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상한 업데이트
《업데이트 알림》
아시르스의 여행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새로운 메인 퀘스트 <이글라우스 토벌기> 업데이트 안내 드립니다.
퀘스트는 카올란스 항구에서 시작하실 수 있으며,
기한 내로 이글라우스 토벌에 성공한 파티는 <불꽃> 타이틀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시스템 업데이트 알림》
* 보유 탈것 거래가 가능해집니다.
탈것 거래를 원하시는 여행자 분들은 캐시 숍에서 <카피반의 신묘한 구슬(4,900원)>을 구매하신 뒤 탈것을 봉인하여 다른 유저와 거래하실 수 있습니다.
거래는 탈것 한 마리당 한 번만 가능합니다. 한 번이라도 구슬에 봉인됐던 탈것은 해방 후에 다시 봉인할 수 없습니다. (구슬 상태로 여러 번 거래는 가능합니다)
* 배우자 모션이 추가됩니다.
배우자 전용 커플 모션이 10종 추가됩니다.
* 예식장이 추가됩니다.
리올레아 항구에 여행자를 위한 예식장이 추가됩니다. 캐시 숍에서 <맹세의 반지(4,900원)>을 구매할 경우 예식장을 이용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습니다. 이미 결혼한 여행자 역시 리마인드 웨딩이 가능합니다.
* 웨딩 정장이 추가됩니다.
성별 무관 착용 가능한 턱시도와 드레스, 폐백용 한복이 추가됩니다. 예식장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게시판>
제목 : 민트고래 사요
내용 : 선제시
제목 : 민트고래 핑크유니콘 날개사자 삽니다
내용: 각각 10억 8억 6억에 사요 쪽지
제목 : 민트고래
내용 : 파는줄알았지? 저도삽니다
제목 : 민트고래 20억 ㅍㅍ
내용 : 냉무
―댓글 리스트―
댓글1: 20억 미친아 양심뒤져도 정도가있지
댓글2: 제가삼 쪽지주셈
└댓글1: 호구ㅅh끼 ㅋㅋㅋㅋㅋ
└댓글2: 뭐라고? 거지ㅅh끼 목소리가 작아서 안들려
머리는 삐죽삐죽 솟고 눈은 퉁퉁 부은 몰골로 세수도 못하고 게임부터 켠 것은 설마 싶어서였다. 설마가 역시나였다. 접속하자마자 우편함이 가득 찼다는 알림이 떴다. 얼른 열어보니 아이템을 첨부한 편지 20개가 밀려 올라왔다.
<풀빛 고래상어가 봉인된 구슬>
<빛의 날개사자가 봉인된 구슬>
<피빛 유니콘이 봉인된 구슬>
<금빛 독수리가 봉인된 구슬>
<칠흑빛 서러브레드가 봉인된 구슬>
<……>
이렇게까지 착착 맞아떨어질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터무니없이 비싼 시세가 형성된 순으로 도착한 우편들이었다.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고 하나하나 반송을 눌렀다. 동시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흑곰이었다.
―왜 돌려보내요?
서운한 티가 가득한 목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는 넌 이걸 왜 보내? 됐다니까.”
―형 한정 아이템 좋아하신다면서요.
“아니……. 너 지금 이 탈것들 시세 얼만지나 알아? 나한테 보낸 것만 합쳐도 백만 원이 넘어.”
―그게 왜요?
더없이 근사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내뱉는 백치미 가득한 대답에 슬슬 뒷골이 당겼다. 부지런히 반송을 누르며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글쎄, 그걸 왜 다 나한테 주냐고. 돈이 넘쳐서 주체가 안 돼?”
―네.
“…….”
―…….
“……탈것 거래 업뎃될 건 어떻게 알았어? 너 진짜 개발자야? 아니면 개발자랑 알아?”
할 말을 잃고 화제를 돌리고 있자니 패배감이 밀려왔다. 그 비참한 심경이 전해졌는지 녀석이 푸흐흐,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개발자면요?
“나 진지해……. 드루이드 상향 좀 해.”
―아하하하.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새 우편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거 참 끈질기네, 반사적으로 또 반송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화이트 턱시도 세트>
<여행자를 위한 예식장 이용 예약권>
“나 원 참…….”
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데다 돈을 쓰는 거야? 설레게 말이야……. 탈것 구슬을 모두 돌려보내고 나서야 턱시도를 수령했다. 턱시도는 테일러드 깃에 장미 장식까지 달린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밋밋하게 생긴 자그마한 인간 캐릭터에게 입혀놓으니 정말 안 어울리고 하찮은 것이 나름 귀여운 맛이 있었다.
……어쨌든 나랑 계속 놀겠다는 뜻인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계속 통화할 거면 디코 켜고.”
―아, 잠시만요. 일단 끊을게요.
툭, 전화가 끊기고 파티 신청이 들어왔다. 동시에 다크베어 마을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흰 물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똑같은 디자인의 턱시도를 입은 흑곰이 머리에 긴 베일을 쓴 채 불도저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쿵, 쿵, 무거운 뒷발이 지면을 박찰 때마다 투명한 베일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파티 창을 열고 키보드를 힘껏 눌렀다.
메리토크라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리토크라시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K 게이머의 미덕 같은 가짜웃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책상에 머리 박고 웃느라 그 정도밖에 칠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반갑게 달려온 흑곰이 두 팔을 번쩍 내밀었다.
《‘까맘곰’님이 왈츠를 신청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이건 또 뭔데. 배를 잡고 웃으며 ‘예’를 누르자 흑곰과 내 캐릭터가 두 손을 맞잡은 채 팔을 쭉 뻗고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꽃 달린 베일을 덮어쓴 거대한 곰과 화려한 턱시도를 차려 입은 드루이드 인간이 키를 맞추느라 내 캐릭터는 거의 종이 인형처럼 팔락대고 있었다.
메리토크라시 : 아 미치겠네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까맘곰 : ㅋㅋㅋㅋㅋ (^^)
까맘곰 : 이거 해보고싶어서 형만 기다렸잖아여! ㅇ(^^)ㅇ
메리토크라시 : 너 머리에 쓴건 대체뭐얔ㅋㅋㅋㅋ
까맘곰 : 예식장에서 팔더라구여ㅎㅎㅎ
까맘곰 : 형은 안쓰실거같아서 제가썼어여^^*
소리 죽여 웃느라 뺨이며 윗배가 너무 아팠다. 아……. 볼수록 골 때리네. 어떻게 그런 껍데기 안에 이런 인격이 있지?
까맘곰 : 저 예뻐여? (^ㅅ^)ㅋㅋㅋ
메리토크라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리토크라시 : 어
메리토크라시 : 예쁘네 우리 곰이^^
까맘곰 : ^////^
칭찬에 만족했는지 흑곰이 별안간 두 손바닥을 위로 올려 입가에 붙이고는 쪽, 키스를 보내는 모션을 취했다. 동시에 내 캐릭터가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나는 또 머리를 박고 웃어야 했다.
랜선 연애 이런 맛에 하는 거구만……. 깨알 같은 달달함이 있네.
메리토크라시 : 그만ㅋㅋㅋㅋ
메리토크라시 : 오늘치 애교 한도초과
까맘곰 : 제 한도는 이 정도가 아닌데ㅇ(>_<)ㅇ?
메리토크라시 : 내 한도는 여기까지야
메리토크라시 : 던전가자
까맘곰 : ㅠㅅㅠ 넵...
우는 시늉을 한 흑곰이 털레털레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별안간 제 대가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까맘곰 : 이것도 애굔데 벗어여?
메리토크라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리토크라시 : 쓰고있어;
까맘곰 : ㅎㅎㅎ
까맘곰 : 디코켤까염?
메리토크라시 : ㅇㅇ잠시만
해저 터널을 누르고 디코를 켰다. 방을 파고 아무 생각 없이 음성 채널을 열자마자 뜬금없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형님!
“아이씨,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다시 보니 ‘포푸리12345’가 연 음성 채팅방이었다. 관성적으로 클릭하다 나도 모르게 초대를 수락한 모양이었다.
“뭐야, 이거? 끈다.”
―형님, 잠시만요. 10초만. 이거 한 번만 봐주세요.
따발총처럼 주절거린 포푸리가 갑자기 라이브방송을 켰다. 그동안 덩그러니 방치된 흑곰은 대가리에 달린 꽃 베일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급한 대로 키보드를 쳤다.
