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내가 사준 선물이 부담스럽다고 말했으면서 그 옷가방을 좋은 표정으로 들고 그녀가 내 옆에서 걷고 있다. 저번에 시장 봤던 것은 나보고 다 들게 했으면서 그 옷가방을 나보고 들어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목적지도 없이 걸었다.
해는 정점을 지나서 내 오른쪽 어깨 너머로 지고 있다. 그냥 이렇게 걷는 기분은 생각지 못한 즐거움이었다. 아직 학원 갈 시간이 제법 남아 있다. 그녀와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학원 갈 시간 다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길을 걸으면서 조용히 묻는다. 지금 헤어진다면 한 시간 가까이 나 혼자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이 여자가 내 마음을 몰라주고 집에 갈 것 같은 의미의 말을 던졌다. 날씨도 좋고, 마음따라 그녀가 예쁘고 그녀따라 마음도 예쁜데 그냥 같이 마냥 걷고 싶은데 그녀는 집에 갈 모양이다.
"왜요? 들어 가려구요?"
"네?"
"아직 조금 여유가 있는데 나영씨 집에 가고 싶으면 가요."
"애인 없는 이유가 참 많구나."
"뭐요?"
"학원이 여기서 멀어요?"
"넉넉하게 한 시간 잡으면 충분하죠."
"학원 몇시부터 시작하는데요?"
"네시부터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여덟시까지 계속 하는거에요?"
"네? 끝나는 시간은 어떻게 아세요?"
"동엽씨 보통 빨리 오면 아홉시 가까이 되어서 오잖아요. 계산하면 쉽게 나오네 뭐."
"중간에 한시간 시간이 비어요. 듣는게 두개라서."
"네시면 집에 오면 다섯시... 그리 늦진 않겠다."
"뭘 계산하는거에요?"
"선물을 받았으니 식사 대접 정도는 해야죠. 여기서는 아무래도 불안할테니까 동엽씨 학원 근처에서 먹어요."
"나 배 안고픈데요."
"제가 고파요."
누가 자기 공주 아니라 할까봐 자기 맘데로 날 학원 앞으로 한시간도 넘게 빨리 가게 만들었다. 그 괜찮습니다. 지가 가자고 그러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있겠나. 갑시다 그럼..
그녀와 같이 지하철을 탔다. 비좁지는 않으나 앉을 자리가 없는 지하철내에서 그녀와 문앞에 섰다. 지하철 안에 뭐 그렇게 구경할 게 있다고 그녀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모습. 사람들의 모습은 대부분 무표정이다. 나에게 시선을 잘 주지는 않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 무표정의 사람들 보다는 훨씬 밝아 보인다. 창에 비치는 내 모습도 오늘은 표정이 있다. 그녀를 쳐다 볼때면 맺히는 미소가 보기 좋다.
학원 앞으로 왔다. 생각보다 동네가 흐름하죠? 여기서 공주가 식사할 만한 식당을 찾기가 어려울 거다. 나는 배가 솔직히 고프지 않다.
"저기 보이는 학원이에요?"
"네. 생각보다 작죠?"
"그렇네요."
내 묻는 성의를 봐서라도 괜찮아 보인다 그러면 어디가 덧날까? 괜히 내 처지가 초라해 보일까봐 그녀에게 저 학원에 다니는 나를 변명했다.
"내 실력이 쌓이면 방송국에서 모집하는 방송 아카데미에 도전해 볼 거에요. 거기서 정식으로 작가 수업을 받을 겁니다."
"열심히 하세요."
"네. 그건 그렇고 밥 사줄거에요?"
"근데 여기 별로 먹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네요."
그래 그말 나올 줄 알았다.
"저 배 안고파요."
"밥 먹기 싫어요?"
"지금은요."
"그럼 조금 이야기나 하다가 가야 겠네요."
"그러세요."
"그래도 비싼 선물 받았는데 미안하네요."
"괜찮아요."
"어디 이야기 할 만한 장소 있어요?"
"예? 어디를 말하는거에요?"
"커피숖이라던지 아니면 다른 이야기 하기 좋은 곳?"
"여기는 주점들이나 포장마차같이 술 마시는 곳이 주류라."
집에서도 이야기 자주 하는데 꼭 인위적인 이야기 할 장소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하늘 해 묻은 색깔이 좋았다. 햇살아래 있는 그녀의 모양새도 좋았다. 굳이 커피숖 같은 곳에 이 시간의 몸을 맡기기가 싫다. 이렇게 같이 외출을 했는데 그냥 오후의 하늘속에 구름이 흐르면 그 아래서 그녀와 자연스런 이야기나 했으면 좋겠다. 학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이 흐른다. 그리고 강 가에는 앉을 곳이 많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괜찮을 듯 싶었다.
