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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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편

조금만 더 놀다가지, 느끼지 못했던 오전의 허전함이다. 천정이 뜨거워져 오고 있다. 그녀는 내 기분을 아쉽게 만드는 표정을 하고는 내 배웅을 거절한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설거지를 끝내고 밥상은 다시 책상이 되었다. 아직 이론 책을 보며 글 쓰는 공부를 해야하는 초보구성 작가단계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전문 작가 이상의 이야기들이 있다. 어찌보면 하숙집 그녀의 삶이 글 쓰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정네가 있었으니 바로 동엽이라 했다. 이렇게 적어 볼까? 너무 삼류 같나?

 문학적 예술성은 배고픔과 고독에서 온다. 지금 나는 고독하지만 배는 졸라 부르다. 내가 무슨 예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배 고픈데 글을 쓸 수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고독해도 딴 생각 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녀 생각이 자주 난다. 아침에 찾아 온 그녀가 돌아간 지금 안타갑다.

 천정이 뜨거워 지는 만큼 내 눈꺼풀은 무거워 지고 있다. 십자 창문 바깥의 풍경들이 녹고 있다. 모두 녹일 것 같은 졸라 더운 여름날이다.

 한 주가 시작 되었다. 학원을 가는 시간이 내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학원 내가 속한 방 사람들은 아직 눈망울이 초롱하다. 작가가 된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또는 취미로 글쓰기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변화가 별로 없지만 차분한 것이 안정된 느낌이다. 종석이 형은 내 이사하기 전달에 반을 옮겼었다. 그 반이 오늘 떠들썩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 오늘 종석이 형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오면서 많이도 망설였다. 그녀의 오피스텔을 찾아 가 보고 싶은 맘 때문이었다. 근데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떼어지지 않았다. 오피스텔 쪽으로 가는 길만 쳐다보다 그냥 돌아섰다.

 집에 와 아침에 계획한데로 찌개라면을 끓여 먹었다. 배 부르니까 기분이 좋다. 희미한 달빛이 초라하게 고운 옥상 소파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웠다. 생활이 단조로운 것 같다. 자취하기 시작하면서 늘 이런 생활이었는데 오늘은 내 생활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 되어진다. 그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고 싶으면 그가 없을 때의 생활이 단조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아까 학원 마치고 그녀 오피스텔을 갔었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을, 내일 아침에도 그녀가 올까?

 컴퓨터를 켜 놓고 나중에 내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는 데 무리가 없을 때, 그때 쓰기 위한 동기를 제공하기 위해 지금 내 마음에 구상되어진 것들을 타이핑 해 보았다. 이런 것도 드라마로 제작할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쥐. 시청율을 올리려면 예전에 종석이랑 주영이가 얘기했던 것처럼 여성 시청자들을 겨냥한 멜로물이여야 한다. 벌써 시청율을 생각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볼 만 할 것 같다. 암, 이 내용 충분히 드라마로 제작 될 수 있다. 제목은 신데렐라라고 하자. 남자 신데렐라. 세상 물정 모르는 백수가 졸라 잘난 여자와 우여곡절 끝에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쿠쿠, 남자 주인공 이름은 신동엽이고 여자 주인공 이름은 이나영이다. 세상에 신동엽이가 나만 있나? 그리고 이나영이라는 이름이 하숙집 그녀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 그래도 혹시 진짜 드라마로 제작되어 그녀가 그걸 보게 되면 조금 부끄럽겠다. 그래서 주인공 이름을 조금 수정했다. 신돈엽, 이나연으로. 이러면 아마 모를것이다.

 글은 안쓰고 컴퓨터 모니터만 밝혀 둔 채, 그 앞에 누워서 신돈엽이하고 이나연이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상상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워드 프로세서의 커서가 깜박 거리며 차라리 컴퓨터를 꺼라, 그러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커서야 미안, 조금만 더 상상하다가 움직여 줄게. 상상하다 웃음을 간직한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오늘 아침도 잠에서 깬 시간이 일찍다. 여덟시도 안됐다. 오늘 아침은 컵라면을 먹어야 되나? 그녀가 왔으면 좋겠다. 십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반가운 사람의 소식이 있을 거라는 모양으로 환하다.

 "쾅, 쾅."

 그년가? 그녀였으면 정말 좋겠다.

 "누구세요."

 "총각, 나 아랫집 아저씨."

 김 팍 새 버린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저 아저씨 잠도 없나.

 "무슨 일인데요?"

 "전기세 나왔어."

 이런 새벽에 전기세를 받으러 왔단 말여. 세상 참 삭막하다. 문을 열어 주었다.

 "얼만데요?"

 "오만 팔천원 나왔는데, 예전부터 이 방에선 20퍼센트를 내기로 했어. 불만 없지?"

 "불만은 없는데요. 그게 얼만대요?"

 "모르지. 빨리 계산해서 죠."

