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1)

9. 약속의 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를 해치우자마자 커피포트를 꺼냈다. 바쁘게 선을 연결하는데 곁에서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찬희가 개수대에 그릇들을 넣고 있었다.

“어, 냅둬. 내가 이따 치울 거야.”

“얼마 안 되니까 금방 할게요.”

“아니야, 손님이 무슨…….”

“엄청 맛있었어요. 이렇게 맛있는 볶음밥 처음 먹어봐요.”

만류하는 말을 아주 성의 없이 무시하며 씩 웃는 얼굴에 그만 입을 다물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녀석의 팔을 끌어당겼다.

“괜찮다니까. 가서 앉아 있어.”

“실랑이할 시간에 각자 할 일을 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얌전히 앉아서 주는 거나 받아먹는 게 손님이 할 일이야.”

힘껏 당겨봤지만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체급 차이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쯤 되니 오기가 생겨 아예 두 팔로 붙들고 무게를 실었다. 끙, 하며 몸을 뒤로 젖히고서야 한 걸음 움직인 찬희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말려요, 이게 뭐라고.”

못 들은 척 뒷걸음질을 치자 발자국마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끙끙대며 도로 침대 앞에 앉혀둔 후에야 콩만 한 주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커피 아메리카노로 타줘?”

“네.”

뜨거운 커피 두 잔을 머그에 담아 밥상에 내려놓았다. 찬희는 작은 상 위에 노트북을 올린 채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무릎이 상을 밀어 올릴 기세였다.

“책상에서 하라니까.”

“의자가 하나뿐이잖아요.”

“난 침대에 앉으면 돼.”

책상과 침대를 기역 자로 붙여놓은 방이라 평소에도 모니터를 돌려 침대에서 쓸 때가 있었다. 찬희는 그제야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 하며 노트북을 들고 일어섰다.

“일단 고슴이 잡고…….”

침대에 걸터앉아 모니터를 돌리자마자 탄식이 나왔다. 길드 가입 신청이 300건을 넘어선 상태였다. 우편함도 그새 또 터져 있었다. 방치했다가는 이벤트 템도 수령할 수 없을 지경이라 신경질적으로 전체 삭제부터 눌렀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말이 나오겠는데. 혹시 몰라 압포 커뮤니티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메인부터 시끄러웠다.

[실시간 인기글] 고슴도치 학살자 타이틀 이펙트

내용은 대도시에서 뻐기고 있는 포푸리를 멀리서 찍은 스크린샷이었다. 까만 털을 가진 수인족이라 깜찍한 새싹 이펙트가 유난히 더 도드라졌다. 고슴이를 잡을 수 있는 거였냐는 의문들을 한참 내리고 나서야 이 사달의 시작점을 찾을 수 있었다.

프리한도비 : 암수 딜이 아무리 세도 고슴이를 자폭 전에 잡을수가있다고? 백퍼구라ㅋㅋ

└등하얀생선 : ㄴㄴ지가잡은거아니래 길마가 잡아줬다했음

└프리한도비 : 길마누군데?

방국봉 : 포푸리 길드명 왜저럼? 전설아니었나

└셜록하우스 : ㅇㅇ새길드 길마가 잡아줬대

└프리한도비 : 길마 누구냐고

셜록하우스 : ☆정리☆ 고슴이 죽일 수 있음 / 고슴이 죽이면 고슴도치 학살자 얻을 수 있음 / 타이틀 이펙트 머리 위에 새싹 남 / 포푸리 새 길드 길마가 잡는법 안다함 / 길드명 <성탄> / 현재 솔가 공대원 모집중이라함

└프리한도비 : 아오ㅅㅂ그래서 길마가 누군데

└셜록하우스 : 메리토크라시

└프리한도비 : ??? 검색해보니 드루나오는데??

└셜록하우스 : ㅇㅇ드루임

└프리한도비 : ㅋㅋㅋ ㅆㅂ 찐으로 망겜됐네 이젠 드루가 길마를 다하네

그때 타이밍 좋게도 게임 화면에 알림이 떴다.

《‘프리한도비’ 님이 가입신청을 하셨습니다.》

칼같이 거절 버튼을 누르고 코웃음을 쳤다. 그 사이 길드 설정을 이것저것 만져보던 찬희가 뒤늦게 물었다.

“우리 길드명이 성탄이에요?”

나도 모르게 마우스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 임시, 임시로 붙였어. 언제든 바꿀 수 있어.”

“왜요? 이대로 좋은데.”

씩 웃는 얼굴을 가까스로 외면했다. 길드 룸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글자 길드명을 지어야 한다. 순간 생각나는 대로 넣은 것뿐이지만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길드] 포푸리 : 아 형님

[길드] 포푸리 : 밥 다드셨으면 면접좀여

[길드] 메리토크라시 : 잠만 일단 던전좀다녀올게

[길드] 포푸리 : 진짜 잠깐만 한명만요

[길드] 포푸리 : 시티보이 왔어요

“시티보이?”

나도 모르게 입으로 말하자 찬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티보이라면 <만두> 길드의 마도사였다. 당연하지만 랭커다.

“아니, 이런 애까지 온다고? 고슴이가 그 정도였나?”

“잘하는 사람이에요?”

“마도사 톱랭커야. 근데 이 사람 만두 멘딜인데 왜 길탈을 했지?”

반가운 마음과는 별개로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다. 포푸리야 뭔 짓을 해도 워낙 별종이라 다들 그러려니 하게 된 지 오래지만, 얌전히 길드 생활을 하던 랭커를 여럿 빼 오는 모양새가 되면 아무래도 남들 보기에 좋지 않을 테니.

[길드] 메리토크라시 : 알았어 불러봐

물론 잘하는 레이드원을 두고 그딴 걸 신경 쓸 바보는 없다. 면접이 이어질 분위기에 찬희가 상체를 쭉 내밀었다.

“저도 거기서 같이 봐도 돼요?”

“어? 응.”

별생각 없이 대답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허벅지가 맞붙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굳혔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녀석이 아예 내 등 뒤로 손을 짚더니 어깨에 뺨을 붙인 것이다.

“…….”

이거 괜찮은 거야? 이 거리감 진짜 문제없는 거 맞아? 놀란 나머지 목덜미에서 맥박이 팔딱팔딱 뛰는 것까지 느껴졌다.

“……무거워.”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뱉은 말이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찬희가 큭큭 웃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턱 밑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까지 솔솔 풍겼다.

“왔네요.”

그 와중에 길드 룸으로 엘프 여캐가 들어섰다. 가장 키가 큰 종족이라 길드 룸 안에 있던 캐릭터들이 쪼르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손님] 시티보이 : 안녕하세요

한눈에 보기에도 룩덕(*룩 오타쿠 : 의상 아이템에 많은 비용과 정성을 들이는 유저를 뜻함)이었다. 머리 장식이며 의상, 구두에 스태프까지 희귀 아이템을 둘둘 두르고 있었다. 특히 긴 은발 머리를 감싼 보석 베일은 재작년 키트(*랜덤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캐시 템)에서 아주 극소량만 풀린 의장인데, 컬래버 아이템인지라 다시 나올 가능성도 없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었다.

“와, 지금 입은 것만 몇백은 되겠네…….”

“옷이요?”

찬희가 되묻자 뺨까지 숨결이 끼쳤다. 등줄기가 오싹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했다.

“어……. 이 사람 원래 희귀 의장 수집가로도 유명해.”

“현금으로 몇백이라는 거예요?”

“몇천까지 갈 수도 있어. 머리에 쓴 것만도 부르는 게 값이라.”

