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한남동, 그 저택 2
5장. 오남 오윤성
외동으로 자란 아이는 부족한 형제의 존재감을 부모로 채운다.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하나라도 없다면, 비어있는 쪽의 몫까지 남은 쪽이 대체한다. 그런 의미에서 윤수의 어머니는 윤수와 어릴 적부터 수많은 역할극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머니였지만 동시에 아버지였으며, 그러면서도 형제였다.
당연히 윤수에게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제외한 혈육의 존재를 체감할 길이 없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아버지처럼, 혹은 형이나 삼촌처럼 크겠거니 생각하며 성장할 무렵부터 윤수는 스스로가 어떤 모습으로 클지를 그려보는 게 어려웠다. 다만 성별은 달라도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의 어느 한구석이라도 닮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때로는 생각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넌 나 닮으면 안 돼. 어느 날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런 말을 말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어머니와 함께 갔던 학교 운동장에서 모자(母子)가 너무도 똑같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감탄을 듣고 오던 길에 했던 말이다.
차마 이유를 묻지 못했다. 메마른 어머니의 입술은 답조차 말하기 싫다는 것처럼 굳건했다. 얼어붙은 입술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답을 내주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닮지 말아야 할 어머니의 곁에서 억지로 살아가는 시간이 흘렀고, 채 답을 알려주기도 전에 어머니가 죽었다. 윤수는 지금도 답을 알지 못한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에 비치는 검은 그림자가 제 얼굴인 것만 같아 윤수의 고개가 화들짝 들렸다. 아니라는 걸 알고는 느릿하게 밑으로 숙여졌다. 이마에 식은땀이 스며있었다. 어제 봤던 윤민의 차가운 얼굴이 자꾸만 상기됐다. 그를 알게 된 이래 처음 접한 낯선 모습은 윤수로 하여금 기묘한 의구심을 자아냈다. 둘 사이의 경계 너머로 존재하는 윤민의 진짜 얼굴은 사실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
오윤수.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거운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오윤석이 보였다. 멍하니 들리는 몽롱한 얼굴을 보면서, 윤석이 삐딱하게 고개를 가눴다. 무슨 일이세요. 그러고 보니 퍽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한남동 집에 있는 걸 좀처럼 보지 못했다. 차라리 나았다. 얼굴 맞대봐야 좋을 게 없었다. 바쁜 일이라도 생겼나 보다 하면서 막연하게 넘기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와 있었던 시간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면서.
30분 안에 준비해서 나와.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할 말만 하고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윤석의 뒤통수에 다급한 윤수의 반문이 날아들었다. 어디를요. 잠시 숨을 뱉은 윤석이 힐끔 윤수 쪽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희 아버지 병원. 싫으면 말고.
심장이 불현듯 빠르게 박동했다. 바쁘게 세안을 마치고 옷을 챙겨 입은 뒤 정원으로 나오는 데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푸른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목덜미를 적셔오는 햇살이 유독 따가웠다. 윤석은 자신의 검은 세단 운전석에 몸을 실은 채 시동만 켜 두고 있었다. 조수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에 몸을 들였다. 윤석은 곁눈질로만 그 모습을 봤다.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서울에 있는 병원이 아닌 모양이었다. 들쑥날쑥 솟아오른 빌딩만 보이던 창밖에 어느 순간부터 낮고 단조로운 건물들이 채워졌다. 언뜻언뜻 신선한 풀 내가 났다. 살며시 쳐다본 윤석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틈틈이 낮은 숨을 뱉기는 했지만, 대체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솔직히 이상했다. 지나칠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은 때때로 그 자체에 담겨 있는 또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예컨대 표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힘들다는 그런 얼굴 말이다.
한 시간 반을 걸려 달린 끝에 수도권의 한 조용한 병원 건물에 닿았다. 시동을 끈 윤석이 먼저 몸을 일으키고, 윤수도 따라서 내렸다. 윤석을 따라 하얀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꽤나 고즈넉한 공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병원이 작은 건 아닌데 환자가 없는 편이다. 두 달 전에 머물러 있는 로비의 달력이 이 병원의 소외된 존재감을 대변했다.
왜 하필 이런 곳에 아버지를 입원시켰을까. 오 회장이라면 얼마든지 최첨단 시설을 갖춘 서울의 병원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건, 아무래도 두 가지 이유로 보였다. 그 정도로 윤수의 아버지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거나. 혹은 아무도 찾게 하고 싶지 않았거나.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사가 친근하게 윤석을 반겼다. 간만에 오셨네요, 오 전무님. 잘 지내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윤석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저야 그냥 그랬죠, 선생님은요. 심상하게 나누는 대화에서 윤수는 어떤 맥락을 읽었다. 오윤석은 이 병원에 종종 왔었던 것처럼 보였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윤석이 3층 버튼을 눌렀다. 높지 않은 층수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문이 열린 틈으로 의사가 먼저 걸어 나가고, 그 뒤를 윤석과 윤수가 따랐다. 새하얀 복도는 아까의 로비보다도 고요했다. 장기 입원실이라 그런지, 이 병원 자체가 그런지는 모를 일이었다. 차분하게 들락거리는 간호사와 간병인이 숨은 그림 찾기처럼 복도에 이따금씩 등장했다. 사람이 지나칠 때조차 침묵을 유지하는 차가운 복도가 괜히 기괴했다.
강현우.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병실 앞에서 의사의 발걸음이 멈췄다. 두 분만 있게 해드릴까요? 친절하게 말을 건넨 의사의 말에 윤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의사가 뒷걸음질을 치며 빠졌다. 문을 연 윤석이 윤수 쪽에 시선을 뒀다. 들어와, 오윤수. 떨리는 발걸음을 가누며 병실 안으로 몸을 들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윤석이 느릿하게 문을 닫았다. 아까 문 앞에서 본 강현우라는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에 어렸다. 그게 아버지의 진짜 이름이다. 오 씨라더니, 그것도 어머니의 거짓말이었다. 이제는 어머니의 흔적에서 진짜와 가짜를 발라내는 것조차 버거운 일처럼 느껴진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슬슬 포기하게 됐다. 진실게임이라는 건 적어도 상대방이 살아있을 때나 유효한 행위다.
가느다랗고 일정한 기계음 속에서 심폐 호흡기를 단 강현우가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두 눈은 나른하게 감긴 채다. 주춤거리며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창백한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자 비로소 확신이 섰다. 윤수의 아버지가 맞았다. 워낙 어릴 때 본데다가, 보지 않게 된 지가 오래돼서 잊을 법도 한데 윤수는 한눈에 알았다. 부드럽게 새겨진 눈썹과 감겨진 기다란 눈매, 적당히 우뚝한 코와 희미한 호를 담은 채 다물린 입술. 윤수가 기억하는 얼굴이 분명하다.
삼 년에 한 번이나 정신 비슷한 걸 차린다고 했나. 뒤편에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윤수와 윤수의 아버지 쪽을 번갈아 보는 윤석이 있다. 역시나 표정은 없었다.
“너희 아버지. 사실상 의사소통을 하나도 못 해. 그냥 식물인간이야. 딱 그 수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서늘하게 물어오는 윤수의 말에 순간적으로 윤석의 입술이 다물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많은 상념이 맺히는 것을 윤수는 봤다. 물어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윤수는 이 사고의 배후에 대해 불편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근거는 있었다. 오 회장이 완전한 타인인 아버지에게 거금을 들여가며 오랜 기간 보살펴왔다는 게 그의 성격상 말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윤수의 아버지는 오 회장이 그렇게 집착하는 어머니가 선택했던 남자였다. 애초에 사고 자체에 어떤 배경이 존재한다는 거다. 그것도 오 회장과 연관된.
얘기해 줘? 한참 끝에 열린 윤석의 입술이 무거워보였다. 매섭게 빛나던 윤수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식었다. 알고 싶다. 그런데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 그 이유가 정말로 윤수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만 같았다. 말없이 고개를 끌어내리는 윤수를 보면서 윤석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윤수의 목덜미에 단단한 윤석의 손아귀가 걸쳐졌다.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데, 이 순간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이라도 없으면 온몸의 힘이 빠져서 그대로 바닥에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너도 예상했지? 무게감 있는 저음이 윤수의 귓속에서 쓰리게 흩어져갔다. 고개가 서서히 가로저어졌다. 흐릿한 동공이 그 어떤 사물도 담기 어려울 정도로 아득해졌다. 듣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듣고 싶다. 하지만 역시 듣고 싶지 않다. 정확하게 어느 쪽인지 스스로도 선택하는 게 어렵다. 머릿속에서 여러 개의 뇌세포들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다. 완전히 초점을 잃은 눈으로 고개만 가누는 윤수의 목덜미를 윤석이 지그시 쓸어내렸다.
“맞아. 우리 아버지가 했어. 어머니를 얻기 위해서, 우리 아버지가 일부러 그랬어.”
윤수의 고개가 희미하게 뒤로 젖혀졌다. 완연하게 말라붙은 입술 안쪽으로 선명한 욕설이 새겨졌다. 씨발. 거칠게 올라온 분연한 주먹이 윤석의 배를 연신 내리쳤다. 개새끼가, 진짜. 감히, 어떻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욕설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도 윤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인지할 수 없었다. 끊어진 필름처럼 모든 것들이 가마득했다.
수없이 윤수의 주먹질을 받아내면서도 윤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게 위협적일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웃자란 풀처럼 돼버린 윤수에게는 최소한의 악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한남동 집에 머물면서 시작된 기나긴 불면증과 두통은 꾸준하게 체중과 기력을 소진시켰다. 스스로가 가죽만 남은 존재처럼 느껴지게 했다.
한참이나 공허한 타격을 반복하던 윤수의 고개가 밑으로 꺾였다. 또 비겁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윤석은 오 회장이 아니었다. 단지 같은 핏줄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화풀이를 하는 것은 달의 그림자를 걷어차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짓이었다. 동작을 멈춘 윤수의 위에서 윤석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끄트머리에 희미한 사과가 맺혔다. 미안해, 오윤수.
바들바들 떨리는 턱을 지탱하며 고개를 돌렸다. 숨을 쉬는 것 이외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아버지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천천히 얼굴을 시트 위에 묻었다. 뒤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윤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블라인드가 올라간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한없이 무거웠다.
아버지의 숨소리와 따스한 햇살에 잠겨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한참 동안 수면을 취했다. 눈을 떴을 때는 무려 세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윤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세 시간 내내 거기에 서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긴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살아있고,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다. 일단은 그걸로 됐다.
여기에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아버지와는 그 어떤 소통도 할 수 없고,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오 회장은 다른 국가에 있다. 소통할 대상도, 화풀이할 대상도 없는 윤수는 사방이 거울뿐인 공간에 홀로 갇혀있는 존재와도 같았다. 오롯하게 혼자서 이 상황을 견뎌내야 했고,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담담해진 얼굴로 병실을 나서는 윤수를 따라 윤석이 나왔다.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던 윤수의 무릎이 종종 불안정하게 굽혀졌다. 알면서도 계속 내려갔다. 한 층을 간신히 지나왔을 무렵, 결국 맥 빠진 다리가 사고를 쳤다. 헛디딘 발이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몸까지 밑으로 고꾸라졌다. 뒤에 있던 윤석이 거세게 윤수의 허리를 휘어 감쌌다. 야, 정신 차려. 귓속으로 위기감 어린 언어가 파고들었다.
내 뒤로 빠져. 뒤에서 걸어 와. 크게 숨을 쉬고 난 윤석이 앞 편에 섰다. 먼저 내려가는 윤석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다가 윤수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끌어내리며 계단을 밟았다.
차 안으로 돌아와 조수석에 앉았다. 시동을 켠 윤석이 느릿하게 핸들을 잡았다. 후진을 해서 차를 빼고, 액셀을 밟아 앞으로 향하는 내내 윤석은 말이 없었다. 윤수도 마찬가지였다. 창밖의 풍경이 익숙한 것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낮았던 건물이 높아지고, 수풀로 가득했던 배경을 짙은 매연이 잠식했다.
열려있는 창문을 타고 입 안으로 들어오는 탁한 공기를 잠시 머금었다가 뱉었다. 오 회장에 대한 증오는 너무도 쌓여 산처럼 높아졌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표출해야 할 지다. 표출할 방법을 찾지 못한 증오들은 종종 절로 식어버린다. 애초에 오 회장은 윤수가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가장 싫은 것은 그걸 쉽게 받아들이고 마는 스스로다.
오윤수. 운전대를 쥔 윤석이 차분하게 윤수의 이름을 불렀다. 윤수의 고개가 천천히 윤석 쪽으로 올라갔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 지 몰라 마른 침을 삼키는 단단한 이목구비가 시야에 들어온다. 문득 궁금해졌다. 윤석이 왜 갑자기 이런 걸 해 줬을까 싶은. 윤수가 알기로 윤석은 좀처럼 그런 걸 쉽게 해 줄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형제들은 대체로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야. 앞으로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아무도 믿지 마.”
