?”
“너 진짜.”
“미안.”
“해도 해도 너무하다.”
허탈하게 숨을 터뜨린 윤혁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간단하게 겉옷을 챙겨 입고는,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나가자.
정원에는 불빛 하나 없었지만, 워낙 집 너머에 많은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존재하는데다가 그날따라 유독 달이 밝아 이동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윤혁을 소나무가 있는 쪽에 두고 윤수는 최대한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앞을 향해 걸었다. 어딘가 겁먹은 듯한 윤수를 알아챘는지 윤혁이 말없이 작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오윤수. 너 나중에 후회하게 될 지도 몰라. 윤수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알아.
일순간 파르르 공률하는 윤수의 어깨에 윤혁은 그만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택이 있는 곳에서부터 소나무를 지나쳐 정문까지 가는 시간이 마치 일 년처럼 느껴졌다. 그 긴 시간동안 윤수의 어깻죽지를 채우는 미지근한 윤혁의 온도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외로웠을 지도 몰랐다.
마침내 정문을 나선 윤수를 두고 윤혁이 차갑게 김을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괴로워 보이는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윤수가 먼저 몸을 돌렸다. 윤혁 쪽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대로변을 향했다. 보이는 빈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택시는 한남오거리로 빠져나와 한남대교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대교의 옆으로 펼쳐진 새까만 강물에 커다란 달이 걸려 있었다. 수시로 일그러지는 달의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윤수는 차마 눈을 감고 말았다.
* * *
성훈의 집에 아이는 없었다. 네가 오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애가 하도 고집을 계속 피워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허망하게 말을 뱉은 성훈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 가문은 핏줄은 어떻게 돼먹은 걸까.
일단 피곤하다며 소파가 있는 곳에서 자겠다는 윤수에게 굳이 성훈은 방을 내 줬다. 너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야, 소파에서 자면 더 상한다. 억지로 윤수를 침실에 몰아넣은 성훈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의도치 않게 성훈의 침대를 점령한 채로 시트에 누워 긴 상념에 빠졌다.
이제 와서 윤수가 직접 가서 아이를 찾아오는 것에는 큰 의미가 함축돼 있다. 아이가 윤수가 아니면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는 건 윤수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다는 거다. 그런 아이를 데려온다는 건 진짜로 키우겠다는 암묵적인 합의나 마찬가지다.
성훈의 집에 오기 전에는 막연하게 애를 빼오는 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애를 데리고 생활해야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윤수는 아직 24살 대학생이었다. 세 살짜리 어린 애를 아들처럼 데리고 사는 삶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만한 나이가 절대로 아니었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쿵쿵 울려 대는 머릿속을 가누며 간신히 잠에 들었다. 해가 뜨고 다음 날이 됐지만, 윤수의 머릿속을 채운 고민은 그대로였다. 시트 위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윤수를 보며 성훈이 말을 걸었다.
“수업 안 가냐.”
“안 갈래. 기운이 없어.”
“마음대로 해라. 냉장고에 이것저것 있으니까, 알아서 먹고.”
“응. 사랑해.”
“됐다.”
건조하게 대답을 마친 성훈이 현관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거운 공기처럼 거실을 헤맸다. 원래 성훈은 윤수를 저렇게 대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소파를 내주려고 했을 것이고, 윤수가 무슨 말을 하든지 헛소리한다며 트집부터 잡았을 것이다. 오래된 친구다보니 그렇게 장난 식으로 구는 게 서로에게도 익숙했다. 지금의 성훈은 좀 다르다. 그도 안 거다. 지금의 윤수가 일반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TV를 보고 있을 때 핸드폰이 벨을 울렸다. 윤민의 번호였다. 엎어둔 채 다시 TV를 봤다. TV 속에서 남자아이돌들이 게임 비슷한 걸 하고 있었지만 윤수는 보면서도 내용이 뇌리에 새겨지지 않았다. 아까 봤던 액정만 생각났다. 이번이 한 서른 번째 전화일 거다. 밤사이에 많이도 왔었다. 앞으로는 더 올 것이 분명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윤민이라면 얼마든지 윤수가 성훈과 있다는 것쯤은 생각할 수 있을 거고, 성훈의 집이 어딘 지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가능할 거다. 한 마디로 지금쯤 이 집 현관에 와있는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이건 경고였다. 나중에 윤수를 다시 제 안에 품었을 때 어떠한 대가를 치를 지에 대해 스스로 계산하라는 거다. 부재중 통화가 많아질수록 그 경고는 누적될 것이고, 한계까지 누적된 경고가 어떤 보복에 이를지 윤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윤수는 여전히 그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집에 있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버려가며 족쇄에 사로잡힌 노예를 자처하는 일이나 진배없다. 보통의 사람으로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사흘이 지났다. 