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장남 오윤석 (3/11)

3장. 장남 오윤석

윤수야 절대로 밖에 혼자 돌아다니지 마. 친구랑 다니던가, 엄마를 불러.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그런 말을 주기적으로 했다. 물론 일리는 있는 얘기였다. 어린 애가 혼자 다니다 보면 위험할 수도 있는 법이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라 적당히 흘러 듣고 말았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흐른 후 혼자 학원에서 돌아오다가 처음 보는 어른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중학교 일 학년 때의 일이다.

윤수를 태운 차는 커다란 저택으로 향했고, 차 문이 열린 곳에는 윤수보다 네댓 살쯤 많아 보이는 남학생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였다. 윤수는 그것이 어느 학교의 교복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목구비가 미성년자인데도 제법 뚜렷해서 저도 모르게 잘생겼다고 생각한 기억이 있다.

남학생은 차에서 내린 윤수를 찬찬히 훑어봤다. 얼굴을 확인하고, 목덜미를 보더니 교복을 입은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막 입양하기 직전의 애완동물을 두고 정말 키울 만한 대상인지 감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수를 데려온 남자가 남학생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남학생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난감해하는 낯빛이 비쳤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남학생이 남자를 향해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안 돼요. 너무 어려요. 이래서는 쓸모가 없어.

너, 지금 몇 살이야. 갑자기 남학생이 윤수에게 턱짓을 건네며 물어왔다. 몸짓에서는 태어나서부터 많은 걸 누리고 자란 가진 자 특유의 여유가 엿보였다. 윤수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 질문을 차마 무시하는 것이 어려웠다. 남학생의 태도에 녹아있는 위엄에 저도 모르게 압도된 기분이었다.

“열네 살인데요.”

“그동안 안 크고 뭐 했어. 누가 이걸 중학생으로 봐.”

원래 그렇게 타고난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뭇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남학생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는 윤수를 향해 남학생이 가까이 다가왔다. 낮은 한숨을 쉬면서 윤수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싼 남학생이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많이 먹고, 빨리 커. 응? 내가 지켜 볼 거야. 알았지.”

자신이 크는 것과 이 남학생의 앞날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윤수는 알 턱이 없었다. 뭐가 뭔지 몰랐지만, 윤수는 일단 대답부터 하고 봤다. 대답을 하기 전에는 남학생이 쥐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놓아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끄덕인 남학생이 뒤 편에 서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얘 데려가요. 그리고 당분간 이런 거 하실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래도 예쁘게는 컸네. 나직하게 한마디 하며 웃어 보인 남학생이 등을 돌렸다. 등 너머에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정말 기괴할 정도로 큰 나무라서, 시간이 흐르고 흐른 후에도 윤수는 다른 건 몰라도 그 나무만은 종종 떠올랐다. 비록 자세한 형상을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대략 그런 나무가 존재했고 자신이 그런 나무를 키우는 집에 갔었다는 사실이 이따금씩 파도 속의 암초처럼 고개를 들곤 했다.

* * *

“또 왔어요?”

한동안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희미하게 눈꺼풀을 파고드는 햇살과 함께 갈기갈기 일그러졌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곳에는 윤석이 있었다. 또 마치자마자 기절한 모양이다. 방까지 옮겨 놓은 건 조 비서라는 사람일 터다. 이 집에 있다 보면 파스스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자꾸만 기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 회장과 하는 섹스는 더욱 빠르게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기폭제와도 같았다. 섹스를 하고 나면 매번 정신을 잃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서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봤다. 그러고 보니 저 나무, 그 때 봤던 것하고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런 커다란 나무를 지닌 집이 한두 곳이겠느냐만.

몸은 괜찮아?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의 윤석이 윤수에게 말을 건넸다. 무성의한 질문에 괜히 화가 치밀었다. 괜찮겠어요? 보고도 몰라요. 날 선 언어를 다짜고짜 윤석에게 겨누고 나자 뒤늦게 환멸감이 몰려왔다. 스스로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한 건 오 회장이었다. 윤석은 관계가 없다. 화를 내는 일 자체가 멍청한 일이다. 메마른 입술을 가볍게 축인 윤수가 몸을 감싼 이불을 끌어 내렸다. 완연히 드러난 알몸을 보자마자 윤석이 잠시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윤수의 눈살이 사르르 찌푸려졌다. 전에 없이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수의 알몸이라면 윤석은 몇 번이나 봤다. 오 회장과 섹스하고 난 다음 날에는 언제나 윤석이 찾아왔으니 지금까지 대 여섯 번은 족히 봤을 거다. 그 때마다 뻔뻔하게 몸을 확인하면서 약을 발라줬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려니 했다. 서로 합의한 일이라 생각했다. 왜 갑자기 오늘 이러는지는 모를 일이다. 고개를 들어 윤석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다리를 벌렸다.

“뭐 해요. 발라줘요, 약.”

“너 진짜 부끄러운 걸 모르는구나.”

“관심 없다면서요. 형이야말로 갑자기 왜 이래요.”

갑자기 보통 사람처럼 물어오는 윤석 때문에 이번에는 진짜로 화가 치밀어 오를 뻔 했다. 오히려 윤수 쪽을 이상한 사람처럼 만드는 언사다. 가볍게 자신의 얼굴을 쓸어 올린 윤석이 쓰게 혀를 차고는 협탁 위에 올려 뒀던 연고를 손에 쥐었다. 손가락 위에 짜여진 반투명 연고가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났다. 윤수의 앞으로 다가 온 윤석이 손을 들어 윤수의 허벅지를 잡았다. 상처 난 아래쪽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상한 부위에 촘촘하게 끈끈한 약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아, 좀. 천천히. 나지막하게 낸 소리에 윤석이 난감한 얼굴로 숨을 뱉었다. 또 전에 없던 반응이다. 오 회장으로부터 처음 강간당한 다음 날 마주쳤던 때가 떠오른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빠르게 붉어졌다. 능숙하게 약을 다 바르고 난 윤석이 떨어져 나갔다. 완전히 고개를 돌려버린 채 탁자 위에 차곡차곡 쌓여진 윤수의 옷을 던지듯 건넸다. 묵묵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좀 먹고 다녀라. 너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말랐어.”

“알아요.”

윤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아니, 이 집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 사실쯤은 알고 있을 거다. 추정할 만한 이유야 있었다. 아무래도 오 회장이 가장 유력할 것이다. 그러나 윤수는 그게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윤수의 의심은 이 저택을 둘러싼 기묘한 분위기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인정하자니 말도 안 되는 추정이란 생각이 중첩돼 떠올랐다. 윤수는 귀신도 종교도 믿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이 집이 문제라며 단정 짓는 일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졌다.

학교에 가자마자 학보사부터 들렀다. 한동안 오 회장에게 시달리느라 학보사 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정신이 없었던 윤수 대신 부편집장인 성훈이 학보를 챙겼다. 슬슬 편집장 흉내라도 내지 않았다간 본성이 포악한 성훈에게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몰랐다.

어, 윤수 오랜만이네. 학보사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수개월 만에 보는 학보사 선배 김시윤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윤수가 의아한 얼굴로 옆에 앉은 성훈을 쳐다봤다. 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학교 총장 인터뷰할 거 있어서 왔다가, 시간 남아서 들렀대.

“아, 맞다. 시윤 선배. 방송사 가셨다고 했죠.”

“응. SBC. 윤수도 나중에 마이크로 와.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글쎄요. 전 펜이 더 맞는 거 같아서요.”

“어련하시겠어요. 편집장님이.”

심드렁하게 받아치는 윤수를 보며 시윤이 못 당하겠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이 학교의 학보사는 인맥이 탄탄한 편인 데다가 실제 언론사 지망생 비율이 높았다. 당연히 선배들 중에 기자로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고, 시윤도 그 중 하나였다.

요즘엔 뭐 취재하세요? 성훈이 시윤이 노트북에 담겨 있는 이런저런 영상기록을 눌러대며 물었다. 지금은 경제부 소속이라 기업 취재 위주. 솔직히 업계 취재는 재미없어. 사회부 있을 때가 훨씬 더 나았지. 성훈의 옆에서 함께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던 윤수의 시선에 문득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어. 저도 모르게 뱉은 윤수의 말에 시윤과 성훈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수십 개의 영상 캡처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컷이 있었다. 오승조 회장. 정장을 입은 채 미소를 머금은 모습. 망설이던 윤수가 오 회장의 얼굴이 나온 영상파일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건 뭐예요? 선배. 시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거. 한 때 취재하다가 홀드한 거. 왜 홀드 했는데요?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느낌이 들어 시윤이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심상했다. 생각해보니 원래 저런 캐릭터였다. 딱히 남들에게 선을 긋지 않는 솔직한 타입.

“저 사람이 러시아 광물 회사 회장인데, 처음에는 그 회사가 우리나라 성원전자라는 곳이 보유했던 곳이거든. 그러다가 성원전자 상무 출신이었던 오승조 회장에게 갑자기 헐값으로 매각을 했고, 오 회장은 나중에 그 회사를 유럽에 상장시켜서 떼돈을 벌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거야. 그렇게 잘 될 회사를 왜 굴지의 대기업이 손해까지 보면서 지나치게 싼 가격에 매각을 했냐는 거지.”

“왜 그랬는데요.”

“비자금 조성의 목적이 아니었겠느냐는 얘기가 나오긴 해. 솔직히 예전부터 의혹은 불거졌어. 뚜렷한 증거가 없다보니 매번 의문만 제기하고 끝나는 수준이었지만. 그래서 나도 취재하다 홀드한 거고.”

담담하게 이어지는 시윤의 말에 윤수의 동공이 빠르게 커졌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게 사실인 게 알려지면, 그 회사 대표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일단 매각을 주도한 성원전자 CEO에는 배임죄가 적용되겠지. 그리고 문제의 오 회장은 증권거래법 위반. 이게 정말 기가 막힌 게이트인데, 증거가 없어.”

“저, 이 분이랑 좀 아는데. 제가 취재 도와드릴까요?”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성훈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몸을 일으킨 성훈이 윤수의 팔을 끌고는 학보사 구석으로 향했다. 뭐야, 너 왜 그러는데. 양아버지 회사잖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쏟는 성훈을 보면서 윤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왜, 내 마음이야.”

“미쳤어? 너.”

“안 미쳤어.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냥 모른 척해. 김성훈.”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크게 숨을 뱉은 성훈이 고개를 돌렸다. 윤수는 진심이었다. 이건 윤수에게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김시윤의 취재를 도와서, 오 회장을 감방에 넣는다. 그리면 위탁 양육이니 뭐니 하는 같잖은 조건 없이도 조용히 유산 받고 그 집에서 나올 수 있다. 당연히 오 회장이 하는 강압적인 섹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집에서 나오면, 유산으로 아버지 병원비를 마련하면 된다. 어떻게든 이걸 이용해야 했다.

시윤은 도와주면 자신이야 고맙다고 했다. 윤수는 증거가 될 만한 건 모두 찾아내기로 했다. 성원전자는 워낙 보수적이면서도 모든 의사 처리 과정에 철저한 곳이었다. 오 회장에게 정말 비자금 마련 목적의 주식 매각을 진행했다면, 문서로든 육성으로든 각서를 남겨 놨을 터였다. 키는 오 회장의 방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 회장의 방은 잠겨 있지 않아 들어가는 게 수월했다. 어두침침한 방의 불을 켜고, 있는 대로 방을 뒤졌다. 서랍이란 서랍은 전부 뒤져봤지만 각서 비슷한 건 나오지 않았다. 침대나 옷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중요한 걸 아무데나 둘 사람이 아니긴 했다. 허탈하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든 윤수의 시선에 벽면 한 가운데 걸린 그림이 보였다. 인터넷 같은 데서 몇 번이나 보긴 했지만 정작 이름은 모르는 유명한 그림. 아무래도 오 회장이라면 진품으로 샀겠지 라는 생각을 했던 그 그림이다.

조심스럽게 그림이 걸린 액자를 들어 안쪽을 살폈다. 뭔가가 있었다. 편지봉투처럼 생긴 것. 끌어내서 확인해보니 USB가 들어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액자 위치를 정돈하고, 가쁜 숨을 쉬면서 창밖을 봤다. 정면에서 응시하는 거대한 나무가 까마귀 떼처럼 시야를 에워쌌다. 불현듯 현기증이 짙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입구까지 걸었다. 가는 내내 몇 번이나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이나 심호흡을 반복했다. 이따금씩 느껴지는 집안의 기묘한 공기는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파도처럼 윤수를 덮쳤다. 한번 몸을 내어주면 벗어나는 게 어려웠다. 그물에 걸린 생선처럼 몇 번이나 몸부림을 친 끝에야 악몽에서 깰 수 있었다.

굳어 있는 다리를 어렵게 내딛은 끝에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고개를 드는데, 막 계단 위를 올라오던 윤민과 눈이 마주쳤다. 새하얗게 질린 윤수를 보고는 놀란 윤민이 다급히 위로 올라왔다. 윤수야, 왜 그래. 목덜미에 윤민의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방금 전까지 얼어붙을 것처럼 식어가던 자신의 몸이 싫어질 정도로 따뜻했다.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 방은 왜 갔어.”

“두고 온 것 있는 것 같아서.”

“그랬구나. 몸은 괜찮아? 왜 이렇게 떨어.”

목덜미를 타고 어깨에 닿는 손길 때문에 서러움이 증폭됐다. 이 집에 머무는 건 똑같은데 누구는 이렇게 안정적인 체온을 유지하면서 버젓이 잘 지내고 있고, 자신은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시들어가고 있다. 뿌리칠 수 없는 기묘한 갈퀴는 정체를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하다. 무력하게 주저앉아 실체 없는 공포감을 홀로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 윤수는 슬슬 진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형.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윤민의 팔을 쥐고 있는 손이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가쁘게 떨렸다. 차마 안타깝다는 얼굴로 윤수를 내려다보던 윤민이 어깨에 머물러 있던 손에 차분하게 힘을 실었다. 아이를 다독이는 것마냥 어루만지는 손길은 지금 당장의 위로는 될지라도 저게 사라지는 순간 다시 혼자가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진배없어 역시 두려웠다. 물기를 머금은 윤수의 고개가 맥없이 밑으로 향했다. 윤수가 우는 것을 알아챘는지 윤민이 걱정스럽게 윤수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놓치기 싫은 온기가 어깨를 적셨다.

“윤수야. 울지 마. 응?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다.”

“나 진짜 미치겠어. 형은 여기서 어떻게 살아?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떻게. 나는 진짜.”

“괜찮아. 윤수야, 괜찮아.”

초조하게 하소연하는 윤수의 얼굴을 들게 하고는, 더운 물이 어린 눈가에 윤민이 짧게 입을 맞췄다. 다시 윤수를 끌어안은 윤민이 꽤 긴 시간 동안 윤수의 어깨를 말없이 문질렀다. 얼핏 보이는 얼굴에 많은 상념이 담겨 있었다. 여전히 이방인인 윤수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을지에 대한 고민이 비쳤다. 손을 타고 느껴지는 윤민의 단단한 팔뚝과 자신의 어깨를 매만지는 온기 어린 다독임 속에서 윤수의 눈물이 조금씩 증발해 갔다. 완전히 자국만 남은 채 물기가 지워질 무렵, 윤민이 입을 열었다. 윤수야, 형이 할 말 있어.

9.

이 집에서 오랫동안 기거한 여성은 모두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예외는 없었다.

