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사남 오윤혁 (4/11)

4장. 사남 오윤혁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근친상간, 동성애, 수간. 레위기에서는 이런 것들을 얘기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혈육이나 동성, 동물과 하는 이들을 어떻게 사람이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선택한 겁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삶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를 따라 단 한 번 나갔던 교회에서 근친상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근친상간이 뭐예요.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그런 걸 물었더니 어머니는 오히려 그런 걸 어디에서 들었냐며 따지고 들었다. 아까 갔던 교회 목사가 그랬는데, 근친상간을 하면 지옥에 간대요. 깊게 탄식한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면 안 돼. 정말 지옥에 가게 된단다. 말을 맺은 어머니의 입술이 짧게 경련했다.

교회는 이후로 가지 않았고, 당시 목사가 지껄였던 얘기들의 상당수도 시간에 쓸려 잊어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근친상간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두고두고 기억하게 됐다. 딱히 그 문장이 인상에 남아서라기보다는, 그때 그것을 경고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계속 떠올라서였다. 당시 어머니의 얼굴에 맺혀있던 혐오는 윤수 입장에서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다만 그 혐오가 정확히 어디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에는 윤성과 약속했던 대로 그가 다니는 과학 고등학교에 찾아갔다. 이동하는 내내 죽은 듯이 택시 뒷좌석에 기대 창밖만 바라봤다.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이 윤수만을 제외하고 버젓이 흘러가는 세계인 양 낯설었다. 어제 있었던 일은 연필로 적힌 문장처럼 지운다고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무겁게 윤수의 발목을 잡았다. 무게감의 온도가 낮아질수록 점점 더 발목이 무거워졌다.

택시가 내려준 곳에는 커다란 정문이 있었다. 지그재그 나열된 현수막에는 어디어디 수학경시대회, 혹은 어디어디 과학경시대회 대상에 누구와 같은 글자들이 가득했다. 예사롭게 올려다보던 현수막의 글자들에 어딘가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인지한 순간 바로 소름이 돋았다. 수십 개의 현수막에 적힌 이름들 중 유독 하나의 이름만이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오윤성. 오윤성. 오윤성, 또 오윤성. 대부분이 오윤성의 이름이다.

이 학교는 윤수도 익히 알고 있는 이과 분야 수재학교였다. 이런 학교 출신 한 명이 거의 독점적으로 여러 개의 전국 대회에서 수상하고 있는 거다. 비정상적이었다.

3학년 2반. 윤성의 교실이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몰랐고, 이왕 온 김에 윤성의 얼굴도 확인할 겸 교실을 살짝 들러봤다. 얼굴을 빼꼼하게 내밀어 본 교실 안쪽에서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방과 후 자습시간인 모양이었다. 남자교사 한 명이 교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모든 아이들이 교과서를 보며 뭔가를 필기하고 있었다. 윤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봤다, 비교적 끄트머리의 창가 자리에 익숙한 뒤통수가 있었다.

윤성은 필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턱을 괸 채 말 없이 창가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눈 파는 것이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다 못한 교사가 결국 한 마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윤성. 어딜 봐.

묵직한 말 한 마디에 윤성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아이들이 필기하던 걸 멈추고 전부 윤성 쪽에 시선을 뒀다. 저게 저 정도로 모두가 주목할 일인지 새삼 의아해졌다. 교사한테 혼이 났는데도 윤성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 있게 웃어 보이며 교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선생님. 할 일 하세요. 그냥. 저는 제 할 일 제가 알아서 잘 하니까. 건네 오는 말투는 미성년자의 그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게감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킥킥 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얼굴이 붉어진 교사가 들고 있던 교과서로 빠르게 탁자를 내려쳤다. 뭘 웃어. 책이나 봐, 새끼들아.

윤수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교사에게 하극상을 벌이는 남학생을 몇 명인가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 질이 안 좋은 학생들이었다. 굳이 교사에게만 국한한 게 아니라, 어딜 가든지 상대방에게 시비를 걸 준비가 돼 있는 그런 부류들이었다. 윤수가 아는 한 오윤성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낯설었다. 교사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라는 우려가 들었다. 교사 쪽을 막 돌아간 시선이 문득 그와 마주쳐졌다.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교사가 앞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어, 윤수 형. 윤성이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걸어온 윤성이 미소 띤 얼굴로 윤수의 몸을 끌어안았다. 쳐다보던 교사의 낯빛에 당혹감이 현현하게 걸렸다. 멋쩍은 기분에 윤수의 손이 절로 윤성의 어깨를 밀었다.

“윤성아. 하지 마, 학교에서.”

“응? 뭐가.”

“미안. 교무실로 바로 갔어야 했나 봐.”

저기, 누구신지.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물어오는 교사의 얼굴이 사뭇 불안해보였다. 대답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불쑥 옆에서 윤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형이에요. 친형. 입가에 걸리는 미소에 만족감이 실려 있다. 고개를 갸웃한 교사가 한 번 더 물었다. 친형이 여기는 무슨 일이신데요. 역시 윤성이 대신 답했다. 오늘 면담 있는 날인데 저는 형 불렀거든요. 선생님. 저 형이랑 교무실 좀 다녀올게요.

적절하지 않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습시간이었고, 방금 윤성은 한 눈을 팔다가 혼까지 난 상황이었다. 당연히 교사는 보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난처해하며 윤성을 보던 교사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다시 열렸을 때는 일말의 체념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 기인한 것은 자포자기나 황당함 등과는 달랐다. 윤수는 그의 얼굴에서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 해라. 윤성이, 다녀오고. 예상과 전혀 다른 답변이 교사의 입에서 나왔다. 오히려 윤수 쪽이 민망해졌다. 네, 선생님. 빠르게 응답한 윤성이 다짜고짜 윤수의 팔을 휘어잡았다. 역시나 악력이 셌다. 윤수의 팔을 끌어대면서 계단을 차곡차곡 내려가는 윤성의 옆얼굴이 꽤나 기분 좋아보였다. 말없이 윤성의 보조에 맞춰서 내려가던 윤수가 끝내 그 팔을 뿌리쳤다. 정말로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윤성아. 너 그냥 교실로 들어가.”

“싫어. 선생님도 된다고 했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그리고 너, 왜 선생님한테 버릇없이 굴어.”

“그러면 안 돼?”

갑자기 윤성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건네 오는 시선에는 윤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며있다. 단순하게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거나 하는 것이었다면 수긍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표정은 그런 것들과 달랐다. 윤성의 얼굴에 스민 감정은 의아함과 닮아 있었다. 정말 왜 윤수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 학교 선생들은 다 형편없어. 나보다 똑똑한 사람도 없고. 뭐 하러 그런 사람들 말을 들어.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윤성의 말에 윤수는 모근이 수축되는 것만 같았다. 윤성아, 너 진짜. 어떻게 설득해야 할 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황망하게 쳐다만 보던 윤수의 몸을 윤성이 세차게 끌어안았다. 아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형이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형이 좋으니까 상관없어. 형은 나한테 그래도 돼. 이제 교무실 가자. 응? 흐드러지게 웃어 보인 윤성이 다시 윤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찾아간 곳에는 윤성의 담임인 듯한 여자교사 한 명이 집중해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저희 형 왔어요. 윤성의 말에 여자의 어깨가 놀란 듯 흠칫 들렸다.

“어머. 진짜로.”

“안녕하세요. 윤성이 형 오윤수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윤성이가 올 지 말지 모른다고 해서. 시간을 제대로 안 잡아 놨었거든요. 와서 다행이네요. 윤성아, 그만 들어가 볼래.”

“네. 선생님.”

예의 있게 고개를 숙인 윤성이 교무실을 빠져 나갔다. 윤수의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 쉰 담임이 의자 하나를 내줬다. 자리에 앉아서 맞은편의 담임을 봤다. 사뭇 얼굴이 앳돼 보였다. 그야 직업이 있으니까 윤수보다 나이가 많긴 하겠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완전히 윤성이 친형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그러니까 어머니만 같습니다.”

“그렇구나. 윤성하고는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그런가.”

“그렇게 적은 차이도 아니에요. 제가 올해로 스물넷이거든요.”

“아. 동안이시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담임이 멍하니 다시 노트북 쪽을 봤다. 시선이 제법 공허하다. 백지처럼 새하얀 얼굴에서 많은 감정이 묻어난다. 한 단어로 집약하기에는 어렵지만, 그녀에게서도 아까의 남교사의 얼굴을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읽히는 것만 같다. 그들의 얼굴에 맺혀 있는 공통적인 색채. 두려움.

저기,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담임이 천천히 운을 뗐다. 그녀의 아랫입술이 순간적으로 살짝 떨렸다. 우리 학교는 대대로 모범생들만 모이는 곳이고. 크게 튀는 아이가 없었어요, 원래. 문제를 일으키는 애들도 없고. 보통은 그냥 공부만 하고 차분한 애들만 모이는 곳이라. 명문 고등학교니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수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윤성이가 오고 나서부터, 학교 분위기가 좀.”

“윤성이가요.”

“이걸 뭐라고 설명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좀 붕 뜬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요. 물론 윤성이는 머리가 굉장히 좋아요. 아시겠지만, 그냥 영재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대학 석박사 정도는 스스로 학습하는 애니까. 솔직히 교사 입장에서 버거워요. 차라리 작년에 조기 졸업을 하는 게 맞았을 텐데, 본인이 학교를 더 다니고 싶다면서 그런 것도 안 해서.”

말을 끊은 담임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에 긴장감이 어려 있다. 윤수에게 어디까지 얘기하는 게 맞는지를 속으로 계산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이왕 기회가 생겼을 때 가능한 만큼 하소연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동시에 비쳤다. 윤수는 어딘가 그 가녀린 존재에 동정심이 일었다.

“윤성이에게 있어서 학교를 다니는 건, 솔직하게 제 생각에선 일종의 오락 같아요. 그 나이 대 남자애들이 게임하는 것처럼 말이죠. 얻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거예요. 그게 재밌으니까. 그런 윤성이를 따르는 애들이 있어요. 주로 남자 애들. 여자 애들도 좀 따르고요. 솔직히 애가, 딱 봐도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잖아요. 아무튼 그런 애들이 중심이 돼서 교사들을 무시하고, 이런 분위기가 자꾸 형성되는데. 그게 참, 뭐라고 해야 할 지. 죄송해요. 제가 말씀드리고도 창피하네요, 진짜.”

“아닙니다. 윤성이한테는 제가 잘 얘기할 게요.”

“저 정말로 윤성이를 컨트롤하는 게 힘들어요. 심지어 작년에는 그런 사건도 있고 해서.”

담임의 마지막 말에 윤수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작년의 그런 사건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좀처럼 파악이 되지 않았다. 사실 윤성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떠올릴 만한 일화가 없다. 윤성은 그 동안 한 결 같이 윤수를 향한 맹목적인 호감만을 표시해 왔다. 그게 다였다.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별로 없다. 윤수가 아는 것이라곤 박찬욱과 김지운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과학고에 다닌다. 거기까지다. 윤성이 이렇게까지 공부를 잘 하는 지도 윤수는 방금 학교에 와서 알았다.

모르시는군요. 눈앞에서 느릿하게 담임의 입술이 떨어졌다. 담임의 얼굴에 하나의 감정이 중첩됐다. 불안함. 윤기 없는 눈동자로 윤수의 얼굴을 한 번 살핀 담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윤성이는 작년에 사람을 죽였어요. 다리 위에 올라와 있던 윤수의 손아귀가 지긋이 무릎을 움켜쥐었다.

* * *

자율학습을 마친 윤성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윤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이 형제들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굳어있는 화석처럼 창밖만 보고 있는 윤수의 얼굴에 윤성의 시선이 닿았다. 스르르 들어온 팔이 문득 허리를 둘렀다. 소스라치게 놀란 윤수가 윤성의 손목을 쥐었다. 왜 그래. 반사적으로 밀어 내는 윤수를 보며 윤성이 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왜 계속 창밖만 봐, 형. 나는 본 척도 안 하면서. 불만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에 차마 대꾸할 말을 찾는 게 어렵다. 너, 작년에 왜 그랬어. 반쯤 열린 윤수의 입 안에서 차마 내 뱉지 못한 언어가 스며든다. 담임은 자세한 건 윤성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다만 당시 윤성의 행위는 누가 봐도 그 상황에서는 벌일 수 있었던 일인 데다가 경찰에서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한 점, 피해자 가족이 처벌을 원치 않은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윤성에게는 아무런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고 했다.

윤성이 입을 거치지 않고 제가 함부로 말하는 것도 실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천천히 윤성이한테 물어보세요. 솔직히 저도 궁금하거든요. 왜 그랬는지. 말을 마친 그녀는 차마 윤수와 있는 것조차 소름이 돋는다는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윤성아.”

“응, 형.”

“너, 나쁜 짓 하는 애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한 얘기를 하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윤성이 엷게 웃어 보였다. 손을 들어 윤수의 얼굴에 갖다 댄 윤성이 조금씩 윤수의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붙였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를 두고, 윤성이 나긋하게 입술을 뗐다. 나쁜 짓 안 해. 형한테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부터 윤석을 맞닥뜨렸다. 저도 모르게 몸이 위축됐다. 차마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윤수의 얼굴에 집요한 윤석의 시선이 닿았다. 어디 갔다 왔어. 윤수와 윤성을 번갈아 보던 윤석이 근엄하게 물어왔다. 윤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윤수를 제 뒤에 숨긴 채 윤석을 짧게 노려봤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심이 물처럼 흘렀다. 곁눈질로 쳐다보던 윤수의 손아귀가 일순간 움츠려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 집 형제들은 전부 윤석을 적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방에 들어와 눕자마자 또 지독한 나뭇가지의 마찰음이 귓속을 자극했다. 날벌레 떼처럼 날아드는 소음은 끊어질 만하면 이어지고, 멎을 만하면 반복돼서 도무지 외면하는 게 어려웠다. 거칠게 숨만 몰아쉬다가 참다못한 고개가 절로 들렸다.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은 자야 하는데, 정말이지 곤란했다. 내일은 학보 마감일이라 할 일도 많고 전공과목 수업도 두 개나 있다.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이 커질수록 이를 방해하는 불청객의 소음이 동시에 커졌다. 윤수는 살면서 한 번도 불면증을 겪어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더욱 낯설었다.

문득 윤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중하게 실내를 울렸다.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어보니, 윤민이 있었다. 미안. 내가 깨웠어? 녹녹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에 윤수은 불현듯 안도감을 느꼈다. 아니. 형. 잘 왔어. 빠르게 받아치는 윤수의 머리카락을 윤민이 가볍게 쓸어내렸다. 뭘 잘 와. 귀엽기는.

잔뜩 꼬여 있던 머릿속의 상념 사이로 따뜻한 윤활유가 스며드는 것만 같다. 윤민과 있을 때면 윤수는 종종 이런 기분이 들었다. 윤민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불안감이 들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윤민의 팔뚝 위에 손을 올린 윤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성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애원하고 싶었다.

“같이 자 줘, 형.”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런 얘기를 해, 윤수는. 응?”

“그냥 그렇게 해줘. 제발,”

급박한 마음에 윤민의 팔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보고 있던 윤민이 도무지 못 이기겠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윤수의 어깨 위로 온기 어린 윤민의 손이 찾아들었다. 그러자. 형이 윤수 하는 말을 어떻게 거슬러.

침대에 윤민과 나란히 누워 이불을 덮었다. 윤민의 몸 가까이 얼굴을 기대고 있으니 언제나 이 사람의 몸에서 나는 아로마 계열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담배를 피우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 언젠가 조리사로부터 윤민이 상당히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게 기억났다. 일 때문에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술을 먹고 들어온 날에도 한 시간씩 운동을 한 다음에 잠에 들고, 아무리 만취한 상태에서도 꼬박꼬박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뜬 다음에 출근한다고 했다.