윤수는 점점 더 신경질적이 돼 갔다. 이유는 확실하기 꼽기 어려웠다. 그저 자신을 둘러 싼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밖에 나왔지만, 여전히 목에는 족쇄가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한남동에 떨어져 있는 형제들은 수시로 윤수의 목줄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었다. 불안함에 자주 심장이 뛰었다. 나왔는데도 변한 게 없었다. 불만스러웠다. 갈수록 목을 옭매어오는 족쇄의 감각이 날카로워 수시로 오싹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밥을 먹지 않겠다며 방에 들어갔다가 굳이 문을 열어 식사를 권하는 성훈에게 화를 냈다. 건전지가 닳아 작동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리모콘을 집어던졌다가 산산이 박살나는 걸 보며 성훈이 탄식했다. 처음엔 그런 행위들에 대해 성난 말로 대꾸하던 성훈도,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윤수를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걸 인지한 모양이었다. 윤민의 부재중 전화가 100통이 넘어섰다. 윤수는 여전히 스스로가 보통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오후였다. 수업이 없던 성훈은 방 안에 있었고, 윤수는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문득 성훈의 핸드폰이 벨을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성훈이 빠르게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네, 형님. 제 가방에 어댑터를 두고 가셨다고요. 저 지금 집이에요. 예. 지금 오시면 돼요. 짧은 통화를 마치고 종료 버튼을 누른 성훈이 말없이 윤수를 내려다봤다. 이제는 그저 안타깝다는 감정만 섞인 시선. 오랜 친구의 동정은 어딘가 낯설어 윤수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바로 거두게 할 정도로 태연하게 굴 기운이 윤수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잠깐 아는 형이 집에 들를 거야. 전국일보에서 기자하는 형인데. 얘기 좀 나누고 있어. 너도 언론고시 준비하는 입장이니까 대화 나누면 여러 가지로 도움될 거야.”
“모르는 사람 싫어.”
“믿을 만한 사람이야. 전국일보 사주 아들인데. 차원혁이라고, 너도 이름 들어봤잖아.”
차원혁. 언론반 스터디에서 몇 번인가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국내 최대 메이저 신문사와 메이저 방송사, 메이저 통신사까지 세 곳의 매체를 동시에 합격한 언론고시 3관왕. 결국엔 신문사인 전국일보를 택했다. 애초에 어머니가 사주로 있는 전국일보에 갈 생각이었고, 나머지 매체의 시험을 친 건 일종의 보여주기 용도였을 지도 몰랐다. 전국일보만 붙으면 낙하산 의혹이 불거질 게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메이저 매체에서까지 합격하는 걸 일부러 증명한 거다. 기자가 된 후에는 더 유명해졌다. 정치부에 있으며 여러 정치권 인사를 낙마시키거나 위협하는 기사를 썼다. 모 정치인의 비리혐의를 포착했다거나 정치권 논란이 불거졌다는 단독기사를 보면 바이라인에는 당연한 것처럼 차원혁의 이름이 들어가 있곤 했다.
윤수야. 너 힘든 건 아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외부하고 벽 쌓고 지낼 수는 없잖아. 모르는 사람하고 대화 좀 나누고 해 봐.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다. 쓰리게 입을 다물어 버린 성훈과 윤수의 간극에서 침묵이 흘렀다. 맞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처절하게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언제까지는 언제까지여야 하는 거고, 언제쯤이면 이렇게 지내지 않을 용기가 생기는 건지. 윤수는 그걸 알 수 없었다.
문득 현관 키패드에 숫자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활짝 문이 열렸다. 검은 가죽재킷을 입은 키 큰 남자 한 명이 안으로 성큼 들어오더니 방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야. 미안하다. 다시 사러 갈 시간이 안 돼서.”
“아니에요. 형님. 그나저나 비밀번호 외우셨네요.”
“엊그제 네가 술 쳐 먹고 불렀잖아. 한 번만 들어도 외우겠더라. 좀 바꿔.”
“어댑터 방 안에 있어요. 들어오세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어루만진 남자가 안쪽으로 불쑥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수의 시야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제법 남자다운 얼굴이 언뜻 비쳤다. 손에 쥐고 있던 책자의 하드커버만 어루만지는 윤수를 힐끗 본 남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저건 뭐야. 성훈이 윤수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답했다. 학교 친구요.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우리 집에서 잠깐 지내고 있어요.
남자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고개 좀 들고 살라고 해라. 무슨 새끼가 사람이 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해. 심드렁하게 한 마디 한 남자가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어댑터를 찾아 쥐었다. 윤수는 남자의 불친절한 언행을 들으면서 그가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외면이나 무시 따위는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신경을 거스르는 존재를 직설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사람. 마치 한남동의 형제들처럼, 언제나 타인보다 우위에 있는 게 익숙한 사람.
“형님. 잠깐 방에서 쟤랑 대화 좀 하고 있어 주실 수 있어요? 한 십 분이면 돼요. 저 잠깐 차 좀 빼려 다녀와야 해서.”
“그러든가. 금방 와야 한다. 나도 빨리 나가봐야 해.”
“고마워요. 형.”
