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6)

‘……기요, 저이요.’

노트북 화면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찰싹 달라붙어 있던 이영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 여자 목소리가 들리기에 헛것이 들리는 건줄 알았는데 정말 여자가 부른 것이었다.

‘네?’

당황하는 바람에 목소리까지 살짝 뒤집어졌다. 여학생이 소리 없이 살풋 웃었다. 귀로 열이 몰리는 느낌이 났다.

‘이거 좀 드세요.’

눈앞에 캔 커피를 멍하게 보고 있으려니 여학생이 덧붙였다.

‘좀 전에 캐드 알려주신 거 감사해서요.’

‘아뇨. 별것도 아닌데요, 뭐.’

고작 간단한 수식과 용어 정도 가르쳐 준 것으로 이렇게 음료수까지 받으려니 민망했다.

‘그래두요.’

그러면서 생긋 하고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역시 여자애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좋구나 싶었다.

‘그럼, 잘 마실게요.’

이영이 인사를 하며 캔 커피를 건네받았다.

커피도 받았겠다 이제는 제 작업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여학생은 여전히 이영의 앞에 서있었다. 뭐 더 물어볼게 있나? 의아해하는 이영에게 여학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과 아니시라던데.’

‘…….’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오히려 그동안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던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저도 실건이고……, 친구가 써도 된다고 해서…….’

누가 물으면 호기롭게 말하겠다고 준비했던 것과는 달리 이영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내놓은 여학생은 이영의 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 사실 여학생이 궁금한 것은 이영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아니었다.

‘강현오빠랑은 어떻게 친하신 거에요?’

‘아…….’

이영은 뒤늦게 상황을 모두 이해했다. 결국 여학생이 궁금한 것은 강현이었던 거다.

‘강현이요?’

‘네.’

‘그냥 강의에서 만난 사이에요.’

‘그런데 저희가 보기엔 엄청 오래된 친구 사이 같아 보였는데요?’

‘……그래요?’

되묻는 이영의 입술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뿌듯한 기분.

엥?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뿌듯하긴 대체 뭐가 뿌듯하다는 건데? 게다가 나 지금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는 것보다 강현과 친해보였다는 사실에 더 기분 좋지 않았어?

이영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혼자 웃다가 이내 얼굴을 굳힌 것도 모자라 미친놈처럼 머리까지 휙휙 내젓는 이영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여학생은 인사를 끝으로 후다닥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그런 여학생의 목소리는 이영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소개팅?’

재황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재황의 반응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영도 절박했다.

‘어.’

‘이야. 소개팅 생각이 다 나고. 이 자식 아직 살만 하구나?’

남의 속도 모르고 저런 소리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이영이 솔직히 말했다.

‘너무 생각이 안 나서 문제다. 나 너무. 오래 쉬었나봐.’

‘너 마지막으로 사귀었을 때가 언제였는데?’

‘고2때 사귀었다가 대학 오면서 헤어졌지.’

‘그렇게 오래 없었냐?!’

그렇게 놀랄 일인가. 뒤늦게 민망해진 이영이 급히 변명했다.

‘과제에 시험에 딴 짓 할 시간이 어디 있냐.’

‘아무리 그래도 대학 와서 몇 년인데 단 한 명도 없었다고?’

‘…….’

변명하자면 제가 강현처럼 여자가 줄줄이 붙는 타입도 아니고 이영 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기엔 그땐 진짜 너무 시간이 없었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만큼 마음에 들어온 여자가 없기도 했고.

‘그래, 좋다 뭐. 어떤 타입을 원하는데? 청순? 섹시? 귀염?’

‘여자기만 하면 돼.’

딱 잘라 말하는 이영의 대답에 재황의 표정이 불쌍한 사람 보는 표정으로 급 변했다.

‘……너 진짜 급하구나?’

‘급하댔잖아.’

‘알았어. 이 형님이 꼭 여친 생기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라.’

왠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불행히도 믿을만한 사람은 이 녀석뿐이었다.

‘그런데 말야.’

