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를 나와 한첨을 뛰던 이영이 갑자기 푸시식,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이영을 미친 놈 보듯 빙 둘러 피해갔지만 이영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미쳤구나. 나 진짜 미쳤어.
강현이 제게 말을 하는 내내 이영의 눈은 강현의 입술만 쫓고 있었다. 저 입술로 키스했었는데, 저 입술로 윗입술을 빨았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강현이 제게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강현이 옆자리에 앉은 이후부터 심상치 않게 두근거리던 심장은 강현의 손이 제 머리에 얹는 순간 쿵, 하고 발치로 한 번에 떨어져 내렸다.
'나 진짜 왜 이러지.'
울상을 한 이영이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영은 지금 사랑에 빠진 거였다.
* * *
기웃기웃.
가게 안을 기웃거리던 이영이 뒤늦게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하고 붙어있던 가게 문에서 황급히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은 전혀 가게 쪽으로 가려던 것이 아니었다는 듯 노인네마냥 손을 앞뒤로 휙휙 흔들면서 혼잣말을 크게 중얼거렸다.
'아, 날?씨 좋~다.'
하지만 지금 시간은 저녁 10시. 야밤에 별 미친놈 다보겠다는 표정으로 행인은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던 이영은 행인이 골목을 꺾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가게 문 쪽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웃거려도 겉에서는 검은 색 문 안쪽의 전경이 전혀 보이질 않고,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냥 집에 갈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이영은 이내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사실 여기서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나 싶었다.
rainbow. 흰 바탕에 색색의 글씨로 써진 간판을 한 번 더 확인한 이영은 붙잡은 문고기를 힘차게 밀었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 무색하게도 가게 안은 보통의 술집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들어서기 무섭게 짙은 화장을 한 남자들이 달려드는 게 아닐까. 막 남자들이 옷을 벗으면서 스트립쇼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끈적끈적하게 남자들끼리 붙어있는 난교파티가 열리고 있는게 아닐까. 이영이 했던 온갖 걱정들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실 남자들이 달려들기는 커녕 오히려 손님을 맞아주는 점원도 없었다.
'어서오세요.'
계속 그렇게 서있는 것도 뭣해서 일단 슬금슬금 bar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제야 bar너머에 있던 바텐더가 이영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깔끔하게 흰 남방에 검은 바지, 그리고 짧은 머리의 바텐더 역시 이영이 상상했던 게이바 바텐더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다소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이영은 bar에 딸린 의자에 엉덩이를 내렸다.
걸어오는 동안, 그리고 앉으면서 슬쩍 둘러본 가게 안은 확실히 남자들 비율이 높았다. 물론 이영이 상상했던 남자끼리 입술을 부비거나 몸을 겹치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혼자 오셨어요?'
올 것이 왔구나. 눈이 휘둥그레진 이영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혼자 왔는데 왜요?!'
그리고 막 이영의 앞에 메뉴판을 놓아주려던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이영은 그것이 단순히 손님의 수를 파악하기 위한 직원의 아주 평범한 물음이었음을 깨달았다.
'한 분이시군요.'
조용히 대꾸한 바텐더가 메뉴판을 이영의 앞에 놓아주었다. 흠흠, 무안해진 이영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메뉴판에 얼굴을 묻었다.
'소주, 아니 그냥 맥주 주세요.'
칵테일 일색인 메뉴판에서 대충 눈에 익은 것을 골랐다.
'잠시만요.'
바텐더가 메뉴판을 거둬갔다.
어색한 기분에 테이블에 팔을 올려보기도 하고 턱을 괴어보기도 하다가 이내 얌전히 제 무릎에 올려놓았다. 제가 생각했던 그런 이상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초조하고 불안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여기요.'
다시 나타난 바텐더가 이영의 앞에 맥주병과 콘칩이 담긴 그릇을 놓았다.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 기분에 무릎을 달달 떨고 있던 이영이 냉큼 맥주병을 붙잡았다. 긴장한 탓인지 입안에 침이 바싹 마르고 갈증이 일었다. 끝까지 채운 셔츠 단추 때문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래도 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푸식, 하고 뚜껑을 따서 곧바로 들이켰다. 꿀꺽꿀꺽꿀꺽, 입도 떼지 않고 한 병을 다 비운 이영이 맥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한 병 더 주세요.'
두 번재 맥주병은 그래도 반쯤 남겼다. 맥주 두 병에 취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술 먹으로 온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한 이영이 맥주병을 놓고 슬그머니 앞에 놓은 콘칩을 집었다.
아작.
오랜만에 먹으니 꽤 맛있네.
아작, 아작, 아작, 아작. 처음엔 소심하게 하나씩 집어먹던 것이 점점 속도가 붙었다. 조그만 그릇에 들어 있던 것이라 콘칩은 금방 동이 났다. 아쉬운 듯 그릇을 마지작거리고 있으니 바텐더가 물었다.
'더 드릴까요?'
'아. 그래도 될까요?'
조용히 그릇을 가져가는 바텐더의 등짝을 보며 되게 친절하네,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혼자 왔어요?'
낯선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그리고 옆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빙긋, 하고 마주 웃는 얼굴에 그제야 제가 있는 곳이 게이바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런 덴 처음?'
'......네.'
다소 멍청하게 보고만 있는 이영을 위해 남자가 한 번 더 물었고 이영도 조금 늦긴 했지만 이번엔 대답했다.
'그렇구나.'
