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편
하루의 해가 지고 있다. 따뜻한 나라에서 내 빨래들이 마르고 있다. 짧게 잘려진 내 머리가 바람에 시원하다. 옥상에서 보는 하늘 따라 늘어선 높은 건물 사이로 해가 수줍게 작별을 하고 있다. 황금 빛이다.
밥상을 펴 놓고 앉았다. 책을 보며 글을 쓰다가 웃었다. 한 줌 미소속에 행복이 숨어 있으리라. 시간에 떠맡긴 무료한 마음이지만 오늘은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느니, 소중한 사람이여 지금 내 모습을 보고 그대도 미소 짓는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으이. 오늘은 하숙집 그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정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단지 다시 만난 반가움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물음표는 아직 존재하고 있지만 오늘 나는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다.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의 발걸음이 가벼울 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 자신있게 발걸음을 뗄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마음도 위축되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이 그렇다.
얇은 이불로 배만 덮고 누워 불꺼진 천정을 바라 보았다. 하숙집 그녀가 없었더라면 내 생활이 참 막막했을 거란 생각을 해 보았다. 아직 그녀의 마음을 모르기에 자신은 없지만 내일 그녀에게 넌지시 내 마음을 표현해 봐야겠다. 어떻게 표현해 볼까?
일찍 일어나 맞은 아침은 상쾌했다. 밥솥에 아직 밥이 있다. 마음마저 넉넉하다. 김치 한접시와 달걀 프라이 하나로 반찬은 꾸며져 있지만 아침부터 밥을 먹는다는 것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사소한 것에도 미소를 주자.
밥을 맛있게 먹었다. 어제 머릴 감았는데 오늘 또 머릴 감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화면 죽을 때가 된것이라는데, 괜히 감았나? 오래 살아야 되는데.
나갈 준비를 마치고 소파 아래서 태양이 바로 쏘아 내리는 직사 광선을 맞으며 담배 한 대 폈다. 지금 나가면 너무 일찍 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 극장 앞에 사람들 참 많네. 참 지금 학생들은 방학을 했겠구나. 얼마만이냐. 그녀를 찾아 봤으나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약속 시간까지 한 십여분 남아 있다.
약속 시간이 십여분 지났다. 그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날씨가 덥다. 실내 대기실에 들어가서 혼자 앉아 있기가 싫었다. 그녀가 나타나면 바로 봐야 하는데, 영화 간판 밑 그림자를 친구삼아 앉았다. 그래도 덥다.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이 삼십분도 더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얘가 왜 안 오는겨? 혹시 서울 극장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약속 시간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같이 살아 봐서 아는데 그녀가 약속을 펑크내고 할 사람은 아니다.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허허, 사람 기다리면서 걱정 해 보는 것은 처음 인 것 같다. 왜 안나타는겨?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조금씩 길어지는 그림자 따라 다리를 뻗었다. 다시 십분 쯤 지났을 때 급히 뛰어오는 아가씨를 보았다. 베이지색 엷은 치마자락이 아름답다. 나 여기 앉아 있오. 뭘 그리 두리번 거리냐. 다행이다. 사고 난 것은 아닌가 보다. 사지 멀쩡하다. 하숙집 그녀가 나타났다. 날 발견 하지 못했다.
"나영씨, 여기에요."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미안한 웃음을 짓고는 다가 왔다. 한 손에는 뭘 들고 있다.
"미안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그럼요."
"네?"
"많이 늦은 거 맞다구요."
이런말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버릇이 됐나보다.
"그렇다고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럼 뭐라고 해요?"
"됐어요."
뭐가 됐다는 거냐? 저건 내가 해야 될 말인데. 그녀의 얼굴에 땀이 가득하다. 손수건이라도 있으면 건네 줄텐데. 내 손이 지금 깨끗한가? 오늘 아침에 머리까지 감긴 손인데 더러울리가 없다.
"땀이 많이 낫네요?"
그녀 얼굴 만져 본 것은 같이 살면서도 처음인 것 같다. 그리 싫어 하는 표정은 아니다.
"그러니까 다시 미안한데요."
"늦은거요?"
"네. 울 언니 오늘 오전에 출국했어요."
"언니가 벌써 갔어요?"
"네. 생각보다 빨리 살던 집이 처분되어서요."
"공항갔다 온거에요?"
"네."
"서운하겠다."
"괜찮아요. 떨어져 살던 시간이 오래되어서 적응이 됐나봐요."
"그럼 이제 혼자네요."
"그렇네요. 하지만 지금은 동엽씨랑 같이 있는데."
"그렇구나. 그 들고 있는 것은 뭐에요?"
"영화 봐야죠?"
묻는 말에 답은 안하냐?
"그래야지요. 뭐 볼래요?"
"아무거나."
서울극장 상영관 여섯게 중에 매진 안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 무렵으로 갈 수록 매진율은 더 심했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볼게 하나도 없네요. 오늘 영화 볼 팔자는 아닌가 보네요."