녀석이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시에 침대를 짚고 있던 손이 허리로 올라왔다. ……진짜 미치겠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괜히 입술을 축였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안녕하세요

[손님] 시티보이 : 저

[손님] 시티보이 : 먼저 여쭤볼게있는데요

[손님] 시티보이 : 길마님 혹시 닉머님인가요?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시티보이까지 훅 들어온다. 머리가 빙빙 도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정신을 차렸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포푸리님한테 들으셨나요?

[손님] 시티보이 : 들은 건 아니고

[손님] 시티보이 : 포푸리님이 여기 와있는데

[손님] 시티보이 : 고슴이도 잡았다하고

[손님] 시티보이 : 솔가 잡으러 갈거고

[손님] 시티보이 : 드루이드라니까

[손님] 시티보이 : 혹시 닉머님인가 한거예요

[길드] 포푸리 : 개똑똑해

[길드] 포푸리 : 문과인가봐

나는 빠르게 포푸리에게 야유 보내는 모션을 취했다. 포푸리는 금방 비굴하게 찌그러졌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제가 닉머면 저희 길드 들어오실 건가요?

[손님] 시티보이 : 네

[길드] 메리토크라시 : 흠 근데

[길드] 메리토크라시 : 시티보이님 원래 만두 멘딜이신걸로 아는데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이렇게 갑자기 옮겨오셔도 괜찮으신가요? 차후에 만두에서 저희한테 시비 걸거나 하진 않을지 걱정돼서요

[손님] 시티보이 : 그건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손님] 시티보이 : 좋게 나온건 아니라서요

쿨한 답변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낌새를 보아하니 왠지 본인이 잘못한 건 아닐 것 같았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손님] 시티보이 : 여자인거 들키자마자 부길마가 발정난 개처럼 껄떡대서 욕박고 나왔어요

“…….”

“…….”

나도 모르게 찬희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너무 가까워진 바람에 황급히 다시 모니터를 봐야 했지만.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거 참... 고생하셨네요

[손님] 시티보이 : 그게 어제일이고 나오자마자 포푸리님 새 길드 들어갔단 얘기 보고 온거라

[손님] 시티보이 : 그쪽에서 저 때문에 이 길드 자체에 시비틀수도 있다고 봐요

[손님] 시티보이 : 걱정되면 안받아주셔도 상관은 없는데

[손님] 시티보이 : 다 감수하고 가입시켜주시면 후회는 안하실겁니다

그야 당연하지. 사실 시티보이가 잘못한 거여도 일단 팀에 넣고 봐야 할 판이다. 마도사는 원래 딜이 잘 나오는 직군이지만, 그만큼 잡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그 안에서 랭킹을 올리는 건 훨씬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네 뭐 시티보이님이 잘못하신 것도 없는데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런 건 상관없어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여차하면 길드 쟁 뜨면 될 일이고요

[손님] 시티보이 : 감사합니다

[손님] 시티보이 : 그래서 길마님은

[손님] 시티보이 : 닉머님이 맞으신거죠?

[길드] 메리토크라시 : ㅇㅇ제가 닉머임

[길드] 메리토크라시 : 어차피 소문날 일이지만 일단은 비밀로해주세요

[손님] 시티보이 : 네

《시티보이 님이 길드에 가입했습니다. 따스한 환영 인사를 건네주세요.》

[길드] 포푸리 : 아 한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게있는데여

[길드] 포푸리 : 멘딜은 저죠?

[길드] 메리토크라시 : 현성아

[길드] 메리토크라시 : 따스한 환영 인사 건네라는 메시지 안보이니?

[길드] 포푸리 : 따스하게 묻고있는데요ㅠㅠ

쯧쯧, 혀를 차고 있자니 찬희가 조금 웃었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찬희에게도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다면 다행이었다.

“멘탱은 포지션 차이인 거 알겠는데, 멘딜은 뭐가 달라요?”

심지어 호기심까지 보이지 않는가. 나는 흠, 흠, 목을 가다듬고 신이 나서 주절거렸다.

“고위 레이드 가면 파티원들이 각자 자리를 정해야 할 일이 생기거든. 그때 딜 넣기에 좀 유리한 자리를 선점할 수 있어. 무빙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자리를 잡으면 그만큼 편하니까.”

“아아.”

“그래봐야 큰 차이는 아니라서……. 시티보이 같은 사람은 별로 신경 안 쓸 거야. 포푸리 같은 놈들이나 목숨 걸…….”

[길드] 시티보이 : ?

[길드] 시티보이 : 멘딜은 DPS로 정하는 거지

[길드] 시티보이 : 선점으로 정하는건 아니지않나요?ㅎㅎ

굳은 신뢰를 대놓고 깨뜨리는 채팅에 어쩐지 골이 아파왔다. 하여간 딜러라는 놈들은 다 이 모양이야…….

[길드] 메리토크라시 : 저기

[길드] 메리토크라시 : 저랑 곰이는 고슴이 사망 매커니즘 좀 확인하고 올테니까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사이 두분이 원만한 협의 도출하시고 결과만 보고하세요

[길드] 포푸리 : 피빕이 제일 확실하죠?ㅎ

[길드] 시티보이 : ㅋㅋ

[길드] 시티보이 : 멘딜 dps측정을 피빕?

[길드] 시티보이 : 말뚝딜로는 이길 자신이 없으신가봐요^^

캐스터인 마도사에게는 일정 시간 동안 허수아비를 쳐서 DPS를 측정하는 방식이, 무빙이 빠른 암수에게는 PVP가 유리하다. 어느 쪽이든 나랑은 상관없었다.

“고슴이나 잡으러 가자.”

헛기침을 하며 말하자 찬희가 네에, 웅얼대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내게 들러붙은 몸을 떼어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저기, 찬희야.”

“네.”

“던전 가자니까…….”

“갈 건데 잠깐만요.”

“…….”

“이러고 있으니까 좋아서 그래요.”

……진짜 이 미친놈 어쩌면 좋냐. 주먹 쥔 손으로 미간을 눌렀지만 당연히 해결책은 없었다.

허벅지가 바짝 닿은 탓에 청바지 면 너머로 높은 체온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허리를 감싼 손과 지그시 누르는 뺨의 온도가 간지러워 정신이 다 혼미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적당히 아는 형 동생 사이에서 오갈 스킨십은 아니다. 물론 이 녀석이 내게 바라는 게 그게 아니니까 당연하긴 한데…….

문제는 내가 이게 싫지만은 않다는 거지…….

“……찬희야.”

그렇다고 마냥 즐기기에는 지울 수 없는 찜찜함이 있는 것이다.

“이따 내가 찾아볼게, 네 첫사랑.”

허리에 가볍게 올라와 있던 손끝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 어깨에 닿은 얼굴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 찾아도 된다니까요.”

“그렇게 간단히 말할 게 아니라…….”

“잊어버리시라고 했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진심이에요.”

“…….”

“제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형이에요.”

제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아. 들은 말을 되짚던 의식 속으로 찰박대던 물 표면이 넘친 듯한 깨달음이 일었다. 나는 잠시, 어쩌면 오랫동안 허공에 멈춘 녀석의 시선을 쫓았다.

그러니까 나도, 이 녀석과 있으면 좋은데.

“……그래도.”

그래도 되는지를 모르겠어.

“이대로는 내가 좀 그래.”

네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이 나라고 믿고 싶지만,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아니어서……. 어느 날 갑자기 널 홀랑 빼앗길 수도 있는 거잖아.

“찾아보고 싶어.”

그래서 확인하고 싶어. 내가 안주해도 되는 건지.

“…….”