1917년. 조선으로 파견 온 한 일본인 장교가 갓 결혼한 아내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집을 지었다. 뒤로는 남산이, 앞으로는 한강이 인접해 있어 최고의 입지라고 판단한 자리였다. 일 년에 걸친 공사 끝에 서구식 외형과 편의시설, 일본식 내부 구조를 갖춘 제법 내구성이 탄탄한 건물이 지어졌다. 정원에는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둘 사이에는 딸을 하나 생겼는데, 딸이 일본인 전용의 소학교에 입학할 무렵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1938년. 스무 살이 된 딸은 친일파이자 고위급 경찰 간부였던 조선인 오수헌에게 시집을 갔다. 오수헌은 아내에게 아귀가 딱 들어맞는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낮에는 노역을 거스르거나 불순한 음모를 꾸미는 조선인을 색출해 감옥으로 보내고, 밤에는 아내를 위한 다정한 남자가 됐다. 이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아들인 오인효를 얻었다.

오인효가 다섯 살을 맞이하던 1945년. 조선에 광복이 찾아 왔다. 일본의 패전 소식이 알려지던 날 일본인 아내는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을 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유일한 아들인 오인효였다. 그러나 그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뭔가에 홀린 듯 한참이나 죽은 어머니를 올려다 봤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을 때 출근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운전기사가 죽은 여자와 밤을 샌 오인효를 보고는 놀라서 달려왔다. 오인효를 감싸 안고는 급하게 집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내내 오인효는 죽은 어머니를 봤다.

1965년.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오인효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깐의 군 생활을 거치고 당시의 대통령이 창당했던 정당에 입당했다. 젊은 나이에 창창하게 입지를 다져간 점을 눈여겨본 한 육군 중장은 자신의 딸을 소개해줬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다. 오인효의 집으로 온 아내의 첫 마디는 ‘나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였다. 오인효는 아내에게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얘기했다.

1966년. 오인효의 아버지인 오수헌이 추락사로 죽었다.

1967년, 딸인 오수연을 얻었고 1969년에는 아들인 오승조를 얻었다. 오승조를 낳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오인효의 아내가 죽었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죽은 아내에게서는 하혈한 흔적이 현현했다. 그 무렵 여당의 국회의원이었던 오인효는 대외적으로 명성이 높고 신사적인 사람이었지만 집에서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오수연 오승조 남매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는 게 일상이었다. 아버지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보니 언제나 집안에서 눈치를 보고 살았다. 체벌을 마치고 난 오인효는 오수연만 따로 불러서 어딘가로 사라지곤 했다.

1980년. 오수연이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오수연은 중학교 1학년생이었고, 오승조는 국민학교 5학년생이었다.

1985년. 집에서 상주하고 지내던 두 명의 여성 가정부가 제초제를 잘못 먹고 죽었다.

1988년. 오승조의 아버지인 오인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89년.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오승조는 같은 대학의 신입생이었던 여학생을 이른 나이에 임신시키고 결혼하게 된다. 오승조에 집에 온 아내는 첫 날부터 가위에 눌렸다. 다른 곳에서 살자고 하는 아내에게, 오승조는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했다.

같은 해 오윤석이 태어났다. 1991년. 둘째 오윤민이 태어났다. 오윤민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어디로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1996년. 어머니는 갓 돌이 지난 오윤수를 데리고 집에 돌아왔다. 이듬해인 1997년 오윤혁을 낳았다. 2000년, 오윤성까지 낳은 어머니는 다시 윤수만 데리고 나갔다. 이혼서류에 지장까지 찍은 채였다.

2018년. 이혼한 오승조의 아내가 자살했다.

“윤수야.”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나긋한 가운데 무게감이 있었다. 몽롱한 채로 간신히 들려있던 윤수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갔다. 몸을 감싼 이불의 부드러운 질감이 적나라했다. 따뜻한 눈밭에 파묻혀 있는 듯한 느낌에 자꾸만 잠이 왔다.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가 들은 얘기를 그 눈 더미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이상한 얘기지? 안 믿어도 돼. 나도 거의 안 믿으니까.”

윤민의 팔이 윤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눈밭의 온도가 좀 더 뜨거워졌다. 윤수의 눈이 완연하게 감겼다. 희미하게 떨리는 윤수의 눈가에 윤민의 입술이 또 한 번 짧게 닿았다. 동면에 들어간 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 가장 완전한 평안함이 몸을 지배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집에 온 이래 가장 안락한 취침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묘한 기대감에 심장이 희미하게 뛰었다.

넘치는 기대감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뭔가 얘기를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좋았다. 기대감을 가능한 한 길게 누리다가, 달콤하게 잠에 든다면 그야말로 최상의 휴식이 될 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윤수의 입 밖으로 언젠가 반드시 물어봐야지 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형. 나 이 집에 온 거.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

“왜 그런 생각을 해.”

“아니. 오 회장님이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형이 나 데려왔다는 둥.”

대담하게 시작했던 말머리와 달리 말미에는 다소 어조가 흐려졌다. 계속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예민한 얘기가 될 수 있었다. 윤민으로부터 이상한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런 싫었다. 그러면서도 또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라, 자꾸 상반된 욕망이 윤수의 갈등을 자극했다. 머리맡에서 윤민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수야. 형 못 믿어? 머리맡에 훈풍이 찾아들었다.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소리 내서 답변하자니 망설임이 따른다. 생각하는 것과 말로 하는 것은 다르다. 말로 내뱉는 것은 확신을 했다는 거다. 윤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일단은 믿고 있지만, 확언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현재로서 윤민을 형제 중에서 가장 믿고 있는 건 맞다. 달싹이던 입술에서 적당히 찾은 답변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다행이네. 앞으로도 의심하지 마.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지, 신경 쓰지 마. 너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가오는 언어가 흐릿한 독백처럼 어렵다. 윤민의 말에는 묘한 여운이 있어 곧이곧대로 저 문장을 삼키는 걸 고민하게 한다. 가늘게 눈꺼풀을 끌어올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윤수의 이마에 윤민이 살짝 입을 맞췄다. 건조하게 떨어지는 촉감의 끄트머리에 특유의 아로마 향이 남았다.

윤수야, 너 이제 나한테 말 놓는다. 윤수의 눈꺼풀이 위쪽으로 들렸다. 아, 그러게.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실이다. 동생들은 몰라도 손 위 형들에게 말을 놓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윤석은 불편했고, 윤민은 편한데도 어딘가 어려웠다. 게다가 편하게 지내던 형이 없던 입장이라 나이 많은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일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아지랑이처럼 아득하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됐다. 사소한 것이지만, 윤수의 인생에서는 큰 변화였다. 윤수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어 넘긴 윤민이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좋다, 네가 나한테 반말하는 거.

좋은 거구나, 이런 게.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수가 살짝 시선을 들어 창가 너머를 봤다. 거대한 소나무가 한눈에 보였다. 저 나무, 이 방에서도 보인다. 아무래도 모든 방에서는 저 나무가 보일 것이다. 창문은 전부 정원을 향하고 있고, 정원 한 가운데는 저 나무가 있으므로. 태양을 두고 공전하는 행성처럼 이 집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흩날리는 나뭇가지의 끄트머리가 어딘가 매섭다. 스스로를 힘겹게 통제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사납게 가지가 일렁인다. 어둠에 휩싸인 수많은 가지들과 윤수의 눈이 마주쳐진다.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는 윤민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나무는 항상 이 집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윤민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다. 이렇게 넋 놓은 것처럼 잠에 빠져든 건 이 집에 와서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취한 숙면에 어깨가 결릴 지경이었다. 굳어있는 어깻죽지를 마사지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오늘은 공강이라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다.

씻고 식당으로 갔다. 조리를 담당하는 여직원이 반가워하면서 늦은 아침을 차려줬다. 더운 두부찌개와 밥을 먹는 내내 여직원은 궁금한 게 많은 얼굴로 윤수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부담스러운 느낌에 윤수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휘휘 저어진 맑은 찌개국물 밑으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여직원이 곤란해 하며 손사래를 치더니 빙그레 웃었다. 아니요, 형제라더니 정말 닮은 것 같기도 해서요. 처음 볼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계속 보니 정말 비슷한 뭔가가 있네요. 수저를 들고 있던 윤수의 손아귀가 멎었다.

이 집의 형제들과 스스로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했다. 애초에 부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자신에 비해 훨씬 더 상류층의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랐고, 자신은 평범하게 자랐고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형제들에게는 오 회장에서부터 이어진 공통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그 기질은 이 집을 둘러싼 커다란 담장처럼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것처럼 여겨졌다.

생김새, 말투, 눈빛, 태도. 사소한 것들조차 윤수가 흔히 접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당연히 그들은 어딜 가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더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다. 마치 처음부터 특별하게 태어난 게 당연했으며, 그걸 누리는 게 자신들에게는 별 행운도 아니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주어진 이질감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묘한 분위기는 이 한남동 저택 특유의 공기가 투영된 결과물인지도 몰랐지만, 바깥에서 만났어도 같은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당연히 그건 윤수에게 없는 특성이었다. 애초에 윤수 자체가 오 회장의 뿌리와 무관했으므로, 그게 당연했다. 윤수는 어머니 이세영 내지는 친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뿌리를 완성했으며, 이 담장 안에 존재하는 이들과 다른 일반적인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윤수에게 이 집 형제들과 공통점이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조리사의 말에는 절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오 회장의 방에서 가져온 USB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파일이 하나 있다. 동영상 파일이다. 누르고, 영상이 뜨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긴 터널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

첫 화면은 차가운 느낌이 드는 어느 공간이었다. 구석에 침대가 있는데, 다소 오래돼 보이지만 골동품처럼 운치가 있었다. 침대의 네 모서리에 뭔가가 걸려 있다. 가죽 재질의 벨트 같은 것. 족쇄 같기도 하다. 멀리서 보이는 거라 확신은 할 수 없다.

침대 왼편에 보이는 진열대에는 다양한 도구가 있다. 채찍도 있고, 사슬도 있다. 몽둥이 같은 것도. 다 고문용 도구다. 진짜 쓰려고 둔 건가. 침대 오른편에는 거대한 수조가 있다. 안쪽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수풀이 장식돼 있는데, 안에서 계속 뭔가가 꿈틀꿈틀한다. 뱀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뱀이었다. 심지어 제법 크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노트북 위에 올라간 윤수의 손가락이 짧게 떨렸다. 윤수가 거의 유일하게 싫어하는 동물이 뱀이었다.

영상 위편에 새겨진 숫자는 지속적으로 흘러간다. 숫자가 5분을 넘어설 때까지 영상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조 안에 있는 뱀이 이따금씩 오가는 게 눈에 띌 뿐이다. 잘못 찍힌 영상인가. 이만 꺼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영상 안에서 자지러지는 여자 비명이 들려왔다. 어깨가 흠칫 떨렸다.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멈출 것 같으면 이어지고, 또 멎을 것 같으면 다시 들려왔다. 목소리가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명확하지 않다. 영상 너머의 목소리인 데다가 잔뜩 쉬어 있다. 게다가 여자들 목소리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음이 되면 다 비슷한 것만 같아서, 저게 진짜 어머니인지가 애매하다.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지 8분여가 지났다.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또 7분이 흐른다. 영상이 끝났다.

뭐야, 이거.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윤수는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기분 나쁜 영상이다. 빠르게 끄려고 하는데, 문득 바닥에 점철된 대리석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지독히도 익숙한 문양. 이 집 거실과 같은 무늬다.

다만 어두운 가운데 촬영한 것인 데다가 화질 자체가 좋지 않아 확신하기가 어렵다. 따져 보면 대리석 바닥이라는 게 대개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섣부르게 추정하는 걸 그만 두기로 하고 영상을 종료했다. 솔직히 말해서, 영상을 더 이상 눈앞에 두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가장 컸다. USB를 봉투에 넣은 뒤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장의 뜀박질이 커지는 메아리처럼 온몸을 울렸다. 다시금 시작된 이름 오를 강박이 윤수의 온 세포를 하나하나 터뜨릴 것처럼 압도해왔다.

하. 긴 숨을 내쉬고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어가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울렁거림이 멈출 때까지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시트를 쥐어짰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맥없이 감겼다. 바닷물을 잔뜩 삼킨 채 구조대원을 기다리는 조난자마냥 무력한 시간이 흘렀다. 얼핏 고개를 든 끝에 거대한 가지를 펼친 채 윤수를 조롱하는 나무가 있었다.

심장의 동요가 다소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다. 창밖에서 석양이 지는 게 보였다. 입 밖으로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절한 채로 저녁이 될 때까지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뒤편에서 누군가가 윤수를 불러 세웠다.

야. 담담하게 파고드는 묵직한 음성. 오윤석이다. 목덜미에 순식간에 이슬이 맺히는 기분이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봤다. 손에 들린 봉투를 가볍게 흔들면서 윤석이 매섭게 윤수를 노려봤다. 너, 아버지 방 뒤졌냐.

마른 침을 삼키던 윤수가 자신 없이 고개를 끌어내렸다. 정말이지 운이 나쁜 타이밍이다. 하필이면 저걸 들킬 줄이야. 망설이던 윤수의 혀에 가능한 모든 변명의 수가 모였다. 따지고 보면 방이야 뒤질 수 있다. 궁금해서 그랬다고 하면 그만이다. 양아버지 방인데, 그 정도도 못할 이유는 없다.

“그냥 궁금해서 그랬.”

“김시윤.”

불현듯 들려온 학교 선배의 이름에 시트 위를 딛고 있던 손아귀가 빠르게 웅크려들었다. 윤석의 이맛살이 깊숙하게 패였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얼굴이다. 책상 위에 올라가 있던 윤수의 핸드폰을 덥석 쥔 윤석이 여전히 굳은 인상으로 윤수에게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너 김시윤이랑 짜고 아버지 뒤통수 후리려고 했지.”

“뭐 본 거예요.”

“그냥 솔직하게 얘기 해. 맞아, 아니야.”

더 이상 모른 척 하기가 어렵다. 이 사람은 이미 봤다. 시윤과 나눴던 모든 메신저 대화 내용을. 허탈함이 기도를 먹고 들어가는 것만 같다. 낮은 숨을 쉰 윤수가 윤석 쪽을 향해 차분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버티기라도 해야 했다. 입술 너머로 차가운 말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럼. 어쩔 건데요. 오 회장님한테 얘기할 거예요?”

“너 진짜 미쳤구나. 누워 있는 친아버지 걱정은 하나도 안 되나 봐? 이 와중에 어떻게 이런 깜찍한 짓을 하려고 해. 우리 아버지 성격에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내뱉는 윤석의 말이 윤수의 심장을 꿰뚫는 것만 같다. 불쾌한 기색이 현현한 윤석의 표정에 목이 바싹바싹 마른다. 윤석의 경고에는 외면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있다. 오 회장의 오른팔처럼 지내는 사람이다. 윤수가 오 회장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당연히 오 회장은 이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추정으로만 생각했던 사실이 윤석의 입에서 터져 나온 순간, 윤수는 궁지에 몰린 것처럼 간담이 서늘해졌다. 절박한 언어가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말하지 마세요, 제발.

안 하면. 넌 뭐 할 건데. 텁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윤수는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해줄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다. 돈이 더 있길 하나, 머리가 더 좋길 하나. 인맥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다. 그래도 있다면, 해주는 게 우선이었다.

“원하시는 거 있으면 말씀 하세요. 어려운 거 아니면.”

“어려운 거면 안 한다는 거야, 뭐야.”

“아니. 그건 아닌데.”

