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이는 아주 예쁘고 참한 아이에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스튜디오도 제 스튜
디오 바로 옆에 있어요."
그제야 진혁은 그 진영과 다영을 혼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뚜렷하게 보였다.
어두워 질 무렵 밖으로 나온 다영과 진혁은 무교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영이 2년간 기다리
느라 배고팠다며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떼를 썼던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다영은 자연스럽게
진혁의 팔짱을 꼈다.
"기다리면서 얼마나 조바심 태웠는지 아세요? 미워요. 그렇지만 그런 묵묵함이 끌렸어요."
"제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기다렸어요?"
진혁의 물음에 다영이 금방 대답했다.
"느낌으로 알죠. 그 느낌은 쉽게 가질 수 있거나 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언니가 만나보라
고 할 때 혹시 진혁 씨가 아닐까 싶어서 나온 거였어요. 이제 그 2년 진혁 씨가 채워 주셔야
해요. 진혁 씨 잘못은 아니지만 책임은 지세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는 진혁에게 다영이 다짐하듯 말했다.
"언니에게 이야기 들으셨죠? 전 제 인연은 제가 선택해요. 이제 진혁 씨 도망가긴 늦었어요."
문득 다영에게 잡힌 팔이 행복해 한다는 것을 느끼며 진혁은 낙지골목으로 들어섰다.
내일은 지훈의 치료가 끝나는 날이었다. 지훈은 그동안 형진으로부터 뜸과 침을 병행한 시술
을 받으며 호흡법을 배웠다. 그 덕분인지 몸이 전과 다른 것을 느끼는 지훈이었다.
형진은 지훈에게 하영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바꾸게 했다. 하영의 마음 속에 지훈이 곁에 있
어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하영과 진혁은 진혁의 침대에서 포옹한 채 함께 누워 있었다.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침대에
누운 하영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배어 나와 침실을 가득 채웠다. 누운 채 자신을 마주보는
진혁의 볼을 쓰다듬으며 하영이 말했다.
"이렇게 누워서 당신 체온 느끼고 얼굴 들여다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당신과 사랑하
는 것도 마지막이고,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슬퍼요."
진혁은 단호하게 하영의 말을 부정했다.
"참을 뿐이지, 마지막은 아닙니다. 형수님도 약속을 지키세요. 마지막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
다고 했잖아요. 지켜보다 도저히 못 참으면 그때, 아무나 먼저 손 내밀고 다시 잡기로 해요."
진혁의 말에 하영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도련님. 잠시 쉬면서 지켜보는 걸로 해요. 그렇지만 다영이는 도련님을 송두리째 다
보듬어서 도련님이 제게 손 내밀 틈을 주지 않을 거에요.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구요.
이제 도련님을 몸으로 느낄 수는 없겠지만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당신의 연인이라
서 많이 포근했어요. 사랑해요. 당신.."
"못 참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세요. 다영 씨를 가슴 깊이 아끼고 위하겠다고 약속드릴게요.
그래도 형수님 영역은 늘 쉼표로 비어 있을 겁니다. 그것까지 나무라지는 마세요."
진혁의 볼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쓰다듬던 하영이 와락 당겨 안았다.
"마음은 그냥 흐르는 대로 두고 그 아이만 더 힘껏 사랑하세요. 도련님 사랑이 온전히 그 아이
에게 다 가면 저도 처형으로 지켜보며 행복할 거예요.
억지로 지우려 하지도 말고 억지로 지키려고도 하지 말기로 해요. 지금은 그냥 사랑하면서 까
무러치고 싶어요. 안아 주세요. 하아.."
진혁은 하영의 몸 위로 올라가서 솜털 하나까지도 가슴에 다 기억하려는 듯이 깊게 껴안았다.
황홀한 감촉한 달콤한 체온, 감미로운 숨결을 이제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다.
진혁과 하영은 서로의 옷을 하나씩 벗겨줄 때마다 드러나는 맨살을 안타까운 손길과 입술로
어루만지며 더듬었다. 먼저 알몸이 된 진혁이 하영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팬티를 벗기
며 말했다.
"이건 제가 가질게요. 저를 행복하게 해주셨던 형수님 숨결로 간직할게요."
하영이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이쁜 당신..그리운 내 남자..사랑해요..만질 수 없어도 하영이는 당신 사랑을 가슴에 다
기억할 거에요. 하아..여보 사랑해요..흐으응.."
진혁은 천천히 하영의 몸 위로 엎어지며 하영의 입술을 머금었다. 달콤한 입술이 머금고 있던
다디단 꽃물을 혀로 핥고 입술로 빨아 먹었다. 저릿한 쾌감과 황홀한 아픔이 진혁과 하영을
휘감았다. 하영이 진혁의 귀를 깨물며 속삭였다.
"흐으응..넣어 주세요. 천천히요..하영이 보지가 당신 사랑스런 자지를 다 기억할 수 있게 천
천히 넣어주세요..하아앙.."
자지를 움켜 쥔 보드라운 손이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보지로 이끌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보지의 입술이 자지를 포근하게 보듬고 쓰다듬었다. 묵직한 신음이 하영과 진혁의 입에서 동
시에 터져 나왔다.
"허억..형수님..보지가 자지를 물었어요..흐윽.."
"하아앙!! 가슴이 저려요..하아.."
자지를 물고 빨아들이려는 보지 속살의 황홀한 유혹에 저항하며 진혁은 맛있는 사탕을 아끼
며 녹여 먹듯 천천히 진입시켰다. 손톱만큼의 깊이로 밀어 넣을 때마다 하영의 입술과 귀와
목과 가슴을 핥고 빨았다. 보지가 숨기고 있던 혀가 자지를 비비고 빨며, 더 깊이 끌어 들이려
안타까운 몸부림을 치고 하영이 숨 가쁘게 할딱였다.
"흐으응..아아아..너무 좋아..어떡해..이런 느낌인 당신..하아..다 갖고 싶어..하아앙..영원히..
언제까지라도 다 갖고 싶어서 어떡해..하아앙.."
깊이 들어 갈수록 더 황홀하게 짓이기는 보지 속이었다. 진혁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야금야
금 보지를 채워갔다. 아늑하고 꿈결 같은 보지에 드러눕고 싶은 자지가 용틀임하며 아우성쳤
다. 그 자지 끝에 보지의 가장 깊은 안쪽 벽이 닿자 진혁은 한 번에 쑤셔박았다. 하영의 엉덩
이가 펄쩍 뛰어 오르며 자지를 뿌리째 꿀꺽 삼켰다.
"하아아악!!"
눈앞이 뿌예지는 쾌감에 몸을 떨며 진혁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지가 빠져 나
올 때는 보지의 속살이 훑고 빨고 비비며 따라 나와서 까뒤집혀 졌다가, 자지가 몸부림치며
들어가면 동그랗게 말린 채 밀려들어갔다. 꿈틀거리던 하영의 허리가 원을 그리며 돌고 엉덩
이와 보지가 따로 놀기 시작했다. 돌리고 들썩거리는 속도를 빨리하며 하영이 까무러쳤다.
