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생 루키의 시련
“그래서, 썸남이 생기셨겠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들인 수정이 울분에 찬 말을 내뱉었다. 나는 내 몫의 뜨거운 아메리카노 뚜껑을 만지작대다 말고 되물었다.
“……그치, 이게 썸이지?”
“아니겠냐? 그 정도 해놓고 썸이 아니면 손 잡는 날 식장 들어가야지.”
“아니, 아……. 어휴…….”
갑작스레 밀려드는 현자 타임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 생각해도 술 한 방울 안 먹고서 그 난리를 피운 게 놀라웠다. 사람은 분위기에 휩쓸리면 정말 어마어마한 언행을 할 수 있구나……. 시선을 내린 채 고뇌하고 있자니 수정이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저번에 본 그 미남 얘기 맞지?”
“……어.”
“그런 애가 대놓고 너 좋다는데 잘돼가면 좋은 거지, 뭐가 문제여서 아까부터 머리 싸쥐고 있어?”
“야악……간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역사를 다 말하자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 10분 뒤면 연구실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프로포절이 일착으로 통과된 내 논문은 그 뒤로 반년째 아무 성과 없이 가지각색의 배리에이션으로 제본소를 들락대는 중이었다. 논문 통과는 대학원생이 독심술을 터득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는 선배들의 말이 이제야 와닿았다. 내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고단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 와중에 연애사까지 이 난리가 난 것이다.
“걔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이래저래 이래도 되나 싶어…….”
“너무 어려? 몇 살이길래?”
“스물……둘.”
“세 살? 야, 그 정도는 괜찮지. 난 또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문제는 그 친구의 정신연령이 일반적인 스물둘과는 좀 차이가 있다는 거지……. 그렇다고 찬희의 개인사를 수정에게 주절댈 수도 없어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덜 식은 커피를 쥐고 일어서는 나를 보며 수정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거지?”
“어? 어, 그럼. 괜찮아.”
“무슨 일 있으면 그때그때 얘기해. 저번처럼 말도 없이 잠수 타서 걱정시키지 말고.”
“응, 그럴게.”
무심코 내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수정이 요놈 봐라, 하는 얼굴로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도 그냥 논문 때문에 연락 못한 거라더니, 무슨 일 있었던 게 맞긴 맞구만?”
“아, 이 미친……. 김수정 유도신문 스킬 뭐냐? 프로파일러인 줄 알았네.”
“일단 가봐. 나중에 천천히 시간 들여 털게.”
관대한 허락을 뒤로 하고 잰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난 진짜 가끔 쟤가 너무 무서워……. 정문을 지나 인문대로 향하는 내내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영혼이 후들대는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대학원에 가야 한다. 연구실을 나서자마자 발밑이 물컹 짓눌리며 머리가 빙빙 돌았다. 고개를 흔들어 간신히 털어내고 나니 진한 탈력감이 밀려왔다.
석사를 딴다 한들 취업이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지원할 수 있는 근무처가 늘어나는 만큼 졸업만 하면 어떻게든 되겠거니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라도 선배들 따라 공무원 학원부터 끊어야 하나. 고민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주머니에 쑤셔 넣은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형, 어디세요?
받자마자 흘러나오는 달콤한 목소리를 음미하고 있자니 혈당 쇼크가 이런 건가 싶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소리 없이 목부터 가다듬었다.
“어, 잠깐 학교 왔다가 이제 가는 중…….”
―바로 오세요?
“응.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근처 온 김에 혹시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을까 해서 전화 드려봤어요.
근처?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일 낮의 학교 앞은 학생과 교직원, 잡상인에 주민들까지 다양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너 어딘데?”
―여기……. JMT 버블티……?
골목 하나만 돌면 있는 가게였다. 아아, 하며 걸음을 빨리하는데 찬희가 다시 물었다.
―여기 있으면 돼요? 아니면 다른 데로 갈까요?
“거기 있어. 내가 갈게.”
―네에.
통화가 얌전히 끊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달리듯 걸었다. 골목에 접어들자마자 어쩐지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거리에 드문드문 퍼진 인파의 시선이 명백히 한 점에 모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빨간 벽돌을 쌓아 만든 담벼락 앞에 선 찬희는 티셔츠와 청바지 위에 얇은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붉은 배경 위로 새까만 머리칼이 흔들리는 장면 자체가 섬세하게 색을 골라 칠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가만히 시선을 가라앉힌 흰 얼굴이 유난히 음영 없이 창백해 보여 더욱 그랬다.
“찬희야.”
행여 누군가 용기를 내기 전에 이 자리를 떠야 했다. 소리 내 부르며 다가가자 고개를 든 찬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형.”
대놓고 술렁이는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얼른 팔을 붙들고 걸음을 옮기자 녀석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뭐 바쁜 일 있으세요?”
“…….”