"어디 아는 데 없어요?"
"강가에 갈래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강가에요?"
"그냥 강둑에 앉아서 강 건너 서울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시간 별로 없잖아요."
"뭐 그리 오래 있겠어요."
"그래 갑시다."
강가는 하나의 큰 공원이었다. 저기 멀리 여의도가 보인다. 육삼 빌딩의 색깔이 많이 금빛을 띠고 있다. 오후가 짙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강바람이 참으로 시원하다. 곳곳에 심어놓은 유채꽃들은 남보다 늦게 핀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냥 파란 줄기와 잎들로만 치장되어져 있다.
팔은 왜 벌리냐? 그녀가 내 옆에서 걷다가 꼭 배우처럼 바람을 맞으며 팔을 벌렸다. 거기서 한 바퀴 돌아보면 진짜 영화 장면 같겠다. 진짜 돌려고 했다. 돌려다 들고 있던 옷가방이 날려 내 얼굴을 때렸다. 그러지 않았다면 한바퀴 돌았을 것이다.
"어머 미안해요. 안 아파요?"
"안 아파요. 대신 좀 쪽팔리네요."
좀 무안할 거다.
걸었다. 학원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제법 걸었다. 걷다 보니까 작은 가게가 있는 간이 건물이 보였다..
"저기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서 강둑에 앉아 볼까요?"
신났구만. 가게를 보며 달려가는 그녀를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오늘 잘 데리고 나온 것 같다. 생일날인데 집에 있었으면 솔직히 좀 속이 상했겠지. 게다가 누구 하나 자기 생일이라고 축하 한마디 없었으면 더 그랬겠다 싶다.
작은 파도가 찰싹 찰싹 때리는 강둑은 앉기에 좋았을 뿐더러 깨끗했다. 지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이야기가 오고 가기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고 고개를 멀리 하면 건너 편에 우리 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작게나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옆에 제법 밀착해서 앉았다. 뭐 내 방에서도 그러는데 확트인 여기서 좀 붙어 앉는다고 이상할 게 있겠냐.
"드세요."
포장지를 뜯어낸 메롱바를 그녀가 건넸다.
"콘은 없었어요?"
"있었는데."
"난 콘이 더 맛있던데."
"주는데로 먹어요."
분위기도 모르는 여자다. 영화 같은데 봐라. 연인끼리 강둑에 앉아서 콘 먹는 거는 봤어도 메롱바 먹는 꼴은 한번도 못봤다. 하기야 뭐 니하고 내하고 연인사이는 아니지.
오고 가는 이야기는 예전에 한 번쯤 했음직한 얘기였지만 강이 흐른 만큼 시간도 흘려 보냈다. 해가 멀리 보이는 육삼 빌딩 꼭대기에 걸렸을 정도로 기울었다. 시계를 봤다. 네시 사십분. 뭐여?
"나영씨?"
"왜요?"
"나 학원 갈 시간 지났걸랑요."
"어머, 그래요? 몇신데요?"
"네시 사십분이요."
그녀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정말 그렇네. 나 애들 저녁 차려야 되는데."
"지금 가서 차릴 수 있을래나? 어머님이 차릴까요?"
"그럴거에요. 그러면 안되는데..."
내가 학원 못 간 것은 안중에도 없구먼.
"지금 급히 가서 차리면 일곱시면 애들 저녁 먹일 수 있겠네요."
"아니에요. 제가 없으면 분명 엄마가 차릴거에요. 엄마 혈압이 불안정해서 힘든 일 하면 안된다 말이에요. 어디 전화 할 때 없어요?"
"저기 아까 가게 옆에 공중 전화 있던데..."
그녀가 일어서 공중전화를 찾아 떠났다. 옷가방은 끝까지 손수 사수하는 구만.
나도 일어서 그녀에게로 갔다. 오후가 깊어 가면서 가게 옆의 고수부지에는 사람들이 제법 모여 들어 있었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전화기에다 대고 뭐라 말하고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 갔다.
"엄마 절대 식사준비 하지 마세요. 지금 집에 누구 없어요?"
"..."
"그럼 현철이 좀 바꿔 주세요."
"..."
"응. 현철이니? 누난데. 오늘 일이 있어 저녁을 못 차렸다. 미안해."