"흐윽..하앙..여보..하아악..세게..더 빨리 해주세요..하영이 부숴주세요..아흐윽!! 흐응.."
부추김을 받은 자지가 속도를 높이며 보지를 짓이겨 대기 시작했다. 거칠어지는 자지를 부둥
켜안은 보지의 속살들이 앙갚음을 하듯 더 세게 빨고 핥으며 쓰다듬었다. 하영이 부르르 떨다
가 엉덩이를 치받아 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하악..이상해..어떡해..하아악!!"
하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짙어지더니 숨 막히게 황홀한 질감으로 진혁을 쓰다듬
고 보지의 벽이 녹아서 변한 설융이 자지를 포근하게 부둥켜안았다. 그 미칠 듯한 자극에 진
혁이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흐윽..형수님 보지가 허어억.."
"하아악..저도 느껴져요..보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더 세게 하악..여보 더 세게요..으응?"
더 빨리 보지를 쑤셔대는 자지의 움직임에 따라 하영의 허리가 그리는 동그라미들도 난해하
고 복잡해졌다. 궤적이 일정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물결처럼 출렁였다. 들썩거리는 엉덩이와 꿈틀거리는 보지, 휘돌아 가는 허리가 각자 다른 방
향으로 자지를 찧고 빻으며 갈아 대었다. 자지가 보지를 찧어대는 것이 아닌, 그 황홀한 보지
가 자지를 갈아대며 씹고 빨고 깨물고 짓이겨 대었다.
온몸이 갈아져 가루가 되는 듯한 쾌감이 자지와 보지에서 뭉텅뭉텅 피어오르며 진혁과 하영
을 깔아뭉개고 짓이겼다.
"여보..하아악!! 가요..하영이 보지 그 것..하아악..그것 싼다구요..하아악..엄마.."
진저리를 치는 하영의 보지 속에서 신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보지 가장 깊은 곳에서 보드랍
고 맑은 새 살이 밀려 나와 귀두를 덮었다.
"아아악!!"
"흐으억!! 형수님..허억.."
정사를 나눌 때마다 느끼면서도 그 때마다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잔인한 쾌감이었다. 진혁은 하
영을 으스러지게 껴안은 채 보지를 터뜨려 버릴 듯이 짓이겼다. 자지가 더 크게 부풀어 올라
보지를 비비며 쑤셔대는 자극에 하영은 오금이 저렸다. 보지의 벽이 뒤로 밀려나는 듯한 쾌감
에 자지러지며 하영이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하아악!! 그것..하아악..여보 그것..하아아아악!!"
하영의 비명과 함께 정상에서 돋아난 영롱한 돌기가 귀두를 어루만지기 시작하고 귀심이 볼
록 솟아오르며 정로와 맞붙어 버렸다.
"아아악!!!"
"흐으윽!!"
언제나 그렇듯 귀심을 정로에게 빼앗긴 진혁은 이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황홀함이 아득하게
머릿속을 휘젓는 가운데 미친 듯이 내달렸다. 제동장치가 끊어진 채 폭주하는 기관차였다.
거칠게 내닫으며 쑤셔대는 자극에 허우적거리던 하영은 보지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환상을 보았다.
"하아악!! 하영이 죽어요..아으윽!! 이대로 죽고 싶어요..아아아아..이대로 당신과 함께 죽고
싶어..흐응..여보 하영이 죽여 줘요..하아악..사랑해요..흐으윽..엄마!!"
그것은 하영의 환상이 아니었다. 하영의 보지 속은 끓는 가마솥이 되어 자지를 삶고 고아대었
다. 자지는 뜨거워서 더 크게 몸부림치며 그 가마솥을 휘저었다. 하영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며 커다란 오르가즘이 보지로 몰려 내려갔다. 하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아악..여보.하영이..가요..싼다구요..흐으으윽!!"
진혁의 몸에서도 황홀한 폭음이 영혼을 흔들었다. 폭주하는 기관차의 저만치 앞에 우람한 벽
이가로막았다. 재동장치가 고장 난 기관차는 미친 듯이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혁이 비명을
질렀다.
"흐으윽..형수님 저도..허억!!"
진혁과 하영은 서로를 향해 어머어마한 오르가즘을 쏟아 부었다.
"하아악!!! 엄마!!"
"흐으으윽!!"
그것은 파정이 아닌 마른 오르가즘이었다. 안으로 쏟아지며 몸을 터뜨릴 듯 더 크게 부풀어
오르는 공극의 시작이었다. 하영의 몸도 주인의 의지를 벗어나 고삐 풀린 광마처럼 멋대로 질
주하기 시작했다. 그 질주는 두 사람을 까마득한 허공으로 치솟게 했다.
"어떡해..하아악..어쩜 좋아..하아악..여보 또..하영이 또..하악.."
미친 듯 질주하던 말이 폭주하는 기관차의 정면으로 달려와서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되어 허
공으로 흩어졌다.
"하아악!! 여보 또 싸요..흐으윽!!"
"허억!! 형수님 저도..으윽."
폭주하던 기관차는 하영을 짓이기며 그대로 달렸다. 저만치 커다란 벽이 기관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 간 기관차가 벽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진혁과 하영은 서로를 으
깰 듯이 부둥켜안으며 진저리쳤다.
"아아악!! 난 몰라..하아악..여보..또 하아악!!"
"으으윽!!"
벽을 부셔버린 기관차는 속도를 더하며 더 거칠게 내달렸다. 나타나는 벽을 부수고 산을 허물
어뜨리고 강을 쪼개며 달렸다. 하영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자지러졌다.
"하아아악!! 어떡해..아아악!! 여보..진혁 씨..하아악..또..또 싸요.."
몇 번을 싸고 몇 번이나 까무러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서로의 몸을 느끼며 사랑하는
것의 마침표를 찍지 않으려는 듯, 명기의 보지가 자지를 물고 빨고 핥으며 방점을 찍어 주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한 황홀함이었다. 거대한 바위에 깔려 짓이겨지고 분쇄기에 넣어져 가루
가 되는 듯한 잔인한 쾌감이었다.
그 오르가즘은 진혁과 하영의 몸을 터뜨려버릴 듯이 채운 채 압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고 큰 극치감에 넋이 나간 하영이 진혁의 어깨를 깨물었다.
"흐으윽..놔줘..나쁜 놈아..하아악!! 하영이..하영이 살려줘..하아악!! 여보 하영이..흐으으윽..
하영이 죽을 것 같아요..여보..하아악..살려줘..나쁜 놈아..하아악!!"
넋이 나가버린 하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 어여쁜 입으로 진혁에게 나쁜
놈이라는 말까지 뱉어내며 할딱거렸다. 바라보기만 해도 저리게 하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나
쁜 놈이라는 말이 진혁의 쾌감에 휘발유를 들이부었다. 확 치솟은 불길이 진혁을 태우기 시작
하고 하영의 비명이 높아졌다.
"아아악!! 여보..여보..하아악..저기..하아윽!! 끝이..하아악..흐으아앙!! 엄마!!"
