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편
그녀가 생각나 뜨거웠던 일요일은 빠르게 어둠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어제 그녀를 만난다고 너무 설레였었나 보다. 라면과 쌀을 어디 숨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저녁 한 끼만으로 배고픔을 참았다. 밥을 먹으면 바로 배고픔을 면할 수 있지만 그리움은 그렇지 않다. 오늘처럼 그녀가 생각나는 밤이면 왠지 분
위기를 잡고 싶다. 방 안이 너무 더웠다.
하늘을 보았다. 소나기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하늘은 맑은 것처럼 보인다. 인공적인 도시의 주황빛이 하늘을 탈색시켰지만 그래도 비는 안 오겠다. 옥상 바닥이 불땐 온돌방 바닥 같다. 고풍스럽게 다 떨어져 가는 소파에 최대한 폼을 잡고 앉았다. 그리고 멋있게 담배를 물고... 에이씨, 불을 안가지고 나왔다. 방으로 급히 들어가 라이터를 가지고 나왔다. 아까처럼 소파에 멋있게 앉아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연기가 옥상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움이 커지면 담배 연기처럼 내 마음을 가리고 있던 막연함이 사라질 것도 같다.
월요일도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옥상에서 폼을 잡았었다. 점점 담배연기가 옅어 진다. 그녀가 가까운 곳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왜 더 그리운지 모르겠다. 있을 때 잘하자.
화요일도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옥상에서 폼을 잡았다. 무엇인가 내 앞을 심하게 가리면 이 좋은 담배의 맛도 그냥 쉼호흡과 같아져 버리는구나.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내일은 소낙비라도 내릴 것 같다. 오늘 옥상 바닥은 비닐하우스를 치고 물만 뿌리면 그대로 사우나탕이 될 정도로 뜨겁다. 심심한데 이단 옆차기나 연습 해보고 방에 들어가 바로 잡을 자자. 내일은 그녀가 내 근처로 돌아 올 것이다.
오전에 그녀의 오피스텔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를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점심 때 전화 거는 목적으로 식당에 밥 먹으러 갔다. 그녀는 없었다. 덕분에 점심을 먹었다. 냉면이 시원했다. 학원을 가다가 또 전화를 해 보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를 잊어 두고 어떻게 자취 생활 한 달을 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녀가 돌아 왔다. 하하.
"동엽입니다."
"아, 동엽씨. 저 방금 돌아 왔어요."
"아, 그래요. 잘 맞춰 전화를 했네요. 학원 가는 길에 생각이 나서 전화 해 봤어요."
"잘 했어요. 집에 먹을 것 많이 있거든요. 학원 마치고 오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는 간단하게 하는 편이구만. 빨리 끊으려 했다.
"참 나영씨."
"네?"
"무슨 꽃 좋아해요?"
"왜요? 꽃 사줄려구?"
"네."
"노란 프리지아 하구 빨간 장미하고 하얀 안개꽃이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프리지아가 어떻게 생긴 꽃인지 모른다고 말하면 뭐라 그러겠지? 드레곤 불에 나오는 프리자와 무슨 연관이 있는 꽃인가?
"정말 잘 어울리겠는데요."
"참, 꽃다발로 장식해서 사오지 말고, 그냥 꽃만 사오세요. 화병에다 꼿게요."
"알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학원 첫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멀뚱히 있다가 에휴, 수업 한시간 빠진다고 뭐 큰 지장이 있겠냐,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더 설레이며 그녀와의 만남을 지연하는 것은 내 건강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 튀자.
후리지아가 저렇게 생긴 꽃이었구나. 색깔과 향기를 빼면 별로 예쁜 꽃은 아니다.
"얼만큼 드릴까요?"
"제가 꽃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요. 삼만원치 정도를 알아서 섞어 주세요. 참 포장은 할 필요 없습니다."
꽃 집을 나와 신나게 걸었다. 분위기를 잡으면서, 꽃을 든 남자라는 사실에 주위의 시선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한송이 장미처럼 보여 질 것도 같았다. 졸라 큰 장미네 그럼. 꽃을 든 남자 처음 봤어? 생긴것이 꼭 벽에 붙여 놓은 씹다 뱉은 껌같이 생긴 놈이 피식 거리며 나를 지나쳤다. 저 얼굴은 평생가도 여자한테 꽃 선물 한 번 못할 것 같다. 나도 알고 보면 잘난 놈이다.
멀리서 천둥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진짜 비가 오려나 보다. 잘됐네. 지금 내가 우산이 없으니까, 나중에 집에 돌아갈 때 그녀가 날 혼자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 날 집까지 데려다 주면 또 내가 우산을 쓰고 그녀를 오피스텔에 데려다 주고, 허허, 이런 노가다 생각을 하면서 웃을 정도니 그녀가 내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인 줄 알겠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맞구만. 그것도 아주 많이.
그녀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바로 뛰어 올라 가려다, 오늘은 왠지 내 모습을 점검해 보고 싶었다. 괜찮구만. 정문을 향해서 빠른 걸음을 걸었다. 정문에서 아릿따운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앗, 그녀다.
"나..."
이름을 부르려다 멈찟했다. 그녀와 같이 나오는 정장 입은 사내를 보았기 때문이다. 제법 멋있게 생긴 놈이다. 엘레베이터를 같이 타고 내려온 모르는 사람일까 생각을 했는데, 둘이서 말을 주고 받는다. 괜히 내 모습을 근처의 봉고차 뒤로 숨겼다.