 아이씨, 계산해놓고 와야 될 거 아냐. 오만 팔천원의 이십퍼센트면 얼마냐. 오만에 이십퍼센트는 만원이고 팔천원에 이십퍼센트는? 쫌 어렵다. 천... 천 팔백? 아이씨, 졸라 어렵네.

 "아저씨 계산기 없어요?"

 "안 가져 왔는데."

 "대충 만 천원 정도 되는데요?"

 "그럼 만 천원만 죠."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하숙할 때는 전기세 달라는 소리는 안했는데 생각지 않았던 돈이 나가니까 억울했다. 컴퓨터가 아직 켜져 있다. 켜져 있는 컴퓨터로 계산해 보았다. 오만 팔천원의 이십퍼센트는 만천육백원이었다. 사발면 하나 값을 앉은 자리에서 벌었다.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아주 사소한 것에 기분 나빠 했다가 기분 좋아해 하는 것 같다.

 열시 까지 방문을 주시한 채 아침을 먹지 않았다. 방문을 주시한 채 아침을 먹기를 꺼려 했던 것은 당연히 그녀가 혹시 올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의 열기를 식힐 겸 찬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 준 옷을 입고 학원으로 출발했다. 아침, 점심을 모두 컵라면으로 때웠다. 속이 좀 쓰리다. 그 속쓰림은 학원을 파하고 최고조에 달했다.

종석이 형을 만났었다.

 "어! 오늘은 엄청 깔끔하다."

 "원래 제가 깔끔하잖습니까? 옷이 잘 어울려 보여요?"

 "그래, 잘하면 이십대로 봐줄 수 있겠다."

 "저 이십대 맞는데요."

 "보통때는 안그래 보였어."

 "어제는 안 보이시대요?"

 "하하!"

 종석이 그가 대답은 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왜 웃어요?"

 "나, 다음 달부터 M방송국 작가 아카데미 전문 코스 밟게 됐다."

 "네?"

 "내가 이번에 그 방송국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상을 했잖아. 그 수상 경력 때문에 중급자 코스도 아니고, 바로 전문 코스로 건너 뛰어 버린 거 아니겠냐."

 "진짜요?"

 "응. 잘하면 내년에는 방송국 작가 공채에 도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제 시나리오를 썼대요?"

 "틈틈히 썼지."

 허! 이 녀석은 그래도 할 것 다하고 개떡 사랑 읊고 다녔었네. 근데 시나리오 쓸 만한 내용이 이 녀석 주위에 있었을까? 내 속이 지금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무슨 내용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요?"

 "내용? 그냥 내 일상적인 얘기야."

 "그러니까 무슨 일상적인 내용인데요?"

 "어, 내용을 설명하자면 작가의 꿈을 쫓는 한 여성의 좌절과 그리고 그 곁에서 그 여자가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순수한 남자의 헌신적 사랑을 심리적, 시간적으로 심층적으로 엮었지."

 무슨 말이야 이거. 여자는 주영씨를 생각한 것 같다. 근데 너 차였잖아. 심리적으로 엮었어? 심리적은 무슨, 개떡사랑철학 주절 주절 썼겠지. 어떻게 입상이 되었을까?

 "상금은 없어요?"

 "얼마 안돼지만 곧 받아."

 "잔치 안 해요?"

 "나중에."

 "그럼 이 학원은 안나오겠네요."

 "그래. 그래도 종종 찾아 올게."

 "그래요. 축하해요."

 나도 공모를 해 볼까? 하지만 아직 시나리오 쓰는 형식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예전에 강사가 아무 글이나 공모해 보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진짜 나도 공모를 해 볼까? 너무 서둘지는 말자.

 같은 계단에 있던 사람이 날 버려두고 웃으며 몇 계단 올라 가 버렸다. 축하는 해 주었지만 내 자신이 초라하다.

 "한 잔 할래?"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상금타면 한잔 합시다."

 "그래. 그때는 내가 살게."

 "잘 되길 빌게요."

 "고마워. 너도 잘 될거야."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자취방으로 들어 왔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옷차림이 멋있는 미남이다. 그렇지만 그것 뿐인 것 같다. 옷을 벗어 단아하게 옷걸이에다 걸었다. 내 처지와 가장 비슷한 놈이, 별로 생각나던 사람은 아니지만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쓸쓸하다. 그래도 잘되서 떠나는 것이니 축하해 주어야 된다. 흠, 속이 졸라 쓰리다. 이제 내 처지와 비슷한 사람은 나영씨 밖에 없구나. 근데 언제 하숙집 그녀가 나하고 비슷한 처지가 되었나. 그 또 이상하네. 오늘은 내가 딴 날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지고 있는데, 그녀가 내 처지와 비슷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진다. 어찌보면 내 처지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낮아지지는 않는다.

 종석이 형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자극에 컴을 켜고 몇자 쳐 보았지만 또 배시시 웃고만 말았다. 그래, 하숙집 그녀가 가까운 곳에 있다. 내일은 그녀를 찾아가 보아야 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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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56 /305 날짜 1999년6월20일(일요일) 13:30:46

E-mail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 34편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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