진혁도 공극의 끝을 보고 있었다. 깎아지른 바위산이 기관차를 가로 막고 있었다. 기관차는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그 바위산과 부딪쳤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응축된 오르가즘이 폭발
하며 자지와 보지로 몰려갔다. 그 장엄한 오르가즘을 온몸으로 느끼며, 진혁과 하영은 움직임
을 멈추고 부둥켜안은 채 두려움에 떨었다.
"아아아아악!!"
"흐으으윽!!"
자지와 보지를 터뜨린 오르가즘이 서로에게 쏘아졌다. 자지와 보지에서 쏟아지며 서로를 때
리는 오르가즘은 잘게 분해되어 단단하게 응축된 덩어리였다. 구슬처럼 잘고 단단한 오르가
즘 덩어리에 보지 깊은 곳을 수 없이 얻어맞으며 하영이 자지러졌다.
"아아아악!! 엄마!!"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절벽을 꿰뚫은 기관차의 앞에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폭주하던 기관차가 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렸다.
"하아아악!! 이게 뭐야..아아악!!"
"흐으윽!!"
그 낭떠러지는 끝이 없었다. 쏟아내면 그만큼 다시 채워져 서로에게 쏘아지는 지극이었다.
공극의 끝에서 만난 지극이었다. 찬란한 파정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며 보지를 때리자 부들부
들 떨던 하영이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버렸다. 기절한 하영의 보지에 박힌 자지는 여전히 오
르가즘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죽음 같은 쾌감의 끝에서 떨던 진혁도 마지막 한 방울을 쏟아
내고는 하영에게 엎어지며 정신을 잃어 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하영과 진혁이 동시에 눈을 떴다. 원도 한도 없는 정사였다. 미련과 안타
까움과 아쉬움까지 불태운, 장렬한 마침표였다. 서로를 어루만지며 마주보는 진혁과 하영의
눈에 그리움은 여전하였지만, 그것은 아픔이 아닌 편안함이었다.
하영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던 진혁의 가슴을 다영은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다영은 하영보
다도 더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진혁의 마음을 흔들어 자신만의 영토로 만들었다.
하영을 가슴에 담은 채 타인으로 바라보았을 때도 다영에게서 아찔함을 느꼈던 진혁이었다.
자신의 인연이 된 다영과 정면으로 대하게 되자 속수무책으로 다영에게 무너져 내렸다. 걷잡
을 수 없이 빠져드는 속도를 조절하기엔, 다영은 너무 벅찬 상태였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영혼을 가진 다영은 향기로우면서 맑고 청초했으며, 저항할 엄두도 못 낼
만큼 아름답고 섬세했다.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당차고 세심한 다영이었다.
세 번째 만나던 날 자신의 아파트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전화를 받고 돌아온 진혁은 다영
의 뒷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아야 했다. 다영이 옷장을 열어서 옷마다 하나씩 들여다보며 뭔가
를 적고 있었던 것이었다. 궁금해진 진혁이 그 향기로운 어깨너머로 훔쳐보아도 뭘 적는지 통
알 수 없었다. 눈으로 묻는 진혁에게 다영이 꽃처럼 선연한 눈에 웃음을 머금은 채 딱 잘라 말
했다.
"비밀이에요.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비밀이라구요."
그리고 네 번째 만나던 날 다영은 진혁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내 남자는 내가 먼저 챙길 거예요. 진혁 씨가 어떤 손도 타지 못하게 관리할 거야."
다영이 말한 그 관리는 진혁의 가슴을 흠뻑 적셔버릴 만큼 곱고 예쁜 것이었다. 그 주말에 진
혁은 다영과 함께 수안보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수안보의 호텔에서 열리는 보안관련 세미나에서 주제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시간이 빈
다영과 여행을 겸하여 같이 내려가게 된 것이었다.
첫 휴가 때 이후 처음으로 진혁과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을 즐거워 하는 다영을 보며 진혁도 덩
달아 마음이 유쾌했다.
버스가 목적지에 거의 닿을 무렵 입성을 살펴 본 진혁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양복의 앞
단추가 어디에선가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전문가들 앞에서 흐트러진 입성으로 나서야 할 처
지였다.
"빠트리고 온 거라도 있어요?"
다영이 걱정스럽게 묻다가 양복의 단추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더니 예의 여우같은 표정으로
진혁의 윗도리를 벗기며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앙증맞은 주머니에는 갖은 모양의 단추와 여러 가지 색상의 실이 들어
있었다. 진혁은 그 단추와 실, 그리고 얼마 전 다영이 자신의 옷장에서 뭔가 꼼꼼하게 적던 것
을 순간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그 안의 단추와 실들이 자신의 옷에 맞춘 것을 안 진혁은 감
동으로 가슴이 더워졌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원래 양복에 붙어있던 것과 같은 단추를 달아서 입혀주는 다영이 너무 사
랑스러워서 깨물어 주고 싶었다.
세미나가 끝난 뒤 만찬장에서도 다영은 진혁을 놀라게 했다. 진혁의 곁에서, 인사를 나눈 사
람들을 전부 몰래 메모하며 기억하였다가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영은 인사를 나누
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진혁의 약혼자로 소개하여 진혁의 가슴을 뛰놀게 했다.
다영은 진혁의 습관까지 짧은 시간에 파악했다. 웃을 때 머리를 쓸어 넘긴다든가 식사할 때
당근을 싫어하는 것을 비롯하여 즐겨 마시는 차와 술의 종류, 좋아하는 색과 음악 등 진혁에
관한 것들을 전부 읽어버렸다.
그러면서도 다영은 진혁의 앞에 나서지 않고 곁에서 향기로운 숨결로 지켜보며 표시 나지 않
게 챙겨주기만 했다. 그것은 구속이 아닌 달콤하고 우아한 배려였으며, 내조의 모습이었다.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진혁을 반짝이게 하는 다영에게 안 빠져든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이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여인, 다영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영에 대한 안타까운 그리움과는 별개로 진혁의 마음은 다영에게로 열리고 있었다.
숨겨야 하는 사랑에 아파했던 진혁은, 마음껏 드러내놓고 어디든 같이 다닐 수 있으며, 미래
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다영과의 인연이 점점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구와 공유하지 않아도 되
는, 온전히 자신만의 사람이며 사랑이라는 것이 그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것이기를 거부한 채 다영에게 달려가 있는 것을 보면서도 진혁은 아직
다영에게 마음을 다 내보이지 못한 상태였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
가 먼저 고백하지 않았기에, 가슴으로만 느끼던 관계는 우연한 계기로 공식적인 것이 되었다.
며칠 무리를 한 탓에 진혁은 몸살을 크게 앓았다. 아침에 일어난 진혁은 심한 열로 정신이 혼
미했다. 겨우 계일에게 전화를 걸어 몸이 불편하여 출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는 다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의사가 다녀간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진혁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는 일로 인해 누적
된 과로가 원인이라며,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곧 깨어날 테니 걱정 말고 찬 수건으로 열을 내
려 주라고 했었다. 다영은 얼음을 감싼 수건으로 진혁의 벗은 상체를 닦아주며 애처로움을 담
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쉬어 가면서 일하지, 왜 그렇게 몸을 괴롭혀요? 당신이 철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진혁의 이마를 짚어주며 하영이 혼자 안타깝게 되뇌었다.
