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커먼 암흑천지.
스팟
눈부신 섬광과 함께 작고 하얀 구체 하나가 나타나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감질날 정도로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꾸준히 밀어내는 하얀 구체. 암흑의 공간은 불쾌한 듯 자신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 거칠게 저항하며 그것을 찍어 눌렀다. 하지만 얼마나 단단한지 구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야금야금 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렇게 꾸준히 얼마나 진행되었을까.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암흑이 요동쳤다. 하지만 이미 절반의 영역을 확보하여 그 힘이 막강해진 하얀색의 영역은 우습게 그 공격을 집어삼켰다.
그것을 기점으로 이번엔 하얀색이 무섭게 회오리치며 암흑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영역이 하얗게 물들자 구체의 틈이 벌어지며 영혼 하나가 오롯이 나타났다. 그 영혼의 정체는 바로 비담이었다.
“휴우, 드디어 본신으로 돌아왔구나. 아마도 이곳은 예전 길천 형님이 계시던 내 상단전이겠지. 그나저나 폐쇄되었던 상단전은 이리 제자리를 찾았는데...망가진 육신은 어찌한다?”
비담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폭주하는 바람에 몸과 정신 모두 피폐해질 정도로 망가진 상태. 운이 좋아 정신은 회복하였으나 몸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에 쉽사리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지. 잘 될는지 모르겠지만 깨달음을 통해 몸을 복구하는 수밖에.”
비담은 이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동안 천상계에서 만년지투를 치르며 길천을 비롯한 천마와 검제, 검후로 불렸던 초하련의 무공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무(武)에 대한 상당한 깨달음을 얻은바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비담의 정신이 오롯이 한 점에 집중되었다. 그리곤 복기하듯 천상계에서 있었던 경험과 깨달음, 나아가 의형들과 질녀에게 들었던 무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담은 그렇게 끝없이 자신의 내부로 빨려 들어가며 무아지경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더없이 슬퍼 보이는 여인의 등.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건만 여인은 그렇게 온 몸으로 울고 있었다. 그녀 앞에 놓인 한 사내의 시체 앞에서.
여인의 눈동자엔 초점이 맺혀있지 않았다. 자신 앞에 놓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너머의 어딘가를 응시하듯 여인의 눈은 허무하게 죽어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더 슬픈 눈으로 지켜보는 흑의 사내.
막내 흑천대원은 슬픔으로 가득 찬 여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려다 이내 닫고 말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자며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를 안타까운 눈으로 그저 바라보았다.
그런데 우연이었을까. 슬픔에 젖은 아가씨의 등을 피해 시선이 닿았던 시체의 몸이 돌연 움찔 떠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 여겼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틀림없이 작게나마 가슴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흑천대원은 놀라움에 그저 어! 어! 만 거듭 연발하였다.
그리곤 허망하게 앉아 있던 여인의 어깨를 거칠게 부여잡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 순간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임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희는 돌연 자신의 어깨를 세차게 부여잡는 흑천대원으로 인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귀신이라도 본 듯 크게 떠진 눈으로 입만 벙긋거리는 흑천대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아, 아가씨......저...저...저...방금...공자님의.......가슴이......”
서희는 거듭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흑천대원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그 손끝을 쫓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흑천대원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이내 깨달았다.
“상공!!!”
서희는 기쁨의 탄성을 내뱉으며 이내 비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미약하지만 또렷이 들리는 심장소리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섬을 느꼈다.
쿵쾅 쿵쾅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소리. 서희는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그가 되살아났음을 알았다. 죽은 지 하루 만에 일어난 기적 같은 일. 모든 것을 단념한 채 이제는 그를 놓아 주어야겠다 결심한 순간 찾아온 믿기 힘든 기사.
서희의 심장이 기쁨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곤 메말랐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충만 된 눈물이.