좁은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쩐지 머쓱한 기분에 입가를 문지르는데 찬희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제 무릎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는 녀석의 미간이 우울하게 패어 있었다. 눈을 내리뜬 채 예쁜 입술을 꾹 다문 모습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 왜 그래?”

“……제가.”

말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눈도 마주쳤다. 초콜릿색 눈동자가 크게 요동치는 바람에 혹시 우는 건가 싶어 식은땀이 다 났다.

“제가 그렇게 부담스러우시면…….”

“어? 뭐?”

“죄송해요. 저도 자제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안돼서…….”

“아니, 저기. 찬희야. 찬희야, 잠깐만.”

“……네?”

“지금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서 이런 결론이 도출된 건지 설명해주지 않을래? 내가 왜 너를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해?”

번갈아 삿대질까지 하며 묻자 녀석이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그게 아니면 뭐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방금 제 첫사랑……. 꼭 찾아줘야겠다고 하신 거.”

“어, 그게 왜?”

“제가 이러는 게 싫어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저 다른 사람한테 보내려고…….”

……듣고 보니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미칠 듯한 간지럼증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방심하면 와하하 웃어버리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녀석 같은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는 또 마음의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 나는……. 너한테 항상 고맙지. 고맙고…….”

“제가 형에게 고맙다고 느껴질 만한 일을 하는 건 형이 좋아서예요.”

“…….”

“몰라주셔도 괜찮지만…….”

몰라줘도 괜찮다니. 그렇게 간절한 표정으로 말해봤자 무슨 설득력이 있겠냐……. 결국은 허탈한 웃음이 샜다. 긴장이 풀리니 오히려 명확해졌다. 이 녀석은 첫사랑이고 뭐고 이제 됐다고 말하지만, 내가 그 첫사랑이라고 믿고 있지 않은 이상 이 정도의 마음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나 크고 애달픈 애정이 생겼겠어.

“찬희야, 나는…….”

부름에 온순하게 마주쳐 오는 눈동자가 촉촉했다. 더는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분명 이 녀석을 향해서― 내 안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너 부담스럽지 않아. 같이 있으면 좋고…….”

“정말요?”

“지나치게 잘해주니까 미안할 때가 있긴 해도……. 부담스럽다거나, 안 했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오히려 점점 욕심이 자라고 있지. 솔직히 이건 불가항력이라고 봐야 한다. 찬희가 내어주는 호의나 온기는 꽃향기 같았다. 사치스럽고 안온했다. 몰랐다면 모르는 대로 살았겠지만, 나는 이미 온실을 짓고 싶어져버렸다.

“혹시 내가 욕심내는 거 아닐까 싶어서…….”

“…….”

“그 부분을 확실히 하고 싶은 것뿐이야.”

찬희는 대답이 없었다. 나조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공을 짚던 손을 꽉 말아 쥔 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지?”

“네.”

아주 시원스럽고도 솔직하지……. 입을 다문 채 머뭇대는데 잠시 뭔가 고민하던 녀석이 문득 물었다.

“형, 그러면요. 혹시 제가 첫사랑 얘기 안 했으면 지금 아무 고민도 안 하셨을까요?”

“…….”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멈췄다. 첫사랑 얘기 없이 나한테 이랬으면……? 이렇게 생긴 애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이런 정성을 부렸다면…….

“……아니. 그랬으면 완전히 네가 나 갖고 노는 줄 알았을걸.”

“고민의 여지도 없이 아웃이었어요?”

“어…….”

“그렇구나. 괜히 말했나 싶었는데 그럴 일은 아니었네요.”

안도한 듯 중얼거린 녀석이 사르르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헛기침을 하고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알았으니까 이제 던전 가자.”

“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제 노트북 앞으로 돌아갔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에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그럼 형이 제 첫사랑 맞으면 다 해결되는 거죠?”

……어째 얌전히 넘어간다 했다. 대답 대신 슬쩍 쏘아보는 눈빛을 보내고 워프 게이트를 열었다.

[길드] 포푸리 : 형님 어디가세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고슴이잡으러ㅇㅇ

[길드] 옹팍 : 헐 저도 잡아주세요

[길드] 시티보이 : 저도..

[길드] 포푸리 : 어허 신입들 기강빠져가지고

[길드] 포푸리 : 한달지나야 고슴이 잡아준다는 공지못봤습니까?

[길드] 메리토크라시 : 뭘 좀 확인하러 가는거긴한데

[길드] 메리토크라시 : 한가하면 따라오세요 겸사겸사 타이틀 따드릴테니

[길드] 포푸리 : 형님???

[길드] 포푸리 : 한달간은 푸리만 새싹달고 다닐수있는거아니었나요?ㅠ

무시하고 옹팍과 시티보이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어차피 레이드 인원으로 확정됐는데 굳이 시간 끌 필요도 없지 않나 싶었다. 그러자 포푸리도 혼자 있기 심심하다며 매달리는 바람에 최종적으로는 5인 파티가 되었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잡몹은 알아서들 잡으시고 보스룸은 들어오지 마시고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이것저것 시험해보느라 시간 좀 걸릴수있으니 재촉하지 마셈

[길드] 옹팍 : 옙

[길드] 시티보이 : 네

[길드] 포푸리 : 형님 그럼 그거 켜주세요

[길드] 포푸리 : 공헌도 랭킹

공헌도 랭킹이란 특정 레이드나 인스턴스 던전을 클리어할 때 파티원 중 누가 클리어에 더 많이 기여했는지를 알려주는 리스트다. 기믹 수행까지 측정되는 만큼 DPS 순위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주로 탱커들이 높은 순위에 랭크되는 편이었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공랭은 왜?

[길드] 포푸리 : 잡몹 누가 더 많이 잡는지 경쟁하려구요ㅋㅋ

[길드] 포푸리 : 자고로 멘딜이라면 머릿수로 승부해야죠^^

[길드] 시티보이 : ? 갑자기 뭘 혼자 결정하시네ㅋㅋ

[길드] 포푸리 : 쫄았으면 안하셔도ㅋㅋ

[길드] 시티보이 : 광딜로 마도사를 이기겠다고? 불쌍해서 그래요ㅋㅋ

[길드] 메리토크라시 : 예 뭐 맘대로들 하시고 출발하겠습니다

얘네는 계속 이러려나? 딜부심으로는 아시르스 안에서 투탑을 달릴 유저라 든든한 만큼 걱정스럽기도 했다. 지금이야 반 농담으로 싸우지만 나중에는 진짜 마음 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적어도 포푸리는 그러고도 남을 또라이였다.

[길드] 옹팍 : 딜러들은 너모 무서워.. 섬세하고 매너있는 성기사랑은 다르네요ㅠㅠ

물론 옹팍도 사람이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 미친 세상에서 인성에 하자 없는 놈은 우리 귀여운 흑곰뿐이구나. 나는 주섬주섬 대검을 꺼내 드는 흑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님들 그럼 이번 공랭으로 멘딜 정하기로 합의된 거예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둘다 납득했으면 그렇게 하고 더이상 이걸로 싸우지 마셈

[길드] 시티보이 : 네 전 좋아요

[길드] 포푸리 : ㄴㄴ일케해요

[길드] 포푸리 : 제가 제안한 pk, 시티보이님이 제안한 말뚝딜, 거기다 이번던전 공랭까지 해서

[길드] 포푸리 : 2선승자가 멘딜

[길드] 포푸리 : ㅇㅋ?