사무실로 전화하였다가 계일로부터 앓아누웠다는 말을 듣고, 하영에게서 열쇠를 건네받아 곧
장 달려 온 다영이었다. 얼른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정성이 깃든 손길로 진혁의 몸을 닦아 주
고 있었다. 진혁에 대한 연민과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다
영은 아파트 문이 열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영이 방문 앞에 다가와 서있는 것도 모른 채, 다영의 신경은 전부 진혁에게 향하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하영이 미소를 머금었다. 얼음수건으로 진혁의 몸을 닦아주는 다영의 모습
이 따스하고 아름다운 그림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지켜보던 하영은 다영이 눈치채지 않게 조
용히 문을 닫아주고 돌아서 나왔다. 다영이 앉은 자리에 자신이 앉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하영은 아리지 않았다. 진혁의 상태는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밤이 깊을 무렵에야 진혁이 눈을 떴다. 그때까지 지켜보던 다영이 와락 달려들어 진혁을 껴안
았다. 진혁은 놀란 와중에도 다영을 마주 안아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영이 진혁의 가슴에 얼
굴을 비비며 울음을 터뜨렸다.
"흑..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한 번 만 더 아프기만 해봐요. 가만 안 둘 거야. 다영이도 아픈
약 먹고 옆에 드러누워 버릴 거라구요.허락없이는 아프지 않겠다고 얼른 약속해요."
바라보기만 해도 혼곤해지던 여인이 품에 안겨서 들려주는 그 촉촉한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민 진혁은 더 세게 안으며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럴게요. 다영 씨 허락 받지 않고는 아프지 않을게요. 약속할 테니 이제 그만 울어요.
이러다간 집 떠내려가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은 다영을 안아 일으켜 침대에 뉘고 팔베개를 해주었다. 팔을 베고 안
긴 다영의 몸에서 저릴 만큼 황홀한 향기가 배어 나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하영에게서 느껴
지던 신비한 향기였지만 그 색깔은 달랐다. 하영이 황홀하고 아늑한 향기였다면, 다영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화사함과 청초함을 보태고 질감이 더 뚜렷한 향기였다.
그 향기에 아찔해지고 소름이 돋는 진혁의 볼에 아련한 감촉이 와 닿았다. 다영의 입술이었
다. 놀라서 쳐다보는 진혁을 맑고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다영이 녹일 듯이 고운 여운으로 속
삭였다.
"사랑해요. 진혁 씨"
그 말 한 마디만으로도 진혁은 아득해졌다. 그 떨리는 의미와 목소리에 사정할 것 같은 극치
감마저 느끼며 몸을 떨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진혁은 다영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마음도 들려주었다.
"다영 씨, 사랑합니다."
다영이 진혁을 와락 당겨 안았다. 이어 꽃잎보다 여리고 보드라운 그 입술이 진혁의 입술에
부딪쳐 왔다. 벼락에 꿰뚫린 듯 엄청난 황홀함이 순식간에 진혁을 덮쳤다. 단지 그 어여쁜 입
술과 키스할 뿐인데도 그런 느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쾌감이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다영
의 향기가 어느 순간 공감각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질감과 색체가 뚜렷한 그 향기는 하
영에게서 느꼈던 것보다 더 짙고 더 두터웠으며, 더 화사했다. 진혁은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
서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영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도 다영의 향기에 온몸이
어루만져지는 것을 경험했던 진혁이었다. 하영과 자매라는 것을 알고 난 지금, 진혁은 그 향
기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형진에게서 들어, 진혁은 명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었다. 고사의 견식에 있어서는 오히려
형진을 앞서는 진혁은 교국로의 두 딸인 소교와 대교 및 원희의 처였던 견씨 자매 등에 대한
정사와 야사를 알고 있었다. 진혁의 비범한 추론은 그것을 통하여, 자매 중 한 사람이 명기체
일 경우 나머지 한 사람도 명기체일 가능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다영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기체의 그것이었다. 다영의 모든 면과
하영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진혁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다영이라는 사람 그대로가 중요했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입술로 진혁의 넋을 빼앗아 버린 다영이 입술을 떼더니 말했다.
"전 당신께 솜털 하나까지도 부끄럼 없이 투명하게 내보일 수 있어요.
부모님이 물려주신 그대로인 순결한 몸과 누구도 담아 본 적 없고 미워하지 않은 마음 그대로
당신 앞에 있어요."
꿈꾸듯이 속삭이는 다영의 말을 진혁은 듣고만 있었다.
"그렇지만 진혁 씨에게는 그걸 바라지 않아요. 저를 만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지 상관 안
해요. 당신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제게도 소중한 거니까, 저 때문에 버리지 말고 지켜 나가세
요. 제가 택한 당신은 절 사랑하면서도 가치 있는 것을 지킬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걸 알아요."
진혁은 다영을 경이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 들려주는 말, 행동, 어느 것 하나 감
동이 아닌 게 없는 여인이었다. 하영과 현주가 다영만 만나면 모든 상황이 정리된다고 확신하
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진혁 씨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연들을 다 만나보고 싶어요."
진혁의 품에 안겨 가슴을 어루만지고 볼을 쓰다듬던 다영이 잠들기 전에 한 말이었다. 그렇게
다영을 안은 채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찌개냄
새가 침실까지 풍겨왔다. 먼저 일어난 다영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혁은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혁은 그 날 다영과 함께 회사로 출근하여, 계일을 비롯하여 가족 같은 직원들에게 자신의
입으로 다영을 약혼녀라고 소개하였다. 직원들은 환호와 함께 열렬한 박수로 다영을 반겼다.
다영은 순식간에 모든 직원을 휘어잡아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렸다.
진혁이 다영에게 두 번째로 만나게 한 사람은 꽃가게의 지현이었다. 얼마 전 비워진 독에 새
로운 인연을 먼저 담은 사람이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현은 진혁과 함께
들어 선 다영을 진심이 담긴 환대로 따뜻하게 맞았다.
토요일 늦은 오후, 진혁의 집 거실에 아름다운 세 여인이 진혁을 가운데 두고 모여 있었다. 하
영자매와 현주였다. 현주와 하영조차도 다영에게 꼼짝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지켜보며, 진혁
은 여자들에게 들키지 않게 혼자 웃었다.
하영이 가지고 있던 진혁의 아파트 열쇠를 다영에게 넘겼다는 것을 들은 현주도 어쩔 수 없이
열쇠를 꺼내 다영에게 자진 납부했다.
"그래, 이 지지배야. 혁이는 이제 네 물건이니깐 네가 실컷 챙겨."
열쇠를 빼앗기는 게 아무래도 억울한지 현주가 입을 삐죽이며 덧붙였다.
"억울해. 어릴 때 내 신랑이었으니 내게도 혁이에 대한 지분이 있어."