균일하게 다듬어진 태엽처럼 흘러가는 삶의 습관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것임이 분명했다. 윤민의 몸에서 항상 떠나지 않는 아로마 향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는 게 본인도 편하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것일 터였다. 목적지를 향하던 중 이탈하는 일이 잦은 윤수로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는 세계는 다르지만, 윤수에게는 지금 이 사람이 필요했다. 윤수의 몸을 끌어안은 윤민의 미지근한 온도는 위축됐던 혈관을 녹이는 것 마냥 나른했고, 그 나른함 속에서 윤수는 비로소 수면에 대한 허기를 느꼈다. 고장 나기 직전의 가로등처럼 깜빡깜빡 눈꺼풀을 감았다 여는 얼굴을 보다가, 윤민이 살짝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잘 자, 윤수야.”

“응, 형.”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슨 걱정.”

“윤수는 나만 믿으면 돼.”

앞부분이 찢겨져 나간 책자처럼 의구심을 자아내는 윤민의 말에는 모순적일 정도로 유독 강렬한 온기가 스며 있다. 짤막하게 자리 잡았던 의아함이 온기 속에서 무뎌져 간다. 윤민의 마지막 말을 곱씹고 있던 윤수의 머릿속이 몽롱해 진다. 눈이 감겼다. 복잡한 상념들이 한여름의 눈처럼 녹아내린다.

15.

시트 위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함께 몸을 일으키려는 윤수를 보면서 윤민이 나직하게 말했다. 왜 그래, 더 자. 나 출근해야 해서 그래. 쉬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린 윤민의 뒷모습 다음으로 딱딱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문득 윤수와 그 사이에는 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종종 느껴지는 경계가 윤수로 하여금 그런 기분이 들게 했다. 윤수는 이 집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되는 것이 분명했다.

침대에 누워 윤민과의 벽을 곱씹는 시간은 스스로가 어느 정도로 이방인인지를 가늠하는 시간과도 같았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보니 어느덧 잠이 다 깨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그리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적당히 준비한 다음에 학교에 가면 될 것 같았다. 찌뿌둥한 몸을 간신히 일으킨 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마주친 건 오윤혁이었다. 윤수와 마주친 시선이 제법 차갑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 순간은 유독 그랬다.

“왜. 할 말 있어?”

“윤민 형 아까 네 방에서 나오더라.”

“맞아. 근데 그게 왜.”

“뻔뻔하네. 이제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구나.”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뒤늦게 의도를 알았다. 윤혁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야, 아니야. 윤민 형은 진짜 아니야. 다급하게 뱉는 윤수의 말에도 윤혁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는 소음이 길게 복도를 울렸다. 억울함에 탄식 어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학교에 가자마자 학보사에 들렸다. 성훈에게 미안해서라도 학교에 있을 때만큼은 이 쪽 일에 신경 쓰는 흉내라도 내야 했다. 가자마자 눈에 띈 것은 처음 보는 두 명의 어린 여학생들이었다. 학보사 데스크에 앉아서 찡그린 얼굴로 두 여학생을 차례로 보는 성훈의 눈빛이 하나 씩 후려칠 것처럼 매서웠다.

어, 윤수 왔냐. 들어오는 윤수에게 아는 체 하는 성훈의 말에 여학생들이 일제히 윤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낯선 시선이 동시에 몰리니 부담스러웠다. 주춤거리며 성훈의 옆 자리에 앉은 윤수가 의아한 얼굴로 여학생들을 쳐다만 봤다. 짧은 한숨을 쉰 성훈이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여학생들을 훈계했다.

“아무튼 이거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다시는 그러지 마. 헛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알고 이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선배님.”

“여총 회장한테도 가서 사과해. 박채영이랑 애들이 얼마나 너희들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알아들었지.”

“네.”

“그만 가 봐. 도무지 내가 힘들어서 더 못 보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학생들이 쏜살같이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뭐 하는 애들이고,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윤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설명을 원하는 얼굴로 고개를 드는 윤수를 힐끗 보고는 성훈이 한탄하듯이 입을 열었다.

“농구팀 주장이 폭행했다고 소문냈다는 매니저 여자애들, 내가 엄청 수소문해서 불러 모아 봤다.”

“그게 왜.”

“어휴. 진짜 오윤혁이 죄인이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윤혁의 이름에 윤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윤혁의 이름에 빠르게 입부터 다물고 마는 윤수를 보면서도 성훈은 왜 그러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심상하게 남은 말을 이어 붙였다. 쟤네, 둘 다 오윤혁이랑 썸 탔던 애들이란다. 사귄 건 아닌데.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양 올라온 성훈의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어댔다.

“오윤혁이 잘 만나다가 갑자기 연락하지 말자고 했나 봐. 둘 다 어장 당하는 거 알면서도 꾸역꾸역 잘 만나오다가 갑자기 헤어지자니까 그제야 열 받아서 죄도 없는 주장한테 일할 때 지들 폭행을 했느니 어쩌니 하면서 클레임 걸었대. 분풀이는 하고 싶은데, 할 데가 마땅치 않으니까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단다. 농구부에서 제일 권력 있는 사람이 논란에 휩싸이면 농구부원 전체에 피해가 갈 줄 알았다나. 어이가 없다, 진짜. 물론 오윤혁도 나쁜 새끼이긴 하지만.”

상상도 못 했던 얘기다. 물론 윤혁이라면 웬만한 여자애들이야 어렵지 않게 마음이 동할 수 있게끔 할 수는 있을 거다. 얼굴 훤칠한데다가 키 크고, 무엇보다 대학 농구팀 에이스다. 넘어가지 않는 여자애가 오히려 드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윤혁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대개 집에서만 마주쳐왔기 때문에 일상에서 그가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두고 윤수가 확신할 길은 없다. 다만 농구 말고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던 윤혁의 특성상 여자애 두 명을 동시에 만났다는 게 의외의 일처럼 느껴졌다. 침묵에 잠긴 윤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굴러갔다.

야, 근데 오윤수. 저 여자애들 말이야. 문득 입을 연 성훈이 망설이는 것처럼 마지막 언어를 헤맸다. 뭐가. 되물어오는 윤수의 얼굴에 닿았던 성훈의 시선이 깊은 한숨과 함께 돌아갔다. 텁텁한 목소리가 망설임 끝에 흘러나왔다.

“전부 너 닮은 거 같지 않냐.”

“무슨 개소리야.”

“아니, 나도 개소리 같긴 한데. 그냥 그렇다고.”

말을 마친 성훈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는 손길이 사뭇 작위적이다. 방금 전 한 말에 본인도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황당했다. 애초에 스스로도 이상한 얘기라는 걸 알면서 굳이 그런 얘기를 한 성훈이 희한하게 여겨졌다. 굳이 따지면 그런 걸 감안해가면서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로 윤수가 닮긴 했다는 거다. 잠시 봤던 여학생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자신과 닮았는지를 두고 몇 번이나 스스로가 아는 자신의 얼굴과 비교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본인의 얼굴이다 보니 객관적인 분석이 어려웠다.

그런데 오윤혁은 왜 안 오냐. 또다시 흘러나온 윤혁의 이름에 윤수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절로 몸이 자리에서 일으켜졌다. 집에서도 불편한 오윤혁을 굳이 학교에서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성훈이 사정을 알고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배신감이 들었다. 원망스럽다는 얼굴을 지어보인 윤수가 성훈을 향해 득달같이 입을 열었다.

“왜 불렀어, 오윤혁.”

“내가 말 했잖아. 폭행건 안 되면 오윤혁 인터뷰 싣는다고.”

“야.”

“네가 해. 저번에도 말 했지? 양심이 있으면 이 정도는 하자고.”

차갑게 밀어붙이는 윤수의 시선에 성훈은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차마 윤수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 차분하게 고개를 숙여 혼자 화를 삭힌 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의도가 있었던 인터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장으로서 이행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 부여. 윤혁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겠다는 의지. 내재된 의미가 적지 않은 섬세한 자리였다. 윤수의 고개가 빠르게 가로저어졌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학보사 문이 열렸다. 방금 연습을 마치고 온 듯, 짧은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있는 윤혁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란 몸이 성훈 쪽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고개를 끄덕인 성훈이 여유 있게 말을 건넸다.

“어.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우리가 이번 주에 기사 하나가 부족한데, 네가 좀 고생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너도 알지? 네가 우리 학교에서 최근에 엄청 유명한 거.”

“글쎄요. 그건 잘.”

“아무튼 인터뷰는 우리 편집장이 할 거야. 누군지는 네가 더 잘 알 거고.”

데스크에 있던 신문을 말아 쥐고는 윤수의 어깨를 툭 치고 난 성훈이 윤혁 쪽을 봤다. 윤수의 고개가 빠르게 숙여졌다. 차마 윤혁의 지금 표정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윤혁의 입 밖으로 심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오윤수 선배님이랑 인터뷰하면 됩니까. 감정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말투다. 고개를 끄덕인 성훈이 자리에서 걸어 나왔다. 윤수를 향하는 눈빛이 새삼 이성적이다. 어. 윤수랑 해. 난 일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눈살을 찌푸린 윤수가 조급하게 성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야, 김성훈. 그냥 있어. 성훈은 무시했다.

박채영이 불러서 잠깐 여총 가봐야 해. 제대로 해라, 오윤수. 그동안 내가 너 많이 봐줬다. 말을 마친 성훈이 빠르게 학보사를 나가 버렸다. 하필이면 이렇게 둘만 남아 버렸다. 난감한 얼굴로 성훈이 지나간 자취만 쫓던 윤수의 시선이 시든 풀처럼 흐려졌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학보사 안은 고적하기 그지없었다.

할 거면 빨리 해. 나도 시간 없으니까. 담담하게 말을 건넨 윤혁이 윤수의 맞은편에서 의자를 빼고 앉았다. 190센티가 넘는 큰 키는 앉은 상태에서도 우뚝했다. 복잡한 얼굴로 윤혁을 보고 난 윤수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데스크 위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을 키고, 화면이 뜨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동이 터 오르는 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저기, 오윤혁.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윤혁을 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왜.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목소리는 속내가 불투명하다. 길게 숨을 뱉은 윤수가 막 드러나기 시작한 바탕화면을 눈에 담으며 말을 건넸다. 윤민 형은 진짜 아냐. 안 했어. 그냥 잠이 안 와서 같이 자자고 한 거야. 구구절절하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정할 건 해야 했다. 맞은편에서 윤혁이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턱을 괸 채 윤수를 무뚝뚝하게 내려다 본 윤혁이 의미심장하게 물어왔다. 그러니까, 윤석이 형이랑은 진짜였다는 거네.

순식간에 머리통이 무지근해졌다. 노트북 위에 올라가 있던 손등이 길게 경련했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꼴이었다. 입 안의 혀에 날 선 이빨이 걸렸다.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는 후회감이 뒤늦게 밀려왔다. 그랬으면 절반은 갔을 텐데.

인터뷰나 해. 그러려고 온 거니까. 엷게 한숨을 쉰 윤혁이 복잡한 시선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키보드 위에 올라간 손가락이 느릿하게 엔터 버튼을 눌렀다.

뭘 질문해야 할지가 불현듯 막막했다. 생각해 보니 윤혁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농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섞여서 몇 번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가 키가 남자치고 작은 편이다 보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영 재미가 없었다. 그냥 김성훈한테 시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구는 김성훈이 좋아했다. 잘 하기도 하고.

뭘 멍 때리고 있어. 안 물어봐? 답답하다는 투로 윤혁이 이맛살을 구겼다. 경직돼 있던 어깨가 스르르 풀어졌다. 하긴, 지금 이 시간은 각자의 개인적 감정을 차치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집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서로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저 목적을 위해 서로를 마주해야 하는 시간.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포지션이 뭐야. 너. 망설이다 건넨 윤수의 말에 윤혁이 길게 고개를 젖혔다. 와, 진짜. 빈정거리는 듯한 윤혁의 시선에 윤수는 순식간에 민망함을 느꼈다. 진짜 하나도 모르네.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무슨 인터뷰를 하냐.

방금은 실수였다. 기본적인 것은 숙지한 상태에서 질문을 했어야 하는데, 윤수 쪽이 어리석었다. 스스로를 책망하며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떨어뜨리는 윤수의 얼굴을 윤혁이 한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관찰당하는 느낌이 들어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따지고 보면 저 시선은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느껴지던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시선이 빠르게 자라는 덩굴처럼 윤수의 맥박을 자극하며 퍼져나갔다.

“슈팅가드, 그리고 포인트가드.”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농구.”

“초등학교 1학년 때? 솔직히 아버지는 싫어하셨지만.”

“왜 싫어했는데.”

“몸 쓰는 일은 머리 나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아버지는.”

“대학부 MVP 수상경력은 언제 한 거야.”

“작년하고, 재작년.”

“MVP, 왜 됐다고 생각해?”

“왜 잤냐? 큰 형이랑.”

불현듯 던져지는 질문에 윤수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들렸다. 매서운 윤혁의 눈초리는 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호하다. 메마른 눈꺼풀이 밑으로 끌어내려졌다.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를 둔 지난한 고민이 시작됐다. 그것에 대해 얘기하려면 윤수가 오 회장의 구속을 돕기 위해 방을 뒤졌다는 얘기부터 해야 한다. 왜 오 회장을 구속시키려 했냐고 묻는다면, 오 회장과 잤던 얘기까지 해야 한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냥. 시름없이 떨어진 말에 윤혁의 눈썹이 깊게 비뚤어졌다. 그냥? 정말 그뿐이냐며 물어오는 듯한 질문에 윤수는 어렴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냥. 윤혁의 입 밖으로 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느릿하게 삼켜진 침이 한없이 썼다. 내뱉고도 말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낮게 욕설을 읊조린 윤혁이 윤수 쪽을 향해 사납게 입을 열었다.

“너 집에서 나가라, 진짜.”

“그건 안 돼. 저번에도 안 된다고 했잖아.”

“씨발. 너 말귀 존나 못 알아 쳐 듣.”

“쌍욕을 하든지 패든지 너 좋을 대로 해. 아무튼 난 못 나가.”

윤혁을 향한 시선이 또렷하게 빛났다. 그건 진심이었다. 윤수는 이 지옥 같은 상황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버텨야 했다. 지금 윤혁의 앞에서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앞으로 남은 기간을 살아야 했다. 한동안 윤혁의 얼굴을 차갑게 쳐다보고 난 윤수가 시선을 끌어 내렸다. 모니터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검은 글자를 눈으로 훑고는, 윤혁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계속 해. MVP 왜 됐는지부터 시작하자.

문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펼쳐져 있던 노트북이 닫혔다. 놀란 얼굴을 들어 보이는 윤수를 보면서 윤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데스크를 지나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윤혁이 느릿하게 윤수의 얼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너 진짜 지독하다. 윤석이형 좆이 그렇게 좋았어? 어금니가 있는 힘껏 다물렸다. 그런 이유 아냐. 개소리하지 마. 성대에 잔뜩 힘을 담아가며 뱉은 말에 윤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비치지 않았다.

불현듯 그의 눈동자가 포식자의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괜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아, 꼭 다문 입술로 고개를 돌렸다. 턱 밑으로 윤혁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올라왔다. 윤수의 매끄러운 얼굴을 손에 담은 윤혁이 마지막 경고를 읊었다. 방금 나한테 창녀 취급당하고도 아무렇지 않나 봐. 자존심도 없어? 그냥 얘기해. 나간다고. 윤수의 고개가 힘 있게 가로저어졌다. 싫어. 이 개새끼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수의 팔을 휘어잡은 윤혁이 거칠게 몸을 끌어당겼다. 머리가 심하게 흔들린 나머지 두통이 찾아왔다. 완전히 윤혁에게 장악되다시피 한 몸이 데스크 위에 강제로 눕혀졌다. 다짜고짜 찾아든 손길이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벗겨 내리기 시작했다. 맨살을 스치는 차가운 촉감에 윤수의 몸이 짧게 소스라쳤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긴. 이렇게 해서라도 내보낼 수 있으면 해보려고.”