“갑자기 그런 얘기를 왜 하세요.”
“나 당분간 집에 못 들어 와. 어디 좀 나갈 거야.”
그 얘기를 끝으로 윤석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허물어졌던 경계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돌린 채 윤석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이방인에게 이 정도까지 속내를 터준 건 고맙지만, 역시 듣고도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딜 간다는 거고, 또 왜 간다는 건지도. 여러 형태의 궁금증들이 입 안에서 동그란 물방울을 만들었다. 차마 내뱉지 못한 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윤석의 얼굴에는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식의 체념이 어려 있었다.
다시 한남동 집으로 돌아온 윤석이 주차공간에 차를 세워놓고 말없이 고개를 가눴다. 적막한 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윤수 쪽을 전혀 보지 않는 윤석을 응시하다가 윤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나가시는데요. 그 정도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궁금증을 정제하고 정제해 유일하게 꺼낸 질문이었다. 윤석의 고개가 느릿하게 윤수 쪽으로 돌아갔다. 두터운 눈썹 밑에 새겨진 그림자에 고뇌가 맺혀 있었다.
“이 문제 있는 집안을 어떻게든 정상궤도에 안착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어.”
역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스르르 눈꺼풀을 끌어 내리는 윤수의 귓불에 윤석의 손이 다가갔다. 천천히 귓바퀴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괜히 간지러웠다. 희미하게 목덜미를 떨어대던 윤수가 살짝 몸을 뒤쪽으로 뺐다. 손을 끌어내린 윤석이 얼핏 웃었다. 당분간 못 본다니 아쉽네.
말을 마친 윤석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윤수도 조수석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저 편에서 세 명분의 실루엣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 순간적으로 윤수의 입술이 벌어졌다. 윤민과 윤성, 윤혁.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형. 잘 다녀와. 따스하게 말을 건네며 윤민이 천천히 걸어왔다. 바라보는 윤석의 시선이 다소 차갑다. 둘 사이를 에워싸는 한낮의 공기가 후끈하고 거칠했다. 고개를 들어 윤민 쪽을 보자마자 그대로 시선이 마주쳐졌다. 지그시 웃어 보인 윤민이 윤수의 팔을 휘어잡았다. 부드럽게 이끄는 손힘에 따라 윤수의 몸이 윤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윤수는 내가 잘 챙길게.”
“오윤민.”
“어, 얘기해. 형.”
희미하게 올라간 윤민의 입가에 여유가 실려 있다. 윤석이 무슨 말을 하든지, 자신은 어렵지 않게 그 표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치는 미소다. 분연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윤석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윤민의 옆으로 다가온 윤성이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윤민 못지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별일 없을 거야. 형.
* * *
주말이 지나고 학교에 갔다. 오후에만 수업이 있는 날이라 오전 느지막한 시간대에 학보사를 찾았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성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며 윤수를 반겼다. 어. 잘 왔다. 오윤수. 너 점심에 뭐 있냐. 고개를 가로저은 윤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없지. 여기 사람들이랑 먹으려고 했는데.
그럼 나랑 같이 먹자, 아는 교수 분이랑. 잘됐다는 것처럼 건네 오는 말에 윤수의 눈꺼풀이 의아한 듯 들렸다. 다짜고짜 어깨에 손을 올린 성훈이 빠르게 윤수를 학보사 바깥으로 끌어냈다. 물론 오늘 생각한 점심 멤버에 성훈이 잠정적으로 포함돼 있었던 게 맞기는 하다. 그러나 교수는 생각지도 못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불편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가는 윤수의 볼을 성훈이 가볍게 툭 치면서 입을 열었다.
“나 어렸을 때부터 알던 아버지 친구분이 우리 대학 의학부 교수거든.”
“응. 근데.”
“지난주에 아버지랑 만났단 말이야. 같은 대학에 있다고 하니까 학교에서 한 번 밥 먹자고 하더라고. 그 분이 정신과 전공인데, 너 한 번 소개 시켜 드리고 싶어서.”
“정신과를, 왜.”
“너 요즘 불면증이라며. 밥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 한 번 나눠 봐. 도움될 지도 모르잖아.”
무덤덤하게 건네 오는 말에 윤수가 헛웃음을 쳤다. 한동안 여자친구에 미쳐서 잠시 윤수를 잊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름의 신경을 쓰고 있었다. 뭘 웃냐는 투로 윤수의 얼굴을 성훈이 지그시 꼬집어왔다. 나밖에 없지? 오윤수. 짧게 고개를 끄덕인 윤수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응, 사랑해. 성훈의 고개가 탐탁지 않게 가로저어졌다. 아, 그건 좀 싫은데.
성훈과 찾아간 곳은 학교 근처의 중식당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보이는 테이블에서 중년의 남자가 성훈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흰 머리카락을 왁스로 발라 뒤로 넘긴 모습이 제법 세련됐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남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어이구, 김성훈이. 이렇게 또 바로 보네. 여기가 친구야?”
“네. 오윤수라고 합니다.”
“이쁘게도 생겼네. 삭발이라도 해라. 오해받겠다.”
“쟤는 그래도 똑같을 걸요.”
“그만 해라. 김성훈.”
얄밉게 건네 오는 성훈의 말에 제법 힘 있게 배 쪽을 팔꿈치로 치면서 짧게 노려봤다. 교수가 먼저 앉고, 성훈과 윤수가 맞은편에 앉았다. 앉자마자 뚫어져라 보는 교수의 시선이 정말로 환자라도 관찰하는 것처럼 진지하다.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사라져 시선이 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교수라는 존재 자체도 불편한데, 저런 식으로 보는 시선은 더 불편했다. 성훈이 말로는 불면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교수가 천천히 운을 뗐다.
원래 그런 건 아니고요. 최근 들어서 좀 그래요. 교수가 테이블 위에 올린 팔을 들어 턱을 괴면서 물어왔다. 어떤데? 아예 못 자는 날도 있고, 자게 되더라도 좀 불규칙한 식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교수가 좀 더 질문을 건넸다. 최근에 뭔가 문제가 있었어?
윤수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문제라고. 여러 문제가 있긴 했다. 한남동 집에서 옮기고 난 뒤부터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문제가 생겼다. 다만 그건 제삼자에게 태연하게 읊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스스로를 하염없이 옭아매는 지옥의 존재에 대한 얘기다. 남에게 보인다는 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그냥, 살던 곳을 좀 옮겨서요. 자신감 없이 말을 마친 뒤 시선을 피해버렸다. 턱을 괴고 있던 교수가 그 언어에 숨겨진 의미를 알았다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마 문제를 밝히지 못하는 윤수의 입장을 곱씹는 듯 생각에 잠겨 있던 교수가 문득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아버지나 어머니 중에 우울증 지닌 사람 있었어?
얼기설기 얽혀있는 수많은 기록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것을 찾아본다. 우울증이라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그러면 어머니는. 마른 침이 느릿하게 목구멍에 삼켜졌다. 윤수에게 있어 어머니는 수위가 변하지 않는 저수지처럼 언제나 집을 같은 존재감으로 채우는 존재였다. 잔잔한 소용돌이처럼 집안을 맴도는 존재감은 웬만해서는 갑자기 그 수위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았다.
아주 이따금씩 수위가 변할 때가 있었다. 긴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밤. 허기진 것처럼 밥을 두어 공기씩 밀어 넣고는 화장실에 가서 구토하던 비 오던 날. TV를 보다가 불현듯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발견했는지 리모콘을 집어던진 뒤 베란다에 가서 담배를 태우던 주말. 변화는 일시적이었고 그것이 끝나면 어머니는 다시 원래의 수위로 돌아갔다. 그걸 우울증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시시때때로 자신이 지닌 수면을 찰박이며 살아간다. 그것을 우울증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걸 지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없었는데요. 마침내 튀어나온 윤수의 언어가 얼어붙은 물처럼 차가웠다. 무표정으로 일별한 교수가 깊게 들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뭐, 일차적으로는 환경 변화에 따른 이상증세 정도로 보는 게 맞을 것 같고. 이상할 정도로 심상한 말에 윤수가 문득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근데 아버지랑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에요.
윤수의 질문에 교수가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벌어지는 입술이 새삼 단호했다. 그것을 의심하는 행위조차 허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원래 정신병은 유전이거든. 근데 병원 가면 이런 얘기 대놓고 하는 의사가 별로 없지. 인권 문제도 있고, 좀 민감한 얘기잖아. 어쨌든 근본적으로 따지면 그래. 인생에 있어서 유전자의 역할이 구 할이야. 그만큼 무서운 거거든.”
말을 마친 교수가 서버를 불렀다. 양장피 하나, 난자완스 하나. 귓가에 닿는 주문이 스르르 가마득해져간다. 시선이 비어 있는 테이블에 닿는다. 위에 올려진 유리에 윤수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친다. 천천히 입 안으로 단단한 문장 하나를 새겨 넣는다. 정신병은, 유전이라고.
22.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왔다.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하는 것도 포기한 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이 집에 오면서부터 시작된 두통을 동반한 무기력증은 암세포처럼 윤수의 몸에서 점점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퍼져나가는 속도는 서서히 스며드는 물기마냥 기척이 없어서, 어느 날 정신을 차렸을 때 스스로가 어느 정도 그렇게 됐다는 걸 뒤늦게 인지하는 식이었다.
윤석은 정말 아버지의 병원을 다녀온 날 이후로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윤민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일이 있어서 해외에 나갔다고만 했다. 해외. 오 회장도 해외에 있는데. 같은 곳을 간 건가. 아니면 따로. 모르겠다. 윤민은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또 경계를 그었다.
형. 불현듯 젖혀진 문 사이로 활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빠끔히 내민 윤성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윤수의 얼굴을 살폈다. 눈이 마주쳐지자 웃어 보이는 얼굴이 한없이 천진하다. 느릿하게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윤수가 움직이는 걸 보고 침대 근처로 다가 온 윤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경영학과지. 나 형한테 물어볼 거 있어.
뭔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불쑥 내밀어진 윤성의 손이 윤수의 팔을 이끌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성이 향한 곳은 옆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네모난 책상 위에 수많은 문제집이 펼쳐져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경제신문에서 고교생을 대상으로 발간하는 경제상식 문제집이었다.
재밌어서 풀고 있는데, 모르는 게 좀 있어서. 이과 쪽 고교학습 과정은 이미 다 체득해서 그런지 재미삼아 이런 것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윤성의 옆에 앉아 그가 건네 오는 문제집 페이지를 봤다. 외부경제, 외부불경제, 공유경제, 지하경제. 이 정도는 고등학생 입장에서도 구분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도박이나 비자금이 지하경제야. 그리고 우버랑 에어비앤비 같은 게 공유경제고.”
“응. 그리고.”
“근데 우버 때문에 택시기사가 피해를 입었어. 그건 외부불경제.”
“그러면 에어비앤비 때문에 일반 숙박업소가 덩달아 매출이 오르면 외부경제겠네.”
“맞아.”
“그러면 우버랑 에어비앤비는 공유경제면서 지하경제인 건가? 소득 신고도 제대로 안 한다고 하니까.”
“윤성아.”
딱딱하게 던져진 윤수의 말에 윤성이 고개를 들었다. 살짝 갸웃거린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혀있다. 하. 윤수의 입 안에서 짤막한 숨이 터져 나왔다. 너, 이거 몰라서 물어본 거 아니지. 서늘한 말에 윤성이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다물었다. 방 안이 불현듯 고요해졌다. 예상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 알고 있는 걸 굳이 왜 물어 봐.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너 진짜 이럴 거야? 저도 모르게 내질러진 윤수의 성난 목소리에 윤성의 눈가가 억울한 듯 일그러졌다. 윤수의 눈꺼풀도 덩달아 찌푸려졌다. 잘못한 건 윤성 쪽이다. 그래놓고 저런 얼굴을 짓고 있다. 차오르는 분기를 참는 게 버거웠다. 일단 빠르게 고개를 돌려 윤성을 외면했다.
윤성이 일반적이지 않은 학생이라는 건 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알면 알수록 보통의 학생들과 다르다. 두뇌가 명석한 건 그렇다 쳐도 교사들이 두려워 할 정도의 주도권을 학교에서 쥐고 있는 듯했다. 몇 번인가 혼자 공부를 하겠다며 학교에 나가지 않은 일이 있었다. 보통 같으면 당장 나오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담임은 안부만 묻고 그만뒀다. 혼자 공부한다고요, 네. 그러라고 하세요. 차라리 잘 됐다는 투로. 그리고 끝이었다. 이런 식의 통화가 몇 번인가 있었다.
함께 지내는 학생들 사이에서의 모습도 일반적이지 않다. 어떻게 뭉친 것인지 모를 같은 학교 아이들이 이따금씩 집을 찾았다. 서울 시내에서 보기 어려운 커다란 저택이 신기한 아이들은 이것저것 만져 보고 돌아다니느라 바쁘다. 윤성은 그 때마다 단호하게 몇 가지 제약을 걸었다. 예컨대 뒷마당으론 가지 마라. 서재 문은 열지마라. 부엌 뒤쪽으로는 가지 마라. 정말 친한 친구라면 왜 그래야 하냐며 궁금해하거나, 장난삼아서라도 직접 해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윤성이 한 번 그런 말을 하면 아이들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한 채 잠자코 따랐다. 서열이 있다는 거다. 그것도 윤성에게만 독보적으로 유리한.