이야기를 훔쳐 듣던 진혁은 현주의 말에 기가 막혔다. 자신이 여자들에 의해, 뭔 주식처럼 지
분으로 나눠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영은 인심을 쓰듯 말했다.
"좋아. 인정해줄게. 현주언니에겐 포옹까지는 허락할게."
현주가 아쉽다는 듯 간청했다.
"입술까지는 어떻게 안 될까? 엄마나 이모가 보는 데서도 내 것처럼 가져갔었는데 좀 봐줘."
그런 현주의 말을 다영은 한마디로 깔아 뭉개버렸다.
"언니 미쳤어? 그건 절대 안 돼. 언니 같으면 허락할 수 있겠어?"
명쾌하게 한마디로 잘라버리는 다영 앞에서 현주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다영이 이번
에는 하영에게 말했다.
"음..언니도 포옹까지 만이야. 형수로 시동생 안는 건 안 돼. 처형으로 제부 안는 것만이야."
하영은 미소를 머금었지만, 현주가 아무래도 억울한지 다영에게 따졌다.
"얄미운 지지배야. 여태까지 나랑 언니가 혁이 돌봐 왔는데 네가 전부 다 가져버리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다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주와 하영에게 허리를 숙여 깍듯이 인사하며, 정중하
고 나붓하게 말했다.
"우리 진혁 씨 돌봐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살아가면서 보답하겠습니다."
하영과 현주가 동시에 두 팔을 들었다가 떨어뜨리며 항복했다.
"졌다."
처음부터 다영에게 이길 의지도, 이길 수도 없는 현주와 하영이었다. 현주와 하영 두 사람 다
다영과 진혁의 마음이 하나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아름다운
세 여인이 정겹게 다투는 모습을 보며 진혁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화창한 오후였다. 외출하여 일을 끝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가는 진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
를 받자마자 떨리는 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창한 오후였다. 외출하여 일을 끝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가는 진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
를 받자마자 떨리는 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저 임신했대요. 삼 개월째래요. 제일 먼저 도련님께 알려 드리는 거예요."
하영은 행복한 듯 했다. 하영의 행복은 진혁에게 기쁨이 되었다. 자신이 사랑했고 지금도 마
음으로 그리워하는 여인이, 자신의 아이가 아닌 형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들으면서도 기뻤
다. 그 사랑하는 여인이 이어준 다영이라는 향기로운 사람이 있기에 아프지도 않았다.
"잘 되었네요. 형수님이 행복해 하시니 저도 정말 기뻐요."
"도련님 사랑이 제게 준 귀한 선물이에요. 고마워요."
형진의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지훈은 새로운 모습을 내보이며 하영을 놀라게 했었다. 하영이
자신의 메달을 맡길 수 밖에 없게 했던,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우러난 지훈의 사랑을 받으며 하영의 마음도 차츰 연애시절로 돌아가게 되었
다. 그 변화는 하영의 몸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고, 형진의 독특한 시술과 합쳐져 임
신이 되었던 것이었다.
진혁이 아파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을 느끼며 하영의 행복은 배가 되었다. 포만감을 느낄 만큼
자신을 사랑해준 진혁이었다. 이제 그 진혁의 사랑을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소중하게 간직하
고, 진혁이 원하는 대로 지훈과 아기에게 충실하겠다고 하영은 다짐했다.
손이 귀한 집안이라 하영의 임신소식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늘 걱정하던 어머니와 아
버지도 진혁을 볼겸 서둘러 올라오고 현주와 매형까지 들이닥치자 이모 댁이 왁자해졌다. 그
가운데 하영은 얼굴을 붉힌 채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기쁨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집안이 들썩거리는 중에 진혁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현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 진혁은 잠
시 후에 돌아왔다. 진혁이 자리에 다시 앉은 뒤, 따라 들어 온 현주가 손바닥을 탁탁 치며 '여
러분!'하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 소개시켜 드려야 할 사람이 있어요."
이야기를 멈춘 모두의 시선이 자신만을 향하고 있자 현주가 배시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좀 길게 소개해드려야 해요.
소개할 사람은 제겐 작은 올케가 되고, 이이에게 처남댁이 되고, 언니에겐 동서가 되는 사람
이며, 오빠에겐 제수씨가 될 사람이에요.
엄마 아버지껜 질부가 되고 우리 이모, 이모부껜 며느리가 되는 사람이에요."
긴 소개가 끝났는데도 지훈과 하영, 진혁을 제외한 가족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눈으로 현주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현주가 문을 열자 다영이 문 앞에 서 있
었다. 가족들의 입이 쩍 벌어지는 가운데 사돈처녀를 알아 본 이모와 이모부가 자리에서 반갑
게 일어났다. 현주의 말이 이어졌다.
"소개할게요. 혁이 색시가 될 사람이에요."
현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족들이 환성을 터뜨리며 박수를 치고 다영과 진혁의 얼굴이 발
갛게 물들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영이 어머니와 아버지, 이모와 이모부께 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너
무 좋아 입이 귀에 걸리고 근엄한 아버지마저도 흡족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른들에 대한 인사를 지켜보던 현주가 다시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아직 소개가 끝난 게 아녜요.
새 올케는 우리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안겨 준, 예쁜 헌 올케의 친동생이에요."
현주의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 매형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영만 보면 어쩔 줄 모르고 예뻐하
며 탐을 내던 어머니였다. 며느리 될 사람이 그 질부의 동생이라는 것을 안 어머니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다영의 곁으로 옮겨 앉아 어깨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이렇게 고운 처자가 내 며느리라니, 너무 좋아서 정신 줄 놓을 것 같네.
더구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질부의 동생이라니......"
그런 어머니마저도 다영은 한순간에 꼴깍 삼켜버렸다. 다영이 웃음을 띤 채 다소곳이 말했다.
"예쁜 딸로 효도하겠습니다. 많이 예뻐해 주세요. 어머님."
너무 좋아서 뒤로 꼬로록 넘어가는 어머니였다. 지훈이 황급히 그 등을 받쳐주었다.
따로 상견례가 필요 없는 만남이었다. 다영의 보호자는 지훈과 하영이었으며,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진혁의 가족이었다. 다영이 진혁보다 한 살 더 많고 양친이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
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영의 임신과 다영의 등장으로 집안이 들썩거리는 거리는 가운데
아버지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이모부를 쳐다보았다.
"이질부였는데, 지금은 사하생(査下生)이니 호칭에 대해서 형님께서 정리를 좀 해주시죠."
이모부로서도 금방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다. 한참 고민하던 이모부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시대가 변한 만큼 너무 계촌에 얽매이지 말고 친숙한 예전 호칭으로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우리 며느리를 사하생으로 대하고, 우리집 애가 제 처를 사형으로 불러야 한다면 서로
어색하고 불편해질 테니 말야."
모두 동의하며 그렇게 굳어지려는 것을 제지하며, 이모부는 하영의 의견을 물었다. 아무리 며
느리지만, 새 식구를 맞아들이려는 마당에 자칫 결례를 할 수 있어서였다.
