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편
낯선 시간들이 지나갔다. 지금 하늘 모습으로 내 느낌이 묘하다. 학원을 파했다. 종석이 형은 이삿 짐 날러 주었던 보답을 받으려는지 의미있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들이 해야지?"
"하지요 뭐. 맥주 드실래요?"
"좋지. 내일 할일이 있는데 소주는 속이 불편하겠지."
맥주가 비싸니까 니가 그러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랴. 근데 내일 토요일이잖아. 무슨 할 일이 있을까?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별이 보이는 서울 하늘 아래 내 자취방이 있다. 아직 그 속에서의 생활은 해보지 않았지만 낭만적일 것 같다. 주인 아저씨가 생각보다 나이가 적었다. 외모상으로는 나만한 딸이 충분히 있을 것 같았는데 딸이라고는 이제 중학생이 하나 있고, 제일 빨리 낳은 자식은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짐들로 방안은 어수선했다. 사가지고 온 맥주와 먹을 것들로 옥탑방 앞에 마당처럼 펼쳐진 옥상에서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낡은 소파가 운치가 있다.
다리를 꼬고 허리를 핀 채 소파에 기대어 작은 나라의 왕자모습으로 앉아 종석이 형과 술을 마셨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옥탑에서의 이야기가 멀리 번져 간다.
"야, 분위기 괜찮다."
"이사 잘 온 것 같아요?"
"그래. 여름밤에 앉아 쉬기 딱 좋은 분위기다."
"그렇지요?"
"한잔 해."
"그럽시다."
약간의 취기는 녀석에게 또 희한한 말들을 하게 했다. 높은 곳에 사니까 출세했다. 옥상이니까 유에프오 볼 수도 있겠다. 어린 왕자가 찾아 올 수도 있겠다. 달밤에 체조해도 아무도 뭐라 않겠다.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다. 그 그녀가 내 그녀는 아니었지만, 하숙집 그녀를 떠 올리게 했다.
"한번 생각해 봐라."
"뭘요?"
"분명 내 사랑했던 사람이 가까운 어딘가에 살고 있는데 잊혀져 간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누구 말하는 거에요?"
"주영이 말이야."
"그말이에요? 전혀 모순이 아닌데요. 여자야 딴 남자에게 시집가버리면 잊혀지는 것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여자 친구가 없는거야. 그게 모순이라고 생각되어야 안 잊혀지지. 잊혀지지만 않으면 다시 만나게 되어있어."
뭔 말하는거야. 니가 철학자냐? 어려운 말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 그녀가 내게 자주 하던 말을 자네까지 하면 섭하지. 우리 그녀? 그거 어감이 괜찮다. 잊혀지지 않아도 다시 못보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종석이라는 사람은 모르나 보다.
"그럼 죽은 사람도 안 잊혀 지면 다시 볼 수 있어요?"
"당연하쥐. 나중에 내 죽어서 만나면 되지. 잊혀지지만 않으면 돼.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하자."
"그럽시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왠만하면 철학과는 가지마라. 굶기 쉽상이다. 철학? 술 먹으면 다 철학자 된다는 말씀. 물론 장난삼아 별 의미없이 한 말이지만, 내 앞의 종석이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까 새삼 그 말이 공감되어진다.
맥주로 시작한 집들이는 결국 소주로 끝을 마쳤다. 뭐 세상에다 대고 할 말이 저렇게 많았을까? 술에 못 이긴 종석이 형은 곰팡이 핀 낡은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날씨 따뜻하니까 저렇게 재워도 괜찮을 듯 싶다. 오늘 모기들 포식하겠다.
새벽 한 시가 넘었다. 정리 되지 않은 내 옥탑방을 안식처로 꾸며야 했다. 방은 하숙방보다 훨씬 넓다.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대충 짐들을 배치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았다. 창 아래에 글쓰기 위한 컴퓨터와 밥상을 놓은 것 외엔 아무렇게나 짐들을 배치했다. 두 시간 가까이 흐르자 내 방이 안식처로 변했다.