메리토크라시 : 곰아 잠시만
메리토크라시 : 누가 불러가지고.. 금방올게
까맘곰 : ㅇ.ㅇ 네..
“왜, 뭔데. 진짜 10초만 본다.”
―지금 이글라우스 3페이즈 봤거든요. 근데 여기서 바닥 문양 파훼법을 모르겠어요.
“난들 알겠냐?”
―아이,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봐주세요.
어거지로 들이미는 라이브방송을 결국 클릭했던 것은, 귀찮은 만큼 별수 없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새 레이드가 업뎃되자마자 당장 들러붙어 밀고 있는 포푸리가 부럽기도 했다. 아직 아무도 못 깬 신규 토벌 공략이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문득 레이드 시작을 준비하는 화면을 빤히 보았다. 공대 목록에 아는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포푸리의 닉네임에도 <전설> 길드 표시가 없었다.
“너 길드 나왔어?”
―네, 일단 오늘은 공팟(*임시로 모집한 파티)으로 박아보는 거예요.
“왜 다른 공대 안 들어가고?”
―형님 돌아오시기만 기다린다니까요.
무시하고 화면에 집중했다. 이글라우스는 머리에 불타는 뿔이 달린 인간형 마수다. 1페이즈에선 불, 2페이즈에선 용암을 주로 쓰는데 3페이즈가 되면 용암이 굳으면서 여러 문양이 떠오른다. 1, 2페이즈는 주로 AOE 장판에 이전 레이드 기믹 재탕이라 크게 어렵지 않지만, 들은 대로 3페이즈부터가 골치 아파 보였다.
―문양에서 한 번씩 용암이 솟는데 그게 즉사댐(*즉사급 대미지)이거든요. 근데 용암 나오는 순서를 알 수가 없어요. 피하려고 문양이 없는 바닥에 몰려 있으면 균열이 가면서 낙사하고요.
가만 보니 정방형 바닥이 네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리 죽고 저리 죽고 떨어져 죽는 파티원들을 하나하나 살피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과반 올라가면 떨어지네.”
―네?
“바닥 지금 네 칸이잖아. 한 칸에 일곱 명까진 버티는데 여덟 명 되는 순간 깨져.”
―아, 그래요?
“지금 패턴은……. 좌측 상단, 우측 하단, 좌측 하단 순으로 용암 나온다.”
―어떻게 알아요?!
말 끝나기 무섭게 좌측 상단 바닥에서 용암이 터졌다. 동시에 겁먹은 파티원들이 문양이 없는 우측 상단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바람에 동시에 낙사했다. 용암분출이 끝난 좌측 상단으로 피한 포푸리만이 팔짝대며 이글라우스에게 암수를 던졌다.
“타락한 마도사가 동포들 피를 끓여 소환해낸 게 이글라우스잖아. 마도사 마을에서 쓰는 달시계 문양이야. 표시된 시간순으로 터지는 거 같은데.”
―달시계가 뭔데요?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알아?
“이글라우스 스토리에 다 나오는데 왜 몰라. 일곱 명은 문양 없는 바닥에 서서 말뚝딜하고, 여덟 명은 제일 늦게 터지는 바닥에 있다가 먼저 터지는 바닥으로 네 명씩 이동하면 되겠네.”
―형님은 진짜 미친 겜창입니다……. 존경합니다.
“아무튼 됐지? 끈다.”
―형님, 형님. 한 개만 더요.
포푸리가 또 다급하게 사람을 붙잡았다. 결국 못 이기는 척 화면을 지켜봐주었다. 아닌 척했지만 내심 재밌었다……. 빨리 만렙을 찍어야 나도 신규 레이드를 깨고 다닐 텐데, 속이 근질거렸다.
흑곰과의 렙업은 순조로웠다. 일단 티어를 찍는 속도가 빠르니 일사천리였다. 이대로라면 만렙까지 길어봐야 2주면 될 것 같았다. 우선 캐릭터 레벨을 다 올린 뒤에 자연 티어부터 찍고, 암흑 티어 스토리도 마저 찾아내면 얼추 모양새는 갖추게 된다.
―근데 형님, 솔직히 부캐 키우시죠?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는데 포푸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당황한 나머지 대답이 늦자 이거다 싶었는지 실실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이 어떻게 압포를 접겠어요. 디코 접속하셨을 때 예감했습니다.
“아니라고 했다…….”
―또 드루이드? 캐릭터 직업별로 검색해보니까 디코 복귀하셨을 무렵쯤에 생성된 드루이드 전 서버에 딱 하나 있던데요.
“스토킹한 게 자랑이야?”
―부정 안 하시네. 제가 오늘 내로 이글라우스 잡고서 만렙 만들어드릴게요. 저 진짜 형님 없이 게임하니까 너무 재미없고 답답하고 그래요. 저 끼워주세요. 네?
나도 모르게 음……,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만약 압포를 계속 한다면, 그것도 흑곰과 같이 한다면 길드를 만드는 게 유리하긴 하다. 거기에 잘하는 길드원이 있으면 당연히 좋다. 문제는…….
“……나 요새 게임 친구 따로 있어. 걔한테 먼저 물어볼게.”
왠지 흑곰이랑 이 새끼……. 성격이 전혀 안 맞을 것 같단 말이지…….
―제 자소서 첨부할까요?
“오버하지 말고.”
―옙.
사실 포푸리가 문제다. 지가 인정한 사람한테나 고분고분하게 굴지, 기본적으로는 막 나가는 놈이라 흑곰 같은 온실 속 도련님이랑은 상성이 나쁠 수밖에 없다. 거기다 이 새끼는 오직 게임 실력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다 보니……. 흑곰이 게임하는 꼴을 보면 우습게 알고 무시할 게 뻔했다.
포푸리 : 님들 혹시 과반이 무슨뜻인지 모름? 사전검색하고 오실?
바로 저렇게 말이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한 채팅 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야, 너 그럼 이제 전설 애들이랑은 연락 안 하지?”
―아, 그럼요. 진작 다 손절했죠.
“혹시 연락해도 나 복귀했단 소리는 하지 마.”
―당연히 저는 말 안 할 건데요, 형님이 만렙 찍고 레이드 밀고 다니다 보면 어차피 들킬 걸요? 잘하는 드루이드가 같은 하늘 아래 둘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요.
“…….”
그건 또 그렇다. 거기다 포푸리까지 붙어 있으면 나라도 눈치채겠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에 빠졌다. 게임도 작은 사회인지라, 잘하는 사람은 유명세를 탈 수밖에 없다. 거기다 드루이드라는 희소성까지 있지 않은가.
역시 그냥 흑곰이랑 둘이서 랜선 연애 놀이나 하는 게 답인가? 고민하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심코 시계를 보니 어느새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아, 미친……. 나 끈다.”
―억, 형님. 제발 막페(*마지막 페이즈) 불주먹 공략만…….
듣지 않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곧장 흑곰 아이디를 누르고 음성 채널을 열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어?”
게임 화면으로 돌아가니 10분 전에 접속을 종료한 상태였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화났나? 미안한 마음에 얼른 핸드폰을 집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간 후에야 연결음이 들렸다.
―네, 형. 볼일은 끝나셨어요?
푹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잡음이 섞이는 걸 보니 밖인 것 같았다.
“어……. 너 어디야?”
―저 잠깐 약 사러 나왔어요.
“약? 무슨 약?”
―저녁 먹고부터 속이 좀 안 좋았거든요. 형 자리 비운 사이에 소화제라도 사 오려 했는데 일찍 오셨네요.
나도 모르게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약국이 열어?”
―그러니까요. 근처 약국 다 닫아서 허탕 쳤어요.
“집에 비상약 없어?”
―있을 텐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은 집 비우셨고, 일하시는 분도 퇴근하셔서.
“…….”
―괜찮아요. 그냥 살짝 불편한 정도라 참을 만해요. 지금 들어갈게요.
본인이 그렇다니 그런 줄 알면 될 일이건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소화제 정도는 편의점에도 팔 텐데. 얼른 말해주려다 멈칫했다. 지난 달쯤, 갑자기 체했을 때 엄마가 보내준 매실 원액이 떠올랐다.
“……음…….”