뭘 어떻게 맞춰줘야 할지 모르겠다.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이미 약점이 잡힌 이상 윤석 앞에서는 자꾸만 눈치를 보게 된다. 막상 눈치를 보기 시작하니 윤석이 한없이 어렵게 다가온다. 하긴, 처음부터 어렵긴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석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 하나 하자. 내일 오전에 우리 사무실로 와. 주소는 가르쳐줄 테니까. 시간만 맞춰 와. 의아한 얼굴의 윤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냥 여기서 얘기하시지. 왜요.”

“여기선 안 돼.”

말을 마친 윤석의 시선이 방 천장의 어느 끄트머리에 닿았다. 워낙 순식간에 향했다가 멀어진 시선이라 정확히 어디를 향한 것인지 윤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시 윤수 쪽으로 시선을 맞춘 윤석의 입술이 탐탁지 않게 열렸다.

“이 집에는 비밀이 없거든. 그래서 안 돼.”

10.

사무실은 역삼동에 있었다. 오 회장이 회장으로 있는 러시아 광물회사의 한국 법인. 오윤석은 본사의 CFO이자 한국법인 대표였다. 국내 법인은 러시아 본사에서 생산한 광물을 기반으로 고가의 특수소재를 개발해 국내 기업에 납품하거나 해외에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본사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사업이지만, 마진율이 높아 순이익 측면에서는 본사에 이어 글로벌 법인 중 3위 안을 꼬박꼬박 차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높은 고층빌딩의 가장 끝 층과 바로 밑층이 한국 법인의 메인 오피스였다. 이런 금싸라기 땅에서 굳이 고층에 자리를 잡은 게 무의미한 허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의 스타일상 이런 걸 고집했을 것 같지는 않고, 오 회장의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채 가장 위층에 위치한 윤석의 사무실까지 올라가는 동안 귀가 먹먹해졌다가 다시 풀어지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지독하게 높은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프론트 데스크의 여성들을 지나쳐 로비로 향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노란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넓은 공간에서는 종이 냄새와 플로랄 계열의 향수 냄새가 났다. 윤석에게 왔다는 전화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막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 뒤편에서 살가운 여자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오윤수 씨 되시죠. 고개를 돌린 곳에 키가 크고 늘씬한 정장 차림의 미인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 전무님 비서 최희윤이라고 합니다. 구십 도 각도로 예의 있게 고개를 숙인 최희윤이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안쪽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최희윤을 따라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곳곳에 있는 사무공간이나 회의실에서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바쁘게 대화를 나누고,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걸 봤다. 주력 사업이 광물업이라 그런 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외국인도 상당수였다. 대화에서 한국어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영어 혹은 러시아어가 대부분이었다. 생각해보니 포털사이트에 등재된 윤석의 프로필에도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을 나왔다는 기록이 있었던 것 같다.

이쪽입니다. 전무 오윤석이라는 명패가 달린 사무실 앞에서 최희윤이 발걸음을 멈췄다. 문을 두드린 최희윤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전무님, 윤수 씨 오셨어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경과한 뒤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최희윤이 윤수를 향해 고개를 꾸벅 해 보이고는 복도로 돌아갔다.

안에 있는 건 윤석 뿐이 아니었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윤석의 앞에서 잔뜩 미간을 좁힌 채 앉아있었다. 마침 왔네. 윤수를 본 윤석이 손가락을 들어 가까이 오라는 듯 까딱까딱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단 윤석 쪽으로 다가가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 남성의 얼굴에 더욱 복잡한 감정이 맺혔다.

“전무님, 매번 이런 식으로 하시면 나중에 더 피곤합니다. 대형 언론사 몇몇 곳 제외하면 하나같이 하이에나라고요. SBC 기자라고 돈 줘서 틀어막고, 전국일보 기자라고 광고 때려서 틀어막으면 소규모 매체들 가만히 있겠습니까. 김영란 법 때문에 언론사들 더 난리 났어요. 꼬투리 잡을 거 있으면 있는 대로 물고 늘어진.”

“정 실장님. 무슨 홍보실장이 말을 그렇게 하세요. 하이에나가 뭡니까, 기자들한테.”

“하이에나를 하이에나라고 하지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무튼 우린 꿀리는 거 없는 거예요. 삼 년 전에 검찰에서 무혐의 나왔는데 뭐가 문제야. 제 의도는, 그냥 회사를 클린하게 꾸려나가자는 거예요. 뒤탈 없이, 우리 정 실장님이 그거 전문이니까.”

말을 마친 윤석이 탁자 위에 올려 져 있던 케이스에서 시가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끄트머리를 커터로 자르고 불을 붙인 윤석이 길게 숨을 뱉으며 윤수의 어깨 위로 손을 가져갔다. 얇은 옷가지 너머에 닿은 손가락이 괜히 따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정 실장이라는 사람을 쳐다보는 윤석의 눈이 야생짐승처럼 순간적으로 검게 빛났다. 우리는 클린하다는 거, 이쪽 우리 동생한테도 잘 얘기해주시고.

하이고. 들릴 듯 말 듯 하게 한숨을 쉰 정 실장이 마지못해 윤수를 응시하다가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다. 체념을 담은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동생 분께서는 아니라는 점 확실히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듣고 있자니 절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애초에 시윤과 손잡은 건 그냥 오 회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이 회사가 실제 비리를 저질렀는지 여부는 윤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윤석이 하는 행위는 마치 윤수에게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정말로 떳떳하다고 보기에는 지금의 상황에 보이는 함정이 너무도 많다. 윤석 역시 알고 있다.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이 정도 신경 써줬으면 눈치껏 너도 알아서 넘어가달라는 식의 감정이 전제돼 있다. 윤수의 눈 밑살이 짧게 떨렸다. 멍하니 입만 다물고 있는 윤수를 두고 윤석이 정 실장 쪽으로 툭 말을 건넸다.

“우리 2분기 홍보예산 중에 남는 거 얼마 있지.”

“오천만 원쯤 남습니다. 조간일보 글로벌 행사 협찬 들어가려던 거 취소돼서요.”

“응, 잘 했어. 남은 금액 안에서 김시윤한테 적당히 술 사주고 밥 사주고 떡값 줘서 끝냅시다.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뒷말 안 나오게 처리 잘 하시고.”

“네. 전무님.”

“이만 가 봐요. 항상 고생 많으십니다.”

정 실장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윤석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이어서 윤수의 앞에서도 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저한테는 안 하셔도 되는. 나지막하게 말을 뱉는 윤수의 입가에 윤석의 손아귀가 빠르게 찾아들었다. 가 보세요. 윤수의 입을 틀어막고는 정 실장 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윤석을 보다가 정 실장이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텁게 공간을 울렸다.

뭐하는 거예요, 진짜. 도무지 의중을 알 수가 없어 절로 불친절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다소 불만스럽게 올려다보는 윤수를 보면서도 윤석은 별 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입가에 닿은 시가를 여유 있게 재떨이 위에 올려놓고는 윤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오해하는 부분은 정정해야지. 그게 다야.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런 상황극에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다. 빤히 수가 보이는 윤석의 태도가 마치 윤수를 어린애나 모자란 애 취급하는 것 마냥 느껴져 불쾌감이 들었다.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는 윤수를 보며 윤석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이제 가도 돼요? 더 이상 함께 있는 게 불편하게 느껴져 반쯤 소파 위에서 몸을 일으킨 윤수를 향해 윤석이 턱짓을 했다. 누가 가도 된대? 앉아. 부탁할 거 있다고 했잖아.

윤석의 눈치를 보던 몸이 스르르 소파 위에 앉혀졌다. 사무실로 오라는 것 자체가 부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는 윤수 쪽으로 윤석이 손가락이 들렸다. 입 밖으로 건조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벗어 봐.

화들짝 놀란 윤수의 입 밖으로 당혹감 어린 반문이 튀어나왔다. 네? 벗으라고. 머리의 핏기가 빠르게 가셨다. 뭣보다 오윤석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와 닿지 않았다. 섹스엔 관심이 없다던 사람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게 어제 일 같은데, 갑자기 돌변한 듯한 태도가 혼란스러웠다. 떨리는 동공만 가누는 윤수를 보면서 윤석이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할 거야? 시간 끌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해.”

“아니, 그게. 왜 그러시는데요.”

윤석이 재떨이 위에 올려뒀던 시가를 다시 입가에 가져갔다. 희미하게 퍼지는 텁텁한 향을 입에 잠시 머금었다가 짙은 눈썹을 들어 윤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에 혀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다시 시가를 내려놓은 윤석이 딱딱하게 말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오윤수.

역시 의중을 알 수가 없다. 철저하게 본심을 배제하고 목적과 결부된 언어만 제한적으로 건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번 저런 식이었다. 결과적으로 오윤석은 네 명의 형제들 중 가장 알기 어려운 사람이 됐다. 게다가 윤민이나 윤성처럼 대놓고 호감을 표현하지도, 윤혁처럼 대놓고 경계하지도 않는다. 그저 관찰하듯이 윤수를 지켜만 본다. 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면 대체로 하지 않는 편이었으며, 그건 윤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은 지독할 정도의 포커페이스를 늘 유지하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전 사무실에서 정 실장이라는 사람과 나눈 대화는 꽤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더 난감했던 건, 그 대화 자체가 어딘가 의도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나는 네게 이 정도의 연극은 보여줄 수 있으며, 그러므로 너도 이 정도 수준으로 스스로를 버리는 게 맞다는 식의 암묵적 제안. 철저하게 서로가 합의한다는 전제 안에서 이뤄진 세팅이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키를 쥐고 있는 건 윤석 쪽이었다.

주어진 제안을 가능한 선에서 받아들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벗은 몸을 보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윤석에게는 몇 번이고 보인 적이 있었으니까. 걸치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벗어 소파 밑에 흘렸다. 검은 가죽 위에 옷가지가 닿을 때마다 스치는 소리가 모래알이 흩어지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겉옷은 그렇다 치고 속옷은 조금 신경 쓰였다. 살짝 고개를 들자, 윤수를 보던 윤석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뭐가 어렵냐는 듯한 눈빛이다. 하긴, 처음 보여주는 것도 아니긴 했다.

긴장한 손으로 속옷까지 밑으로 끌어내렸다. 현현하게 드러난 성기는 분명히 몇 번인가 보여준 것인데도 처음 보인 것처럼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시키는 것을 마친 뒤 물끄러미 윤석 쪽을 올려다봤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이었다. 그 정도의 간격을 두고, 윤석은 손을 내미는 대신 말을 건넸다. 벌려 봐, 다리.

벗고 있던 윤수의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한 번 더 윤석을 봤다. 말을 번복하기 싫다는 것처럼 윤석의 입술은 굳게 다물린 상태였다. 뭘 벌려요. 혹시나 싶어 건넨 질문에 태연한 반문이 찾아왔다. 한국말 몰라?

한국말이야 모를 리가 없다. 그저 이 예기치 않은 요구가 믿기지 않아서 그랬다. 짧게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모아져 있던 다리를 서서히 벌렸다. 지켜보고 있던 윤석이 불현듯 윤수의 팔을 쥐고는 소파 위에 눕혔다. 목덜미에 사뭇 딱딱한 소파의 끄트머리가 닿았다. 소파 못지않게 단단한 윤석의 말투가 윤수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하기 싫지? 하게 해 줄게.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더 안 좋은 건, 그 예감이 틀릴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사실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면서 외면하는 윤수를 보고는, 윤석이 좀 더 완고하게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게 엉덩이 안쪽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오 회장의 것과 비교하면 좀 더 거칠었지만 한편으로는 매끄럽고, 한편으로는 자신감이 있었다.

“뭐, 뭐예요.”

“가만히 좀 있어.”

“좀. 아, 읏.”

“소리 좋네.”

마지막 말에 담긴 묘한 수치심이 윤수의 귓바퀴를 자극했다.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들어온 손가락은 제법 집요했다. 나갈 기미는 한 치도 보이지 않고, 점점 더 깊숙하게 파고들기만 했다. 처음 접한 손가락이 내벽의 주름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감각에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바르르 일렁이는 윤수의 얼굴을 보면서 윤석이 엷게 웃었다. 이 상황에 제법 흥미를 느꼈다는 표정이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활기가 녹아들었다. 닿는 주름을 놓치지 않고 모두 피부에 새기겠다는 것처럼 저돌적이다. 흐으. 입 밖으로 물기 어린 숨이 터져 나왔다.

소리는 맞는 거 같은데. 이쪽은 이렇게만 해서는 잘 모르겠네. 덤덤하게 내뱉어지는 언어에 윤수의 목덜미가 미동했다. 대체 뭐는 맞고 뭐는 모르겠다는 건지, 윤석의 의도를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이런 정신 나간 짓에 따라 주고 있는 스스로의 존재도 싫었다. 오 회장에 이어 오윤석까지. 구렁텅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스스로가 인간임을 더더욱 부정하는 것만 같아 자꾸만 자괴감이 들었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늘었다. 처음엔 두 개였는데, 지금은 네 개쯤 됐다. 늘어난 손가락이 더욱 사납게 점막을 훑어댔다. 오 회장이 남긴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이었다. 여린 표피를 스치는 손가락에 세포 곳곳이 소스라치게 반응했다. 따가운 감각이 전신을 타고 퍼졌다. 젖혀진 고개 너머로 날 선 소리가 흘러 나왔다. 좀, 하지 마요.

날카로운 저항에도 윤석은 답이 없었다. 무시하듯 윤수의 말을 씹어 먹은 윤석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이빨로 지분거렸다. 보이는 몸 이곳저곳을 탐해보겠다는 기세였다. 목덜미에서 쇄골로 흐르는 부위에 짧게 이빨이 닿았다. 어깻죽지가 흠칫 올라갔다. 위에서 생생하게 눈에 담은 윤석이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너, 몸 되게 예민하구나. 윤수의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오 회장과 하면서도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따금씩 기묘한 간지러움 때문에 괴로웠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벼운 자극에 세포가 반응한 것은 오 회장 때 없었던 일이다. 이전에는 이렇게 예민한 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설마 오 회장과의 잦은 섹스가 체질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더 싫었다.

목덜미에서 스르르 내려온 윤석의 입술이 이번에는 쇄골 쪽을 짧게 깨물었다. 동시에 내벽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보다 깊숙하게 들어갔다. 우툴두툴한 내벽을 즐기는 것처럼, 하나하나 느릿하게 손끝에 담는다. 하반신이 저릿하게 젖어 들어갔다. 간헐적으로 입술을 깨무는 윤수를 잠시 쳐다본 시선이 유두 쪽에 닿았다. 입을 조금 벌린 윤석이 끈적하게 그것을 안에 넣고는 혀로 굴렸다. 질끈 감은 입술 틈에서 일말의 저항이 흘러나왔다.

“아읏, 하지. 좀.”

“너 장난 아니구나. 여자랑 똑같이 느끼나 보네.”

“그런 말 왜, 흐으.”

“그래도 이상하지. 유진이랑 할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거든.”

갑자기 나온 낯선 이름에 윤수의 눈이 번뜩 뜨였다. 윤석의 입술이 삐딱하게 열렸다. 강유진. 내 와이프. 목구멍에 무거운 호흡이 담겼다. 그러니까, 와이프랑 할 짓을 왜 자신과 하는지에 대해 윤수가 먼저 묻고 싶었다. 동그랗게 떠오른 윤수의 눈을 보면서 윤석이 의도를 알았다는 것처럼 엷게 웃었다. 넣었던 손가락이 훅 빠져나왔다. 손가락이 나간 틈에 공기가 채워지면서 윤수의 벌려진 다리가 짧게 진동했다. 소파 위에 내려앉은 윤수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며 윤석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섹스가 재밌었던 적이 없거든. 이런저런 자극이 들어오면 반응은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번식의 용도가 아닌 이상 왜 사람들이 섹스를 하는지를 이해해 본 적도 없고. 집에서는 유진이가 틈만 나면 하자고 하니까 일단은 하는데, 솔직히 귀찮아. 집에서까지 근무해야 하나같은 느낌도 들고.”

