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몇 일을 보냈다. 학원 생활도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의 생일 이후 내 하숙 생활에도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쾅,쾅 거리며 노크하는 그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노라면 계속 놀리는 투의 말씀들. 그래도 괜찮다. 살 만하다. 안주해서는 안되겠지만 분명 좋은 기억으로 남을 만한 생활들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무얼할까? 하숙집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이나 할까? 야구장에 그녈 데리고 가면 괜찮을 것 같다. 예쁘게 차려 입은 그녀의 모습과 나란히 야구 경기를 보면 야구 경기가 정말 신날 것도 같다. 비록 좋아하는 팀은 다르지만 그녀와 아웅다웅하는게 이제는 좋다. 참 내가 사준 옷을 그녀가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럴까?
아침에 눈을 떠 이불 맡에 앉아 오늘을 생각했다. 아직 쾅,쾅 되는 노크가 없다. 시계는 열시를 거의 가리키고 있었다. 쾅,쾅 거릴 때가 되었는데.
"쾅,쾅."
그녀도 양반은 못 되겠다.
"나가요."
추리닝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위 아래로 쳐다 보는 그녀의 시선이 오늘은 다른날과 좀 다르다. 내 밥은 식탁위에 차려져 있었다. 밥그릇이 하나 뿐이다.
"나영씨는 식사 했어요?"
"네."
허, 좀 아쉽다. 아침에 그녀와 마주하며 밥 먹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아침을 즐겁게 해주는 활력소였는데 오늘은 나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뭐 그녀가 같은 집에 있는데 또 모르지 내 옆에 청아하게 커피잔을 들고 있을지.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럼요."
"아무리 집에 있어도 외모에 신경 좀 쓰세요."
"왜요?"
"내가 편해요?"
"네?"
"아니에요."
그녀가 오늘 진짜 날 보는 시선이 다르다. 무슨 일이 있나.
"참 나영씨."
그녀가 주방에서 남은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요?"
"오늘 시간 있어요?"
"그건 왜요?"
"아니 할 일 없으면 야구나 보러 가자구요. 오늘 마침 잠실에서 오비랑 엘지가 경기를 하데요."
"시간 없어요. 오늘 약속이 있네요."
"그래요? 그럼 뭐."
요즘은 어디론가 혼자 나가던 외출도 잘 안하고 집에만 있는 여자가 오늘같이 필요로 할 때는 꼭 약속이 잡혀 있냐. 튕기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빨리 드세요."
"빨리 먹고 있잖아요."
그녀가 설거지를 끝마치고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굼뜨게 밥 먹고 있는 나에게 빨리 먹으라 재촉을 했다. 진짜 약속이 있나보다.
"나 조금 있다 나가 봐야 되요."
"내가 먹은 건 내가 설거지 할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럼 나 내 방에 들어 가도 되요?"
"그러세요."
쩝, 그녀가 방으로 들어 가 버렸다. 오늘 뭐 할까? 하기야 뭐 보통때 보다 몇 시간 더 집에 있으면 되는 것인데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배부른 짓이다. 재미없는 비디오나 빌려서 내 구성 실력이나 배양해야 겠다.
밥을 다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왔다. 아주 공주가 되어서 나왔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절로 떠 올랐다.
'이년이 어딜 가는데 이렇게 차려 입고 나오는 겨?'
옷이 좀 낯이 익었는데 못 보던 것이었다.
"어디 가세요?"
"음."
그녀가 내 말을 듣고는 자기 옷 맵시를 내려 본다. 저 태도는 자기 모양새가 어떤지부터 물어 달라는 표현이겠지.
"참 예쁘네요. 옷이 참 잘 어울려요."
"좋아 보여요?"
"못 보던 옷이네요."
"참내, 저러니 여자 친구가 없지."
"왜요?"
"이거 동엽씨가 사준 거에요."
그래 이상하게 못 보던 옷인데 낯이 익다 싶었다. 잘 사주었네. 근데 저걸 입고 어딜 가는겨.
"어디 가는데요?"
"안 가르쳐 줄래요."
"일찍 들어 오는 거에요?"
"그건 모르죠."
"남자 만나러 가요?"
"내가 남자 만나러 간다면 동엽씨 기분 나쁠까요?"
"뭐 별로 나쁠 것은 없지만 내가 사준 옷을 입고 나가니까..."
"흠, 갔다와서 봅시다. 나 나가 봐야 겠어요."
그녀가 구두를 신는 뒷모습을 고무장갑을 낀 채 바라 보고 섰었다. 설버라. 그녀 성격에 남자 만나러 가면 내 물었을 때 당연히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친구 만나러 가는 가 보다. 그래 내가 그 옷 사주었다고 자랑이나 하고 오시오. 하하.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찝찝했던 기분이 풀린다.
"잘 다녀와요."
그녀가 한 번 뒤돌아 보더니 암 말도 안하고 그냥 나가 버렸다. 쩝.
설거지를 끝내 놓고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오늘따라 내 방 공간이 너무 커 보인다. 허전해서 그런가?
할 일이 구체적으로 떠 오르지 않는다. 발가락으로 티비 리모콘을 눌러 보지만 마땅히 관심 둘만한 프로가 없었다. 그래 진짜 잼없는 비디오나 빌려서 분석이나 해보자. 머리를 대충 손 보고 지금 입고 있는 차림 그대로 방을 나왔다. 주인 아줌마가 마루에 나와 계셨다. 많이 좋아 진 모습이다.
"어머님 나오셨어요?"
"어 동엽이 총각."