포푸리가 솔솔 뿌린 레이드 떡밥에 홀려 잠시나마 녀석을 까맣게 잊고 방치한 일에 대한 죄책감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뜸을 들이자 전파 너머로 흑곰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형?
“그, 저기…….”
―네?
몇 번이나 마음속에서 제동이 걸렸다. 아무래도 오버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선 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입은 이성을 배신하고 충동을 따랐다.
“내가……. 매실에이드 만들어서 갖다줄까?”
―…….
“너……만 안 불편하면……? 나 진짜 심하게 체했을 때 이거 한 잔 마시고 싹 내려갔었거든. 효과 좋아.”
―지금 오신다고요?
되묻는 목소리는 어딘가 얼떨떨하게 들렸다. 당연하지. 나라도 뭔가 싶겠다. 이제라도 철회할 생각으로 입을 여는데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귓가로 흩어졌다.
―설레네요.
“…….”
―저 어디서 기다릴까요?
듣고 보니 아차 싶었다. 밤에는 슬슬 쌀쌀한데 밖에서 기다리게 해도 되나? 몸도 안 좋은 애를.
“어…….”
그렇다고 집 주소를 알려달라는 건 진짜 오버 같다. 스스로 판 무덤에 발을 담근 채 있는 힘껏 머리를 굴렸다.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는지 녀석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저 차 끌고 나왔어요. 어디 세워놓고 기다리면 되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그래? 근데 바로 출발해도 20분은 걸릴 텐데…….”
―저번에 버스 타셨던 그쪽으로 오실래요?
“으음……. 알았어. 일단 바로 갈게.”
전화를 끊고 급히 찬장을 열었다. 텀블러를 꺼내 매실 원액과 탄산수를 섞고 얼음까지 야무지게 털어 넣었다. 후드와 청바지를 급히 주워 입고 집을 나서려다 현관에 붙은 거울을 보고 멈칫했다. 세수도 못해 부스스한 얼굴에 마구 삐친 머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씨…….”
수습할 시간은 없었다. 급한 대로 옷장에 처박아둔 야구모자를 꺼내 썼다.
다행히 길은 전혀 막히지 않았다. 10분 만에 도착한 정류장에 내려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건너편에 비상등을 켜고 정차한 차 한 대가 보였다. 언뜻 봐도 심상치 않은 크기의 외제 세단이었다. 아무리 집이 부자라도 스물두 살짜리가 저런 걸 끌고 다니나? 고민하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갑자기 운전석 문이 열리고 키가 큰 남자가 내렸다.
“…….”
까만 맨투맨 차림의 흑곰이었다. 녀석도 진작 나를 발견했는지 곧장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손짓하며 미소 짓는 이목구비가 먼 거리에서도 무섭도록 또렷했다. 나는 홀린 듯 길을 건너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반대 방향에서 내리겠네요.”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이쪽에 세우고 기다렸는데.”
“……아.”
어색한 미소를 짓고 텀블러를 내밀었다. 어마어마한 차에서 내리는 어마어마한 미남을 보니 뒤늦게 내 선물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참,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편의점에도 소화제 팔아.”
“편의점에서 약을 팔아요? 그래도 돼요?”
“되……니까 팔지 않을까? 아무튼 혹시 모르니 들어가는 길에 들러서 사.”
“아니에요. 이거 마시면 나을 것 같아요.”
배시시 웃은 녀석이 텀블러 뚜껑에 입 맞추는 시늉을 했다. ……원래 애교가 좀 있나 보다. 그 채팅들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일찍 쉬어. 나도 갈게.”
“네?”
머쓱한 마음에 빠르게 자리를 파하려는데 녀석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이라는 듯 놀란 얼굴이었다.
“가시게요?”
“가야지……?”
“저 이거 어떻게 마시는지 모르는데…….”
급격히 가라앉는 말투에 나까지 당황스러웠다.
“어? 아……. 다 만들어온 거야. 그냥 따라서 마시면 돼. 얼음도 넣었고 시원할…….”
어영부영 말을 잇다 나도 모르게 눈치를 살폈다. 이거 아닌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보니 흑곰은 사탕 뺏긴 어린애마냥 삐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희 집 오시는 줄 알았어요.”
“……응?”
“선물 가지고 오는 사람을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형 초대하려고 아까 커피랑 케이크도 샀는데.”
녀석이 시무룩하게 차 안을 가리켰다. 언뜻 조수석에 놓인 프랜차이즈 카페 쇼핑백이 보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뭐라 말을 못하고 있으려니 한층 더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쁘세요? 가셔야 돼요?”
“…….”
집에 가봐야 게임밖에 안 할 건데 그걸 바쁘다고 하기에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바쁜……. 건 아닌데…….”
“그럼 잠깐만 들렀다 가세요. 네? 집에 아무도 없어요.”
조르는 말이 왜 이렇게 산뜻하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참 머뭇대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웃은 녀석이 조수석에 놓인 쇼핑백을 집어 뒷좌석으로 옮겼다.
“타세요.”
차 내부도 외관만큼이나 삐까뻔쩍했다. 괜히 신발을 툭툭 털고 몸을 밀어 넣었다. 엉거주춤 앉아있으려니 운전석에 올라탄 녀석이 별안간 내 쪽으로 상체를 쑥 내밀었다.
“잠깐만요.”
가까워진 목덜미에서 비누 향이 훅 끼쳤다. 등줄기가 굳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오른손은 콘솔박스를 짚고, 왼손을 내 어깨 너머로 넘긴 녀석이 안전벨트를 죽 당겼다.
“이 차 벨트가 좀 특이한 위치에 있어서 찾기 힘들거든요.”
묻지 않은 설명을 덧붙이고는 찰칵, 소리가 나게 벨트를 채워준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입을 떼 볼 틈도 없이 녀석이 시동을 걸었다.
“출발할게요.”
“……어어.”
우웅, 묵직한 엔진음을 낸 차가 부드럽게 도로 위로 미끄러졌다.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모양이 능숙해 보였다.
“운전 잘하네……. 오래 했어?”
“한 4년 됐어요. 학교 다니려면 차가 있어야 했거든요.”
“학교?”
“치료 받던 병원이 보스턴에 있어서요. 고등학교도 거기서 다녔어요.”
‘완전관해’라는 단어를 검색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런 이야기까지 해준다는 건, 자기 병력을 말하는 걸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무심한 호기심이 아닐까 고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암……. 같은 거였어?”
“네, 림프종.”
림프종이 뭐지? 차마 그것까진 묻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유학도 겸해서 간 거야? 아니면 미국이 의료수준이 높아서……?”
“한국에도 좋은 병원 많긴 한데요. 저 같은 경우는 약 때문이었어요.”
“약?”
“발병한 게 일곱 살 때인데 맞는 항암제를 못 찾아서 계속 치료에 실패했거든요. 거의 10년을 그러다가 주치의 선생님이 신약을 써보라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그 약의 투약이 미국에서만 가능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것만 해보자 하고 건너간 거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10년 넘게 치료를 실패했다니 듣는 것만으로 막막해졌다. 그나마 집이 부자인 것 같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의료보험도 안 되는 미국에 가서 치료받을 엄두 같은 건 낼 수 없었을 테니까.
“힘들었겠다…….”
무심코 중얼거리자 녀석이 희미하게 웃었다.
“힘들었죠. 그땐 그 제안 자체가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난 이제 그만하고 쉬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게 하니까.”
“…….”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됐잖아요. 덕분에 이렇게 나아서 형도 만났고.”
그만 말문이 막혔다. 순간적으로 너무 무거운 감정을 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별 뜻 아니었는지 녀석은 곧 화제를 돌렸다.
“내일 무슨 일정 있으신 건 아니죠?”
“어…….”
“자고 가실래요?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래, 뭐……. 어? 뭐?”
관성적으로 대답하다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씩 웃은 흑곰이 별안간 차를 세웠다. 그제야 주변을 눌러보니 높다란 담장 앞이었다. 녀석이 대시보드에 붙은 리모컨을 누르자 거대한 철제문이 열리고 차고가 나타났다.
“다 왔어요.”
먼저 차에서 내린 녀석이 뒷좌석에 둔 쇼핑백을 꺼냈다. 나도 뒤늦게 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자고 가라는 말을 확실히 거절하지 못한 게 신경 쓰였으나 꼬투리 잡을 타이밍이 보이지 않았다. 흑곰이 이미 차고에 연결된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오세요. 제 방은 3층이에요.”
