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한남동 41-7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거실 천장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다. 늘어진 팔과 다리를 타고 불투명한 체액이 흘러내렸다. 열린 창문 틈으로 흘러드는 더운 바람을 견디다 끝내,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나부꼈다. 윤수야, 미안해. 종이에는 그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어머니를 닮아 둥글고 매끄러운 글자의 끄트머리에는 마침표가 없었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 * *
안 졸리냐. 입고 있는 상복에 있는 대로 향냄새가 밴 것만 같았다. 소매를 들어 옷가지에 묻어있는 냄새를 맡던 윤수의 곁에서 성훈이 거칠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뭐가. 심상하게 되묻는 윤수를 향해 성훈이 사뭇 고조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사흘이나 못 잤잖아, 안 졸리냐고. 윤수는 대답 대신 작은 상자에 담긴 어머니를 세게 움켜쥐었다. 안 졸려. 보지도 않은 채 성훈이 가져온 차 쪽으로 향하는 윤수의 뒤편에서 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는 게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나도 졸릴 리가 없었다.
뒷좌석 문을 열고 시트 위에 상자를 밀어 넣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트렁크 쪽으로 걸어가는 성훈이 보였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무는 것을 보고는 윤수가 팔을 뻗었다. 쳐다보던 성훈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넌 왜.”
“나도 한 대 줘.”
“이 새끼야, 끊었다며.”
“안 되냐.”
윤기 없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윤수를 보면서 성훈은 대답 대신 머리를 뻑뻑하게 만져댔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막 입에 물었던 담배를 건넸다. 손가락으로 받아 입에 가져가는 윤수를 향해 다소 씁쓸한 잔소리가 뒤따랐다. 아껴 펴, 새끼야. 돗대야.
픽 웃으며 성훈이 건네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에 가져가 한 모금 삼켰다. 눈앞에서 자욱하게 흐드러지는 연기가 한여름의 안개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닥쳐있는 상황이 현실일 리 없을 테니까. 머릿속에서 어미만 바꾼 여러 형태의 문자가 정처 없이 맴을 돌았다. 어머니가 죽었다, 정말로 죽었나. 하지만 죽었다, 그래서, 죽은 게 맞다면.
어머니가 없는 자신을 규정하는 게 어렵다. 윤수의 어머니 이세영. 바로 사흘 전까지는 이세영의 아들, 오윤수였다. 이제는 그 이세영이 없다. 어떤 수식어로 스스로를 포장할 수 있을지 윤수는 가늠하는 것조차 어렵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윤수에게는 조부모도, 형제도 없다. 친척이나 사촌도 없다. 같은 혈맥을 지닌 소속 집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혼자다. 대서양에서 홀로 표류하는 부표처럼 완전하게 고립된 존재.
반쯤 피우고 난 담배를 성훈에게 건네고, 다소 서늘한 아침 공기에 목덜미를 움츠리며 차 범퍼에 몸을 기댔다. 어깨에 서리가 내린 것 마냥 자꾸만 오싹한 기운이 들었다. 차가운 숨을 내쉰 뒤 고개를 든 곳에 처음 보는 남자의 실루엣이 있다. 검은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의 남자. 햇빛이 좀처럼 들지 않는 나무 그늘아래, 남자의 이목구비가 제법 뚜렷하게 빛난다.
더럽게 잘 생겼네.
오윤수 씨 되시죠. 멀찍이서 남자가 윤수를 향해 말을 던졌다. 온기를 품은 저음이 동굴 같은 귓속에서 지긋한 여운을 남겼다. 네. 영문을 알 수 없어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는 윤수를 향해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얼굴은 지금 자신이 보는 것이 실존하는 인물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입체적인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짙은 눈썹 밑에 엷게 쌍꺼풀을 머금은 눈이 있고, 우뚝하게 솟은 콧날 아래에 은은한 호가 맺힌 입매가 존재한다. 보고 있자니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얼굴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명함입니다. 윤수의 앞에 다가온 남자가 가벼운 인사와 함께 명함 하나를 건넸다.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내려 명함에 새겨진 글자를 봤다.