빈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을 향해 던지던 찰나, 갑자기 재황이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설마 너 그럼 혹시 동정?’

‘…….’

종이컵이 휴지통 가장자리를 맞고 툭, 튕겨나갔다.

‘이런 불쌍한 새끼.’

‘그래도 키스는 했어.’

‘고딩 주제에 해 봤자지.’

‘키스 맞거든?”

발끈하는 이영을 향해 재황이 태연히 묻는다.

‘그럼 키스 하면서 가슴도 주물렀어?’

‘……이, 이런 변태새끼.’

‘그러면서 무슨. 기껏해야 뽀뽀가지고.’

코웃음 친 재황이 들고 있던 종이컵을 휙, 하고 휴지통을 향해 던졌다. 튕겨진 이영의 종이컵과 달리 재황의 종이컵은 한 번에 쏙, 휴지통 안으로 사라졌다.

‘어제 소개팅 잘했냐?’

인우의 질문에 이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평소와 달리 차려입은 차림새로 어색하게 여자랑 단둘이 앉아있는 거보면 대충 그거지 뭐.’

‘아, 쪽팔려.’

민망해진 이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소개팅에 중국집은 좀 아니지 않아?’

아마도 풍원각에 있을 때 본 모양이었다.

‘그냥 아무거나 괜찮다고 해서’

‘순진하긴. 여자의 아무거나 괜찮다는 말은 니 센스를 불 테니 한번 골라보거라, 하는 뜻이라고요.’

‘……어쩐지 어제 헤어지고 문자를 해도 답이 없더라니.’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영에 인우가 큭큭 거리며 웃었다.

‘문자까지 보낸 거 보면 마음에 들었나보네?’

‘뭐, 그렇지 뭐.’

‘하긴 예쁘니까.;

‘예뻤어?’

인우의 말에 이영이 되물었다. 여자와 단둘이 있는 것이 오랜만이라 엄청 불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편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예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자세히는 못 봤다만 그 정도면 미인 축에 끼지 않나? 긴 생머리에 옷차림새도 여성스럽고.’

‘……그랬나?’

심지어 그녀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하루 만에 까먹을 만큼 뇌세포가 죽어버린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그런 이영을 보고 있던 인우가 불쑥 물었다.

‘너 그거 혹시 강현이 놈 때문 아냐?’

흠칫. 갑자기 등장한 강현의 이름에 순간 이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뒷덜미가 서늘했다.

‘강, 현이 때문이라니, 뭐가?’

태연하게 묻는다고 묻는 건데 제가 들어도 국어책이라도 읽는 듯한 딱딱한 말투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우는 그런 이영의 태도에도 대수롭지 않게 제 할 말을 이었다.

‘그 놈 얼굴에 익숙해지다 보면 웬만한 외모는 다 평범해 보이거든. 우리끼리는 그걸 일명 강현 효과라고 하지.’

껄껄거리는 인우에 이영도 하하, 하고 다소 과장되게 웃었다. 물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듣고 보디, 그런 거 같기도 하네.’

‘그렇다니까.’

여유를 찾고 생각해보니 제법 일리가 있었다.

사실 남녀를 불문하고 일반인의 퀼리티는 아니지. 그러니까 내가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는 다소 비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강현 효과란 말이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게 무슨 효관데?’

이영과 인우과 동시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뒤고 고개를 틀었다.

‘언제 왔냐?’

‘지금.’

보통 사람은 얼굴을 찡그리거나 눈을 사납게 뜨거나 할 때가 무섭기 마련인데 강현은 이상하게 아무표정이 없을 때가 더 사람을 압박하는 능력이 있었다.

‘니들 요즘 나만 없으면 자꾸 내 뒷담을 깐다?’

‘뒤, 뒷담은 무슨. 그냥 공동소재가 너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흐음.’

‘참, 이영이 어제 소개팅했다.’

강현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인우가 냉큼 이영의 소개팅으로 화제를 돌렸다. 나름의 분위기 쇄신을 노린 것이었으나 살벌한 분위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는 좀 전보다 오히려 더 날이 선 것처럼 느껴졌다.