“그 얘기를 지금 왜 하시는데요.”

“너 때문에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으니까. 솔직히 너 처음 벗은 거 봤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어. 남자애치고 선이 곱네. 이 정도. 두 번째하고 세 번째도 그랬던 거 같고. 그런데 한 다섯 번째쯤이었나. 그때는 좀 달랐어.”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여전히 그의 의도는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눈꺼풀을 거세게 치켜 올린 윤수의 얼굴을 한 번 시선으로 훑고는, 윤석이 찬찬히 윤수의 몸을 내려다 봤다. 시선이 닿은 곳곳이 보이지 않는 자취가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윤석의 눈빛에는 진정어린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정확히 내가 네 어느 부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가 알고 싶었어. 그렇다고 너한테 그걸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넌 남자애고, 또 나랑 피까지 섞였는데.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

이게 정상이 아니라는 건 또 아는구나. 하. 짧게 헛웃음을 친 윤수가 분연히 고개를 들었다. 제법 매섭게 윤석 쪽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확인하셨어요? 윤석의 눈썹이 짧게 일그러졌다. 글쎄. 알 것도 같은데, 좀 부족해. 목소리 쪽인가, 아니면 몸인가. 혹은 둘 다인가. 어렵다는 얼굴로 윤수의 엉덩이를 짜낼 것처럼 손에 쥐고 난 윤석의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목소리 얘기에 윤수는 새삼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스스로가 남자치고는 엷은 느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때는 그게 콤플렉스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 걸 갑자기 얘기하고 나오는데 신경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성인군자였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회사라서 한계가 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석이 윤수의 엉덩이를 쥐고 있던 손을 떼어 자신의 바지버클이 있는 쪽으로 가져갔다. 풀어지는 마찰음이 생생하게 네모진 공간을 열렸다. 일어나 봐. 눈짓으로 명령한 윤석이 느릿하게 입고 있던 정장바지의 지퍼를 끌어내렸다. 안에 비치는 속옷에서 굵직하게 발기한 성기가 비쳤다. 몸을 일으키던 윤수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기. 망설이다가 꺼낸 윤수의 말에 윤석이 보지도 않고 응수했다. 왜. 형하고 저, 피가 절반이나 섞였다는 건 알죠. 모를 것이라 생각해 한 말이 아니었다. 상기할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윤석과 오 회장은 달랐다. 오 회장은 엄밀히 말해 남이었다. 오 회장과 섹스 하는 일이 힘들었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그 하나 때문이었다.

오윤석과 여기서 더 뭔가를 한다면, 거기에 또 다른 죄책감이 더해진다. 피가 섞인 혈육과 성교하는 건 짐승 또는 인간이길 포기한 미치광이나 할 법한 일이다.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윤수는 자신의 발밑에 또 다른 형태의 지옥이 뚫리는 것만 같았다. 한 발자국만 더 딛는 순간 바로 닿을 지옥의 입구에는 어디까지 떨어질 지모를 무한의 구렁이 존재했다.

“알아. 그리고 말했잖아. 정상이 아니라는 거, 나도 안다고.”

무덤덤하게 건네지는 윤석의 말과 함께 걸쳐져 있던 속옷이 빠르게 내려갔다. 탄력 있는 천이 흘러내려간 끝에 귀두부터 이미 축축해진 커다란 성기가 드러났다. 소파 위에 무릎을 올린 채 그것을 일별한 윤수가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뺐다. 완전히 소파 끝까지 밀려나기 일보 직전인 윤수의 팔을 윤석이 잡아끌었다. 밑으로 내려가서 이거 빨아. 오늘은 이 정도만 할게.

밑을 향하고 있던 속눈썹이 짤막하게 떨렸다가 위로 들렸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붙었다. 삽입을 안 해도 된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지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오럴 섹스는 해 본 일이 없었다. 완전히 정지한 상태로 올려다보던 윤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거 못 해요, 해 본 적 없어요. 윤석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을 터뜨렸다. 탐탁지 않은 질문이 무게감 있게 흘러 나왔다.

“지금 네가 선택할 처지라고 생각해?”

끄트머리에 걸쳐 있던 윤수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밑으로 흘러내렸다. 갑작스럽게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일어난 일이다. 다리 하나가 밀려 내려가자 나머지 몸도 순식간에 떨어져 내렸다. 추락하다가 맞은편 테이블에 어깨를 부딪었다. 입 밖으로 고통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윤석은 괜찮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보다 고압적으로 말을 뱉었다. 빨리 하자. 시간 없다.

두 눈을 살짝 찡그린 채로 눈앞에 드리워진 윤석의 성기를 봤다. 처음으로 접한 큰 형의 음경에는 오 회장의 것에서 찾을 수 없는 탐욕이 엉겨 있었다. 쿠퍼액에 젖어 윗부분이 희미하게 반질거렸다. 깊은 날숨을 뱉은 윤수가 천천히 입을 열어 팽창한 성기를 입 안에 담았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달싹이는 걸 본 윤석이 갑자기 윤수의 팔을 당겼다. 음낭이 있는 자리에 윤수의 손을 가져가 쥐게 했다. 적나라하게 닿는 물컹한 감각에 윤수의 눈이 흠칫 감겼다.

입 안에 넣는 일은 구멍에 넣는 것과 달랐다. 얼굴까지 변소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성기는 아무리 입 안에 담아도 여전히 커서, 어디까지 넣어야 할지 가늠하는 게 어려웠다. 반쯤 입 안에 성기를 넣은 채 힐끗 올려다보는 윤수를 보고는, 윤석이 답답하다는 듯 손을 들어 윤수의 목덜미를 쥐었다. 흐읍. 입 밖으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해. 나랑 장난하는 거 아니잖아.”

지분거리듯 윤수의 목덜미를 어루만진 윤석이 힘 있게 성기가 있는 쪽을 향해 머리를 억눌렀다. 귀두가 목구멍 입구까지 닿았다. 쿨럭. 밭은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윤석은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시험해 보겠다는 것처럼 오히려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줬다. 단단한 이물질이 식도 부근까지 닿았다. 호흡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애원하듯 윤석의 팔을 쥐었다. 귀두에 틀어 막힌 숨구멍 때문에 기절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 번은 봐주겠다는 것처럼 윤석이 윤수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하아. 연신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윤수가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궜다. 목구멍에 젖어있는 쿠퍼액이 온 입안을 쓰게 물들였다. 진짜, 사람을 죽이려고.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지탱하면서 윤수가 힘겹게 말을 뱉었다. 윤석의 입가에 엷은 조소가 맺혔다. 죽이긴 뭘 죽여. 이렇게 이쁜 애 죽였다간 지옥 가지. 충혈 된 윤수의 눈가가 가늘게 일그러졌다.

이제 알았지? 어떻게 할지. 잘 빨아 봐, 아이스크림 빠는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하고 난 윤석이 윤수의 목덜미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반사적으로 손을 떼어 낸 윤수가 다소 날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 마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낸 윤수가 아까처럼 윤석의 음낭을 손아귀에 쥐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과거에 여자 친구에게 받았던 기억, 포르노에서 봤던 기억을 모조리 상기해가며 혀를 끌어올렸다. 여전히 팽팽한 성기를 혀로 어루만질 때마다 튀어 오른 혈관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혈관은 지나치게 도톰해서 닿는 순간 맥박이 느껴질 것도 같았다. 더 쑤셔 넣어. 아까 한 것처럼. 좀처럼 깊숙하게 넣지 못하는 윤수를 향해 윤석이 경고했다. 더운 숨을 뱉은 윤수가 스르르 성기를 좀 더 안에 밀어 넣었다.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입 안의 점막을 스치는 귀두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목구멍에 닿을 정도로 성기를 집어넣은 윤수의 입안에 쓴 침이 고였다. 안까지 넣은 성기를 바깥으로 뺐다가, 다시 밀어 넣을 때마다 입술을 타고 축축한 타액이 떨어져 내렸다. 그 와중에 성기가 더 두툼해졌다. 아까가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짧은 숨을 수시로 뱉으며 성기를 머금는 윤수의 머리맡에서 윤석이 흡족하게 웃는 게 느껴졌다. 귓불 밑으로 찾아든 윤석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살집을 매만졌다.

“서툴러도 괜찮네. 빠는 얼굴이 마음에 들어.”

희롱의 의도가 분명한 말에도 거부반응을 일으킬 정도의 힘이 윤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하아. 무력하게 숨을 뱉은 윤수가 보다 끝까지 윤석의 것을 입 안에 넣었다. 식도까지 닿은 귀두가 심장이라도 달린 것처럼 두근거렸다.

“전무님. 연구개발부장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출연연하고 공동 기술개발 진행하는 부분 관련해 보고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불현듯 입구 쪽에서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와 함께 점잖은 중년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윤수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끝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채 성기를 입 안에서 빼내기도 전에 윤석의 손아귀가 정수리를 억눌렀다. 으읍. 입 밖으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예 도망칠 구석을 차단하겠다는 것처럼 정수리에 실린 손의 힘이 점점 더 묵직해졌다. 윤수의 눈꺼풀이 스스로에게도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떨렸다.

“지금 바쁜데. 있다가 하면 안 됩니까.”

“내일 당장 해당 출연연 담당자하고 미팅이 있어서, 전무님께 오늘 중으로는 컨펌을 받아야 할 텐데요. 언제 다시 오면 되겠습니까.”

“뭐, 그러면.”

잠시 말을 맺은 윤석이 윤수의 머리통에 대고 지그시 손가락을 눌렀다. 소파 위에 손을 짚고는 살짝 하반신을 들어 윤수의 입 가까이에 갖다 댔다. 차가운 바닥에 올려져있던 윤수의 무릎이 불안정하게 옆으로 밀렸다. 완전히 자세를 갖춘 윤석이 윤수의 입 안에 삽입하는 것처럼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읏. 나지막한 탄성이 목구멍에서 틀어 막혔다.

“내가 다른 건 다 기억이 나는데, 파견 문제가 긴가민가하네. 결국 박사급을 파견을 하기로 했던가요.”

“네. 세 명 파견하기로 했고 기간은 연구원 별로 다릅니다. 1년에서 3년이요.”

윤수의 정수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린 윤석의 손아귀가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어깻죽지가 바르르 떨렸다. 이빨 드러내지 마. 입술 오므리고. 윤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말을 꺼낸 윤석이 보다 거칠게 성기를 입 안에 박았다. 순식간에 식도까지 치고 들어왔다. 붉어진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스르르 빼낸 윤석이 다시 아까와 같은 속도로 삽입했다. 경련하던 윤수의 손이 윤석의 팔을 잡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몇 번의 움직임 끝에 윤석의 성기가 자리를 잡았다. 완전히 윤수의 입 안을 삽입구처럼 취급하면서 연이어 성기를 밀어붙였다.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입 안의 부드러운 점막 곳곳에 성난 성기의 표피가 닿았다. 귀두에서 터져 나온 쿠퍼액과 윤수의 타액이 섞이다가 녹진하게 입술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얼핏 비치는 윤석의 성기도 못지않게 번들거렸다.

“하아. 어차피 우리도 생색내려고 하는 거긴 하지만, 그 쪽에다가 기분 안 나쁘게 얘기 잘 해줘요. 정부에서 산학협력 안 하면 죽일 것처럼 구는데 솔직히 별 수 없잖아.”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가 봐요. 나머지는 내가 다 기억하니까 마음 편히 진행하시고.”

“알겠습니다. 전무님.”

문가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윤석이 있는 힘껏 윤수의 목구멍 안으로 성기를 튕겨냈다. 읍. 헛구역질이라도 할 것처럼 윤수의 목덜미가 절박하게 일렁였다. 그 상태에서 성대 너머를 집요하게 쑤셔 박던 윤석의 귀두가 한계까지 부풀어 올랐다. 틀어 막힌 숨구멍을 갈구하며 절박하게 윤석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불현듯 뜨거워진 귀두에서 터져 나온 정액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쿨럭. 윤석의 성기가 떨어져 나가자마자 윤수의 입에서 탁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비소를 머금고 지켜보던 윤석이 몸을 숙이더니 윤수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새하얀 정액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입 안에 남은 건 삼켜. 맛있으면 다음에 또 줄게. 물기에 찬 윤수의 눈꺼풀이 날카롭게 들렸다.

당연히 뱉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윤석이 어떤 시비를 걸 지 몰랐다. 마지못해 삼켜진 형의 정액은 화학약품처럼 쓰기만 했다. 식도를 넘어 위장까지 윤석의 정액으로 질척하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쓰리게 입을 다무는 윤수의 곁으로 다시 윤석이 다가왔다. 양 어깨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소파 쪽으로 몸을 옮겼다. 또 왜요. 반사적으로 불만이 흘러나왔다. 벗은 몸을 소파 위에 앉힌 윤석이 어깨가 있는 쪽을 물끄러미 봤다. 뒤늦게 아까 테이블에 부딪혔던 부위가 홧홧했다. 아팠겠네. 멍들겠다, 야. 다쳤던 부위로 절로 시선이 떨어졌다. 붉은 자국이 현현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윤석의 얼굴이 윤수의 목덜미에 찾아들었다. 아, 좀. 질린다는 표정으로 어떻게든 피하려는 윤수의 팔을 단단히 쥔 채, 윤석이 쇄골에서 목덜미로 이어지는 부위에 축축한 입술을 갖다 댔다. 피부 너머의 세포를 모두 삼켜버릴 것처럼 강렬한 흡입이 찾아들었다. 아. 목덜미가 녹아드는 기분에 희미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어깨가 부딪히던 순간 못지않게 거센 강도로 피부를 빨아들인 윤석이 긴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위태롭게 세워져 있던 윤수의 몸이 등받이가 있는 쪽으로 스르르 기울어졌다. 방금 전까지 빨아들인 부위를 툭 건드린 윤석이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보기 좋네. 자국 남은 거.”

11.

일정하게 초침이 흐르는 소리는 어떤 존재의 발자국 소리를 닮아 있다. 초침이 이동할 때마나 지나간 자리의 간격만큼 윤수의 손아귀에 들린 기다란 실이 스르르 어딘가로 이끌려 간다. 어머니에 대해 뒤엉킨 죄책감을 풀어낸 실의 끄트머리는 지옥의 구렁텅이와 연결돼 있다. 시간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가 보면 그 입구에 다다르기 마련이고, 거기서도 실을 놓지 않으면 그 다음엔 나락이었다.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더 이상 지옥에 갈 짓을 하지 않거나, 아예 실을 내려놓거나.

거센 파도가 이는 밤바다처럼 요란하게 일렁이는 나뭇가지의 외침을 귀에 담다가 결국 또 원치 않는 시간에 눈을 떴다. 고개를 든 윤수의 시선이 습관적으로 시계를 향했다. 새벽 4시였다. 그래도 아까 윤석의 사무실을 나오지 마자 방에 들어와서 바로 잤으니, 수면 시간 자체는 나쁘지 않은 셈이다. 다행이었다.