우아하게 설명한 녀석이 벽에 붙은 버튼을 눌렀다. 어영부영 그 곁으로 다가간 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집에……. 가정집에 엘리베이터……? 혹시 다세대주택인가 싶어 슬그머니 안쪽을 살폈다. 그러나 짧은 계단 위로 얼핏 비치는 공간은 누가 봐도 거대한 거실이었다. 심지어 ‘집’이 아니라 ‘방’이 3층이라지 않는가.
이게 말로만 듣던 부자들 저택이구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아담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는 동안에도 흑곰은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이었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새였다.
“형 오니까 좋네요.”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멘트에 순간 뜨끔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막 녹인 초콜릿 같았다.
“…….”
원래 아무한테나 이 정도로 곰살맞게 구는 타입일까. 괜히 나만 시시콜콜 휘둘리는 것 같아 심란해졌다.
“케이크 어떤 거 좋아하세요? 일단 제 취향대로 샀는데.”
3층에 도착하자 희미한 비누 향이 풍겼다. 흑곰이 가까워졌을 때 맡은 향과 같았다.
“아……. 너무 달지만 않으면 다 괜찮아.”
“다행이네요. 저도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거실이었다. 안쪽으로 작은 주방과 방 몇 개가 붙어 있는 구조였다. 대충 40평은 될 것 같았다. 40평짜리 방이라……. 차원이 다른 이야기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편한 데 앉으세요. 치즈케이크 괜찮으시죠?”
“어어.”
손을 씻고 주방으로 향한 녀석이 찬장에서 그릇과 컵을 꺼냈다. 달각거리는 도자기 그릇 사이 덩그러니 놓인 내 텀블러가 참 궁상맞아 보인다. 아일랜드 바 스툴에 앉아 멍하니 그 모양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텀블러에 Y대 사회학과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언젠가 학과에서 뿌린 기념품이었다.
왜 하필 저걸 가져왔지? 왜긴, 텀블러가 저거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렇지. 진땀 나는 기분에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 분명히…….
‘닉머’가 학과 커뮤니티에 졸업앨범 신청한 내역을 봤다고 하지 않았나?
“…….”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이름 앞 두 글자가 같은데, 이걸 나한테 한 번을 안 물어본다고? 물론 저 문구를 아직 못 본 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요.”
멍하니 깜빡이던 시야로 근사한 그릇에 담긴 케이크가 나타났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이번에는 고급스러운 컵이 내려앉았다. 시원해 보이는 아이스아메리카노였다.
“아……. 고마워.”
시선을 내리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 사이 건너편에 앉은 녀석이 텀블러를 열고 내용물을 컵에 따랐다. 찰랑, 맑은 소리와 함께 얼음 섞인 매실에이드가 흘러나왔다. 홍차빛 음료를 유리컵에 넣으니 위스키처럼 보였다. 길고 단단한 손끝이 근사하게 쥐고 있어 더 그랬다.
“맛있어?”
천천히 한 모금을 머금은 녀석을 곁눈질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흑곰은 음미하듯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엄청요.”
“…….”
“벌써 체기 다 내려간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있냐…….”
어이가 없어 타박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 컵을 금방 비운 녀석이 한 번 더 텀블러를 기울였다.
“근데 오늘 바쁘셨어요?”
“……응?”
“업뎃 날인데 계속 안 들어오시길래.”
대답을 미루고 커피를 홀짝였다. 게임하느라 밤을 새우고 연구실에 들렀다 와서 침대에 쓰러진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형 없으니까 업뎃된 모션도 못 써보고, 얼마나 심심했는데요.”
서운한 시늉을 하고 있지만 반쯤 장난인 것이 느껴졌다. 내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뭐해서 망설이는데 눈을 맞춘 녀석이 한층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목 빠지게 기다렸는데, 금방 저 버리고 가버리고.”
“……그건, 아니, 아는 애가 불러서……. 아참.”
불현듯 떠오른 포푸리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미묘하게 이어지는 불편한 공기가 버거웠던 탓이었다.
“있잖아. 우리 슬슬 길드를 만들까?”
“길드요?”
물론 다른 속셈도 있었다. 이 녀석이 닉머의 진실을 알고 나서도 게임을 계속하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책임감을 불어넣으려면 감투를 씌우는 게 제일이다.
“길드가 있으면 여러 가지 혜택도 받을 수 있거든.”
“예를 들면요?”
“어……. 성력도 증가시킬 수 있고, 길드 전용 채팅 창이 생기니까 일일이 파티하지 않아도 되고, 길드원을 많이 영입할수록 유리한 것도 많…….”
“길드원?”
턱을 괴고 듣던 녀석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으응. 기본적으론 너랑 내 길드인데, 그래서 내가 길드장을 하고 너한테 부길드장을 줄 건데 이제 레벨링하거나 레이드 갈 때 같이 다닐 사람들을 모집…….”
“드루이드랑 그림자 전사가 길드장에 부길드장인데 사람이 올까요?”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네? 길드원을 모집한다 해도 염두에 둔 게 아직 포푸리뿐이다 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포푸리는 당연히 얼씨구나 달려올 테니까.
“그렇긴 한데 일단 하나 데려오면 걔 따라서 올 사람은 많을…….”
어떻게든 얼버무려보려는데 미묘한 위화감이 스쳤다. 멈칫한 채 곰곰이 되짚다 나도 모르게 말끝을 높였다.
“너 드루이드랑 그림자 전사 망캐인 건 어떻게 알아?”
아무것도 모르고 게임 시작해서 나랑만 놀았는데. 의아한 물음에 녀석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검색하다 보니 그런 글이 나오던데요. ‘드루이드는 닉머가 해야 하니 냅두고, 그림자 전사는 멸종시켜야 한다’고.”
“…….”
“어쩐지 처음 게임 시작했을 때 마주친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웃고 가더라고요. 와서 도와준 건 형뿐이었어요.”
안 봐도 훤했다. 척 봐도 뉴비인데 그림자 전사로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좋다고 놀려댔겠지. 쯧, 혀를 차고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진한 크림치즈가 혀끝으로 녹아들었다.
“신경 쓰지 마. 우리가 만렙만 찍으면 그딴 놈들 찍 소리도 내기 전에 다 잡을 수 있어.”
“진짜요?”
“진짜. 나 PVP 잘해.”
“PVP가 뭐예요?”
“……아. Player Versus Player의 약자야. 유저끼리 싸우는 거.”
잘난 체 떠드는데 흑곰이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형은 못하는 게 없으시네요.”
“…….”
“멋있어요. 대단하고.”
……분명 순수한 칭찬 같은데, 듣고 있자니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건 그렇고, 갈아입을 옷 안 가져오셨죠? 빌려 드릴게요.”
따로 할 말을 찾는데 별안간 화제가 튀었다. “뭐?” 식겁해서 되묻자마자 의아한 미소를 띤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편한 옷 입고 계시는 게 낫지 않아요?”
“아, 아니……. 저기, 아깐 제대로 대답을 못했는데 나 집에 갈…….”
“샤워부터 하실래요? 침실 욕실 쓰시면 돼요.”
이쯤 되니 일부러 안 들리는 척하는 건가 싶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말해야겠다 싶어 숨을 들이켜는데 텀블러 뚜껑을 덮던 녀석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형, 임정아 작가 좋아하시죠?”
“……어?”
“제 방에 「올가의 비밀 레시피」 있어요.”
하마터면 쥐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올가의 비밀 레시피」는 임정아 작가 팬카페에서 이벤트로 배포했던 소책자다. 『이세아 전기』의 스핀오프 단편인데, 소설 연재 초기에 소규모로 진행되었던 이벤트라 수량 자체가 극소량밖에 없었다.
“그……. 그게 어떻게 있어?”
그런 연유로 내가 『이세아 전기』를 접했을 때는 이미 귀하디귀한 레어템이 되어 있었다. 구하는 사람만 넘쳐나지 판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 번은 50만 원이라는 가격에 판매글이 떴지만 30초 만에 팔렸다. 당연히 초딩이었던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성인이 된 후엔 구할 수 있었느냐? 그럴 리가 있나……. 구한다는 글만 오백 번 쓰고 사기당할 뻔한 적만 삼백 번이었다.