레이드 들어갔을 때 네임드 오른쪽에 서냐 왼쪽에 서냐를 먼저 고르자고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나야 서포터니까 말 섞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시티보이도 포푸리의 제안이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길드] 시티보이 : 알겠습니다

[길드] 시티보이 : 대신 결과 나오면 깨끗하게 승복하고 질척대지 않는걸로요

[길드] 포푸리 : ㅋㅋ

[길드] 포푸리 : 걱정ㄴㄴ 저 납득충임

대충 정리된 파티를 끌고 고슴이 던전으로 입장했다. 공헌도 랭킹을 켜자마자 포푸리와 시티보이가 동시에 달려나갔다. 포푸리가 먼저 단검을 사방에 흩뿌리며 공중제비를 돌자 몰려 있던 몹들이 일격에 절멸하며 각기 다른 괴성을 내질렀다.

그때 시티보이가 자리에 멈춰 서더니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고는 훌쩍 뛰어올라 마법진을 밟고 정면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마도사가 자신에게만 사용 가능한 전용 헤이스트 스킬이었다. 전투 중에 시전하면 마나를 소비하기 때문에 PK 상황이 아니고서는 잘 쓰지 않는 기술이다.

“어이구야, 목숨 걸고 하네…….”

보아하니 일부러 처음 나오는 무리는 포푸리에게 던져주고, 그 다음에 나올 몹 무리를 노린 모양이었다. 두 번째 무리가 머릿수도 많고 피통도 크기 때문이다. 바닥에 내려선 시티보이의 스태프 끝에서 커다란 불구덩이가 솟구쳤다. 공헌도 실시간 랭킹 1위가 포푸리에서 시티보이로 바뀌었다.

[길드] 포푸리 : ㅅㅂ

짧고 강렬한 소회를 뱉은 포푸리가 별안간 불만을 늘어놓았다.

[길드] 포푸리 : 형님 이건 불공

[길드] 포푸리 : 헤이스트 저도

[길드] 메리토크라시 : 내가 걸어준거아냐

[길드] 메리토크라시 : 마도사스킬임

[길드] 시티보이 : ㅋㅋ

그 사이 또 자체 헤이스트를 시전한 시티보이가 허공에서 파란 물약을 들이켰다. 와, 이걸 마나포션까지 빨면서 한다고? 참고로 전투 중 마나를 채워주는 포션 가격은 현금으로 병당 3천 원이 넘는다.

의장 덕질도 그렇고, 전투 템에 돈 붓는 사이즈만 봐도 부내가 솔솔 풍겼다. 금수저거나 직장인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뒷짐 진 채 느긋하게 따라가고 있자니 찬희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둘이 지금 메인 딜러 하겠다고 싸우는 거예요?”

“어? 응.”

“메인 붙는 게 그렇게 좋은 거였어요? 그럼 저랑 옹팍 님도 이런 거 해야 해요?”

나도 모르게 푸핫, 웃음이 터졌다. 찬희는 한층 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야, 아니야. 넌 내가 처음부터 메인 탱 앉혀놓은 거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새로 들어온 파티원이 소외감 느끼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거랑은 또 좀 다른 문제라 해야 하나……. 이렇게 팀 짜서 관리하는 거 자체가 수고로운 일이거든. 그러니까 이 정도 특권은 가져도 돼.”

“흐음…….”

“그리고 네가 그 포지션에 필요해서 그 자리에 둔 거야. 옹팍도 납득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찬희가 그제야 네에,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시티보이와 포푸리는 첫 번째 네임드 앞까지 주파한 채로 누가 문을 여느냐를 두고 아옹다옹하고 있었다.

[길드] 포푸리 : 제 손에 단검 장전된 거 안 보이세요? 인정이 있다면 시티보이님이 열어주셔야져ㅎㅎ

[길드] 시티보이 : 전 파이어볼트 풀차지가 끝나버려서 남는 손이 없네요ㅠㅠ

[길드] 메리토크라시 : 옹팍님 가서 문좀따주세요

[길드] 옹팍 : 네ㅜㅋ

검과 방패를 든 채 철걱철걱 달려간 옹팍이 열쇠를 넣고 문을 열었다. 동시에 포푸리와 시티보이가 준비 중이던 공격을 안쪽으로 쏟아부었다. 공헌도 랭킹 1위 자리는 미친 듯이 깜빡대며 바뀌는 중이었다. 콰쾅, 레벨링용 인스턴스 던전에서 온갖 요란한 이펙트가 난무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기운이 빠졌다.

[길드] 포푸리 : 솔직히 캐시템은 반칙이지ㅠ

결국 고슴이만 남겨둔 보스 룸 앞에서 둘의 차이는 꽤 벌어져 있었다. 물론 시티보이가 1위였다. 본래대로라면 마도사의 광역 마법 공격이 아무리 강해도 마나의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는 이 던전 안에서만 마나포션 열 통(=3만 원)을 태움으로써 차이를 공고히 했다.

[길드] 시티보이 : 캐시템이 반칙이라구요?

[길드] 시티보이 : 혹시...

[길드] 시티보이 : 무과금만이.. 진.짜.겜이다. 뭐 그런.. 빈털터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

[길드] 포푸리 : ㅠㅠㅋㅋ 하젠장

[길드] 포푸리 : 낼부터 상하차 뜁니다

……죽이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로 백기 드는 모션을 취하는 포푸리를 지나쳐 보스 룸을 열었다. 땅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대던 고슴이가 우리를 발견하고 앞발을 들어 올렸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놀고계세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잡고옴

[길드] 옹팍 : 네엡

흑곰만 데리고 입장하자마자 문부터 닫았다. 같은 파티원은 들어오려면 들어올 수 있지만 굳이 들은 말을 어길 인간들은 아닌 것 같았다. 캐릭터를 잠시 세워둔 채 이전 입장 시 로그를 뜯었다. 흑곰이 공격 콤보를 돌렸을 때 통상 수치의 수십 배에 달하는 대미지가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쳐볼래?”

“네.”

말 끝나기 무섭게 흑곰이 고슴이에게 콩콩 달려들었다. 대검을 길게 휘두르자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이가 응전 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피가 획기적으로 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내가 했던 게…….”

이번에는 이전 기록에서 흑곰에게 걸려 있던 버프를 확인했다. 방어력 증가 버프 하나뿐이었다. 똑같이 걸고 지켜보는데 이번에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이번엔 진짜로 버그였나? 그런 거면 쟤네 새싹 못 달아주는데. 가입 사기 쳤다고 사사게 올라가도 할 말이 없…….

“아.”

그때 노트북을 보고 있던 찬희가 짧게 탄식했다. 그러고는 잠시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더니 다시 대검을 휘둘렀다.

“어?”

이번에는 순식간에 피가 훅 깎였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물어볼 틈도 없었다. 고슴이가 곧장 몸을 일으키고 전멸기를 시전했던 것이다.

“어어, 잡아. 잡아.”

“네에, 잡을게요.”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흑곰이 고슴이의 가슴팍을 길게 그었다. 그러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고슴이가 배를 보이고 발랑 쓰러졌다. 길드 창도 동시에 시끄러워졌다.

[길드] 옹팍 : 헉 땄다

[길드] 옹팍 : 우와~~~

[길드] 포푸리 : 헐 곰님이 공랭 1위먹었는데요?

[길드] 포푸리 : 이러면... 무효아닌가~?

[길드] 시티보이 : 질척푸리로 닉변하신다고요?

[길드] 포푸리 : 아니요 피빕으로 만회한다고ㅠ

“어떻게 한 거야?”

길드 창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고개를 빼고 물었다. 찬희는 대답에 앞서 노트북을 돌려 화면을 보여주었다.

“자연 3티어 찍었더니 생긴 스킬이에요.”

“어?”