날 찾아 온 손님인데 밖에 재워 둘 수 없어 종석이 형을 깨우러 방을 나왔다. 벌써 모기에게 많이 뜯겼는지 종석이 형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연신 가려운 곳을 긁고 있다.
"형 들어가서 자요."
"괜찮아.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예?"
"잘 할 수 있다니까."
"들어가서 자라니까."
"괜찮아. 괜찮아. 살다보면 그럴때도 있는거야."
정신 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괜찮다고 그러는데 굳이 깨워서 방에 재울 필요 있나 싶다. 그럼 나는 들어가서 잘테니 형은 거기서 잘 주무세요.
"형 그럼 거기서 주무세요."
"응.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내일 딴 말하기만 해 봐라. 먹던 술병이나 음식들을 대충 치워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십자 창문 사이로 밤 하늘 빛이 분위기 있게 들어 온다. 좋다. 무언가 그리운 것이 있다면 그걸 회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이다. 그래서 전에 살던 방이 그립다. 그녀는 아직은 내 살던 그 곳에서 잠이 들었겠지. 그녀가 아직 내가 아는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
"크러렁!"
언제 들어온겨? 아침에 코 고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옆에 종석이 형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가 배에 말고 자고 있었다. 거지가 되어도 어디가서 얼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밝아 진 내 방이 낯설다.
문 쪽을 쳐다 보았다. 밖에 아무도 없지만 왠지 노크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괜히 문을 열어 보았다. 낡은 주방이 보인다. 주방 식탁에 그녀가 앉아 있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사용한지 오래 되었는지 주방의 싱크대가 더러워 보였다. 먹을 것도 하나 없다. 다시 자자.
종석이 형이 감고 있던 이불을 빼앗아 잠을 다시 청했다. 그리고 배가 고파 도저히 계속 잠을 잘 수 없을 때까지 잤다. 깨어 보니 오늘 해는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다. 베개도 없이 목을 긁으며 종석이 형은 여전히 잠에서 깰 생각을 안한다. 옥상위의 옥탑방. 종석이 잘도 잔다. 꼬로록 꼬로록. 배 고롱이 울어대도 종석이 잘도 잔다.
"형 일어나요."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아요. 일어나서 집에 가야 할 것 아니에요."
"응?"
그가 눈을 떴다. 주위를 살피더니 목을 긁는다. 신기한 곳에라도 온 모양이다. 두리번 거린다.
"정신 차려요."
"여기가 어디야?"
"내 방이요."
"몇시냐?"
"세시 쯤 되었네요."
"날 샌거야. 밝다."
"오후 세시오."
"뭐야? 나 세시에 약속 있는데 큰일났다."
"아직 세시 될려면 십여분 남았어요."
"나 지금 바로 가야겠다."
"안 씻어요?"
"지금 씻는게 문제냐. 그녀가 뭐라 그러겠는데."
"누구요?"
"주영이 말이야."
"오늘 만나기로 했어요?"
"응. 나 갈게."
종석이 형은 허겁지겁 옷차림을 매만지더니 간다는 말만 남기고 횅하니 내 방을 떠나 버렸다. 나쁜놈. 어제 그리움이 뭐 어쩌고 저쩌고 할 때는 꼭 다시 못 볼 사람마냥 말하더니 오늘 약속이 있었어. 에라이 나쁜노마. 혹시 길거리를 걷는데 사람들이 자넬 쳐다보면 머리 모양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머리나 빗고 가지. 아무래도 오늘 주영씨에게 모진 말 들을 것도 같다. 자네 나간 모양새라면 설사 자네 부인이라도 딴사람에게 시집가고 싶겠다.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다. 차려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지만 하루만에 바로 불편함을 느끼게 될줄이야. 오늘은 밖에 나가 사먹고 내일부터는 직접 해 먹어 보기도 하자. 그녀에게 전화도 해 볼까? 왜 망설여지지 근데.