꼬박 100일.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다. 가사상태에 빠진 비담을 다시 초옥으로 옮겨 보살핀 지 오늘로 정확히 100일이 흘렀다. 하지만 점점 호전되는 비담의 몸을 보며 희망을 보았기에 서희는 그 시간이 결코 초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왠지 예감이 좋았다.
알록달록 온 산을 물들인 단풍과 아침부터 청명한 하늘. 거기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어여쁜 새가 지저귀는 울음소리까지. 서희의 기분은 날아갈듯 상쾌했다.
그런데 이런 서희의 예감이 적중한 것일까. 비담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담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사에 관한 비밀을 꿰뚫어보았고, 나아가 고금을 통틀어 독자적인 무의 영역을 개척한 거인들과 함께 하며 수많은 무리(武理)들을 얻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00일의 시간동안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죽은 듯 누워있던 비담의 몸에서 오색창연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곤 그의 몸이 이내 일곱 자(약 2m) 가까이 허공에 떴다.
투두둑 투둑 투둑.
푸스스스.
새로운 경지에 맞추어 비담의 모든 뼈들이 재구성되었고, 나아가 옷과 함께 피부 역시 여러 겹 벗겨지며 아기 피부처럼 뽀얗게 되살아났다.
환골탈태.
자연과 하나 된 무극의 경지. 비담의 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단전이 되어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모든 구속과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이었다.
서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다시 살아난 비담을 돌보며 이대로 평생 그의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는데 또 다시 찾아온 기연.
서희의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렇게 한참동안 환골탈태의 과정이 이어지고. 마침내 끝이 났는지 밝게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지고 그곳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비담이 오롯이 서 있었다.
비담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육신이 살아있음을 생생히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후아아~!!”
기쁨과 격정으로 충만 된 긴 숨을 내뱉고. 비담은 천천히 감겨져 있던 눈을 떴다.
“어?”
비담의 입에서 단말마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예상 밖의 상황에 너무 기쁘고 놀라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비담은 그대로 굳은 채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저 입만 벌린 채 커다랗게 뜬 눈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만 보았다.
서희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비담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말을 대신하였기에 그녀 역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서희는 자석이 끌리듯 천천히 비담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소중한 보물을 매만지듯 천천히 그의 머리부터 눈, 코, 입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서희의 눈이 다시 뿌옇게 흐려졌다. 서희는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비담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은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비담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서희의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이내 자신의 가슴을 축축하게 적시는 그녀의 눈물에 더 이상 북받치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서희의 얼굴을 들어 입술을 포개었다.
길고 부드러운 입맞춤.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멈췄고 오로지 둘만 존재하였다. 그렇게 길었던 입맞춤이 끝나고. 비담은 그제야 환골탈태를 겪으며 몸 이곳저곳 아직 불순물이 묻어있음을 깨달았다.
비담은 조용히 서희의 손을 끌고 초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되었음을 증명하듯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폭포를 향해 몸을 띄웠다.
천리비행술.
눈 깜짝할 사이에 폭포 앞에 당도한 비담은 서희의 옷을 하나씩 차례차례 벗겼다. 자연스럽게 서희 역시 나체가 되었고, 비담은 그런 서희를 향해 밝게 웃은 뒤 그녀와 함께 폭포에 의해 만들어진 커다란 용소 안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비담이 한발자국씩 발을 디딜 때마다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비담의 발을 중심으로 아침 안개가 퍼져나가듯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비담은 서희가 혹 추울까 염려되어 자연의 기운을 살짝 변형시켜 흐르는 폭포 전체를 거대한 온천으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누군가 이 장면을 직접 보았다 하더라도 믿기 힘들 정도로 불가사의한 일을 비담은 별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펼쳐보였다.
비담은 머리까지 푹 담가 자신의 몸에 남아있던 불순물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곤 서희를 끌어당겨 정성껏 그녀의 전신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서로를 확인하고 싶은 열망.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갈망.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둘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 맞물렸다.
그렇게 물의 온도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고, 주변의 그림 같은 풍광 전체가 둘을 감싸주었다.