화면에는 녹색으로 깜빡이는 티어 스킬이 떠 있었다. 이름은 ‘공명’이었다.

“자연 계열 버프를 받았을 때 일시적으로 대미지를 대폭 증가시켜주는 것 같아요. 3티어 조건이 자연 버프를 백 번 받는 건데, 마침 지난번에 여기 들어왔을 때 딱 달성이 됐거든요. 뭐가 깜빡이길래 별생각 없이 눌렀는데…….”

아예 노트북을 받아들고 자세히 보니 들은 말대로였다. 그림자 전사가 자연 3티어를 달성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공명’은 자연 계열 버프― 즉 드루이드가 걸어주는 버프를 뭐라도 받으면 순간적으로 큰 대미지를 낼 수 있는 스킬이었다. 문제는…….

“……쿨타임이 하루에 한 번?”

심지어 최대 대미지 절대 수치에 리미트가 있었다. 즉 이런 하위 던전에서는 네임드를 한 방에 보낼 수 있지만, 고위 레이드에서는 그리 효율적으로 쓸 수가 없다. 고슴이처럼 특별한 클리어 조건이 있는 인스턴스 던전 보스 타이틀 수집에나 유용할 듯했다.

“…….”

실망감에 한숨을 쉬다 말고 불이 반짝였다. 혹시 애초에 목적이 그건가? 보통은 대충 클리어만 하고 넘어가는 던전이나 퀘스트의 숨은 타이틀을 따게 해주는 설계인 건가……?

어쩌면 드루이드와 그림자 전사는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인 걸까? 고위 레이드보다는 게임 자체에 숨겨진 컨텐츠를 구석구석 즐기기 위해서?

[귓속말] 프리한도비 : 님

[귓속말] 프리한도비 : 길갑승인좀

상념에 잠긴 사이 귓말 알림이 깜빡였다. 어디서 본 닉네임이라 미간을 좁혔다가 곧 차단해버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자연 3티어 올릴 생각을 했어?”

“제가 뭘 한 건 없어요. 형이랑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달성된 거라.”

“처음에 티어 퀘스트는 받았을 거 아냐.”

“그건 형 안 계실 때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받았어요. 혼자 딱히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어쩐지 시위하는 발언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어색하게 웃고 일단 길드 룸으로 워프했다. 졸래졸래 따라 들어온 세 명이 단체로 머리에 새싹을 달고 있는 건 좀 웃겼다. 특히 시티보이의 화려한 베일 장식 위로 통통한 새싹이 쏙 올라온 모양이.

[길드] 포푸리 : 이거 우리 길드 시그니처해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싫어도 그렇게 될듯

[길드] 메리토크라시 : 고슴이 죽일수있는게 곰이뿐이라

[길드] 포푸리 : 헐진짜요?

[길드] 포푸리 : 형님이 뭔가 하신줄알았는데 곰님스킬이었음?

[길드] 메리토크라시 : ㅇㅇ

[길드] 포푸리 : 이거 쩔파티열면 떼돈벌텐데

[길드] 포푸리 : ㅠ_ㅠ그래두 쩔반대!! 성탄 시그니처얌~♥

몸을 배배 꼰 포푸리가 애교 모션을 취했지만 다행히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외면했다.

[길드] 옹팍 : 부길마님만 고슴이 잡을수있는거면 그전 특화 스킬인가여?

[길드] 메리토크라시 : 뭐 비슷한데

[길드] 메리토크라시 : 누가 물어보면 그냥 길마만 잡는법 알고 아무한테도 말 안해준다더라 하세여

[길드] 메리토크라시 : 나중에 공략법 정리해 올릴테니 한동안은 님들만 유세떨고 다니셈

[길드] 옹팍 : 아싸

[길드] 시티보이 : 그럼 지금 아시르스에 새싹이펙트 가진 게 여기 있는 다섯명뿐인 건가요?

[길드] 시티보이 : 기분 개째지네

……개째지는 건 어떻게 째지는 거지. 굳이 묻지는 않기로 했다. 신이 난 길드원들의 수다를 영혼 없이 받아주며 입으로는 찬희에게 말했다.

“원래 못 죽이는 몹들 이런 식으로 잡아봐도 괜찮겠다. 내일부터 찾아서 해보자.”

“둘이서만요?”

“둘이 해야지. 근데 당분간은 레벨링이 바쁘니까 끝나고 남는 시간에.”

“네, 데이트면 다 좋아요.”

이 직구에도 슬슬 익숙해졌다. 어, 하며 씩 웃자 녀석도 미소 지었다.

[귓속말] 프리한비도 : 님

[귓속말] 프리한비도 : 외 차단박는거임?

훈훈한 분위기는 잠시뿐이었다. 그새 또 날아온 귓속말이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허, 하며 재차 차단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님은 뭔데 질척대는데요

[귓속말] 프리한비도 : 아니;;

[귓속말] 프리한비도 : 솔가레이드팀 모집한담서요?

[귓속말] 프리한비도 : 직자지원임;

성직자라……. 철밥통 직업이긴 해도 암수나 성기사 같은 귀족직은 아니다. 운용 난이도가 낮은 편이라 허접들이 많이 몰려 있기도 하다. 굳이 드루이드 비하 발언까지 하는 유저를 불러다 면접을 봐야 할 만큼 급하지 않다는 뜻이다.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직자 찼음

[귓속말] 프리한비도 : 그럼 치유사요

[귓속말] 프리한비도 : 이게 치유사캐임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그것도 찼음

[귓속말] 프리한비도 : 사격수는요?ㅠ

손끝이 멈췄다. 사격수는……. 쪼오끔 귀하지. 이유는 당연하게도 손을 타기 때문이다.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편차가 심하게 큰 편이라 항상 구인난에 시달리는 직업이기도 했다.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흠

[귓속말] 메리토크라시 : 격수로 와보세요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드 룸으로 인간 여캐가 들어섰다. 번쩍번쩍한 활을 들고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위기감이 번쩍 들었다.

[손님] 프리한보비 : 헐

[손님] 프리한보비 : 멤버쩌네;;

길드 룸에 있던 네임드 3인방을 목격한 놈이 가감 없이 지껄였다. 자꾸만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눌렀다. 아니야, 얘기해보면 좋은 사람일 수도 있어. 어쩌면 격수 랭커일지도 몰라. 그때 문제의 손님이 별안간 포푸리 옆에 찰싹 들러붙었다.

[손님] 프리한보비 : 와 포푸리님이당

[손님] 프리한보비 : 부빗ㅇㅅㅇ

아니야, 이건 텄어……. 길고 짙은 탄식을 삼켜내며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철썩 올려쳤다. 어느새 다시 옆에 와 앉아 있던 찬희가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냈다.

“왜요, 형?”

“……아냐. 귀족직에 홀려 바보짓을 한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치더라도 살살 치세요. 이마 빨개졌어요.”

크고 부드러운 손이 서슴없이 내 이마를 덮어 슬슬 문질렀다. 정말 우습게도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길드] 포푸리 : ??????????????????

[길드] 포푸리 : 님 지금

[길드] 포푸리 : 의태어를 입으로 말한거임?????

[길드] 포푸리 : 진짜 이런거 하는 사람이 있구나

모니터 안에서는 지뢰가 터지기 직전임에도 그랬다.

[손님] 프리한보비 : 아...