가볍게 조소를 머금은 윤혁이 윤수의 양 팔을 휘어잡은 채로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끝까지 끌어내렸다. 이 새끼가 진짜. 욕설을 뱉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윤수의 저항은 윤혁에게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었다. 말라있는 손목을 쥐고 있던 윤혁의 손아귀가 더욱 거세게 살집을 억눌렀다. 악. 입 밖으로 짧은 비명이 튀어 나왔다. 이 정도 압박이면 충분히 멍이 생기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완전히 바지와 속옷을 벗겨 내린 윤혁이 데스크 위에 옷가지를 툭 던졌다. 이번에는 상의를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가슴께까지 맨살이 드러났다. 평소에 제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긴 하지만, 학보사는 공개된 공간이었다. 언제 누가 와서 이 꼴을 볼지 알 수 없었다. 윤수의 다리가 빠르게 발버둥 쳐졌다. 오윤혁, 제발 미친 짓 하지 마. 여기 사람 오는 곳이란 말이야.

다급한 외침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윤수의 다리를 벌려 댄 윤혁이 둥근 엉덩이를 짧게 어루만졌다. 피부를 스치는 낯선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자신보다 두 살이 어린 형제에게 이런 걸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모멸감이 들었다. 하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악에 바쳐 소리를 뱉던 윤수의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이 박혀왔다. 구멍 입구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오윤석이 여기다가 쑤신 거 맞지. 건조하게 건네 오는 말에 목덜미가 순식간에 저릿해왔다. 너 진짜 뭐 하는 거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물기를 머금은 언어가 윤혁을 향해 원망스럽게 터져 나왔다. 무표정으로 대응한 윤혁이 구멍 근처를 느릿하게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벌어진 허벅지가 희미하게 떨렸다.

엄청 벌름거리네. 넣어줬으면 좋겠어? 비꼬듯 웃어 보인 윤혁이 윤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윤혁의 의도를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윤수를 조롱하고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한 장난의 일종이다. 윤혁이 왜 이렇게 윤수를 내보내려 하는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존재를 이렇게라도 무너뜨려 볼품없어지는 꼴이 보고 싶은 거다. 그러고 나면 정말 윤혁이 원하는 대로 될 지도 모를 테니까.

목덜미에 닿은 차디찬 혀가 길게 피부를 머금었다. 딱딱한 앞니가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계속해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에 몸이 더워졌다 추워졌다를 반복했다. 엉덩이 사이에 끼워진 손가락이 구멍 주변을 배회하듯 빙글빙글 어루만졌다. 하. 하반신을 타고 올라오는 간지러움에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목덜미를 적시던 혀가 쇄골을 깊숙하게 스쳤다. 혀가 지나가는 곳마다 질척한 타액이 발자국처럼 남았다. 그만 좀 해, 이 미친놈아. 장난감처럼 다뤄지는 기분이 당연히 좋지 않았다. 거세게 올라갔던 허벅지가 윤혁의 단단한 팔꿈치에 틀어 막혔다. 손목에 이어 허벅지에까지 멍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표정 보기 좋네. 오윤석이 그거 보면서 많이 쌌겠어.”

“지랄 마. 개새끼야. 오윤석도 미친놈이지만 너도 지금 단단히 돌았어. 이게 재밌어?”

“응. 하다 보니 꽤 재밌네.”

태연하게 지어보이는 비웃음에 기가 찼다. 완전히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는 윤수를 눈으로 슥 훑은 윤혁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혀가 닿은 곳은 유두 쪽이었다. 동그란 유륜을 축축하게 적시는 혀놀림에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간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홧홧해진 윤수의 얼굴을 확인한 윤혁의 입술이 가운데 자리 잡은 유두로 향했다. 힘 있게 빨아들이는 감각에 근처에 자리 잡은 세포 하나하나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아앗. 있는 힘껏 억눌러왔던 소음이 짤막하게 뱉어졌다. 잘근잘근 유두를 물어대던 윤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닌 척 하면서 느낄 데는 다 느끼네. 너도 참 애석한 운명이다. 뜻 모를 윤혁의 말에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애석한 운명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와 닿았다.

문득 문이 있는 쪽에서 손잡이를 달칵거리는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돌아갔던 손잡이가 절반도 채 넘기지 못한 채 원래대로 돌아갔다. 짧은 순간 들려온 쇳소리가 윤수의 귓속에 묵직하게 틀어박혔다.

야, 이거 누가 잠갔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성훈의 목소리다. 결국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질색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는 윤수의 허리를 윤혁이 세차게 휘어잡았다. 데스크 위에 널브러진 옷을 챙기고는 윤수의 팔을 쥔 채 어딘가로 이끌었다. 다다른 곳은 학보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재였다. 기척이 들리지 않게 서재 문을 닫고, 그 문 역시 잠가 버린 윤혁이 물끄러미 윤수를 내려다 봤다.

“아까 문 잠그길 잘했네.”

“너 진짜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형이랑은 섹스도 했으면서 뭘 그렇게 유난 떨어. 누가 보면 처녀인 줄 알겠다.”

“건방진 소리 작작해, 오윤혁. 내가 형이야. 옷 이리 주고.”

옷이 들려 있는 손을 향해 팔을 드는 윤수를 힐끗 본 윤혁이 높다랗게 팔을 올렸다. 키가 한참은 더 큰 농구선수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윤수로서는 방도가 없는 게 당연했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매서워진 시선을 드는 윤수를 보며 윤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야, 벽 쪽으로 가서 기대 봐. 윤수의 눈살이 빠르게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야, 그게.

윤수가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옷가지를 저편에 집어던진 윤혁이 묵직하게 윤수의 어깨를 쥐었다. 이어 갑작스럽게 밀어붙이는 손힘에 윤수의 몸이 부질없이 벽 쪽으로 밀착됐다. 순간적으로 부딪힌 어깨가 이상하리만치 따가웠다. 저번에 윤석의 사무실에 있을 때 소파에서 미끄러지다 부딪힌 곳과 같은 부위였다. 경직된 윤수의 엉덩이 사이로 윤혁의 손가락이 흘러들었다.

“이왕 시작한 거 좀 더 즐겨보겠다는데 왜 이래. 오윤수.”

“즐기긴 뭘 즐겨. 너 진짜 미쳤.”

분연히 내뱉어지던 윤수의 말이 칼로 베어진 것처럼 뚝 끊겼다. 순식간에 구멍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오고 있었다. 야, 너 지금. 당혹감과 절망감이 껌처럼 뇌리에 달라붙었다. 동시에 바깥에서 문이 열리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벌어졌던 윤수의 입술이 빠르게 다물렸다.

진짜 어떤 새끼 짓거리야. 잡히면 아주 죽여 버릴라.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난 성훈에 이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야, 근데 윤수는 어디 갔어. 윤수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아는 목소리였다. 박채영. 윤수의 전 여자친구.

흡. 갑자기 올라온 커다란 손이 윤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빠르게 고개를 가로젓는 윤수를 알면서도 한 번 들어온 손가락은 좀처럼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스멀스멀 파고드는 손가락이 점막 곳곳을 탐색하듯 어루만졌다. 벽을 짚고 있던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미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머릿속을 엄습했다. 밖에 제 친구와 전 여자친구를 두고 이런 짓을 당할 수야 없었다. 윤수의 성난 팔뚝이 뒤에 있는 윤혁의 몸을 향해 내질러졌다. 입을 막고 있던 손아귀가 기세 좋게 저항하는 손길을 휘어잡았다. 무리다.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몸싸움이다. 손가락은 더욱 깊숙이 안쪽으로 후벼졌다.

읍, 오윤혁. 오윤혁. 제발. 연달아 터져 나오는 간절한 애원에도 윤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왔다. 뻑뻑했던 내벽이 다소 축축해졌다. 침을 묻힌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빠듯했다. 상처 난 점막에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윤수의 어깨가 흠칫거리며 떨렸다.

자지가 아니라서 아쉽겠다. 응? 귓가에 닿는 조소에 벽을 짚고 있던 손가락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할 수만 있다면 그만 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다시 입이 윤혁의 손아귀에 반쯤 틀어 막힌 데다가 어차피 바깥에 사람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벽 너머에서는 계속해서 성훈과 채영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오윤혁이랑 형제야? 난 몰랐네.”

“어. 근데 사이는 별로인 거 같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인터뷰 시킨 거야.”

“잘 됐으면 좋겠다. 윤수 걔 말은 안 해도 은근히 형제 있는 집안 부러워하는 거 같더라고. 그리고 위에 형도 둘이나 있다며. 앞으로 든든하겠네.”

“야, 근데 솔직히 남자 입장에서 형이 둘이나 있으면 좀 그래. 누나나 동생이 낫지. 나도 형 있어 봐서 알아.”

“그래? 내 남동생은 형 있었으면 좋겠다고 만날 난리던데.”

“걔는 형한테 개 패듯이 쳐 맞아봐야 누나, 동생이 좋은 거 알 거다.”

허탈함에 눈가가 젖어들었다. 성훈도 그렇지만 전 여자 친구 목소리 들으면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느릿하게 내벽의 주름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에는 곳곳에 맺혀 있는 생체기를 확인하는 것처럼 섬세함이 녹아있었다. 안 그래도 오 회장에 이어 윤석과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크러질 대로 물크러진 내벽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틀어 막힌 입 밖으로 고통어린 신음이 간헐적으로 흘러 나왔다. 뒤통수 너머에서 확신했다는 듯한 윤혁의 언어가 찾아들었다.

“엄청 헐었네. 몸 파는 여자들도 너보다는 덜 할 거다.”

“진짜, 흐으. 그만 좀. 제발 그거 좀 그만.”

“희한하게 구멍은 진짜 좁네. 단기간에 많이 해서 그런가. 좀 더 넣어도 되지? 얼마나 넓어지는 지 궁금해서 그래.”

“크흡. 진짜, 진짜로 안 돼. 박채영, 박채영 있.”

“박채영이 누구야.”

“저기에 전 여친 있다고, 좀. 읏.”

빠듯한 안쪽을 억지로 쑤셔 대는 이물감에 허리서부터 이어지는 온 하반신이 아렸다. 몸을 어떻게 세우고 있어야 할지도 몰라 그저 절박하게 손톱을 들어 벽만 긁어 댈 따름이었다. 정말로 손가락이 하나 더 안에 들어왔다. 엉덩이 너머에 찌르르 쓰라림이 퍼졌다. 넣고 난 윤혁이 짧게 더운 숨을 내뱉는 게 들렸다.

“하. 오윤혁. 진짜, 진짜 나 아파서 안 돼.”

“저 여자애가 전 여친이야? 소리 좀 들려줘, 그럼.”

“그게 무슨. 악.”

순식간에 안쪽까지 치고 들어오는 세 개의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윤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흡 하는 소리가 잡혀 있는 손 안에서 짧게 터졌다. 잠시 학보사 쪽이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식은땀이 흐르면서 윤수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워졌다. 침묵을 삼키는 시간이 유독 길어서 자꾸만 불안했다.

“아, 그래서 너 현대문학의 이해는 드랍이야?”

“어. 도무지 못 듣겠더라. 재미도 없고. 교수도 별로고.”

“그거 나도 좀 별로긴 하더라. 그리고 교수가 성희롱 발언 너무 해서 짜증나.”

“그 사람은 확실히 그런 거 있지. 여총에서 문제제기 안 했던가.”

“안 그래도 최근에 제보 들어와서 조만간 공론화 한 번 하려고.”

끊어졌던 대화가 대수롭지 않게 재개됐다. 하. 안도의 숨을 낸 윤수의 뒤 쪽에서 윤혁이 픽 웃는 게 들렸다. 그렇게 좋았어? 소리 엄청 크게 내네. 일그러진 윤수의 눈초리가 공격적으로 윤혁을 향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윤혁이 좀 더 힘을 줘서 안쪽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꿈틀거리는 손가락이 유독 아팠던 상처를 눌러댔다. 아읍. 윤혁의 손아귀에서 짤막한 비명이 낮게 터졌다. 손가락을 세워 윤수의 입술을 살살 어루만지던 윤혁이 조롱조로 말을 건넸다. 조심해, 오윤수. 전 여친이 알아채겠다, 야. 너 이러고 있는 거.

치욕감에 이가 아득아득 갈렸다.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네 개째였다. 두툼한 손가락들이 안을 멋대로 넓혀대면서 엷은 점막을 탐하고 있었다. 찬찬히 내벽을 스쳐가던 손가락에 문득 튀어나온 돌기가 닿았다. 윤수의 얼굴이 빠르게 밑으로 끌어내려졌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이게 그거구나. 알았다는 투로 윤혁이 보다 깊숙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눌러댔다. 아. 더운 숨이 윤혁의 손아귀를 적셨다.

다리의 힘이 자꾸만 빠졌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을 윤혁의 팔이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민감한 부위를 눌러대는 손가락이 보다 집요해졌다. 선명한 요의가 하체를 지배했다. 그 와중에 긴장한 성기는 적당히만 부풀어 오른 채였다.

“어디 간다고? 학식?”

“어. 오후에 여총 회의 있어서 간단히 먹으려고. 김성훈 넌 밥 먹었냐.”

“안 먹었어. 같이 먹지, 뭐.”

바깥쪽에서 성훈과 채영이 학보사를 걸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윤수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윤혁이 귓가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갔다. 소리 내도 돼, 오윤수. 참았던 숨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너 진짜, 언제까지 할 거야. 윤혁의 손가락이 느긋하게 내벽을 헤집어댔다. 살살 만져오는 돌출부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글쎄. 너 싸는 거 보고? 남자가 이것만으로 사정하는 거 처음보거든. 흥미롭다는 것처럼 얘기하는 윤혁은 윤수를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듯했다. 날카롭게 세워진 손가락이 깊게 벽에 자국을 새겼다. 엉덩이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부드러운 돌기를 계속해서 지분거렸다. 맛있는 것을 손에 쥔 어린애처럼 달뜬 움직임이었다. 성기가 다소 뜨거워졌다. 눈물을 삼키는 코끝이 시큰했다.

이 집의 남자들과 섹스하면서 사정한 일이 없었다. 고통과 공포가 앞서는 섹스였으니 그게 당연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집중적으로 윤수를 자극하면서 사정을 유도하는 손길은 수치스러운 걸 넘어 무서웠다. 정말로 사정하는 순간 자신이 남자의 손에도 발정한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돼버린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억제하려는 윤수의 노력을 비웃는 것처럼 손가락이 활기 있게 돌출부를 자극했다. 강약을 조절하며 지속적으로 눌러오는 감각에 윤수는 정말이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성기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귀두 끝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아, 읏. 오윤혁. 제발. 그거, 제발 그만.”

“왜. 싸고 싶잖아. 싸게 해 준다는 데 왜 그래.”

짓궂게 말을 뱉은 윤혁의 손가락이 달아오른 돌출부를 보다 빠르게 짓눌러댔다. 하으. 아랫입술을 깨물어대는 입술 사이로 가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현듯 성기 입구가 홧홧해지더니 묽은 정액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다리의 힘이 풀린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아팠지만, 그보다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절망이 더 컸다. 붉어진 얼굴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는 내내 윤혁의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뭘 그렇게 울어. 어차피 형이랑 하면서 몇 번이나 이렇게 갔을 거면서. 심상하게 찾아드는 언사에 눈물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올라갔다.

강간당하면서 가긴 뭘 가. 나도 이런 적 처음이라고. 진짜 죽고 싶으니까 그만 말 해. 분노를 담아 터뜨린 말에 갑자기 뒤쪽이 조용해졌다. 꽤나 긴 시간 동안 눈물을 삼켜낸 끝에 고개를 돌린 곳에 다소 난감한 얼굴의 윤혁이 있다. 반쯤 손가락으로 가리고 있는 얼굴이 꽤나 붉었다. 물기 어린 윤수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는, 차마 더 이상 눈에 담기 힘들다는 것처럼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빠르게 젖혔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재 안에 윤수 홀로 남았다. 고즈넉한 햇살이 서재 안에 가라앉는 모습에 눈이 부셨다. 입 밖으로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씨발, 진짜 좆같아서.

16.