"아버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버님과 이모부님께 사돈어른이라고 여쭙
는 건 말이 안되니까, 어른들께서는 전처럼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끼리는 서로 더 가깝
게 느껴지는 호칭으로 부르는 게 어떨지요?"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지훈이 과장되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흠, 그럼 나는 처제를 제수씨라고 불러야 하나, 부르던 대로 처제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래도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이모부가 명쾌하게 관계를 정리해주려고 작정한 듯 했다.
"나와 집사람은 간단하겠어. 며느리는 전처럼 부르고 새 질부는 질부로 부르면 되니까.
동서와 처제도 우리 아기에겐 전처럼 질부로 부르고, 새 질부는 며느리로 부르면 되겠지.
김서방은 처남의 댁이, 김실이는 올케가 새로 들어온 것이니 고민할 것 하나도 없어."
거기까지는 정리가 그럭저럭 잘 되더니, 지훈과 다영의 관계에서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처제이면서도 제수이기 때문이었다.
진혁과 하영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형수로 불러왔지만, 처형이라는 호칭을 버릴 수 없었다.
동서지간이지만 친자매인, 다영과 하영의 관계도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도대체가 원칙을 정
하기가 어려운 관계였다. 현주가 진혁을 보며 불쑥 말했다.
"혁이가 정리해봐."
"내가 뭘.." 하며 뒤로 빼던 진혁은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더 사릴 수 없어 입을 열었다.
"막내인 제가 정리할 게 아니라 어른들께서 알려주셔야 할 문제인데, 하라시니 해볼게요.
이모와 이모부, 어머니와 아버지, 누나와 매형은 이모부께서 정리하신 대로 하면 되겠죠?"
모두 그렇다고 동의하자 진혁은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저와 이 사람, 형수와 형, 네 사람의 교차관계인데 명쾌한 기준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다영은 진혁이 자신을 이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말에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마치 진혁의 아내로 거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마음이 더 아늑해졌다. 진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친가에서는 친가의 계촌, 처가에서는 처가의 계촌을 따르면 쉽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처가의 어른들이 안 계시기 때문에 친가와 처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없다는 거에요."
진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족들을 둘러 본 뒤에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형집에 가도 처형이 있기 때문에 처가가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형이 우리 집에 오면,
동생집에 온 거면서도 처제가 있어서 처가이기도 하니 기준이 없는 거죠."
그 말에 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난마를 쾌도로 잘라버리는 진혁을 보던
다영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그럼 네 사람의 교차관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 해볼게요.
먼저 저와 형수의 관계입니다. 일단 저는 형수나 처형, 둘 다 정감있고 좋습니다. 어른들이 계
실 때는 형수로 부르고, 처형이라는 호칭은 세 가지 상황에서만 쓰겠습니다."
진혁의 말하는 세 가지 상황이란, 자신과 하영자매가 있는 경우, 넷이 함께 있는 경우, 처가의
친인척들을 만날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영이 흔쾌히 동의하여 거기까지도 깨끗이 정리되었다.
"다음은 형과 저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복잡합니다. 사촌형과 친동서의 관계로 놓
고 보면 간단할 수도 있지만, 아시다시피 형과 저는 사촌이면서도 사촌이 아니니 문젭니다.
이건 멋있고 너그러운 우리 형이 많이 양보해야 정리가 됩니다."
그 말에 지훈이 양보할 게 있다면 기꺼이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저야 양쪽으로 다 아우이니 불편할 게 없습니다. 형이 양보해야 할 부분은, 어른들이 안 계시
는 가운데 우리 넷 중에 셋 이상 모였을 때만은 절 동서로 대하는 겁니다. 해라체가 아닌, 하
게체를 쓰며 형수와 이 사람에 대해서 배려하면 정리가 됩니다."
그러자 지훈이 그게 뭐 어렵겠느냐면서 웃더니 말했다.
"알았네, 동서. 이러면 되는 거지?"
진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마무리했다.
"형수와 이 사람은 형과 저의 상황에 따르면 정리가 될 것 같네요."
하영과 다영이 동의하자 복잡한 계촌관계는 그것으로 정리 되었다. 매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처남의 댁의 수태와 새 처남댁의 가족 입성, 복잡한 이중 계촌관계를 위하여 건배하죠."
매형의 말에 모두 웃으며 잔을 들었다.
하영의 수태에서, 계촌관계로 이어지던 화제는 이제 다영과 진혁의 결혼으로 흘러갔다. 아버
지가 씻어 놓은 과일처럼 반짝거리는 다영이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성례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누?"
다영이 얼굴을 붉히며 언니인 하영을 쳐다보았다. 하영이 곱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영
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날짜를 잡아주시면 저희들은 그 뜻을 받들겠습니다."
다영의 말에 어머니가 다시 넘어가며 빠른 시간 내에 치루자며 서둘렀다. 평소 차분하고 움직
임이 깊은 어머니였다. 그러던 어머니가 사랑스런 질부의 수태라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깨물
어주고 싶은 예비 며느리의 자태에 빠져 철부지 소녀처럼 덤벙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모
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처제가 얼른 손주를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보네..허허.."
그 말에 다영의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그런 다영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예뻐서 어쩔줄 몰라
하다가 덥썩 껴안고 볼을 비볐다.
"요렇게 이쁜 새 아기가 어디 있다가 이렇게 새록새록 나타났남, 그래.."
진혁과 다영의 결혼문제는 대략적인 시기를 봄으로 잡기로했다. 더 자세한 것은 하영과 이모
부, 아버지가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밤이 깊었다. 어머니와 이모가 눈짓을 주고 받더
니, 각자의 며느리인 다영과 하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모가 모두를 둘러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자매들끼리 잘 거니깐 아무도 끼어들 생각하지 마. 뒷 정리는 힘센 남자들 동
원해서 현주가 다 해."
마침 토요일이었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남자들은 그 자리를 정리하는 대신 더 뭉개며 술잔
을 비웠다. 유일한 여자로 남겨진 현주는 삼엄한 파수꾼인 다영의 눈으로부터 방치된 진혁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기회다 싶어 진혁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앉았다.
"여우같은 예비 올케가 없으니 혁이는 지금부터 내꺼야."
그것을 본 매형이 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보아 그 광경이 익숙한 가
족들은 그러려니 하며, 관심도 두지 않고 술만 마셨다.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 거실로 나온 사람은 다영은 거실의 광경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남자들이 서로 뒤엉킨 채 거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지는 다영은 자신도 이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남자들 틈에서
현주도 진혁의 팔을 밴 채 아기처럼 잠들어 있었다. 미소를 머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영
은 소리 나지 않게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이어 잠에서 깬 어머니가 다영이 보이지 않자 거실로 나왔다. 남자들이 깨지 않게 소리를 죽
인 채 설거지하는 다영을 본 어머니가 다가가서 거들었다. 설거지가 끝나자 어머니가 다영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겨주다가 깊숙이 껴안았다.
"이쁜 우리 아기..에미 앞에 와줘서 고마워.."
