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카피반의 신통한 구슬
MMORPG를 하는 유저들이 ‘이 게임은 망했다’고 되뇌는 순간은 다음과 같다.
1. 밸런스 똥망 패치로 드루이드가 망캐 취급을 받을 때.
2. 운영진의 실언(이를테면 ‘드루이드가 난이도가 높긴 하죠’)이 논란을 불러올 때.
3. 캐시로 구매하는 확률성 뽑기 아이템, 소위 ‘키트’가 우르르 업데이트됐을 때.
<카피반의 신통한 구슬 리뉴얼 알림>
안녕하세요, 아시르스의 여행자 여러분.
<카피반의 신통한 구슬> 리뉴얼을 알려드립니다.
신규 업데이트된 <카피반의 신통한 구슬>을 구매하시면
<빛나는 요정여왕의 귀걸이>, <빛나는 무기 구슬>, <빛나는 봄날의 연회복>을 비롯한 의장 아이템과
<강직한 대장장이의 망치>, <유연한 재봉사의 바늘>을 비롯한 제작용 아이템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유저 익명게시판>
제목 : 블라에서 누가 올타(*올타임즈게임 : 압포의 제작사) 임원 하나가 운영비 횡령해서 코인에 꼬라박았다던데
내용 : 귀신같이 키트업뎃뜨네 아 ㅋㅋㅋ
제목 : 압포 망겜다됐다는증거
내용 : 아크로스 연대기 업뎃은 세월아네월아 미루면서 3악신 짤짤이로 컨텐츠 돌려막더니 연대기 언제줄거냐는데 응 모르겠고 호구새끼들아 키트나 사
제목 : 빛나는 요정여왕 귀걸이 시세얼마나갈거같냐
내용 : 원래 있던 요정여왕 귀걸이랑은 다른거지? 뭔가 이펙트 추가되는거같은데
└일단 뽑으면 나한테 연락줘라
└누가 데이터 뜯었는데 후광효과 추가인듯
└ㅋㅋㅋㅋ관종템ㅅㅂ
└ㅋ관종아니고서야 누가 의장뽑자고 돈을써 생각하고말해
제목 : 빛나는 무기 시리즈
내용 : 종족 기본무기에 빛나는 이펙트넣은거임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날로먹겠어? 설마
└ㄱㅆ 아니 날로먹는거아니고.. 꽤예쁠거같던데 이펙트가 생각보다 화려함
└니가 코인꼬라박았냐? 잡았다이새끼
└ㄱㅆ ??내 코인 나락가긴했는데 어케알았음?
여론은 좋지 않다 못해 험악할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익명게시판이란 곳이 다 그렇기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일단 <성탄>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길드] 시티보이 : 저 미리 얘기해두는데..
[길드] 시티보이 : 혹시 귀걸이 뽑는분 나오시면
[길드] 시티보이 : 누가 얼마를 부르든 그거보다 비싸게 살테니
[길드] 시티보이 : 꼭 저한테 먼저 말씀해주세요
당연하게도 시티보이가 가장 신이 나 있었다. <요정여왕의 귀걸이>는 처음 키트로 출시된 이래 2년이 넘도록 재발매되지 않은 인기 의장이었다. 원래도 화려하게 반짝이는 이펙트로 유명한데, 심지어 ‘빛나는’ 수식어까지 추가된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까마귀 아이템이 등장할 게 뻔했다.
[길드] 사격수 : 근데
[길드] 사격수 : 키트 가격 오른거맞죠?
[길드] 사격수 : 원래 하나에 천원아니었나
[길드] 옹팍 : 오른거맞아요ㅇㅇ
[길드] 옹팍 : 삼백원오름
[길드] 사격수 : 달러인줄알았네..
개당 1,300원, 10개 묶음은 12,000원……. 뻔한 장삿속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랑은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애초에 키트 따위는 사지 않기 때문이다…….
압포의 키트 장사는 그래도 제법 합리적인 구석이 있었다. 확률이 심하게 낮은 아이템은 모두 룩덕용 의장이었고, 장비 제작 재료나 특수 무기 등은 자주 뜨는 편이기에 게임을 하면서 번 돈으로 충분히 구매가 가능했다. 굳이 현금을 들여 도박을 하지 않아도 남들만큼 게임을 하는 일에는 아무 지장이 없게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압포가 자체적으로 공개한 확률에 의하면 키트에서 S급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0.001% 이하다. 즉 천 개를 사야 하나가 나올까 말까 하고, 천 개를 사는 비용은 묶음 할인을 적용해도 120만 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천 명 중 하나일 거라는 희망 따위는 갖지도 않는 사람이다.
[길드] 포푸리 : 다들 키트까실거?
[길드] 포푸리 : 빛무기 구슬 데이터 뜯은거봤는데 생각보다 예뻐서
[길드] 포푸리 : 이게 의외로 비쌀수도있을듯
[길드] 메리토크라시 : 빛무기가 뭔데?
[길드] 포푸리 : 종족기본무기에 이펙트 씌운건데
[길드] 포푸리 : 하나뽑으면 전종족 무기 다준대요
[길드] 포푸리 : 귀걸이보다도 안나오지않을까 하던데
[길드] 포푸리 : ㅈㅁ요 링크드림
‘데이터를 뜯는다’고 함은 게임 테스트 서버에 업데이트된 미발매 아이템을 복사해 들여다보는 일을 뜻했다. 코드를 완벽하게 훔칠 수는 없는 만큼 미구현 영역이 포함된 반쪽짜리 이미지가 대부분이지만,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 대략적으로 추측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쭉 내려 보니 포푸리의 말대로 처음 캐릭터를 생성할 때 주는 기본 무기에 특별한 이펙트를 넣은 버전인 모양이었다. 예쁘기야 하겠지만……. 역시 나는 폴리곤을 꾸며주기 위해 예금을 투자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심드렁하게 창을 끄려는데 문득 드루이드의 은행나무 스태프에 시선이 닿았다.
“…….”
구부러진 나무 막대기에 은행나무 이파리 한 장이 달려 있는 심심한 디자인. 이런 게 빛이 나봤자 특별히 예뻐질 리 없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펙트가 아니었다. 스태프 머리 부분에 작은 리본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어…….”
화질이 조악해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저게 만약 흰색 실로 수를 놓은 녹색 리본이라면 그건…….
“어어……?”
그건 카피반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이별할 때 건강을 기원하며 선물해준 리본이다. 카피반들은 손이 짧고 손톱이 길어서 바늘을 다루기 어려워한다. 때문에 수를 놓는다는 건 엄청난 수고를 요하는 일이었다.
―왜요, 형?
무의식중에 멍청히 중얼거리고 보니 찬희가 듣고 있었다. 나는 얼른 헤드셋을 고쳐 쓰고 큼, 헛기침을 했다.
“아, 아냐…….”
―지팡이 갖고 싶어서요?
사실 갖고 싶은 아이템이 생겼다 해서 달라질 건 없다. 특히 이건 제대로 플레이하는 드루이드 유저 자체가 희귀한 탓에 인기 직종 무기에 비해 그렇게 비싸지도 않을 것이다. 시세가 형성되는 분위기를 살펴서 적당히 좋은 가격을 잡고 거래하면 된다. 분명 그렇지만…….
“하……. 이게 사람 마음이 희한하네.”
―뭐가요?
“직접 뽑아서 얻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물론 안 할 거지만.”
―왜 안 해요? 해보시면 되죠.
“내가 뽑는다고 나오겠어? 일단 그런 데 쓸 캐시도 없어.”
그러자 찬희가 낮게 웃었다. 어쩐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웃음이라 귀를 기울이자 곧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 잊으셨어요? 제 계정에 얼마 있는지.
“…….”
인마, 그게 네 돈이야? 하고 싶은 젊은 꼰대와 나 정말 자기만 믿는다? 하고 싶은 노답 도파민 중독자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갈등하는 기색이 느껴졌는지 찬희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현금으로 환원 못하는 캐시고, 둬봤자 썩는 데이터니까 거리낌 없이 쓰셔도 돼요.
“아냐, 흔들지 마. 키트 같은 건 안 까는 게 이기는 거야…….”
―그래요? 길드원들은 다 패배자예요?
“그게 또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그러는 사이 길드 창은 점점 더 신규 업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호구 낚는 항해일 뿐인데, 뭐라도 나오는 것만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솔가 클리어 후 어지간히 할 짓들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만설>이 솔가 클리어에 성공한 것은 결국 업데이트 이틀 뒤였다. 퍼클은커녕 세컨클조차 못한 그들은 당연하게도 유저게시판과 익명게시판, 동영상 채널까지 전방위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만설>의 패착은 최대 인원인 12인으로 도전했음에도 힐러를 둘만 데려갔다는 점에 있었다. 12인 도전인 경우 탱커 둘, 힐러 셋, 딜러 일곱 정도가 이상적인 구성이다. 모든 팀원이 숙련자라 한 대도 안 맞고 플레이할 수 있다면 모를까, 첫 트라이하는 고위 레이드에서 시도하기엔 다소 과감한 전략이었다.
[길드] 포푸리 : 근데 분명 힐러 셋으로 간다하지않았어여?
[길드] 포푸리 : 왜 전략을 바꿨지
[길드] 시티보이 : 힐러빼고 딜러넣을 이유는 하나뿐이져
[길드] 시티보이 : 딜이 존나 안나왔던거지
[길드] 포푸리 : ㅇ ㅏ
심지어 그렇게 무리해서 딜러 수를 늘렸음에도 RDPS가 썩 높지도 않았다. 특히 마지막 솔가 발톱 페이즈에 들어서서는 트라이가 수십 번 반복되도록 지지부진 바닥을 터뜨리다 공멸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댓글은 온통 욕과 비아냥으로 물들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만설>은 동영상 채널을 삭제했고, 그다음 주에는 아예 길드를 해체해버렸다.
이제 와서 외부 공격 따위에 찌그러질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간들은 아닌 만큼 아마 내분이 일어난 것 같았다. 탱힐진은 주로 <만두>, 딜러진은 주로 <전설> 출신이었는데, 알음알음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서로에게 퍼클 실패의 책임을 돌리며 쥐어뜯고 싸우다 결국 찢어졌다는 듯했다.
“장기태 요즘 이상하다고 하더라.”
아르바이트 중간 보고를 위해 만난 수정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애들 만나도 그냥 입 다물고 술만 마시다가 돌아간다네.”
“그게 이상해진 거야?”
“이상해진 거지. 기가 팍 죽었다니까. 원래 술 들어가면 그런 진상이 없었는데.”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이는 근황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같이 재밌게 놀던 사인데, 사람 인연 참 모르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일 얘기로 돌아가서……. 원장님이 너 검수 잘하는 거 같다고, 일 조금 더 맡기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때?”
“진짜? 한 달 내로 끝낼 수 있는 분량이면 좋아.”
“영어도 괜찮아? 고2부터 3까지는 내가 진행하는 중이고, 너한테는 중3부터 고1 영어 가능하냐고 물어보라 하시네.”
“영어? 음…….”
“어차피 지문은 교과 출제고, 문제랑 답안에 오류 없는지만 보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어렵지 않아. 국어보다 단가도 조금 더 높고.”
“음, 음……. 해볼게. 혹시 나 헤매면 조금만 도와주라. 선물 사 올게.”
“그거야 해줄 수는 있지만……. 굳이?”