다른 집단에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집에서는 항상 친근한 모습을 유지한다. 특히 윤수에게 유독 다정하다. 다만 갈수록 대하는 게 집요하다. 집에 같이 있는 날에는 잠시도 윤수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한다. 다른 형제들과 같이 있는 걸 보면 꼭 뭐 했냐고 물어보고, 윤수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냐면서 꼬치꼬치 캐묻는다. 윤수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처음에는 없던 형제가 갑자기 나타나 급하게 정을 붙이느라 그런가 보다했다. 그런데 갈수록 집착이 기이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윤수 스스로도 감당이 어려워지고 있다. 예컨대 지금 같은 상황 말이다.
형, 미안해. 윤성이 나지막하게 사과를 건넸다.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니 처연한 얼굴로 윤수의 얼굴만 살피는 게 다소 가엽기까지 하다. 낮은 숨을 뱉은 윤수가 고개를 숙였다. 하긴 윤수도 잘한 건 아니었다. 워낙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윤성이 이런 장난을 치니 저도 모르게 감정이 고조됐다. 따지고 보면 어린 애가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다신 그러지 마.”
“응. 형.”
“왜 그랬어, 근데.”
“하루 종일 형이 방에서 안 나오니까.”
“나 지금 몸이 별로 안 좋아. 그래서 쉰 거야.”
“많이 안 좋아?”
걱정스럽게 지어보이는 윤성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 치 앞에서 보니 이 집안 남자들 특유의 이목구비가 이 아이한테도 있다는 게 확연하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어린 애 같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서서히 성인 남자의 형태를 갖춰 간다는 느낌이 든다. 19세 남학생의 성장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윤수도 겪어 봐서 그걸 안다.
윤성아. 차분하게 떨어진 윤수의 말에 윤성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누그러진 언어에 긴장해있던 윤성의 어깨도 풀어지고 있었다. 너 작년에, 친구한테 무슨 나쁜 짓 한 거 있어? 또박또박 강조하며 건넨 질문에 윤성의 시선이 잠시 비껴갔다. 뚫린 구멍처럼 적막한 눈동자가 소리 없이 굴러간다.
다시 윤수를 향한 눈동자에는 윤기가 어려 있다. 이내 느릿하게 가로저어지는 고개. 대수롭지도 않다는 것처럼. 그 모습에서 윤수는 암묵적으로 어떤 문장을 읽는다. 무슨 짓을 하긴 했지만, 나쁜 짓은 아니다. 마른 입술을 축이고 난 윤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 그만 방에 들어가 볼게. 윤성의 손아귀가 다급하게 윤수의 손목을 쥐었다. 형, 좀만 있다 가. 응? 윤수의 고개가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좀 자야겠어.
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윤수의 어깨를 윤성의 손이 단단하게 감쌌다. 다소 거칠게 윤수의 몸을 자신 쪽으로 돌리고는 바로 맞은편에 있는 벽에 밀어붙였다. 아. 어깨에 닿은 벽이 지나치게 딱딱했다. 고통에 젖은 음성이 짧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왜 이래, 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뱉는 성난 음성에 윤성이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가지 마, 형.
어깨에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그 나잇대의 흔한 남학생들에 비해 악력이 꽤나 센 편이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하염없이 한숨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소 절망감이 어린 윤수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윤성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정 갈 거면 뽀뽀해주고 가.
무슨 뽀뽀.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황당하기 이를 데 없어 눈꺼풀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말이 없는 윤수 가까이로 얼굴을 끌어내린 윤성이 간절하게 말을 건넸다. 응? 형. 별거 아니잖아.
별거 아니라고. 윤수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생각해보니 윤민과는 예사롭게 그런 걸 한 적이 종종 있다. 이 아이도 그걸 보고 저런 말을 건네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윤성은 막내인 데다가 유독 윤수와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형제들에 대한 샘이 많은 것처럼 보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형제인데 누구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자신과는 미묘하게 거리를 둔다고 하면 서운할 만도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정말 이게 별게 아니구나 싶다. 절반의 피긴 하지만 어쨌거나 핏줄이 이어져 있는 형제. 그런 형에게 뽀뽀를 해달라고 하는 동생.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다소 상황을 과대해석 했다는 책망이 들 지경이다.
고개를 든 윤수의 얼굴이 윤성의 얼굴 가까이에 기대졌다. 짧게 입술을 머금고 바로 얼굴을 돌리려는데, 빠르게 윤수의 얼굴을 손아귀에 쥔 윤성이 또 입술을 부딪쳐왔다. 읍. 짧은 소음이 입 안에서 삼켜졌다. 그러기를 잠시, 불현듯 닫혀있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혀가 흘러들었다. 허공을 향하던 윤수의 동공이 바르르 공률했다.
입 안에서 유영하는 혀의 움직임은 서툴지만 집요하다. 목구멍까지 빠르게 밀고 들어온 혀가 깊은 점막을 지그시 음미했다. 벽을 짚고 있던 손이 반사적으로 윤성의 어깨를 밀쳤다. 윤성은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어깨에 댄 손목을 단단하게 붙든 채 더욱 깊숙이 윤수의 몸을 벽 쪽에 몰아댔다.
윤성아. 그만 해. 희미하게 터져 나온 언어가 윤성의 혀를 타고 스르르 증발해버렸다. 입 안의 모든 점막을 훑어낼 것처럼 스치는 혀 때문에 불현듯 두통이 심해졌다. 이대로 가다가 진짜 기절이라도 할 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최대한 힘을 실어 윤성의 몸을 다시금 밀어댔다. 밀려날 것처럼 밀려나지 않는 몸이 단단한 나무둥지 같다. 어떻게든 고개라도 돌려보기 위해 턱 끝에 힘을 실었을 때, 찌르르한 고통과 함께 순식간에 혀끝이 타들어갔다.
악. 낮은 비명을 지른 윤수가 고개를 뒤로 뺐다. 눈앞에 비치는 윤성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다. 입가에 묻어 있는 붉은 핏물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주르르 흘러 내렸다. 바들바들 떨면서 올라간 윤수의 손이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입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손가락에 붉은 핏방울이 맺혀있다. 생채기가 난 혀를 타고 비릿한 맛이 점점이 번졌다. 흡족함을 머금은 윤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제 됐어. 형.
* * *
누가 보면 너 뭐, 아이돌 준비하는 줄 알겠다. 무슨 애가 갈수록 말라가냐. 오랜만에 학교 식당에서 마주친 박채영은 다짜고짜 그 말부터 꺼냈다. 대답 대신 한숨을 쉰 뒤 테이블에 앉는 윤수 주변에 채영과 성훈이 몸을 앉혔다. 꾸역꾸역 식판 위에 담긴 음식물을 입에 행위는 단지 열량을 채우기 위해 섭취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입맛이 하나도 없어서, 뭘 먹어도 맛있다는 느낌을 가져본 일이 없다. 입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로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는 윤수의 옆에서 성훈과 채영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윤호 그래서 어떻게 됐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학교 후배들 쪽엔 알짱거리진 않는 것 같더라고. 잘 됐지, 뭐.”
“와. 선배 갑질에 환장한 그 새끼가 갑자기 왜?”
“나야 모르지. 뭐가 있었던 거 같긴 한데, 당사자가 연락이 이제 안 되니. 뭐.”
느릿하게 목구멍을 타고 점점이 흩어진 음식물이 들어온다. 고개를 든 곳에 벽에 붙어있는 TV 화면이 있다. 헤드라인에 ‘한-미-러시아 3개국 첫 공동 구리사업 개시’라는 글자가 달려 있고, 위에 비치는 화면에서는 정장 차림의 오 회장이 미소를 띤 채 취재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저 사람 너희 양아버지 아니냐. 문득 대화를 멈춘 성훈이 윤수를 향해 물어왔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화면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여유 있게 올라간 입가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자신이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 무엇을 하든지 자신은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거기서 떨어질 위기감 따위는 취급하고 싶지도 않다는 단단한 여유. 장성한 사자처럼 갈기를 뻗고 있는 저 빛나는 존재의 이면에 윤수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고의적인 사고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십 년이 넘도록 심폐 호흡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나약하고 무고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굳어있는 손가락으로 수저를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끌어내리는 윤수의 귓가에 채영과 성훈의 대화소리가 잡음처럼 맺힌다. 너 그래서 저녁에 학회 사람들 만날 거야? 아니, 바빠서. 네가 뭐가 바빠. 나 요즘 시험 준비 하거든. 대화소리가 얼기설기 감겨 있다가 풀어지는 덩굴처럼 윤수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간다. 이내 정적.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면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오승조의 태연한 얼굴만 떠오른다.
윤수는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어떤 생각을 했다. 아주 일시적이긴 했지만, 그건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던 것이었다. 무의식에 떠오른 생각은 불시에 솟아오르는 용암처럼 윤수의 머릿속을 붉게 물들여 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굳이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은 뇌리에서 서늘하게 식은 화석이 된다.
오승조를 죽이고 싶다.
23.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주방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윤민과 윤혁, 윤성이 있었다. 윤수와 얼굴이 마주치자마자 윤민이 빙그레 웃어 보이며 턱짓으로 의자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밥 안 먹었지? 같이 먹자.
세 명분의 얼굴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윤수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도 밥을 먹는 게 힘든데, 한남동 집에서 음식물이 넘어갈 리 없다. 그래도 앉았다. 안 그래도 집에서 소외된 주제에 일부러 곁을 내주는 것까지 거부하는 게 부담됐다. 옆에 있던 윤성이 찻잔을 채워줬다. 주르르 채워져 가는 찻물의 색깔이 어딘가 평소보다 짙었다. 매번 머리 아픈 것은 혹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윤수의 손가락이 주어진 사약을 마셔야할 지를 두고 고민하는 죄인처럼 간헐적으로 떨렸다. 윤수에게서 시선을 거둔 형제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의 윤성과 윤민 간의 대화였다.
“아버지는? 윤민 형.”
“어, 뭐. 특별히. 내일 잠깐 홍 선생님이 집에 올 거야.”
“왜? 왜 벌써 와.”
“벌써 오는 건 아니고, 하루만 있다가 다시 출국할 예정이야. 나랑 상의 좀 할 게 있어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윤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홍 선생님은 또 누구고, 윤성은 왜 그렇게 그의 방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구는지. 어떻게 대화에 끼어야 할 지 몰라 잠자코 식탁 위에 올라온 하얀 그릇들만 응시했다. 더께 하나 묻어있지 않은 깨끗한 그릇이 하얀 조명을 받아 더욱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도 희어서 차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문득 윤민의 핸드폰이 벨소리를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윤민이 전화를 받으며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 선생님. 아닙니다. 지금 공항이시라고요. 네.
그냥 식사자리에서 받아도 되지 않나. 어차피 남도 아닌데. 빠르게 일 층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윤민의 자취가 어딘가 낯설다. 멍하니 시선을 떨구며 찻잔의 매끄러운 표면만 쓸어내리는 윤수를 보다가, 옆에서 윤성이 독촉을 해왔다. 마주쳐 보이는 맑은 눈동자에 기대감이 담겨 있다. 형, 왜 안 마셔. 응? 사근사근한 말투에 이상한 거부감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망설이던 입술이 결국 그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못 마시겠어. 이거 때문에 자꾸 머리 아파지는 것 같아서.
오윤성, 이제 그만 해. 문득 맞은편에서 윤혁이 묵직하게 한 마디 건네 왔다. 윤수의 눈꺼풀이 의아함을 머금고 들려졌다. 그만하라니, 정확히 뭘.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윤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혀있었다. 천진함을 넘어 갓 즐거움을 깨달은 어린 아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티 없는 웃음이다. 뭘 그만 해. 형. 형도 동의했잖아.
갈수록 대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어렵다. 그 와중에 무겁게 테이블을 감도는 긴장감에 왠지 숨이 막히는 것만 같다. 혼란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문득 윤혁과 시선이 맞닿았다. 하. 난감해하는 얼굴로 한숨을 뱉은 윤혁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터벅터벅 식탁을 지나쳐 이 층으로 올라가는 등에 체념이 어려 있다. 윤혁이 있던 자리 앞에서 비우다 만 밥그릇이 허전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다.
윤수 형. 빨리. 윤성이 한 번 더 강조해왔다. 이 아이는 대체 왜 이럴까 싶은 생각에 불현듯 머리가 아파왔다. 윤성은 이따금씩 윤수를 지나칠 정도로 몰아붙였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제 멋대로 키스를 하다가 윤수의 혀를 깨물었을 때도 그랬다. 잠시 즐거운 얼굴을 해 보이더니, 이내 다급하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네 왔다. 실수로 그랬다면서. 실수. 실수로 남의 혀를 깨물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사과를 하는 윤성에게 차마 화는 낼 수가 없었다. 미안해하는 얼굴이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와도 같았다.