고개를 꾸벅해 보인 성훈이 부리나케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제한된 사각 공간 안에 윤수와 남자만 남았다. 불편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담배 피냐. 문득 물어 온 남자의 말에 윤수의 얼굴이 스르르 들렸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시야에 담겼다. 뚜렷하고 올곧은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짙은 눈썹에 깊은 눈매, 높게 올라간 콧대와 남자답게 다듬어진 턱선. 어딜 가나 잘 생겼다는 얘기를 쉽게 들을 만한 생김새. 기시감이 있었다.
한 대 주세요.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윤수에게 한 대 건넨 남자가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줬다. 이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간 담배에도 붉은 불을 붙였다. 창문을 끝까지 열어젖힌 남자가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밖을 향해 연기를 뱉었다. 하얗게 흩어지는 연기 속의 남자가 무성영화 속의 인물처럼 인상적이었다.
“너 어디 사냐.”
“지금은 한남동이요.”
“허, 터도 드럽게 안 좋은 데서 사네.”
짧게 혀를 찬 남자가 창틀 너머에 팔을 뻗고는 점점이 그 위에 재를 털었다. 의중을 알기가 어려워 빤히 쳐다만 보는 윤수를 발견한 그가 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살짝 벌어지는 입술에 텁텁함이 걸려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새끼가 그 동네 살거든. 얼마나 싫어하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까지 그런 얘기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제가 뭔데. 왜 집도 안 들어가고 김성훈네 집에서 이러고 있어. 담담하게 건네는 언어가 제법 어른스럽다. 윤수와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윤민 또래 정도로 보이는 사람인데도. 문제. 담배가 걸려 있던 손가락이 소리 없이 밑으로 끌어내려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캔에 그대로 담배를 비벼 끄고는, 눈꺼풀을 살짝 밑으로 기울였다.
분명히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이건 애초에 윤수가 마음만 먹는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타고난 것을, 그렇게 태어난 것을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온 몸에 흐르고 있는 제 혈액을 모조리 뽑아내서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는 한 윤수의 태생은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있는데,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거다.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문제예요. 맥없이 흘러나온 윤수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거지. 완고하게 지적한 남자가 창틀에 꽁초만 남은 담배를 비벼댔다. 하, 완전히 겨울이네. 방 안으로 거세게 스며드는 찬 공기 속에서 혼잣말을 마친 남자가 꽁초를 들고 윤수의 근처로 다가왔다. 윤수가 담배를 비벼 껐던 캔 안에 그것을 넣고는, 넌지시 윤수 쪽에 시선을 뒀다.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좆같은 운명도 있는 거야.”
“받아들이기 싫으니까 문제죠.”
“그럼 거부해.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 쪽이야 대형 신문사 사주 아들로 태어나서 세상 평탄하게 잘 살았으니 그런 말 나오는 거죠. 저는 지금 그런 게.”
분연히 말을 쏟던 윤수가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뭘 짓거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시점부터 허물어진 남자에 대한 경계심에 되는 대로 말을 뱉고 말았다.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윤수를 잠시 응시하던 남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벨을 울렸다. 액정을 본 남자가 귓가에 핸드폰을 갖다 댔다.
“네, 부장. BH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아직 여당 쪽에서 별 말 들은 거 없었는데. 확인해 보죠. 아뇨, 안 그래도 원내대표한테 전화 하나 넣으려고 했었습니다. 다른 건 때문에. 팩트 체크하고 10분 안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네. 팩트 맞으면 1면으로 가야죠. 대놓고 여야정 합의 거부한다는 거 아닙니까.”
통화를 마친 남자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자마자 현관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흘깃 윤수 쪽을 일별하고는 사뭇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평탄하게 살았는지 어쨌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생각 함부로 하지 마. 남자의 경고에 차마 할 말을 잃은 윤수의 입술이 다물어졌다. 방 안을 부유하는 공기의 온도가 한없이 낮았다. 아까 문이 열린 사이 찬바람이 들어와서인지, 남자의 언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쁘장한 얼굴값 한답시고 영양가 없는 소리 해댈 시간에 그냥 결정을 해. 받아들일 거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확실하게 대책을 찾아.”
단호하게 말을 마친 남자가 등을 돌렸다. 형, 이제 가보셔도 돼요. 방 안으로 들어온 성훈이 한마디 했다. 그 어깨를 짧게 두드린 남자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 현관문을 열고나서는 남자를 응시했다. 다시 한 번 보니 그제야 윤수는 그 얼굴이 익숙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인상은 꽤 다르지만, 오윤민과 엄청나게 닮아 있는 얼굴이다.
한남동 집에서 시달리다 보니 내가 이제 별 헛것을 다 보는구나. 나지막하게 헛웃음을 터뜨린 윤수가 날연하게 고개를 젖혔다. 하기야 저 사람 말이 맞기는 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결정을 해야 했다.
“김성훈.”
“어. 왜.”
“내일 아침에 나 잠깐 어디로 데려다 줄래.”
“어디로.”
의아한 얼굴로 물어오는 성훈을 보며 윤수의 입술이 제법 결연하게 열렸다. 최희윤 씨 집. 애, 데리러 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