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편
"아무짓도 안했는데 왜 그렇게 놀래요?"
"아무짓도 안했으니까..."
"일찍 일어 났네요?"
"예."
"몸은 좀 어때요?"
"이제 낫았나 봐요. 어지럽지도 않고, 춥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야 될거에요. 이 베개 동엽씨가 받쳐 준거에요?"
"응."
"그럼 아까 베개 받쳐 주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응, 맞아요. 그거야 그거."
"맞긴 뭘 맞아요. 딴 짓 하려고 그랬죠?"
"무슨 딴 짓이요?"
"혹시 키스하려고 그랬던 것 아닌가? 아니, 한 거 아닌가?"
이 여자가 혹시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게 아닌가 싶다. 깨었으면서 잠든 척 일어 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역시 좋아는 하지만 연인까지는 어렵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심히 쪽팔린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좀 더 주무세요."
"왜, 내가 잠들면 또 입맞추려고?"
이 년이 진짜 알고 있었구만. 뽀얗게 웃는 얼굴이 좀 얄밉다. 이 방에 자기하고 나 둘 뿐인 것을 알고서 저렇게 놀릴까? 이제 다섯 시 갓 넘은 새벽인데 내가 열받아, 쪽팔림에 못이겨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근데 내가 덮칠 용기나 있나. 나? 당연히 못 덮치지. 덮칠 정도의 용기가 있으면 벌써 사랑한다 얘길 했지.
"아무짓도 안했다니까 진짜."
몸이 많이 좋아 졌지만 평상시의 몸은 아니었다. 다소 어지럽다. 내가 누웠던 자리로 가 삐친 척 이불을 덮고 돌아 누웠다.
"삐쳤어요?"
"몰라요."
"알았어요. 이제 안 놀릴게. 근데 진짜 아무짓도 안했어요?"
이게 진짜 아픈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쪽팔리게끔 왜 자꾸 뭇는거야. 차라리 하고나 들켰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래 했다 쳐라."
"진짜루?"
도대체 무슨 답을 듣고 싶은거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봐라 보았다. 창쪽에서 햇살이 비스듬이 들어 와 그녀 볼에 맺힌다. 허허, 진짜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날 보며 앉아 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흔들고 물었다.
"원하는 대답 해 줄테니까, 했다고 그러면 좋겠어요? 아무짓도 안했다고 말하면 좋겠어요?"
"피, 이제 진짜 아프지 않나 보네."
이게 또 말을 먹네.
"나영씨."
"왜요."
"나도 나영씨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또한 나도 많이 헛갈려요."
"헛갈릴 것도 없나 보다. 약 먹어야죠. 죽 쑤어 올게요."
"아직 이른 시간인데."
"잠도 안 오는데 일찍 일어 나야죠."
그녀는 부엌으로 나갔다. 마음이 좀 후련하다. 아픈 몸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그녀에게 표현한 것 같아서 후련하다. 근데 반응이 저렇냐.
그녀가 무릎을 팔로 감싼채 내 죽먹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 내가 무슨 구경거린가. 밖은 이제 완연한 아침의 모습으로 환하다. 나중에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면 많이 허전하겠다. 좀 더 아프면 좋겠는데. 꾀병인 척 들어 누울까? 그녀가 정성스레 날 돌 봐 주었는데 빨리 완쾌해야지.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다.
약을 먹고 잠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리 저리 부산하게 부엌으로 욕실로 왔다 갔다 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나 보다. 세수를 하고 난 후의 그녀 얼굴이 유난히 뽀얗다.
"가려구요?"
"왜 자꾸 가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아니 집에 가려구 부산하게 움직인 것 같아서요. 누가 가라고 그랬나."
"커피 한 잔 해야죠. 원두 커피 기계 한 번 이용해 볼까나."
"커피가 물기를 많이 먹었을텐데."
"괜찮아요."
"나는 믹스가 더 맛있더라. 나는 그냥 커피 마실래."
"누가 동엽씨 끓여 준댔어요. 동엽씨는 아직 커피 먹으면 안돼요."
"그럼 나는 뭘 먹어요."
"따뜻한 물이나 마셔요."