“뭐 어쩌다 보니……? 저도 잊고 있었는데 형 보여드리면 좋아하시겠다 싶더라고요.”
“…….”
“근데 가셔야 되면…….”
“나 샤워부터 하고 올게.”
경건히 선언하고 벌떡 일어났다. 흑곰은 조금 웃은 것 같았다.
챙겨준 옷을 쥐고 욕실 문을 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봐도 내 원룸의 두 배 크기는 될 것 같았다. 샤워부스와 욕조가 나뉘어 있는 호텔식 구조에, 자재는 모조리 윤기 흐르는 대리석이었다. 훈훈하고 달콤한 향도 풍겼다. 어디선가 집이 품은 부는 욕실이 증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왠지 물도 튀기면 안 될 것 같다. 기가 죽어 조심스레 후드를 벗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드라이어랑 스킨은 찬장에 있…….”
눈이 마주치자 흑곰이 멈칫했다. 목에서 빼낸 후드는 팔에 걸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끝을 우그러뜨리고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느릿하게 시선을 흘리더니 찬장을 열었다.
“여기요. 꺼내 쓰시면 돼요. 칫솔도 여기 있어요.”
“……어어.”
“저는 거실 욕실 쓸게요. 책은 침대에 뒀어요.”
어디다 뒀다고? 황당함을 표출할 틈도 없이 다시 문이 닫혔다. 참았던 숨을 길게 몰아쉬고 옷을 마저 벗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문을 안 잠근 내 탓이지. 애써 마음을 다잡고 녀석이 열어둔 찬장을 곁눈질했다.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명품 로고가 박힌 기초화장품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저 미모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구만. 호기심에 병 하나를 들어 자세히 살폈다. 한글 라벨도 붙어 있었지만 도대체 뭐라고 써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티 샤인 토닝 로션이 도대체 뭔데?
“번잡하다, 번잡해…….”
그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머릿속을 꽉 채운 건 오직 「올가의 비밀 레시피」뿐이었다. 빠르게 옷을 마저 벗고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흑곰이 챙겨준 파란 체크무늬 파자마는 신기하게도 내 몸에 딱 맞았다. 그 녀석한텐 아무래도 작을 사이즈인데 희한한 일이었다. 동생이라도 있나.
머리는 물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말리고 후다닥 밖으로 나섰다. 넓은 공간에 커다란 침대 하나만 배치한 방이었다. 부드럽고 푹신해 보이는 하얀 침구 한가운데에 얇은 책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손을 뻗었다. 단색 표지에 제목만 쓰인 소책자는 겉보기부터 저예산의 향기를 풀풀 풍겼다. 모서리가 낡고 군데군데 변색돼 있었지만 거의 20년 전에 나온 물건임을 감안하면 감지덕지한 보관 상태였다.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조심히 첫 장을 펼쳤다. 「올가의 비밀 레시피」가 전설로 남은 이유는 그 수량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제목 그대로 이세아를 향한 올가의 마음을 다루고 있다는 게 크다. 이세아의 마법 스승이자 친구인 올가는 이백 년 넘게 살아온 대마법사인데, 이미 오래전 세상에 흥미를 잃은 그가 이세아를 통해 다시금 애정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이세아가 누구와 이어질 것인가를 두고 왕자 파와 올가 파로 나뉘어 전쟁에 가까운 키보드 배틀을 벌이는 게 팬카페 연례행사였다)
때문에 올가 파 독자들은 이 소책자 내용을 본편에도 실어달라 요청했지만, 임정아 작가는 이벤트성 단편은 이벤트로 남겨두고 싶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후에 E북이 발행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고 계세요?”
심호흡을 하고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고 말았다. 나처럼 머리가 덜 마른 흑곰이 문간에 기대 서 있었다. 아마 왜 침대에 앉지 않고 바닥에서 그러고 있느냐는 뜻으로 물은 말 같았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딴 게 아니었다.
“옷…….”
제게 꼭 맞는 파란 체크무늬 파자마를 입은 녀석을 보니 황당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같은 색, 같은 디자인, 사이즈만 다른 파자마를 왜 갖고 있으며……. 그걸 또 굳이 맞춰 입고 나타날 이유가 뭐냐고.
“아, 이거요.”
나는 굳었거나 말거나, 제 옷깃을 문지른 흑곰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귀국했을 때 아버지가 사놓은 옷들이 다 작아서 전부 새로 샀거든요. 아마 제가 고등학생 때 입던 사이즈만 생각하셨나 봐요.”
“……아.”
“버리기도 뭐해서 일단 보관해놨었는데, 형한테 잘 맞네요. 다행이죠.”
……다행인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나만 이 거리감이 이렇게 당황스러운 건가. 머뭇대는데 천천히 다가온 녀석이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올라와서 보세요.”
그러고는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그제야 정말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어영부영 자고 가는 분위기가 된 건 그렇다 치고, 한 침대를 쓰는 건가? 진짜?
“…….”
물론 이 침대가 충분히 크긴 하지만, 이 녀석이야 아무 생각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아무래도 자극이 강할 수밖에 없다. 고민하던 시선 끝에 문득 탁상시계가 보였다. 어느새 밤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그러고 보니 너 잘 때 됐구나.”
“네?”
“먼저 자. 난 이거 읽고 올게.”
따발총처럼 지껄이고 벌떡 일어났다. 행여나 붙잡히기 전에 얼른 문고리를 잡고 씩 웃었다.
“잘 자.”
불까지 끄고 문을 닫는 동안 녀석은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복도를 가로질러 썰렁한 거실로 향했다. 주위를 두리번대다 커다란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따라 나오는 기색은 없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숨 막혀 죽겠네…….”
이유도 없이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생긴 놈과 한 침대에 몸 붙이고 누워야 한다니, 내가 게이가 아니라도 불편했을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책을 펼쳤다. 50페이지 가량의 짧은 단편은 올가가 이세아를 위해 과자를 만드는 이야기였다. 날짜를 보니 당시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발행했던 것 같다. 잔잔하고 조용한 이야기였지만, 고위 마법사가 인생을 쏟아부어 단련한 마법의 정수를 오로지 과자 하나에 불어넣는 과정은 마냥 고요하지 않았다.
“…….”
찐사다, 찐사……. 어릴 때야 이세아가 올가와 이어지든 왕자와 이어지든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실제로 소설에서도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요즘 봤다면 나 역시 올가를 응원했을 것 같다. 부와 권력을 어필하는 왕자보다는 한 발짝 물러선 자리에서 성심을 다해 이세아의 선택을 지지하는 올가가 낫지…….
“하…….”
심지어 결말이 대박이었다. 기껏 몇 날 며칠 고심해 만든 과자를 선물했더니, 고맙다며 받아간 이세아가 길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과자를 전부 나눠줘버린 것이다. 올가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못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자, 그런 올가를 빤히 보던 이세아가 올가의 손을 쥐어 살짝 입 맞추더니 미소 짓는다.
―이런 맛이었군요.
이러니 올가 파들이 미칠 수밖에 없지. 나는 조심히 덮은 책을 가슴에 안은 채 짙은 여운에 잠겼다.
그나저나 흑곰은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지. 저 녀석 재력이면 돈으로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로 임정아 극성팬이라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이상한 아이디도 그렇고, 이런 희귀본을 아무렇지 않게 소장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역시 압포 개발자 아들 아니야?
“…….”
아니다, 이쯤 되면 게임사 회장 아들 아닌가? 그럼 이 재력도 아이디도 임정아와의 커넥션도 다 설명되잖아. 웅크려 누운 채 온갖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점차 시야가 흐려졌다. 몇 주간 밤을 새우고 쪽잠으로 때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조금만 몸이 편해도 잠이 쏟아지곤 했다.
“아, 책…….”
혹시 뒤척이다 깔고 자면 안 되는데. 쥐고 있던 책을 힘겹게 멀리 밀어냈다. 마지막 힘을 짜내자마자 다시 눈이 감겼다. 가죽 소파는 내 침대보다도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어쩐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 *
구름 같은 이불이 몸을 감싸는 감각에 절로 편안한 숨이 흘렀다. 눈을 뜬 것은 얼굴 위로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탓이었다. 높고 깨끗한 천장이 먼저 보였다. 찌뿌둥한 몸을 펼치려 두 팔을 위로 뻗자 손끝에 딱딱한 침대 헤드가 닿았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해를 피해 돌아누웠다. 조금만 더 자면 딱 개운할 것 같은데. 이불 틈으로 얼굴을 파묻다 말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침대?