의아하게 물은 수정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씩 웃었다.
“애인 네이티브라며? 애인한테 도와달라 하면 되지.”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걔 네이티브 아니야, 유학 비슷한 거 한 거지.”
“어쨌든 영어 잘한다면서. 애인한테 같이 봐달라고 해. 그 핑계로 알콩달콩 데이트도 하고.”
“쓸데없는 소리 진짜…….”
타박을 이어가려다 멈칫했다. 수정의 시선이 내 어깨너머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동공이 확장된 표정. 사람들이 뭘 목격했을 때 이런 얼굴을 하는지 이제 나는 질리도록 알고 있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마침 근처까지 다가온 찬희가 슬쩍 미소 지었다.
“놀라게 해주려 했는데.”
“……어서 와.”
“안녕하세요, 수정 누나.”
내 양어깨에 손을 짚은 찬희가 수정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수정은 뒤늦게 어어, 하며 과장되게 침 닦는 시늉을 했다.
“언제 봐도 황홀하구나, 찬희야…….”
“고맙습니다. 혹시 끝나려면 멀었어요?”
“거의 끝났어. 잠깐 앉아서 기다려. 커피 사줄까?”
“아니에요. 포장해서 가려고 주문해놨어요.”
유들유들하게 대답한 찬희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붙이듯 몸을 기울이며 테이블에 늘어놓은 교정지를 살폈다.
“분량 많아 보이네요.”
“안 많아. 크로스체크만 하면 끝이야.”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면 좋은데…….”
그러자 수정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려고 들었다. 나는 얼른 씁, 소리를 내고 출력물을 아무렇게나 긁어모았다.
“가자, 가. 집에 가서 마저 하면 돼.”
“네?”
“우리 간다. 아까 얘기한 건 메일로 보내줘.”
찬희를 잡아끌며 수정에게 당부하자 수정이 느글느글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든 이 재밌는 광경을 소문내고 싶어 죽겠다는 눈이었다. 얼떨결에 나를 따라 일어선 찬희가 다시 수정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갈게요, 누나.”
“어어. 잘 가.”
“네, 누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필요 이상으로 상냥하게 인사하는 모양이 묘한 찜찜함을 남겼다. 나는 찬희가 주문해놓은 커피와 디저트를 찾아들고 카페를 나서며 일단 눈부터 흘겼다.
“너 수정이한테 왜 이리 호의적이야?”
“네?”
“그렇게까지 살갑게 굴 필요 없잖아.”
“살갑게 굴어야 저를 좋게 보잖아요.”
“……좋게 보여서 뭐 하게?”
“혹시 수정 누나가 형을 좋아하더라도, 절 좋게 본다면 포기할 거 아니에요.”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엄청난 소리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나는 짐을 한 손에 몰아 쥔 뒤 남은 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철썩 내리쳤다.
“너 행여나 수정이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
“형 하는 거 봐서요.”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갈수록 별소리를 다 해.”
파르르 떠는 나를 보면서도 찬희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애를 잘못 키운 게 맞다니까. 손만 잡아도 얼굴이 벌게지던 녀석한테 이런 면이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주차장에 도착해 짐을 싣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당기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내 무릎 옆을 툭 짚었다.
“형.”
그대로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내민 찬희가 물었다.
“저 뽀뽀해주면 안 돼요?”
“…….”
“출발 전에 한 번만.”
차는 주차장 구석 자리에, 벽을 마주 보고 세워져 있었다. ……일부러 이렇게 세웠나. 어이가 없어 픽 웃으며 몸을 돌려 앉았다.
“진짜 뽀뽀만?”
두 손으로 녀석의 얼굴을 감싸고 코끝을 들이밀었다. 찬희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나는 혀 넣고 싶은데, 참고 뽀뽀만 할까?”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다시 묻자 까만 눈이 길게 접혔다. 하아, 한숨 섞인 탄식이 밀폐된 차 안을 울리자마자 입술이 와락 먹히듯 겹쳐졌다.
“응……!”
찬희의 손이 시트 가죽을 우그러뜨리는 감각이 허벅지로 전해졌다. 파도처럼 덤벼드는 기세에 밀려 조수석 창에 부딪히기 직전, 따뜻한 손이 뒤통수를 감쌌다.
한껏 벌어진 입안으로 침범한 살덩이가 잇새를 벌리고 내 혀를 엮어 올렸다. 빨아들이며 당겼다가 느릿하게 문지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찬희의 무릎이 콘솔박스를 넘었다. 맞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습한 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티셔츠 아래를 파고든 손이 늑골이 휘어지는 자리에 맞춤하게 닿고 나서야 깜짝 놀라 녀석의 팔을 덥석 쥐었다.
“그만…….”
착하게 멈춘 찬희가 가늘어진 눈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축축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꼴깍, 군침을 삼켰다.
“…….”
슬쩍 시선을 내려 보니 짙은 색 청바지 앞섶이 빳빳하게 부풀어 있었다. 신축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두꺼운 천 아래로 저만한 존재감이라니. 아프지는 않을까 싶어 무심코 손으로 짚어 눌렀다.
“읏…….”
움찔, 어깨를 굳힌 찬희가 잔뜩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하라면서요? 소리 없이도 들리는 말에 그만 비실비실 웃어버렸다.
“집에 가서 하자, 응?”
“…….”
“공중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을 만한 장소에 도착하는 대로 형아가 만져줄게.”
“……벨트 매세요.”
빠르게 자리로 돌아간 찬희가 철컥, 기어를 내렸다. 나는 안전벨트를 당기며 실없이 웃었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입술부터 맞닿았다. 찬희가 내 허리를 끌어당겨 제게 단단히 누르는 바람에 나는 목이 뒤로 꺾이도록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팽팽히 늘어난 기도를 헤치고 나온 숨이 부드러운 살갗 틈으로 젖은 마찰음을 냈다.
거침없이 들어온 혀가 입천장 가장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을 깊이 눌렀다. 하아, 무심코 고개를 틀며 입을 크게 열자 턱이 붙잡혔다. 도망치지 말라는 듯한 손으로 쥐어 고정한 채 다시금 침범한 살덩이가 이번에는 혀를 건져내 진득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읏, 으응……. 읏.”
귓바퀴가 오싹 오그라드는 듯한 자극에 무릎이 후들거렸다. 찬희는 비척대는 나를 더욱 세게 안은 채 내 다리 사이로 제 무릎을 끼워 넣었다. 단단한 대퇴근이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리듯 달라붙었다. 나는 아, 하며 발부리를 세웠다. 삐빅, 스니커즈 밑창이 타일을 긁으며 경고음 같은 소리를 냈다.
“찬희야, 들어가……서.”
속삭이자마자 입술이 먹혔다. 그사이 점점 더 파고든 찬희의 허벅지는 이제 내 다리 사이를 강하게 누르는 중이었다. 호흡마다 슬슬 앞뒤로 문지르기까지 하고 있었다. 고환 아래쪽으로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에 신경이 파득파득 튀어 오르는 듯했다.
“들어가서, 응……. 마저…….”
헐떡이며 끊어 뱉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찬희가 몸을 낮췄다. 그러고는 한 팔은 내 등에, 한 팔은 엉덩이 아래로 두르고서 훌쩍 안아 올렸다.
“……으, 앗!”
놀라 급히 허둥대며 눈앞의 목을 끌어안았다. 찬희는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녀석의 등을 얼른 힘껏 내리쳐 막았다.
“신발! 신발 벗어야지!”
그러자 찬희가 손을 뒤로 뻗어 내 신발을 벗겨냈다. 허공에서 추락한 스니커즈 두 짝이 툭, 툭, 애처로운 몰골로 현관을 뒹굴었다. 착실히 제 신도 벗고 안으로 들어선 녀석은 거실 소파 앞에 도착해서야 나를 내려주었다.
풀썩, 푹신한 소파에 쓰러진 내 허리를 타고 오른 찬희가 카디건부터 벗어 던졌다. 속에 입은 티셔츠도 홱 들치듯 벗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까만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마른침을 삼키고 상체를 일으켰다. 급히 겉옷에서 팔을 빼내고 바지 벨트를 풀었다. 찬희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지와 속옷까지 벗고 티셔츠 한 장만 남긴 채 찬희에게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바지 앞섶을 풀자 젖어 들기 시작한 속옷 아래로 선명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이의 형태가 보였다. 속옷 밴드를 잡아 내리니 굵은 기둥이 튕기듯 빠져나왔다.
망설임 없이 두 손으로 쥐자 고개를 떨어뜨린 찬희가 하아, 젖은 숨소리를 냈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며 마주쳐 오는 시선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 정말……. 이 녀석 이런 얼굴 볼 때마다 못 참겠다.
“……앉아봐.”
벗은 어깨를 건드리며 속삭이자 달뜬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랑곳없이 온몸으로 밀어 소파에 똑바로 앉게 했다.
농밀한 스킨십이라면 요즘 들어 눈 마주칠 때마다 하고 있지만, 끝까지 가는 빈도는 별로 높지 않았다. 특히 넣는 건 다섯 번 중 한 번이 될까 말까 했다. 좋은 건 좋은 거고 힘든 건 힘든 거였다. 한두 번으로는 절대 만족 못하는 팔팔한 애인을 감당하려다 보니 별수 없이 온갖 요령만 쌓였다.
“후우…….”
찬희를 마주 보고 허벅지에 올라타듯 앉았다. 한 손은 찬희의 어깨를 짚고, 한 손은 등 뒤로 뻗어 두꺼운 기둥을 버겁게 쥐었다. 그대로 천천히 골반을 내리자 엉덩이골 사이로 빠듯한 살덩이가 밀착되었다.
“하…….”
고개를 살짝 젖힌 찬희가 달뜬 숨을 내쉬었다. 이마와 뺨이 온통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흐.”
배시시 웃고 하체를 조금씩 앞뒤로 문질렀다. 기둥을 감싸 엉덩이 사이로 누른 채 깔짝거리는 동안 점점 더 크게 부푼 살덩이 표면으로 흉흉한 핏줄이 불거졌다. 찌걱, 흘러내린 선액이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에 간지러웠다. 몸을 비틀다 살짝 휘청대자 찬희가 두 손으로 내 골반을 잡아 눌렀다.
그대로 옆구리를 지나 늑골을 세듯 문지르고 가슴을 쓸어 올린 손이 양쪽 유두 주변을 크게 움키듯 쥐었다. 흠칫, 나도 모르게 흔들린 몸을 다잡을 새도 없이 찬희의 입술이 한쪽 유두를 덥석 빨아들였다.
“아, 흐으……!”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느라 찬희가 걷어 올려놓은 티셔츠가 도로 흘러내렸다. 찬희는 제 머리에 걸쳐진 티셔츠 자락을 들어 올리더니 내 입가로 가져왔다. 나는 곧 속내를 알아채고 그것을 입에 물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찬희가 다시 내 가슴 위로 입술을 내렸다. 판판한 가슴을 잘근대며 혀끝으로 유두를 콕콕 누른다. 입안을 채운 신음은 잇새에 물린 천 조각에 먹혀 답답한 침음으로 맴돌 뿐이었다. 슬렁슬렁 밀려드는 쾌감을 견디느라 숨을 고르는데 찬희가 별안간 앉은 채 하체를 퍽, 소리가 나도록 들썩였다.
“……!”