안 마실 거야? 공허한 눈동자로 자리만 지키는 윤수를 뚫어져라 보며 윤성이 또 한 번 물어왔다. 손잡이를 쥐었다가, 이내 그만뒀다. 도무지 안 되겠다. 윤수의 고개가 힘 있게 가로저어졌다. 안 마실래. 진짜 못 마시겠어.
벌떡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윤수를 윤성이 빠르게 쫓아왔다. 윤수의 팔을 거칠게 쥐고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끌어왔다.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전에 없이 차갑다. 형. 진짜 왜 그래.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에 괜히 짜증이 났다. 안 마신다고. 내가 안 마신다는데 네가 왜 그래. 성난 것처럼 터져 나오는 윤수의 말에 윤성의 미간이 느릿하게 구겨진다. 서운해, 형.
윤수의 입 밖으로 허탈한 숨이 터져 나왔다. 차가 안 맞아서 안마시겠다, 이 한 마디 한 게 뭐가 그렇게 윤성 입장에서 서운해할 일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함께 있을 심적인 여유조차 무너진 윤수가 윤성의 어깨를 밀치며 앞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윤성은 그 거부의사를 묵인하지 않았다. 거세게 올라간 손아귀가 윤수의 어깨를 쥐었다. 단단하게 양 어깨를 감싼 윤성이 갑자기 입술을 부딪혀왔다.
흐으, 읍. 틀어 막힌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성의 이유 모를 집착이 오늘따라 유독 별났다. 어깨를 내려쳐서라도 녀석을 떼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려다가, 문득 목구멍으로 뭔가가 흘러 들어오는 걸 느꼈다. 원래 마시던 차에 있던 것과 비슷한 듯하지만, 거기서 나는 특유의 낙엽향이 짙다. 안으로 흘러든 것을 저도 모르게 꿀꺽 삼킨 뒤 윤성을 봤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윤수를 살펴보는 얼굴이 꽤나 만족스럽다.
뭐야, 이거. 희미하게 떨리는 윤수의 성대를 타고 날 선 질문이 흘러나왔다. 어깨를 으쓱한 윤성이 예사롭게 답했다. 형한테 좋은 거야. 내가 직접 했어. 순식간에 메마른 윤수의 입술 너머로 혼잣말이 새겨졌다. 직접 했다고.
서늘한 의구심이 들었다. 윤수가 항상 마시던 차는 인도에서 수입해 온 거라고 윤민이 늘 말했었다. 그 차와 향이 비슷한데, 이것은 윤성이 직접 한 거라고 한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를 일이다. 어떻게든 생각을 진척시키고 싶지만 좀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찡하고 찾아드는 이명의 여운이 평소보다 길다.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를 봤다. 자리에 앉아있었던 네 명의 흔적. 각기 먹다 만 식기와 찻잔이 놓여 있는 건 같은데, 찻잔이 채워졌던 흔적이 보이는 건 윤수의 것뿐이다. 윤수의 등줄기에 순식간에 한기가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말고 이 집에서 저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긴 했던가.
* * *
언제나 찾아오던 한 밤의 두통이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아까의 차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머리가 아픈 건 둘째치고 온몸을 장악하고 드는 한기인지 열기인지 모를 기운이 기분 나빴다. 온 세포를 잠식할 것처럼 스며드는 감각이 낯설기 그지없어 눈을 감고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이 유독 조용했다. 원래도 밤에는 고요한 집이지만, 오늘따라 안에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보니 특유의 호젓함이 두드러졌다. 통화를 마친 윤민은 일이 있다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2층에서 내려 온 윤혁은 친구와 술을 마시겠다면서 역시 나가버렸다. 집에 상주해 있는 여직원들은 오후 10시만 되면 퇴근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집에는 윤성과 윤수 둘 뿐이다.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는 내내 머릿속에서 같은 문장이 반복됐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고, 또 이상하다. 이 집, 그리고 이 집의 사람들. 분명히 이상한데 확실하게 뭐가 이상하다고 꼬집어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탈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혀서 하염없이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든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형제들은 대체로 문제가 있어. 언젠가 들었던 윤석의 문장이 이따금씩 수수께끼처럼 윤수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문제. 겉보기에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이 집안의 남자들에게 문제라고. 물론 오 회장과 윤석, 윤혁이 윤수를 범한 것은 충분히 비인간적인 범죄행위였다. 하지만 윤석이 얘기하는 문제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인 어떤 것이었다.
머리맡에서 바람이 스치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귓가에 닿는 무수한 나뭇잎의 마찰음. 아, 또. 저 나무는 때때로 예고 없이 윤수의 신경을 마비시켜 온다. 보는 것도 아니고, 듣고 있을 때조차.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의 모든 존재들이 흐릿하게 일그러져 간다.
간신히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완전한 수면은 아니고, 절반쯤. 잠결에 어렴풋한 인기척을 느꼈다. 제법 섬세하게 윤수의 하반신을 어루만져오는 손길. 어쩐지 허전한 허벅지에 질척한 혀가 닿았다. 혀의 자취를 따라 희미하게 소름이 새겨졌다. 아.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 하반신이 허전한지는 모를 일이었다. 분명히 잠옷으로 쓰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손길이 좀 더 위쪽으로 미끄러져 올라왔다. 입고 있던 상의가 천천히 위로 끌어올려졌다. 기묘한 한기가 이불 속을 채웠다.
저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덮고 있던 이불을 빠르게 젖혔다. 안에 들어가 있던 윤성과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씩 웃어 보이는 얼굴이 다소 즐거워 보인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윤수의 입술을 타고 맥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 있게 몸을 세워 윤수의 위에 앉혔다. 골반 옆에 닿아있는 단단한 무릎이 압박하는 것처럼 하체를 조여 왔다. 꿈을 꾸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뚫어져라 윤수를 향하는 윤성의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해보기 위해 생각을 정리했다.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늘어나자마자 또 다시 짙은 이명이 귓속을 후볐다. 도무지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고, 윤성은 왜 저렇게 즐거워 보이는지가.
언젠가부터 윤수는 고민하는 일이 버거웠다. 머리를 좀 굴려보려고 하면 지독한 두통과 이명이 찾아들어 절로 신경을 내려놓게 됐다. 원래는 그렇게 무감각한 타입이 아니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고민을 거친 다음에 실행했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원래는 그랬다.
생각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진 건 역시 이 집에 오고 나서부터다. 그래도 이 지경까지 신경이 무뎌진 적은 없었다. 지금은 말 그대로 글자 몇 가지를 떠올리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머릿속이 혼란한 상태다. 지긋한 현기증의 틈바구니에서 꾸역꾸역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따졌다. 아까 윤성이 대담하게 윤수의 목구멍에 밀어 넣은 찻물이 떠올랐다. 그 차. 이전에 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짙은 향을 머금은.
오윤성. 아까 그 차 뭐야. 그리고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사납게 터뜨리는 윤수의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윤성이 가지런하게 눈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윤수가 건넨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말이 윤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다가 꿈을 꿨는데, 형. 위에서 보이는 얼굴은 여전히 천진한 특유의 그것이다. 너무도 맑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완전히 굳어 버린 윤수의 얼굴을 향해 윤성의 고개가 내려갔다. 아주 천천히. 귓불까지 다다른 윤성이 질척하게 혀를 내밀어 뭉툭한 부위를 입에 넣었다. 아. 윤수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떨렸다.
형이 벗고 있었어. 꿈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의중이 불분명했다. 낮게 숨을 뱉은 윤수가 보다 목에 힘을 줘가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내려 와, 당장. 윤성은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입에 넣고 있던 귓불을 맛있다는 것처럼 잘근잘근 물어댔다. 간지럽고 눅눅한 감각이 얇은 살점을 타고 목덜미를 적셨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윤성의 행동은 당혹감을 넘어 공포심이 들게 할 지경이다. 고개를 든 윤성이 지체 없이 윤수의 입술을 머금었다. 겹쳐진 입술 안으로 스멀거리며 혀가 들어왔다. 오윤성. 하지 마.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외침에 윤성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모르겠어, 형. 그냥, 형이랑 이러고 싶어.”
하, 제발. 절박한 손이 윤수의 어깨를 잡고 있는 윤성의 팔에 닿았다. 밀어 봤지만, 꿈쩍도 안 했다. 이 애가 악력이 센 편이란 건 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셌던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윤성이 센 건지, 아니면 윤수가 약해진 건지. 점점이 흐드러져가는 머릿속을 가누며 가쁜 숨만 내쉬는 윤수를 향해 윤성이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이지 행복해서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벌어진 윤성의 입술 사이로 나른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꿈에서 했던 거, 진짜로 해보고 싶어. 형.”
순간적으로 귓속을 파고드는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거세졌다. 마치 나무가 바로 머리맡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가운데 폭풍우 같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무너뜨리듯 두드려대는 소리가 생생하다. 지금까지 저 소리가 이렇게까지 컸던 적이 있던가. 윤수는 알 수가 없다.
윤성아. 잠깐만. 윤수의 몸을 단단하게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려는 윤성의 존재감이 낯설기 그지없다. 다급하게 내밀어진 윤수의 팔이 윤성의 어깨를 쥐었다. 손아귀가 순식간에 저릿할 정도로 아파온다. 고작 그 정도 힘을 썼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몸 상태가 이전과 같지 않다. 언젠가부터 점진적으로 기력이 소진되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이 정도였던 적은 없다.
오윤성. 고개 들어. 밭은 숨을 내쉰 윤수가 다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윤성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묻어 있다. 윤수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다. 그 태연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대로 머리가 빙글 돌아 버리는 것만 같다. 지금 얘가 뭘 알고 이러는 건가 싶은 생각이 순간 들었다. 열아홉. 열아홉이면 알만한 건 다 아는 나이이긴 하다. 윤수만 해도 열여덟 살 때 처음으로 여자와 관계를 가졌고.
그런데 윤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에게 분출하는 윤성이 욕정이 자신이 그 나잇대 가졌던 것과 동일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어딘가 다르다. 보통 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윤성의 목적은 윤수와 섹스를 하겠다는 것이 되겠지만. 지금 윤성의 행동은 미묘하게 서툴러 보인다. 한 마디로 뚜렷한 목적성이 비치지 않는다. 윤수를 탐하고는 싶은데, 그 방식이 불분명한 느낌.
너, 지금 뭐 하겠다는 거야. 나랑. 차갑게 뱉은 말에 윤성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리며 돌아간다. 이내 스르르 몸을 끌어내려 윤수의 목덜미를 짧게 입술에 품는다. 아, 또. 별것도 아닌 행위에 닿은 부위가 찌릿했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세포의 반응이 평소보다 훨씬 더 빨라진 기분이다.
그냥, 벗은 채로 뭔가를 하긴 했는데. 목덜미에 닿아있던 윤성의 혀가 축축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확실히 서툴다. 그런데 그때마다 느껴지는 오싹한 기분이 과거의 어떤 때보다 강렬하다. 자꾸만 떨려오는 목덜미를 간신히 가누며 윤수가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하긴 했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윤성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그래도 충분히 기억나는 건 많아. 형 벗은 거, 그리고 형 얼굴. 그리고. 천천히 읊어대던 윤성의 동공이 문득 윤수의 하반신 쪽을 향했다. 집요하게 성기와 엉덩이 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다급하게 다리를 모아 최대한 보이지 않게끔 추스른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 애는 섹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말이 안 되는 얘기지만, 윤성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관심 있는 것은 본인이 흥미 있어 하는 분야를 공부하는 것뿐이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일반적이지 않다. 친구가 있기는 한데 감정적인 교류가 제한적이다. 학교를 다니거나 친구를 사귀는 것이 윤성에게 있어서는 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으니까. 그러므로 좀 더 민감한 주제의 대화, 말하자면 성적인 성격의 것들을 친구들과 나누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집에 종종 놀러 오는 같은 학교 여학생들이 윤성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만, 윤성이 그걸 적극적으로 받아주는 걸 본 일이 없다. 여자에 대해 흥미롭게 뭔가를 얘기하는 것도 들은 적이 없고. TV에서 여자 아이돌이나 여자연예인이 나오는 걸 보면서 별 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 하는 일도 잦았다. 이상형이 있느냐고 물어 봤을 때는, 그런 게 있어야 하냐는 식의 얘기를 했다.
고개를 들어 윤성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러면서도 윤수는 이걸 확실하게 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건 윤수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오윤성.”
“응.”
“너, 자위한 적 있어?”
윤수의 말에 윤성이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짓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느리게 반복되는 고갯짓을 시야에 담고 있으니, 척추를 타고 빠르게 소름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뭔지는 아는 데, 한 적은 없어. 하고 싶은 생각을 해 적이 없으니까.