법무법인 윤민. 대표 변호사 오윤민. 법무법인이 본인 거라는 건가. 젊어 보이는데. 보통은 둘 중 하나일 거다. 인맥도 실력도 없다 보니 검찰이든 기존 로펌이든 거들떠도 보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혼자 차렸거나, 부모 잘 만난 금수저라서 일찌감치 남의 눈치 안 보고 제 사무실 차렸거나.
애초에 변호사가 갑자기 왜 찾아왔을까. 멀뚱히 명함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윤수를 보면서도 변호사는 왜 명함을 받지 않느냐는 둥의 재촉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한다는 얼굴로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아는 대상과 마주한 것처럼, 여유까지 느껴졌다.
무슨 일이신데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윤수 대신 성훈이 볼멘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장례식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존재가 시신을 화장하자마자 나타난 것을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사실 그건 윤수도 마찬가지였다. 기묘한 등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경계심은 들지 않았지만. 홀대 비슷한 응대에도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여유 있게 웃을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기존에 만들어 둔 유언장을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윤수 씨.”
“유언장이요? 그런 게 있었나요.”
“확인해 보시겠어요? 여기.”
남자가 들고 있던 갈색 서류봉투를 윤수 쪽으로 건넸다. 밀봉을 풀고 찬찬히 훑어봤다. 어머니의 신분을 증빙하는 복잡한 서류는 차치하고, 요점인 유언장부터 봤다.
제 명의로 전 남편 오승조 씨가 챙겨준 위자료 중 일부인 20억 원을 제가 사망한 후 아들인 오윤수에게 상속합니다. 다만 해당 시점 윤수의 나이가 만 24살 이하일 경우 아직 대학생인 점, 그리고 제가 사망한 후 혼자 지내는 것에 적응하지 못할 점 등을 고려해 사망 후 일 년 간 전 남편 오승조 씨에게 윤수를 위탁하겠습니다. 일 년간의 위탁 양육이 끝나면, 해당 법무법인은 윤수에게 상속금을 지급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유언장은 제가 사망한 즉시 효력을 발휘합니다.
읽고 난 윤수의 속눈썹이 흐리게 떨렸다. 전 남편이라고. 윤수가 아는 아버지 이외에 또 다른 남편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유산으로 주어진 20억 원도. 어머니에게 그런 거액의 현금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사실이다. 돈의 출처는 오승조. 어머니의 전 남편. 그리고 윤수의 위탁 양육을 맡게 된 사람.
보고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종이를 쥐고 있던 윤수의 손톱이 안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지그시 자국을 새겼다. 금방이라도 종이를 떨어뜨릴 것처럼 불안정하게 쥐고 있는 윤수의 손아귀를 변호사가 차분하게 움켜잡았다. 느릿하게 손등을 쥐어오는 손은 따뜻함을 넘어 뜨겁기까지 했다. 달구어진 혈관을 타고 손가락이 붉어지는 것만 같았다.
당혹스러우시죠, 이해합니다. 안온하게 위로를 건넨 남자가 윤수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서류를 스르르 빼냈다. 여전히 굳어 있는 윤수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들고 있던 봉투에 종이를 밀어 넣었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윤수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다시 마주쳐 온 얼굴을 보면서 윤수는 더 이상 잘생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방금 전 아주 짧게 접한 얼굴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벌써부터 익숙했다. 닮은 연예인이 있는 건가. 머릿속으로 몇 안 되는 아는 연예인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윤수 씨. 편하게 생각 하십시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윤수 씨를 돌봐 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일 년간의 위탁 양육이 끝나면 유산으로 20억 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오승조라는 분을 제가 잘 몰라서요.”
“아니요,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TV에서든, 신문에서든. 못 믿을 만한 분은 아니니까요.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승조 씨 집에 가지 않고 유산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망설이다가 뱉은 윤수의 말에 남자가 짧게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흥미로움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알던 꼬마가 갑자기 어려운 숫자놀음에 대한 답을 물어왔을 때, 이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하며 기특해하는 어른을 연상케 하는 미소였다.
“일단 재산권은 향후 일 년간 오승조 씨한테 귀속됩니다. 집에 가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오승조 씨를 설득하거나, 오승조 씨 신변에 특별한 문제가 생겨서 유산을 관리할 수 없게 되거나.”
“특별한 문제라고요.”