그 바람에 손을 놓치고 뒤로 쓰러질 뻔했다. 다행히 찬희가 곧장 허리를 끌어안아 제게로 당겨왔기에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원망하는 눈으로 내려다보자 녀석은 적반하장 잔뜩 꿍한 표정을 지었다.
“형…….”
슬그머니 흘러내린 손이 주름진 골 사이를 꾹 눌렀다.
“……오늘도 안 돼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다음에 올 것이 무엇인지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희는 굴하지 않고 목을 기울여 내 시야로 쫓아 들어왔다. 불가항력으로 마주한 얼굴은 눈썹을 잔뜩 가라앉힌 채 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 망했다. 눈빛 공격을 받아버렸어……. 두 눈을 질끈 감는 나를 보며 승리를 예감한 찬희가 낮게 웃었다.
“형이 너무 힘들다 하면 멈출게요.”
“…….”
“내일 아무 일정 없잖아요……. 네?”
애교 있게 조르며 턱 밑을 쪽쪽대는 데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질 사람은 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 누르자 모양 좋은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형은 나한테 너무 약해…….”
그걸 아는 놈이 이래? 울컥해서 타박하려는 순간 긴 손가락이 뒤를 가르고 들어왔다. 조금씩 새어 나온 체액에 젖어 있긴 하지만 안쪽은 여전히 뻑뻑해 버거운 이물감이 느껴졌다. 나는 아, 하며 얼른 녀석의 팔을 잡아 아래로 밀었다.
“찬희야, 젤.”
“아, 죄송해요.”
사과하며 내 뺨에 입을 맞춘 녀석이 별안간 양팔을 내 무릎 아래로 넣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등을 끌어안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악……!”
얼결에 벗은 다리를 한껏 벌리고 매달린 꼴이 되자 새삼스러운 수치심이 밀려왔다. 나는 혹여 떨어질까 녀석의 목에 달라붙으면서도 얄미운 등을 여러 번 내리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찬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나를 덜렁 든 채 침실로 향했다.
협탁에서 젤과 콘돔을 꺼낸 찬희가 침대에 앉았다. 내가 내려가려 하자 어딜, 하듯 골반을 잡아 눌렀다. 나는 하릴없이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등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젖은 손끝이 뒤로 닿았다. 움찔, 놀라 허리를 움츠리자 찬희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엉덩이를 꽉 쥔 손이 척척한 액체를 구멍 주위로 가득 펴 바르고는 이내 꾸욱, 누르듯 침입해 들어왔다.
“하…….”
타인의 피부가 몸 안에 닿는 이 감각은 평생 가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고개를 멀리 떨어뜨리며 판판한 등을 길게 긁었다. 찬희는 끙끙대는 나를 어르고 달래가며 천천히 안을 넓혔다. 점성 있는 젤이 두 사람분 체온에 찔걱대며 녹을 때마다 뒷덜미가 오싹하도록 간지러웠다.
“으응…….”
두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손마디가 끝나는 지점까지 들어오더니 안에서 구부러졌다. 순간적으로 목 아래까지 찌릿한 감각이 솟아올랐다. 하아, 진저리치는 나를 진정시킨 찬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파요?”
귓바퀴에 입술을 댄 채 흘려보내는 목소리는 머리가 어찔해질 만치 달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여러 번 숨을 골랐다.
“아니야, 안 아파…….”
“그런데 왜 이렇게 앓아요.”
“……좋, 으니까 앓지…….”
말 떨어지기 무섭게 손가락 두 개가 마디 하나만 남기고 주르륵 빠져나갔다. 구불구불한 내벽을 남김없이 긁어내리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배에 힘이 들어갔다. 밑이 바짝 조여진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으윽, 하며 고개를 젖히자마자 다시 끝까지 푹, 파고든다. 안쪽에 고여 있던 젤이 주르륵 넘쳐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 흐으, 너 장난, 치지 마……!”
아프지는 않았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쾌락이 갑자기 덮쳐올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이 싫었다. 눈물까지 찔끔 배어난 나를 보고 찬희는 그제야 풀 죽은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형. 형이 좋다고 하니까…….”
“응, 그……. 그거 그만 넣어, 아…….”
“더 좋게 해주고 싶어서…….”
세 번째 손가락이 들어오자 절로 입이 벌어지고 호흡이 짧아졌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올라온 떨림이 턱 끝에 맺혀 나도 모르게 우는 소리가 났다.
“흐으……. 이거 그만, 하고 네 거 넣어…….”
“안 돼요. 아직 충분히 안 벌어져요.”
“넣으, 라니까, 나……. 나 벌써 할 거 같단 말이야…….”
“해도 돼요.”
그러더니 쑥 뻗어온 손이 빳빳이 일어선 내 성기를 덥석 쥐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뒤쪽을 파고들고 있었다.
“흐, 잠……. 잠깐만……. 아!”
눅진해진 배 속을 마디마디 눌러 매만지며 앞을 탁탁 쳐올리는 자극에 눈앞이 번득였다. 아직 콘돔도 안 했는데. 뒤늦게 고개를 든 위기감에 앞을 쥔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찬, 희야. 잠깐만, 그만……. 나……. 흣!”
“괜찮아요, 형. 제 손에 싸요.”
“아, 흑, 싫어……. 손, 흐윽, 더러워……지잖아.”
“안 더러워요. 형 거잖아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찬희가 살짝 빼냈던 손가락을 다시 끝까지 쑤셔 넣었다. 몸 안에 꽉 들어찬 쾌락을 머리끝까지 밀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아, 얼빠진 소리를 냈다. 동시에 한계까지 팽팽해졌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며 몸이 끓는 듯한 사정감이 몰려왔다.
“하아…….”
전신을 훑은 쾌락이 한숨에 맺혀 허공으로 흩어졌다. 후들대는 몸을 가누려 애쓰며 내려다보니 내 것과 찬희의 손, 아랫배까지 온통 탁한 액체로 물들어 있었다. 아……. 뺨이 홧홧해지는 감각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닦을 거…….”
협탁으로 몸을 돌리려던 그때, 뒤를 벌리고 있던 손가락이 안쪽을 누르듯 크게 휘어졌다. 헉, 밭은 숨을 들이켜며 흔들리는 몸을 바로잡았다.
“뭐, 뭐 해…….”
“안 찾아도 돼요.”
찬희는 덤덤하게 속삭였지만, 나는 그 안에 섞인 조급한 숨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맞닿은 피부의 체온이 높았다. 할 말을 잃은 나와 빤히 눈을 맞춘 찬희가 젖은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말릴 틈도 없이 손바닥이 우묵한 지점부터 길게 핥아 올렸다.
“미친……!”
얼른 손목을 붙잡아 내렸지만 이미 붉은 입술 주위가 희멀건 액체로 번들번들하게 젖은 후였다. 땀에 젖은 이마로 달라붙은 머리카락, 팽팽한 열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까지 더해지니 어쩐지 내가 큰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뭐 해, 그걸 왜 핥……. 핥아.”
당황해 묻자 젖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급해서요.”
“…….”
이쯤 되니 더는 핑계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력이 쭉 빠져나간 몸은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지만, 나는 녀석이 손가락을 빼내고 제 것을 쥐어 내 뒤에 맞출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앗, 으…….”
뭉툭한 귀두가 한 번에 파고들지 못하고 골 주위를 맴돌자 절로 허리가 떠올랐다. 나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세우고 삽입을 준비했다. 딱 견딜 만한 수준의 고통과 미지수의 쾌락을 예감한 등줄기가 바들바들 떨렸다.
“……하아.”
여러 번 손이 헛돌고 나서야 몸이 조금씩 열렸다. 피부는 충분히 젖어 있었고, 안쪽은 녹아내릴 만큼 부드러웠지만 이 두꺼운 살기둥을 온전히 넣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찬희는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손으로 받친 채 계속해서 얼굴 이곳저곳에 입 맞추었다. 그게 찬희 나름의 재촉이란 걸 알았지만 곧장 기대에 응해주기엔……. 정말이지 커도 너무 컸다.
“어디 가서, 좀, 줄여서, 오랬지…….”
진담을 가득 담은 타박도 찬희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쪽, 쪽, 귀여운 마찰음과 동떨어진 거친 호흡이 귓전을 간질이고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아, 나는……. 얘가 나한테 안달하는 게 왜 이리 좋을까.
“형…….”
애원하듯 낮아진 목소리가 어리광을 가득 담고 속삭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몸이 부서지든 말든 다 받아주고 싶었다.
“하……. 잠깐만……. 이제…….”
간신히 끄트머리만 넣고도 머리가 띵하도록 버거웠다. 아직 사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탓도 있었다. 내 감각이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결국 강건한 어깨로 이마를 파묻으며 항복 선언을 했다.
“미안, 내가 잘 못하겠어…….”
등을 감싼 손이 멈칫 굳었다. 잠시 망설이던 찬희가 이내 내 귓전에 대고 물었다.
“그럼 그만할까요……?”
강아지였다면 끼잉, 하며 귀가 내려갔을 것만 같은 목소리와 말투였다. 잔뜩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주인을 너무 좋아해서 짖지도 못하는 그런 착한 강아지. 푸핫,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좀 넣어봐.”
“…….”
“내가 해서는 끝까지 못 넣…….”
움찔, 맞닿아 있는 목덜미에서 혈관이 발끈 서는 기색이 느껴졌다. 동시에 침대에 대고 있던 양 무릎 아래로 탄탄한 팔이 파고들었다.
“……엇.”
찬희의 팔오금과 내 무릎 오금이 겹치고, 이어 하반신이 붕 떠올랐다. 지지대를 잃고 허우적대는 몸을 단단히 받쳐 든 찬희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으앗!”
나는 녀석이 나를 침대에 똑바로 눕힐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찬희는 일어선 그대로 내게 입을 맞추며 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따질 틈도 없이 침실 벽에 등이 닿았다. 물론 여전히 다리가 붙들려 있어 바닥을 디딜 수는 없었다. 찬희가 손에서 힘을 풀기만 하면 푹 내리꽂힐 것만 같았다.
“흐읏, 치, 침대에서, 해…….”
입술이 떨어지는 틈을 기다려 애원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한 번 더 내 몸을 추어올린 찬희가 낮은 목소리로 투정했다.
“……그러면 형 도망가잖아요.”
침대에서 할 때마다 압박감과 뒤섞인 쾌감을 이기지 못해 앞으로 기어가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얼굴이 훅 달아오른 것도 잠시, 찬희가 나를 벽에 짓누르듯 몸을 붙이며 잠시 멈췄던 삽입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윽, 흑……!”
녀석의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래봤자 내 무게에 못 이겨 떨어지는 몸을 온전히 멈출 수는 없었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 주위로 녹은 젤이 거품처럼 밀려 나왔다.
“……으응, 차, 찬희야…….”
“후우…….”
“앗, 나……. 조금만 더 들어……. 앗, 아……!”
천천히,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차근차근 욱여넣는 살덩이가 지나치게 뜨겁고 단단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찬희의 허리로 양발을 교차해 매달렸다. 잠깐이라도 더 도망쳐 보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애석하게도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자마자 배 속이 꽉 조여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
멈칫한 찬희가 신경질적인 한숨을 토해냈다. 아마 무의식중에 그런 거겠지만 나는 조금 놀라버렸다. 그 바람에 그나마 남아 있던 힘이 풀렸고, 찬희가 미처 붙들어줄 틈도 없이 하반신이 푹 가라앉았다.