껴안은 채 등을 두들겨 주는 어머니의 품이 아늑하고 포근하여 다영은 눈물이 나려했다. 등을
토닥거려 주는 어머니를 마주 껴안으며 다영이 앙증맞게 말했다.
"어머님 품이 참 따뜻하고 포근해요. 자주 안아주세요."
그 말에 진탕된 어머니가 다영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언제든지 팔만 벌리렴. 에미 품은 늘 열려 있단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오던 하영이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아름답고 따
스하게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현주에게 팔을 빼앗긴 진혁도 아까부터 잠에서 깬 채 실눈을 뜨
고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영과 진혁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픔의 흔적이 사라진, 따
뜻하고 편안한 눈빛을 주고받다가 하영이 먼저 곱게 웃고 진혁도 눈으로 따라 웃었다.
이제 진혁과 하영의 마음속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은 쉼표로 굳어지고 있었다. 진혁의 곁에는
다영이 있었고 다영을 아프게 할 어떤 일이나 생각도 할 수 없게 된 진혁이었다.
하영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사랑을 되찾은 지훈의 온전한 아내로 돌아가 있었다. 진혁과의
사랑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채 태아를 생각하며, 좋은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영만 만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던, 현주와 하영의 확신이 확연히 이해되는 진혁
이었다.
"어머님 아버님 앞에서는 '이 사람' 이라고 했으면서, 좀 져줄 수 없으세요?
이렇게 고집부릴 땐 꼭 좁쌀영감님 같아. "
어머니와 아버지를 서울역까지 배웅하고 아파트로 돌아 온 진혁과 다영은, 진혁의 깍듯한 경
칭문제로 토닥거리는 중이었다. 공대하는 것이 거리감 느껴진다며, 말을 낮춰 달라는 부탁을
진혁이 들어주지 않자 다영이 토라진 것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진혁이었다. 후배인 계일을 제외한, 회사
의 직원들에게도 하대를 않고 있었다.
"다영 씨도 같이 낮추면 따라 할게요."
"전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그래요.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내 남자를 내가 먼저 존중하고 떠
받들고 싶어서예요. 제 꿈이었다구요."
"같은 이유로 저도 마찬가집니다."
진혁의 그 말에 다영은 정말 발끈한 듯 했다.
"어른들 계실 때는 이 사람이라고 말 해줬잖아요. 둘이 있을 땐 왜 못 그래요?"
진혁이 그건 어른들에 대한 당연한 예의라는 말에 다영이 작전을 바꿨다. 그 예쁜 눈 가득히
녹여버릴 듯한 웃음과 간절함을 함께 담은 채 여우로 변신했다.
"제발요..네? 당신께 응석도 부리고 매달려서 애교도 떨고 싶단 말예요. 응?"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예쁜 변신 앞에서 진혁은 이쯤이 물러설 때라는 걸 알았다.
그대로 계속 고집을 부렸다가는 "정진혁 이병, 차렷!" 하던 호통이 또 뒤따를 게 분명했다.
진혁은 다영의 고운 눈을 마주 들여다보았다. 빨려들 듯한 깊은 눈이었다.
"알았어. 다영아. 이러면 되는 거죠?"
다영이 아이처럼 좋아하다가 눈을 흘겼다.
"못됐어, 정말. 뒤에 건 빼고 다시 해주세요."
진혁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다영아, 사랑해."
"고마워요. ‘다영아’보다 영아가 더 다정하고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불러 주세요."
"알았어. 영아, 사랑해."
다영이 진혁을 껴안으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자지러질 것 같은 황홀함이 한순간에 진혁을 아
득하게 했다. 한참 입술을 비비고 혀로 어루만져서 진혁의 넋을 빼놓은 다영이 고개를 들고
꿈결처럼 속삭였다.
"사랑해요. 당신..이제부터 당신을 더 반짝이게 해드릴게요. 기대하세요."
하영과 현주가 갖고 있던 열쇠를 압수한 다영은 두 사람이 하던 역할을 혼자서도 너끈하고 향
기롭게 해치웠다. 진혁의 아파트는 더 아늑해진 채 더 반짝였다.
하영과 현주도 정성으로 진혁을 챙겼지만, 다영의 손길과 정성은 언니들과는 자세부터 다른
것이었다. 미래를 함께 할 약혼자에 대한 정성과 손길이었다.
부둥켜안은 채 잠들었다가 함께 아침을 맞는 날들이 늘었다. 다영을 안는 순간에 진혁은 그
저릿한 감촉과 체온에 몸을 떨고 달콤한 숨결에 허우적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우릿한 황홀함
에 빠져 더 나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거기에 감미로운 다영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내려앉으면 넋이 나가버리는 진혁이기에 아직
그 이상의 선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다영의 눈부신 여체에 감춰진 비밀을 짐작하므로 진혁
이 두려워하는 것도 이유였지만, 아끼는 마음이 워낙 깊은 두 사람이어서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다영에 대한 사랑이 깊어 갈수록 진혁에겐 새로운 고민거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기처럼
맑은 다영의 눈을 마주 볼 때마다 이제는 쉼표가 된 하영과의 사랑이 걸렸던 것이었다. 자신
을 소년처럼 투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다영이기에 그 고민은 더욱 커졌다. 다영도 진혁의
표정에서 어떤 그늘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비가 내리는 주말 밤이었다. 진혁의 품에 안겨 사부작대던 다영이 진혁을 보며 물었다.
"영아에게 말하고 싶은 것 있어요?"
그 맑은 눈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영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 저랑 같이 의논해야 하는 거라면 지금 말하세요. 그게 아니고 지나간 비밀이라면 말
하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은 제게 말한 걸로 하고, 저는 들은 걸로 하고, 둘이서 같이 비운 걸
로 해요. 아셨죠?"
그런 다영을 보며 진혁은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담스런 다영이 품고 있는 마
음의 그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다영이 다짐하듯 말했다.
"대신 이 시간 이후부터는 제게 그 어떤 비밀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영아는 그거면 충분해요."
"응. 비밀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진혁은 다영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다짐했다. 그 다짐은 그 시간 이후부터 진혁의 신념
이 되었다. 그것은 다영이 바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하영이 더 바라고 있는 것이
기도 했으며 진혁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진혁 씨가 말한 이야기 속에 누군가가 있고 혹시 그 사람이 미워하던 사람이면 그
미움까지도 다 끝난 거예요. 맞죠?"
영롱하게 웃으며 껴안아 주는 다영의 품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그 품에서 아이처럼 잠든 진혁
은 맑은 아침에 깨었다. 다영의 햇살 같은 웃음이 지켜주는 그 아침에 진혁은 다시 환한 표정
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고민은 진혁이 자는 사이 다영이 가슴 깊이 품어서 다
녹여 없애버린 뒤였다.
다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진혁의 사무실에 들러 직원들과도 얼굴을 익히고 친하게 지냈다. 그
사이 늘어나서 쉰 명이 넘는 직원이었다. 다영은 짧은 시간에 이름과 직책, 하는 일 등을 전부
기억하여 진혁과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직원들의 생일까지 챙기며 마음이 담긴 글과 함께 정
성스런 선물을 하는 다영이 나타나면, 계일을 비롯한 직원들은 까무러치는 환성으로 반겼다.