“예컨대 오승조 씨가 병에 걸려 입원을 한다든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휩싸여 구속이 됐다든가. 이런 문제들 얘기하는 겁니다. 아, 사망도 있겠네요.”
마지막 말을 하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웃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미소 띤 얼굴이 제법 보기 좋아 윤수는 그 표정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절로 유보하게 됐다.
윤수 씨 24살이시잖아요.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에 어려운 나이가 아니니까. 빠른 시일 안에 결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설명을 마친 남자가 주머니에서 메모장 하나를 건넸다. 새하얀 종이 위로 짧은 글귀가 비쳤다.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41-7.
“여기가 오승조 씨 자택입니다. 결정이 서면, 이쪽으로 와 주세요. 혹시 가는 게 불편하거나 하면 언제든지 저한테 연락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서류는 담당 변호사로서의 의무가 있으니 위탁 양육기한이 만료될 때까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또 궁금한 점 있으신가요.”
“지금은 아무 생각이 안 들어서요.”
그 말만 내뱉고는 멍하니 서 있는 윤수의 머리통에 남자의 손이 찾아왔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몽글몽글한 거품처럼 나른했다. 처음 본 존재가 강아지라도 만지는 양 저를 다루고 있는데, 불쾌하다는 생각보다는 그 손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이들이 머리 만져주는 걸 좋아하는 게 이래서인가 보다. 느릿하게 흘러내리는 손가락을 느끼면서 윤수는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가던 눈꺼풀이 불현듯 그 존재의 부재와 동시에 화들짝 위로 들렸다. 사흘이나 못 자다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노곤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또 뵙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가 몸을 돌렸다. 걸어가는 실루엣에 맺힌 그림자가 제법 길었다.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정적으로 흘러갔다. 뭐야, 저 새끼는. 옆에서 쳐다보고 있던 성훈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짧게 혀를 찼다.
집에 오자마자 포털사이트에 오승조를 검색했다. 인물소개 란의 첫 페이지에 그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만 49세. 쉰 살이라는 거지.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꽤나 젊어 보인다. 주요 이력으로는 러시아 광물 회사 설립. 기업 가치만 현재 약 10조 원. 광물 회사 설립 전에는 국내 최대의 제조기업인 성원전자에서 초고속 승진으로 임원 자리를 꿰찬 이력이 있다.
마우스를 차곡차곡 클릭해가며 인터넷에 올라온 오승조의 다양한 기록을 읽는다. 성원전자 상무로 있을 때 국내 언론과 인터뷰했던 기사, 러시아 광물 회사의 국내 법인을 설립하며 기자간담회를 할 때의 영상, 국내 아동단체에 10억 원을 기부했다는 미담 등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모니터에 들어있는 오승조는 늘 사근사근하게 웃고 있다. 미소가 맺힐 때마다 눈가에 잡힌 주름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는 듯 매끈한 피부 위에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가 채워져 있다. 공백이라는 게 좀처럼 없는 얼굴. 전형적인 미남이다.
쥐고 있던 마우스를 뒤집고는 책상 위에 고개를 묻었다. 어머니가 참 대단한 남자랑 결혼을 했던 모양이다. 저 정도 되는 사람에게 뭐가 아쉬워서 이혼을 했을까. 물론 어머니가 워낙 미인에다 명문대까지 나온 재원이었던 건 맞지만. 윤수를 키울 때에는 거의 하루 종일 집에 머물러 TV를 보거나 책 읽는 것에만 열중하던 평범한 여자였다. 어머니가 일을 하는 걸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보통의 삶을 살아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여윳돈이 늘 있어서, 윤수는 한때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그게 다 오승조의 돈이었던 거다. 오승조 위자료로 그렇게 살아왔던 거다. 어머니도, 윤수도.
이혼, 왜 했을까. 눈을 감고 완연한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과거를 가늠해본다. 따져보면 어머니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언제나 현재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윤수에 대해.
