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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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진짜 연인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연인이에요. 벌써 잊었어요?"

현숙한 주부였다가, 만지면 가루가 묻어날 것처럼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가, 개구쟁이 소녀의

모습으로 바뀌는 하영 앞에서 진혁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래도 진짜 연인이라는 말이 참 포근하게 와 닿았다.

하영이 낙엽을 톡톡 건드리며 발장난을 치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도련님,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요."

그 말에 진혁은 난감했다. 순간적인 위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있는 편이지만, 완성된 형태의

우스갯소리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하영이 아이처럼 재촉한다.

"얼른요."

마치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떼쓰는 꼬맹이처럼 조른다.

다행스럽게도, 형진에게서 들었던 해학 한 자락이 떠올랐다.

"아는 거라고는 딱 하나뿐인데 좀 야합니다."

"야해도 괜찮아요. 얼른 해주세요."

하영이 얼른 해달라며 재촉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

"사실은 그렇게 야하지도 않는 이야기에요. 음..어느 마을에 아들 내외와 노부부가 살고 있었

대요."

하영은 기대에 찬 눈으로 진혁을 보고 있다. 진혁은 하영의 눈을 보며 형진에게서 들었던 이

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아들 내외와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들 내외의 효성도 지극하였지만, 아들과 며느리를 아끼는 노부부의 자애로움도 그에 못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 내외는 노부모가 절대 손에 흙을 묻히지 못하게 하였다.

노부부가 일을 거들려고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질색을 했다. 자신들을 불효자식 만드

시는 거라며 펄펄 뛰며 삽이나 호미는 손도 못 대게 했다.

어느 더운 여름이었다.

며느리와 아들은 밭에 일하러 나가고 시어머니는 마실을 간 집에서, 시아버지가 한숨 늘어지

게 자고 일어났다.

점심때가 되었는지 마침 젊고 예쁜 며느리가 점심을 차리려고 집으로 왔다.

안 그래도 배가 출출하던 참이었다.

며느리는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시아버지는 대청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딱딱한 마루에

서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등이 가려웠다. 팔을 뒤로 돌려서 긁으려 했으나, 가려운 부분이 손

에 닿지 않아서 애만 타고 더 가려웠다.

마침 며느리가 상을 차려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밭일을 하다가 온 며느리의 발에는 흙이 잔뜩 묻은 상태였다. 대청에 상을 내려놓은 며느리에

게 시아버지가 말했다.

"아가, 등이 가려운데 팔이 닿지 않는구나. 좀 긁어주련?"

며느리는 얼른 "네"하고 대답하였다.

등을 긁어주려면 등 뒤로 가야 할 텐데 발에 흙이 잔뜩 묻어 있어서 대청에 오르기가 뭣했다.

그렇다고 연로한 시아버지를 일어나게 하는 건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로서 못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앞에서 등 너머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여기가 가려우세요? 아버님."

"으응..그래..그 아래..옳지..어이구 시원하다.

그 옆에도 긁어주련? 거기 말고 그 옆에..옳타구나."

시아버지는 대청에 걸터앉아 있고 며느리는 시아버지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등을 긁어 주는

자세였다. 그러다 보니 며느리의 뽀얀 가슴이 적삼 사이로 살며시 삐져나와 시아버지의 눈앞

에서 아른거렸다. 당연히 그 탐스럽고 어여쁜 젖꼭지도 고스란히 자태를 드러낸 채 시아버지

눈앞을 오락가락했다.

너무 예쁘고 탐스러웠다. 시아버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 예쁜 젖꼭지를 한입 머금고 말았

다. 시아버지는 음흉한 노인이 아니었다. 점잖고 행실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였던 만큼 음심이 있어서 머금은 게 아니었다. 며느리의 젖꼭지가 너무 탐스럽고 예뻐

서 자신도 모르게 머금어 버린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온 아들이 그것을 보고 말았다.

거기까지 말한 진혁이 하영을 보았다.

그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이야기 속으로 달푸당 뛰어든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되긴요. 아들이 길길이 뛰고 난리를 쳤죠. 그 효성 지극하던 아들이 아버지의 멱살을

틀어쥐고 소리쳤어요."

"어머나! 어떻게요?"

"'당신 말이야!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노망이 들어도 어쩜 그렇

게 추잡하게 들었느냐며 퍼부었어요."

"저런, 그래서요?"

동화를 듣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영이 너무 귀여웠다.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하영

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들에게 멱살까지 잡히고 온갖 모욕을 당하고 나서 기다시피 하여 사랑채로 도망온 아버지

는 기가 막혔어요. 하늘에 맹세코 엉큼한 마음을 품은 게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도 그 꼴을 보

이고 아들에게 그 꼴을 당했으니 아주 죽고 싶었어요."

"그랬겠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하도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곰방대를 물고 담배만 뻑뻑 피워댔어요. 그렇게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뭔지는 모르지만 무지 억울하게 느껴져서 곰곰이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아들

에게 갔어요."

"어머! 그러고는요?"

"가서는 아들을 보자마자 따귀를 벼락같이 올려붙였어요. 그러고 나서 아들의 멱살을 옭아 쥐

고는 집이 들썩거릴 만큼 큰 소리로 호통을 쳤어요."

이야기에 푸욱 빠진 하영은 어서 다음 이야기를 해달라고 눈으로 재촉한다.

"뭐라고 호통쳤을 것 같으세요?"

"글쎄요. 뭐라고 했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영의 모습이 너무 천진하고 사랑스럽다. 으스러지게

껴안은 채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음, 모르겠어요. 뭐라고 했어요?"

진혁은 일단 하영의 팔을 당겨서 단단히 붙들었다. 웃음이 많은 하영이기에 자칫 벤치에서 굴

러 떨어질지도 몰라서였다.

"따귀를 한 대 거하게 올려붙인 아버지가 이렇게 호통쳤어요.

'야! 이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아.

너는 내 마누라 젖꼭지 주구장창 빨아서 쭈구렁탱이 할마시 만들어 놓아도 내 아무 말 안 했

는데 그래, 이 치사한 놈아! 니 마누라 젖꼭지 딱 한 번 빨았기로 애비한테 노망들었다고 퍼붓

냐? 이 본때 없는 놈아!' 그랬대요."

하영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결국 폭포처럼 웃음이 쏟아진다.

"푸푸풉!! 호호홋!..아이..푸푸푸풉!!..호호호.."

허리를 잡고 웃어대는 하영의 등에 은행잎 하나가 내려와 얹히더니 같이 흔들린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싸아했다.

덕수궁을 한바퀴 돈 진혁과 하영은 청계천 쪽으로 걷고 있었다. 하영이 진혁의 어께를 때리며

말했다.

"아까 너무 웃었더니 배가 다 아파요."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거리엔 바람이 가장 바쁘다.