“……!”
한순간에 끝까지 들어온 살덩이가 배 속 가장 깊은 곳을 짓찧어 올렸다. 출렁이듯 요동치던 신경줄이 하복부에 모여 경련을 일으켰다. 아, 하며 손을 놓친 나를 찬희가 얼른 꽉 안아 들었다.
“흐, 아으으…….”
고개를 젖혀 정수리를 벽에 댄 채 오랫동안 떨었다. 온몸의 예민한 부분마다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쾌락에 덜컥 두려워졌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히자 찬희가 내 눈가를 핥아 올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배 속이 재차 짓눌렸다. 신음하며 고개를 떨어뜨리자 녀석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파요?”
……실은 쪽팔림이 더 컸다. 한 번 싼 지 얼마나 됐다고 넣자마자 또.
“……아, 니야. 그냥 창피해서…….”
“뭐가요?”
“진짜……. 변명하는 것도 구차한데, 나 정말 조루 아니거든…….”
“……?”
찬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형 안 쌌는데요?”
그 말에 두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내 것은 여전히 빳빳이 선 채 찬희의 복근을 누르고 있었다. 처음 내보낸 걸 제외하면 사정의 흔적도 없었다. ……분명 느낌이 있었는데? 영문을 몰라 굳어버린 나를 두고 찬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형……. 저 조금 움직여도 돼요?”
“…….”
안 된다고 해야 해. 그런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찬희야말로 이제 한계인 것 같았다. 평소보다 근육이 선명해진 팔에 굵은 핏줄이 감기고,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진 호흡이 내게로 끼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원스레 허락할 기력도 없었다. 결국 나는 녀석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찬희가 팔에 힘을 주자 몸이 밀려 올라가며 안쪽이 빈틈없이 눌렸다.
“아, 하윽…….”
다시 퍽, 쳐올리는 기세에 예민해진 피부가 철퍽대며 부딪쳤다. 그때마다 애매한 사정감이 빳빳하게 몰려들다 결과물 없이 묽어지기를 반복했다. 아, 이게 대체 뭐지. 시야는 흐려지고 생각은 흩어져갔다. 어떤 의문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 몸을 채우는 자극이 어서 끝났으면 싶기도 하고 영원히 계속됐으면 싶기도 했다.
“하아, 아, 찬희. 찬희야.”
헐떡이며 부르자 찬희가 고분고분 입을 맞춰왔다. 뜨거운 혀가 목구멍까지 찔러 들어옴과 동시에 하반신이 들러붙듯 내리꽂혔다. 악, 비명은 찬희의 혀 아래 눌려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쿵, 쿵, 온몸이 흔들릴 때마다 내장이 온통 뒤섞이는 듯했다. 뒤섞인 자리부터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땀과 눈물에 부옇게 흐려진 시야에는 오로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새까만 눈만 담겼다. 찬희는 마치 한 점 남은 살덩이를 뜯어먹는 동물처럼 나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 조급함이, 가문 땅 위에서 물 한 모금을 갈구하는 듯한 움직임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찬희야, 기분……. 기분 좋다고 해줘.”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하지. 이토록 선명히 보이는데, 누가 봐도 나를 원하는데, 굳이 말로 듣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원초적이고 야만적이며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에서 머리가 터져 나갈 정도의 행복감을 느끼는 게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형.”
나지막이 뇌까린 찬희가 퍽,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짓쳐 올렸다. 나는 도망칠 곳도 없는 허공에서 오랫동안 몸서리쳤다.
“하으윽…….”
“형, 좋아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뜬 것도 잠시, 녀석이 내 허리를 붙들어 제게로 힘껏 끌어당겼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호흡이 피부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이제는 다 내 숨이고 내 체온 같았다. 찬희도 그래서 이토록 온 힘을 다해 나를 끌어안는 걸까. 이성도 체면도 흔적 없이 날아가고 일체감을 향한 갈망만이 남자 모든 것이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나는 녀석의 뺨을 감싸며 정신없이 입을 맞췄고, 찬희는 나를 움켜쥐듯 안은 채 오랫동안 사정했다. 관자놀이에서 쿵쿵 울리는 것이 내 맥박인지 찬희의 숨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안락한 탈력감에 오래도록 잠겨 있고 싶을 뿐이었다.
* * *
“……내가 미쳤지…….”
씻고 나오자마자 침대에 뻗어버린 나를 보고 찬희가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기진맥진한 나를 욕실까지 옮겨 구석구석 씻겨주고도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얼굴이 반들반들한 것이 상쾌하게까지 보였다. ……혹시 이래저래 나만 정기를 뺏기고 있나? 감각이 반쯤 사라진 허리를 혼자 문지르고 있자니 침대 가에 앉은 찬희가 상체를 낮춰왔다.
“제가 주물러 드릴까요?”
“어, 좀 주무르……. 아, 아니야. 만지지 마. 저리 가.”
은근히 뻗는 손끝이 야릇하게 움직이는 모양에 얼른 벽으로 굴러 도망쳤다. 찬희는 쫓아올 것처럼 겁을 주면서도 정말로 그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미국 가서 동거하는 건 생각 좀 해봐야겠어…….”
농담 반, 진담 반을 정확히 섞어 말하자 찬희가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벌써 계약금이랑 석 달 치 월세 다 보냈는데.”
“찬희는 거기 살아. 형아는 학교에서 연결해준 셰어하우스로 갈 거야.”
“욕조까지 있는 스튜디오로 정말 어렵게 찾았는데.”
“모르겠다아, 안 들린다아.”
“크리스마스 마켓 열리는 거리도 다 알아놨는데…….”
“몰라, 몰라. 아무튼 앞으로 한 달은 금지야. 알았어?”
시무룩 가라앉은 얼굴이 못 견디게 귀여워 보이는 것이 내 병이고 업이었다. 하아, 한숨을 쉬고 모로 누웠다. 물론 나도 충분히 혈기 왕성한 나이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절대 아니지만……. 집에 홈 짐을 차려놓고 사는 스물두 살을 감당하기엔 역시 체력적인 부담이 큰 것 같다.
“아, 형. 키트 업뎃됐나 봐요.”
뻐근한 몸을 늘어뜨리고 한껏 뻗은 내 곁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찬희가 말했다. 어디, 하며 들여다보니 커뮤니티 계정에 슬슬 키트 패배담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제목 : 30태웠다
내용 : 요정여왕 귀걸이 떴는데 이거 좋은거냐?
└빛나는 붙었으면 좋은거
└걍 귀걸이는 이번에 엄청풀려서 시세나락갔음
“진짜? 요정여왕 귀걸이가?”
갑자기 시티보이가 떠올랐다. 온더고한테 그 비싼 돈을 주고 샀으면 어쩔 뻔했나, 내가 다 아찔해졌다. 고작 두어 달 만에 이렇게 될 거였는데.
“드루이드 스태프 산다고 글 올려둘까요?”
“아, 아니야……. 놔둬. 어차피 구슬 풀리기 시작하면 드루 무기는 헐값에 나올 거야.”
“그래요? 왜요?”
“……왜긴.”
드루이드 하는 놈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지……. 차마 내 입으로 내뱉기는 참담한 말을 애써 삼키고 찬희에게 어깨를 바짝 붙였다.
“무기 검색해봐. 얼마 정도에 나오나.”
“보자……. 구슬째로 파는 사람 한 명 있네요. 가격은……. 150억.”
“…….”
현 시세로 환전하면 대략 200만 원쯤 될 것 같았다. 나는 턱을 괸 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분명 이걸 쪼개서 파는 놈이 나온단 말이지. 그럼 그 안에서 드루이드 스태프는……. 비싸봐야 5억쯤 될까. 그 정도라면 내 계정에 있는 골드로 충분히 구입할 수 있다. 새싹 타이틀과 솔가 쩔 파티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이 대충 7억 골드쯤 있었다.
“됐다, 됐어. 누가 드루 것만 팔면 그거 사지, 뭐.”
“다크베어 무기는 얼마쯤 할까요?”
“갖고 싶어?”
“그거 자체가 갖고 싶은 건 아니고, 형이랑 같은 템으로 맞추고 싶어서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인 찬희의 눈꼬리가 길게 접혔다. ……이 요사스런 녀석 보게. 나는 픽 웃으며 찬희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얼마든 형아가 사줄게.”
“정말요?”
“그래. 다크베어도 뭐 인기가 있어봐야 얼마나…….”
“……어.”
웃으며 핸드폰을 훑어 내리던 찬희가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에 들어온 것은 게시판 가장 최신 글 제목이었다.
제목 : 드루스태프 20억에 삼ㅅㅅ
“뭐? 이런 미친, 왜?!”
흥분하며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어그로일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손끝으로 눌렀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내용 : 카피반의후예 < 쪽지
―댓글 리스트―
댓글1 : ??드루것만 20억에 산단소리임?
└ㅇ
└왜??
└왜인지알면 팔거임?
└흠ㅋㅋ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독 드루이드 스태프를 산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호기심(과 약간의 빡침)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찬희를 잡아끌고 서재로 향했다.
나란히 앉아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길드 룸 한가운데에 포즈를 잡고 서 있는 시티보이와 마주쳤다. 이미 S급 아이템인 <빛나는 요정여왕의 귀걸이>, <빛나는 봄날의 연회복>, <빛나는 마도사의 지팡이>까지 모조리 장착한 채였다. 온몸으로 번쩍대는 엘프가 새로 접속할 길드원만 기다렸다는 듯 제 자리에서 빙글 돌아 보였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와 멋지네요 시티님
자고로 룩덕을 상대할 때의 기본 소양은, 평소와 다른 착장을 알아채고 칭찬하는 것이다. 신이 난 시티보이가 ‘엘프의 축제 댄스’를 추었다.
[길드] 시티보이 : ㅎㅎㅎ
[길드] 시티보이 : 사실 정말 기분째지는 소식은 따로있어요
[길드] 까맘곰 : 안녕하세요
[길드] 시티보이 : ㅋㅋㅋ온더고새끼
[길드] 시티보이 : 진짜로 귀걸이 갖고있었더라고요
[길드] 시티보이 : 가격 더오를때까지 묵혀두려고 존버했다는데
[길드] 시티보이 : ㅋㅋ그때 나한테 팔았으면 돈벌었을걸 ㅂㅅ
“헐…….”
그러게, 이건 좋은 소식이네. 나는 채팅에 대고 아낌없이 키읔을 날려주었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원래 인생은 타이밍이죠
[길드] 시티보이 : 하여튼 그래서 기분좋아가지고
[길드] 시티보이 : 갖고싶었던거 다질러버렸어영
[길드] 시티보이 : ^^
역시 룩덕의 축제는 의장 업데이트 날이군. 나는 시티보이가 휘두르는 지팡이를 유심히 보며 다시 손가락을 놀렸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시티님 혹시
[길드] 메리토크라시 : 지팡이 얼마주셨는지 물어봐도돼요?
[길드] 시티보이 : 이거 30억이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흠
[길드] 시티보이 : 드루스태프 사고싶으셔서요?
[길드] 시티보이 : 시세 대충 알아봐드릴까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아 그래주심 감사해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급한건 아니에요
그때 찬희가 옆에서 형, 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녀석이 모니터를 보며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지금 막 생각난 건데요.”
“……어? 어.”