꿈에서 어머니를 봤다. 천장에 목을 건 채 윤수를 쳐다보는 시선에 체념과 고통이 담겨 있었다. 마주친 눈망울에서 떨어진 물기가 무력하게 낙하한다. 보고 있던 윤수의 발걸음이 느릿하게 뒤쪽을 향하며 천천히 어머니에게서 멀어져 간다. 윤수야.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입을 연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윤수를 시야에 담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힘들어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 온 얼굴에 현현하게 새겨진다.

둘 사이에 연결된 투명한 혈관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끊어지지는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절하게 섞인 윤수와 어머니의 피가 온 몸을 서늘하게 적셨다. 느릿하게 열린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수야, 살려줘.

몸을 일으키자마자 잔뜩 젖은 등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시트에 젖어든 물기가 한 가득이었다. 창 밖에서 갓 솟아오른 해가 보였다. 일단은 아침이었다. 꽤나 자고 일어났는데도 편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체중이 좀 더 줄어든 기분이 든다. 이제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도 워낙 가벼워 타격조차 입지 않을 것 같다.

방문의 손잡이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온 건 오윤혁이다. 윤수를 보자마자 낮은 한숨을 쉰 윤혁이 차분하게 문을 닫고 안쪽으로 걸어왔다. 뭐야, 왜 와. 경계심이 어린 시선으로 윤혁을 노려본 윤수가 등을 뒤쪽으로 뺐다. 윤혁의 발걸음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꽤나 긴 시간 윤수의 얼굴만 살피며 복잡한 표정을 가누던 윤혁이 한 걸음 한 걸음 새기는 것처럼 발걸음을 내딛어가며 윤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오윤혁. 양 눈살 가득히 불만을 담은 채 윤혁을 보는 시선에는 아찔한 날이 서있었다.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윤혁이 무릎을 꿇는 것처럼 몸을 앉혔다. 할 말 있어. 오윤수. 운을 뗀 윤혁이 한동안 물끄러미 경멸어린 얼굴을 응시했다.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까지 들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정적이 흘렀다.

미안해, 오윤수. 어제 내가 심했어. 건조하게 건네는 사과는 아무런 색채를 담고 있지 않아 제법 진짜처럼 느껴졌다. 반쯤 감겨 있던 윤수의 눈꺼풀이 파르르 진동했다. 사과는 진짜인 것 같지만,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빠르게 등을 돌려 버리는 윤수의 어깨를 다급하게 윤혁이 잡았다. 손대지 마. 차갑게 뱉은 말에 굳어있던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난 몰랐어. 그냥 너도 좋아서 한 건 줄.”

“좋아서 뭘 하는데. 내가 미쳤어? 정신병자야? 제정신이 아니고서 친형이랑 그런 걸 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떻게든 말을 이어보려던 윤혁이 체념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짧게 터지는 혀 차는 소리가 제법 썼다. 낮은 숨만 가누며 고개를 숙이는 윤혁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이 점점 더 느려져갔다. 생각해보니 이 집 남자에게 사과를 받은 건 처음이다. 오 회장이나 윤석은 이런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취해 놓고, 하고 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나왔었다. 솔직히 지금의 것은 윤수 입장에서도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낯선 상황이었다.

오윤혁. 고개 들어 봐. 담담하게 건네진 말에 윤혁의 얼굴이 천천히 올라왔다. 눈앞에서 보이는 다부진 이목구비에서 윤수를 범했던 남자들이 비친다. 차마 똑바로 응시하는 게 어려워서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다시 그 얼굴을 봤다. 명확하게 닮은 얼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이 집 남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기묘한 형색이 있다.

닮은 얼굴. 그 단어를 떠올리면 윤수는 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네가 만났다는 여자애 두 명.”

“어.”

“언제부터 만났어.”

“둘 다 달라. 한 명은 작년부터고, 한 명은 올해부터. 그게 왜.”

“걔들 말이야. 얼굴보고 만났냐.”

마지막 질문에 부쩍 윤혁의 말이 없어졌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불안했다. 그냥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정색하고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애초에 저렇게까지 진지해질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던진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펼쳐서는 안 되는 페이지를 억지로 잡은 채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른 침을 삼킨 윤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고민을 해. 그냥 말하면 되잖아. 취향이 있다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닌데.

윤혁의 얼굴에 드리워진 상념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윤혁이 짤막하게 답했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나중에, 때가 되면. 윤수는 입 안으로 그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말을 마친 윤혁이 난처한 듯 살짝 이맛살을 구겼다. 윤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화의 핵심은 사실 단순했다. 윤혁으로서는 그저 이렇게 생긴 여자애들이 좋고, 그래서 만났다고 내뱉고 말면 끝날 대화였다.

굳게 입술을 다문 윤혁에게서는 마치 윤수가 선이라도 넘어서려 했다는 듯한 위기감이 비쳤다. 덕분에 이방인으로서 알지 말아야 할 것을 함부로 물어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언젠가 서재에서 발견한 이 집안 조상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엎어가며 서늘하게 쳐다보던 윤성이나, 언제나 윤수를 따뜻하게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한 경계를 긋는 윤민의 태도와도 닮아있었다.

그 감정은 단순히 몇 가지 사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 집 형제들은 공통적으로 윤수에게 일정 수준까지만 자신의 존재를 허용했으며, 그 이상까지 넘어오려 하면 정중하게 혹은 오히려 윤수를 무안하게 만들면서 거절하는 방식을 택했다. 보이지 않는 경계는 불확실성이 확고해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그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윤수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걔네들, 진짜 연락만 하고 데이트만 했어. 키스까지 한 애도 있긴 한데. 자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고. 어떻게든 주어진 질문을 소화하려는 목적인지 윤혁이 갑자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난색이 어려 있었다. 고개를 든 윤수가 한 번 더 시도해볼 의도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원래 사귀던 여친은. 걔도 그 여자애들이랑 비슷하게 생겼었어? 윤수의 말에 윤혁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렸다.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방을 맴돌았다. 마침내 벌어진 입에서 나직한 한 마디가 나왔다. 원래 여친, 없었는데.

윤수의 눈꺼풀이 빠르게 올라갔다. 윤혁의 낯이 돌연 붉어졌다. 저도 뒤늦게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메마른 목이 불이라도 덴 것처럼 타들어 갔다. 말도 안 된다. 전 여친도 없고, 만났던 여자애 두 명과는 키스만 했다는 건.

“너, 경험 없어?”

“나 연습 간다.”

“야. 오윤혁.”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는 윤혁을 향해 윤수가 한 번 더 힘을 줘서 이름을 불렀다. 무시하듯 나가버리는 윤혁의 등을 보며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된다. 그러면 어제 윤수와 그런 일을 한 것도 처음이라는 거다. 어쩐지 서툴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남자 몸을 취하는 건 처음이겠거니 싶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윤혁이 나간 뒤 한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창 밖에서 나뭇가지 일렁이는 소리가 생생했다.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데, 이제는 슬슬 저 존재도 익숙해질 것 같다. 한참이나 누워 있다가 뒤늦게 허기를 느껴 방에서 나왔다. 식당 쪽으로 가니 여유 있게 식탁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윤성이 있었다. 작은 그릇에 담긴 잎사귀 같은 것들이 윤성의 나른한 손가락을 따라 점점이 부스러졌다. 지리멸렬한 잎사귀에서는 죽은 식물 특유의 텁지근한 냄새가 났다.

윤성아. 옆 자리의 의자를 빼서 앉으며 윤수가 말을 건넸다. 응, 형. 사르르 웃으면서 윤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거 뭐야. 올라온 윤수의 고개가 그릇이 있는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자신이 쥔 접시를 내려다보고, 이내 윤수를 한 번 본 윤성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실험용. 말을 마친 윤성이 옆에 놓인 뚜껑을 들어 그릇을 덮었다. 옆으로 치워 놓는 손길이 한없이 정중하다. 윤수와 자신의 사이에 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동작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다.

아침 안 먹었지? 우리 형, 배고프겠다. 윤성의 손길이 지긋이 윤수의 볼을 어루만졌다. 눈앞의 나긋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왠지 있던 허기도 들어가 버리는 것 같다. 얼굴에서 내려온 손이 윤수의 팔에 단단한 손아귀를 감았다. 피부에 닿는 감각이 사뭇 서늘해서 저도 모르게 팔을 뒤쪽으로 빼고 말았다. 바로 알아챈 윤성이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봤다. 왜, 형. 윤수의 고개가 간헐적으로 가로저어졌다. 아냐. 아무것도.

주전자를 손에 쥔 윤성이 윤수의 찻잔을 채웠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길고 고요했다. 찻잔을 윤수 쪽에 밀어 놓은 윤성이 마시라는 눈짓을 해 보이고는, 바게트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다른 한 편에 가득 담겨 있는 샐러드를 집게로 집어 바게트 위에 얹는 동작이 정성스럽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신선한 야채의 잎사귀를 타고 물기가 떨어져 내렸다.

“윤혁이 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어?”

“아침에 형 방에서 윤혁이형 나오던데.”

담담하게 건네 오는 말에 윤수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살짝 떨렸다. 잔잔했던 표면 위에서 빠르게 파동이 번져가고, 안에 담겨 있는 윤수의 얼굴이 점점이 무뎌져갔다. 어떻게 알았어? 다소 말라있는 질문에 윤성은 예사롭게 답했다. 그냥, 봤어.

그냥 봤다고. 가벼워 보이는 문장과 달리 안에 담겨있는 의미가 속이 꽉 차있는 과실처럼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물론 볼 수도 있을 거다. 윤성이 바로 옆방이니. 오며 가며 하다 보면 그런 걸 본다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윤수가 알기로 윤혁이 나갈 때 윤성의 방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는 들린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알 수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후각을 자극해 오는 차향에 괜히 머리가 아파왔다. 그대로 잔을 내려 놓으려는 윤수를 보자마자 윤성이 빠르게 저지하고 들었다. 왜 그래, 형.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윤수가 맥없이 말했다. 머리 아파. 그냥 물 마실래. 윤성의 눈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안 돼. 몸에 좋은 거란 말이야. 빨리 마셔.

전에 없이 고집을 부려오는 윤성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새삼 혼잡해 온다. 마지못해 차를 한 잔 다 마셔 놓고, 윤성이 건네주는 바게트를 몇 개인가 집어먹은 다음에야 다시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윤성은 더 윤수와 있고 싶어 했지만, 윤수는 차마 피곤해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는 말로 떨쳐냈다.

침대에 눕자마자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오윤성은 좋은 애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집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윤수를 반긴 것도 윤성이고. 성격도 세심한 편이라 사소한 것까지 잘 챙겨준다. 기본적으로 천진한 성격이고, 잘 웃는다. 적어도 윤수 앞에서는 그렇다.

문득 윤성의 담임과 면담했던 때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윤성이는 사람을 죽였어요. 정당방위라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어떤 사연과 이유가 작용했던지 윤성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은 건 맞는 듯하다. 실수였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을 할 수는 없을 거다.

스마트폰을 들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포털사이트에 윤성의 이름과 다니고 있는 과학고 이름을 나란히 입력하자 어디어디 경시대회에서 몇 학년 오윤성이 수상했다는 뉴스들만 주르르 노출됐다. 특별한 건 없다. 윤성의 이름은 지우고 그 과학고 이름만 입력한 뒤 다시 뉴스를 검색했다. 그곳에서 열린 행사나 그 학교 소속 누구가 어느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둥의 범상한 검색 결과가 줄줄이 이어졌다. 한참동안 페이지를 뒤로 넘기다가 문득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작년 여름 무렵의 기사다.

경찰, 동급생에 진통제 과다 투입해 사망케 한 과학고 학생 불기소 송치. 누워있던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기사를 클릭해서 찬찬히 내용을 봤다. 요는 그 과학고 점심시간에 축구경기를 하던 남학생 하나가 비정상적인 심장박동을 일으키며 쓰러졌는데, 교사들이 어찌 대처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사이에 한 남학생이 진통제를 투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존에 이 남학생이 심장병을 앓고 있었던 상황에서 진통제를 맞자 주성분인 카페인이 부정맥을 일으켜 결국 사망케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날 학교에는 마침 양호선생이 자리를 비운 채였고, 교사들은 쓰러진 학생이 정확히 뭐가 문제여서 그리 된 것인지를 몰라 일단 119를 부른 뒤 마냥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쓰러진 학생이 금방이라도 죽겠다며 뭐라도 처방을 해 달라고 애원했고, 보다 못한 남학생이 양호실에서 진통제를 가져와 몇 대 놓아줬다는 내용이 덧붙어 있었다. 고의성도 없었고, 상황 자체의 특수성을 감안해 해당 남학생에게는 살인이나 약사법 위반과 같은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설명으로 기사는 끝났다.

따지고 보면 납득 가능한 일이다. 아파하는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리한 것인데, 범죄라고 보기 어렵다. 눈을 감은 채 그날 봤던 담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 있는데, 그녀는 분명히 마치 윤성에 뭔가 의도가 있었다는 투로 얘기했다. 윤성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뉘앙스로. 아까 윤성이 내뱉었던 단어가 흐릿하게 상기됐다. 입을 열어 그것을 희미하게 읊조려 본다. 입 안에서 퍼진 언어가 가시라도 돋친 것처럼 따갑게 스며들었다. 실험용.

17.

윤성에 대한 생각이 겹치고 겹쳐서 또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자꾸만 학교에서 봤던 윤성과 집에서 보는 윤성의 사뭇 다른 표정만 교차됐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온도 차가 컸다. 만약 학교에서의 모습이 원래의 윤성이라면, 왜 이렇게 집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윤수에게 다정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상 처음 만난 형제인데, 다른 형제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게 대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다른 형제들에게는 딱히 친절하게 굴지도 않았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봤다. 그날따라 조용한 나무를 한 번 더 응시하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모두가 잠든 밤이다. 천천히 복도를 걸어 일 층으로 내려가고, 긴 거실을 거쳐 바깥으로 빠져 나왔다. 하늘에 걸쳐 있는 보름달은 한창 빛나야 할 때에도 흐릿했다. 달을 가로막은 구름이 막이라도 형성한 것처럼 빛나는 존재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에 걸려있는 희미한 분자들이 일렁였다.

밤 산책 삼아 나오긴 했지만, 나무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거대한 저택의 입구를 중심으로 양 끄트머리를 느릿하게 걸었다. 왼쪽 끝까지 한 번, 오른쪽 끝까지 한 번. 오른쪽 끄트머리의 모퉁이에 작은 통로 같은 게 있었다. 짧게 깎인 잔디 위에 도보용 바닥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다. 집 뒤에도 공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부엌 뒤편에 문 같은 게 있긴 했다. 보통은 정문으로 오가지만, 후문도 있기는 하다는 거다.

발걸음을 내딛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불빛이 하나도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다. 주머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유일한 빛에 의존해서 짧은 도보를 지나치고 나니, 아담한 크기의 뒷마당이 나왔다.

평범한 마당처럼 보였다. 정기적으로 관리를 하긴 하는지 바닥에 자리 잡은 수풀이 제법 일정한 키를 지니고 있었다. 한 편에는 기다란 나무가 하나 있는데, 정원의 소나무에 비하면 한없이 작아서 볼품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보니 작은 비닐하우스 같은 게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의 비닐하우스보다는, 세련되게 만들어 놓은 식물원 같은 느낌이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빛나는 매끄러운 표면이 괜히 기괴했다.

발걸음을 내딛어 그쪽으로 향했다. 마당이 작다 보니 닿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개를 든 곳에 명패가 있다. 꽤나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나무 재질의 작은 현판이다.

板野. 국어식으로 발음하면 판야라는 단어가 되지만, 그런 건 국어사전에 없다. 중국식이나 일본식으로 발음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원래 이곳을 지은 게 일본인이니, 이것이 그 때부터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일본식으로 읽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방금 본 한자를 입력했다. 검색해 보니 일본의 한 지역을 기반으로 생겨난 일본식 성씨인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이 집에 살았던 일본인이 이런 성씨를 갖고 있었구나 하는 추정이 나왔다. 동시에 오승조 가문의 뿌리 중 일부가 되는 가문.

