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극현도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아니 불편한 정도를 넘어 미칠 지경이었다. 다 잡았다 여긴 흑천맹의 반격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오정회와 은송림, 더불어 정도맹까지 들이닥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극현도가 그쪽의 감시를 게을리 한 것도 아니었다. 작은 변수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는데. 그래서 지금의 충격이 배가 된 것이다.
금선탈각의 계.
오정회와 정도맹은 자신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껍데기만 남겨 놓았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진퇴양난, 사면초가.
극현도는 자신의 인생 최고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할 순 없지. 승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법.’
사도련주 극현도는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싸우라는 명을 하달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
비담은 싸우는 와중에도 매의 눈으로 전장을 살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싸움을 최소한의 피해로 일찍 마무리하겠다는 계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우두머리의 제거였다.
잘 훈련받은 정예군사가 아닌 무림인들의 특성상 명령체계만 무너뜨리면 사상누각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사도련처럼 련주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조직은 조금 더 버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뇌부가 무너지면 조직이 와해될 소지는 충분했다.
그런 비담의 눈이 반짝 빛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한 시진 가량 이어진 전투.
비담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사도련 고수들의 수가 100을 넘어설 무렵. 드디어 비담은 사도련주 극현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극현도는 패색이 짙은 전장을 바라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리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 앞에 버티고 선 비담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운명처럼 자신의 원대한 꿈을 짓밟은 이가 비담이란 사실을 느낀 것이다.
“정확히 30년. 내 인생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모두 사도련에 바쳤다. 그렇게 련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무림 일통의 꿈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였는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 사도련에 인생을 바친 게 아니라 허황된 꿈을 실현시키겠단 탐욕에 자신의 꿈과 인생을 허비한 거죠. 자, 보세요. 덕분에 이렇게 죽지 않아도 될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잖습니까?”
“대의를 위해서 흘린 피는 숭고한 것이다.”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했네요. 그 꿈 얼마나 허무하고 허황된 것인지 산산이 깨 부셔 드리죠.”
비담의 화류선이 투명하게 물들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지법을 펼치기 위해 극현도의 손가락 역시 검게 물들었다.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구지신마 극현도였다.
파파팟
대기를 뚫고 아홉 줄기의 검은 광선이 비담의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비담의 신형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못 박히듯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극현도는 자신의 지강에 비담의 몸이 뚫려 넝마가 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아홉 개의 지강은 허무할 정도로 비담의 몸을 지나쳤다. 마치 허공을 지나치듯 아무런 제약 없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극현도는 비담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극도로 기감을 확장했으나 전혀 느껴지지도 않았다.
당황한 극현도의 손이 다시 한 번 다섯 차례 움직였다. 총 45 개의 지강. 허나 그가 발출한 지강은 이번 역시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소멸되었다.
‘이형환위를 펼쳤다면 잔상이라도 남아야 하거늘. 저 녀석은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유령과 싸우는 것인가? 어째서 내가 펼친 지강에 번번이 뚫렸음에도 저리 무사하단 말인가?’
하지만 극현도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왔기에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콰쾅
방금까지 극현도가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파였다. 극현도의 머리끝이 쭈뼛 솟아올랐다. 지금껏 승승장구하며 천하가 좁다하고 활보하였던 자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격.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더욱 무서웠다.
만약 자신의 육감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한 채 피하지 않았다면...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극현도는 이곳이 전장 한 복판임도 잊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비담을 응시했다.
“후후, 이 양반 표정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네. 하기야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니 당황할 법도 하지. 이제 시작이니 마음 단단히 먹으쇼.”
비담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에 맞추어 엄청난 공격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극현도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방을 향해 막무가내로 지강을 쏘았으나 역부족이었다.
비담은 오래 끌 생각이 없었기에 최후에 깨달은 심득을 바로 펼쳤다. 투명하게 변한 부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한 순간 극현도의 육신과 영혼을 잘라 버렸다.
투둑.
심연에서 들리는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에 극현도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 크게 치떠진 눈만이 그의 분노를 대변하였을 뿐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크게 떠졌던 눈은 이내 공허하고 칙칙하게 색이 바랬고, 곧 생명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쿵.
허황된 꿈을 꾸었던 간웅의 몸이 땅위로 쓰러졌다. 비담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죽으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육신이 쉴 그 정도의 땅만 필요할 뿐이거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다투는지. 부귀, 명예, 권력 모두 부질없소이다. 죽으면 다 내려놓고 가야할 허망한 뜬구름이요.’