“아까 그 사람, 드루이드 스태프 비싸게 사는 이유가 어쩌면…….”
[길드] 시티보이 : ???
[길드] 시티보이 : 이거 시세가 왜이러지..?
[길드] 시티보이 : 지금 드루 스태프가 제일비싸네요?
[길드] 시티보이 : 일단 판다는 사람이 부르는 최저가가 50억이에요
[길드] 시티보이 : 구슬 호가도 200억 갔네...
“그……. 소설이랑 관련 있는 거 아닐까요?”
“…….”
얼마 전 발매된 임정아의 『아시르스 오브 포츈』은 현재 전 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이를 먹고 직장인이 된 1세대 판타지 소설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장르 소설로서의 재미와 주제 의식, 캐릭터까지 놓치지 않은 수작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페이퍼백은 발행 2주 만에 2쇄에 들어갔고, 세트 가격이 10만 원에 달하는 양장본 펀딩도 무려 10억을 달성했다.
카피반 마을에서 자란 인간 소년 ‘토피어’가 대륙을 모험하고 동료를 만나고 세계의 비밀을 푸는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숨 쉴 틈도 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내가 이틀을 꼼짝도 않고 읽는 동안 방치된 찬희가 제법 진지하게 서운함을 표했을 정도였다.
가물었던 출판 시장에서 간만에 터진 대박인 만큼 게임 유입 인구까지 늘어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소설 주인공이 드루이드이니 드루이드를 신규 생성하는 유저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 모두가 이 손 타는 직업을 오래 잡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는데…….
[길드] 포푸리 : 지금 대량유입된 드루들이 전부 카피반 신봉자잖아여
[길드] 포푸리 : 카피반 리본 달려있다는 이유로 환장을하고 사려고드는데
[길드] 포푸리 : 이상하게 다 연령대는 높고 돈은 있고
[길드] 포푸리 : 그러다보니 산다는 놈들끼리만 경쟁붙어서 계속오르는중임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쌌다. 아……. 대충 3040 직장인들이겠군……. 대부분 MMORPG 경험도 있겠지……. 거기에 임정아의 골수팬이라면 얼마를 들여서라도 저 폴리곤 쪼가리를 얻겠다 목을 매도 이상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나를 보고 찬희가 음, 고민에 빠진 침음을 냈다.
“형.”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기에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조금만 사볼까요? 키트.”
“…….”
“실은 저 이런 거 약간 해보고 싶었어요.”
천천히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찬희가 배시시 웃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다시 한 편의 키보드 전쟁이 열렸다.
―25세 도파민 중독자 : 뭐 어때! 어차피 있는 게임머닌데 그냥 까버리자!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젊은 꼰대 : 확률성 아이템이란 수학을 모르는 호구들에게서 거둬들이는 공돈이나 다름없는 시스템으로서 사행성 게임을 조장하며……
―25세 도파민 중독자 : 뭐래? 1900만 원어치를 까겠다는 것도 아닌데.
―합리적인 판단력을 갖춘 젊은 꼰대 : 도박은 시작이 어렵지 중독은 일사천리……
“얼마나 살까요?”
“……한 뭉만.”
이런 싸움은 대체로 도파민 중독자가 이긴다. 나는 의자를 굴려 찬희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찬희는 시키는 대로 12,000원 짜리 한 뭉을 구매해 인벤토리에 넣었다.
“형이 열어보실래요?”
“아니야, 네가 열어. 나 이런 거 운 하나도 없어.”
“저도 뭐 당첨돼본 적은 없지만…….”
딸깍, 찬희가 마우스로 구슬 하나를 열었다. 그러자 화면 중앙에 떠오른 구슬이 빙글빙글 돌며 황금색 빛을 뿜어냈다. 이펙트 한 번 화려하네…….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상단에 네온사인 같은 안내 멘트가 지나갔다.
《까맘곰 님이 <빛나는 봄날의 연미복>을 획득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응?”
연미복이면……. 신상 의장 아니야? 시티보이가 입은 연회복은 긴 로브 형태의 드레스고, 연미복은 프릴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정장이었다. 두 의상 모두 입으면 반짝이는 나뭇잎이 캐릭터 주변을 감싸는 이펙트가 달려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게…….
[길드] 포푸리 : 헐
[길드] 포푸리 : 스급뽑으셨네
[길드] 시티보이 : ㅈ
[길드] 시티보이 : 제가
[길드] 시티보이 : 제가살게요
[길드] 시티보이 : 곤미
[길드] 시티보이 : 곰님
[길드] 시티보이 : 저한테파ㅅ요
다급한 시티보이의 외침 아래로 엄청난 양의 귓속말과 우편이 쏟아졌다. 부르는 대로 사겠다는 놈부터 구걸하는 놈까지 양상도 다양했다. 나는 찬희 대신 귓속말 차단 설정을 하고 흑곰에게 연미복을 입혀 보았다.
“…….”
목과 소매에 프릴이 달린 흑곰은 절로 풉, 웃음이 터질 만큼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초조해진 시티보이는 ‘애원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길드] 시티보이 : 젭라요
[길드] 시티보이 : 제게파세요
[길드] 시티보이 : 사람살려
“어떻게 할래?”
“음……. 그냥 드리면 어떨까 싶은데 안 될까요?”
“엉? 그냥?”
“네. 그 요리사 옷 검색해 보니 30억이더라고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흑곰이 열심히 입고 다니는 요리사 옷은 시티보이가 선물로 준 거였다.
“받을 때야 뭣도 모르고 받았지만, 알고 보니 어쩐지 뭐라도 보답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어서.”
“아……. 그러게. 그러네.”
물론 ‘빛나는 봄날의 연미복’은 지금 30억 이상도 받을 수 있겠지만……. 인간관계에선 그런 사소한 계산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다시 의자를 밀어 내 모니터 앞으로 돌아갔다.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시티님
[귓속말] 시티보이 : ㄴㅔ!!!
은밀하게 부르자 씩씩하게 대답한 시티보이가 이제는 ‘기원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곰이가 요리사옷 답례로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연미복 그냥 드리고 싶다고하는데
[귓속말] 시티보이 : ?????????????
[귓속말] 시티보이 : 헐아니애요
[귓속말] 시티보이 : 저그런거바라고말씀드린거아닌데;;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ㅇㅇ알아요
[귓속말] 시티보이 : 진짜괜찮아요 시세대로살게요
[귓속말] 시티보이 : 지금이거 요리사옷보다훨씬비싸요;;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아는데 신상 시세야 언젠가는 떨어지는거잖아요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곰이 마음이 그렇다니 그냥 받아주시고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대신 그.. 길드원들한테는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시티님이 시세대로 샀다고 말맞춰주세여ㅇㅇ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비싼거 너무 턱턱 주고받는거 보이면 좀 고깝게보는사람도 있을수있으니까
[귓속말] 시티보이 : ㅠ.ㅠ;; 아니 저진짜 이러고싶었던게아닌데...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ㅋㅋㅋ 걍 다음에 뭔가 또 귀여운옷얻으시면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곰이좀챙겨주세여
[귓속말] 시티보이 : ㅠ.ㅠ힝...
[귓속말] 시티보이 : 제가 곰님 패션위크 보내보겠습니다....
시티보이는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연미복을 받아 갔다. 연미복은 키 크고 늘씬한 엘프 캐릭터에게 더없이 잘 어울렸다. 막상 입으니 신이 나는지 다시 뽐내기 모드에 들어간 시티보이를 뒤늦게 접속한 길드원들이 빙 둘러쌌다.
[길드] 포푸리 : 오오
[길드] 포푸리 : 연미복 멋지당..
[길드] 연필 : 연미복 얼마예요?
[길드] 연필 : 개랑 세트로 입고싶은데
[길드] 사격수 : 개가 설마 지우개님이에요?
[길드] 연필 : ㅋㅋ전용애칭임
[길드] 메리토크라시 : 지금 파는 사람은 한 40억부르는데
[길드] 메리토크라시 : 연회복에 비하면 자주 뜨는거같으니까 좀 기다려보세여
[길드] 연필 : 쩝 신상은 당일에 입어야 의미가있는데..
시끌벅적한 길드원들을 내버려두고 다시 찬희 옆에 붙어 앉았다. 남은 9개의 구슬을 마저 까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구슬은 아무 이펙트 없이 덜렁 열렸다. ……그렇군. 높은 등급 아이템이 나오려면 빛을 뿜고 회전하는 거였구나. 결과물도 별 값어치 없는 제작용 잡템이었다.
세 개째, 네 개째……. 아홉 개째를 깔 때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흥미가 떨어진 나는 찬희의 인벤이 온갖 잡템으로 채워지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구슬을 클릭했을 때, 다시 구슬이 떠오르고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책상에 대고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에이, 설마……!
《까맘곰 님이 <빛나는 봄날의 연회복 구두>를 획득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
……그럼 그렇지. 맥이 빠져 찬희의 어깨로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연회복도 아니고 구두까지 S급으로 분류해놓을 건 뭐람.
[길드] 시티보이 : ㅈ
물론 이거라도 갖고 싶은 사람은 많은 모양이지만……. 팔짝대며 다가온 시티보이가 일단 거래부터 걸고 5억을 올렸다. 간단히 팔고 나니 우리에게 남은 건 온갖 잡템과 5억뿐이었다.
“나 물 좀 마시고 올게…….”
비척비척 일어나 서재 밖으로 나섰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 주방에 닿고 나서야 새삼 내 집처럼 활보하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찬희 몫까지 작은 생수병 두 개를 꺼내 들고 돌아서자 거실 통창 너머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정원이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자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래……. 물욕 따위는 부질없는 거야. 이런 좋은 집에서 토끼 같은 애인이랑 꽁냥질하고 있으면 됐지. 무려 3개월을 미국에서 함께 보낼 예정이면 됐지. 폴리곤 쪼가리가 다 뭐라고 이 기분을 망쳐야 해. 애써 마음을 다잡고 웃는 얼굴로 서재 문을 열었다.
“찬희야, 너도 물…….”
……찬희의 모니터 화면에서 익숙한 구슬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너 뭐 해? 그거 또 샀어?”
“네, 조금만 더 사봤어요.”
“자기야……. 이런 건 최대 한 뭉만 사는 거야. 그 이상 사봤자 패가망신만 할 뿐이지 아무 의미도 없…….”
잔소리를 쏟아내며 의자에 앉자마자 다시 별 쓸모없는 제작템이 나타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찬희는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인벤을 들여다보니 구슬 89개가 남아 있었다.
“아홉 뭉 샀어?”
“네. 열 뭉까지만 해보자 싶어서.”
“…….”
그래, 뭐. 캐시가 1900만 원이 있고, 연미복이랑 구두 뽑은 것만 해도 이미 수십만 원어치는 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녀석에게 12만 원쯤은 큰돈 아닐 것 같고……. 무엇보다 어쨌든 찬희 돈이지 내 돈도 아닌데 과하게 참견하는 것도 좀 주제넘지 싶었다.
“그래……. 난 드루이드 일퀘 좀 하고 올게.”
“네에.”
그 사이 하나둘 사행성 소비에 걸려들기 시작한 길드원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길드] 포푸리 : 재봉사 골무 필요하신분ㅎㅎ
[길드] 포푸리 : 싸게드릴게요 5천~^^
[길드] 시티보이 : 약팔이아냐?