오승조, 오승조. 한참 동안 뇌까리다 보니 제법 낯익게 다가오는 이름이다. 봤던 이름인 것 같기도 하고. 왜지, 언제 봤지. 한참 동안 기억을 짚어보던 윤수는 문득 단 한 번 직접 본 적이 있는 자신의 주민등록등본을 떠올렸다.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오승조라는 이름. 그래 봤자 어머니가 낚아채듯이 가져가는 바람에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윤수가 좀 더 의심이 많았다면 직접 끊어서라도 확인했을 텐데, 그때는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알고 어릴 때 돌아가시긴 했지만 아버지가 오 씨 성을 가진 누구다, 라는 것 정도도 알고 있었으니까.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 있던 게 진짜 오승조일까. 정말 오승조라면, 왜 내 호적에 그 이름이 있었던 거지. 어둠에 가로막혀 있던 시야가 불현듯 환해졌다. 익숙하기 그저 없는 흰색 벽지를 눈으로 어루만지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졸렸던 감각이 태초로 돌아간 것처럼 오롯해졌다. 아무래도 그 집에는 가보는 게 맞을 것 같다.
2.
주소지는 번화가로부터 꽤 떨어져 있었다. 지하철역에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데다가, 군데군데 언덕이 많아 윤수는 욕지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뭐 이딴 곳에 살까. 좋은 집 다 놔두고.
스마트폰 지도가 표시하는 대로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어디선가 짙은 솔 향이 풍겼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머금은 솔 향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푸르름이 깃들어 있었다. 깊은 산 속에 들어온 것처럼 온몸을 압도해오는 향기. 주변을 살펴봤지만, 소나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독 주택이나 낮은 건물이 이곳저곳 들어차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담장이 있었다. 곳곳에 오래된 덩굴이 얼기설기 맺혀진 높다란 담장. 기다랗게 이어진 담장은 안쪽의 공간을 빈틈없이 에워싸는 거대한 성벽을 연상케 했다. 스마트폰 지도 속에서, 이 담장 너머에 새겨진 붉은 점이 뚜렷하게 빛났다.
입구를 찾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담장을 따라 걷고 걷다 보니 단단한 철장으로 무장한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 너머에는 서울 한복판에 어떻게 이런 집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공간이 존재했다. 웬만한 초등학교 운동장 절반 크기의 정원에는 같은 간격으로 정돈된 수풀이 둥글게 모여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주변의 모든 사물을 압도할 것처럼 뻗어 있는 커다란 소나무가 존재했다. 꼿꼿하게 가지를 들고 있는 소나무에서는 한없이 물을 뿜어내는 분수처럼 공격적인 솔 내음이 풍겼다. 온몸의 세포가 솔 향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집은 이층집이었다. 면적이 초등학교 건물의 절반 정도는 될 듯 했다. 저 정도면 일단 안에 있는 방이 열 개는 가볍게 넘을 거다. 가격은 또 얼마나 할까. 대기업 회사원이 평생 뼈 빠지게 벌어도 못 살 정도인 건 확실한데, 도무지 체감이 되지 않는다. 윤수의 인생에서 실제로 발을 들여보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해 본 일 자체가 없는 집이다.
하염없이 집이 있는 쪽을 쳐다만 보던 윤수의 옆쪽으로 세단 하나가 조용히 밀려와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단단하게 자리 잡은 굵직한 눈썹이나 입매가 제법 남자답다. 윤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다소 딱딱하게 말을 건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어, 그게. 어머니가.”
윤수의 입술이 짧게 떨어졌다가 다시 다물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갑자기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오승조라는 남편이 있었고. 그 남자가 이혼할 때 준 위자료 중 일부를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겼으며, 그걸 받기 위해서는 오승조라는 사람의 집에서 일 년 동안 머물러야 한다. 이 길고 복잡한 사연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이 윤수로서는 괴롭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그 와중에 윤수를 향한 남자의 집요한 시선 때문에 더욱 입을 여는 걸 망설이게 됐다. 애초에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한동안 말이 없는 윤수를 쳐다보던 남자의 눈살이 가늘게 찌푸려져 갔다. 뭔가 발견했다는 얼굴이다. 까매진 눈동자가 보다 면밀하게 윤수의 얼굴을 훑는다. 관찰당하는 기분이 부담스러워 윤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 오윤수지. 갑작스럽게 들려 온 제 이름에 윤수의 고개가 번뜩 들렸다. 하, 진짜. 확신했다는 얼굴의 남자가 갑자기 차 뒷문을 열었다. 묵직한 소리에 윤수의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완전히 바닥에 붙은 것처럼 서 있는 윤수를 보면서 남자가 건조하게 말했다. 타. 같이 들어가게.
