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 ㅡ8편.
아주머니를 병원에 데려 드리고 나는 학원으로 달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즐겁다.
오늘 학원에서 별 다른 것을 배운 것은 없다. 단지 강사가 수필이든, 각본이든, 소설이든 아무 곳이나 공모하는데가 있으면 글을 써서 공모를 해 보라고 했다. 그 정도 실력 되면 내가 왜 학원을 다니남? 각본은 아직 쓸 줄도 모르는데... 각본 제대로 쓰는 것은 언제 갈쳐 줄겨?
공모해서 입상이라도 하게 되면 자기 캐리어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며, 또는 공모를 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면 그 만큼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에 글 실력이 부쩍 는다고 공모 같은 것에도 관심을 두라고 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때는 한 번 써 보지,라고 생각하며 흘려 들었다.
"신군!"
학원을 파하고 집으로 가려는데 그 아무래도 사귀는 것 같은 년,놈 중 놈이 나를 불렀다. 뭐 또 술 마시자고 꼬시려는 것이겠지.
"왜요?"
"내일 술 한잔 하자고."
"왜 내일 술 마실 걸 지금 말해요?"
"자네가 매일 일찍 집에 가 버리니까 그렇지."
"내일 무슨 일 있어요?"
"쟤 생일이래."
그 놈이 좀 떨어져 이쪽을 보고 있는 그 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요? 근데 왜 나하고 술을 마셔요? 저 아가씨하고 같이 마시지."
"너도 같이 마시자고. 다같이 아직 처량한 신세인데, 즐거운 날 한명이라도 더 있는게 좋잖아."
"그래요. 내일 봐요."
"선물도 사 와."
"나 쟤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내가 좋아하니까."
참내, 나 너도 별 안 좋아해. 이렇게 말하려다 참았다. 그래도 학원에서 친하게 된 몇 안되는 사람인데, 그리고 조금 힘든 삶에서 맞은 생일인데, 축하는 해죠야겠다. 뭘 사주지? 돈도 없는데... 그 둘이가 날 보며 웃어 주고 갔다. 웃어 주니까 좋네.
"내일 봅시다."
"그래요. 잘 가세요."
내 인사를 받아 주고는 그녀와 그 놈이 사라져 간다.
하숙 집안 냄새가 좀 그렇다. 생선 냄새 때문이리라. 거실 겸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참 오랫동안 그녀를 못봤다. 아침 먹고 그 후로는 계속 못 봤으니까. 그냥 들어 가려다가 아웅다웅해도 그녀 얼굴 한 번 보려고 내가 왔음을 알렸다. 맞다, 밥도 먹어야 된다.
"저 왔습니다."
내 기대대로 그녀가 자기 방에서 나왔다. 자다 일어 난 모습이다. 학생들 저녁 차려 주고 나서부터 잤었나 보다.
"이제 왔어요?"
"예."
기지게를 켜며 그녀가 하품을 한다. 긴 주름 치마에 조금 헝컬어진 머리 모양, 별로 상류층 사람 같지가 않다.
"밥 먹어야죠."
"차려 주시게요?"
"언제 안 차려 준 적 있어요? 저도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럽시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나왔다. 물론 집에 들어 왔으니까 씻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가 저녁에 학생들이 먹었던 찌개가 남은 큰 냄비가 아닌 작은 냄비에서 찌개를 떠 왔다. 감격하지 않는다. 예전부터 저랬으니까. 반찬들 몇 가지와 밥 그릇을 놓고는 그녀가 앉았다. 그녀가 지금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다가 그녀를 뚜러지게 보았다. 뭔가 보였다. 복수할 기회다.
"안 먹고 뭐해요?"
"좋은 말 할때 빨리 세수 하고 와요."
"예?"
"눈꼽 있어요."
그녀가 세수하러 갔다. 안 간다고 그랬으면 더 놀릴 수 있었는데 아무말 없이 세수하러 갔다. 난 그녀가 올 때까지 밥숟갈을 뜨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녀가 물기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 말씀 하셨다.
"이제 먹읍시다."