이타노.

윤수야. 느닷없이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윤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흘러내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 다급하게 몸을 숙여 핸드폰을 찾으려 하는데, 도무지 어두워서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옆에서 나란히 몸을 숙여 바닥을 살피던 윤민이 차분하게 핸드폰을 주워 윤수의 손에 건넸다.

“형.”

“뭐해, 이 밤에. 안 자고.”

“그냥, 좀. 생각이 많아서.”

“또 잠이 안 와?”

“응.”

달빛에 의지해 쳐다봐야 하는 얼굴에는 희미한 윤곽만 걸려있다. 윤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가 어둠속에 맺힌 동굴의 주름처럼 막연하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나긋한데, 짓고 있는 얼굴도 같은 느낌일까. 안개 속의 존재가 어깨 위로 따뜻한 손을 덮어온다. 들어가자. 감기 걸려.

윤민의 보폭에 맞춰 몇 걸음인가 앞으로 딛었던 발꿈치가 멎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근데, 형. 저건 뭐야.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거. 충동적으로 뱉은 질문이었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무의식 속에서 수많은 갈등을 거친 끝에 내놓은 말이었다. 윤민은 답이 없었다. 대신 부드럽게 윤수의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반강제로 몸을 앞쪽으로 뺐다. 윤민에게 등을 떠밀려 걸어가는 내내 발길에 스치는 수풀소리가 스산했다. 발이 시렸다.

궁금한 게 많구나. 윤수는. 엷게 웃으면서 내뱉는 말과 동시에 윤수의 발꿈치에 닿았던 흙덩이가 바스스 흩어졌다. 걸어가는 윤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윤민이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때가 되면 알려 줄게. 아무튼 이쪽으로는 오지 마. 아버지가 알게 되면 싫어하셔.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노란 햇살을 닮아 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들려온 것이었기에 어색했다. 응. 윤수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또 궁금한 거 있어? 윤수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윤민이 질문을 건넸다. 있다고 하면, 윤민이 정말로 알려줄까. 잠시 열렸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어졌다. 건넨 질문에 답변을 받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안온하고 따뜻한 존재가 긋고 있는 기묘한 경계선은 윤수가 알고자 하는 모든 의문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 방식이 너무도 상냥해서 차마 불만조차 제기할 수가 없다.

윤민의 방에 함께 들어와 그의 침대 옆자리에 누웠다. 형. 나직하게 윤민을 부르며 그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윤민이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던 이불을 윤수의 어깨 위에 걸쳐주는 손길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윤성이 말이야.”

“응.”

“잘 모르겠어. 좋은 애 같은데. 그냥, 어쩔 때는 좀.”

“윤수야.”

듣기 좋은 저음이 윤수의 이름을 불렀다. 윤민의 몸이 천천히 윤수의 옆에 눕혀졌다. 고개를 돌려 윤수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사람은 그런 거야. 모든 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윤수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애초에 윤수가 질문한 의도는 이런 말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스멀스멀 올라와 윤수를 윤민으로부터 밀어내고 있다. 분명히 가까이 있는데, 윤수는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윤수 너에 대해 알아. 아주 잘. 은은하게 들리는 윤민의 마지막 문장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맞부딪힌 시선에서 기묘한 공기가 흘렀다. 차마 더 이상 마주보기가 힘들어 시선을 밑으로 끌어내린 윤수가 눈을 감았다. 질문하고 싶은 건 많지만, 더 이상은 못하겠다.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걸 재차 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단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나조차 제대로 모르는 나를, 윤민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생각이 윤수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윤민은 없었다. 이제 막 아침이 된 시간인데. 정말이지 생활 패턴이 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이불을 걷어낸 뒤 바깥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옆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윤혁이 있었다. 윤민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희미하게 이맛살을 구긴 채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진짜 그냥 잠만 잔 거니까.”

“너 왜 자꾸 윤민 형한테 붙어다는 거냐.”

“몰라. 그게 편한 걸 어떻게 해. 기본적으로 이 집 추워서 잠이 안 온단 말이야.”

“대체 넌 어쩌면 그렇게 어릴 때부터.”

공격적으로 뱉어내던 윤혁의 말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윤수의 눈꺼풀이 빠르게 들렸다. 방금 엄청나게 생소한 얘기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수의 어릴 때. 이 집에 살았다던 여섯 살 이전의 일. 윤수조차도 기억하지 못 하는 걸 윤혁은 방금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 때 윤혁은 많아 봐야 네 살 정도였다. 온전한 기억은 아닐지라도, 본인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이라면 충분히 기록할 수 있는 나이이긴 하다.

“나 어렸을 때, 뭐.”

“아냐, 됐어. 내가 헛소리 했다.”

황급히 말을 마무리한 윤혁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형제들의 경계 긋기. 하지만 방금 전 윤혁의 것은 어딘가 허술했다. 그래서 자꾸만 상기하게 됐다.

* * *

학교에 가자마자 강의동 앞에서 윤혁과 또 마주쳤다. 야, 오윤혁. 다짜고짜 윤혁의 이름부터 부르는 윤수를 두고 윤혁이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생각해보면 언젠가부터 이런 일이 잦았던 것 같다. 윤혁은 학보사에서 그런 일이 있은 직후부터 종종 윤수를 데면데면 대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오히려 오랜만에 접하는 본래의 오윤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윤수의 눈초리가 찌푸려졌다.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을 멋대로 피하는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빠르게 걸어가는 윤혁을 윤수가 한 번 더 불러 세웠다.

“야. 오윤혁. 사람 무시하지 마.”

“무시 안 했어.”

“뭘 무시 안 해. 그리고 형, 아니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냐.”

“다음에 할게.”

“뭐가 다음에야. 너 그리고 어디 가.”

“연습.”

말을 섞는 것조차 부담스럽다는 것처럼 성의 없게 말을 마친 윤혁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짧게 헛웃음을 치는 윤수를 보며 옆에서 보고 있던 성훈이 심상하게 물어왔다. 야, 그래도 너네 좀 친해졌나 보다. 윤수의 눈가가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친한 걸로 보여? 어. 친한 걸로 보여. 픽 웃으며 반쯤 피운 꽁초를 툭툭 두드리던 성훈이 고개를 까딱하며 입을 열었다. 잘 됐네. 이따 농구팀 경기도 보러가야 하는데, 네 동생 경기하는 거 한 번 제대로 구경해.

갑작스럽게 나온 농구팀 얘기에 눈꺼풀이 번뜩 올라갔다. 무슨 의미냐는 얼굴로 올려다보는 윤수를 일별한 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입을 열었다. 윤호 형이 이따 농구팀 경기에서 보잔다. 순식간에 윤수의 아랫입술이 빠르게 깨물렸다. 김윤호. 오랜만에 듣는 재수 없는 이름.

“웬 김윤호야. 연수원에 있던 거 아니었어?”

“올 초에 연수원 떼고 지검으로 갔잖아. 요즘은 그래도 좀 살 만한가 보더라고.”

덤덤하게 들려오는 성훈의 얘기에 머리가 갑자기 아파왔다. 입가에 낮은 한숨이 맺혔다. 김윤호는 윤수 입장에서 좀 불편한 인간이다. 원래 농구 특기생으로 이 대학에 입학했는데, 한 학기 만에 부상을 당하면서 빠르게 팀에서 제명당했다. 이후 경영학과로 전과했고, 그가 군대를 다녀와 3학년이었을 때 윤수와 성훈이 입학을 했다. 학년은 달랐지만 같이 하는 인문학회가 있어서 꽤나 친하게 지냈다. 졸업반이었을 무렵 사법고시에 합격했는데, 대학 농구팀 출신 사시 합격생이라는 게 화제가 돼서 적잖게 언론에도 나왔던 인물이다.

윤수에게 김윤호가 불편한 건 종종 지나칠 정도로 신체 접촉을 해서였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만지는 건 그렇다 쳐도 술이라도 먹으면 뽀뽀를 하거나 여자애를 만지는 것처럼 허리를 쓰다듬었다. 윤수로서는 좋을 리가 없었다. 성훈도 그걸 안다. 그럼에도 김윤호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일단 연을 맺어 두면 나중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리란 걸 둘 다 알아서다.

“근데 왜 하필 농구팀이야.”

“오랜만에 학교 오는 김에 농구팀 후배들이랑 학회 후배들 동시에 보겠다는 거지, 뭐. 학회 사람들이랑 경기 본 다음에 농구팀 애들 몇 명이랑 같이 뒤풀이 하자나 봐.”

“와 진짜, 개꼰대 새끼. 어지간하네.”

“그 선배 스타일이 그렇지 뭐. 벌써부터 후배들한테 검사님 소리 들을 생각에 오르가즘 느끼기 직전일 지도 모르겠네.”

비웃음으로 말을 맺은 성훈이 길게 담배연기를 내 뱉었다. 아득하게 퍼져나가는 하얀 연기에 괜히 숨이 탁해졌다. 씨발 새끼야, 금연한 사람 앞에서 피지 말랬지. 가볍게 성훈의 정강이를 걷어찬 윤수에 성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화풀이를 여기다 하냐는 투였다.

18.

홈경기라 경기는 학교 안에서 치러졌다. 잘은 모르지만 상대팀도 꽤나 막강한 우승 후보인데, 이쪽 대학도 농구팀이 강팀이라서 서로 비등비등한 수준이라고 들었다. 대학 농구경기는 신입생 때 학보사 활동을 하면서 선배가 시켜 취재를 나간 것 이후 두 번째였다. 윤수는 농구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왜 이렇게 대학 농구경기에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다소 서늘했던 경기장이 뜨거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트에 선 윤혁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날렵했다. 머리를 요란하게 염색하거나 윤혁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선수도 있었지만,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도 윤혁의 모습만 눈에 띌 정도로 날쌨다.

-아, 이준영. 공 놓쳤습니다. 오윤혁, 턴오버. 바로 달립니다. 오윤혁, 속공. 실패. 따라가고요. 그대로 덩크슛, 성공. 여섯 점 차. 오늘 오윤혁 컨디션 좋습니다.

저걸 뭔 재미로 보냐. 시끄러운 관중 속에서 반쯤 귀를 틀어막은 채 윤수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정작 말을 건넨 성훈은 듣지도 않은 듯 경기에 심취해 있었다. 대신 옆에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안 봐도 돼. 겸사겸사 이렇게 후배 얼굴 좀 보는 거지.

아, 김윤호. 진짜 싫다. 눈앞에 드리워진 불쾌한 얼굴에 절로 시선이 끌어내려졌다. 아예 반쯤 고개를 돌린 채 한숨만 쉬고 있는데, 귀 쪽에 올라가 있던 윤수의 손을 천천히 김윤호가 끌어내렸다. 귓불에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져간 김윤호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잘 지냈어?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네.

사시 준비는 아직도 하고? 나긋하게 건네지는 목소리에 괜히 기분이 상했다. 사시가 아니고 행시였다. 게다가 이 년 연속으로 일 차만 붙고 말아서 아예 제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포기한 지 오래였다. 같이 준비했던 성훈도 마찬가지로 지금은 행시를 내려놨다. 살짝 얼굴을 찌푸린 윤수가 심통 맞게 얘기했다. 안 해요, 그리고 지금 하는 거는.

거기까지 내뱉던 윤수의 입술이 순간 멎었다. 상대팀의 공을 가로챈 윤혁이 빠르게 코트를 가로질러갔다. 맞은편에서 선수들이 방어를 시도하지만, 공을 뺏는 데는 실패했다. 애초에 속도나 순발력에서 비교가 안 됐다. 당연히 저 코트 안에 있는 선수들이야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운동 베테랑이겠지만, 윤혁은 그런 존재들을 가볍게 압도하고 있었다. 프로선수와 아마추어의 경기를 연상케 했다.

-오윤혁 빠릅니다. 지금 사쿼터입니다. 최영준에 전달. 최영준, 돌파. 덩크 찬스, 실패합니다. 다시 오윤혁. 삼점 슛, 들어갑니다. 구 점 차. 더 벌어집니다. 사쿼터, 사쿼터 상황인데요.

쟤, 너랑 형제라며. 묵직한 김윤호의 목소리가 윤수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절로 어깨가 흠칫 떨렸다. 목소리도 목소리였지만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뭇 퉁명스럽게 고개를 드는 윤수를 김윤호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애초에 윤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중요하지도 않다는 투다. 그게 김윤호였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하는 인간.

“그런데요. 그게 왜요.”

“친한가 봐. 아버지도 다르다면서.”

“안 친한 데요.”

“쟤가 아까부터 너 쳐다보던데.”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던 윤수의 시야에 잠시 이쪽을 쳐다보는 윤혁의 존재가 스친다. 멀리에서 보는 거라 윤수로서는 저게 정말 쳐다보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오윤혁같은 프로 선수가 경기하는 와중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윤수를 신경 쓴다는 게 별로 현실성이 없는 얘기라고 생각됐다.

코트 위를 가로지르는 윤혁의 작은 머리통을 응시하다가 문득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옆을 확인한 윤수의 눈살이 길게 일그러졌다. 어깨 위에 올라온 윤호의 묵직한 팔뚝이 벌레라도 묻은 양 불쾌했다. 조심스럽게 올라온 손을 끌어내리는 손등에 땀이 맺히는 것만 같다. 윤수가 명백한 거부의사를 드러낸 걸 알면서도 김윤호가 또 태연하게 물어왔다.

“그래서, 이제 행시는 안 해?”

“안 되는 거 굳이 붙들고 있지 않으려고요.”

“그럼, 뭐할 건데.”

억지로 끌어내렸던 김윤호의 손이 다시 윤수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어금니가 질끈 깨물렸다. 매번 제멋대로 구는 김윤호 때문에 지금처럼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낮은 숨을 내쉬면서 경기장에 시선을 두니, 다소 찌푸린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윤혁이 있다. 설마 김윤호하고 뭐라도 되는 사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경기, 끝났습니다. 홈에서 가볍게 승리가 나옵니다. 오윤혁 활약 컸습니다. 역시 전년도 MVP다운 경기력 보여줬죠. 관중들, 환호합니다.

* * *

뒤풀이는 인근의 고기 집에서 이뤄졌다. 학회 사람 예닐곱 명과 농구팀 선수 대여섯 명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주도는 김윤호였다. 불판이 올려 진 테이블 주변을 서성이면서 어떻게 하면 김윤호와 떨어져서 앉을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가운데 자리 잡은 김윤호가 먼저 윤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윤수, 뭐해. 옆에 앉아.

앞도 아니고 옆이라니 더 싫었다. 고개를 돌려 다급하게 성훈을 찾았다. 완전히 고개를 돌린 채 전화통화에 빠져있는 성훈이 보였다. 응, 그래. 민아야. 오빠도 사랑해. 목소리가 녹아가는 사탕처럼 달달하기 그지없다. 저 여자에 미친 새끼. 절로 짜증 섞인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김성훈은 기가 막힌 사랑꾼이었다. 평소에는 절친한 친구인 윤수에게 잘도 맞춰주는 편이었지만, 여자친구가 개입하면 순식간에 그 쪽으로 신경을 몰입했다. 모순적이게도 성훈의 연애 텀은 그리 길지도 않았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세 달, 그 이상은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한 번 연애를 시작하면 신장이라도 떼어줄 것처럼 잘해줬다. 얼굴도 반듯한 편인 데다가 한 번 빠지면 있는 대로 퍼주는 성격이다 보니 오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윤수가 알기로 지금은 성훈이 가장 최선을 다 하는 연애 초기였다.

안 와? 저 편에서 윤호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한 번만 더 무시하면 볼멘소리가 날아들 것만 같아, 마지못해 옆에 가서 앉았다. 고개를 들어 누구누구가 왔는지를 보는데, 학회 사람들도 그렇고 농구팀 선수들도 그렇고 성훈을 빼고는 다 처음 보는 이들이다. 학회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애초에 윤수가 학회 생활을 그리 오래 한 것도 아니긴 했다.