뭐지. 갑자기. 들릴 듯 말 듯 하게 감사하다는 얘기를 내뱉고 일단 안에 탔다. 윤수가 앉자마자 차 문을 닫은 남자는 두텁게 닫힌 문의 무게만큼 묵직하게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시트 위에 내려앉았다. 특별하게 뭔가를 한 것이 아닌데, 차가 문 앞에 서자마자 자동적으로 철문이 열렸다. 번호판 인식 시스템이 있는 모양이었다. 멀찍이서 보이던 붉은 표면의 저택이 점점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집 앞의 주차공간에 차를 댄 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한 남자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윤수도 따라서 나왔다.
특별한 언질도 없이 남자가 성큼성큼 집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조용히 뒤를 따르는 윤수를 등에 둔 채 남자가 현관 앞의 기기에 지문을 인증했다. 기계음과 함께 문고리가 풀리는 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문을 젖히고 안쪽으로 향하던 남자가 힐끔 윤수 쪽을 봤다. 들어오라는 것처럼.
진짜 똑같이 생겼네. 현관 앞에서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남자가, 윤수의 앞에 슬리퍼 한 켤레를 놔주며 입을 열었다. 사뭇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윤수가 물었다.
“뭐가요.”
“너네 어머니하고.”
“뭐가 닮아요, 그런 소리 한 번도 안 들어 봤는데. 그나저나 우리 어머니 아세요?”
자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소개도 없이 윤수에 대해 다 안다는 투로 말을 꺼내는 남자가 어딘가 불쾌했다. 다소 퉁명스럽게 물어오는 윤수의 말에 남자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 뒀다. 저 편에서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젊은 여자가 빠르게 거실을 가로질러 왔다. 상냥하게 웃으면서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무님, 일찍 오셨네요.”
“어. 그렇게 됐어.”
“옆에 계신 분은.”
“아냐, 알 거 없어.”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손을 내저으며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뭐야, 예의 없게. 마른 침을 삼킨 윤수가 남자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널찍한 거실 곳곳에 절로 시선이 닿았다. 거실만 한 80평쯤 될 것 같았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 조명을 받아 유리처럼 하얗게 빛났다. 한 쪽에는 열 명쯤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법한 두터운 가죽 소파와 고급스러운 윤기를 머금은 테이블, 대형 TV가 있다. 다른 한 쪽에는 대형 냉장고 다섯 개와 부엌, 그리고 8인용이나 10인용 정도로 보이는 목재 테이블.
공백이 될 법한 공간에는 커다란 난이나 물고기가 헤엄치는 수조 따위를 장식용으로 뒀다. 가장 눈에 잘 띄는 벽 위편에 네 개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두 개는 흑백 사진, 다른 두 개는 컬러. 모두 남자들. 그 중에서 가장 오른편에 있는 얼굴은 윤수가 어제 인터넷을 검색하며 본 그것이다. 오승조.
“저기, 오승조 씨는 언제 오세요.”
“회장님이라고 해라.”
“네, 뭐. 그러니까, 오 회장님.”
“언제 올지는 나도 몰라. 워낙 본인 일정을 공유 안 하고 사는 사람이라.”
“그럼 제가 여기 온 이유가 없는데.”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윤수의 옆에서 남자가 잠시 낮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할 말은 있는데, 차마 내뱉기가 어려워 마지못해 변환한 형태의 숨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윤수까지 불편해졌다. 남자 쪽을 일별하고는 천천히 거실에 있는 소파 쪽으로 갔다. 일단은 손님이니까, 앉아 있어도 되겠지. 딱딱해 보이는 재질의 소파였는데 정작 앉고 나니 푹신하기 그지없었다. 손바닥이 닿은 표면에 정성들여 가공한 동물의 매끈한 가죽이 느껴졌다. 금세 몸이 나른해졌다.
금방이라도 잠이 올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고개를 드니 멀찍이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가 보였다. 다부진 이목구비 밑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 너머로 수컷 특유의 위압감이 덮쳐온다. 권위나 권력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생김새다. 윤수는 스스로가 그런 쪽의 얼굴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런 느낌의 남성상을 때때로 부러워했다. 편하게 살았겠네. 생각을 마치고 난 윤수의 눈꺼풀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제도 결국 제대로 못 잤으니, 무려 나흘 동안 제대로 된 취침을 못 한 셈이다.