그녀가 한 손에는 자신의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호호 거리면서 나에게 다른 손에 든 그냥 맹물이 담긴 컵을 건네 주었다. 아침까지 먹고 나니 이제 거의 정상을 찾은 느낌이다.
몸을 벽에 기대인채 앉았다. 그녀는 건너 편 벽에 앉았다. 방이 크지 않아 멀리 있는 느낌은 아니다. 아침에 그녀와 함께 커피, 아니 맹물 한 잔의 여유가 너무나 좋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출근 준비 하느라 바쁘겠지. 백수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다. 회사 다닐 때 보다 하숙하던 때가 훨씬 그리운 이유는 바로 그녀와 같이 했던 아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맛있어요?"
"응, 아침에 원두커피를 마시는 것이 참 좋네요. 저거 쳐박아 놓지 말고 자주 사용해요."
"알았어요."
"아, 좋다.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아침이네요."
"나두요."
"이때 일어 난 적 있기나 해요?"
야이, 거의 없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따지지 좀 말아요."
"옛날 기억들이 떠 오르네요. 별로 옛날도 아니구나. 동엽씨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가 육개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 전인 거 같아요."
"나두요."
그 사이 좀 많은 일들이 일어 났지.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가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
"동엽씨 처음 왔던 날 기억해요?"
"그럼요. 내가 짐 나르는 데, 이것 저것 시키기만 하고 하나도 거들어 주지 않았잖아요."
"그때 말고 하숙집 구하러 왔을때요."
"그때요? 아, 그때 나영씨를 처음 보았구나. 그때는 나영씨가 말도 없이 다소곳이 방을 보여 주었잖아요. 아주 청순하고 가련해 보여서 기필코 이 하숙집에 방을 얻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 청순하고 가련한 거 맞잖아요."
"작전이었지요. 이사하는 첫날 그 환상이 깨지더군요. 방을 얻었다구, 그러니까 이제 그물안에 들어 온 물고기다 이거지. 이삿짐 나르는 것은 하나도 안 도와주고, 옆에 와서 얼마나 쫑알 되던지. 나는 방 구하러 왔을 때 본 그 여자 동생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비데오도 있네. 옷장은 없어요? 이건 뭐에요? 저건 뭐에요? 거기 보단 여기 놓는게 나을텐데. 기타 등등, 에구 얼마나 말이 많던지."
"이제 한 식구라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랬지. 나도 동엽씨가 방 구하러 왔을 땐 양복 입고 깔끔한 모습이길래 무슨 재원이나 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백수였을 줄이야. 겉 모습만 깔끔하면 뭐하냐. 이불을 깔 줄만 알고 갤 줄을 몰라요. 오디오 장식장에다 팬티를 말아 넣어 두지를 않나. 하숙생 중에서 동엽씨가 제일 안 씻었던 것 같어. 겉모습 깔끔했던 것도 나중에는 포기해 버리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좀 후한 점수를 주고 많이 기대를 했었는데. 내 팔자가 이러려니 했지요."
"아이, 백수 소리 하지 말라니까. 나도 작년까지는 그런데로 재원이었어요."
"짤렸잖아요. 재원이 짤리나."
"짤리기 전에 자진해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거나 거거나."
"나영씨 그거 알아요?"
"뭘요?"
"여자도 남잘 성희롱하면 벌금 문다는 거."
"무슨 말이에요?"
"속옷만 입고 있는 데 문 열고 들어 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죠? 그때마다 고소했으면 나 때돈 벌었을거야 아마."
"누가 속옷만 입고 자래요? 그리고 노크 안하고 들어 간 적은 한번도 없다 뭐."
"그게 노크에요? 일방적 통보지. 그게 노크였구나."
"그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그러면 동엽씨도 나 속옷만 입고 있을 때 내 방 들어오지 그랬어요?"
"그게 여자 입에서 나올 소리에요?"
"같이 살면서 서로 조심했어야지. 내 잘못 만은 아닌 것 같은데."
"치. 그래도 그 때문에 많이 친해 졌어요. 그지."
"맞아요."
"하기야, 나영씨가 처음 봤을 때 느낀 그런 여자였다면 친해 지기 어려웠을거야. 말없이 다소곳하기만 하면 말 붙이기가 힘들거든요."