낙엽들에게 새로운 번지를 정해주느라 바쁜 바람은 하영의 고운 치맛자락과 부드러운 머릿결

도 간섭했다. 부드러운 치마가 나란히 걷는 진혁의 다리에 감기고 긴 머리가 흩날리며 진혁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하영의 향긋한 동체가 가을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런 하영을 보면서 설렘이 또 깊

어질 때 누군가가 진혁의 어깨를 툭 친다.

그리고 한 남자가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앞에 서 있었다.

"언제 귀국한 거야?"

그 얼굴을 확인한 진혁의 입에서도 반가운 탄성이 터졌다. 그가 악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이 진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케임브리지에서 7년이 넘게 진혁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형진이었다. 그렇잖아도 며칠 뒤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길에서 만나다

니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름 전쯤에 귀국했습니다. 안 그래도 형님 찾아 뵈려고 했는데......"

"인석아, 보름 전에 귀국해놓고 아직도 형한테 얼굴도 안 내비치냐?"

표정은 웃으면서도 서운하다는 듯 진혁의 어깨를 또 툭 친다. 다쳤던 어깨를 단련된 손에 맞

으니 우릿하게 통증이 온다. 아무래도 직업은 못 속이는지 형진은 진혁의 어깨가 불편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숫제 길에서 옷을 벗기고 확인할 것처럼 덤비다가 곁에 있는 하영을 보

고 멈추더니 넉살을 쏟아냈다.

"요 녀석 보게. 이런 미인과 데이트하느라고 형을 까맣게 잊고 있었군.

제수씨 되실 분이 워낙 참해서 봐준다."

그러더니 진혁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넙죽 하영에게 인사를 청했다.

"제수씨 되실 분 맞죠?

오형진입니다. 이 녀석은 하나 밖에 없는 제 동생입니다."

하영을 진혁의 약혼자 쯤으로 아예 단정을 지은 듯한 말투였다. 진혁이 끼어들 틈도 없이 하

영이 웃으면서 마주 인사했다.

"진하영입니다. 우리 진혁씨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영의 깨물어주고 싶은 재치는 이미 많이 경험하였지만, 자신을 우리 진혁씨로 부르는 게 너

무 기분이 좋았다.

허리를 굽혀 하영과 마주 인사하던 형진이 하영을 유심히 본다. 마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듯하다. 거침없는 넉살에 비해 워낙 속이 깊고 사리가 분명한 형진이었기에 그 모습

이 진혁에겐 낯설다.

형진의 얼굴에 놀란 빛이 서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진혁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형진은 이내 원래의 넉살 좋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쁜 제수씨 모시고 저녁이라도 같이해야 할 텐데 마침 세미나가 있는 날이라서, 정말 죄송

합니다. 며칠 내로 꼭 모시고 아주버니 노릇 제대로 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거침없는 넉살로 편안하게 해주는 형진의 말에 하영은 그저 예쁘게 웃기만 했다.

"너, 딴말하지 말고 이른 시간 내에 우리 병원에 들려라. 네 어깨도 봐야 할 것 같고 할 이야기

도 있으니까.

이 녀석이 잊고 있으면 제수씨께서 꼭 챙겨 보내세요."

다짐을 단단히 받은 형진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저만치 서서 기다리던 일행과

함께 멀어졌다. 형진이 안 보일 때까지 진혁은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형진과 하영이 주고받던 '제수씨'와 '우리 진혁씨'라는 말이 묵직한 여운으로 진혁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하영이 정말 자신의 약혼녀이거나 연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처연함

마저 느껴진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의 현재와 미래까지 다 던져서라도 하영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없기에 진혁은 가슴이 저렸다.

형진의 얼굴에 놀란 빛이 서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진혁은 놓치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형진은 이내 원래의 넉살 좋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쁜 제수씨 모시고 저녁이라도 같이해야 할 텐데 마침 세미나가 있는 날이라서, 정말 죄송

합니다. 며칠 내로 꼭 모시고 아주버니 노릇 제대로 하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거침없는 넉살로 편안하게 해주는 형진의 말에 하영은 그저 예쁘게 웃기만 했다.

"너, 딴말하지 말고 이른 시간 내에 우리 병원에 들려라. 네 어깨도 봐야 할 것 같고 할 이야기

도 있으니까.

이 녀석이 잊고 있으면 제수씨께서 꼭 챙겨 보내세요."

다짐을 단단히 받은 형진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저만치 서서 기다리던 일행과

함께 멀어졌다. 형진이 안 보일 때까지 진혁은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형진과 하영이 주고받던 '제수씨'와 '우리 진혁씨'라는 말이 묵직한 여운으로 진혁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하영이 정말 자신의 약혼녀이거나 연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처연함

마저 느껴진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의 현재와 미래까지 다 던져서라도 하영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없기에 진혁은 가슴이 저렸다.

하영은 진혁의 처연한 모습을 보면서 뭔가로 인해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 그늘을 걷어주고 싶었다. 하영은 짐짓

더 살가운 목소리로 진혁의 상념을 흔들어 깨웠다.

"도련님, 열 걸음 정도만 앞서 걸어 보세요."

진혁은 또 무슨 장난을 하려는 것 같은 하영의 표정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표

정을 보며 조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상념의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왜요? 전 형수님이랑 나란히 걷는 게 더 좋은데......"

"아이 참, 앞서 가보세요. 여태까지 도련님 뒷모습 못 봤잖아요."

"산에 올라갈 때 보셨는데요?"

"그땐 도련님 엉덩이만 봤어요."

시키는 대로 앞서 걸어가는 진혁의 뒷모습을 하영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도련님, 됐어요. 이제 이쪽으로 걸어와 보세요."

진혁은 빙그레 웃으며 돌아서서 하영을 향해 걸어왔다. 하영이 마주 걸어가서 진혁의 팔짱을

끼고 돌려세우며 말했다.

"도련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여요. 늦게 군대 가는 거랑 이것저것 생각이 많죠?"

"노총각이라서 그래요.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으면 앞모습은 또 어땠어요?"

하영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모습은 힘차고 당당해 보여서 좋았어요. 언제나 그렇게 어깨를 쭈욱 펴고 당당하게 걸으세

요. 그게 가장 도련님다운 모습 같아요."

하영이 말을 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수줍음을 타는 소녀처럼 발그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으로 저한테 걸어오시는 걸 보며 설렜어요."

그 말을 하는 하영의 목소리가 좀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을

할 때는 밝고 투명했는데 지금은 감미롭고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였다. 보드라운 질감이 묻어

나는, 화사하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진혁은 진하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수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목소리와 분위기와 표정이 단순히 다양하다고 표현할 성질이 아닌, 각자 다른 여러 사람을 보

는 듯했다.

고즈넉이 있으면 아름답고 현숙한 주부의 모습이었다가 장난을 할 때는 발랄하고 귀여운 소

녀가 되었다.