한 번 깬 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시트 위에 올라간 메마른 팔뚝에 하얀 달의 그림자가 맺혀 있다. 유독 환하게 빛나는 손목을 따라 푸른 혈관이 두드러졌다. 손목에서부터 이어진 혈관을 따라 흐르는 혈액이 온 몸을 구석구석 탐험한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에 아까 윤석이 남기고 간 자국이 있었다. 처음에는 붉었는데, 지금은 푸르게 변했을 거다. 차마 확인할 자신이 없어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오 회장이 떠난 기간 중에는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심지어 대상은 섹스에는 관심도 없다던 오윤석이다. 삽입을 한 건 아니지만, 아까 있었던 상황으로 추정컨대 실제 섹스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윤석은 일부러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줬던 것인지도 몰랐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와이프나 다른 여자들에게 들지 않았던 어떤 욕망을 윤수에게만 느끼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윤수는 남자였다. 그것도 피가 절반이나 섞인.

느릿하게 시트 위를 어루만지던 윤수의 손가락이 체념한 것처럼 부드러운 재질 위에 펼쳐졌다.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다. 완전히 잠을 잊다시피 한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왔다. 먹지처럼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일 층으로 내려갔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작은 서구식 등에만 의존해 시야를 확보해야 하는 집안은 음산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서늘하다. 발길이 닿는 대로 좀 걸어 봤다. 딱히 목적이 있는 행보는 아니었다. 머릿속은 소용돌이라도 이는 것처럼 복잡했고, 그렇다고 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잠에 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걷든지 먹든지 말을 하든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정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서 걷는 게 제일 편할 것 같았다.

발자국을 한계까지 남겨보려는 양 빙글빙글 거실을 걸어 대다가 문득 두터운 문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문이었다. 구석에 있어서 미처 몰랐다. 밀어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열렸다. 안쪽에는 수 천 권은 족히 될 법한 책이 가득했다. 서재로 쓰이는 방인 모양이다. 찬찬히 다가가 책들의 상태를 보니 새것도 간간히 있었지만 대체로 낡은 것이었다. 한글로 된 것보다 일본어나 영어로 된 게 더 많았다.

서재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집성된 공간이었다. 굳이 책들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의 흔적이 현현했다. 책들의 라벨을 훑어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에는 긴 테이블이 있었다. 위에 액자들이 비슷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액자 안에는 둘만 있거나, 자녀까지 동반한 남녀의 사진이 있다. 흑백 사진부터 컬러 사진까지. 남자들의 얼굴이 제법 낯익다. 이 집 거실에 붙어 있는 그 얼굴들이다.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과 서구식 정장을 입은 남성. 아마도 이 집에 최초로 살았다는 일본인 부부일 것이다. 그 다음은 역시 기모노를 입은 여인과 경찰 제복 차림의 남성. 이쪽이 아마도 오수헌 부부. 다음은 오인효 부부, 그리고. 오 회장과 윤수의 어머니 이세영.

사진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나니 목덜미가 문득 서늘하게 굳어간다. 가장 마지막 사진을 확인한 동공이 초점을 잃은 채 빠르게 식었다. 시선이 다시 가장 왼 쪽에 있는 일본인 부부의 사진으로 향한다. 거기서부터 출발해 오른 쪽 방향으로 하나하나 네모난 기록을 눈에 담는다. 이번에는 남성들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여성들의 얼굴만 봤다. 한 번 더. 자신이 본 것이 혹여나 헛것이었을까 봐, 또 같은 방식으로 여성들의 얼굴을 살폈다. 세 번. 그 정도에 걸친 검증을 마치고 나니 비로소 확신이 섰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사실이지만, 본 것은 본 것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들, 다른 구석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겼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어쩌다 취향이 맞아 떨어지면 비슷비슷한 여자를 만날 수도 있을 거다. 마른 침을 반복해 삼키며 어떻게든 본 것을 정당화하려는 윤수의 뇌리에 차마 외면하기 힘든 반론이 떠오른다.

4대 째에 걸쳐서 비슷하게 생긴 여자를 만나는 것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면 어떻게든 정당화하려던 일말의 노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설령 우연이라 하더라도, 기분 나쁠 정도로 기괴한 우연이다. 윤수의 발걸음이 테이블로부터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건 본능이었다. 막 입구 쪽까지 뒷걸음질을 쳤을 때, 문득 방에 불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윤성이 있었다.

형, 여기서 뭐 해. 살갑게 웃은 윤성이 윤수 쪽으로 다가왔다. 그냥 돌아다니다 들어 왔다고 하면 되는데, 왠지 그마저도 망설이게 된다. 이방인인 주제에 허용되지 않은 공간에 멋대로 들어온 게 아닌지에 대한 죄책감이 입을 틀어막고 있다. 지그시 입술만 다문 윤수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윤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뭐야, 잠이 안 오면 나한테 얘기를 했어야지.

평소와 같은 다정한 언사인데 말미에 묘한 한기가 어려 있다.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되새겨보니 기존의 말투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아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반말한 적이 없었다. 경직된 윤수로부터 몸을 떼어낸 윤성이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세워져 있던 부부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접어서 밑을 눕혔다. 계산된 것이 아닌지를 의심케 할 정도로 절제가 담겨 있는 동작이다. 묵묵하게 사진을 모두 뒤집은 윤성이 고개를 들어 윤수를 봤다. 동공에 윤기가 하나도 없었다.

형. 여기서 뭐 본거야? 들려져 있던 뒤꿈치가 살짝 떨렸다. 입 안의 혀가 정처 없이 대답을 헤맨다. 어떻게 생각하면 뭔가를 보긴 본 게 맞다. 그러나 그건 뭔가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대답을 하는 게 적절한지 몰라 한참동안 입술만 달싹였다. 이방인으로서 이 집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묻는 게 맞는 것인지 윤수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바라보는 윤성의 시선은 사뭇 온도가 낮아, 윤수는 그의 앞에서 전에 없이 위축되는 것만 같았다.

“별로. 본 거 없어.”

“여기 서재, 우리 아버지가 관리하는 건데. 기분 나빠서 우리들도 안 들어 와. 나가자, 형.”

다짜고짜 윤수의 손목을 잡은 윤성이 강제로 끌어내듯이 몸을 바깥으로 내몬다. 잡힌 손목이 빠르게 저려왔다. 미성년자인 윤성은 형제들 중에서 키가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그래 봤자 윤수와 비교하면 검지 한 개 정도가 더 크긴 했지만. 그런데도 악력만큼은 형제들 못지않았다. 사슬처럼 손목을 옭죄는 윤성의 손아귀에 윤수는 맥없이 끌려갔다. 바깥으로 발을 딛자마자 서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손목을 쥐고 있던 손아귀가 스르르 풀려나갔다. 새삼 나긋한 얼굴로 돌아온 윤성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방으로 갈 거야?”

“글쎄. 잠이 안 와서,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랬어? 나도 잠이 안 오긴 했어. 그럼 우리 TV라도 볼까. 형, 하고 싶은 거 있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친근한 말투가 어딘가 낯설다. 형용할 수 없는 기세에 눌려 머뭇거리는 윤수의 어깨를 떠밀다 시피하며 윤성이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윤수를 소파 위에 앉혀 놓고, DVD가 잔뜩 들어있는 서랍을 연 윤성이 이것저것 물어왔다. 형, 뭐 좋아해. 우리 영화 보자. 윤수의 고개가 기운 없이 가로저어졌다. 글쎄. 난 좋아하는 거 없어서.

그래? 난 박찬욱 감독 좋아하는데. 김지운도. 혼자 신이 나서 말을 꺼내며 DVD 케이스를 헤집어 대는 윤성의 손길은 사뭇 작위적이다. 적당히 짜여 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예컨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예상했고, 그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한다는 것을 미리 정해놓고 그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 본의 아니게 정체 모를 사람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갇힌 기분이 들어 윤수는 자꾸 목이 말라왔다.

“형. 우리 아침 올 때까지 영화보자.”

“좋을 대로 해.”

“정말? 좋다. 난 이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우리 형들은 나한테 잘 안 맞춰줘서.”

티 없이 웃은 윤성이 윤수 가까이로 다가와 어깨 쪽에 얼굴을 묻었다. 윤민도 그렇지만 윤성도 스킨십이 잦다. 다만 느낌은 다르다. 윤민은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윤수에게 다가오고, 윤성은 아이처럼 다뤄지듯 윤수에게 다가온다. 윤민이야 어릴 때의 기억이 무의식에 있어 불편하지 않다지만, 윤성에 대해서도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어쨌거나 형제는 형제인 모양이었다. 몸이 먼저 아는 것인지도 몰랐다.

“근데, 형. 내일 모레 시간 돼? 오후에.”

“그날은 수업 일찍 끝나는 날이긴 한데. 왜?”

“학부모 상담 있는 날인데, 지금 아버지도 출장 갔고 형들도 다 바빠서. 형만 괜찮으면 와줬으면 좋겠어. 별 거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담임이랑 대화만 하다 가면 돼,”

학부모 상담이라는 말에 윤수의 눈꺼풀이 빠르게 들려졌다. 자신이 없다. 윤성에 대해 뭐라도 알아야 그런 걸 할 텐데, 윤수는 정말이지 아는 게 없었다. 어떻게 적당히 거절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입술만 다문 윤수의 앞으로 윤성의 얼굴이 보다 가깝게 올라왔다. 싫어? 난 꼭 형이 와줬으면 좋겠는데.

말을 마친 윤성이 그러쥔 윤수의 손에 힘을 실었다. 압박이 너무 세서 윤수는 짧게 소리를 낼 뻔했다. 전기라도 흐르는 양 아픔 사이에 소름이 녹아들었다. 윤성에게 드러나지 않게끔 눈살을 찌푸린 윤수가 단념한 것처럼 손을 자리에 뒀다. 이대로 빼면 윤성이 상처받을 지도 몰랐다.

뭐해? 이 새벽에. 문득 뒤편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운동복 차림을 한 채 거실에 서있는 윤혁이 있다. 윤성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고 윤수 형도 그렇고, 잠이 안 와서 영화 보려고 했어. 형도 같이 볼래?”

“나 아침 일찍 연습 가야 해. 그리고 너 있다가 학교 가야 하는데 잠도 안자고 지금 뭐하는 거야. 이게.”

“그거야, 내 마음이고.”

퉁명스럽게 받아치는 윤성을 보면서 윤혁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신기 위해 현관에 뒀던 운동화를 밀어낸 윤혁의 입가에 탁한 한숨이 맺혔다. 고개를 든 윤혁이 다소 성난 발걸음을 내딛으며 소파를 향했다. 윤성의 팔을 거칠게 쥔 윤혁이 강제로 몸을 일으켰다. 쓸 데 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 당장.

윤성은 납득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수와 있을 수 있는 기회를 강제로 박탈하려는 존재에 불쾌함을 느낀 듯 얼굴을 빠르게 일그러뜨렸다. 싫어. 내가 왜? 담담하게 반문하는 윤성의 말에 윤혁이 못 당하겠다는 것처럼 어금니를 깨물었다. 고개를 돌린 윤혁의 시선이 앉아 있는 윤수를 향했다. 입 밖으로 분연한 명령이 떨어졌다. 오윤수, 네가 들어가. 갑작스러운 지시에 윤수의 손가락이 살짝 곤두세워졌다.

“아니, 나는. 내가 왜.”

“네가 들어가야 얘도 들어간단 말이야. 빨리.”

딱딱하기 그지없는 언어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단호했다. 난감한 얼굴로 윤혁을 응시하던 윤수의 몸이 마지못해 일으켜졌다. 터덜터덜 방으로 향하던 윤수의 몸이 계단 중간쯤에서 잠시 멈췄다. 아까 있던 소파 쪽으로 시선을 살짝 끌어내렸다. 잔뜩 화가 난 채 윤혁을 노려보는 윤성의 얼굴이 선명하게 시야에 걸렸다.

아침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다가 뒤늦게 잠에 들었다. 아까 보고 겪었던 일이 복잡한 숙제처럼 머릿속을 짓눌러왔다. 전화 벨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점심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갈수록 수면시간이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포함해 많은 것들이 어긋난 태엽처럼 불규칙하게 윤수의 인생을 휘감고 있었다.

“응, 성훈아.”

-뭐야. 너 오늘 학교 안 와?

“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진짜 안 좋아 보이네. 그래도 우리 이번 주 학보 마감해야 하는데 편집장이 지면 계획 짜는 날 비우는 건 너무 하다, 야. 너 기사도 안 쓴 지 꽤 된 거 알아?

“미안. 네가 대신 좀 고생해주라.”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솔직히 좀 서운하다. 어?

결이 거친 목소리에는 완연한 섭섭함이 어려 있었다. 윤수 역시 알고 있었다. 성훈에게는 이렇게까지 화 낼 자격이 있다는 걸. 학보사 일에 제대로 손을 댄 기억이 까마득했다.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건반이 빠져나간 피아노를 두들기는 것처럼 윤수의 학교생활은 제멋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히 화음이 뒤죽박죽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집에 오고 나서부터 많은 측면에서 일상이 꼬이고 있었다. 평소의 패턴으로 살아가는 게 사실상 어려운 수준이었다.

“미안해, 성훈아. 화내지 마. 응? 내가 잘못 했어.”

-됐다. 그런 목소리로 얘기하는데 내가 뭔 말을 하겠냐. 몸조리 잘 해라. 아프지 말고. 너 요즘 너무 말랐어.

“고마워.”

성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거울 쪽으로 다가갔다. 테두리에 더께가 둘러진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얼마나 말랐고, 얼마나 초췌해졌는지가 좀처럼 체감이 되지 않았다. 스스로의 얼굴을 파악하는 일은 수면 위에서 발을 딛는 것처럼 어려운 행위였다. 거울로부터 얼굴을 떼어 낸 윤수가 복도가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일 층으로 내려가 아침도 점심도 아닌 식사와 함께 차를 마시고, 정원이 있는 쪽으로 나왔다. 오후의 햇살이 늦여름의 바람과 섞여 온 몸을 훈훈하게 에워쌌다.

짧지 않은 길을 걸어 나무가 있는 쪽까지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나무 가까이 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고개를 든 시야에 얼기설기 드리워져 있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거미줄처럼 겹겹이 이어진 실루엣은 저 끄트머리 어딘가에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101년이라고 했다. 이 집에 처음 살기 시작한 일본인이 나무를 심고, 이것이 뿌리를 내려 이렇게 크기까지 101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윤수는 새삼 궁금해졌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빛에 대한 저항으로 자꾸만 끌어내려지는 눈꺼풀을 아예 감아버린 채 은은하게 찾아드는 솔 향을 온 몸으로 취했다. 적막한 가운데 소나무와 자신만 존재하는 긴 시간이 흘렀다. 일광욕을 하는 식물처럼 온 몸이 따뜻하게 물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음습하기만 한 나무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눈꺼풀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문득 누군가가 뒤에서 빠르게 윤수의 허리를 잡아챘다. 동시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뭔가가 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 입 밖으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웬만한 성인여성 키 정도는 족히 될 법한 길이의 나뭇가지 하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두텁기도 적잖게 두터워서, 그대로 서 있다가 깔렸으면 기절하고도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조심해야지, 윤수야. 뒤편에서 부드러운 남성의 음성이 찾아들었다. 떨리는 고개를 가누며 뒤쪽을 보니, 다행이라는 얼굴로 지긋이 미소를 지어보이는 윤민이 있다. 다정함이라는 단어가 실존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의 온기어린 얼굴. 분명히 그런데도,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기묘한 두려움이 물밀듯이 찾아온다. 호흡이 예고 없이 가빠져 왔다. 점점 더 새하얗게 돌변하는 윤수의 얼굴을 보면서 윤민이 빠르게 윤수의 얼굴을 제 쪽으로 들어 보였다. 왜 그래. 윤수야.