진한 화장을 하거나 말투가 막 여성스럽거나 하지도 않았다. 달랑거리는 귀걸이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냥 보통 남자였다.
'나도 혼자 왔는데. 괜찮으면 합석할래요?'
'네, 뭐.'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왠지 선량해 보이는 웃음에 이영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굳이 합성할 것도 없었다. 이미 남자는 이영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나도 맥주.'
콘칩 그릇을 놓아주는 바텐더에게 남자가 주문을 했다.
'학생?'
'......네.'
'설마 고등학생은 아니지?'
'어? 아니에요.'
이영이 손까지 내저으며 말하자 남자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농담이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아작. 민망해진 이영이 앞에 놓인 콘칩을 집어 먹었다.
'뭐 하는 거 보니까 데뷔도 안 했겠네?'
'네?'
웃으면서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영이 되물었으나 남자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원래부터 남자 좋아했던 건 아니죠? 보니까 남자가 좋아진 건 최근인거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 게 얼굴에 써져있나? 남자의 물음에 눈이 휘둥그레진 이영이 되물었다.
사실 이런 곳은 처음 왔다고 하고 -물론 딱 봐도 나 여기 처음왔어요, 라는 포스를 풍기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남자에게는 관심 없는 이영의 모양새만으로 누구든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영과 같은 이유로 이곳에 발을 들이는 일반인들은 꽤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을 꼬드겨서 따먹는 것이 영진의 주특기였다. 모르는 사람들, 특히 일반인들에게 영진의 선량해 보이는 인상은 꽤 잘 먹혔다.
'사실 나도 그렇거든요.'
반쯤 낚인 이영에게 영진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거의 백이면 백, 다 먹히는 레퍼토리였다.
'얼마 전부터 계속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있는데.......'
말끝을 흐린 영진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말고는 남자한테 이런 기분 든 적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저두.......'
조그맣게 동조하는 이영에 영진의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여기도 그래서 오긴 했는데 그럴 마음이 들지가 않아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저도. 사실은.'
점점 영진의 몸이 이영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영은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에 완전히 경계심을 풀어버린 상태.
'그래서 말인데. 여기 좀 불편하지 않아요?'
사실 이제 좀 편해진 참이었다.
'그러지 말고 여기 말고 나가서 한 잔 할래요? 편하게?'
이영이 선뜻 대답을 하지 않자 영진이 어딘가를 향해 턱짓을 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틀었던 이영이 휙, 하고 다시 고개를 원위치 시켰다. 잠깐이긴 했지만 분명 남자끼리 키스를 하고 있었다.
'어쩔래요? 아니면 난 혼자서라도 일어설 건데.'
일부러 민망한 장면을 보게 만든 뒤 한 번 더 압박. 이런 장소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을 부각 시키는 것이었다.
'......그럴, 까요, 그럼?'
자리에서 일어서는 영진에 불안해진 이영도 따라 일어섰다.
'같이 계산해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영진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웨이터에게 내밀었다.
'어? 아뇨. 제건 제가-'
'어차피 다른데 갈 거잖아요. 거기서 내요.'
이영이 급히 지급을 꺼냈지만 이미 카드는 넘어간 뒤였다. 영진에게 지폐를 건냈지만 영진은 다음 술자리에서 내라는 말로 가볍게 거절했다. 이영은 굉장히 미안해했지만 사실 영진은 가게 밖으로 나갔을 때 이영이 그냥 가겠다고 하지 못하도록 보험을 들어둔 것뿐이었다.
'그럼 갈가요?'
계산을 끝낸 영진이 이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분명 스킨십이었지만 이미 경계가 풀린 이영은 그저 남자들끼리의 평범한 접촉으로 여겼을 뿐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영진이 이끄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내딛던 찰나였다. 누군가 갑자기 이영의 옷 덜미를 잡아당겼다.
'꽥.'
덕분에 목이 졸린 이영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미안한데. 얘는 두고 가.'
그리고 이영이 졸린 목을 감싸 쥐며 켁켁 대는 사이 이영의 옷 덜미를 잡아당겼던 이가 영진을 향해 말했다. 옷 덜미는 여전히 붙잡힌 채였다.
'뭐야, 너. 얜 내가 먼저 찜했다고.'
암묵적은 규칙을 깬 것은 상대 쪽이었다. 영진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리자 상대도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알아. 아는데. 얘가 내 친구거든.'
상대의 대답에 오히려 놀란 쪽은 이영이었다. 옷 덜미를 잡혀 목이 졸리고 있는 상황도 잊고 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웃기지마.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안 믿기겠지. 나도 안 믿기는데 너는 어죽하겠냐마는. 나도 웬만하면 계속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그놈의 동향이 뭔지. 나도 어쩔수 없이 이러는 거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네.'
'......진짜야?'
'얜 진짜 내 취향에서 벗어난다고.'
대놓고 무례한 소리를 하는 상대에도 이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지금 상대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있던 영진에게서 자신을 구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던 영진이 쳇, 하고 혀를 찼다.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럴 정도로 이영이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이유도 컸다.
기분 다 잡쳤네, 라고 낮게 읊조린 영진이 그대로 가게를 나가버렸고,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치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바텐더도 눈에 띄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옷 덜미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가자, 이영은 몸을 틀었다. 눈앞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토끼눈을 한 이영이 눈앞의 상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김태주?!'
눈앞에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분명 이영의 고등학교 동창, 김태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