아무리 저렇게 입고 있어도 상류층 인사가 맞는거 같다. 앞으로 그녀의 외모를 보고 자신감 갖고 그러지 말자.
"오늘도 찌개 나영씨가 끓였어요?"
"왜 맛이 없어요?"
"아니요. 생각보다 맛이 있어서요."
"내가 끓인 것 맞아요."
생각해 보니 내가 오늘 점심을 안 먹었다. 그래서 좀 맛있게 느껴졌었나 보다. 물론 또 국그릇을 두손으로 감싸고 말했지.
"내 부탁 안 잊었죠?"
"예. 몇 시까지 오면 되요?"
"열 한시 이전에만 들어 오세요."
"제가 그렇게 늦게 들어 온 적이 잦았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알았어요."
허 참, 내일 학원 그녀의 생일이라고 했었는데 어쩐다. 뭐 11시까지 들어 오는 건데 뭐.
"양복은 있죠?"
"당연히 있지요."
"와이셔츠는 있어요?"
"당연히... 움, 참 있긴 있는데 내일 세탁소 갖다 주어야 겠다. 구겨졌걸랑요."
말 하면서 밥을 먹으니까 밥맛을 잘 모르겠다. 그녀야 어짜피 조금씩 품위 찾아 가며 먹으니까 말을 하던 상관이 없는데, 나야 한 웅큼씩 퍼서 먹으니까 말을 하게 되면 상당히 불안하다.
"그거 나중에 저 주세요. 다려 줄테니까."
"다림질 할 줄 알아요?"
그녀의 표정이 몹시 불만인 듯 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고마워요."
"예?"
또 내 말을 씹은 것인겨? 그녀는 꼭 불리하면 내 말을 씹는 것 같다.
"오늘 엄마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면서요."
"아닌데요. 그냥 가는 길에 같이 동행했을 뿐인데요."
"나중에 셔츠 꼭 내 놓으세요."
"알았어요. 참 여자들은 생일 선물로 뭐 받으면 좋아해요?"
"어? 내 생일 다가 오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괜히 물었다. 모른 척 하는 것이 낫다.
"뭐 받고 싶어요?"
"음. 담에 가르쳐 드리죠. 내일 아빠 제산데 내 생일 선물 얘기하고 그러고 싶지 않네요."
"그러세요. 그래도 여자들은 뭐 받으면 좋아할까요?"
"그때 치마 하나 사 줄까요,라고 물었었잖아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니만 여자냐? 그녀가 입고 다니는 저런 치마를 학원 그녀가 좋아할까? 그래도 학원 그녀 때문에 하숙집 그녀의 기분을 좋게 했나 보다. 설거지 하면서 즐거운 음가락을 흥얼 거린다. 회사 퇴직하고 나서는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와이셔츠. 내 옷서랍을 열어 보니 세 벌이 나왔다. 왜 서글픈 웃음이 나오냐. 개어진 채로 오랫동안 있었던 탓인지 주름이 많이 가 있었다. 하얀 색으로 하나를 꺼내 이제 설거지를 끝 마친 그녀에게 갖다 주었다.
"제사 때는 하얀 색이 낫겠죠?"
"그래요. 뭐 와이셔츠가 색깔별로 있어요?"
"내가 작년에는 백수가 아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때가 그리워요?"
"생각 안 납니다. 하여간 잘 다려 주세요. 그거 꽤 비싸게 샀던 걸로 기억하니까."
"내일 드릴게요."
"그러세요."
또 혼자 된 밤은 새벽으로 이름을 바꾼다.
아. 어느 먼지 낀 골방의 백열등 아래서 밥상을 펴고 초췌한 모습으로 폐병까지 걸려 가면서, 폐병은 빼자. 하여간 그렇게 글을 써야 하는데, 나는 깨끗한 하숙방에서 인버터 스텐드를 켜놓고 초췌하기는커녕 회사 다닐 때 보다 훨씬 더 살이 찐 모습으로 책에 밑줄이나 긋고 있다.