조용히 진혁 자신을 바라보는 하영의 모습은 포근하고 편안한 형수였다가도, 눈에 물기를 머

금고 자신을 바라볼 때는 아찔하게 빨려들 것 같은 매혹적이고 요염한 여인이 되었다.

스며드는 향기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조차도 딴 사람처럼 그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그것이 하영의 마음이나 기분의 어떤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

지만 그에 따라 진혁의 설렘도 각기 다른 색으로 출렁거렸다.

"도련님!!"

하영이 진혁의 팔을 흔들었다.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기느라 하영의 말을 못 들었나 보다.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진혁은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하영에게서 느꼈던 다양한 분위기들을 이야기했다.

"그렇구나. 형은 그런 말 안 했는데 도련님께만 그렇게 보이나 봐요.

우리가 연인이라서 그런가?"

거기까지 밝은 목소리로 말한 하영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교동에서부터 청계천을 따라 걸었는데 어느새 세운교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하영이 걸음을 멈추더니 진혁을 깊은 눈으로 쳐다본다.

"도련님 약속 하나 해줘요."

"어떤 약속요?"

"앞으로는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랑 의논하겠다고 약속하세요. 누구에게 말 못

할 못하는 고민이 있거나 의논할 상대가 필요할 때 형수부터 찾겠다고 약속하세요."

진혁의 목소리가 떨려나온다.

"형수님......"

너무 벅차고 떨려서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까 도련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어요. 도련님 혼자 먼 나라에서 넘치도록 외로

웠잖아요. 아직도 등과 어깨에 그 외로운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어서 약속해줘요.

혼자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형수를 먼저 떠올리며 형수를 찾겠다고 얼른 약속해요."

진혁은 하영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먹먹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득해질 만큼 아름다운 형수

의 마음이 저리도록 깊게 와 닿았다. 더워진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 오르려는 것을

겨우 억누르며 진혁은 힘있는 목소리로 약속했다.

"형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어떤 거라도 숨기지 않고 형수님께 다 말하고 의논하겠습니다.

그게 부끄러운 거라고 해도 다 말씀드리고 의논할게요."

하영이 흡족한 표정으로 등을 두드려 주면서도 다시 다짐을 받으려 했다.

"맘에 들어요. 그럼 새끼손가락 걸고 복사까지 해요."

진혁은 그 새하얀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언제나 형수님 편의 맨 앞에 있을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모습으로든 형수님 곁에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하영의 눈이 감동으로 젖어든다. 하영은 그 감동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더니 금세 개구쟁이로 변했다.

"형이랑 이혼해도 제 곁에 있을 거에요?"

깜짝 놀란 진혁이 아무 말도 못한 채 입만 쩍 벌렸다. 하영이 그 모습을 보며 까르르 웃더니

팔짱을 꼈다.

"농담이에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도련님 정말 아이 같아서 뭔 말을 못하

겠어."

하영은 청계 4가를 지나 새벽다리에 닿을 때까지 진혁이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았다.

화사한 모습으로, 매혹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귀여운 모습으로 현란하게 변신하며 아득하게

했다. 얼을 뺏었다가 돌려주었다가 다시 뺏어가는 하영으로 말미암아 진혁은 황홀하고 행복

한 바보가 되었다.

진혁과 하영은 청계 5가에서 청계천을 벗어나,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빠져 나간 채 하영에

게 휘둘리던 진혁의 얼이 그제야 주인에게 돌아온 듯했다.

하영은 진혁이 샤워를 끝내자마자 윗도리를 벗고 어제처럼 드러눕게 했다.

상처는 어제보다 더 부은 듯했다. 하영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많이 아프죠?

어제보다 더한 것 같아.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진혁이 괜찮다며 며칠 지나면 다 가라앉을 거라고 말했지만 하영은 여전히 눈물을 글썽인다.

하영과 같이 있으면서 행복한 바보가 되느라 통증을 느낄 겨를이 없던 진혁이었다.

부드럽게 마사지를 해주는 하영의 손길이 어제보다 더 깊게 느껴진다. 두근거림과 설렘도 더

커져서 하영의 손이 닿는 곳마다 세포가 황홀함으로 부르르 떤다. 사람의 손길이라고 믿기 어

려울 만큼 보드라운 손이 진혁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맨몸에 닿는 달착지근하고 감미로운 숨결만으로도 아득한데 하영은 진혁을 까무러치게 할 셈

인가 보다.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더니 얼음찜질을 한 가슴에 '후욱' 하고 입

김을 쏟는다. 그 황홀한 입김에 자지러질 것 같은 자극을 받은 진혁은 혀를 깨물고서야 겨우

신음을 숨길 수 있었다.

아득한 감촉에 까무러칠 것 같은 진혁의 사정도 모른 채 하영은 더 정성껏 다친 부위를 문지

르고 어루만져 준다. 그 포근한 정성에 자꾸 쾌감을 느끼는 게 형수에게 미안하여 진혁의 얼

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자꾸만 피가 아랫도리로 몰리는 것을 억누르려고 진혁은 이를 악물었

다. 가슴이 불타는 듯한 진혁에게 하영은 서러울 만큼 달콤한 말로 기름을 끼얹었다.

"우리 도련님은 너무 멋져."

매혹적인 얼굴을 마주 보는 게 두려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보니 하영의 눈이 진혁을 깊게

내려다보고 있다. 진혁에겐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하영의 손길과 숨결과 짙어지는 향기로도 미칠 지경인데 아름다운 눈이 자신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고문이었다. 이젠 눈을 감으면 더 부끄러워질 것 같아서 눈감을 수도 없었다.

파닥거리며 쩔쩔매는 진혁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하영은 더 섬세해진 손길로 정

성을 다해 어루만진다. 사랑과 정성을 담뿍 담은 아름다운 눈과 얼굴은 더 고혹적으로 빛나는

듯했다.

진혁은 쾌감에 허덕이는 모습으로 형수를 무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야

했다. 뒤가 마려운 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진혁의 모습이 하영에겐 더 풋풋하고 사랑

스러웠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이끌려 하영은 진혁을 어제처럼 깊숙하게 안아주었다.

"예쁜 우리 도련님."

그 녹아날 듯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하영의 볼이 가슴에 닿자 진혁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

었다.

하영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거실을 자욱하게 채웠다. 숨을 들여 쉬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질 것

처럼 황홀한 향기였다.

파닥거리던 진혁은 순간 놀라운 느낌이 들었다. 놀랍다기보다는 신비한 느낌이었다.

황홀하고 고혹적이던 향기가 포근하고 아늑하게 바뀌고 있었다. 분명 좀 전과는 다른 향기였

다. 아득한 쾌감으로 괴로웠던 가슴이 편안해졌다. 하영의 품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조금

전과 같지만 아찔한 색이 빠진 포근함과 편안함이었다.

숨쉬기도 한결 나아졌다. 그래도 눈물이 날만큼의 아늑함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자신이 직

접 겪고 있으면서도 믿기 어려울 만큼 신비스럽기까지 한 아늑함이었다.