얘는 진짜 저 시선들이 안 느껴지나? 말이라도 붙여보겠다고 드릉대는 분위기에 압박이 올 만도 한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나저나 이 근처엔 무슨 볼일이 있었어?”
물어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땅한 식당이 있을까부터 문제였다. 이 녀석은 파인 다이닝보다 급이 낮은 가게를 가본 적이 없을 것 같은데, 대학가다 보니 내가 아는 밥집 중에 가장 비싼 곳은 돈가스집 정도였다.
“형 보러요.”
“어? 뭐?”
“형 보고 싶어서 온 게 볼일인데요.”
무심코 돌아보니 희멀건 낯짝이 빙긋 웃고 있었다. ……아, 내 심장 어쩌면 좋냐고. 밀려드는 흉통에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차……는?”
“버스 타고 왔어요. 차 댈 데가 마땅치 않으니까 오히려 시간 낭비하게 되길래요.”
“그렇구나, 잘했네…….”
“학교 앞까지 와본 건 처음인데 사람이 진짜 많네요. 다 형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 사람들이에요?”
삼삼오오 모여 제 얼굴 구경하면서 소곤대는 사람들을 두고 기껏 한 생각이 ‘형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 사람들인가?’구나.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샜다.
“우리 학교 애들이 많긴 하겠지. 전부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대학교는 정원이 많겠네요.”
“맞아. 같은 과여도 다 알지는 못해. 점심 뭐 먹을래?”
고개를 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예전 길드에 있던 시절에 자주 가던 피시방 간판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기 부찌 라면이 진짜 맛있는데. 입맛을 다시는 기미가 보였는지 찬희의 시선도 위를 향했다.
“피시방 가고 싶으세요?”
“……아, 그게 아니라 저기서 파는 라면이 맛있거든.”
“그럼 갈까요? 저도 먹어보고 싶어요.”
“어? 진짜?”
너 라면 먹어본 적 있어? 무심코 뱉을 뻔한 질문을 꿀떡 삼키고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피방 라면은 좀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그럴싸한 다른 식당이 있는가 하면 그도 아닌 게 문제였다. 고민하다 결국은 일단 올라가보기로 했다. 복작대는 식당보다는 앉혀놓으면 안 보이는 피시방이 나을 것 같다는 계산도 있었다. 어느 식당이든 들어가는 순간 편히 밥 먹기는 글렀을 것 같아서.
다행히 피시방은 좀 한산한 편이었다. 구석 자리 두 개를 끊고 찬희부터 밀어 넣었다. 찬희는 능숙하게 메뉴판을 클릭해 주문을 넣는 나를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소떡소떡이 뭐예요?”
“소시지랑 떡을 하나씩 끼워서 소스 뿌린 거.”
“맛있어요?”
“애들 먹는 거긴 한데 맛있어.”
“먹어볼래요. 사주세요.”
무심코 열 개 넣을 뻔했다.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라면 두 개에 소떡 하나, 음료수 두 개를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냅다 압포를 켜서 일퀘부터 수행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쟁반을 든 사장님이 나타났다.
“해민 씨, 해민 씨.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어, 안녕하세요.”
피방 죽돌이로 살다 보면 별수 없이 사장님과 안면을 트게 된다. 40대 중반 남성의 애교에 적응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장님은 음식을 하나씩 놓아주며 대단히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해민 씨가 안 오니까 여자 손님 뚝 끊겨서 우리 매출 반토막 났었어. 알아?”
“또 그러신다, 또.”
“진짜야. 총 게임 동아리 애들도 해민 씨 안 오고부터 안 보이는 거야. 어쩌다 밖에서 마주쳐서 물어봤더니 요즘은 가도 그 잘생긴 오빠 없길래 그냥 가까운 데 간다잖……. 헉!”
래퍼처럼 영업 멘트를 쏘아대던 사장님이 찬희를 발견하자마자 숨을 들이쉬었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을 반짝이는 모양새가 이해는 갔다. 나라도 이런 애가 내 영업장에 있으면 이게 웬 떡인가 싶지.
“해민 씨, 정말 미안한데 카운터 쪽 자리로 옮기면 안 돼……?”
“안 돼요. 저희 여기에 박혀 있게 두세요.”
“제발……. 오늘 게임비 안 받을게.”
“안 돼요, 안 돼.”
손을 내저으며 재차 거절하자 사장님은 그제야 우는 시늉을 하며 멀어져갔다. 이러나저러나 장난기가 많을 뿐이지 질척대는 사람은 아니었다.
조용해진 자리에서 찬희가 소떡소떡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눈만 굴려 쟁반 위를 살피는 거였다. 뭘 원하는지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았다.
“나이프 필요해?”
“……아. 그냥 먹는 거예요?”
“응, 들고 베어먹는 거야.”
그렇구나……. 대답은 하면서도 소스투성이 간식에 일단 입을 갖다 댈 엄두는 안 나는 모양이었다.