‘소개팅?’

강현의 시선이 이영에게 향했다. 거의 티가 나지는 않지만 분명 강현의 눈이 좀 전보다 갸름해졌다는 걸 이영은 알 수 있었다.

‘어제 조별모임 간다고 하지 않았어?’

‘…….’

‘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보네.’

대충 상황을 눈치 챈 인우가 이영을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 인우의 잘못은 아니었다.

‘뭐야?’

‘…….’

‘왜 거짓말 했는데?’

‘…….’

그러게. 왜 그랬을까. 제가 묻고 싶었다.

사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소개팅이 대놓고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길 일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이상하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짓말을 내뱉은 뒤였다. 이미 그렇게 말했는데 또 사실은 그런 게 아니고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고 다시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그럼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 안했냐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제가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테니 뭐 어떠랴, 하고 넘겼던 것이 화근이었다.

‘과제에, 팀 발표에, 할 거 많다고 죽는 소리 하더니 그 와중에 여자 만날 시간은 있었나 보네.’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강현에 이영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너도 만나잖아.’

‘지금 내 이야기가 왜 나와. 내가 거짓말했냐? 너도 거짓말까지 한거 보면 스스로도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냐.’

‘나라고 뭐 만나고 싶어서 만났는 줄 아냐?! 내가 누구 때문에 없는 시간 쪼개가면서 여자를 만난 건데!’

아픈 곳을 찔리니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지금 나 때문이라는 거냐?’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강현에 이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젠장. 진짜 왜 이러나 싶었다. 이 녀석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머릿속이 뒤죽박죽 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무섭기까지 했다.

‘송이영.’

‘그래. 너 때문이다. 됐냐?!’

빽. 소리를 내지른 이영이 가방을 들고 작업실을 가로 질렀다.

‘저거 왜 저래?’

쾅. 하고 문을 닫고 사라지는 이영을 눈으로 쫓고 있던 강현이 이번엔 인우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소개팅녀한테 까였대.’

‘……그래?’

날이 서있던 강현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어. 그러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남는 게 여잔데 뭐 그런 거 가지고 히스테리야.’

그러야 너한테나 해당되는 얘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잘난 척을 하는 강현에 인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야, 어디가?’

가타부타 간다는 말도 없이 작업실을 나가는 강현에게 인우가 물었다.

‘찾으러 가봐야지.’

‘누굴?’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인데 강현은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긴 누구야. 송이지.’

‘왜?’

‘삐져서 나갔는데 그럼 그냥 두냐?’

원래 너 그냥 두잖아. 라는 인우의 반박은 이미 작업실을 나가버린 강현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진짜 별일이네.’

만나던 여자애들한테도 저러는 걸 못 봤는데. 강현이 열어놓고 간 문을 닫으며 인우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커피.’

쿵. 뒤에서 들려온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음료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돌아보지 못하고 자판기만 보고 있으려니 이영의 어깨 너머로 불쑥 뻗어진 손이 버튼을 꾹, 하고 눌렀다. 뒤로 물러가던 팔이 살짝 어깨에 닿았다. 쿵. 하고 다시 한 번 더 음료수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묘하게 열기가 느껴지는 어깨를 문지르며 몸을 구부린 이영이 음료수 캔을 꺼냈다.

‘자.’

이영이 건네주는 캔을 받던 강현이 물었다.

‘화났니?’

‘……아니.’

오히려 제 쪽에서 물을 말이었다. 거짓말에 괜히 혼자 성질을 내고 나와 버렸는데 이렇게 뒤따라 나왔다. 이런 거 보면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놈들은 이유가 다 있다. 절대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 다정하단 말이지.

‘그런데 표정은 왜 계속 뚱해있는 건데.’

‘…….’

그거야 안 그래도 미친놈처럼 이상하게 굴다가 나왔는데 금세 기분이 풀어져서 헤헤거리면 더 미친놈처럼 보일까봐.