으이씨, 그렇게 말하면 안돼지. 같이 영화 본다고 내가 얼마나 설레어 했는지 아십니까? 극장이 이거 하나 뿐이냐? 저 건너편에도 극장 있잖아. 너 은근슬쩍 볼 영화 없다는 핑계로 가버리려고 그러지?
"영화 봐야 되는데요."
"꼭 영화 봐야 되요?"
"그럼요. 저 건너 극장에 가 봅시다."
"그럴까요 그럼."
힘드냐? 걸음걸이가 영 시원찮다. 한 시간이나 늦게 와도 나처럼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이 많은 줄 아남. 영화 봐야돼. 단성사도 매진이었다. 피카디리? 당연히 매진이었지. 무슨 날인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근데 서울에도 장이 서나?
"동엽씨 오늘 영화 못 보겠다."
"한군데 남았잖아요."
"다른데 갈거에요? 나 오늘 많이 걸었어요. 오늘은 구두 굽도 높아서 발 아파요."
그러고 보니 오늘 나영씨가 다른 날 보다 좀 커 보이긴 한다.
"멀리 안가도 돼요. 피카디리 옆에도 극장이 하나 있네요."
"저긴 이륜데. 그리고 제목도 낯선 영화잖아요."
"어짜피 우리가 뭐 제목보고 영화 보러 왔나요. 영화 보는데 의의가 있지."
내가 왜 영화 보는데 목숨을 거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를 붙잡긴 위해선 영화를 봐야했다.
"그래요. 그럼 저거라도 봅시다."
"표는 내가 살테니까, 나영씨가 먹을 것 사세요."
"알았어요."
공주도 대충 시킨데로 하는구나. 허허.
그 극장은 표가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쌩판 모르고 영화 보기는 처음이다.
옆 극장에서 하는 걸 이 극장에선 예고편으로 내 보내는 구나. 저거 재밌겠다. 헤헤,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있다. 이 여자가 정말, 나도 신발을 벗지 않았는데...
완전 예술 영화였다. 배우들이 하는 말도 영어가 아닌 것 같다. 전함 포템킨과 막상막하다. 그래도 대형화면이라 비디오 보다는 볼만했다. 어깨가 왜이리 무거운겨.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있다. 기분좋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까지는 말이다. 예전에 포템킨 보면서 의심했던 것에 확신이 들었다. 그때도 잤었구만. 그래 잘 자라. 영화 보다 보니까 볼만 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팝콘을 조심스럽게 뺏었다. 내가 팝콘을 혼자서 다 먹는 동안 그러니까 영화 끝날때까지 내 어깨는 그녀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새근 새근 그녀가 잘도 잔다. 그녀가 잠 깨지 않도록 내 영화 보면서 자세를 바꾸지 않았었다. 그래서 앉은 자세가 좀 불편하기는 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나영씨."
"네!"
뭘 그리 놀라냐.
"영화 끝났어요."
"아, 제가 잠시 졸았네요."
뭘 한시간도 넘게 잤으면서.
"영화 그런데로 괜찮았죠?"
"네."
"무슨 내용인 줄은 알겠어요?"
당연히 말 못하겠지.
"좀 어려운 영화네요."
뭘 어려운 영화야. 보지도 않았으면서.
"일어 납시다."
"그래요."
그냥 일어나면 어떡하냐. 신발은 신어야지. 자네 공주 맞냐? 그 들고 왔던 것도 챙겨야지.
"어제 잠 안 잤어요?"
"네, 거의. 언니가 다음 날 갈 것이라 생각하니까 할 얘기가 많았어요. 밤새 얘기 했네요."
"그랬군요."
"제가 오래 졸았나요?"
"아니요. 오래 잤어요."
잠이 덜 깬 듯한 그녀를 데리고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까보다 더 더운것 같다. 시원한 냉커피나 팥빙수가 생각난다.
"집에 바로 갈거 아니죠?"
그녀가 날 멀뚱히 쳐다 본다.
"흠, 오늘 동엽씨 집 구경하려고 생각했는데."
"그래요?"
"저녁도 먹어야 하잖아요."
"우리 집에 먹을 것 없는데요."
"집 지저분해서 보여주기 민망할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죠?"
"아이, 우리집 분위기 있고 좋아요."
"여기서 돈 쓰지 말고 동엽씨 집에 가서 놀아요."
"안 바빠요?"
"백수가 뭐가 바쁘겠어요."
오호라, 이제야 자기도 백순걸 인정하는구나.
"나영씨는 백수아니라면서요."
"어쩔수 없이 지금은 백수인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네요."
"근데 먹을 것은 진짜 없어요. 저녁은 제 단골이 된 식당에서 먹을래요?"
"그래도 되구요."
"그럼 갑시다. 그집 갈비탕 맛있어요. 내가 사줄게요."
"고마워요. 동엽씨 집에 간 김에 방 청소도 좀 해주고 와야 겠다."
"내 방 진짜 깨끗하다니까 왜 못 믿지?"
"같이 살아봐서 그 말을 못 믿겠네요."
같이 살아 봤다는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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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52 /305 날짜 1999년6월18일(금요일) 2:57:49
E-mail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 31편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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