“줘봐.”
결국 녀석에게서 받아든 소떡을 앞접시에 대고 하나씩 빼주었다. 그제야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좀 재밌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이세아 전기』에도 이거랑 비슷한 내용이 있었지. 이세아가 왕자를 데리고 야시장에 가서 온갖 불량식품을 먹이는 바람에 다음 날 왕자가 식중독에 걸리는 에피소드였다. 왕자는 사실대로 말했다간 이세아가 왕족을 해쳤다는 죄목을 받게 될까 봐 급한 대로 말 먹이가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 먹어봤다고 둘러대는 바람에 시종들에게까지 놀림을 받고…….
“흠…….”
딴생각에 빠져 있는데 찬희가 애매한 침음을 흘렸다. 돌아보니 골똘히 떡 한 점을 씹고 있었다.
“맛없어?”
비죽 웃으며 묻자 한층 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 녀석은 입술을 붙인 채 입에 든 것을 넘기고 나서야 대답했다.
“좀 짠 것 같기도 하고요……?”
“원래 그런 맛으로 먹는 거야.”
“짜기도 짠데 달기도 달고…….”
“자고로 맵고 짜고 달아야 불량식품이라 할 수 있지.”
흐흐 웃으며 일퀘 완료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별안간 화면 상단에 무지개 빛깔로 번쩍대는 글자가 떴다.
《온더고님의 외침 : 모 신생길드는 남의 공대원 빼가기를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매너겜 부탁합니다.》
그냥 우편 쏘면 되지 뭔 저격질을 하자고 개당 천 원짜리 네온사인 확성기를 태우고 있다냐. 하여튼 사람 앞에 두고는 못할 말을 저따위로 주어 없이 흘리고 다니는 놈들은 뭐가 문젠가 몰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손끝이 멈칫했다.
저거 혹시…….
《온더고님의 외침 : 유명 레이드 길드에서 멘딜하던 사람들만 쏙쏙 골라 영입한다고 퍼클 보장되는거 아닙니다.》
《온더고님의 외침 : 아시르스에서 <전설>과 <만두>를 건드린다는게 무슨뜻인지 곧 알게되실테지만요.》
[길드] 포푸리 : 거지 푸리에게 확성기 사주실분
[길드] 시티보이 : 우편확인ㄱ
[길드] 포푸리 : ㄱㅅ
《포푸리님의 외침 : 오 말투 완전 좆찐따 냄새》
《포푸리님의 외침 : 아아ㅡ 이것이 <전.설.>과 <만.두.>의 힘이다ㅡ》
《포푸리님의 외침 : 앗 방사ㅋㅋ ㅈㅅㅈㅅ~》
그때 짜고 또 짜기만 한 부찌라면을 한 입 맛본 찬희가 물었다.
“또 싸우는 거예요?”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신경 끄고 레벨링이나 가자.”
그나저나 견제가 슬슬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군.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라 놀랍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시티보이님 혹시
[길드] 메리토크라시 : 온더고가 만두 부길마임?
[길드] 시티보이 : 넵
[길드] 메리토크라시 : ㅇㅋ
내막도 뻔하다. 지가 껄떡대던 길원이 멘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니 괜히 찔리는 마음을 어디든 덮어씌우려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거겠지.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이건 대답하기 싫으면 안하셔도 되는데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온더고가 지랄하던거 캡처 있으심?
[길드] 시티보이 : 그럼요
[길드] 시티보이 : 점 하나까지 모조리 피뎁따놨음
그러는 사이 드디어 다음 확성기가 떴다. 아마 온더고가 캐시 숍에 다녀오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온더고님의 외침 : 하ㅋㅋ 저 박쥐같은새끼 여전하네》
《온더고님의 외침 : 저도 방사임^^ㅋ》
[길드] 포푸리 : 확배갈까여?
[길드] 포푸리 : 아님 이쯤에서 피빕떠??
확배란 ‘네온사인 확성기 배틀’의 줄임말이다. 네온사인 확성기는 내 메시지가 서버 전체에 커다랗고 번쩍이는 글씨로 출력되는 아이템인데, 시선 강탈 효과가 확실한 만큼 남용을 방지하고자 오직 캐시템으로만 판매된다. 즉…….
확성기로 키배를 뜨려면 돈이 든다. 돈 떨어지는 놈이 가오 털리고 끝나는 그런 싸움이란 뜻이다. 때문에 화면을 어지럽히는 큰 글자로 온갖 쓸데없는 쌈박질이 오가도 시스템에 항의하는 사람보다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다.
[길드] 시티보이 : 일단 있는건 다 써보셈
[길드] 포푸리 : ㅇㅋ
시티보이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신이 난 포푸리가 확배에서 가장 효과적인 어그로를 시전했다.