이불을 들추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급히 둘러본 방안은 어떻게 봐도 흑곰의 침실이었다. 분명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는데 뭐지? 혼란에 빠져 있는데 똑똑, 닫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어요?”
문 너머에서 나타난 흑곰이 상냥하게 물었다. 파란 체크 무늬 파자마에 남색 실내용 가운을 걸친 모양새였다. 나는 멍청히 벌어진 입을 간신히 움직여 쉰 목소리를 냈다.
“나 언제 여기…….”
“뭐가요?”
“아니, 나……. 나 언제 침실로 들어왔어?”
“글쎄요? 저 일어나 보니 옆에서 주무시고 계시던데.”
“…….”
태연한 대답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세상에. 술 한 방울 안 마셨는데 어떻게 이런 짓을 했지? 아픈 이마를 감싸자 흑곰이 걱정스레 물었다.
“머리 아프세요?”
“……아, 아니야.”
“더 주무실래요? 아침 다 돼서 깨우러 온 거긴 한데.”
“괜찮, 괜찮아. 일어나야지. 미안.”
시계를 보니 아침 9시였다. 세상에, 오래도 잤네. 머리통을 벅벅 긁으니 삐친 뒷머리가 손끝에 잡혔다.
“달걀 요리 정도만 간단히 차려달라 했는데 괜찮으시죠?”
“응?”
“일하시는 분 왔다 가셨거든요. 커피도 타 주셨어요.”
아참, 도련님이셨지……. 안 놀란 척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간단한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주방으로 향했다. 해가 뜨니 이 집의 채광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천창에서 내린 빛을 몸에 두른 녀석이 콧노래를 부르며 커틀러리를 놓는 중이었다. 간단한 달걀 요리라더니 생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요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멍하니 내려다보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 괜찮아?”
“네?”
“속 안 좋은 거……. 좀 나아?”
내 명치께를 더듬으며 묻자 냅킨을 접던 녀석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스툴에 앉았다.
“어제 다 나았다니까요.”
“그럼 다행인데……. 일부러 약까지 사러 나갔다니까 많이 안 좋은 줄 알았지.”
“원래 엄살 심해요.”
요리는 토마토 스튜에 반숙 프라이를 얹은 모양새였다. 녀석은 음식을 적당히 떠서 내 앞에 놓아주고는 구운 식빵을 반으로 잘랐다.
“빵 찍어 드시면 맛있어요.”
“어, 고마워……. 이런 거 생전 처음 본다.”
“저도 차려 주는 대로 먹는 거라 잘은 몰라요.”
그런 것치고 아주 능숙해 보이시지만 일부러 딴지 걸지는 않았다. 시키는 대로 바삭한 빵을 소스에 찍어 먹으니 고소하고 맛있었다. 해가 잘 드는 하얀 집에서 SNS 사진에나 나올 법한 음식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웃기긴 했지만.
“…….”
심지어 건너편에 앉은 놈과 커플 파자마까지 입고 있다. 의식하자마자 목이 막히는 기분에 씹던 것을 얼른 삼켰다.
“저……. 책은 잘 봤어. 고마워.”
“재미있으셨어요?”
“응. 무슨 내용인지 진짜 궁금했거든.”
“가져가실래요? 전 한 권 더 있어요.”
남은 빵을 찢던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어?”
“잘 보관해둔 거 따로 있고요. 형 빌려드린 건 편하게 보던 거라 가져가셔도 돼요.”
“아니, 저……. 아니야. 그거 진짜 희귀본이라 부르는 게 값인데…….”
혀끝까지 치미는 욕망을 삼키고 사회적 체면을 뒤집어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럼 저한테 사실래요?”
“어? 정말?”
이번에는 단번에 구미가 당겼다. 학부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를 세 탕씩 뛰어가며 쌓은 나의 예금은 바로 이때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르는 게 값이면 판매자가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있는 거죠?”
“어어, 그렇지. 내가 얼마까지 낼 수 있냐면…….”
“조건부는 어때요? 제 첫사랑 찾는 거 도와주시면 그냥 드릴게요.”
흑곰 기준에는 빈약할지 몰라도 내게는 전 재산인 예금 잔고를 서슴없이 부르려던 입술이 소리 없이 뻐끔거렸다.
“같은 학교 다니시더라고요.”
“…….”
“과도 같고.”
힐긋, 흘러간 시선 끝에 깨끗이 씻어둔 텀블러가 닿았다.
“대학은 같은 과라고 서로 다 알고 지내진 않죠? 그래도 한번 알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맞아요?”
“……그…….”
아마도 지금이 적절한 시기 아닐까. ‘닉머’는 네가 찾는 첫사랑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할…….
“…….”
애초에 그 말이 나한테 어려울 이유가 뭐가 있지. 이 녀석이 압포를 접는다면 그거야 아쉽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게임 친구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게임에서는 게임 실력이 인망의 척도고 나는 게임을 잘하니까.
그림자 전사와 드루이드 사이의 히든 스토리 역시 꼭 이 녀석이 있어야만 팔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연 티어 레벨링은 힘들어지겠지만 어차피 한 번은 혼자 힘으로 했던 일 아닌가.
“……아냐. 책은 안 줘도 돼.”
그런데도 망설여지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대신 내가 도와주면, 네 첫사랑 찾기가 어떻게 끝나든 게임은 같이 하자.”
그냥 내가 서운한 거겠지.
“이런 조건이면 어때?”
아무래도 나는 이 녀석이 어색하고 불편하면서도, 계속 보고 싶은 것 같다.
“너무 저만 남는 장사 같은데요?”
턱을 괸 흑곰이 눈을 접고 웃었다. 그 첫사랑인지 뭔지 참 부럽네. 저런 놈이 일편단심 좋다고 매달릴 테니.
“어쨌든 알아봐주시는 거죠?”
“아, 응. 그거 말인데…….”
아이디가 있으니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다. 개중에서 나와 중복되는 정보를 거르면 되니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그 사람이 네 첫사랑이라고 확신하는지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안 돼?”
‘닉머’, 즉 나는 녀석이 찾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녀석이 내 SNS나 커뮤니티 글을 보고 나라고 확신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연령대가 비슷하다든가.
잠시 말없이 두 눈을 깜빡이던 흑곰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사더라고요.”
“…….”
침묵이 감돌았던 것은,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고 녀석은 거기서 입을 닫았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대답이 그게 다였던 걸 알고는 의아해졌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
“그게 왜? 다들 사지 않아?”
내가 SNS에 올려놓은 건 거의 음식 사진이었다. 내 사진도, 친구들이나 동기들 사진도 일부러 올리지 않았다. 간혹 동기들 SNS에 여럿이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갈 때면 반드시 귀찮은 일이 생겼던 탓에 굳어진 습관이었다.
“그런 게 있어요.”
재차 물어도 흑곰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내 마음만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마 작년 크리스마스에 올린 홀 케이크 사진을 본 것 같은데, 그게 어쨌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띵,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있었다.
“어……?”
이어 기골이 장대한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진하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어깨가 떡 벌어진 모양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가까워진 후에야 흑곰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인가? 아니면 삼촌? 어영부영 일어나 인사할 준비를 하는데 남자가 대뜸 흑곰을 향해 물었다.
“아들, 누구야? 친구?”
아들?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봐도 삼십 대 후반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데. 홀린 듯 돌아보자 흑곰이 살짝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난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렇게 됐네. 아침 먹고 있었어?”
“네. 친구가 와서.”
성큼성큼 걸어 가까워진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한 박자 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심해민이라고 합니다.”
“엉, 반가워요. 이야, 우리 찬희한테 이렇게 잘생긴 친구가 다 있었네.”
듣다 보니 목소리도 비슷했다. 뻗어온 손을 마주 잡고 악수하며 멍하니 물었다.
“저, 그런데 흑고……. 아, 아니. 찬희 아버님이신 거죠……?”
“응? 맞아요.”
“당연히 형이나 삼촌이신 줄 알고…….”
“뭐? 아이고야.”
탄식한 남자가 와하하, 소리 내 웃었다. 접히는 눈도 꼭 빼닮은 모양새였다. 과연 유전자의 힘이란 위대하구나…….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남자가 흑곰을 향해 말했다.