담배 한 가피를 물었다. 어두운 방안에 그 불빛이 참 유혹적이다. 빨간 그 불빛. 주위를 밝게 하지는 못하지만 담배 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참 붉다. 꿈으로 미래를 유혹하자. 새벽이 깊으니께 별 말이 다 떠오르네.
"쾅! 쾅!"
오늘은 늦잠인가 보다. 방 문 두들기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해님이 창 끝에 걸려 있다.
"일어 났어요."
밖으로 나왔다. 부침개 굽는 냄새가 참 좋다. 식탁 옆에 내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 그릇 하나.
"나영씨는 밥 먹었어요?"
"네.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애들하고 같이 먹었어요."
"어머님은 병원 가셨어요?"
"네. 오늘은 오후에 저하고 같이 할 일이 많아서 일찍 가셨어요."
"제사 음식 만들려고 그러나 보네요."
"네."
대충 씻고 와서 밥상 앞에 앉았다. 냄새가 좋다. 그녀가 보지 못했던 전기 프라이팬을 식탁위에 꺼내 놓고 지금 부침개를 굽고 있다. 내 밥상 위에는 멀건 국과 풀들과 햄 조가리다. 고향에 계신 어무이, 나도 부침개 먹고 싶어요. 밥 숟갈을 들고 천천히 밥 공기를 비워 나가는 중이다. 냄새가 자꾸 나를 유혹한다. 아... 그 모습을 보았는지 그녀가 물었다.
"부침개 만든 것 좀 줄까요?"
"아니에요. 제사 음식인데 제가 먼저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요? 그럼 빨리 식사 하세요."
쩝, 아침이라 그런지 햄 조가리가 맛이 없다. 고향에 계신 어무이, 진짜 부침개 먹고 싶어요.
"줄 때 먹어요."
"괜찮다니까요."
아침부터 밥을 왜 이리 많이 준겨. 쩝. 입에 밥만 넣고 하숙집 그녀를 쳐다보며 어그적 씹었다.
"나영씨."
"왜요? 하나 드릴까요?"
"예."
맛있었다. 그녀가 만들었지만 맛있었다. 아니다 그녀가 만들어서 더 맛있었다고 해두자.
하숙집 실내은 제사 음식 차리는 모녀의 모습으로 아름답기도 하고 서글퍼기도 했다.먹는 걸 보지 못하는 지아비의 상을 차리는 아낙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래도 냄새가 너무 곱다.
"다녀 오겠습니다."
"일찍 와요."
그러지요. 부침개 얻어 먹기 위해서라도 꼭 일찍 오지요. 그렇지만 오늘 하필이면 약속이 잡혀 있는 날이다. 학원을 가다가 여성 토털 패션점에 들렸다.
"뭐 보러 오셨나요?"
"치마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요?"
"그거 꼭 알아야 되나요?"
괜한 질문을 했다. 근데 저 점원도 좀 띨빵하다. 내가 뭘 고르지도 않았는데 그걸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영 초보처럼 보였다.
"골라 보세요."
그래, 그렇게 말해야지. 하숙집 그녀가 입으면 참 잘 어울리겠다 싶은 치마를 발견했다. 가격표를 봤다. 으아. 무슨 이런 천 조각이 이렇게 비싸다냐. 참 난 지금 그녀의 치마를 사러 온 것이 아니다. 우리 학원 그녀에게 치마는 도저히 선물 못하겠다. 치마 값이 다들 장난이 아니었다. 한 쪽에 진열되어 있던 작은 스카프를 하나 샀다. 이것도 어디여. 계산을 하고 토털 패션점을 나왔다. 근데 아까 본 치마를 우리 하숙집 그녀에게 선물 했으면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내일 통장에서 돈을 좀 뽑지 뭐...
햇빛이 점점 더워 지고 있다. 오후 속으로 한 사내가 뛰어 가고 있다. 그 사내는 나지요. 하하.
ㅡ 계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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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애정비사外 / 검색결과
번호 #215 /304 날짜 1999년5월9일(일요일) 6:15:28
E-mail 이름 이현철
제목 하숙 ㅡ9편
원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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