잠시 극현도의 시체를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찬 비담은 이내 전장 한 복판으로 뛰어들어 사도련의 남은 수뇌부를 격살하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살육의 장을 빨리 끝내기 위해.
그렇게 꼬박 하루의 시간이 흐르고.
사도련은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흑천맹에 투항하였다.
모래 위에 지은 성.
하나로 뭉친 거대한 파도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비담과 구인철은 참담하게 변한 전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래야죠.”
“이제 마지막 싸움만 남았군. 황군은 어디쯤이라 하던가?”
“하루거리라 하더군요. 이곳 싸움이 마무리 되었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내겠죠.”
“그래, 끝이 보이는군.”
구인철은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핏빛으로 선명하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하루 뒤.
황실의 고수로 이루어진 황군과 무림 연합의 일대 격돌이 시작됐다. 비담은 황제가 다시는 무림을 넘보지 못하도록 가장 선봉에 앞장서 적들을 유린했다.
황군은 기진맥진 지쳐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맹렬히 돌격하였으나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무림 연합의 고수들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담은 비참하게 죽은 매영의 복수를 위해 전투가 마무리될 즈음 오정회와 은송림의 고수들 역시 은밀하게 제거해 버렸다. 그렇게 피비린내로 점철되었던 2차 정사대전과 황군과의 싸움이 끝을 맺었다. 그 뒤 황제는 화병이 나 몸져누웠고, 얼마 후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던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정도맹은 오정회의 치부를 이용해 이미 구심점을 잃어버린 오정회의 근간을 뿌리 채 흔들며 정리, 흡수하였다. 흑천맹 역시 사도련의 남은 세력을 끌어들여 명실상부 사파연합의 맹주로 우뚝 섰다.
그렇게 반년이란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고, 무림은 정도맹을 중심으로 한 정파연합과 흑천맹을 중심으로 한 사파연합으로 양분되어 평화를 되찾았다. 이 평화가 얼마나 흐를는지 장담하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표면적으론 무림의 평화가 다시 찾아왔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흑천맹의 대 연회장.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무림의 평화를 되찾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구인철과 비담의 혼례가 있는 날이었다.
이제 사파의 맹주로 우뚝 선 흑천맹의 세를 과시하듯 엄청난 인파가 초대되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정도맹 역시 수많은 무림의 명숙들을 보내 둘의 관계가 공고함을 증명하였다.
혼례가 시작되자 구인철과 빙루가 화려한 혼례복을 입고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비담과 구서희, 이선화가 붉은색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뒤따랐다.
겹경사를 맞게 된 흑천맹주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커진 채 다물어질 줄 몰랐고,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속에 식은 무사히 끝났다.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듯.
새로운 시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도래했다.
구인철과 빙루가 초야를 치르게 될 방 밖.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그 방 창문 아래에 일남이녀가 쭈그리고 앉아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남이녀의 정체는 바로 비담과 서희, 선화였다.
비담은 온 청각을 열어 방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서희에게 전음을 보냈다.
‘빙소저께 남녀 간의 합일에 대해 설명해줬죠?’
‘그럼요, 상공의 부탁대로 잘 설명해드렸답니다. 그러니 너무 노심초사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후후, 드디어 형님의 숙원이 이뤄지겠구려.’
‘호호, 제 일도 아닌데 왜 이리 떨리죠?’
‘쉿!! 시작하려는 모양이오.’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리가 방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대 가득한 셋의 목울대를 타고 침 넘어 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으음, 한 번 만져 봐도 되겠소? 눈처럼 뽀얀 것이 무척 부드러울 것 같소만...”
“조심히 만져주세요. 보는 것과 달리 예민해서 강하게 어루만지면 상처가 생긴답니다.”
“흐음! 내 태어나 이처럼 보드라운 감촉은 정말 처음이오. 그리고 봉긋 솟은 이곳은 정말 탐스럽고 따스하군요.”
“하아! 저도 아까워서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답니다.”
“그나저나 끝에 매달려 있는 이것은 무엇이오? 빨갛게 익은 것이 꼭 열매 같소이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특히 예민한 부분이니 살살 다뤄주세요.”
“정말 신기하오.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빛이 나는 것 같소.”