꿀꺽 하는 선명한 소리와 함께 목 안에 굵은 침이 삼켜졌다. 점점이 분열된 머릿속에 절망적인 상념이 들어찼다. 이르면 초등학생 무렵, 늦어도 중학생 무렵에 대부분의 남자애들은 자위를 한다. 그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보면서, 혹은 포르노를 보면서. 그런 기분이 들면 저도 모르게 하게 된다. 그게 일반적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위를 해 본 일이 없다는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성적인 흥분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다가 그런 흥분감을 처음 느낀 대상이 꿈에서 본 윤수. 이건 정상이 아니다.
오윤성. 일어나. 어서. 아까보다 거센 손길로 밀어붙이는 윤수를 한동안 윤성은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이내 눈살을 찌푸린 윤성이 대뜸 자신을 향해 뻗은 윤수의 팔을 쥐었다. 끌어내려간 손목이 시트 위에 단단하게 눌러 붙는다. 손목을 둘러싼 압박이 거세다 못해 부러뜨릴 것처럼 위협적이다. 짧은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오윤성. 너 아까 나한테 준 차. 분연하게 따지는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또 다시 윤성이 입술을 비벼댔다. 안으로 들어오는 혀가 갈증 난 것처럼 점막을 헤집어 댄다. 윤성과 이런 걸 한 것이 몇 번인지를 머릿속으로 헤맸다. 아마도 한 세 번쯤. 처음에는 어찌해야 할 줄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훨씬 더 대담하고 능숙해져 있다. 입 안에 차오르는 더운 숨이 증기처럼 혀에 스며든다.
벗은 하반신 쪽으로 윤성의 손이 내려가는 게 보였다. 허벅지를 여유 있게 쓸어내린 손아귀가 윤수의 성기를 가볍게 쥔다. 문질거리며 매만질 때마다 표피를 타고 퍼지는 감각이 기묘할 정도로 간지럽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없다. 아. 저도 모르게 다소 커다란 신음이 터져 나온다.
“흣, 아. 오윤성. 윤성아. 이거, 좀.”
“기분 좋아? 형. 지금 얼굴 귀엽다.”
“아니, 진짜로. 하으. 좀, 하지.”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몸이 받아들이는 감각은 전에 없을 정도로 나른하다. 온 몸에 각인이라도 새겨진 것처럼 세포 하나하나가 빠르게 반응한다. 자꾸만 소름이 돋아서 어지러울 지경이다. 분명히 문제는 아까의 그 차다. 거기에 대체 정확히 뭐가 들어간 건지가 정답 없는 의문처럼 윤수의 의식을 맴돈다. 완연하게 붉어진 얼굴을 윤성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성기를 움켜쥔 손아귀 밑으로 윤수의 허벅지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만족스럽게 그것을 보고 난 윤성이 문득 윤수의 목덜미를 길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 윤성. 윤성아, 으응.”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달뜬 음성이 입술 밖으로 터져 나왔다. 소리를 낸 스스로가 싫어 절망적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윤수의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형, 흥분한 소리 듣기 좋아. 또 어디 해 줄까. 만족감과 욕망이 묻어 있는 목소리. 그것조차 어딘가 자극적으로 다가와서 윤수는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짧게 떨었다.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물든 얼굴을 미소 띤 채 내려다보는 윤성의 눈동자가 검은 사냥개처럼 빛났다.
입술이 윤수의 유두 쪽으로 이동했다. 작은 돌기를 질척하게 흡입해대는 게 아예 빨아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돌적이다. 하, 아응. 거, 거기. 하지, 읏. 또 다시 튀어나온 음기어린 신음에 윤수는 자신의 성대를 뜯어내고 싶다는 경멸감을 느꼈다. 입술이 빨아대는 돌기가 터질 것처럼 빠르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축축해진 유두에서 입술을 떼어 낸 윤성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꼭 젖 나올 것 같아. 형.
시트를 쥔 손아귀가 치욕감을 머금고 바르르 떨렸다. 밑쪽에서는 윤성이 윤수의 다리를 벌려오고 있었다. 아, 안 돼. 무뎌 져 가는 이성 속에서도 절로 팔이 윤성을 향해 내뻗어졌다. 가볍게 윤수의 팔을 낚아 챈 윤성이 다시 윤수를 몸을 아까처럼 시트 위에 고정시켰다. 윤수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은은하게 말을 건넸다.
“형. 지금 하면 엄청 기분 좋을 거야. 응?”
“제발. 하면, 하면 안 돼.”
“왜 안 되는데, 형. 내가 형 동생이라서?”
태연하게 건네지는 질문에는 애초에 그게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그 당당함에 윤수의 머릿속이 검게 물들었다. 윤수가 혈육이라는 걸 충분히 인지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예사롭게 넘기는 이 애의 태도는 윤석이나 윤혁보다도 훨씬 더 비정상적이다. 그리고 그 비인간적인 행위에 당연한 것처럼 윤수를 끌어들이려 한다. 윤성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핏줄이 거세게 윤수를 당겨오고 있다. 윤성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이 행위의 최후. 지옥.
서서히 몸을 일으킨 윤성이 좀 더 윤수의 다리를 힘 있게 벌려온다. 동시에 자신이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벗어 내리는 모습이 심상하기 그지없다. 이미 윤성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목적뿐이다. 윤수와 섹스를 하고 싶다. 오로지 그것 하나. 내려가는 속옷 틈으로 빳빳하게 귀두를 들고 있는 커다란 성기가 눈에 띈다. 자신의 형을 보면서 저 정도로 발기한 저 아이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깝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그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차마 윤성의 성기를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시야가 어두워진 가운데 벌어진 구멍 틈으로 단단하게 발기한 음경이 파고드는 느낌이 생생하다. 윤혁과 하고난 뒤 간신히 제 모습을 갖췄던 내벽이 다시 위태롭게 일그러져갔다. 하. 짧은 숨이 연이어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벌어진 다리를 가누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들어오는 성기의 무게가 묵직하다. 느릿하게 파고드는 두툼한 귀두를 온 점막이 축축하게 삼켜대는 느낌이 싫었다. 정말로 자신이 좋아서 동생의 것에 박히고 있는 듯한 기분. 이 상태는 위험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윤수가 하염없이 윤성에게 애원 섞인 말을 뱉어냈다. 제발, 그만해. 그만해. 나 이상해. 제발.
소용이 없다. 윤성은 이미 윤수의 내벽을 탐하는 일에만 심취해 있었다. 책상에 앉아 수학문제를 풀 때처럼, 오로지 윤수의 몸에 자신을 새겨대는 것에만 집중한 채였다. 스르르 들어온 귀두가 내벽의 깊은 점막을 지그시 문질러댔다. 뱃속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혈관 하나가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고개가 저도 모르게 뒤로 젖혀졌다.
“아앙, 아. 윤성아. 하, 안에, 으응.”
“형 안이 계속 움찔거려. 나 이거 못 뺄지도 몰라. 형이 너무 세게 삼키고 있잖아.”
“하으. 진짜 이상해. 그만, 제발 좀.”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조여드는 내벽을 조롱하는 것처럼 윤성이 픽 웃었다. 눈시울이 순식간에 후끈해졌다. 달아오른 윤수의 얼굴이 한없이 귀엽다는 것처럼 윤성이 그 볼에 입을 맞췄다. 입술 사이에서 나온 혀가 제법 질척하게 뜨거운 피부를 문질러댔다. 살금살금 스치는 윤성의 혀에 주르르 내려온 윤수의 눈물이 닿았다.
형은 눈물도 맛있네. 부드럽게 말을 뱉은 윤성이 하반신을 치고 들어오는 속도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내벽의 주름을 아래위로 훑어 내리는 기분에 심박수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빨라졌다. 윤수의 점막에 맺힌 점액과 윤성의 귀두에서 터져 나온 쿠퍼액으로 뒤섞인 내벽이 질척하게 윤성만을 위한 통로를 만들었다. 통로를 파고드는 단단한 성기가 쉴 새 없이 점막 이곳저곳을 머금었다. 빼곡하게 조여드는 공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처럼.
분명히 윤성은 처음 하는 것일 텐데, 연신 수축되는 자신의 뱃속이 원망스러웠다. 처음에 찾아 들었던 짧은 고통조차 잊을 정도로 끈적한 간지러움이 하반신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낯설었고, 그래서 무서웠다.
“윤, 윤성아. 나 무서워. 하으, 그러니까.”
“왜, 형. 자지 박히면서 느끼는 게 싫어? 난 보기 좋은데. 형이 나 때문에 야해지는 거 좋아.”
“그런 게, 아읏. 나는, 나는.”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머릿속에 나열된 문장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다. 집요하게 뱃속을 후벼대는 동생의 음경이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찔하게 골반 밑을 저릿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완전히 하반신을 윤성에게 내어 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건 싫었다. 자신은 남자였고, 보통의 인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자극을 느끼는 스스로가 발정 난 개처럼 느껴졌다.
그만, 그마안.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하염없이 내뱉는 애원에 윤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형은 이제 나하고 섹스한 사이야. 내가 형 따먹은 거야. 응? 귓속을 파고드는 다정한 언어는 모순적이게도 윤수에게는 시퍼런 칼날처럼 다가온다. 축축한 눈가에 또 다시 물기가 자욱해졌다. 자신을 따먹었다고 아무렇지도 말 하는 동생에 환멸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스스로가 싫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떨어진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온 건 그렇다 쳐도, 조금만 자신이 똑똑하게 대처했다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오 회장을 감방에 넣겠답시고 방을 뒤지는 멍청한 일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 일단 한 이상 그걸 들키지만 않았어도 오윤석에게 강간당할 일은 없었다.
오윤혁. 애초에 어릴 때 얘기를 해준답시고 덫을 놓은 녀석의 수작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한심할 정도로 순진했다. 게다가 벗어보라는 말에 너무 안일하게 따랐다. 윤혁 입장에서는 이미 윤수가 벗은 순간 상황은 종료된 거였다. 스스로 알몸을 보였다는 게 윤혁에게는 자신과의 섹스를 암묵적으로 동의한 일처럼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오윤성.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성분 모를 차가 원인이다.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테이블 위에 올라오기에 마냥 마셨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저녁에야 알았다. 그러면서도 굳이 형제들에게 진실을 묻지 못했다. 물어봐야 형제들은 언제나처럼 정중한 경계선을 그으며 외면할 테니까. 그래서 윤수도 차마 의구심을 외면하고 말았다.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걸 알고 저도 모르게 위축돼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어쩌면 이 상황까지 스스로를 끌어내린 것은 결국 윤수 본인이었다. 핑계를 대 봐야 소용이 없다. 낯선 집에서 낯선 사람들과 적응하기 위한 과도기에 불거진 실수라며 넘어가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도 컸다. 큰형에게 강간당하고, 자신의 바로 밑 동생과 섹스하고, 그 밑의 동생에게 따먹혔다. 함부로 제 형제들의 하반신을 취한 자가 향할 수 있는 목적지는 오로지 하나였다. 희망이 없는 뜨겁고 어두운 세계. 윤수는 그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형. 형 덕분에 이제 계속 섹스하게 될 것 같아. 물론 형이랑만. 나긋하게 웃은 윤성이 다시 윤수의 유두를 입술에 품었다. 날선 이빨로 살살 짓이겨대는 감각에 유륜에 오톨도톨한 소름이 맺혔다. 흣, 그거 하지 마. 다급하게 내뱉는 윤수의 음성에 윤성이 보다 더 깊숙이 유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이거 좋아하는구나. 형.
내벽을 끊임없이 훑어대던 성기에 틈틈이 달아오른 돌기가 닿았다. 윤성이 그 존재의 정체를 알 리는 없겠지만, 귀두가 그 탄탄한 돌출부에 스칠 때마다 허벅지의 근육이 소실된 것처럼 힘이 빠졌다. 조붓한 공간을 채운 성기가 내벽을 누빌 때마다 뱃속이 순식간에 뭉쳐왔다. 어느덧 꼿꼿하게 세워진 윤수의 성기에서 희미하게 질척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 성기가 있는 곳으로 내려온 윤성의 손이 투명한 쿠퍼액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빙글빙글 엄지를 비벼댔다. 혈관이 돋아 오른 표피 곳곳에 스스로가 분출했던 액체가 묻어났다.
완연하게 팽창한 성기가 보다 힘있게 내벽을 채웠다. 단단한 표피에 돌출부가 닿을 때마다 입 밖으로 희미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응, 앗. 윤성아. 여자처럼 신음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방도가 없었다. 온몸에 번져가는 자극이 머릿속까지 무겁게 짓눌렀다. 차마 이성을 가누는 것이 힘들었다. 더워진 망막 너머로 윤수를 취하는 일에 하염없이 도취된 아이를 봤다. 더 이상 저 꼴을 보는 게 어려웠고, 스스로도 이런 꼴을 보이는 게 저주스러웠다. 차라리 빨리 끝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윤성아. 흣, 나. 나 그냥.”
“응, 형. 얘기 해.”
“싸게, 하아. 싸게 해줘. 제발. 응?”
“그래? 그럼 같이 싸자. 형.”