한계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과거에 얽매어 날서 있기만 하던 감각이 비로소 무너졌다. 형용할 수 없는 피로함이 온몸을 잠식해 온다. 더 이상 4일 전의 시간에 머물러선 안 된다며 채근해 오는 것처럼, 온 신경을 닦달해 오는 두개골의 명령에 윤수는 결국 완전히 눈을 감고 시트 위에 머리를 묻었다.
윤수는 또 장례식장에 있었다. 어머니의 빈소는 대체로 한산했다. 군데군데 이가 나간 접시처럼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유일하게 자리를 차지하던 두 명의 중년 남자가 떠나고, 완전히 허전해진 빈소에서 성훈과 마주본 채 테이블에 앉았다. 좀 먹어라. 윤수의 앞에 식기를 놓아주면서 성훈이 재촉했다. 고장 난 것처럼 붉은 육개장 육수 위에 드리워진 자신의 얼굴만 보는 윤수의 앞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훈의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윤수의 볼을 툭 건드렸다. 네 몸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흘을 살아 있어. 답답하다는 양 내뱉은 성훈의 말에 윤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7년을 봐 온, 익숙하기 그지없는 친구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윤수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말을 꺼냈다. 야, 성훈아. 막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놓은 절편을 집은 성훈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어, 왜.
나, 사실 잘못한 거 있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무명의 손길에 눈을 떴다. 뚜렷해지는 시야에 처음 보는 커다란 수족관이 들어왔다. 안에서 헤엄치는 크고 작은 물고기가 쫓고 쫓기는 것처럼 가쁘게 버둥거린다. 멈춰있던 사고가 물고기의 움직임을 따라 느릿하게 재개됐다. 아, 여기 오승조 집이었지. 손을 들어 무심코 이마를 매만지니 여전히 윤수의 머리카락에 머물러 있는 손이 닿았다.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봤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듯한 남학생 한 명. 입고 있는 셔츠는 누가 봐도 교복이다.
윤수 형. 완전히 눈을 뜬 윤수를 보면서 남학생이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해맑게 흐드러진 눈매가 제법 매력적이다. 아직 생김새가 자리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좀 더 크면 꽤나 미남 소리를 들을 법한 인상이다. 그런데 날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남자도 대뜸 내 이름부터 물어오지 않았었나. 다소 몽롱한 상태로 고개를 가누던 윤수를 남학생이 대뜸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을 타고 바닐라 향 같은 것이 물씬 풍겨왔다.
형, 이제 여기서 사는 거죠. 한동안 윤수의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난 남학생이 살짝 몸을 떼어내고는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 여기서 산다고. 윤수는 거기까지는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집에 온 건, 일단 자신과 오승조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 다음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24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자의 집에서 다 큰 성인 남자가 얹혀사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피도 섞이지 않았고, 사실상 아예 모르는 사이인데.
글쎄, 사는 건 잘 모르겠는데. 나지막하게 말한 윤수의 말에 남학생의 얼굴이 살포시 일그러졌다. 실망한 얼굴이다. 키는 윤수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는 더 큰 것 같은데, 하는 짓은 완전히 애였다. 이걸 어떻게 무마해야 하나. 윤수는 어린 애를 다루는 일에는 통 재주가 없었다. 아래로든 위로든 형제 없이 지내온지라 동갑내기 친구가 아니면 편하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감정 표현에 솔직한 어린 애는 더욱 대하기가 낯설었다.
좀 놔 줄래. 더듬더듬 남학생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여전히 서운한 얼굴의 남학생이 마지못해 윤수로부터 다소 떨어졌다. 얘는, 이 집 앤가. 오승조라는 사람 아들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오승조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고개를 들어 다시 남학생 쪽을 응시했다. 윤수와 눈이 마주친 남학생이 태연하게 웃어왔다. 쉽게도 눈웃음을 새기는 눈매에 어딘가 애정이 담겨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윤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처음 봤는데, 애정을 품을 수가 있나.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아까 뚫어져라 자신을 보던 짙은 인상의 남자는 없다. 거실이 텅 비어 있다. 꽤 잤던 모양이다. 몸을 돌리고 있는 윤수의 팔을 남학생이 아프지 않게 끌어당겼다. 절로 남학생 쪽으로 몸이 돌아갔다. 형, 여기서 살면 안 돼요? 얘는 나를 언제 봤다고 이런 얘기를 할까. 다소 혼란한 얼굴로 윤수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누구야? 거기.”