다영에 대한 직원들의 호칭은 형수님이나 언니였다. 직원들이 형수님이나 언니로 부를 때마
다 다영은 진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동생이 하나도 없어서 아쉬웠는데, 여기 한 트럭 있었네요. 전부 어쩜 저렇게도 반짝거리
고 멋있는지 그득하고 든든한 느낌이에요. 당신, 우리 도련님들과 아가씨들께 더 잘하세요."
아직 결혼식 날짜도 잡지 않은 다영이었지만 도련님, 아가씨라는 말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가 없었다. 그 말에 꼬로록 넘어간 직원들은 자청하여 '다영교'의 광신도가 되었다. '형수님
교'이기도 한 그 사이비 종교의 교주는 회사 책임자인 계일이었다.
원래도 똘똘 뭉쳐 있던 직원들은 다영이라는 용액이 첨가되자 하나의 강철덩이로 굳어졌다.
다영은 세 사람만 있을 때는 계일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맏이라서 형수가 없는 계일은 다영
이 도련님이라고 불러 줄 때마다 입이 귀에 걸리며 좋아했다.
바쁜 일 때문에 토요일에도 단둘이 출근한 진혁과 계일은 둘이서 손발을 맞춰 예상보다 일찍
일을 끝냈다. 마무리까지 마친 진혁과 계일은 느긋한 마음으로 회사운영에 대한 이런저런 이
야기를 나누었다. 책임자인 계일의 일처리가 워낙 빈틈없고 진혁의 의중까지 읽으며 움직이
는 터여서 사실 오래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 남자 둘이 얼굴 맞대고 있는 게 무료하였든지 계
일이 TV를 켰다. 마침 휴먼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부모를 사고로 여읜 오누이가 3년간이나 자신들을 숨어서 돌보고 있는 독지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내용이었다. 그 독지가는 명절이나 생일뿐만 아니라 어린이 날, 소풍, 수학여행 등 부모
의 역할이 필요한 경우를 빠뜨리지 않고 챙겨주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부모처럼 꼼꼼하게 챙겨 보낸다는 것이었다. 소원을 묻는 리포터에게 오누이
가, 그 분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며 울먹이는 것으로 프로가 끝났다. TV를 끈 계일의
눈이 진혁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눈빛만으로도 통하
는 두 사람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회의 때 직원들 의향을 들어보고 결연 맺을 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 봐."
계일이 역시 우리 형님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웃더니 말했다.
"형님과 둘만 있는 시간도 드문데 모처럼 돼지껍데기에 소주라도 한 잔 하죠?"
둘만 있을 때는 형님이라고 부르는 계일이었다. 흔쾌히 동의하고 일어선 진혁이 퇴근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계일이 문을 열고 말했다.
"형수님께서 손님 모시고 오셨어요."
계일의 안내를 받으며 다영이 낯선 여인과 함께 들어섰다. 다영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며 진혁은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또 어떤 앙증맞은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 없어 각
오를 단단히 했다.
직원들이 없기에 직접 차를 준비해 주고, 나가려는 계일을 다영이 붙들어 앉혔다.
"도련님, 어디 가세요? 오늘의 주인공은 형이 아닌 도련님이세요."
진혁과 계일, 다영과 낯선 여인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다영과 함께 온 여인은 이
목구비가 또렷하면서도 온화하고 지적이면서도 여성스러운 인상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매우
선하고 고운 분위기였다. 진혁은 그 여인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하면서 누군
가를 닮은 듯도 했다. 다영과 그 여인은 그런 진혁의 표정을 살피다가 서로 눈을 부딪치며 작
게 웃었다. 다영이 계일에게 말했다.
"도련님, 형의 머릿속은 이 아름다운 여인이 누군지 유추하느라 바쁠 거에요. 지켜보자구요."
자신과 다영과 관계가 얽힌 여인이라는 것을 짐작했던 진혁에게 다영의 그 말은 결정적인 힌
트였다. 진혁이 웃음을 띠며 일어나서 낯선 여인에게 불쑥 악수를 청했다.
"우리 연대장님 잘 계시죠? 진영 씨."
진혁을 제외한 세 사람의 표정이 각자 달라졌다. 다영은 역시나 하며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고
그 여인은 기절할 듯 놀란 표정이었다. 두뇌회전이 진혁에 못지않은 계일은 잠시 어리둥절하
다가 다영의 의도를 읽어내고는 매무새를 고쳐 앉았다.
"형부, 처음 뵐게요. 진영이에요. 이렇게 멋진 분인 줄 알았더라면 아빠가 말씀하실 때 냉큼
만났을 텐데, 튕기다가 놓쳤으니 아까워서 어떡해."
그 말에 다영과 진혁이 웃음을 터뜨리고, 그때까지의 대화로 줄거리를 알아챈 계일도 웃었다.
"아버님께서 워낙 바른 분이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언니 만나지 못하고 진영씨에
게 코 꿰었을 겁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을 아버님으로 두셨습니다."
다영이 정식으로 계일과 진영을 인사시켰다. 두뇌가 비상하면서도 심지가 깊고, 부드러운 통
솔력을 가진 계일이었다. 거기에 가슴까지 따뜻한 계일을 보며 다영은 일찌감치, 진영과 연결
시켜 주기로 작정했었다.
마침 사무실 문을 닫고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계일과 진혁은, 비 오는 날이라서 순대가 제격
이라는 여인들에게 덜미를 잡혀 신림동으로 씩씩하게 끌려갔다.
진혁은 다영을 만난 이후 대구의 집에도 전보다 더 자주 다니러 갔다. 다니러 갔다기보다는
붙잡혀서 따라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님 품이 그립다고 보채며 떼쓰는 다영을 이길 방법
이 없었다. 떼쓰기 전에, 이른 바 '형수님교' 교주인 계일을 통하여 진혁의 일정을 꿰고 있는
다영이었다. 내려갈 때마다 외톨이가 되는 것에 질려,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계일에게
도움을 청해도 통하지 않았다.
"머리도 식힐 겸 다녀오세요. 저랑 직원들은 바빠야 신나는 사람들인데 무슨 걱정이세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붙잡아 달라는 진혁에게 오히려 등을 떠미는 계일이었다.
대구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혁은 버려진 인형처럼 외로웠다. 어머니의 눈에는 다영만
보이는 것이었다. 진혁을 혼자 떼어놓고, 다영과 손잡은 채 찜질방으로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자랑하느라 진혁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같은 남자인 아버지마저 외출이나 산책을 나갈 때
는 다영만 찾았다.
"아가, 애비 외출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다영이 냉큼 달려나와 팔짱을 끼면, 아버지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한 채 진
혁만 내버려 두고 대문을 나섰다. 덩그렇게 남겨진 진혁은 서럽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이
집에 다영은 친딸이며 자신은 얻어먹으러 온 천덕꾸러기처럼 느껴졌다.
늘 곁에서 지켜보며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진혁을 빛나게 하던 다영은, 대구에 내려가기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