빙긋 웃어 보이며 건넨 말에 불현듯 머릿속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빨리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윤성은 다른 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윤성이 느릿하게 뱃속에서 성기를 빼냈다. 질척하게 젖어든 표피에 혈관까지 돋아있는 게 현현했다. 설마 싶어 윤수의 손아귀가 파르르 떨렸다.
예상했던 게 맞았다. 솟아오른 커다란 성기가 윤수의 성기와 겹쳐졌다. 아, 그건 싫. 다급하게 고개를 도리질하는 윤수를 보며 윤성이 즐거운 듯 물어왔다. 왜, 형. 싸고 싶다며? 표피가 맞닿은 적나라한 감각에 오금이 저렸다. 내벽을 내준 데 이어 자신의 성기까지 내준 기분이 들었다.
달아오른 두 개의 성기가 윤수의 배 쪽으로 밀착됐다. 윤성의 뜨거운 손아귀가 달뜬 손길로 맞붙은 성기를 빠르게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틈틈이 자신의 성기로 윤수의 것을 지분거렸다. 부풀어 오른 각기 다른 귀두가 닿을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런 걸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 잔인한 감각이 어딘가 짜릿해 발가락이 연신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윤수의 얼굴 가까이 내려온 윤성의 목덜미를 타고 더운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서로의 성기가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자극의 온도점이 올라갈수록 윤수의 얼굴도 점점 더 붉어져갔다. 하아, 으응. 이제, 그만 해도. 읏. 날카롭게 뱉어지는 신음소리는 비명과 닮아 있었다. 배 위에 흩뿌려진 하얀 정액이 뜨거운 것을 넘어 따가웠다. 윤수의 분출물 위로 윤성의 귀두 끝에서 터져 나온 정액이 덮치는 것처럼 스며들었다. 사정을 마친 윤성이 느릿하게 두 명분의 정액이 묻어있는 윤수의 배를 엄지로 어루만졌다. 형, 형은 정액 묻히고 있어도 예쁘다. 윤수의 눈꺼풀이 좌절한 것처럼 빠르게 끌어내려졌다.
윤성아, 너.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 윤성의 고개가 부드럽게 들렸다. 응, 형. 손가락에 묻은 정액을 혀에 지그시 문지르는 모습에 또 다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만 같다. 차마 마주 보기가 어려워 시선을 돌린 윤수가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차, 뭐야. 아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윤성이 정중하게 대답을 거절했다. 음. 안 가르쳐 줄래. 또 다시 걸려버린 경계선. 윤성의 말대로 윤수는 따먹혔고, 윤성은 원하는 걸 취했으니 이제 됐다는 건가. 윤수의 아랫입술이 절망적으로 경련했다.
더 이상 그와 관련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윤성이 대뜸 윤수의 몸을 끌어안은 채 옆에 몸을 눕혔다. 윤수의 볼에 짧게 입맞춤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형한테 좋은 거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윤성의 문장이 머릿속을 연신 웅웅 울렸다. 좋은 거라고, 대체 뭐가. 원인 모를 감각에 취해 동생과 섹스하며 여자처럼 신음하게 되는 게, 나한테 좋은 거라고. 머릿속에서 간신히 다잡고 있던 이성 하나가 소리 없이 뚝 끊겼다.
윤수는 그때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위치인지를. 윤수는 이방인도 아니었다. 이방인은 최소한 손님이기라도 했다. 이 집 남자들에게 윤수는 어쩌면 잠깐 맡아 키우는 애완동물, 내지는 희롱당하기 위해 스스로 찾아온 창부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도 태연하게 내킬 때에만 경계선을 넘나들며 윤수를 농락할 리가 없다.
생각으로 꽉 찬 머리는 무거워서 도무지 가누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맥없이 머리를 시트 위에 기대는 윤수의 머리카락을 윤성의 손길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귓가를 타고 윤성의 나긋한 언어가 흘러들었다. 나 형 사랑하는 거 같아.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목소리에 윤수는 기묘한 공포를 느꼈다. 그 와중에 문득 시야에 들어온 윤성의 허리 밑으로 자글자글한 상처가 눈에 띄었다. 흐려져 가는 사고 속에서 윤수는 아주 잠깐 또렷한 판단 하나를 했다. 오윤성도 몸에 상처가 많다.
24.
갈수록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릇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발자취에 남는다. 흘러 간 자취 속의 인물들은 마치 그것이 당연했다는 것처럼 윤수를 종용해 온다.
일어났을 때 윤성은 없었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윤성이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길게 한숨을 쉬면서 몸을 확인했다. 깨끗하게 닦여진 채 옷까지 입혀져 있다. 윤성이 한 모양이다. 핸드폰을 보니 또 성훈에게서 온 메시지가 한 가득이었다. 확인 안 해도 내용은 알 만했다. 왜 학교에 오지 않느냐, 왜 학보사 일을 챙기지 않느냐와 같은 잔소리 성격의 것들일 터다. 체념 섞인 숨을 터뜨리면서 핸드폰을 협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이제는 이런 것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조차 지겨웠다.
복도를 걷다가 1층을 내려다보니 거실 쪽에서 두 명의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워낙 대화에 집중했는지 2층에서 내려다보는 윤수의 존재는 인지조차 못 한 분위기다. 고개를 좀 더 내밀어 밑을 제대로 확인했다. 윤민, 그리고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생각보다 수치가 안 나오고 있습니다. 텁텁하게 말하면서 중년 남성이 소파 위에 무겁게 걸터앉았다. 윤민은 앉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가던 윤민의 몸이 남성의 맞은편에 우뚝 섰다. 잠시 망설이던 남성이 긴장한 고개를 끌어올려 윤민을 봤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윤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비쳤다. 그 미소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바로 남성이 빠르게 시선을 밑으로 떨궜다.
“홍 선생님.”
“네. 변호사님.”
“그걸 왜 못합니까. 대학 병원에서 20년 동안 근무하셨다는 분이.”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선생님.”
홍 선생님. 어제 식사 자리에서 나왔던 이름. 잠깐 귀국한다던 사람이 이 사람인가. 누구고, 이 가족들과는 무슨 관계지. 윤수의 시선이 소파에 앉아 있는 홍 선생이라는 사람 쪽을 보다 세밀하게 주시한다. 양 손이 꼭 맞닿아 있는 가운데 무릎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한눈에 띄었다. 윤수의 눈살이 의문스럽게 찌푸려졌다. 저 사람, 윤민보다 못해도 스무 살 정도는 많은 사람이 아닌가.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
제가 평소에 선생님 굉장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차분하게 건네진 윤민의 말이 어떤 온도를 띠고 있는지, 윤수는 가늠하는 게 힘들다. 단지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민은 종종 저런 식이었다. 상대방과 명백하게 소통하는 상황에서 매우 예의 있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의중을 숨긴다. 한껏 정제된 언어는 소통하는 것에는 지장을 주지 않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 말에 숨겨진 뜻을 파악해야 하는 또 다른 난관이 있다. 다만 그 어떤 사람도 윤민의 소통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매우 정중하기 그지없는 언사와 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당연하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여전히 윤민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건네 오는 남성의 말에 윤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흘러나온 언어는 더욱 부드러웠다. 국립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는 선생님 아내 분도요. 남성의 얼굴이 천천히 윤민 쪽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름진 얼굴에 허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같은 어조로 윤민이 말을 덧붙였다. 따님이 지금 결혼해서 미국에 있죠. 손주들이 많이 컸던데.
남성의 무릎이 순식간에 빠르게 진동한다. 멀리서 봐도 떨고 있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다. 대체 왜. 남성만큼은 아니지만, 어딘가 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눈동자를 들어 윤민을 봤다. 은은하게 미소 띤 얼굴은 여전하다. 남성을 내려다보며 긴 숨을 내쉰 끝에 윤민이 몸을 돌려버렸다. 상념을 곱씹는 것처럼 무겁게 바닥에 내려앉는 발자취를 멍하니 쳐다보던 남성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거의 무릎을 꿇을 것처럼 바닥을 향해 몸을 숙인 남성이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윤민이 소리 없이 웃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희 사이에.”
담담하게 대꾸한 윤민이 남성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걸어 다시 남성에게 다가간 윤민이 움츠려든 그의 어깨를 차분하게 쥐었다. 나긋하게 팔을 들어 남성의 몸을 일으켜 세운 후, 그 바지자락을 툭툭 털어 주기까지 했다.
“이런 것 하지 마시고요. 품위가 생명이신 의사 선생님께서 아무데서나 몸 숙이고 다니시면 되겠습니까.”
“송구합니다.”
“기존 계획은 그대로 가고, 플랜B 실행합니다. 이미 현지에는 연락 넣어 놨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가서 원래 하시던 역할 해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에 오 전무님께서.”
오 전무. 윤수의 눈꺼풀이 짧게 경련했다. 오윤석을 얘기하는 거겠지. 해외 나간다더니, 오 회장이 있는 러시아에 같이 간 건가. 오 회장이 일을 도와 달라며 부르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지. 들려오는 대화만으로는 상황을 유추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마른 침을 삼키며 거실만 지켜보는 윤수의 시야에 천천히 들리는 윤민의 얼굴이 보였다. 담겨 있는 표정이 자못 서늘하다.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픽 웃고는, 빠르게 미소를 거뒀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 쪽은. 남성의 어깨는 여전히 굳어있었다.
가 보세요. 이만. 윤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성이 짧게 꾸벅해 보이고는 소파에 놓여 진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지금은 어떤 상황인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낮게 숨을 가눈 윤수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문득 뒷발에 닿았던 열린 방문에서 끼익 하는 기다란 소음이 퍼졌다. 아, 하필이면. 윤수의 아랫입술이 날카롭게 깨물렸다.
아래쪽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둘 다 위쪽을 쳐다보는 모양이었다. 최대한 복도에 놓인 장식장 뒤에 몸을 숨겼다. 거의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들어서는 안 되는 대화를 들었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하염없이 장식장에 기대고 있던 몸에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박동의 속도가 금방이라도 심장을 터뜨릴 것처럼 속수무책이었다.
문득 아래층에서 입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나간 건가. 그런데 남성만인지, 혹은 윤민까지 둘 다인지. 그걸 모르겠다. 문소리가 들린 뒤부터 집 안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100년이 넘은 이 집은 커다란 창문을 수시로 열고 다니는 데다, 대리석 바닥을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거닐고 있어 웬만큼 소리가 크지 않은 한 사람의 기척을 느끼기가 어렵다. 마른 입술을 지분거리며 꽤나 긴 침묵의 시간을 견뎠다.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윤민 역시 나간 걸까.
윤수야. 불현듯 나지막한 저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목덜미에 한기가 들었다. 흠칫 고개를 돌리자마자 장식장 근처까지 와 있는 윤민이 보였다. 다소 표정이 없는 얼굴. 아. 다물려 있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말없이 윤수를 내려다보던 윤민이 느릿하게 앞으로 다가왔다. 윤수의 양 어깨를 단단하게 손으로 감싸고는 찬찬히 얼굴을 살폈다. 시선의 온도를 가늠하는 게 어렵다. 아까 홍 선생을 보던 그 낯빛처럼.
“뭐 해, 여기서. 학교 안 갔어?”
“아, 네.”
“네?”
“응.”
몸에 깃들어있는 긴장감을 떨쳐대는 게 버거웠다. 완전히 경직된 윤수를 보면서 윤민이 픽 웃고는 매끄러운 볼을 짧게 어루만졌다. 이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복도를 걸어 일 층으로 내려갔다. 소파에 뒀던 재킷을 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온 집 안을 울렸다. 멍하니 서 있던 윤수의 입 밖으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왜 존댓말이 나왔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 * *
하루 빠진 끝에 다시 찾은 대학 교정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업을 마친 뒤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성훈의 제안을 거절하고, 줄줄이 늘어선 나무들 틈에 자리 잡은 벤치로 가서 앉았다. 눈을 감은 채 온 피부에 닿는 햇살의 샛노란 감촉을 느끼고 있으니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한남동 집과 사뭇 다른 공기와 바람이 온 신경을 따뜻하게 물들이는 바람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일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눈을 뜨는 일이 꿈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일처럼 지난하게 느껴졌다. 느릿하게 펼쳐지는 익숙한 학교의 풍경 사이에 윤혁이 있었다. 말없이 올려다보는 윤수의 얼굴을 한동안 윤혁이 굳게 다문 입술로 응시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쳐가는 사람들의 소음이 소리처럼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진한 정적의 시간이었다.
오윤수. 윤혁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스스로 생각해도 그리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밥 한 끼 굶었다고 이렇게 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좀처럼 결론이 나오지 않는 추측을 하면서 빤히 윤혁의 얼굴만 올려다봤다. 깊은 한숨을 쉰 윤혁이 차분하게 윤수의 옆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보이는 매서운 이목구비가 유독 날카로웠다.