어. 오윤혁. 농구팀 한 명이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편한 후드 티 차림으로 터벅터벅 안으로 걸어온 윤혁이 테이블 쪽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웬일이야, 너 이런 데 안 오잖아. 농구팀 한 명이 크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윤수로서도 희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윤호와 오윤혁은 애초에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윤혁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김윤호와 윤수가 있는 맞은편에 몸을 내려놓고 김윤호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내리자, 짧은 머리카락에 선명한 물기가 비쳤다.

“어, 너 얘기 많이 들었다. 네가 에이스라며.”

“글쎄요. 딱히.”

“한 잔 받아. 나 누군지 알지? 우리 학교 농구팀 출신으로 검찰 된 사람은 내가 유일무이할 거다.”

소주병을 윤혁 쪽 잔에 갖다 대며 한 김윤호의 말에 윤수는 고개를 돌리면서 짧게 헛웃음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자랑에 발동이 걸렸다. 덤덤한 얼굴로 소주를 받은 윤혁이 제법 예의 있게 김윤호의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다시 병을 건네 받은 김윤호가 이번에는 윤수의 잔을 채웠다. 윤수 많이 먹어라. 너 술 좋아하지.

네, 뭐. 탐탁지 않은 얼굴로 적당히 대답하고 말았다. 엄밀히 따지면 마음에 드는 자리에서나 적용되는 얘기였다. 윤수는 술자리는 즐기는 편이었지만 술 자체는 그리 잘 하지 못 했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는 술자리는 윤수에게 쥐약이었다. 예컨대 지금 같은 자리 말이다.

-김성훈 왜 안 와.

김윤호에게 보이지 않게끔 테이블 밑에 핸드폰을 집어넣고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싫어하는 김윤호에 친하지도 않은 오윤혁. 불편하기 그지없다. 문득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서 물끄러미 윤수를 쳐다보는 윤혁이 있다. 꼭 관찰하는 모양새다. 며칠 전부터 통 속내를 알기 어려운 태도만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핸드폰 액정을 끄려는 찰나 성훈의 메시지가 왔다.

-야, 미안. 나 민아가 불러서.

이 배신자 새끼가, 애초에 가자고 한 건 지면서. 억울함에 온갖 욕이 속에서 읊조려졌다. 허탈하게 가누는 윤수의 어깨를 김윤호가 가볍게 어루만졌다. 뭐해, 윤수. 한 잔 해야지. 마지못해 고개를 든 윤수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아, 네. 잔을 들어 김윤호, 윤혁과 가볍게 맞부딪힌 뒤 입가에 가져갔다. 김윤호와 윤혁은 동시에 넘기고, 윤수는 반만 넘겼다. 그걸 본 윤호 쪽에서 바로 지적을 해 왔다. 윤수야. 첫 잔은 다 받는 거다. 윤수의 눈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먹기 싫은 약을 억지로 넘기는 것처럼 입가에 가져간 소주는 정말로 맛이 없었다. 더럽게도 술이 안 받는 날이었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고 맞은편에 시선을 뒀다. 제법 매섭게 김윤호를 쳐다보는 윤혁이 있었다.

“최근부터 같이 살았다며. 너네 둘.”

“어떻게 아셨어요.”

“저번에 윤민 형 만났는데 그 얘기해 주더라고.”

빈 잔을 채우면서 김윤호가 예사롭게 말했다. 잔을 받던 윤수와 윤혁의 고개가 동시에 올라갔다. 제 멋대로 잔을 부딪친 뒤 또 한 잔을 비우면서 김윤호가 말을 이었다. 윤민 형이 나보다 연수원 한 기수 선배야. 몰랐어?

생각해보니 그랬다. 김윤호가 올 초부터 검찰 생활을 시작했고, 윤민은 지난 해 초부터 로펌 생활을 시작했으니까 기수로 따지면 맞기수가 된다. 아무래도 마주칠 일이 많았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윤민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항상 집에서 특유의 다정한 모습만 접해왔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민 형은 어땠어요. 연수원 때.”

“젠틀하지. 엄청 나이스한 성격이야. 사람들도 다 좋아하고. 솔직히 완벽하잖아. 잘 생겼고, 똑똑하고. 집안도 뭐.”

윤민 얘기가 나오니 부쩍 윤혁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텁텁한 손길로 잔을 마저 비우는 윤혁의 얼굴에서 다소 씁쓸한 감정이 비쳤다. 자신의 친형 얘기에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윤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다. 불판 위의 고기 한 점을 집어먹은 김윤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좀 알기 어렵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그런 거 있잖아. 너무 완벽한데, 빈틈조차 찾을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완성된 사람인데. 그래서 더 무서운 거. 게다가 그 선배는 자기 얘기를 잘 안 해. 사람들 다 받아주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거리 두는 편이고. 뭐, 그 사람 속내야 나 같은 사람이 알 턱이 없겠지만.”

기름 튀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빠르게 달궈지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살점의 표면에 맺혔던 핏물이 자글자글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처음부터 핏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멍하니 익어가는 고기만 응시하던 윤수의 입가에 문득 김윤호가 고기 한 점을 집어 건넸다.

“왜 그렇게 안 먹어.”

“아.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됐어. 근데 넌 왜 이렇게 안 컸냐. 1학년 때 봤을 때하고 똑같으면 어떻게 해. 군대까지 다녀온 놈이.”

“아니, 그게.”

오윤혁 앞에서 이런 걸 보이는 게 왠지 싫었다. 난처해하며 몸을 뒤쪽으로 빼는 윤수의 입 안에 김윤호가 억지로 고기 한 점을 넣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빠르게 고기를 씹는 윤수의 허리 쪽으로 김윤호가 팔을 감아 왔다. 비로소 시작이다. 학교 다닐 때 몇 번이나 겪었던 악몽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이뻐 죽겠어, 하여간. 내가 학교 때부터 너 되게 아낀 거 알지. 지긋이 웃으며 윤수를 응시하는 김윤호의 눈에서 정감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윤수는 김윤호 같은 타입을 잘 알고 있다. 어디에 가나 자신의 애완동물 하나쯤이 필요한 타입. 윤수에게 집요할 정도로 스킨십을 하거나 대화를 건네 오는 건 희롱하기 위해서라거나 윤수가 좋아서라거나 하는 상식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제 손에 놓고 내키는 대로 주물거리고 싶은 강아지 한 마리가 필요한 거고, 그게 윤수였다. 의외로 남자들만 있는 조직에는 김윤호 같은 놈들이 많았다. 애완동물이 하나 있다는 건 남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이 집단에서 이 정도 전유물쯤은 우습게 갖고 있다는 자기과시의 목적이기도 했다.

고개 좀 들어 봐. 뭘 그렇게 자꾸 숙여 대냐.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는 윤수의 고개를 김윤호가 억지로 위로 치켜 올렸다. 픽 웃은 뒤에는 짧게 볼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져나가자 마자 윤수는 파르르 진저리를 쳤다.

작작하시죠, 선배님. 불현듯 맞은편에서 윤혁이 묵직하게 말을 뱉었다. 윤수와 김윤호의 얼굴이 동시에 그쪽을 향했다. 다소 불쾌한 얼굴로 김윤호를 쳐다보는 윤혁의 시선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친 김윤호가 윤혁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했다.

“야. 너 말 진짜 이쁘게 한다. 어?”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공공장소에서.”

“야. 너 몇 살이야.”

“스물 두 살입니다. 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씨발 새끼가. 너 일어나 봐.”

벌떡 몸을 일으키는 김윤호를 보고는 윤혁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김윤호의 손바닥이 윤혁의 뺨을 거세게 가격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전부 이쪽으로 집중됐다. 놀란 남성 몇 명이 허겁지겁 달라붙었다. 잠자코 있던 윤혁이 빠르게 김윤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불시에 윤혁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만 김윤호가 짧게 기침을 쿨럭였다. 분연히 윤혁 쪽을 노려본 김윤호가 죽일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진짜 이 새끼가, 미쳤나.

힘을 실은 김윤호의 다리가 윤혁의 배를 걷어찼다. 순간적으로 미끄러진 윤혁의 팔이 날카로운 테이블 모서리를 스쳤다. 팔뚝 사이로 길게 엷은 핏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있던 여후배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야, 너 이제 큰일 났다? 픽 웃어 보인 김윤호를 향해 부리나케 몸을 일으킨 윤혁이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김윤호가 무너졌다.

주변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들고 일어서서 두 사람을 뜯어말리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누군가는 112를 불렀고, 누군가는 차마 무서운 나머지 다가가지도 못한 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술자리 한 가운데서 윤수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 * *

신고를 받고 달려 온 경찰들은 김윤호와 윤혁을 인근의 지구대로 인계했다. 윤수는 참고인으로 동행했다. 별것도 아닌 사건이라 합의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둘 다 고집스럽게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경찰서까지 가게 됐다.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자꾸만 돌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아까 찢어진 윤혁의 팔뚝이 신경 쓰였다. 일단 응급처치를 받은 걸 보긴 했는데, 괜찮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소견은 듣지 못했다.

형사과 데스크에 앉은 두 사람은 최소한의 진술만 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쌍방과실이었다. 두 사람이 합의만 한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버티는 이유는 알 만했다. 자존심 때문이다. 김윤호 입장에서는 검찰인 자신이 경찰들의 질문에 이런저런 대답을 하는 게 싫을 테니 일부는 이해가 갔다. 다만 윤혁이 조용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에게 이것저것 묻던 형사들 중 하나가 문득 윤혁의 이름을 듣고는 의아한 얼굴로 어딘가에 연락을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경찰서 안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연락을 했던 경찰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했다. 와, 진짜 동생 분이셨네요. 오 변호사님.

초점 없는 눈으로 형사과 앞 의자에 앉아있던 윤수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차분하게 안으로 들어온 윤민이 짧게 경찰과 악수를 나눈 뒤 윤수와 윤혁, 김윤호를 차례로 내려다봤다. 자리에 앉아있던 윤혁이 낮은 욕설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씨발.

윤수야. 괜찮아? 윤민이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윤수 쪽이었다. 어차피 윤수는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이 상황에서 괜찮고 안 괜찮을 게 없었다.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윤수를 보고는, 윤민이 낮은 숨을 쉬면서 짧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몸을 일으키는 윤민을 향해 제법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경찰 한 명이 다가왔다.

“와, 오변 오랜만이야.”

“그러게요. 영전 축하드립니다. 형사과장 되셨다고요.”

“아이고, 본청 때가 좋았지. 죽을 맛이다. 아무튼 동생이 농구 선수였어? 몰랐네.”

“둘 다 제가 잘 아는 친구들이니까 책임지고 합의시키겠습니다.”

“응. 우리 검찰 나리는 모르겠고, 동생이 너무 말이 없네.”

“제가 항상 얘기해뒀거든요. 경찰서 가게 되면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요. 변호사가 올 때까지는.”

거기까지 얘기한 윤민이 윤혁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흘러나온 언어들이 사뭇 서늘했다. 그런데 부르려고 했던 변호사가 애초에 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더라고요. 저를 신뢰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아예 저하고 엮이기가 싫었던 건지.

형사과장이라는 사람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윤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원래 동생이 다 그런 거야. 형 몰래 사고치고 뭐, 안 그래? 오변은 안 그랬어? 아니다, 오변은 안 그랬을 수도 있겠다. 아주 귀하게 자라서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을 것 같은 데 말이야. 횡설수설 내뱉는 형사과장의 말을 들으며 윤혁의 얼굴을 살폈다. 질끈 감은 두 눈에서 불만이 비쳤다.

“우리 서장님 방금 시경 다녀와서 위에서 야근하고 계시거든. 가서 담배 한 대 피면서 얘기나 하고 가. 응?”

“지금 서장님이 박 과장님이시던가요.”

“맞아. 이번에 시경서 이리로 왔어. 너 가면 엄청 좋아하겠네. 시경 수사과장 할 때부터 알았다고 했나.”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면서 형사과장이 빠르게 윤민의 어깨를 밀었다. 일단 윤민이 왔으니 어떻게든 해결은 될 것 같았다. 안도의 숨을 쉬며 들어 올린 시선에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윤혁의 팔뚝이 보였다. 농구선수가 팔을, 그것도 오른팔을 다쳤다. 당분간 경기를 제대로 뛸 수 있을지가 걱정됐다. 아까 이제 큰일 났다며 조소하던 김윤호의 얼굴이 자꾸만 상기됐다.

윤수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쪽에서 경찰 두 명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처음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계속 듣자 하니 윤민의 얘기라 귀가 트였다.

“서른 살도 안 돼 보이는 새끼한테 뭐 서장까지 인사를 시킵니까.”

“쟤 5공 때 총리였던 오인효 손자야. 5공 때 파생된 정당에서 일 주지, 저 새끼 아버지가 원래 성원전자 상무 출신인데 뭐가 그렇게 후달린 게 많은지 그 기업에서도 쟤한테 일 나눠 주지. 그런 식으로 여기도 저기도 다 수임 시켜준다고 하면 뭐, 정계며 재계며 인맥은 다 쥐고 있다고 봐야지. 저 새끼가 로비도 존나게 잘해요. 유명 변호사들 줄줄이 지네 펌으로 끌고 와갖고 승소율이 국내에서 제일 높거든. 서로 윈윈이지, 뭐. 하여간 금수저 물고 태어나면 삼 대가 망해도 잘 쳐 먹고 잘 산다니까.”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던 경찰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윤수와 시선을 마주쳤다. 마른 침을 삼키고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 온다. 따지고 보면 맞는 얘기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삼 대가 망해도 잘 먹고 잘 산다. 오승조 가문은 대대로 정권이나 경찰, 군사 조직에서 고위직을 차지해왔다. 젊은 변호사로서 윤민이 저 정도의 위치에 올라간 것에는 조상 대대로 이어진 기묘한 세습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수는 그 세습이 단순하게 더 많은 일감을 수임해주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컨대 윤민은 그런 게 없었어도 저 비슷한 위치에까지는 쉽게 올라갔을 거다. 로비를 잘해서 승소율을 국내 최고 수준으로 확보한 변호사라고 했다. 애초에 그런 능력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이곳저곳에서 일거리를 줄 이유도 없다.

따지고 보면 비단 윤민뿐만이 아니라 이 집안의 형제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비정상적으로 탁월한 구석이 있다. 오윤석은 나이 서른에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전무 역할을 하면서도 제법 뻔뻔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 직원들을 타고난 것처럼 능숙하게 거느린다. 적당히 예의 있고, 적당히 건방진 방식으로 말이다. 천성적으로 리더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오윤혁. 이미 대학 농구리그에서는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피지컬이다. NBA 팀에서조차 영입을 염두에 두고 직접 경기를 참관하러 온다는 인재. 스스로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윤혁이 향후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선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오윤성. 말할 것도 없다. 대학 석박사 수준의 이공계 과정을 혼자 공부해서 이해한다. 남의 가르침을 받는 걸 지독하게 싫어해서 혼자 공부하는 걸 선호한다. 혼자 하는 데도 그 정도다. 역시나 타고난 거다.

통상적으로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형제들은 대개 비슷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한다. 예컨대 형이 운동을 뛰어나게 잘하면 둘째나 셋째도 그런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형제들 몇 명이 나란히 이공계 수재로 성장하는 경우가 있고, 예술적인 분야도 그렇다. 부모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재능은 한정적이며, 형제들은 그 제한된 재능 안에서 본인의 역량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형제들은 예외다. 각자가 자질을 보이는 분야나 특성이 네 명 다 다르다.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두 가지 정도다. 형제들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거나. 분야를 막론하고 여러 측면에서 빼어난 유전자를 처음부터 세습 받았거나.

19.

집에 오자마자 윤민은 고생했다며 짧게 윤수에게 입을 맞추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혁과 둘이 덩그러니 거실에 남아 목덜미에 스며드는 한기를 견뎠다. 문득 시선을 내려뜨린 곳에 하얀 붕대로 휘감은 윤혁의 팔뚝이 보였다. 괜찮아? 나직하게 건넨 질문에 윤혁이 시선을 맞춰왔다. 마주보는 게 괜히 힘들어 살짝 시선을 비꼈다.