'쪼옥' 소리와 함께 꽃잎 같은 입술이 진혁의 이마를 살포시 눌렀다. 이어 볼에도 꿈결 같은 감

촉이 닿았다. 진혁의 입술이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여나 하는 기대를 품은 채 순서를

기다렸다.

하영은 안은 그 상태로 보드라운 팔을 진혁의 목 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달콤하게 안은 채

목을 받치며 진혁의 상체를 일으켜 앉힌다. 주인의 의지를 거스르며 기대로 꿈틀거렸던 진혁

의 입술이 서러워서 아우성을 쳤다.

진혁과 하영은 오늘도 포도주 세 병을 다 비웠다.

발그레해진 하영의 볼이 어제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이러다가 이모부랑 형님이 포도주 다 마셔버렸다고 야단치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하영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싹싹하게 대답했다.

"포도주는 제가 마시려고 준비해 둔 거에요.

형이랑 아버님은 가끔 제게서 얻어 드시는 거라구요."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진혁에게 하영은 농담이 아닌 사실이라고 말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서 검사를 받았는데 둘 다 이상이 없었다

고 했다. 주치의는 체질에 따라 그럴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는 거였다. 하영이 잘 때 몸을 따뜻하게 덥히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취침 전에 포도주 마시는

것을 권했다고 했다.

그래서 질 좋은 포도주를 구해다 놓았다는 거였다.

"그러니 이 포도주는 둘이서 전부 다 마셔버려도 뭐랄 분이 없다 이 말씀이에요."

아픔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내색하지 않고 말하는 하영이 애처롭게 느껴져서 콧등이 시큰했

다. 가슴에 안은 채 다독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고집 부리지 말고 제 방에서 같이 자요."

빈병을 치운 하영이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겠다는 말을 꼭 들어야겠다는 결의가 단단해 보였

다. 그걸 읽으면서도 진혁은 어제처럼 요지부동이다.

"아무래도 저는 거실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오늘은 하영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어깨랑 가슴이 이렇게 부었는데 어떻게 딱딱한 데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려요?

도련님이 밖에서 자면 나도 어제처럼 곁에서 잘 거에요. 몸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아까 말했

잖아요. 형수를 또 밖에서 재울 거에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진혁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영이 잠시 기다리라며 먼저 침실로 들어가고 조금 있으니 다시 침실문이 열렸다. 비치지 않

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하영이 은은한 불빛을 뒤에 둔 채 서 있었다. 속이 비치지 않은 잠옷 위

로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진혁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하영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지만 본 중에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

인 모습이었다. 감히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혁을 편하게 해주는 마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머, 우리 도련님 형수가 너무 이뻐서 넋이 나갔나 봐.

힛~ 하긴 내가 좀 과하게 예쁘긴 해..후훗~"

그 새치름하고 여우 같은 말이 진혁의 발을 움직이게 해주었다. 뇌쇄적인 자태의 여인은 사라

지고 아름답고 포근한 형수만 남아 있었다.

진혁은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은 하영의 뜻을 따랐지만, 자신은 바닥에서 자겠다고 했다.

도저히 형수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은 안 되겠다며 그것까지는 양보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영은 그것도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한 번에 단정해버렸다.

좀 있으면 군대 갈 사람이 그 어깨와 등으로 바닥에서 자겠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것이었

다. 정 불편하면 자기가 바닥에서 잘 테니 진혁에게 침대에서 자라는 거였다.

평소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잘 전달하는 진혁이었지만, 그 조리도 하영에겐 통하지 않았

다. '그렇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들어서 말하는 하영의 화법을 전혀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진혁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형수님과 같은 침대에서 자면 제가 잠을 못 자고 뒤척일 것 같아서요.

그러면 형수님도 불편해서 못 주무시잖아요."

진혁의 그 마음을 하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제처럼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린

것이었다. 형수와 시동생이 같은 침대에 자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우려는 첫날부터

없었다. 에로틱한 상상 같은 것도 애초에 없었다.

하영은 진혁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형수가 포근하게 잠들 수 있게 재워 줄게요. 믿으세요."

믿으라고 말하는 하영의 입술과 눈이 진혁으로 하여금 믿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어쩔 수 없이 침대로 끌려간 진혁은 하영의 그 장담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이내 깨달았다.

하영이 진혁의 목 뒤로 보드라운 팔을 넣더니 살며시 당겨 안아서 팔을 베어 준다.

자신이 가만있으면, 어깨가 불편한 진혁이 먼저 팔을 베어 주겠다고 할 게 뻔해서였다.

여인의 팔베개를 남자가 베도 되는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진혁은 하영의 품 안으로 끌려갔

다. 끌려간 그 품 안에서 진혁은 또 한 번 신비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영의 향기와 감촉과 숨결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데도 아늑하고 포근했다. 황홀한 쾌감이 아

닌, 더 없는 아늑함과 포근함이었다. 설렘은 여전한데 그 설렘과 두근거림마저 격렬한 것이

아닌 잔잔하고 다소곳한 것이었다.

하영의 팔이 등을 몇 번 쓰다듬어 주지 않았는데도 진혁은 거짓말처럼 깊은 잠속으로 혼곤히

빠져들었다.

숨소리가 고른 것으로 진혁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하영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잘 자요, 내 이쁜 도련님."

하영의 입술이 살며시 진혁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꿈꾸어 온 그 고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것도 모른 채 진혁은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침에 먼저 눈을 뜬 하영은 자신이 잠든 자세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진혁의 배에 다리를 걸친 채 깊게 부둥켜안은 자세였다.

그저께는 처음 진혁의 곁에서, 그것도 불편한 거실에서 잤기에 몸부림을 치지 않았지만, 하영

은 평소 뭔가 끌어안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잠버릇이 얌전한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침

대에서 잔 간밤에는 평소의 잠버릇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잠옷의 치마가 위로 밀려 올라가

서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가 진혁의 배를 감고 있었다.

얼굴을 붉힌 하영은 이내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맨살에 닿는 진혁의 체온이 따스하고 편안

해서 다리를 내리기가 싫었다.

입을 벌린 채 새록새록 잠자는 진혁의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하다. 하영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진혁의 벌린 입에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어젯밤과는 다른 아찔한 자극에 하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자극이 너

무 강하여 자신도 모르게 진혁의 벌린 입안에 혀를 밀어 넣을 뻔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든 하

영은 얼른 입술을 떼고 진혁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며 머리를 쓸어주었다.

동시에 진혁이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보드라운 다리를 자신의 배에 걸친 형수가 곱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에 걸쳐진 다리

에서 형수의 감미로운 체온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잘 잤어요? 잠꾸러기 도련님."