‘딴 여자 소개시켜줘?’

슬그머니 이쯤에서 표정을 풀까, 하던 참이었는데 이번엔 일부러가 아니라 진짜로 표정이 굳었다.

‘뭔, 소리야.’

뭐 알고 하는 소린가 싶어 잔뜩 굳은 이영과 달리 강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소개팅 잘 안됐다며. 그래서 나한테 화풀이 하는 거 아냐?’

‘…….’

어찌 보면 이렇게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정말로.’

‘됐어.’

‘해준다고 할 때 하지? 나중에 또 몰래 소개팅 하지 말고.’

‘아, 됐다고!’

‘성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강현의 기분은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뭐, 어찌 보면 차인 게 잘된 건지도. 공대 준비하려면 여자 만날 시간은 없을 테니까.’

뭐 임마? 울컥해서 표정을 일그러트리던 이영이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야. 공대라니?’

‘설마 공대가 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나도 건축학과 학생이거든?’

공대 즉, 공간대상은 많은 공모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국제 건축 공모전으로, 공대 입상경력이 스펙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뭘 모른다고 하는 이영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맥도 없고, 공모전에 참가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과의 인맥은 더더욱 없는 이영에게 공모전은 남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내주는 과제하기도 힘든 판에 공모전은 무슨 공모전인가.

‘일단 멤버로 나랑 인우는 확실한데 다른 한 명은 아직 생각중이야. 다들 개인 과제 같은 게 있으니까 미리 시작하는 게 좋으니까 다음 주쯤-.’

‘저기요.’

이야기를 듣던 이영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왜?’

‘혹시 아직 생각하고 있다는 한 명이 나야?’

강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아, 아니구나. 머쓱해하는 이영에게 강현이 덧붙였다.

‘너는 당연히 끼는 거지.’

어? 이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치만 확실한 멤버는 너랑 인우라며. 나는 말 안했잖아.’

‘너한테 얘기하는 건데 너를 왜 넣냐?’

듣고 보니 그렇다. 하지만.

‘그런 얘기 들은 적도 없다고.’

‘어제 얘기하려고 했는데 니가 소개팅 한다고 안 왔지.’

‘…….’

뜬금없이 그렇게 말하는데 누가 알아듣겠냐고. 투덜거리던 이영이 강현의 한마디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콜라 캔을 땄다.

‘그런데 나 헬퍼도 해본 적 없는데.’

보통 1,2 학년 때 선배들 공모전을 돕는 걸 헬퍼라고 하는데 경험도 쌓고 인맥을 쌓는데 좋다는 얘기만 들었다.

‘나도 없는데?’

아네. 그러시겠지요. 강현이야 굳이 헬퍼로 인맥을 쌓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혹시나 저를 헬퍼로 쓰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은 것인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우는 헬퍼 좀 해본 모양이던데. 왜 헬퍼 안해본 사람은 못믿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떨떠름한 반응이야?’

‘이상하잖아. 난 실건이고. 별로 실력도 없는데. 굳이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 많을 텐데 같이 하자고 하니까’

‘실력이 없으니까 같이 하자는 거지.’

이건 또 뭔 소린가. 이영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내가 끼워주지 않으면 과제나 겨우 하다가 졸업할 거 아냐.’

‘…….’

‘왜 자존심 상하냐?’

‘어.’

솔직한 대답. 괜히 아닌 척 하지 않는 것이 또 이영답다. 언뜻 보면 비굴한 것 같아도 사실은 자존심이 센 녀석이라는 걸 강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기 싫어?’

물론 싫다고 하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비굴하기만 한 녀석은 싫지만 괜한 자존심만 부리는 부류도 딱 질색이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영은 강현의 예상을 빗나갔다.

‘내가 미쳤냐? 안 하긴 왜 안 해? 절대 할 거다.’

흥칫핏. 입으로 콧방귀를 낀 이영은 강현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황당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쫓던 강현이 피식. 하고 웃었다.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으면서도 그게 또 싫지 않으니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강현도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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