너, 엊그제 밤에 뭐 했어. 불현듯 내 던져진 질문에 윤수의 손등이 흠칫 떨렸다. 엊그제 밤. 그야, 윤성과 방에 있었고. 성분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차에 취해 있었고. 그런 채로, 윤성의 표현에 따르면 ‘따먹혔다’. 피를 나눈 동생과 살을 섞었다. 뚜렷하게 현상된 필름처럼 흘러가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가다 윤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지.
오윤수. 윤혁이 또 한 번 묵직하게 윤수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매서운 얼굴을 다시 봤다. 초점 없는 윤수의 동공을 긴 시간 응시하던 윤혁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하. 꽤나 커다란 한숨 소리와 함께 윤혁의 손아귀가 스스로의 얼굴을 덮었다. 단단하고 긴 팔뚝에서 문득문득 근육이 꿈틀거렸다.
“너, 진짜 이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내가 방법 생각해 볼게.”
건조하게 한 마디 한 윤혁이 윤수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느릿하게 벤치 위를 두드려대는 손가락에 묘한 분기가 스며있었다.
친아버지. 조심스럽게 운을 뗀 윤수를 향해 윤혁이 고개를 들었다. 친아버지가 뭐 어쨌냐는 얼굴이다. 다 얘기하도 되나. 윤수는 불현듯 두려워졌다. 윤수는 그 동안 형제들이 윤수와 자신들 사이에 그은 경계를 모순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경계선 너머로 제한된 정보만 건네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윤수 역시 그 경계를 활용해 드러내고 싶은 만큼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특히 친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대화의 소재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벤치를 딛고 있는 윤혁의 팔뚝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다. 찢어진 건 어느 정도 회복해 다시 경기는 뛸 수 있지만, 무리하면 안 되기 때문에 풀타임은 뛰지 않는다고 들었다. 하얀 붕대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바르르 떨리다가 끌어내려졌다. 오윤혁에게는 어디까지 얘기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윤혁은 이 집 형제들 중 비교적 자신의 정보를 많이 노출한 케이스였다. 본의로든 타의로든. 여자문제에 얽힌 것이라든지, 자신이 기억하는 윤수의 과거에 대한 것이라든지. 때로는 윤수 때문에 싸움에 휘말려 다친 적도 있었고.
“친아버지가 병원에 있는데, 오 회장이 그 사람을 책임지고 있어.”
망설이다 꺼낸 말에 윤혁의 고개가 느릿하게 들렸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이 건넬 수 있는 최대한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집에서 나간다고 하면, 오 회장이 가만히 있지. 거기까지 뱉은 윤수의 말을 불현듯 윤혁이 가로막았다. 오윤수. 살짝 눈살을 찡그린 표정에 어딘가 답답함이 녹아 있다. 윤수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표정이다. 지금 우리 아버지가 문제가 아냐. 윤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좀 생각해보고 다시 얘기해 줄게. 거기까지만 말한 윤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윤수를 일별하고는,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작아지는 새까만 뒤통수에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 집에 있으면 안 된다고. 윤수도 그걸 안다. 어쩌면 첫날 밤 오 회장에게 강제로 안겼을 때부터 윤수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윤수는 한남동에 살고 있다. 저택의 담장을 에워싼 덩굴처럼 보이지 않는 단단한 줄기가 윤수의 몸을 붙들고 있다. 도망치는 게 어렵다. 느슨하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아까 윤혁이 했던 말이 눅눅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지금 오 회장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내가 이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진짜 이유는 뭐지. 꼬리를 무는 의문이 퇴적되다 만 모래처럼 불완전하게 뇌리에 쌓인다. 그 무게가 한없이 힘겨워, 윤수는 한동안 불 꺼진 등대마냥 하염없이 자리를 지켰다.
25.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에 앉아있는 윤성의 뒤통수를 봤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젊은 남성은 언제나 오 회장의 곁에 붙어 다니던 조 비서라는 사람이다. 저 사람도 귀국한 건가. 홍 선생처럼 일시적으로, 아니면 계속. 주춤거리며 현관문을 어루만진 채 두 사람을 응시했다. 이 집은 현관문을 닫는 소리는 커도 열리는 소리는 작은 편이라, 제대로 신경 쓰지 않으면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황을 보니 둘 다 윤수가 문 여는 소리는 못 들은 모양이었다.
말라 있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조 비서를 향해 윤성이 차분하게 얼굴을 들었다. 강제로 조 비서와 시선을 맞추다시피 한 윤성이 입술을 열었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눈빛. 기시감이 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학교에서였다. 윤성이 학교에서 선생을 볼 때의 눈빛과 굉장히 흡사하다.
“제가 어려운 거 얘기했어요? 아니잖아요. 비서님.”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 제가 좀.”
낮은 숨을 가누다 고개를 돌리는 비서의 눈빛이 불안정하다.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묵직한 남성이 어린 고등학생에게 쩔쩔매고 있는 꼴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잠시 조 비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윤성이 무릎 위에 올린 팔에다 제 턱을 괴고는,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을 대로 하세요. 그럼. 조 비서님이 선택한 거예요. 나중에 어떻게 되든, 그것도 비서님 몫이죠. 뭐.”
“제가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뭐를요.”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다시 비서 쪽을 쳐다보는 윤성의 얼굴에는 미소를 넘어 선 조소가 맺혀 있다. 정말이지 흥미로워서 죽겠다는 얼굴. 그 얼굴을 보면서 짧게 입맛을 다신 조 비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도련님. 떨어지는 말끝이 썼다.
생각이요? 지금 이 상황에서? 윤성의 말투가 다소 고조됐다. 조 비서의 말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 동안 반달눈을 해가며 웃는다. 조 비서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밑으로 숙여지는 얼굴에 체념이 담겨 있다. 불현듯 몸을 일으킨 윤성이 조 비서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애완동물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뻣뻣한 머리카락을 한번 스치듯 배회한 윤성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와, 진짜. 우리 조 비서님. 방금 한 얘기 다시 해 봐요. 정말 웃겼으니까.”
“오윤성.”
빠르게 터져 나온 윤수의 말에 윤성이 고개를 돌렸다. 이내 특유의 해사한 얼굴을 지어 보이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태도가 전환되는 게 빛의 속도처럼 순식간이다. 마땅히 정해진 역할을 소화하는 베테랑 연극배우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뭐야. 형.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나긋하게 건네 오는 언사에 윤수는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어른한테. 최대한 침착하게 경고를 건네며 조 비서 쪽을 힐끗 봤다. 역시 윤수를 보고 있던 조 비서와 일순간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얼굴이 다급하게 돌아갔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얼굴이 빠르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다 봤었다. 나름 시간이 흘러버린 일이라 윤수도 그 사이에 잊고 말 뻔 했다.
소리 없이 곁으로 다가 온 윤성이 세차게 윤수를 끌어안았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과 방금 본 윤성의 얼굴이 겹쳐서 바로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안간힘을 써가며 몸을 빼낸 윤수를 사랑스럽다는 듯 눈에 머금은 윤성이 여유 있게 웃었다. 아냐. 그런 거. 윤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런 게 뭔데.
조 비서님. 윤성이 조 비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지못해 들리는 조 비서의 얼굴에서 고통이 비친다. 도살장을 눈앞에 둔 소 마냥. 두렵고 어려운데 피할 길이 없어 간신히 따르는 듯한 느낌. 제가 비서님께 뭐라고 했어요? 다정하게 건네오는 윤성의 질문에 조 비서가 경직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거 봐. 형. 대수로울 것 없다는 얼굴로 윤수의 팔을 잡아 끈 윤성이 식탁으로 향했다. 우리 형 뭐 좀 먹어야겠다. 가볍게 중얼거리는 말에 윤수의 턱 끝이 순간적으로 전율했다. 거의 반강제로 윤수를 식탁 위에 앉힌 윤성이 조 비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나가는 강아지를 부르는 것도 저보다는 다정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할 얘기 끝났으니 가 봐요, 조 비서님. 생각, 그거 잘 해보시고요.”
윤성이 또 픽 웃었다. 저게 뭐가 재밌는 거지. 도무지 그가 웃는 포인트를 이해할 길이 없다. 난처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던 조 비서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터덜터덜 입구를 향하는 두터운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조 비서의 손을 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강렬하게 거실을 울렸다. 윤수로부터 등을 돌린 윤성이 부엌 쪽으로 다가갔다. 조리사 누나가 토마토 스튜 해 놓고 갔어, 엄청 맛있어. 다정다감하게 건네는 말이 윤수의 귓바퀴를 타고 흩어지는 물방울처럼 희미하게 번졌다.
윤성은 갈수록 예측 불가능하다. 윤수에게든. 타인에게든.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데 윤수에게만 숨겨온 것인지, 19세의 빠른 성장기에 그런 특성이 자리 잡은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저 애가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눈앞에 하얀 접시 하나가 올라왔다. 붉은 토마토 스튜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름기가 조명을 받아 반지르르하게 빛났다. 수저를 들 의지도 기력도 없어 초점 없는 동공으로 하염없이 기름의 이동경로를 눈으로 훑기만 했다. 좀처럼 음식에 다가가지 않는 윤수를 본 윤성이 직접 먹여주려는지, 수저가 담겨 있는 케이스에 손을 가져갔다. 케이스 옆에 놓인 하얀 주전자가 문득 눈에 띄었다. 매끈한 곡선을 타고 올라온 끄트머리가 조명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다. 윤수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경련했다. 달달 덜리는 입술 사이로 맥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거, 이제 안 마실 거야.”
“그거? 뭐?”
의아한 얼굴의 윤성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테이블을 둘러보고는, 이내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숙여졌다 올라갈 때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길들여진 존재에 만족하는 것처럼. 고갯짓을 멈춘 윤성이 태연하게 말했다. 응. 먹지 마. 이제 형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이제 안 먹어도 된다고. 방금 들은 말을 하나하나 되새기는 머릿속이 복잡하게 일그러져간다. 분명히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 그 문장에 붙어있는 사족 비슷한 것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걸 불편하게 만든다. 이제는, 이라는 말이. 스튜가 담긴 그릇에서 올라온 수저가 윤수의 입가를 향했다. 마지못해 한 입 먹고는, 그 다정한 얼굴을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마주친 시선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윤성이 흐드러지게 웃어가며 윤수의 얼굴을 시야에 담았다.
“너, 엊그제 왜 그랬어.”
“얘기했잖아. 그러고 싶었다고.”
“그러고 싶으면 다 하는 거야? 그건 범죄야.”
“응. 그렇구나, 범죄였구나.”
비꼬듯이 중얼거린 윤성이 다시 스튜가 담긴 접시에 스푼을 담갔다. 윤수가 뭐라고 하든 듣기 싫은 건 취급하기도 싫다는 식이다. 비로소 알 것 같다. 학교 선생들이든, 친구들이든, 조 비서든. 그들이 매번 윤성에 제대로 맥을 못 추는 건 몸에 밴 것처럼 예사롭게 상대방을 무시하는 저 태도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 같은 위압은 윤성과 타인 간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적 특성이 전제됐을 때에만 유효한 일이다. 단순히 타인을 무시하는 것만으로 사람이 위축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윤성이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보다 철저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어서다.
윤수는 윤성과의 관계에 있어 그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서열을 정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같은 동복형제. 그것이 전부다. 그런 관계에서 서열이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윤수는 이 상황에서 묘하게 스스로가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26.
너, 이 집에 있으면 진짜 안 될 것 같아. 낮에 윤혁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윤혁이 허물었던 경계선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였다. 이제는 서로의 경계를 서로가 터주는 만큼만 침투하는 일이 형제들과의 암묵적인 약속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시간은 새벽 2시를 지나가는데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갔다. 윤성과 윤민의 방을 지나쳐 윤혁의 방이 있는 쪽으로 갔다. 거기까지 향하는 동안 윤수의 내면에서 수많은 갈등이 물에 떨어진 물감처럼 번져갔다. 분명히 얘기해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물어보자. 아니다. 어차피 얘기해 주지 않을 건데 성가시게 물어보는 것은 자존심을 상처 내는 일만 될 뿐이다. 아니다. 그래도 물어보자.
결국 이긴 것은 그래도 물어보자는 쪽이었다. 윤혁의 방문 앞에 내딛은 발목이 괜히 시큰거렸다. 분명히 자고 있을 거다. 그래도 깨워서 물어보기로 했다. 답을 듣든, 듣지 않든 어느 쪽이라도 대답을 얻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거운 손목을 들어 문을 두드리고 기다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못 들었나 싶어 또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역시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은 텅 비어 있다. 아예 안 들어온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지난번에도 나갔다가 엄청 늦게 들어왔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 들어 밤마다 바쁜 윤혁의 행보는 의아할 지경이다. 평소에는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며 자정 이전에 꼬박꼬박 자던 사람이다. 문을 닫자마자 긴 한숨이 뱉어졌다.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일 층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현관을 나서 정원으로 나왔다. 날이 제법 쌀쌀했다. 가을의 초입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제법 온기가 느껴지는 계절이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어서 정원만 서성였다. 커다란 소나무를 타고 들려오는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는 윤수가 이동할 때마다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도무지 기분이 나빠 정원에 있을 수가 없었다.
