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154)

153화

정도맹의 별실 안.

비담은 오욱 덕분에 정도맹의 수뇌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비담은 가지고 갔던 오정회의 치부책과 황금 십만 냥을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후 함께 할 것을 종용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정도맹의 수뇌부는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더불어 오욱을 구해준 일, 멸사대가 확보하려했던 황금 십만 냥을 돌려준 일을 통해 비담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정사대전 후, 흑천맹을 중심으로 한 사파연합과 자신들 정도맹을 중심으로 정파연합을 구성하여 무림을 양분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회의가 끝나고 비담은 서둘러 흑천맹의 본대가 있는 섬서성으로 향했다.

흑막주로부터 구인철이 위기에 몰렸다는 사실을 들었기에 비담의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도착한 섬서성.

비담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할 여가도 없이 곧바로 구인철을 만났다. 다행히 사도련과의 대규모 전투 전이었기에 무사히 재회할 수 있었다.

구인철은 자신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비담을 덥석 끌어안았다. 흑막주와 서희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듣고도 믿지 못할 정도의 기사였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만 같았다.

비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을 껴안는 구인철에게 좋으면서도 짐짓 볼멘소리를 하였다.

“켁켁, 형님 저 이러다 다시 죽어요. 숨 막힌단 말입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하하하, 서희보다 더 하십니다. 그만 풀어주세요.”

“흠흠.”

비담의 거듭된 요청에 드디어 진한 포옹을 풀어준 구인철이었다.

자리를 옮긴 둘은 그동안 못다 나눈 이야기들을 나누며 회포도 풀고, 모든 의문도 해소하였다.

“그러니까 자네 말을 요약하면 오정회와 정도맹이 사도련의 동쪽과 서쪽을 친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정확히 시간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겠으나 이미 확답을 받았으니 멀지 않아 작전은 실행될 것입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랍군.”

“놀라실 것 없어요. 정의니 무림의 미래니 하는 숭고한 뜻이 아니라 자기들 밥줄 때문에 그러는 것이니까요. 되려 정의와 무림의 미래를 짊어진 채 고군분투하는 것은 사파로 매도당한 흑천맹 아닙니까. 천상계에서도 겪었지만 세상사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고맙네. 그럼 앞으로 우린 어찌하면 좋겠나?”

“시간을 벌어야죠. 살살 약을 올리면서 유인도 하고요. 앞으로 열흘이면 이 망할 상황은 역전됩니다. 분명히.”

“저쪽의 전력이 만만치 않네. 열흘의 시간을 확보한다...정녕 그게 가능하겠는가?”

“여길 보세요.”

“이게 뭔가?”

“사도련의 무덤이 될 곳이죠. 막주님에게 구한 섬서성 화강현의 지도입니다. 이곳을 보시면 천혜의 요새인 사릉협이 있습니다. 지형이 호리병 형태로 되어 있어 입구가 매우 좁고, 주변을 깎아지른 절벽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나는 새조차 쉬었다 넘어야 할 정도로 험난한 곳입니다.”

“그럼 자네 말은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가자는 것인가? 그 안에 갇히면 피할 곳이 없어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형님과 제가 입구만 지킨다면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한 번에 열 명 이상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신 안에서 버틸 식량과 물이 필요한데 그 부분도 이미 막주님을 통해 넉넉히 조달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하고 방심하겠군. 그러다 뒤에선 황제가 압박하고 더불어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오정회와 정도맹마저 동시에 협공을 가한다. 그런데 쉽사리 해결할 것 같았던 우리 흑천맹은 안에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제거하려고 발버둥 치나 자네와 나 때문에 그것 역시 여의치 않다. 사도련주가 초조해 미쳐버리겠군.”

“아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것입니다. 저희들은 그렇게 버티다가 오정회와 정도맹의 공격에 맞춰 함께 밀고 나가면 됩니다.

황제는 무림의 세력들이 서로 상잔하기를 기다릴 것이니 우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사도련의 세를 분쇄한 연후에 함께 힘을 모아 황제에 대항하면 모든 그림은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하하하!!! 좋아. 가능성이 충분해. 그럼 사도련을 뒤에 달고 사릉협으로 가세.”

“예, 형님.”

구인철은 오랜만에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정사대전의 끝이 보였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흑천맹의 모든 세력을 이끌고 마지막 전장으로 향하였다.

이틀 뒤.

사도련주 극현도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정녕 스스로 들어갔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함정이나 매복의 가능성은?”

“주변을 꼼꼼히 살펴봤으나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렇단 말이지.”

“아마도 궁지에 몰려 불가피한 선택을 한 듯싶사옵니다.”

“배수진을 말함이더냐?”

“마지막 발악이지요. 아마도 입구가 좁다는 사실을 적극 활용할 심산인 듯하옵니다.”

“결국 이리 되었구나. 후후후, 그동안 용케 버텼으나 이제 정말 끝이로구나.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쓸어버려라.”

“복명.”

“흐흐흐, 그 안에서 버티며 원군을 기다릴 생각이겠지. 허나 너흴 구원해줄 원군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잘 가거라.”

사릉협 입구에 수북이 쌓인 시체.

비담과 구인철은 덤덤한 시선으로 그 시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오늘로 열흘째구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그나저나 이젠 괴물이 되어버렸구나.”

“하하, 정 부러우시면 형님도 저처럼 죽었다 살아나세요.”

“됐다. 그런 끔찍한 경험은 너 하나로 족해. 참, 막주님께 기별이 왔다고?”

“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하시네요.”

“휴우, 다 끝나가는 구나. 더 이상 이런 의미 없는 피는 손에 묻히지 않아도 되겠어.”

“다행이죠.”

“누군가의 그릇된 욕심으로 숱한 생명들이 사라진 것은 애석한 일이나 앞으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히 마무리를 짓는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제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마지막 전투를 위해 힘을 비축하셔야죠.”

“알았다. 그럼 부탁하마.”

구인철은 털썩 자리에 앉아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마지막 전투를 위해.

한 시진 후.

콰쾅 쾅쾅

요란한 폭음 소리가 협곡 전체를 울렸다.

“도착했네요. 우리도 시작하죠.”

“그래, 마무리 지으러 가보자.”

둘의 신형이 바람처럼 내달렸고, 그 뒤를 흑천맹의 전 무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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