《포푸리님의 외침 : 냠》
《포푸리님의 외침 : 냠》
《포푸리님의 외침 : 냠》
일명 돈휴지로 불리는 스킬이었다. ‘니가 확성기 하나에 하고 싶은 말 꾸역꾸역 욱여넣고 있을 때 나는 이러고 있다’는 도발이다. 이런 개싸움에서 포푸리를 이길 인재는 그리 많지 않다. 금방 끝나겠거니 싶어 일단 흑곰을 고래에 태웠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곰님이랑 저는 인던 다녀올테니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이왕 싸울거면 이기셈
[길드] 포푸리 : 옙^^)>
[길드] 시티보이 : 지켜봐주시면 안돼요?
[길드] 시티보이 : 포푸리님만으론 영 불안한데
[길드] 포푸리 : 어째서죠?ㅠ
옥신각신하는 사이 온더고는 또 캐시 충전을 마친 모양이었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ㅋ포푸리님 쩔로 폭리취한다고 유명하시던데 그렇게 악착같이 번돈 확성기따위에 태우셔도 되겠어요?》
《포푸리님의 외침 : “너 쩔로 폭리취한다며?” 해석 : 모든 인던 스런(*스피드런 : 레이드 클리어까지 드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공략) 가능한 너의 딜과 신컨이 부러워서 뒈지기 직전이다》
《포푸리님의 외침 : “그렇게 악착같이 번돈” 해석 : 내 쩔파티는 아무도 신청안하는데 ♥같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맘대로 생각하시든가》
[길드] 포푸리 : 두개남음
[길드] 시티보이 : ㄱㄷ
어째 꽤 장기전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개당 천 원이 적은 돈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열 마디를 하면 만 원이고 백 마디를 하면 십만 원이다. 자칫하면 가오 따위를 지키자고 수십만 원을 허공에 날리는 것이 확성기 배틀이다.
“에휴…….”
결국 캐시 숍을 열어 확성기 한 묶음을 결제했다. 웬만하면 참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배에 돈 태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는 내 신념 상 계속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었다.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성탄 길마입니다. 저희 길드에 불만이 있으시면 길드 룸으로 직접 와서 말씀하세요. 주어 없는 저격질 같은 유치한 짓은 중학교 졸업할 때 그만두시는 게 맞죠.》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혹시 아직 중학생이시면 미안합니다.》
어차피 <만두>든 <전설>이든 한 번은 싸움을 걸어올 거라 예상했다. 언젠가 겪을 일이라면 솔가 레이드가 닥쳐 정신없기 전에 치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뭐래? 누가 님들얘기랬음? 찔리는게 있으신가봐^^》
근데 저 새끼가 끝까지 이렇게 나오네. 내가 한숨을 쉬자 찬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우리 얘기 맞지 않아요?”
“맞아. 괜히 저러는 거야.”
“불만 있는 티를 내놓고서 직접 말하라니까 괜히 아닌 척을 한다고요? 왜 그렇게 피곤한 짓을 하죠?”
“그러게나 말이야…….”
남은 확성기는 여덟 개였다. 웬만하면 길드 룸으로 부르거나 PVP로 유도하고 싶은데 쉽게 따라주지는 않을 모양새였다.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그럼 다른 길드 소속이었던 멘딜 둘을 최근에 영입한 길드가 또 어딘지 말씀해보세요》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내가 왜?》
《온더고님의 외침 : 님이 뭔데 말해라마라임?》
《온더고님의 외침 : 애초에 왜끼어드는거?ㅋㅋㅋㅋ 자의식과잉 어쩔》
《온더고님의 외침 : 성탠 길매입니댸~~ 뭐어쩌라고 님들얘기아닌데?》
“이 사람 중학생이에요?”
찬희가 정말이지 무구하고 악의 없는 말투로 물었다. 눈을 반만 뜬 채 화면을 보다 말고 픽 웃음이 샜다. 원래도 이런 도발에 흔들리지 않는 편이지만, 찬희의 적나라한 평가를 들으니 더욱 우습게 보였다.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그러니까 만두 길드 부길마 온더고님이 말씀하신 ‘남의 길드 멘딜을 두 명이나 빼간 레이드 길드’는 저희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
《온더고님의 외침 : 장난까나?》
《온더고님의 외침 :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ㅇㅈㄹㅋㅋㅋ 괜한 사람한테 시비털었으면 사과박는게 먼저아님?》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ㅇㅇㅈㅅ》
[길드] 시티보이 : 어휴 저 ♥♥♥ 졸렬한거여전하네
진절머리를 내는 시티보이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낀 것은, 온더고가 볼수록 장또와 비슷한 타입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 찌질한 불만 표출법부터 말하는 방식까지 무슨 영혼의 쌍둥이 같았다. 어쩌면 이미 둘이 쿵짝이 맞아서 하고 있는 짓인지도 모른다.