정원을 떠나 있을 만한 곳을 떠올리다가, 문득 언젠가 봤던 비닐하우스 같은 곳을 상기했다. 윤민이 가지 말라고 했던 곳. 아버지가 싫어하신다면서. 그래 봤자 지금은 오 회장이 집에 없으니 상관없을 거다. 그 생각을 하자 발걸음이 절로 뒤뜰을 향했다.
저번처럼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좁은 골목을 걸었다. 뒤뜰에 다다르자마자 저번보다 부쩍 초라해진 나무 한 그루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시선을 돌려 반대편을 봤다. 제법 잘 꾸며 진 식물원 같은 비닐하우스. 천천히 그 쪽을 향해 걸었다. 입구에 달려 있는 명패. 이타노. 흘깃 보고는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잠겨 있지 않은지 바로 열렸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가운데 낙엽을 닮은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언제나 마시던 차에서 맡던 그 향이다. 핸드폰을 들어 안을 샅샅이 비췄다. 들쑥날쑥 자리 잡은 자리 잡은 이름 모를 풀들. 8평, 아니면 10평이나 될까. 그리 넓지 않은 공간 안에 똑같이 생긴 풀들이 한 가득이다. 고개를 숙여 풀의 머리 쪽을 살폈다. 처음 보는 것이다. 가운데에 파란 봉오리가 있고, 그 주변을 역시 파란색 잎사귀가 꽃잎처럼 두르고 있다. 어떤 풀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잎을 하나 따서 냄새를 맡아 봤다. 코끝을 아릿하게 만드는 텁텁한 향이다. 입 안에 넣고 짧게 씹었다. 씁쓸하고 기분 나쁜 맛이 순식간에 입 안에 번졌다. 빠르게 뱉은 뒤 바닥에 떨궜다.
매일 마시던 차는 아무래도 이걸로 만드는 모양이다. 만드는 사람은 윤성인 듯하고. 문득 사진을 찍으면 식물 이름을 알려주는 어플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앱을 검색해 설치하고, 주변을 둘러싼 풀을 카메라에 담았다. 풀의 이름을 분석하는 동안 0부터 100까지 올라가며 진행속도를 알리는 숫자가 유독 느리게 변했다. 마침내 100까지 다다른 분석 진행화면이 넘어가고, 뚜렷한 이름이 화면에 담겼다. 대마초.
윤수 형. 순간 뒤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윤수의 허리를 둘러쌌다.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맥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들고 있던 손이 주체 없이 떨렸다. 방금 본 것을 믿기가 어렵다. 꽤나 긴장한 윤수의 상태를 알면서도 윤성이 자못 태연하게 물어왔다.
“왜 왔어? 여기는.”
“오윤성. 이거 다 뭐야.”
여전히 전율하는 고개를 돌려 윤성을 봤다. 어두운 가운데 드러난 이목구비가 어딘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마초. 대마초라고. 이런 걸 버젓이 키우는 집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건가.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윤성은 답이 없었다.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혹은 이미 알면서 뭘 묻냐는 듯이. 아니, 어차피 알아도 윤수와는 별 관계도 없다는 듯이.
하. 낮은 숨을 뱉은 윤수가 거칠게 윤성의 어깨를 밀쳤다.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윤수의 팔을 윤성이 빠르게 휘어잡았다. 힘을 실어 윤수의 몸을 끌어당긴 윤성이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윤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 형.”
“너희들 미쳤어. 어떻게 이런 걸 집에 들여. 정신 나갔어?”
“우리가 집에 들인 거 아닌데.”
귓가에 닿는 윤성의 심상한 목소리에 마른 침이 삼켜졌다. 나른하게 윤수의 눈가에 살짝 입을 맞춘 윤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건데, 이 집에. 하. 윤수의 입술이 허탈하게 떨어졌다.
“원래 있었다고? 정신 나간 새끼들. 아주 대대로 미쳤구나.”
“음. 그래도 우린 안 해. 별로더라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여전히 태연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안 한다고. 형제들은 하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그게 맞다 하더라도 윤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그건 부차적인 문제니까. 그들은 집에서 대마를 키웠다. 이런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건 사실상 마약중독자나 도덕성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밖에 없을 거다.
윤혁이 얘기 했던 이 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왔다. 정말로 나가야 했다. 한 시도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휘어 잡힌 팔을 어떻게든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윤수를 윤성이 보다 세게 압박해왔다.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윤수의 귓속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왜 그래. 형.”
“이거 놔. 나갈 거야.”
“뭘 나가.”
“나갈 거라고. 이딴 집에서.”
날카롭게 내뱉은 말에 윤성의 손목이 팔뚝에서 스르르 풀어져갔다. 대신 힘을 실은 양 손아귀가 윤수의 어깨를 쥐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악력이 지나치게 셌다. 윤수의 눈살이 바로 일그러졌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윤성의 입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 한 번만 더 같은 말을 내 뱉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양 살기까지 녹아있다. 있는 힘껏 윤성의 팔목을 후려친 윤수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나간다고 했잖아. 비켜.
어깨를 감싸 쥔 손아귀는 생채기까지 내면서 달려드는 손길에도 굳건하다.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윤수와 붙들려는 윤성 사이에서 짧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당연하게도 이긴 건 윤성 쪽이었다. 윤성이 더 체구가 큰데다가 악력까지 셌으며, 반면 윤수는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나날이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다. 애초에 의미 없는 몸싸움이었다.
완전히 기선을 제압한 윤성의 몸이 윤수를 빠르게 바닥에 밀어뜨렸다. 딱딱하고 서늘한 바닥 위에 윤수의 등이 닿았다. 고개를 돌리니 오밀조밀 자리 잡은 대마초가 짙은 낙엽 향을 풍기며 윤수를 응시하는 게 한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온 몸이 송연해졌다.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끔 위에서 억누른 채, 윤성이 천천히 윤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윤수의 입 밖으로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오윤성, 이거 놔. 무시하듯 윤수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춘 윤성이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왜 고집을 부려, 형.”
사면이 어둠이었다. 볼 수 있는 게 지극히 제한적이다. 희미하게 떠있는 달빛을 통해 간신히 주변을 둘러 싼 사물의 실루엣을 읽을 수 있는 정도. 딱 그 수준이다. 보이는 게 없으니 막연한 두려움만 더 커진다. 게다가 평생 접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식물이 감시하듯 자신을 에워싼 것이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정체 모를 공포감에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가운데 귓불에 얼굴을 갖다 댄 윤성이 작은 살집을 조물조물 씹어 대는 게 느껴졌다. 축축한 소리가 귓속을 스밀 때마다 새삼 소름이 돋았다. 제발, 여기서 좀 나가게 해달라고. 애처롭게 터진 음성에 윤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무서운가 보네. 귀엽다. 형.
귓불에서 떨어져나간 입술이 윤수의 입가로 향했다. 엷은 피부를 잘근거리며 깨문 끝에 안으로 거칠게 혀를 집어넣었다. 어떻게든 고개를 빼보기 위해 목덜미에 힘을 줬다. 소용이 없다. 안쪽에서 윤수의 이빨이며 혀, 점막까지 모든 부위를 쓸어내리는 혀 놀림은 좋아하는 사탕을 핥아 대는 아이 같다.
흐읍. 연신 괴로운 소리를 터뜨리는 윤수를 알아챘는지, 윤성이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자유를 찾은 입가에서 절로 밭은 호흡이 터져 나왔다. 오윤성.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분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윤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응. 하지 말라고 했지. 범죄라고. 이내 픽 하고 터뜨려지는 웃음소리.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는 투다. 윤수가 얘기한 것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느낌. 애초에 범죄인지 아닌지 조차는 아예 관심도 없다는 느낌. 윤성의 혀가 스치고 간 윤수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붙는다.
부탁이야. 제발 나가게 해줘. 바들거리며 건넨 말에 윤성의 움직임이 부쩍 멎는다. 한 동안 생각에 잠긴 것처럼 정지해있던 윤성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불쾌함이 역력하다.
“실망이야, 형. 내가 이렇게 좋아해주는데. 형은 나간다는 소리나 하고.”
난데없이 윤수의 턱 밑으로 윤성의 손아귀가 찾아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시야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원하는 위치를 찾았다. 어림짐작으로 보이는 대상의 위치를 계산하면서 손을 가져가고 있는 거다. 그 계산력에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목젖이 존재하는 곳에 양 엄지손가락을 가져간 윤성이 있는 힘껏 기도를 압박해대기 시작했다. 목 안에서 비명이 번져갔다.
윤성아. 아, 크흡. 달달 진동하는 팔뚝이 절박하게 윤성의 손아귀가 있는 쪽으로 올라갔다. 끝내 미치지는 못했다. 채 닿기도 전에 맥을 잃고 축 늘어졌다. 시야를 장악하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느릿하게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에는 분노와 즐거움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형. 여기에 있으면 내가 평생 형 예뻐해 주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줄 텐데.”
나긋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건반이 망가진 피아노에서 연주되는 것처럼 엉망진창 귓속에서 번진다. 허공에 붕 뜬 양 온 몸의 감각이 아득해진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윤성아, 나. 흐읍. 제발, 살려.”
“계속 여기에 있을 거지? 있겠다고 얘기해. 잘못했다고. 그러면 놔 줄게.”
온몸의 핏기가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숨구멍이 공격적으로 조여드는 가운데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정신 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팽팽해졌다. 그 와중에 남아있는 일말의 이성이 윤수 스스로에게 질문을 건네 온다. 계속 이 집에 있을 자신이 있겠냐고.
좀처럼 답을 하지 못하는 윤수의 입가에 윤성의 차가운 입술이 찾아든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입술을 축축하게 적시고 난 윤성으로부터 또 한 번 묵직한 혀가 들어왔다. 점점 더 차가워지는 윤수의 입 안 곳곳을 질척하게 쓸어낸 윤성이 다정하게 웃으며 물어왔다. 응? 말해야지. 형.
힘이 빠진 다리가 순간순간 위쪽을 향해 다급하게 무릎을 세운다. 하염없이 삼켜대는 바닷물 속에서 어떻게든 나가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입 안을 채운 윤성의 혀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형. 빨리 얘기해. 나 이러다가 정말 우리 사랑하는 형 죽이면 어떻게 해. 목구멍을 옥죄던 손가락이 지그시 안쪽에 힘을 줬다.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 줄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귓속을 커다랗게 울렸다.
“잘못, 으읍. 잘못 했어. 큽.”
“이제 안 갈 거지? 형,”
“안 나갈, 안 나갈 거. 흐으.”
완전히 숨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머릿속을 지배할 무렵, 비로소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아귀가 스르르 풀려갔다. 참았던 숨을 빠르게 몰아쉬며 고개를 가누는 윤수의 눈가에서 더운 물기가 파르르 번졌다. 연신 떨어대는 윤수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어루만지면서 윤성이 귓가에 따스하게 속삭였다. 그러게. 처음부터 말 들었으면 좋았잖아. 형.
* * *
하루 종일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꿈속에서는 단단한 올가미에 목덜미를 사로잡혀 끊임없는 공포에 떨었다. 올가미는 풀릴 만하면 다시 윤수를 에워싸고, 풀릴 만하면 다시 압박해 왔다.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처럼.
오윤수. 묵직하게 들려오는 저음에 눈을 떴다. 희미하게 열리는 시야에 기다랗고 탄탄한 남자의 실루엣이 담겼다. 아, 오윤혁. 힘없는 숨소리를 가누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에 힘이 들어가자마자 지긋한 고통이 온 몸을 에워쌌다. 읏. 빠르게 눈살을 구기는 윤수를 의아한 듯 살펴보던 윤혁이, 깊은 한숨을 쉬며 절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야, 너 진짜. 차마 못 볼 것을 봤다는 얼굴로 윤혁이 다가왔다. 턱 밑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얼굴 아래 자리 잡은 목덜미를 살짝 매만졌다. 아. 맹렬한 탄성과 함께 윤수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건 또 누구야.”
“하. 만지지 마. 진짜.”
“야. 이건 만지고 안 만지고의 문제가.”
분연히 말을 쏟아내던 윤혁의 입이 질끈 다물어졌다. 그만 두자는 얼굴로 짧게 윤수를 응시한 끝에 몸을 일으켰다. 말없이 윤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한 마디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잡한 감정이 맺혀 있다. 영문을 몰라 그저 바라만 보는 윤수의 팔목을 갑자기 윤혁이 덥석 잡았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는 통에 그만 몸이 앞 쪽으로 엎어질 뻔 했다. 윤수의 입술이 다급하게 열렸다.
“야. 뭐하는 거야.”
“일어나. 옷 챙겨 입고. 중요한 짐 챙겨.”
담담하게 건네는 윤혁의 명령은 도무지 의도를 알기 어렵다. 의아함에 윤수의 눈가가 사르르 일그러지기 시작했을 때, 보다 확고한 윤혁의 언어가 찾아들었다. 여기서 나가자.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