“아까 윤민 형 왜 안 불렀어.”

“부르기 싫었어. 아는 다른 변호사 부르려고 했었어.”

“그러니까 왜 안 불렀냐고.”

“그냥. 감정에 휩쓸려서 내가 잠시 멍청했던 거지, 뭐.”

흐드러지듯 허공에 스며드는 언어에 긴 여운이 묻어 있었다. 윤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오늘 겪은 윤혁 자체가 전부 그랬다. 아침에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대뜸 꺼냈을 때도. 학교에서 마주치자마자 도망치듯 피했을 때도. 그런 와중에 굳이 김윤호와 함께 있는 윤수를 찾아왔을 때도. 그러다 김윤호와 한바탕 붙었을 때도. 경찰서에 가서는 마땅히 불러야 할 윤민을 부르지 않고 침묵만 지켰을 때도. 하나같이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것 일색이었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단 위로 올라가는 윤수의 뒤를 윤혁이 말없이 따랐다. 2층에 올라 복도를 지나는 시간이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나오는 윤혁의 방 앞에서 윤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윤수의 뒤를 밟아 가장 끝 방까지 걸어왔다. 왜. 손잡이를 쥐면서 물어오는 윤수의 얼굴을 윤혁이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어둡기 그지없는 복도 위에서 하얀 달빛이 윤혁의 이목구비를 푸르게 물들였다.

너 어릴 때 얘기 해줄까. 문득 튀어나온 윤혁의 말에 손잡이를 돌리던 윤수의 동작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갑자기 저런 얘기를 하고 나오는 윤혁이 낯설었지만, 처음으로 허물어진 경계에 기묘한 달가움을 느꼈다. 굳어있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먼저 방 안으로 들어온 윤수의 뒤로 윤혁이 들어왔다.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은 윤수가 물끄러미 윤혁을 올려다봤다. 얘기 해. 망설이던 윤혁이 고개를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윤수의 고개가 살짝 갸웃했다. 무슨 조건.

벗어 봐. 대뜸 건네진 말에 윤수의 눈가가 빠르게 찡그려졌다. 자신이 들은 게 진짜인지를 잠시 의심했다. 무의미한 의심이었다. 시야에 닿은 윤혁의 단호한 시선은 일말의 의문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했다. 너 미쳤구나. 나가. 벌떡 몸을 일으킨 윤수가 윤혁의 몸을 거칠게 문이 있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잠시 밀리는 것처럼 당해주던 윤혁이 불쑥 윤수의 팔목을 휘어잡았다. 얼굴이 보다 진지해져 있었다.

“벗기만 해.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

“진짜 왜 그러는 건데. 이유가 뭐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때 학교에서 보고 나서 계속 생각나더라고. 살면서 이런 적이 없었거든. 나도 이상할 정도야.”

담담하게 건네 오는 말에 모골이 절로 송연해졌다. 살면서 이런 적이 없었다는 말이 어딘가 기시감 있게 다가왔다. 어디서 들었나 생각해 보니, 스스로도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어졌다. 오윤석도 저런 식으로 얘기했다. 섹스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윤수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취향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예컨대 윤수만 해도 전 여자 친구인 박채영과 고등학교 때 사귄 첫 여자 친구에게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성격이 좀 전투적이라든지, 눈매가 동글동글한 편이라든지. 그런데 이런 특성을 지닌 여자들은 대한민국에 수없이 많고, 없으면 억지로라도 닮은 부분을 찾아서 저 사람이 내 취향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윤석이나 윤혁이 말해 오는 방식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그저 윤수가 취향이라기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오로지 윤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식이다.

너 이상한 거 알아? 건조하게 물어오는 윤수의 말에 윤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알아.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거야. 나도 내가 이상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윤혁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침 맛이 꽤나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수의 팔목을 쥐었던 손아귀가 스르르 풀어져나갔다. 흘러내린 팔이 밑을 향해 축 늘어졌다.

허무맹랑한 제안이고, 허무맹랑한 이유였다. 헛소리하지 말라며 윤혁을 바깥으로 끌어낸 다음 문을 닫아버리면 이 상황은 종료된다. 그런데 그걸로 모든 일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단언하기에는 어렵다. 앞으로 윤혁과는 이 집에서 수많은 나날을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 긴 시간 내내 윤혁이 지금과 같은 의구심을 지닌 채로 윤수를 본다면 그야말로 서로에게 고통이 될 수 있었다.

달싹이던 손가락을 움켜쥔 윤수가 몸을 돌려 침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트 위에 올라간 뒤, 윤혁 쪽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어 내렸다. 그러는 내내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손아귀에 잡힌 게 바지인지 티셔츠인지 속옷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보여주고 끝내자는 생각만 들었다. 마침내 알몸이 되었을 때, 온 피부에 스며드는 냉기에 비로소 이게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됐어? 똑바로 쳐다보는 게 민망해 곁눈질로만 맞은편의 얼굴을 일별했다. 긴 실루엣이 서서히 다가왔다. 시트 위에 무릎을 딛고는 윤수의 알몸을 찬찬히 눈으로 살폈다. 시선이 닿은 곳곳이 인두라도 댄 것처럼 홧홧했다.

내가 아까 윤민 형 안 부른 거 말이야. 문득 운을 뗀 윤혁이 윤수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시트 위에 눕혔다. 부드러운 시트의 질감이 푹신하게 등을 쓸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와중에 이런 자세로 굳이 보여야 하나 싶은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윤혁의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묵직한 표정 어딘가에 고민감이 어려 있어서, 윤수는 일단 내버려두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어차피 목적은 몸을 보는 것이었다. 이외의 의도는 없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질투를 2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 다시 상기하게 됐던 거 같아. 그래서 그랬어.”

“무슨 질투.”

“그냥. 너 어릴 때부터 윤민 형만 지독하게 잘 따랐거든. 그거 때문에 어린 마음에 내가 꽤 샘을 냈었고.”

“정확히 누굴 질투했다는 거야.”

주체가 불분명한 문장 때문에 윤혁이 질투했다는 대상이 누군지를 읽는 게 어렵다. 누워서 윤혁의 얼굴만 훑고 있던 윤수의 유두 부근으로 윤혁의 손가락이 비벼졌다. 아. 짧게 소리를 낸 윤수가 윤혁의 반사적으로 팔뚝을 쥐었다. 야, 뭐해. 그냥 본다며. 윤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유두를 만지는 손길에 좀 더 힘을 줬다. 튀어나온 부위를 살금살금 만져대는 촉감에 모근이 전부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윤혁의 팔을 쥐고 있던 윤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윤혁의 입술이 짧게 떨어졌다. 윤민이 형을.

스르르 내려간 손가락이 윤수의 엉덩이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온기가 스며있는 손길이라 더욱 감각이 이상했다. 야, 어딜 만져 진짜. 어금니를 깨물며 내뱉는 윤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윤혁의 고개가 윤수의 목덜미를 엷게 물었다. 잘근잘근 씹어대는 감각에 아랫입술이 짧게 떨렸다.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틈틈이 구멍을 매만져대는 손가락에 불현듯 위기감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손아귀가 윤혁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댔다. 그만 하고 떨어져. 이제 됐잖아.

윤혁의 다른 손아귀가 어깨에 닿아있던 손목을 휘어잡았다. 동시에 날아드는 또 다른 팔까지 한꺼번에 움켜쥐고는 시트 위쪽에 고정시켰다. 맞아, 이제 됐어. 이제 안 것 같아. 윤혁의 무릎이 윤수의 허벅지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또 다른 허벅지 역시 다른 편의 무릎에 의해 억눌러졌다. 벌어진 양 다리 사이에 서늘한 공기가 녹아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이상한 게 맞는 것 같아. 오윤수. 윤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위편에서 청바지의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멍하니 보고 있던 윤수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무너진 젠가처럼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뒤늦게 하나하나 정돈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진짜 아니라는 것.

“오윤혁. 당장 떨어져. 너 진짜 하려고 그래? 정신병자처럼 친형이랑 하고 싶어?”

“말했잖아. 내가 이상한 거 인정한다고. 어차피 이번에 한 번만이야. 나도 지옥은 한 번만 가고 싶거든.”

자조적으로 웃은 윤혁이 입고 있던 청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내렸다. 배에 붙을 정도로 단단하게 솟아오른 성기에 윤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절대 안에 들어갈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크기였다.

소리를 질러서 누구라도 불러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옆방에는 윤성, 그리고 그 옆옆 방은 윤민. 부르면 누군가 오기는 할 것이다. 그 다음이 문제다. 윤혁에게 이런 꼴을 당할 뻔한 모습을 보여주고 아무렇지 않게 그들과 생활할 수 있을까. 윤수는 자신이 없다. 게다가 이걸 계기로 오 회장이나 윤석과 관계를 맺었던 일까지 알려진다면 윤수는 이 집에서 인간으로서의 취급조차 받기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윤혁은 상황이 다르다. 그는 이 집 사람이었다. 짐승 취급을 받아도 이 저택 소속원이라는 성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윤수는 아니었다. 여전한 이방인이었다. 소속되지 않은 존재의 비인간적인 행위는 더욱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다. 도무지 소리를 지를 자신이 없었다. 결국 모든 화살은 윤수에게 돌아오게 돼 있었다.

아, 그리고 너 이미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랑 엄청 닮았었어. 윤수의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지분거리면서 윤혁이 말을 건넸다. 등줄기가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 예기치 않은 어머니 얘기까지 들었다. 윤혁의 손아귀에 틀어 잡혀 있던 맥박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그렇게 잊으려고 했던 지옥의 존재가 다시금 선명해졌다.

뭘 그렇게 당황해. 어렸을 때부터 이뻤다는 얘긴데. 픽 웃은 윤혁이 불쑥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읍. 윤수의 이빨이 파고들 것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긴장해서 위축된 데다가 빠듯한 공간에 성기가 쉽게 들어갈 리가 없었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내벽 안으로 두툼한 이물질이 뱀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윤혁의 무릎에 눌려있던 하반신이 순식간에 쓰려왔다.

“아흑. 안 돼. 안 된다고. 그거 안 들어, 흐읏.”

“엄청 비좁네. 이런 구멍에 큰 형은 어떻게 넣은 거야.”

“그냥 빼. 읏. 아파. 찢어질 것 같.”

스멀스멀 물기가 차오르는 시야에 윤혁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살짝 벌어진 윤수의 입술을 덮치듯 머금고는 혀를 밀어 넣었다. 대뜸 안쪽의 깊은 점막부터 쓸어내리는 혀에 숨이 틀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터져 나올 구멍을 차단한 윤혁이 더욱 깊숙하게 성기를 집어넣었다. 간신히 제 모습을 갖춘 점막 곳곳이 다시 물크러질 것처럼 위협적으로 내벽이 쓸려나갔다.

삼키는 건 잘하네. 어디까지 넣을 수 있어? 나른하게 얘기한 윤혁이 침이 고인 윤수의 입 안을 찰박거리며 혀로 헤집었다. 성기가 틀어박혀 있는 공간이 다소 후끈했다. 쿠퍼액이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다소 미끈해진 내벽을 타고 성기가 보다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터질 것처럼 커진 귀두가 점막의 주름 하나하나를 관찰하는 것처럼 머금었다. 간신히 머리에서 지웠던 고통이 하반신을 짓이길 것처럼 장악했다. 윤혁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던 손아귀가 간헐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아파, 오윤혁. 제발. 고개를 젖히자마자 눈물이 시트 위로 떨어져 내렸다. 눈가를 타고 줄줄이 흐르는 물기를 혀에 담으면서 윤혁이 나긋하게 말했다. 너 아직도 눈물이 많구나. 어릴 때도 엄청 울었었는데. 그 말에 왠지 눈물샘이 더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의 무게만큼 윤혁의 것이 더 두툼하게 팽창하는 게 뱃속에서 느껴졌다.

상반신을 일으킨 윤혁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윤수의 다리를 여전히 벌리게 한 채로 하반신에 힘을 가했다. 살짝 빠졌던 음경이 내벽 깊숙이 자취를 남기며 쑤시고 들어갔다. 점막 곳곳이 망가질 것만 같아 윤수의 목덜미가 소스라쳤다. 오랜만의 삽입이라 그런지 오 회장과 처음 할 때처럼 낯설었다. 안쪽에 존재하는 성기의 존재감이 적나라했다.

오 회장이 박았던 구멍을 오윤석이 탐했고, 그것을 잊을 만 했을 때 오윤혁이 같은 곳에 성기를 박아댔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마치 이 집에서 자신이 공용으로 쓰이는 성적인 도구라도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오 회장을 제외하면 남도 아니었다. 그들 역시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든 정상으로 회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들은 너무도 쉽게 그걸 포기하고 있었다. 그저 눈앞에 놓인 존재에 발정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처럼. 무뎌지는 윤수의 동공 너머로 더운 물기가 자욱했다. 짐승들과 섹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그러면 자신도 이제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윤수의 가슴께에 더운 물기가 떨어져 내렸다. 낮은 숨을 내쉰 윤혁이 상의를 벗어 올렸다. 구석구석 단단하게 근육이 새겨진 몸 곳곳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시 직장의 끝까지 다다른 성기가 점막의 주름을 끈질기게 지분댔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느릿하게 내벽을 비벼대는 음경 때문에 꼭 손가락으로 어루만져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얇은 점막에 혈기 어린 귀두가 스칠 때마다 혈관이 터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윤수의 발가락이 빠르게 오그라들었다.

한동안 더뎠던 삽입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흠칫한 윤수의 허벅지를 윤혁의 손가락이 꾹 눌렀다.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로 치고 들어오는 게 빨라졌다. 내벽이 통째로 일그러질 것 같은 기분에 윤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하으. 너무 빠르, 앗. 오윤혁. 살려줘.”

“네 구멍, 너무 잘 조여서. 이러려고 있는 구멍 같아. 어릴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오윤수.”

“그냥, 흑. 얘기하지 마. 아무것도. 흐읏.”

“왜. 어릴 때 얘기하는 거 싫어? 네가 얘기해 달라며.”

나직하게 스며드는 목소리에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전부 다 싫었다. 이 상황도 싫고, 자신의 과거도 싫어졌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알면서 태연하게 범해오는 오윤혁도 싫었다. 눈물을 삼키는 식도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아예 갈기갈기 스스로를 찢어내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완전히 윤수 위에 몸을 밀착시킨 윤혁이 보다 거칠게 하반신을 부딪쳐 왔다. 성기가 내벽을 타고 들어올 때마다 질척이는 피부 사이의 마찰음이 방 안을 울렸다. 뱃속이 아예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의 성기에 헤집어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처음 하는 것이라면서, 오래전부터 윤수의 몸을 꿰고 있었다는 것처럼 안을 장악하고 있다.

문득 귀두가 내벽의 돌출부에 닿았다. 윤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저것만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무릎을 세우려고 하며 발버둥치는 윤수를 알아채고는 윤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왜. 가는 거 싫어? 자지로도 한 번 가 봐. 저번엔 손가락이었잖아. 물기를 머금은 윤수의 고개가 빠르게 도리질 쳐졌다. 안 돼, 진짜 안 돼. 하지 마, 좀.

절박한 윤수의 언어는 애초에 윤혁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외마디 비명에 가까웠다. 느긋하게 미소를 띤 윤혁이 돌출부를 지그시 귀두로 짓눌렀다. 아읏. 윤수의 입 밖으로 밭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립선 너머를 자극하는 음경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손에 쥐고 노는 것처럼 집요했다. 내벽의 끄트머리까지 들어갔던 귀두가 돌기를 수시로 자극하면서 아래위로 치고 빠졌다. 하반신이 아려오는 가운데 세포가 톡톡 터지는 듯한 간지러움이 찾아들었다. 윤수의 입 밖으로 연신 물기 어린 숨소리가 뱉어졌다.

“아, 그렇게. 흐윽. 하지 마, 제발.”