[길드] 연필 : 하ㅠㅠ연미복
[길드] 연필 : 시티님.. 저 연미복 한번만입어보면안대여?
[길드] 시티보이 : 입어보세여 ㅋㅋ
[길드] 연필 : 감사합니다 이제 절 찾지마시길...
[길드] 시티보이 : ㅋㅋ 사이버경찰청 홈페이지 열었습니다
그 사이 찬희는 옆에서 계속 마우스를 딸각대고 있었지만, S급 아이템을 뽑았다는 알림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첫 구슬에서 연미복이 나온 것만도 엄청난 행운이었지.
[길드] 포푸리 : 곰님은 왜 여기서 꼼짝않고계시지?
[길드] 포푸리 : 계속 구슬까고계신가
[길드] 연필 : 아 그러고보니..
[길드] 연필 : 저희 오프언제해여?
[길드] 연필 : 퍼클보상ㄱㄴ?
“……아.”
그러고 보니 퍼클에 성공하면 오프 하기로 했었지. 나도 모르게 찬희를 돌아보자 찬희도 눈을 맞춰왔다.
“그때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소리긴 한데……. 너 길드원들 만나는 거 괜찮아?”
“네, 전 상관없어요.”
때마침 타이밍 좋게 사격수와 옹팍, 지우개까지 차례로 접속했다. 어느새 화제는 키트에서 오프 모임으로 옮겨 가 있었다.
[길드] 사격수 : 전 주말이면 괜찮음
[길드] 옹팍 : 저도여
[길드] 지우개 : 근데 장소는 어디에요?
[길드] 시티보이 : 이번주면 저도 ㄱㅊ
[길드] 시티보이 : 다들 어디사시는데요?
[길드] 연필 : 저랑 개는 인천살아요
[길드] 사격수 : 전 잠실..
[길드] 옹팍 : 전 의왕이여
어째 점점 당장 이번 주말에 만나자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핸드폰 스케줄러를 열었다. 내일모레가 토요일이니까, 나도 그때까지 아무 일정 없긴 하지만…….
[길드] 메리토크라시 : 경인지역 거주자도 있으니까
[길드] 메리토크라시 : 한 사당쯤으로 잡아볼까요?
자고로 여기저기 퍼져 있는 사람끼리 만날 때는 교통편 좋은 곳이 최고다. 다행히 다들 별 이견 없이 좋다고 입을 모았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럼 토요일에 만나는걸로하고.. 자세한건 디코 레이드방에 안내드릴게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급하게 잡는거니까 이번엔 솔가팀 먼저 보고
[길드] 메리토크라시 : 나중에 길드 전체 오프도 추진해보죠
혹시 레이드에 참여 못한 길드원들이 서운해할까 싶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길드 단위로 오프라인 모임을 자주 가져봤자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오프 친목을 너무 깊게 해도 문제고, 괜히 싸우기라도 하면 더 문제다. 곧 인턴십도 나가겠다, 이미 약속한 것만 대충 때우고 끝낼 셈이었다. 어차피 내년이면 취준하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길드] 지우개 : 드디어 세계최고의 미남을 영접하는건가...
[길드] 연필 : ㄷㄱㄷㄱ
[길드] 지우개 : 두근두근?
[길드] 연필 : 두구두구임 ㅋ
얼결에 잡힌 약속이지만 제대로 이행하는 건 내 책임이었다. 여덟 명이 모여 놀 만한 장소를 잡으려면 어디가 좋을까. 핸드폰을 들고 SNS를 검색하기 시작한 지 얼마인가 지났을 무렵,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찬희의 마우스 클릭음이 멈췄다.
89개를 다 연 모양이었다. 그러나 S급 아이템 알림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키트라는 게 원래 이런 거야. 나는 바닥을 밀어 의자를 찬희 쪽으로 밀었다.
“다 꽝이야?”
“네. 놀랍도록 이런 것만 나오네요.”
찬희가 제 캐릭터에 ‘신사 콧수염’을 장착했다. 도톰한 머즐에 만화 같은 콧수염이 달렸다. 나는 와하하 웃으며 찬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귀엽네, 뭐.”
“흠…….”
“이제 그만 사. 이런 거 원래 다 이래. 첫 끗발이 좋았다고 계속 돈 부으면 결국은 망하게 돼 있다니까.”
“그러네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보상이 나올 줄 알았어요. 현금 받고 파는 아이템이 다 이런 거라니 좀 놀라운데…….”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모양에 동질감이 들었다. 나도 설마 돈 받고 쓰레기만 팔겠나 믿던 때가 있었지……. 찬희를 위로하기 위해 뺨을 쓰다듬는데 녀석이 갑자기 제 마우스를 툭툭 두드렸다.
“실은 한 개 남았는데, 이건 형이 열어보실래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인벤토리에 구슬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또 사양하며 나 운 없다니까, 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마우스를 쥐었다. 어차피 뭘 기대하고 까는 것도 아니고, 내 손이야 시작부터 개끗발인데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그나저나 우리 오프는 아예 저녁쯤 잡을까? 다인원 들어가려면 차라리 호프집 같은 데가 나을 것 같은데.”
“형이 술 드시고 싶은 건 아니고요?”
“들켰어?”
익숙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딸깍 눌렀다. 내 머릿속에는 여덟 명의 레이드원과 사당이라는 장소만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부 동의하면 술집으로 하고, 아니면 공간 분리가 된 카페 같은 곳을 알아보자. 그래야 게임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떠들 수 있을 테니까.
“몇 시쯤 나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이제 정해야지. 너 차 가지고 갈 거면 나 좀 픽업해서…….”
그때 번쩍, 화면에서 금빛 이펙트가 뿜어져 나왔다.
“…….”
우리는 동시에 말을 멈추고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떠오른 구슬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어? 멍청한 감탄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을 맴돌았다.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화면은 이내 잠잠해졌다.
에이, 설마. 또 구두 같은 거나 나왔겠지. 곧 정신을 차리고 인벤토리를 훑었다. 그러나 온갖 잡템을 쑤셔 넣은 창고가 되어버린 흑곰 인벤토리에서 방금 뽑은 아이템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상단 알림이 흐르기 시작했다.
《까맘곰 님이 <빛나는 무기 구슬>을 획득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길드] 포푸리 : ㅁㅊ
[길드] 포푸리 : 대박
[길드] 연필 : ?!??!?!
[길드] 시티보이 : ??????
“허……?”
다시 눈을 비비고 인벤토리를 뒤졌다. 그제야 <카피반의 신통한 구슬>이 있던 자리에 똑같이 생긴 구슬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색깔이 미묘하게 다른 구슬에 마우스를 올리니 아이템 이름이 길게 떴다. <빛나는 무기 구슬>.
“…….”
마우스를 툭 놓쳤다. 온몸의 맥이 풀린 듯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도 잠시, 이내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찬희는 벌떡 일어나 방안을 배회하기 시작하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벽을 짚고 섰다가, 괜히 문을 열었다 닫았다가, 내 의자에 앉았다가 도로 일어나 찬희에게 달려들었다.
“자기야!”
덥석 끌어안고 올라타자 찬희가 우왓, 하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뒤로 쭉 밀려 나가려는 의자를 멈춰 세우기 위해서였다. 아랑곳없이 눈앞의 얼굴을 끌어안고 힘껏 입을 맞췄다. 찬희는 뒤늦게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떨어지지 않게 허리를 감았다.
“깜짝이야, 그렇게 좋아요?”
“아니, 이게……. 이게 말이 돼? 진짜 이게 말이 돼?”
“와, 형. 심장 엄청 빨리 뛰어요.”
흥분한 내 가슴에 손을 대본 찬희가 걱정스레 말했다. 나는 행여나 꿈일세라 찬희를 만지작대며 손끝의 감각을 확인했다.
“아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너……. 너 미친 게 틀림없어.”
“진정해요. 진정. 괜찮아요.”
“어떻게 저게 진짜로 나와? 너 무슨 수 쓴 건 아니지?”
단단한 어깨에 손을 얹고 앉은 채 팔짝 뛰었다. 한 번 더 뒤로 밀린 의자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그러자 내 허리를 감은 찬희의 손끝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내려다보니, 예쁜 눈가에 약간의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아.”
난처한 듯 미소 짓는 얼굴, 다리 사이로 빠듯이 느껴지기 시작한 압박감에 뒤늦게 마른침을 삼켰다. 쿵, 쿵,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심장 박동이 자꾸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당장 내려가 아무 농담이나 던짐으로써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수습하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합리적인 판단 대신 도파민 중독자의 자아를 택했다. 제 바지를 끌어 내리는 내 손을 내려다보던 찬희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한 달은 금지 아니었어요?”
“……내일부터.”
“신난다.”
입을 맞추자 잠시 잊고 있던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한껏 웃으며 거추장스러운 옷을 바삐 걷어 올렸다.
* * *
물론 모든 뒷감당은 오롯이 충동에 진 나약한 인간의 몫이다. 다음 날은 집으로 돌아가 아르바이트에 집중하려던 내 계획은 완전히 불이 붙어버린 어린 애인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찬희는 평범하게 앉거나 자려고 누웠을 때도 꼭 몸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어깨에 기대면 허리를 안고 허리를 안으면 목덜미를 쪽쪽대고 그러다 보면 또 입술이 닿고…… 뭐 그런 식이었다.
“하나도 못 봤잖아…….”
결국 토요일 아침, 내게 남은 것은 검토해야 할 부분이 여전히 산더미인 교정지와 구석구석 멍울지고 기력이 쇠한 몸뚱이뿐이었다. 알몸으로 침대에 늘어진 나를 두고 홀로 파자마까지 갖춰 입은 찬희가 내 손에 들린 교정지를 받아들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
“영어는 저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할까요?”
출력물을 넘기며 체크하는 표정이 자못 진지해 보였다. 나는 침대를 굴러 시트를 몸에 휘감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아니야, 둬……. 내 일인데 내가 해야지…….”
“여기 탈자 있네요. 문맥상 former 같은데 fomer라고 돼 있어요.”
출력물을 내 쪽으로 들이민 찬희가 첫 장에 나온 예문 기사 중간을 손가락으로 찍어 보였다. 그 와중에 R 발음이 더없이 근사했다. 나는 침을 꼴딱 삼키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 일단 거기 있는 펜으로 체크해줄래?”
“얼마 안 걸릴 것 같은데 제가 할게요. 형은 좀 더 쉬세요.”
오프 약속은 오후 3시였다. 사격수가 금주 중이라는 말에 적당한 모임 장소를 따로 찾은 것이다. 적당히 놀다가 상황을 봐서 저녁도 먹으면 되겠지 싶었다. 나는 엎드린 채 상체를 일으켜 찬희를 바라보았다. 찬희는 이미 쪼그려 앉은 채 교정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서재 가서 책상에 앉아서 해. 바닥에서 보려면 불편하잖아.”
“아니에요. 형이 안 보이는 게 더 불편해요.”
“…….”