“그렇죠? 저도 볼 때마다 늘 신기했답니다. 아슬아슬 끝에 매달린 것이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그럼 제 것을 구경하고 만지셨으니 저도 당신의 것을 구경하고 만져 봐도 괜찮을까요?”
“많이 놀랄 터인데 그래도 괜찮겠소?”
“늘 각오하고 있었는걸요? 어떻게 생겼는지 늘 궁금했는데 오늘 드디어 당신 물건을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 모를 거예요. 어서 빨리 꺼내주세요.”
“하하하, 보여드릴 것이니 너무 보채지 말아주시오. 자! 이것이오.”
“꺄아! 정말 크네요. 어떻게 이런 걸 가지고 다니세요?”
“하하, 남자라면 의당 이정도 물건은 지니고 다녀야지요.”
“너무 멋져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하네요.”
“칭찬을 과하게 해주시니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소. 하하하.”
너무나 익숙한 대사를 주고받는 둘로 인해 비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일그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서희와 선화는 진하게 전개되는 방안의 상황에 기함을 하며 놀라고 말았다.
“우와! 이렇게 크고 단단한 것이 구멍을 찾아 들어간다니 너무 신기해요. 이런 거에 찔리면 많이 아프겠지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처음 당하는 사람은 이 물건에 찔리는 순간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도 하지요.”
“정말요? 서희 아가씨에게 듣긴 들었는데...많이 아프겠죠?”
“하하하! 제 물건을 당신께 함부로 사용할 일은 없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이 녀석이 보기와는 다르게 여린 성격을 지녀 조심조심 다뤄줘야 합니다. 잘못 다루면 주인에게 해를 끼치기도 한다오. 하지만 당신께는 소중히 살살 다룰 것이니 나를 믿으시오.”
“그럼 살살 해주셔야 돼요. 그나저나 정말 쭉 뻗은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이거 언제 넣으실 거예요?”
“당신의 마음이 흡족해지면 그 때 넣을 거라오.”
“정말요? 그럼 더 구경해도 되나요?”
“하하, 그 녀석 역시 민감하니 조심히 다루기만 한다면 얼마든 구경해도 상관없소. 그리고 당신이 충분히 만족을 느낀 후 넣고 싶을 때 언제든 말만 하면 넣으리다.”
“호호, 역시 상공은 자상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럼 밝은 곳에서 구경할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 신나오?”
“그럼요. 매일 상상만 했는걸요. 그러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아마도 오늘밤을 잊지 못할 거예요.”
“나도 자랑스럽소. 하하하!!!”
“이제 충분히 구경했으니 그만 넣어주세요. 너무 바깥구경을 오래했다며 잔뜩 화가 난 것 같아요. 헤헤.”
“이 녀석은 원체 바깥에 나오는 걸 좋아하오. 그나저나 이제 넣어도 된다고 하였으니 염치불구하고 넣겠소.”
“아니에요. 자꾸 구경을 시켜달라며 조른 것은 저인걸요? 그런데 제 것이 조금 작아 보이는데 꽉 끼어서 답답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어요.”
“보기엔 이래보여도 들어가면 꽉 맞물려 한 치의 틈도 없다오. 음양의 조화가 오묘하다고 할까.”
순수한 영혼(?) 둘의 경쾌한 대화가 이어질 무렵, 비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창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채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혼례를 치른 첫날밤에도 검을 보며 품평을 늘어놓으시면 어찌합니까? 저랑 서희가 그토록 사전 교육을 철저히 시켜드렸건만...흐업!!!”
비담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둘은 더 이상 순수한 영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방에서 물건이 크네 어쩌네 했던 것은 실제로 구인철의 물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고, 분홍빛 열매는 빙루의 가슴과 유두를 말함이었던 것이었다. 비담은 그것도 모르고 예전 창고에서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라 그만 오해를 했던 것인데.
구인철은 순간 당황하여 빙루와 결합하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다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부랴부랴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담이 네 이놈!!! 거기 그대로 꼼짝 말고 있거라. 내 당장 네놈을...”
“죄송해요. 그럼 오붓하게 하시던 거 마저 하세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비담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도주를 시도했다. 서희와 선화는 영문도 모른 채 급히 비담의 뒤를 쫓았다.
“상공, 같이 가요.”
“하하하!! 당분간 천하나 주유합시다.”
“호호호, 좋아요.”
비담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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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완성을 하게 되었네요.
그동안 모자란 제 글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