“왜? 기분 좋잖아. 그냥 솔직하게 인정해. 왜 자꾸 아닌 척 굴어.”

“싫어. 진짜, 읏. 싫다고. 가는 거, 하아.”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읊어대는 고집스러운 절규가 윤혁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불현듯 허리를 세운 윤혁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힘 있게 돌출부를 중심으로 성기를 찔러댔다. 정신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하반신에 들이닥치는 가려운 감각에 윤수의 허리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오윤혁, 그만 해. 난 싫어. 싫다고 했잖아. 혹여나 바깥으로 소리가 들릴까봐, 최대한 집어삼켜가며 흘린 애원에 윤혁은 미간을 구기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하반신이 엉덩이에 맞닿을 때마다 현현하게 울리는 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귓속을 파고드는 찰싹이는 소음이 더 이상 실존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

이미 지옥에는 떨어졌다. 아직 당도하지 않았을 뿐. 언제 떨어질지는 윤수 스스로도 몰랐다. 다만 자신은 이미 추락하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내내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한다. 나락에 존재하는 지옥의 화염이 얼마나 뜨겁고 끔찍한 일인지를 막연하게 헤아리는 고통. 인간이 아니기를 선택했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오윤혁, 오윤혁. 그마안. 그냥, 하으. 내가 쌀 테니까. 제발.”

“그럼 싸 봐. 너 싸는 거 보고 나도 쌀 테니까.”

“안에다가는, 읏.”

“응. 안에 싸줄게.”

윤수의 귓바퀴를 어루만지면서 윤혁이 피식 웃었다. 정말로 자신이 지옥에 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됐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성기 끝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젖어있는 윤수의 성기를 한 번 어루만진 윤혁이 부르튼 내벽 안에 더운 이물질을 쏟아냈다. 고개를 돌린 채 소리 없이 숨만 가누던 윤수의 시선이 문득 시트 위에서 막 몸을 일으킨 윤혁의 등을 향했다.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가다듬던 윤수의 머릿속에 일순간 어떤 의구심이 새겨졌다.

오윤혁. 등에 무슨 상처가 저렇게 많아.

20.

또 잠을 설쳤다. 창밖에서 나뭇가지가 올곧게 서있는 걸 봤는데도 귓가에서는 끊임없이 나뭇가지 스치는 환청이 들렸다. 베개에 푹 얼굴을 묻고 양 끄트머리를 손아귀에 쥔 채 귀를 틀어막았다.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베개를 쥐고 있던 손아귀가 스르르 풀어져 내렸다. 쥐고 있을 힘조차 사라져갔다.

윤수야. 문이 열리는 소리가 서늘하게 귓가를 적셨다. 고개를 드니 윤민이 있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다가 문득 알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이불은 거의 목 끝까지 덮어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안을 확인하지 않는 한은 알 길이 없을 테니. 머뭇거리다 최소한의 얼굴만을 드러낸 채 윤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지금 몇 시야.”

“일곱 시. 저녁.”

“아. 또 밤새고 잤네.”

“저녁 약속 있니.”

“없어.”

“옷 입고 나와. 어디 좀 가게.”

담담한 톤으로 말을 마친 윤민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얼핏 비친 어깨가 새삼 차다. 주섬주섬 일어나 옷을 챙겨 입다보니 머릿속에 기묘한 의문이 들었다. ‘옷 갈아입고 나와’도 아니고, ‘옷 입고 나와’라고 했다.

* * *

윤민과 향한 곳은 청담동에 있는 한 고급 라운지바였다. 국내 최대의 주류 수입업체에서 VIP 고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회원제 라운지라고 윤민이 얘기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 주류업체에서 수입하는 모든 양주류가 비치된 바가 한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검은 색 바닥재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은은한 노란 조명과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잔을 닦고 있던 바텐더가 윤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윤민이 가볍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빼곡하게 진열장을 채운 양주병에서는 갓 매장에 세팅된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늘 새것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 수준 병이 비워지면 아예 처분하고 새로운 양주로 채우는 모양이었다. 일반적인 바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터다. 멍하니 진열대를 둘러보는 윤수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윤민이 픽 웃었다. 신기해?

응. 신기해. 가감 없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웬만한 성인들도 올 일이 없을 곳에 대학생이 왔는데 신기하지 않을 리가 없다. 윤민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잠깐 앉아 있어. 저기, 이쪽으로 좀 와 볼래요.

바텐더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얼굴이 연예인 연습생처럼 훤칠하다. 얼굴이라도 보고 뽑는 모양이었다. 왠지 모를 위축감에 윤민이 내어 준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주변만 살폈다. 옆에서 윤민이 바텐더에게 몇 가지 요청을 건네는 게 들렸다.

“내 동생인데, 여기 라운지 처음이니까 이것저것 시음 좀 시켜줘요.”

“네. 변호사 님. 그리고 조금 이따 대표님 오시는데, 알고 계신 거죠?”

“오면 얘기해 줘요. 일단은 이쪽에 신경 쓰고.”

예사롭게 바텐더의 말을 귀에 담은 윤민이 윤수의 어깨를 지그시 감쌌다. 윤수야. 나 잠깐 안 쪽 룸에서 누구랑 얘기 좀 할 테니까, 여기서 좀 놀다가 들어와. 한 십 분 정도만. 가까이 다가오는 아로마 향의 얼굴을 보니, 절로 목구멍을 타고 단 침이 삼켜진다. 바텐더를 보면서 잘 생겼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새삼 매력적인 이목구비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윤수를 두고 윤민이 코너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라진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바텐더들이 저희들끼리 말을 주고받는 게 들렸다.

“안에 여자야?”

“아니 남자.”

“크, 아깝. 여친 누군지 궁금했는데.”

“여자랑 온 적이 있긴 하냐.”

저희들끼리 한동안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던 바텐더들이 문득 윤수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이 새삼 다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가왔다. 과장된 미소는 전형적인 서비스직의 그것이다.

“좋아하는 주류 타입은 어떻게 돼요?”

“글쎄요. 전 그냥, 다 먹어서.”

“술은 센 편?”

“별로요.”

“어디 보자. 이거 한 번 시음해보실래요?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수입하는 건 아니고, 해외나 면세점에서 파는 건데. 시트러스 향 좀 강하고 당도가 있는 리큐르예요.”

주저리주저리 말을 하면서 바텐더가 잔에 붉은 색 리큐르를 따랐다. 맛이 어떻고, 가격대가 어떻고, 판매하는 주류사는 어땠는지를 줄줄이 읊어대는 음성이 따분하기 그지없다. 말을 듣는 대신 코너 안쪽에 시선을 뒀다. 안에서 윤민이 누굴 만나고, 자신은 왜 데려 왔는지가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고개를 돌려 로비가 있는 쪽을 봤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조용하고 묵직한 바닥을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재즈음악이 채운다. 여기가 메인 공간 같은데, 아무도 없는 걸 보면 손님들은 전부 룸에만 있는 건가. 아예 손님이 윤민밖에 없는 것은 아니겠지. 고개를 든 윤수가 바텐더가 있는 쪽을 봤다. 저기요. 바텐더가 활짝 웃으며 응수했다. 네, 말씀하세요.

여기는 회원권 가격이 얼마나 해요. 새삼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에 바텐더는 별 순진한 얘기를 한다는 투로 짧게 웃어 보였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잔을 닦고 있던 바텐더가 심상하게 입을 열었다. 컵 안에 새겨진 불투명한 물질이 흰색 천이 스치며 스윽 지워져 갔다.

“여기는 돈 낸다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고요. 우리 고객사 대표님들이나 우리 대표님하고 기타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VIP 분들이 오세요.”

“그럼, 윤민 형은 어떻게 오는 거예요.”

“우리 회사 관련 민사 소송을 오 변호사님 로펌에서 전담하거든요. 오 변호사님 아버님하고 우리 대표님 간의 친분도 있고요.”

그랬구나.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쪽 회사도 윤민의 로펌에서 하는 거라고. 정당에서 수임한 일거리, 오 회장이 다니던 성원전자에서 수임한 일거리, 그리고 이 회사.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로펌이 큰 모양이다. 고작 개업 2년 차의 젊은 변호사가 대표로 있는 로펌이 이렇게까지 자리를 잡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은 의구심이 든다. 비정상적이었다.

그나저나 처음 볼 때는 몰랐는데, 닮으셨네요. 오 변호사님이랑. 앞에서 씩 웃으며 건넨 바텐더의 말에 잔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노란 조명이 흐르는 테이블 너머가 일순간 흐릿해졌다. 닮았다고, 오윤민이랑. 무겁게 느껴지는 잔을 느릿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테이블을 울리는 마찰음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롭게 다가왔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윤민뿐 아니라 그 집 안의 형제들 그 누구에게도 윤수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바가 없다. 그 집 형제들은 그 집 형제들이고, 윤수는 윤수였다.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컸다. 닮은 구석이 있을 리가 없다. 건조한 입술을 뗀 윤수가 바텐더를 보며 대꾸했다. 닮았다는 얘기 처음 들어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바텐더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요? 하긴 막 대놓고 닮은 얼굴은 아니에요 솔직히. 그러니까 뭐랄까, 구체적으로 어디가 닮았다기보다는. 그냥, 분위기 같은 거? 그런 게 좀. 윤수의 눈살이 지그시 찌푸려졌다. 분위기가 닮았다는 게 대체 무슨 얘기인지 와 닿지 않는다. 그 와중에 바텐더는 누르면 말이 나오는 인형처럼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윤민과 닮았다니, 대체 어디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얘기다.

오윤수. 문득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윤수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막 라운지 안에 발을 들이는 오윤혁이 있다. 쟤는 여기 또 왜. 저도 모르게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워낙 급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맞은편의 바 모서리에 골반 쪽을 부딪쳤다. 젠장. 낮은 욕설과 함께 눈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놀란 윤혁이 빠르게 윤수 쪽으로 걸어왔다. 야, 괜찮아? 자연스럽게 뻗어오는 팔을 윤수의 손아귀가 사납게 밀어붙였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너 진짜 조심 좀 해라. 어제 한참 그래 놓고.”

걱정스럽게 건네 오는 말에 윤수의 눈가가 더욱 구겨졌다. 어제 일이 여기서 왜 나오는지. 분연히 노려보는 윤수의 얼굴을 보고는 윤혁이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바텐더들의 의아한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스쳤다.

윤수야. 문득 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윤민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윤혁과 윤수의 얼굴이 동시에 들렸다.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 두 사람을 차례로 응시한 윤민이 턱 끝을 까딱했다. 들어가자, 이제.

어쩐지 어둡게 느껴지는 복도를 걸어 윤민이 문을 열어주는 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윤혁과 윤수 둘 다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김윤호. 저 사람이었나. 난감한 얼굴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김윤호가 고개를 든다. 윤수를 보고는 낮은 한숨을 쉬며 도로 숙였다.

오윤혁. 저 쪽에 앉아. 윤수도 여기 앉고. 윤민의 말에 따라 윤혁, 윤수가 나란히 앉고 윤민은 윤수 옆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의 양주병을 든 윤민이 김윤호의 잔을 채웠다. 갈색 알콜을 느릿하게 채우고 난 병의 입구가 들렸을 때, 김윤호의 손이 순간적으로 부들거렸다. 병을 도로 가져온 윤민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내 윤수 쪽은 보지도 않고 윤혁에게 말을 걸었다. 오윤혁. 너도 한 잔 받아.

망설이던 윤혁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잔을 들었다. 잔 채워지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묵직하게 쌓였다. 어쩐지 윤수도 받아야 할 것만 같았다. 앞에 놓인 잔으로 다가가는 손을 윤민이 차분하게 저지했다. 뻗었던 손목에 단단하게 윤민의 손아귀가 둘러졌다. 너는 그냥 있어.

평소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호한 음성에 잡힌 손목의 힘이 절로 빠졌다. 윤수의 팔을 소파 위에 올려놓은 윤민이 말없이 잔을 통째로 비웠다. 지켜보고 있던 김윤호와 윤혁도 차례로 잔을 비웠다. 빈 잔을 어루만지던 윤민이 천천히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워낙 고요한 공간인 탓에 테이블 위에 부딪히는 잔의 소리가 바위라도 내려치는 것처럼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김윤호. 담담하게 떨어진 윤민의 말에 김윤호가 빠르게 응답했다. 네, 선배님. 반사적으로 숙여진 김윤호의 정수리를 보면서 윤민이 들릴 듯 말 듯하게 혀를 한 번 찼다. 소파가 부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윤민이 몸을 일으켰다. 김윤호를 향해 내딛는 느릿한 발걸음에 한기가 어려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김윤호 앞에서 윤민은 한동안 말없이 그 새까만 머리통을 내려다만 봤다. 긴 숨을 내쉰 윤민이 지그시 입술을 뗐다. 고개 들어, 김윤호. 흘러나오는 저음에 평소와 다른 공기가 스며 있다. 어둡고 서늘한.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든 김윤호를 새까만 눈동자로 훑어가며 윤민이 질문을 건넸다. 말이 질문이지, 추궁에 가까웠다. 왜 그랬어. 김윤호는 사과로 갈음했다. 죄송합니다. 말을 마친 입가에 나지막한 한숨이 맺혔다. 윤민의 눈가가 불만족스럽게 꿈틀거렸다.

“죄송한 놈이 무슨 표정이 그래.”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님.”

“너 대검 정현우 라인이라며.”

대뜸 떨어진 말에 김윤호의 목덜미를 타고 굵은 침이 넘어갔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윤민이 묵직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정 선배 지금 경찰청 수사과에서 뇌물수수 혐의로 내사 들어간 거 있다. 2004년에 특검에 있었지. 지금 BH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 (*BH: 청와대.)

“알아들었습니다.”

김윤호의 고개가 또다시 밑으로 꺾여 내려갔다. 소파 위를 딛고 있던 윤수의 손아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축축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2004년 때와 지금의 정권이 다르니, 2004년 때 특혜를 입었던 검찰들은 언제든지 정부로부터 보복성 물갈이를 당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렸다. 거기에는 윤민 스스로 그 정도 경고는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맥을 지니고 있다는 자신감이 전제돼 있었다.

좀 생각하면서 행동해. 응? 고개를 들어 짧게 숨을 뱉은 윤민이 다시 김윤호 쪽을 내려다봤다. 얼핏 비치는 시선이 살기라도 담은 양 찼다. 차마 마주보기가 어려워 윤수의 시선이 비스듬하게 돌아갔다. 문득 시야에 담긴 룸의 하얀 모퉁이가 더께 하나 없이 얼음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고개 들어. 김윤호. 건조한 윤민의 말에 김윤호의 고개가 힘겹게 올라갔다.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윤민이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뺐다. 허공으로 올라갔던 손이 그대로 김윤호의 뺨을 내려쳤다. 매서운 소리와 함께 김윤호의 얼굴이 빠르게 돌아갔다. 한 번이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제자리로 돌아온 김윤호의 얼굴을 다시 윤민의 손이 가격했다. 같은 상황이 몇 번인가 반복됐다. 손으로 뺨을 내려칠 때마다, 윤민의 차분한 목소리가 룸 안을 채웠다.

그러게, 어딜 감히, 건드려, 내가 아끼는 걸.

쉴 새 없이 몰아붙이던 날 선 마찰음이 멎었다. 팔을 들어 올린 윤민이 긴 숨을 내쉬면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떨리는 동공으로 주시하고 있던 윤수와 윤민의 시선이 짧게 마주쳐졌다. 새하얗게 질려있는 윤수를 보며 희미하게 웃은 윤민이 다시 얼굴을 돌렸다. 윤민을 담았던 망막이 스멀스멀 아려오는 것만 같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물론 김윤호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저건 지나치다. 마른 침을 삼킨 윤수가 하염없이 윤혁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윤혁이 보인다. 동공이 메말라 붙은 것처럼 물기가 하나도 없다. 완전히 경직돼 있는 윤혁을 보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오윤민이 뭐라고 한 건 분명히 김윤호다. 그런데 불현듯, 경고한 대상이 그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2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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