저 새끼는 차도 있었다. 그것도 중형차네. 나이는 별로 안들어 보이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녀석이다. 사내가 오피스텔 앞에 주차 되어 있던 흰색 소나타 앞으로 가더니 문을 열었다. 열었으면 바로 타고 떠나야 할 것 아닌가. 그녀와 말을 주고 받는다. 미소띤 그녀의 얼굴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야이, 저 놈 봐라.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친다. 다독거려 준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예삿 사이가 아닌가 보다. 사내가 말을 몇마디 하니까 그녀가 손짓으로 길을 가리킨다. 고개를 흔들며 사내가 또 뭐라 그러자 그녀가 시계를 봤다. 그리고는 차에 같이 타버린다. 뒷좌석도 아닌 운전자 옆 보조석이다.
뭐야 이거. 순간 들고 있던 꽃을 떨어 뜨려 버렸다. 차는 내가 왔던 반대 방향으로 뒷 전조등의 빨간 불을 선명하게 밝히고는 멀어져 갔다.
멍하다.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 지면서 서러워 온다. 나는 아까 양복입고 차도 있는 그 사내와 비교가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녀의 오피스텔까지 들어 왔던 사내라면 분명 보통 사이는 아니다. 나처럼 같이 하숙한 것도 아니고. 친오빠처럼 지내야 된다던 그 사낸가 보다. 친오빠처럼 대하다가 나중에 결혼하려나 보다. 저 새끼가 그랬을 것 같다. 혼자니까 외롭지? 날 친오빠처럼 생각하며 편하게 대해.
오늘 그 사내가 그녀를 차에 태우고 집에 대려다 준 것 같다. 우산쓰고 비 맞고 걷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행동같다. 아까 생각했던 내 설레임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기분 참 묘하다. 허허, 좀 더 일찍 저런 모습이 내게 보여졌다면, 오늘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감히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밉다. 들켜도 꼭 내 마음을 다 뺏아아 놓고 들킨 것 때문에 밉다. 빨리 들켰으면 내 축하해 주었을 텐데. 이제 나는 어떡하라고 진짜 섧다. 마음 더 다치기 전에 빨리 그녀를 잊자. 지금부터 당장 그녀를 잊는 연습을 하자. 차마 잊기 힘들 것 같으니까.
힘없이 돌아서 집으로 걸었다. 내 마음엔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 친다. 어이, 스카이. 지금 영화 찍냐? 아니면 내 비참한 모습을 극대화 하기 위해 놀리는 것이냐? 구름 사이로 번개의 밝은 빛이 왔다 갔다 하더니 이내 천둥질이다. 그리고 자취집으로 반이나 왔을까. 굵은 소낙비가 내렸다.
그래 내려봐바. 나 우산 엄써. 이왕 젖을 거 많은 비에 젖으면 시원하기라도 하지. 그래 마구 내려라. 오늘 내 초라한 마음 씻기워 주면 좋겠다. 몸이 시려 온다. 빗방울이 장난이 아니다. 쫌만 덜 내렸으면 좋겠는데...
옥상을 힘없이 올라 왔다. 옥상은 벌써 곳곳에 물물이 고였다. 더운 김이 안개처럼 퍼져 있다. 뜯어진 소파는 비를 피할 기력이 없나 보다. 내 모습 같은 소파는 비가 와서 그냥 맞아도 더 초라해 질 것이 없다. 내일 보자 소파야.
완전히 젖은 옷들을 욕실에 던져 놓고는 샤워도 하지 않고 젖은 몸을 물기만 닦은채 방으로 인도했다.
이불을 깔고 누웠다. 십자 창문에 빗물 튀기는 소리와 풍경이 너무 낭만적이다. 그래서 슬프다. 머리가 아파 온다. 감기 기운이 도는 것이 비를 너무 맞았나 보다. 갑자기 아파진 마음만큼 몸도 아프다.
불을 켠채 오늘 그녀가 모르는 사내와 같이 있었다는 사실 보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묻기 조차 힘든 내 초라한 신세가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조용히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픈채 잠이 들었다.
아침 창가에 서울 새가 운다. 밝은 햇살이 새 울음 소리와 함께 들어 오고 있다. 날씨가 맑다. 어제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맑다. 눈은 떴지만 일어 나지는 못하겠다. 자취하면서 체력이 많이 약해 졌나 보다. 어제 꼴랑 그 정도의 비를 맞았다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춥다. 배도 고프다. 어제 저녁을 먹지 않았다.
집에 먹을 것도 없다. 졸라 서럽다. 집에 가고 싶다.
"쾅! 쾅!"
터프한 노크소리다. 누군지 묻지도 않고 힘든 몸을 일으켜 세워 문을 열어 주고는 다시 이불속으로 와 누웠다.
"동엽씨. 어제 온다더니 왜 안왔어요?"
따지듯 그녀가 내방으로 들어 선다. 시선을 주기 싫었다.
"그냥요. 왜 왔어요?"
고개를 조심스레 돌려 그녀를 보았다. 문앞에 높은 그녀가 서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먹을 것인가 보다. 냄새가 좋다. 그녀는 특유의 기분 나빠하는 모습으로 이불속에 누워 있는 나를 깔아 보고 있다.
"내가 왔는데 일어 나지도 않아요?"
내가 왜 일어 나야 된다는 말인가.
내가 자기 보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시 그녀를 외면하며 고개를 그녀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몸이 아프니까 눈시울이 금방 붉어진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해 봤다. 참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다. 그녀의 결혼식에 가 부조금을 내고 함박 웃음으로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 준다. 그리고 축하객들과 밥을 먹으면서 나 혼자서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 같을 것 같다.
"동엽씨 안 일어나요? 어디 아파요?"
먹을 것만 내려놓고 그냥 가라.
ㅡ 계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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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58 /305 날짜 1999년6월20일(일요일) 13:32:25
E-mail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 36편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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