아니, 그냥. 모르겠어. 정말로 왜 이러는지는 윤수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방금 일에 저도 모르게 크게 경직된 모양이었다. 숨통이 커다란 손에 틀어 막힌 것처럼 거세게 조여 왔다. 호흡하는 일이 갑자기 힘겹다.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윤수의 턱을 쥔 윤민이 안쪽에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어 왔다. 그대로 혀를 누른 채 윤수의 몸을 더욱 세차게 끌어안았다. 혈이 흐르는 등을 소리가 날 정도로 힘을 줘서 몇 번인가 두드렸다. 반복되던 같은 동작이 어느 순간 멈췄다. 호흡이 점점 더 안정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얼어붙었던 혈관에 피가 돈다. 길게 고개를 젖힌 윤수의 몸이 스르르 윤민 쪽에 기대졌다.

괜찮지? 이제. 갑자기 놀라서 그랬나 보다. 조곤조곤 말을 건네며 윤수의 어깨를 문질러오는 손길은 오후의 햇살을 닮아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수의 머릿속에서 일말의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은 괜찮은데, 앞으로도 괜찮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옅게 숨을 뱉은 윤수의 고개가 윤민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막 주차한 차에서 내린 윤석의 기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윤수를 곁눈질로 쳐다보던 윤석이 윤민과 윤수를 번갈아 확인하고는 심드렁하게 물어왔다. 뭐하는 거야, 거기서.

12.

너, 오윤민이랑도 잤냐. 집 안으로 들어와 윤민이 제 방으로 향하는 걸 보자마자, 윤석이 윤수 쪽으로 비꼬듯 말을 걸어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윤수가 제법 매섭게 입을 열었다.

“윤민 형이랑은 그런 거 안 해요.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너처럼 순진한 얼굴로 아버지 방 뒤져 대는 애 말을.”

“진짜.”

“진짜, 뭐.”

“수준 떨어져서 대화를 못 하겠네.”

서늘하게 대화를 종용하며 고개를 돌리는 윤수의 손목을 윤석이 낚아챘다. 윤수의 몸을 다시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한 윤석이 손을 들어 윤수의 옷 안쪽을 헤집었다. 진짜 왜 그래요. 혹여나 윤민이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날 선 반응이 터져 나왔다. 무시하듯 좀 더 안쪽까지 티셔츠를 끌어내린 윤석이 됐다는 얼굴로 손을 빼냈다. 잘 있네, 자국. 윤수의 눈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내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 여전히 윤수의 손목을 쥔 채로 윤석이 묵직하게 말을 건넸다. 윤수의 얼굴이 더욱 불만스럽게 찌푸려졌다. 어느 집을 말하는지는 윤수도 모르지 않았다. 윤석은 기본적으로 용산의 어느 고층 아파트에서 출가해 얻은 가정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곳은 윤수와 무관한 공간이었다. 굳이 가고 싶지 않았다. 다물려 있던 입 밖으로 퉁명스러운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제가 거길 뭐하러 가요.

오라면 와. 말했잖아, 넌 선택권 없다고. 정면에서 부딪혀오는 단호한 시선에 윤수의 등골이 바싹바싹 말라간다. 살짝 올라간 윤석의 입가에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여유가 비쳤다. 맥없이 고개를 숙인 윤수의 입 밖으로 체념어린 말이 흘러나왔다.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주소는 핸드폰으로 보내 놓을 거니까, 수업 마치면 바로 와. 마땅히 해야 할 대답을 윤수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 태도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윤석이 빠르게 윤수의 고개를 잡았다. 돌아간 만큼 다시 끌어올린 윤석이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대답은. 마른 침을 삼킨 윤수의 입 밖으로 허탈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알았어요. 턱을 쥐고 있던 손아귀가 소리 없이 풀어졌다.

* * *

아이고, 우리 귀한 편집장님 오셨습니까. 다음 날 학보사 편집부에 가자마자 성훈이 과장된 인사를 건네며 윤수를 맞이했다. 윤수의 눈꺼풀이 지긋이 감겼다가 풀어졌다. 입 밖으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나도 알아. 내가 잘못한 거. 그만해라, 좀.”

“그래도 어제보단 목소리가 좀 낫네. 다행이다. 야.”

“그러게. 하루 좀 쉬었다고. 이번 주 지면은, 다 된 거야?”

“어, 거의 다 됐는데. 한 꼭지 부족하긴 하다.”

지면 계획이 적힌 종이가 윤수에게 건네졌다. 찬찬히 안에 적힌 새까만 글자를 훑어보는 사이, 불현듯 과방 문이 벌컥 열렸다. 안쪽으로 성난 듯 걸어오는 여학생은 윤수가 지독하게 잘 아는 얼굴이다. 야, 오윤수. 맞은편의 책상 위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손을 짚은 여학생이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윤수를 봤다. 아, 좀. 나지막하게 말을 뱉은 윤수가 귀찮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편집장. 너네 일 제대로 안 해?”

“제보는 제발 우리 학보사 이메일로 하자. 내가 이메일 주소 불러 줄.”

“이메일은 얼어 죽을. 내가 너한테 메신저로 보낸 거 못 봤어? 우리학교 농구팀 주장 폭행 사건, 그거. 여총에서 다 들고 일어난 걸 왜 학보사는 캐치를 안 하냔 말이야.”

“야, 박채영. 살살 해라. 윤수 쟤 요즘 오늘 내일 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성훈이 심드렁하게 채영 쪽을 봤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든 채영의 눈이 다소 가늘어졌다. 어, 진짜 그러네. 차마 골이 아프다는 얼굴로 채영을 흘낏 본 윤수가 탄식 섞인 말을 건넸다. 알아봐 줘서 고맙다, 박채영.

“진짜 왜 이래. 너 요즘 못 먹고 다니니? 나랑 사귈 땐 그렇게 잘 쳐 먹어 놓고는.”

“진짜 전 남친한테 하는 말본새가 고급스럽기 그지없구나. 너.”

채영의 언사가 거친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담담하게 반응하는 윤수를 잠시 갸웃거리면서 쳐다보던 채영이, 급하게 몸을 틀면서 강조하듯 말했다. 아, 암튼. 방금 그거 다시 확인해보고 이번 주에 실어. 꼭. 학보사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제 할 말만 하고 휙 사라진 존재를 곱씹다가 성훈이 큰 소리로 혀를 찼다. 아주 대단한 걸 봤다는 얼굴이다.

“진짜 여러 가지로 대단하다. 쟤나, 쟤랑 사귄 너나.”

“아니, 근데 박채영 지금도 여학생총회야?”

“지금 회장이시란다. 원래 하던 여자애가 갑자기 휴학 했대.”

“하. 임자 만났구나.”

“박채영이 얘기한 거 뭔지는 나도 아는데. 그거 기사로 다루기가 좀 애매해서. 농구팀 주장이 매니저 하던 여자애들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뭐 그랬다는 건데, 피해자 증언이 확보가 안돼서 기사쓰기엔 상황이 좀 그래.”

“그럼 농구팀 애들이 알겠지.”

“근데 우리가 아는 농구팀 애들이.”

성훈이 잠시 말을 멎는 사이 윤수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액정을 확인해 보니 생전 처음 받아보는 윤혁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액정에 닿은 윤수의 손가락이 흠칫 움츠려들었다.

-너 지금 어디야.

있네. 얘가 있네.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는 성훈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그 뻔뻔한 얼굴을 윤수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밀쳐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윤혁 성격상 순순히 취재에 협조해 줄 리가 없다.

“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랑 얘는.”

“박채영한테 얻어 쳐 맞는 것하고 너의 사랑스러운 반쪽짜리 형제를 만나서 얘기를 듣는 것하고 어느 쪽이 더 너한테 유리할까, 윤수야.”

“넌 진짜 개새끼야.”

“일단 물어나 봐. 그리고 얘도 모른다고 하면, 비어 있는 기사 한 꼭지 다른 걸 채우지, 뭐. 폭행 건은 다음 주에 더 알아보고 하든가 하고.”

“뭐로.”

“오윤혁 인터뷰. 얘가 지금 우리 학교에서 제일 핫하거든.”

빙긋 웃어 보이는 성훈의 얼굴에서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다는 성취감이 비친다. 윤수 입장에서는 그저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어떤 핑계를 내며 넘어갈 지를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윤수의 귓불을 갑자기 성훈이 길게 잡아당겼다. 악. 절로 고통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손을 떼어낸 성훈이 단단하게 으름장을 놨다. 이 정도는 해라. 너도 양심이 있으면. 윤수의 입 밖으로 희미한 한숨이 내뱉어졌다. 머릿속에 담아둔 핑계거리들이 사르르 녹아 증발해버렸다.

정문 쪽에서 만난 윤혁은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띄는 실루엣을 지니고 있었다. 키가 큰 것도 그랬지만, 몸의 비율이 워낙 좋은데다가 단출한 것 같으면서도 옷 입는 센스가 뛰어났다. 멀리서도 보이는 선명한 이목구비도 한 몫 했다. 남자고 여자고 한 번씩 힐끔거리며 지나가게 만드는 존재를 보고 있자니 괜한 열등감에 기분이 나빠졌다. 차라리 친형제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은편에 다다른 윤수를 윤혁은 한동안 말없이 눈으로 훑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서만 있는 건 두 번째였다. 저번에 강의실에서 만났던 때, 그리고 지금. 대화를 자주 나누던 사이가 아니다 보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윤혁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제대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윤혁이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갔다. 먼저 사람을 불러놓고 뭐하는 건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윤혁에게 물을 것이 있는 상황이기도 했으므로, 마지못해 따라 걸었다.

정오의 기류가 유독 후덥지근해서 조금만 걸어도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그 와중에 성큼성큼 걸어가는 윤혁의 보폭이 워낙 넓어 따라잡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걷기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을 무렵, 갑자기 윤혁이 등을 돌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고개를 드는 윤수를 향해 딱딱한 언어가 쏟아져 나왔다.

“점심, 뭐 먹을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먹고 싶은 거 해.”

“난 다 잘 먹어. 너 좋아하는 걸로 하라고.”

“하, 진짜. 더워 죽겠는데.”

안 그래도 기력도 없는데 날까지 더워 막연한 짜증이 났다. 게다가 의도를 알기 어려운 윤혁의 태도가 불쾌감을 더했다. 히스테릭한 감정을 담아 맞은편에 건넨 시선에 한없이 진지해 보이는 얼굴이 맺혔다. 진짜 밥을 먹으려고 부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윤혁이 이런 식의 호의를 보이는 게 낯설어 저도 모르게 비뚤게 생각하고 말았다. 일단 뭐라도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주변을 둘러 본 끝에 적당한 한식당 하나를 가리켰다.

“일단 저기로 가자. 나 더 못 걷겠어.”

“그거면 돼?”

“너 진짜 왜 이러냐. 나 죽도록 싫어할 땐 언제고.”

“뭐, 그건 맞는데. 지금 네 꼬라지 보니까.”

“내 꼬라지가, 왜.”

“아니다. 일단 가자.”

앞장서서 걸어가는 윤혁의 뒷모습에 윤수는 새삼 의구심이 들었다. 식당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학교 근처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나 싶은 생각으로 고개를 든 곳에 메뉴판이 있었다. 생각보다 가격대가 높았다. 학생들이 쉽게 찾을 만 한 집은 확실히 아니었다.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윤혁이 윤수 쪽으로 손짓을 했다. 뭐해, 앉아. 내가 살 거야. 당연하게 건네는 말에 묘하게 자존심이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눈꺼풀을 치켜 올린 윤수가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사긴 뭘 사, 내가 형인데. 윤혁의 입 밖으로 답답함을 실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냥 좀 앉아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냐. 넌.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채 거두지 못한 채 일단 자리에 앉았다. 서버가 다가오자 윤혁이 메뉴판에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주문했다. 지나치게 메뉴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을 다 접수한 서버를 붙들고 윤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야, 그걸 다 누가 먹어. 잠시만요, 저희 주문 수정할게요. 난감한 얼굴로 윤수를 향하는 서버를 윤혁이 떠밀듯 홀로 보냈다. 아니에요, 그냥 가세요. 결국 돌아서는 서버를 보면서 윤수가 마뜩치 않은 얼굴로 테이블 위에 무겁게 손가락을 걸쳤다. 맞은편에서 별나게 굴지 말라는 투로 윤혁이 미간을 좁히는 게 보였다. 그냥 먹어라, 좀. 별 거 갖고 토 달지 말고.

다부지게 부딪혀오는 시선에 괜히 할 말이 없어졌다. 잠자코 메뉴를 기다리는 동안 둘 사이에 긴 정적이 흘렀다. 윤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고, 윤혁은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한참이나 뭔가 생각을 하는 듯 해 보였다. 음악조차 흐르지 않는 적막한 식당에서 윤혁의 시선이 한 동안 허공을 헤맸다. 길어지는 정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윤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네 농구팀 주장. 진짜 여자애들 막, 그랬냐.”

“몰라, 그건. 그랬다는 얘기도 있는데. 난 본 적이 없어서.”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윤혁의 말에 윤수의 입술이 살짝 비뚤어졌다. 이러면 나가린데. 쯧, 하며 짧게 혀를 차는 윤수의 얼굴을 윤혁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평소하고 비교하면 표정이 다소 차분했다. 윤수가 기억하기로는 항상 마음에 안 든다는 것처럼 찌푸리거나 성난 듯한 얼굴 일색이었다. 원래 인상 자체가 그런 영향도 있긴 하지만, 윤수를 볼 때는 유독 그 표정이었다. 괜히 낯설게 다가오는 얼굴에 할 말을 잃은 윤수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문득 맞은편에서 윤혁의 입술이 열렸다. 오윤수. 비껴갔던 시선이 다시 윤혁 쪽으로 향했다. 왜.

“우리 형제들이 너한테 뭘 하든, 너무 받아주지 마.”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그냥 그렇게 하라고. 어려운 거 아니잖아.”

“네가 무슨 소리하는 건지 난 모르겠다.”

“뭐,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에 사뭇 무게감이 있다. 꽤나 고민한 끝에 건넨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의도가 뭔지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형제들이 윤수에게 뭘 하든지라는 말에 희미한 물음표가 붙는다. 물론 윤석은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외의 형제들에게는 뭔가가 없다. 이따금씩 그들에게서 비치는 서늘한 인상을 제외하면, 윤수를 특별히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윤혁은 마치 모든 형제들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것처럼 경고하고 있다. 꼭 언젠가 그들이 윤수에게 뭔가를 할 것이라는 것처럼.

생각이 길어지니 두통이 찾아왔다. 통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덥기까지 하다.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입고 있던 티셔츠의 목 부분을 살짝 옆으로 당겼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안 쪽 피부를 구석구석 훑어댔다. 턱을 괸 채 표정 없이 윤수를 쳐다보던 윤혁의 눈썹이 문득 비틀렸다. 야, 너 그거 뭐야.

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어 오는 윤수의 턱 밑으로 윤혁의 손이 예고 없이 찾아들었다. 티셔츠 안쪽으로 들어온 손길이 목덜미를 깊숙하게 짓누른다. 압박이 지나치게 세서 반사적으로 커다란 소음이 터져 나왔다. 야. 뭐하는 거야. 방어적으로 윤혁의 손목을 밀어내는 윤수를 보면서도 윤혁은 쉬이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윤수를 응시하던 윤혁의 입술이 서늘하게 열렸다. 이거 누가 남겼어.