《온더고님의 외침 :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면 길드해산하고 사사게에 사과문 작성하세요》
[길드] 포푸리 : ?
[길드] 시티보이 : ?
《옹팍 님이 접속했습니다》
《온더고님의 외침 : 아니면 평생 대도시 밖은 못 밟는다고 생각하시던지 ㅋㅋㅋ》
[길드] 포푸리 : 저 ♥♥ ♥♥♥ 돌았나?
[길드] 옹팍 : ???
[길드] 옹팍 : 머임? 먼일임
“무슨 소리예요?”
찬희가 아이스티를 집어 들며 물었다. 순진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장 우리 길드 해체하지 않으면 만날 때마다 PK하겠다고 협박하는 거야.”
“왜요?”
“흠, 아마…….”
따지자면 시티보이를 고립시키기 위해서겠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전략을 취할 거라곤 생각 못했던 터라 살짝 당황스럽기는 했다. 이런 인간들 특성이 게임 게시판 여론을 엄청 신경 쓴다는 건데, 이 정도까지 한다는 건 아마 여론전에서 이길 자신이 있거나…….
《온더고님의 외침 : 참고로 이건 <만두>와 <전설> 길드 전원의 뜻이 일치한 결정임을 미리 알리는 바입니다.》
거 이미 짝짜꿍 맞았을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온더고는 시티보이를, 장또는 포푸리를 죽이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무리수로 나온다는 거다.
아무래도 맞다이 뜨고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낫겠는데…….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수고스럽게 뭐하러요》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그냥 각 길드 대표끼리 캐삭빵 한번 시원하게 뜨고 그걸로 끝내죠》
다행이라면, 저들의 모든 신경이 포푸리와 시티보이에 쏠려 있는 덕에 정작 내게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쉬운 싸움이 바로 날 우습게 보는 상대와의 싸움이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 캐삭빵같은소리하네》
《온더고님의 외침 : 확성기 떨어져가시나봐요^^》
《온더고님의 외침 : 그러게 확성기살 돈도 없으면서 왜 개겨ㅋㅋㅋ》
《온더고님의 외침 : 돈도 없고 가오도 없고ㅋㅋㅋ 답은 해체인듯 길드해체해ㅇㅇ》
확성기가 떨어져가는 건 사실이긴 하다. 두 개 남았으니까. 이걸 한 묶음 더 사, 말아……. 고민하는데 길드 창이 반짝였다.
[길드] 시티보이 : 하.......
[길드] 시티보이 : 길마님
[길드] 시티보이 : 걍 제가 가서 담판짓고 올게요
[길드] 시티보이 : 아마 저때문에 저렇게까지 지랄하는 듯
화면을 보니 시티보이가 길드 룸 바닥에 털퍽 주저앉아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엘프가 쪼그려 앉은 모습이 궁상맞기 짝이 없었다.
[길드] 포푸리 : 기운내셈ㅠ
[길드] 포푸리 : 현성이도 같이 가서 조지구올게염
[길드] 메리토크라시 : 현성아
[길드] 메리토크라시 : 전설도 동의한 거라잖니
[길드] 메리토크라시 : 너도 이 사태의 원인 중 하나란다
[길드] 포푸리 : 데헷;
어떻게든 맞다이로만 몰고 갈 수 있으면 이길 자신이 있는데, 문제는 순순히 이쪽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온더고가 바보가 아닌 이상 포푸리나 시티보이와 싸울 리 없고, 나랑 싸우자고 하면 그건 받아들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닉머라는 사실을 눈치 채면 발을 뺄 게 뻔하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다이?》
《온더고님의 외침 : 돈떨어졌음? 길드해체해^^》
“확성기라는 아이템이 필요한 거예요?”
고민하고 있자니 캐시 숍을 연 찬희가 물었다.
“캐시 남은 거 좀 있는데, 보내드려요?”
“음……. 그래. 일단 캐시 있는 만큼만 줘봐.”
웬만하면 이런 일에 돈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저 골칫덩이 쩌딜러들을 맡은 이상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 갚으면 되지. 쉽게 생각하고 거래를 받아 캐시템의 봉인을 풀었을 때였다.
《네온사인 확성기 999개》
“…….”
요란한 아이템 아이콘에 표기된 숫자를 보자마자 심장이 덜컹했다. 나도 모르게 아이템을 우클릭했지만 이미 인벤토리 안에서 봉인이 풀린 탓에 청약 철회 버튼도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야, 너 미쳤……!”
“네?”
“이, 이거 뭐야? 이걸 백만 원어치나 사면 어떡해!”
목소리를 높이자마자 카운터 쪽에서 힐끔대는 기색이 느껴졌다. 얼른 입을 다물고 표정으로만 질책하고 있자니 찬희가 눈을 둥글게 뜬 채 느릿느릿 깜빡였다.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캐시 있는 만큼 보내라면서요?”
“……캐시가 얼마 있었는데?”