참 맨정신으로 별소리를 다 한다니까……. 시트에 파묻혀 모로 누워 있으니 어느새 방 안은 팔락대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 사각대는 펜 소리로 가득 찼다. 벗은 몸을 감싼 부드러운 이불, 평화로운 온도와 간헐적인 소음에는 없던 잠도 불러오는 효과가 있었다. 가물가물 흐려지던 눈앞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아시르스 대륙의 드루이드였다. 카피반 할머니가 매어준 리본이 행여 상하기라도 할까 스태프를 못 꺼내고 종종대다 들쥐에게 맞아 넉다운 당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스태프를 꺼내고 싶어도 손이 시원스레 움직이지 않았다. 분해서 땅을 치고 있으려니 멀리서 흑곰이 머리 위로 대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형! 기운차게 부르는 목소리에 안도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그런데 흑곰은 내 대신 들쥐를 때려잡기는커녕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선 채 형, 형, 부르기만 했다. 어, 알겠는데 저 들쥐부터 좀 잡아봐. 손짓 발짓하며 열심히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형.
그때 기어코 점프한 들쥐가 내 어깨를 들이받았다. 온몸이 흔들리며 눈이 번쩍 뜨였다.
“형?”
눈앞으로 잘생긴 얼굴이 쑥 다가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이게 뭐 어떻게 된 일이지.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녀석이 제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죄송해요. 슬슬 깨워야 될 것 같아서.”
“……응?”
그제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1시 50분이라는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1시 50분…….
“1시 50분?”
버럭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 앉았다. 약속은 사당에서 3시였다. 내가 주최했으니 최소 10분은 일찍 도착할 셈이었는데.
“좀 일찍 깨우지. 나 세수도 못했는데.”
“아침에 샤워하셨잖아요.”
“아으, 진짜……. 잠깐만. 나 옷 어디 있지?”
“여기 있어요.”
조신하게 대답한 찬희가 그저께 벗어놓은 내 옷과 새 속옷까지 차곡차곡 대령했다. 급하게 옷가지를 꿰어 입고 양치를 했다. 그 난리를 피우는 동안에도 찬희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는 데 오래 안 걸려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네가 사당을 몰라서 그래. 거기 얼마나 차 많고 복잡한데. 빨리 나가야 돼.”
결국 내가 더 안달 내며 재촉한 뒤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에는 2시 45분 도착 예정이라고 떴지만, 절대 이 시간에 도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디스코드 단체방에 조금 늦을지 모른다고 전하고 사과부터 했다.
사격수 : ㄱㅊ아요 차막히면 늦을수도있죠
사격수 : 그나저나 다들 술드시고 싶었던것같은데 좀 죄송하네요
사격수 : 저 안주발만 세워도되니까 술집가셔도 돼요
시티보이 : ㄴㄴ전 술없는 자리가 좋아여
옹팍 : 저도 술 별로 안좋아해서
옹팍 : 카페가조음여
포푸리 : 푸리는 술좋아하는뎅
포푸리 : 데헷
모두가 한마디씩 보태는 와중에 연필과 지우개만 조용했다. 혹시 이 녀석들도 늦나? 내가 초조해하는 게 보였는지 찬희가 조심스레 권했다.
“형, 도착하면 일단 형만 먼저 내려드릴게요. 전 주차하고 따라 올라가고요.”
“……아. 그러게. 그럴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지만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도착 시간은 한없이 뒤로 밀리고만 있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주차 사정까지 봐주지는 않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목적지 카페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땐 정확히 오후 3시였다.
“나 먼저 내릴게. 천천히 올라와.”
“네. 형, 뛰지 마세요.”
어엉, 꿀떡 같이 대답은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달려 건물 입구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윤조야. 눈 없어? 누가 봐도 이리로 들어가야 되잖아.”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잡아채는 듯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가 제 옆에 선 남자를 장난스레 타박하는 중이었다.
“건물이 붙어 있어서 헷갈린 거야.”
타박 당한 남자가 배시시 웃었다. ……저 목소리도 익숙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대며 조심히 그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부르자 둘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타이밍이며 표정까지 둘이 똑같아서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연필 님이랑 지우개 님?”
입으로 말하려니 조금 부끄러웠지만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들끼리 한 번 눈을 맞추더니 이번에도 동시에 입을 열었다.
“메리 님이세요?”
그러더니 키가 조금 작고 눈이 치켜 올라간 남자가 먼저 내게 성큼 걸어왔다.
“우와! 안녕하세요, 제가 연필이에요. 포푸리 님이 하도 메리 님 잘생겼다 그래서 궁금했는데, 진짜였네요.”
“하하…….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옆 건물 잘못 들어갔다 나왔어요.”
그러는 사이 시간은 3시 5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얼른 건물 입구를 가리켜 보였다.
“저희 일단 들어가죠. 다들 먼저 와 계실 것 같은데.”
“참, 그럴까요? 윤조야, 가자.”
연필이 제 뒤쪽의 남자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지우개도 내게 눈인사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만 지각인가? 곰 님도 먼저 와 계신 거예요?”
“곰 님……도 금방 올라올 거예요. 지금 주차 중이에요.”
“아아, 같이 오셨어요?”
“네, 가까운 데 살아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카페는 건물 가장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다. 넓은 공간 한쪽을 벽으로 막아 세미나 등의 용도로 대여하는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안내를 받아 문을 열자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구면인 포푸리와 유일한 여자 멤버 시티보이까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나, 그 앞의 남자 둘은 소개가 필요했다. 나는 열린 문을 잡고 연필과 지우개부터 들여보낸 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땅한 사과 멘트부터 늘어놓자 자리에 앉던 연필도 손을 번쩍 들었다.
“저희도 죄송합니다아.”
“버스 타고 왔는데 차가 너무 막히더라고요.”
지우개가 이어 말하자 포푸리가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와, 두 분 현실에서도 말을 이어서 하네요? 진짜 웃긴다.”
“저희 그렇다니까요.”
“아무튼 먼저 온 사람들끼리는 소개했는데, 제가 포푸리예요. 반갑습니다.”
이어 옆에 앉아 있던 여자도 고개를 꾸벅했다. 시티보이는 짧은 단발머리에 뺨이 통통해서 내가 아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외관만 놓고 보면 10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제가 시티보이예요.”
짧게 소개하고 입을 다무는 모양이 왠지 낯을 좀 가리는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제가 옹팍이요. 아, 닉네임 너무 대충 지었더니 이런 데서 말하려니까 창피하네요.”
키는 나보다 좀 작을 듯했다. 얼굴도 동그랗고 눈이 커서 다람쥐 같은 인상을 풍겼다. 경망스러운 평소 채팅과 매치되지 않는 외모였다.
“뭐 어때요. 사격수라고 지은 저도 있잖아요.”
그 옆에 앉은 남자가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머리를 단정히 넘기고 말끔한 셔츠를 차려입은 그는 이 모임에서 유독 이질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사격수는 솔직히 레어닉이죠. 저런 닉네임은 어떻게 먹는 건가 맨날 궁금했는데.”
“베타 테스트 첫날은 되게 널널했어요. 연필 님이랑 지우개 님도 그때 선점하신 거 아니에요?”
“맞아요. 저희 심지어 원래 하던 게임이 서버 점검하는 바람에 딴 거 뭐 없나 찾다가 압포 깔아본 거였는데, 마침 그게 베타 첫날이었더라고요.”
막상 만나면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게임이라는 공통 주제가 있다 보니 생각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으려는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시티보이가 별안간 물었다.
“그나저나 길마님, 지금 무기 구슬 시세 250억 넘은 거 알고 계세요?”
“……예?”
이틀 내리 게임을 즐기긴커녕 침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터라 당연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시티보이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산다는 사람 기준이고 파는 사람이 없어요. 확률조정 한 번 더 한 거 아니냐는 소리 나올 만큼 안 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곰 님은 그렇게 대박을 쳐놓고 왜 접속을 안 하세요? 혹시 오늘도 안 오시는 거예요?”
“아, 그게…….”
그때 등 뒤에서 끼익, 유리문이 열렸다. 대화 소리가 뚝 끊기고 모든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했다. 메뉴판을 보느라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든 옹팍이 헉……. 소리를 냈다. 문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당연하게도 찬희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따라 유난히 진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좁은 세미나실을 가득 채웠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를 좀 멀리 대고 오느라…….”
“와, 이런 미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옹팍이 갑자기 짝, 짝, 박수를 쳤다.
“세계 제일의 미남은 솔직히 개오바일 줄 알았는데……. 팩트였다니.”
“깜짝이야. 갑자기 TV 보는 줄 알았어요.”
“제가 말했잖아요.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겼다니까요.”
사격수와 포푸리가 한마디씩 거드는 사이, 나머지 인원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찬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별수 없이 속이 좀 뒤집어졌다. 하여간 저거 밖에 돌아다니게 두면 안 되는데.
“……곰 님, 진짜 왜 인방 안 하세요? 푸리님 말대로네요. 방송 켜고 숨만 쉬어도 달에 억대로 버실 것 같은데.”
한참 후에야 침 닦는 시늉을 한 시티보이가 물었다. 나는 찬희를 끌어당겨 옆자리에 앉히며 대신 대답했다.
“곰 님 집이 엄해서 그런 거 못해요.”
그러자 찬희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집이 엄해요.”
“미쳤다. 웃는 것도 너무 잘생겼다.”
시티보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미처 정제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곰 님, 여자 친구 있으세요? 당연히 있죠?”
옹팍이 짓궂게 묻자 찬희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결혼 약속한 사람은 있어요.”
모인 이들에게서 와악,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겨얼호온? 곰 님 몇 살이신데요?”
“스물둘이요.”
쉽게 대답하는 찬희를 향해 사격수가 아예 몸을 돌려 앉았다.
“스물둘에 약혼자가 있다고요? 곰 님, 혹시 어디 재벌가 아들이에요? 공개 안 된 재벌 자제 중에 이강유업 막내아들이 이십 대 초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혹시…….”
“이강유업이 어디예요?”
“……그런 우연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근데 정말요? 농담 아니고?”
이어지는 추궁에 찬희가 힐끗,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당연히 녀석을 주시하던 이들의 시선도 모두 내게로 옮겨 왔다. 찬희야, 이 녀석아…….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게나 둘러대었다.
“맞아요. 찬희 약혼자 있어요.”
“찬희?”
“찬희라고요?”
“곰 님 이름이 찬희예요? 진짜 이름 정도는 만식이나 돌쇠면 안 돼요?”
울분에 찬 마지막 말을 뱉은 것은 옹팍이었다. 건너편에서 시티보이가 음료수를 마시다 말고 풉,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궁금하다. 이런 미남이랑 약혼하려면 어떤 사람이어야 돼요?”
“쬐끔만 썰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사생활 파고들려는 건 아닌데 진짜 너무 궁금해서.”
“음…….”
찬희의 시선이 이번에도 내게로 향했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로 눈을 피해버렸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저 일곱 살 때 만난 첫사랑이에요.”
“……예? 약혼자 스토리마저 이런 드라마라고요? 진짜 살맛 안 나네.”
찬희는 아랑곳없이 예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 목표였어요. 꼭 이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고.”
“일곱 살에요?”
“네.”
“아니, 대체 누구길래……. 집안끼리 아는 사이거나 그래요?”
물론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 자아, 하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여러분. 사적인 이야기는 거기까지만 캐시고요.”
“악, 안 돼. 결정적인 순간이었는데…….”
“그보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곰 님이 무기 구슬 뽑은 거 있잖아요. 저희 솔가 퍼클 축하 겸 각자 빛나는 무기 하나씩 나눠드리려고 하거든요.”