윤혁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어졌다. 긴장해있던 어깨가 맥없이 밑으로 끌어내려졌다. 윤혁이 뭘 말하는지, 윤수는 단박에 알았다. 윤혁의 손가락이 닿아있는 부위에서 윤석이 남겼던 흔적이 점점이 미동하는 것을 느꼈다.

윤민 형이야? 다짜고짜 윤혁이 내뱉은 이름에는 현실감이 하나도 없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윤석도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 윤민과 뭔가를 했을 것이라는 것처럼. 윤수로서는 말도 안 되는 추정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누가 봐도 제일 가능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맥없이 숨을 가눈 윤수가 차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리고 그게 뭐가 궁금해.”

“그럼 오윤성이야?”

“야. 아니라고. 그만해, 좀.”

“윤석 형이야?”

“아니라고 했.”

격하게 미동하던 입술이 순간적으로 멎는다. 도무지 말을 끝맺을 수가 없다. 그냥 아니라고 하면 그만인데, 막상 내뱉으려고 하니 기묘한 죄의식이 들었다. 그런 걸 아니라고 부정하는 일이 새삼 힘에 부쳤다. 보이지 않는 사슬에 얽혀 들어간 언어가 소리 없이 소멸된다. 스스로도 난감한 기분이 들어 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윤수의 귓가에 윤혁의 비소가 맺혔다. 미치겠다, 너 진짜.

뭐가. 순식간에 말라붙은 입술을 열어 반문하는 윤수를 향해 윤혁이 사뭇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한심하다고. 병신 새끼야. 말을 마친 윤혁이 분연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경질적으로 카운터에 걸어가 계산을 하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유리창 너머로 짧게 자른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빠르게 걸어가는 윤혁의 긴 실루엣이 보였다. 윤혁이 지나간 자취를 타고 찌는 듯한 열기가 윤수의 목덜미를 점점이 붉게 물들였다. 입가에 희미하게 욕설이 맺혔다. 씨발,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한 줄 아나.

13.

윤석의 집은 한남동 저택에서 차로 십 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용산의 한 고층 아파트였다. 비현실적으로 건물이 높아 꼭대기를 찾기 위해서는 한참이나 고개를 젖혀야 했다. 경비실에 방문할 호수를 얘기하고 기다렸다. 능숙하게 스피커폰을 켠 경비원이 어딘가에 연락을 했다. 몇 가지 대화를 주고받은 경비원이 카드 키 하나를 건넸다. 나중에 반납하시면 돼요. 윤수는 자신이 허가 받지 않은 공간에 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관에서 윤수를 반겨온 건 젊은 여자였다. 어머,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방긋방긋 웃어대며 건네는 형식적인 언사는 버튼을 누르면 입력된 말이 튀어 나오는 기계식 인형을 연상케 했다. 인형 같다는 건 단순히 그 이유에서만이 아니었다. 여자의 매끄러운 이목구비와 가느다란 몸매는 하나하나 신경 써서 다듬은 마네킹처럼 어디 하나 부족한 곳이 없었다. 그런 마네킹은 사실 많았다. 방송에서 나오는 수많은 여자연예인 중에 비슷한 인물을 찾으라면 열 명도 넘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금방 들어올 거예요. 잠깐 TV보면서 기다려요. 식사 곧 준비 되니까. 부엌에서 분주하게 요리를 준비 중인 가정부를 뒤에 두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여자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푹신하고 매끈한 소파에 앉아 덩그러니 놓인 리모콘을 들었다. TV를 트니 저녁 시간 대 하는 일일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윤수는 방송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현실적으로 짜여 진 드라마는 더욱 그랬다. 그래도 할 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 동안 총천연색의 세세한 화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것처럼 화면을 봤다. 재미는 없었다.

화면에서 비스듬히 시선을 비껴 근처를 살폈다. 윤석과 여자의 결혼기념 사진 같은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념사진 옆에는 화사한 정장차림으로 공중파 로고가 새겨 진 뉴스데스크에 앉아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기시감의 근원지를 찾았다. 공중파 뉴스 아나운서 중에 강유진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발성도 좋고 진행 태도도 좋았던 아나운서였다. 이따금씩 표정 관리가 안 될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인간적이어서 호감이 갔다. 어느 날 뉴스를 진행하던 중 혼잣말로 보도국장을 욕하는 소리가 전파를 탔다. 다음 날부터 보이지 않게 됐다. 뉴스에서든. TV에서든.

윤수 씨. 드레스룸에서 강유진이 원피스 두 개를 집어 든 채 나왔다. 원피스 두 장을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손길이 제법 정성스럽다. 좀 골라줘요. 뭐가 더 나아요? 색깔이 다를 뿐 윤수로서는 차이를 파악하는 게 힘들었다. 여자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청담동. 좀 이따 친구들이랑 저녁 먹을 건데. 오늘 좀 많이 신경 써야 하거든. 회사 동기들이랑 오랜 만에 보는 거라.

숙인 여자의 고개 밑으로 길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차분하게 그것을 쓸어 올리는 손톱이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모양새와 색깔로 다듬어져 있어서 윤수는 조금 소름이 돋았다. 윤수는 사실 팬까지는 아니었지만 뉴스를 자주 챙겨보는 입장에서 여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공중파 여자 아나운서 중에서 자기 주관을 표출하는 캐릭터는 그녀가 유일했다. 덕분에 호불호는 좀 갈리는 편이었지만, 윤수는 그런 걸 좋아하는 쪽이었다.

방송에서 본 여자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여자를 쉽게 매칭하지 못한 건 지금 접하는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방송과 달라서였다. 윤수의 눈에는 오히려 지금 보는 모습이 훨씬 더 카메라를 앞에 둔 사람마냥 어색해보였다. 생김새부터 말투, 행동, 소품까지 하나하나 연기하고 있는 느낌. 소위 얘기하는 사랑스럽고 애교 많은 여자에 작위적으로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느낌이었다. 윤수가 여자를 보자마자 인형이나 마네킹을 연상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거 해야겠다. 블루 벌킨이랑 매칭하면 잘 어울리겠네. 윤수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결정을 내려버린 강유진이 다시 드레스룸에 들어가 버렸다. 애초에 뭐 하러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 키패드에 숫자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리고, 벌컥 문이 열리더니 윤석이 들어왔다. 원피스를 차려 입은 강유진이 해맑게 웃으며 남편을 반겼다.

“어. 오빠 왔어?”

“안 갔어? 아직도.”

“이제 가려고. 어머, 근데 윤수 씨 너무 귀엽다. 아직 고등학생이지?”

대학교 3학년생 군필 예비역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맺혔다가 사그라졌다. 차마 말도 못 하고 빤히 쳐다만 보는 윤수의 얼굴을 윤석이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내를 눈앞에 두고도 윤수의 얼굴만 집요하게 훑는 시선 때문에 묘한 죄책감과 불편함이 머릿속을 채웠다.

전무님. 식사 준비 다 됐는데요. 부엌에서 가정부가 말을 걸어왔다. 고생 했어요. 이만 퇴근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윤석의 옆에서 강유진이 느슨하게 소매를 잡았다.

“오빠. 나도 가볼게. 오늘 오빠도 오면 좋았을 텐데. 혜진이랑 유정이는 남편이랑 같이 온다더라.”

“나 집에서도 일 해야 해서 못 가. 잘 다녀와. 밑에서 기사 분 기다린다.”

“응, 다녀올게요. 윤수 씨. 잘 놀다 가구, 또 봐요.”

생글거리는 얼굴로 윤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강유진을 보고 있으니 팬서비스하는 여자 아이돌이 떠오른다. 보기만 해도 기가 빨렸다. 오윤석은 저런 여자랑 어떻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애초에 저 성격이 오윤석하고 맞을 것 같지도 않다. 피곤하다는 얼굴로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윤수를 두고 여자와 가정부가 차례로 나갔다. 윤석과 둘만 남은 거실에 정적이 흘렀다.

“저녁, 안 먹었지.”

“왜 부르신 거예요.”

“일단 먹어. 먹고 나서 얘기 해.”

다소 피로한 얼굴로 재킷을 벗으면서 윤석이 입을 열었다. 낮에는 오윤혁이 밥 먹이려고 난리더니, 저녁에는 오윤석이 이러고 있다. 뭐라 대꾸할 거리가 없었으므로 잠자코 식탁에 앉았다. 차려진 음식들은 가짓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출장 뷔페를 연상케 했다. 그래도 한남동 집에 있다가 여기 오니 좀 나았다. 거기서는 입맛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서는 좀 먹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맞은편에는 입고 있던 셔츠에서 넥타이만 푸른 윤석이 있다. 수저를 들어 접시로 향하는 손길이 제법 차분하다. 문득 저 사람이 원래 이런 이미지였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한남동 집에서 마주친 게 대부분이라 그 때는 몰랐는데, 여기에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어딘가 부드러운 이미지가 있다.

“저기요.”

“어, 말해.”

“아버지 있는 병원, 알려줄 수 있어요?”

“왜. 가고 싶어?”

“네.”

거기서 대화가 끊겼다. 천천히 접시 안에 담긴 것을 입으로 가져가 몇 초간 씹은 윤석이, 꿀꺽 음식물을 삼켜내고는 입을 열었다. 언제 한 번 데려가 줄게. 물론 너 하는 거 봐서.

그냥 해준다고 하면 어디가 덧날까 싶었다. 하나라도 사족을 붙여야 성미가 풀리는 저 오만한 성격에 치가 떨리는 것만 같다. 하긴, 오윤석은 어쩔 수 없는 오 회장 아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오윤석이 당장 그리 해줄 것이라 기대한 것도 아니긴 했다. 무거운 침묵으로 점철된 식사가 이어졌다. 밥그릇을 거의 다 비울 무렵에 윤석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 집 침실, 들어가 봤어? 막 입 안에 물을 머금었던 윤수의 시선이 빠르게 바로 올라갔다. 제가 거길 뭐하러 가요.

그럼 애도 못 봤겠네. 담담하게 얘기한 윤석이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담긴 도가니를 집었다. 젓가락이 들어갔다 나온 하얀 육수 위에서 기름이 섬처럼 둥둥 떠다녔다. 애가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하긴 저번에 섹스 얘기하면서 번식 어쩌고 했던 거 보면 다른 건 몰라도 윤석이 제 자식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와이프는 일도 안 하고 집 아니면 청담동 식당 같은데 들락거리는 게 일상이니, 바빴으면 윤석이 바빴지 와이프 입장에서야 애 만들 시간이 없을 리가 없다. 추측컨대 한 동안은 윤석이 일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와이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을 거고, 그러면 밤마다.

더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표정이 왜 그래.”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어서요.”

“암튼 유진이는 애 한 번 낳더니 더 이상은 낳고 싶지 않다고 난리고. 그러면 나로서도 섹스를 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유진이한테 밤마다 맞춰주는 게 힘들더라고. 행위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닌데, 좀 피곤하고 지겹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요.”

“그런데 너랑 우리 침실에서 한 번 하면, 앞으로 유진이랑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쿨럭. 윤수의 입밖으로 짧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잘못 들었는지를 의심했다.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해 윤수와 한 번 제 침실에서 한 다음에, 그걸 떠올리면서 앞으로 제 와이프를 안겠다는 얘기다. 와이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이혼 사유였다. 윤수의 입 밖으로 거절이 줄줄이 흘러 나왔다. 못해요. 안 해요. 아내 분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요, 그런 걸.

아버지 방에서 도둑질 할 때는 언제고, 이상한 데서 모럴하네. 너. 그리고, 지금 내가 너한테 제안하는 거 같아? 네가 그걸 고를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맞은편에서 팔짱을 낀 윤석이 태연하게 질문을 던진다. 살짝 비틀린 짙은 눈썹에 윤수의 입술이 절로 다물어졌다. 할 말이 없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일방적으로 윤수 쪽이 불리한 게 당연했다. 순식간에 밥맛이 떨어졌다. 쥐고 있던 젓가락이 기다란 마찰음을 내며 식탁 위에 내려놓아졌다. 윤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까딱 하며 윤수 쪽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윤수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나.

일어난 다음의 일이 막연하게 두려웠다. 난감한 얼굴로 식탁 위의 하얀 접시들만 쳐다보는 윤수를 향해 윤석이 건조한 숨을 뱉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윤석이 팔을 쥐고는 힘 있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고 했지. 입 안에서 축축한 타액이 느릿하게 삼켜졌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윤수가 고개를 들어 윤석을 봤다. 짙게 드리워진 무표정이 윤수의 다음 행동을 암묵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수의 시선이 단단하게 닫혀 있는 침실 입구를 향했다.

어린 애 아니잖아. 결정권 줬을 때 머리 좋게 행동해. 윤석의 단호한 언어가 윤수의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걸쳐진다. 호흡을 가다듬은 윤수가 굳어있던 발걸음을 들어 침실 쪽을 향했다. 문을 열기 위해 쏟아 부어야 하는 기력이 평소의 것보다 수 백 배는 더 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열린 문틈으로 윤수가 몸을 들이고, 이어서 들어온 윤석이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안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고, 건너편에는 작은 침대가 있다. 작은 침대에서는 두어 살쯤 돼 보이는 어린 애가 곤히 자고 있었다. 아이를 보니 또 두려움이 밀려온다. 도무지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대상이 보다 늘어났다. 어머니, 윤석의 아내 강유진, 그리고 저 아이. 자신을 둘러싼 지옥의 개수가 순식간에 많아졌다. 뒤꿈치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경직된 윤수의 뒤편에서 윤석이 거칠게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잠깐만요. 다급하게 뱉은 윤수의 호소를 윤석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할 거면 빨리 해. 지금 놀러온 거 아니잖아. 윤석의 단단한 팔뚝이 윤수의 바지 안에 밀물처럼 흘러들었다. 허벅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이가 있는 쪽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참다못해 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윤수의 어깨를 윤석이 빠르게 잡아챘다.

혼자 깨끗한 척 그만 좀 해. 열 받으니까. 어깨에서 내려온 손아귀가 팔을 쥐었다. 시트 밑으로 끌어내려지는 순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푹신한 소음과 함께 밑으로 추락한 윤수의 위로 윤석이 올라탔다. 풀다 만 바지 버클을 통째로 젖히고는 속옷까지 한꺼번에 벗겨 내렸다. 방금 전 윤석이 내뱉은 말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윤수의 오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완연하게 드러난 벗은 하반신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윤석 역시 입고 있던 바지를 끌어내렸다. 목적성이 분명한 손동작을 보며 윤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창살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지를 무릎 언저리까지 끌어내린 끝에 속옷이 단박에 벗겨져 내려갔다. 툭 튀어 나온 성기가 드러났을 때, 윤수는 자신이 못 볼 걸 봤다는 생각을 했다.

윤수는 그 동안 상식적인 선에서 남성들이 발기하는 몇 가지 이유를 인지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자극이 들어왔을 때나 포르노처럼 야한 영상을 봤을 때, 그리고 야한 상상을 했을 때. 지금 윤석이 발기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 번째였다. 그저 윤수의 얼굴을 보고, 행위를 상상한 것만으로 저렇게 됐다는 거다. 피가 섞인 남동생을 보면서.