“아들, 1층에 선물 있거든. 좀 가지고 올라올래?”
“나중에 볼게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갔다 와. 힘들게 고른 건데.”
그러자 흑곰이 슬쩍 나를 살폈다. 시선의 뜻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녀석은 보란 듯 긴 한숨을 내쉬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우리 애가 좀 유난이죠?”
흑곰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 후에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자 단정한 미간이 애석하게 주름졌다.
“애가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나 예절을 잘 몰라서 좀 곤란할 때도 있을 건데……. 그럴 땐 나한테 연락 줘요.”
“……네?”
“여기, 명함.”
남자가 뒷주머니에서 정말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얼결에 받아들면서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불편한 점은 뭐든지 나한테 말해주면 내가 잘 타이르고 중재할 테니까요. 응?”
“…….”
“이름이 해민이랬나? 찬희가 집까지 누굴 데려온 건 처음인데…….”
아무리 봐도 농담 같지는 않았다. 진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모습에 나까지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지내면서 불편한 점은 자기한테 의논하라니. 보통 스물두 살짜리 아들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나? 남자는 마치 입질 훈련이 안 된 개를 남의 집 앞마당에 풀어놓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대는데 그가 이번에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참, 이건 용돈 해요. 찬희랑 맛있는 거라도 사 먹고…….”
명품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가죽 지갑에서 별안간 오만 원짜리 지폐 뭉텅이가 불쑥 튀어 나왔다.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아, 어른이 주는 건 받는 거야.”
“아니에요. 진짜 괜찮습니다. 이런 거 못 받아요. 죄송합니다.”
“그러지 말고, 아들 같아서 주는…….”
언뜻 봐도 수십만 원은 돼 보이는 돈뭉치를 기어코 쥐여 주려 덤벼드는 손을 피해 옥신각신하는 사이 다시 띵,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살았다 싶어 후다닥 몸을 피하자 한 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들어서던 흑곰이 멈칫했다.
“…….”
까만 시선이 남자와 그의 손을 훑더니 후우, 길고 짙은 한숨이 흘렀다. 어쩐지 내가 죄지은 기분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 * *
쇼핑백은 온갖 과자며 옷가지로 가득했다. 선 채로 내려다보다 문득 내가 아직도 그놈의 파자마 차림인 것을 깨닫고 모골이 송연해졌다. 세상에, 커플 파자마를 입은 채로 저 녀석 아버지와 마주쳤잖아. 용케 아무 소리도 안 들었네…….
흑곰은 집이 조용해진 후에도 말이 없었다. 소파에 걸터앉은 채 이마를 쓸어 넘길 뿐이었다. 괜히 눈치 보며 서 있으려니 한참 후에야 시선이 마주쳤다.
“죄송해요.”
“어?”
“아버지가 이상한 소리 하셨죠?”
예의상 부정해야 할 것 같은 말인데,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건 사실이라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녀석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가 이래저래 하자가 있다 보니까……. 어디서나 그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뭐? 왜? 네가 어디가 어때서.”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듯 되물었다. 애가 화용 언어 사용이 조금 능숙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깟 걸로 뭐 하자랄 것까지야. 그러나 흑곰은 풀죽은 시선을 내리깐 채 다시 말이 없었다. 호되게 야단맞은 강아지가 귀를 축 늘어뜨린 모습 같았다. 나는 얼른 녀석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니, 야……. 그냥 네 친구 보니까 좋으셨나 보지.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
“너 한국 온 지 얼마 안 됐다며? 그럼 네가 한국에서 사귄 친구는 거의 처음 보신 거 아냐? 반가워서 그러신 거지. 나한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집에 친구 데려온 거 처음 본다고, 반갑다고.”
녀석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푹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나도 모르게 널따란 어깨를 토닥이며 아무 말이나 쥐어 짜냈다.
“네가 무슨 하자가 있어? 너 이렇게 잘생기고, 키도 크고, 또…….”
돈도 많다고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어쩐지 그건 NG일 것 같다. 열심히 빈 혀를 굴리는데 흑곰이 살짝 웃었다.
“또요?”
“…….”
“또 어떤 점이 괜찮아요?”
“……또 그…….”
내 성실한 렙업 셔틀이지……, 를 어떻게든 다른 말로 바꿔 말해야 했다. 다행히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착하지. 너 얼마나 착한데.”
하하, 작위적으로 웃으며 까만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해놓고 선 넘었나 싶었지만 다행히 흑곰은 옅은 미소를 띨 뿐이었다.
“착하다는 말 처음 들어보네.”
그러고는 앞으로 스르르 기울어졌다. 툭, 녀석의 이마가 내 어깨에 닿고 예의 그 비누 향이 훅 풍겼다.
“……어.”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밀쳐낼 뻔했다. 심장이 벌컥 튀어 오른 소리가 새어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을 치기 직전에 손끝을 말아 쥘 수 있었다. 입술을 하도 꽉 닫았더니 인중이 다 저렸다.
“형도 착해요.”
속삭이는 말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침묵 속에서 크고 차가운 손이 허리를 감아왔다.
“내가 태어나서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착해.”
숨이 막혔다.
“……저기…….”
간신히 입을 열자 까끌까끌하게 긁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다란 팔이 허리를 넉넉히 두르고 옆구리까지 닿은 탓이었다. 간지러운 자극에는 면역이 없다. 어깨를 움츠리자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양 뺨으로 소름이 훅 끼쳤다.
“…….”
침을 삼키면 들킬 것 같았다. 눈만 깜빡이며 쩔쩔매는데 후우,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죄송해요.”
간단히 사과한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떨어져 나갔다. 나는 어어, 하며 아직 간지러운 감각이 남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커피 드실래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 모양이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쩐지 이러다간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게 될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그만 가봐야지.”
“어딜요?”
“어디긴, 우리 집 가야지.”
그러자 녀석이 새까만 시선을 빤히 던져왔다. 뭔 소리야? 그렇게 쓰여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애써 모르는 척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책 보여줘서 고마워. 재워준 것도, 응.”
“…….”
“다음에 또 놀러 올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덧붙이자 그제야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정말요?”
“……어, 정말.”
선뜻 대답하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놀러 온 어른한테 하루 만에 정 붙인 어린애가 떼쓰는 모습 같다고나 할까…….
“그럼 태워다 드릴게요.”
물론 어린애랑 달리 이 녀석은 운전면허도 있고 으리으리한 차도 있지만.
“아냐, 뭘. 버스 타면 금방인데.”
“여기서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는 멀어요. 길도 언덕이고.”
“…….”
“태워다 드릴게요.”
재차 말한 녀석이 복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형 옷 이쪽에 있어요.”
“어? 어.”
뒤늦게 쫓아가보니 작은 드레스룸이었다. 방에 꼭 맞게 짜인 시스템장에 색과 각을 맞춘 옷들이 정갈하게 채워져 있었다. 무슨 연예인 집 공개하는 방송에서나 보던 방 같았다. 이 집 자체가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요.”
의류 관리기 문을 연 녀석이 안에 걸려 있던 내 후드와 청바지를 꺼내주었다. 포슬포슬하고 따스한 공기가 훅 퍼지며 좋은 향이 났다. ……맨날 세탁기에 대충 돌려 입는 옷인데 의류 관리기라니, 좋은 집에 와서 옷까지 호강했네.
“고마워.”
감사 인사에 미소로 답한 흑곰이 장에 걸려 있던 티셔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파자마 상의를 벗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넓은 어깨와 두툼한 흉곽, 늘씬한 허리에 티 없이 깨끗한 피부까지 한눈에 들어온 뒤였다. 놀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덤덤하게 티셔츠에 목을 꿴 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갈아입으세요?”
“……갈아입, 여기……. 아, 갈아입어야지.”
그래, 보통 남자끼리 있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생각해보면 어제부터 있던 일 모두 마찬가지다. 친구끼리 한 침대 쓸 수도 있고, 잠깐 기댈 수도 있고, 옷도 훌러덩 벗을 수도 있고……. 그냥 커플 파자마 하나만 좀 이상했던 거지.
마음을 굳게 먹는다 해서 갑자기 간이 커지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나는 후드 티에 목을 꿰어놓은 상태로 파자마 상의 단추를 푸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렇게 꼼지락대는 사이 하의까지 쉽게 갈아입은 녀석이 나를 지나쳐 밖으로 나섰다.