빙그레 웃음을 띠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던 진혁은 또 한 번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

게도 눈이 더 밝아진 것 같으면서 머리가 투명할 정도로 맑고 몸이 가뿐했다. 다친 어깨도 거

의 결리지 않고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가벼웠다.

하영의 다리에서 전해오는 감촉이 너무 좋은 진혁은 온종일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렇지만 시계처럼 정확한 진혁의 몸은 일어나서 움직일 시간이라며 주인을 재촉

했다. 진혁은 일부러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형수님, 저 숨 쉬게 다리 좀 내려주시겠어요?

이대로가 너무 좋아서 혼자서는 못 일어나겠네요."

아침을 끝낸 뒤 진혁은 설거지를 거들었다.

하영이 안된다며 주방에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게 싫은 진혁은 끝내 고

집을 꺾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하영의 곁에서 그릇을 부시는 동안 진혁은 달콤한 기분이 들었

다. 하영과 금실 좋은 부부라도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했던 그 달콤함은 너무 짧았다.

둘이 먹은 아침이라 그릇 몇 개와 수저를 씻고 나니 더 부실 게 없는, 설거지라고 할 수도 없

는 설거지였다. 진혁은 순식간에 뚝딱 끝나버린 설거지가 아쉬운지 쩝쩝 입맛을 다셨다.

한강이 가장 잘 보이는 하영의 침실 창가에서 나란히 커피를 마시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서울 중부 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하영과 진혁은 강촌으로 가려던 일정을 바꿔 오늘은 집안에서 보내기로 했다.

사실 집안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이 있었다. 종일 아무 말 않고 눈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진혁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도련님 샤워하고 나올 게요."

하영이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며 문을 닫는 순간 진혁은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 외로움이 낯설지도 않고 싫지도 않았다. 아련하면서도 애잔하기까지 한 그 외로움이 사실

은 그리움이라는 것을 진혁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비는 기세를 점점 더하더니 이젠 마당의 잔디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로 변했다.

얼굴이 동그란 예보관이 일기예보에서 말한 대로, 쉽게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았다.

그 비를 내다보는 진혁의 눈에 자꾸만 어제 본 비로용담이 밟힌다. 이런 비라면 작은 와디가

범람하여 낮은 흙 언덕을 휩쓸어버릴 것 같았다.

[註 와디: 평소에는 마른 골짜기이다가 큰비가 내리면 범람하는 계곡 또는 강. 마른 실개울을

지칭하기도 함.]

가을비이기에 그 꽃이 씻겨 내려가면 속절없이 말라 죽을 게 뻔했다. 자꾸만 비로용담의 고운

자태가 눈에 밟혀 진혁은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하영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비로

용담이 그 자리에서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더구나 하영은 못 가게 말릴 게 뻔했다.

마음이 급해진 진혁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와 볼펜을 찾았다.

"형수님,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메모를 남기고 광에서 부삽을 찾은 진혁은 마침 눈에 들어온 양철 들통도 함께 챙겨 들고 아

차산으로 향했다. 하영에게 보조를 맞출 필요가 없기에 어제처럼 천천히 올라가지 않고 바삐

걸었다. 한 번밖에 와보지 않고 폭우가 쏟아지는 산길이었지만 이상하게 길이 훤하게 느껴지

고 숨도 차지 않았다. 진혁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빨리 비로용담이 있는 와디에 닿았다.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그 비로용담을 다시 못 볼 뻔했다.

불어난 물이 흙을 휩쓸어 가버려서 뿌리가 거의 다 드러난 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마땅한 장소를 찾아서 옮겨 심어준다고 해도 이미 가을비에 뿌리를 다 드러내 버렸기에 살아

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이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야생화가 아닌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한

무리의 꽃에 불과했다. 잠시 망설이던 진혁은 가지고 간 양철 들통에 꽃과 뿌리 주변의 흙까

지 함께 옮겨 담았다. 들통을 가슴에 품은 진혁은 서럽도록 고운 꽃망울을 어루만지며 꽃들에

게 속삭였다.

'이제 너희를 정말 이뻐해줄 아름다운 분과 함께 있으렴.'

내려오는 산길의 폭우는 올라올 때보다 더 맹위를 떨쳤다.

폭우를 뚫고 산을 내려온 진혁은 이모 댁을 지나쳐 언덕길로 내려갔다. 어제 하영과 외출할

때 언덕입구의 큰 길가에 꽃가게가 있는 것을 눈여겨 봐두었던 것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꽃가게의 문은 열려 있었다.

등을 보인 채 엎드려서 꽃을 손질하던 주인 여자가, 문 여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몸에 빗물이

줄줄 흐르는 진혁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수건을 내민다.

"어서 오세요. 우선 물기부터 좀 닦으세요."

여인이 내미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서야 진혁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공간에 가득한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과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꽃가게라고 하기보다

는 화원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넓고 규모가 있으면서도 잘 꾸며진 가게였다.

"이 꽃들을 화분에다 옮겨 담아서 집에 두려는데 도와주십시오."

진혁은 품에 안고 있던 들통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주인이 탄성을 질렀다.

"아! 비로용담이네요.

이 귀한 걸 어디서 캐셨어요?"

주인이 꽃잎을 어루만지다가 진혁을 보며 물었다. 그제야 진혁은 그 꽃가게 주인의 얼굴을 정

면으로 보았다. 꽃과 딱 어울리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었다.

하영처럼 눈에 확 띄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단아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제 아차산에 갔다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큰 비에 걱정되어 가보니

휩쓸려 내려가기 직전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담아 왔습니다."

혹시 몰상식하게 야생화를 캤느냐고 할까 봐 진혁은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그녀가 진혁의 마

음을 알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가을비에 뿌리가 드러나면 운 좋게 다시 흙을 만나더라도 시들어서 죽거든요."

비로용담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에 정성이 가득한 것을 보며 진혁은 빙그레 웃었다.

정말 꽃을 사랑하는 듯한 마음이 느껴지는, 꽃하고 잘 어울리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화분에 옮기려면 우선 화분을 고르라는 말에 진혁은 직접 골라 달라고 했다. 꽃을 잘 아는 만

큼 어울리는 화분도 자신보다 잘 알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디다가 두실 거에요?"

놓아둘 장소에 맞게 화분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실보다는 침실에 두는 게 더 낫겠죠?"

"네, 삭과니까 씨앗이 나오면 그때 다른 곳에 심고 우선은 쉽게 돌볼 수 있는 곳에 두는 게 나

을 거에요."

그녀는 가지런히 쌓인 화분 중에서 하얗고 우아한 느낌이 드는 것을 골라서 진혁에게 보여 주

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한 곡선으로 빚어진 화분이 하영과 딱 어울리는 듯해서 마음에 들

었다.

그녀는 옮겨 심을 준비를 끝내고도 손을 움직이지 않고 자꾸 진혁을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뭔

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부 아홉 뿌리인데 한 뿌리만 주실 수 있으세요?