누워서 입술만 달싹이는 윤수의 몸 가까이로 윤석이 다가왔다. 여전히 굳어 있는 허벅지가 억센 손아귀의 힘에 떠밀려 위로 올라갔다. 아, 저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거부의사는 윤석에게 무의미했다. 완전하게 양 허벅지를 벌린 채 위로 끌어올린 윤석이 지긋이 엉덩이 사이를 손으로 헤집었다. 구멍이 있는 부근을 마사지하는 것처럼 문질러오다가, 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불쑥 들어왔다. 아. 성대를 타고 쓰라린 숨이 터져 나왔다. 저번보다 훨씬 더 거칠다. 금방이라도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 내 하는 수컷처럼 발정어린 손길이다. 메마른 내벽의 주름을 어루만지면서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나는 위쪽을, 하나는 아래쪽을 집중적으로 문질러대면서 내부의 통로를 넓혔다. 보이고 싶지 않은 속을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에 온 몸이 치욕감으로 물들었다.

저번보다 잘 삼키네. 다른 것도 넣어도 되겠어. 응? 픽 웃은 윤석이 좀 더 안쪽까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달달 떨리던 아랫입술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진짜 큰형과 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왔다. 닿을 수 있는 내벽의 한계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얇은 손톱으로 지그시 점막을 눌렀다. 아앗. 짤막한 탄성이 목을 울렸다. 문득 고개를 든 곳에 고급스럽게 마감된 상들리에풍 조명이 있었다. 불이 꺼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찔한 곡선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매끈한 조형물의 끄트머리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눈가에 더운 물기가 차올랐다.

“저기, 정말로. 형. 저요.”

“뭐가. 얘기해.”

“못 하겠어요. 저 이거 못해요.”

말을 내 뱉는 것과 동시에 눈꼬리를 타고 길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 진짜.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양 윤석의 상체가 사납게 들렸다. 동시에 안쪽을 장악하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나가면서 긁힌 내벽이 피가 날 것처럼 쓰렸다. 또 한 번 눈가가 뜨거워졌다.

오윤수. 너 내가 얘기했지. 윤수와 또렷하게 마주쳐지는 눈이 날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다. 창 밖에서 스며드는 달빛과 조명에 의지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해야 하는 와중에도 잘 다듬어진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그 얼굴에 새삼 겁을 먹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윤수의 위에서 윤석이 또박또박 얘기했다. 말 했지. 선택권 줄 때 머리 좋게 행동하라고. 혼자 깨끗한 척 하지 말라고.

아랫입술이 있는 힘껏 깨물어졌다. 깨끗한 척 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건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므로, 단지 그 뿐이었다. 쥐고 있던 끈은 당기고 당겨져 이미 윤수를 구렁의 코앞까지 인도했다. 심지어 지옥의 입구는 여러 개였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그 뿐이었다.

“굳이 이런 거 안 해도 일상 생활하는 데 지장 없잖아요.”

“맞아. 지장 없어. 실제로도 그렇게 잘 살아왔고.”

“그럼 이렇게 할 필요가.”

“몰랐을 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말을 맺은 윤석이 윤수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손을 끌어내렸다. 눈꺼풀과 코, 입술과 볼을 구석구석 만지는 손길이 마음에 드는 조형물을 매만지는 것처럼 섬세했다. 물기에 젖은 피부에 손가락이 스쳐갈 때마다 윤수는 그 자취에 검은 자국이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오윤수. 윤석의 입이 나지막하게 윤수의 이름을 불렀다. 차분한 어조에 어두운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잘못된 일인 거 몰라서 매번 후회할 짓 저지르는 것 같아? 나쁜 거 아니까 하는 거야. 원하는 걸 얻으려면, 그게 어쩔 수 없을 때도 있다는 거 아니까.”

불현듯 윤수의 다리가 보다 깊숙하게 젖혀졌다. 딱딱한 손가락이 빠르게 엉덩이 사이를 벌리고, 그 틈으로 팽창한 성기가 치고 들어왔다. 형, 제발. 가쁘게 내뱉어진 윤수의 단말마를 집어삼키며 성기가 안쪽으로 틀어박혔다. 물크러진 점막 곳곳에 터질 것처럼 혈기를 머금은 성기가 아예 붙어버릴 것처럼 밀착됐다. 하반신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무뎌져갔다.

상처 난 점막의 어딘가가 유독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짓이겨지다 못해 결국 피가 난 모양이었다. 피 많이 나네, 너.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굳이 윤석이 입으로 확인시켜줬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몸에 깊은 모멸감이 들었다. 상처 더 안 나게 할게. 뚝뚝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윤수의 눈가에 입을 맞춘 윤석이 심상하게 말했다. 물기에 잠식당한 눈가가 무겁게 일그러졌다. 우는 건 단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윤수의 피로 질척해진 내벽을 타고 윤석의 것이 탐욕스럽게 주름진 살점을 머금었다. 허벅지에는 힘이 풀린 지 오래인데, 안을 자극하는 성기의 날 선 자극이 고통스러워 수시로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부드럽게 둥근 피부를 어루만지던 윤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안에는 걸레처럼 문드러졌는데, 그 와중에 자지는 잘 먹네. 귓불이 순식간에 홧홧해졌다.

“하으, 그만. 그만 빼요. 읏. 피 계속 날 것 같아.”

“이 정도는 괜찮아. 좆이야 여기서 좀 더 커지겠지만.”

“그러니까 그게 안, 하아. 제발. 안에 진짜 망가진, 흑.”

“엄청 우네. 귀엽긴 하지만. 내일 눈 엄청 붓겠다.”

물기가 자욱한 윤수의 눈가를 지그시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윤석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둘 중 누구도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피로 얼룩졌을 자신의 내벽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긴 터널이었다. 끝났다, 이제. 윤수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실이 마지막으로 스르르 당겨졌다. 어둡고 습한 구렁텅이 안으로 무력하게 몸이 꺾어져 갔다.

멍 하니 허공만 쳐다보는 윤수의 목덜미에 윤석의 혀가 닿았다. 차가워진 머릿속 못지않게 한기 어린 타액이 윤수의 쇄골에 호수를 만들 것처럼 적셔댔다. 아. 상반신 구석구석 모근이 돋는 것만 같았다. 절망적으로 고개를 돌린 윤수의 귓바퀴에 윤석의 나긋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기분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해. 버티지 말고.

눈물의 농도가 보다 짙어졌다. 기분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느껴지는 것이 환멸감뿐인 상황에서 기분이 좋다면 그야말로 변태일 것이다. 단지 이따금씩 소스라치게 돋아 오르는 소름에는 기분이 나빴다. 꼭 느끼는 것처럼 다가와서, 그게 싫었다. 그러나 그런 걸 윤석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입술을 지분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윤석에게는 명백한 거부감을 표한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엉덩이 사이로 심술궂은 삽입이 시작됐다. 더는 상처내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이제는 생체기가 난 곳을 하나하나 훑어대면서 어디라도 터뜨려보려는 심산이 비친다. 베개 위에 올라가 있던 손가락이 날 선 동작으로 부드러운 천을 쥐었다.

“아아, 그. 읏. 더, 더 안 나게 한다고.”

“응.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마음에 안 들게 나오잖아.”

“그렇게 하지 마요. 좀, 흐윽. 아프다고. 읏.”

“말 좀 듣자. 윤수야. 응?”

사뭇 다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너머에 음기 어린 욕망이 존재한다는 걸 윤수는 안다. 그걸 외면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이제는 알았다. 지금의 윤석에게 싫다거나 하지 못하겠다거나 하는 류의 말을 하는 건 날카로운 가시를 통째로 쥐는 일처럼 무모한 일이다. 그에게는 지금 윤수를 취하려는 목적이 있고, 한 침대에 누운 이상 윤수는 그 목적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존재였다.

윤석이 윤수에게 깨끗한 척 하지 말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윤수가 오 회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방을 뒤졌다는 건 스스로 오 회장과 똑같은 인간이 되기로 했다는 거다. 그걸 윤석에게 들킨 순간 윤수는 오 회장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됐다. 그걸 알기에 윤수에게 이런 걸 요구하는 것이고, 이걸 외면하려는 것은 혼자서만 인간성을 챙기려 하는 위선적인 행위가 되는 셈이다.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굴레는 한남동 집에 들어와 오 회장에게 안긴 첫날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기분 좋다고 해 봐. 윤수의 귓불을 이빨로 아프지 않게 깨물어대면서 윤석이 말을 건네 왔다. 눅눅하게 귓가에 맺히는 더운 숨에 윤수의 입술이 달싹 거렸다. 점막을 문대는 봉긋한 귀두가 닿을 수 있는 끄트머리에까지 상처를 내려는 것처럼 공격적이었다. 흘렀던 피가 멎을까 싶으면 다시금 새로운 핏물이 스며들었다. 자신의 내벽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고 있을지, 윤수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만이 뇌리를 엄습했다.

“하. 기분 좋, 읏. 좋아요. 아.”

“너 지금 나랑 왜 하고 있는 건지 알지.”

“그야. 저랑 하고 나서. 흣. 강유진 씨랑 저 떠올리면서 한다고.”

“그럼 오빠 소리 해 봐. 듣고 싶으니까.”

귓가에서 얼굴을 떼어낸 윤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 입 밖으로 허망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반신에서 질척이는 마찰음이 생생하게 시트 위를 울렸다. 부어오른 점막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경련했다.

처음부터 와이프 얘기는 핑계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목적은 단출했다. 그냥 윤수를 안고 싶었던 거다. 복잡하게 와이프 핑계를 댄 건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이 상황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싶어서였을 거다. 지난번에 회사에서 정 실장과 무의미한 연극을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불필요한 상황이나 사연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윤수를 끼워 맞춘다. 그저, 윤수에게 보이기 위해서다. 나는 너를 위해 이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는 걸 그는 그런 식으로 보여줬다.

안 할 거야? 안 쪽 끝까지 밀려든 귀두가 점막에 맺힌 생채기를 지분거렸다. 아앗. 갈가리 찢겨지는 것만 같은 느낌에 윤수의 목울대가 빠르게 전율했다. 또 다른 상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어 머릿속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혀 밑으로 들어찬 타액이 주르르 입가를 타고 흘렀다.

“오빠, 앗. 아프, 아프니까 그만 좀.”

“어차피 시키면 잘 하면서 왜 그렇게 시간을 끌어.”

“그래도. 읏, 아. 살살. 오빠, 제발.”

음경이 스치는 모든 부위들이 균열이라도 난 것처럼 얼얼했다. 완전히 윤수의 몸을 끌어안은 윤석이 벌어진 다리 사이에 제 하반신을 접착이라도 할 것 마냥 문질러댔다. 각기 다른 사람의 몸이 하나로 뭉쳐지는 것처럼 뱃속이 묵직해졌다. 성기는 완전히 속구멍 깊숙이 밀착된 상태였다. 오히려 나중에 빼는 게 더 힘들 것만 같았다.

제발, 이제 끝내도 되잖아요.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말인 지 울음인 지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얼굴은 더욱 몰골이 말도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지금 이순간의 자신은 앞으로 어느 순간에라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쓰레기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이었다. 어깨를 감싼 윤석의 손아귀 위로 간헐적으로 떨리는 윤수의 손이 올라갔다. 있는 힘껏 손아귀를 쥐어대자 불끈 솟아오른 혈관이 느껴졌다.

끝내고 싶어? 네가 뭘 했다고. 어둠 속에서 윤석의 입가에 연한 비소가 실리는 게 보였다. 억울했다. 윤석이 시키는 건 다 했다. 이 정도면 윤수로서는 거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포기한 것이었다. 탁한 숨소리를 뱉으며 눈물을 삼키는 윤수의 밑에서 윤석이 비슷한 텀을 두고 성기를 뺐다가 집어넣는 게 느껴졌다. 속도는 느렸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삽입의 순간에 성기의 주름이 직장의 튀어나온 돌기를 머금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어금니를 급하게 깨물었다.

“안에다 싸달라고 해. 그럼.”

“흣, 그런 걸 어떻. 아읏, 오빠. 좀.”

“어차피 할 거면서 또 시간 끄네. 오윤수.”

조롱조로 말을 건넨 윤석이 윤수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거기서부터 스르르 입술을 움직여 윤수의 입가까지 다가왔다. 맑은 침이 들어차 있는 입술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타액이 넘치는 입 안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안의 점막을 쓸어댔다. 입 안의 호수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윤석의 손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빨리 해. 입술을 떼어낸 윤석이 윤수를 무표정으로 내려다 봤다. 윤석의 음경이 장악한 다리 사이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윤수조차 만져 본 일이 없는 곳을 한계까지 집어삼킨 윤석의 것이 돼있었다. 살짝 돌아간 눈가에서 느릿하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허한 입 안으로 절망이 삼켜졌다.

“안에다 싸 주세요. 오빠.”

“더 크게 얘기해야지.”

나직하게 뱉어진 말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하반신의 움직임에 힘을 가하며 윤석이 단호하게 요구했다. 불끈한 성기가 직장 너머까지 치고 들어갈 것 같아 윤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손을 내밀어 윤석의 어깨를 쥐었다. 얼굴을 가져가 다시는 같은 말을 반복할 일이 없게끔 큰 소리를 터뜨렸다.

“안에다, 읏. 안에 싸 주세요. 하. 오빠.”

“그래. 착하네. 오윤수.”

윤석의 손아귀가 차분하게 윤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내 내벽 안에서 폭풍우처럼 고통이 몰아쳤다. 여전히 빠듯한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넓혀보려는 것처럼 쑤셔대는 이물감에 발끝까지 새삼 욱신거렸다. 흐읏. 턱밑으로 눈물과 타액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윤수의 머리카락을 쓸어대던 윤석의 손이 불현듯 부드러운 머리통을 한 손에 쥐었다. 다리 사이의 마찰음이 보다 커졌다. 철썩이는 소리에 귓속까지 아파왔다.

맛있긴 맛있네. 아버지가 환장하는 이유는 알겠어. 낮은 윤석의 읊조림과 함께 내벽 안에 더운 액체가 눅눅하게 들어찼다. 낙망 어린 윤수의 팔이 눈꺼풀을 덮었다. 맨살이 순식간에 눈물에 적어 축축해졌다. 진짜로 했다. 절반이긴 하지만 친형의 정액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기어코 했다. 죽고 싶었다.

괜찮아? 일어나. 오윤수. 씻고 약 발라줄게. 귓가에 찾아드는 윤석의 사뭇 다정한 언어가 비현실적이다. 무거워진 머리로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그 상태로 멈춰 있는 윤수를 윤석은 말없이 기다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팔을 떼어낸 윤수가 기운 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시선을 둔 곳에 반쯤 눈을 뜬 채 아동용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가 있었다. 머릿속에서 번뜩 번개가 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막 침대에서 일어 선 윤석이 윤수 쪽으로 물어왔다. 왜 그래.

식도를 타고 마른 침이 삼켜졌다. 다시 쳐다 본 아이는 눈을 감고 있다. 애매했다. 본 게 맞는 것 같은데, 아이의 반응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저 나이 대 애들은 일단 울고 봤을 것이다. 아니면 뭐 하는 것이냐며 물어보던가. 지나칠 정도로 범상하게 반응하는 아이의 태도에 윤수는 소름이 돋는 것만 같다.

왜 그러냐고. 오윤수. 보다 큰 소리로 한 번 더 물어오는 윤석을 보지도 않은 채, 윤수가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저 갈게요. 침대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빠르게 챙겨 입는 윤수를 보면서 윤석이 깊게 미간을 누볐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윤수는 듣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옷을 마저 챙겨 입은 윤수가 빠르게 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야, 오윤수. 빠르게 다가와 윤수의 팔을 휘어잡는 윤석의 손아귀를 거칠게 털어낸 윤수가 아동용 침대 쪽으로 흘깃 시선을 뒀다. 죽은 듯 숨을 참고 있는 아이의 작은 몸이 있다. 윤수의 목덜미가 짧게 공률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히 저 애는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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