“준비 좀 하고 있을게요. 천천히 입고 나오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까만 머리꼭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죽겠네…….”
상대는 아무 생각 없는데 나만 열심히 의식하고 있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 정신 차려야지. 다시금 다짐하고 얼른 마저 갈아입었다.
“주소가 어떻게 돼요?”
평정심은 어제 봤던 으리으리한 차에 올라타는 순간 한 번 더 흔들렸다. 주소? 눈을 멀뚱히 뜨고 되묻자 핸드폰을 쥐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취방으로 가실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그냥 정류장에 내려주면…….”
“여기서 정류장까지 가나 형 자취방까지 가나 거리는 비슷할 것 같은데요.”
잠시 고민하다 결국 건물 주소를 불렀다. 굳이 사양하면 주소를 알려주기 싫은 모양이 될 것 같은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취하신 지는 오래되셨어요?”
낮에 본 주택가는 밤에 언뜻 봤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성벽 같은 담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 적막한 느낌도 들었다.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혼자 살았으니까 5년은 됐지.”
“통학은 안 해보시고요?”
“본가에서 이 학교 다니려면 왕복 네 시간은 걸려.”
성적에 맞춰 갈 수 있는 학교 중 최대한 집에서 먼 학교를 고른 이유였다. 집에서 매일 식구들 얼굴을 봐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멋있어요. 혼자 사는 거.”
눈을 마주친 녀석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 뜬금없는 공치사에도 슬슬 익숙해지는 것 같다.
“멋있긴 뭐가. 반고리관만 한 원룸에서 아등바등 사는 것뿐이야.”
“그냥요. 형이 하는 건 뭐든 멋있어 보여서.”
거리도 가까운데 길도 전혀 막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대학가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 앞 골목까지 이 거대한 차를 끌고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나마 도로가 넓은 사거리에 닿자마자 얼른 손짓을 했다.
“여기 세워줘. 안쪽으로 들어가면 차 돌리기 힘들 거야.”
“괜찮은데……. 저 운전 잘해요.”
“내가 간 쫄려서 안 돼. 서민은 이럴 때마다 심적으로 힘들어.”
단호히 말하자 슬쩍 웃은 녀석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얼른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잠시만요,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녀석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있었다. 망설이며 다가가니 A4 크기의 쇼핑백을 내민다.
“이게 뭐야?”
“텀블러랑, 과자예요. 아버지가 사 오신 거.”
“아, 고마워. 잘 먹을게.”
꽤 묵직한 쇼핑백을 품에 안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길에서 마주 보고 서 있으니 새삼스레 키 차이가 실감이 났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흑곰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헤어지려니 아쉽네요.”
“…….”
“언제든 또 놀러 오세요.”
이쯤 되니 좀 너무한다 싶다. 어차피 절절이 매달리는 첫사랑은 따로 있으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너도 언제든 또 몸 안 좋으면…….”
“어, 해민!”
흐릿한 감상에 젖어가던 의식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솟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흑곰의 어깨너머로 수정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가운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에 한 박자 느린 난색이 돌았다. 아마 나를 발견하자마자 불러놓고 뒤늦게 흑곰의 존재를 인식한 모양이었다.
내 시선을 따라 흑곰이 고개를 돌렸다. 별수 없이 보고 말았다.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숨 막히는 표정을 짓는 수정을.
“아……. 내 친구야.”
얼른 소개하고 수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그녀는 흑곰이 다가가 인사를 건넨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안녕하세요.”
“네, 안, 안녕, 안녕하세요.”
이토록 당황한 수정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흑곰은 그런 수정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살그머니 두 눈을 접었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형.”
“……으응. 조심해서 가.”
“형도요. 친구분도 잘 들어가세요.”
수정을 향해서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녀석이 커다란 외제차에 올라탔다. 수정은 거대한 차의 뒤꽁무니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차가 제법 멀어진 뒤에야 철썩, 내 등짝을 내리쳤다.
“야, 심해민……. 심해민, 너…….”
“잠깐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거 아니야……. 그리고 개아퍼.”
“너 이 깜찍한 새끼. 어쩌면 그렇게 새침을 떠나 했더니 저 정도 인물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겠다는 뜻이었어? 그런 거야? 심지어 형? 쟤 몇 살인데?”
“아니라고……. 전에 말한 그 게임 친구야.”
필사적으로 부정해봤지만 이미 수정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내 어깨를 붙들고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더욱 간사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래서, 네 스타일 아니라고?”
솔직히 입이 찢어져도 그 소리는 안 나온다. 당연하지 않은가. 저렇게 생긴 애가 자기 스타일이 아닐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건수를 잡았다 싶었는지 수정의 눈동자가 희번득 빛났다.
“어? 전혀 생각 없다고?”
“글쎄 헛다리라니까. 쟤 임자 따로 있어.”
“임자만 없었으면 생각 있고?”
“그런 가정을 뭐 하러 해. 아무튼 아냐.”
어쩐지 풀이 죽는 기분에 골목 안쪽으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수정도 그제야 표정을 굳힌 채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우리 해민이, 누나가 아픈 데 찌른 건 아니지?”
“알면 그만 가……. 나 마음 아파서 쉬어야 돼.”
“그러고 싶은데 내일이 동기 모임이네요. 이번에야말로 너 데려오라고 애들 다 눈에 불을 켜고 있어.”
수정이 내 눈앞으로 제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동기 모임 단톡방이 불타고 있었다. ‘방금 해민이 만났다’는 수정의 보고에 당장 포승줄에 묶어 끌고 오라며 저마다 억하심정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바쁘면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 졸업하고 사회 나가서 의지할 거 동기뿐인데, 애들한테 서운한 마음 쌓게 만들어서 좋을 게 뭐 있어.”
수정이 애써 웃으며 타일렀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얼굴 보는 게 수정뿐이다 보니, 동기들과 나 사이에서 얼마나 등이 터지고 있을지도 눈에 훤했다.
“알았어. 신경 쓰게 만들어서 미안해.”
아예 잠수를 타버렸던 건, 장또가 동기 모임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달은 그나마 그 인간도 잠잠한 모양이지만 학교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 겹치는 만큼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일도 아니기는 했다. 무엇보다 내가 피할 이유가 없고.
“시간이랑 장소 보내주면 맞춰서 갈게.”
“드라이해줄까?”
“뭔……. 됐어.”
수정이 히,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문득 흑곰이 준 쇼핑백에 시선이 갔다. 열어보니 녀석의 말대로 외국 과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참, 너 이거 좀 가져가서 먹어.”
포장된 초콜릿과 틴케이스에 담긴 쿠키를 몇 개 꺼내주자 수정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와, 초콜릿 이거 완전 비싼 건데. 웬 거야?”
“그래? 비싼 거야?”
“안 돌려줘. 받았으면 내 거.”
받은 것을 품에 감추며 눈을 찡긋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픽 샜다. 그냥 텀블러만 빼고 통째로 주는 게 낫겠다. 쇼핑백을 활짝 열어 뒤적이던 손끝이 우뚝 굳었다.
“…….”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두른 선물용 과자 사이, 촌스러운 디자인의 텀블러와 익숙한 소책자가 보였다. 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올가의 비밀 레시피」였다.
“이런…….”
헛숨을 들이쉬고 핸드폰을 들었다. 의아해하는 수정에게 대충 인사한 뒤 전화를 걸며 자취방 건물로 달려 들어갔다. 건물 계단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다 ‘연결이 되지 않아……’로 시작하는 안내 음성을 듣고서야 이마를 쓸어 올렸다.
아마 별생각 없이 이러는 거겠지. 투병한 나날이 길다 보니 사람 사이의 거리감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잖아.
문제는 내가 이런 친절에 면역이 없다는 거다. 불쑥 건네는 상냥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짓는 눈웃음도, 아까울 것 하나 없다는 듯 퍼주는 친절도 하나하나 낯설어서 매번 깜짝깜짝 놀라고 만다.
열도 좀 받는다. 어차피 그놈의 첫사랑인지 뭔지 찾아내면 미련 없이 그쪽으로 갈 거면서.
“…….”
후우, 무거운 한숨을 쉬고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괜찮다. 어차피 이러다 말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