문득 저 편에서 두텁게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새된 마찰음을 타고 날카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윤수의 귀에 꽂혔다. 윤수와 남학생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다소 신경질적인 얼굴로 귓가의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내는 남성은 윤수의 또래 정도로 보였다. 우뚝 솟아있는 커다란 키가 한눈에 띄었다. 매섭지만 잘 다듬어진 이목구비는 미묘하게 오승조를 닮아 있었다. 얘도 이 집 아들이구나.
윤수 형이야, 형. 빙글빙글 웃으며 건네는 남학생의 말에 남성이 살짝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일말의 당혹감이 비쳤다. 오윤수라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어오는 남성의 말에 남학생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윤수 형 이제 여기서 살 거야. 윤수의 입술이 짧게 벌어졌다.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다급하게 남학생의 손목을 휘어잡는 윤수의 뒤편에서 남성이 짧게 헛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 진짜. 아주 빼다 박았네. 휙 몸을 돌려 걸어가는 남성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목덜미에 더운 땀이 맺히는 것만 같다. 빼다 박았다고, 누구를. 머릿속에 아까 정문 앞에서 함께 차를 타고 왔던 남성이 떠올랐다. 이 집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꽤나 망설이다가 꺼낸 것처럼 내뱉던 한 마디도. 진짜 똑같이 생겼네. 어머니랑.
저 사람도 알고 있는 건가, 어머니를. 뒤늦게 찾아온 궁금증에 빠르게 몸을 일으킨 윤수를 뒤에서 남학생이 와락 끌어안았다. 순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악력이 제법 셌다. 일으켜졌던 윤수의 몸이 주르르 시트 위에 앉혀졌다. 왜 그래. 다짜고짜 자신을 방해하는 남학생이 거슬려 차갑게 묻는 윤수 쪽으로 조곤조곤한 언어가 찾아들었다.
“윤혁이 형, 지금 기분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말 걸지 않는 게 좋아요. 엄청 무서운 형이거든요.”
“쟤 이름이 윤혁이야?”
윤수의 물음에 남학생이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무서운 형이라고.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래 봤자 뭐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윤수는 날라리 남학생들이라면 완전히 도가 터 있었다. 제법 평범하게 고등학교 3년을 보냈지만, 절친한 친구인 성훈이 학교에서 알아주는 양아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성훈은 학교에서는 윤수와 둘이 얌전히 있다가도 방과 후에는 술 담배를 기본으로 하는 무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온갖 곳에서 시비질을 일삼았다. 지금은 타지 않지만, 한 때는 지독한 오토바이 마니아였다. 윤수가 오토바이를 싫어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몇 번인가 성훈이 태워줘서 탔는데, 미친놈처럼 위험하게 밟아대는 통에 저 세상에 갈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어서다.
죽으려면 너 혼자 죽어, 씨발 놈아. 막 3학년이 되고 덤프트럭에 치일 뻔 했던 날, 윤수는 길바닥에 서자마자 헬멧을 집어 던지면서 성훈에게 쌍욕을 했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뒤에 성훈은 오토바이를 팔았다. 그리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미친 듯이 공부를 몰아서 하더니 2학기 무렵에는 전교권에서 놀던 윤수와 비슷한 등수까지 성적을 끌어올렸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갔다. 윤수는 가끔 그 사실이 눈물 날 정도로 억울했다. 3년을 공부한 자신과, 1년을 공부한 김성훈이 같은 아웃풋을 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윤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학생이 뭔가를 더 얘기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아까보다 더 온기를 담아 윤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보다보니 낯익게 다가오는 미소다. 정체 모를 기시감의 근원을 찾아 잠시 기억을 헤매던 끝에는 어제의 변호사가 있었다. 웃는 얼굴이 좀 닮은 것도 같고. 그 변호사가 이 애랑 무슨 연관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불현듯 현관이 벌컥 열리더니 안쪽으로 들어온 덩치 큰 남성이 거실 곳곳에 스며들 수 있게끔 큰 소리로 외쳤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직원 대 여섯이 우르르 거실로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윤수와 함께 있던 남학생이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여직원들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거실에 모이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봤던 묵직한 생김새의 남자도, 윤수 또래의 키 큰 남자도 저벅저벅 걸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에 병렬로 섰다. 질서정연하게 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구 쪽에 시선을 두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풍경이 아니다.