"동엽씨가 회사일에 바쁘고, 이해 타산 적인 재원이었다면 나도 편하게 대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래, 하숙할 때가 그립네요."
"동엽씨가 정이 많아 좋았어요. 처음엔 잘 몰랐는데, 백수라서 실망도 했는데 자꾸 정이 갔어요."
"아이씨, 자꾸 백수라 그러지 말라니까."
"알았어요. 그래도 동엽씨가 백수였기 때문에 편했어요. 내 처지가 버림 받기 쉬운 처지잖아요. 나는 내세울게 없었어요. 동엽씨가 어찌 보면 참 높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마다 백수라 놀린거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이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좀 헷갈린다.
"나영씨가 어때서요."
"나 이제 고아잖아요. 아직 발령이 날지 미지수인 백수구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물려 받은 재산이 좀 있긴 하지만 내세울만한 것은 못돼요. 이런 날 좋아 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네요."
"무슨 말이 그래요. 그럼 나는요? 나는 그런 나영씨가 항상 높아 보여서 내 마음도 정의 내리지 못했었는데."
"동엽씬 좋은 사람이에요. 그 나이면 포기할 수도 있는데 자신의 꿈을 쫓고 있잖아요. 그것도 부모 힘 빌리지 않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쫓고 있는 거잖아요. 나 보다는 훨씬 낫아요."
"아니라니까요. 난 미래가 불확실해요. 요즘 여자들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 좋아하지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나영씬 곧 발령날 거잖아요. 자신의 앞가림은 충분히 할 것이고. 외모도 준수하고, 좋아할 남자들 줄을 섰겠다."
"훗,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자신이 초라해 보이나 보네요. 아까 동엽씨 나에게 입맞춤 하려 할때 나 깨어 있었어요. 모른채 하려다 괜히 죄 짓는 것 같아서 눈을 뜬 것이에요."
"에?"
에구 쪽팔려라. 근데 눈 뜬게 죄지, 왜 모른 척 하려 했던게 죄냐.
"약간의 감정에 의해서 한 순간 어색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더군요. 동엽씨 내가 간호해 준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 난 사랑 같은 감정에 동정심이 포함되어서 그랬던 것이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거나 어색한 느낌이 들거에요."
말은 좀 어렵군. 나보다 들고 있는 컵에다 눈 길을 주는 그녀가 그녀의 말처럼 가엾긴 하다. 동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정심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이제는 안다.
"아닌데, 나는 내 처지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랑이란 감정을 애써 부인하곤 했었는데..."
"흠... 처지 탓 하지 말아요."
"사회 생활 해 봐서 그런지 맘데로 안되네요. 나영씨."
"응."
또 반말이야 씨.
"나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 말고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단지 그 사람만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힘들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동엽씨가 좋아요. 나도 내 처지가 어떻던 상관없이 나만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금 바란다면 우리 부모님 두분 따로 제사 모시는 것은 어렵더라도 결혼 기념일 같은 날을 잡아서 제사도 지내주는 그런 남자가 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성공하면 충분히 그래 줄 수 있는데..."
"훗, 꼭 성공하세요. 아니 꼭 성공해야 돼요. 나는 내년에는 결혼 할 생각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만으로 27, 29이지. 실제로는 스무 여덟, 서른이잖아요."
"나는 누가 뭐래도 아직 이십대에요."
"알았어요. 근데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 그지."
"조금 그렇네요. 결혼 얘기가 왜 나왔지?"
"자신의 처지 얘기하면서 나온 것 같다."
"그렇네. 하여튼 우린 못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래요. 고마워요."
아침 햇살이 창을 타고 넘어 온다. 내 방이 환하다. 내 아픈 몸도 오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겠다. 그녀의 수줍게 웃는 모습이 좋다. 아무래도 저 표정을 잊지 못할 것 같다.
ㅡ 계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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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62 /305 날짜 1999년6월23일(수요일) 0:24:55
E-mail [email protected]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ㅡ 39편 (마지막)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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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길게 쓰야 되는데 전편에 괜히 마지막이라 그래 가지고 좀 급히 끝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