"..."
"나는 일이 없니? 쪼그만한게 뭘 그리 묻냐? 하여튼 오늘 저녁은 중국집에서 시켜 먹어라. 애들 보고 그렇게 말해줘."
"..."
"그래, 내일은 맛있는 거 해줄게. 고마워."
그녀가 전화를 끊고 나를 쳐다 본다.
"저녁 그냥 포기한거에요?"
"여기 왜 왔어요?"
"안가요?"
"동엽씨 학원 갈 시간 지났고 또 중간에 한시간 빈다면서요. 내가 가면 동엽씬 뭐해요?"
저게 날 배려하는 말일까? 아니면 자기 놀려고 아예 날 학원 못가게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까 앉았던 자리로 도로 돌아갔다. 가면서 그녀가 어떤 꼬맹이가 산책시킬려고 데리고 나온 개새끼를 보더니 그 앞에 앉아 그 개새끼를 쓰다듬었다. 꼬맹이는 한 일곱 여덟살 남짓 되어 보였다.
"강아지 한 번 안아 봐도 되니?"
"네 그러세요."
그녀가 강아지를 안아 나를 보며 웃는다. 허허.
"개 이름이 뭐니?"
참 친한척 한다.
"아임에프요."
꼬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 우습다. 아임에프 된지 육개월여만에 개새끼 이름에도 아임에프가 등장할 줄이야.
"호호!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니?"
"울 집에 노는 삼촌이 있는데 그 삼촌이 그렇게 지어 주었어요. 울 삼촌이 저 아저씨 하고 닮았어요."
야이 씨. 왜 가만 있는 날 끼워 넣냐?
"그래? 삼촌이 잘 생겼니?"
그녀가 나를 돌아다 보며 재밌다는 듯 호호 거렸다.
"아니요. 나는 잘생겨 보이는데 울 할머니가 맨날 삼촌보고 못난놈, 못난놈 그러시는 걸 보면 못생겼나봐요."
"동엽씨 들었죠?"
뭐여.
"개가 무슨 종류니? 털이 참 복슬하다."
"포메라이언인데요. 가끔씩 마루 닦을때 걸레로도 써요."
새끼 똑똑하네. 나는 발음하기도 어렵겄만...
"호호."
"누나 참 예쁘네요. 우리 아임에프가 참 좋아 했겠다."
꼬맹이 녀석이 상당히 끼가 있어 보였다. 나중에 여자 여럿 울릴 것 같다. 내 나이 곧 서른이지만 그런 말 잘 못하는데...
"안녕."
그녀가 꼬맹이에게 인사를 하고 뒤에 서서 개새끼를 한 마리를 놓고 이야기 하던 어떤 여자와 꼬맹이를 쳐다 보고만 있던 나에게로 돌아 섰다.
"개가 좋아요?"
"아니요. 꼬마가 귀여워 보여서 그랬던 거에요."
그렇게만 답하고 그녀가 강둑으로 갔다. 어짜피 다음 수업 들을 때까지는 그녀와 있어야 하는 거 아까 못했던 이야기나 계속 하자. 그녀가 먼저 가 앉아 있는 옆으로 가서 앉았다.
하늘 한쪽은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참 초라하게 느끼게 할 것 같은 바람이 분다. 물결 소리가 그 바람소리 보다 크게 들린다.
"노을이 예쁘죠?."
그녀가 한참이나 출렁이는 강물을 보며 아무말이 없자, 따로 할 말이 없어서 노을 얘기를 했다.
"물속에도 맺혔네요."
갑자기 얘가 왜 분위기를 가라 앉히며 말하냐?
"물결이 살이 많이 쪘네요."
나도 글공부 하는 사람으로서 이정도 비유야...
"흠. 저 물살이 조금 더 살이 쪄 둥글면 꼭 무덤 같겠다 그죠?"
"네?"
왜 비유를 그런 곳에다 하냐.
"우리 아버지는 무덤이 없어요."
"그건 무슨 말..."
"급하게 돌아가셔서 묫자리 써놓은 거 없어서, 묫자리 돌 볼 아들하나 없어서 우리 아버지 그냥 화장시켜드렸어요. 그리고 저 한강 상류에 흘려 보냈어요."
어제 참 그녀 아버님 제사였지. 돌아 가신지 제법 되었는데 아직 저러는 걸 보면...
ㅡ 계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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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32 /304 날짜 1999년6월7일(월요일) 11:13:42
E-mail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ㅡ13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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