일요일은 자취 생활을 위한 설레임과 준비로 바쁘게 지나갔다. 백수면서 아직 목돈이 남아 있던 관계로 쇼핑을 했다. 베개를 아주 푹신한 걸로 하나 샀다. 작은 전기 밥솥도 사고, 토스트기도 샀다. 원두 커피 기계도 사고 전기 포트도 샀다. 수저 세트를 예쁜 것으로 하나 샀다. 신혼 부부용인가 보다. 숟가락 젓가락 남,녀 용으로 색을 맞추어 있다. 밥 그릇도 사고 국그릇도 사고 냄비도 샀다. 휴대용 가스렌지도 하나 샀지요. 도마와 칼도 샀다. 옥상에 나와 고기 구워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솥뚜껑도 샀다. 솥뚜껑 산김에 삽겹살도 한근을 샀다. 오늘 하루 옥상을 오르내린 게 수십번은 되는 듯 하다. 물건 하나 사서 정리하다 보면 또 살것이 생기고 했기 때문이다. 식용유, 간장, 된장, 김치, 쌀, 식빵, 쨈, 햄, 달걀, 라면. 등등 먹을 것 산 것을 끝으로 내 자취 생활의 준비는 끝이 났다. 새롭게 시작이다. 아자!
일요일 저녁 어두워 지는 하늘을 친구 삼아 옥상에서 나홀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어제 먹고 남았던 소주도 있었다. 정말 좋다. 소파가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낡아서 신경 쓸 필요 없는 편안함까지 주는 소파도 정말 맘에 든다. 고기까지 맛있네.
혼자서 고기 한 근을 다 구워 먹고 움직이가 불편해서 소파에 기대어 하늘을 보았다. 등따시고 배부르고 또한 편하다. 나영씨 나 오늘 기분 좋오. 그러니까 당신 생각이 나는구료. 그녀에게는 내일 연락해야 겠다.
아침에 먹을 밥을 위해 쌀을 씻었다. 힘들지 않았다. 반찬도 햄이랑 달걀 구워서 김치하고 먹으면 된다. 오늘은 피곤했다. 아직 배는 꺼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일찍 잠들 수가 있었다.
자취 생활이 무리 없이 흐르는 듯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가 왔다. 쌀로 밥해 먹는 것은 삼일을 가지 못했다. 전기 밥솥 괜히 샀다. 아침에 토스트기에서 빵을 구워 먹었다. 저녁은 학원을 마치고 음식점에서 사먹고 왔다. 간혹 라면을 끓여 먹었다. 토스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라면으로 대신했다. 라면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제부터 아침에는 컵라면을 끓여 먹는다. 학원 갈 무렵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고. 저녁은 계속 밖에서 사먹고 들어오고 있다. 주방에 가스렌지와 냄비하나를 제외하고는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공간만 차지하고 복지부동이다. 남아 있는 간장이랑 식용유가 아깝다. 어제 컵라면 한 박스와 커피 믹스 한 박스를 사왔다. 원두 커피 기계? 딱 두번 사용해 봤다.
오늘 아침은 아예 굶었다. 그래도 어제 저녁 사먹고 들어 온 것이 갈비탕 곱배기라 배는 별로 고픈 줄 모르겠다. 갈비탕도 단골 되면 곱배기가 가능해요. 아침은 그래도 운치가 있다. 오늘 같이 일찍 일어난 일요일 아침이면 더욱 그렇다. 커피 한잔을 들고 낡은 런닝에 추리닝만 걸치고 아직 덥지 않은 아침 태양아래 나 만의 옥상에서 낡은 소파에 앉아 먼 하늘을 쳐다 보는 것은 여전히 내 자취 생활을 탁하지 않게 해주고 있다.
오늘로 하숙집을 떠나 온지 16일이 지났다. 그 동안 학원 생활은 심한 변화가 없었다. 그녀에게 연락한다 하는 것이 미루다 보니 오늘까지 연락을 하지 못했다. 커피와 잘 어울리는 담배를 찾지 못했다. 담배 사러 가는 김에 그녀에게 연락을 해 보자.
담배를 한 보루 사고 나서 근처 공중 전화에서 하숙집으로 전화를 걸어 봤다. 결번이랜다. 뭐야 이거. 쩝. 잃어 버렸다. 나영씨를 말이다.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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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49 /305 날짜 1999년6월17일(목요일) 17:7:18
E-mail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 28편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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