[손님] 프리한보비 : ㅋㅋ아뇨

[손님] 프리한보비 : 지금 피방인데

[손님] 프리한보비 : 여사친이 장난쳤네요;

[손님] 프리한보비 : 장난기 많은애라ㅇㅇ 가끔 이런짓을해요 여친은아닌데

[손님] 프리한보비 : 유난히 저한테 이런 장난치고싶어하네요ㅎㅎ

[길드] 시티보이 : ㅋㅋ

[길드] 시티보이 : 피방로고 안뜨셨는데

피시방 접속 유저는 게임 운영 중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접속 중 닉네임 옆에 PC 딱지가 붙는다. 나는 재빠르게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피방로고 오류날때 있대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하여튼 면접 진행하겠습니다

경험상 이런 타입들은 지나치게 몰아붙여봤자 남을 게 없다. 다행히 시티보이도 그 이상 찌를 생각은 없는지 얌전히 물러섰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보비님 지금 격수랭킹에는 이름 안뜨시는데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이전 레이드 참여내역 있으신가요?

[손님] 프리한보비 : ? 랭커여야 지원가능한거였나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아뇨 그건 아니지만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이왕이면 레이드 경험은 있는분이면 좋겠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손님] 프리한보비 : 본캐 직자로는 레이드 계속 다녔는데 격수는 공팟만 다녀서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럼 허수아비 한번 쳐볼게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잠시만요

길드 룸 설정을 열어 DPS 측정용 수련장인 ‘무도관’을 만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포푸리와 시티보이, 옹팍까지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수련장에서는 제한 시간 동안 가만히 있는 표적에 공격을 쏟아붓는 방식으로 딜을 재는데, 변수가 없는 만큼 얼마나 딜 사이클을 제대로 돌리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손님] 프리한보비 : 음 그런데

[손님] 프리한보비 : 제가 아직 만렙파밍이 끝난상태는 아니어서요

[손님] 프리한보비 : 그리고

[길드] 메리토크라시 : 장비 설정 끄고 레벨대비 딜만 볼게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걱정ㄴㄴ

예상대로 혓바닥도 길었다. 시작 시간을 세팅하자 화면에 카운트다운이 떴다. 그제야 입을 다문 프리한보비가 허수아비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틱, 틱, 틱……. 0초가 되자마자 타켓 가능 표시가 뜨고, 바로 화살이 날아갔다.

“…….”

요란한 이펙트가 터져 나오는 허수아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격수 운용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인간이었다. 사격수는 허리에는 단총을, 등에는 활을 메고 있다. 멀리서 활로 도트 데미지를 넣고 평타를 쏘며 스택을 쌓다가, 접근해서 단총으로 헤드샷을 날리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즉 분류는 원거리 딜러지만 근거리 딜도 넣을 줄 알아야 한다. 손을 많이 타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네 됐습니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만봐도 되겠어요

수련 타이머를 끄자 나타난 수치는 만렙 사격수치고는 대단히 민망한 수준이었다. 포푸리나 시티보이가 완전히 흥미를 잃은 것이 느껴졌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격수를 잘 모르시는것같아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다음에 기회 있으면 다시 뵙죠

[손님] 프리한보비 : ?

[손님] 프리한보비 : 지금 저 까인건가요?

[길드] 포푸리 : 넴 까이셨음

다행히 불편한 답변은 포푸리가 대신 해주었다. 길드 룸에서 퇴장시키려고 멤버 창을 열었을 때였다.

[손님] 프리한보비 : ㅋㅋ아니

[손님] 프리한보비 : 시♥ 존나어이없네

[손님] 프리한보비 : 드루가 격수를 깐다고?

요란하던 길드 룸에 잠시 숙연한 침묵이 감돌았다. 찬희도 옆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길드] 포푸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포푸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길드] 시티보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옹팍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만들 처웃으세요

[길드] 포푸리 : 합주기;

“저 사람 지금 형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찬희의 말투가 처음으로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제 노트북 앞으로 달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길드] 까맘곰 : 지금 욕하신 건가요? -_-^

채팅 창을 보자마자 터진 건 나였다. 으하하학, 품위 없이 웃어버리자 찬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돌아보았다.

“기다리세요, 형. 제가 따끔하게 혼내줄 테니까.”

“아, 미친……. 미친 거 아냐?”

나는 배를 잡고 웃느라 죽어가거나 말거나 화면 속 까맘곰의 폭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앞발을 번쩍 들어 올린 흑곰이 쿵쿵 발을 구르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까맘곰 님이 분노합니다!》

[길드] 까맘곰 : 당장 사.과.하세요ㅡㅡ^!

너무 묻고 싶다. 저 세기말 이모티콘들 정말 정체가 뭐야? 나이도 어린 게 왜 저런 것만 쓸 줄 아는 거야. 옆으로 엎어진 채 웃다 찔끔 밴 눈물을 닦았다. 아…….

진짜 귀여워 죽겠네…….

[손님] 프리한보비 : 뭘 사과하라는거?

[손님] 프리한보비 : 격수가 노장비로 이정도 딜뽑는게 쉬운줄아세요?

[길드] 포푸리 : 쉬울거같은데

[길드] 포푸리 : ㅋㅋ

[손님] 프리한보비 : 아니

[손님] 프리한보비 : 포푸리님이나 시티보이님처럼 딜에 목숨건 사람말고요

[길드] 시티보이 : 님은 왜 목숨안거는데요?

[길드] 옹팍 : 싸우디마세요

[길드] 옹팍 : 러브앤피스ㅠㅠ

당연한 일이지만 길드 룸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자초한 일이라고는 해도 여럿이 한 명을 몰아가면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거기다 내가 여기까지 데려온 거니 어쩔 수 없이 책임감이 들었다. 슬슬 수습할 생각으로 손을 들었을 때였다.

[손님] 프리한보비 : 죄송한데 전 현생이 바빠서

[손님] 프리한보비 : 게임에 목숨까지 걸만큼 한가하진않습니다만

참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이런 말을 되뇔 때는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다. 못 참으리란 걸.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럼 길드 룸 들어와서 저 분들 봤을 때 바로 나가셨어야죠

하필 나는 타자도 매우 빠르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목숨걸고 딜뽑는 랭커들인거 알아봤잖아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본인은 목숨 안걸고 설렁설렁 하겠다는 주의면 다른 파티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야죠

[길드] 메리토크라시 : 목숨걸고 하는 파티원과 굳이 같이 하고 싶은데 나는 목숨 안걸겠다는건 결국 무임승차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길드] 메리토크라시 : 왜 당당하지?

[손님] 프리한보비 : 그럼 랭커만 받는다고 하시던가요

[손님] 프리한보비 : 왜 이제와서 딴소리냐고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거랑은 다른 문제죠

[길드] 메리토크라시 : 랭커 아니어도 나름의 의욕이 있고 열심히 할 생각이 있어 보이면 합 맞추면서 같이 갈 수 있어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근데 님은 이깟 게임에 열낼 생각 없다면서요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럼 님처럼 이깟 폴리곤 놀이 우습게 보는 파티를 찾으러 가세요 여기서 날로 먹어보겠다고 비비지 마시고

“와……. 형, 말 진짜 잘하시네요.”

찬희가 순수하게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무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자니 치솟았던 호승심이 잠깐이나마 가라앉았다. 나는 으흠, 헛기침을 하고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하여튼 차단합니다 다신 볼일 없도록 합시다

길드 룸에서 쫓아내고 곧바로 차단을 눌렀다. 동시에 일렬로 서 있던 포푸리와 시티보이, 옹팍이 줄지어 박수를 쳤다.