“모르겠는데요……? 그냥 한 번에 구매 가능한 최대치로 보냈어요.”
나도 모르게 상체를 쭉 뻗어 녀석의 모니터 앞으로 향했다. 화면 상단 유저 정보를 클릭하자마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까맘곰 님 환영합니다 : 잔여 캐시 19,001,000원》
뭔 게임 아이템용 캐시가 1900만 원이 있어? 골이 띵해지는 느낌에 멍하니 올려다보니 어깨만 한 번 으쓱인다. 잊고 있던 까맘곰 개발자 설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거 설마 직접 충전한 거야……?”
“아마 받은 걸 거예요.”
“받아? 누구한테?”
“음……. 원래 현금으로 받아야 할 돈의 일부를 게임 캐시로 주는 대신에 두 배로 쳐서 줬댔나? 그랬던 것 같은데.”
점점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찬희의 생돈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고민하다 우선 내 모니터 앞으로 돌아왔다. 찬희가 직접 충전한 돈도 아니고, 어차피 환불도 안 될 아이템이라면…….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그럼 어쩔수없죠》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확배 지는 길드가 해체합시다》
될 대로 돼라. 허탈하게 웃으며 지르자마자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갤러리들이 미친 듯이 확성기를 띄웠다.
《겨미러비님의 외침 : ㅋㅋㅋㅋ 찬성!!! 확배로 길삭빵ㄱㄱ!!!》
《이터너티마감님의 외침 : 만두가 지면 전설까지 해체임?》
당연하게도 길드 창은 얼어붙었다.
[길드] 시티보이 : 길마님??;;
[길드] 시티보이 : 쟤네가 두당 하나씩만 사도 그게 몇갠데.. 어쩌시려고ㅠㅠ
[길드] 시티보이 : 일단 제가 백개사올게요; 잠시만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ㄴㄴ
[길드] 메리토크라시 : 확성기충분함
[길드] 메리토크라시 : 걍 계세요
[길드] 포푸리 : ????
[길드] 포푸리 : 로또되심?
대충 인간형 로또 비슷한 게 옆에 앉아 있긴 하지. 나도 모르게 사악한 미소를 지었는지 찬희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온더고님의 외침 : 아 ㅋ 어이없네 평화적으로 해결해보려했더니 싸움을걸어?》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대형길드 기분상해죄로 신생길드 해체하라는게 평화적 해결이라고요?》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저희 길드원도 다섯명밖에 안되는데... 대도시 나갈 때마다 수백 명이 몰려들어 다구리 놓겠다고 협박한게 평화적 해결?》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그럴거면 캐삭빵 뜨고 끝내자는데 기어코 길드해체하라고 밀어붙인게 평화적 해결?》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혹시 매년 노벨평화상 발표할때마다 집에서 눈물흘리심? 내가 님이었으면 왜 나는 저 상 안 주는지 ㅈㄴ 억울했을거같은데》
손가락에 불이 나도록 키보드를 치는데 옆에서 뭔가 우물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찬희가 소시지 한 점을 입에 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숨도 안 쉬고 타자 치는 거 신기해서요.”
“…….”
“옛날 생각 나기도 하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흥미롭게 미소 짓는 얼굴이 의아했지만 신경을 분산시킬 때가 아니었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 존나 부들거리네》
《온더고님의 외침 : 걍 길드해체하고 끝내라^^ 담달 폰요금 나왔을때 빨개벗고 쫓겨나기 싫으면》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실례지만 잘못한 아이를 발가벗겨 내쫓는다는 발상은 유아교육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이 팽배했던 5060 세대의 대표적 악습인데...》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혹시..연배가..?》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니보단 젊을듯》
[길드] 시티보이 : 저새끼 40대임
[길드] 포푸리 : ???
[길드] 포푸리 : 님한테 껄떡댔다며요?
[길드] 포푸리 : 님은 몇살인데?
[길드] 시티보이 : 저요? 스물다섯
[길드] 포푸리 : 누님이셨네
[길드] 포푸리 : ㅈㅅ함다 현성이 유교보이임 오해ㄴㄴ
“미친 새끼 아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는지 눈앞으로 음료 컵이 쑥 밀려 들어왔다. 입술 앞에 알맞게 대준 빨대를 물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들이니 정수리 끝까지 차오른 열이 조금이나마 식어 내렸다. 상황은 이렇지만 미남에게 보필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님 슴다섯인거 알고도 껄떡댄거임??
[길드] 시티보이 : 슴다섯인거 알고도x 슴다섯인거 알자마자o
[길드] 시티보이 : 제가 멍청했던거긴함.. 의장에 눈이멀어서ㅠ
사정을 대충 요약하면, 온더고가 여름에 나온 키트에서 희귀 의장 아이템인 <요정여왕의 귀걸이>를 뽑았고, 시티보이가 그걸 본인에게 팔라고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온더고는 현금으로 100만 원을 제시했고 시티보이는 수락했는데, 계좌를 달라고 하니 갑자기 서로의 신분증을 뒷자리만 가린 채로 오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사진까지요?