제게 원예학과를 지망하게 한 꽃이 바로 비로용담이거든요.

염치없고 죄송스런 부탁이지만, 워낙 좋아하는 꽃이라서 정말 가꾸고 싶네요."

어쩐지 보자마자 바로 비로용담을 알아보기에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여인이 간절한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꽃망울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가만히 생

각해보니 하영이 이 꽃을 가꾸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서로 엉켜 있던 뿌리를 갈라 놓는 게 꽃에게 미안하였지만 진혁은 선뜻 그러라고 했다. 너무

쉽게 승낙을 하니 그녀는 믿기지 않는가 보았다. 다시 확인을 하고서야 기쁜 표정을 짓는다.

진혁은 기뻐하면서도 미안히 여기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두 뿌리 드릴 테니 이 꽃을 가꾸다가 도움 청할 때 돌봐주시면 좋겠는데......"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는 표정까지도 환해지며 그러겠다고 했다. 너무 갖고 싶었던

꽃이었기에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미안했던 것을 털어낸 듯한 표정이었다. 따로 부탁을 하지

않아도 하영이 도움을 청하면, 정성껏 비로용담을 보살펴 줄 사람처럼 여겨졌다.

들통에 있던 비로용담을 흙과 함께 화분으로 옮기는 손길에서 세심한 정성을 오롯이 느꼈던

것이었다.

옮겨 심는 것을 끝낸 그녀가 화분의 흙을 깨끗이 닦더니 진혁에게 안겨 주었다.

망울을 터뜨리려는 보라색 꽃과 하얀 화분이 조화를 이루며 애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쩜 이렇게 줄기가 곧고 망울이 예쁜지 싸한 느낌까지 드네요.

이르면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망울을 터뜨릴 거에요. 야생화라서 손은 많이 안 가지만, 정성

을 담은 마음으로 대해줘야 잘 자랍니다."

가는 도중에 화분이 비를 맞지 않게 비닐로 곱게 감싸준 손길에 정성이 가득 느껴진다.

세심하게 마무리까지 한 그녀는 신경 써야 할 것들도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당부하듯 말했다.

"삭과류의 꽃이라서 씨앗을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잘 받아 두었다가 화분에 심으세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를 부르시거나 화분을 가져오시구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 댁에서 가꾸실 게 아닌가 보죠?"

"이모 댁에 와서 머무는 중입니다. 입대를 며칠 앞두고 다니러 왔습니다."

"네에, 군대 잘 다녀오시고 지나실 일 있으면 들러서 차라도 들고 가세요."

진혁은 그러겠다고 하고 화분을 안아 들었다. 그녀가 진혁에게 목례를 했다.

볼수록 단아한 매력이 깊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거세게 퍼붓는 빗속을 달리다시피 하여 언덕길을 올라가서 보니 하영이 우산을 쓴 채 대문 앞

에 서 있었다. 비를 흠뻑 맞고 다가오는 진혁을 본 하영이 눈을 흘기며 어깨를 때린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시는 거에요?

걱정하면서 기다렸잖아요."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하영의 옷도 사선으로 퍼붓는 비에 젖어 있었다. 진혁은 빗물이 흐르

는 얼굴을 손등으로 닦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 형수님께 벗이 되어 드릴 녀석들을 데리고 왔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거실 탁자에 화분을 내려놓고 천천히 비닐을 벗기는 진혁의 손끝을 하영의 눈이 따라다닌다.

비닐이 벗겨지고 비로용담이 자태를 드러내자 하영이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나! 어쩜 이렇게 예쁜 꽃이 다 있담. 너무 예뻐요. 눈물이 핑 돌만큼이요."

하영이 탄성을 터뜨릴 만도 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보라색 망울을 터뜨리는 비로용담은 자태가 곱기로 이름난 꽃이다.

많은 시인이 그 청아하고 신비로운 자태를 시로 읊기도 한 꽃이었다.

하영은 그 보드라운 손으로 여린 꽃망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눈을 떼지 못했다.

진혁의 눈엔 하얀 화분에서 다소곳이 몽우리 진 꽃과 하영이 너무 닮은 듯했다.

"요 이쁜이들을 뭐라고 불러요?"

"비로용담이에요.

진정으로 아껴주는 사람에게만 꽃잎을 열어준다는 신비한 전설도 전해지는 꽃입니다."

진혁은 아직도 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하영에게 키울 때 신경 써야 하는 부분들을 자세히

알려주고, 언덕 아래의 꽃가게에 부탁하여 놓았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가라고 알려주었

다. 그제야 하영은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이 꽃 사러 나갔다가 온 거에요?"

"이 녀석들이 운이 아주 좋은 거에요. 폭우에 떠내려가서 시들 뻔했다가 형수님한테 사랑받으

며 자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진혁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입만 쳐다보는 하영에게 꽃이 여기에 오기까지의 일을 전부 말해

주었다. 산에 있던 꽃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옮겨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듣는 하영의 눈에 감동

이 일렁인다.

"세상에, 우리 도련님은 어쩜 이렇게 마음씨도 고울까?

도련님 땜에 내가 못살아. 우리 도련님 너무 이뻐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영에게 우리 도련님이라는 말은 이제 하나의 단어로 굳어진 듯했다. 그리고 굳어진 그 단어

는 들을수록 진혁에게 더 깊은 설렘을 안겨주는 말이었다.

진혁은 촉촉하게 젖어드는 하영의 눈을 보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샤워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다시 하영의 품으로 끌려가서 황홀한 고문을 당하며 버둥거릴 게

뻔해서였다.

이제 진혁도 하영의 눈빛이, 분위기와 목소리와 향기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깨달

을 수 있었다. 하영의 눈빛을 보면 또 어떤 색깔로 자신의 넋을 빼놓을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

었다. 왜 그런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눈빛과 그런 설렘의 요소들은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지금 형수는 그 향기와 분위기가 가장 매혹적이고 아찔해질 때의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저 눈빛에 빠지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고혹적인 분위기와 향기 속에 또 이를 악물고 버둥거

려야 할 게 뻔했다.

도망치듯 일어나서 욕실로 가는 진혁을 하영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욕실 문을 여는 진혁의 등에, 하영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촉촉한 물기까지 머금고 사뿐 날

아와서 향긋하게 달라붙는다.

"도련님, 형수가 등 밀어 드릴까요?"

기겁을 한 진혁은 얼른 욕실로 몸을 숨기며 문을 닫았다.

정말 형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잡이를 잠그고 나서야 가만히 한숨을 내 쉬었다.

진혁도 하영의 눈빛이, 분위기와 목소리와 향기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깨달

을 수 있었다. 하영의 눈빛을 보면 또 어떤 색깔로 자신의 넋을 빼놓을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

었다. 왜 그런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눈빛과 그런 설렘의 요소들은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지금 형수는 그 향기와 분위기가 가장 매혹적이고 아찔해질 때의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저 눈빛에 빠지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고혹적인 분위기와 향기 속에 또 이를 악물고 버둥거

려야 할 게 뻔했다.