웅성대던 세미나실 안으로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역시 겜미새들의 주의를 돌리려면 아이템 이야기가 최고다.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던 길드원들 중 포푸리가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형님과 곰님을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었던 건 바로 저! 암수의 신!”
“현성아, 전부 준다고 하잖아. 말을 들어…….”
“순번이 중요한 거예요. 제일 먼저 받아야 가오가 살잖아요.”
그때 사격수가 손을 들며 저어, 하고 입을 열었다.
“너무 과한 보상을 주시는 거 아니에요? 무기 가격 지금 많이 올랐어요. 저희 줄 거 다 파시면 일이백 만원은 나올 텐데요.”
“물론 공짜로 드린다는 건 아니에요. 이제부터가 중요한데요.”
말을 이어가려던 그때 조용히 음료수만 마시고 있는 시티보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 하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시티님은 이미 무기 사셨죠? 어떻게, 부캐 무기로 받아가시겠어요?”
“네? 아니에요. 저는 이미 받은 게 있잖아요.”
시티보이가 얼른 손을 휘저으며 격렬하게 사양했다. 연미복이라면 요리사옷의 보답이었으니 별 상관없지 않나 싶었지만 우선은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제가 12월에 해외 인턴십을 가게 됐어요. 그래서 내년 2월까지 게임 접속을 못하거든요. 곰 님도 같이 갈 예정이고요.”
사격수와 연필, 지우개의 눈이 동시에 찬희에게로 향했다. 모두의 얼굴에 똑같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인턴십을 같이 가? 왜?
“그 기간 동안 저랑 곰 님 아이디 가지고 길드 관리 좀 나눠서 해주세요. 시간 널널하면 일퀘도 해주시면 좋고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3개월 간 접속 아예 못하세요?”
턱을 괸 지우개가 물었다. 눈꼬리가 내려간 얼굴은 별다른 표정 없이 나른해 보였다.
“아마 게임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미리 부탁드리고 가려고요.”
사실이 그랬다. 주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 나머지 시간은 찬희와 놀아야 하는데 버벅대는 인터넷 견뎌가며 게임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주말마다 여행도 다닐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바빴다.
“인턴십 다녀와서는 자주 오실 거죠? 저희 길드는 길마님이 아이덴티티인데.”
연필이 지우개와 대칭으로 턱을 괸 채 물었다. 나는 음, 하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내년이면 본격 취준생이니 지금만큼 게임을 오래 하긴 어렵겠지만, 즐겁자고 만난 자리에서 내 사정을 너무 시시콜콜 말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았다.
“노력해볼게요. 솔가 전까지 했던 것만큼 열심히 하긴 힘들겠지만요.”
“저희는 길마님 안 계시면 굳이 길드 생활할 이유 없는데…….”
“진짜요? 연필 님. 우리가 함께 쌓은 동지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열변을 토하는 포푸리를 향해 연필이 쪽, 손 키스를 날렸다. 둘이 그사이 많이 친해진 건지, 연필의 본체가 본래 능글맞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말이 없어진 지우개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뭐, 자세한 건 12월 돼서나 얘기할 거니까 오늘은 재밌게 놀고들 가시죠.”
“그래요. 찬성, 찬성.”
“어? 무기 배포는 어영부영 그러기로 된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싼 아이템인데.”
사격수가 한 번 더 이의를 제기했다. 아무래도 사회인의 체면상 넙죽 받기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모아 쥔 손을 테이블에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근데 격수님. 생각해보세요. 저희가 단체로 빛나는 무기 들고 돌아다니는 꼴을요.”
“……꼴?”
“만설 애들이 보면 눈꼴시어 죽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
고요하던 테이블에 서서히 심술궂은 생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사격수도 곧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비싸다 싶으시면 저희 일퀘나 좀 돌아주세요.”
“하루도 빠짐없이 책임질게요.”
게임 이야기가 정리되니 그다음부터는 다시 잡담이 이어졌다. 유저 사이에 도는 업데이트 관련 낭설과 소설판 『아시르스 오브 포츈』 이야기, <만설>에서 떨어져 나온 장또 무리가 초보 존에서 PK를 하고 다니다 개망신을 당한 썰 등 소재도 다양했다.
정신없이 떠들다 보니 어느새 세미나룸 예약 시간이 끝나고 오후 여섯 시였다. 슬슬 자리를 옮겨야겠다 싶어 솔가 스피드런 공략 논의에 열을 올리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저희 예약 시간 끝나서 슬슬 나가야 하는데, 저녁 먹으러 갈까요?”
그러자 합창하듯 네에― 활기찬 대답이 돌아왔다. 여덟 명이 들어갈 만한 식당도 이미 알아본 터였다. 핸드폰에 써놓은 정보를 들여다보는데 포푸리가 불쑥 참견을 했다.
“저희 밥 피방 가서 먹으면 안 돼요?”
손을 멈칫하며 고개를 들자마자 간절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입으로만 겜 얘기 한참 했더니 손으로도 하고 싶어졌는데. 저만 그래요?”
“맞아. 피방이나 갈까요?”
“저도 좋아요.”
연필과 지우개의 호응에 신이 난 포푸리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가리켰다.
“여기 길 건너에 제가 아는 데 있어요. 단체로 가기 좋고 밥도 맛있어요.”
“피방인데 밥이 맛있다? 그건 가야지…….”
옹팍은 이미 따라갈 기세였고, 사격수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 말이 없는 건 찬희와 시티보이뿐이었다.
“시티님은 괜찮으세요?”
“네? 아…….”
갑작스러운 호명에 놀란 듯 고개를 든 그녀가 잠시 머뭇대다 어렵게 고백했다.
“실은 저 피시방을 가본 적이 없어요.”
“……예?”
“그래서 가보고 싶……. 궁금하긴 해요.”
게임에 그렇게 미쳐 있는 사람이 피시방을 가본 적이 없다고……? 당연히도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상 희귀한 생물을 바라보는 분위기가 되자 찬희가 거들듯이 나섰다.
“저도 메리 님 만나기 전에는 가본 적 없어요.”
“진짜요? 사람이 피방을 안 가볼 수가 있단 말이야? 전 그런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옹팍이 테이블을 내리칠 기세로 목소리를 높였다. 찬희는 의례적인 미소를 띠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갈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집에 PC가 있으니까 굳이……. 한 거죠.”
“맞아요. 저도 딱 그거였어요.”
시티보이가 동의하자 나머지 인원은 다시 허어,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 사격수가 알겠다는 듯 손끝을 퉁겼다.
“그렇구나. 피방은 보통 동행이랑 놀려고 가는 곳이지, 게임만 하자고 가는 곳은 아니니까요.”
“그래요?”
“네. 커피가 목적이면 집에서 혼자 타 마시면 되지만, 대화가 목적이면 카페를 가게 되잖아요. 비슷한 거죠.”
“그렇구나. 이해했어요.”
시티보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예약 시간이 완전히 끝나고 직원이 세미나실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허둥지둥 일어나 짐을 챙기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럼 제가 아는 데로 갑니다?”
도로로 나오자마자 포푸리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고 찬희 옆에 붙어 섰다.
“찬희야, 괜찮아? 안 피곤해?”
다인원과 좁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대화를 하고, 2차로 피시방까지 가게 된 상황이 혹시 힘들지는 않을까 싶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묻자 찬희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응, 그래도 돼.”
“재밌어요. 저 이렇게 여럿이랑 오래 어울려본 적이 없어서.”
“…….”
“친구가 많이 생긴 것 같고 좋네요.”
“저기요, 여러분.”
듣자마자 무리 지어 앞서가던 여섯 명을 불렀다. 마침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 멈춰 선 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우리 지금부터 다 친구 하는 겁니다. 알았죠?”
“……? 예?”
“그냥 그렇다고 해요, 빨리. 무기 받고 싶으면.”
“아이, 그럼요. 우리가 바로 평생 친구죠.”
“어깨동무도 하고 갈까요?”
“아니, 스킨십은 됐고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데 찬희가 다시 몸을 낮췄다. 나는 녀석이 내 귓가에 손날을 대고 속삭인 말에 그만 풉, 웃고 말았다.
“아니에요. 사실은 형만 있으면 돼요.”
참 신기한 일이지. 내게는 별거 아닌, 지겹기까지 한 일상도 찬희가 즐거워하면 아주 특별한 이벤트가 된다. 아마 앞으로 겪어갈 많은 일도― 그래, 네가 좋다면 됐어, 하며 넘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오늘도 소떡소떡 먹을 거야?”
“아니요. 그건 저번에 먹어봤으니까 다른 거.”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유저 익명게시판>
제목 : 성탄새끼들 단체로 빛무기 맞췄던데
내용 : 그들을 질투하고...시샘하고....어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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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ㅋㅋㅋㅋ퍼클길드가 단체로 돈지랄템 들고다니는것만큼 꼴값인게없는데
└겜창어 해석 : 돈지랄템 꼴값이다=형님들 가오가 오져서 눈도 못마주치겠습니다
제목 : 성탄 무기 말인데
내용 : 그전이 뽑은 구슬로 나눠가진듯? 구슬뽑은사람이 지금 손에 꼽히는데 그중하나가 성탄길드 그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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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진짜? 공짜로?
└무기가 지금 얼만데 공짜로주겠냐 게임사 아들아닌 이상에야
제목 : 그전이 진짜 답이냐?
내용 : 누가 이번에 스급득템 내역 리스트로 쭉 정리했는데
무기구슬 : 총 17명 중에 4명이 그전
연회복, 연미복 : 총 55명 중에 10명이 그전
그 외 스급잡템 : 총 242명 중에 30명이 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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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무기구슬이 진짜 놀랍네
└ㅇㅋ그전만들러감
└아니ㅅㅂ 무기구슬이 지금 17개풀렸다는게 찐이야? 이럴때가 아니라 올타를 메워야
제목 : ㅋㅋㅋㅋ 퍼클도못했는데 빛무기들고다니는 새끼들이 제일웃기지않냐?
내용 : 우리 길드에 퍼클은커녕 레이드도 안뛰는 라이트유저있는데 빛무기 좋다고 사서 끼고 다니더라ㅋㅋ 존나 같잖음
―댓글 리스트―
댓글1 : 끼고다녀도 됩니다 자칭 라이트유저님
└ㄱㅆ 감사합니다
제목 : 나만 퍼클상전들 꼴보기싫음?
내용 : 가이우스랑 이글라우스에 비하면 솔가 개좆밥인거 다아는데 2시간걸려 아득바득 퍼클한게 뭐그렇게 자랑이라고 단체로 빛무기차고 쩔파티다니고ㅋㅋ 약간 오글?거린달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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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이새끼는 찐이네
댓글2 : 시작부터 끝까지 부들대며 쓴게보여서 약간 염병?같달까?
댓글3 : 너 온더고지
제목 : 성탄은 길원모집 더안하냐?
내용 : 나도 새싹타이틀이랑 빛무기 갖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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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새싹타이틀은 그렇다쳐도 빛무기는 뭐어쩌라고인데
└성탄 그전님한테 키트 대신 돌려달라구할래
└그새끼는 진짜 축캐같긴하더라 스급만 세번떴던데
└ㅋㅋㅋ 한 백뭉샀나보지
제목 : 퍼클상전 꼴보기싫다 = 게임 좆같이하네 똑같은 말이지..
내용 : 눈만 봐도 개털린다는 거지
―댓글 리스트―
댓글1 : 사실상 최고의 찬사
└엌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