[길드] 시티보이 : ㅇㅇ
[길드] 시티보이 : 지금 생각하면ㅠ 입금하는 사람이 난데 굳이 왜... 싶은데
[길드] 시티보이 : 그땐 걍 귀걸이 갖고싶은 마음밖에 없어서ㅠ 보여줬어요
[길드] 시티보이 : 근데 신분증 보자마자 이번엔 연락처도 달라고..그래야 안심하고 거래하지않냐고
[길드] 시티보이 : 그때도 좀 멍청했던게ㅠ 내가 여자인거 그때 첨알았을텐데 그거에 대해선 별말없길래
[길드] 시티보이 : 진짜로 거래 깔끔하게 할생각으로 이러나보다 뭐...
주절주절 이어지는 채팅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짠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손끝을 한 번 말았다 폈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시티님
[길드] 메리토크라시 : 온더고는 아마 님이 여자인거 대충 눈치채고 있었을거임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래서 거래핑계로 신분증까게 한거고
[길드] 포푸리 : ㅇㅇ제생각도 같음
[길드] 메리토크라시 : 원래 저런새끼들 특징이
[길드] 메리토크라시 : 바라는거없는척 시침떼면서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은근 찌르고 사람 헷갈리게 하는거라
[길드] 메리토크라시 : 님이 신분증이든 연락처든 안줬으면 그건 그거대로 트집잡아 지랄했을거임
[길드] 메리토크라시 : 여튼 님이 멀 잘못해서 이상황 된거 아니니까
[길드] 메리토크라시 : 내가 멍청했다느니 그런말 안하셔도됨
[길드] 옹팍 : ㅁㅈ요ㅠ 저새끼가 븅신임
잠잠하던 옹팍까지 떠올랐지만 시티보이는 대답이 없었다. 괜히 안 좋은 기억만 건드린 건 아닌가 싶어 씁쓸해졌다. 그때 별안간 포푸리가 대가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길드] 포푸리 : 근데 귀걸이는여?
[길드] 포푸리 : 외않끼셧음?
……그러게? <요정여왕의 귀걸이>는 귀 전체를 덮고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의장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얼굴 옆에서 찰랑대며 반짝거리기 때문에 엘프 캐릭터가 끼면 극적으로 화려한 이펙트를 즐길 수 있다. (괜히 비싼 게 아니다) 그런데 시티보이의 귀에는 평범한 다이아몬드 귀걸이뿐이었다.
[길드] 시티보이 : 결국 계좌를 안줬어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
[길드] 포푸리 : ??
[길드] 옹팍 : ??
[길드] 시티보이 : 연락처 받고서도 거래 얘기는 안하고 계속 쓸데없는 거만 물어보길래
[길드] 시티보이 : 사적인 얘기는 길드창에서 하고 계좌부터 알려달랬더니
[길드] 시티보이 : 자기가 뭘했다고 철벽치냐면서 급발진해서..
“형, 저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요?”
혈압이 치솟는 느낌에 미간을 문지르고 있으니 찬희가 더없이 순수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거?”
“상황파악이 잘 안돼서 그러는데, 시티보이 님이랑 싸운 사람이 40대 남자라는 거잖아요.”
“응? 응.”
“근데 시티보이 님한테 껄떡댔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시티보이 님은 형이랑 동갑이라면서요.”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싸웠다더니 껄떡댔다는 게 무슨 소리냐는 건가? 눈만 껌뻑이는 나를 향해 찬희가 침착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저 온더고라는 사람이 시티보이 님한테 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거예요?”
“아, 어어. 맞아. 그러다 속내 들키니까 혼자 열폭한 거지.”
“그럼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아요?”
“……응?”
“나이 차이가 거의 스무 살인데 그런 의도로 접근하면……. 범죄자 아니에요?”
어찌나 진지하게 묻는지 나도 순간 그런가? 싶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자 찬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시티보이 님이 미성년자면 모를까……. 온더고가 쓰레기긴 해도 불법적인 일을 한 건 아니지.”
“정말요……?”
“응, 범죄자냐 아니냐만 따지면 아니기는 해…….”
[길드] 포푸리 : 그새끼 귀걸이 뽑았던건맞음?
와중에 포푸리가 다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길드] 시티보이 : 캡처 보여주긴 했는데..
[길드] 포푸리 : 직접 착용은 안하고여?
[길드] 포푸리 : 구라일 가능성 532%
[길드] 시티보이 : 그거마저 구라면...