다소 흐려진 동공으로 그들을 관조하던 윤수의 귓가에 뚜렷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로 잰 것처럼 절도가 있다. 덩치 큰 남성의 옆 편에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이 와서 선다. 윤수 쪽에서 봤을 때는 거구의 남성에게 가려진 채라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신고 있던 구두를 하나하나 벗어내는 남성의 앞으로 빠르게 여직원 한 명이 다가와 전용 슬리퍼를 내어준다. 저런 것까지 일일이 다 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나. 요즘 같은 시대에. 소파를 짚고 있던 윤수의 손가락이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느리게 날숨을 뱉으며 고개를 든 남자가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옆태. 윤수는 단박에 그를 알아봤다. 저 사람이 오승조 회장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오 회장이 앞의 존재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양 굵직하게 혀를 찼다. 특별히 얼굴을 구기거나 한 것도 아닌데,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멀리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온 거실을 압도했다.
윤수는. 오 회장의 입 밖으로 짤막하게 나온 한 마디에 윤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나온 것이 제 이름이 맞는 지를 바로 인지하는 게 어렵다. 사실상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다짜고짜 윤수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숨죽여 오 회장을 쳐다보는 윤수의 귓속으로 보다 확고한 언어가 파고들었다.
“윤수는 왜 아직이냐고.”
“윤수, 여기 있습니다.”
진짜 내 이름이다. 완전히 경직되다시피 한 윤수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소파에 주저앉아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있던 윤수의 허리를 끌어안아 바닥을 딛게 하고는, 차분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당혹감에 젖은 윤수의 고개가 위쪽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시선이 마주쳐진 존재가 얼핏 웃고는 윤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제 만났던 변호사. 오윤민.
진짜 와줬구나. 오 회장의 얼굴이 돌연 유해졌다. 원하는 걸 찾았다는 안도감, 그로 인한 만족감이 현현하게 비친다. 왜 저렇게까지 기뻐하는지 윤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변호사에 살짝 등을 기댄 채 망연하게 서 있는 윤수를 향해 오 회장이 걸어왔다. 윤수의 양 볼을 손아귀에 쥐고는, 한동안 흡족하게 내려다봤다.
“고맙다, 와 줘서.”
“아니요, 저는.”
아직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오 회장이 윤수의 몸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어깨를 다독이는 손에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오 회장의 신체가 닿은 곳을 타고 전기라도 흐르는 것처럼 온 세포가 파르르 떨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윤수를 품에서 떼어 낸 오 회장이 인자하게 말을 건넸다.
“편하게 지내렴.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테니까. 지내기 나쁠 건 전혀 없다. 여기 네 형제들도 잔뜩 있고.”
“형제요? 무슨 형제요.”
형제.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 윤수는 외동이었다. 혼자로 태어나 혼자 어머니 밑에서 컸다. 외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조차 할 일이 없었다. 윤수에게 있어 스스로가 외동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들은 형제라는 단어는 신기루처럼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오 회장의 입만 쳐다보는 윤수의 목덜미에 오 회장의 따스한 손길이 닿았다. 고개를 돌린 오 회장이 거실에 나와 있는 세 명의 남자를 차례로 봤다. 윤수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짙은 인상의 남자와 키가 크고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그리고 천진한 얼굴의 남학생. 이어 윤수의 뒤편에 서 있는 변호사까지. 네 명의 남자들에게 한 번씩 시선을 둔 오 회장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여기 있는 애들, 다 네 형제야. 너하고 어머니가 같단다. 전부.”
순식간에 윤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24년간 기록해 온 자신의 혈연관계가 순식간에 부정당했다. 지리멸렬하게 흩어진 과거의 기록 위에 새로운 글자가 새겨졌다. 형제가 있었다. 심지어 네 명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