"나영씨는 어딜 가던데요."
"어? 그래. 아침은 차려 주고 나가던?"
"네."
"그래."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그래."
아줌마의 표정에도 뭔가 오늘은 다른 게 있어 보였다. 눈을 위로 떠 아줌마와 눈을 한 번 마주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야 햇살이 보석 빛이다. 호호, 글 쓴다고 이렇게 비유하면 안되지. 놀기 참 좋은 날씨다. 백수 티 나나?
거리 풍경이 밝다. 토요일은 일요일이란 미래가 있기 때문에 밝은 것이다. 내 요즘 생활이 밝은 편이다. 일요일 같은 미래가 분명 있을 것 같다. 오늘 예쁜 모습의 그녀가 떠 올라 내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가볍다.
졸라 재미없는 비데오는 값이 싸서 좋다. 몽타쥬 기법이란 무엇일까? 변증법 이론에서 나온 것이라 했는데. 세르게이 에이진타인의 전함 포템킨이란 영화를 빌렸다. 이게 내 글쓰는데 도움이 될까 싶다. 비데오 테잎을 추리닝 허리춤에 꼽고 제법 신나는 걸음걸이로 집으로 향했다. 담배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숙집으로 들어 왔다. 마루에 주인 아줌마와 눈에 익지 않은 아줌마 한 분이 또 계셨다. 알지 못했지만 인사는 했다. 저 아줌마가 왜 날 아래 위로 한 번 훝었을까?
방으로 바로 들어 가려다 물이 필요 했길래 냉장고 문 쪽으로 발 걸음을 옮겼었다. 가까운 식탁에 주인 아줌마와 낯선 아줌마가 앉아 있다. 주인 아줌마가 괜히 내 눈치를 살폈다. 그것에 아랑 곳 없이 낯선 아줌마는 내가 입장하면서 중단 되었다 싶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었다.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물을 컵에 따르다가 듣기 싫은 얘기를 들었다.
"혹시 저 총각을..."
"아이,"
"저 총각 보다는 오늘 선 보는 남자가 훨씬 낫지."
주인 아줌마가 날 쳐다 보았다. 선이라는 말 때문에 오늘 그녀가 외출하던 모습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기분이 팍 나빠졌다. 더욱이 저 총각이라는 말은 날 보고 하는 소리였으리라.
천천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 오다 내 예상이 맞았음을 알고 조금 슬펐다. 아니 많이 슬펐다.
"오늘 나영이가 선보러 나간 거 잘한거야. 내 그 총각 꼭 나영이 소개 시켜 주고 싶더라니까. 언니 몸도 편찮은데 나영이 빨리 시집보내야지. 하기야 지금도 좀 늦은 편이지만."
주인 아줌마는 아무 말 없다. 그래 주인 아줌마가 고맙긴 하다. 내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봐서 아줌마의 마음에 내가 조금 스며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내 기뻐해야 할 일이지. 저 아줌마는 근데 뭐여? 꼭 나 들어라고 하는 소리같다. 내가 꼭 나영씨를 넘보는 놈처럼 느껴졌나 보다. 그런 적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방으로 들어 왔지만 기분 한 번 억울하다. 방문 옆에 걸린 거울속에 담긴 내 모습이 상상되어진 오늘 그녀와 선보는 남자와 상대가 되지 않을 듯한 초라한 모습이다. 아침에 그녀가 날 다른 날과 다른 시선으로 본 게 못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오늘은 여전히 좋다. 햇살 한 번 꽃같다. 아이씨 글쓴다고 그러지 말라니까 진짜. 그래 햇살 한 번 속 뒤집어 지게 만든다.
담배를 문 채 비데오 테잎을 넣었다. 세르게이 패 죽이고 싶다. 뭔가 날 몰두 하게 만들란 말이다. 비데오를 틀어 놓고 자꾸 그녀 생각만 하고 있다. 그녀 생각을 하다가 배신감도 느꼈다. 최소한 선보러 나갈때 내가 사준 옷은 입고 나가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그런 식으로 놀아라 이뇬아.
이불위에서 뒹굴었다. 햇살은 여전히 속을 뒤집어 지게 만든다. 으이씨, 으이씨 그러다 비데오 때문인지 날씨 탓인지 그냥 잠이 들었다.
꿈에서 아주 잘나게 되는 나를 보았다. 우리 하숙집 그녀가 쳐다 보기 민망할 정도로 잘나게 되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배를 긁다 일어 나 보니 속을 뒤집게 하던 햇살은 창너머로 넘어가 있었다. 보기 좋은 깊은 오후가 되었다. 아까 가져온 컵에는 물이 없었다. 담배를 얼마나 피웠는지 목이 아팠다. 시계를 보니 한 세시간 잔 것 같다. 목을 한 번 돌려 보고는 물을 뜨러 밖으로 나갔다. 조용한 하숙집 실내다.
아무도 없다. 그녀는 어떤 남정네 앞에서 갖은 내숭을 부리며 히히덕 거리고 있겠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도 없다. 씨. 기분이 많이 나빠졌다.
"으이씨. 이년은 물도 안끓여 놓고 어디로 선보러 간겨?"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에서 나왔다.
"저보고 그런거에요?"
어? 왜 그녀가 내 뒤에 있대요? 집에서 입는 그 긴치마 차림으로 그녀가 내 뒤에 서 있다. 얼굴에 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욕실에서 나온 것 같다. 왜 이리 빨리 온겨?
ㅡ 계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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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35 /304 날짜 1999년6월11일(금요일) 2:57:0
E-mail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15편)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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