[길드] 시티보이 : 정말 목졸라서 죽여버리고 싶어지는데..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ㅋㅋ 왜 갑분 입다물었지?》
《온더고님의 외침 : 돈떨어짐?》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온더고님》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갑분은 ‘갑자기 분위기’의 줄임말이라》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왜 갑자기 분위기 입다물었지?’라고 쓰면 어색한 문장이 됩니다》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철지난 신조어 주워다 쓰실때는 정확한 뜻이라도 알고 써야》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젊은애들 흉내내는거 들켜서 망신당할 일이 없답니다》
문장을 끊어 쓰는 데엔 이유가 있다. 상대가 확성기 하나를 쓸 때 나는 두세 개를 쓰는 게 확배의 기본 공격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온더고와 메리토크라시라는 닉네임 두 개를 써놓고 각자 확성기를 몇 개나 썼는지 카운트 중일 것이다.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그나저나 요정여왕의 귀걸이 삽니다》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파실분?》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만두 부길마인 온더고님이 키트에서 뽑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사실인가요?^^》
《야옹이사랑님의 외침 : 제가 삽니다 요정여왕귀걸이》
《야옹이사랑님의 외침 : 저한테 파셈 무조건 제가 10% 더드림》
그 뒤로는 쭉 개소리의 향연이었다. 누가 먼저 확성기 결제를 포기하느냐의 싸움이었으니 당연했다. 유치한 도발과 더 유치한 반박으로 이루어진 말싸움은 내 인벤토리 안의 확성기 숫자가 500개 아래로 떨어졌을 무렵 드디어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온더고님의 외침 : ㅋㅋ하 끝이 안나겠네》
《온더고님의 외침 : 좋습니다 그쪽 요구대로 하죠》
《온더고님의 외침 : 대표자끼리 캐삭빵하고 끝내는 걸로요》
왔다. 나도 모르게 비열한 미소를 지었는지 길드 룸 장식에 전념하던 찬희가 조금 놀란 듯 속삭였다.
“형, 방금 얼굴 진짜 무섭고 귀엽네요.”
뭐래. 째려보니 살그머니 웃으며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린다. 길드 룸은 어느새 보라색 꽃장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뭔소리세요?》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확배항복임?》
《메리토크라시님의 외침 : 그럼 만두랑 전설 해체해야죠》
《이스릴반지님의 외침 : ㅁㅈㅁㅈ》
《이스릴반지님의 외침 : 참고로 현재까지 확성기수 메리토크라시:524 / 온더고:305》
《겨미러비님의 외침 : ㅋㅋㅋㅋㅋㅋㅋ사실상 승패는 난거아닌가》
《겨미러비님의 외침 : 추하게 굴지말고 길삭ㄱㄱ》
“형이 이긴 거예요?”
“거의……?”
“흠, 제 덕분이죠?”
무의식적으로 그렇지, 하려다 멈칫했다. 마주친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한테 상 주셔야 되는 거 아닌가?”
상……? 혼란을 숨기고 빤히 보는데 찬희가 왼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막았다. 그러고는 오른손 검지로 왼손 손등을 톡톡 두드리는 거였다.
“…….”
간단한 제스처의 의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녀석의 어깨를 툭 내리쳤다. 마음 같아선 세게 때리고 싶었지만 차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그건 이, 이르다고 했잖아.”
“그럼 언제가 적당한데요?”
왠지 예전에 사촌 동생과 나눈 대화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형, 우리 집에 언제 올 거야? 몇 밤 자면 돼? 괜히 헛기침하며 눈을 돌리는데 고개를 기울인 찬희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형 보고 싶어서 왔더니 한 시간을 이렇게 방치해두고…….”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손등에는 뽀뽀하게 해줬으면서 얼굴에는 안되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
“야, 밖, 밖이야. 여기 밖이야. 말조심.”
어째 애가 하루가 다르게 능청맞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혹시 여태까진 감쪽같은 내숭이었고 이게 본모습인 걸까? 쩔쩔매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찬희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저 사람 또 뭐라고 하네요.”
그 말에 모니터를 보니 온더고의 구구절절한 확성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온더고님의 외침 : 우선 팩트로만 말씀드리면 저는 확배에 동의한적도, 만두와 전설의 존폐를 건 적도 없습니다.》
《온더고님의 외침 : 메리토크라시님의 일방적인 착각을 제가 책임져야 할 의무도 없고요.》
《온더고님의 외침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을 계속하시겠다면 처음 제안하셨던대로 pvp로 가자는 게 제가 할수있는 최대한의 양보입니다.》
《야옹이사랑님의 외침 : ㅋㅋ온하다 추더고》
됐다! 나도 모르게 냅다 그러자고 하려다 손을 멈췄다. 너무 좋아서 달려드는 게 보이면 또 뒷구멍으로 빠져나가려 들겠지. 어떻게든 잘 유도해서 빼도 박도 못할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이 새끼…….
내가 꼭 캐삭하게 만들어줄 테다. 2년을 쌓아온 스킬을 걸고 반드시.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