[길드] 시티보이 : 약간 믿음이 생겨요

[길드] 시티보이 : 만두에서 뭔 수작질을 해도 길마님이 다 해결해줄거같음

[길드] 메리토크라시 : 길마니까 웬만하면 제가 해결하긴 하겠지만

[길드] 메리토크라시 : 일부러 시비트고 다니진마세요

[길드] 시티보이 : 넹

[길드] 시티보이 :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저도 도움이 되도록

[길드] 시티보이 : 화산 가요 내일까지 두분 성력 만렙 찍어드릴게요

그 와중에 귀가 솔깃했다. 화산이라 함은 정말 징글맞게 피통이 큰 몬스터가 대량으로 포진해 있는 필드를 뜻한다. 잡기는 어렵지만 그만큼 경험치를 많이 주기 때문에 강한 딜러가 버스를 태워주면 가장 효율적으로 레벨링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길드] 메리토크라시 : 곰님이 지금 노트북인데요

[길드] 시티보이 : 상관없어요

[길드] 시티보이 : 세워놓고 멍하니 계시면 제가 다 잡아드림

자신만만한 선언이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이건 아마도……. 오늘 밤을 새우고 내일까지 꽉 채워 달리겠다는 이야기였다. 즉…….

[길드] 포푸리 : 머야

[길드] 포푸리 : 그럼 곰님 오늘 길마님네서 자야겠네요

……채팅을 보자마자 애석하게도 눈이 마주쳤다. 동그란 눈동자가 순간 반짝인 걸로 보였다면 내 착각일까.

[길드] 메리토크라시 : 그러지 말고

[길드] 메리토크라시 : 오늘은 곰님이랑 저랑 둘이서 티어도 올릴겸 알아서 레벨링할테니

[길드] 메리토크라시 : 다음주중에 하루 날잡고 도와주셈ㅇㅇ

[길드] 시티보이 : 그럴까요?

[길드] 시티보이 : 그럼 괜찮은 날짜 잡아서 알려주세요

[길드] 시티보이 : 전 아무때나 ㄱㅊ

아무 때나 괜찮다니, 학교나 직장이 없나? 다시금 부상하는 시티보이 금수저 썰을 고이 넣어두고 찬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봤지? 오늘은 나 암흑이나 하나 찍고…….”

“저 자고 가면 안 돼요?”

고개를 갸웃 기울인 찬희가 아무 유감 없는 말투로 물었다. 정말 순수하게 안 되는 이유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마우스를 꽉 쥐었다.

“……이 집에 너 재울 데가 어딨어. 침대도 싱글 사이즈라 나 하나 눕기도 좁은데.”

“전 바닥에서 자면 되는데.”

“바닥……! 야! 그럴 거면 내가 바닥에서 자야지!”

“네? 형을 바닥에 재울 순 없죠. 차라리 제가 집에 갈게요.”

“그래! 그니까!”

새된 목소리로 외치자마자 정적이 감돌았다. 잘 해결된 상황을 두고 동시에 웃음이 터진 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 살풋 미소 띤 입술을 매만지는 찬희의 손끝에 모자란 햇빛이 감돌았다.

“그러면요, 형.”

“…….”

“저희 집에 가실래요?”

그래, 왠지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니까.

“……쩔 스케줄 잡히면 생각해볼게.”

“쩔이 뭐예요?”

“포푸리나 시티보이가 하는 것처럼……. 레벨 낮은 사람 데리고 다니면서 경험치나 아이템 먹여주는 걸 쩔이라고 해.”

“아아.”

“…….”

“오늘은 안 가실 거구요?”

은근히 물으며 살그머니 웃는……. 저런 짓 좀 제발 안 했으면 싶다. 나는 입술을 축이며 괜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오늘……은 뭐 하러 그래…….”

“아, 초대에 응할 핑계가 필요한가요?”

“그렇게 대놓고 말할 거야?”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는 안 돼요?”

헙, 열렸던 입술을 급히 닫았다. 저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그런 핑계는 안 되지, 아직은…….

“……다음에 놀러 갈게.”

“진짜로?”

“진짜로.”

그제야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얌전히 화면 속 흑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쌓아뒀던 성력을 모조리 소진해 암흑 티어를 하나씩 올리고 나니 어느새 어둑해진 시간이었다. 티어 퀘스트는 여러모로 예상대로였다. ‘암흑’과 ‘자연’, 두 가지 티어는 드루이드와 그림자 전사가 페어로 수행할 경우 간단히 완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론 노가다는 그대로지만, 그 노가다의 난이도가 수직 하락하는 식이었다.

티어 퀘스트를 함께 수행할 때 상성이 좋아지는 직업이 그간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성기사와 성직자는 신성 티어를 함께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신성 티어 퀘스트 스토리는 아시르스 전역을 돌며 수호수를 되살려내는 것인데, 탱커와 힐러가 팀을 짜서 진행하면 각 퀘스트의 완료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자 전사가 ‘자연’ 티어를 찍을 이유도, 드루이드가 ‘암흑’ 티어를 찍을 이유도 없는 데다가― 두 직업을 잡는 인구 자체가 너무 적다 보니 이런 구조가 여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는 건…….

‘자연 10티어를 달성한 그림자 전사나, 암흑 10티어를 달성한 드루이드에게 분명 뭔가 생길 거야.’

처음부터 게임의 설계 의도가 그쪽이었다면, 그림자 전사와 드루이드가 똥캐로 자리매김한 것은 유저들이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수많은 원성에 시달리면서도 딱 두 개의 직업만 천대받는 현 상황에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도 설명이 된다. 티어만 고쳐 찍으면 해결될 문제였던 거니까.

“…….”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똥캐 벗어나는 거 아냐? 불타오르는 희망회로에 입술을 실룩이는데 찬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어? 어어, 응.”

나도 얼른 침대에 달라붙은 엉덩이를 떼어냈다.

“그러고 보니 차는 어디다 대놨어?”

“근처 공영 주차장에요.”

“아, 어딘지 알겠다.”

슬슬 해가 지면 쌀쌀해질 시기였다. 1층까지라도 배웅할 생각으로 주섬주섬 얇은 겉옷을 걸쳐 입자 찬희가 미소 띤 채 물었다.

“어딘지 아세요?”

“응? 놀이터 옆에 있는 주차장 말하는 거 아니야?”

“아시는구나. 어쩌죠? 저는 지금 다시 찾아가려면 헤맬 것 같은데.”

“…….”

“…….”

“어……. 주차장까지 데려다줘?”

“네에.”

그래……. 어렵지 않게 대답하고 옷을 마저 입었다. 찬희의 화법은 가끔 어린애들과 비슷할 때가 있었다. 친구가 과자를 먹고 있으면 그 옆에 가서 ‘나도 과자 좋아하는데’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게 귀엽게 느껴지는 나도 나지만.

“꽃 고마워요.”

그사이 제 짐을 챙긴 찬희가 꽃다발을 소중히 안아 들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수국은 문짝만큼 커다란 미남의 품에서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저 얼굴에 안 밀리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싶으면서도― 괜히 아쉬운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시선이 멈췄다.

“…….”

집에서 받아온 그대로 내버려둔 태블릿PC 쇼핑백이었다. 나는 속으로만 두 번을 망설이고는 되도록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저기, 혹시 이거 너 쓸래?”

내가 들어 올린 쇼핑백을 본 찬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데요?”

“패드인데, 난 이런 거 잘 안 써서……. 너 필요하면 가져가.”

“태블릿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 비싸지 않아요?”

비싸긴, 「올가의 비밀 레시피」에 비하면 껌값인데다 애초에 내가 산 것도 아닌데. 잘 안 쓰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고 팔기도 뭐하고……. 이래저래 갖다 붙일 이유는 많았다. 그런데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을 열자마자 가감 없는 속엣말부터 흘러나왔다.

“괜찮아. 내가 주고 싶어.”