도망치듯 일어나서 욕실로 가는 진혁을 하영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욕실 문을 여는 진혁의 등에, 하영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촉촉한 물기까지 머금고 사뿐 날

아와서 향긋하게 달라붙는다.

"도련님, 형수가 등 밀어 드릴까요?"

기겁을 한 진혁은 얼른 욕실로 몸을 숨기며 문을 닫았다.

정말 형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잡이를 잠그고 나서야 가만히 한숨을 내 쉬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빗속에 산을 오르내리느라 피곤해서인지 졸음이 쏟아진다.

샤워를 하고 나오며 하품하는 진혁을 본 하영이 눈을 좀 붙이라고 했다.

자꾸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저 방에서 자고 있을 테니 형수님 심심하시면 깨우세요."

손님방으로 가려는 진혁을 불러 세운 하영이 뭔가 불만이 있는 아이처럼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긴 어딜 가요? 이 방에서 자요."

"낮에도 무서우세요?"

그 말에 하영은 정말 화가 단단히 난 것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긴다. 하영의 심기를 뭔

가 건드린 것 같아서 진혁은 조마조마해졌다.

"도련님 화장실이랑 씻으러 갈 때 말고는 눈앞에서 안 보이는 것 용서 못 해요."

그렇게 말하고 꽃처럼 웃는 모습에 홀린 진혁은 자신이 손님 방에서 자려고 했던 것도 잊고

말았다.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워 하영이 받쳐주는 팔을 벤 뒤에야 그것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하영이 보드라운 팔로 목을 감고 늘씬한 다리를 배에 걸친 뒤였다.

그 상태로 하영이 속삭였다.

"허락도 없이 어딜 가려고 해요? 갈 수 있으면 가보세요."

달콤하고 포근한 늪에 사로잡힌 진혁은 가라고 떼밀어도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영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침실 창가에 놓인 비로용담의 은은한 향기와 하영의 달콤한 향기 속에 진혁은 잠이 들었다.

잠든 것을 확인한 하영이 고개를 들어 진혁의 얼굴을 본다. 아침에 진혁 몰래 키스하였을 때

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지훈과 연애하던 시절의 키스도 그렇게까지 아

찔하고 깊은 울림은 아니었다.

아이처럼 천진하게 자는 모습을 보니 웬일인지 가슴이 저리고 설렌다. 편안하고 든든하게 느

껴지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깊은 데까지 시릴 만큼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진하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속을 가득 채운 아스라한 감정의 정체를 하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다른 여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하영이기에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정체가 뚜렷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그 설렘에 이끌린 하영은 진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

갰다. 그리고 아침보다 더한 자극에 부르르 떨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하아.."

그 신음에 스스로 놀란 하영은 얼른 입술을 떼며 얼굴을 붉혔다.

입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진혁은 여전히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진혁의 볼

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베 물었던 하영은 다시 진혁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 평소의 잠버릇대로

진혁의 배에 다리를 걸친 채 잠이 들었다

하영이 잠든 지 한참이 지난 저녁 무렵에 진혁이 먼저 잠에서 깼다. 눈을 뜬 진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향기였다. 비로용담의 향기와 하영의 향기가 어우러진 향긋하면서도 신비한 분위

기가 침실을 채우고 있었다.

배에 걸쳐진 보드랍고 매끈한 다리의 감촉과 가슴을 간질이는 달착지근한 숨결이 느껴졌다.

하영의 새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오자 진혁은 흠칫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아늑하게 느껴지던 감촉의 색깔이 바뀌려 했다. 배에 닿는 허벅지에서 전해지는 보드라운 감

촉이 숨 막히는 쾌감으로 바뀌려 하고 있었다.

진혁은 한 번 감은 눈을 다시 뜨는 게 그렇게 어렵고 힘겨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눈 뜨

면 형수의 새하얀 허벅지에 녹아들 것만 같은 두려움에 눈꺼풀이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어렵게 눈을 뜬 진혁은 떨리는 손으로 하영의 잠옷 자락을 끌어내려 허벅지를 가려주었다.

하영의 체취와 온기가 밴 잠옷의 보드라운 감촉도 새하얀 허벅지의 황홀한 도발에 못지않았

다. 잠옷 사이로 얼핏 순백색 팬티를 본 진혁은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불에 덴 것

처럼 뜨거워졌다. 진혁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잠옷 자락이 살갗을 스치며 내려가는 부드러운 감촉에 하영이 눈을 떴다.

하영의 눈에 볼이 새빨개진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잠버릇에 허옇게 드러났

을 자신의 허벅지를 덮어주려다가 저 지경이 되어버린 게 한눈에 짐작되었다.

자신이 깨어난 것도 모른 채 제풀에 놀라 눈을 감고 어찌할 줄 모르는 진혁을 본 하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이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풋풋한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 편하게 해줄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곯려서 편하게 해줄 것인지, 아니면 어루만져 줘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 하영은 잠

에서 깨는 척 뒤척였다.

그러면서 실눈을 뜨고 보니 진혁은 여전히 그 상태였다. 하영은 진혁이 자신을 보지 않을 수

없게 과장되게 기지개를 켰다. 진혁의 눈이 떠지는 것을 본 하영은 시침을 뚝 떼고 여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잘 잤다. 어머! 도련님, 자다가 얼굴 데었어요? 왜 그렇게 빨개졌어요?

어디 좀 봐요."

만져봐야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자 진혁의 얼굴이 더 빨개진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본 하영은 장난기가 더 동하고 말았다.

"아, 이제 알았다.

몰래 훔쳐 본 내 허벅지에 뎄구나. 맞죠?"

의도한 건 아니지만 몰래 본 건 사실이었기에 정곡을 찔린 진혁은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일 뿐

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게 느껴진 하영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다른 건 안 봤구요?"

그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진혁은 절대 아니라며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이 같은 진혁

을 보며 하영은 더 나가면 저 커다란 아이를 울릴 것 같아서 안아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운 그대로 진혁을 덮치며 하영이 속삭였다.

"장난이었어요.

착한 우리 도련님, 이렇게 착하고 이뻐서 어떡하면 좋아."

밑에 깔린 진혁은 그 미칠 듯한 포근함과 황홀한 감촉에 아득해진 채 버둥거렸다.

하영이 몸을 일으키며 놓아 줄 때까지 진혁의 정신은 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다시 다가온 하영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진혁은 다시 황홀한 두

려움에 떨어야 했다. 하영이 마사지를 시작하려는 듯 얼음 팩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침실에서의 마사지는 거실에서 할 때에 비하여 시작부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푹신한 침대에 엎드리는 순간부터 진혁의 온몸은 자극을 받았다.