그러자 찬희는 조금 놀랐다가, 이내 두 눈을 부드럽게 접었다.

“그래요?”

그 이상 묻지 않고 받아주는 게 고마웠다. 선물을 준 사람도 아니고 받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대학가 중심에서 미묘하게 벗어난 곳이라 인적은 드물었다. 얼결에 배웅하는 거긴 해도 따라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등도 얼마 없는 곳이라 찬희 혼자서는 정말로 주차장을 찾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딴생각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적막한 골목에 발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괜히 슬쩍 올려다본 찬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의미 없는 침묵이 이어져도 신경 쓰이지 않는 관계라는 게 있다. 찬희에게는 벌써 내가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그러나 나는 아직도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공백이 어색했다.

“근데 너, 그 옛날 이모티콘들은 다 어디서 본 거야?”

다행히 아무렇게나 주절댈 주제가 있었다. 찬희는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두 눈을 아주 느리게 깜빡였다.

“예전에 누가 알려줬어요.”

“예전이란 게 언젠데?”

“음……. 15년쯤 됐나?”

보통 그 정도 세월을 예전이라고 말하나……. 멍하니 곱씹는데 녀석이 물었다.

“요즘은 그거 안 써요?”

“잘 안 쓰지……. 개그할 때 아니면.”

“그럼 요즘엔 어떤 거 써요? 형이 이모티콘 쓰는 건 거의 못 본 것 같아서.”

“요즘……. 아니, 이모티콘을 굳이 써야 돼?”

찬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혹시 꼽주는 걸로 들렸나 싶었다. 해명을 어떻게든 붙여보려는데 별안간 밝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모티콘이라는 건 약속된 거잖아요.”

“…….”

약속? 뜬금없는 말에 멀뚱히 보고만 있자 찬희가 음, 하며 입가를 매만졌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캐럿 기호(^) 말이죠. 이걸 두 개 붙여서 쓰면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이라는 거요. 분명 처음에 웃는 얼굴을 캐럿 기호 두 개로 표현하자는 생각을 해낸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웃는 얼굴은 캐럿 기호 두 개라는 이 암묵적 합의가 퍼져나가면서 보편적으로 쓰게 됐을 거고요.”

“어? 어…….”

“그러니까 웃는 얼굴 이모티콘을 쓴다는 건, 이 이모티콘에 대해 공통된 약속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 소속된다는 거거든요.”

“…….”

“게임 모션도 그래요. 두 팔을 치켜들고 발을 구르면 화를 내는 거라거나, 손키스를 날리면 애정을 표현하는 거라거나……. 이런 건 모두 이 몸짓이 담는 의미가 모두에게 똑같이 전해진다는 전제하에 만드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뭐라 할까……. 소속감이 느껴져요. 상대가 나와 같은 약속을 공유한다고 믿을 수 있고, 아무 부연 설명 없이도 내 뜻을 전할 수 있다는 게요.”

처음엔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했는데, 듣다 보니 점점 기시감이 느껴졌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 아, 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소쉬르네.”

“네?”

“언어학 책 같은 거 읽은 적 있어? 너 방금 말한 게 딱 구조주의 언어학 개념이랑 비슷한데.”

“그게 뭔데요?”

두 눈을 껌뻑이며 묻는 얼굴은 꼭 외계어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함께 멍하니 있다 말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방금 나……. 1학기만큼 주워들은 지식 가지고 세상 통달한 척하는 인문대생 그 자체였다…….

“아, 아냐. 헛소리한 거…….”

“뭔가 이론이 있어요? 전 아주 옛날에 엄마가 말해줬던 대로 기억하는 거긴 하거든요.”

보폭을 맞출 때마다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슬슬 서늘한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가?” 몰래 코를 훌쩍이며 묻자 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모티콘 배웠을 때 엄마한테 이게 왜 그런 표정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물어봤었어요. 그랬더니 그렇게 읽도록 약속된 것뿐이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도 다 그렇게 정해지는 거라고 하셔서요.”

“아…….”

“언어를 쓴다는 건, 그 언어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우리는 태어난 날부터 죽는 날까지 이 세상과 셀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가는 거라고.”

“…….”

“그러니 저한테 그 이모티콘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준 사람은, 제가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타인과 무언가를 약속하게 만들어준 사람이고…….”

찬희가 걸음을 멈췄다. 달이 없는 날이었다. 우리는 가을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어둠을 나눠 이고 서 있었다.

“……그리하여 외롭지 않게 해준 사람이죠.”

선택지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도,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도, 너무 의미 부여가 심한 거 아니냐는 핀잔을 줄 수도 있었다. 어떤 방법도 택하지 못한 것은 우습게도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저런 눈으로, 저런 말투로 부드럽게 회상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너무나 뻔했으니까.

“찬희야.”

나와 같은 나이, 같은 아이디를 쓰고, 가정환경까지 비슷한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희박하고 대단한 우연이 혹시나 존재해서…….

“그거 정말 나야?”

그게 정말 내가 아닐까 봐.

찬희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둠에 흐려진 시야로는 입꼬리가 올라간 것만 간신히 알 수 있었다. 바스락, 얇은 포장지 마찰음이 들렸다. 시선을 내려 보니 찬희가 쥐고 있던 꽃다발을 가슴팍 위로 들어 올린 채였다.

“형.”

“…….”

“무언극에서 꽃을 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언젠가 수정과 함께 봤던 발레 공연이 떠올랐다. 아다지오를 한 발레리나를 에워싸고 여럿의 발레리노가 꽃을 바치는 장면이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공연에서 무용수는 가슴에 대었던 손을 상대에게 뻗거나 붉은 꽃을 건넨다. 그래야…….

……보는 사람 모두에게 같은 의미를 전달하니까.

“제가 오해하는 거면 지금 말해주세요.”

고개 숙인 찬희가 낮게 속삭였다. 꼭 꽃다발에 입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을 감추려는 계산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새 꽃을 치우면 숨이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자칫하면 심장 박동이 들릴 거리였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긴 숨을 들이쉬었다.

“오해 아니…….”

바스락, 내 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찬희가 꽃다발을 힘주어 쥐는 소리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 한 겹짜리 장애물을 치워버릴 기세였다.

“아니지만, 아니긴 하지만…….”

급한 대로 한 손을 들어 내 입을 막았다. 정말 바보 같아 보일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키……스는 아직 일러.”

막아놓은 입으로 웅얼대자 바스락, 연약한 꽃다발 너머로 찬희가 슬쩍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정말요?”

“…….”

“아쉬워라…….”

수국 다발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입을 막은 손등에 부드러운 숨이 스쳤다. 가까워진 코끝이 손갈퀴를 살짝 누르는 바람에 등줄기가 오싹 조여들었다.

“여기다 입술만 대보는 건요?”

손등뼈 사이로 새겨넣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공기에 노출된 모든 피부가 따끔거렸다. 무의식적으로 꽉 잡아 누른 양 볼이 홧홧하니 뜨거웠다. 오래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나는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약속된 몸짓 중 하나를 표출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고개를 끄덕였다는 뜻이다.

긴 숨을 들이쉰 찬희가 천천히 내 손등에 입술을 붙였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갗 사이로 번져 나온 따스한 호흡이 손 틈 사이사이로 번졌다. 나는 두 눈을 힘껏 감고 손아귀를 꽉 다물었다. 눈이 마주쳤다간 입을 막은 손에서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손이 자유로워지면 끌어안고 말 것 같았다. 그러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팔꿈치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감정이 넘쳐 이성이 마비되기 전에, 이성이 마비되어 주제넘은 약속을 만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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