엎드린 아랫도리가 부드러운 침대에 눌리자 그 감촉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지가 불끈 일

어났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힌 코를 통해 하영의 향기가 스며들고 볼에서는 하영의 체온이 고

스란히 느껴졌다. 더구나 하영은 아직도 보드라운 잠옷차림이었다.

하영이 등을 주무르느라 엎드린 자세가 되자 여린 잠옷 자락이 살갗을 쓰다듬었다.

거실에서의 마사지만 생각했던 진혁은 곤혹스러움에 진땀이 났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거친 숨을 가눌 수 없었다. 하영의 향기조차도 꽃향기와 버무려져 쾌감을

부채질했다. 하영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는 침대에 비벼지는 자지에서 격렬한 쾌감이 뭉텅

뭉텅 솟아났다.

커지고 단단해진 자지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진혁은 미칠 것 같은 쾌감에 정신이 혼미했

다. 눈을 감으면 하영과 알몸으로 엉키는 환상이 보이고 눈뜨면 하영의 고혹적인 허벅지가 일

렁거렸다.

정성스럽게 등을 어루만지는 하영의 손끝에서도 물씬물씬 향기가 피어나는 듯했다. 코로만

느껴지는 향기가 아닌 눈으로도 보이는 듯한 향기였다. 그것도 잔잔하고 아늑한 향기가 아닌

늪처럼 짙고 매혹적이며 황홀한 향기였다. 혀끝으로도 느껴지는 향기였다. 온몸의 오감을 통

하여 가해지는 자극에 진혁은 무방비로 허우적거렸다.

삽입은 커녕 부둥켜안지도 않은 상태에서 느끼는 그 황홀함은 사정 직전에 느꼈던 오르가즘

보다도 더 아찔했다.

엎드린 채 세심하고 찬찬히 어루만지는 하영의 달착지근한 숨결에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빠

져들던 진혁은 보드라운 손바닥이 등을 톡 때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과 어깨는 끝났어요. 착한 환자님, 이제 돌아누우세요."

잠시 정신이 들었던 진혁은 하영의 그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얇은 잠옷 바지를 뚫어버릴 듯 단단한 자지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불끈거리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돌아누우면 자지가 하영의 눈에 그대로 치솟으며 드러날 게 뻔하기에 진혁

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인의 곤혹스러움이 자지엔 더 격한 흥분이 되었는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커지고 단단해진

다. 너무 커지고 단단해져서 터질 듯이 아픈 자지 끝에서 더 부푸는 쾌감과 난감함에 눈물이

나려 했다. 자신의 그 모습을 보아도 형수가 나무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혁은 돌아누

울 수 없었다.

욕정을 품은 것은 아니지만, 형수의 정성에서 쾌감을 느껴버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

것은 저 고운 형수를 욕보이는 것이라고 여겨져서 돌아누울 수 없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와중에도 자지는 더 단단해지고 쾌감은 자꾸 부풀어 올랐다. 초인적인 의지

로 버티는 진혁의 상태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하영은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말 잘 듣던 환자가 웬 난데없는 고집을 피운담. 얼른요."

시간이 지나 자지가 수그러들 때까지 버티려 했던 진혁은 그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태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 것 같지가 않았다. 더구나 수그러든다고 해도 돌

아누운 채 자극을 받으면 다시 일어설 게 뻔했다.

진퇴양난의 상태에서 진혁의 진솔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형수님, 도저히 돌아누울 수가 없어요."

부끄러움에 온몸이 새빨개지는 진혁을 보며 그제야 하영은 상태를 알아차렸다.

발기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진혁이 고집을 부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 발기가 욕정에서 발로된 것이 아닌 자극을 받아 자연스럽게 깨어난 것도 동시에 알았다.

형수에게 수치스러움을 안길까 봐 감추려 하는 진혁의 마음이 선명하게 보였다.

볼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하영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든 게 하영은 투명하고 맑게 느껴졌다. 발기된 상태를 보이지 않으려는 진혁의 마음이

투명했고 진혁이 느끼는 쾌감까지도 맑게 느껴졌다.

그 느낌은 하영에게도 아련하고 달콤한 설렘으로 전해졌다.

"어떤 모습도 형수에게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 잊었어요?

자연스러운 거에요. 건강하다는 증거이구요. 형수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거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여기서 멈춘다면 진혁이 더 쑥스러워하며 어색함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을 하영은 알고 있었

다. 멈추고 싶은 마음도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의 가슴이 진혁의 볼을 짓누른 채 어루만지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하영은 진혁의 몸을 안

아 돌려 눕혔다.

침대에 짓눌렸던 자지가 헐렁한 바지를 밀어올리며 수직으로 우뚝 서며 불끈거렸다.

볼을 붉히면서도 하영은 놀라움에 자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옷 속에 숨은 채 끄덕거리는

움직임으로 보아 얼마나 크고 단단할지 짐작이 되었다.

아름다운 형수의 눈앞에 자지를 드러낸 진혁이 어쩔 줄 모르는 소녀처럼 얼굴을 두 손으로 가

렸다. 그 모습도 투명하고 사랑스러워 하영은 다시 진혁의 얼굴을 가슴에 안으며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도련님 건강한 게 느껴져서 기쁘고 든든해요."

촉촉하고 젖은 목소리였다. 보드라운 질감이 느껴지는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귓속으로 형수

의 황홀한 숨결이 밀려들었다. 그 자극에 자지가 부르르 떨었다. 허벅지에 닿은 자지의 몸부

림에 하영도 몸을 떨었다. 진혁의 쾌감이 하영에게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하아.."

처음 듣는 하영의 녹아날 것 같은 신음에 진혁은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형수를 욕보

이는 것 같은 느낌에 울고 싶었다.

그런 진혁의 마음을 모르는 하영의 향기가 더 짙어진다. 여태껏 진혁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황홀한 색이 꿈틀거리는 농염한 향기였다.

하영도 진혁의 단단하고 건장한 가슴이 황홀하게 느껴지면서 설레고 달콤한 느낌이 들었다.

더 안고 싶었지만 진혁을 괴롭히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아직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진혁의 두 손을 살며시 치우며 하영이 속삭였다.

"도련님, 눈 떠보세요."

어렵게 떠진 진혁의 눈이 젖어 있었다. 형수에게서 쾌감을 느껴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과 당혹

스러움에 금방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자신보다 불과 네 살 어린 스물여덟 살의 진혁에게서 하영은 소년의 순수함을 보았다.

진혁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울먹이듯 말했다.

"형수님,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런 진혁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영은 그 사랑스러운 만큼의 설렘을 담아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바보 같아. 우린 연인이에요. 건강한 남자가 연인의 손길에 반응하는 건 당연한 거에요.

도련님의 어떤 모습도 형수에겐 사랑스럽고 따뜻해요."

볼을 어루만져 주던 하영의 팔이 진혁의 목을 끌어당겼다. 진혁의 얼굴이 하영의 봉곳한 가슴

에 파묻힌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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